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리 시대, 어떻게 설득할까?
by Brett McCracken2020-07-01

현재 목격하고 있는 인식론적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진리가 이성의 문제에서 감정의 문제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다수가 참여하는 커뮤니티 차원의 논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대신 개인적 차원에서 느낌으로 발견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가 내게 진리로 느껴지는가의 여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의 진리”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한,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진리”로 나의 진리를 위협하지 않는 한, 나의 진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진리에 관한 다른 사람의 이해가 내 생각과 충돌하는 경우, 과거에는 서로의 다른 생각을 존중하며  토론을 나눴다. 그러다보면 다른 생각이 내 생각에 도전을 주고 또 내 사고를 전환시키기도 했다(물론 그 반대 경우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사라졌다. 이제는 진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나와 다르면, 아예 침묵한다. 또는 아예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고집쟁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잘하는 것처럼, 트위터를 통해서 상대방을 향한 유치한 욕을 퍼붓는다.


SNS에서 조금만 시간을 보내보면 이런 상황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한 예를 들자면, 해리 포터의 작가인 J. K. 롤링(Rowling)이 최근 트위터를 통해 생물학적 성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온건한 주장을 내놓았다. “성 개념을 지워버리는 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에 대한 의미있는 토론을 할 기회 자체를 앗아가는 일이다. 미움으로 진리를 말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뤄졌고, 내가 여자임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나는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군중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롤링이 이해한 진리를 싫어했고, 그녀가 트랜스젠더를 증오(transphobic)한다고 주장했다. 롤링의 말 속에 담긴 논리에 관심을 갖는 대신, 비난자들은 롤링을 악마로 취급했다. 고작해야 다음과 같은 답글을 반복해서 달았을 뿐이었다. “트랜스젠더 여자도 같은 여자다.” 마치 같은 말을 여러 번 쓰면 그게 사실이 되고 자동적으로 롤링의 논리가 반박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트위터에서든 아니면 뉴욕타임즈 뉴스룸이든, 우리는 점점 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제와 관련한 논쟁을 거부하거나 그런 주제 자체를 무시하려고 한다. 이런 변화는 탈진리 시대를 살아가는(post-truth trajectory) 우리에게 실로 대단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진리를 주장하고 또 진리를 보존해야 하는 기독교인으로서는 이런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의 취약함


이런 시대가 도래한 데는 복음주의자들도 나름 한 몫을 담당했다. 다른 목소리는 아예 내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위협적인” 생각과 대면하는 것을 무조건 피하기만 하는 태도는 단지 세속적인 진보주의자들만이 아니다.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도 다르지 않았다. 20세기가 가져다준 “세상적인(worldly)” 사고에 관한 근본적인 두려움으로 가득찼던 복음주의 부모와 목사 그리고 단체들은 그 사고와 대면하는 대신, 어떻게 해야 그들이 책임지는 사람들이 잠재적 해가 되는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까하며 보호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건 몰라도 복음주의자들은 그들만의 “안전한 장소”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에게 쏟아지는 반지성적이라는 비난이 비록 100 퍼센트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고, 그것은 애초에 예정된 결과기도 하다. 


한편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교는 믿음을 떠받치고 있는 신학 사상을 강조하는 대신 믿음이 가진 치유적 측면과 감정적 체험을 강조했다. 취약한 교리 학습과 어려운 교리에 대한 회피는 자연스럽게 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종교적 정체성이 감정에 의해 좌우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는 당연히 더 취약해진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어려운 질문을 만난 기독교인은 당연히 믿음이 가진 지적 측면을 가지고 씨름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명하다. 애초에 별로 아는 게 없는 기독교인이 발을 디디고 있던, 카드로 만든 집과 같이 허약한 믿음의 집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deconversion accounts)를 통해서 이런 경우를 너무도 많이 목격한다. 논리적 사고와 이성적인 대화 그리고 믿음의 내용에 관해 조리있게 설명하는 능력이라는 면에서 전혀 훈련되지 않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제 그들이 비판하는 “지적 교만에 빠진 세속적인 사람들(secular snowflakes)” 만큼이나 취약한 존재가 되었다.


“안전주의(safetyism)”가 주는 매력과 취약성에 대한 가정은 세속적인 좌파와 종교적인 우파 모두를 유혹한다. 우리는 다 공개된 공간(village green)에서 종종 혼란을 주고 진을 다 빼는 이교성을 함축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보다는, 거품과 메아리로 가득한 공간이 주는 안락함을 더 선호한다. 게다가 온라인에서 매일 만나는 나쁜 뉴스와 분노로도 충분한 상황에, 굳이 사람을 더 힘들게 자극하는 새로운 주제를 끌어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특히나 이미 트라우마에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수 인종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목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도록 꺼놓는 게 훨씬 더 쉬운 길이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길 원한다면, 그리고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일한 진리”를 옹호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우리는 불편함을 피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싸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부드럽게 진리를 항변하는 세 가지 방법 


진리를 쫓는 길이 결코 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진리를 수호하는 데 굳이 불필요한 어려움을 유발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서는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온라인 멍청이가 있는 반면, 자신의 생각이 도전 받는 것을 결코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 대단히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두 부류 사이에 중간 지대가 있다. 


