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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아름다운 도시여
by 서나영
2024-01-11
나는 매일 아침 도시 안 오래된 아파트숲 속 좁은 공간에서 눈을 뜬다. 이 도시는 한민족이 역사를 지나며 일군 ‘한강의 기적’을 자랑하는 땅이자, 기술 산업의 눈부신 발전과 문화강국의 주역을 이룬 공간이다.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인터넷 속도로 손가락 터치 한 번에 음식과 생필품이 배달되고, 식료품은 신선함을 위해 새벽 배송을 고집하는 편리한 도시다. 저명한 미국의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그의 저서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에서 이 세계가 낳은 가장 중요한 불행과 불의 세 가지 중에 “추한 도시”를 언급했다. 그는 공간의 중요성을 모르는 세대에 탄식하며 “도시의 미학”에 무관심한 세대를 불행한 세대로 보았다. 물리적 실재, 즉 이 땅과 자연과 우리의 실재 공간 속에 내재한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는 것인데, 온전한 샬롬을 위해서는 “기쁨과 희락”의 요소가 빠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쁨”은 감각의 아름다움에서 오는데, 그 감각은 오늘날 모던한 세련미나 최첨단 기술로부터 느껴지는 편리한 느낌이 아닌, 칼뱅이 말했던 절제된 우아함이 있던 인간 생활 방식과 장소의 아름다움이라고 독자들을 설득한다.그러나 과연 이 시대는 말과 마차가 다니던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을 그리워하는 학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말의 배설물이 풍기는 냄새와 여러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기쁨은 대단했다고, 강철과 유리로 지어진 현대 건축술과 자동차 중심의 도시 건설로 인해 도시가 한껏 추해졌다고 확신하는 위대한 철학자의 미학관에 대해 말이다.현재 몸담고 있는 도시의 추함에 대해 묵상하자면 끝이 없이 써내려갈 수 있다. 홍수 때마다 사상자가 나오는 반지하의 가난한 삶들, 배달의 민족이라는 훈장 뒤에 하루가 멀다하고 듣는 배달기사들의 불의한 사고들,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가족이 생을 마감하는 뉴스들, 믿지 못할 청년 실업률 및 자살률, 그로 인한 미혼율과 저출산 문제, 세계 최고를 찍은 노인 불행 지수와 자살률 등등, 이들은 눈부시게 발전한 도시의 아픈 자식들이다.고도로 발달된 이 도시에서 이런 추함의 현상을 미학과 연결해 본다면,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살게 하는 형식과 관련 있을 것이다. 도시가 가진 형식과 인간의 삶은 직결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남긴 말을 재해석하자면, 도시의 미학이 중요한 이유는 거주민들이 잘 살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생활방식을 표현하는 방식을 넘어, 생활방식을 이끌고 가며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월터스토프가 말한 “도시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표현에 동의한다.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지각할 수 있는 재료에 심겨진 가치”이며 하나의 예술적 건축물처럼 “합리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도시의 샬롬을 미학으로 연결한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어떤 기준의 미학관을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샬롬을 ‘기쁘고 행복하며 질서정연함 속에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이해할 때, 내가 밟고 있는 공간의 미학을 어떻게 기준할 것인가? 그 기준을 탁월한 예술과 일치되는 심미적 아름다움으로 둘 것인가? 이미 많은 도시가 심미적 즐거움을 위해 설치예술을 통해 환경예술, 대지예술 등등의 새로운 용어가 생긴 지 오래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추함으로 인해 도시의 아름다움을 갈구한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계몽주의 이전 시대, 즉 기계화 되기 전의 자연과 친밀하고 자동차가 아닌 인간 중심으로 설계된 좁은 도로에서 볼 수 있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둘 것인가? 성경 속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려 입성하신 예루살렘은 기술의 발전을 찾아볼 수 없는 말과 나귀가 다니는 자연과 친밀한 도시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도시를 보시자 마자 통탄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부재가 도시의 불행임을 암시하신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도시가 눈에 들어오자, 예수께서 그 도시를 보고 우셨다. “네게 유익한 모든 것을 오는 네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앞으로 네 원수들이 포병대를 몰고 와서 너를 포위하고 사방에서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들이 너와 네 아이들을 바닥에 메어칠 것이다. 돌 하나도 그대로 남지 않을 것이다. 이 모두가, 너를 직접 찾아오신 하나님을 네가 알아보지도 않고 맞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눅 19:41-44).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도시와 연관된 공간미학의 고민은 정확히 성경적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한 목적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도시 속에서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운명은 에덴동산과 같이 대자연과의 화합과 일치를 고집하는 무릉도원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꿈꾸게 되는 “새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삶이다(계 3:12, 21:10). 이는 타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기도 하다. 완전하고 새로운 기쁨의 도시에 사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새예루살렘 도시는 그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을” 뿐 아니라 벽옥으로 된 성곽으로 둘러싸였고, 정금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에서 새 몸을 가지고 왕이신 하나님과 함께 그의 백성으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요한계시록 21장). 성경은 주의 백성이 마침내 아름다움과 삶이 공존하는 도시에서, 원래 창조된 인간의 본모습으로 진짜 삶을 살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그곳이 ‘샬롬의 도시 그 자체’일 수 있는 이유는 보석과 정금 때문이 아니다. 인격적 생활방식 때문만도 아니다. 샬롬의 진짜 이유는 보좌에 앉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의 왕 되시고 그의 백성과 친히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복할 뿐 아니라 찬양하고 감탄하며 경외하는 삶의 연속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의 역작 센터처치에서 강조하는 ‘도시 사역’에 관한 설명은, 철저하게 도시의 샬롬을 이루는 사역적 비전을 세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 샬롬의 기준은 ‘복음’이며, 이 ‘복음’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부터 죽음과 부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지는 능력의 이름이며, 모든 추함을 구원할 유일한 이름이다. 모든 문화와 언어의 상상력으로 끊임없이 재발견 되어야 하는 이름이며, 끝도 없이 아름답고 정확하게 설명되어야 하는 이름이다.신이 없이도 잘살 수 있는 최첨단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인 도시에서, 하나님을 뺀 온갖 인본주의적 선과 정의를 부르짖는 도시에서, 인간을 이용하고 등급을 매겨 비인격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세련됨이라고 착각하는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추함을 예언한 학자들의 미학관을 답습하고 다음세대에 가르쳐야 하는가? 아니면 도시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회피하고 숨어서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만 하는가?나의 경우에는,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지만, 도무지 칼뱅의 주장대로 평생 시편가만을 부르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시편가는 음악 안의 클라이막스를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고 그로 인한 감정의 고양을 방지한 밋밋한 선율 위에 부르는 다윗의 시편이다. 칼뱅이 그렇게 경계하고 금지했던 수많은 신앙고백의 찬송과 아름다운 음악들이 귀에 즐겁고 마음에 감동을 준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의 글을 읽어도 나는 이미 칼뱅의 예배음악관에 동의할 수 있는 정서를 갖기엔 글렀다. 그렇지만 칼뱅이 삶으로 말했던 미학관 이면의 진지하고 엄격했던 자세는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마음을 다해 배우고 싶다. 편리함이라는 우상, 화려함과 인기를 갈망하는 우상, 많음과 큰 것에 최고가치를 두는 온갖 우상으로부터 미혹되고 싶지 않다. 날아가는 새를 포착해 정교하게 그렸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말씀 안에 진지했던 그 미학관으로 세상을 포착해 정확하게 분별해서 읽고 싶다. 그것이 팀켈러 목사가 말한 ‘문화적 상황화’의 이상이자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최근 신도시에서 담임목회를 하는 지인을 만나 나눈 대화 중 중요했던 주제는 다름아닌 “교회의 주차장 크기”였다. 한 대형교회가 그 신도시에 지교회를 세우며 범접할 수 없는 크기의 편리한 주차장을 건설했고, 많은 사람들이 단시간에 몰려 수적으로 부흥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흥의 이유가 단지 최고시설의 주차장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실제로 교회를 정할 때 주차장의 편리함이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는 소문이 실재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율법 속 제사를 폐하시고 “영과 진리로”(요 4:23) 예배하라고 새롭게 명하셨지만, 한번도 편리한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적이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도시가 주는 형식 안에서 그저 도시가 추구하는 기준대로 살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심각성은 크다. 오늘의 도시가 섬기는 신은 힘과 권력이고, 돈과 개인의 이기적 안위이며, 화려함과 인기다. 그것은 계시록에서 말한, 땅에서 올라온 미혹하게 하는 짐승(계 13:11)과 같이 새끼양처럼 두 뿔을 가져 어린양 그리스도와 비슷한 선한 차림을 한 ‘거짓의 영’일 것이다. 미혹 당하는 자는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들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잘살아 보자는 도시의 슬로건에서, ‘오직 예수’라고 외치면 무식하고도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이 오늘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아름다운 도시에 대한 꿈을 꿔야 한다. 도시에 기쁨과 샬롬이 임하는 비전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각자의 도시에서 그렇게 살도록 연습해야 한다. 절대적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도시 속에서 그 기준을 고집하는 것이 힘들어도 반드시 최우선으로 바꿔야 하며, 매일매일 흐트러져도 그 아름다움의 기준을 재정렬해야 한다. “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불행이며 빈곤일 수밖에 없다”는 월터스토프의 말은 교회가 꼭 기억해야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각자 밟고 서 있는 도시 속 한 평이라도 변혁하려고 애쓰는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도와 방향은, 단지 평화와 공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왕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미리 닦고 예비하며 보수하는 일이다. 복음의 길을 닦는 일이다. ‘복음의 도시’를 이룩할 그날까지, 용기 내며 걷는 작은 한 걸음의 2024년이 되기를 소망하며, Soli Deo gloria!
