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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또는 매장, 이 결정이 중요한 이유는
by Justin Dillehay
2024-01-31
과거에 화장할까 매장할까를 놓고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었다. 그리스도인에게 매장은 표준이었고, 따라서 “기독교식 매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스도인에게 화장은 고작해야 바이킹이 나오는 이야기에서나 만나는 먼 나라 내용이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상황이 바뀌었다. 화장이 보다 더 일반화되었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조금씩 사라졌다. 이제는 매장보다 화장이 더 일반적인 나라가 적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중에도 아예 처음부터 화장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화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은 목사로서 내가 종종 받기에 충분히 생각할 가치가 있다.내 주장은 “기독교식 매장”이 잘못된 명칭이 아니라 적절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시신이 화장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활시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하나님에게 매우 쉬운 일이다.) 그리고 화장이 성경의 명확한 명령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적 관행이 기독교 신학과 잘 맞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나는 매장이 인간의 몸과 그 미래에 관한 성경적 선례, 성경적 이미지, 그리고 성경적 신학을 더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행위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매장은 절망적인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주는 희망을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죽음이 주는 슬픔 안에서 기쁨을 찾는 방법으로서 회복할 가치가 있는 관행이다. 바른 질문을 하라성경에 화장에 대한 도덕적 금지 조항은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많은 예가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화장한 예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라헬, 요셉, 미리암, 모세, 다윗, 엘리사, 세례 요한, 스데반, 그리고 가장 유명한 매장 사례로는 그리스도의 시신이다(창 25:10; 35:19, 29; 49:31; 50:14, 민 20:1, 신 34:6, 여 24:32, 왕상 2:10, 왕하 13:20, 막 6:29, 행 8:2, 고전 1:31; 15:4).왜 그런지 물어볼 가치가 있다. 얼마든지 다른 옵션도 있었다. 스테판 프로테로는 “이집트인, 중국인, 히브리인을 제외하면 화장은 고대인의 표준 관행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매장이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하나님 백성의 표준 관행이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일까?매장 패턴은 정경이 완성되었다고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매장이 화장을 대체했다는 게 역사의 증명이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지배적이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문화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화장이 부활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인구 증가와 장례 비용 증가도 한몫했다.) 하지만 왜?반문화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이 역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항상 지배적인 관습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몸에 대한 유대-기독교의 믿음과 유대-기독교의 매장 관습 사이에 어떤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어서가 아닐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몸과 미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죽고 나서조차 그 몸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종교들이 바라보는 몸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는 화장한다. 인도나 네팔과 같은 곳에서는 화장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힌두교인이 환생과 몸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다. 한 힌두교 웹사이트에 따르면, “죽은 후에 인간의 외양, 즉 육체는 아무 소용이 없다. 따라서 영혼을 해방시키고 환생 과정을 돕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몸을 태우는 것이다”라고 한다. 육체와 내세에 대한 힌두교의 믿음과 죽음을 둘러싼 힌두교의 문화적 관습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다. 이건 놀랍지 않다. 육체를 영혼의 껍데기나 감옥으로 여기는 종교도 적지 않다. 이런 시각이 반드시 매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건 분명하다. 탈출한 감옥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행 17:32). 반면에, 매장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 다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매장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드러난다.)종교는 문화의 일부이며 문화적 신념은 문화적 관행에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가 바라보는 몸기독교는 이 점에서 힌두교와 매우 다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영혼 불멸뿐 아니라 육체의 부활도 믿는다. 다른 많은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의 육체와 창조 전반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았다”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창 1-2 참조). 이것이 기본적인 기독교의 시각이다. 물리적 창조와 인간의 몸은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결과이다. 이는 또한 인간에 대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 교리의 일부이다. 인간으로서 당신은 몸을 가진 영혼 또는 영혼이 있는 몸으로 묘사될 수 있다. 두 요소 모두 중요하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 죽음의 정의이다(약 2:26).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몸이 단지 “진짜 나”를 만드는 영혼을 싸고 있는 껍질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몸은 인간이 인간이 되도록 하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아비가일 파페일이 말했듯이,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다. 신체는 겉으로 드러난 사람 자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전이 된 5세기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에 대해 썼고, 그는 죽은 사람을 돌보는 방법에 이를 적용했다.아버지가 입던 옷, 아버지의 반지, 그리고 그의 모든 물건이 아버지가 베푼 사랑을 고려할 때 자식에게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가지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육신은 얼마나 더 잘 보살펴야 하겠는가? 평생 입었던 육신을 어떻게 옷과 비교할 수 있을까? 몸은 단지 외적 장식이나 보조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이 죽음으로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몸을 부활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신 이유이다. 예수님이 매장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자를 썩음을 당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제 삼일에 살리실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행 2:27, 고전 15:4).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그리스도인 대부분도 부활하기 전에 부패를 겪겠지만, 우리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 8:11; 참조 고전 15:51-55).힌두교 신학이 그들의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초기 기독교 신학도 교회의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미쳤다고 신학자 티모시 조지는 지적한다. “로마의 카타콤이 증명하듯이 초기 그리스도인은 매장을 고집했다. 그리스도인의 묘지는 코에메테리아(coemeteria)라고 불렸는데, 문자적으로는 ‘잠자는 곳’을 의미한다. 곧, 미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간단히 말해서, 인체의 본질적인 선함과 미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근본이다. 따라서 그것이 사후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문화적 관행을 형성했다는 건 조금도 놀랄 일이 아이다. 바른 신호를 보내라그리스도인이 최근까지 거의 보편적으로 매장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문화 추세를 단순히 따르기 전에 잠시 멈춰서 생각해야 한다. 죽음의 의식은 문화적, 신학적 공백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화장하는 요즘의 추세가 과연 바람직할까? 더 중요한 것은 (성경과 그 이후 모두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적 관행을 고려할 때,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매장 사이의 자연적 적합성이 매장이라는 보편적 관행을 제대로 설명하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러셀 무어가 말했듯이, “문제는 단지 화장이 죄인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다, … 진짜 문제는 장례가 과연 기독교적 행위로 이뤄지는지의 여부이며, 따라서 장례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이다.” 무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생각한다. 장례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이며, 약함으로 뿌려진 것이 언젠가는 능력 있게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전달한다(고전 15:42-43). 부활에 관한 모든 구절 중 가장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땅에 심어진 씨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몸으로 옵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밀이든지 그 밖에 어떤 곡식이든지, 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고전 15:35-37)시신을 묻는 것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둘 다 땅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땅에서 나오는 것이 둘 다 생물학적으로 연속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차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상태로 다시 나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서 동일한 비유를 사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2:24).이 말씀은 죽은 자를 매장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으로서의 부활과 기독교 관습으로서의 매장 사이의 자연적 적합성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이 담긴 지침이라는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농업이든 장례식이든 매장은 최종 행위가 아니라 시작 행위이다. 단순한 끝이 아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교 문화 속에서 우리가 활용해야 할 기회이다. 그리스도인의 매장은 단순히 주검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는다. 추수를 바라며 씨를 뿌리듯, 우리는 부활을 바라며 장사를 치른다. 기독교식 매장을 다시 주장하며나는 무어의 이 말에 동의한다. “기독교 목사로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성도 중 일부가 화장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거기에 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변의 다른 문화처럼 우리는 죽음과 매장조차도 단지 개인 취향에 따른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사람은 바다에 홀로 뜬 섬이 아니며,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장례식은 항상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책임이 개인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실용주의적이고, 비역사적인, 그리고 문화적 조류에 휩쓸리는 미국의 개인주의자로서 치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경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장례라는 엄숙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 화장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돈 문제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묻어주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을 향해서 나는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단지 입에 발린 동정은 가치가 없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이것이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가 여전히 장례를 기독교적 행위로 믿는다면, 우리는 중요한 곳에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 경제적 이유로 매장을 하지 못하는 교인에게 교회가 나서서 재정적 지원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앞에서 나는 몸에 대한 기독교 신앙과 역사적인 기독교 매장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가 화장을 선택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서 화장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나의 소망은 미래 지향적이다. 사랑하는 사람,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장례를 논의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어서이다. 매장은 성경의 사례, 성경의 비유, 그리고 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가 점점 더 이교화될수록, 우리도 점점 더 반문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매장 문화를 되찾자. 그리고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크게 외치자,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원제: Cremation or Burial: Does Our Choice Matt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쀼’의 세계
by 양혜원
2024-01-30
커플 걱정하는 거 아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헤어진다느니, 더는 같이 못 살겠다느니, 남친이나 남편에 대한 불평과 하소연을 잔뜩 늘어놓던 친구의 말을 기껏 들어주고 위로해 줬더니, 불과 며칠 후 헤헤거리며 다시 짝꿍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본 싱글들이 만들어 낸 말이지 싶다. 자식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 흉을 잔뜩 보는 어머니에게 맞장구를 칠라 하면 이내 아버지 두둔을 하고 나서는 어머니를 보며, 그들의 세계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보다 하는 어느 작가의 감상을 읽은 적이 있다. 문득, 지난 12월, 선배 언니 아들의 결혼식에서 본 광경이 떠오른다. 16년 전, 유방암 4기 진단을 받고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이 대학 가는 거까지라도 보고 싶다고 하던 언니가, 계속 항암 치료를 받으며 암과 동거하는 생활을 해오던 중에 그 아들이 대학도 가고,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니, 가지 않을 수 없는 결혼식이었다. 곱게 한복을 입고 혼주 차림을 한 언니를 보고 괜한 감동에 울컥 눈물이 나서 급하게 인사를 하고 화장실로 뛰어가 감정을 추스르고 식장에 들어갔다. 이 뜻깊은 결혼식을 제대로 보고 싶어 가장 잘 보이는 좌석을 찾는데, 마침 혼주 하객 테이블이 단상 바로 가까이라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테이블에는 혼주 중에서도 아버지 쪽, 그러니까 선배 언니 남편의 지인들이 나머지 자리를 채우는 바람에 실로 오랜만에 홍일점으로 앉아 식사를 하며 식을 지켜보았다. 육칠십 대는 되어 보이는 이 혼주 쪽 지인들은 서로들도 아는 사이인 듯,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그중 한 사람이 “저는 오늘 김장하는 날이라 좀 일찍 들어가 봐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귀가 쫑긋해졌다. 김장은 여자들의 일이고, 남자는 집에 있어봤자 걸리적거리는 존재라 집을 비워주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되는 게 오랜 가부장제 문화의 패턴인 줄 알았는데, 나이 지긋한 분이 김장 때문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니 신선했다. 그러자 그 옆에 앉은 분이, “우리는 어제 했어요. 거기도 절인 배추 사서 하세요? 그걸로 하니까 훨씬 편해요.” 이런다. 아,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은퇴한 중산층 남자들의 대화란 말인가. 부부 관계의 신풍속도를 보는 듯했다.선배 언니의 남편은 운동권 출신이라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 지인들의 대화 중에 누가 옛날에 감옥 갔다 와서 어쨌고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강남의 부잣집 딸이었던 언니는 가진 거 하나 없는 시골 출신 운동권 남자에게 반해서 결혼을 했고, 그 후에 적잖이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언니가 덜컥 암에 걸리자, 집안일 한번 안 해본 남편이 살림과 간병에 뛰어들었고, 그동안 고생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앞서는 마음과 서투른 일처리에 못 따라오는 몸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도 있었다고 들었다.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어도, 언니는 그런대로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고, 아픈 와중에도 정말 같이 못 살겠다 싶은 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부부로 지내고 있다. (언니는 아직도 항암 중이다.) 2023년이 이런 이야기로 그럭저럭 훈훈하게 마무리 되어가던 무렵 또 다른 선배 언니가 암에 걸린 것 같다며 전화를 해 왔다. 