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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시대에 빠지기 쉬운 흔한 오류들
by Steve Bateman
2023-10-28
허위 정보, 당파적 조작, 조직적인 불신이 난무하는 온라인 세상에서 무엇을 믿을지 분별하라는 성령의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나날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깨어 있으라”(엡 6:18). “분별하도록 힘쓰라”(엡 5:10). “모든 것을 분간하라”(살전 5:21). 그리고 “생각하라”(딤후 2:7).무엇이 걸린 문제인가? 첫째, 교회의 평안이다. 40년 동안이나 목회를 했지만, 나는 전염병과 대통령 선거가 성도들 사이에서 얼마나 열정적인 분열을 일으키는지 제대로 몰랐다. 여느 목회자들처럼 나도 성도들로부터 “잘 연구된” 여러 기사 링크가 포함된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이런저런 문제에 관해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어떤 입장을 표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 입장을 명확히 밝힌 다른 주에서 목회하는 유명 목회자들을 언급하며, 그들의 모범을 따르라며 충고하는 교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교인들이 서로 모순되는 기사들을 보낸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들 모두의 의견에 다 동의하는 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중한 우정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적지 않은 교인들이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우리의 연합이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걸린 문제는 신뢰성이다. 우리가 거짓에 쉽게 설득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이 참되다는 우리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고의적인 무지함 또는 눈가림은 진리의 여부를 분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라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주제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떤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전에는 반드시 전략적 망설임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분별을 위한 중요한 기술 중 하나가 성경 읽기 능력이다. 매일 뉴스 자료를 습득하는 것과 함께, 우리는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행 17:11).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헤드라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동성 결혼을 옹호하는 현직 대통령의 다음 말 속에 숨은 실체를 파악하게 한다. “결혼은 단순한 제안일 뿐이다. 당신은 누구를 사랑하는가?” 성경적 능력은 우리를 이런 식의 속임수로부터 보호한다. 성경 읽기 능력을 키우는 것 외에도 행여 우리가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공개 토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곱 가지 오류는 다음과 같다.1. ‘성급한 결론’ 오류관련성이 있지만 불충분한 증거를 바탕으로 결론을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몇 년 전, 전선 오류로 인해 애매한 상황에서 내 차의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내 앞에 있던 성급한 운전자들과 싸움을 벌일 뻔했다. “속보”가 난무하는 문화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가족, 교회, 국가가 감정적인 성급한 판단으로 분열되어 있는가?야고보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약 1:19). 천천히, 진정하고, 입을 닥치고, 곰곰이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급하게 부정확한 결론을 내리고 나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일단 공개적인 입장을 취한 이상, 거기에 반대되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에 우리의 자존심이 더 크게 손상된다는 위험 요소를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할 때까지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고 판단을 보류하라. 2. ‘반복 논증’ 오류단지 자주 반복된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믿는 것은 반복 논증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믿을 가능성이 커진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끊임없이 거짓 비난에 시달렸다(막 14:55-59).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런 식의 반복되는 거짓말을 믿었기에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여러 가지 일로 고발”(막 15:3)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비난을 반복한 히틀러가 사용한 게 바로 이 기술이다. 나치의 선전은 거짓말을 증폭시켰고, 독일 문화에 반유대주의를 부추겨 마침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반복되는 거짓말은 오늘날도 치명적인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반복되는 내용을 받아들이기 전에 생각하라. 3. ‘인신공격’ 오류이 오류는 토론자가 논쟁보다는 사람을 공격할 때 발생한다. 논쟁에서 이긴 예수님을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불렀다(요 8:48). 모욕은 더 이상 논쟁할 무기가 남지 않은 사람이 의지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욕설에 능한 정치인은 인신공격을 통해서 상대방의 정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수고를 피하는 동시에 속기 쉬운 유권자를 효과적으로 설득한다. 복음에 충실한 목사를 단지 다른 목사가 ‘다시 깨어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렇게 믿는 건 차마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일이다.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인신공격에 빠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나아가서 진리마저 훼손한다. 사람이 아닌 논쟁을 해체하라. 4. ‘이중 잣대’ 오류이중 잣대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표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더십에서는 성품이 중요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권위를 위임받기 전에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딤전 3:2). 