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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가 만든 이상한 신세계
by 이춘성
2023-09-12
중학생 딸아이가 수학여행 준비에 바쁘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로 인하여,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미 경험했어야 할 수학여행을 이제야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딸아이의 생의 첫 수학여행을 위한 가장 큰 숙제는 다이어트다. 평생 남게 될 첫 수학여행의 사진이 조금 더 예쁘게 나와야 할 것 아니냐는 게 딸아이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와 딸은 저녁 늦게 함께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을 뛰기로 했다. 러닝을 시작한 두 번째 날, 늦은 저녁 시간인데도 중학생 여자아이들이 여럿 모여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욕설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자기들 입에서 나오는 욕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까?내가 대학에 다닐 때, 그러니까 1990년대 중후반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충격이었다. “돼지가 우물이 빠진 날”(1996년), “강원도의 힘”(1998년)으로 이전의 연극적으로 과장된 연출과 연기가 주류였던 영화계에 힘을 뺀 연출과 연기, 일상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그의 영화는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2002년 “생활의 발견”과 이후에 나온 그의 극사실주의적 영화들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생활의 발견” 이후의 홍상수의 영화는 자연스럽다 못해, 인간 내면의 욕망을 아무런 여과 없이 찢어발겼다.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목욕탕 탈의실을 몰래 엿보는 것과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결국 자기가 본 그 훔쳐보기와 그 살덩이가 자기 자신과 욕망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사람들은 수치를 느끼며 당황해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지식인들의 가식과 숨겨진 원초적 욕구에 어떤 포장이나 옷도 허락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이들이 입고 있는 옷과 포장을 벗기고, 더 나아가 뼈와 장기를 덮고 있는 몸을 해부하여, 장기 속 소화하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너’라고 말하고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kie Elie Derrida, 1930~2004)는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해부학적 접근을 ‘해체’(deconstruction)라 불렀다. ‘해체’란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가치와 윤리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것들이 당연하다고 믿게 했던 절대 기준이란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해체를 통해서 결국 인간이 만들고 믿었던 가치와 종교, 사상은 인간의 욕망과 욕구의 투사일 뿐, 공통되고 절대적인 기준은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면, 사회를 이끄는 유일한 힘은 개인의 욕망과 욕구이며, 이를 종교나 윤리라는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선과 가식이 된다. 더 나아가 이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 노골적인 언어(욕설)와 섹스, 식욕, 탐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것이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행동으로 인정받게 된다. 찌꺼기는 찌꺼기답게 냄새나고 더러울 때 가장 윤리적이라는 것이 해체의 윤리가 지향하는 이상(ideal)이다.이제 홍상수는 흘러간 인물이 되었지만, 그가 시작한 해체의 대중문화는 여전히 ‘먹방’과 ‘SNL’이 되어 MZ세대와 현대인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인간이 먹는 욕구 그 자체, 말하는 입이 아닌 음식이 들어가는 입, 그 자체에 지금처럼 주목했던 때가 있었을까? 음식과 먹는 입은 중요한 것이지만, 이는 생명을 위한 영양소, 대화를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음식을 마구잡이로 쌓아 두고 말없이 먹는 그 입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먹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을 더 이상 예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음식과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 그것은 순수하고 진정성(authenticity) 있는 행위이다. 이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예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가식과 위선에 사로잡힌 예의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이제는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느꼈을 불편한 감정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여전히 음식에 대한 예절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는 해체 이후에 남은 일종의 흔적일 뿐이다.또한 ‘19세 관람가’라는 도장이 찍힌 SNL**식의 코미디는 어떤가? 과거에는 술자리나 군대의 음침한 창고에서나 오갈 성행위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 사람을 향해 쏟아내는 상상하기도 끔찍한 뜻의 욕설들, 그리고 이러한 표현에 ‘맛깔나다’라는 먹방식 표현과 이에 대한 찬사와 ‘슈퍼챗’ 형태의 돈으로 상을 주는 대중, 그리고 이를 따라 하면서 웃고 떠드는 사춘기 아이들의 일상의 모습,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칼 트루먼(Carl R. Trueman)은 이런 현대 세계를 “이상한 신세계”(Strange New World)라고 이름하였다.우리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기대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세계가 해체되어 버린, 모든 가치와 윤리가 의심받으며 오직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라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이상한 신세계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런 이상한 세계 속에서 절대적인 존재와 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욕구와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가 창조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마주한 위기요 과제이다. “초월의 위대함과 그 아름다움을 선전하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 사명을 위한 고민을 이어질 짧은 글들로 담아내고자 한다.**SNL: Saturday Night Live의 머리글자로 미국 NBC에서 방송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포맷을 가져와 성적인 농담과 노골적인 욕설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성인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지친 목회자를 위한 소망
by Ryan Ross
2023-09-11
목회 서신서 연구는 신학교 목회 인턴십, 레지던트, 사역 과정의 필수 요소이다. 미래의 목회자라면 이 편지들로부터 기초를 쌓아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 서신서야말로 모두가 동의하는 신약성경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는 직분의 성격, 목회 소명의 구체적인 내용, 그리고 목회자가 교회를 돌보는 방식이 나와 있다.Pastor, Jesus Is Enough: Hope for the Weary, the Burned Out, and the Broken(목사들이여, 예수님으로 충분하다: 지친 이들, 탈진한 이들, 부서진 이들을 위한 소망)의 저자 제레미 라이트볼은 목회자를 격려하기 위해서 바울이 쓴 세 권의 목회 서신에만 내용을 국한하지 않는다. 저자는 미시간 플리머스에 있는 Woodside Bible Church의 담임목사이다. 그는 결코 사역이 주는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가 어떻게 목회자에게 격려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첫 세 장은 교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목회자가 깨달아야 하는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Pastor, Jesus Is EnoughJEREMY WRITEBOL만족한다는 것은 곧 지쳐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사들이여, 좋은 소식은 당신만으로는 결코 충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예수님 한 분으로만 충분할 수 있다. 제레미 라이트볼은 이 책에서 요한계시록 2-3장 속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를 통해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고 목회자들을 초대한다. 요한계시록 2-3장의 권고는 교회 전체를 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목회자들을 향한 권면이 들어있다. LEXHAM PRESS. 192 PP.목회 초점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에 관해서 기록한다(계 1:16). 그는 “이들이 일곱 교회의 천사들(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20절)이라고 설명한다. 교회 자체는 “일곱 촛대”로 묘사된다(12, 20절).그러면 “일곱 교회의 천사”는 누구일까? 얼핏 문맥을 보면 “천사”는 초자연적인 수호천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피터 라잇하르트(Peter Leithart)와 개혁주의 가르침의 오랜 역사를 따르는 저자는 요한이 지금 말하는 사자가 교회마다 특별히 지정된 천사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사자(使者, messenger)인 목사라고 주장한다. “이 편지는 예수님이 목회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목회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개인적인 가르침이다.”(6) 이런 해석적 접근 방식은 난시를 교정하는 렌즈 역할을 한다. 