기침이 생각보다 오래가서 병원을 찾았다가 덜컥 폐암 4기일지도 모르니 얼른 검사를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마침 언니랑 아는 후배 하나랑 같이 셋이서 여행을 가기로 한 바로 전날이었다. 우리는 깜짝 놀라 서둘러 예약한 숙소와 기차를 취소하려는데, 언니가 호기롭게, 어차피 지금 아픈 거도 아니고 검사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약 일까지 기다려야 하니 그냥 여행을 가자고 고집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워하면서도 같이 길을 나섰다. 정말 암이라면 치료하는 동안 여행은 힘들 테니 갈 수 있을 때 가자는 심산도 있었던 것 같다. 푸짐한 저녁과 뜨끈한 온천으로 몸과 마음이 노곤해진 우리는 언니로부터 평소 듣지 못했던 이야기도 들으면서 하룻밤을 보내고 왔다. 그 후 언니는 다행히 폐암은 아니지만 역시 암은 암인 것이 밝혀져 항암 치료를 시작했고, 커플이 아니었기에 남편 대신 요양병원의 간호를 받으며 나한테 전화해서, 여기 아주 편하고 좋다, 라면서 만족스러워했다. (이 언니도 계속 항암 중이다.) 그리고 해를 넘겨 2024년 첫 주에, 어머니도 갑자기 암 진단을 받으셨다. 예후가 아주 좋지 않은 뇌 쪽의 림프종으로, 진단이 나왔을 때는 이미 종양과 부종이 오른쪽 뇌를 가득 채운 후였다. 그렇게 갑자기 발현되고 확산이 매우 빠른 암이라 일주일 전과 후의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어머니는 기저 질환이 없으셔서, 몸에 이상이 생겨도 혈압약을 드시는 아버지 쪽일 거라 생각했지, 어머니가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괜히 항암으로 고생만 하시다 가는 것 아닐까, 다른 선택지를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이대로면 일주일 안으로 돌아가신다는 의사의 말에 급하게 항암이 시작되었다. 뇌에 종양이 생긴 어머니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시기도 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도 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착잡했고,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힘들어하셨다. 아버지는 자상하고는 거리가 먼 분이었고, 어머니가 한 번씩 나랑 길게 통화할 때는 주로 아버지에 대한 불평일 때가 많았다. 정말 이제는 같이 못살겠다는 말씀도 제법 진심을 담아 여러 번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진지하게 들어드렸고, 정말 심각한 갈등이면 그냥 헤어지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도 해 보았다. 40대 때만 해도 부모님이 헤어지시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50대가 되고 나니, 뭐, 그리 큰일도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쓸데없는 커플 걱정이었다. 코로나 이후의 병원 규정 때문에, 어머니 옆에는 한 명의 지정 간병인만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버지가 간병을 고집하셨다. 그러나 돌봄 노동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간병이 서툴렀고, 그로 인해 하룻밤 새에 어머니가 세 차례나 낙상하는 바람에 골절이 있는 것은 아닌지 엑스레이까지 찍으셔야 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처음 하는 일이라 그랬다고, 이제는 잘할 수 있다며 계속 간병을 고집하며 병실 안에서 버티셔서 우리는, 도대체 엄마가 몇 번을 더 낙상해야 포기하시려나 하는 심정으로 물러섰는데, 결국 밤새 간병하며 힘이 드셨던지 간병인을 부르라 하고는 시골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서투름으로 낙상하여 눈가가 시퍼렇게 멍든 어머니가 되려 아버지를 계속 찾아댔다. 간병인 돌려보내고 대신 아버지를 오라 하라고 하시는데, 이분들이 이렇게 서로 애틋한 사이였던가, 그동안 내가 들은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불평불만은 다 뭐였단 말인가, 싶었다. 결국 아버지는 하루 만에 서울의 병원으로 돌아오셨고, 마침 간병인의 학대 정황도 잡히는 바람에 아버지의 간병 주장은 더욱 힘을 얻어 본격적인 아버지의 간병인 생활이 시작되었다.하지만 올해 만으로 여든이신 데다가, 최근에는 정신도 오락가락하시는 아버지가 간병을 하게 되면서 자식들은 환자와 간병인 모두를 살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더욱 정신이 없었다. 간병인 이외의 출입을 금지하는 병원 규정 때문에, 이리저리 눈치 보며 두 분의 상태 확인하고 필요한 것 나르고 하느라 동생과 나는 멘탈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병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아버지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사랑이었던가. 처음에는 간병이 서툴렀던 아버지는 이내 요령을 익히셨고, 일주일쯤 지나자 우리도 조금 마음을 놓게 제법 간병을 잘하셨다. 다른 일은 다 정신이 없으신데도 간병은 그런대로 잘 해내시니 그게 신기하기도 했고, 어머니도 심리적 안정을 얻으면서 만족스러워하셨다.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어머니의 뜻에 다 맞추었고, 전 같으면 언짢아하실 만한 일도 그냥 다 받아주셨다. 어머니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 부지런히 사다 나르고, 뒷일 처리며 부축이며 제법 능숙해지셨다. 다행히 항암이 잘 들어 최근에 2차 항암을 위해서 다시 입원을 하셨는데, 이제는 병원이 편하다며, 어머니랑 같이 있어서 좋으시단다. 잠시 쉬시게 하루라도 교대해 드린다 해도 다 괜찮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랑꾼의 모습이다. 정말이지 부부에게는 부부만의 신비로운 세계가 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친척 중에 평생을 남편에게 맞고 살았고, 나중에는 접근 금지 명령까지 내려놓고도, 결국 이혼을 안 하고 한집에서 (각방 쓰며) 같이 사는 부부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친척은, 부인이 외국에서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남편은 은퇴 후에도 홀로 한국에서 인스턴트 음식이나 배달 음식으로 매 끼니를 이어가며 몇십 년을 떨어져 사는 부부도 있다. 두 경우 모두 내가 공부한 상식이나 경험으로는 부부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없는데도, 이들은 부부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가톨릭 작가 소노 아야코는 부부 관계를 “불가사의한” (혹은 “알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은 이런 부부 관계의 속성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남이 개입할 수 없는 ‘당사자들’의 문제라는 뜻이다. 사실, 남이 개입할 수 없는 ‘당사자들’의 관계란, 비단 부부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소노 아야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선택한 원칙이고 “하나의 성역이어서 어떤 사람도 침범할 수 없다”라고 했다(남들처럼 결혼하지 않습니다, 218쪽). 그러니 당사자들 이외의 사람이 개입하기 힘들다. 그런데, 심지어 부모 자식 관계도 서로를 떠나는 시기가 있다면, 부부란 중간에 헤어지거나 일찍 사별하지 않는 한, 그 누구보다는 긴 시간을 꾸준히 서로를 상대하며 지내야 하는 사이이다. 그렇게 쌓인 시간 때문에 부부는 정말로 굵은 물줄기처럼 아무리 잘라도 잘리지 않는 무엇으로 묶이게 되는 것 아닐까. 몸으로 안다는 것은 비단 섹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네 몸이 내 몸인 양 만져도 아무런 설렘이 없는 그런 시간의 물리적 축적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이런 관계는 밋밋한 관계라고, 부부간의 로맨스를 살리라는 조언들이 넘쳐나는 것 같은데, 사실 이게 딱히 성경적인 말 같지는 않다. 바울은 정욕을 위해서 각자 한 명의 배우자를 두라고 했는데, 정욕은 로맨스와는 별개의 문제이고, 정욕이란 게 평생 있는 것도 아니고, 성별과 나이와 개인 성향에 따라 다 다르고, 한 대상에게만 느끼는 것도 아니라, 사실 이 규범은 그냥 혼자 살라는 대원칙을 따르지 못하는 대다수 사람을 위한 위안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오늘날에도 소수의 독신 수도자를 다수의 결혼한 평신도보다 우위에 둔다). 성경에서 일상적 부부 생활의 사례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든데, 그나마 오랜 세월 부부로 살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성경의 커플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떠오른다. 남편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넘기지를 않나, 아내가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넘기지를 않나, 그러면서도 백세가 다 되도록 후손을 얻기 위해 성생활을 이어가는 이 부부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관계이다. 그렇게 보면, 부부는 사명으로 이어질 때 가장 단단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로맨스 운운하는 것은 역시 성경적이지 않다. C. S. 루이스가 그랬던가, 로맨스란 결혼이라는 차를 힘차게 출발시키는 엔진과 같은 것이라고. 아마도 그렇게 강력한 엔진의 발동이 없다면 결혼이라는 차는 제대로 출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로맨스의 역할은 거기까지. 그러나 오랜 세월 그 차를 계속 같이 타고 가다 보면, 로맨스라는 말로는 담기 부족한, 불가사의한 “쀼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 그것이 곧 결혼의 신비가 아닐까. 오늘도 아버지는 항암 치료하는 어머니 곁에서 행복하게 간병을 하고 계신다.
“가나안 성도” 현상: 교회 공동체에 던지는 질문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4-01-29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지난 10년간 한국 교회에 경각심을 일깨워 준 대표적 현상 가운데 하나는 “가나안 성도”의 증가라 할 수 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교회에 ‘안나가’기 때문에 거꾸로 ‘가나안’ 성도라 불리는 이들의 비율은 2012년의 10.5퍼센트에서 2017년의 23.3퍼센트로 훌쩍 뛰었고, 2023년 조사에서는 29.3퍼센트로 더욱 높아졌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102쪽 이하). 이 수치는 코로나로 인해 현장 예배를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높아졌을 개연성도 담고 있다. 이들 중 25퍼센트는 코로나 기간 중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최근 조사인 2023년 10월 통계에서는 가나안 성도들이 26.6퍼센트로 약간 낮아지기도 했다.이러한 증가세가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탈-교회 현상일 수도 있고, 또는 신앙생활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하겠다는 새로운 신앙표현의 발로일 수도 있다. 아니면 혹시라도 “가나안성도”라는 이름 붙이기가 그동안 교회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했을 우려도 있다. 2012년 이전인 1998년 조사에서는 가나안성도가 11.7퍼센트, 2004년에는 11.6퍼센트였으니 2012년까지의 조사들에서는 가나안 성도 비율은 대체로 일정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성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그 개념이 널리 알려지면서 비율이 뚜렷하게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어쨌든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어느 한 가지 지배적인 원인만을 지목하는 것은 이 현상에 접근하는 정직한 자세가 아니다. 가나안 성도에 대한 논의가 처음 나왔을 때는 소위 ‘소속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의 가능성이 제시됐다. 현대인들이 더 이상 교회라는 집단에 의존하거나 소속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갱신되고 변화되더라도 이러한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 자체에 대한 기대가 없고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었다. 심지어 1인 교회라는 단어까지 나오기도 했다. 과거 조사에서도 30퍼센트 이상의 가나안 성도들이 이러한 유형에 속했다. 한국 교회의 위계주의나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주체적 자아의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속 없는 신앙을 진지하게 추구하기에 탈 교회를 한 것일까? 실제 조사를 보면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시기는 중고등학교 때나 대학생 때가 높다. 이들은 주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다가 스스로 교회 출석 여부를 선택할 즈음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조사에서도 청소년(38%)과 청년(45%)의 연령대에서 가나안 성도의 비율은 전체 평균보다 훨씬 높게 나온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신앙에 대한 관심이나 구원의 확신 비율은 낮다. 반면, 교회생활 경험과 구원의 확신까지 있는 가나안 성도들은 주로 성인이 되어서 교회를 떠난 경우가 많다. 이들의 탈-교회 원인으로는 주체적인 신앙의 추구라기보다는 목회자와 교인들에 대한 상처나 실망이 더 크다. 따라서 이들 중 상당수(43%)는 교회가 변화된다면, 혹은 좋은 교회를 찾는다면 여전히 교회로 돌아오길 원한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111). 나는 ‘소속 없는 신앙’이라는 용어에 대해 그 어떤 신학적 동감도 느낄 수 없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시대와 타협하고 변질되었을 때, 제도권 교회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운동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움직임들은 교회의 참된 본질을 찾으려는 반성적이며, 실험적인 몸부림이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움직임들을 통해서 교회는 갱신되었다. 하지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이 모여 그의 몸을 이루는 교회됨의 소명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양보하거나 약해질 수 없는 신앙의 중심이다. 비록 현실 교회가 허물이 많고 신뢰를 잃었다 하더라도 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교회됨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지, 교회됨을 간과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인간이 자율적이며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한다는 발상은 근대적 자아주의 신화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여러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습관과 신념을 형성한다. 그리고 특정한 공동체와 전통이 바로 그러한 경험과 이야기를 제공한다.그렇다고 해서 가나안 성도 현상을 부정적으로 단죄하는 태도는 더더욱 곤란하다. 혹자는 가나안 성도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히 10:25)에 빗대기도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관을 질타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본문은 좀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권면은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동료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 전통을 버린 자들이라고 질시와 고난을 받을 때 주어졌다. 율법과 제사를 뛰어넘고 완성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확신을 가진 자들에게 더 이상 유대교인들의 공격과 비난으로 인해 위축되지 말고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이다. 여기서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모임을 늘리라거나 교회당에 더 많이 오라는 차원이 아니다. 히브리서 10:24은 무슨 모임인지를 명료하게 알려준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이는 돌봄과 격려를 위한 모임을 말한다.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즉, 서로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소망을 갖고 일상을 살아내도록 돌아보고, 더 나아가 사랑과 선행의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고 종교적 열심이나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가나안 성도의 증가라는 탈-교회 현상에 대한 해법이 전혀 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교권주의와 율법주의의 위험성까지 지닐 수 있다.이러한 교회됨의 목적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의 신비를 말할 때도 드러난다. 그는 당시 주의 만찬이라는 맥락에서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18절)라는 표현을 쓴다. 그들이 저녁 식사를 위해서 모이는 것이 곧 교회로 모이는 것이었다.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20절)나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절)는 표현을 보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교회로 모일 때에 주의 만찬이 중심순서였음을 암시한다. 우리말의 식구(食口)가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을 의미하듯, 함께 먹으러 모인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가족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위해서 모일 때에 “분쟁이 있다 함을”(18절)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분쟁으로 말미암아 먹으러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그의 해법은 아니다. 오히려 만찬의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달아야 했다. 비록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서 함께 식사할 때 갈등과 반목이 일어났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그의 몸을 이룬다는 깨달음 가운데 자기를 돌아보며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과 희생을 배워가야 했다. 그것이 교회로 모여 주의 몸을 이루는 신비였다. 개인의 취향과 권리가 최고의 덕목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 한 공동체에 소속되고 헌신한다는 것은 분명히 유행과는 어긋난다. 그러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갈망하고 찾아 나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동체적인 존재로 지으셨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삼위일체라는 관계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도 현상은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반성하게 한다. 가나안 성도들이 소속 없는 신앙을 추구해서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혹은 교회와 신앙에 대한 실망과 회의 때문에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아니면 애초부터 진정한 신앙을 확립하지 못해서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그 모든 탈 교회의 원인과 해법은 모두 교회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가 어떠한 관계와 습관의 공동체로 존재할 것이냐의 과제는 가나안 성도 현상을 통해 더욱 중대해진다.