더 깊이 들어가야 길을 잃지 않는다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우리 신앙의 정체성과 귀속성
by 김선일
2024-01-1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종교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우선 한국의 3대 종교인 개신교, 불교, 천주교 모두에서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응답이 가장 높다. 이는 우리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지난 2023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마음의 평안을 신앙생활의 이유로 꼽은 개신교인들은 42퍼센트로 나왔는데, 이전 조사들(2017년, 2012년)의 37-38퍼센트에 비해서 유의미하게 높아진 수치이다. 반면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개신교인들은 42.5퍼센트에서 35.9퍼센트로 많이 떨어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신도들과의 친교를 위해서’라는 응답이 종전의 1퍼센트대에서 2023년 조사에서는 6.5퍼센트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사회적 교제를 위해서 종교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조짐이지만, 이는 그만큼 현대인의 외로움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구원과 영생이라는 신앙의 핵심적 목표보다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응답이 더욱 높아진 것은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점검하게 한다. 그런데 다른 종교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정체성과 귀속성은 더욱 강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신앙을 갖는다는 응답이 천주교의 경우에는 73.4퍼센트, 그리고 불교에서는 68.9퍼센트가 나왔으니 개신교(42%)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라는 답을 택한 이들도 개신교 35.9퍼센트인데 반해, 불교는 2.7퍼센트, 천주교는 7.2퍼센트로 현저히 낮다. 구원과 영생이 불교도에게는 낯선 언어이기 때문에 선택지로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건강, 재물, 성공 등의 ‘현실적 복을 받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12.2퍼센트로 나와서 개신교(6.1%), 가톨릭(5.9%)보다 두 배 이상 높다(한목협,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67).같은 뿌리의 종교라 할 수 있는 개신교와 천주교 간 비교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드러난다. 구원의 확신 여부를 묻는 질문에 개신교인은 66.9퍼센트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반면, 천주교인은 47.7퍼센트로 큰 차이를 보여줬다. 이는 지난 2017년 조사에서 천주교인들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이 68.8퍼센트였던 것에 비해서 대폭 낮아진 것이다. 그전에도 천주교인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이 60퍼센트 중반대였으나 이번 조사에서 크게 하락한 것이다. 개신교인들은 그동안 천주교인들과 비슷한 비율로 구원의 확신 여부에 대해 긍정응답을 해오다가 이번에는 큰 차이로 앞서 것이다(한목협, 75).자기 신앙의 정도를 묻는 질문에서도 네 가지 신앙단계, 즉 기독교 입문층, 그리스도 인지층, 그리스도 친밀층, 그리스도 중심층의 네 단계 중에서 천주교는 개신교에 비해서 초보 단계인 기독교 입문층(50.1% 대 31.8%)과 그리스도 인지층(35.7% 대 27.5%)에 더 많은 신도가 분포하는 반면, 개신교인은 천주교인에 비해 더욱 성숙된 단계인 그리스도 친밀층(28% 대 12.6%)과 그리스도 중심층(12.6% 대 1.6%)에서 더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한목협, 79). 이는 개신교인들이 유사 종교인 천주교인들에 비해서 신앙의 정체성과 귀속성에서 더욱 적극적임을 시사한다.종교의 교리에 대한 인식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주요 교리에 대한 입장을 보면, 개신교인들은 종말론에 대해 50퍼센트만 믿고, 종교다원론을 믿는 사람이 31.8퍼센트, 유일신 신앙을 믿는 이들은 62.9퍼센트로 나왔다. 이러한 수치는 일단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교리적 신앙이 점점 약화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 비교하면 이러한 현상은 비단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불교인의 경우에는 가장 대표적인 교리로 알려진 윤회설을 믿는 이들이 21.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다소 충격적이게도, 개신교인들 중에서 12.5퍼센트, 천주교인 중에서 15.8퍼센트가 윤회설을 믿는다고 대답해서 불교인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내세와 영생의 신앙이 혼합된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개신교인들의 66.2퍼센트가 믿는데, 2017년 대비 8.9퍼센트포인트 하락했다(한목협, 82-83) 이러한 결과들을 통해서 우리는 선교한국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우선, 기독교가 여전히 다른 종교들에 비해서, 신앙의 목적, 교리에 대한 믿음, 신앙의 활동성에 있어서 더욱 적극적이라는 점은 청신호다. 한국 교회가 아무리 대외적 신뢰도와 이미지가 낮다고 하지만, 교인들이 무기력하거나 퇴조된 신앙생활에 빠져있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설령 습관적이라 할지라도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인생에서 신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 점은 한국 기독교의 자산이다. 타종교와 비교되는 부정적 이미지로 교회가 위축될 필요까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신앙의 잠재적 활동성을 담아내고 분발시킬 신앙의 방향과 공동체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 기독교의 상대적으로 견고한 신앙 정체성과 귀속성이라는 자산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까? 최근 선교적 교회 운동에 가장 큰 영감을 준 고 레슬리 뉴비긴이 서구 기독교의 쇠퇴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신앙의 역사성과 공공성을 잊어버리고 복음에 대한 고유한 자신감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 힌두교 친구가 기독교에 대해서 지적한 바를 회고한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성경을 읽어 보니, 거기에는 우주 역사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과 더불어 인간을 역사의 책임 있는 행위자로 보는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당신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또 하나의 종교 경전인 것처럼 이야기한단 말이야. 우리 인도에는 그런 유의 종교 서적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75).뉴비긴은 이교도의 이러한 지적을 상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인류 역사의 실마리를 푸는 거대한 이야기이며, 기독교의 복음이 공적인 영역에서도 진리임을 확신하고 증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날도 기독교 신앙의 효력이 내면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용도로, 또는 개인의 문제 해결, 혹은 기껏해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에 정신 승리를 제공하는 내세주의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개인적인 효용성에 머무는 복음은 온전한 변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세대에서 세대로 지속가능할 수 없음은 서구 기독교의 쇠퇴가 보여줬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상대적으로 강한 신앙적 정체성과 귀속성은 그 자체로 선교한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산이다. 그러나 이 신앙의 성격이 더욱 역사적이고, 공공적이어야 하며, 특정 이데올로기나 문화적 패러다임에 끌려다니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지녀야 한다. 유한한 인간은 더 큰 세계와 이야기 안에서 비로소 존재와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그 큰 이야기는 오직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발견된다. 신앙의 지경을 넓히는 과제는 선교한국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기초 작업이 될 것이다. 오랜 경험의 한 산악구조 전문가는 왜 등산객들이 산에서 조난을 당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충분히 깊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등산객들이 산속으로 너무 깊이 갔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달랐다. “사람들이 더 많이 가야 길이나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지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자기들의 불안함과 짧은 생각으로 중간에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길을 잃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 기독교의 부흥과 회복은 대외적 이미지를 재고하고 외형적 신뢰를 얻기 위한 제스처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의 하드코어로 더 깊이 들어가서 전인격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복음적 갱신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다.
나는 내 트랜스젠더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by 익명
2024-01-09
예수님은 가족의 갈등을 십자가 지는 것과 연결한다(눅 14:26-27). 나는 이 가르침을 개인적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우리 큰아들과 나, 그리고 아내 및 다른 가족 사이에서 일종의 죽음이 일어나는 일이다. 아들은 어릴 때만 해도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나는 물론이고 교회의 다양한 지체들과도 신앙 대화를 꾸준하게 나눴다. 우리 부부는 가정에서 쉬지 않고 말씀을 가르쳤다. 따라서 작년에 성 혐오증에 빠진 아들이 자신이 행여 트랜스젠더가 아닌가를 놓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채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열여덟 살 된 아들은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믿었고, 동시에 LGBT+ 정체성이 성경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왜입니까? 우리 부부는 물밀듯 몰려오는 질문들과 싸워야 했다. 도대체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건데? 아들이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도대체 뭔지를 찾고 또 찾았지만, 우리가 발견한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옛 친구 하나가 코로나 시절에 내 아들의 삶에 스며들었고, 둘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다양한 LGBT+ 공동체를 거친 사람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가르쳤는데, 거기에는 친구를 향해서 사랑과 관심을 쏟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내 아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은 몇몇 다른 사람들이 LGBT+ 생활 방식도 얼마든지 기독교와 일치할 수 있다고 아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모든 LGBT+ 정체성이 기독교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 아들지만, 그는 현재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인정한다. 우리 부부는 아들이 진정한 신자라면 그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갈 5:19-21; 고전 6:9-10). 아들이 동성애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신뢰와 순종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아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결정을 내린 이후로, 나는 LGBT+ 정체성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모든 잠재 요인과 원인에 대한 책을 읽었다. 정말로 내적 또는 외적 끌림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실을 주님께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함을 갈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건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주님의 주권에 항복함을 의미한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내 아들과 내 가족을 위한 가장 좋은 대답은 언제나 예수님이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한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실제로 이 고백을 삶에서 실천하는 건 어렵기만 한다. 아들을 사랑하기동성애를 선언하고 몇 달 동안 아들은 대부분 폐쇄적인 시간을 보냈고 우리조차도 적대했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에 대한 확신이 커짐에 따라 조금씩 주변을 향해서 마음을 열었다. 오늘날 그는 다정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예를 들어, 마침내 아들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호칭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선가 자신이 선호하는 이름과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서 그는 우리가 부모로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막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육신의 존귀함을 무시하는 성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어느 날 대화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이름과 대명사를 사용할 수 없다는 우리 말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제가 자살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도 할 수 없어요.” 그날 아들은 방으로 가서 통곡하며 울었다. 나와 아내도 무력감을 느끼며 울었다. 물론, 그가 원하는 이름과 대명사로 부르는 게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아들이 기뻐하는 방식으로 같이 기뻐하는 게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이렇게까지 힘든 순간을 맞으면, 아무리 신앙을 굳건히 갖는다고 해도 아들이 요구하는 변화가 결국에는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정신과 육체에도 해를 끼칠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는 게 쉽지 않다.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린 아들은 작년 크리스마스 휴가 내내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암울한 크리스마스였던 그 시간은 몇 달이 되었고, 그 기간 내내 우리는 행여라도 자살한 아들을 방에서 보는 게 아닐까 마음 졸여야만 했다. 