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신성을 믿습니까?
by 이승구2020-06-25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따라서 성령님도 믿게 된다.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서도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성령님에 대해서는 “온전히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생각하지 않는 일이 많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고대의 성령훼손당과 몬타누스주의 등의 이단들을 생각해 보라.) 유난히 성령님에 대해서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성향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내어서 과연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 주시는지를 살피고, 우리들의 생각 속에 성령님에 대한 생각이 과연 성경이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보고, 가장 중요한 일로 “그 성경적 성령님과 바르게 관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논의를 해보도록 하겠다.


질문 1: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십니까?”


성경대로 믿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 같은 타종교인들이나 여호와의증인이나 미국의 ‘크리스천사이언스’(Chrisian Science)라는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크리스천사이언스’라는 이단에서 유행시킨 것 같이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바른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크리스천사이언스는 그 이름과 달리 기독교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다. 1894년 미국 보스턴에서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의 가르침으로  첫 교회가 시작되었고, 1936년경에는 27만 명까지 성장했으나 그 후에는 교세가 약화되어 2009년에는 5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성령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실질상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성령님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성령님께 명령을 한다든지, 자신이 성령님의 사역을 주관하고 통제할 수 있는 듯 하는 것은 결국 성령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의도는 없다고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과연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으로 대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참으로 신실한 사역자들이 늘 그리했듯이 용어도 “성령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 물론 심령에서 그렇게 성령님을 온전한 하나님으로 의식하면서 이 용어를 써야 한다. 그저 용어만 성령님이라고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 중에서 표현하듯이 “하나 안에서 삼위가, 또 삼위 안에서 한 하나님이 경배 받으셔야”하기 때문이다(이남규, ‘신조학’ 합신대학원출판부). 성령님을 참으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아뢰고, 경배해야 한다.


질문 2: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존숭하는 것 같이 성령님을 존숭하십니까?”


마음 깊이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만큼 존숭(尊崇)하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한다.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영향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명백하게 이교적이거나 이단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성령님이 성부(聖父) 하나님이나 성자(聖子) 하나님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가 자신의 심중에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상 성자께서 성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해도 그것이 성자께서 성부보다 낮은 위격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듯이, 성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것을 예언하시고(요 15:26) 그 말씀대로 성령님께서 오셨다고 해서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보다 무엇이 부족하거나 낮은 위격이 아니다. 위격상의 동등과 경륜상의 복종을 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순종의 형태가 보이지만 그 위격에 있어서 삼위는 동등하시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고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라고 선언한 베드로의 말을 우리들은 잘 들어야 한다. 오순절에 교회 공동체에 임하여 오신 성령님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기때문에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고(행 5:9) 하는 것이다. 이 사건 속에서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심이 확연히 드러났고, 그리하여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행 5:11)했다(이승구, ‘성령의 위로와 교회’ 이레서원).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고전 3:16; 고전 12:13; 엡 2:22)은 하나님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과 같은 정도로 존숭해야 한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위격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적 이해를 반영하면서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는 “이 삼위 안에서 아무도 더 먼저 있거나 더 나중 되지 않으며, 아무도 더 크거나 작지 않다. 다만 세 위격 모두가 서로 동일하게 영원하시며 동등하시다”라고 고백했다. 


질문 3: “성령님께 순종하십니까?”

이 세 번째 질문이 가장 핵심적 질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과연 성령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일까? 


첫째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님을 이해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여기서 다른 것, 특히 자신의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성령님을 이해하고 성령님과 관계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성령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됨을 생각해야 한다. 성령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에 대해서 성경에 가르친 것을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해야지, 여기에 다른 것을 더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하시고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4-15)고 하신 뜻이 여기에 있다.


일차적으로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하신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보존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요 14:26) 방식이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려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요 15:26; 요 16:13-14).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님과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알아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친다고 했다(고전 2:13).


둘째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과 성령님을 따르는 것을 동의어로 놓고 논의해 간다(롬 8:4-14).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했으니,  중생하여 하나님을 참된 의미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 안에 성령님이 계셔서(롬 8:15),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것이다(롬 8:16). 이것은 그저 말로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중생하여 영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부르짖음의 성격을 그렇게 규정하신 것이며, 그렇게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날마다 성령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나아갈 때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질문 4: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십니까?”


우리가 과연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배우고 그 배운 것을 표현하는지 아닌지 다음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다. 우선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씀을 읽어보자.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로서는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우선 성자께서 아버지, 즉 성부로부터 성령님을 보내신다고 했다. 요한복음 14-16장은 성령님이 오실 것을 여러 번 언급하는데 특히 성부로부터 성령님이 보내진다는 새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더 나아가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성령님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proceed)는 말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는 우리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놀라운 말을 하게 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말의 “나오신다”(proceed), “나오심”(procession)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발출(發出) 등으로 쓰면 안 된다. 특히 고대적 상황에서는 그렇게 쓰면 고대 교회의 대표적 이단인 영지주의(Gnosticism)의 발출설과 혼동되기 때문에 그런 용어를 쓰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현세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님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는 아주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이다. 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서는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씀을 따라서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 의도는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성을 분명히 하면서 성부님과 성령님의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쓰다 보니 과거 동방 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이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하시다는 종속설, 즉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하신다는 견해, 즉 성부가 좀더 높으시다는 견해를 자꾸 생각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종속설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톨레도(Toledo)에서 모인 ‘톨레도 제3공의회’(589)에서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고 표현하여 “성자로부터도”라는 어귀를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더 넣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성자가 더 못한 분이라는 종속성을 막고, 성경을 따라 성령님이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표현하는 본래의 의도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다. 이것을 흔히 서방 교회의 전통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 이해를 반영하면서 ‘벨직 신앙고백서’ 제12항에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다음 같이 고백하고 있다.


“우리들은 또한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성령님은) 만들어지신 것도 아니고, 피조된 것도 아니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입니다.

질서에 있어서는 성령님이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시지만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며,
권위와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성령님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대로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도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과연 성경이 가르친 대로 여러 면에서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하는지를 묻고, 더 나아가서 그 성령님께 과연 순종하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는 결국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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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승구

이승구 교수는 기독교교의학(CHRISTIAN DOGMATICS)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로서, 총신대 기독교교육과 졸업, 합동신학대학(MDiv)과 영국 The University of St. Andrews(PhD)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