그들이 그 신뢰를 배반한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부자라는 이유로, 인맥이 많거나 유명하다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는 지도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편견 없이 이것들을 지키고, 어떤 일이든지 공평하게 처리해야”(딤전 5:21) 한다.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반대자들의 결점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옹호자들의 비슷한 결점에는 변명으로 일관할 때, 믿지 않는 세상은 우리가 드러내는 불일치와 편파성을 고의적인 속임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에게 같은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라. 5. ‘억제된 증거’ 오류이것은 당신의 주장에 불리한 증거를 숨기는 것이다. 사법 제도에서는 진실을 판단하려는 공정한 제삼자 앞에서 두 당사자가 주장을 펼친다. 솔로몬의 말을 기억하라. “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잠 18:17). 양측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1770년 존 아담스는 보스턴 대학살에서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한 영국군을 변호했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들을 향한 배심원단의 편견을 눈치챈 아담스는 다음 사실을 상기시켰다. “사실은 완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바람, 성향, 열정이 가리키는 방향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사실과 증거의 상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양측으로부터 모든 사실을 들은 배심원단은 멸시받는 군인들 가운데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판결했다.그리스도인은 언론의 자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증거를 억압할 수 있다.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무료로 보장된 뉴스 매체 간의 시장 경쟁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실을 (그리고 팩트 체크를) 제공한다. “내가 원하는 사실”만을 보도하는 뉴스만 선택함으로 우리는 자신의 편견을 더 굳히고 나아가서 자신까지 속이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인의 80퍼센트 이상이 디지털 기기에서 뉴스를 얻는다. 디지털 기기는 독자를 편중된 정보에 가두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조작된 뉴스 제공원이다. 깊게 읽는 게 능사가 아니다. 다양하게 읽으라. 6. ‘유명인 의존’ 오류주장의 타당성보다는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명인 의존 오류’이다. 많은 언론인이 남다른 수사 기술을 갖고 있으며 청중이 의견을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있다. 나중에 책임을 추궁당하면 유명인은 “농담이었어!”라고 즉시 변명한다(잠 26:18-19). 단지 재미있는 코미디, 풍자, 해설이었다는 식으로 자기 말에 책임을 회피한다. 1732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리처드 손더스라는 가명을 만들어 자신의 경쟁자인 타이탄 리즈(Titan Leeds)의 사망일을 예측하고 발표했다. 리즈는 프랭클린이 예상한 날에 죽지 않았지만, 프랭클린-손더스는 사기를 계속 치며 엄청난 양의 연간 정보집(Poor Richard’s Almanack)을 팔고 미디어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모든 청중이 프랭클린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게 틀림없기에, 그는 자신의 거짓말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저널리즘과 엔터테인먼트의 혼합은 미국의 오랜 전통이니까. 좌파 쪽에서 볼 때, 레이첼 매도우(Rachel Maddow)는 시청률을 성공적으로 끌어낸 매력적인 스타일의 미디어 유명인이다. 방송 중 명예훼손 발언으로 다른 언론사로부터 고소를 당했지만, 항소법원은 다음과 같이 사건을 기각했다. “합리적인 시청자라면 매도우가 객관적 사실을 암시했다고 결론 내렸을 리가 없다.” 우파 쪽에서는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법정에서 그의 변호사들은 칼슨이 허구를 사실로 제시했다는 원고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이 선택한 변론 전략은 “칼슨이 자신이 논의하는 주제에 대해 ‘실제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과장’되고 ‘비문자적’ 논평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청중이 인식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판사는 이에 동의하고 사건을 기각했다.두 유명인 모두 다 추종자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뉴스 소스로 인식되지만, 둘 다 언론 윤리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두 법원 모두 미국인이 진실 주장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책임이 있다고 가정한다. 불행하게도 미국인 대부분이 손에 들고 있던 증거는 오로지 매도우와 칼슨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부였다. 엔터테인먼트의 이면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증거를 제대로 파악하라. 7. ‘동기 호소’ 오류제안한 사람의 동기에 의문을 제기하며 제안 자체를 기각하는 경우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은 나쁜 동기로 전파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동기로 전파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빌 1:18). 동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명예나 재산 축적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책임을 질 것이다. 요점은 동기가 논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동기와 상관없이 복음은 참되다. 기소하는 주체가 단지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전직 직원, 질투심 많은 교단의 경쟁자, 필사적인 정치인, 또는 경멸받는 언론 매체라는 이유로 자신이 좋아하는 설교자나 정치인에 대한 혐의를 즉석에서 일축하는 그리스도인은 ‘동기 호소’ 오류에 빠진 것이다. 아무리 악의적인 동기라고 해도 제시하는 증거가 진짜일 수 있다. “정치적 동기가 있다”는 주장도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와 관계 없이 혐의의 증거 자체가 검증될 수 있다면 고발자의 동기는 무관하다. 동기를 무시하라. 그리고 메시지를 조사하라. 합리성이라는 평판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아신다. 공개적으로 무언가를 지지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가진 지적 능력에 대해서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하는 팩트 체크와 비판적 사고가 최신 헤드라인에 대한 진실을 드러낼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여러분의 관용(합리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빌 4:5)라고 권면했다. 합리적이라는 평판을 얻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진실을 증언하는 우리를 여물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주체로 만든다. 원제: Common Fallacies in an Age of Outr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도는 우리의 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by 최창국