우리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왜 우리는 아들을 다시 정상으로 만들 수 없는 걸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아들은 우리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그가 몰랐던 게 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도 그는 제대로 몰랐다. 누가복음 14:26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녀를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건 문자 그대로의 미움이 아니다. 성경에는 자녀를 기뻐하고 희생적으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선한 명령으로 가득하다(신 4:9; 잠 17:6; 사 49:15-16; 말 4:6; 골 3:21; 엡 6:1-4). 예수님은 여기에 반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조하는 게 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할 때 치러야 하는 희생의 정도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가족, 심지어 당신의 자녀에게도 증오로 보일 수도 있다.우리 부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건 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들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항상 아들이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의 죄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다. 우리는 도무지 “악을 기뻐할 수” 없다. 비록 우리의 사랑이 아들에게는 미움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기뻐해야만” 한다(고린도전서 13장).우리 부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죽어야만 한다. 1.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인생을 충만하게 살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다.2.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아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줄 수 있다.3. 우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이 더 큰 삶과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는다.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는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한다. 이건 부모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처음부터 정해진 패턴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다. 그건 부모인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오로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만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이 험난한 물살을 헤쳐나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은혜밖에 없음을 쉬지 않고 확증한다. 아들의 어려움은 우리가 예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로지 우리 구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부활의 생명으로 꽃피운 유일한 죽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건 예수님 자신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이자 주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며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본다면, 영적으로 장님이 된 아들로 인한 나의 계속되는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받고 싶은 것을 받으면서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죽음을 낭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원제: I Love My Transgender Child. I Love Jesus Mor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주시는 시련보다 크다
by Abigail Dodds
2024-01-08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 오래되고 진부한 이 말이 나를 조롱했다. 나는 살면서 하나님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주신 게 분명하다고 여러 번 느꼈다. 생명을 위협하는 발작으로 인해 임사 체험까지 한 아들을 둔 사람에게, ‘그건 당신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입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는 또 어떤가? 무력함? 만성통증? 어쩌면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나쁜 시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모든 상황을 견디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그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옆방에서 구급대원들이 발작하는 아들을 치료하는 동안 땀에 젖어 기절한 채 욕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나를 생각하면, 그건 도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사자와 우리의 한계“갤럽, 브리, 뛰어. 너희는 군마라는 사실을 기억해”(The Horse and His Boy, 270). 자신의 조국 칼로르멘의 악을 피해 도망친 어린 공주 아라비스는 말하는 말 브리에게 적들로부터 최대한 빨리 도망가라고 재촉했다. 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7권 중 하나인 말과 소년(A Horse and His Boy)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브리와 친구 흐윈(Hwin)은 각자 나름 생각하기에는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거 같다. “확실히 두 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리고 이렇게 지적한다. “하지만 그 둘은 결코 같은 게 아니다.”말하는 두 마리의 말과 그 등에 올라탄 소년과 소녀의 필사적인 질주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공포의 정점을 향해서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 그들은 칼로르멘 군인들로 이루어진 끔찍한 군대의 추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가까이에서는 더 위험한 적인 위대한 사자가 바로 뒤에서 포효하고 있었다.“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271). 동화 속 이 단순한 장면이 지난 십 년과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측면에서 내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어려움 속에서 나의 “한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2)어려운 시기에 나를 짓누르는 분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3)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정도까지 짓누르기로 선택하셨는지와 관련해서도 그분의 선하심을 엿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욕실 기절 사건에 적용하기브리는 위대한 사자 아슬란을 등에 태우고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내 경우에는 위기를 맞은 아들과 필사적으로 함께하고 싶었던 바로 그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는 점에서, 거기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정신을 잃어버린 끔찍한 생리 반응을 어떻게 사자를 등에 태우고 속도를 더 내는 브리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겉으로만 봐서는 전혀 비슷한 게 없다. 하지만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던 나는 나만의 새로운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거기 누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내 아들을 구해 달라고 간구했고, 동시에 주님을 더 믿기 위해서 내게는 새로운 변속 기어가 필요했다. 내가 매 순간 아들 곁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은 항상 계셨다. 나는 아들의 발작을 멈출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다. 아들이 죽는다고 내가 따라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내 아들 곁에도 계실 것이다. 브리와 마찬가지로 나도 내 생각에 괜찮다 싶을 정도만 믿음을 가졌다. 사실 그게 대단한 믿음도 아니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내가 다 감당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로 대단한 시련이 아니었다. 위대한 사자의 추격과 함께 나는 새로운 믿음의 차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당신은 알고 있는가? 당신이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상 한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창조자이자 유지자가 아니기에,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당신의 한계를 결코 제대로 알 수 없다. 내 한계를 넘어서 우리는 모든 걸 다 바쳤고, 남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나의 한계를 제대로 시험해 본 적이 없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나는 안 돼, 이건 내 한계를 넘은 거야, 이런 손해는 감당할 수 없어, 이런 시험은 말도 안 돼, 난 이런 결과를 감당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필요한 압력을 행사하신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9)알다시피, 고난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믿음이 우리가 원래 강인한 체질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는 건 내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다.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화장실 바닥에서 박박 기는 동안에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할 수 있다. 변치 않는 사랑의 길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서(그분을 의지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음을 종종 보여주신다. 그리고 직관에 거슬리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단지 격려나 긍정적인 사고 또는 확언을 통해서 우리를 그 믿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다. 브리의 경우처럼 고통과 시련을 증가시킴으로,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해서 달려나가도록 인도하신다. 브리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속도를 높이자, 위대한 사자는 그들과 그들을 쫓는 진정한 적들 사이의 거리를 더 벌어지게 했다. 아슬란이 그들을 겁주었지만, 결국에는 그게 다 그들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서였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느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고 선한 일에만 복종하게 하실 뿐, 필요 없는 고통은 단 한 방울도 더하지 않으실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일이 합력하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신다(롬 8:28-29).하나님께서 우리가 죽어라 질주하고 숨에 헐떡이도록 몰아가실 때, 그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은혜이다. 그분은 오로지 선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는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바라보라고 우리를 압박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옛 적들, 즉 세상과 육신과 마귀 사이에 거리를 두심으로써, 정말로 해를 끼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당신이 위대한 사자의 압력을 받는다고 느낄 때 결코 잊지 말라. 그의 모든 길은 변함없는 사랑이다(시 25:10). 화장실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도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다. 원제: More Than Mom Can Bea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에든버러 2010을 넘어서
1920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이후 선교의 현주소
by Kirsteen Kim
