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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가 알려주는 공격적 변증법
by Ross Bowerman
2024-02-20
공격과 수비 없이 스포츠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수비는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약점의 은폐라고 할 수도 있다. 반대로 공격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약점을 공략한다. 이 비유를 사용하면 변증에도 방어적 변증과 공격적 변증, 두 가지가 있다. 방어적 측면으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주장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한다. 반대로 공격적인 변증을 통해 우리는 세상 세계관의 약점을 드러낸다. 수비에도 능했던 팀 켈러지만, 그는 동시에 공격적 변증의 이유와 방법을 가르쳤던 사람이다.공격적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기독교를 수호하는 대중 옹호자로서 켈러는 이 세상에 믿음이 아예 없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믿음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종교적 신념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라도 현실 속에서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핵심 사항에 관해서 많은 가정을 한다. 이러한 신념은 폭로되고 조사되어야 한다. 켈러의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가 바로 “당신이 가진 의심을 의심하라”이다. 사람들은 (비록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자기에게 믿음이 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아이디어 시장’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켈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 중 한 사람인 C. 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믿음이라는 건 아주 작은 시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실제로 실행이 가능한 세계관은 고작해야 물질주의, 범신론, 그리고 유신론 세 가지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존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공격적인 변증이 될까켈러는 내용과 태도 면에서 모두 다 훌륭한 공격 모델을 보여주었다. 콘텐츠와 관련하여 켈러는 절대적 증명이 가능한 믿음 체계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믿음 체계와의 비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평가를 위해 그가 제시한 것은 세 가지 기준이었다. 나의 믿음이 얼마나 일관성 있는가(일관성의 기준)? 그 믿음이 우리의 지식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증거의 기준)? 그 믿음이 삶의 경험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생존의 기준)? 켈러는 사람들이 가진 믿음 체계가 의미, 도덕성, 진실, 정체성, 인권 등 기본이 되는 서구 문화의 가정과 욕구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성과 자원을 제대로 제공하는지 고려하라고 말했다. 믿음 체계가 성공하려면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그 믿음을 기초로 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테스트를 모두 통과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내가 가진 믿음 체계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켈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좋은 공격 모델을 만들었다. 그는 냉철한 정신, 최고의 경청 기술, 그리고 논쟁이 아니라 사람을 얻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를 수행했다. ‘성찰하는 경청’의 헌신적 옹호자인 켈러는 자신의 목표가 상대의 주장을 상대방보다 더 잘 설명해서 상대방 스스로가 그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허수아비 전략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상대의 주장이 가진 강점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켈러는 상대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 후에야 비로소 복음을 이해하고 마음을 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 다음에 켈러는 프랜시스 쉐퍼가 원조로서 선보인 전술을 사용했다. 쉐퍼는 이를 “집에서 지붕을 떼어내는 것”이라고 불렀다. 쉐퍼는 청중의 믿음을 비에 노출시켰다. 달리 말해서, 그건 일관성, 증거 및 생존 가능성에 대한 테스트였다. 쉐퍼는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집은 결코 제대로 된 생활이 가능한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고 싶었다.기독교가 진리임을 원하도록 하라블레즈 파스칼로부터 켈러가 배운 점은 기독교가 참되다고 믿기 전에 먼저 그것이 참되기를 원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 부분이 변증에 있어서 켈러의 전략을 공격적인 전략으로 이끈 주된 원인이었다. 누구나 핵심 믿음이 필요하고 또는 이미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탐구하고 공유하며 진정으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일관성, 증거 및 생존 가능성의 기준으로 자신의 믿음을 테스트할 기회가 주어지면 그들은 기꺼이 현재 믿음을 의심하고 기독교를 더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할 것이다. 그래야만 기독교 진리가 가진 긍정적 증거를 계속해서 탐구할 것이고, 나아가서 방어적인 변증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열망까지 가질 것이다. 변증 게임에서 켈러는 열심히 그러나 공정하게 플레이했다. 그는 상대팀의 존경을 받는 그런 선수였고, 사람이 아닌 공을 다루는 선수였다. 켈러처럼 마냥 좋아 보이기만 하는 사람이 그토록 다양한 공격 전략을 가르쳐줄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원제: How Tim Keller Taught Us to Be Offensiv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형과 아우, 아버지와 아들이 지켜낸 교회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여수 장천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4-02-19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19세기 말 호남의 중심지는 전주와 나주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전남으로 좁히면 나주와 순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상대적으로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의미이다. 결국 나주는 선교사들을 배척함으로 광주에 선교부가 만들어졌고, 순천은 지리상의 여건도 있었지만, 주변 지역에 비해서 늦게 복음이 들어가는 곳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순천은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시작되었음에도 성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려야 했다. 순천에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공식적으로 설치되는 것이 1913년이고, 순천에 공동체(현 순천중앙교회)가 1906년에 설립이 되는 것은 선교부 설치보다 빠른 것이지만, 순천 주변 지역에 설립된 교회들에 비하면 오히려 늦은 경우이다. 이 말은 호남 남동부지역 선교거점이 순천에 설치되었지만, 순천 읍내보다 변두리 지역에 먼저 교회가 세워졌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광양 신항리교회, 벌교 무만동교회, 여수 장천교회 등이 순천중앙교회보다 일찍 설립되었다. 그 이유는 순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불교(514년 송광사, 529년 선암사)와 유교(1407년, 순천향교, 1568년 옥천서원) 등이 이 지역의 문화와 생활, 세계관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와 유교의 풍습과 전통이 이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외래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현재도 송광사와 선암사는 전국에서 찾는 불교도들이 많고, 일반 관광객들이 많은 사찰로 유명하다.호남 남동부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남장로교회 선교부의 영향력이 직접 미쳤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의 경우만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이나 선교가 설치된 도시에서 선교사들과 접촉하는 과정을 통해서 복음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신앙을 이어가게 될 때, 그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우는 바다 건너 제주도에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아 놀랍고 귀하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여수시 율촌면에 있는 장천교회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장천교회가 설립되고 성장하는 과정에는 조일환과 조의환 형제의 역할이 컸다. 그중에 형인 조일환이 어떤 목적으로 만주로 가려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숨어들어 그곳에서 복음을 접하고 개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서 1905년 10월 자기 집에서 아우인 조의환과 이기홍, 박중호 등과 함께 오웬(Clement C. Owen) 선교사의 조사인 지원근이 중심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장천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공동체가 모임을 가지는 과정에서 조일환은 목포에 있는 프레스턴(John F. Preston) 선교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이렇게 시작된 장천교회는 광양의 신항리교회와 함께 순천 이남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 선교사들의 손이 부족한 상황이라 새롭게 설립되는 교회들을 모두 돌아볼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조사의 역할이 컸고, 조사라도 있으면 감사한 일이었다. 실제로 순천에 공식적인 선교부가 설치되는 것이 1913년이니까, 장천교회를 목회하거나 직접 목회할 수 있는 지도자는 없었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조일환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개종자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심이었다.그러한 열심은 공동체가 시작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1908년 첫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 비록 작은 평수이지만 12평 목조 예배당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작은 규모의 예배당이지만, 이러한 공적인 공간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건물이었다. 따라서 선각자로서 조일환 등은 이 공간을 활용하는 방안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 그것은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1910년 장천교회는 근대교육을 위한 여흥학교를 설립했다. 여흥학교는 교명은 ‘여수를 흥하게 하자’는 의미를 담은 여수의 여(麗)와 흥할 흥(興)을 더하여 지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는 이 여수지역에서 근대교육에 있어서 효시이다.그러나 이미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상태에서 교회가 원하는 교육이나 민족교육 등과 같은 것은 점점 시행할 수 없게 되어갔다. 일본은 한일병탄을 완성한 다음 즉시 식민지에서의 국민교육과 관련한 칙령을 내려서 식민지교육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교육을 실시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결국 1935년에 이르러서 일제의 박해가 더욱 가혹해졌다. 특별히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점차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교회로서는 학교를 지속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자진 폐교를 하기에 이르렀다.한편 조일환의 동생 조의환은 직접적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중심에서 일을 감당했다. 1908년 예배당을 건축하고, 여흥학교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형제의 열심은 신자들과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이내 예배당이 비좁아지게 되니, 1913년 기와지붕을 이은 15평 규모의 예배당을 다시 지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없는 상황인지라 공동체의 영적인 성장에는 갈급함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의환은 1909년 영수(令首)로 임명을 받아 사실상 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다.영수로 임명을 받아서 공동체를 섬기면서 1912년에는 이 교회의 장로로 임직했다. 영수와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이 교회를 섬기던 조의환은 결국 목회자의 소명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광양교회, 여수교회, 제주도 모슬포교회 등지에서 목회했다. 그러다가 제주도에서 일제에 의해서 검거되어 두 번이 투옥되었다. 그만큼 그의 항일정신과 복음을 통한 변화된 생활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로 나가는 그해에야 이 교회에는 처음으로 곽우영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1920년대, 어찌 보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가 폭력을 동반하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1922년 승주군 도룡교회, 1923년 율촌면 평촌교회, 1925년 율촌면 광암교회 등을 개척 설립함으로써 복음전파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이렇게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면서도 좁아진 예배당은 더 큰 규모의 예배당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1923년에는 학교 23평 건물을 지었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석조 예배당(80평)을 새롭게 건축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현재 유치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화재 예배당이다. 