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가 묘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by 김상일2020-07-04

“안 돼. 네가 ‘내’ 주위로 돌아야 해!” 모두가 그렇게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섯 혹은 열 혹은 백 사람이 무대에 올랐는데 다들 중심에 서려고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는 춤이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무대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 삼위일체의 어떤 위격도 상대에게 자신의 주위를 돌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주위를 돌려고 애쓸 뿐이다. (팀 켈러 ‘왕의 십자가’ 37쪽)


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 신학하기’를 펼쳐 나가는 뼈대 세우기의 일환으로, 필자는 지난 시간에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아닌,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다. 이번 시간에는 팀 켈러가  삶을 풀어내는 교리 특히 그 가운데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겠다. 


현대 문화 안에는 기독교 교리가 추상적인 것, 일상의 삶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 지루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또한 이런 고정 관념을 거의 그대로 공유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팀 켈러는 교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켈러에게 있어서 교리란,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하심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중요한 주제별로 나누어서 (삼위일체론, 구원론, 종말론, 죄론 등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 것이며, 따라서 켈러에게 교리는 성경과 분리된 채로 존재할 수 없다.


당신의 춤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삼위 하나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다룰 때에도 그렇다. 켈러는 자신의 마가복음 강해서인 '왕의 십자가'(King’s Cross)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 등장하는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성부), 비둘기 같은 성령,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성자) 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살핀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9-11)


켈러는 실제 유대교의 경전을 살펴보면서 왜 마가가 ‘비둘기’라는 비유를 통해서 성령을 묘사했는지, 거기에 숨겨진 더 큰 의미는 무엇인지까지 파고 들어간다.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표현이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마가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교의 경전 중에서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경전은 마가 시대 유대인들이 읽던 아람어 구약 성경인 탈굼(Targums) 밖에 없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로 운행하셨다. 여기서 운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훨훨 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령이 수면 위를 훨훨 날아다니셨다. 탈굼을 쓴 랍비들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처럼 수면 위로 훨훨 날아다니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세상의 창조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세 주체가 참여했다. 이 세 주체는 예수님의 세례식에도 참여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아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은 비둘기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여기서 마가는 의도적으로 태초의 창조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가는 처음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였던 것처럼, 진정한 왕의 오심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왕의 십자가’ 33쪽).


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비로운 것이며 인지적으로 도전이 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 신이 조화롭게 일한다고 생각하는 삼신론이 아니다. 또한 한 분의 하나님이 때에 따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일위론도 아니다. 삼위일체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는 삼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셋이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면서 셋이시다(‘왕의 십자가’ 34쪽).


삼위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워낙 인지적으로 이해하기에 어려운 교리이기에, 또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개념적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켈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대한 개념 정리를 우선 명확하게 한다.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며, 그렇다고 한 분도 아니다.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셋이다. 만약 켈러가 여기서 멈췄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어렵다, 아니 교리는 다 어렵다’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만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켈러는 곧바로 마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서, 과연 삼위 하나님이 서로 맺고 계신 관계란 어떤 것인지를 더 깊이 읽어내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물에서 나오시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의 말씀으로 입혀 주시고 덮어 주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와 동시에 성령은 그를 능력으로 덮어 주신다.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영원 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과정이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을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왕의 십자가’ 34쪽)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게 어떻게 우리의 삶을 풀어내는 지혜가 되는 걸까? 그에 대한 실마리는 하나님께서 서로 맺고 계신 그런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불러들이시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켈러는 자신이 깊은 영향을 받은 C. S. 루이스의 삼위일체에 관한 묵상, 특히 루이스가 사용하는 삼위일체가 함께 누리는 “춤”이라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런 지혜를 더욱 풍성하게 드러낸다. 켈러의 말을 들어보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상대방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상대방을 찬양하고 높인다. 그렇게 서로에게 찬양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극히 행복하시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너무도 존경해서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대상이 당신에게도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기쁘기 한량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바로 이런 기쁨을 누려오셨다 …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중요한가? 이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세 위격의 춤, 드라마, 삶의 패턴이 우리 각자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야 한다 … (기쁨과 능력, 평안, 영생은) 실재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의 거대한 샘이다.” 왜 루이스는 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자기중심적인 삶은 정적인 삶이다. 전혀 역동적이지 않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되고 만물이 자신의 주위를 돌기 원한다. 그가 남을 돕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이나 돈이나 여유가 있을 때만 베풀고, 베푸는 목적도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뿌듯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 (‘왕의 십자가’ 35-36쪽).