2024-01-06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역사적인 1910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이후 100년 동안 모든 대륙에서 거의 100개의 대회와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1] 그 후 10년이 지난 2010년에, 우리는 그간에 우리가 배운 내용과 오늘날 그 내용이 선교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우선, 세 차례의 주요한 100주년 행사들을 돌아보고, 둘째로는 에든버러 2010 대회에서 비롯된 주목할 만한 도서 시리즈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러한 자원이 2020년대의 상처받은 세계에서 선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제안하려고 한다.10년이 지난 2010년에, 우리는 그간에 우리가 배운 내용과 오늘날 그 내용이 선교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서로 다르게 기념하다 : ‘가나의 세 자녀’1978년에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풀러 신학교에서 교수로 역임했고 그 당시 미국세계선교센터 책임자 랄프 윈터(Ralph Winter)는 그가 20년 전에 ‘결혼’이라고 일컬어온 일을 돌아보았다. 그는 1910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의 계속위원회로 출발한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 같은 뿌리에서 나온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에 합병된 결정이 가나의 아크라에서 이루어졌다고 언급했다. 그것은 IMC와 WCC의 통합이 서구 기관들과 이전에 식민지화된 국가들, 즉 제3세계 교회들 간의 선교를 위한 구조적 연합을 이루도록 의도된 결정이었다. 그러나 윈터는 사실상, 이 ‘합병(marriage)’이 상이한 세 ‘자녀들’을 낳았다고 주장했다.[2] 첫 번째 자녀는 WCC 세계 선교와 전도위원회(Commission for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CWME)였다. 두 번째 자녀는 스위스 로잔에서 역사적인 첫 번째 대회를 열었던 로잔운동[3]이었다. 세 번째 ‘가나의 자녀’는 윈터와 다른 미국 선교학자들이 ‘타문화 선교 사역’에 헌신한 선교사들의 결집을 위해 초안을 잡은 ‘부르심’에서 구상되었다.[4]2010년도를 돌아보면서 나는 윈터의 예측이 대체로 성취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100주년을 맞아 윈터가 말한 ‘가나의 세 자녀들’은 각각 대규모 행사를 열었다.에든버러 2010은 WCC의 후원을 받았으므로 에든버러 1910의 제도적 계승자였다. 이 대회는 특히 존 모트(John Mott)가 에든버러 1910의 폐회 연설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 – 현재 ‘세계 기독교’와 유사한 – 과 함께 이룰 교회의 전 세계적인 성장을 언급하면서 ‘확산되는 그리스도(a larger Christ)’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비전을 포착했다.[5]로잔 운동이 2010년 케이프타운[6]에서 개최한 제3차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대회는 세계 복음화에 주목한 에든버러 1910의 비전에 기초하여 제1차 로잔대회에서 제시된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는 표어를 해석했다. 이 대회는 위대한 계명(Great Commandment)에 근거하여 지상 대위임령(Great Commission)을 설정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했다.[7]도쿄 2010은 윈터[8]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에든버러 1910이 전 세계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려는 타문화 선교사들을 결집하려는 대회임을 강조했다. 이 대회는 현대선교 운동이 다양한 멤버십과 다양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9]윈터는 에드버러 세계선교대회 100주년을 맞아 단일 대회를 희망했지만, 글로벌 선교 네트워크의 다양성을 문제 삼지 않고 그것을 ‘생산적인 결혼’으로 표현했다.[10] 필자는 한 부모 아래 태어난 이런 여러 행사들이 에든버러 1910을 충실하게 회고하면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용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나누려는 공동의 열망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세 자녀 모두가 서로에게서 배우고 협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11]레그넘 에든버러 100주년 시리즈: 선교학자를 위한 자료 에든버러 2010 프로젝트는 2005년에 연구 프로젝트와 컨퍼런스로 시작되었다.[12] 그 프로젝트는 WCC가 시작했지만, 가능한 모든 교회가 모이는 모임을 소집하기 위해 WCC가 직접 주관하지는 않았다.[13] 에든버러 2010 ‘공동의 부르심(Common Call)’은 가톨릭, 복음주의, 정교회, 오순절, 개신교, 독립 교회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예배 가운데 확인되었다.[14] 그 ‘부르심’은 프로젝트의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고 레그넘 에든버러 100주년 시리즈 (Regnum Edinburgh Centenary Series, RECS)에서 나온 광범위한 책들의 기초를 형성했다.[15] 에든버러 1910에서 출판된 9권의 책에서 영감을 받은 레그넘 시리즈의 핵심 설계자는 크누드 요르겐센(Knud Jørgensen)이었다. 그는 에든버러 2010 연구 프로젝트를 감독했고 동시에 케이프타운 2010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당시 옥스포드 선교연구센터(Oxford Center for Mission Studies, OCMS)의 학장인 마원석 박사와 부속 출판사인 레그넘과 협력했다.[16] 나는 에든버러 2010 프로젝트팀의 일원으로서 편집팀에 합류했으며, 토니 그레이(Tony Gray)는 레그넘의 제작 편집자였다.2009-2016년에 출판된 이 시리즈는 2018년에 35권의 책과 두 권의 개요서(Compendium)로 구성되었다. 각 권은 상충되지 않는 다양한 관점들을 대표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종합적으로, 그것은 21세기 초의 선교적 사고에 대한 광범위한 관점(cross-section)을 제공한다. 이 시리즈의 많은 책들은 에든버러 프로젝트에서 나왔다. 예를 들어, 제2권인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에든버러 2010 대회에서 모든 대표자들이 소지한 책이다. 이 책은 여러 대륙에서 수년간 일해 온 9개의 연구 그룹들의 보고서와 현재의 선교 주제와 연관된 교회 분열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선교의 기초; 타종교와 기독교 선교; 선교와 포스트모더니티; 선교와 권력; 선교적 참여의 형태; 신학 교육과 형성; 현대의 기독교 공동체; 선교와 일치-교회론과 선교; 그리고 선교적 영성과 참된 제자도. 100 주년 시리즈의 에든버러 2010 대회 책자는 ‘선교적 영성을 갱신하고, 더 많은 반성을 자극하며, 역사상 이 독특한 시점에서 교회의 공동의 행동을 장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리즈의 다른 책의 기조를 설정한다.[17]이 보고서들은 에든버러 2010의 토론과 ‘공동의 부르심’의 토대를 형성했다. 이후 9개 그룹 모두 시리즈용 책을 제작했으며, 이 주제를 검토하는 다른 그룹들의 작업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타종교 선교’에 관한 두 권의 책이 있다.[18] 또한, 이 시리즈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오순절을 포함한 다양한 고백적 선교 신학에 관한 연구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한국, 동북부 인도, 중부 유럽과 동유럽 등 세계 여러 지역의 관점에서 본 선교에 관한 책들도 포함한다. 다른 그룹들은 총체적 선교, 글로컬 선교, 디아스포라 선교, 교육 선교 등 다양한 종류의 선교에 대한 책자; 선교와 성경, 어린이, 일치, 형성, 종교자유; 그리고 화해로서 선교, 주변부 선교, 섬김과 창조 세계 돌봄으로서의 선교에 관해 저술했다.‘가나의 세 자녀들’은 각각 에큐메니컬 선교학(35권), 로잔운동(22권), 복음주의 및 전방개척 선교(9권) 시리즈로 대표된다.[19] 이 시리즈는 모두 오늘날 선교와 세계 기독교에 있어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매우 소중한 자료다.상처 입은 세상에서의 선교: 2020년과 그 이후2021년의 세계는 10년 전보다 어두운 것처럼 보인다. 식민지 시대의 선교 모델에 대한 강한 비판이 있었지만 에든버러 2010의 분위기는 축제와 다름없었다. 서구 기독교 왕국의 사고방식(Christendom mindset)과는 대조적으로, 이 대회는 전 세계에 걸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와 여러 센터에서 선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세계 기독교에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비전에 따라 ‘공동의 부르심’은 ‘상호성, 파트너십, 협력, 네트워킹’으로 귀결되는 성령을 통한 전 세계적 상호 연결성을 강하게 표현한다. 세상에 대한 공동의 부르심의 접근은 ‘진정한 대화, 정중한 참여와 겸손한 증언’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민감하게 접근하는 것에 유의하는 한편, 희망적이고 ‘담대한 확신(bold confidence)’이라는 특징을 띤다.에든버러 1910은 대영 제국에 의해 세계화된 세계에서 열렸고, 이런 조건으로 인해 전 세계의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대회에 직접 모일 수 있었다. 하지만 불과 4년 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세계의 여러 지역들이 분열되었다. 그 후, 세계는 전염병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대공황을 촉발한 보호주의에 의해 분열되었으며, 소위 냉전으로 인한 이념대립이 확립되기 전에 더 큰 규모의 세계적인 전쟁을 초래한 부상하는 민족주의에 의해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20] 냉전 시대에 이은 세계화는 2010년에 동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이 에든버러, 케이프타운, 도쿄에서 모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이 글로벌 연결 시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대신 민족주의, 보호무역주의, 이동 제한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팬데믹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상처를 드러냈다; 병든 본성과 인간의 고통과 이기심뿐 아니라 부의 뿌리 깊은 불공평,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및 환경의 질도 그렇다. 이런 대부분의 불평등은 인종, 민족 및 위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 구조적이다. 현 상황은 이런 공동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계가 함께 모이기를 요구하지만, 많은 면에서 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세계화를 심화시키며,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든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조차도 기술 민족주의와 강력한 지도자의 조작에는 취약하다.2010 년은 하나님의 선교에 다 함께 동참하기 위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선교를 분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런 대회에서 얻은 자원들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케이프타운 서약(Cape Town Commitment, CTC)’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통합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의 종족적 화해’(CTC II-B-1)에서 모델이 되는 길을 설명한다. 정부와 초국가적 비정부 기구들이 세계를 하나로 묶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모든 나라, 민족, 백성과 언어(계 7:9)의 그리스도인들이 협력하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한지 모른다.[21]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현세와 내세, 육체와 영혼, 가깝고 먼 곳을 아우른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적인 요인이나 외적인 요인이 초래한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화해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를 구축하고, 상처와 불의를 해결하며 함께 나아갈 길을 구성하는 과정이다.[22] 에든버러 2010 ‘공동의 부르심’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영광과 심판 가운데 오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고, 모든 피조물을 변화시키고 화목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교에 참여하는 일에 모든 사람이 우리와 함께하도록 초대한다.’1. 이 프로젝트 리서치 코디네이터로 있을 때 에든버러 2010 웹사이트www.edinburgh2010.org에 이 내용을 문서화해 정리했다. 2. Ralph D. Winter, ‘Ghana: Preparation for Marriage’,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67, no. 267 (July 1978): 338-53. 3. 이후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위원회 4. Winter, ‘Ghana’, 351-53. 5. John R. Mott, ‘Closing Address’, in World Missionary Conference, 1910, Vol. 9: The History and Records of the Conference (Edinburgh: Oliphant, Anderson, & Ferrier, 1910), 348.6. 편집인 주: See article by Doug Birdsall entitled, ‘A Personal Reflection on Cape Town 2010’ in November 2015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7. 케이프타운 서약, 서론. https://lausanne.org/content/ctcommitment#p2-2.8. 윈터는 2009년 작고했다. 9. 2010 Tokyo Declaration 2010. 10. Winter, ‘Ghana’, 353.11. 나는 기쁘게도 세 회의 모두에 참석할 수 있었다.12. For the background, see Daryl Balia and Kirsteen Kim, ‘Introduction: Experimenting with a Multi-Regional, Cross-Denominational, Poly-Centric Study Process’, in Daryl Balia and Kirsteen Kim, eds., Edinburgh 2010: Witnessing to Christ Today, RECS 2 (Oxford: Regnum, 2010), 1-9.13. 다른 주요 파트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에든버러 대학교였다.14. 에든버러 2010, 공동의 부르심(Common Call), http://edinburgh2010.org/fileadmin/Edinburgh_2010_Common_Call_with_explanation.pdf.15. 종이책 또는 전자책 구입 링크 https://www.regnumbooks.net/collections/edinburgh-centenary. 개인용으로 사용시 무료 PDF 다운로드 링크 https://www.ocms.ac.uk/regnum-centenary-free-downloads/.16. 마 박사는 현재 미국 Oral Roberts 대학의 신학 및 목회학 대학 학장이자 세계 기독교 석좌교수다.17. Kirsteen Kim and Andrew Anderson, ‘Introduction’, in Kirsteen Kim and Andrew Anderson, eds., Edinburgh 2010: Mission Today and Tomorrow, RECS 3 (Oxford: Regnum, 2011), 6.18. Lalsangkima Pachuau and Knud Jørgensen, eds., Witnessing to Christ in a Pluralistic World: Christian Mission among Other Faiths, RECS 7 (Oxford: Regnum, 2011); Marina Ngursangzeli Behera, Interfaith Relations after One Hundred Years: Christian Mission among Other Faiths, RECS 8 (Oxford: Regnum, 2011).19. Kenneth R. Ross, Jooseop Keum, Kyriaki Avtzi, and Roderick R. Hewitt, eds., Ecumenical Missiology: Changing Landscapes and New Conceptions of Mission, RECS 35 (Oxford: Regnum, 2016); Margunn Serigstad Dahle, Lars Dahle, and Knud Jørgensen, eds., The Lausanne Movement: A Range of Perspectives, RECS 22 (Oxford: Regnum, 2014); A. Scott Moreau and Beth Snodderly, Evangelical and Frontier Mission: Perspectives on the Global Progress of the Gospel, RECS 9 (Oxford: Regnum, 2011).20. Bryant L. Myers, Engaging Globalization: The Poor, Christian Mission, and Our Hyperconnected Worl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7); Peter Sedgwick, ‘Globalization’, in Peter Scott and William T. Cavanaugh, The Blackwell Companion to Political Theology (Oxford: Blackwell, 2007), 486-500.21. 편집자 주: See article by Kirsteen Kim entitled, ‘Unlocking Theological Resource Sharing Between North and South’ in November 2017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17-11/unlocking-theological-resource-sharing-north-south.22. See, for example, Al Tizon, Whole and Reconciled: Gospel, Church, and Mission in a Fractured Worl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8). 원제: Beyond Edinburgh 2010출처: lausanne.org
창세기 1장은 성삼위 하나님을 계시하는가?