전인적 돌봄에 참여하는 교회
by Florence MuindiI
2024-01-27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교회 없이 추구하는 전인적 선교? 종종 우리를 무릎 꿇게 하는 일이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할 때가 있다. 고집이 센 의사가 많은데,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이 고집을 꺾기 위해서는 혼란스러운 경험이 필요하다.나는 약 30년 전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상황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열정으로 선교지에 헌신했다. 그 이후 3년을 열심히 일했고, 199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는 무릎을 꿇었다. 실패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 더 큰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 무렵 나는 영적인 돌봄과 육체적 돌봄을 병행하고 있었다. 약 5,000명의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지역사회 기반의 의료 사역을 운영했다. 여기에는 우리 집 뒷마당에서 열린 어린이 400명을 위한 크리스마스 전 방학 성경학교(Vacation Bible School) 등의 취약 계층 어린이를 위한 사역도 포함되었다. 게다가 나는 남편과 두 아이도 보살피고 있었다. 정신없이 바빴다. 하지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모인 방학 성경학교였다.나는 아주 일찍 일어나 성경학교에 필요한 빵을 구하기 위해 여러 빵집을 들렀다. 안개가 자욱하고 추운 아침,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광경은 나를 완전히 충격에 빠뜨렸다. 우리 선교센터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길거리에서 살고 있는 5살, 7살, 10살 아이들이 새벽 6시부터 추위에 떨며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었다.마음이 아팠다.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충동을 물리쳐야 했다. 방금 산 빵을 아이들에게 줄까도 생각했다. 우리 가족과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더하여 보육원도 시작해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어떻게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정서적, 정신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데 어떻게 계속해서 건강상의 필요를 위한 처방만 내릴 수 있겠는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전인적인 돌봄을 경험할 수 있을까?계기나는 며칠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고, 그 이후 사역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빵을 나눠주는 일, 보육원 운영, 계속해서 나병 환자들을 위한 지역사회 기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성경학교를 운영하는 일은 더 이상 내가 담당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더 이상 ‘내’가 맡는 것이 아니다. 대신, 교회가 전인적인 돌봄과 지역사회의 돌봄을 책임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전략을 전인적 사역(holistic ministry)이라고 부른다. 교회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통해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응답을 제시할 것이다:•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회를 일으켜 세운다.• 각 지역사회에서 취약 계층에 힘을 불어넣어, 가장 작은 자들에게도 존엄성을 가지게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시스템과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여 피해자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결과를 경험하지 않도록 예방한다.이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3년 후 이 교회들이 지역사회의 변화 과정을 완전히 주도하며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잘 준비된 출구전략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국제 LIA(Life in Abundance)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접근 방식이다.[1]교회 참여 접근 방식과 성경적 근거이 모델은 예수님의 사명을 설명하는 이사야 61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 이사야 61장은 공의가 나타날 때까지 어떠한 회복이 수반되는지, 그리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다. 예수님의 이 사명은 그의 제자인 우리가 뒤따라가는 전인적인 사역이다.우리는 지역사회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해하고 환영하기 위해 먼저 그 지역사회의 안팎에서 기도로 시작한다. 그다음 전략적으로 배치된 교회의 리더들을 모아 비전 수립 세미나를 열고 교회의 총체적 사역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 설명한다. 이 세미나에 참여하는 리더들은 훈련자를 위한 훈련(Training of Trainers)에 초대된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참여형 조사를 공동으로 실시한다. 지역사회 동원과 조직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우선으로 다뤄야 한다고 여겨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성가능한 해결책을 가지고 단계적인 실행을 시작한다. 교회는 3년의 기간 동안 지역사회 건강, 교육, 경제적 역량 강화, 사회 참여 분야에서 추가적인 참여를 해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된다.여기에서의 초점은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지속 가능한 총체적인 접근 방식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기 위해 교회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 중 일부이며, 성령님께서 인도해 가신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에 대한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찾고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 참여하게 된다.국제 LIA 촉진자들(facilitator)은 3년 동안 교회와 멘토링의 관계를 맺으며, 교회가 섬길 준비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하고, 격려한다. 지역 교회는 전략적으로 빈곤한 지역사회 내에 위치하게 된다. 지역 교회는 변화의 주체이다. 그들이 바로 빛과 소금이다. 이렇게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교회를 중심에 두고 이사야 61장에 묘사된 예수님의 사명을 실행해 나간다.연구에 따르면 지역 공동체가 변화된 모습으로 살 때, 그들은 LIA나 우리가 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진정으로 바라봐야 할 대상으로 교회를 언급한다.참여하고 있는 교회로부터의 영향력우리는 25년 전, 10년 전, 가깝게는 3년 전에 우리가 떠난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이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과연 우리가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왔을까? 우리의 사역이 마무리된 지역사회에서 우리와 협력 관계를 맺은 수백 개의 교회를 통해 보고받을 만한 지속적인 영향이 있는가? 과거와 현재에 대한 투자 가치가 있었는가?이러한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 2015년 우리는 과감하게 독립 그룹에 영향력에 대한 평가를 의뢰했다. 이 그룹의 임무는 우리가 함께 일했던 모든 지역사회 중에서 무작위로 6개의 지역사회를 선정하여 단기 및 장기 모델을 평가할 수 있는 정량화할 수 있는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 데이터를 통해 그들은 지역사회에서 모델이 구현되면, 촉진자가 떠난 후에도 그 지역사회에서 총체적인 변화가 지속되고 확장될 수 있다는 가설에 답했다.평가자들은 여섯개의 지역사회를 선택하고 전인적 돌봄의 관점에서 6가지 핵심 분야를 중심으로 그 지속성을 평가했다:• 경제적 역량 강화• 지역사회 건강• 교육• 환경 영향• 사회적 참여• 영적 변화또한 지역사회 내 직접적인 수혜자와 초기 지역사회를 넘어선 영향력을 고려하여 지속 가능한 영향력의 수준을 평가했다.[2]데이터 분석 결과 직접 수혜자에게 지속적인 영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년 동안의 참여형 프로그램 서비스를 통해 대상 수혜자들은 지속적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직접 수혜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도 지속적인 영향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떠난 후에도 이웃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는 평가 대상이었던 모든 지역사회에서 나타났다.또한, 이 평가 대상 중 세 곳의 지역 교회는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새로운 지역사회에서 동일한 프로젝트를 재현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는 개발자가 떠난 후에 영향력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는 기존의 개발 및 인도주의 활동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결과이다. 놀랍게도 몇몇 현장의 연구원들은 지역사회 내 영향의 파급효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큰 감동을 받았지만, 그 결과에는 놀라지 않았다.그 연구 보고서는 세 가지 요점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사역은 촉진자가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 발전해 나가고 있다.• 방문한 모든 현장에서 사람들이 지역사회에 총체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효과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를 통한 총체적인 돌봄의 모델이 필수적이다. 이 모델의 구성 요소는 모두 함께 기능하며, 어느 하나도 독립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상호의존성은 모든 현장에서 깊고 복잡한 수준으로 분명하게 드러났다.나는 하나님께 우리와 교회를 통해 행하신 일들에 감사드린다. 1999년에 열린 이 구령 활동은 지역 교회로 이어졌고, 그리고 첫 번째 훈련자의 훈련, 3년간의 시범 운영, 그리고 아프리카 12개국과 카리브해 2개국에서 현재 진행 중인 사역으로 이어졌다.수년 동안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인적인 돌봄을 받았다. 직접적인 돌봄을 받은 사람 중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3,500곳 이상의 교회가 준비되어 있으며, 14개국과 전 세계에서 계속해서 더 많은 교회가 준비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역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전인적인 돌봄의 사역을 해나가고 있다.현재 동향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반응하기를 요구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1999년 크리스마스이브의 사건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여전히 첫 번째 공동체에서 그곳의 사람들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영웅처럼 그들을 위해 일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항상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나는 의존해야 하는 곳이 점점 더 많아지며, 지치고, ‘선한 일’이라고 불리는 일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신부를 비하하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는 이기적인 해를 끼치고 있었을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영웅이 되고 영광을 차지하라고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을 높이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지역 교회를 준비시키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법을 배웠고, 그렇게 우리의 발자취를 남긴 곳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 전략은 효과가 있고,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축복하시는 것의 핵심적인 특징을 담아낸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명이자 방법이기 때문이다.영적으로, 내적으로 변화된 사람만이 영적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 행동하고, 육체적인 변화를 지속해 나갈 수 있다.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며, 증거하고, 선포해야 하는 사명이 있고, 이를 우회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속적인 영적인 목소리이다. 지역사회가 교회 기반의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때, 그들은 교회의 기능을 받아들이고 프로그램 활동 내에서 교회의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교회의 통합적 선교는 이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효과적인 선교의 현 추세이다. 이사야 61장의 말씀처럼, 선포된 말씀은 변혁적인 변화를 일으킬 힘을 가지고 있다.영적으로, 내적으로 변화된 사람만이 영적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 행동하고, 육체적인 변화를 지속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루기 위해 오신 구속 사역이며, 예수님은 이 사역을 축복하시며 자신의 교회 위에서 세우신다.1. ‘Defeat Poverty. Restore Dignity’, Life in Abundance International, accessed 28 August 2023, https://lifeinabundance.org. 2. This comprehensive study produced a thorough 53-page report available from www.lifeinabundance.org. 원제: The Church and Whole-Person Care출처: lausanne.org
기도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by 최창국
2024-01-26
교회 역사에서 형성된 중요한 경구가 있다. 바로 기도의 법이 곧 믿음의 법이다(lex orandi lex credendi)란 경구다. 이 경구는 5세기의 수도사 아퀴테인의 프로스퍼(Prosper of Aquitaine)가 남긴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믿음과 삶의 방식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성경에서도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요한계시록 8:3-5에는 성도의 기도가 세상에 미치는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성도의 기도는 천국의 향로와 함께 천사에 의해 하나님의 존전으로 올라간다. 그 후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며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난다”(계 8:5). 이는 기도가 우주에 미치는 생생한 묘사이다. 이처럼 기도는 우주적 영향력이 있는 영적 활동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요 3:16)에서 생명력을 지닌다. 기도는 세상을 치유하는 생명력을 지닌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의 생명력을 초월적이고 기적적 능력으로만 보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만병통치약처럼 접근하는 것은 기도의 가치와 효과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주의해야 한다. 기도는 단지 기적을 낳는 방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많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맺고, 이를 기적적으로 성취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에게 자녀를 약속한 내용이다(창 17:15-19; 18:10-15; 30:22; 삿 13; 삼상 1:20; 눅 1:7).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적으로 출생한 아이들은 각자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하는 현대의 여성들이 이 내용을 자신에게 똑같이 적용하여 기도하면 아이를 허락하신다는 약속으로 간주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을 배제해서도 안 되지만,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데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마음대로 이용하거나 제도화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초자연적 기적 추구의 열정으로만 이해되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의 자연법칙을 배제하는 기도 문화를 형성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치유는 초자연적일 수 있지만 창조적 설계, 즉 자연법칙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기도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차가운 겨울에 벼를 심어놓고 눈이 오지 않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법칙과 배치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노화 차제를 막거나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따르면, “자연법이라고 하는 용어는 자연으로부터(from Nature) 기원하는 법칙이란 뜻이 아니라 자연 위에(upon Nature) 부과된 법칙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은 위로는 궁창에도, 아래로는 대지에도 있으며 이 세계는 이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시편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이 계명들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와 동맥과 정맥을 통하여 흐르는 피와, 호흡기관인 우리의 허파에도 하나님의 계명이 주워져 있다”(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96). 우리의 기도가 자연법칙과 충돌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의 기도가 모두가 인정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을 무시한다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이로써 야기된 재앙은 자연법칙을 무시한 기도에 대한 창조자가 설계한 보편법의 응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신학자들은 이런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부른다”(도로시 세이어즈, 창조자의 정신, 26). 하나님은 우주가 창조 법칙에 따라 작용하도록 설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 또는 신유 역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바로 그 법칙 안에서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 안에서 더욱 충만해질 때 하나님의 신비를 더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하지만, 기도의 초자연적 특성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루돌프 오토는 서구 기독교가 신학과 신앙의 본질을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 즉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차원에만 종속시킴으로 기도와 같은 신앙의 생명력을 고갈시켰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반이성적이거나 반지성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비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계몽주의 시대사조가 저지른 합리주의적 오류와 독단에 도전을 하였다. 그는 종교 경험의 비이성적 차원을 뉴미너스(numinous)라고 부르고 거룩한 존재 앞에 설 때 자기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임을 느끼는 의식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비이성적 종교 체험의 신비감은 하나님이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경험한다. 그는 종교 경험은 역설, 비약, 실존적 결단, 자기 초월의 감정, 황홀한 감성, 비매개적인 직관, 비인과적 동시성 체험 등을 동반하기 때문에 종교 경험이 반드시 논리적, 과학적, 인과론적 설명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실재의 세계가 아니라고 하였다(Rudolf Otto, The Idea of the Holy, 1-40). 바울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고백했듯이, 인간의 영적 경험은 이성적이고 감성적 표현 능력을 초월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적 경험은 은혜, 신비, 봉사, 경험 등과도 관계된다. 루이스는 “종교적 권위가 보다 확고히 수립되면 될수록 우발적 영감에 대해서는 더욱 대적하게 된다”고 하였다(C. S. Lewis, Ecstatic Religion, 34). 그것은 아마 기도의 신비의 미학을 의심의 눈을 가지고 자기도취적 행위나 욕망의 추구로 보고, 기도를 점점 무시하는 것에 대한 예견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기도 경험은 자연법칙 안에서만 이해될 수 없는 신비의 미학이 있다. 특히 기도의 신비의 미학은 우리의 영적 삶을 이성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버리는 과오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기도를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삶과 맞바꾸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도를 통한 창조 세계의 샬롬에 대한 성경적 전망은 천상적이지만, 이 땅에서 실현되는 천상적 질서에 대한 전망이다(계 21:1-2). 이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 배우는 텔로스(telos), 즉 궁극적인 목적이다. 주의 기도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의 기도는 현실을 도피하는 전망이 아니라 회복하는 전망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의 성경적 전망은 이 땅에서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다. 기도의 성경적 전망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이분법을 철저히 거부한다. 앙리 드 뤼박의 말처럼,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으로 욕망하도록 창조되었으며, 은총이 초자연적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창조된 자연적인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Henri de Lubac, The Mystery of Supernatural, 130-137). 따라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은총도 결국은 자연적인 삶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유, 여전한 유혹