기독교인이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추구할 때, 담대하면서도 동시에 친절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말투(tone)에 신경써라


아무리 조심해서 전달을 한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트라우마가 되는 진리가 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이 말하는 성 윤리(sex ethic)를 아무리 잘 전달한다고 해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미움과 편협함 그리고 위협이 되는 진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투로 전달하는가에 따라, 사람들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주제에도 귀를 기울이게 하고 나아가서 이성적인 대화로도 이끌어 낼 수 있다. 공격적인 전달은 필연적으로 강한 반발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공감적인 이해심과 친절함 그리고 존경심으로 무장하고, 또 논리적이면서도 사랑으로 전달하는 경우라면(벧전 3:15), 어려운 주제까지도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기회를 맞게 될 것이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님이 대화를 이렇게 시작했다고 한번 생각해보라.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요 4:18). 이런 시작은 사마리아 여인을 단숨에 방어적인 자세로 만들었을 것이고, 두 사람의 대화는 아마도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어려운 주제를 피하지 않는 예수님이었다고 해서 그가 항상 대화의 시작을 어렵고 딱딱하게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비난이 아닌 초청하는 말투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의 말투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진리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2.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라


오늘날 토론에서 아무리 진리를 선포해도 열매가 없는 이유는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단지 선포만 하고 끝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초에 배울 마음이 없는, 가르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선생일 뿐이다. 자칭 “전문가”가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오만하고 자신감 있는 가르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겸손과 듣고 배우려는 마음을 갖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성경의 가르침이 단지 말을 아예 하지 말거나 또는 결코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대화 주제가 아무리 듣기 힘들더라도 듣는 데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단순히 우리가 가진 패러다임에 도전한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특정한 사실이나 주장을 무시하거나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그런 세상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기독교인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압두 머레이(Abdu Murray)는 이렇게 썼다. “탈진리 시대를 맞아서, 증거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나 의견과 일치하면 모든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증거는 아예 용납될 수 없거나 불쾌한 것으로 간주되며, 그런 증거는 이제 얼마든지 건전하게 진행될 수도 있었던 토론까지도 무력화시켜 버린다.” 나름 건전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기독교의 진리와 다르다는 측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에 직면한 기독교인의 경우, 비록 그 주제가 우리를 자극하고 감정적인 스트레스까지 유발하더라도 대화를 피하거나 또는 무조건 공격적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들어야 하고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가진 의미 중 하나를 실천하는 길이다(눅 10:27).


3. 상대방의 모든 주장에 다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특정한 부분에 반대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


비난에 대응하는 오늘날의 방식을 보면 하나 독특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 세 가지를 다 조금씩 합쳐놓은 형태다. (1) 누군가에 대해 절대적 최악으로 생각하기, (2) 밉다는 딱지를 붙이기, (3) 나와 어떤 부분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와는 결코 공통 분모가 있을 수 없다고 가정하기. 그러나 우리의 취약성이 가져다준 이런 증상은 사회에 만연한 자기 방어와 불신의 기운을 증폭시킬 뿐이다. 어떤 글을 읽었을 때 내용 전체에 동의하지는 않아도 일정 부분에는 동의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의견을 듣고도 그 사람의 주장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몇 가지 의견에는 얼마든지 찬성할 수 있다. 어떤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느 일부분에서 서로 동의하는 누군가와 얼마든지 손을 잡고 협력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도 개혁주의 기독교인이라면 일반 은총의 현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부분에서 완전히 틀린 생각을 하는 누군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부분이 가진 중대함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동의하는 부분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든 부분에서 나와 같지 않으면 완전히 적이라는 식의 당파적 극단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가능한 부분에서 보다 더 상대를 향한 여지를 열어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얼마든지 언론의 자유와 사회적 정의를 위한 입법과 같은 주제에서 서로 동의할 수 있다. 


설득을 다시 한번 더 위대한 것으로 만들자


사회는 지금 무서운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사실상 설득의 가능성을 거의 다 포기한 상태다. 즉,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누군가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있다는 것, 우리 모두가 다 지성의 힘을 모아 너와 내가 전혀 다른 진리가 아닌, 진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설득의 힘을 포기하게 되면 남는 것은 단지 권력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정치는 또 하나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초월적인 진리를 포기할 때,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정치 뿐이다. 이 세상은 이제 누가 또는 어떤 당이 리더가 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만의 진리에 충실해서 살도록 강요받게 된다. 슬프게도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실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능적 무신론자다. 그들은 이미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백기를 들었으며, 그 대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쥐기 위해 경주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결코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오직 진리를 알 때만 만날 수 있는 참 자유는 이런 식으로는 성취되지 않는다(요 8:32). 이것은 허무하고 위험하다. 이런 접근법은 단지 문화 전쟁이 가져다주는 폭력을 더 가중시킬 뿐이다. 미국을(다른 어떤 나라라고 하더라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부드러운 설득의 과업이 다시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제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임시적인 그 어떤 정치적 이득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진리, 그 자체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Exit the Echo Chamber. It’s Time to Persuade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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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Brett McCracken

브랫 맥크레켄은 미국 TGC의 편집장으로 Southlands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