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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 설교? ‘삼위일체’ 설교?
by 고상섭
2024-04-03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 중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하지 말고 삼위일체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설교에서 그리스도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본문에 맞춰 삼위일체를 모두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고 말한다. 언뜻 신학적으로 더 균형 있는 말인 것처럼 들리지만 이 또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이 곧 삼위일체 중심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설교여야 한다는 명제가 증명되려면, 먼저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이 아니다”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적이지 않은가? 프레스 샌더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에서 그리스도 중심일수록 더욱 삼위일체적이 된다고 설명한다. “만일 성육신이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세 위격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 위격은 계시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차이점에 의해 서로를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에서는 하늘에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없고, 오직 익명의 셋만 있게 될 것이다.”이 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만 삼위일체의 구분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양자됨으로 우리가 성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부와 성령과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부에 의해 보냄을 받고, 성령 안에서 사역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적일 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가 더욱 찬란하게 계시된다.센더스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은 성부를 망각하는 것도 성령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경 히브리서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는 말씀이 있다면 성경을 읽는 그 누구도 ‘예수를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삼위일체 중에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성부가 보내는 성령에 대해 생각한다. 즉 삼위일체의 관계성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도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중심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모든 설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자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신약의 서신들은 처음에 시작되는 인사말과 끝에 나오는 축도조차 그렇게 하지 않는다. 11개의 신약의 서신서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언급한다. 자세히 보면 성령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바울 서신이 ‘성령님’을 뺀 잘못된 설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성자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과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설교한다는 것이고, 설교를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이유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심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즉, 그리스도 중심 설교야말로 최선의 삼위일체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설교가 존재하는가? ‘삼위일체 중심 설교’라는 표현은 듣기에는 좋지만 학술적 정의가 불분명한 표현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다양한 신학 근거를 가진 책들과 실용서들이 출판되었지만, ‘삼위일체 중심 설교’라는 설교학 교과서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삼위일체 설교’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인가? 모든 설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반드시 다 거론해야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본문에서 성부가 나올 때는 성부만, 성자가 나올 때는 성자만, 성령이 나올 때는 성령을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는 말인지 명확하지 않다. 본문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나오지 않는 본문을 설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에서 말하는 것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 중심 설교라면, 삼위일체가 모두 등장하지 않는 본문은 늘 인간의 스토리만을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 본문이 포함된 문맥과 각 책, 구약과 신약의 전체 속에서 설교할 본문을 바라보는 숲속의 나무로 본문을 보는 성경신학의 눈이 생길 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라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다. 삼위일체 설교라는 말은 명확한 실체가 없는 표현이기에 실례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리스도 중심적이지 않고 삼위일체적으로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삼위일체 설교의 구체적인 예를 한 번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설교하는 것이 삼위일체 중심 설교인지 구체적인 설교문을 보고 싶다. 삼위일체 설교라는 주장은 많지만 정작 삼위일체 설교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학문 근거도 실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모두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일 뿐이다. 삼위일체 설교는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삼위일체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극단적으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는 설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프래드 샌더스도 삼위일체를 깨뜨리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분리해서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이 유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보내신 성부의 사랑을 그리고 지금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의미의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존재 그대로를 보는 데 실패하게 된다.”결론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정도 요점을 살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곧 삼위일체 중심 설교이다. 둘째, 삼위일체 중심 설교의 구체적인 예와 원리가 명확하지 않다. 셋째, 그러함에도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를 고려하지 않는 설교를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삼위일체 중심 설교는 결국 그리스도 중심일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의 풍성함이 더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 중심 설교, 삼위일체 설교라는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욱 아름답고 찬란하게 드러내어서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이 선포되도록 더욱더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삼위일체 중심이 된다.
비극의 소비자가 되지 말라
by Caroline Stoltzfus
2024-04-02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전쟁, 무차별 총격 사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연예인, 정치극, 그리고 재판받는 첨단 기술 관련 억만장자들 등등. 오늘날 사회에는 끊임없이 뉴스가 쏟아지고, 그 모든 뉴스를 챙겨봐야 할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보를 얻는다는 건 사회와 연결되었음을 확인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 및 역량을 강조하는 현대 문화의 미덕을 발휘하는 모습이다. 물론 탄탄한 저널리즘을 기반으로 한 역사적이고 시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건 가치가 있다. 창작자가 정직하게 이야기를 전할 때 정의가 구현되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자를 대변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뉴스를 통해서 각 세대가 이웃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자원을 사용하도록 영감을 받는다. 개인과 공동체로서 서로 배우고, 연결하고, 또 성장하는 데에 뉴스는 도움을 준다. 하지만 나쁜 뉴스에 관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둠스크롤링(doomscrolling: 뉴스 스크롤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과 더불어 쉬지 않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또 속보가 뜰 때마다 오는 알림을 강박적으로 클릭하는 게 과연 그리스도의 왕국을 잘 섬기는 데에 도움이 될까? 우리는 정말로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을 쏟는 걸까? 아니면 비극이 우리의 오락이 되었기 때문일까?참여냐 도피냐?솔직하게 말해서, 쉬지 않고 새로운 소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게 나와 이웃의 고통을 피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비난하는 게 바로 앞 모퉁이에 있는 노숙자를 돕는 거보다 훨씬 쉽다. 리얼 범죄 팟캐스트에 몇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가상 작업의 단조로움에 일시적인 만족감을 주는 아드레날린 해독제이다. 가족과 함께 가치 있는 대화를 나누는 대신 인스타그램 릴(Reel)이 제공하는 정치 드라마의 토끼 굴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마치 내가 역사의 올바른 편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내 정신 건강과 내 공동체에 초래하는 피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정보 소비 행태는 주로 혼자 이뤄진다. 둠스크롤링은 굳이 육체를 갖춘 인간과 구원의 관계를 맺는 복잡하고 헌신적인 작업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뉴스를 시청하다 보면 애초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벗어나게 된 과거의 절망에 다시 빠지고,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그 절망이 더 깊어지기도 한다. 시청에서 행동으로무력하게 멀리서 지켜보는 대신, 이사야 58:10-11에 귀를 기울이자.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라고 하신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우리가 부름 받은 건 단지 배고픈 사람들을 돕자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포스팅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바램을 보며 답답하다며 고개를 흔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을 쏟아부음으로 궁핍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부름받았다. 타인의 불행을 보다 보면 종종 두려움과 우울함이 생기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때 주님은 모든 우울함을 밝게 하시고, 계속해서 인도하시며, 나아가서 우리의 소망까지 만족시켜 주신다. 우리가 만족을 찾아야 할 행동은 스크롤링이 아니라 진짜 봉사이다. 하나님이 끊임없는 주시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흐름 이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이야기로 초대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의 필요에 부응할 때 우리에게 정신적이고 영적인 복지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육체적 필요를 채우며 고통과 싸울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감정적, 영적 어려움을 만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시고 우리가 기쁨의 증언을 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는 결코 뉴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취약계층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비극은 결코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극은 단지 인간의 죄가 모든 개인과 사회에게 어떤 끔찍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려줄 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주변 고통에 대한 정보를 알라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그 고통 속으로 발을 디디라고 부르신다. 