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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경청하라! 세계 선교를 상상하라!
by Xiaoli Yang
2024-02-24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로잔운동의 지도부가 발표한 글로벌 공청회(global listening calls) 분석 보고서[1]를 읽고 난 뒤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경청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경청하고 (재)상상해야 변혁적인 힘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가 담아낼 수 있는 깊은 경청과 (재)상상의 방법과 특징은 무엇인가? 삼십 년 전, 존 스토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세상에 대해 ‘이중 경청’의 기술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2] 하지만 그는 경청하고 (재)상상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 다각적인 변화를 이루는 기술적인 행위로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 글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언어, 육체, 침묵의 세 가지 중요한 수단을 다루는 방법을 통하여, 다른 무엇보다 성령의 은혜로 경청과 (재)상상하는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초대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함께 듣고 응답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깨지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세계 선교(Missio Dei)에 참여할 수 있다.다문화적 지혜다양한 전통에 나타난 고대의 지혜는 경청과 (재)상상의 기술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보물을 제공한다. 호주 원주민 공동체들은 앉는 것, 배우는 것, 아는 것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배우고 실천해 왔다. 탄다냐(Tandanya) 국제 원주민 문화 기관에서 ‘야바라(Yabarra)-빛 속에서 꿈꾸기’라고 불리는 예술 축제에 손님들을 환영하면서, 그들은 “당신은 우드리(Wodli)에 앉도록 초청되었고 당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보는 것을 알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해의 길을 보고 들으십시오”라고 노래했다.[3]이런 종류의 경청은 단지 지식이 아닌 일상생활에 대한 지혜를 찾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앉기, 바라보기, 이해하기와 함께 완전히 구현된다. 2021년 올해의 시니어 호주인(Senior Australian)인 미리암 로즈 웅건머(Miriam-Rose Ungunmerr)는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샘을 두드리기”에 대해 말한다. 그녀가 속한 부족의 이름은 응강이쿠룽쿠르(Ngangikurungkurr)인데, 이는 ‘깊은 물소리’[4]를 의미한다. 이 부족의 구성원들은 내면에서 ‘깊은 샘물’이 솟아오를 때까지 귀 기울이는 자세를 취한다.고대 중국인들은 다섯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의 결합이 ‘경청’의 총체적인 구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배웠다. ‘Ting/청’(듣다, 聽)이라는 단어의 중국어 어원은 듣기에 필요한 다섯 가지 요소: 듣는 귀, 보는 눈, 생각하는 사고, 느끼는 마음, 그리고 온전한 주의를 위한 한 획으로 구성되는 건설적인 모델을 제공한다.[5]완전히 구현된 종류의 경청은 자신의 편견, 전제, 예상을 제쳐두고 상대를 향한 존중과 공경을 요구한다. 이해(understanding)를 얻으려면 상대방의 ‘밑에 서 있어야(stand under)’ 한다. 그러므로 경청은 겸손, 취약성, 인내의 행위이다.언어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개념에 익숙하다. 이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규범적이고 권위가 있는 말씀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기독교의 전통은 우리의 상상력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말씀을 읽는 고대의 방법인 신성한 독서(Lectio divina)는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더 깊은 친교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사색적인 접근은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우리를 읽게 하고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에 응답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팬데믹의 격동,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인종 차별, 기후 변화, 그리고 경제 침체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겪은 폭풍에 비유할 수 있다(막 4:35-41; 눅 8:23-25). 우리의 상상력을 활성화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바람과 거친 물살 한 가운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공황 상태에 빠져 미친 듯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믿음 혹은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돌보지 않으시는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변화될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동료, 협력 단체, 선교 협력 기관,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 등 다른 이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도자인 우리는 듣기보다는 더 많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귀를 열고 듣는 것이 다른 사람들, 특히 취약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며,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인으로서 첫 번째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토착민 선교, 상황화 선교는 우리 자신과 다양한 문화 속에서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그 지역의 땅에서 듣고 상상하는 깊은 감각으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경청에 있어서 종종 간과되는 부분은 내면의 자기 대화이다. 혼잣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자라게 한다. 뒤에서 하는 혼잣말은 우리를 자기 부인이나 강박의 유혹에 빠뜨릴 수도, 혹은 생명을 주는 길로 끌어줄 수도 있다. 우리 내면의 소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발견될 때, 우리는 이름을 부르고, 분별하며,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응답할 수 있다.육체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간의 육체는 신성하고, 거룩하며, 그리고 전적으로 주님 안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객체가 아니고, 하나의 사람이자 하나의 주체이다. 마치 화가에게 캔버스, 시인에게 단어처럼, 육체는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수단이기도 하다. 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존엄하게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사람들의 진심 어린 통곡을 들으셨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 그들의 믿음을 알아보셨다(눅 5:18-20; 17:11-19).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고 있던 제자들의 육체의 언어(body language)를 들으셨고, ‘그들의 눈이 피곤함’을 보셨으며, 그러므로 그들의 연약한 육체를 알아보셨다(막 26:36-46). 또한, 예수님은 적대하는 자들의 육체의 언어를 들으시고, 그들 마음속의 문제를 알아보셨다(눅 5:17-26; 7:36-40).오늘날,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칠 줄 모르고 일하며 육체적인 피로, 탈진을 자주 경험한다. 만약 그들이 신체의 중요한 신호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많은 탈진(burnout) 현상들을 초기 단계에서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역 사역 혹은 세계 선교에 참여할 때,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그들과 연결됨으로써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를 통해 깊은 의식이 표면으로 나오게 되고 실재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경험될 수 있다.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창조 전체로도 확장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성경뿐만이 아니라 나무, 꽃, 구름, 별에도 기록하신다고 주장했다. 토착민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각각의 영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물 전체를 위한 것임에 대해 많은 것을 일러준다. 복음주의의 전통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는 중요한 계명에 큰 강조를 두는 것이 맞지만(마 28:18-20),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위대한 극장 안에 앉아서 하나님의 창조물이 우리에게 설교하도록 둘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연계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에 대해 새로운 언어로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침묵많은 그리스도인이 침묵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들의 모임은 보통 소리, 말,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침묵은 매우 중요한 언어이며 사랑의 하나님이 소통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하나님의 침묵이 꼭 움직임이 없다거나 하나님께서 침묵 속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 혹은 새로운 돌파구의 탄생 전 매우 의미심장한 멈춤의 시간일 수 있다. 사무엘상은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으나, 그 말씀을 듣는 데 네 번이나 걸렸던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삼상 3:1-10). 구원자의 오심을 인내하며 기다린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사람들은, 오랜 멈춤 후에 하나님과의 교감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눅 2:26; 37-3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심문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시며, 침묵 속에서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 궁금해했을 것이다(요 8:3-11). 강력한 두 번의 멈춤(6절과 8절)은 고발자들이 죄로 물든 자신들의 삶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 자신들의 손가락을 거두도록 하는 침묵의 순간이 된다.지도자들이 모여 함께 들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기에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의 모든 질문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침묵은 모든 우리의 고통 가운에 함께 계시며, 우는 자에게 안식을 주시며, 극복해 나가는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침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처럼 그분의 계시를 알아볼 수 있는가? 때때로 가장 좋은 응답은 이야기, 시, 혹은 그림을 통해 모양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재)상상력이 솟아올라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침묵의 공간일지 모른다.일상속에서 성경의 날개가 높이 날기 위해서는 공간의 침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회화나 건축물의 여백은 내용을 비우지 않고, 오히려 가득 채운다. 침묵의 공간은 바라보는 사람이 자신의 말을 찾고 해석할 수 있도록 표면에서 그들을 향해 흐른다. 시에서 발생하는 멈춤은 우리를 친숙한 세계로부터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이 공간이 없이 우리는 형체도,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실도 가질 수 없다. 내적인 침묵은 히브리어 성경의 시집에서 발견되는 ‘셀라’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칠십인역 성서는 이 단어를 구분점으로 보여주지만, 그것은 멈추다, 가늠하다, 듣다를 가리키는 묵상의 멈춤, 중단을 의미한다.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주고 받는 침묵 속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영향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의 신성함,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기 위한 멈춤은 우리가 메시지를 씹고 먹을 수 있게 해준다. 침묵의 케노시스(kenosis)[6]상태는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받을 준비가 된 비어 있고 부서진 열린 그릇이 될 수 있도록 해주며, 이는 우리의 ‘새로운 자아’가 거하는 곳이 된다(엡 4:24).결론로잔 운동의 세계적인 모임이 열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다중심적(polycentric)이고 다성적(polyvocal)인 사명 안에서 경청하고, 현명하게 분별하며, 그리고 창의적으로 (재)상상할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자.거룩한 경청과 (재)상상의 기술을 발달시킴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추구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2024년 서울에서 열릴 제4차 로잔대회가 육체와 침묵이라는 수단을 통해 경청하고 (재)상상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을까?우리가 의도적으로 몸을 움직여 상대방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열린 자세를 취할 때, 성령의 바람이 더 강하게 불고, 희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들려올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희생이 요구되는데, 희생은 본래 ‘증인’(witness)을 의미하는 ‘순교자’(martyr)라는 단어와 종종 연관된다. 영원하시고 살아 계시는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함께 귀를 기울이는 것을 통해 희생적인 사랑을 담아낼 때, 우리는 혼란스럽고 양극화된 세상 속에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의 힘을 볼 수 있게 된다.1. ‘The Evangelical Church Interacting between the Global and the Local: An Executive Summary of the Analysis of Lausanne 4 Listening Calls,’ Lausanne Movement, Dec 1, 2021, https://lausanne.org/l4/global-listening/the-evangelical-church-interacting-between-the-global-and-the-local. 2. John R. W. Stott, The Contemporary Christian: An Urgent Plea for Double Listening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2). 3. Dean Eland, ‘Eyes on the Street: See What is Around You,’ Loving the Neighourhood, August 17, 2020, accessed 30th Sept 2022, https://lyn.unitingchurch.org.au/2020/08/. 4. Miriam-Rose Ungunmerr, ‘Listening to Another,’ Compass Theological Review 22 (1988). 1. ‘5 Listening Insights from the Chinese Character for Listening,’ SkillPacks, accessed 30th Sept 2022, https://www.skillpacks.com/chinese-character-listening-5day-plan/. 6. ‘Kenosis’ meaning ‘self-emptying of Christ’. 원제: The Transformative Power of Deep Listening출처: lausanne.org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가?