2023-10-27
기도는 매우 역동적인 힘이 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기도가 지닌 특성이기도 하다. 물론 기도를 통해 단지 개인의 내면의 안녕과 욕구만을 추구할 때 기도는 종교 중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내면과 삶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기도에 관한 신학과 현상학의 통합적 연구를 처음 시도한 프레드릭 헤일러는 누구도 자신의 정신이나 내면세계와 관련이 없는 추상적인 내용으로 기도할 수 없다고 하였다.[1] 헤일러의 말처럼, 누구도 자신의 내면세계와 무관하게 기도할 수 없다. 따라서 기도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우리가 기도를 통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반은총, 즉 창조적 선물인 내면세계, 뇌 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종교심리학의 개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여러 종교 행위 가운데 특별히 기도가 가져오는 효과를 강조하였다. 그는 종교 행위 가운데 기도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기도할 때와 기도하지 않을 때의 차이점은 마치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과 사랑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것에서 나타나는 경험의 차이와도 같다. 우리가 아주 오래된 (진부한) 세상 속에 산다 할지라도 기도가 개입되면 우리의 정신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2] 기도는 신학적, 영적 의미를 지닐뿐 아니라 인간 삶의 여러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효과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첫째, 기도는 성품 개선에 효과가 크다. 기도와 감사의 관계를 관찰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기도를 더 많이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감사의 성품이 더 높게 나타났다. 기도와 감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마이클 지가렐리가 그리스도인 성품 지수(Christian Character Index)에 관한 연구를 위해 미국 내의 50개 주, 전 세계 60개국을 대표하는 5,00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임상적 연구에 따르면, 기도와 찬송과 예배 생활의 비율이 높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감사의 성품이 더 높게 나타났다. 또한 감사의 성품이 계발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과 예배하는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3] 이는 기도와 감사는 상호유기적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진정한 기도는 감사와 같은 성품을 우리 안에 형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기도는 우리에게 수많은 성품의 특성을 계발하는 하나님의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커리큘럼이기도 하다.둘째, 기도는 뇌를 치유하고 성장시킨다. 앤드류 뉴버거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최대의 뇌 기능의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추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이마 바로 뒤쪽의 뇌 부위 전전두피질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 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즉,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되었다.[4]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본질을 어떻게 믿고 기도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우리의 신체적, 관계적, 심리적, 영적 상태가 달라졌다. 셋째, 기도는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면역체계를 강화한다. 마이애미대학교의 연구팀이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질병에 대항해 싸우는 주요 면역세포들의 숫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탠퍼드대학교가 100여 명의 여성 유방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종교 활동 수치가 높을수록 백혈구나 림프구 같은 면역세포의 수치가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5] 기도와 묵상은 중요한 영적 삶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1987년과 1995년 사이에 2만 1,000명이 넘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기도와 같은 종교 생활과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예상 수명이 7년이나 연장되었다고 밝혔다.[6] 넷째, 기도는 자기 절제력을 높여준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기 전에 평소 기도를 해온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며 직면한 문제에 효과 있게 대처하는 힘을 보인다. 묵상과 기도에 사용한 시간은 자아에 병적으로 함몰될 수도 있는 삶을 극복하도록 도와 줄 수 있다.[7]다섯째, 기도는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발휘한다. 기도는 스트레스의 부정적인 영향을 감소시킨다. 기도하는 동안 인간의 뇌파와 심박동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결과가 나타났다.