마치 안경을 새로 맞추는 것처럼 목회적 의미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춘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왜곡되었던 이전의 나 자신과 나의 사역을 깊이 되돌아 볼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목회자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직접성은 회개가 필요한 곳을 지적하고,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사역하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목회자들에게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 책이 가지는 중요성이다. 권고와 격려요한계시록 처음 세 장의 대상이 목회자라는 주장을 펴는 저자는 일곱 편지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자신과 목회자에 관해서 하시는 말씀을 끌어낸다. 저자는 목회자를 변명하지 않는다. 목회 사역이 얼마나 가치 있는 소명임을 이해하기에 결코 목회 기준을 낮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꾸짖음을 강조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목회자가 자신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는 목회 사역에 충실하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게 아님을 상기시킨다. 목사라면 누구나 드는 유혹이 있다. 내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기도하고, 상담하고, 또 잘 목양한다면 교인들이 다 나를 좋아할 것이고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저자는 “목회자에게 고통은 사역의 당연한 현실”(35)이라고 주장한다. 이 지적은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목사들이여,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목회자가 얼마나 교묘하게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사역을 악용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나는 단지 신실하고 싶을 뿐입니다”라는 영적인 언어조차도 개인적인 유산을 남기려는 죄악된 욕망의 은폐 수단일 수 있다.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여라도 그 영광의 일부에 내가 동참할 때만 그런 거 아닌가? 이런 내용은 격려라기보다는 숲속으로 밀어 넣는 압박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처럼, 저자는 독자들을 향한 비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이 주는 안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안도감은 오로지 복음을 통해서만 온다. 저자는 쉬지 않고 예수님의 속죄를 통해서만 오는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목회자는 이미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다. 그들의 사역은 오로지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현실을 저자는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언제라도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복음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정체성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목회자들은 더 이상 실패를 축소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자유롭게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저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목회자의 회개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그를 정죄하는 증언자가 그를 위한 치료법도 함께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127). 목회자들이 은혜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 달려갈 때, 그들은 은혜를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목사들이여,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목회자들이 거룩함을 추구하되 궁극적으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찾도록 격려한다. 이 책은 목회자들에게 하나의 축복이다. 그렇기에 더 널리 읽힐 가치가 있다.원제: Hope for Weary Pastors: Review: ‘Pastor, Jesus Is Enough’ by Jeremy Writebo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시편 135편: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
by John Piper
2023-09-09
시편의 하나님· 시편 1편: 분주한 일상을 극복하는 묵상의 즐거움· 시편 2편과 복음전도· 시편 135편: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 시편 135:1-6 1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2주님의 집 안에, 우리 하나님의 집 뜰 안에 서 있는 사람들아,3주님은 선하시니,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가 은혜를 베푸시니, 그의 이름 찬송하여라.4주님께서는 야곱을 당신의 것으로 택하시며, 이스라엘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 택하셨다.5나는 알고 있다. 주님은 위대하신 분이며, 어느 신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다.6주님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바다 밑 깊고 깊은 곳에서도, 어디에서나, 뜻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하시는 분이다.이 시편은 우리에게 주님을 찬양하라며 시작합니다. 주님을 찬송하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라! 그다음에 시편 기자는 3절부터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솟아올라야 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선하시니, 주님을 찬송하여라.” 찬양해야 할 이유의 목록은 6절까지 이어지는데, 여기서 내가 집중하고 싶은 구절이 바로 이 6절입니다.주님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바다 밑 깊고 깊은 곳에서도, 어디에서나, 뜻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하시는 분이다.시편 115:3도 같은 말을 합니다.늘 자유롭게 이 구절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하나님은 기쁘시게 그 일을 하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억지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궁지에 몰려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즐거워하십니다.이 본문과 다른 많은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가 주권자로서 행하시는 자유를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권자로서 행하시는 자유란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뜻”에 따라, 당신의 기쁨의 지시에 따라, 항상 자유롭게 행동하신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결코 상황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기뻐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결코 끌려다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갇히거나 궁지에 몰리거나 강요당하지 않으십니다.향기로운 제물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가장 어려우셨던 그 일, 곧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로마서 8:32) 그 일을 하신 바로 그 시점에서도, 하나님은 자유로우셨고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었다고 말합니다(에베소서 5:2). 그의 죽음조차도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갈보리로 가시는 그 길에 예수님은 당신 뜻대로 할 수 있는 권세를 갖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 10:18]. 당신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 우주의 역사에서 단 한 번 예수께서 함정에 빠지신 것처럼 보이던 그 시점에서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일, 곧 여러분과 나 같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 죽는 일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책임을 맡으셨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경외와 경이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 앞에서 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찬양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우리의 구원도 바로 이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하고자 하시면 어떤 일이든 이루신다.”원제: Psalm 135 and the Pleasure of God in All He Doe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김은홍
율법주의 저장 장애
by 김정우
2023-09-08