by 고상섭
2024-02-23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반대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문제 제기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는 의견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부분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본문에서 무리하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면 성경 본문의 주제가 흐트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들이 나오는 배경에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설교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구약의 특정 본문에서만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가?“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한 오해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의 저자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좁고 제한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의 뜻을 다 설교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1] 이런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정의에 대한 혼동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본문을 갈보리와 십자가상의 속죄와 연결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였지만 단순히 속죄만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레이다누스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좁은 의미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승천 모두를 하나님의 옛 언약 약속들의 성취로 선포했으며, 또한 성령님을 통한 이 예수님의 오늘날의 임재와 그의 임박한 재림을 선포했다. 간단히 말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구속사의 전 영역이라는 문맥에서 전파하는 것을 의미했다.[2]즉, 그리스도를 설교함이란 단순히 모든 본문을 십자가의 구속으로 연결하는 설교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사 전 영역을 포함한 설교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해 정의하게 되면,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해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다.“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한 오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라는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런 질문을 하는 저변에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모든 본문에서 일대일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저자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의미는 회당에서 설교하는 것과는 달리 구속의 드라마 전체를 고려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의미한다. 본문을 그리스도와 연관 지어 보는 것은 그것을 더 큰 문맥, 즉 계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목적의 맥락에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문이 주는 특정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만능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마무리를 써놓고 매주 필요할 때 골라가며 쓰라는 말이 아니다.[3]클라우니는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연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바라보는 더 큰 문맥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취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본문 안에서 인간의 한계 상황(FCF: The Fallen condition Focus)이 드러나면, 그 대안으로서 그리스도를 초청할 수도 있다.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말의 의미를 싱클레어 퍼거슨의 표현을 빌린다면,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는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며 그 구원의 은혜가 인간의 순종이라는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다면 복음이 아닌 종교적 설교, 윤리적 설교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의 선행은 선행을 통해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 공로주의가 아니라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선행이기에 모든 순종과 선행은 칭의라는 은혜가 동기로 작용한다.결국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쉬운 적용은 “칭의가 성화로 연결되는 설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는 구절을 따로 떼어 설교하지 않겠지만, 굳이 이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하라고 하면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설교로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열심은 은혜의 만족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으나” 그것을 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우리의 열심의 동기는 부족과 결핍이 아니라 은혜와 만족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은혜의 감격이 열심의 동력이 되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게으름은 인간의 열심과 결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가 우리의 열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동기가 아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개미도 저렇게 열심히 일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게으름이 습관이 되어서 늘 시작한 일을 끝마치지 못하십니까? 요한복음 13:1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그리스도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게으름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게으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랑이 우리 삶의 열심의 동기가 될 것입니다.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잠언 6:6이 포함된 본문을 이렇게 설교했다. 지혜로운 자는 누가 위험하지 않아도 내면의 동기만으로 스스로 알아서 일한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온갖 구실로 작아 보이는 일탈을 삼다가 빈궁이 닥쳐오면 깜짝 놀란다. … 이런 삶은 예수님의 삶과 크게 대비가 된다. 그분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삶에 당신이 일하지 않아 사라져버린 부분은 없는가? 우리는 일할 때도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4]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은 성경의 본문에서 무조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 본문을 포함한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조망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찰스 스펄전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이런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스펄전이 한 웨일즈의 젊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설교)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다”고 하자, 그 설교자는 “글쎄요. 성경 본문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에 있는 것을 설교해야 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영국의 모든 자그마한 동네에도, 그게 어디 있든 런던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예, 그럼요.” 그러자 스펄전은 “성경의 모든 본문도 마찬가지로 성경의 수도로 통하는 길이 있다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일세, 사랑하는 형제여, 자네의 직무는 본문을 대할 때 그리스도께로 통하는 길이 무엇일까?” 하고 말하고 곧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저 거대한 대도시, 즉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달리면서 설교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만난 적이 없네. 만에 하나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어떡하든 길 하나를 만들 것이네. 담벼락을 넘고 도랑물을 건너서라도 나의 주님께로 나아갈 것이네. 설교란 그 안에 그리스도의 향취가 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기 때문이지.”[5]스펄전은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본문 자체에서 그리스도를 무조건 연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팀 켈러도 이렇게 조언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희미하게 연상시키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로 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떠오르는 대로 무조건 덤벼서는 안 된다. 라합이 창문에 걸어 둔 붉은 줄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연상될 수는 있지만(수 2:18)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정말로 그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온전함을 잃지 않은 채 각 본문의 중심 메시지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다. 설교가 끝나기 전에, 바로 그 길을 가리키고, 바로 그 길을 여행하라”[6]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의미는 팀 켈러의 표현처럼 “온전함을 잃지 않은 채 각 본문의 중심 메시지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어떤 길‘”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1.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p.29.2. 같은 책, p.32. 3. 에드먼드 클라우니,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p.30.4. 팀 켈러, 오늘을 사는 잠언, p.28.5.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p.95. 6. 같은 책, p.96.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by Trevin Wax
2024-02-22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연구한 마이클 그레이엄과 짐 데이비스의 유익한 책, 탈기독교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를 계기로 지난 25년 동안 미국에서 발생한 교회 이탈(dechurching)의 원인과 영향에 대한 많은 논의가 최근에 있었다. 여기에는 떠난 이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방법에 대한 제안도 들어 있다. 나는 교회 이탈 현상을 좀 더 자세하게 관찰하기 위해서 내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Reconstructing Faith에 그레이엄과 데이비스, 라이언 버지를 초대해서 인터뷰했다. 왜냐하면 교회 이탈은 지금 미국 전역에서 화제가 되는 뜨거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교회 이탈을 논하려면 거기에 수반된 다른 질문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왜 교회에 가는가?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가에만 집중하다 보면, 물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인 왜 교회에 가는지를 까맣게 잊곤 한다. 사람들은 왜 교회에 갈까? 거기에 뭐가 있기에 매주 가는 걸까? 당신은 왜 교회에 가는가?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한 간단한 답이 없는 것처럼(The Great Dechurching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왜 다니는가에 대해서도 정답은 없다. 이 문제를 놓고 교인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한다면, 아마도 다양한 이유 앞에서 놀랄 것이다. 교회 지도자라면 신자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게 하나 같이 고상하고 또 강력한 신학적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자극적인 예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거라는 사실을 안다. 예배를 위해 모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온다. 그런데 진짜 이유는 보다 현실적인 경우가 많다.습관적 참석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그건 순전히 습관 때문이다. The Lamp에 기고한 글에서 매튜 왈더는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 가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거나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대접하는 것과 똑같이 미사가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식료품점이나 쇼핑몰, 동네 고등학교의 풋볼 경기에 가는 것처럼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가는 이유가 그게 항상 하는 일이고 또 항상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아직도 교회 다니는 게 당연한 동네가 있다. 거기에서는 이웃에게 “어느 교회 다니세요?”라고 묻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전혀 불쾌감을 일으키는 질문이 아니다. 습관적 참석자(the regulars)는 교회에 가는 게 일상이고, 그건 사회적 결속과 가족 안정을 위한 중요한 일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 시대를 고려할 때, 이런 사람은 점점 고령층이 되어간다. 여기에 해당하는 젊은이는 많지 않다. 습관적 참석자가 누구인가? 어머니날이나 아버지날에 자녀들과 손주들을 데리고 나타나 그들의 일상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길 바라는 부모와 조부모들이다. 책임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두 번째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책임자”(the Responsibles)라고 부른다. 안내자나 집사, 주일학교 교사거나 유아반 봉사자, 성가대 또는 주차 봉사 등, 가지 않으면 당장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소그룹에 속한 이들이다. 그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는 맡은 책임 때문이다. Everybody Loves Raymond의 한 에피소드에서 레이는 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 때문에 부모와 가족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결국 그는 성당에 가기를 꺼렸던 과거를 반성하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성당에 열심히 참석하기로 다짐한다. 