성령의 열매를 고려하라어떻게 해야 주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돕는 방식으로 정보를 접할 수 있을까? 일단 뉴스 소비가 우리 삶에 어떤 열매를 맺는지 생각해야 한다. 게시물을 스크롤하고, 기사를 읽고, 또 팟캐스트를 들을 때 당신 속에 일어나는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라. 거기에 성령의 열매라는 특징이 있는가(갈 5:22-26)?• 이웃 사랑•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 당신의 삶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더 큰 계획 여부에 달린 평화• 학습 과정에서 필요한 인내심• 행동에서 드러나는 친절• 의롭고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함• 봉사하는 데서 드러나는 신실함• 마음과 몸의 한계를 향한 너그러움• 더 많이 알고 싶은 욕구에 대한 자제력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도리어 두려움, 불안, 죄로 특징지어진 반응이 주로 나타난다면, 당신의 뉴스 소비 습관은 재고되어야 한다. 보니 크리스티안은 Untrustworthy에서 단지 정보를 얻는 것보다 공부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공부하는 자세를 갖는다는 건 지식을 추구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이 모든 걸 다 잘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굳이 모든 헤드라인을 다 읽으려고 하지 말고, 적은 수의 기사를 깊이 신중하게 읽으라는 충고이다. TV 뉴스, 앱 알림, 일일 뉴스 요약 이메일의 단식부터 시작하라. 적어도 몇 주 동안 소음을 제거하고 이런 변화가 당신의 관계, 기분 및 불안 수준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라. 그리고 시간을 내어 성경을 읽으라. 일기를 쓰고, 기도하고, 또 이런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며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나눠 보라. 혹시라도 더 개선하거나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라. 이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기도와 돕는 손길과 재정을 어떻게 바치라고 요구하시는지를 고민하라. 그런 다음에 뉴스 피드를 새롭게 구성하라. 당신은 이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새롭게 정보를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주제에 대한 온갖 정보를 다 얻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오늘 터지는 뉴스와 관계없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영원한 구원 스토리의 일부가 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원제: Tragedy Isn’t for Consump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파괴되기 전에, 다시 세워야 한다
by 전재훈
2024-04-01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 보게 되는 표지판이 ‘아시안 하이웨이’다. ‘일본-한국-중국-인도-터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는 아시안 하이웨이 1번 도로이며 6번 도로의 경우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릉-원산-청진으로 북상해 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모스크바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지만 북으로는 철책이 놓여 있어 일본처럼 섬이나 다름없는 형국이다. 자연스레 이 땅의 젊은이들은 세계관이 다른 나라에 견주어 좁은 편이다. 하지만 이 하이웨이가 개통되고 오토바이 타고 유럽을 갈 수 있게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젊은 친구들이 꿀 수 있는 꿈의 크기가 달라지고 세계관의 스케일이 달라진다. 미국은 50년 동안 달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달에 깃발 꽂고 사진 한 장 찍은 것이 전부였다. 이것마저도 사기라며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개의치 않고 달 탐사에서 한 발 더 나가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달 탐사 프로젝트가 가져온 결과는 비단 사진 한 장만이 아니다. 달에 가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무수히 많은 기술적 진보를 이뤄냈고, 그 혜택을 우리가 누리며 살고 있다.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으로 생각의 지평을 넓혔고, 이는 다양한 문화적 확장을 이뤄냈다. 스타워즈의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인식의 한계를 지닌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듣고, 보고, 느끼는 세계는 매우 좁다. 너무 크거나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너무 멀리 있거나 혹은 매우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의 귀는 20~2만 헤르츠 사이의 주파수대에서 소리를 듣고, 우리의 시야는 120도를 넘지 못한다. 0.03초 이내의 순간은 전혀 볼 수도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우리의 한계 속에서 규정된 세계였다. 하지만 과학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매우 넓어진다. 광학 현미경으로 나노 크기의 원자를 보고, 천체 망원경과 우주탐사선으로 도움으로 화성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은 소리는 키워서, 큰 소리는 줄여서 들을 수 있는 기계들도 많다. 야간에는 적외선 탐지기로 어둠 속을 보고, 엑스레이나 MRI로 몸속을 볼 수도 있다. 배 속에 있는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손가락을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분명 더 확장된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SNS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앞집 아저씨의 근황은 몰라도, 인도에서 선교하는 친구의 근황은 잘 안다.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무한대로 넓어졌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고, 우리 아이들을 위한 선물도 받았다. 페이스북의 친구들을 파도타기 하면 불과 다섯 번 만에 전 세계인을 다 만날 수 있는 시대다. 번역기는 언어의 한계를, 구글은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준다. 지금까지의 과학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앞으로 수년 내에 펼쳐질 미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지금 상용화를 앞둔 다양한 기술들은 불과 1, 2년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술들이다. 과학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이는 삶의 편의성만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다. 분명 사고의 변화를 일으킬 것이고,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게 되며, 가치관의 혼돈도 생겨날 것이다. 과학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는 신학과 철학이 인간의 생각을 주도해 왔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철학적 사고보다 과학적 사고가 더 환영받는다. 어떤 신이 참 신인가에 대한 논쟁은 신이 있기는 한 것인가의 논쟁으로 바뀌었고, 진부한 싸움은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게 했다. 이제 더 이상 신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시대가 되었다. 이런 생각들은 다시 한번 변화의 기회를 맞고 있다. 화성탐사프로젝트로 빅뱅이론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원자 단위로 물체를 분리 추출하는 기술은 물체 에너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를 정리하고 데이터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선도하는 기술은 이미 가동 중이다.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자동차는 양산을 앞두고 있다. 3D 프린터는 가정용으로 만들어 판매되고 있다. 화상캠을 통하여 집에서 교회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제어하며, 미국 출장 가서 한국 집에 있는 보일러를 조작할 수 있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대화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공간과 시간 안에 갇혀 있던 우리의 생각들은 무한의 세계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4차원’이라는 말이 더 이상 바보를 뜻하는 말이 아닌 진보적이며 창조적인 의미로 바뀌고 있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말은 더 이상 설 곳을 잃어가고, 엉뚱한 상상은 인류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가고 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로 종교의 울타리가 무너졌듯, 다가올 미래는 신학의 파괴를 부채질할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종교적 마인드로는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설득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AI가 인간을 대체하기 전에 재림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묶어 두었던 종교적 세계관, 가치관, 인간관, 신관을 모두 재정립해야 한다.
‘영적 예배’의 참 의미는
by 최창국
2024-03-29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롬 12:1)는 기독교 예배의 정신과 목적에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로마서 12:1의 ‘영적’이라는 단어는 ‘로기코스’(λογικός)를 번역한 것이다. ‘로기코스’는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합리적’(개역판), ‘영적’(RSV, 개역 한글판, 새번역), ‘마음과 심성으로 드린’(표준새번역, 표준 신약성서)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또한 여러 번역서가 ‘이성적’(KJV, STV, NBG)으로 번역하고 있다. ‘로기코스’는 동사 ‘생각하다’와 명사 ‘말씀’과 관계가 있는 단어로 어떤 것의 참되고 핵심적인 본질에 부합한다는 의미의 ‘진정한’을 뜻하기도 한다. NEB 성경은 그 형용사의 다중적인 의미를 담아 ‘지성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로 번역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로기코스’를 이성적으로 번역하여 ‘영적 예배’가 아니라 ‘이성적 예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더라도, 여기서 이성적이란 의미는 이성 그 이상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한 예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는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어떤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고 갱신된 정신을 가진 이들이 드리는 믿음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즉, 영적 예배는 이 시대의 가치, 태도, 행동, 삶의 방식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 삶과 관련된다(롬 12:2).분명히 ‘로기코스’는 단순히 ‘이성적’으로만 번역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로기코스’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비유적’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에서 몸(σώμα)을 비유적이고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로기코스’도 비유적이고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몸을 전인적이고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듯이, ‘로기코스‘도 ’영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바울은 영적 예배를 우리의 몸, 즉 전인을 드리는 예배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명사 ‘예배’는 ‘섬김’(service)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의식(儀式)과 의무라는 뜻 모두를 내포한다. 따라서 여기서 예배란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예배 의식이나 행위만이 아니라 삶과도 관계된다. 이 단어의 이중적 의미는 우리의 예배 의식과 일상의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뿐 아니라 삶의 행동과 봉사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응답하는 형태들임을 상기시켜 준다.