[8] 특히 평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들의 경우 재정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신체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자신의 재정적인 유익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적인 정서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나아가 기도는 스트레스로 인한 알코올 섭취량을 줄이는 결과가 나타났다. 체스터 톨슨과 헤롤드 코닝의 의하면, 가장 효과가 뛰어난 스트레스 감소요법은 기도라고 하였다.[9] 나아가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적인 활동에 참여하면 개인의 삶과 건강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들이 임상연구를 통하여 밝혀지고 있다.[10] 신앙심 깊은 기도는 사람을 상대적으로 더 튼튼한 부부관계와 가정생활을 유지하게 하고, 상대적으로 더 건전한 생활방식을 가지게 하고,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더 쉽게 이겨내게 한다. 나아가 심각한 혈관 관계 질환을 막아주고,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면역체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11]1. Friedric Heiler, Prayer: A Study in the History and Psychology of Religion, 308. 2. 윌리엄 제임스, 종교 체험의 여러 모습들, 496.3. 마이클 지가렐리, 예수의 성품을 가진 크리스천, 81.4. Andrew Newberg·Mark Robert Waldman, How God Changes Your Brain: Breakthrough Findings from a Leading Neuroscientist, 27-32, 53.5. T. E. Woods·M. H. Antoni·G. H. Ironson·D. W. Kling, “Religiosity is Associated with Affective and Immune Status in Symptomate HIV-Infected Gay Men,” Journal of Psychosomatic Researches, 45(1999): 165-76.6. R. Hummer·R. Rogers·C. Nam·C. G. Ellison, Demography, no. 36/2(1999): 273-85. 7. 월트 래리모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건강한 사람, 258-59. 8. 필립 얀시, 기도, 456.9. Chester Tolson·Herold Koening, The Healing Power of Prayer, 48. 10. 래리 도시, 치료하는 기도 참조, 이 책은 미국의 80여 의학대학원에서 대체의학의 한 유형으로 기도치료에 관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11. Chester Tolson·Harold Koenig, The Healing Power of Faith 참조.
주님을 위해 일할 나이
시편 92편 묵상
by 고명환
2023-10-26
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광고나 강연에서 듣던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나이는 숫자 정도로 여겨지는가? ‘아니다’ 단언해도 무리가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고정관념을 깨자’는 취지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지는 몰라도, 현실은 그 숫자가 가지는 위력 앞에 쉽게 굴복하고 만다. 여전히 나이를 따져 효율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잣대이다. 개척하여 섬기던 한인교회 가까이에 한참 떨어져 있던 한인교회가 이사를 왔다. 한인들이 희소한 매사추세츠주와 뉴햄프셔주의 경계에 자리한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한인교회 둘이 오분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할 곳은 아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개척을 결심할 때 마음으로 정한 원칙이 둘 있었다. 하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빼내어 시작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미 한인교회가 있는 곳에 터를 잡지 않는다.’ 한인교회가 가까이에 없는 지역에, 주님을 모르거나 낙심한 영혼들을 찾아내어 개척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기도하며 시작했다. 주님의 도움으로, 더디었지만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장소에서, 새롭게 주님을 알아가는 분들과 함께,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져 가는 중이었다. 한데, 적지 않은 역사를 가진 교회가 무슨 사정인지 지척에 들어온 것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체 상태였던 교회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전도에 의욕적인 젊은 목사님을 맞아들였고, 교회 자리도 옮겨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젊은 한인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 서로 협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점점 바뀌었다. 그래서 연락해 오면 기꺼이 만나 인사도 나누고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그 목사님과 만나 식사하는 자리는 수개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같이 식사하자고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마련한 기회였다. 만난 자리에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 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그 분의 헌신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비교하니 나의 활동은 게으른 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계속된 이야기 가운데, 그 열정의 젊은 목사님은 한국의 유수한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서울의 대형교회 부목사로 일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은 ‘주의 종’임을 듣게 되었다. 나무랄 데 없는 경력에 젊음과 열정마저 갖춘 그 분에 비하면 나의 것은 조촐했지만, 차례가 된 것 같아 나름 소상하게 풀어 놓기 시작했다. “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십오 년 동안 하며 주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위해 전 시간을 드려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신학교에 마흔이 넘는 늦은 나이에 들어가서 겨우 졸업한 뒤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소개에 이어 교회 개척 동기와 진행, 현재의 모습에 이르도록 나름대로 성의 있게 설명해 주었다. “난 나이 든 사람이 신학교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런 그 분의 말에 짐짓 당황했다.