그리고 1928년에 목사가 된 조의환은 자신의 고향이며, 자신의 모교회이며, 형인 조일환과 함께 시작한 이 교회의 2대 목사로 부임을 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이 교회 5대 목사로 다시 부임하여 원로목사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그리고 1973년 다시 석조 예배당(86평)을 지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옛 건물은 부속시설로 사용하면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1년 예배당이 비좁아지면서 20여 평을 증축하여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현재 중앙에 있는 건물이다. 현재는 교제실 겸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3년 현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건축하여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지역 복음화와 교회로서 섬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장천교회를 찾았을 때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여기 소개한 대로 1924년, 1971년, 2003년에 각각 건축한 예배당들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배당이 한 장소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서 한국기독교회의 예배당 건축사에 있어서 특별한 장면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매우 특별하고,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여기 장천교회에서만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1924년에 건축한 예배당만 문화재(115호)로 보호되고 있지만, 건축사적인 의미에서 더 중요한 것은 건축 시대가 다른 세 개의 예배당이 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천교회 예배당은 각각 다른 양식과 소재로 지어진 예배당 건축의 변화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것이다.그런데 1924년에 건축된 예배당과 1971년에 지어진 예배당은 출입구가 남녀가 각기 다른 출입구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특별히 문화재 예배당은 지상 2층으로 지어진 것으로 계단을 통해서 예배당에 올라가게 했고, 남녀출입문을 따로 만들되 그 위에는 캐노피를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아마 현존하는 예배당들 가운데 이런 양식으로 지은 것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또한 이 예배당은 호남 남동부지역 최초의 석조 건물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 1971년에 지어진 예배당도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 시대까지만 해도 여전히 남자 성도와 여자 성도가 출입문을 각각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1970년까지도 남녀가 유별한 사회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이 교회에 문화재 예배당 앞에는 특별한 비석이 하나가 서 있다. ‘지한영 강도사, 지준철 성도 순교비, 2015 건립.’ 여기 새겨진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다. 이곳 율촌에서 나고 자랐으며,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지한영이 소명을 받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 조선신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당시 교회 수에 비해서 지도자가 절대 부족한 시대이다 보니, 신학생들도 목회 현장에서 필요로 했다. 지한영은 전도사 신분으로 덕충교회와 승주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그러다가 강도사 신분으로 모교회인 장천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하던 중인 1950년 공산군에 점령되었고, 목회자인 지한영은 체포되었다. 그해 9월 28일 아들 준철 군과 함께 공산군에 의해서 처형되고 말았다. 부자지간 순교를 당한 것이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다.사실 이러한 순교는 장천교회만의 일은 아니다. 호남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가 6.25사변을 전후해서 희생당한 것은 잊힐 수 없는 일이다. 아쉬운 것은 지한영 강도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 교회에는 겉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가운데 있는 예배당 종각에는 특별한 종이 있다. 특별한 관심과 함께 찾아보아야만 볼 수 있는 것인데, 이 교회의 역사와 함께 지켜온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증언해 주는 종이다. 교회 종은 종이지 무엇이 특별한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회들의 종은 나름 사연이 많다. 모든 교회가 경험했던 것은 일제 말기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다음 전쟁 물자를 확보하려는 조치로 각 가정은 물론 기관 단체들로부터 온갖 쇠붙이를 징발했다. 이때 교회의 종이나 교회에서 사용하는 도구들 가운데 어떤 형태의 쇠붙이가 되었든 모두 징발 대상이 되었다. 이에 한국의 교회들은 교회의 종을 징발당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대부분 다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데 이 교회는 그러한 수탈 과정에서 종을 지켜냈다. 특별히 이 종의 의미가 있는 것은 이 교회 설립에 동참했고, 이 교회를 섬겨온 조일환과 조의환 형제가 아버지 조병하가 별세하자 1929년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한 종을 주문 주조하면서 종에다 부모님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사연을 가진 종을 1924년에 건축한 문화재 예배당 종각에 달아 사용하다가 현재는 1971년에 새롭게 건축한 중앙에 있는 예배당 종각에 달려있다. 이 교회의 입장에서 이 종의 역사와 사연을 아는 것만으로도 장천교회의 역사와 섬김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이어갈 수 있는 동기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선교지에 기독교 화가와 음악가가 필요하다
by Byron Spradlin
2024-02-17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몇 년 전 볼리비아 인디언 목장 일꾼들이 사는 한 마을 전체가 주님께 나아왔을 때, 내 친구 선교사들은 몇 가지 어려운 질문에 직면했다.이제 주님을 구주로 알게 된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 대부분이 성경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들에게 성경을 공부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그들에게 기독교 음악이 없는데, 그들에게 어떤 노래를 부르도록 권할까? 그들의 문화적 표현에 예전(liturgy)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공동체의 어떤 관습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고백, 찬양, 경배를 표현해야 할까?이 질문들에 대해 나의 선교사 친구들은 옳은 일을 했다. 그들은 볼리비아 인디언 신자들이 자신만의 음악적 표현을 만들도록 격려했다. 그들은 문화적으로 합당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원주민들이 직접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친숙하고 진심 어린 표현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적절하고 현명할 것이라고 인정했다.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복음화가 충만하게 일어날 때, 새 신자들의 목표를 나는 그들이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공감을 일으키는 자신들의 문화적 표현을 통해 드리는 믿음과 예배를 의미한다. 참된 예배는 우리 내면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나 공동체의 핵심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숙한 표현을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1] 그래서 주님의 복음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복음으로 구원받고 해방되고 변화된 그 마음에서 노래와 춤, 의식과 전례 및 장식의 고유한 표현이 샘솟게 된다.또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종종 문맹으로 인해 많은 의사 소통이 필연적으로 예술적 또는 상상적 표현을 통해 이루어진다. 음악, 드라마, 스토리텔링, 그림, 건축, 마임, 인형, 공예, 축제, 운동, 의식, 음식, 장식 등은 공동체가 이를 통해 예배하고, 배우고, 제자 삼고, 축하하는 모든 형태의 예술적 표현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서구 세계에서 흔히 ‘예술’이라고 부른다)이 문화적으로 친숙하지 않다면,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예배가 되기 어렵고, 복음의 전달은 덜 효과적일 것이며, 공동체의 성장은 더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표현이 낯설고 어색하거나, 단순히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예술적 소통가와 예술적 표현 전문가들은 종종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진전시키는 데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을 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표현 전문가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디자인과 표현에 있어 비범한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이 개념은 장인(craftsman, 상상력을 요하는 디자인이나 표현에 있어서 특출하게 뛰어난 사람)이라는 히브리어 개념과 관련된 용어에 근거한 것이다. 음악가와 가수도 이 큰 범주에 속한다. 그들은 목사나 교사, 음악가, 화가, 작가, 관리자, 공장 노동자, 농부 또는 주부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주신 ‘특출한’ 상상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상상력’을 갖고 있지만, 문화적으로 적절한 노래나 가사, 시, 이야기, 움직임, 시각적 표현, 환경적 감수성 등을 만들어 내는 미적 감수성의 비범한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또한 적절한 예술 형식과 방법을 예배나 가르침, 제자도 훈련, 전도에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비전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기독교 음악가와 예술가의 중요한 역할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로 듣고 이해하기 훨씬 전에 마음으로 듣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학자나 변증가가 아니라 예술가와 시인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는 기독교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세계 복음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지상명령이 진정으로 수행된 곳에 침투된 문화에서 자신의 마음의 언어와 문화적 스타일로 예배하고 신앙을 선포하게 되는 것은 매우 마땅한 일이다.이러한 마음의 언어와 문화적 스타일은 예술 사역 전문가 또는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 전문가인 토착 예술가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시각과 음악, 스토리텔링 또는 기타 집합적인 표현의 역학이 사용되는 의식이나 예전 또는 공식 대회에서 공적 및 사적 예배의 표현에서 믿는 공동체를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예술 사역 전문가이다.“현재 예배는 현대 복음주의에서 잃어버린 보석입니다. … 그것은 현대 교회에서 잃어버린 하나의 빛나는 보석이며, 나는 우리가 그것을 찾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토저(A. W. Tozer)는 이렇게 썼다.[2] 그리고 가장 귀중한 보석은 자신의 문화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예배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상징과 은유, 의식을 필요로 한다.이러한 예배는 머리의 언어를 넘어 마음의 언어로 하나님의 실재와 진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술적 표현의 영역일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인격과 나라의 실재를 말을 뛰어넘어서 표현할 수 있도록 현대의 예배 예술가들을 특별히 준비시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배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을 교회와 그 사명의 자리에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배치해야 한다.남아프리카 북동부 콰줄루나탈(KwaZulu-Natal)의 광대한 시골 지역 출신의 기독교 공예가들이 성경에 대한 진정한 아프리카의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밝은 구슬 장식의 태피스트리. 출처: 로잔운동 예술 및 음악 사역 인력에 대한 교회 내부의 저항젊은 신자로서 나는 두 가지를 아주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는 교회 지도부가 예술 전문가를 신뢰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술계가 기독교 예술가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깨달음을 통해 나는 세계 복음화의 더 큰 대의를 위해 예술가들과 음악가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셨음을 느꼈다. 나는 또한 이러한 예술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역 구조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열정은 음악가와 예술가, 그리고 모든 종류의 창조적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선교 기관인 국제 기독교 증인 예술가회(Artists in Christian Testimony International, ACT Intl)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토착 예배와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에 헌신된 사람들이다.