바울은 영적 예배를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과 잇는다. 필립스 의역본은 그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변 세상이 당신을 틀에 박지 못하게 하라”(롬 12:2). 따라서 영적 예배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즉 이 세대의 문화와 가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를 추구하는 삶이다. 영적 예배는 이 세대의 물질주의와 부도덕성과 잘못된 사고방식과 수단을 거부하는 삶과 관계된다. 중요한 것은 바울 시대를 전후한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그 시대의 물질주의와 부도덕한 삶을 거부하고 거룩한 또는 건전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기독교 초기에 그리스-로마 사회의 종교는 신과 관계된 의례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윤리적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다. 그 당시 사회에서 종교는 “신전과 제단, 사당에서 거행되는 제사와 제의적 활동, 그리고 특정한 축일을 준수하는 책무가 대부분이었다”(래리 허타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200).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독교 사상의 발전과 함께 윤리적인 삶을 종교와 결부시켰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고 가르치며 실천했다. 2세기 말에 이교도와 기독교도 간에 벌어진 논쟁에서 기독교의 대변인이었던 옥타비아누스가 “날마다 우리의 수는 증가일로에 있다” 하면서, 그 원인이 건전한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87에서 인용). 초기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사회 안에서 건건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옥타비아누스의 고백이 증명해 준다. 예배와 사회적 실천은 상호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예배의 실천과 사회적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적은 종교적인 신뢰를 갖게 하는 본질적인 요인이었다. 실제로 램지 맥멀른은 “눈에 보이는 신적 역사”가 엄청난 개종의 이유가 되었다고 하였다(Ramsay MacMullen, Paganism in Roman Empire, 126). 그리스-로마 사회의 이러한 종교적인 상황에서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 어느 종교 공동체보다 그리스도인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존율이 높았던 것을 기적으로만 말할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당시 다른 종교 공동체 구성원들은 전염병 환자를 멀리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환자를 적극적으로 간호하며 보살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병자를 낳게 한 것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환자를 위해 올린 기도 덕분만이 아니라 참을성 있게 떠다 먹인 수프 덕분이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42). 이처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영적 예배로서 거룩한 삶을 일상에서 신실하게 실천하는 공동체였다.로마서에서 영적 예배를 강조한 바울도 거룩한 삶의 실천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관계시킨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특히 남성들에게 그들의 색욕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다스리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행동하지 말라고 권면한다(살전 4:4-5). 당시 이교도 문화에서 ‘포르네이아’ 즉 간음은 여성이 몸을 파는 행위인 매춘을 의미했지만, 바울은 포르네이아를 혼외정사로 이해하고 가르쳤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아내에게는 보통 결혼 생활 중에 정조를 지킬 것을 엄격히 요구하였지만, 남편들은 상당히 자유로웠다. 남편들은 유부녀나 자유민 출신의 처녀와 성관계를 맺는 일은 용인하지 않았지만, 그 외의 성행위는 구애받지 않았고 심지어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사회에서 여성, 특히 아내들에게 요구되는 “거룩함과 존귀함”의 기준을 남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 당시 지배적인 이중 잣대의 성문화에 도전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남편들에게 성관계의 대상을 아내로 한정하고 아내를 명예롭게 대할 것을 요구했다(살전 4:4-5). 이 구절에서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신을 섬기는 용도로 준비된, 이를테면 제단이나 제의 용구 같은 신물이라든가 사제를 수식하는 용어다“(래리 허타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204-05). 이는 거룩한 삶과 신을 섬기는 제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바울에게 남자들의 거룩한 성생활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표지 중의 하나였다. 즉, 바울이 가르치는 핵심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바른 성적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는 거룩한 삶과 거룩한 제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깊은 차원에서 거룩한 삶이 거룩한 제사, 즉 영적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예배는 거룩한 삶의 형성과 관계된다. 영적 예배는 어느 한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다. 영적 예배는 십자가를 아름답게 장식해 놓은 공간이나, 화려한 현대식 시설을 갖춘 건물이나, 찬송이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기도원 같은 특별한 장소나 행동이 있는 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주일 예배도 영적 예배에 포함된다. 따라서 영적 예배가 거룩한 삶과 관계된다는 의미가 주일마다 함께 드리는 공동체 예배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매주 드리는 주일 예배와 영적 예배는 서로 순환 관계 안에 있을 때 서로를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의 부활은 더더욱 ...
by Steve Bateman
2024-03-28
마크 트웨인이 믿음(faith)을 설명한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believe) 것.” 그는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그런 모습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럼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그들은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육체의 부활을 믿는 걸까, 아니면 증거 때문에 믿는 걸까? 오늘 그 점을 살펴보자. 게다가 지금 이 시점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주장에 대한 몇 가지 증거를 고려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3월의 이데스(Ides of March, 3월 가운뎃날—에 수십 명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그날로부터 거의 77년 후인 서기 33년 4월 5일 일요일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역사가가 과거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하는 네 가지 관행을 따르면 우리는 두 사건 모두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1. 두 가지 방법의 구분과학적 방법은 관찰을 기록하고, 가설을 세우고, 예측하고, 반복 가능한 실험을 수행하고, 결과를 분석한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적 사실은 과학적 방법을 활용한 반복 실험이 불가능하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9년 1월에 루비콘 강을 건넜다거나, 조지 워싱턴이 1776년 12월 25일에 델라웨어 강을 건넜다거나,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에 영국 해협을 건넜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합리적인 사람은 이러한 사건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역사적 방법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다.역사가 루이스 고트샬크(Louis Gottschalk)는 역사적 방법을 “과거의 기록과 자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양심적인 역사가’는 개인적인 편견을 버리고, 문서를 연구하고, 유물을 조사하고, 사실을 수집하고, 증거를 따른다. 귀추법(Abductive reasoning)을 통해 역사가는 사실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설명을 제시한다. 기독교의 핵심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주장이 있다. 과학에 호소하여 이 주장을 거부하는 것은 과학의 한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다”(고전 15:14)라고 인정했다.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역사적 방법을 통해 검증과 반증이 가능하다. 2. 두 간격의 조사먼저,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이를 보고하는 원본 원고 사이의 간격을 조사한다. 이 간격이 짧을수록 작성자는 실제 사건에 더 가깝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에 암살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비록 우리가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과거 사건을 믿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 사실을 믿는다. 목격자들은 눈으로 본 사실을 썼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많은 사람이 카이사르의 암살을 믿는 이유는 단순히 고등학교 때 1599년에 초연된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를 읽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출처는 토마스 노스(Thomas North)가 1579년에 영어로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Parallel Lives)이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암살 후 약 160년이 지난 서기 2세기 초에 가서야 그 책을 썼기 때문에 목격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출처는 누구였을까?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기(Gallic Wars)를 일부 자료의 출처로 사용했다. 카이사르야 당연히 당사자로서 암살의 목격자였지만, 그가 거기에 관해서 글을 쓰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마도 키케로가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운명적인 날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채 일 년 후에 죽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 사건의 살아 있는 목격자를 접할 수 없었지만, 로마 사회의 저명한 구성원으로서 아마도 지금 우리에게는 없는 여러 문서와 구전 전통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카이사르의 암살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원본 문서 사이의 간격은 약 160년이다. 이에 비해 신약성경은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과 그 가까운 동료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죽은 지 160년 후에 글을 쓴 반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빈 무덤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두 가지 핵심 주장을 확인하거나 부인할 수 있는 목격자들의 생애 동안에 글을 썼다.서기 50년에 이미 바울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기록했다(갈 1:1). 예수께서 서기 33년에 죽었다면, 부활과 이를 보고하는 최초의 원본 사본 사이의 간격은 고작해야 20년 미만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대 역사의 표준이 되는 플루타르코스나 신약성경 작가가 쓴 원본이 없다. 그래서 두 번째 간격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원본 원고와 현존하는 원고 사이의 간격이다. 역사적 방법은 텍스트 비평을 사용하여 (손으로 쓰인) 현재의 사본을 검토하여 원본을 재구성한다. 이 간격은 짧을수록 좋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원본 원고와 우리 손에 들린 가장 초기 원고 사이의 간격은 무려 800년 이상이다. 거기에 비해서 요한복음의 원본 사본과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요한복음 사본 조각 사이의 간격은 고작해야 50년이다. 신약학자 대럴 복(Darrell Bock)의 결론이다. “복음서는 예수와 카이사르에 관해 출처 간격의 증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른 어떤 고대 기록과 비교해도 뛰어나다. 고전과 카이사르 연구에 효과가 있는 연구 방식을 예수의 기록에 적용한다면, 예수의 기록은 신뢰성이 탁월하다.” 3. 