하지만 그가 성당을 다니면서 깨닫게 된 건 아버지가 성당을 열심히 다닌 게 신앙 때문이 아니라 헌금 봉사와 헌금 계수하면서 사람들과 주고받는 잡담을 좋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존경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세 번째 이유는 가족 생활에까지 영향을 주는 사회적 혜택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존경자”(the respectables)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도덕적 본능을 발전시키고 유지하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교회는 도덕적으로 존중받는 곳,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곳이다. 크리스챤 스미스와 에이미 아담스직이 쓴 Handing Down the Faith(신앙 전수)는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성공적으로 전달한 가족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담고 있다. 그들의 인터뷰에는 ‘토대’ ‘베이스’ ‘기초’ 같은 단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존경자는 교회 출석이 자녀에게 좋은 삶을 살도록 이끄는 도덕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그들이 선하고 도덕적이며 품위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무언가를 제공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자기들은 가지 않았으면서도 부모들이 굳이 십대 자녀를 교회 청소년 모임이나 교회 캠프에 보내는 이유이다. 자기네는 이미 교회가 제공하는 도덕적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추구자교회에 가는 네 번째 이유로 진리를 찾기 위해서인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매주 미국 전역의 교회에는 영적으로 갈구하지만, 아직 신앙에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추구한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과 그 가르침에 관심이 있다. 대부분은 다른 부류에 해당하는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방문하지만, 일부는 스스로 교회를 찾아 다니거나 온라인에서 검색을 한 후 출석하기도 한다. 추구자(the reachers)는 규모가 가장 작다. 왜냐하면 교회 출석이 그들의 영적 여정에서 첫 번째 단계가 아니라 나중 단계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확신자마지막 부류지만 의미가 있는, 굳건함과 결단력으로 특징지어지는 믿음의 소유자가 있다. 이들은 가장 명백하게 중생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교회 출석자이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일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서 역사한다. 확신자(the resolute)의 열정과 헌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내가 처음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불신자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다. 따라서 오로지 성경적인 이유만으로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확신자는 교회를 성경적 렌즈로 본다는 측면에서 가장 독실한 신자이다. 확신자는 신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의 백성을 사랑한다. 신약성경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또한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갈구한다. 그들은 또한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중심의 방향 전환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올바른 영성 형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가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교회 참석자의 대다수가 이 독실한 그룹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교인을 구상하는 건 다양한 수준의 영적 성숙도를 지닌 다섯 가지 범주의 사람들 모두이다. 또한 습관적 참석자인 동시에 책임자일 수도 있다. 교회 출석의 미래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이 교회 출석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습관적 참석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그건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으며 동시에 매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줄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자 그룹에서도 지속적인 쇠퇴를 예상할 수 있다. 교회 이탈이 계속되고 우리 사회가 더욱 고립됨에 따라 해결해야 할 요구 사항과 더불어 각종 서비스와 활동까지 줄어들기에 서로를 연결하고 의무를 이행할 장소까지 사라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존경자 사이에서도, 기독교의 도덕적 비전을 고수하다 보면 주류 사회와 보조를 맞출 수 없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교회 출석이 초래하는 사회적 대가가 너무 높으면 상당수가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 문화의 광기에 대응하여 신앙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교회를 도덕적 건전성의 원천으로 보며 더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의 숫자도 무시할 수 없다. 성 혁명은 필연적으로 치유가 필요한 사상자를 낳을 것이다.추구자 중에서는 영적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의 증가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존 신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따뜻하게 환영하는가에,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그들에게 어떤 지혜와 가이드를 제공하는가에 달려있다. 확신자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적 변화가 계속된다면, 이 그룹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대다수를 차지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이 다음 세대에까지 자신들과 같은 확신자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이다. 확신자가 과연 기독교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추구자를 더 많이 찾고 초대하려고 할까? 교회 리더들에게 좋은 소식이 모든 건 교회 출석과 관련한 하나의 시험적인 생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소개한 분류를 비판하거나 보강하려는 모든 의견을 환영한다. 목회자와 교회 리더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당신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처음 세 가지 범주와 더 밀접하게 일치한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도 긍정적인 면이 숨어있다. 그들은 여전히 당신의 교회를 다니고 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만나고 그들이 확신자가 되도록 인도하라. 이를 위해서는 복음의 능력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믿어야 한다. 복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을 책망하고 강권하며 참된 회심을 가져온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순종을 단순한 의무에서 기쁨으로 바꾼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자유함으로, 그리고 자존심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 사랑으로 봉사하게 한다. 세상이 우리의 믿음을 비웃을 때,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일어서게 한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를 성숙시키고 성화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이는 이유에 관해서 점점 더 그분의 뜻과 일치하게 된다. 우리 공동체가 예수님의 향기를 더 많이 발산할수록, “교회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될 것이다. 원제: Why Does Anyone Go to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불확정성의 원리와 평강
by 전재훈
2024-02-21
지금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과학이라는 문명이 거대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지요. 하늘로 쏘아 올린 공은 반드시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핵심 원리 중 하나입니다. 과학이 떨어지는 공의 원인을 밝혀주었고, 쏘아 올린 모든 공은 예외 없이 모두 떨어지므로 과학의 진정성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만약 쏘아 올린 공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불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공이 계속 하늘에 머무를지, 아니면 내 머리에 떨어지지는 않을지, 혹시 내 아이가 떨어지는 공에 다치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마음은 과학의 세계로 들어가서 왜 떨어지지 않고 있는지를 규명해 주어야 맘이 편해집니다. 더 나아가 그 공이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를 예측해 주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되지요. 내 마음에 평강을 찾아주는 과학은 결정론적 사고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양은 반드시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집니다. 만약 낮이 너무 짧아서 누군가가 신적인 권능을 가지고 태양을 기브온 위에 잡아둔다면, 혹은 밤이 오지 말라고 달을 아얄론 골짜기에 가둬둔다면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들게 될 것이고, 세상은 종말을 보여주듯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과학이 준 위대한 평강입니다. 우리가 디디고 살아가는 이 땅은 안전할 것이라고 믿어야 평강이 임합니다. 하지만 뜬금없이 싱크홀이 생기면서 어느 순간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그 평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지요. 우리는 과학자들이 땅꺼짐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고, 땅꺼짐 위험 지도를 완성해 주어야 비로소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게 펴게 됩니다. 인류는 세기말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시한부 종말론 때문에 홍역을 앓아왔습니다. 몇 년 전에는 전쟁설이 등장하여 한반도를 긴장하게 만들었지요. 이런 종말론과 전쟁설 때문에 평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신앙인의 말보다 과학자의 말이 더 옳은 것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신령한 목사님을 통해 5년 후 종말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한다면 평강을 잃어버릴 사람들은 지옥에 갈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이어서 천국의 상석을 예약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지옥에 갈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그려주는 장밋빛 미래에 젖어 그날을 설레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학의 세계에 복병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시 세계에 있던 양자역학이었지요. 원자 주위의 전자들의 세계가 입자인가 파동인가를 두고 고민하다 밝혀진 것이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규명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워낙 어려운 내용인지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더 잘 알려진 불확정성의 원리는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과학의 산물입니다. 매일 아침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아침 식사를 하던 사람에게 ‘당신은 내일도 아침을 드시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일이 100퍼센트 이뤄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확률적으로 아침을 먹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일 뿐, 반드시 먹는다고는 할 수 없지요. 사람은 이상하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면 보란 듯이 아침을 굶기도 하겠지만, 그 사람이 사고로 저녁에 죽거나 다칠 수도 있으므로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의 불확정성의 원리 덕분에 이 시대가 과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버젓이 살아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틈을 내주었습니다. 물론 그 작은 틈새 사이로 보험도 생존하여 번성할 수 있게 했지요. 뿐만 아니라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와 같은 원효 철학도 가능케 했습니다. 톰 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20세기 폭스)는 ‘미래가 예측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거대 담론을 담아내었습니다. 사람의 행동양식을 통해 살인을 예측하고 미리 사전에 통제할 수 있다는 설정입니다. 이 영화 속 살인범들은 살인할 뻔한 사람들이지 실제 살인을 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런 살인을 할 뻔했던 사람들을 살인 직전에 잡아서 살인범으로 취급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문제제기였지요. 범죄 예방 수사국 소속 범죄과 수사반장이었던 존 앤더튼(톰 크루즈)은 과학적 사고관인 ‘결정론적 사고관’의 맹신자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결론에 다다르자 살인 예측 시스템의 붕괴로 결정론적 사고관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면서 끝이 납니다. 우리의 미래는 확률적으로 예측할 뿐이지, 결코 결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과학과 같은 결정론적 사고관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시한 양자역학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의지’라는 또 하나의 축이 있어서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의지’라는 놈은 결과를 분명하게 만들지 못해서 ‘진인사대천명’ 즉 최선을 다하나 결과는 하늘에 맡기게 되었지요. 여기에 나오는 ‘하늘’이 불교에서는 ‘인연’이고, 기독교에서는 ‘주님의 뜻’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결국 미래는 ‘의지’에 ‘하늘’이 합쳐서 만들어 내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의 평강은 어디에서 올까요? 가장 기본적인 평강은 물리학에 기초한 세계에 있습니다. 여름에 눈이 오면 안 되고, 겨울이 더우면 안 되지요. 낮은 환해야 하고, 밤은 캄캄해야 합니다.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어야 하고요.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밟으면 차가 나가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서야만 평강이 생기는 법입니다. 인간의 평강은 물리학적인 평강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낙관적인 세계관이 또 한 부분을 채워줘야 합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밤의 잠이 달콤한 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심히 공부해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인내는 쓰고 결과는 달다고 믿는 사람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낙관적인 세계관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라서 간혹 평강의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긍정의 힘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것도 아니라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는 사업에 실패했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존 그레이는 이혼했습니다. 자기계발서 100권 읽고도 실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낙관적인 세계관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도 뿌리 깊게 내려있습니다. 그것도 결정론적 사고관으로 위장해서 말이지요.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십일조하면 복 받는다’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된 예를 알고 있습니다. 운전하기 전에 항상 기도하시던 분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것도 봤지요. 십일조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 그렇지 않은 교인들보다 반드시 더 잘 살지는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불확정성의 원리에 갇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 안에 결정론적 사고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와 같이 분명하고도 확고한 절대 진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죽음 이후의 문제가 현재의 평강을 담보해 주지 않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평강을 주겠지만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지요. 과학의 세계에도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듯, 신앙의 세계에도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 불안이 깃들고, 낭패와 실망을 겪게 만듭니다. 하지만 과학의 세계에서 지동설이 진리이듯, 신앙의 세계에서도 분명하고도 확고한 결정론적 진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든지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평강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합니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 사랑 변함 없으신 거짓 없으신 성실하신 그 사랑’을 믿을 때 ‘세상이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오늘처럼 내일도 나를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팀 켈러가 알려주는 공격적 변증법