by Scott Swain
2024-01-05
TGC의 성경 읽기(Read the Bible) 운동에 참여하세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일 년 안에 힘을 합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삼위일체가 등장할까? 대답은 확고부동한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어제, 오늘, 그리고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시기에 창세기 1장을 포함하여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 걸쳐서 삼위일체 되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서 삼위일체의 존재를 확증하는 건 쉽지만, 다양한 구절 속에서 드러나는 삼위일체의 임재 방식을 분별하는 건 훨씬 복잡한 문제이다. 오래전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창세기 1장에서 특정 구절이 드러내는 것보다 더 과도하게 삼위일체를 찾아내는 과잉 해석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에 반해서 현대 독자들은 특정 구절이 증명하는 것보다 삼위일체를 훨씬 적게 바라보는 과소 해석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다.구약 속 숨겨진 존재구약성경에 삼위일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큰 질문에서 시작하자. 루터교 신학자 요한 게르하르트(Johann Gerhard)에 따르면, 창세기 1장 속 삼위일체는 “그 시대에 적합한 계시 방식으로” 존재한다. 성경 속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는 이중 경륜에 따라 전개된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전(구약의 삼위일체 자기 계시)과 예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후(신약의 삼위일체 자기 계시)이다. 이 두 형태의 계시를 가르는 대조는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삼위일체가 구약에는 전혀 없고 오로지 신약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조는 상대적이다. 구약과 신약에는 다 삼위일체가 드러나지만, 임하시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구약에서 삼위일체는 “숨겨져” 있고, 신약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난다.”구약에 숨겨진 삼위일체의 임재는 마치 밭에 감춰진 보물과도 같이(마 13:44; 골 2:2-3) “숨겨진 임재”이다. 그에 반해서 신약에서 삼위일체는 “명백한 임재”를 보여준다.창세기 1장 속 숨겨진 존재 이러한 명확한 설명을 통해 우리는 이제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었다. 삼위일체는 어떻게 창세기 1장에 “그 시대에 적합한 계시의 방식으로” 존재할까? 창세기 1장은 삼위일체의 숨겨진 임재에 대한 최소한 세 가지 흔적을 보여준다. 이러한 흔적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계시의 완전한 체계를 위한 필수적인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1. 창세기 1장은 주어-동사 불일치의 여러 사례를 보여준다.창세기 1:1에서 복수명사 “엘로힘”(ESV에서는 “God”)은 단수 동사 “창조하다”와 결합되었다. “태초에 [엘로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 패턴은 창세기 1:27에서도 반복된다. “이에 [엘로힘]이 자기 형상 곧 [엘로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느니라.”이러한 주어-동사 불일치는 저자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무엇일까?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분의 유일한 대리인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창조는 하늘의 존재들이 구성한 위원회의 회의를 통해서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인도자(사 40:13-14)와 돕는 자(사 44:24; 렘 10:12; 27:5) 없이,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이 점을 강조하면서 창세기 1장은 삼위일체 신학의 첫 번째이자 근본적인 구성 요소인 유일신론을 제공한다. 한 분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며, 만물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 유일신교와 별도로 삼위일체 신앙은 다신교의 한 형태가 될 수도 있다. 오로지 유일신교의 맥락에서만 삼위일체 신앙이 다신교가 아닌 세 위격을 가진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 2.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인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포함한다. 앞의 예들은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차지하는 위치를 인식하도록 돕는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이 만물을 생산하시고, 형성하시고, 또 채우시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하나님은 창조물이 존재하도록 말씀하신다(창 1:3, 6, 9, 11, 14, 20, 24, 26). 하나님은 다양한 피조물에 이름을 지어 주신다(창 1:5, 8, 10).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을 축복하신다(창 1:22, 28).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은 창조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미완성, 채워지지 않은 세상 위를 어미 새처럼 맴돈다(창 1:2; 신 32:11 참조). 그리고 생명을 주는 그분의 임재를 통해 창조물에게 생명, 활력, 총명, 그리고 충만함을 공급한다(출 31:3; 35:31; 민 24:2).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하나님이 만물을 생산하시고, 형성하시고, 또 채우시는 데 필요한 수단임을 밝히는 동시에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로서 말씀과 성령을 포함시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창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른 누군가의 대리인을 통해서 일하시는 게 아니라, 오로지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창조하신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시 33:6-9; 요 1:3; 롬 11:36; 고전 8:6; 골 1:16; 히 1:2).그러나 창세기 1장이 삼위일체 신학에서 “말씀”과 “성령”이라는 이름이 갖는 완전한 의미까지 제대로 드러내는 건 아니다. 이 이름들의 온전한 의미는 오로지 성육신으로 오신 말씀과 오순절에 부어진 성령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자신의 존재 속에 말씀과 성령을 포함시킴으로써 삼위일체 신학의 또 다른 기본 구성 요소를 마련한다. 성경이 나중에 엘로힘과 그분의 말씀 및 성령 사이의 어떤 구분을 밝히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말씀과 성령을 한 분 하나님과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말씀과 성령에 대한 어떤 구분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 안에서만 이뤄져야 한다. 3. 또 다른 복수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창세기 1장 속 하나님은 반복해서 복수 명사 “엘로힘”으로 표현된다. 일부 성경 주석가들은 이 복수 명사를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뿜어내는 충만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또 창세기 1:26에 나오는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표현(“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창조 사역이 삼위로 이루어진 한 분 하나님의 역사라는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런 복수형은 삼위일체의 숨겨진 현존을 나타내는 표시인가? 창세기 1:26을 보자. 창세기 1:26에 나오는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 호칭은 때때로 왕이 복수형으로 자신을 호칭하는 관용적 표현, 소위 말하는 “군주 일인칭”(royal we)의 예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이 복수형을 하나님이 소집한 천상 회의 속 천사들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욥기 1:6; 2:1). 그러나 이 두 가지 설명 모두 다 가능성이 작다. 첫 번째로 고대 근동에서 로얄 일인칭이라는 관용적 표현이 쓰였다는 증거가 부족하다. 두 번째로 천상 회의 주장은 창세기 1장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요한 메시지와 모순된다.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하시는데 굳이 합창단 역할이나 맡을 천사들의 도움이 필요할 리가 없다(욥 38:7). 하나님만이 언제나 그분의 유일하고 주권적인 대리인을 통해서 행동하신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요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친 자니라”(사 44:24).그러면 창세기 1:26의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 지칭의 수수께끼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언젠가 로버트 젠슨(Robert Jenson)이 언급했듯이, 창세기 1:26 속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 지칭의 잠재적 대상으로 가능한 유일한 후보는 말씀과 성령이다. 이러한 관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결정적인 결론에 아직 도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의 이중 계시가 주는 어려움을 이해한다면, 구약에서 삼위일체의 계시를 해석할 때 결정적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를 맞는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이유도 또 고민할 이유도 없다. 구약에서 만나는 삼위일체 계시의 수수께끼는 신약의 삼위일체 계시에 의해서 언제나 해결 가능하다. 창세기 1장은 무대를 만든다구약성경에 있는 삼위일체 존재에 대한 흔적은 신약성경에 의해서 완전한 체계로 드러나는 삼위일체 계시를 위해서 꼭 필요한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의 주인공, 즉 말씀과 성령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소개한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형성되고, 채워지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창세기 1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열심(commitment)의 주된 목적,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세기 1장은 성경의 주된 목적, 즉 삼위일체와 그분을 위해 창조되고, 구속되고, 또 완전해진 백성 사이의 연합과 교제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원제: Is the Trinity in Genesis 1?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재고한다
by 이춘성
2024-01-04
“신들림의 시간”에 이어서 읽으면 더 좋습니다. 많은 분이 레이첼 카슨이 1962년에 쓴 침묵의 봄을 아실 것입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살충제와 제초제로 사용된 DDT로 인한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려, 미국과 전 세계에서 환경 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출판되고 5년 뒤인 1967년, 기독교와 교회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중세 유럽의 농업 기술사를 가르치던 린 화이트 주니어가 쓴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짧은 논문을 통해서 현대 환경 파괴와 생태 위기의 기원으로 지목되는 불명예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기독교와 교회가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의 주범이라는 그의 주장은 대부분의 학자들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화이트의 글에 따르면, 기독교가 환경 파괴의 주범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독교의 자연관이 문제였습니다. 기독교는 자연을 대상이나 도구로 여겨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둘째, 인간 중심주의가 문제였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구별된 존재로 보았고, 이로 인해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신론을 비판했습니다.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의 범신론과 달리 기독교는 자연을 신의 일부로 여기지 않아 자연을 함부로 착취했다는 것입니다.놀랍게도 이러한 주장은 당시 반전 운동을 하던 히피들을 포함한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쉽게 수용되었으며, 반전 운동은 환경 운동과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평화주의를 탄생시켰지요. 그리고 이들은 평화의 적으로 기독교와 교회를 지목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1960년대 서양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급격하게 떠나는 ‘탈교회’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당시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은 동양 종교, 특히 인도의 힌두교와 동남아 및 일본의 선불교에 매료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비틀즈와 같은 유명인들은 1968년 인도를 방문해 마하리쉬 요기를 만나서 초월명상법을 배워 돌아왔습니다. 이후에도 서양의 많은 대중 가수들과 배우들이 인도를 찾아 초월명상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동양 종교의 명상을 돕기 위해 동양 음악을 차용한 음악 장르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바로 뉴에이지 음악입니다.환경 파괴, 전쟁, 핵무기, 과학 기술에 대한 회의,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 평화주의, 반전 운동 등으로 1960년대 서양은 공포와 혼란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기독교는 이 모든 혼란의 주범으로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는 신론, 창조론, 인간론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일어났고, 일부는 수정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극단적인 실존적 이해와 관계론적 이해가 대두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는 20세기의 이해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의 참 의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관계성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20세기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이전의 교회와 기독교가 이해해 온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종교개혁 이후 대표적인 두 신앙 고백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신앙고백은 인간에 대해 현대와는 다른 이해를 제시합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소요리 문답 첫 번째 질문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가요?”라고 묻고,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하이델베르크신앙고백의 6번 답은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그리고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그와 함께 영원한 복락 속에서 살고, 그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라고 말합니다.20세기 이전의 신학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관계라는 피상적인 개념으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 하나님을 창조주로 바르게 알고 사랑하며, 그와 함께 살고, 그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관계를 바르게 설정하고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감각적인 표현, 즉 관계성이 연결되었는지, 끊어졌는지에 대한 집중보다는, 연결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할 때, 따라오는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이것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즉, 터치가 먼저이고, 그 후에 거룩함과 영광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특히 개신교인인 우리가 존귀하게 여기고 지켜야 할 교리인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교리는 실존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실존적 관계성, 일종의 신비한 종교적 체험이 은혜와 믿음의 증거라는 것이지요. 만약 이러한 터치를 경험했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뒤로 미뤄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신교인들의 실존주의적 신앙의 능력 없고 고민 없는 삶을 보면서, 개혁파 신학자 바빙크는 로마가톨릭보다도 못한 개신교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러한 한탄을 남겼습니다. “그러한 경건함이 거짓된 원칙–즉,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치가 없다고 즉시 단언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멀리해야 한다. 그러한 판단이 정말로 많은 진리를 담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말하기 전에 개신교의 좋은 교리로 말미암은 의로움보다 가톨릭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이 훨씬 낫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Refomed Ethics 1, 44) 베드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현상인 이유를 창세기 1장과는 다른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것은 우리의 타락과 구원과 성화, 영화라는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조망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벧후 1:3)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베드로의 미래적 설명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신성한(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다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이어서 이를 위해 성도들이 해야 할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꼭 잡았을 때, 어떤 에너지가 전달되어 자동으로 변화되는 만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 자동으로 다른 사람이 되는 공상 영화와도 다릅니다. 베드로의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한 ‘처절한 투쟁’에 가깝습니다. 믿음 안에서 거룩하고 덕스러운 삶을 살고, 옳은 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탐구하며, 지식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절제하고, 절제로 오래 기다리며 인내하며, 인내 속에서도 경건함을 포기하지 않고, 약한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사랑을 더하는 삶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며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쉽게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자랑하며, 서로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종말에 자격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칭찬이며, 상급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형상’이란 이름을 인간을 향해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마치 우리를 미리 의롭다고 칭하시는 ‘칭의’의 은혜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사랑 속에서 우리에게 보증해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우리의 가벼운 이해를 재고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 안에서 책이 나오고 싶다고 꿈틀거리지 않는가?