두 숫자의 비교법정에서 믿을 만한 증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처럼, 사본도 많을수록 좋다. 아무리 신실한 증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보지 못한 세부 사항을 생략할 수 있고 또 봤다고 착각하는 세부 사항을 추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증언을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주변적인 세부 사항에는 사소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의 요지는 분명해진다. 신약성경 사본의 수를 다른 고대 문서와 비교하면 신약성경이 가진 역사적 증거의 우월성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은 다양한 부분을 망라하는 23,986개의 사본을 가진 것에 비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경우에는 사본이 채 열 개가 되지 않는다. 이건 엄청난 숫자의 차이이다.신약성서 학자 댄 월리스(Dan Wallace)는 현존하는 신약성서 사본들을 모두 합쳐서 쌓으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4개보다 더 높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조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고대 그리스 작품의 경우에 모든 사본을 다 쌓아도 높이가 1미터를 조금 넘을 뿐이다. 4. 두 동기의 검토원본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재생산 기록이 많더라도 작성자가 진실을 보고했는지 아니면 거짓말을 날조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또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플루타르코스 시대에 카이사르 암살에 관한 이야기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평판이나 사회적 지위에 해를 끼칠지 모를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글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는 글을 통해서 사회 엘리트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였을 뿐이다. 그는 역사적 주장을 글로 써서 당시에 오늘날의 베스트셀러 계약에 버금가는 이익을 얻었다. 그는 잃을 것이 거의 없었고 얻을 것이 많았다. 예수의 초기 제자들은 진실 아니면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굳이 그들이 왜 거짓말을 할까? 그들의 대담한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고 정치적으로 위험했다. 목격자의 증언(행 1:22)으로 인해 그들은 지위와 부, 자유를 잃었고 어떤 사람은 생명까지 잃었다.역사가는 그러한 고통을 문서의 신뢰성에 대한 논거로 간주한다. 고트샬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진술이 증인, 그의 사랑하는 사람 또는 그의 대의명분에 해를 끼치는 경우 그것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과 가족,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큰 해를 끼쳤다. 일관되고 지속적인 그들의 증언을 가장 설명하는 방법은 그들이 진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신앙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광신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해서 죽을 사람은 있어도 거짓임을 알면서 죽을 사람은 없다. 그들은 부활이 이익을 준다는 이유로 증언한 게 아니다. 부활이 사실이었기에 증언했다. 3월의 이데스를 기념하는 역사학자가 몇 명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은행조차도 쉬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부활절에 모든 대륙에서 수십억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할 것이다. 카이사르는 세상에 율리우스력을 주었지만, 1세기에 목수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우리에게는 연수를 계산하는 새로운 방식이 생겼다. 그건 랍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다. 그의 죽음 때문도 아니다. 예수 외에도 로마가 십자가에서 죽인 적의 숫자는 적지 않다. 2068년 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계는 이를 하나의 역사적 각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로부터 불과 77년 후,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세상은 그날을 기점으로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원제: I Believe in the Death of Julius Caesar and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그리스도인을 위한 심미안 기르기
by 서나영
2024-03-27
어린 시절부터 악기들을 다루고 듣다 보니 얻은 것은 예민한 귀다. ‘예민’의 다른 말은 섬세한 구분이 빨리 가능한 상태다. 초등학교 때는 3년간 베이스 리코더로 리코더부에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소리만 들어도 아는 텅잉 기술과 섬세한 핑거링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3년간 현악부에서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는데, 포지셔닝의 손가락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음색, 활털의 재질, 브릿지가 정확한 위치에 놓여 음이 울리는지, 심지어 연주자 팔 길이에 따른 다이나믹 차이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다룬 피아노는 물론, 기타는 음색만 들어도 대충 어떤 회사의 제품인지 구별이 가능해졌다. 최근에는 리움미술관의 상설전시관을 자주 들여다 보니 드라마에 등장하는 달항아리가 왜 모조품인지 지나가는 화면 찰나에도 구별이 가능해졌다. 많은 경험과 감상의 시간들은 구별할 수 있는 감각을 선물해줬다.‘심미안’이란 ‘아름다움을 살피는 안목’을 말한다. ‘안목’이라는 단어는 눈의 보는 활동을 넘어 “포괄적으로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을 의미하고, ‘살핀다’는 말은 우리의 의지가 개입되는 적극적 행위를 뜻한다. 즉 심미안을 풀어 이야기하면, 아름다움을 분별하고 애써 찾으려는 열정적인 눈과 귀와 그 외의 감각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심미안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에게 무척 어울리는 단어다. 그리스도인은 구별된 사람들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주했던 성경인물들은 그를 향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했고, 거룩의 내적 의미는 ‘다르다’라는 사실에 대한 감탄이다. 그분을 어떤 식으로든 마주하면 죄로 타락한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구별이 가능해진다(이사야 6장). 구별된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다름과 차이에 민감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사는 그들의 삶은 세상과는 다르다. 전인격적 영역을 포함하며, 가정과 일터와 사회와 나라 속에서, 그리고 모든 관계와 행위와 선택들이 세상과는 구별된다.개혁주의 기독교 전통은 가톨릭 신학자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의 ‘신학적 미학’의 역사를 애써 외면해 왔다. 아름다움은 감각의 영역이라 신학의 영역에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지금도 거두지 않았다. 개신교의 신학적 입장을 변호해 보자면, 가장 큰 이유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좋은 예로 인류를 대표하는 화가인 반 고흐(Vincent can Gogh)나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그들의 작품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반 고흐는 사후 15년 뒤에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 열린 회고전(1905)을 시작으로, 바흐는 사후 100년 후 멘델스존의 마태수난곡(바흐, 1729 초연) 재연(1829)을 계기로, 지금까지 꺼지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된다. 즉,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은 감상자의 맥락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며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된다는 것에 그 복잡함이 있다. 맥락에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 개인의 믿음과 취향과 세계관이 포함되어 있어 추적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왜 어떤 아름다움은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지, 왜 역사는 특정한 작품에 가치를 부여했는지 분석하는 것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아름다움에는 익숙하지만, 인간이 만든 예술을 대할 때의 태도와 취향은 극과 극을 오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심미안이라는 단어가 가능한 말인지를 늘 의심받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심미안 형성은 중차대한 일이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감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길 거부하는 사람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 심미안은 순례길에 있어 장식품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것들도 꼼꼼하게 볼 수 있고, 다름과 차이에 그 누구보다 민감해지는 것, 그 길은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성화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심미안,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눈으로 분별하여 아름다움을 찾는 눈은, 섬세한 훈련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꼭 가져야 하는 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심미안이라는 바다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떻게 도달해야 할지 큰 강줄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시작은, 순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열망은 세례받은 심미안 시작의 모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잊지 못할 장면들이 있다. 그중 예전 한 미국의 다큐 프로그램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 가운데 트럭에 매달려 목숨을 담보로 레이싱을 즐기던 한 소년의 인터뷰가 기억난다. 마약 기운에 초점 없는 눈빛을 하고 “I’m Christian”(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장면이다. 그 외에도 많다. 평생에 새벽예배도 빠지지 않고 온갖 헌신과 봉사로 교회를 떠나지 않았던 한 여집사님이, 14년간 이어온 불륜 내연남과 호텔에서 심정지로 사망한 참담한 사고의 기억이다. 설교 강단에서 몇십 년을 가르쳤지만 동성애를 지지하고 애완견에게 세례를 주는 목사들이 존재하는 등의 놀라운 경험들이다. 후에 세계관에 관한 공부는 내가 놀랐던 이유를 꽤 명확하게 말해줬다. 현대사상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 안에 ‘섞여 있는 세계관들’이 그 이유다. 성경의 진리 말고도 동양의 범신론적 일원론 사상, 유신론적 실존주의 사상, 자연주의 이신론 사상, 뉴에이지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등 다른 믿음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을 섬겼던 고대 이스라엘 왕들과 백성들처럼, 한 사람 안에 두 마음 세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약 4:8). 이러한 세계관의 공존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일에 정함이 없게 만든다(약 1:8), 그리스도인 속에 숨어서 때로는 아주 오랫동안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그만큼 분별이 힘들다는 이야기다. 선과 아름다움으로 가장한 죄악의 은밀한 공존은 남도 자신도 특별한 노력의 시선이 아니면 알아챌 수 없다.성경의 진리와 함께 갖가지 다른 세계관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먼저다. 연단의 과정을 거쳐 정금같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기를 바란다. 죄가 세련된 멋으로 가장해 가짜 아름다움을 진짜라고 믿게 하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최근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의 유작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개정 6판이 출간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성경의 진리를 지키고자 쓴 (대학 축제 비판에 관한) 작문 과제물에 대해 F 성적을 받았던 한 학생은, 후에 기독교 세계관의 순전함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사이어와 같이 순전한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주옥같은 학자들의 책들이 많이 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장해 매섭게 파고든 현대사상들을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외의 다른 사상들을 쪼개어 다듬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번째는 훈련된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모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 기독교 예술학과가 개설되고 학생들을 뽑을 때, 첫 번째 조건은 예술에 대한 학위가 있는 자들이었다.