저장 장애(Hoarding Disorder)라는 게 있다. 물건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여 쌓아 놓은 물건들이 생활공간을 침범해 불편함을 겪으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수집하고 저장하는 성향이다. 왜 끝없이 쌓을까?그렇게 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이나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성향에 ‘장애’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모두 율법주의 성향이 있다. 자기 힘으로,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 낸 방식에 따라 ‘자기 의’를 이루려는 성향 말이다. 이런 율법주의 신앙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면, 복음의 은혜와 능력에 대해 늘 듣기는 하지만, 결코 누리지는 못한다.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영적 위기가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인간의 의와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 신앙에 빠졌기 때문임을 알았다. 따라서 교회의 영적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를 다시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그러한 율법주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습니다”(갈 6:11)는 말까지 한다. 이 서신의 처음부터 지금까지는 대필자의 도움을 받아서 썼지만, 마지막 부분만큼은 본인이 직접 쓰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이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영적 혼란과 갈등 가운데로 빠뜨린 거짓 교사들이 왜 그토록 할례를 강조하는지 잘 드러낸다(갈 6:11-13). 거짓 교사들의 진짜 관심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의와 공로를 드러내는 것, 또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영광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례를 육체의 자랑거리로 삼은 것이었다.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게 바로 이러한 율법주의 신앙이다. 때로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박해와 유혹보다 더 극복하기 힘든 게 율법주의 신앙이다. 이 율법주의 신앙은 바로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부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라도 영적 경계심을 늦추게 되면 우리는 언제든지 율법주의 신앙의 늪에 빠지게 된다. 김정우, 갈라디아서를 처방합니다(두란노)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종말론, 시간의 이해
by Chris Watkin
2023-09-07
성경의 종말론(끝, 마지막 일에 관한 연구)은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준다. 분명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 일에 관한 성경의 설명에서 끌어내는 가장 복잡한 결과의 하나를 제시한다. 종말론은 끝이자 시작이다. 발전에 관한 현대의 생각이지만, 가장 그렇지 않은 생각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이루어 낸 업적을 하찮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가치를 인정하기도 한다. 과거와 깨지지 않는 연속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급격한 단절을 말하기도 한다. 종말론과 시간성(temporality) 사이의 관계는 이렇게 복잡하다.이 세상에 대한 모든 견해가 다 “마지막 것(들)”에 관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로마의 원자론자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세상은 붕괴하여 우주 먼지로 변하고 끝없는 순환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영원하다고 믿었다.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다양한 종말론이 있지만, 성경의 종말론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시간의 형태종말론은 성경의 이야기에 분명한 방향을 부여하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 존재의 지평에도 그렇게 한다. 종말론은 이러한 삶에 뚜렷한 의미를 불어넣는다. 우리가 현재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그런 무한한 시간이나 무한한 환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에 사전 연습이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역사는 썼다가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 선과 같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누구도 지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끝은 전 인생의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마지막 장이나 마지막 장면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끝 장면이 없이 어떤 스토리의 전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끝이 없다면, “역사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구름에서 패턴을 찾는 것과 같다”라고 존 레녹스는 말한다. 구름에서도 이런저런 형태 또는 얼룩을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거기에 부여하려는 감각은 단지 지나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며 전날 저녁에 먹은 치즈의 영향에 불과하다. 끝이 없이 불투명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존 리스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에 나오는 구절을 이렇게 풀어썼다. 삶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세상에서 땅 위의 평화를 찾는 단조롭고 쓸데없는 탐색이 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그다지 품질이 좋지 않은 1970년대 코미디 쇼를 몇 시간 동안 계속 반복해서 보면서 머리가 마비되는 경험을 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경험을 직접 했다는 것은 아니다.)기계적 오류그러나 기독교의 시간관에는 결말이 있기에 역사에는 의미가 담긴다.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의 줄거리(플롯)로 거듭난다. C. S. 루이스가 말하듯이, 역사는 이제 “우주적인 이야기, 즉 다른 모든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존재하는 궁극적인 줄거리”가 된다. 헤르만 바빙크는 기계적 세계관에는 역사는 없고 단지 병렬(juxtaposition)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 사건들(Things)은 영원하고 연속적인 사건들(events)의 흐름 속에서 차례로 발생하는데, 그 사건들을 일관된 내러티브로 모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추정할 수 없다고 기계적 세계관은 말한다. 이러한 기계적 세계관과는 달리 기독교 시간관은 “만물의 발전과 온 세상에 관하여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시간이 지나오면서 실현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함께 모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엡 1:10).루이스는 이러한 성경의 시간관이 문학에 끼친 영향을 추적한다. 그는 호메로스의 주요 서사시에는 “거대한 주제가 없으며, 애초를 있을 수도 없다”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위대함은 어떤 사건이 역사에 심오하고 다소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때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라도 역사에는 패턴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패턴도 없는 고대 영웅의 시대에는 오로지 “목적 없이 이뤄지는 영광과 비참함의 끊임없는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승리, 패배, 잔치, 금식, “‘멈춰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순간 이후에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기독교 시대에 들어서서야 역사를 구체적이고 되돌릴 수 없으며 존엄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다. 선형 연대기선형 역사(linear history)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또한 선형 역사의 의미를 그 누구보다도 통찰력 있게 끌어냈다. 이 히포의 주교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성경을 토대로 최초의 기독교 역사 철학(또는 기독교 신학)의 공식을 도출한다.하나님의 도성이 서구 세계에 준 것은 시간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마이클 멘델슨(Michael Mendelson)에 따르면,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역사의 중요성은 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연속적인 전체로 만드는 순환 패턴에 있었다. 따라서 독특하고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고 공통적인 사건을 강조했다.”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야기를 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그 사건이 단일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미래에도 반복될 사건의 패턴”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역사는 “반복될 수 없는 일련의 도덕적으로 결정적인 사건들의 극적인 전개”였다는 게 멘델슨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성경의 역사관에서 순환성의 여지를 아예 부정하는 건 아니다. 바벨탑은 아담의 죄를 반영하고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출애굽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이 모든 사건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단 하나의 시작과 단 하나의 끝으로 펼쳐지는 단 하나의 이야기라는 틀 안에서만 발생한다. 절대로 같은 사건이 다시 생기지는 않는다. 오로지 시작자, 이게 우리가 아는 역사이다.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다. 다만, 그렇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있다(계 1:18). 우리는 “영원무궁”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계 7:12).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는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히 올라온다”(계 14:11). 하나님의 메시아는 “영원히” 다스리신다(계 11:15). 멸망된 바벨론의 연기가 “영원히 올라간다”(계 19:3).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영원히” 고통을 당할 것이다(계 20:10). 새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릴 것이다(계 22:5).이 영광스러운 후렴이 들려주는 커다란 북소리는 다른 그 어떤 구절보다도 종말적 현실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더 뚜렷하게 보여준다. 나니아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최후의 전투에서 C. S. 루이스의 주인공들은 과수원이 있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산과 “영원히 솟아오르는” 폭포를 생각한다.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이제 그들은 지구상의 누구도 읽지 못한 위대한 이야기의 제1장을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되며 모든 장은 이전의 것보다 낫다.” 파루시아는 기독교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파루시아는 “그 자리에 있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더 높이 올라가라, 더 깊이 들어가라!”는 명령이다.종말은 결코 끝없는 정체도, 무의미한 병치도 아니다. 단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이 글은 Christopher Watkin, Biblical Critical Theory(Zondervan Academic, 2022)에서 간추린 것이다. 원제: Eschatology Makes Sense of Tim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바벨론이라는 대학을 이겨내는 다니엘의 세 가지 지혜