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갔다고 말한 사람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하다니?’ ‘그의 앞에 있는 나이배기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 했었다는 말 아닌가?’혼란스러웠다. 즉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공격적인 질문 대신에 상투적인 변호를 늘어놓았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팔십세가 되어 부름을 받았고, 갈렙은 팔십이 넘는 나이에도 주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성경에 보면 나이가 많아도 주님의 일꾼으로 귀하게 일한 분들은 많은데요.”이에, 그는 입술을 약간 떨며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응대했다. “어쨌든 전 나이 든 사람들이 신학교 가는 것에 반대합니다.”얼굴을 붉히며 내보이는 단단한 고집을 확인하고 나니, 더 이상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다. 하여, 애써 불쾌한 마음을 추스른 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어설프게 마무리해야만 했다.왜 그분은 나이 든 사람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는 것을 싫어했을까? 왜 목사는 자신처럼 젊은 나이에만 헌신해서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믿었을까? 자신은 제때 신학교를 거치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는데, 늦게 신학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세상에서 더럽혀진 사람들이 나중에 ‘성직자’가 되는 것은 자격이 없다고 믿은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나이 든 사람들은 목회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듣고 싶지 않은 대답에 대한 질문을 지금도 해 본다. 2.시편 92편1-3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4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5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6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7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8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9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10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11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12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13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14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15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며 찬양하는 시이다. 시인이 노래하고 싶어한 주님의 사랑, 성실하심은 정의를 행사하시는 것으로 밝히 입증된다. 곧, 악인들과 의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 악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잠시 그들의 악행이 세상에 만연한다 해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도록 심판하신다. 반면에, 의인들은 악인들로부터 온전하게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크게 번성하는 복을 누리게 하신다. 시에서 악인은 풀(잡초)에, 의인은 나무(종려, 백향목)에 비유된다(7, 12절). 풀과 나무는 수명과 유용성에 있어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풀은 아무리 쑥쑥 자라 무성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말라 그 생명을 다해 쓸모없어 버려질 뿐이다. 그러나 나무는 그 생명이 길고 여러 쓰임새로 인해 큰 가치를 지닌다. 의인은 우거지고 높이 치솟는 종려나무나 백향목처럼 크게 번성하고 뻗어 나간다. 수령이 오래되어도 생기를 잃지 않고 푸르며 열매를 맺는다. 오래된 나무라도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며 풍성한 결실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이 늙으나 젊음을 유지하며 열매 맺는 생활을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의 근원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젊거나 늙거나 나이에 상관없이, 활기차고 열매 맺는 의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관건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밀착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3.나이란 하나님께는 숫자에 불과하다. 주님의 선발기준에 나이는 존재하지 않는다.주님의 쓰임을 받는데 나이의 커트라인이란 없다. 주님은, 자원하는 사람이 나이가 많다고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어리다고 돌려보내시지 않는다. 누구든지 쓰임 받을 준비만 되어 있으면 선택의 대상이 된다.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주님께서 그 어떤 조건의 사람이라도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가진 특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재능을 가졌든 못 가졌든, 나이가 어리든 어리지 않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쓰임에 합당한 열매를 반드시 맺는다. 관건은 나이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이다. 주님께 뿌리를 두어야 푸르름을 유지하고 열매 맺을 수 있다. 홍안의 소년이라도 주님께 뿌리를 두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한다. 백발의 노인이지만 주님께 뿌리가 연결되어 있으면 그 잎은 푸르며 열매는 풍성하다. 시편 1편의 시절을 따라 열매 맺는 나무가 생명의 시냇가에 천착하였듯이, 진액이 넘치고 푸르르며 늘 열매를 맺는 나무는 생명의 근원인 주님께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다. 예수님은 가지인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으려면 포도나무인 그분께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요한복음 15장). 주님 앞에 나이를 따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이를 크게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작게 보는 사람이다. 어렸으나 주님의 쓰임에 적합한 다윗을 무시했던 사람들의 일원이며, 사무엘이 늙었다고 강제 은퇴시키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동조하는 부류 중 하나이다. 