시편 49편 묵상
by 고명환
2024-01-25
1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적 성공을 바란다.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이 시대에, 성공이 가져다주는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인의 아들이 의사가 되었다. 유치원생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 뒤, 험한 일을 해가며 자식 뒷바라지를 했으니 나름 성공한 것이다. 일전에, 그분에게 아들이 의대에 진학하려는 동기를 물은 적이 있었다. 들려온 답은 간단했다. 아들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의대에 가려 한다고 했다. 흔히 말하는 ‘적성에 맞아서’나 ‘병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아니면 ‘보람 있는 직업이라 생각해서’ 정도의 상투적인 선택 동기를 기대했는데, 정제되지 않은 솔직한 대답에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기억이 난다.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돈을 좇는 것에 냉소를 보내고 싶지 않다.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들에게 돈은 안정과 안락함을 보장해 주는 수호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넉넉한 돈은 갖고 싶은 것 갖게 해주고, 가고 싶은 곳에 데려다주고, 병들었을 때 치료받게 해주고, 고민 없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게 해주며, 편안히 쉴 공간을 제공해 준다. 물신의 통치 아래 사는 시민에게 돈은 쾌락이요, 안정이요, 권력인 것이다.허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 편승해서 성공과 돈을 좇는 대열에서 보조를 맞추고 있는 풍조는 그들이 진정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이생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의대 보낸 이웃을 부러워하고, 안되면 치대라도 보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녀를 일찍이 학원으로 몰고 있는 그리스도인 부모를 대할 때면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투기를 목적으로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고,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 불필요한 땅을 사둔 사람들도 교회의 요직에 배치되어 있다. 백세가 보장된 것처럼 ‘백세시대’를 노래하며 그때까지 누리고 즐길 넉넉한 자금을 비축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장로님 목사님들 앞에 하루하루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빈자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진다. 예배 시간에 백억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하는 당회장 목사를, 거부가 교회에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장로님을 마주할 때면 이곳이 교회인가 하는 의문마저 생긴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잠언 30:8). 과거에 그리스도인들 입에 제법 회자되던 성구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겸손한 기도와 가르침을 듣기는 쉽지 않다. 물질의 어려움 없게 해 달라는 기도나 사업이 잘되어 주님을 위해 멋지게 쓰게 해달라는 기도를 더 듣게 된다. 겨우 의식주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디모데전서 6:8)고 가끔이라도 강조하는 설교자들은 주변에 있는가? 의식주만 해결되면 자식 교육, 문화생활,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만족하며 살라고 가르치면 교회 건축, 선교 등의 교회 사업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런 시대적 필요 앞에 자족과 절제 같은 성경의 미덕은 현대의 그리스도인과 교회 속에서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2시편 49편1만민들아, 이 말을 들어라. 이 세상에 사는 만백성아 모두 귀를 기울여라.2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귀를 기울여라.3내 입은 지혜를 말하고, 내 마음은 명철을 생각한다.4내가 비유에 귀를 기울이고, 수금을 타면서 내 수수께끼를 풀 것이다.5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나를 에워싸는 그 재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6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과 돈이 많음을 자랑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7아무리 대단한 부자라 하여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속량하지 못하는 법, 하나님께 속전을 지불하고 생명을 속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8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값으로 매길 수 없이 비싼 것이어서, 아무리 벌어도 마련할 수 없다.9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생각도 하지 말아라.10누구나 볼 수 있다. 지혜 있는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자나 우둔한 자도 모두 다 죽는 것을!평생 모은 재산마저 남에게 모두 주고 떠나가지 않는가!11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12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13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말을 기뻐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14그들은 양처럼 스올로 끌려가고, ‘죽음’이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아침이 오면 정직한 사람은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시들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될 것이다.15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 목숨을 건져 주시며, 스올의 세력에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 (셀라)16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더라도, 그 집의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너는 스스로 초라해지지 말아라.17그도 죽을 때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며, 그의 재산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18비록 사람이 이 세상에서 흡족하게 살고 성공하여 칭송을 받는다 하여도,19그도 마침내 자기 조상에게로 돌아가고 만다.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20사람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새번역)“들어라(Hear)” “귀를 기울여라(Listen)”(1절). 시인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며 시작한다. 그가 하려는 말을 흘려 버리거나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혜(wisdom)가 있고, 명철(understanding)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련한 짐승처럼 근시안적 삶을 사느냐(12, 20절), 미래를 내다보고 영원을 사느냐 하는(14, 15절) 중대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2절), 들어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만백성”(1절)은 모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이스라엘 사람이든, 저주 받은 이방인이든 가릴 것 없이, 삶을 부여받은 피조물들은 지혜를 말하고 명철을 주며 인생의 의문을 풀어낼 수 있는 시인의 말을 들어야 한다(3, 4절).시인은 단지 부자들을 경고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자기의 민족 이스라엘만을 향해 교훈하려고 그들을 첫머리에 부르지 않는다. 만백성(all people)을 부른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all who live in this world)에게 외친다. 누구도 예외 없이 들어야 할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호소하듯 “들으라”고 외친 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경고한다. ‘죽음의 목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높은 자, 낮은 자, 부자, 가난한 자, 우매 자 혹은 지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생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알라고 소리를 높인다(10절). 이 죽음 앞에 사람은 조금도 저항할 수 없다. 양처럼 지각이 없는 존재인 사람은 목자인 죽음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다(14절). 다만, 보이는 물질세계의 위력에 눈이 멀어 인생의 진리를 볼 수 없는 것뿐이다. ‘죽음의 목자’를 따르는 선두에는 가진 자들이 도열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쌓아 놓고 의지하는 부와 권력이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며(18절), 영원히 기거할 집(11절)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어두움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무덤이 영주할 주인인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11절). ‘죽음의 목자’가 이끄는 대열의 선두 뒤에는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며 그 대열에 진입하고자 애쓰는 무리가 있다(13절). 그들은 가진 자들의 교훈과 철학을 기뻐하고 그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충고를 반긴다. 부와 명예를 거머쥘 기회를 제공하는 그들이 고맙기만 하다. 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인 가진 자들만이 보이지, 가진 자들 앞을 인도하는 ‘죽음의 목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영원한 거처, “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19절)으로 향하는 인파 속에 섞여 있음을 알지 못한다.살펴본 것처럼 시인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분명하게 밝힌다. 반면, 거기에 따르는 구체적인 훈계나 교훈은 절제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결국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시인의 외침만으로도 청자나 독자들이 각자의 인생의 좌표를 점검하게 만든다. 더하여, 시 안에 직접적인 지시나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한다.부언) 부한 자들을 경고하고 부를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를 전체를 수렴하는 주제로 내세우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다. 따라서, 새번역 성경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인 “부유함을 의지 하지 말아라”는 제목은 적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재물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바꾸거나 살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임을 일깨워 주고(6-8절), 소멸하지 않는 생명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의 자신감은 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확신에서 나온다(15절).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시인이 부자를 두려워하거나(6절), 그들로 인해 초라해질 리 없음은 당연하다(16절). 3소유욕은 정말 질긴 욕망이다. 만족할 줄 모르며 중단할 줄도 모른다. 한 사람을 주관할 수도 있고 집단을 조종할 능력도 있다. 영특해서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낼 때도 있고, 숨어 정체를 숨길 때도 있다. 다스림 받기를 싫어하고 조금만 틈을 보이면 뛰쳐나가 일을 벌인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통 채로 삼켜 버리기까지 한다. 사무엘하 11장에 기록된 다윗의 범죄 기록을 거론할 때 간음죄를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면 살인죄를 붙여 풀어 나간다. 물론 이 둘로 해석하고 교훈을 얻는다 해도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물면 사건의 온전한 실체를 다 아우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간음과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은 원인이 빚어낸 결과임을 찾아 낼 수 있다. 그 사건의 이면에는 엄청난 일을 벌이도록 작용한 배후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범죄 당시, 다윗의 인생은 절정기에 있었다. 불안했던 왕위가 확고하게 안정되었고 왕국을 위협할 만한 주변의 큰 이방 민족들은 모두 평정되어 직접 전쟁에 나가도 되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에 해당하는 영토를 완전히 차지할 수 있었고, 이에 앞장섰던 다윗왕을 향한 백성의 신망은 매우 두터웠다. 아내로 삼은 여섯 여인에게서 여러 왕자가 태어나 왕가 역시 크게 번성했다(사무엘하 3:2-5). 왕으로서 최고의 영예와 부를 누리는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내면에 도사린 탐욕을 제어할 수 없었다. 밧세바가 우리야의 아내라는 사실을 보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통제를 벗어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밧세바를 소유했고, 이를 덮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말았다. 이를 보신 하나님은 다윗이 일시적인 성적인 유혹을 못 이긴 간음죄 정도로 가볍게 여기시지 않았다. 나단 예언자의 입을 빌어 예를 든 비유 중, 많은 양과 소를 가졌는데도 손님이 오자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뿐인 어린 암양을 빼앗아 대접한 부자의 탐욕이 다윗 안에 숨어 있음을 먼저 들추어내신다. 그런 뒤, 직접적으로 그의 근본적인 잘못이 무엇인지 준엄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고, 또 내가 사울의 손에서 너를 구하여 주었다. 나는 네 상전의 왕궁을 너에게 넘겨 주고, 네 상전의 아내들도 네 품에 안겨 주었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나라도 너에게 맡겼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무엇이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어찌하여 나 주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내가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게 하였다.” (사무엘하 12:7-9)주님은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시고 상전의 아내들을 그의 품에 안겨 주시기까지 모든 것을 넘치게 베풀어 주셨다. 나라와 백성을 맡기셨고, 그것으로도 부족하게 여기었다면 그 이상 무엇이든 더 주실 마음이셨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의 소유를 부족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악한 일의 원인이 만족함이 없는 그의 소유욕에 있었음을 집어 내시고 그것을 간음과 살인보다 더 악한 것으로 판단하셨음을 들려준다. 마가복음 10장에 전도유망한 한 청년이 등장한다(누가복음 18장, 마태복음 19장). 공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관리로서 높은 위치에 있는 부자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크게 성공한 엘리트 젊은이였다. 거기에 신앙심도 깊어 하나님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잘 지켜온 믿음 좋은 청년이었다. 아마도, 믿음 좋은 딸을 둔 부모들이라면 사윗감으로 삼고 싶은 보기 드문 젊은이였다. 돈과 지위를 이미 거머쥔 이 부자 청년은 무엇이 부족했던지 예수님을 찾았다. 그가 한 질문이 이유를 말해 준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부자 청년은 영생을 소유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나사렛 청년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부자이고 지위가 있는 젊은이가 예를 갖춰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질문한 것을 볼 때, 이미 주님에 대한 상당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얻고자 하는 바, 영생의 길을 예수님은 알려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겸손하게 다가와 영생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계명들을 나열하시며 “생명의 길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의 랍비라 칭함을 받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할 만한 평범한 대답을 먼저 하신 것이다. 이에 부자 청년은 말한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참으로 비범한 젊은이가 아닐 수 없다.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삶을 살아온 청년이다. 세 복음서 기자들이나 예수님께서 청년의 대답에 대해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말은 진실했던 것 같다. 마가는 이즈음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삽입한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마가복음 10:21). 기자는 한 개인에게 예수님께서 따뜻한 시선을 보이셨다는 흔치 않은 설명을 덧붙인다. 마가의 관찰대로,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다. 아버지가 자랑스런 아들을 사랑하듯, 여러 면에서 칭찬할 만한 청년을 주님은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헌데, 주님은 이 부자 청년을 그것으로 놓아주시지 않는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쉬운 해답을 들려주시지 않았다.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집어엎고 다시 구축해야 할 혁명적인 길을 제시해 주신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가복음 10:21)시간이 흐르면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을 버리고 영원히 남을 것을 대신 소유하라고 도전하신다. 