삼위일체는 어떠한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 일단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왕의 십자가’ 37쪽)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이 돈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산다. 우리의 하나님이 권력의 모습을 가졌다면, 우리는 권력을 쟁취하는데 모든 것을 건다. 우리의 하나님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그 만큼, 우리의 삶 또한 하나님을 닮아가는데서 벗어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다고 창세기는 말한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그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닮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항상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그 하나님이 어떤 모습인지 상관없이) 닮아가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면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루이스의 표현을 빌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추시는 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관계를 그려내시는지를 삶의 지혜로 깨달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춤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나를 찬양해라.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라. 나의 아름다움을 깨달아라. 그러면 춤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너는 춤을 위해 창조된 존재니라. 나를 믿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가끔 기도하면서 종교인의 외양만 갖추어서는 부족하다. 힘들 때 내 말에서 약간의 힘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너는 나를 중심으로 살도록 창조된 존재다. 매사에 나를 생각해야 한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섬겨야 한다. 거기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춤의 의미다.”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막연히 믿기만 하는가?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주위를 돌아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왕의 십자가’ 38-39쪽).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그 분과 함께 춤을 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켈러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중심성을 버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만큼이나 우리의 이웃 또한 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분과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 맺음에서 크나큰 시사점을 가진다. 이것은 교회 내 사역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가지는 시사점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되어 있다. 사역이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을 통한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이기에 그렇다.


삼위 하나님과 함께 춤추며 배우는 관계적 진실성


켈러는 자신의 책 '센터 처치'(Center Church)에서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역동성에 가장 필수적인 것 중 하나를 ‘관계적 진실성’이라고 규정한다. 그가 말하는 ‘관계적 진실성,’ 특히 신앙이 없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관계적 진실성이란, 1) 그리스도인이 이웃과 같은 점이 있음을 알게 해주고(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고 그들이 입는 것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의 언어와 휴식과 문화생활과 공공 활동에 있어서 이웃과 같아야 한다, 588쪽), 2) 이웃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해주며(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관대함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 …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생활수준보다 낮게 살아가는 법도 고려해야 한다, 589쪽), 3) 그 두 가지를 바탕으로 이웃과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솔직하게 이웃에게 드러내면서 그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관계적 진실성을 갖고 이웃에게, 특히 신앙이 없는 이웃에게 다가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켈러는 특히 관계적 진실성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두 가지 경우에서 찾는다. 하나는 그가 조화 접근법(the blend-in approach)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거품 접근법(the Christian bubble approach)이다. 조화 접근법이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의향을 숨긴 채 관계적으로만 가까워지려는 것”(‘센터 처치’ 592쪽)을 가리키며, 기독교 거품 접근법이란, “비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유지하는 것”(‘592쪽)을 가리킨다. 왜 그리스도인임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않으면서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가? 진실한 자신을 드러내면 믿지 않는 친구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왜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유지하는가? 관계를 깊이 맺게 될 때 따라오게 될 희생을 감당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켈러는 조화 접근법과 기독교 거품 접근법 양쪽 모두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신자들 사이에 왜 관계적 진실성이 그렇게도 적은가? 그 답은 주로—전부는 아니지만—동기에 있다. 조화 모드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용기가 부족하다. 그들은 영향력을 잃는 것, 무대 뒤에서 고초를 겪거나, 또는 직업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을 걱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거품 모드에 있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에게 감정적, 사회적, 재정적, 신체적 헌신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센터 처치’ 595쪽).


조화 접근법과 기독교 거품 접근법은 모두 자기중심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들이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을 때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춤추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맺어주신 관계의 방식을 따라서 그 관계 안에 충분히 침잠되어 살아가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웃들과 맺어가는 관계 또한 자기중심적인 동기가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동기를 통해서 가꿔간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이렇게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을 돌아보게 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 우리가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갈수록, 그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될수록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갖고 사람들과 관계 맺어왔던 이전의 방식을 포기하게 된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 맺으시듯이, 그렇게 사람들과 관계 맺기 시작할 때 그 중심 동기는 단지 도덕적으로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중심 동기에는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찬양한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보면 넋을 잃고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내게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그렇다. 대학에서는 A학점을 받으려고 열심히 모차르트 음악을 들었다. 취직이 잘되려면 학점이 높아야 됐다. 다시 말해,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모차르트 음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돈을 주고서라도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다. 모차르트 음악이 내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듣는다. 내게 모차르트 음악은 더 이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아무 조건 없이 섬기고 싶어진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섬기겠다”고 말한다면, 사람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왕의 십자가’ 34-37쪽).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와 맺어주시는 관계를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바탕에 둔다면, 우리의 사역 프로그램과 목회 방법론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지나치게 열심을 쏟지 않게 될 것이다. 대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성경 해석에서 시작된 교리와 전통 읽기는 이렇게 삶으로 풀리며, 사역의 기술과 목회 방법론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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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상일

김상일 작가는 UC 버클리(B.A.), 고든콘웰 신학교(M.Div) 졸업 후, 현재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육과 실천 신학으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현재 서평 쓰는 남자 블로그(www.likeellul.com)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으며, 팀 켈러에 관해서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 "좋은 나무" 웹진과 시니어 매일 성경에 글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