강력한 주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초라한 사람의 능력을 크게 보는 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실 수 있는 분(고린도전서 1:27)이시라는 사실에 무지한 사람이다.아직 어리다고 뒤로 물러나지 말기를 바란다. 이제는 늙었다며 조기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님 안에 뿌리를 두기만 하면 나이를 불문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것도 숨이 멎는 그날까지.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삶을 꿈꾸어야 마땅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이 가능함을 보장해 준다. 얼마나 힘이 되고 소망을 주는 말씀인가!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레바논의 백향목처럼높이 치솟을 것이다.주님의 집에 뿌리를 내렸으니,우리 하나님의 뜰에서크게 번성할 것이다.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12-14절, 새번역)
죽음의 카운트다운을 무시하지 말라
지옥 교리를 선포해야 하는 이유
by Bradley Bell
2023-10-25
어렵지만 아름다운 교리(Difficult but Beautiful Doctrines)탈 기독교 시대에 접어든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학적 진리의 깊은 의미와 필요성을 느끼고자 하는 시리즈입니다. “죽기 30초 전.”이것은 판타지 작가 브랜던 샌더슨이 피할 수 없는 일을 불길하게 예시하는, 등장인물이 죽기 전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통찰력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당신은 어쩌면 판타지 소설이 주는 불멸의 매력을 찾는 독자에게 이런 식의 표현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의 Stormlight Archive 시리즈에 매혹된 수백만 명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종말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인간 영혼에 깊은 의미를 던진다. 나는 누구라도 이와 비슷하게 죽음 직전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차가운 내레이터가 그 사람의 남은 수명에 대해 당신의 귀에 속삭인다고 상상해 보라. 정말로 기이하고 끔찍한 지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당신이 그 사람과 맺으려는 관계의 방식을 근본부터 바꿀 것이다. 엄중한 현실은 차원이 다른 긴급성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없다. 지금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그 이상이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역사적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는 별개로 지옥, 즉 악인들이 의식적으로 영원히 고통당하는 실제 장소가 무자비한 입을 벌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시간이 없다. 지금이 소중하다. 그들이 모르는 지식을 안다는 이 짐은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을 주는가? 선교사의 짐아마도 선교사만큼 그 무게를 감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요삼 1:7) 나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천하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할 만한 유일한 이름” (행 4:12)이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는 것이다(유 1:23). 많은 선교사가 그들의 부르심 뒤에 숨은 중심 동기가 다른 게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즉시 인정한다. 선교사의 삶과 소명이 가진 부담은 지옥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 다시 말해서 죽음이 얼마 남았는지 알려주는 내레이터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겪어봐서 잘 안다. 동아프리카 선교사로서 우리는 종종 먼 거리를 운전하며 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을 위해서 기도하곤 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장소에 멈췄는지, 우리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동안 수백 곳에서 수천 명을 만났다.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신자들을 보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내 머리를 떠난 적이 없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동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누군가가 막 죽었다는 의미였다.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 봤을까? 최근에 내가 시장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일까? 내가 복음을 전한 사람일까? 이것은 마치 비명을 지르듯 세레나데를 부르는 청년처럼 내게 쏟아지는 나 자신을 정죄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죽음이라는 장막 바로 너머에 영원히 기다리고 있음을 한 번 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선교사가 받는 유혹이런 부담과 함께 따라오는 유혹이 있다. 지옥의 교리를 잠시 제쳐두면 어떨까? 그건 전혀 어렵지 않다. 쉬운 방법이 여러 가지 있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장될 것이라고 믿는 보편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다. 영원한 저주는 불필요하며 성경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죽는 즉시 바로 사라지거나 지옥에서 잠시 고통은 받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예 없어진다는 영혼 소멸론(annihilationism)도 나름 좋은 방식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불신자는 아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영원한 심판의 장소인 지옥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지옥을 제쳐두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예 거기에 관해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 남았다고 해도 부담은 없다. 영혼에 대한 긴급성은 함께 줄어든다. 한때 선교사를 감동시켰던 지옥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무관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밤에 들리는 통곡 소리, 사방에 쌓인 장작더미, 죽음이 31초 남았던 이웃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동정이 부른 피로감 또는 문화 충격이라고 치부하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옥에 관한 걱정과 부담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식의 포기를 어떤 사람은 “사랑이 이긴다”라고 표현한다. 