by Catie Robertson·Andrew M. Selby
2023-09-06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 삼백 명의 학부생이 있는 강의실에서 아이를 낳지 말라고 말한 교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이어진 웃음 없는 침묵이었다. 수백 명이 일제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는 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올해 가을, 전국에 걸쳐서 부모들은 자녀를 세상으로 보낼 준비를 하며 미니 냉장고와 기숙사 액세서리를 차에 싣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대학에 진학하는 젊은이들을 향한 기독교 공동체의 불안은 커졌고, 그건 당연하다. 새내기 대학생이 지금 바빌론으로 들어가고 있다. 비록 다니엘이 바빌론으로 들어간 게 자발적인 건 아니었지만(그는 강제로 유배당했다), 그러함에도 그가 거기서 보여준 성경적 신실함의 모범은 학생과 부모 모두에게 격려가 될 수 있다.바빌론에 있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는 정치권력 아래에서 세속 동료들과 함께 엄격한 세속 교육을 받았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 대학생에게 바빌론에서 살아남는 방법만이 아니라 번영을 누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지금부터 살펴보자. 1. ‘왕의 식탁’을 피하라.바벨론의 사상은 다니엘을 흔들지 못했다. 오늘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갈데아 문학을 공부할 때 점성술, 점술, 부도덕한 신화 등 기존 이스라엘 신앙에 적대적인 많은 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들은 사회적 압력이야말로 강단에 선 교수의 이념적 호언장담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충성심을 허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이유로 다니엘과 친구들이 왕의 음식을 먹지 않고 또 왕의 포도주도 마시지 않겠다고 선택했다(단 1:8). 왕이 제공하는 교실은 공유했지만, 그들은 결코 왕의 식사를 공유하지 않았다.후자의 행위는 그들을 같이 훈련받는 다른 현자들로부터 분리했다. 맛있는 음식을 거부하겠다는 대담하고 즉각적인 선택은 그들을 하나로 묶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향하는 반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했다. 왕의 술을 피함으로 그들의 머리는 맑았고 언제라도 지성의 싸움에 돌입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대학생도 왕의 고기와 포도주를 피해야 한다. 그렇다. 이 말은 다름 아니라 신입생 파티에 참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불어서 가장 친밀한 사회적 접촉 지점(예를 들어 정기적인 식사)과 가장 뿌리 깊은 우정의 통로를 오로지 같은 신자들로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통합을 포기하는 희생은 상처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니엘과 친구들은 하나님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기꺼이 대가를 치렀다. 동료 신자들과 함께하는 저항적 교제가 처음부터 우리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한다. 2. 믿는 자들과 함께 식사하라.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한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냐와 미사엘, 아사랴는 어떻게 왕의 맹렬한 진노를 감당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다니엘은 어떻게 죽음의 굴로 당당히 발을 들일 수 있었을까? 그들의 강한 결의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수천 번의 평범한 식사가 밑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다른 신자들과 함께하는 정기적인 식사를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인 학생은 용기 있는 생활 방식에 꼭 필요한 양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기적 식사를 위해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은 지역 교회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그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함께 식사하는 자리,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이름이 일상적으로 모독받는 현장이기도 한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하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식사 자리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서 영적 전쟁에 필요한 전투력을 쌓는 시간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가 누구인지 정기적으로 상기하지 않는 학생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릴 것이다. 나(케이티)의 대학 시절, 화요일 밤은 자매들과 함께 모여서 저녁으로 수프를 먹는 날이었다. 우리는 그날 겪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세상의 거짓말을 비웃으며, 공허하고 파괴적인 파티의 짠 칼로리를 실질적인 영적 대화와 친교를 제공하는 따뜻하고 풍부한 사우어도우 빵으로 대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다음 날 아침이면 친구들이 떠들어대는 세상의 해로운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진실을 옹호하며 싸우는 나의 이야기가 다음 화요일 밤 저녁에 좋은 화젯거리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3. 바벨론을 축복하라.대학의 “식탁”을 피하는 것이 분리주의적이고, 전투적이며, 또 불신자들에 대해 냉담한 태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서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세상과 적절하게 전략적 거리를 둘 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바벨론을 축복할 수 있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학자를 모두 죽이려고 했다(단 2:12). 지식과 인간 생명을 향한 체계적인 파괴는 현대 바빌론에도 반영되고 있는데, 인문학에서 발생하는 지적 자살과 학생들 사이에서 실제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바로 그 현장이다.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해결의 시작은 교제와 기도였다(단 2:17-19).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연결은 제국에까지 생명을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로 하여금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게 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벨론의 지식을 보존하셨다.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강한 확신을 가진 명철한 그리스도인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들은 강의실을 포함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적절한 순간을 만나면 생명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와 명확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언제라도 불신자들을 신앙의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불신자를 변화시키는 선포를 제대로 하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준비는 바로 일상적인 캠퍼스 생활 습관에 대한 쉬지 않는 저항과 매일 쌓아가는 깊이 있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에서 시작한다. 믿지 않는 학우들과 진리를 나누기 열망하는 캠퍼스의 그리스도인은 본능적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세상의 공간에서 어울리고, 그들의 문화적 일상에 동참하고, 또 일종의 전도 이전 활동으로 그들과 함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문화적으로 적대적인 바벨론에서 필요한 것은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이교도들을 확고한 믿음의 교리로 이끌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이교도들이 즐기는 의식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침식하는 문화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불신자들이 달려갈 수 있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 저항의 공동체를 만들자나 자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학생들을 생각할 때, 대학을 바라보면서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의심할 바 없이 오늘날 대학은 바벨론의 짐승이 날뛰는 최첨단의 전선이다. 현대 캠퍼스에서 그리스도인이 직면하는 선택은 간단하다. 