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이해를 위해 읽어야 하는 문헌들의 양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예술적 심미안’이 어느 정도 길러진 사람을 뽑겠다는 심사였다. 그러나 공부를 하며 마주한 사실은 어차피 감당하지 못할 양의 문헌들이 평생을 괴롭힐 것이라는 슬픈 진실이었다. 머리를 쥐어짜며 고군분투한 세월에서 내가 다다른 결론은 “많이 경험한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이었다. 평생을 미술관을 다니며 얻은 심미안을 엿보고 음악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의 글을 외우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 대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죄로 가득한 세상은 탐욕의 엔진으로 돌아간다. 채워지지 않은 갈망으로 한 우물을 팠던 사람들의 경험을 읽어라. 그리고 경험해야 한다면 그 안에서 선별해서 경험하기를 추천한다. 그리스도인은 게걸스럽게 모든 세상 문화 예술 콘텐츠를 즐기고 경험할 시간이 없다. 구별하는 시각을 갖겠다고 매력적인 모든 것을 깊숙이 자세히 경험하고자 하면 너무 많은 죄악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결국 탐욕의 주인이 될 확률이 높다. 예술 세계의 마지막은 소유다. 소유만이 만족을 주기 때문에 결국 세례받지 않은 심미안의 끝은 원작을 끊임없이 소유해야 하며, 라이브로 들어야 만족을 느끼고, 거창한 건축물을 지어내야만 만족의 마침표를 찍는다. 이런 소유의 과정은 심미안을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브레이크를 걸 수 없다면 덕이 되지 않는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 많은 세계관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이 아닌 다른 사상들은 최대한 간단히 핵심만 보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지혜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심미안을 훈련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러한 절제가 필요하다. 잊으면 안 된다. 작은 십자가라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마지막 큰 줄기는, 본질에 대한 호기심이다. 아름다움은 늘 감춰져 있다. 그 숨은 의도를 발견하고 감춰진 내용을 들춰보는 것이 심미안의 묘미다. 그리고 어떤 아름다운 작품을 대하든 그 숨겨진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은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자만 획득할 수 있다. 음악, 미술, 댄스, 사진, 영화와 드라마, 시와 소설, 건축 등 수많은 영역의 예술이 존재하고 각자 다 다른 색과 맛의 미학적 노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본질을 파헤치기를 원하는 자, 성경을 열정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와 손을 통해 주신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성경은 쉽지만 어려운 말씀이다. 누구나 명확하게 복음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지만, 알수록 깊어지며 수많은 연구와 묵상의 과정이 필요한 책이다. 살아 있는 거룩한 언어가 문자로 남겨져 있는 것이 성경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본질을 파헤치는 자만이 그 안의 생명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 빛과 색과 소리와 움직임은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로 모두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데, 실로 생명의 아름다움은 실존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일차로 하나님으로 말씀으로부터 온다. 많은 버전의 성경을 읽어보고, 충분히 묵상하며, 쉬운 주석부터 통독해 보기를 권한다. 그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이 되기를 기도하라. 심미안을 가장 온전하게 형성해 가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 될 것이다. Soli Deo gloria!
설교자여, 쉼 없이 회중을 사로잡는 설교를 갈망하라
by Trevin Wax
2024-03-26
몇 주 전, 나는 The Keller Center 설교 섹션에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모서리를 찾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모서리를 찾는 것은 다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성경 본문 속 전제, 태도 및 적용이 우리가 세상에서 “상식”으로 간주되는 요소와 어떻게 대조되는가? 이 본문이 세상적 또는 삶의 사고방식과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지점이 어디인가? 모순이 가장 날카롭게 부각되는 곳은 어디인가? 모서리 탐구는 설교자가 지나치게 길고 종종 지루한 설교에 안주하지 않고 교인들의 관심을 붙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설교에 매력이 있어야 한다거나 모서리를 찾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을 타협의 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인의 유익이라는 미리 정해진 조건에 따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여라도 이런 접근 방식이 사람들이 꼭 들어야 하는 것보다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의미일까?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에 기초하여 설교를 작성하는 건 아닐까? “구도자에게 민감”해지도록 성경의 거친 부분을 깎아내거나, 설교를 “매력 있게” 만들려고 노력함으로 설교자로서의 신념을 희생하는 건 아닐까? 이런 우려를 함부로 일축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신약성경에도 가려운 귀를 만족시키려는 유혹을 받는 목회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제쳐두고,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정치 또는 사회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을 결집하려 하거나, 복음과는 동떨어진 조언이나 제공하면서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설교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교인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설교의 목적이 인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것이라면, 그런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얕고 피상적으로만 파악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견고하고 성경에 충실한 설교가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 리는 없다.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고, 내용의 심각성이 어조에 잘 반영되도록 열정을 담아 전달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주석가의 영원한 관심사였으며 지금도 그렇다.유창함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On Christian Doctrine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썼다. 애정의 표현이라고 해서 반드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다. … 또는 반드시 다양한 담론이 듣는 이들이 짜증 내지 않고 주의를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 동경하거나 회피하게 하는 마음을 만드는 것은 발명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존 카바디니는 그의 글 “The Sweetness of the Word”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주요 목표는 단지 배운 것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감동”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건전한 가르침”을 제시받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단순히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르침이 “지혜”롭거나 “건전”한 경우라면, 거기에 유창함이 더해지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설득이 목표가 아니라면 연설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다. 몸을 더 강하게 만들지 않는 운동, 접시가 절반만 찬 식사, 쓴맛 때문에 환자가 삼킬 수 없는 약 등등, 이 모든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학적 비유를 사용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달콤하게 말하고, 현명하게 말하는 사람은 건전하게 말한다. … 그러나 치유의 힘이 있는 달콤함, 혹은 달콤한 치유의 힘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단맛을 더욱 간절하게 갈구할수록, 치유의 힘은 더 쉽게 발휘된다. 유창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찬사는 교만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교인들이 “저 설교자 참 대단하지 않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설교자의 메시지가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더 잘 알고 진리와 더욱 사랑에 빠지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쉼 없이 흥미로울 것나는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몇 년 전, 나는 우리 교회에서 초대 목사로 섬겼다. 2021년부터는 두 번이나 임시 목회직을 맡아 주간 메시지를 전했고, 또 전국 각지의 여러 교회나 콘퍼런스, 대학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어디에서 설교하든 내 목표의 하나는 설교가 시종일관 흥미롭게 하는 것이다. 설교가 너무 흥미로워서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게 힘들게 하는 것, 그러면서 그들이 계속해서 성경 본문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설교가 쉼 없이 흥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딴짓하는 게 집중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잘한다는 건 아니다. 이 목표가 쉽지 않기에 나는 되도록 설교를 길게 하지 않는다. 이삼십 분 정도면 목표를 달성할 거 같지만(물론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삼십오 분을 넘기면 아주 힘들어진다. 설교 길이에 관해서 물었을 때, 한 설교학 교수가 말했다. “정해진 길이는 없습니다. 교인들의 집중력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설교하세요. 그런데 기억하세요. 설교자들 대부분이 자신이 실제보다 교인의 집중력을 십오분 정도 더 오래 잡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의 하나는 신뢰할 수 있는 몇몇 출처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피드백 없이 발전은 힘들다. 교인들이 당신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신이 과연 교인들의 주의력을 붙잡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과의 만남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기에 설교 내용과 전달은 중요하다. 존 스토트는 모든 설교자의 열망에 대해 이렇게 썼다.설교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경험은 설교 중간에 회중에게 임한 이상한 침묵을 목격하는 것이다. 자던 사람이 깨어나고, 기침하던 사람이 기침을 멈추며, 산만하던 사람이 갑자기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눈도 또 마음도 흔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듣고 있지만, 그들이 귀를 기울이는 대상은 더 이상 앞에 선 설교자가 아니다. 어느새 설교자는 잊히고, 교인들은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팀 켈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설교가 기록할 가치가 있는 통찰로 가득 차야 한다는 건 맞다. 그러나 그 설교에 펜과 메모지를 다 제쳐두고 우리의 구원을 이룬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경외에 차서 멍하게 만드는 지점이 없다면, 결국에는 실패한 설교이다. 레이 오틀런드(Ray Ortlund)는 이렇게 상기시킨다. 설교를 듣는 것은 강의 듣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당신은 그의 영광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변화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그에게 집중하고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다시금 주목하자. 사람들을 휘어잡지 못하는 설교는 자격이 없다. 우리가 정말로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길 원한다면, 설교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 영광을 보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 영광에 걸맞은 설교를 하자.원제: Preachers, Aspire to Be Relentlessly Interest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작은 자로 살아가기