이 분야의 역사가 50년 정도 되었는데, 이제는 비록 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사역과 선교에서 예술적, 음악적 전략의 중요성에 대해 더 개방적이 되었지만, 교회 지도자들의 마음에는 이러한 저항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예술적 표현과 방법 및 전략에 대한 전략적 성격을 이해하는 소수의 새로운 구성원들에게 기꺼이 제공되는 “사역 촉진 구조”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제자 양육과 교회 개척, 하이브리드 예배 큐레이팅 등의 사역 콘텐츠를 개발하는 실험을 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필요: 예술가와 음악가를 위한 선교적 구조예술적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이다.처음부터 ACT Intl은 사람들이 적절한 문화적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선포하도록 돕고, 교회가 적절한 예배를 열방에 가져오게 하는 세계 복음화와 총체적 사역을 위해 음악가와 예술가에게 힘을 실어주는 데 전념해 왔다. 이 일들은 음악과 예술을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의 문화를 되찾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 명령의 열쇠이다. 예술적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이다. 그래서 ACT Intl은 이 세 가지 영역을 모두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예술 사역자를 찾고 파송하려는 더 많은 선교 기관이 필요하다.창조적인 하나님 나라의 종들이 모든 문화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예술가들을 사역에 동원하는 유사한 운동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오래지 않아 주님은 우리에게 테네시주 내슈빌에 위치하도록 지시하셨다. 이곳은 현재 음악의 도시이자 기독교 음악의 본고장으로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큰 녹음 계약을 기다리고 있는 엄청난 수의 음악가와 아티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보수나 팡파르 없이 교도소 사역을 통해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ACT Intl의 교도소 사역은 실습을 통해 배우는 전도 훈련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교도소 사역이 성장함에 따라 예술가, 음악가, 무용수, 배우들에게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화된 기회를 제공했다.필요: 예술과 음악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을 위한 더 많은 제자 훈련과 교육우리는 또한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예술가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더 심도 있는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필요는 현재 uSeminary.org 및 Worshipedia.org라고 하는 예술-사역 훈련 프로그램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경험 많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이 그들의 지혜를 구체화하고 전달할 수 있는 고품질, 저비용의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예술 사역을 위한 성경적 신학, 성경적 전략 및 성경적 기술을 탐구한다. 우리는 현재 uSeminary, Worshipedia, uSeminary Publishing 세 가지 교육 서비스를 위한 온라인 포털을 보유하고 있다.ACT Intl 창작 예술가 커뮤니티는 이미 사역 중인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두 명의 초기 예는 현대 음악가인 마티 맥콜(Marty McCall)과 스캇 웨슬리 브라운(Scott Wesley Brown)이다. 두 형제는 내슈빌 음악가를 돌보는 데 중점을 둔 월간 ACT Intl Christian Musicians Fellowship을 주최하는 데 서로 다른 시간에 나와 함께하게 되었다. 마티와 스콧의 목회적 강점이 표면화되자, 하나님은 순회 사역에 예배 목회를 추가하여 지역 교회에서 리더십 역할을 하도록 두 사람을 감동시키셨다. ACT Intl과 연결된 다른 사람들은 해외에서 단기 음악 봉사 활동을 했다. 일단 지역 교회의 지경 너머의 사역에 참여하게 되면, 다음 단계로 예술적 방법과 전략을 통한 단기 선교와 지속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 쉬워졌다.봉사할 준비가 됨: 예배 예술과 다른 창조적인 하나님 나라 일꾼들창조적인 하나님 나라 일꾼들과 예배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은 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잡아당김을 느끼고 있다. 많은 사람이 멘토링과 지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을 식별하고, 그들을 참여시키고, 그들을 배치하는 구조를 개발하고,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의도적으로 격려해야 한다. 세계 복음화는 예술 사역의 실천가와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 전문가의 참여 없이는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그러므로 당신이 창의적이라면, 매일의 예배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집중력과 사명을 주님께 간구하고, 당신의 예술적 열정과 기술을 그의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당신이 교회에서 섬기는 리더라면 어떤 자격으로든, 당신의 영향이 미치는 영역에서 예술적인 사람들을 찾으라고 나는 촉구하고 싶다. 그런 다음 그들을 볼 때, 그들을 돌보고, 그들과 연결하고, 긍정하고 존경하고, 지원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강력한 방법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배에서 그의 영광을 표현하고, 용서와 접근에 대한 예수님의 위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성령께서 많은 사람의 삶에서 역사하실 아름다운 그릇으로 봉사하도록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특히 우리를 흑암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하여 해방된 주님의 예술 영역의 종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세계 복음 전도가 더욱 번성하게 될 것이다. 부디 여러분이 복음을 위한 이 풍부한 창조적 예술가 그룹을 참여시키고 돌보는 일을 지지하게 되기를 바란다.주1. ‘Christian Communities For Every Context’ by Michael Moynagh in the September 2020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0-09/christian-communities-for-every-context. 2. A. W. Tozer, Worship: The Missing Jewel (Camp Hill, Pennsylvania: Christian Publications, 1961), 9.원제: The Critical Role of Christian Artists and Musicians in Missions출처: lausanne.org
‘무교’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by Joe Carter
2024-02-16
지난 십 년간 종교계에서는 새로운 인구통계 항목인 “무교(Nones)”가 꾸준히 비율을 높이며 두각을 나타냈다.“무교”는 종교 정체성 조사에서 “(종교) 없음”이라고 응답하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로서 기존의 종교 전통과 일치하는 부분이 없음을 나타낸다. 퓨(Pew)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무교라고 답한 사람들 가운데 17퍼센트가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또 20퍼센트는 불가지론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63%)는 단지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 없음”을 선택했다.무교 가운데 69퍼센트는 50세 미만이고 31퍼센트는 50세 이상이다. (상대적으로 종교를 가진 미국 성인의 45퍼센트는 50세 미만이고, 55퍼센트는 50세 이상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무교는 남성(51%)과 여성(47%)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나타난다. 지난 50년간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1950년대에 특정 종교와 관련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거의 0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인 네 명 중 한 명(28%)이 무교라고 말한다. 이러한 추세는 현대 세계가 처한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종교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담론 분야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무교의 부상을 신앙 포기와 무종교(irreligiosity)의 증가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기억할 점은 무교가 우리 주변에서 없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존재했다. 나디아 윌리엄스는 Cultural Christians in the Early Church(초기 교회의 문화 그리스도인)에서 이 용어가 지칭하는 이들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지만, 외적 행동,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내적 생각과 동기는 기독교 신앙과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주변 문화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윌리엄스의 책이 짚어주는 포인트는 명확하다. 문화적 기독교를 현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그것은 교회가 생긴 이래로 항상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무종교인의 증가가 이와 관련된 현상이며 오늘날 자신을 무교라고 규정하는 많은 미국인은 단지 수십 년 전의 문화적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다.유행하는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종교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종교 정체성을 채택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니케아 신경의 고백을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기독교 신앙을 거부한다는 건, 그 종교가 주장하는 명제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물론 이것도 사람들이 종교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로 무교인 사람이 가장 자주 제기하는 게 다름 아니라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이다. 무교의 무려 60퍼센트가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무종교를 지향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믿음이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에 기반을 둔다고 말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각각 83%와 78%),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이라는 응답자 중에서는 단지 절반 미만(48%)이 같은 대답을 했다. 무교 중 상당수(47%)가 종교 단체에 대한 혐오가 비종교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답했다. 약 3분의 1(30%)은 종교인으로부터 겪은 나쁜 경험을 언급한다. 전체적으로, 무교의 55퍼센트가 종교 단체나 종교인(또는 둘 다)을 자신들이 비종교적인 주요 이유로 언급했다.믿음의 형성이라는 과정이 단지 추론에만 기반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기에 이런 결과는 놀랍지 않다. 팀 켈러는 인간의 지식에는 (1) 합리적/지적, (2) 경험적/직관적, (3) 사회적/실용적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서 (1) “그것에 타당한 이유가 있고” (2) “그것이 우리의 내적 경험과 일치하며” (3)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진짜로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켈러는 “적어도 교회에 대한 환멸 때문에 ‘확고하고 활동적인 신자’에서 ‘완전한 불신자’로 변하는 일부 사람들은 세 번째의 사회적 측면에서 보아야 하며, 그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만큼은 거의 확고하게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특히 종교나 정치처럼 사회 현상에 대한 믿음 중 상당수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사회적/실용적 측면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유형의 믿음을 경제학자 아놀드 클링(Arnold Kling)은 “유행을 타는 믿음”이라고 불렀다. 즉, 내용의 타당성과 관계없이 동료들 사이에서 나의 지위를 높이거나 최소한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믿음을 말한다. 클링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젊고 부유한 십대들이 점점 더 LGBTQ+라고 선언하는 건,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유행이기 때문이에요.” 나를 포함한 많은 보수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양성애, 섭식 장애, 성전환과 같은 부정적인 행동이 급증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런 행동의 기본이 되는 신념이 점점 더 대중화되고 동료들에 의해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현상을 보면서도 우리가 종종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인기를 얻고 널리 채택되기를 원하는 믿음, 즉 기독교의 믿음에도 얼마든지 동일한 과정이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믿음은 참되고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통 복음주의 신앙이 유행하는 믿음이 되기를 원한다.기독교는 미국에서 아주 오랫동안 유행하는 믿음이었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기독교는 가장 유행하는 믿음 중 하나로서 그 지위를 유지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하나의 문화 브랜드로서 누리던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당수의 미국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 꼬리표를 별 부담 없이 “그리스도인”에서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으로 바꾸는 데에는 족히 또 한 번의 50년이 더 걸릴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독교가 유행하는 믿음이었던 이유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향수에 젖기 쉽다. 