by Trevin Wax
2024-01-03
나는 적지 않은 야심만만한 작가들로부터 자신 안에서 책이 끓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대체로 그건 한 장(chapter) 정도이다. 그게 아니면 블로그에 올릴 정도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책을 써야 한다고 말할 때도 있다. 누군가가 괜찮은 집필 아이디어를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이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게 당신일 수도 있다. 글쓰기 아이디어 또는 실제 글쓰기에는 뭔가 매력적인 면이 있다. 내 속에 과연 책을 낼 정도로 통찰력 있는 내용이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글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주제로 여러 번 대화를 가졌다. 작가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때로는 출판사 모자를, 또 때로는 작가의 모자를 쓴다. 상황에 따라서 양쪽에 다 참여하기도 하고 또 둘 사이를 오가기도 한다. 나는 글을 쓰는 데에 무슨 과정이 필요한지를 알려준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디어가 책으로 가능할지, 아니면 좋은 칼럼이나 에세이, 블로그 게시물로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돕는다. 쓰기는 읽기에서 시작한다책을 쓰고 출판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시작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새로운 세상은 훌륭한 제안서를 작성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좋은 제안서는 다른 책을 읽는 데에서 시작한다.글쓰기는 읽기에서 시작한다.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의 말이다. “작가의 시간 중 가장 많은 부분은 글을 쓰기 위해 읽는 데 소비된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서 작가라면 도서관의 절반을 뒤집을 것이다.”관심 있는 주제를 충분히 읽고 나면, 책의 개요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안서에 그 내용이 정확하게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책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충분한 콘텐츠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많은 경우에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제안서를 만드는 단계에서 사라진다. 어느 지점에선가 아직 내가 책을 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제안서를 작성하면서 쌓은 경험과 역량은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계속 읽고 계속 고민하라. 플랫폼 질문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책을 쓰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을 쓰고 싶어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가 모르는 사람, 그러니까 전작이 없는 초보 작가의 책을 집어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특히 요즘 들어서 작가들은 대체로 출판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플랫폼 구축이나 신뢰도 구축 등의 노력을 거쳐야 한다. 좋든 싫든 출판사는 수요가 많은 주제를 다루는 플랫폼을 찾기 마련이다. 이것은 초보 작가에게는 가장 낙담스러운 측면일 수 있지만, 글쓰기의 리듬을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좋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글쓰기 습관을 들이는 데에 도움을 주는 블로그나 소셜 미디어에 작품을 게시하기 시작하면서 소규모 청중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다른 작가와 연결을 맺거나 다른 온라인 플랫폼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당신의 동기가 단지 출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여야 한다. 시작하라: 계속하라열망에 찬 작가 지망생들과 대화할 때, 나는 그들의 글쓰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무슨 주제를 파고 드는지 알고 싶다. 그들 속에 과연 좋은 책을 낼 아이디어가 있는지 아니면 최소한 기사거리라도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돕고 싶다. 나는 또한 책을 쓰는 데에 필요한 체력도 알려주고 싶다. 작가 지망생이 내게 블로그나 웹사이트를 시작하는 방법이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간단한 생각을 게시하는 방법에 대해 물으면, 나는 다음과 같은 조언으로 대답한다. 시작하기 전 첫 달을 계획하라. 일주일에 세 번 글을 쓰고 싶다면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하라. 블로그의 경우 매주 2-3편의 글을 써서 첫 달에 9-12편의 게시물을 만든다. 웹사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게시물을 작성하고 일단 초안을 준비해 놓으라. 다른 사이트의 경우 장기적으로 하고 쓰고 싶은 주제와 관련해서 최소한 15-20편의 글을 준비하라. 그러나 실제로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사람의 수는 한 손에 꼽힐 정도이다. 대부분은 첫 달에 10-12편이 아니라 괜찮은 글 두어 편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싣는 정도이다. 종종 작가들은 큰 프로젝트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 블로그를 작성하고 싶어 한다. 아니면 심지어 몇 달 안에 책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1-2 마일 달리기를 시도하기도 전에 마라톤을 뛰겠다는 목표를 세운 초보 주자들처럼 일을 시작한다. 글쓰기도 똑같다. 뛰기 전에 먼저 걸어야 한다. 잘 쓰려면 먼저 못 쓴 글이 쌓여야 한다. 그리고 많이 써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 글쓰기의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야 한다.현실을 직시하자. 대부분의 경우에 글쓰기는 힘든 일이다. 게시물에 별 다른 반응이 없으면 낙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하라.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요점은 청중의 반응이 아니라 훈련 내지 규율이라는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작가로서 당신이 스스로에게 어떤 습관을 들이는가이다. 요점은 입소문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잘못된 글도 그럴 수 있음), 기술을 키우는 것이다. 이는 마라톤 뛰는 것과 같다. 여러 개의 작은 목표를 먼저 달성하지 않고는 큰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더 많이 연습하고 더 나은 기술을 향상시켜야 한다. 노력할수록 더 나은 작가가 될 것이다. 배움을 활용하라아무도 당신에게 글쓰기 속도를 지정할 수는 없다. 글을 빨리 쓰는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항상 더 나은 사람을 찾아서 비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글쓰기 빈도 또는 길이에서 동일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규격화하지 말라. 어떤 작가는 알렉산더 해밀턴(“왜 항상 시간이 부족한 것처럼 글을 쓰는가?”)과 같은 반면, 또 다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작해야 한두 가지를 기여하는 게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꾸준히 글을 씀으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작가가 되기를 갈망하는가? 내 충고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관심 갖고 있는 주제에 관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읽으라. (2) 당신의 글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도 자주 쓰라. (3) 각 장의 개요와 요약, 같은 분야의 다른 책에 대한 소개를 포함하여 완전한 제안서를 만들라. 당신이 발견한 내용이 당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한번 지켜보라. 계속해서 기술을 연마하라. 그리고 기억하라. 글쓰기는 학습이다. 멈추면 안 된다. 원제: Is There a Book in You?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남은 권위마저…
by 전재훈
2024-01-02
예전에 독서 모임을 할 때였습니다. 그 모임을 이끌어 주시던 분이 중년의 아주머니셨습니다. 직업이 논술학원 원장님이십니다. 학원을 운영하기 전에는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합니다. 그 원장님께 제가 “학교 교사를 하시다가 학원을 하시니까 무엇이 제일 좋으세요?”하고 여쭤봤습니다. 원장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대답하셨습니다. “아이들을 가려 받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학교 교사를 할 때는 아이들이 맘에 안 들어도 내보내지 못하고 일 년은 끌어안고 있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힘드셨답니다. 학원을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학원에서는 실력이 있는 아이들만 모집할 수도 있고, 맘에 안 드는 학생이나 말썽을 피우거나 사고를 치는 학생은 학원에 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서 너무 좋으시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야단치고 화내고 하는 일이 많았어요. 아무리 잘 가르치고 싶어도 따라오지 못하는 몇 명 때문에 더 많은 걸 가르칠 수도 없었고요. 그런데 학원을 하니까 쓸데없이 감정을 낭비하지 않아서 너무 좋아요. 마음껏 가르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그러나 제일 좋은 것은 교사로서 권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맘에 안 들면 내보낼 수 있으니, 아이들에게 제 말이 먹힙니다.” ‘군사부일체’라며, 선생님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했을 만큼 선생님에게 권위가 있던 시절이 있었지요. 한 동네에 배운 사람이 별로 많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내 아이를 나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은 존경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잘못하면 아버지도 아이의 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아이들은 스승님께 함부로 대들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스승의 권위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인지 ‘스승의 은혜’를 부르다 보면 자꾸 ‘어버이 은혜’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권위는 학부모들의 학력이 높아지면서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학력의 학부모들이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으니, 아이들도 선생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해서 선생님에게 맞기라도 하면 학부모가 찾아와서 항의하는 시대이니 선생님의 권위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만 갑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들을 체벌하는 것조차 금지되면서부터는 선생님들의 의지도 점점 없어지고 아이들도 선생님 말씀을 따르려고도 하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가 된 것입니다.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라도 선생님들의 권위를 세워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점차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제도가 상벌 제도입니다. 직접 체벌은 금하고 상점이나 벌점을 주어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점점 전문인으로 육성하여 특정 분야의 권위자가 될 수 있게 하려고도 합니다. 선생님의 최종학력이 점점 높아져 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목사의 권위도 교사의 권위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목사님의 권위는 선생님의 권위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님보다 더 많이 배웠고 인품도 더 훌륭해 보였지요. 실제로 부모님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목사님께 가져가면 척척 해결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작게는 글을 모르는 분들에게 편지를 읽어주거나 읍사무소에 함께 가는 일부터 크게는 아이들 결혼식에서 부모님 장례식까지 목사님께서 척척 해결해 주시니 그 권위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목회는 권위주의로 할 수 있었지요. 권위주의로 목회하던 시절의 가장 큰 장점을 뽑자면 성도들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가 수월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교황처럼 ‘우리 목사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아’ 하던 시절은 이단이 함부로 교인을 미혹해 갈 수 없었지요.그러나 목사의 권위도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학력 수준도 높아졌고 목사님께 말해서 해결될 일도 별로 없어지고 있습니다. 신학교는 점점 대학 갈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학교로 인식되어 버렸습니다. 이른바 “비인가 신학교”가 난립하면서 오히려 성도보다 무식하고 무능한 목사들이 많아지고 말았지요. 