바벨론의 방식에 동화되거나 아니면 저항하며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저항의 길을 선택한다면 전략적이고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단지 막연하게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또 불신자와 친해지려고 나름 노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자신의 믿음은 말할 것도 없고 전도라는 장기적인 전략으로서도 효과적이지 않다. 다니엘은 우리에게 제대로 된 전략을 보여준다. 왕에게 맞서고, 정기적으로 신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대화하고 기도함으로써 그는 어떻게 해야 바벨론에서 생존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신자들과 함께 저항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만 있다면, 대학 전체를 구원할 수도 있다. 형제자매가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신실한 정통을 공부하고 그 정통을 실천하기 위해서 서로 격려한다면, 대학의 지혜가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 마음을 두는 식탁 교제를 즐겨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풀무불이나 사자굴 앞에서도 굳게 설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시련과 환난, 사회적 칼날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라. 다니엘을 바벨론에 두신 하나님, 그를 사자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 함께 풀무불 속에 서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 그들을 바벨론에서 지키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시며 캠퍼스 생활이라는 바벨론에서도 언제까지나 함께 하실 것이다.원제: Daniel’s 3 Tips for Surviving the University of Babyl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짧은 인생이 최선의 인생이 되려면
by John Ensor
2023-09-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는 한, 때때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장모 조니는 우리 부부와 함께 산다. 백 살인데도 꽤 건강하다. 그녀가 잘 웃는다. 또 잘 운다. 그리고 종종 농담도 하는데 손자와 증손자들은 그런 그녀를 즐겨 방문한다. 그들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지난주에 조니가 지나가며 한 달이 걸린 다니엘서 연구를 마쳤다고 말했다. “다니엘서를요!” 나는 깜짝 놀랐다. 과연 백 살이 된 내가 그 예언적이고 묵시적인 책을 다루고 싶어 할지, 나는 차마 감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야 할 것 같다.그러나 조니에게는 그녀를 괴롭히는 한 가지 특별한 질문이 있다. 특히 시력이 좋지 않거나 혈압이 높은 날에는 더 그렇다. 왜 아직도 나는 살아 있는 걸까?당신은 왜 사는가? 조니의 남편은 죽었다. 맏아들도 죽었다. 108살까지 살았던 언니가 작년 12월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녀는 관절이 안 좋다. 그녀는 또한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극적인 도덕적 붕괴를 슬퍼한다. 그녀는 이제 천국에 갈 준비가 되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묻는다. “왜 아직도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아마도 항상 숨겨진 이유를 가지고 계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비록 부분적이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1975년, 스무 살 대학생이던 나는 조니의 질문에 답이 되는 소중한 한 문장을 발견했다. 나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쓴 감옥에서 보낸 옥중서신, 그리고 그의 친구 에버하르트 베트게가 쓴 그의 전기를 읽었다. 감옥에서 일 년을 보낸 뒤, 그리고 나치에 의해 처형되기 약 일 년 전, 그는 에버하르트에게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는 한, 때때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털어놓았다(136).나는 이 말이 본회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조니에게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나는 본회퍼의 신앙 선언문에 너무나 놀랐고, 처음 읽은 지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말은 여전히 내게 영감을 준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존? 당신에게는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펼쳐지는 복음의 위대한 사업에 일조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악한 날을 잘 사용하기본회퍼는 히틀러 살해 음모 혐의로 체포된 게 아니었다. 체포 당시만 해도 사건의 줄거리와 그의 역할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음모는 실패했고, 핵심 선동자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다음날 처형되었다. 고문 끝에 동지를 배반할 것이 두려웠던 사람들은 자살했다.이때까지만 해도 저항 활동 속 본회퍼의 역할은 사실상 숨겨져 있었는데, 그건 그가 조국을 사랑하고 정부를 지지하는 다소 순진한 목사인 척 위장했기 때문이었다. 정치 문제에 대해 모르는 척하며 자신이 부당하게 체포되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석방될 것이라고 나름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음모에 가담한 그의 역할은 발견은커녕 조사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계략이 먹히지 않을 것이며 죽게 될 것을 직감했다. 주요 음모자 중 한 사람의 일기에서 본회퍼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러시아가 베를린으로 몰려들었고, 본회퍼는 그의 형제, 그리고 다른 공모자 다섯과 나란히 교수형을 당했다.본회퍼가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는 한”이라며 삶에 관해서 말했을 때, 전체 문맥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에베소서 5:15-16을 묵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에게 시대가 악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윤리학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한 시간을 아끼는 길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일본회퍼의 신앙 선언이 나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친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본회퍼의 선언은 우리 모두 에베소서 2:10을 믿고 거기에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두신 선한 일을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위대한 사업에 기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분의 계획은 창조부터 완성까지 쉬지 않고 전개된다. 본회퍼와 조니, 그리고 당신과 나,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의 글로벌하고 거침없는 사역 안에서 맡겨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수많은 경험과 수년간의 성경 묵상을 통해 자신으로 하여금 윤리에 관한 책을 쓰도록 준비시키셨다고 생각했다. 악과 죽음이 그를 둘러싸고 또 감방에 갇힌 상황에서 책을 쓰는 것이 그가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시대의 악함을 감안할 때, 그는 우리 모두 오늘날 마땅히 느껴야 하는 것처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는 긴급함을 느꼈다.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본회퍼는 하나님께서 성취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던 일을 마치기도 전에 처형당했다. 조니의 경우,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선행을 하고도 남을 긴 생애를 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본회퍼의 구절을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공개적으로, 매일,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하면서 사는 바로 그 길이다. 성경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1)라 말한다.본회퍼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을 할 만큼 오래 살았다. 조니는 심지어 백 살에도 할 수 있는 훌륭한 일을 가지고 있다. 다름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육신이 너무 약해지고 이 세상에 지쳐도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바로 그 일이다. 솔직히 나는 본회퍼의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미완성으로 마친 윤리학을 읽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느꼈다. 나는 또 제자도의 대가를 읽었다. 나는 그 책이 필요하다고는 느끼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해 공개적으로, 매일, 그리고 지속적으로 살았으며, 무엇보다 삶과 죽음을 통해 “제자도의 대가”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본회퍼가 저자라는 특징이 없는데도 과연 이 책이 오늘날에도 인쇄되어 팔릴 수 있을까에 관해서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본회퍼의 책처럼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건 책 뒤에 있는 사람이다. 악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하필이면 나치즘이 사라지는 상황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도,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어서 사는 것이다. 