밀라드 에릭슨이 관찰한 바와 같이, “영원한 형벌의 교리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비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이며 종종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먼저 비신화화되는 주제의 하나이다.” 그러면 왜 선교사는 그 주제가 가져다주는 끊임없는 고뇌를 고집해야 하는 걸까? 에릭슨이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옥의 교리를 고려해야 한다. … 왜냐하면 그건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지옥의 교리를 포기한 선교사가 갑자기 더 자유로워지고 더 도덕적인 선교사가 되는 건 아니다. 교리의 상실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욱더 제한된 신앙과 협소한 사역이다. 선교사의 확신성경 속 지옥에 관한 가장 분명한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나온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세상 종말에 관한 긴 설교를 한다. 물론 사역 내내 그의 가르침 대부분이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정죄를 암시한다. 하지만 이 장에서 그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울며 이를 갈며”(마 24:51; 25:30)라는 문구를 반복한 후, 그는 그러한 고통이 일어나는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다. 의로운 “양”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나라로 맞아들일 것이며, 저주받은 “염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마25:33, 41). 이런 심판의 범위를 반복하면서 예수님은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 25:46)라고 결론 내린다. 마태복음 25장이 그리는 지옥의 모습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옥이라는 이 중요한 교리가 단지 한 장의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지옥이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이며 “그들의 벌레가 죽지 않는 곳”(막 9:48)으로 묘사된 것을 본다. 누가는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인용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죽은 다음에 부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렇게 외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눅 16:23-24). 요한계시록은 또한 끝없는 고통의 연기가 나고 유황이 많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한다(계 9:1-2, 11; 14:9-11; 19:3; 21:8).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옥에 관해서 성경은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을 정도로 분명하다. 카운트다운을 향한 위로지옥에 관한 너무나도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 때문에 선교사는 이 교리가 가진 진리뿐 아니라 그 선함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의식적으로 영원한 고통을 겪는다는 이 교리의 어떤 점이 좋을 수 있을까? 이 교리가 영혼의 교화에 도움을 주는가? 사역에 어떤 열매를 맺게 하는가?다음부터 밤에 통곡 소리가 들리거나 내레이터가 속삭일 때 이 교리가 주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유익을 기억하라. 30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 민족 가운데 잃어버린 그의 친족을 생각하며 바울이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롬 9:2)라고 썼을 때, 그가 지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지옥이 사실이고 영원한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다면, 그분의 자비에 대한 말씀도 우리는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다.성경의 신뢰성을 확신하는 것보다 선교사의 사역에 유익을 주는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고후 4:5).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기록된 말씀을 통한 살아 있는 말씀이다. 지옥의 짐이 엄습할 때, 선교사는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며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라는 말씀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다.25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지옥 교리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주장의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일시적인 인간의 악에 대해서 어떻게 영원한 심판을 행하실 수 있다는 건가? 선교사는 웨인 그루뎀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처벌받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악을 징벌하시고 악을 이기실 때 그의 공의와 의와 모든 대적을 이기시는 능력의 영광이 나타난다.” 겸손하게 복음을 전하고 또 겸손하게 지옥에 대해서 경고하는 선교사는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시며 공의로우시고 또 전능하신 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듣는 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복음은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한 사람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20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를 키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에 대한 나의 확신은 선교 현장에서 탄생했다. 어느 날, 우리 팀장이 나를 산꼭대기의 탁 트인 전망 앞으로 데려갔다. 접근할 수 없는 마을이 수 마일에 걸쳐 수천 개의 양철 지붕의 모습으로 반짝였다. 그날 밤, 나는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살 뻔했다. 그렇게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이 오로지 나의 힘에 달려 있었다면, 나는 절망에 빠져 그만두었을 것이다.