by Ross Bowerman
2024-02-20
공격과 수비 없이 스포츠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수비는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약점의 은폐라고 할 수도 있다. 반대로 공격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약점을 공략한다. 이 비유를 사용하면 변증에도 방어적 변증과 공격적 변증, 두 가지가 있다. 방어적 측면으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주장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한다. 반대로 공격적인 변증을 통해 우리는 세상 세계관의 약점을 드러낸다. 수비에도 능했던 팀 켈러지만, 그는 동시에 공격적 변증의 이유와 방법을 가르쳤던 사람이다.공격적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기독교를 수호하는 대중 옹호자로서 켈러는 이 세상에 믿음이 아예 없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믿음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종교적 신념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라도 현실 속에서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핵심 사항에 관해서 많은 가정을 한다. 이러한 신념은 폭로되고 조사되어야 한다. 켈러의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가 바로 “당신이 가진 의심을 의심하라”이다. 사람들은 (비록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자기에게 믿음이 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아이디어 시장’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켈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 중 한 사람인 C. 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믿음이라는 건 아주 작은 시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실제로 실행이 가능한 세계관은 고작해야 물질주의, 범신론, 그리고 유신론 세 가지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존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공격적인 변증이 될까켈러는 내용과 태도 면에서 모두 다 훌륭한 공격 모델을 보여주었다. 콘텐츠와 관련하여 켈러는 절대적 증명이 가능한 믿음 체계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믿음 체계와의 비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평가를 위해 그가 제시한 것은 세 가지 기준이었다. 나의 믿음이 얼마나 일관성 있는가(일관성의 기준)? 그 믿음이 우리의 지식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증거의 기준)? 그 믿음이 삶의 경험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생존의 기준)? 켈러는 사람들이 가진 믿음 체계가 의미, 도덕성, 진실, 정체성, 인권 등 기본이 되는 서구 문화의 가정과 욕구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성과 자원을 제대로 제공하는지 고려하라고 말했다. 믿음 체계가 성공하려면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그 믿음을 기초로 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테스트를 모두 통과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내가 가진 믿음 체계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켈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좋은 공격 모델을 만들었다. 그는 냉철한 정신, 최고의 경청 기술, 그리고 논쟁이 아니라 사람을 얻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를 수행했다. ‘성찰하는 경청’의 헌신적 옹호자인 켈러는 자신의 목표가 상대의 주장을 상대방보다 더 잘 설명해서 상대방 스스로가 그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허수아비 전략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상대의 주장이 가진 강점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켈러는 상대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 후에야 비로소 복음을 이해하고 마음을 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 다음에 켈러는 프랜시스 쉐퍼가 원조로서 선보인 전술을 사용했다. 쉐퍼는 이를 “집에서 지붕을 떼어내는 것”이라고 불렀다. 쉐퍼는 청중의 믿음을 비에 노출시켰다. 달리 말해서, 그건 일관성, 증거 및 생존 가능성에 대한 테스트였다. 쉐퍼는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집은 결코 제대로 된 생활이 가능한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고 싶었다.기독교가 진리임을 원하도록 하라블레즈 파스칼로부터 켈러가 배운 점은 기독교가 참되다고 믿기 전에 먼저 그것이 참되기를 원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 부분이 변증에 있어서 켈러의 전략을 공격적인 전략으로 이끈 주된 원인이었다. 누구나 핵심 믿음이 필요하고 또는 이미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탐구하고 공유하며 진정으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일관성, 증거 및 생존 가능성의 기준으로 자신의 믿음을 테스트할 기회가 주어지면 그들은 기꺼이 현재 믿음을 의심하고 기독교를 더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할 것이다. 그래야만 기독교 진리가 가진 긍정적 증거를 계속해서 탐구할 것이고, 나아가서 방어적인 변증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열망까지 가질 것이다. 변증 게임에서 켈러는 열심히 그러나 공정하게 플레이했다. 그는 상대팀의 존경을 받는 그런 선수였고, 사람이 아닌 공을 다루는 선수였다. 켈러처럼 마냥 좋아 보이기만 하는 사람이 그토록 다양한 공격 전략을 가르쳐줄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원제: How Tim Keller Taught Us to Be Offensiv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형과 아우, 아버지와 아들이 지켜낸 교회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여수 장천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4-02-19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19세기 말 호남의 중심지는 전주와 나주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전남으로 좁히면 나주와 순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상대적으로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의미이다. 결국 나주는 선교사들을 배척함으로 광주에 선교부가 만들어졌고, 순천은 지리상의 여건도 있었지만, 주변 지역에 비해서 늦게 복음이 들어가는 곳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순천은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시작되었음에도 성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려야 했다. 순천에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공식적으로 설치되는 것이 1913년이고, 순천에 공동체(현 순천중앙교회)가 1906년에 설립이 되는 것은 선교부 설치보다 빠른 것이지만, 순천 주변 지역에 설립된 교회들에 비하면 오히려 늦은 경우이다. 이 말은 호남 남동부지역 선교거점이 순천에 설치되었지만, 순천 읍내보다 변두리 지역에 먼저 교회가 세워졌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광양 신항리교회, 벌교 무만동교회, 여수 장천교회 등이 순천중앙교회보다 일찍 설립되었다. 그 이유는 순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불교(514년 송광사, 529년 선암사)와 유교(1407년, 순천향교, 1568년 옥천서원) 등이 이 지역의 문화와 생활, 세계관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와 유교의 풍습과 전통이 이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외래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현재도 송광사와 선암사는 전국에서 찾는 불교도들이 많고, 일반 관광객들이 많은 사찰로 유명하다.호남 남동부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남장로교회 선교부의 영향력이 직접 미쳤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의 경우만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이나 선교가 설치된 도시에서 선교사들과 접촉하는 과정을 통해서 복음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신앙을 이어가게 될 때, 그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우는 바다 건너 제주도에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아 놀랍고 귀하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여수시 율촌면에 있는 장천교회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장천교회가 설립되고 성장하는 과정에는 조일환과 조의환 형제의 역할이 컸다. 그중에 형인 조일환이 어떤 목적으로 만주로 가려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숨어들어 그곳에서 복음을 접하고 개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서 1905년 10월 자기 집에서 아우인 조의환과 이기홍, 박중호 등과 함께 오웬(Clement C. Owen) 선교사의 조사인 지원근이 중심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장천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공동체가 모임을 가지는 과정에서 조일환은 목포에 있는 프레스턴(John F. Preston) 선교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이렇게 시작된 장천교회는 광양의 신항리교회와 함께 순천 이남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 선교사들의 손이 부족한 상황이라 새롭게 설립되는 교회들을 모두 돌아볼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조사의 역할이 컸고, 조사라도 있으면 감사한 일이었다. 실제로 순천에 공식적인 선교부가 설치되는 것이 1913년이니까, 장천교회를 목회하거나 직접 목회할 수 있는 지도자는 없었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조일환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개종자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심이었다.그러한 열심은 공동체가 시작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1908년 첫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 비록 작은 평수이지만 12평 목조 예배당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작은 규모의 예배당이지만, 이러한 공적인 공간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건물이었다. 따라서 선각자로서 조일환 등은 이 공간을 활용하는 방안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 그것은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1910년 장천교회는 근대교육을 위한 여흥학교를 설립했다. 여흥학교는 교명은 ‘여수를 흥하게 하자’는 의미를 담은 여수의 여(麗)와 흥할 흥(興)을 더하여 지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는 이 여수지역에서 근대교육에 있어서 효시이다.그러나 이미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상태에서 교회가 원하는 교육이나 민족교육 등과 같은 것은 점점 시행할 수 없게 되어갔다. 일본은 한일병탄을 완성한 다음 즉시 식민지에서의 국민교육과 관련한 칙령을 내려서 식민지교육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교육을 실시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결국 1935년에 이르러서 일제의 박해가 더욱 가혹해졌다. 특별히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점차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교회로서는 학교를 지속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자진 폐교를 하기에 이르렀다.한편 조일환의 동생 조의환은 직접적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중심에서 일을 감당했다. 1908년 예배당을 건축하고, 여흥학교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형제의 열심은 신자들과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이내 예배당이 비좁아지게 되니, 1913년 기와지붕을 이은 15평 규모의 예배당을 다시 지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없는 상황인지라 공동체의 영적인 성장에는 갈급함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의환은 1909년 영수(令首)로 임명을 받아 사실상 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다.영수로 임명을 받아서 공동체를 섬기면서 1912년에는 이 교회의 장로로 임직했다. 영수와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이 교회를 섬기던 조의환은 결국 목회자의 소명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광양교회, 여수교회, 제주도 모슬포교회 등지에서 목회했다. 그러다가 제주도에서 일제에 의해서 검거되어 두 번이 투옥되었다. 