시편 131편 묵상
by 고명환
2024-03-25
1 미국의 한 주립대학에서 가르치던 젊은 한국인 체육 교수가 점심을 먹던 자리에서 각진 자세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는 한국 체육계에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위인전의 끝을 장식할 만한 문어적 수사를 써서 밝힌 포부였다. 사람이 운집한 공식 석상에서 들을 법한 선언과도 같은 말을 몇이 둘러앉은 조촐한 식사 자리에서 듣게 되니 머릿속이 다소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말이 의미하듯 그 젊은 교수는 성공하여 큰 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두 나라를 오가며 인맥을 만들기에 부지런히 움직였고 자신의 이름을 여러 방면으로 알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젊은 교수처럼 큰 자가 되어 보겠다는 사람을 탓할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칭찬할 마음은 더욱 없다. 다만, 왜 큰 자가 되고 싶어 하는지는 알고 싶다. 그 동기와 목적을 알고 싶은 것이다.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서, 아니면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여기에 더해, 누구를 위해 큰 자가 되려고 하는지도 묻고 싶다. 자신인가, 아니면 그 누구인가.사람을 줄곧 영향권 아래 두어 왔던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 이 시대에도 큰 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곧,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은 것을 가지거나, 유명해지라고 부추긴다. 그래야, 후회 없는 만족한 인생이라고 속삭인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대우해 준다고 강조한다. 큰 자로 살라는 세상의 가르침은 일찍이 교회의 울타리도 수월하게 뚫고 진입했다. 사람의 욕망을 숙주 삼아 성경적 가치인 양 버젓이 행세하고 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각 분야의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교회 안에도 큰 자가 있으니 큰 자로 쓰임 받기를 사모하라고. 장로, 권사가 되어 권위를 가지라고. 교회를 부흥시켜 큰 목회를 하라고, 아니면 자신을 확대해서 큰 교회의 담임이 되라고. 그런데, 교회의 머리시요 심판 날의 재판장이신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문화와 제도가 인정하는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의 나라에서 인정받는 큰 자와 다를 뿐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주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큰 자가 되려면 작은 자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앞서간 진실한 성도들 역시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그릇이 되고자 힘썼을 뿐이다. 오히려, 큰 자가 되어 세상의 영화와 사람의 영광을 얻는 길을 경계했다. 2 다윗은 큰일을 이룬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런 겸손한 마음을 시편 131편은 잘 보여준다.시편 131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1주님, 이제 내가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나서지 않으며,분에 넘치는놀라운 일을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2오히려, 내 마음은고요하고 평온합니다.젖뗀 아이가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3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새번역)1절에서 다윗은 교만한 마음, 오만한 길, 그리고 큰 것을 이루려는 욕망을 버렸다고 고백한다. 모두 마음의 평안을 빼앗는 신앙의 독소들이다. 경험에 의하면, 사람의 영혼을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고,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며, 눈을 높은 곳에 두고 자기를 중심에 두고 살 때 영혼은 피곤하다. 즉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기준으로 살면, 영혼은 안식하지 못하고 평안은 모두 빼앗기게 된다. 더불어, 커다란 것을 계획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영혼은 쉴 새가 없고 피폐해져 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위해 가지는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이 오히려 자신을 해치고 망가뜨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아마도 1절에서 언급한 마음과 태도로 인해 영혼의 전쟁터를 분명히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져다준 것은 명성이나 부였지 영혼의 안식과 평화는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더더욱, 안정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것이다. 오로지, 평화와 안정은 주님 안에서만 영혼이 자리잡을 때 주어지는 것이며, 높아진 마음이나 분에 넘치는 야망과 함께 그분이 계시는 평강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기에게서 떠나 주님의 영역으로 간 다윗에게 찾아온 것은 영혼의 평화와 안정이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듯이 고요하고 평안했다(2절). 젖뗀 아이에게 여전히 어머니의 품은 필요하다. 어머니의 품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곳이 아니라, 가장 안전하고 포근한 안식처이다. 다윗에게 주님의 품이야말로 진정으로 안전한 쉼의 장소였다. 그 어떤 것이 줄 수 없는 영혼의 안식과 완전한 안전을 보장해 주는 안식처인 것이다. 이 시는 여러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중 하나로 불리며 사랑받았을 것이다. 주님이 계신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무리에게 참으로 적절한 찬양이 아닐 수 없다. 영광의 하나님을 뵈러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정리하지 않은 부정한 마음과 세상의 욕망을 그대로 안고 다가갈 수는 없다.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길로 집약되는 주님께서 대적하는 마음은 물론, 욕심과 후회 원망 분노 등의 격정을 모두 비워내야 한다. 다윗의 본 시는 순례길에 오른 성도들이 읊조리고 노래하며 올라갈 때 충분히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갈망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짐작한다. 3열왕기하 4장에 한 부유한 여인이 등장한다. 수넴에 살고 있던 그 여인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성심껏 섬기기 시작했다. 엘리사가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음식을 대접했고 거처를 마련해서 머물러 편히 쉴 수 있도록 특별한 편의를 제공했다. 어느 날, 엘리사는수넴 여인의 남다른 정성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왕이나 군사령관 같은 권력자도 그의 말이라면 들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며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구하라고 했다. 그때, 그 여인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한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열왕기하 4:13, 개정개역). (새번역은 “저는 저의 백성과 한데 어울려 잘 지내고 있습니다”로 풀어서 번역했다.) 여인의 대답은 하나님의 백성의 한 사람으로 아쉬울 것 없이 만족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구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수넴 여인은 부유한 환경에서 남편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삶에 허전한 구석 없이 완벽하게 채워졌기 때문에 엘리사의 호의를 에둘러 사양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어쩌면 가장 큰 것을 갖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대를 이어줄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여자였다. 당시의 관점에서 수넴 여인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저주받은(복 받지 못한) 여자라는 사회적 편견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그늘 아래 보통의 여자 같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의 눈을 피해 고립된 삶으로 자신을 몰아가기 쉽다. 하지만, 대답에서 보여주듯 그녀는 동족과 어울리며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엘리사가 여인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알아내고는 딱하게 여겨 아들을 낳게 해 준다. (수넴 여인은 열왕기하 8장에 다시 등장하며, 성경은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한 여인과 관련한 이야기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수넴 여인은 마음을 높여 백성을 분리하고 멀리하며 충분히 특권 의식 속에 살 만한 위치에 있었다. 왕의 마음까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엘리사라는 큰 인물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유력한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백성 중에 있었다. 백성의 한 사람으로 평범하게 사는 삶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또 그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수넴 여인의 낮고 겸손한 눈 높이가 더 가질 수 있고 더 높아질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줄 엘리사의 호의도 정중하게 거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로, 평범한 여인 같으나 비범한 인물이었고, 작은 자인 것 같으나 큰 자였다. 복음서는 드문 경우이지만 제자들 사이에 빚어진 다툼을 기록했다. 다툼의 원인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자냐 하는 논쟁이었다. 그들이 다툰 이슈는 서열이 필요하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누가 더 크냐’였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 간에 그래도 서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 그들은 부름을 받은 순서나, 배운 정도, 혹은 가문, 아니면 다른 어떤 기준을 대면서 각자의 상위를 주장했을 것 같다.“제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그들 마음 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누가복음 9:46-48).먼저, 제자들이 왜 서로 간의 서열 문제로 다투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찾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제자들이 살았던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는 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계급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거대한 제국의 일원이었던 유대 사람들 역시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사회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함께 모이거나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서로가 가지는 사회적인 위치를 묻고 거기에 맞는 예우를 해 주어야 했다. 당연히,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우선 사회적인 위치를 물어보아야 했다. 이에 따라 상대방이 나보다 나은 위치나 계급에 있는 사람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낮은 자세를 보여야 했다. 바로 제자들의 다툼은 이런 문화 사회적인 배경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왜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초기에는 관심이 없었던 이슈를 부각시키고 논쟁을 벌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간단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그들 사이의 서열을 정해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으면 열두 명이 효과적으로 조직되고 움직이기 위해 적어도 팀장 정도는 세웠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웬일인지 그들 사이에 서열을 정해 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제자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고 그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자 제자들의 계산은 저마다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서열 문제는 그들 안에 크게 떠올랐다. 서열에 의해 미래에 차지할 지분이 각각 달라질 거라는 공통의 계산이 충돌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의 권세를 정복하고, 기대하는 강력한 왕국이 세워지면 그들이 얻게 될 지위와 영예에는 분명 차등이 있을 것이다. 