더불어 일반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목사님들이 많아지면서 목사님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클릭이나 터치 한 번으로 더 좋은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시대이니 우리 목사님의 권위에 순종해야 할 이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더하여 포스트모더니즘도 한몫 거들었지요.목사의 권위가 사라지면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교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교회를 옮길 수 있고 그렇게 옮겨간 이들을 다른 교회들이 환영해 주었습니다. 제자훈련과 큐티가 오히려 성도들의 마음에 또 다른 자만심을 심어 주게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와 내 큐티가 다르면 목사님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는 이단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호와증인이 와서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서 유혹하는 말에 홀랑 넘어가고, 제칠일안식교인이 와서 성경을 들이밀며 ‘안식일은 주일이 아니고 토요일이다’라고 말하면 또 홀라당 넘어가 버립니다. 이제는 대놓고 성경공부하자면서 교인들을 빼가는 시대가 되어서 교회마다 ‘신천지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경고문까지 붙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목사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생겨나는 또 다른 폐단은 그 권위를 세워보겠다고 무리수를 두며 거짓 학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미국에 한 달 다녀와서 박사 학위 받았다고 하는 목사님들이 참 많았습니다. 목사 가운인지 박사 가운인지 헷갈리는 정체불명의 가운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영어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박사가 목사 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권위가 세워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대상이 되고 말았지요.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권위를 세워보겠다고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이 난무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성령 집회를 한답시고 안수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술 담배 안 하는 것이 뭐 대단한 것이라고 그것으로 교인들을 죄인 취급하기도 했고요. 심지어는 임파테이션이라는 것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베드로처럼 수건만으로도 병을 고친다고 하고 금가루를 떨어지게 한다고도 하고 아말감을 금니로 바꾼다고 생난리를 쳤습니다. 목사의 권위에 도전하면 나병이 생긴다면서 협박도 서슴지 않습니다. 목사님 돈 떼먹고 죽었다는 성도 이야기나 목사님께 대들고 사업이 망했다느니 불치병에 걸렸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참 많이 들었습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목사의 권위를 세워보겠다는 대부분의 시도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최근 교황의 권위를 등에 업은 천주교는 급성장하고 있고 불교도 유명 스님들의 대중적 인기와 더불어 꽤 성장하고 있습니다만, 기독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그룹이 목사 그룹이 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었지요.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기독교는 그야말로 “개독교”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권위논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입성하시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군중의 환영을 받고 입성하신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어 쫓으셨지요. 그리고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 모든 일은 당시 권위를 독점하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성전에 들어가 이제는 가르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도대체 무슨 권위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는지 따져 묻기에 이릅니다. 말하자면, 교사 자격증이 있냐는 것이지요. 당시에는 공인된 랍비만이 성전에서 가르칠 수 있었거든요. 이 권위논쟁은 예수님을 고발할 수 있는 좋은 흉계가 됩니다.예수님은 권위논쟁에서 세례 요한의 권위를 근거로 저들의 흉계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 아들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큰아들은 대답만 하고 순종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 하고 나중에 순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권위는 순종과 관계된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케 하지요. 즉 하늘로서 받은 권위라도 순종하는 자에게나 그 권위가 통한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권위논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뒤에 두 개의 비유가 더 등장합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의 공통점은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진멸한다는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징계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에 대해 답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마 21:27) 하셨습니다. 뒤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예수님의 권위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권위가 어떤 것인지 설명한 것입니다. 즉 권위는 순종을 기반으로 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징계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논쟁을 이해하려면 좀 더 넓은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권위논쟁에 앞서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이 일어납니다. 마가의 기록을 참조하면 성전에 들어가기 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사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오다가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게 되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마 21:21-22)이 말씀은 기도할 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기도는 믿고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받은 줄로 믿고 미리 헌금을 한다고 해서 ‘선불집사’라는 희한한 단어까지 등장했었지요. 한국 교회이기에 가능한 코미디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성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를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며 성도를 정죄하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산 옮기기 기도로 믿음 테스트를 하면 과연 누가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말들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화과나무 저주에서 나오는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는 말씀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성전이 있던 시온산더러 들려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해 바다에 던져지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이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거든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하신 것처럼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시온산을 심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심판하실 수 있는 그 시온산에서 재판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들’ 중에 시온산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던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권위로 징벌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손에 죽으시면서 그들을 위한 변호를 하셨습니다. ‘악함’ 때문이 아닌 ‘알지 못함’ 때문이니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권위는 하늘로부터 부여된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에 바람과 파도가 순종했고 군대 귀신도 꼼작 못했습니다. 때가 되지 않아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도 그 권위에 순종합니다. 말씀 한마디로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놀라운 권세를 가진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권위로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들을 불러 시온산을 불바다로 만드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 권위논쟁을 벌이던 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이고 아들마저 죽인 이들을 포도원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저들은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마 21:41)라고 답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권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악한 농부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왕의 혼인 잔치를 비유로 다시 권위를 설명하십니다. 왕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게 왕은 그의 권위로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마 22:7)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복을 입지 않아도 손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지게 됩니다. 권위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저들의 권위논쟁에서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이 보내신 권위임을 말씀하셨다면 저들의 결말은 ‘진멸당함’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스스로 권위 없는 자가 되어 권위 있다는 자들의 손에 붙들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저들이 당해야 할 ‘진멸당함’을 본인이 대신 당하셨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아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이 쓰신 거룩한 두 돌판을 깨뜨립니다. 비록 그 일로 다시 40일을 금식하며 십계명을 다시 받아 와야 하는 수고로움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깨지 않았다면 우상숭배한 이스라엘은 그 돌판에 쓰인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에 의거해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모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온유함이 승하신 분이십니다. 물론 권위도 훨씬 더 크신 분이셨지요. 예수님이 권위논쟁에서 답을 회피하신 이유가 바로 그 권위 앞에 진멸당할 저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권위를 앞세우면 저들은 심판의 대상이지만 사랑을 앞세우면 저들은 ‘변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탈권위의 시대입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보다 친구같은 아버지가 대세입니다. 선생님들도 권위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아이들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분이 존경받는 시대입니다. 교황도 예전의 알던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스스로를 낮춰 아기들하고도 눈높이를 맞춤으로써 존경을 받고 있고, 스님들도 절에만 머무르기보다 법륜스님처럼 산에서 내려와 즉문즉설을 하며 민초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권위를 내세우면 시대를 역행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한국 기독교가 권위를 세우려다 도리어 망한 케이스입니다. 권위는 스스로 내려놓기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에 새로운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어차피 땅에 떨어진 권위입니다. 누더기가 된 권위를 다시 주워 입으려 하지 말고 이참에 예수님을 본받아 조금이라도 남은 권위마저 내려놓고 성도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살 길입니다.