그만큼 그의 항일정신과 복음을 통한 변화된 생활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로 나가는 그해에야 이 교회에는 처음으로 곽우영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1920년대, 어찌 보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가 폭력을 동반하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1922년 승주군 도룡교회, 1923년 율촌면 평촌교회, 1925년 율촌면 광암교회 등을 개척 설립함으로써 복음전파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이렇게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면서도 좁아진 예배당은 더 큰 규모의 예배당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1923년에는 학교 23평 건물을 지었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석조 예배당(80평)을 새롭게 건축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현재 유치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화재 예배당이다. 그리고 1928년에 목사가 된 조의환은 자신의 고향이며, 자신의 모교회이며, 형인 조일환과 함께 시작한 이 교회의 2대 목사로 부임을 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이 교회 5대 목사로 다시 부임하여 원로목사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그리고 1973년 다시 석조 예배당(86평)을 지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옛 건물은 부속시설로 사용하면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1년 예배당이 비좁아지면서 20여 평을 증축하여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현재 중앙에 있는 건물이다. 현재는 교제실 겸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3년 현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건축하여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지역 복음화와 교회로서 섬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장천교회를 찾았을 때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여기 소개한 대로 1924년, 1971년, 2003년에 각각 건축한 예배당들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배당이 한 장소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서 한국기독교회의 예배당 건축사에 있어서 특별한 장면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매우 특별하고,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여기 장천교회에서만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1924년에 건축한 예배당만 문화재(115호)로 보호되고 있지만, 건축사적인 의미에서 더 중요한 것은 건축 시대가 다른 세 개의 예배당이 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천교회 예배당은 각각 다른 양식과 소재로 지어진 예배당 건축의 변화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것이다.그런데 1924년에 건축된 예배당과 1971년에 지어진 예배당은 출입구가 남녀가 각기 다른 출입구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특별히 문화재 예배당은 지상 2층으로 지어진 것으로 계단을 통해서 예배당에 올라가게 했고, 남녀출입문을 따로 만들되 그 위에는 캐노피를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아마 현존하는 예배당들 가운데 이런 양식으로 지은 것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또한 이 예배당은 호남 남동부지역 최초의 석조 건물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 1971년에 지어진 예배당도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 시대까지만 해도 여전히 남자 성도와 여자 성도가 출입문을 각각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1970년까지도 남녀가 유별한 사회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이 교회에 문화재 예배당 앞에는 특별한 비석이 하나가 서 있다. ‘지한영 강도사, 지준철 성도 순교비, 2015 건립.’ 여기 새겨진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다. 이곳 율촌에서 나고 자랐으며,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지한영이 소명을 받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 조선신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당시 교회 수에 비해서 지도자가 절대 부족한 시대이다 보니, 신학생들도 목회 현장에서 필요로 했다. 지한영은 전도사 신분으로 덕충교회와 승주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그러다가 강도사 신분으로 모교회인 장천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하던 중인 1950년 공산군에 점령되었고, 목회자인 지한영은 체포되었다. 그해 9월 28일 아들 준철 군과 함께 공산군에 의해서 처형되고 말았다. 부자지간 순교를 당한 것이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다.사실 이러한 순교는 장천교회만의 일은 아니다. 호남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가 6.25사변을 전후해서 희생당한 것은 잊힐 수 없는 일이다. 아쉬운 것은 지한영 강도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 교회에는 겉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가운데 있는 예배당 종각에는 특별한 종이 있다. 특별한 관심과 함께 찾아보아야만 볼 수 있는 것인데, 이 교회의 역사와 함께 지켜온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증언해 주는 종이다. 교회 종은 종이지 무엇이 특별한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회들의 종은 나름 사연이 많다. 모든 교회가 경험했던 것은 일제 말기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다음 전쟁 물자를 확보하려는 조치로 각 가정은 물론 기관 단체들로부터 온갖 쇠붙이를 징발했다. 이때 교회의 종이나 교회에서 사용하는 도구들 가운데 어떤 형태의 쇠붙이가 되었든 모두 징발 대상이 되었다. 이에 한국의 교회들은 교회의 종을 징발당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대부분 다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데 이 교회는 그러한 수탈 과정에서 종을 지켜냈다. 특별히 이 종의 의미가 있는 것은 이 교회 설립에 동참했고, 이 교회를 섬겨온 조일환과 조의환 형제가 아버지 조병하가 별세하자 1929년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한 종을 주문 주조하면서 종에다 부모님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사연을 가진 종을 1924년에 건축한 문화재 예배당 종각에 달아 사용하다가 현재는 1971년에 새롭게 건축한 중앙에 있는 예배당 종각에 달려있다. 이 교회의 입장에서 이 종의 역사와 사연을 아는 것만으로도 장천교회의 역사와 섬김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이어갈 수 있는 동기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선교지에 기독교 화가와 음악가가 필요하다
by Byron Spradlin
2024-02-17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몇 년 전 볼리비아 인디언 목장 일꾼들이 사는 한 마을 전체가 주님께 나아왔을 때, 내 친구 선교사들은 몇 가지 어려운 질문에 직면했다.이제 주님을 구주로 알게 된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 대부분이 성경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들에게 성경을 공부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그들에게 기독교 음악이 없는데, 그들에게 어떤 노래를 부르도록 권할까? 그들의 문화적 표현에 예전(liturgy)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공동체의 어떤 관습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고백, 찬양, 경배를 표현해야 할까?이 질문들에 대해 나의 선교사 친구들은 옳은 일을 했다. 그들은 볼리비아 인디언 신자들이 자신만의 음악적 표현을 만들도록 격려했다. 그들은 문화적으로 합당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원주민들이 직접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친숙하고 진심 어린 표현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적절하고 현명할 것이라고 인정했다.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복음화가 충만하게 일어날 때, 새 신자들의 목표를 나는 그들이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공감을 일으키는 자신들의 문화적 표현을 통해 드리는 믿음과 예배를 의미한다. 참된 예배는 우리 내면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나 공동체의 핵심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숙한 표현을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1] 그래서 주님의 복음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복음으로 구원받고 해방되고 변화된 그 마음에서 노래와 춤, 의식과 전례 및 장식의 고유한 표현이 샘솟게 된다.또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종종 문맹으로 인해 많은 의사 소통이 필연적으로 예술적 또는 상상적 표현을 통해 이루어진다. 음악, 드라마, 스토리텔링, 그림, 건축, 마임, 인형, 공예, 축제, 운동, 의식, 음식, 장식 등은 공동체가 이를 통해 예배하고, 배우고, 제자 삼고, 축하하는 모든 형태의 예술적 표현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서구 세계에서 흔히 ‘예술’이라고 부른다)이 문화적으로 친숙하지 않다면,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예배가 되기 어렵고, 복음의 전달은 덜 효과적일 것이며, 공동체의 성장은 더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표현이 낯설고 어색하거나, 단순히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예술적 소통가와 예술적 표현 전문가들은 종종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진전시키는 데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을 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표현 전문가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디자인과 표현에 있어 비범한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이 개념은 장인(craftsman, 상상력을 요하는 디자인이나 표현에 있어서 특출하게 뛰어난 사람)이라는 히브리어 개념과 관련된 용어에 근거한 것이다. 음악가와 가수도 이 큰 범주에 속한다. 그들은 목사나 교사, 음악가, 화가, 작가, 관리자, 공장 노동자, 농부 또는 주부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주신 ‘특출한’ 상상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상상력’을 갖고 있지만, 문화적으로 적절한 노래나 가사, 시, 이야기, 움직임, 시각적 표현, 환경적 감수성 등을 만들어 내는 미적 감수성의 비범한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또한 적절한 예술 형식과 방법을 예배나 가르침, 제자도 훈련, 전도에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비전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기독교 음악가와 예술가의 중요한 역할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로 듣고 이해하기 훨씬 전에 마음으로 듣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학자나 변증가가 아니라 예술가와 시인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는 기독교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세계 복음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지상명령이 진정으로 수행된 곳에 침투된 문화에서 자신의 마음의 언어와 문화적 스타일로 예배하고 신앙을 선포하게 되는 것은 매우 마땅한 일이다.이러한 마음의 언어와 문화적 스타일은 예술 사역 전문가 또는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 전문가인 토착 예술가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시각과 음악, 스토리텔링 또는 기타 집합적인 표현의 역학이 사용되는 의식이나 예전 또는 공식 대회에서 공적 및 사적 예배의 표현에서 믿는 공동체를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예술 사역 전문가이다.“현재 예배는 현대 복음주의에서 잃어버린 보석입니다. … 그것은 현대 교회에서 잃어버린 하나의 빛나는 보석이며, 나는 우리가 그것을 찾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토저(A. W. Tozer)는 이렇게 썼다.[2] 그리고 가장 귀중한 보석은 자신의 문화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예배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상징과 은유, 의식을 필요로 한다.이러한 예배는 머리의 언어를 넘어 마음의 언어로 하나님의 실재와 진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술적 표현의 영역일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인격과 나라의 실재를 말을 뛰어넘어서 표현할 수 있도록 현대의 예배 예술가들을 특별히 준비시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배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을 교회와 그 사명의 자리에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배치해야 한다.남아프리카 북동부 콰줄루나탈(KwaZulu-Natal)의 광대한 시골 지역 출신의 기독교 공예가들이 성경에 대한 진정한 아프리카의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밝은 구슬 장식의 태피스트리. 출처: 로잔운동 예술 및 음악 사역 인력에 대한 교회 내부의 저항젊은 신자로서 나는 두 가지를 아주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는 교회 지도부가 예술 전문가를 신뢰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술계가 기독교 예술가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깨달음을 통해 나는 세계 복음화의 더 큰 대의를 위해 예술가들과 음악가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셨음을 느꼈다. 나는 또한 이러한 예술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역 구조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열정은 음악가와 예술가, 그리고 모든 종류의 창조적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선교 기관인 국제 기독교 증인 예술가회(Artists in Christian Testimony International, ACT Intl)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토착 예배와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에 헌신된 사람들이다.이 분야의 역사가 50년 정도 되었는데, 이제는 비록 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사역과 선교에서 예술적, 음악적 전략의 중요성에 대해 더 개방적이 되었지만, 교회 지도자들의 마음에는 이러한 저항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예술적 표현과 방법 및 전략에 대한 전략적 성격을 이해하는 소수의 새로운 구성원들에게 기꺼이 제공되는 “사역 촉진 구조”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제자 양육과 교회 개척, 하이브리드 예배 큐레이팅 등의 사역 콘텐츠를 개발하는 실험을 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필요: 예술가와 음악가를 위한 선교적 구조예술적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이다.처음부터 ACT Intl은 사람들이 적절한 문화적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선포하도록 돕고, 교회가 적절한 예배를 열방에 가져오게 하는 세계 복음화와 총체적 사역을 위해 음악가와 예술가에게 힘을 실어주는 데 전념해 왔다. 이 일들은 음악과 예술을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의 문화를 되찾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 명령의 열쇠이다. 예술적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이다. 