영원한 보물 저장고에 그의 소유를 옮기고, 그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유로 삼았던 돈, 명예, 도덕성의 추구, 종교적 업적이 줄 수 없는 영생을 얻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버린 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추구해 오던 인생의 업적을 모두 해체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산과 같은 제안을 하셨던 것이다.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부자 청년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바꾸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섞어질 것을 썩지 않을 ‘하늘의 보화’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보이지만 임시적인 세상의 보화를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하늘의 보화로 바꾸라고 말씀하셨다. 이 트레이드를 보장해 주시는 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었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야 하는 청년에게는 그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예수님을 다른 랍비들과 다른 정도의 수준이 아닌 하늘의 비밀을 알려 주시는 메시아로 믿어야 하는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청년은 이 트레이드에 실패했다. 그를 사랑했던 예수님과, 갈구하던 영생의 길을 뒤로하고 근심하며 떠나가고야 말았다. 많은 소유가 그를 붙들었고, 청년은 이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마가는 청년이 결단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초대형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젊은 목사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제자화 전략을 통해 소규모 교회를 거대 교회로 일구는 데 성공했다. 물론 교회 주변에 신도시들이 생겨서 교회가 커지는 데 일조한 면도 있었다. 교회의 몸집을 더 이상 불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시점부터는 꾸준히 분립개척을 여러 번 해왔다고 한다. 아울러, 교회가 커지면 한국 교회가 손대는 대안학교, 복지시설 등도 운영해서 교회 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분은 60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일년 후에 조기 은퇴할 거라고 했다. 이유인즉, 이젠 “번아웃(burnout)” 되어 더 이상 목회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큰 교회 목회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하여,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조그만 목회를 하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목회다운 목회를 하려면 교회가 200명 이상이 되면 어렵다는 소견을 가졌던 나는 그분의 결정을 반기며 잘 생각하셨다고 맞장구를 치고 지지해 주었다. 그런데, 이어진 그분의 장래 계획은 나의 기대를 금방 깨고야 말았다. 조그만 교회를 일구어 큰 교회에서 못한 한 영혼 한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심정으로 섬기고 돕겠다는 소박한 꿈이 아니었다. 목회자들을 컨설팅하는 사무실을 열어서 자신의 목회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가르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컨설팅 자격증을 땄고 교회에서는 그 일에 이미 지원을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교회에서 마련해 준 공간에서 자신의 목회 성공(?) 노하우(교회를 크게 만드는 비결)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며 목회자들의 멘토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였다. 어찌 생각해 보면, 성공한 목회자가 성공을 위해 몸부림 치지만 어떤 이유에서 건 고전하고 있는 후배를 위해 나선다는데 박수치고 기대감을 가져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 길은 더 높은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픈 본인의 또 다른 욕망 성취를 위한 시작은 아닌지.’ ‘목회라는 책임감과 정신적 압박의 자리에서 비켜나, 힘들이지 않고 여전히 존재감을 잃지 않을 자리로 옮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스쳐 가는 의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른 한편, 그분이 젊은 시절 부목사로 시무했을 당시의 담임목사님의 은퇴에 대해 언급했다. 개척해서 견실한 중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기까지 고생하신 목사님에게 교회가 은퇴 처우를 섭섭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었지만 흔히 있는 불미스러운 일 정도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멈추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더는 캐묻지 않았다.시간이 지나, 그 교회에 함께 다녔던 장로님을 만나는 기회에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은퇴하시는 목사님에게 교회로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섬겨 드렸다고 했다. 원로 목사님으로 추대해서 담임목사님이 받는 80퍼센트의 사례비를 매월 지급하고 있고, 퇴임 후 퇴직금은 물론, 편안하게 사실 아파트까지 마련해 드렸다고 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내가 판단하기에도, 기본적으로 개인 재산이 있으시고 자녀들이 모두 성장하여 뒷바라지가 끝난 노년에 그 정도면 사모님과 큰 불편 없이 살아갈 만한 충분한 지원이었다. 그런데도, 그 성공한 목사님은 자신이 모시던 담임 목사님이 섭섭한 대접을 받고 은퇴했다고 전해주었다. 궁금하다. 작은 교회를 초대형 교회로 키운 그 목사님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 어떤 퇴직이 보장될지. 분명한 건, 섭섭하게 보냈다던 그 목사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퇴직금과 생활보장이 이루어질 거라는 사실이다.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후배들에게 존재감을 보여주며, ‘성역’을 이룬 보상으로 주어진 재물이 주는 편리함을 향유하고, 그것이 가진 힘을 행사하며 넉넉한 노년을 보낼 것 같다. 4얼마나 가져야 하는가? 성경은 그 한계를 정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한 소유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이 가져야 할 분량의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얼마나 소유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은 각자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주님과의 관계에 실패를 가져오는 어떤 소유도 정당화될 수 없다. 소유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관계에 틈을 만든다면 소유는 악이고 적인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는 정도의 양이 각자가 가져야 하는 분량이다. 미련 없이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적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얼마나 많은 가치를 부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가치에 눈을 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와도 관련이 있다. 아브라함은 많은 가축과 종을 거느린 부자였다. 단지, 가축과 재산만 소유한 부자가 아니라 주변의 왕들과 싸워도 결코 밀리지 않는 훈련된 사병을 보유한 강력한 족장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진 것을 가진 것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낮게 바라보며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그의 소유는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카 롯에게 좋은 곳을 선택할 기회를 먼저 줄 수 있었고, 자식들에게도 공평하고 적정하게 재산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에게 많은 소유는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수중에 있었어도 그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욥 역시 가진 자였으나 가지지 않은 자처럼 살았다. 그의 거대한 재산이나 많은 자식이 주님과의 관계에 조금도 틈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재산도 자식도 축복으로 생각했으나 소유로 여기지 않았다. 잠시 자신에게 맡겨진 임시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뿐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가 모든 것을 잃고 했던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죽을 때에도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주신 분도 주님이시요,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욥기 1:21, 새번역)그의 곁에 있다가 사라진 많은 것들, 재산, 자녀, 건강, 신뢰 같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일시에 잃었을 때, 욥은 권리를 가지신 주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보통 욥의 믿음을 강조하는 선에서 관찰을 멈추고 끝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어지는 행동도 간과하지 말고 주목하기를 바란다. 욥은 잃은 것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주님을 찬양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찬양을 통해 영광을 돌린다.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상관없이 주님께서 하셨기에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 합당하며 선한 뜻이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차원 높은 믿음의 표현까지 실천했던 것이다. 보았듯, 많은 소유가 욥과 주님과의 관계에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소유주로 착각하지 않고 만유의 하나님을 소유주로 바르게 인식했던 믿음의 사람을 상실이 침몰시키지 못했다.5인류의 타락 이후 소유욕은 사람들 마음의 빈자리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에덴 동산에 머물 때는 소유할 필요가 없었다. 소유하지 않더라도 불안하거나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등진 이후 사람들은 소유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힘과 만족으로 삼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서로를 소유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소유는 영혼의 불안과 공백을 채우는 양식이 되었고,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빼앗아 갔다. 그런 뒤,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마저 그것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부유한 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소유가 영혼에 밀착되어 사고와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성경의 여러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많이 거둔 소출에 취해 영혼마저 부유해진 나머지 커다란 착각에 빠진다. 자기가 소유와 영혼의 주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영혼에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누가복음 12:19, 새번역)어리석은 부자는 많은 소출로 영혼의 양식을 삼고 앞으로 즐기며 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영혼의 주인은 그가 아니었다. 그날 밤 영혼을 회수할 수 있는 절대자가 권리를 행사하면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는 영혼을 소유에 빼앗긴 채,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계획을 세웠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소유로 인해 전 인생을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소유를 마음에서 분리해 내야 한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것이 마음을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비록 내게 주어졌으나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 부족함 없는 생활을 넘어 외유와 관광이 잦고, 사치와 호식을 축복으로 자랑하며 고민 없이 즐기는 영적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선교지를 방문한다는데 골프 장비를 가지고 가야 할지 테니스 채를 가져가야 할지 저울질하는 목사들의 들뜬 고민이 들려 오기도 한다. 과연 이분들 영혼 속에 주님과 주님 나라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자리 잡을 틈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사도 바울은 감독이 갖추어야 할 여러 자격에 대해 열거할 때,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디모데전서 3:3)라는 항목을 포함시킨다. 바로 이어서 언급하는 집사의 자격보다 감독(overseers)의 자격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언급한 것으로 보아, 감독이 중요한 직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돈을 사랑하지 아니해야 한다’(not a lover of money)는 요구조건은 집사가 될 사람들에게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아니해야 한다’(not pursuing dishonest gain)는 것보다 더 적극적이고 수준 높은 자격요건인 듯하다. 그만큼, 영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일꾼들은 소유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소유에 의해 잠식당하기 쉬운 오늘날의 영적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경계하고 점검하는 엄격한 표지의 하나로 삼아야 할 가르침이라 생각한다.책을 좋아하던 젊은 시절에 사방을 빽빽하게 책으로 장식한 목사님들의 사무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많은 책은 그분의 영적인 내공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그 무게 앞에서 나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만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심리적 위축감이 들었다. 교회는 담임 목사님의 도서 구입비로 상당액을 사례비 외에 지원해 주었고, 어쩌다 지나치는 당회장실 문 옆에는 배달된 큼직한 책 박스가 눈에 띄었다. 어느 날, 당회장실 소파에 앉아 목사님을 마주할 때,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할 겸 객쩍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책이 참 많으시네요.”“아! 내가 책 욕심이 많아요.”목사님이 반색하며 말씀을 이어 가셨다.“새 기독교 서적이 나오면 무조건 알아서 내게 배달이 되게 되어 있어요.”그러고 보니, 구석에는 아직 끈도 풀지 않은 큰 박스 두어 개가 눈에 띄었다. ‘책 욕심’욕심이 책과 결부되면 미덕으로 둔갑하는가 보다. 그럴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개인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책 읽기에 욕심을 부린다면. 하지만, 공간을 꾸미기 위해 수집에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도 미덕이 될까. 미덕은커녕 허세가 되지는 않을지. 유학을 결심하고 짐을 부쳐야 할 때가 되었다. 거기 가서도 필요하리라 선택된 물건들이 박스에 쌓였다. 그중에는 생활비를 아껴 구입한 주석서, 성경 사전 등의 소장 가치가 있는 책들이 박스들의 반이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공부하러 가니 충분히 그곳에서도 요긴하게 쓰일 것들이었다. 일반적인 신앙 서적들은 어느 교회에 기증한 터였고, 신중하게 챙긴 알짜들은 그 나라까지 기어코 나와 동행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앞으로 두고두고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석, 사전류 등을 없는 살림에 열심히 구입했고, 흐르는 시간에 비례해서 그 덩치가 점점 커졌다. 이렇게 모은 책들은 빈번한 이사 때마다 싸고 풀고 정리하는 일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빼앗아 갔다. 그때마다, 나그네 생활이 끝나고 어디에 정착한 후 번듯한 공간이 생기면, 더 이상 박스에 담을 일도, 풀어 책꽂이에 반듯하게 정리할 일도 없을 거라는 작은 소망을 위안 삼아 며칠 간의 정리 작업을 해내곤 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그런 날은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또다시 박스에 싸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번엔 달랐다. 이제 많은 책 박스들은 귀국하는 짐이 되어야 했다. ‘그동안 애착을 가지고 구입하고, 끌고 다녔던 것들인데. 또, 한국에 가면 구할 수 없는 원서들인데. 앞으로 주의 일을 하려면 필요한 재산일 텐데.’ 두 번 생각할 이유 없이 당연히 함께 가야 할 짐이었다. 하지만, 이사를 준비하면서 책들이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곳에서도 저 많은 책을 풀고, 정리하고. 또, 다시 옮겨 할 텐데, 같은 일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하는가?’ 앞으로는 새로운 것을 살림으로 만들지 않기로 다짐하고, 이미 의복 외에 정들었던 세간을 처분해 나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책들은 끝까지 곁에 있어 주어야 할 것 같은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상황과 생각은 그것들도 이젠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계속 사인을 보내왔다. 마침내, 모든 책을 처분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책 중에는 일 년에 한 번 들춰 볼까 말까 하는 두꺼운 책들이 상당수였고, 어떤 책들은 구입한 후 나중에 읽어 보리라 마음먹고 표지도 열어보지 않은 채 몇 년을 끌고 다닌 묵은 것들도 있었다. 이미 읽었지만, 나중에 또 한 번 보겠다고 보관하고는 다시 꺼내지 않은 책들도 제법 되었다. 가까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늘 가까이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힘들여 소유할 만한 이유보다 보내고 나서 오래도록 아쉬워할 만한 이유가 덜한 것들이었다.책을 떠나보내도 정 필요하면, 도서관을 방문하거나 기본적인 기독교 서적 정도는 구비한 목회자를 찾으면 해결될 것 같았다. 아니면, 전자도서를 사거나 빌려 이용하면 짐스런 책들을 더 이상 불러들이지 않아도 필요를 채우는 데 문제 될 것 같지 않았다. 애착을 가졌던 값나가는 책들을 팔고, 주고, 버리는 일은, 결코, 쓰지 않는 생활용품을 처분하는 것처럼 즐겁게 할 일이 아니었다. 마치 폐업정리 하는 주인과 같이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그분은 목회자인데 책이 별로 없어.”오래전, 한 집사님이 어떤 목사님 방을 들여다본 후 하던 소리가 생각났다. 더불어, “책 욕심”이 많다던 그 목사님의 소리도 겹쳐 들려왔다. 다행히, 단권 주석 두 권, 성경 두 권, 신학 사전 두 권을 빼고는 모든 책이 순조롭게 정리되었다. 남긴 여섯 권의 책은 급할 때 가까이 두고 쓸 의향으로 떠나보내지 않은 것들이었다. 지금도 처분한 책들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없는 아쉬움보다 자유로움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마음 한켠에는 ‘그것들이 무엇이라고’ 목사로서의 정체성을 조금이라도 거기에 두려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다. 책이라는 조그만 소유로 영혼이 부요한 적이 있었음을 후회하는 마음 또한 지우지 못한다. 6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풍족하게 주시는 이유는 명백하다. 나누고 베풀라고 주신다. 사치와 향락에 쓰기보다 돕고 사랑하는 데 쓰라고 주신다.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선한 일에 소진하라고 주신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여러 목회적 충고 가운데, 부한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내용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넉넉한 형편을 주시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한 자들에게 ‘명하라(command)’는 강한 어휘를 사용한다. 오늘날, 사도의 명령 그대로 교회 안의 부자들에게 명하여 가르치는 목회자가 있다면 아마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디모데전서 6:17-19, 새번역)하나님은 부한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고 부를 맡기셨다(18절). 