이때 더 큰 자리와 권세를 꿰차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앉게 되느냐’는 단순한 논쟁 같아 보이나 그 안에는 영예와 권세와 대접을 좋아하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속된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기존의 관행과 질서를 뒤집는 방법으로 대처하신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 곁에 세우셨다. 예수님이 직접 어린아이를 데려와 그분 가까이에 세운 일은 그 시대의 관행으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보통은 어린아이를 직접 지적하여 이리 오라 명령하면 될 일이었다. 어린아이는 신분 피라미드 구조에서 가장 아래층에 속하는 부류 중 하나였고, 종처럼 대우해도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사회였다. 가정에서조차 소유물로 취급했고 심지어는 팔기까지 했으니 예수님께서 손수 데려다 곁에 세우신 행동은 매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의 또 다른 저자인 마가는 그 어린아이를 껴안아 주셨다고 기록한다(마가복음 9:36).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우하셨는지 직접 본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어린아이들을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꾸짖다가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되는 잘못을 범한다(마태복음 19:13-15).)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신 뒤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어린이 주일 설교 본문의 주제로 적합하지 않다.) 어린아이처럼 세상에서 작은 자여서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주님을 영접하듯이 받아들이고 친절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는 엄격한 신분 사회에 던지는 혁명적인 말씀이었다. 우월한 위치의 사람이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을 영접하는 일은 없었다. 최소 나와 지위가 같거나 높을 경우에만 영접할 대상이었다. 어린아이들이나 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손님이 오면 때론 손님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헌데, 주님은 작은 자가 되어 그들을 환영하여 영접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 일은 나를 보내신 분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논쟁을 종식하는 역설로 말씀을 마무리하신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된 것으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겠다. 같은 문제를 다룬 마가의 복음서를 따라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작은 자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마태가 기록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자’라는 말씀에 따라 이중적 의미를 갖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다.주님 나라의 가치와 원리를 가르쳐 주는 동시에 그것을 땅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하늘 나라의 큰 자들은 세상에서 작은 자로 사는 사람들이고(마태복음 18:4), 아울러 작은 자가 되어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다(마가복음 9:35). 그러므로, 유한한 세상의 가치와 제도 아래에서 권세와 영화를 얻겠다고 큰 자가 되려 하기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을 남을 섬기는 작은 자로 살아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사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 원리대로 사셨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복음 10:45).말씀처럼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자신을 낮추어 작은 자로 섬기며 사셨다. 어린아이, 종, 여인들과 동등한 사회적 위치에서 그들을 영접하고 친근하게 대하셨다. 스승이 제자보다 낮을 수 없는데도 제자들보다 자신을 낮추어 그들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셨다. 고난의 시간이 임박해 올 때,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큰 자냐는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이때도 주님은 그들을 꾸짖는 대신 타이르듯이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누가복음 22:26).이어서 말씀하신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누가복음 22:27).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섬기는 사람”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셨던 것이다. 다만,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분은 나사렛의 평범한 목수로 사시다 메시아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신 이후, 일관되게 작은 자들을 섬기는 작은 사람으로 사셨다. 4제자들의 예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한 작은 자로 겸손하게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주변에 적극적으로 작은 자를 영접하고 대접하며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은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가 지닌 육신(flesh)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큰 자가 되어 영접받고 대우받기를 원한다. 사람이 가진 본능과 의지로 체질화하고 실천할 수 있는 쉬운 덕목 정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처럼 실패를 거듭하다 아예 포기하는 가르침인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 미국 남부의 한 한인교회를 방문했다. 선교관이란 이름의 조그만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어 하룻밤 신세를 질 요량으로 찾게 되었다. 저녁 시간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젊은 부목사가 반갑게 맞아 주며 소소한 안내를 해 주었다. 잠시 거실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 그 부목사는 내게 어느 나라에서 일하는 선교사인지 물어 왔다. 선교관에 묵게 되니 당연히 선교사인줄 알았나 보다. 이에 나는 선교사가 아니라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부목사는 기대가 무너졌는지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에서 고압적이고 가르치려는 태도로 변해 갔다. 이후 성의 없는 몇 마디 하고는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 부목사에겐 선교사는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큰 사람이고 나 같이 공부하는 신학생은 별 볼 일 없는 작은 자라 그리 환대할 존재가 아니라고 여겼던 모양이다.‘나이로 따지면 내가 그 부목사보다 십년은 족히 넘을 텐데…’ 푸대접을 넘어 훈계를 받았으니 한동안 그때를 기억하면 울화가 치밀었고, 지금도 그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작은 자로 살아가는 데 실패하고 있나 보다. 작은 자로서 받아야 할 어쩌면 당연한 대우를 받고도 그 정도보다는 큰 자라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어 그런가 보다. 그 젊은 목사 역시 작은 자가 되어 섬기는 일에 실패했다. 자신은 작은 자보다는 큰 자라고 여겼을 터이고 이로 인해 작은 자가 되어 영접하고 섬기는 일에 실패했던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잊는 길 밖에 작은 자로 살 방법은 없다. 우리의 타고난 자아를 가지고는 작은 자가 될 수도 작은 자로 살 수도 없다. 흉내를 낼 수 있지만 그도 오래 가지 못한다. 수양과 훈련이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 실패를 피하지 못한다. 삼 년 동안 스승을 따라 다니며 그분을 배웠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도 누가 큰 자냐는 갈등으로 마음이 분열되어 있었다(마태복음 20:20-28). 여전히, 권세를 즐기고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의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육신의 자아를 처리하지 못한 채 헛된 기대를 안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었다. 작은 자로 살기 위해서는 시편의 다윗이 육신의 소욕을 모두 뒤로하고 주님께 오듯이,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께 와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으로 오셔서 평생을 그렇게 사셨던 분, 섬기던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으나 그들을 위해 끝까지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기 전까지는 작은 자로 살아가기란 요원할 뿐이다. 5우리 중에 작은 자로 살겠다고 세상의 권세와 지위를 일부러 피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큰 자, 작은 자는 세상에서 일컫는 지위의 고하 혹은 성취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높은 지위에 있어도 작은 자로 살 수 있고, 낮은 자리에 있어도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큰 자로 살 수 있다. 나는 세상에서 힘없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도 능력 없는 자라고 스스로 비하하며 주님을 섬기는 일에 물러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언자로 부름받지는 않았지만 예언자를 알아주고 섬기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는다고, 의인을 알아보고 의인으로 맞아들이면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뿐인가? 주님의 제자라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면 이를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시겠다고 하셨다(마태복음 10:42). 작은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이다. 주님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일으켰던 대 예언자 엘리야나 그를 정성으로 섬겼던 사르밧 여인이 한 일을 동일하게 큰일로 여겨 주시고, 기적의 예언자 엘리사가 행한 일이나 그를 알아주고 섬겼던 수넴 여인이 한 일을 다 귀하게 보시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말씀을 따라 작은 자로 살아가는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주님 나라의 사람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우리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겸손하게 일하다 거기에서 내려온 뒤에는 작업복으로 손수 망치를 들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 짓는 일에 참여하고, 주일이면 주일학교 교사로 평범한 사람들을 섬겼던 하나님 나라의 큰 자를 익히 들어 안다. 어느 다른 한편에는, 자신을 잊고 사람이 닿기 힘든 오지나 음지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작은 자로 일하는 드러나지 않은 무명의 주님 나라 일꾼들은 얼마나 많은가. 세상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도덕적 표준으로 삼으라 하고, 보편적인 종교는 넉넉하면 적선을 실천하라는 수준의 가르침에 그친다. 헌데,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작은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섬기며 살라고 가르치셨다. 세상에 살지만 하늘의 도덕률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상식과 관행을 뒤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라고 하셨다. 이렇게 사는 것은 단지 높은 수준의 도덕을 실천하는 것을 지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교훈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곳곳에 많아질 때 주님의 나라는 점점 확장되고 그곳에 천국의 삶이 구현될 수 있다고 본다.우리는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행하신 분을 믿고 따른다. “나를 본 받으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도의 본에 감동하며 마음을 다진다. 주님과 사도들은 가르침대로 자신을 낮추고 작은 자가 되어 희생하고 섬기며 살았다. 진실하게 주님을 믿고 따랐던 앞서간 분들 역시 그 길을 그대로 밟았다. 이제는 우리에게 바통이 넘겨져 왔다. 주님과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본으로 가르쳐 왔던 천국 시민의 도덕률을 우리가 실천해야 할 때이다. 낮은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섬기는 작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과 사람이 알아주고 말고에 상관없이 자신을 잊고 묵묵히 그 길을 가야 한다. 그러면, 그날에, 자신은 몰랐지만 작은 섬김 하나라도 기억해 주시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분이 반드시 고마워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다(마태복음 25:31-46).