그러나 유행이 된 다른 믿음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또한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거나 유지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사람들의 비율은 언제나 높았다. 나의 논제가 정확하다면 그러니까 과거에 상당수의 미국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이유가 단지 유행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라면, 오늘날 무교의 급부상도 철저한 무종교성의 증가 때문이라기보다는 항상 존재했던 무언가가 드러난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니까 일부 미국인들의 경우에 이전에 유행했던 특정 믿음을 더 유행하는 새로운 믿음으로 바꿨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힘든 도전과 함께 상당한 기회를 함께 제공한다. 더 많은 위선을 통한 더 나은 도덕성먼저 도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미국에서 기독교가 유행했을 때 기독교 도덕은 매우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물론, 기독교 도덕의 상당 부분, 즉, 인종 평등의 경우에 미국의 역사 전반에 걸쳐 철저하게 무시받았다. 그러나 미국 역사의 초기에 기독교의 도덕 원칙(특히 성과 관련된 원칙)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매우 높게 가치를 인정받았고, 그 결과 도덕 나침반뿐 아니라 죄악된 충동을 억제하는 데에까지 많은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예언서, 산상수훈, 바울서신은 기독교 신앙에 완전히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인정되는 윤리적 행동에 대한 명확한 틀을 제공했다. 기독교 도덕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존경심은 특정 행동을 억제하고 성경적 원칙에 기초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반대로,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 도덕의 지위가 쇠퇴함에 따라 죄악된 행동에 대한 외부 제한도 그에 상응하여 침식되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부패한 마음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28절)을 허용한 사회에 생길 비극이 무엇일지를 경고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경고가 현실이 된 사회를 목격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가 사라지는 순간, 개인은 한때 통제되었던 충동에 호기심을 느끼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시스템이 유지되었던 것은 많은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위선자였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이 실천하지 않는 도덕 표준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1973년에는 미국인의 절반 미만(43%)이 혼전 성관계를 지지했다. 이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 때문에 결혼 외의 성관계를 반대했지만, 그중 상당수는 여전히 불법적인 성적 행위에 가담하고 있었다. 스스로 공언한 믿음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은 용어의 정의상 위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행동이 (최소한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고 그 점을 기꺼이 인정했다.그렇다면 이런 식의 위선이 대안보다 더 나을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라메쉬 포누루가 주장한 것처럼 위선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도덕적 행위에 대한 공공 표준이 영향력을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그 표준을 믿는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품위 있고 관대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위선은 필수적이다.” 다른 말로 해서, 최선의 선택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선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믿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다.이런 식의 위선을 선호해야 하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문화적 기독교에서 무교 상태로 전환되면서 상당한 손실이 발생한 건 사실이다. 기독교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참된 믿음으로 가는 길에 오늘날처럼 외부의 장애물이 많지는 않았다. 더불어서 당시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믿음 때문에 생계를 잃을 염려 없이 “평안하고 조용한 생활”(딤전 2:2)을 하기가 더 쉬웠다. 그러므로 미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왜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기독교가 다시 유행할 가능성은 없으며 무교를 표방하는 이들에게 과거 문화적 기독교 시대의 위선으로 돌아가라는 호소는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기독교 이전이나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넘치는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아예 무교인 사람들이 기독교의 도덕을 사용해서 충분히 도덕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전례없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염소 판별기다행히도 심각한 도전과 함께 기회도 찾아온다. 이전에 문화적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무교가 됨으로써 누가 “염소”인지를 확실하게 가릴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참된 신자가 아님을 분명하게 한다(마 7:21-23).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 25:31-33).미래에 염소들은 예수님에 의해 가려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염소 판별기”가 1776년에 발명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누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이고, 누가 “염소”인지 단박에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에 유리한 유행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심지어 도덕적인 삶도 살았지만, 그들은 사실상 “거듭나지” 않은 염소였던 것이다(요 3:3).만약에 그런 염소 판별기가 있었다면, 기독교는 한참 전에 유행과는 거리가 먼 종교가 되었을 것이고, 미국에서 도덕성의 쇠퇴는 수십 년 더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역사의 매 단계에서 유행에 이끌려 그리스도인 행세를 한 염소를 식별하고 그들을 진짜 믿는 양과 분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교회는 다니지만 진짜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건 사실상 시종일관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밥 존슨은 그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가장 확실한 전도 대상자는 언제나 교회 안에 있습니다.” 무교 현상을 일종의 자체 식별이 가능한 염소 판별기라고 생각하자. 과거에는 그리스도인 양들 사이에 숨어서 거듭나지 않은 염소로 남아 있던 이들이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더 이상 숨지 않고 진짜 양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들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임을 당당하게 선포한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이제는 모를 수가 없다. 따라서 전도가 훨씬 더 쉽게 되었다. (아무 목사나 붙잡고 물어보라. 또는 단편 소설 계시의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에게 물어보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불신자를 전도하는 게 쉬운지 아니면 독선적이고 기독교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거듭나지 않은 문화적 그리스도인을 전도하는 게 쉬운지 말이다.)무교의 약 44퍼센트(무신론자의 73퍼센트 포함)는 삶에서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종교를 가질 시간이 없어서 비종교를 택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그들의 필요를 본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 예수님이 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없다종교 정체성의 새로운 변화는 전도를 위한 독특한 기회를 제공한다. 어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문화적 기독교에서 훨씬 더 정직한 자기 정체성이라는 무교로의 전환은 복음을 나누기 위한 보다 명확한 환경을 제공한다. 이는 종교에 대한 불신이나 무관심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이며, 그들이 잠재적으로 문화적 가식의 장벽 없이 복음의 진리를 듣는 데 더 쉽게 마음을 열도록 하는 기회이다. 이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에 나오는 상황과 비슷하다. 씨 뿌리는 사람은 다양한 땅에 씨앗을 뿌리는데, 그 결과는 복음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다. 어떤 씨앗은 길에 떨어지고, 더러는 돌밭과 또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일부는 좋은 땅에 심겨진다. 이 비유에서 무교는 문화적 기독교라는 가시가 제거된 땅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땅은 이제 복음이 역사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복음의 씨앗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뿌리고, 그중 일부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 맺기를 믿는 것이다. 동시에 무교의 부상은 교회 내 성찰과 개혁을 요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문화적 형태의 기독교를 장려하는가? 우리 교회가 삶에서 역사하는 복음의 변혁적인 힘을 드러내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패턴을 따르라는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가? 무교의 증가는 교회가 제자를 삼는 핵심 사명(마 28:19-20)을 다시 다짐하고, 기독교의 믿음이 단지 유행하는 부속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는 관계임을 확신하도록 하는 기회이다. 무교의 증가를 보며 실망해서도 또 현재에 안주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 전도 노력에 활력을 불어넣는 도전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내가 믿는 신앙을 삶에서 제대로 실천하겠다는 자극을 받아야 한다. 더 신실하게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더 큰 열매를 주실 주님의 주권을 신뢰하며(고전 3:6),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와 진리의 능력을 삶으로 보여주며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이라는 대답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을 믿음”으로 바뀌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원제: ‘Nones’ Have Always Been with U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공감과 위로의 배신
공감에서 성육신으로
by 이춘성
2024-02-15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던 칼 트루먼(Carl R. Trueman)은 최근 어느 지역에서 열린 로마 가톨릭 신부들과 개신교 목사들의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곳에는 소위 복음주의 신학을 가진 개신교 목사들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그 모임에 참여한 후 자기와 같은 복음주의 목사들에게 이질감을 느꼈고, 그 소회를 한 기독교 잡지에 기고하였다. 그 내용은 그가 적어도 성자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에 있어서는 복음주의 목사들보다 로마 가톨릭의 수도회 소속 신부들에게서 더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후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곳에 참여한 개신교 목사들이 그리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분이지만,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신부의 예수님은 성부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죄를 해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이다. 트루먼의 지적처럼, 현대 교회의 설교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와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수가 위로와 공감에 대한 것이다. 모두 괜찮고, 네 잘못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메시지가 설교단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설교가 정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교회 안에서 정죄의 언어는 죄악으로 거부당하고 있다.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청중에게 배척당하고, 설교자들에게서도 이질적인 언어가 되었다. 무조건 죄악과 부정적인 말로 우울하게 하는 메시지도 문제지만, 분별 없는 공감과 위로도 큰 문제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자신의 죄를 상대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억울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정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더 큰 쾌락과 안정을 위해 약의 용량을 늘리지만, 그것이 그를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답 없는 위로와 공감 또한 문제의 근원인 죄를 외면하게 만들어 상처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위로와 공감에 대해서 뭐라 말하고 있을까? 