한낱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지거나 거기에 소망을 두게 하는(17절) 사적 소유물로 간직하라고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 맡기신 부를 “아낌없이” “즐겨” 베풀고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하며 이로 인한 기쁨을 누리며 살라고 허락하신 것이다(18절). 주님의 뜻대로 소유를 흘려보내는 일은 결코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하늘의 계좌로 이체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정성스럽게 보내 준 쓸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그들의 섬김이 사도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마음에 새겨지는 선물이 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들의 장부(account)에 기록되는 열매라고 흥미롭게 표현한다(빌립보서 4:17). 이는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늘에 계좌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서 사랑으로 베풀고 나눈 소유는 자신의 하늘 계좌에 고스란히 기입되어 쌓이게 됨을 가르쳐 준다.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누가복음 12:33)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상충되지 않는 적절한 설명이다. 소유를 떠나보낼 때, 나의 장부의 잔고가 줄어들었다고 아쉬워하기보다 보상이 반드시 따르는 안전한 계좌에 입고되었다고 기뻐해야 할 이유이다. 성경 원리를 따라 맡겨진 부를 적절하게 내보내는 일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최상의 투자이며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7이제, 긴 전개를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다. 소유가 끄는 힘은 너무도 강하다. 타락한 본성 안에 도사린 소유욕을 부추겨 어떤 사람이라도 수하에 거느릴 수 있다. 수십 년의 선한 업적과 명성을 쌓은 지도자라고 말년에 소유의 희생양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를 탐하다 오명을 남기고 떠난 교계 거성들이 근자에도 제법 되지 않은가? 시인이 말한 부와 성공이 생명을 속량할 수 없다는 진리와,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재산이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범한 명제를 흘려듣지 말기를 바란다.소유를 사고의 모든 영역에서 분리해 내고 객체화하는 작업을 통해 소유의 지배를 끊어 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소유는 서서히 그 편리함과 위력에 나를 취하게 하고 마비시켜, 도저히 분리해 낼 수 없는 중독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에게는 성공한 자로 칭송과 명예를 얻게 할지 몰라도 생명의 목자이신 주님과의 관계성에는 실패한 자로 전락시킬 것이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소유에 대한 집착을 이길 적극적인 방법은, 가지셨으나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분이 내 속에서 그 어떤 소유보다 귀중한 존재로 자리 잡는다면, 또 그분이 약속한 하나님 나라가 실상으로 다가온다면, 소유는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 단순한 원리이지만 최선의 해법이다. 기억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교회에서, 혹은 목회에서 성공했다 하더라도 주님과의 관계성에 실패한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임을. 예수님께 나와 영생의 길을 물었던 성공한 부자 청년처럼 말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자기 위로의 위험
by Trevin Wax
2024-01-24
얼마 전 나는 Wired 인쇄판에서 “크라우드소싱 치료”를 통해 소셜 미디어에서 “자기 위로”(self-soothing)을 선호하는 우리 세대에 관한 통찰력 있는 칼럼 하나를 접했다. 검증을 위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온라인 “커뮤니티”로 전환하고 있고, 그에 따라서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 점점 더 “치료 말하기”를 의존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런 흐름이 실제로 치료를 담당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인해서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런 추세가 온라인에서 점점 더 많은 청중을 확보하는 일종의 치료의 대체 역할을 한다는 데에 있다. 대충 증세를 확인하고 의료 잡지 WebMD를 정독함으로, 자신이나 가족의 병명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잘못된 자신감처럼, 우리는 다양한 심리적 질병에 대해 조언을 제공하는 온라인 자기 계발 전문가와 자칭 치료사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 The Atlantic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이 시장에는 확실한 청중이 있다. “수많은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불안, 트라우마, 고통에 대해 더 잘 인식하라고 말하는 영향력 있는 치료사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인스타그램에는 불안한 고백과 치료 이야기로 차고 넘친다. TikTok 해시태그 #Trauma의 조회수는 60억 회 이상이다. … 5,500개 이상의 팟캐스트 제목에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들어있다.”우리 사회에 트라우마, 학대, 우울증, 불안, 그리고 독성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단어를 초래하는 다양한 사회적이고 또 심리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된 전문가로부터 받는 치료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정신 건강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방송하는 비전문가로 가득 찬 생태계, The Atlantic이 “치료 미디어”라고 부르는 세계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형성한다.”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불안 장애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접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겪는 문제까지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로 받아들이고” 있다.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각종 멍청한 진단과 단순한 해결책을 고려할 때, 틀린 말이 아니다.자기 위로와 관계 붕괴온라인 치료를 실제 관계에 적용하려는 시도보다 이 문제가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도 없다. Wired 칼럼은 당신이 소셜 미디어의 세계가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공동체라는 환상에 어떻게 빠져드는지를 설명한다. 정체성 그리고 당신의 느낌이 특별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과도한 자기만족에 빠지기 마련이며, 그건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까지 해를 끼친다.그러므로 대중 수준으로 격하된 치료의 결과로 일어나는 관계 붕괴를 목격하는 건 놀랍지 않다. 나아가서 대인 관계에서 긴장도를 높이고 모든 상호 작용에서 위기를 초래한다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녀가 하는 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에요. 당신을 지금 가스라이팅하고 있어요.”“단지 사람만 틀린 게 아니에요. 그의 견해가 해로운 겁니다.”“당신이 굳이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는 건, 그가 틀림없이 여성혐오자이기 때문이지요.”“그녀가 당신하고 어울리지 않는 건 인종차별주의자이기 때문이에요.”“상사가 ‘당신은 함께 일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사실상 ‘당신은 우려먹기가 힘들다’라는 뜻입니다.” 내게 안정감을 주는 온라인 세계에만 갇혀서 끊임없이 자신의 관점을 검증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왜곡되고 해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기 쉽다. 갈등이 생기거나 힘든 대화를 해야 할 경우를 만나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을 비난부터 하기 쉽다. 상대가 당신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만을 옹호하는 경우에 그 태도는 당신 눈에 자기애에 빠진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상대로부터 아무런 반발이 없어야, 당신이 옳았다는 의미가 된다. 자기 위로와 의심이러한 조건에서 관계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모든 불일치나 갈등이 누군가가 권력을 행사하거나 통제력을 유지하는 방법의 결과라는 의심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인간관계와 상호작용이 이뤄질 리가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숨은 동기를 갖고 있다고? 당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더 나은 무언가를 열망하는 당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게다가 이와 같은 진단은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광범위하다. 물론, 분석이 사실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당신을 덮치려는 상사가 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사나 밈, 소셜 미디어 전문가가 어떻게 그 차이를 알 수 있을까? 모든 상황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치료 언어는 도움은커녕 해로울 뿐이다. 모든 경우를 똑같이 평면화해버린다. 더 나쁜 것은, 소셜 미디어 자체 검증은 나쁜 행동마저도 선의의 표시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될 수도 있는 태도나 행동, 그래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할 대상이 도리어 당신의 선함을 드러내는 증거로 둔갑한다. 당신은 완고하고 고집이 센가? 전혀 아니다. 단지 당신은 당신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앞에서 굳건하게 버텼을 뿐이다. 당신은 교활하고 음흉한가? 아니다. 관계 탐색에 있어서 당신은 누구보다 영리하기에, 누구도 당신을 가지고 놀 수 없다. 당신은 너무 예민하고 항상 불안한가? 무슨 소리인가? 전혀 아니다. 당신은 단지 개인적인 모욕과 주변의 불공정한 분위기에 올바르게 적응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온라인 치료 크라우드소싱의 가장 큰 문제이다.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다 타인의 불의와 죄, 그리고 이기심 탓으로 돌리며, 그것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아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당신을 위로한다. 같은 비판에 괴로움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감을 느낄수록, 당신은 공동체에 참여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있을 뿐이다. 자기 위로와 외로움의 감옥Wired는 또한 내가 작년에 언급했던 문제, 즉 “트라우마”와 “학대”와 같은 언어에 일어나는 희석 현상을 지적했다. 한때 정신 건강 커뮤니티에서 쓰이던 단어가 이제는 일상적인 스트레스와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적용된다. 직원과 어려운 대화를 나누는 상사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직원이 ‘나는 지금 힘듭니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건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내 감정이 상했기에 상사는 내게 학대자인 것이다. 또는 스트레스를 느끼기에 내 직업은 나를 “자극”하는 유해 장소가 되는 것이다. Wired는 이렇게 말한다. 정상적인 인간 갈등과 불일치를 훨씬 더 복잡한 것, 즉 학대, 정신병, 임상적 나르시시즘으로 병리화하기 쉽다. 이런 식의 단어를 씀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당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을 저주하는 건 매우 쉽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갈등을 해결하거나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대신 결국 벽을 쌓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당신은 전보다 더 외로워질 것이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킨다는 생각에 벽을 쌓았지만, 실제로는 나를 지켜주는 그곳이 감옥인 셈이다.이 모든 것이 진짜 커뮤니티를 죽인다. 갈등 없는 긴밀한 공동체란 불가능하다. 그 어떤 불일치나 갈등 없이 유지되는 공동체는 사실상 가장 천박하고 피상적인 우정으로 이뤄진 곳이다. 자기 위로와 교회이 모든 이야기는 그럼 교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더불어 사는 삶에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형제자매들의 짐을 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더욱이 때때로 형제자매, 그들의 존재가 짐이 되기도 한다. 그때야말로 당신은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다. 형제가 당신의 짐이 되어도 여전히 당신은 그 곁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단순히 조종당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를 참으셨다. 우리도 똑같이 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치료 대화로 이어지는 디지털의 특성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대화와 갈등 속에서 드러나는 디지털의 함정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참된 기독교 공동체는 누군가의 감정이 항상 옳아야 한다거나, 무언가가 항상 객관적인 진실로 여겨져야 한다는 생각과 공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체험 또는 개인의 특성과 동의어인 “나의 진실” 또는 “당신의 진실”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결코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호소하지 않는 한, 다른 신자들의 지혜와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오늘날의 치료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진리로 나아갈 방법을 찾지 않는 한, 그리고 죄와 회개, 용서와 화해, 수용과 열망을 추구하지 않는 한, 교회가 아무리 살아있는 공동체를 약속하더라도 사람들은 결국에 고립을 초래하는 피상적인 온라인 세계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제: The Danger of Self-Soothing Through Social Medi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읽지 않는 시대에 성경은?
by 박혜영
2024-01-23
전철을 타고 앉으면 전 아직도 책을 읽습니다. 후줄근한 면바지에 남방, 운동화, 거의 하얗게 센 숱 많은 머리, 안경을 코에 건 모습으로 책을 꺼내 들면 나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시대에 안 맞는 건 아닌지, 어떤 때는 살짝 위축됩니다. 그럼 나도 전자책 단말기를 사서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볼지 고려한 적도 있습니다. 이내 접었습니다. 종이 질감을 포기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봅니다. 책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전부 화면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뭘 보는지 궁금해서 다른 사람들 화면을 슬쩍 쳐다봅니다. 드라마나 게임과 같이 한 곳을 계속 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손가락을 밀면서 여기저기, 이곳저곳 화면을 휙휙 바꾸고 있습니다. 집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재미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세상입니까? 책은 널려 있고,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누구라도 글을 읽을 수 있지만, 점점 고루한 물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증상, 또는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학생이지만 긴 글을 읽지 못하는 일이 있답니다. 읽기는 읽지요, 한글이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수능 시험에서 국어가 극히 어렵게 출제된 적이 있습니다. 문제 자체가 복합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었기에 국어 시험인지 과학 시험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다른 진단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문제 자체가 어렵기도 했지만, 예시된 지문이 아주 길어서 디지털 문장에 익숙한 학생들은 줄거리를 파악할 수 없었다는 분석이었습니다. 뉴스에서 그 국어 시험을 다룰 때 저도 얼핏 본 기억이 있는데, 정말 긴 지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한 번 읽고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건 극단적인 경우라 치고, 읽은 내용을 이해 못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생활하면서 아예 읽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만은 사실 아닌가요? 여러분은 최근 호흡을 길게 하여 30분 정도 한자리에서 무엇이든 읽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 지금 이 글이라도 읽고 있습니까? 읽지 않아도, 서로 길게 대화를 이어가지 못해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습니다. 일상에서는 무언가 물어보거나 처리하는 데 필요한 정도로만 말하고 쓰면 되지, 길게 대화하거나 길게 뭘 쓸 일이 없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대방을 보면서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일도 어려워지고 있다는 겁니다. 요즘은 주로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전달하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인간관계도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무슨 단어를 써서 자기 느낌을 전달해야 할지 모르고, 자기 뜻을 전달하기 위해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데, 만나서 말하라고 하면 서로 오해만 쌓일 겁니다. 청소년들은 거의 헐, 대박, 빡쳐 뭐 이런 말로만 자신을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청소년 남자아이 셋이 제 뒤에 걸어오면서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화는 아니고, 잡담 같기는 한데 말할 때마다 욕을 하니 ‘담(談)’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그냥 ‘떠들기’였습니다.역시 저는 구시대인가요? 교회와 신앙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뇌의 읽기 회로에 변형이 생겨, 주의집중과 깊은 생각이 불가능하며, 난독증이 늘어날 거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런 책(다시, 책으로)을 살펴보다가 “위기에 처한 깊이 읽기”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깊이 읽어야 깊이 생각할 텐데, 읽지 않아도 아무 지장 없고 답답하지도 않은 세상이 되었으니 개념을 모르는 사람은 늘어날 테고….“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는 성경 말씀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믿는 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믿는 도리”를 담은 책을 읽지 못하고, “믿는 도리”에 대한 설교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과연 ‘신자’ 곧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믿는 도리”를 읽지 않는 시대에 ‘믿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유튜브 세대에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요구는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지금도 그런데! 옛날에는 글을 모르고, 책이 없어 스테인드글라스에 성경 장면을 그렸다면, 너도나도 읽을 수 있고 여기저기 성경책이 있는 데도 다시 스테인드글라스에 성경 장면을 그려야 하는 시대로 되돌아갈 것만 같습니다. 돌아다니는 일은 확 줄이고, 화면은 멀리하고, 차분히 자리에 앉아 영원한 말씀을 읽으며,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신자와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요?
