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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구원의 복음을 위한 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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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김선일 /  작성일 202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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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nti-Slavery Society Convention, 1840, by Benjamin Robert Haydon

내가 즐겨 찾는 저자이자 신약학자인 스콧 맥나이트(Scott McKnight)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복음이라는 단어가 ‘개인 구원’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의해서 납치되었다고 본다. 복음 그 자체는 ‘결정’을 용이하게 내리기 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The King Jesus Gospel, 26 - ‘예수 왕의 복음’) 나는 맥나이트의 진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한다. 그 책의 전반에서 전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성경의 복음이 우리 구원의 기초라는 논지에도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개인 구원이라는 복음의 핵심 요소가 하나님 나라라는 어젠다의 유행에 의해 가려지는 역설적인 현상을 근래에 종종 보고 있다. 교회에서 그동안 개인 구원과 죄 용서의 복음을 편향적으로 강조하다 보니, 복음이 너무 개인주의적이 되어 신약성경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약화되었다는 주장이 점점 더 득세하고 있는 듯하다. 이 주장에 의하면 오늘날 기독교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 함몰됐으며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칫 개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복음의 엄청난 잠재력을 간과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개인 구원, 이신칭의, 죄 관리의 복음이 진정 문제인가?


개인 구원과 더불어 최근에 문제 제기의 대상이 된 교리 중에는 이신칭의도 있다. 물론 이신칭의가 종교개혁 교리의 핵심임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기독교 복음을 지나치게 대표하지 않느냐는 의문으로 보인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이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믿음에 합당한 삶의 변화 없이도 자동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확보한다는 천박한 풍조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은 늘 제기되어왔다. 또는 기독교 복음이 죄 관리의 복음으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있다(달라스 윌라드). 예수를 믿음으로 자기 죄를 용서받아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때로 자기 위안적인 메시지로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어린 아이를 유괴 살인한 자가 자신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 받았다고 뻔뻔하게 진술하는 것이 아마 이러한 죄 관리 복음의 가장 큰 폐해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 교리들에서 파생되는 부작용은 개인의 욕망과 문화적 편견으로 인해 뒤틀리고 왜곡된 것이다. 만약 복음의 개인화(privatization)가 문제가 되어 그런 문제점들이 발생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복음의 공공화(publicization)도 복음을 왜곡하거나 축소할 위험을 내포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이와 같은 위험성은 어떤 경우에나 존재한다. 기우일 수 있으나, 공공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자칫 이 세상의 구조를 개선하는 것을 더욱 높은 가치로 삼을 수 있다. 그러면 기독교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무관한 엘리트주의나 심지어 인간의 공적주의로 흐를 위험이 도사린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개인 구원이 유보되거나 극복되어야할 구습으로 간주되는 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참여할 근본적 잠재력을 앗아갈 수 있다.


충분하지 않았던 개인 구원의 복음


평생을 산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구조해 온 한 전문 산악인은 사람들이 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사람들이 산길이 낯설거나 지도나 나침반을 볼 줄 몰라서가 아니라고 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산에서 길을 잃는 가장 큰 이유는 충분히 올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제가 알려주는 대로 충분히 가지 않고 중간에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개인 구원으로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구원, 즉 사회 구원으로 이동해야 하는 게 아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덧입혀져야 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개인 구원의 복음, 이신칭의의 복음, 죄 용서의 복음,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더 깊이 충분히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성경적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의 내러티브라는 문맥 속에서 제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새창조의 비전과 사명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한국 교회가 시급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죄 용서의 복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근본적 죄성이라는 고질적 문제를 더욱 처절하게 직시하지 않았기에 문제가 된다. 인간은 모두 죄악 중에 출생하여, 죄로 오염된 성정과 욕망으로 죄악된 구조를 양산한다. 공적으로는 정의와 덕을 부르짖어도, 사적으로는 이기심과 인정 욕구가 자신의 동기를 지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의 구속적 사역은 지금도 존속하는 인격적 영향력으로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고 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고, 그와 연합을 이루는 삶이 아니고서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이 하나가 되는 우주적이고, 공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들어설 수 없다. 


개인 구원의 더 깊은 발견


진보적 신학자인 강남순은 기독교 신앙의 지구적 연대성을 강조하면서도 개별 존재의 중요성을 멋진 말로 표현한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거창한 집으로부터가 아니라, 아주 작은 귀퉁이에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얼굴을 지닌 개별적 인간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개별적 인간 한 사람의 존엄성을 어디로부터 찾아야 할 것인가? 나는 성경에서 개인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인지를 발견한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신적 존재인 군주의 소유물이거나 노예로 취급받던 고대 근동사회에서 구약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선언하며 다양한 약자보호법을 선호했다. 황제를 신격화했던 로마의 전제군주 시대에 신약성경은 공적 권력의 근처에도 갈 수 없던 노예와 여성 등의 평범한 개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왕같은 족속이자 제사장이라 불렀다(벧전21:9). 복음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무리에게 천국복음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관심은 종종 지나치기 쉬운 한 개별 존재에게 집중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군중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혈루증 앓던 여인, 딸을 위해 극한의 낮아짐을 개의치 않았던 수로보니게 여인, 이방인에게 부역하며 유대인과 어울릴 수 없었던 세리 삭개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기독교는 단지 이처럼 소외된 개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애적 모본을 따르라는 규범을 제시하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를 본받기에 앞서 예수를 전적으로 믿고 그 안에 거하며 그와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자존감의 근거를 찾는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때문이다(갈2:20). 하나님 나라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일을 감당하기엔 자격도, 능력도 없으며, 항상 죄악된 본성과 유혹에 시달리며 넘어지고 좌절하는 나로 하여금 그 나라의 소망에 동참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때문이다. 더 이상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얻고자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연연하지 않아도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자존감과 정체성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깊은 구원의 메시지가 되고 있는가!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는 자야 말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사랑,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품어주는 그  큰 사랑, 나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는 대영제국에서 최초로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하나님의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귀감을 자주 이야기한다. 그 윌버포스의 은사였던 존 뉴튼은 한때 노예선 선장이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회개하고 돌아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작사한 장본인이었고, 이 찬양을 가장 아름답고 은혜롭게 불렀던 윌버포스는 평생에 걸쳐 근대에 가장 숭고한 인권의 위업을 이룩했다. 뉴튼이 임종을 앞두고 전한 “비록 내 기억이 희미해지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지독한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위대한 구세주라는 사실”이라고 했던 고백은 세상을 위한 모든 헌신과 사역에서 날마다 상기되어야 할 교훈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정의와 긍휼, 희생과 봉사의 삶은 더욱 필요하다. 대 사회적 이미지도 중요하고, 공공적 책임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출발점은 한 개인의 삶을 근본으로부터 변혁시키는 강력한 은혜의 대속적 복음이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한 준거점도 대속적 복음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사 그의 왕국에 동참하도록 강권하시는 방식이다.  

작가 김선일

김선일 교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거쳐 풀러신학대학원(MDiv, PhD)에서 수학하고 2008년 9월부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풀러신학대학원 재학 중에는 한인 최초의 캠퍼스 교목으로 일했으며, 한국교회의 청년 선교와 교회 성장을 위해 섬겨왔다. 저서로는 ‘전도의 유산: 오래된 복음의 미래’, ‘교회를 위한 전도가이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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