걷는 자 옆에서 달리기백 살이 된 조니가 여전히 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나라를 발전시키는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단지 방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또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녀는 거의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떠들고 다닌다고 비난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백 살에 다니엘서 공부를 마친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그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니의 몸은 여행을 할 수 없지만, 그녀의 간증은 얼마든지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 나는 중국, 우간다, 쿠바 등지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보행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의 간증은 뛰어다닌다. 조니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다음 세대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권유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낀다. 그것이야말로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다. 원제: The Best Use of Your Short Lif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일터 예배, 모든 직원을 참여시켜야 할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9-04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현재 30명 규모의 작은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월요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인도를 제가 합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고 선교에 관심이 많은 것을 직원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잘못한 직원에게 책임을 묻고 필요하면 징계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저에게 용서와 너그러움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마다 난감합니다. 자칫 엄격하게 하면 교회가 욕을 먹을 수도 있어서요. 김선일: 이 질문은 일의 신학을 접하는 그리스도인 경영자들이 겪는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들로부터 현실에서 일의 신학을 적용하는 게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질문에는 고민해야 할 주제가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에 모든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한 가지 가장 현실적이고 피부에 와닿는 주제, 곧 일터에서 드리는 예배에 집중하면 어떨까 합니다. 이금주: 이 질문을 보면서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부터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저명한 구약학자인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 교수가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일터를 섬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질문하신 그리스도인 경영자가 월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동기는 무엇일까요? 김: 한국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 경영자들 대부분이 일터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 매주 병원에서 일터 예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이: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이 있습니다. 모든 직원이 그리스도인이라서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요? 그러면 예배 시간은 얼마나 길게 진행되나요? 직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나요? 그들은 이 경영자가 그리스도인이며 선교에 관심이 있는지 어떻게 알게 되나요? 그들은 경영자에게 무엇을 기대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들이 경영자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면 그의 행동이나 삶에서 무슨 변화가 있을까요? 김: 보통 일터에서의 예배는 30분 이상 진행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질문하신 분을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데, 직원들의 절반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는군요. 대신 입사할 때 일터 근무 시간 중에 주 1회 예배드리는 시간이 있음을 미리 알려주고 동의를 얻는다고 합니다. 이: 좀 파격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저는 만약 예배 시간이 30분이라면 직원들에게 예배 대신에 자유 시간을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 이분의 경우에는 근무 외 시간에 예배를 요구하지는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저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종교적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직원들의 복리를 위한 시간을 배려하는 것이 일의 신학에 더 부합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 카이저의 말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일터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예배라면, 의식으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죄송하지만, 이분은 예배와 일터에서의 영성을 분리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 일터에서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예배나 기도 모임을 하는 것은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배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요구될 경우, 비록 그것이 강요의 형식을 띠지 않더라도 회사의 위계로 봤을 때 사실상 부담으로 다가오리라 봅니다. 이: 질문자께서 직원이 잘못하면 책임을 묻고 또 징계해야 할 때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 잘못이 단순 실수인지 고의적 기만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둘을 구분해야 처리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실수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은혜가 필요합니다. 실수와 고의가 혼합되면 안 됩니다. 만약 금전적인 피해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실수라면 먼저 원인 파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임과 징계를 논하기 전에 그리스도인 경영자와 해당 직원 둘이 앉아서 먼저 대화해야 합니다. 첫째, 원인을 먼저 찾고, 둘째,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방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셋째, 손해를 어떻게 해결할지 방법을 같이 찾으십시오. 직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경영자의 소홀한 태도가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직원이 너무 지쳐서 일을 제대로 못 하거나, 가족 문제가 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김: 그리스도인 경영자라면 책임과 징계를 논하기 전에 먼저 실수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서 차분하게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겠네요. 해당 직원에게 추궁하기 전에 무슨 힘든 일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 잘못한 것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이 있을 때마다 함께 의논해서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김: 이분은 자신이 직원들에게 엄격하게 하면 교회가 욕을 먹을 수도 있어서 난감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로 고민하시는 그리스도인 경영자들이 많습니다. 이: 이런 문제로 걱정하는 것은 좋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왜 난감할까요?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말하느냐, 아니면 하대하면서 말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잘못된 행동을 관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원들을 존중하면서 잘못에 관해서 진솔한 대화를 할 순 없을까요? 경영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직원들을 대하시나요? 직원들을 질책하더라도 사랑과 온유로 하나요?(딤후 4:2, 고후 10:1, 빌 4:5, 엡 4:2, 벧전 3:15 참조). 이것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난감한 것입니다. 김: 그리스도인 경영자는 직원들을 징계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통해 용서와 회복으로 나아가야 목표를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질책하다가 직원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기도 합니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우리 모두 일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경영자는 직원들에게 일의 목표와 가치, 그리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터의 윤리가 무엇인지 알려줘야 합니다. 또한 그들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계심을 명심해야 합니다(엡 6:9). 만약 예수님이 더 큰 경영자시라면 어떻게 하실지 항상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김: 일터에서 예배를 드리는 문제를 두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일터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가 덕이 되려면 우리의 일 자체가 하나님과 동료 직원들을 섬기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 회사라 할지라도 우리의 예배와 일이 분리되면 복음의 진정한 영향력은 드러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골 3:23) 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일터 예배일 수 있습니다.