예수님의 공감 첫째로 성경은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신다는 사실이 기록된 성경 말씀은 히브리서 4:15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영어 성경(ESV)은 이 말씀에서 ‘동정’을 ‘공감’(sympathize)로 번역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이 둘은 서로 바꿔 사용해도 의미상의 문제가 없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시고 이해하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공감을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강조한다. 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은 인간이 처한 죄악의 환경, 그리고 죄의 비참함에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둘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은 인간이 처한 현실에 공감하시지만, 그 공감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히브리서 4:15의 ‘시험’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유혹’이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과 같은 죄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또한 그 유혹을 견디고 이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 갈등과 죄에 취약한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경험하셨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예수님의 공감은 여기까지라고,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 있다. 성경은 그 공감과 위로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예수님의 공감은 죄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 네가 죄를 지은 것 모두 공감한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견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네 마음을 내가 다 알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도 너와 비슷해. 그러니 난 널 깊이 공감하고 위로해.” 이런 식의 공감과 위로가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가 결코 아니라는 의미이다.성육신과 복음C.S. 루이스는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장 위대한 기적”(the Grand Miracle)이라고 부르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아래로 내려가십니다. … 자신이 창조하신 자연의 그 뿌리와 해저까지 내려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내려가시는 것은 다시 올라가시기 위함입니다. 황폐된 세상 전체를 자신과 함께 위로 들어 올리시기 위함입니다.”(기적, 218) 이어서 루이스는 성육신은 힘센 사람이 커다랗고 복잡하게 생긴 짐을 들기 위해 자기 몸을 거의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짐 밑으로 숙이는 것에 비유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큰 짐을 어깨에 사뿐히 짊어지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육신의 신비는 낮아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올라가는 ‘상승’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상승이 인간에게 복음인 이유는 그분 홀로 상승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상승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야말로 복음 그 자체이다. 결과적으로 복음의 핵심은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 해결과 상승에 있다. 위로와 공감은 전능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높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상승할 때, 위로와 공감은 그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된다. 위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위로와 공감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가장 위대한 소식’(the Grand News)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22)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신학교 교수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
by Sarah Eekhoff Zylstra·Robert Smith Jr.
2024-02-14
마스크를 쓴 네 명의 청년이 식당에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직원들은 강도임을 직감했다. 주방에 있는 요리사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도망갔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요리사는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요리사 토니 스미스는 원래 그날 근무가 아니었다. 그날 밤 할머니와 함께 자이언츠와 레인저스의 2010년 월드 시리즈를 볼 계획이었는데, 교대 근무를 해달라는 동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도들은 토니를 끌고 가서 금전 등록기의 잠금을 해제하라고 했다. 그러나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금전 등록기가 열리지 않았고, 강도 중 하나인 엑스터시에 취한 17살짜리 소년이 토니를 총으로 쐈다.토니의 아버지이자 비슨신학교(Beeson Divinity School) 설교학 교수인 로버트 스미스가 막내아들이 총에 맞았다는 전화를 받은 건 루이지애나 배턴 루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45분 후에 아들이 사망했다는 두 번째 전화를 받았다. 토니는 말 그대로 아무 의미 없는 죽임을 당했다. 그날 밤 강도들은 단돈 일 달러도 훔쳐 가지 못했다. 스미스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주권자라고 고백하는 법을 배우는 거지요. 해가 빛날 때야 쉬운 고백이지만, 해가 지면 말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고백은 이제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 됩니다.” 스미스는 적지 않은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냈다. 그의 첫 아내는 세 아들이 어렸을 때 루푸스로 사망했다. 15년 동안 암 투병하던 큰아들은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다. 자신 또한 2021년에 뇌졸중을 앓았고 이런저런 건강 문제를 갖고 있다. 그는 왜 이런 일이 자기에 일어나는지 모른다. “우리는 미스터리를 풀거나,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해독하거나, 알 수 없는 것을 알아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갈보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다치게 하셨습니다. 빌라도와 군인들은 모든 게 자기들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스미스는 하나님의 주권을 붙잡고 토니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했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계속해서 전 세계를 다니며 사역하고, 가르치고, 또 설교한다. 그는 이번에 Crossway에서 새로 나온 ESV 오디오 성경 전체를 낭독했다. 몇 달만 지나면 27년을 보낸 비슨에서 은퇴한다. TGC는 스미스에게 슬픔과 아들의 살인자를 용서하는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6주에 걸친 성경 전체 낭독에 관해서 물었다.사망한 직계 가족 세 명 중에서 토니는 살해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주는 슬픔은 종류가 다른가요? 모든 이별은 고통스럽고 다 뚜렷합니다. 병으로 죽은 아이들 엄나의 죽음은 꼭 비극적이진 않았어요. 우리에게는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있었거든요. 아내는 2년 반 동안 아팠습니다. 토니의 형 로버트 3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요. 사실 우리는 로버트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의사가 2-3년 안에 죽을 거라고 했는데, 무려 15년을 살았거든요. 토니는 서른세 살이었습니다. 우리도 통보받은 게 없고 그냥 전화만 받았어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토니도 우리 것이 아니다. 토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우리도 기다리고 계신다. 언젠가 우리는 토니를 다시 만나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라고요.이런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봅니까? 나는 토니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고, 그 추도사를 바탕으로 The Oasis of God: From Mourning to Morning(하나님의 오아시스: 슬픔에서 아침으로)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결코 쓰고 싶었던 책은 아니었지만, 그 책은 내게 다양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하면서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끌렸고, 나도 다른 이들에게서 매력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비슷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실로 놀라운 기회였습니다.당신은 토니를 죽인 청년에게도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나요?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지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내 아들이 그렇게 죽는다는 게요.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약 8개월 후, 나는 선교 사업차 케냐 나이로비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귀에 들린 건 아니지만,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주님이 물으시더군요. 너는 용서를 믿느냐? 예, 믿습니다. 너는 용서를 가르치고 또 설교하느냐? 예, 그렇습니다. 나는 네가 토니의 살인자를 용서하길 원한다.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용서란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 한다는 걸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뭔가가 현실이 되려면 가장 먼저 마음속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상황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법정, 수갑을 차고 15년 형을 선고받고 가던 청년, 그리고 내 아들의 죽음. 그 모든 걸 말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악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압니다. 나는 계속해서 죄를 저질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깨달았습니다. 토니를 잃었지만, 그건 내가 원했던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셨습니다. 그러나 성금요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게만은 칼을 내리꽂았습니다. 하나님은 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그런 사실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오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체험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만남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내가 하기 싫은 일과 할 수 없는 일까지 다 하도록 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일, 즉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그 젊은 친구에게 용서한다고 말했습니까? 예, 그랬지요. 편지를 써서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를 사랑하며,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통해 용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첫 번째 편지를 보내고도 6-7개월 동안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편지를 보내고 마침내 답장을 받았습니다. 답장을 안 한 이유가 행여라도 내가 자신이 한 일을 다른 죄수들에게 폭로할까 두려웠다고 하더군요. 또 행여라도 토니를 아는 사람이 같은 감옥에 있는 경우에 보복을 받을까 무서웠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왜 내가 계속해서 자기에게 편지를 보내는지, 왜 자기를 사랑하고, 용서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 목사와 교회 사진도 보내주었어요. 나는 그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압니다. 그 지역에서 설교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사건이 있던 날 밤에 같이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마약에 취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친척 중에는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죄의 대가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죄와 잘못에는 반드시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용서가 어려울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용서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용서는 아예 불가능합니다.반복해서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물론입니다. 끝난 건 맞습니다. 이제 그 청년에 대한 악의가 없으니까 다 된 겁니다. 나는 그가 잘되기를 바랍니다. 출소하면, 기꺼이 그와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 같이 점심을 먹고 교회도 데려갈 겁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뒷걸음치진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어느 청년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모든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심장이 미친 듯 뛰더군요. 마치 다리가 부러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한 부분을 고쳐주셨지만 뼈는 여전히 욱신거립니다. 