내 아버지 팀 켈러, 그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역사에 ...
by Michael Keller
2024-01-22
THE KELLER CENTER 작년 암 치료를 받고 있던 아버지(팀 켈러)에게 나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했는지 물었다. 구체적으로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즈, 네덜란드 신칼빈주의가 그에게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아버지는 신앙을 형성하던 초기 단계에 내적 경건보다는 기독교가 삶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신칼빈주의의 영어 번역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카이퍼와 바빙크가 체험적 경건에 관해서 남긴 저작물이 없다는 게 아니다. 아버지는 단지 영어로 번역된 그들의 책을 접하지 못했을 뿐이다.)그리고 그는 내적 경건에 관한 글을 더 많이 읽기 위해서 영국 작가들을 찾았다. 그 결과 개혁신학을 개인적이고 체험적 모델로 삼은 에드워즈와 존 오언, 그리고 여러 청교도의 책을 읽었다.켈러는 우리가 단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믿음과 예수님으로 인해 달라진 마음의 변화는 전혀 다르다. 켈러는 신칼빈주의 자료를 통해 점점 더 탈기독교화해 가는 공간에서 체험적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개혁주의를 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오웬과 에드워즈로 인해 형성된 “경건주의적” 성향을 카이퍼, 반틸, 그리고 바빙크로 대표되는 신칼빈주의에서 비롯한 “문화주의” 성향과 독특하게 융합했다.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긴 하지만, 이 두 개혁파의 전통을 하나로 합친 사람이 팀 켈러 외에는 거의 없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켈러가 그 방법을 택한 것은 1980년대부터 2020년대에 걸쳐서 떠오르는 세속 문화에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켈러가 추구한 신칼빈주의/문화주의 형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의 경건주의적 감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 그가 추구한 맥락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두 번째로, 역사적 순간에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사용한 경건주의적 가치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교회가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적용점을 살펴보겠다. 역사적 맥락우리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을 비판적이고 전략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켈러의 삶과 사역이 다루고자 했던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기독교가 당연하게 공공의 도덕적 권위로 여겨지던 분위기가 쇠퇴하던 1950년에 태어났다. 1700년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직면했던 계몽주의 개인주의가 서구의 중심 이야기로 성장한 시점이었다. 1980년대 후반 뉴욕에 도착했을 때, 켈러가 만난 가장 뚜렷한 미전도 그룹은 경력 압박에 압도되어 어려움을 겪는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교육 수준이 높고, 계층 이동이 활발했다. 성적으로 활동적일 뿐만 아니라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외롭고 또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조직화된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를 불신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심리학적 용어로 분석하는 경향이 있었고, 어딘가에 헌신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삶에서 만나는 더 큰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없었다.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왜 일을 하지? 켈러가 만난 사람은 그들이 다가 아니었다. 자신의 신앙을 직업과 통합하려고 애쓰는, 도시가 개인 생활에 가하는 윤리적 압력을 다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리스도인은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켈러는 복음을 과연 어떻게 전했을까?켈러 사역에서 만나는 두 가지 경건적 적응켈러는 자신의 상황에 맞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두 가지 혁신 기술을 사용했다.1.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재발견하면 회개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대각성 운동 내내 에드워즈는 믿음의 증거로 다양한 표적과 기사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뚜렷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반대 경우를 흔하게 접했다. 에드워즈는 사람들 사이에서 질투, 악의, 비통함, 전반적인 비열함이 증가하는 것을 목격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무효화하지 않으면서도 (부흥을 단순한 감정주의로 일축한 찰스 천시와는 반대로), 에드워즈는 믿음의 증거가 단지 외적인 표현에 뿌리를 둘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고전 13:1-3). 심지어 순종의 행위도 믿음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부흥론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시종일관 오직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할 때에만 구원(eternal acceptance)을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마찬가지로 켈러는 1980년대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다 순종만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켈러의 스승인 리처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가 지적했듯이, 많은 그리스도인은 칭의에 기초를 둔 성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성화에 기초를 두고 칭의를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이러한 영적 쇄신이 가져다준 역동성의 실천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깨우고 세속적 불신자를 개종시켰다. 켈러가 자주 말했듯이, “당신은 순종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받아들여졌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관용구는 러브레이스가 들려주는 에드워즈 해석의 요약이기도 하다. 모든 순종은 감사하는 믿음의 마음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순종이 아니다.이것을 어떻게 혁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종종 제자도와 전도를 분리했던 1980년대의 많은 미국 그리스도인에게, 비그리스도인의 핵심 문제인 불신앙이 사실상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는 문제와 하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었다. 죄를 짓는 순간에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우주의 창조주로부터 자신들이 사랑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오로지 성화만을 칭의의 증거로 여기는 한, 결코 구원을 주는 믿음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은 불안해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단지 “열심히 노력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라는 메시지가 아님을 깨닫도록 도움을 받았다. 대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위해 살고 죽으심으로써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며,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칭의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를 간단하게 표현할까?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거의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신학 전문 용어의 도움이 없이도 복음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려면 이 메시지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켈러가 제시하는 원칙은 이것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인이고 결함 투성이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꿈꾸던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존재이다.” 이 간결한 문구는 복음의 본질을 요약한다. 죄많은 인간의 본질적인 깨어짐과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되는 무한한 사랑과 수용 사이의 긴장을 분명히 설명함으로써, 켈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신학적 개념을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메시지로 뽑아냈다. 이 말은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교회에 거의 가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의 핵심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들로 하여금 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깊이 인식하도록 초대한다. 이는 또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정체성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안내하고, 나아가서 변화와 구속, 회복을 은혜 안에서 누리도록 인도하고 촉진하는 빛의 역할을 한다. 2. 교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 1980-1990년대에 걸쳐서, 공적 영역에서 물러나는 그리스도인과 믿는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신앙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속성 있는 목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은 믿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못 느낍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에드워즈의 통찰력은 여기에 답을 준다. 즉, 정서적 (마음) 영역이 인지적 (머리) 영역과 얽혀 있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확언이다. 진정한 이해는 지식을 넘어 체험까지 포괄한다. 에드워드는 설교 “하나님의 그리고 초자연의 빛”에서 지식의 이중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 개념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이 인지할 수 있도록 부여하신 선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 첫 번째는 단지 개념적일 뿐이다. … 다른 하나는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마치 마음이 어떤 개념 앞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때와 같다. … 그러므로 단지 하나님이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은혜의 사랑스러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꿀이 달콤하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꿀의 단맛을 실제로 느끼는 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생각은 켈러의 설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설교는 단순히 정보만 전달하는 플랫폼도, 그렇다고 감정적 반응만을 끌어내는 통로도 아니었다. 그의 설교는 단지 성경의 진리를 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상의 목적을 이루었다. 설교를 통해서 진리가 만져지고 체험될 수 있도록 설교를 구성했다.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영적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에드워즈의 확신을 받아들인 켈러는 생생한 이미지와 가슴 아픈 삽화가 지닌 상상력을 통해, 설교에는 이 땅과 궁극적 실재 차이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에드워즈는 결코 “무조건 말씀을 선포하라”는 뻔한 격언을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사명이 단순한 설명을 넘어 만지고 체험하는 실현에 이르도록 하는 것임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켈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에드워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가 당신을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을 녹이고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그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설교가 지향해야 할 변혁적 목표이다. 단순한 지적 이해를 넘어서서 교인들을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진리의 만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켈러는 에드워즈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관해서 개인 노트에 이렇게 썼다. 그는 내게 지금 만연한 20세기 강해설교가 실제로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었다. 설교가 지나치게 지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단순히 … 감동을 자아내는 감성적인 이야기로 설교를 채우는 건 결코 아니다. 답은 이미지, 예화, 내러티브 등 구체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구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에 있다. 신학교 시절에 나는 에드 클라우니(Ed Clowney)로부터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배웠다. … 그리고 러브레이스로부터는 에드워즈의 부흥주의에 대해서 배웠다. … 그러나 내가 복음주의 하위문화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이 중에서 그 어느 것도 내 설교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모든 게 다 빠진 전통적 강해 설교라는 보상을 받았을 뿐이다. … 나는 그때에도 분명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상 나는 단지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고 그분처럼 살라고 교인들을 다그쳤을 뿐이다. 나를 깨우기 위해서는 뉴욕에서 설교하는 강렬한 경험이 필요했다. …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변화에 직면했을 때, 사실상 내게는 필요한 모든 신학적, 역사적 자원이 다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켈러의 글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춰서 질문하게 한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우리 속 자원을 다르게 사용할 용의가 있다면, 그 자원이 우리의 접근 방식을 어떻게 향상시킬까? 현재 상황을 반영하는 필요가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끼치는 영향을 받아들인다면, 복음을 전달하는 나의 방식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개념, 진리, 범주 및 내용까지 보유하고 있던 켈러였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상황이 가져다주는 긴급한 요구에 직면해야 했다. 그렇다고 변혁적인 변화가 성경의 진리나 복음의 본질을 바꾸는 건 아니다. 단지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을 재형성했다. 그는 복음이 다양한 청중의 귀에 다 들릴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야말로 효과적인 상황화를 위한 필수 프로세스이다. 모든 세대를 위한 복음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켈러의 경건주의적 가치를 분석하면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은 재창조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막 부임한 목사였을 때, 나는 교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자책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로서 켈러가 말했다. “내 몸에 원래 내 것이었던 뼈는 하나도 없다. 내가 설교하는 모든 내용은 따지고 보면 다 다른 곳에서 나온 거야.” 이것은 중요하다. 재창조가 목사나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이 정말로 좋은 소식이고 객관적 사실이라면, 그것은 바뀔 필요가 없다. 우리의 임무가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자. 둘째, 복음은 불변하나 문화는 변한다는 게 켈러가 지향한 중요한 원칙이었다.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복음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만 해도 교회에는 “죄”와 같은 용어를 즉시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경 지식을 갖춘 교인이 대부분이었고, 목사는 그런 사실을 전제로 설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로 켈러가 만난 사람들은 그러한 근본적인 개념과 용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복음을 아예 새롭게 바꾼 건 아니다. 단지 접근 방식을 조정했을 뿐이다.켈러가 활용한 공식은 인간의 마음에는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라 단지 무질서한 사랑을 품고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었다. 좋은 일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순간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죄 많은”(sinful)이라는 용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는 우상 숭배의 언어를 활용했다. 즉,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몰두가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수준에까지 이른 현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해로운 결과를 강조했다. 특정 범주가 부족하다고 개인을 비난하는 대신, 켈러는 복음을 청중이 접근할 수 있는 용어로 바꿔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복음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켈러의 접근 방식을 반영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끊임없이 상황에 맞게 조정함으로(바꾸는 게 아니다), 나날이 더 깊어지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발맞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전도하려는 대상에게 과연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가?셋째, 문화적 변화 속에서는 역사적 맥락 전반에 걸쳐서 지속해온 유사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 복음이 어떻게 선포되었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 공부가 아니라 현대에 필요한 소통을 위해서 귀중한 자원이다. 우리의 과제는 죄, 수용, 사랑에 관한 진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에게 그 용어를 적절하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불신앙과의 싸움은 보편적이며, 이 싸움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전달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단지 지적 지식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복음은 체험적 참여와 변혁적 변화를 모두 요구한다. 복음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당장 우리부터 복음으로 인해서 움직이고 변화되어야 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일어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부지런히 분별하고 있는가? 그럼으로 지금 우리가 수행하는 복음 선포가 과거와 현재의 현실 사이에서 발생한 격차를 효과적으로 메우고 있는가?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를 위해서 사람을 바꾸는 복음의 능력을 쉬지 말고 새롭게 번역해 내야 한다. 단지 이론으로 예수님이 나를 받아들이신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많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생각은 이것이다. 내가 좋은 삶을 살고 있기에, 예수님이 나를 받아들이신 거야. 이러한 불일치는 만연한 초조감, 불안감,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부당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체험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러한 경우에 복음은 현실이 아닌 이론적인 개념으로 전락한다. 결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 복음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힘이 단지 교리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깊이 느껴지고 실천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복음의 진가를 발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제야 비로소 그 전까지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물론 그 전에도 교회를 다니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불안, 분노, 시기, 취약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만족, 감사, 평안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전보다는 낫다고 느낀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비그리스도인에게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단지 “순종하면 받아들여진다”는 또 하나의 수행 모델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수용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럼으로써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새로운 방식임을 깨달을 때야 그들의 삶은 비로소 진정한 변화를 맞을 것이다. 원제: My Dad (Tim Keller) Listened to History to Speak the Gospe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 창조세계, 그리고 기후 위기