시편 2편과 복음전도
by Johnathon Bowers
2023-09-02
시편의 하나님· 시편 1편: 분주한 일상을 극복하는 묵상의 즐거움· 시편 2편과 복음전도· 시편 135편: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 세 가지 관점에서 시편 2편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시편 2편의 메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신약성경이 시편 2편의 메시지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시편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임무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질문해 보겠습니다.시편 2편의 메시지시편 2편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뭇 나라가 술렁거리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1절). 2-3절은 그 헛된 일이 무엇인지 명시합니다. 세상의 임금들이 메시아의 통치권을 거부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 나라들을 하늘 보좌에서 내려다보시면 그 교만을 비웃으시고, 시온산에 왕을 세우셨다고 하십니다(5-6절). 7-9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 대관식을 회상합니다. 특히 열방을 당신의 기업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주목합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무장한 시편 기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을 꾸짖으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에게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로 피신하라고 말합니다(10-12절).그러므로 시편 2편의 메시지를 요약한다면, 하나님이 왕을 보좌에 앉히셨으므로 땅의 나라들은 그들의 반역을 회개하고 메시아에게로 피신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신약의 시편 2편우리가 신약성경에 이르면,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시편 2편에서 이야기하는 바로 그 저항에 부닥치시는 것을 봅니다(참조. 사도행전 4:24-28). 이 저항은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 처형에서 극에 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편 2편의 방식대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심으로써 그의 권위를 입증하십니다.바울은 사도행전 13:32-33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그 약속을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셔서, [조상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입증으로 인해 예수님은 모든 민족의 정당한 상속자가 되셨습니다(마태복음 28:18-20).시편 2편과 복음전도그러면 시편 2편은 우리를 어디로 떠나게 합니까? 예수님이 왕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선 에베소서 2:6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실의 이미지를 봅니다. 신자들은 이 땅의 사람들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 앞에서 담대히 말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고집스럽고 무례하고 복음을 전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드럽게 말하고, 귀를 열어 두고, 인내하며 씨를 뿌려야 합니다. 다만 소심해지지 맙시다.세상 나라는 우리 주님의 나라가 되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요한계시록 11:15).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이 이를 때까지 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각자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아의 영원한 통치를 확신케 하셔서, 우리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열방을 향해서 그리스도께 피난하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원제: Psalm 2 and World Evangelizatio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김은홍
가족은 힘이 될까, 굴레가 될까?
by 양혜원
2023-09-01
여전히 높은 온도와 습도로 연신 땀을 닦으며 걸어야 했던 8월 중순 막바지 주말, 마지막으로 내려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충무로역에 내려서 문학의 집 서울로 향했다. 서울시에서 하는 문학기행 강연 시리즈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작품을 소개하는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작품을 골랐고, 강의 제목은 “가족은 힘이 될까, 굴레가 될까?”로 정했다.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 30명 인원 제한이 있는 강의였는데, 좌석은 거의 다 찼고, 젊은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 노부부 커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들으러 왔다. 아마도 ‘가족’이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박완서의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박완서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걸 ‘낚글’이라고 해야 하나.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하튼 정원을 채웠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가족’에 대한 고민이 많구나, 싶었다. 하긴, 출생의 비밀에 얽히고설킨 가족 관계가 여전히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는 것을 보면, 혼인율과 출생률이 역대 최저를 갱신하는 가운데도 가족이 여전한 항간의 화두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누가 엄마고 아빠고 아들이고 딸이고 하는 이런 관계들이 ‘진실’로서 밝혀져야 하는 이유는 그 진실에서부터 ‘바른’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냥 아는 아저씨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친아빠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나’라는 개인의 서사는 달라진다. 내 탄생의 근원에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써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 서사의 핵심을 구성하는 부모 자식 관계의 서사, 그리고 부부 관계의 서사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 관계가 개인의 서사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달라진다. 그래서 오늘날 가족에 대한 고민이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다가온다면, 아마도 이 변화의 폭이 크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가족 서사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강의 내용의 핵심이었다. 가족의 힘과 굴레를 직접 논한 것은 아니니, 결국 제목이 ‘낚(는) 글’이 되고 말았다고 해야 할까.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시는 여성 한 분이 같이 내려가면서 질문을 좀 해도 되겠냐고 하시길래 흔쾌히 그러시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은 힘이 되는 건가요? 굴레가 되는 건가요” 하며 운을 떼시는 것을 보니, 역시나 제목에 끌려 강의에 오신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나의 귀를 청하셨다. 자신은 결혼해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술 문화가 곧 직장 문화였던 옛날 옛적에, 좀 더 가정적인 문화를 찾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아들이 자신은 다시 한국 가서 살겠노라고 하는 바람에, 캐나다와 한국을 오고 가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신이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 남편의 동의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였다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였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아들이 아직도 장가를 가지 않고 있다며 은근한 우려도 내비치셨다. 두서없이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이 안에는 오늘날 한국 가족의 복합적인 서사가 다 들어가 있다.우선 이민 이야기부터 보자면, 아주 오래된 농담을 포함하여 박완서의 소설에서 미국 이민은, 한국 가족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피난처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아들은 아들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의무와 도리의 부담에서 벗어나, 나만의 가족이라는 로망이 가능한 곳이 미국이다. 