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 통신 5: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주권
by 김은득2020-07-06

한국교회 성도 여러분, 미국 뉴욕의 5번가에 가 본 적이 있나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5번가의 티파니 매장을 선망의 대상으로 봤던 것처럼, 여러분 역시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바로 그 화려한 명품가를 활보하며 쇼핑하는 자신을 꿈꿔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5번가에 위치한 모건 스탠리 건물이나 록펠러 센터가 보여주듯이 이 5번가는 역사적으로 도금 시대(Gilded Age, 대략1870-1900)에 어마어마한 부를 획득한 재벌들(밴더빌트, 록펠러, 카네기, 모건 등)의 거리로 출발했습니다. 5번가에 자신의 호텔을 소유한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대선 슬로건을 제시했을 때, 아마도 그런 5번가의 찬란한 역사를 의식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갑작스레 웬 미국 뉴욕 5번가 타령인가 싶으신가요? 사실 제가 1898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스톤 강연에 초대를 받고,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해 처음 숙소를 잡은 곳이 바로 메디슨 스퀘어에 위치한 5번가 호텔(the Fifth Avenue Hotel)이었습니다. 구 유럽 대륙에서 온 한 여행자로서 그 호텔에서 바라본 뉴욕, 아니 신대륙 미국에 대한 첫 인상을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미국 땅에 심으신 놀라운 잠재력이 드디어 휘황찬란하게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해서 경이로울 정도의 강대국으로 발전할 것(Lectures on Calvinism, 9)”이라는 기대감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그 호텔에 숙박하면서 당시 뉴욕 주지사 선거를 근접해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공화당 후보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와 민주당 후보 어거스터스 밴 위크(Augustus Van Wijk) 모두 화란계 미국인이라는 점이 더욱 제 흥미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여러분의 관심은 화란 출신 주지사 후보들이 아니라 바로 제 정치적 성향, 즉 제가 그 두 후보 중에 누구를 선호했는지, 어느 정당을 지지했는지에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제가 미국에 방문했을 때, 수많은 기자들이 제게 가장 궁금해 했던 질문들 중 하나였습니다. 심지어 한 지역 언론은 저의 기독민주당(Christian Democrat)성향 때문에, 제 허락없이 저를 민주당원으로 보도해서 그 기사를 내려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으니까요. 만일 미국 양당 정치, 더 나아가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에 관해 제 정치적 입장이 어디에 속하는지 물으신다면, 제가 숙박했던 5번가 호텔에 위치한다고 대답하고자 합니다. 제가 묵은 5번가 호텔, 바로 그곳에서 공화당 루스벨트는 자신의 주지사 캠페인을 이끌었고, 그 호텔 바로 근처에 미국 민주당의 본부가 위치했다고 말입니다.