여전히 통증을 느낍니다. 토니의 죽음은 내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토니를 죽인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이 아닌 살인자에게도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암, 교통사고, 치매는 모두 죄로 인한 것이며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슬픔에 잠겨 하나님께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화를 내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들이 아무리 욕을 해도 하나님은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강하시고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원망까지도 다 받아주실 수 있습니다.예레미야(20:7)와 예수님(막 15:34), 그리고 욥(3-37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를 풀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말할 시간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좌절하게 그냥 둡니다. 그냥 다 겪도록 놔둡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일종의 변화, 허물을 벗는 거지요.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없듯, 우리도 때로는 상처 없이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너무 큰 슬픔에 빠질 때면 다시는 영원히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기쁨을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시편 30:5에는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어도 아침이면 기쁨이 온다고 써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아침 몇 시일까요? 모르겠습니다. 밤은 매우 길 수도 있습니다.언제나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물면서 우리의 마음과 좌절을 그분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다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많은 슬픔과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누리는 기쁨은 슬픔을 능가하고 초월했습니다. 내 슬픔은 내 기쁨 속에 삼켜졌습니다. 내가 지금 신학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이론을 설파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가 느끼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쁨 중 하나가 비슨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은퇴하는데요. 이후 계획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강의하고, 글을 쓸 것입니다. 정말로 신이 납니다. 마치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고 봉인된 명령을 하나씩 열어보며 여행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히브리서 11:8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느니라.”모험입니다. 정말로 흥분됩니다. 올봄, Crossway가 당신이 녹음한 ESV의 오디오 버전을 출시할 예정입니다. 그 얘기 좀 해주시죠. 그건 거의 58년에 걸친 사역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동시에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새벽 3시 전에 일어나 바로 사무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오전 3시 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일주일에 6일, 6주 동안 성경을 읽었습니다. 매일 밤 다음 날 읽을 성경 말씀을 준비하는 데에만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말씀을 검토하면서 어떤 부분에 어떤 감정을 주어야 할지 또 이어지는 이야기와의 연결은 어떻게 만들지 등을 고민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한 뒤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그가 결코 아무런 감정 없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지요. 그런 고백을 할 때 도마는 아마도 바닥에 쓰러지지 않았을까요? 좌절과 고통, 환희 속에서 정서적이고 언어적인 표현을 통해서 내가 성경의 인물들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말씀을 읽기 전에 먼저 느끼는 과정, 그때가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하루에 평균 열여덟, 아홉 시간 성경을 읽었습니다. 심지어 성경의 특정 구절을 읽는 꿈도 꾸었습니다.성경 낭독은 삶을 변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D. L. 무디는 당신이 성경을 몇 번 읽었느냐가 아니라 성경이 당신을 몇 번 읽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마치 모든 성경 말씀을 처음 읽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낭독했습니다. 그러자 성경이 내 속에서 나를 읽어냈습니다.원제: How a Seminary Professor Forgave His Son’s Ki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가나안 성도” 현상: 목회적 반성과 대응
by 김선일
2024-02-13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가나안 성도”의 증가는 목회자들이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가나안 성도의 증가는 정당화시키기만도, 또는 질타하기만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목회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점과 고쳐야 할 점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뉴질랜드의 신학자 앨런 제이미슨(Alan Jemieson)이 말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에 민감한 교회를 위한 여섯 가지 지침과 미국의 목회자 짐 데이비스와 마이클 그레이엄이 말하는 가나안 성도를 위한 목회적 권면 다섯 가지를 우리의 상황에서 음미하고자 한다. 먼저 짐 데이비스와 마이클 그레이엄의 탈 기독교 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은 오늘날의 가나안 성도 상황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목회적 권면을 제시한다. 첫째, 사람들이 교회와 신앙을 떠나는 것은 늘 일어나는 현상이다. 새삼 놀랄 필요가 없다. 가나안 성도 가운데 교회로 돌아오려는 사람들도 있으나, 어떤 이들은 애당초 믿음이 없거나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없었다. 가족이나 주변의 지인들을 따라 교회를 다녔던 명목상의 관습적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신앙의 동기부여를 얻지 못하고 가나안 성도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가나안 성도 가운데 교회로 돌아올 의향이 있다는 이들은 42.9퍼센트나 된다. 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이들은 36.7퍼센트인데, 이들 중에는 신앙 수준이 1단계에 머문 자들이 가장 많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 조사, 110쪽 이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격적 신앙의 부재가 결국에는 교회를 떠나게 하는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신앙을 버리는 일은 과거 교회 중직자나 목회자 중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나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요일 2:19)이라는 사도 요한의 조언을 냉정하게 되새길 필요도 있다. 둘째, 극단적 반응은 신앙에 회의를 품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교회를 떠난 이들이 모두 믿음이 없거나 약해서라고 그들을 탓하는 것은 가나안 성도를 더욱 증가시킬 수 있다. 분명히 더 많은 사람이 교회에 대한 실망과 상처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 순수하고 확고한 믿음의 사람들만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교회 안에는 믿음에 관해서 다양한 경험과 인식을 지닌 이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자들이다. 일률적인 신앙의 강요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곤 한다. 가나안 성도들은 권위적, 위계적 교회 문화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 너무 방임적이어서도, 너무 율법적이어서도 곤란하다. 그래도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는 말씀은 교회 문화의 근간이어야 한다. 셋째, 가나안 성도에 대해서 인내하라. 그들이 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도 있다. 기존 교회를 떠나는 그들의 고민은 관습적 신앙생활에 대한 경종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단순히 교회나 신앙을 떠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찾아 나서는 순례자일 수도 있다. 실제로 새로운 모습의 선교적 교회들에서 기존 교회에 적응하지 못한 가나안 성도들이 참여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넷째, 목양의 중심성을 회복하라. 가나안 성도들 가운데 소그룹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석한 경험이 있는 이들의 82.7퍼센트가 교회에 재출석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반면 소그룹 활동을 경험한 적이 없는 가나안 성도들에게서는 교회 재출석 의향이 있다는 응답(40.7%)과 재출석 의향이 없다는 응답(37.8%) 간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는”(잠 27:23) 일은 목양의 중심이다. 목양은 목회자가 오롯이 떠맡아야 하는 몫은 아니다. 교회는 진실하고 책임 있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를 돌보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소그룹 사역은 그러한 공동체적 돌봄을 제공하는 가장 유력한 사역 모델 가운데 하나다. 서로 누구인지를 알고,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고 격려하는 공동체는 가나안 성도 현상을 예방하는 주요 전략이다. 다섯째, 성도를 구비시키라(equip the saints). 소그룹과 공동체를 통한 목양적 돌봄이 가나안 성도의 양산을 막는 방어적 전략이라면, 성도를 구비시키는 일은 가나안 성도를 넘어서는 건설적인 전략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직분자를 삼으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히 구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엡 4:11-12). 교회의 직제는 성도를 구비시키기 위함이다. 봉사의 일이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성도가 세상의 일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함이다. 최근 조사에서 개신교인 청소년 가운데 가나안 성도 비율이 36퍼센트로서 성인보다 더 높게 나왔다. 인생의 목표를 세워나가는 젊은 세대에서 신앙이 인생의 소명과 방향을 제공하는 일은 미래의 건실한 성도를 양성하는 데 필수다. 이상의 다섯 가지 권면은 목회자들이 가나안 성도 현상을 이해하고, 그 현상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조언들이다. 여기에 덧붙여 가나안 성도의 양산을 예방하는 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과제도 대두된다. “떠나는 이에게 민감한 교회”(leaver-sensitive church)가 되라는 앨런 제이미슨의 주장을 살펴보자. 우리는 그동안 구도자에 민감한 교회(seeker-sensitive church)라는 용어에 익숙했다. 이제 탈교회 시대와 마주하며 떠나는 이에게 민감한 교회라는 모델을 고려할 때가 됐다. 이는 단순히 교인 관리 차원이 아니라 회중을 더 깊이 알고 적절한 교회의 사역을 찾기 위함이다. 제이미슨은 여섯 가지의 구체적 지침을 제시한다(A Churchless Faith, 146ff) 첫째,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의문과 의심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라.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불만과 고민을 표출할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은 대답 속에서만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질문 속에서도 임재하신다. 둘째, 여정의 신학을 제공하라. 신앙은 구원의 확신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신앙의 여정에는 고통과 방황도 포함된다.셋째, 신앙에 대한 의문을 정죄하지 말고 관용하라. 신앙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표현하는 이들을 신앙을 잃은 자로 단정하지 말고, 많은 이들이 신앙의 갈등 여정을 지나왔음을 알려주라. 넷째, 하나님은 특정한 신학 관점보다 훨씬 크시다. 현재 교회의 신앙 전통이 절대 기준이고 그 기준을 벗어난 탐구와 의심은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다섯째, 율법적 신앙보다 정직한 신앙의 모델을 제공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복음을 주셨지만, 너무나도 많은 교회가 금기와 법칙을 강요하고 있다. 사람들이 인생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과 진실하게 대면하게 하라. 여섯째, 감정과 직관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 상태를 하나님과 회중 앞에서 숨기는 습관을 지녀서는 안 된다. 공 예배 중에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절규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가나안 성도 현상은 목회 사역에 대한 반성이자 교회의 영성을 제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는 단순히 가나안 성도들을 교회에 돌아오게 하는 실행 전략을 넘어서, 우리가 믿는 신앙의 정체성과 교회의 영성 문화에 대한 깊은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사역 현장의 “허용된 죄들”
by Jen Oshman
2024-02-08