그래서 ACT Intl은 이 세 가지 영역을 모두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예술 사역자를 찾고 파송하려는 더 많은 선교 기관이 필요하다.창조적인 하나님 나라의 종들이 모든 문화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예술가들을 사역에 동원하는 유사한 운동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오래지 않아 주님은 우리에게 테네시주 내슈빌에 위치하도록 지시하셨다. 이곳은 현재 음악의 도시이자 기독교 음악의 본고장으로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큰 녹음 계약을 기다리고 있는 엄청난 수의 음악가와 아티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보수나 팡파르 없이 교도소 사역을 통해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ACT Intl의 교도소 사역은 실습을 통해 배우는 전도 훈련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교도소 사역이 성장함에 따라 예술가, 음악가, 무용수, 배우들에게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화된 기회를 제공했다.필요: 예술과 음악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을 위한 더 많은 제자 훈련과 교육우리는 또한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예술가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더 심도 있는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필요는 현재 uSeminary.org 및 Worshipedia.org라고 하는 예술-사역 훈련 프로그램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경험 많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이 그들의 지혜를 구체화하고 전달할 수 있는 고품질, 저비용의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예술 사역을 위한 성경적 신학, 성경적 전략 및 성경적 기술을 탐구한다. 우리는 현재 uSeminary, Worshipedia, uSeminary Publishing 세 가지 교육 서비스를 위한 온라인 포털을 보유하고 있다.ACT Intl 창작 예술가 커뮤니티는 이미 사역 중인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두 명의 초기 예는 현대 음악가인 마티 맥콜(Marty McCall)과 스캇 웨슬리 브라운(Scott Wesley Brown)이다. 두 형제는 내슈빌 음악가를 돌보는 데 중점을 둔 월간 ACT Intl Christian Musicians Fellowship을 주최하는 데 서로 다른 시간에 나와 함께하게 되었다. 마티와 스콧의 목회적 강점이 표면화되자, 하나님은 순회 사역에 예배 목회를 추가하여 지역 교회에서 리더십 역할을 하도록 두 사람을 감동시키셨다. ACT Intl과 연결된 다른 사람들은 해외에서 단기 음악 봉사 활동을 했다. 일단 지역 교회의 지경 너머의 사역에 참여하게 되면, 다음 단계로 예술적 방법과 전략을 통한 단기 선교와 지속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 쉬워졌다.봉사할 준비가 됨: 예배 예술과 다른 창조적인 하나님 나라 일꾼들창조적인 하나님 나라 일꾼들과 예배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은 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잡아당김을 느끼고 있다. 많은 사람이 멘토링과 지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을 식별하고, 그들을 참여시키고, 그들을 배치하는 구조를 개발하고,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의도적으로 격려해야 한다. 세계 복음화는 예술 사역의 실천가와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 전문가의 참여 없이는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그러므로 당신이 창의적이라면, 매일의 예배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집중력과 사명을 주님께 간구하고, 당신의 예술적 열정과 기술을 그의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당신이 교회에서 섬기는 리더라면 어떤 자격으로든, 당신의 영향이 미치는 영역에서 예술적인 사람들을 찾으라고 나는 촉구하고 싶다. 그런 다음 그들을 볼 때, 그들을 돌보고, 그들과 연결하고, 긍정하고 존경하고, 지원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강력한 방법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배에서 그의 영광을 표현하고, 용서와 접근에 대한 예수님의 위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성령께서 많은 사람의 삶에서 역사하실 아름다운 그릇으로 봉사하도록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특히 우리를 흑암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하여 해방된 주님의 예술 영역의 종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세계 복음 전도가 더욱 번성하게 될 것이다. 부디 여러분이 복음을 위한 이 풍부한 창조적 예술가 그룹을 참여시키고 돌보는 일을 지지하게 되기를 바란다.주1. ‘Christian Communities For Every Context’ by Michael Moynagh in the September 2020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0-09/christian-communities-for-every-context. 2. A. W. Tozer, Worship: The Missing Jewel (Camp Hill, Pennsylvania: Christian Publications, 1961), 9.원제: The Critical Role of Christian Artists and Musicians in Missions출처: lausanne.org
‘무교’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by Joe Carter
2024-02-16
지난 십 년간 종교계에서는 새로운 인구통계 항목인 “무교(Nones)”가 꾸준히 비율을 높이며 두각을 나타냈다.“무교”는 종교 정체성 조사에서 “(종교) 없음”이라고 응답하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로서 기존의 종교 전통과 일치하는 부분이 없음을 나타낸다. 퓨(Pew)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무교라고 답한 사람들 가운데 17퍼센트가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또 20퍼센트는 불가지론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63%)는 단지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 없음”을 선택했다.무교 가운데 69퍼센트는 50세 미만이고 31퍼센트는 50세 이상이다. (상대적으로 종교를 가진 미국 성인의 45퍼센트는 50세 미만이고, 55퍼센트는 50세 이상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무교는 남성(51%)과 여성(47%)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나타난다. 지난 50년간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1950년대에 특정 종교와 관련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거의 0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인 네 명 중 한 명(28%)이 무교라고 말한다. 이러한 추세는 현대 세계가 처한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종교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담론 분야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무교의 부상을 신앙 포기와 무종교(irreligiosity)의 증가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기억할 점은 무교가 우리 주변에서 없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존재했다. 나디아 윌리엄스는 Cultural Christians in the Early Church(초기 교회의 문화 그리스도인)에서 이 용어가 지칭하는 이들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지만, 외적 행동,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내적 생각과 동기는 기독교 신앙과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주변 문화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윌리엄스의 책이 짚어주는 포인트는 명확하다. 문화적 기독교를 현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그것은 교회가 생긴 이래로 항상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무종교인의 증가가 이와 관련된 현상이며 오늘날 자신을 무교라고 규정하는 많은 미국인은 단지 수십 년 전의 문화적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다.유행하는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종교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종교 정체성을 채택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니케아 신경의 고백을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기독교 신앙을 거부한다는 건, 그 종교가 주장하는 명제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물론 이것도 사람들이 종교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로 무교인 사람이 가장 자주 제기하는 게 다름 아니라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이다. 무교의 무려 60퍼센트가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무종교를 지향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믿음이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에 기반을 둔다고 말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각각 83%와 78%),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이라는 응답자 중에서는 단지 절반 미만(48%)이 같은 대답을 했다. 무교 중 상당수(47%)가 종교 단체에 대한 혐오가 비종교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답했다. 약 3분의 1(30%)은 종교인으로부터 겪은 나쁜 경험을 언급한다. 전체적으로, 무교의 55퍼센트가 종교 단체나 종교인(또는 둘 다)을 자신들이 비종교적인 주요 이유로 언급했다.믿음의 형성이라는 과정이 단지 추론에만 기반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기에 이런 결과는 놀랍지 않다. 팀 켈러는 인간의 지식에는 (1) 합리적/지적, (2) 경험적/직관적, (3) 사회적/실용적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서 (1) “그것에 타당한 이유가 있고” (2) “그것이 우리의 내적 경험과 일치하며” (3)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진짜로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켈러는 “적어도 교회에 대한 환멸 때문에 ‘확고하고 활동적인 신자’에서 ‘완전한 불신자’로 변하는 일부 사람들은 세 번째의 사회적 측면에서 보아야 하며, 그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만큼은 거의 확고하게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특히 종교나 정치처럼 사회 현상에 대한 믿음 중 상당수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사회적/실용적 측면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유형의 믿음을 경제학자 아놀드 클링(Arnold Kling)은 “유행을 타는 믿음”이라고 불렀다. 즉, 내용의 타당성과 관계없이 동료들 사이에서 나의 지위를 높이거나 최소한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믿음을 말한다. 클링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젊고 부유한 십대들이 점점 더 LGBTQ+라고 선언하는 건,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유행이기 때문이에요.” 나를 포함한 많은 보수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양성애, 섭식 장애, 성전환과 같은 부정적인 행동이 급증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런 행동의 기본이 되는 신념이 점점 더 대중화되고 동료들에 의해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현상을 보면서도 우리가 종종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인기를 얻고 널리 채택되기를 원하는 믿음, 즉 기독교의 믿음에도 얼마든지 동일한 과정이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믿음은 참되고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통 복음주의 신앙이 유행하는 믿음이 되기를 원한다.기독교는 미국에서 아주 오랫동안 유행하는 믿음이었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기독교는 가장 유행하는 믿음 중 하나로서 그 지위를 유지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하나의 문화 브랜드로서 누리던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당수의 미국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 꼬리표를 별 부담 없이 “그리스도인”에서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으로 바꾸는 데에는 족히 또 한 번의 50년이 더 걸릴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독교가 유행하는 믿음이었던 이유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향수에 젖기 쉽다. 그러나 유행이 된 다른 믿음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또한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거나 유지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사람들의 비율은 언제나 높았다. 나의 논제가 정확하다면 그러니까 과거에 상당수의 미국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이유가 단지 유행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라면, 오늘날 무교의 급부상도 철저한 무종교성의 증가 때문이라기보다는 항상 존재했던 무언가가 드러난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니까 일부 미국인들의 경우에 이전에 유행했던 특정 믿음을 더 유행하는 새로운 믿음으로 바꿨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힘든 도전과 함께 상당한 기회를 함께 제공한다. 더 많은 위선을 통한 더 나은 도덕성먼저 도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미국에서 기독교가 유행했을 때 기독교 도덕은 매우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물론, 기독교 도덕의 상당 부분, 즉, 인종 평등의 경우에 미국의 역사 전반에 걸쳐 철저하게 무시받았다. 그러나 미국 역사의 초기에 기독교의 도덕 원칙(특히 성과 관련된 원칙)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매우 높게 가치를 인정받았고, 그 결과 도덕 나침반뿐 아니라 죄악된 충동을 억제하는 데에까지 많은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예언서, 산상수훈, 바울서신은 기독교 신앙에 완전히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인정되는 윤리적 행동에 대한 명확한 틀을 제공했다. 기독교 도덕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존경심은 특정 행동을 억제하고 성경적 원칙에 기초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반대로,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 도덕의 지위가 쇠퇴함에 따라 죄악된 행동에 대한 외부 제한도 그에 상응하여 침식되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부패한 마음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28절)을 허용한 사회에 생길 비극이 무엇일지를 경고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경고가 현실이 된 사회를 목격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가 사라지는 순간, 개인은 한때 통제되었던 충동에 호기심을 느끼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시스템이 유지되었던 것은 많은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위선자였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이 실천하지 않는 도덕 표준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1973년에는 미국인의 절반 미만(43%)이 혼전 성관계를 지지했다. 