글로벌 기독교 지도자들의 행동을 요청한다
by Kuki Rokhum, Jasmine Kwong, Dave Bookless
2024-01-20
로잔에서 서울까지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기후 관련 사건은 거의 매일 뉴스에 등장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전도 사역에 방해가 되는가, 아니면 선교를 위한 기회가 되는가?John Stott on Creation Care[1]에서, 존 스토트는 생태학적 참여가 ‘선교 사역’의 범주에 적절히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환경 참여를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선포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생태 위기를 무시할 수 없다. 기독교의 사랑은 우리가 증가하는 기후 위기와 재난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게 대응할 것을 요구한다.케이프타운 서약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예수님이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과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모든 창조세계를 포괄하는 것이기에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복음 선포는 창조세계 전체를 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는 복음적 이슈이다(CTC I-7).[2]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는 복음적 이슈라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글로벌 기후 문제2023년 7월,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그달이 사상 최고로 더운 달로 기록될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발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글로벌 열대화(global boiling)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 리더는 이끌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주저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변명할 필요도 없으며,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3]기후 문제는 인간과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며 전 세계가 점점 더 심각하게 겪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셋은 천연자원과 농업에 대한 의존도, 인구 밀도가 높은 해안 지역, 취약한 제도, 만연한 빈곤으로[4] 인해 기후 변화에 특히 더 취약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이 글을 쓴다.기후 변화는 오늘날 북반구의 부유한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난한 나라들에게 그것은 이미 고통스러운 현실이 되었다. 필리핀과 같은 섬나라의 경우 해안 어촌과 해양 생태계는 더욱 심해지고 빈번해지는 폭풍으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다. 토지 이용 변화(예: 삼림 벌채 및 채굴)로 인해 발생하는 기후 문제는 식량 안보와 생물의 다양성을 위협한다.마찬가지로, 인도는 전 세계에서 재해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나라에 든다. 위치와 지형으로 인해 사이클론, 가뭄, 홍수, 지진, 화재, 산사태 등 자연재해에 취약해졌으며, 이러한 자연재해는 더욱 극심해졌다. 생태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피해와 함께 인간에게도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중에도 이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에 가장 적은 책임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이다. 2019년 인도에서는 최소 10,281명의 농부가 극단적 선택을 했으며, 이는 전체 자살의 7.4퍼센트를 차지한다.[5]필자들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이러한 사례들은 글로벌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이에 대응하고 행동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많은 지역의 교회들이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많은 교회가 감당하기에 벅찬 도전으로 인해 마비되었다. 이러한 도전들은 무엇이며, 글로벌 기독교 공동체로서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기후 문제로부터 기회 창출2012년 창조세계 돌봄과 복음에 관한 로잔 글로벌 협의(Lausanne Global Consultation on Creation Care and the Gospel)에서 비롯된 문서인 자메이카 행동 촉구(Jamaica Call to Action)는 세계 교회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절박하고 시급하며 우리 세대에서 해결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6] 이 문서는 발표된 지 이제 10년이 되었지만 중요한 문제들을 주목하고 있어 여기서 그중 일부를 논하고자 한다.도전 1: 세계 교회는 기후 문제에 더 많이 관여해야 한다.기후에 대한 교회의 참여가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증가하는 고통을 무시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독교 복음 증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호주,[7] 영국,[8] 캐나다[9]의 조사에 따르면 창조와 기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갈망하는 기독교 청소년들이 있지만 그들이 속한 교회가 이 분야에 너무 적게 관여하고 있다고 느낀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후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더 갖추게 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온 교회는 창조와 구속의 성경 이야기 안에서 기후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창조세계 돌봄은 기독교 사역에 전문가용 옵션처럼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지구를 돌보는 책임을 주신 첫 번째 선교적 과업이었다. 피조물을 돌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우리의 핵심이며 지도자로서 우리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기회 1: 현재 창조세계를 돌보는 일에 우리가 최소한으로 참여하는 상황을 기후 문제를 배우고 참여할 기회로 전환한다.[10]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 이웃, 창조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지구를 돌보고 지구에 있는 풍부한 자원을 책임 있게 사용한다.”[11]실천 단계 #1기후 문제에 대해 더 배우자. 창조 신학과 실천에 관한 책과 기사를 읽자. 과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도전 2: 많은 그리스도인이 편안한 생활 방식에 익숙하고 단순한 삶의 방식을 주저한다. 기후 문제에 대응하려면 우리 일상생활 속 선택에 대한 정직한 평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창조세계에 대한 공정성과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소비를 조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정의롭고 겸손하게 자비롭게 살기 위해서는(미가 6:8) 이기심을 인정하고, 새로운 습관을 받아들이고,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물론, 우리는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완벽한 환경 의식과 정의로운 생활 방식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기회 2: 교회는 예수님의 삶, 즉 다른 사람을 돌보며 단순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적용하며 본받아야 한다.모든 피조물이 갈망하는 회복의 약속인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해지는 것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완전한 사람도 완전한 세상도 없다(롬 8장). 그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따라 노력해야 한다.실천 단계 #2교회안에서 그리고 공동체의 실제 필요에 따라 시작하라. 우리가 행하는 일이 환경에 해를 끼치고 있는지 평가하자. 지역의 소규모 농부들을 돕자. 제철 음식을 먹고 육류 소비를 줄이자. 대중교통을 이용하자. 소그룹으로 모여 각자의 실천에 대해 나누고 격려하자. 환경에 보존하는 전통적인 방식들을 연구하고 찾자.도전 3: 부실한 창조 신학. 우리는 성경을 가르치고 선교할 때 인간, 특히 영혼에 초점을 맞춰 왔다. 복음주의 교회는 창조세계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육체의 문제보다 영혼의 문제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수님의 주되심은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있다. 우리는 새로운 관점으로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하며, 창조세계 전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 계획의 일부인지 성찰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도자들이 창조세계 돌봄을 복음의 문제로 가르친다면, 우리는 ‘지구를 구하라’는 압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지구를 맡아 돌보도록 명하신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순종과 예배의 마음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더욱이 창조는 개인으로나 신앙 공동체로서 우리의 기도와 예배에 통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관해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가? 우리는 애통의 습관을 회복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우리는 고통과 억압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우리는 야생 동물에게 해를 끼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 얼마나 자주 회개하는가?기회 3: 세상은 주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반응한다.우리가 창조세계 돌봄을 제자도로서 수용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구원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반응할 것이다.실천 단계 #3창조세계 돌봄을 기도, 성경 공부, 그리고 예배와 함께 일상적인 리듬이 되게 하자. 자연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도전 4: 우리는 사람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이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창조세계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창조세계를 돌보는 일은 사람들의 영적, 육체적, 사회적 필요(건강, 일, 가정, 안전)를 돌보는 것을 포함하며, 이 모두가 환경에 달려 있다.많은 교회와 기독교 단체는 이미 사람들의 사회적, 경제적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계를 포함하도록 우리의 선교를 확장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돌보는 것과 자연을 돌보는 것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둘다 하나님께 중요하고 회복을 위한 그분의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기회 4: 이미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 기독교 전통/교단으로부터 배우자!우리 모두가 창조세계의 모든 측면을 잘 돌볼 수는 없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고려하도록 초대받았다.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면서 우리는 각자의 공동체와 상황에서 충실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곳이 어딘지를 분별할 수 있다.실천 단계 #4당신의 교회/단체에서 이미 이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요청하자.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구체적인 기회들에 대해 듣자. 토착 공동체들로부터 배우자.도전 5: 지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기후는 복잡하고 세계적인 문제이며,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 대해 쉽게 낙담하거나 무시하고 말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기후 위기를 해결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순종하고자 한다. 창조세계 돌봄은 우리가 걷는 제자도 여정의 일부이다. 우리가 기도와 성경 공부를 일반적인 기독교 리듬으로 삼는 것처럼, 창조세계에 대한 관심도 일상생활의 일부로 통합해야 한다.우리는 결코 창조세계의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제자도의 일부로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충실하게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실수와 갈등을 창조세계를 돌보는 여정의 일부로서 포용하는 자세도 필요하다.우리는 인내하고 그 과정을 함께 통과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롬 8:19). 그리고 이것은 피조물의 탄식 소리에 교회가 반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기회 5: 당신의 공동체가 머리, 가슴, 손 등 다양한 수준에서 참여하게 하라.창조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소망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매우 큰 격려가 될 수 있다.실천 단계 #5일회성의 행사를 넘어 다년간에 걸친 참여에 헌신하자. 당신의 공동체가 숲, 강, 바다, 도시 등 어느 한 곳에 집중해서 헌신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적소를 발굴하자.더 깊이 나아가기 기독교 자료를 통하여 과학자들과 전 세계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창조세계 돌봄의 깊이를 더하는 데 유익할 것이다. (교회와 선교 지도자들에게 적극 권장되는 내용은 다음의 ‘주’를 참조하라.)• 보다 체계적인 창조세계 돌봄의 신학을 개발하자:[12] [13] [14] [15] • 생태학 렌즈로 성경을 공부하자: [16]•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되심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예배하자: [17] [18] • 모든 창조세계를 위해 세계교회와 함께 기도하자: [19]• 교회 네트워크에 가입하고 지역 상황에 맞는 환경 활동에 참여하자: [20] • 전 세계의 현재 창조세계 돌봄 행사에 대한 업데이트를 받아보자: [21]• 창조세계 돌봄에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개인 및 단체과 함께 활동하자: [22] [23] • 기후 정책 토론에 국제적 수준으로 참여하자: [24]요약하자면, 우리가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은 이것이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 세상을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고자 하는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25]주1. RJ (Sam) Berry with Laura Yoder, John Stott on Creation Care (Illinois: IVP, 2021), https://ivpbooks.com/john-stott-on-creation-care. 2. ‘The Cape Town Commitment,’ Lausanne Movement, Part 1, Sec. 7, accessed 1 August 2023, https://lausanne.org/content/ctc/ctcommitment. 3. Ajit Niranjan, ‘‘Era of global boiling has arrived,’ says UN chief as July set to be hottest month on record,’ The Guardian, 27 July 2023, https://www.theguardian.com/science/2023/jul/27/scientists-july-world-hottest-month-record-climate-temperatures. 4. Venkatachalam Anbumozhi, Meinhard Breiling, Selvarajah Pathmarajah, and Vangimalla R. Reddy, eds. ‘Climate Change in Asia and the Pacific: How can countries adapt?’ ADBInstitute (India: SAGE, 2012), https://www.adb.org/sites/default/files/publication/159335/adbi-climate-change-asia-and-pacific-how-can-countries-adapt-highlights.pdf 5. ‘Accidental Deaths and Suicides in India,’ National Crime Records Bureau, accessed 1 August 2023, https://ncrb.gov.in/sites/default/files/ADSI-2019-FULL-REPORT.pdf. 6. ‘Creation Care and the Gospel: Jamaica Call to Action,’ Lausanne Movement, accessed 1 August 2023,https://lausanne.org/content/statement/creation-care-call-to-action. 7. ‘Leader’s Summary: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 Tearfund Climate Report,’ Tearfund,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tearfund.org.au/resources/leaders-summary-they-shall-inherit-the-earth-tearfund-climate-report. 8. ‘We are Burning Down the House,’ We Are Tearfund,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earetearfund.org/burning-down-the-house/. 9. ‘For All the Earth,’ Tearfund Canada, accessed 1 August 2023, https://tearfund.ca/climatesurvey/ 10.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Devastating Fires and the Church’s Mission’ by Tim Carriker in the March 2020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0-03/devastating-fires-churchs-mission. 11. ‘The Cape Town Commitment,’ Lausanne Movement, Part 1, Sec. 7, accessed 1 August 2023, https://lausanne.org/content/ctc/ctcommitment. 12. Colin Bell and Robert White, Creation Care and the Gospel: Reconsidering the Mission of the Church (Peabody,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2016). 13. R.J.(Sam) Berry with Laura Yoder, John Stott on Creation Care (Illinois: IVP, 2021). 14. Douglas Moo and Jonathan Moo, Creation Care: A Biblical Theology of the Natural World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2018). 15. Dave Bookless, Planetwise: Dare to Care for God’s World (Nottingham: InterVarsity Press, 2008). 16. ‘Why care for creation?’ OMF International, accessed 1August 2023, https://omf.org/resources/why-care-for-creation/. 17. Climate Vigil,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climatevigil.org/album-leadsheets. 18. ‘Doxecology,’ Resound Worship,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resoundworship.org/projects/doxecology. 19. ‘Season of Creation 2023,’ Season of Creation, accessed 1 August 2023, https://seasonofcreation.org. 20. ‘Become an A Rocha Church Partner,’ A Rocha International, accessed 1 August 2023, https://arocha.org/en/church-partners/ 21. The Pollinator: Creation Care Network News, accessed 1 August 2023, http://news.lwccn.com. 22. The Oikos Network, Oikos,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oikos-network.org 23. ‘Join the Rubbish Campiagn!’ Renew Our World Campaign,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renewourworld.net. 24. Christian Climate Observers Program (CCOP) 2023, accessed 1 August 2023, http://www.ccopclimate.org. 25. Berry, John Stott on Creation Care, 193. 원제: Climate Crisis and God’s Creation: Calling Global Christian Leaders to Act출처: lausann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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