우리 가족이 해외 선교사로 나가 있을 때, 우리가 있던 나라에서 죄악에 빠진 모습을 찾기란 매우 쉬웠다. 동남아시아는 거리 모퉁이마다 사원과 신사, 제물(祭物)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거짓 신을 숭배했다.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대낮에 버젓이 매음굴이 영업을 하고 불법 마약이 거래되었다. 우리 주변을 가득 메운 어둠을 보는 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미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 술 취함, 성적 부도덕 등을 찬양하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교회 개척을 시작했다.이러한 노골적인 죄의 모습이야말로 복음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큰 이유이다. 우리는 어둠을 보고 언덕 위의 도시로 출발한다(마 5:14-16). 그러나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쉽게 진단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악은 너무 자주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지만, 우리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7:3-5). 제리 브리지스는 Respectable Sins(허용된 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인 행위 속에 담긴 죄를 식별하는 건 쉽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바로 ‘믿는 자들이 짓는 허용된 죄’이다. … 사실상 우리는 전반적인 사회와 마찬가지로 내가 짓는 죄를 부인하며 살고 있다.”브리지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런데 이 진리를 평신도를 넘어 국내외 사역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정직하다면, 몇몇 “허용된 죄”에 관해서는 교회 지도자라고 해도 쉽게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죄에 너무 익숙해져서, 우리는 종종 당연하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 걱정한다사역에는 돈이 많이 들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부족한 자금이라는 상황은 수시로 만나는 현실이다. 재정을 둘러싼 두려움은 종종 우리를 자린고비의 사고방식으로 사역하게 만든다. 자원을 비축한다. 불안에 사로잡혀 관대함에서 멀어진다. 걱정하는 마음을 현명한 청지기의 태도라는 식으로 위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불안과 걱정이 어떻게든 재정적인 바닥은 치지 않도록 지켜줄 거라는 심정에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용된다. 삶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믿음을 가져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그분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마 6:25-34).2. 소유권을 주장한다 지금 다룰 허용된 죄도 자린고비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종종 흙이 건조한 곳에서 사역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척박하던 토양에서 싹이 트고 뿌리가 자라면 자기도 모르게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열매 맺는 사역 자체가 성공했다는 증거이고, 언젠가부터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다른 교회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내 사역을 더 키우려고 하고, 또 우리가 키워낸 제자들이 다른 곳에서 봉사하려는 것을 막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를 독려하곤 했다. “우리만 성장하는 소문자 나라(kingdom)가 아니라 대문자 하나님 나라(Kingdom)을 추구합시다. 다른 교회도 열매를 맺도록 합시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것에 좌절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막 9:40).3. 떠들고 비방한다사역에 종사하는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게 있다. 비공개로 모일 때, 짜증을 분출하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거 말이다. 지혜와 기도 제목을 나눈다는 미명으로 우리는 같은 교회를 섬기는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다른 사역자나 교회까지 뻔뻔스럽게 비방한다. 사역 팀이라면 서로 통찰력과 정보를 공유하는 게 맞다. 하지만 때로는 선을 넘어 험담할 때도 있으면, 그럴 때면 기분이 좋다는 사실에 솔직해야 한다. 누군가 내 자녀를 욕하고 다닌다고 할 때, 화가 나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를 욕할 때,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화를 내실지 한번 상상해 보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35).4. 불평한다어둠에 맞서려면 편안함, 안전, 편의성, 지위 등을 희생해야 한다. 불평은 해로운 습관이 될 수 있다. 다루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불평하는 게 얼마나 쉬운가? 감사가 부족한 사람, 문화에 얽힌 죄 또는 만연한 불의를 보며 한탄하는 건 어렵지 않다. 너무 뻔한 진실처럼 들릴지 몰라도, 불평하는 사람의 진짜 마음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틀렸고 내가 더 잘 안다’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의문을 제기한 무리에게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아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요 6:43-44). 상황이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구조 속에서도 여전히 역사하시며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5. 과로한다허용을 넘어서 존경까지 받을 만한 이 죄는 근면과 노력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는 참혹하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구원자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과 나의 방법에 의존할 때, 우리의 목회는 자립으로 변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깊은 안식과 성령님을 뒷전으로 미룬다. 사역으로 인한 탈진은 현실이며, 동시에 하나님만이 무한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그의 이름으로 사역하도록 파송하신 후(막 6:7-13), 그들은 돌아와서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다 예수께 고했다”(30절).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31절)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한적한 곳에 혼자 가시는 습관이 있었다(마 14:13). 하나님은 우리를 제한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주어진 한계에 따라 섬기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허용된 죄를 회개하기이런 죄를 나열하는 건 사실 내가 스스로 내 속에 오물을 넣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이 모든 죄에서 유죄이다. 이런 죄는 짓기 쉽다. 가면을 쓴 이런 죄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활보한다. 그냥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존경받을 만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독과 다르지 않다. 각각의 죄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 이 모든 하나하나의 죄가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동시에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상기시킨다. 복음을 맡은 자로서 우리는 숨은 죄를 회개하고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려야 한다(히 12:1-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는 자로서 우리는 입의 말 그리고 모든 마음의 묵상이 그분 앞에 열납되기를 바라야 한다(시 19:14). 우리의 믿음과 행동이 오로지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내길 간절히 바란다. 원제: Respectable Sins in Christian Minist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로잔 대회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대회와 대회 사이에 ‘운동’이 있습니다
by 문대원
2024-02-07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대규모 국제 선교대회의 시의성과 필요성에 대해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 세계 200여 국가에서 5,000명이나 되는 선교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15-20년마다 열리는 로잔 대회(Lausanne Congress)를 일종의 국제 이벤트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로잔 운동의 의의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라면 선교의 범위가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다들 인정할 것입니다. 일례로,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로 사역했던 필자는 미국 단체가 설립한 국제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섬겼습니다. 캠퍼스에서 대학생을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사역이라고 생각하며 부룬디로 떠났지만, 현지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아와 임산부를 위한 사역, 낙후 지역 식수 개선 사업, 현지 교회 건축 사역 등 다양한 사역을 섬기게 되었습니다.수많은 필요가 있는 선교지에서 순전히 영적인 사역만을 감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과 더불어, 취약 계층을 돌보는 사역,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사역, 병자를 치료하는 사역 등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도와 사회 책임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사역은 선교에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선교 현장에서 가장 의미 없는 질문은 “복음이 먼저인가, 빵이 먼저인가?”입니다. 복음과 빵 모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선교의 범위가 광대하고 선교지의 필요는 다양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위한 연합과 협력은 필수입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1792년에 출간된 그의 책 ‘이교도 개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연구’에서 대륙별로 세계 선교 현황을 제시하며, 전 세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모여서 선교 현황과 전략을 논의하는 국제 선교대회를 제안했습니다. 그는 1810년에 이러한 선교대회가 열리기를 희망했는데, 그의 제안은 그로부터 100년 후인 1910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가 개신교 최초의 국제 선교대회는 아니었습니다. 1888년 런던 선교대회(Centenary Missionary Conference)와 1900년 뉴욕 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가 있었지만, 에든버러 대회는 이전 대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선교회(총 160개)가 참여했습니다. 에든버러 대회에 참석한 1,200명의 대표단은 각각의 선교회에서 선정했는데, 이는 세계 교단의 기구적 연합이 아니라 실제 선교사들의 협력 사역을 꿈꾸었던 의장 존 모트(John Mott)의 비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에든버러 선교대회에는 총 8개의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1) 비기독교 세계에서의 복음 전파, (2)현지 교회와 현지 지도자, (3)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육, (4)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 메시지, (5) 선교사 준비, (6) 선교회 본부, (7) 선교와 정부의 관계, (8) 연합을 위한 노력. 에든버러 대회 이후에도 활발하게 사역을 이어간 8개의 위원회는 선교 역사에서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고 불리는 19세기를 지나온 당시 선교 지도자들이 세계 복음화에 대한 어떤 비전과 전략을 품고 있었는지 보여줍니다.‘이 세대 안에 세계의 복음화’(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라는 담대한 비전을 선포한 에든버러 선교대회는 국가와 교단을 넘어선 새로운 기독교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영국 성공회교회, 독일 루터교회, 네덜란드 개혁교회 같은 국교회(state church) 개념이 지배적이었던 기독교 왕국(Christendom) 시대에서 국가를 넘어선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 시대로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에든버러에 모인 선교 지도자들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1920년 창설)이나 국제연합(United Nations, 1945년 창설)보다 훨씬 전에 전 세계가 하나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주창했습니다. 보스턴 대학의 데이나 로버트(Dana Robert) 교수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선교사들이 에든버러 선교대회를 통해서 국제화(internationalism)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해 전 세계가 가까이 연결되어 있고, 세계 복음화를 위한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선교 사역의 이해와 접근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서구 교회와 현지 교회가 상호 존중 가운데 동반자 관계를 세워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이러한 배경이었습니다.로잔 대회는 15-20년마다 열리는 국제 이벤트가 아닙니다. 앞선 대회와 다음 대회 사이에 100회가 넘는 다양한 규모의 국제 포럼과 협의회(consultation)가 열리는데, 12개의 권역(regions)과 27개의 이슈 네트워크(issue networks)로 변화하는 상황에 맞는 새로운 선교 전략과 신학적 성찰이 공유되었습니다. 교회개척, 성경번역, 도시선교, 디아스포라, 비즈니스, 어린이, 장애인, 사회정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선교 협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될 그날까지 함께 기도하며 헌신하는 이들의 자발적인 연합체가 로잔 운동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날과 그때를 모른다고 하셨을까?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일까?