이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 때문에 결혼 외의 성관계를 반대했지만, 그중 상당수는 여전히 불법적인 성적 행위에 가담하고 있었다. 스스로 공언한 믿음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은 용어의 정의상 위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행동이 (최소한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고 그 점을 기꺼이 인정했다.그렇다면 이런 식의 위선이 대안보다 더 나을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라메쉬 포누루가 주장한 것처럼 위선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도덕적 행위에 대한 공공 표준이 영향력을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그 표준을 믿는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품위 있고 관대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위선은 필수적이다.” 다른 말로 해서, 최선의 선택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선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믿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다.이런 식의 위선을 선호해야 하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문화적 기독교에서 무교 상태로 전환되면서 상당한 손실이 발생한 건 사실이다. 기독교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참된 믿음으로 가는 길에 오늘날처럼 외부의 장애물이 많지는 않았다. 더불어서 당시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믿음 때문에 생계를 잃을 염려 없이 “평안하고 조용한 생활”(딤전 2:2)을 하기가 더 쉬웠다. 그러므로 미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왜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기독교가 다시 유행할 가능성은 없으며 무교를 표방하는 이들에게 과거 문화적 기독교 시대의 위선으로 돌아가라는 호소는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기독교 이전이나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넘치는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아예 무교인 사람들이 기독교의 도덕을 사용해서 충분히 도덕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전례없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염소 판별기다행히도 심각한 도전과 함께 기회도 찾아온다. 이전에 문화적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무교가 됨으로써 누가 “염소”인지를 확실하게 가릴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참된 신자가 아님을 분명하게 한다(마 7:21-23).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 25:31-33).미래에 염소들은 예수님에 의해 가려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염소 판별기”가 1776년에 발명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누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이고, 누가 “염소”인지 단박에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에 유리한 유행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심지어 도덕적인 삶도 살았지만, 그들은 사실상 “거듭나지” 않은 염소였던 것이다(요 3:3).만약에 그런 염소 판별기가 있었다면, 기독교는 한참 전에 유행과는 거리가 먼 종교가 되었을 것이고, 미국에서 도덕성의 쇠퇴는 수십 년 더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역사의 매 단계에서 유행에 이끌려 그리스도인 행세를 한 염소를 식별하고 그들을 진짜 믿는 양과 분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교회는 다니지만 진짜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건 사실상 시종일관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밥 존슨은 그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가장 확실한 전도 대상자는 언제나 교회 안에 있습니다.” 무교 현상을 일종의 자체 식별이 가능한 염소 판별기라고 생각하자. 과거에는 그리스도인 양들 사이에 숨어서 거듭나지 않은 염소로 남아 있던 이들이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더 이상 숨지 않고 진짜 양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들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임을 당당하게 선포한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이제는 모를 수가 없다. 따라서 전도가 훨씬 더 쉽게 되었다. (아무 목사나 붙잡고 물어보라. 또는 단편 소설 계시의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에게 물어보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불신자를 전도하는 게 쉬운지 아니면 독선적이고 기독교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거듭나지 않은 문화적 그리스도인을 전도하는 게 쉬운지 말이다.)무교의 약 44퍼센트(무신론자의 73퍼센트 포함)는 삶에서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종교를 가질 시간이 없어서 비종교를 택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그들의 필요를 본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 예수님이 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없다종교 정체성의 새로운 변화는 전도를 위한 독특한 기회를 제공한다. 어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문화적 기독교에서 훨씬 더 정직한 자기 정체성이라는 무교로의 전환은 복음을 나누기 위한 보다 명확한 환경을 제공한다. 이는 종교에 대한 불신이나 무관심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이며, 그들이 잠재적으로 문화적 가식의 장벽 없이 복음의 진리를 듣는 데 더 쉽게 마음을 열도록 하는 기회이다. 이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에 나오는 상황과 비슷하다. 씨 뿌리는 사람은 다양한 땅에 씨앗을 뿌리는데, 그 결과는 복음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다. 어떤 씨앗은 길에 떨어지고, 더러는 돌밭과 또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일부는 좋은 땅에 심겨진다. 이 비유에서 무교는 문화적 기독교라는 가시가 제거된 땅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땅은 이제 복음이 역사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복음의 씨앗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뿌리고, 그중 일부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 맺기를 믿는 것이다. 동시에 무교의 부상은 교회 내 성찰과 개혁을 요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문화적 형태의 기독교를 장려하는가? 우리 교회가 삶에서 역사하는 복음의 변혁적인 힘을 드러내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패턴을 따르라는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가? 무교의 증가는 교회가 제자를 삼는 핵심 사명(마 28:19-20)을 다시 다짐하고, 기독교의 믿음이 단지 유행하는 부속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는 관계임을 확신하도록 하는 기회이다. 무교의 증가를 보며 실망해서도 또 현재에 안주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 전도 노력에 활력을 불어넣는 도전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내가 믿는 신앙을 삶에서 제대로 실천하겠다는 자극을 받아야 한다. 더 신실하게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더 큰 열매를 주실 주님의 주권을 신뢰하며(고전 3:6),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와 진리의 능력을 삶으로 보여주며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이라는 대답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을 믿음”으로 바뀌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원제: ‘Nones’ Have Always Been with U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공감과 위로의 배신
공감에서 성육신으로
by 이춘성
2024-02-15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던 칼 트루먼(Carl R. Trueman)은 최근 어느 지역에서 열린 로마 가톨릭 신부들과 개신교 목사들의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곳에는 소위 복음주의 신학을 가진 개신교 목사들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그 모임에 참여한 후 자기와 같은 복음주의 목사들에게 이질감을 느꼈고, 그 소회를 한 기독교 잡지에 기고하였다. 그 내용은 그가 적어도 성자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에 있어서는 복음주의 목사들보다 로마 가톨릭의 수도회 소속 신부들에게서 더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후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곳에 참여한 개신교 목사들이 그리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분이지만,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신부의 예수님은 성부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죄를 해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이다. 트루먼의 지적처럼, 현대 교회의 설교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와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수가 위로와 공감에 대한 것이다. 모두 괜찮고, 네 잘못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메시지가 설교단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설교가 정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교회 안에서 정죄의 언어는 죄악으로 거부당하고 있다.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청중에게 배척당하고, 설교자들에게서도 이질적인 언어가 되었다. 무조건 죄악과 부정적인 말로 우울하게 하는 메시지도 문제지만, 분별 없는 공감과 위로도 큰 문제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자신의 죄를 상대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억울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정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더 큰 쾌락과 안정을 위해 약의 용량을 늘리지만, 그것이 그를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답 없는 위로와 공감 또한 문제의 근원인 죄를 외면하게 만들어 상처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위로와 공감에 대해서 뭐라 말하고 있을까? 예수님의 공감 첫째로 성경은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신다는 사실이 기록된 성경 말씀은 히브리서 4:15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영어 성경(ESV)은 이 말씀에서 ‘동정’을 ‘공감’(sympathize)로 번역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이 둘은 서로 바꿔 사용해도 의미상의 문제가 없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시고 이해하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공감을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강조한다. 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은 인간이 처한 죄악의 환경, 그리고 죄의 비참함에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둘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은 인간이 처한 현실에 공감하시지만, 그 공감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히브리서 4:15의 ‘시험’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유혹’이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과 같은 죄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또한 그 유혹을 견디고 이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 갈등과 죄에 취약한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경험하셨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예수님의 공감은 여기까지라고,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 있다. 성경은 그 공감과 위로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예수님의 공감은 죄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 네가 죄를 지은 것 모두 공감한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견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네 마음을 내가 다 알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도 너와 비슷해. 그러니 난 널 깊이 공감하고 위로해.” 이런 식의 공감과 위로가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가 결코 아니라는 의미이다.성육신과 복음C.S. 루이스는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장 위대한 기적”(the Grand Miracle)이라고 부르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아래로 내려가십니다. … 자신이 창조하신 자연의 그 뿌리와 해저까지 내려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내려가시는 것은 다시 올라가시기 위함입니다. 황폐된 세상 전체를 자신과 함께 위로 들어 올리시기 위함입니다.”(기적, 218) 이어서 루이스는 성육신은 힘센 사람이 커다랗고 복잡하게 생긴 짐을 들기 위해 자기 몸을 거의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짐 밑으로 숙이는 것에 비유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큰 짐을 어깨에 사뿐히 짊어지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육신의 신비는 낮아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올라가는 ‘상승’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상승이 인간에게 복음인 이유는 그분 홀로 상승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상승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야말로 복음 그 자체이다. 결과적으로 복음의 핵심은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 해결과 상승에 있다. 위로와 공감은 전능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높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상승할 때, 위로와 공감은 그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된다. 위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위로와 공감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가장 위대한 소식’(the Grand News)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22)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신학교 교수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
by Sarah Eekhoff Zylstra·Robert Smith Jr.