성 주간을 위한 묵상과 기도
by Scotty Smith
2024-03-25
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 요한복음 12:27-32 화: 예수께서 우시었다 - 누가복음 19:41-42수: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마태복음 22:41-42목: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요한복음 13:1, 34-35금: 다 이루었다 - 누가복음 23:34, 마태복음 27:46, 요한복음 19:30토: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 마태복음 27:62-64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 베드로전서 1:3-6
소셜네트워크의 몰락과 현대인의 세 가지 욕구
by 이춘성
2024-03-22
지난 2월 4일로 대표적인 소셜네트워크(SNS)인 페이스북이 설립 2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20년 동안, 페이스북은 폭발적인 성장으로 전 세계 30억 이상의 사용자와 시가총액 1.2조 달러의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페이스북 등장 이후에 이와 유사한 형태의 소셜네트워크들이 개발되었으며, 페이스북을 포함한 소셜네트워크 앱은 현재 스마트폰 평균 사용 시간의 1/4을 차지하고 있다.초기 소셜네트워크는 개인과 개인의 사적인 의사소통과 개인과 불특정 다수 사이의 대중적 의사소통을 통합하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매체로 주목받았다. 소셜네트워크 이전의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첫째는 편지, 유선 전화와 휴대 전화 등과 같이 개인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사적 매체들이 있었으며, 둘째는 신문, 라디오, 책, 텔레비전과 같은 개인 혹은 단체와 다수 간의 일방적인 전달을 위한 대중 매체 혹은 레거시 미디어로 이분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두 미디어는 용도와 윤리적 책임의 정도, 사회적 의미에 있어 확연히 구분되었다. 예를 들어 사적 매체는 소문과 사적 대화가 허용되는 공간이었다면, 대중 매체는 사실과 진실에 기초한 높은 윤리적 기준과 공적 역할이 요구되었다.소셜네트워크의 명과 암하지만 소셜네트워크의 등장은 이러한 구분을 통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소통 방식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전통적인 소통 방식을 무너뜨리는 미디어 혁명을 일으켰다. 예컨대 2010년에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은, 대중 매체가 그 공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을 때, 개인이 소셜네트워크 상에서 일인 미디어가 되어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레거시 미디어의 역할과 동시에 사적 통신 수단 역할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랍의 봄’은 정치적 혁명과 동시에 네트워크 혁명이었다. 소셜네트워크 혁명은 긍정적인 면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결과도 있었다. 전통적인 소통 방식의 해체로 일어난 부정적인 결과도 있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첫 번째 결과는 대중매체와 레거시 미디어의 공적인 역할이 해체되고, 언론이 개인과 대중의 기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진실에 대한 전달과 비판 역할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결과는 오히려 사적인 의사 표현에 공적인 책임을 강하게 요구하게 되어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약화되고 자기 검열이 강화되었다. 공적 미디어는 대중에 영합하여 진실을 왜곡하고, 개인은 개인의 의견을 억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의 출현과 발전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구분이 불분명하게 되는 혁명적인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재발견하게 하였고 사적인 영역에서의 공적 책임감을 확대시키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의 이면에서는 사실과 진실의 기준을 낮추고 기대하지 않는 상대주의적인 진리관이 강화되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것은 공적 영역의 축소를 의미했으며, 결국 서로 다른 의견를 제시하고 사실과 논리를 통해서 상대를 설득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만을 강화하고 대결하는 정체성의 대결 정치를 강화하였다. 소셜네트워크 탈출 현상 위와 같은 이유로 현재 젊은 층은 소셜네트워크를 탈출하여 자신의 의견을 더욱 강화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소규모 단위의 대화방과 모임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는 인터넷 가상공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의 거의 반수가 소셜미디어를 떠나고 있으며(40% > 28%), 텔레그램과 같은 메신저 내의 대화방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작년 갤럽 조사(2023년 11월 16일)에 따르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이용자는 30퍼센트 중반이지만 모바일 메신저 이용자는 93퍼센트로 압도적으로 높다. 이제는 전화나 편지와 같이 사적인 매체에 가까운 메신저가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메신저가 현대인의 의사소통에서 핵심 수단이 된 이유는, 단순히 문자 기능을 넘어서, 개인이나 작은 공동체의 생각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대화방’ 때문이다. 메신저 대화방의 최대 장점은 대화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어서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메신저 대화방은 사적 매체가 지닌 거짓 소문의 진앙지가 될 수 있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동시에 자유와 안전을 보장한다는 긍정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적절한 범위의 사회관계망을 형성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와 달리 현재 소셜네트워크는 각각의 극단적인 생각을 강화하거나 상품을 선전하는 일종의 광고판 역할로 변질되어 있다. 일부 영향력 있는 사람과 단체의 전유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개인은 소비자일 뿐이다. 소셜네트워크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온라인 광고판이 되어 버렸다.자유와 안전, 인정현재 일어나고 있는 소셜네트워크의 약화와 메신저 앱이 강화되고 있는 현상은 인간의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욕구들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와 안전에 대한 욕구이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욕구이다. 안전하게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셜네트워크는 현대인에게 늑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목장과 같은 위험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누구든 끼어들어 DM(Direct Message)을 보내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답글을 달고, 원하지 않는 광고를 봐야 하는 위험하고 불편한 공간이 소셜네트워크인 것이다. 또한 개인의 의견에 과도한 공적 의무를 부과하고 혐오적 대응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인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열린 공간이 아니라, 안전한 문과 벽이 있는 집과 같은 곳을 원하게 되었다. 메신저 앱은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메신저 앱은 자신이 남긴 글들이 60초 안에 사라지고, 지정한 사람들만 볼 수 있으며, 추적이 불가능한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여기에 더해 메신저 앱은 인간의 인정 욕구의 복고풍을 소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셜네트워크의 성공은 개인이 불특정 다수에게서 받은 ‘좋아요’의 숫자를 통해 인정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는 절대다수가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추측을 만들어내었다.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억측인 것이다. 인정 욕구의 무제한은 미움과 증오의 무제한이기도 하다는 것이 소셜네트워크의 ‘좋아요’의 함정이다. 언제나 ‘좋아요’를 누르는 분자의 수보다 누르지 않는 분모의 수가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분모의 수가 제한적이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소규모 공동체와 메신저 앱의 대화방은 소셜네트워크에 비해서는 ‘좋아요’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다 할지라도 가성비에 있어서 더 큰 만족과 인정 욕구를 채울 수 있다. 현대 젊은이들은 메신저 앱의 대화방을 통해 소수의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자신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했던 과거 마을 공동체의 모습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진리 없는 자유, 안전, 인정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진실의 측면에서 보면 결코 환영할 만한 현상이 아니다. The Economist는 네트워크가 엔터테인먼트로 전환된 이후에 인터넷 이용자들이 보는 내용의 3퍼센트만이 뉴스이며, 젊은이들의 거의 절반이 소셜미디어와 메신저를 통해 뉴스를 접하고 있다고 통계를 인용하면서 보도하였다. 그러므로 비교적 자유롭고 안전한 메신저 앱으로 이동한 젊은이들에게도 여전히 진실과 사실의 측면에서 본다면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현대인은 자유와 안전, 인정이라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디지털 유목민처럼 이런저런 미디어를 찾아 배회하고 있으며, 그 결과 진리의 영역은 더욱 축소되고 회의적으로 변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진리 안에서 자유와 안전, 인정의 욕구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환상이 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와 메신저 앱과 같은 현대인의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와 가상 세계를 통한 소통의 강화는 진리를 희생하면서라도 자유와 안전과 인정을 얻으려는 현대인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 없는 자유와 안전과 인정은 과연 진짜 자유와 안전과 인정일까? 끝으로 페이스북이 처음 나왔을 때 팀 체스터는 페이스북과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얼굴을 나타내며, 보여준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준다. 성경은 진짜 페이스북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궁극적인 인스턴트 메시지이다. 교회는 진정한 소셜 네트워크이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의 빛을 보는 장소이다.복음은 이렇게 주장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기초 없이 바다 위를 떠다니는 빙산의 어름 잔해처럼 곧 녹아 없어질 자유와 안전, 인정(‘좋아요’)의 세계 속에서 교회와 성도는 영원히 녹지 않고 떠다니지 않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진리의 소식인 복음이 현대인의 진정한 소셜네트워크와 메신저가 될 날이 오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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