개미가 지혜를 지고 나른다
by 필립 정
2023-12-30
올해 4월경, 광화문에 있는 큰 서점에 책을 사러 간 적이 있다. 베스트 셀러를 진열해 놓은 곳에 자기 계발, 인간 관계론, 주식 투자, 토익, 경제 서적들이 뒤덮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 인문학 책 진열대에 갔더니 ‘니체의 말’ 번역본과 니체의 다른 책들이 압도적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냥 서점을 나와 벚꽃이 휘날리는 경복궁을 걸으며 한참 생각해 보았다. 자기 계발, 돈과 니체의 책들의 조화가 수상해 이들의 접점을 찾으려고 머리를 쥐어짜 보았다. 얼마 안 가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한국 청년들의 마음이 현재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사실 내가 현재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선택의 문제는 계속 꼬리를 물고 나를 붙잡고 늘어져 과거까지 끌고 간다. 한번 과거의 선택이 잘못되면 현재의 삶이 뒤틀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삶에서 경험된 지식이 충분히 쌓여야만 현재의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고 미래를 보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판단력, 통찰력, 결정 능력을 성경도 세상도 지혜라 부른다. 단지 성경이 말하는 지혜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와 그 출발점이 다르다. 그 출발점이 다르니 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모든 지식과 지혜가 시작된다고 한다(잠언 1:7). 경외란 하나님을 알아 가며 그의 능력에 탄복하여 존경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뜻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쌓인 놀라운 경험이 지식이고 이에서 생긴 통찰력으로 현안을 해결하며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판단력을 지혜라 부른다. 오늘 소개할 개미 선생님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가 어떤 것인지 좋은 예로 증언해 주고 있다. 개미가 인간의 스승이란다. 흥미롭지 않은가!게으른 자는 누구일까?잠언 기자는 잠언 6:6에서 게으른 자에게 “개미에게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며 나무란다. 그런데 저자는 게으른 자를 지혜가 없는 자라고 단정해 버린다. 왜 그런지 이유가 다음에 나와 있다. 이 게으른 자가 지혜 없는 자의 전형인 인격적 결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개미는 두령도, 감독도 통치자가 없어도 일하는데…(잠언 6:7)” “너는 언제까지 눕고 언제 일어나서 일하러 가겠느냐”(잠언 6:9)라고 한다. 이에 게으른 자의 반응이 매우 반항적이다. “나는 좀 더 자겠다. 졸겠다. 좀 더 누워 있겠다”(잠언 6:10)며 무시해 버린다. 저항, 반항, 분노의 모습이 여실히 그려진다.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언 1:7)는 말씀이 여기서 떠오른다.굳이 멀리서 이런 게으른 자의 예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철없던 어린 시절이 그려지지 않는가! “내 인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마세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외치며 이불을 뒤집어 쓰는 철없던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어느 날 후회를 할 모습이 여실히 그려지는 지혜 없는 자 즉 게으른 자의 전형을 여기서 보여 주고 있다.개미의 지혜개미는 게으른 자가 배워야 할 지혜로운 대상으로 묘사된다. 잠언 6장의 개미의 지혜에 묘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세밀해서 두려울 정도다. 하나님을 알면 그에 대한 탄성과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왜 개미가 지혜롭다고 할까? 잠언 저자는 개미가 두령, 감독자, 통치자가 없이도 먹을 것을 위해 여름 동안에 예비하여 추수 때에 양식을 모은다(잠언 6:7, 8)며 개미의 자발적인 미래 대비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개미의 이 대비 능력은 그냥 말 한마디하고 지나갈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한마디 뒤에 첩첩이 쌓인 무수한 개미들의 지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우선 개미들에게 두령, 감독자, 통치자가 없다는 말씀에 주목해 보자. 사실 이 말씀은 과학적 사실과 맞지 않아 보인다. 분명 개미 사회는 여왕개미가 최정점에 있고 이들의 페르몬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왕개미는 페르몬을 뿌려 다른 암컷들인 일개미들의 생식 활동을 통제하고 혼자 자손 번식 활동을 도맡아 한다. 수명도 여타 개미들보다 10배 정도 길고 몸집도 거대해 생산 활동에 적합하다. 그래서 여왕개미가 사라지면 생산이 멈춰진 개미 사회는 급격히 무너져 버린다. 개미들의 생과 사가 여왕개미의 존재 여부에 따라 결정되니 여왕개미를 최고 권력자라고 보기 쉽다. 그러나 여왕개미를 인간 사회의 왕이나 통치자로 보면 개미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여왕개미는 생산 활동 이외 어떤 힘도 없고 통치할 권력도 갖고 있지 않다. 다른 암컷 일개미들이 콜로니를 벗어나 몰래 알을 낳으려는 것을 저지할 수도 없고 알을 못 낳을 정도로 병이 들거나 노쇠하면 일개미들에게 끌려가 굴 밖으로 버림을 받는 신세로 무력하니 여왕개미는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95퍼센트가 넘는 일개미들이 여왕개미가 낳은 알을 돌보고 새끼들을 먹이고 전쟁이 나면 나가서 싸우기도 한다. 혼내거나 책망해도 일하지 않는 고집 세고 저항적인 게으른 자들과는 전혀 다르다.잠언 6장의 기자인 솔로몬은 이 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있다. 솔로몬은 자신이 비록 왕이지만 자신의 힘이나 권력이 게으른 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게으른 자들이 개미 조직의 일 개미들처럼 스스로 움직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사실 개미의 자발적 분업 사회에 대해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중반에 들어서야 진화론적 관점에서 개미들의 사회적 분업의 발달에 관심을 갖고 생식 계급과 비생식 계급으로 나누고 어떻게 이들이 서로의 갈등을 이겨내고 진화해 왔는지 연구하였다. 개미가 만 이천 종이 넘어 어떤 보편적이고 일관된 질서를 찾기가 어렵지만 개미 사회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서로 돕는 역할로 진화해 왔다고 연구 결과를 내었다. 이 진화론적 관점의 연구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솔로몬은 이것을 이미 3천년 전에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왕이지만 권력 없는 여왕 개미처럼 힘으로 눌러 억지로 일하게 만들 수 없음을 알고 개미의 자발성에 눈을 뜨도록 게으른 자들에게 책망과 동기 부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종적인 지시 체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돕는 개미 같은 횡적 조직 체계에 솔로몬이 이미 눈뜨고 있는 것 같다.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솔로몬이 여왕개미의 존재나 특성에 대해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어떤 미물의 조직이라도 통치 체계가 존재하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데, 솔로몬이 개미의 두령이 없다고 전제하는 것은 개미의 자발적 협력 체계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 분명하다. 솔로몬은 개미의 자발성을 보고 하나님의 창조에 감탄하여 인간 사회도 개미 사회 같아야 한다고 보고 좋은 예를 제시하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왕정 시대에 자기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움직여 일하는 유기적 체제를 꿈꾸고 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왜 일개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 알아볼 차례다. 단지 성경대로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일까? 그 이상의 지혜가 숨어 있다. 왜 개미들은 자기의 자식도 아닌 여왕과 그 후손들을 위해 일하고 협력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실 찰스 다윈도 이 점을 매우 궁금해했다. 대부분 개미의 병사 계급은 나이 많은 일개미이다. 평생 생산 활동에 참여해 보지 못한 늙은 처녀개미가 자기 자식이 아닌 여왕개미와 그 자식을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운다. 다른 일개미들도 역할만 다를 뿐 여왕과 그 자손을 위해 먹이를 구하러 다니거나 건축을 하는 등 다양한 일을 몸 바쳐 한다. 다윈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타적인 동물이 소멸하지 않고 매우 성공적으로 진화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솔로몬이 하필이면 다른 동물이 아닌 개미에게 배우라고 한 것은 이런 개미들의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헌신 때문으로 보인다. 개미는 이 이타성을 빼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개미의 이타성의 비밀은 유전자 연구가 활성화 된 현대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인간은 남녀 모두 염색체 한 쌍을 갖고 있는 이배체의 동물이다. 개미의 암컷 역시 이배체이다. 그러나 개미의 수컷은 염색체 한 벌만 갖고 있는 반수체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형제자매간 유전자의 1/2을 갖고 있지만 개미는 형제자매 간에 유전자의 3/4을 공유한다. 그러니 자기를 더 많이 닮은 형제자매의 번성을 위해 자기들의 생산 활동을 포기하고 자기의 어머니인 여왕과 여왕의 자식이자 일개미들의 형제자매를 위해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보다 훨씬 이타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 조직 사회를 유지해 나간다. 그래서 동물 학자들은 모두 개미를 지구에서 가장 성공한 동물이라고 인정하고 있다.솔로몬의 개미에게 가서 그의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말씀은 이런 개미의 공동체적 특성을 가르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게으른 자들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좀더 눕자”고 저항하며 솔로몬을 무시해 버린다. 이 게으른 자들의 태도는 그들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 결과는 무섭게 나타난다.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궁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언 6:11). 미래에 대해 아무런 준비 없이 살다가 강도와 적군같이 예고 없이 찾아온 궁핍에 무너져 버리는 인생의 비극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게으른 자들의 선택은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자신들을 기대하고 있는 공동체조차도 무너뜨린다. 솔로몬의 권면의 당사자인 르호보암이 그 좋은 예이다. 솔로몬의 사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과 그를 따르는 참모들은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없었다. 그저 세제를 더 강화하고 부역의 짐을 백성에게 가중시켜 집권층의 이익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반란으로 국가의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사회적 약자와 공동체를 위하며 섬기는 마음이 그들에게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은 북쪽의 10지파를 르호보암에게서 빼앗아 가셨다. 솔로몬의 경고가 그의 게으른 자식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게으른 자들은 이렇게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어버렸다.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선택하라우리의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조금 더 분명히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좌우된다. 하나님의 통치와 솜씨에 놀라고 경탄하며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이고 이를 우리의 삶에 하나둘 적용하면 통찰력과 판단력, 실천하는 능력, 즉 지혜가 자라나 우리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지나치게 염려하여 두려움에 싸이면 맘몬 신앙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 대형 서점에 수없이 진열된 자기 계발 서적, 주식, 코인 투자 안내서, 니체의 책들은 여실히 미래에 대해 열심히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보여 준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지 내가 사는 이 미국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들의 고군분투 속에서 엄청난 부담감과 염려와 공포에 눌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삶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지나치면 그것들이 우리를 사로잡아 지배해버린다. 이는 신앙과 같다. 마태복음 6:24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말씀하며, 주님이 하나만 선택하라고 지혜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재물에 대한 두려움과 지나친 염려는 하나님을 중히 여기지 않는 불신앙이니 여기서 떠나라는 것이다.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현대인들이 니체에 열광하는 이유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신의 부재에 공포를 느끼며 그 부재를 극복하려고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고 스스로에 열광하는 광적인 태도가 아니면 이 불안한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하지 않음에서 오는 공허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초인적 자기 극복이 현대의 뉴 노멀 시대를 겪는 공포와 많이 닮았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그 공포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압도되면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느끼는 내 존재의 무익함은 니체의 공허와 다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지식으로 채워지면 거기에서 오는 통찰력과 판단력의 지혜가 나를 인도하여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문제들은 풀기가 어렵고 답이 없다.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삶의 고통이 내 능력 위에 있다고 인정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그를 경험하여 얻은 지식만이 세상을 이기는 참 지식이다. 이 지식은 일개미들처럼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의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때 지혜로 실현된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결단하고 선택을 해야 미래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한번에 건너 뛰려 하지 말고 말씀 한 구절을, 삶의 한 찰나에 적용하면 언젠가 이런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날을 기대하며 꿈꾸기를 원한다.나는 이 글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앞길이 안 보여 절망하는 한국 청년들에게 오해되어 읽히거나 그들에게 잔소리 조의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의 설교 인용 도구로 쓰이지 않기를 바란다. 주를 깊이 의지하고 경험하여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가 충만한 목회자들의 손에 들려 지치고 힘든 한국의 청년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혜의 왕으로 오신 주가 탄생하신 날을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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