2024-02-14
마스크를 쓴 네 명의 청년이 식당에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직원들은 강도임을 직감했다. 주방에 있는 요리사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도망갔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요리사는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요리사 토니 스미스는 원래 그날 근무가 아니었다. 그날 밤 할머니와 함께 자이언츠와 레인저스의 2010년 월드 시리즈를 볼 계획이었는데, 교대 근무를 해달라는 동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도들은 토니를 끌고 가서 금전 등록기의 잠금을 해제하라고 했다. 그러나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금전 등록기가 열리지 않았고, 강도 중 하나인 엑스터시에 취한 17살짜리 소년이 토니를 총으로 쐈다.토니의 아버지이자 비슨신학교(Beeson Divinity School) 설교학 교수인 로버트 스미스가 막내아들이 총에 맞았다는 전화를 받은 건 루이지애나 배턴 루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45분 후에 아들이 사망했다는 두 번째 전화를 받았다. 토니는 말 그대로 아무 의미 없는 죽임을 당했다. 그날 밤 강도들은 단돈 일 달러도 훔쳐 가지 못했다. 스미스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주권자라고 고백하는 법을 배우는 거지요. 해가 빛날 때야 쉬운 고백이지만, 해가 지면 말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고백은 이제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 됩니다.” 스미스는 적지 않은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냈다. 그의 첫 아내는 세 아들이 어렸을 때 루푸스로 사망했다. 15년 동안 암 투병하던 큰아들은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다. 자신 또한 2021년에 뇌졸중을 앓았고 이런저런 건강 문제를 갖고 있다. 그는 왜 이런 일이 자기에 일어나는지 모른다. “우리는 미스터리를 풀거나,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해독하거나, 알 수 없는 것을 알아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갈보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다치게 하셨습니다. 빌라도와 군인들은 모든 게 자기들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스미스는 하나님의 주권을 붙잡고 토니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했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계속해서 전 세계를 다니며 사역하고, 가르치고, 또 설교한다. 그는 이번에 Crossway에서 새로 나온 ESV 오디오 성경 전체를 낭독했다. 몇 달만 지나면 27년을 보낸 비슨에서 은퇴한다. TGC는 스미스에게 슬픔과 아들의 살인자를 용서하는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6주에 걸친 성경 전체 낭독에 관해서 물었다.사망한 직계 가족 세 명 중에서 토니는 살해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주는 슬픔은 종류가 다른가요? 모든 이별은 고통스럽고 다 뚜렷합니다. 병으로 죽은 아이들 엄나의 죽음은 꼭 비극적이진 않았어요. 우리에게는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있었거든요. 아내는 2년 반 동안 아팠습니다. 토니의 형 로버트 3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요. 사실 우리는 로버트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의사가 2-3년 안에 죽을 거라고 했는데, 무려 15년을 살았거든요. 토니는 서른세 살이었습니다. 우리도 통보받은 게 없고 그냥 전화만 받았어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토니도 우리 것이 아니다. 토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우리도 기다리고 계신다. 언젠가 우리는 토니를 다시 만나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라고요.이런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봅니까? 나는 토니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고, 그 추도사를 바탕으로 The Oasis of God: From Mourning to Morning(하나님의 오아시스: 슬픔에서 아침으로)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결코 쓰고 싶었던 책은 아니었지만, 그 책은 내게 다양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하면서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끌렸고, 나도 다른 이들에게서 매력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비슷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실로 놀라운 기회였습니다.당신은 토니를 죽인 청년에게도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나요?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지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내 아들이 그렇게 죽는다는 게요.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약 8개월 후, 나는 선교 사업차 케냐 나이로비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귀에 들린 건 아니지만,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주님이 물으시더군요. 너는 용서를 믿느냐? 예, 믿습니다. 너는 용서를 가르치고 또 설교하느냐? 예, 그렇습니다. 나는 네가 토니의 살인자를 용서하길 원한다.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용서란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 한다는 걸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뭔가가 현실이 되려면 가장 먼저 마음속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상황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법정, 수갑을 차고 15년 형을 선고받고 가던 청년, 그리고 내 아들의 죽음. 그 모든 걸 말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악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압니다. 나는 계속해서 죄를 저질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깨달았습니다. 토니를 잃었지만, 그건 내가 원했던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셨습니다. 그러나 성금요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게만은 칼을 내리꽂았습니다. 하나님은 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그런 사실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오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체험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만남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내가 하기 싫은 일과 할 수 없는 일까지 다 하도록 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일, 즉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그 젊은 친구에게 용서한다고 말했습니까? 예, 그랬지요. 편지를 써서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를 사랑하며,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통해 용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첫 번째 편지를 보내고도 6-7개월 동안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편지를 보내고 마침내 답장을 받았습니다. 답장을 안 한 이유가 행여라도 내가 자신이 한 일을 다른 죄수들에게 폭로할까 두려웠다고 하더군요. 또 행여라도 토니를 아는 사람이 같은 감옥에 있는 경우에 보복을 받을까 무서웠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왜 내가 계속해서 자기에게 편지를 보내는지, 왜 자기를 사랑하고, 용서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 목사와 교회 사진도 보내주었어요. 나는 그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압니다. 그 지역에서 설교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사건이 있던 날 밤에 같이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마약에 취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친척 중에는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죄의 대가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죄와 잘못에는 반드시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용서가 어려울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용서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용서는 아예 불가능합니다.반복해서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물론입니다. 끝난 건 맞습니다. 이제 그 청년에 대한 악의가 없으니까 다 된 겁니다. 나는 그가 잘되기를 바랍니다. 출소하면, 기꺼이 그와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 같이 점심을 먹고 교회도 데려갈 겁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뒷걸음치진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어느 청년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모든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심장이 미친 듯 뛰더군요. 마치 다리가 부러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한 부분을 고쳐주셨지만 뼈는 여전히 욱신거립니다. 여전히 통증을 느낍니다. 토니의 죽음은 내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토니를 죽인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이 아닌 살인자에게도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암, 교통사고, 치매는 모두 죄로 인한 것이며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슬픔에 잠겨 하나님께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화를 내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들이 아무리 욕을 해도 하나님은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강하시고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원망까지도 다 받아주실 수 있습니다.예레미야(20:7)와 예수님(막 15:34), 그리고 욥(3-37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를 풀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말할 시간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좌절하게 그냥 둡니다. 그냥 다 겪도록 놔둡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일종의 변화, 허물을 벗는 거지요.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없듯, 우리도 때로는 상처 없이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너무 큰 슬픔에 빠질 때면 다시는 영원히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기쁨을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시편 30:5에는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어도 아침이면 기쁨이 온다고 써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아침 몇 시일까요? 모르겠습니다. 밤은 매우 길 수도 있습니다.언제나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물면서 우리의 마음과 좌절을 그분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다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많은 슬픔과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누리는 기쁨은 슬픔을 능가하고 초월했습니다. 내 슬픔은 내 기쁨 속에 삼켜졌습니다. 내가 지금 신학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이론을 설파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가 느끼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쁨 중 하나가 비슨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은퇴하는데요. 이후 계획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강의하고, 글을 쓸 것입니다. 정말로 신이 납니다. 마치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고 봉인된 명령을 하나씩 열어보며 여행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히브리서 11:8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느니라.”모험입니다. 정말로 흥분됩니다. 올봄, Crossway가 당신이 녹음한 ESV의 오디오 버전을 출시할 예정입니다. 그 얘기 좀 해주시죠. 그건 거의 58년에 걸친 사역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동시에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새벽 3시 전에 일어나 바로 사무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오전 3시 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일주일에 6일, 6주 동안 성경을 읽었습니다. 매일 밤 다음 날 읽을 성경 말씀을 준비하는 데에만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말씀을 검토하면서 어떤 부분에 어떤 감정을 주어야 할지 또 이어지는 이야기와의 연결은 어떻게 만들지 등을 고민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한 뒤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그가 결코 아무런 감정 없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지요. 그런 고백을 할 때 도마는 아마도 바닥에 쓰러지지 않았을까요? 좌절과 고통, 환희 속에서 정서적이고 언어적인 표현을 통해서 내가 성경의 인물들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말씀을 읽기 전에 먼저 느끼는 과정, 그때가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하루에 평균 열여덟, 아홉 시간 성경을 읽었습니다. 심지어 성경의 특정 구절을 읽는 꿈도 꾸었습니다.성경 낭독은 삶을 변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D. L. 무디는 당신이 성경을 몇 번 읽었느냐가 아니라 성경이 당신을 몇 번 읽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마치 모든 성경 말씀을 처음 읽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낭독했습니다. 그러자 성경이 내 속에서 나를 읽어냈습니다.원제: How a Seminary Professor Forgave His Son’s Ki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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