한편 제 정치적 성향을 보수적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당시 민주당의 본부가 5번가 호텔 근처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면서, 저와 공화당 루스벨트의 공통점에 집중할 것입니다. 제가 당시 신생 정당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 아브라함 링컨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미국을 방문했던 바로 그해 11월 30일, 공화당 출신의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를 만났고, 그를 “기도의 사람”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맥킨리가 암살된 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뉴암스테르담을 개척하러 온 전형적 화란 칼빈주의자들의 후예인데요. 그는 나중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저와 동일한 스톤 강연을 한 제 후배 신학자인 바빙크와 백악관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저를 보수주의자라고 성급하게 지칭해도 될 것 같지만, 링컨의 공화당이 지금 트럼프의 공화당, 아니 적어도 레이건의 공화당과 동일한 보수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아까 언급한 5번가의 재벌들이 링컨의 상공업 우대 정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미국 연방과 분리되어 자기들만의 독자적 연합을 구성한 남부에 대항해 벌어진 남북 전쟁의 폐허에서 새롭게 미국을 일으키는 과정은 무엇보다 미국 국민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정치 사회적 비전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링컨은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지정하면서 미국의 역사는 정치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한 청교도에 기원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플리머스 개척을 이끈 목회자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의 분실된 일기를 영국으로부터 다시 돌려받는 것에 미국이 그렇게 목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혼의 하나됨을 위해 미국에게 청교도 정신이 필요했다면, 미국을 한 몸이 되게 하기 위해 링컨은 재임시 미국 전역을 철도로 다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의 부작용으로 철도(밴더빌트), 은행(모건), 석유(록펠러), 철강(카네기)등의 독점이 가능했고, 바로 5번가의 재벌들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링컨의 공화당이 현재 공화당의 선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조지 밴크로프트(George Bancroft)와 같은 동시대 역사가들처럼, 저도 미국이 칼빈주의의 영향 아래 뉴욕 5번가로 상징되는 정치 경제적 번영을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가 미국 공화당 지지자라고 주장한다면, 일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유 방임형(lasses faire)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로서 노동자들이 재벌들의 독점적 지위에 대항하도록 기독교인 노동 조합을 구성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의 공화당이 지금 공화당과 같은 보수주의라고 말하기엔 상당히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바로 노예 해방 정책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링컨의 공화당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의 공화당이 백인 중심주의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공화당의 진보적 성향 때문에 제가 매킨리 대통령을 만났을 때 건의했던 것은 남아공 보어인(Boer)을 위협하는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세계 평화에 큰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때 매킨리의 정신적 상태가 불안해 보여서 그와의 만남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제가 언급했던 것처럼, 이후에 매킨리 대통령은 신경질적 정신분열증세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집니다. 루스벨트에 이르러 공화당의 진보적 성향은 더욱 강화됩니다. 심지어 루스벨트가 공화당에서 분리돼,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불무스당(Bull Moose Party)이라는 급진 정당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때 공화당 내에서 진보적 색채를 띄는 당원과 유권자들이 루스벨트의 정당으로 이동하였고, 1960년대 시민 운동 이후, 공화당의 핵심 지역 기반을 남부 지역으로 바꾸면서 지금의 보수적 공화당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 정치적 성향을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제가 묵었던 5번가 호텔과 민주당 본부 당사의 근접한 거리에 주목하면서, 저와 동일한 호텔에서 유세를 시작하고 끝맺은 루스벨트에 눈을 감습니다. 먼저 제가 기독교 사회(Christian Society)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을 마치 전근대적 기독교 국가(Christian State) 개념을 옹호한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크리스텐덤의 시대를 살았던 장 칼뱅이나 청교도들이 기꺼이 국가가 참된 종교와 예배를 장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와 바빙크는 프랑스 혁명에 영향 받은 세속 국가가 종교적 이슈를 판단할 만한 능력, 즉 어떤 종교가 참된지 아닌지를 결정할 만한 분별력이 없다고 보았고, 오히려 국가 권력이 이런 영적 문제에 간섭하면 할수록 더 많은 부작용이 발생함을 역사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프랑스 혁명이 강조한 정교분리의 세속화(Secularization as Social Differentiation)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는 세속주의(Secularization as Secularism)에 반발합니다. 이런 식으로 공적 영역에서 아예 개인적 신앙을 배제하면서 누군가의 양심, 특히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짓밟는 것이 정녕 프랑스 혁명이 약속한 자유와 평등인지 묻고 싶습니다. 아니 기독교인들, 적어도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고 믿습니다. 기꺼이 기독교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성도들은 다양한 공적 영역들, 즉 정치, 경제, 사회, 학문, 예술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하고 또한 참여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 단체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의 개인적 자유주의나 공산주의 혁명의 사회적 국가주의를 보완하는 제 3의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가 바로 이런 기독교적 제 3의 길이라면서 예찬했습니다. 특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며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의 종교적 자유 개념과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 저와 거의 흡사한데, 바로 매디슨의 정당이 민주당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매디슨처럼 저도 작은 정부를 지지하고, 시민 단체들의 자유를 극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정부 예찬론자이며 주정부 독립을 강조하는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에 대한 제 개인적 오해가 너무 커서, 저는 민주당의 제퍼슨보다 연방론자(the federalist)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제 입장과 더 유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상당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즉 당시 제가 진보적 의제를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수주의자로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 지역의 변천으로 인해서 지금의 민주당은 큰 정부를 선호하고, 공화당은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역사적 아이러니 때문에, 저를 오늘날의 공화당과 동일한 보수주의로 여기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이런 미국의 일례만 살펴봐도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만큼 유동적이며 상대적인 개념도 없을 것입니다. 예전의 진보가 지금의 보수가 되며, 예전의 보수가 지금의 진보가 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스스로를 진보로 또는 보수로 지칭하는 분들조차도 그 정도의 차이가 상당합니다. 누구나 자신을 중도라고 지칭하지만, 비교 대상에 따라서 언제라도 극좌와 극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진보냐 보수냐 판단의 대상이 되는 제 자신이 그런 판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칼빈주의 정치인으로 제 자신을 규정했고, 또 그렇게 기억되길 바랄 뿐입니다. 한국 교회가 카이퍼라는 제 이름을 좌로나 우로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의 주권을 모든 삶의 영역에 나타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ro R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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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은득

김은득 목사(PhD., Calvin Theological Seminary)는 신칼빈주의,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공공신학을 한국적 문맥에 맞게 상황화하길 원하는 신학자로서 현재 미국 애리조나 투산에서 드림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