사랑하는 삶으로 이해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by 노승수2020-07-13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 고백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삼위일체는 고백일 뿐 삶의 구조나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현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은 자유주의가 일어나면서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와 세상에 자기 계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 경륜 안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뭔가 조심스럽고 이해를 잘못하면 이단이 될 것 같거나 혹은 아예 삼위일체에 대해서 무관심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본다면 삼위일체를 뵙는다.”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진술은 삼위일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성부를 사랑하는 분, 성자를 사랑받는 분, 성령을 사랑 그 자체라고 비유하며 이런 비유는 인간에게로 확대해서 인간의 영혼이 마음, 지식, 사랑 셋이면서도 한 영혼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인간의 영혼에 대한 이해와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비유로 놓으면 양태론에 빠질 위험이 존재하며 현대 신학자들은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관계로 이해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은 ‘관계’ 개념 없이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없게 만들었다. 관계란 사랑의 관계를 맺는 인격 간의 관계를 의미하며, 이 인격의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 간의 사랑의 관계를 우리 삶에 실천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 인격이 지닌 두 가지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삼위일체적인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삼위일체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페리코레시스며 둘째는 신성과 인성 간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사용한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둘레를 의미하는 페리(περι)와 주위를 맴돌며 춤을 춘다는 뜻을 지닌 코레시스(χώρησις)의 합성어로 상호 공재, 혹은 상호 침투로 번역된다. 직역을 하자면 “상호 간의 원형의 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우주와 인간의 원형을 원구의 형태로 이해했다. 특히 티마이오스(Τίμαιος)에서 별들의 운행을 춤(choreia)으로 이해했고 완전한 세계에 대한 철학적 함축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를 완전하며 불변하는 구체로 이해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차용했을 이 인격의 상호 침투 개념은 인간의 인격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무서운 꿈을 꾸고 엄마 품으로 올 때, 아이는 자기 내면의 무서움을 엄마에게 담아둔다. 엄마는 아이의 무서움을 담아주며 엄마와 아이의 인격은 서로를 모사하며 자기 동질성을 확보한다. 잠언에도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고 말한다. 인격은 서로에게 비치는 거울 같으며 상대의 감정의 일부를 담아주기도 하며 건네기도 한다. 죄인인 인간 세계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주로 미움과 분노를 건네지만 원래 인격은 사랑을 건네며 받아두는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는 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이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입으시므로 참 사람이 되시는 교리를 일컫는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입으신 동안에도 여전히 그의 신성과 분리되지 않으신 채로 인성을 입으신다. 그래서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으로는 피곤하셔서 뱃고물을 베고 주무셔야 했지만 동시에 신성으로는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창조주의 권능을 보이신다. 이 둘이 모두 성자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나며 인격은 이처럼 인간과 하나님의 본성이 밖으로 드러나는 통로이자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주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론은 물론 기독론에서도 인격은 통로의 개념을 지니고 있으며 그 통로는 우리 안의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통로이기도 하며 우리 밖의 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하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할 때, 이는 성령께서 우리 몸에 거하신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우리 몸과 영혼의 본성이 밖으로 주체적으로 드러나는 인격과의 동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사랑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관계여야 한다. 삼위께서 동등하시며 남녀가 동등하고 부부가 동등하며 고용주와 고용인이 동등하다. 그러나 동등한 관계에도 질서가 존재한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께 순종하신다.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나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한다. 고용주와 고용인이 동등하나 고용주는 인간적으로 사람답게 대우해야 하며 고용인은 고용 계약서의 법적 요구들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돕는 자로서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된다. 인격은 본성으로부터 나오지만, 대상이 되는 인격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어린 아이를 부모의 인격적 반응을 통해 양육하지 않고 비디오나 TV에만 장기간 노출시키는 행위는 유사 자폐를 부른다는 연구도 있다.


단테는 신곡에서 천국과 지옥을 이렇게 비유했다. 각자의 숟가락이 있는데, 그 길이가 자기 입에 넣기는 불가하고 남에게 먹여줄 수만 있어서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곳은 천국이요 자기 필요를 채우는 곳은 지옥이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이란 서로의 짐을 담아내기도 하며 때로 내 어려움을 상대에게 담아주기를 요청하기도 하는 관계적 삶이다. 이것은 요청과 자발성에 의해서 이뤄져야 한다. 동등한 관계란 상대를 임의로 재단하지 않고 내 필요에 대해서 요청하고 상대의 필요에 대해서 물어보고 확인하며 요청이나 질문을 받았을 때, 자발성에 의해서 반응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고 서로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자발적으로 사랑하며, 인격을 통해서 상대의 일부를 내 존재 안의 일부분으로 담아두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공동체로서 우리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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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승수

노승수 목사는 경상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석사학위(MDiv),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핵심감정 시리즈(탐구, 치유, 성화, 공동체)’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