by Wyatt Graham
2024-02-06
마태복음 24:36을 보면, 예수님은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하셨다.당연히 이런 질문이 생긴다.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님은 왜 그날과 그때를 모르신다고 했을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아들이 모른다면,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인가?아들은 하나님이시고 또 사람이시다성경은 아들이 하나님(요 1:1; 골 2:9)이시요, 동시에 사람(요 1:14; 히 2:14; 빌 2:7; 롬 8:3)이시라고 가르친다. 마태복음 24:36은 이러한 성경의 진리 중 어느 것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이 점에 관한 성경의 규칙은 이렇다. 보통 성경은 때때로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인성 면에서 아버지보다 낮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아버지와 동등함을 확증하셨다. 그러면서 인성에 있어서는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요 14:28)이시라고 기꺼이 인정하셨다.이 기본 해석 규칙은 성경만큼 오래되었다. 이 성경 원리를 완전히 설명하는 글을 보려면 여기를 보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진리는 두 가지이다. “아버지는 종의 형체보다 크시지만 아들은 형체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1]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주장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한다. 빌립보서 2:6-8에서 바울은 아들이 본체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인성에서는 종의 형체를 지녔기에 하나님보다 작다고 단언한다. 그렇다.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다. 이 기본 진리를 알면 마태복음 24:36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이러한 기본 해석 규칙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4:36이 드러내는 것처럼 인간의 무지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처럼 사셨다. 이런 원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마태복음 24:36을 둘러싼 더 큰 성경의 맥락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마태복음 24:36의 전후 문맥 푸아티에의 힐러리(Hilary of Poitiers, 310-367)는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에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아리우스파가 마태복음 24:36을 어떤 식으로 인용하는지를 설명했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모르는 예수님이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을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한 구절만을 놓고 보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문맥에 맞게 읽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4:36과 관련해서, 힐러리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앞뒤의 내용을 확인할 때 제대로 드러난다”라고 언급한다(De Trinitate §9.2).힐러리의 이 말은 마태복음 24:36의 문맥을 이해하려면 본문 자체를 넘어서 마태복음 전체, 심지어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서 힐러리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무려 두 장(9-10장)에 걸쳐서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설명한다. 근접 문맥에서 볼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4:36(마 22:41-46)을 말씀하시기 전에 우선 자신의 신성을 확증하셨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막 13:32)에서도 예수님은 이 말씀에 앞서 자신의 신성을 확증하셨을 뿐만 아니라(막 12:35-37), 마가는 마가복음 11:15-19에서 예수님이 주 하나님으로 성전에 오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마가복음 서두가 암시하는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막 1:2). 전체로 볼 때, 성경이 증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요 21:17; 시 44:21). 아들과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다(신 6:4; 요 10:30). 바울이 말했듯,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시고”(골 2:9).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요 1:16; 골 2:10).그리고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또한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 1:14)고, 그리고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다”(히 2:14)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성자 하나님은 사람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에게 두 가지 본성이 있다고, 즉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예수님이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사람이신 게 사실이라면, 마가복음 8:29이나 마태복음 24:36에서도 그분이 자신의 그런 존재를 멈추실 리가 없다. 마태복음 24:36을 정경의 맥락에서 읽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인간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이 문제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Q: 마태복음 24:36에는 “아들”이라는 단어가 있는가? A: 그렇다.Q: 아들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신가? A: 그렇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들어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이 점이다. 설혹 어떤 구절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굳이 다 설명할 의도가 없다고 해서, 완전한 그리스도가 완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시다”(히 13:8).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누구라는 점을 오로지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라서만 확증해야 한다. 이 진리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없는 특정 구절이 있다고 해서 그분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다. 예를 들어, 칼뱅은 마태복음 24:36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본성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었다.”[2]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볼 때마다 우리는 이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근거로 할 때, 하나님으로서 아들은 모르는 게 없으시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4:36에서 드러난 예수님이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님의 인성은 그분의 무지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Nazianzus)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무지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이 아닌 인간의 본성에 귀속시킴으로, 우리는 가장 경건한 방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Or. 30). 그리고 그레고리도 지적했듯이,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 살아야만 했던 이유도 “내 몸으로 내가 직접 감당하지 않고서는 고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Epistle 101 to Cledonius).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모든 부분을 치유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처럼, 즉 몸과 영혼과 정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시험과 슬픔과 고난이 가득한 진정한 인간으로 사셨다. 히브리서 2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인간을 공감하기 위해 “살과 피”를 취하셨다(히 2:17-18).마찬가지로, 히브리서 5:7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예수님도 인간의 슬픔과 염려가 있으셨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히 5:7).조금 앞서 히브리서 4:15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 4:15).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 26:3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이 어떤 느낌인지 아신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1:5-6)고 확증해야 한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오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히 4:15) 참 인간이시다.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날과 그 시를 모르셨다. 칼뱅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아시는 그리스도(요 21:17)가 인간으로서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무지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부적절하지 않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슬픔과 불안을 겪지 않으셨을 것이고, 결코 우리와 같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히 2:17)”(Harmony, 154).칼뱅은 슬픔과 불안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미래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러한 시련과 유혹을 경험하셔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공감할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도 시험을 이기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실 수 있다.“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벧전 2:21-22).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칼뱅은 마태복음 24:36이 드러내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무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긴 문장으로 설명한다.“중보자가 되려고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계시는 동안에 한해서, 그래서 최소한 그가 직분을 완수할 때까지는, 정확한 종말 시점에 관한 정보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나는 이해한다. 그건 그가 부활하신 이후에 받은 지식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예수님이 직접 부활하시고 나서야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분명히 선언했기 때문이다(마 28:18절)” (Harmony, 154).중보자되신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영광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인간처럼 알고 계실 뿐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날과 그 시간에 관한 지식을 받으셨다는 게 칼뱅의 주장이다. 칼뱅은 성경 전체를 자신만의 문맥으로 이해해서 읽었기에 이 구절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본성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었다”(Harmony, 154).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마태복음 24:36을 읽어야 한다. 즉, 신학적으로 해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성경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칼뱅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에서도 특별한 부분, 즉 그날과 그 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시는 동안에도 어떻게 여전히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본성이 그때는 쉬는 상태(a state of repose)였다.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이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경우에, 즉 인성이 고유한 특성에 따라 별도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신성은 전혀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Harmony, 154).칼뱅이 의미하는 바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인성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있고, 또 상황에 따라서 그분의 신성이 더 드러나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와 구속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구속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에 있어서 예수님의 무지는 그분의 참된 인성을 보여주며,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여준다. 힐러리는 그 점을 지적한다. “주님께서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염려의 무게를 없애셨다” (Matthew §26.4).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 1:7).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굴욕을 당하시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셨고, 그 사실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참 인간으로 사셨음을 의미한다.성경은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한다아리우스파가 성경을 문맥에 맞게 읽지 않는다는 힐러리의 비판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마태복음 24:36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떼어내서 읽는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나머지 가르침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 구절을 이해했다. 힐러리의 지적은 단순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도록 성경 전체에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마태복음 24장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길게 가르치지 않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우리는 그 점을 배울 수 있다. 성경의 각 부분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성경 전체의 문맥을 읽어야 한다. 마태복음 24:36 주위의 몇 구절만 읽는 것은 문맥을 떠나 성경을 읽는 것이다. 힐러리의 주장에 따르면, 그게 바로 아리우스파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속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자 사람이심을 가르친다. 바울은 이 사실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부르면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셨습니다”(딤전 3:16). 성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기에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딤전 2:5)가 되셨다. 마태복음 24:36에서 그날과 그 시를 모른다고 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 곧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참된 인성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딤전 2:5).1. See The Trinity, trans. Edmund Hill, ed. John E. Rotelle, 2nd ed. (New York: New City Press, 1991), 78.2.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6), 154. 원제: Why Doesn’t Jesus Know the Day and the Hour in Matthew 24:3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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