캐나다 이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만의 가족이라는 로망에서 특히 여성에게 중요한 부분은 남편과 대등한 관계이다. 굳이 남녀평등이나 여성해방까지 내세우지 않더라도, 순종적인 아내라는 고전적 미덕이 아닌, 남편과 친구 같은 관계, 파트너 같은 관계를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기대한다. 물론 이처럼 변화하는 의식에 여성운동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여성운동은 여성을 가족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 개인으로 내세우고자 했는데, 요약하자면 여성이 (그리고 남성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상대와 가족을 이루거나 해체할 수 있는 권리가 여성운동이 내세우는 가족의 새로운 규범이다. 그리고 이 규범을 틀로 하는 서사의 핵심 주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독립적 개인과 그 개인들의 다양성이다. 하지만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셨다는 그 여성분도―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은 여성 단체에서 일하셨다―정작 아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 것을 보면, 독립적 개인과 개인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아직 이념일 뿐, 우리의 피는 여전히 전통과 끈끈히 얽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홀로 헤쳐 나가기에 세상은 너무 팍팍하며, 그러한 팍팍한 세상에서 그래도 의지가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야기가 여전히 운명처럼 사람들의 상상력을 강력하게 유인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족은 정말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이상 난 누군가의 자식이고, 그 사실을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우리의 유전자는 마치 낙인처럼 우리 존재의 중심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발가락이라도 닮아버리는 그 유전자 말이다. 그리고 이 유전자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가족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화목한 가정의 서사든, 아니면 그보다 더 현실적인 콩가루 집안의 서사든, ‘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이 가족의 서사는 빠질 수가 없다. 그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원초적인 가족 서사는 아마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 일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누구의 자식인가 하는 소속은 아버지에 따라 정해지고, 양육은 어머니가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유교 사회의 가족 이야기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되어서, 아버지가 없는 집안, 어머니가 자식을 양육하지 않은 집안은, 문제 있는 집안이 되고, 역으로 모든 문제는 이것으로 환원되어 설명된다. 다시 말해서 누가 문제를 일으키면, 그 집안에 아버지가 없어서 혹은 어머니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유교 가족의 서사에서는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시지 않는 한 구원은 없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가족 서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것이 더 근본적인 가족이라며 혈육의 중요성을 상대화시킨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가 문제가 있어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될 수 있고, 그것이 구원받은 새로운 가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한국 사회에서는,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기독교 서사보다는 여전히 유교 서사가 더 강하다. (어느 영화 대사처럼)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는 아직도 우리에게 따라붙는 트라우마 같은 질문인 것이다. 물론 가끔, 나의 백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 든든하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허풍에 가까울 때가 많고,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는, 눈에 보이는 금, 은, 동수저의 아버지들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기 일쑤다. 그래도 기독교의 가족 서사가 가지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지지난번 글에서도 썼지만, 기독교 서사에서 가족은 똘똘 뭉치기보다는 떠나고 흩어져야 하는 관계다.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고, 죽은 자들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맡기고 떠나야 한다. 가족을 뭉치는 관계가 아닌 떠나는 관계로 설정한 것은 여성주의 서사와 기독교 서사가 공통으로 가지는 전통적 서사와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여성주의 서사와 기독교 서사의 중요한, 근본적인 차이는, 기독교 서사에서 떠남은 더 큰 자를 따르기 위한 떠남이고, 여성주의 서사에서 떠남은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떠남이라는 것이다. 이 후자의 서사는 떠나는 행위 자체에는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인간은 무엇을 긍정하기보다 부정할 때 더 큰 반작용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가족이 굴레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저항의 서사는 큰 힘을 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누군가와의 애정 관계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벗어난 후에 어떤 서사를 쓸 것인가 하는 단계에서 이 후자의 서사는 맥을 잃는다. 그래서 한국의 엄마들은 남편과의 투쟁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아들과의 투쟁에서는 전통 서사의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깨끗이 치운 집에 더 강력한 적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처럼, 속박의 관계는 또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는 것이다.일본 가톨릭 여성 작가 중에 소노 아야코라고 하는, 남편을 몇 년 전에 먼저 보내고 지금은 90대의 호호 할머니가 되어 홀로 사는 이 노작가는, 부부가 진짜 가족이 되었다면, 상대를 위해서 그를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좀 특이한 이야기를 했다. 가족은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는 관계이기 때문에, 부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부인을 놓아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즉 이혼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교의 피가 진하게 흐르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건 무슨 한밤중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할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가족을 서로를 착취하는 관계도 아니고, 자기 가족만 챙기는 이기주의적 관계도 아닌,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관계로 보고 있다. 이혼은 그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를 말하기 위한 하나의 설정이다. 서로 죽도록 사랑하다가 죽이도록 미워질 수도 있는 게 남녀의, 부부의 관계이기에, 격렬한 관계의 대표적인 예가 긍정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평화로운 서사를 제시한 것이다. 찐 가족은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며 보내줄 수 있는 관계라는 설정은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도, 다 적용할 수 있다. (부모만 자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자식도 부모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이 서사가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유는, 기독교가 가진 떠남의 서사 때문이다. 유전자의 속박과 법적 구속으로 맺어진 관계들을 떠나 더 큰 존재의 근원을 향해 길을 가는 우리의 관계는 그분의 ‘뜻’이라는 신비 안에서 이어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영혼이 잘되고 또한 범사에 잘되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드리며 지금의 인연들을 환영할 수 있다. 이 큰 서사 앞에서 가족에 대한 이러쿵저러쿵은 어쩐지 조금은 시시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기독교 서사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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