감사하게도 나는 당시 로마서를 읽고 있었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롬 9:18)라는 바울의 선언을 접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혼의 선택이 나를 선교 현장에 머물게 한 위로가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그 자유로움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안식을 준다. 15초 전… 지옥은 전도에 동기를 부여한다.내가 말하는 안식은 선도 활동에서 한 발 떨어진 안식이 아니라 내 영혼을 위한 안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주는 힘으로 우리는 더욱더 노력한다(히 4:11). 이것이 어쩌면 지옥 교리가 주는 가장 분명한 이로움일 수도 있다. 지옥이 실재하고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몇 초 후에 죽는다면, 선교사는 복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바울의 긴박감을 들어보자.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롬 10:14-15)이 얼마나 대단한 동기 부여인가!10 초 전…. 지옥은 우리로 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숨이 막히게 한다.나는 목회자로서 누군가에게 지옥 교리를 묵상하라고 권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지옥의 중요성과 분명히 일치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교리만은 깊이 성찰할 것을 촉구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 같이 하늘의 휘장이 열렸을 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여호와여” (사 6:3, 계 4:8) 외치는 피조물을 묘사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셨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그 영광을 훼손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시는 하나님은 옳으시다. 의식적인 고통을 영원히 겪는 지옥을 항상 생각하는 선교사는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에서(살후 1:9) 오로지 하나님의 진노만이 있는 지옥에서(계 14:10) 영혼이 영원히 슬퍼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그렇다. 지옥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의 높이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척도일 수 있다. 시편 기자와 함께 선교사도 얼마든지 감동에 차서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소리쳐야 한다(시 99:9).5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한다. 선교사로 사역하는 것은 힘들다. 수백만 명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특권이지만, 동시에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있음을 의미한다. 선교사가 인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는 것이다. 지옥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의 높이를 드러낸다면, 그것은 또한 그분의 자비의 깊이에 대한 기념비도 제공한다. 감사는 어려운 시기에 위안이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길 바라신다(요 15:11). 우리가 지옥(자비)을 피하고 영생(은혜)을 상속받도록, 실로 놀라운 사랑으로 선택되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얼마나 큰 감사와 기쁨을 주시는가.결국, 선교사 자신도 몇 초 후면 죽는다. 차가운 내레이터가 언제 내가 죽을지 내 귀에 속삭이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사의 미래는 지옥이 아니다. 오직 천국만이 있고 그다음에는 새로운 창조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왕의 길이다. 오로지 하나님께 감사한다!원제: Don’t Ignore the Countdown to Damnation: Why Missionaries Need a Doctrine of Hel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제가 일터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걸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10-24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교회 다니지 않는 아이에게 과외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전도를 하나 봅니다. 아이가 저에게 선생님도 교회 다니냐고 묻더니, 그 미술 선생님이 자기에게 기독교 얘기를 많이 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동안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일까요? 이금주: 이 질문이 전도의 주제라면 김 교수님이 더 전문이실 것 같은데요. 제가 이 사연을 보고 처음 떠오른 질문은 ‘이 과외 선생님은 전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전도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였습니다. 아마 이는 일터에서 복음전도의 사명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모두 가져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김선일: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21세기 복음전도의 주된 현장은 일터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지요. 우리의 일터는 그곳이 많은 사람이 일하는 큰 조직이든 아니면 이처럼 어린 학생 하나를 지도하는 사적인 공간이든 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이 사례에서 과외를 받는 학생이 ‘선생님도 교회 다니냐?’ 물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가 열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교회를 다닌다고 답하고 대화를 계속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김: 예, 비록 사소한 질문 같지만 전도의 문이 열리는 자연스러운 상황일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4:5에서 바울이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며 세월을 아끼라”고 했는데,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기회를 사라”는 의미라고 하지요. 일상에서 이러한 순간은 “하나님이 전도할 문”(골 4:3)을 열어 주시는 것일 수 있으니 영적으로 민감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저라면 이 학생에게 ‘그래 선생님도 교회 다닌단다’ 이렇게 답하고 나서, ‘그런데 왜 그걸 묻는 거니?’ 또는 ‘너도 교회에 관심이 있니?’ 물으면서 대화를 더 이어가겠습니다. 학생에게 예수님과 복음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김: 그렇지요. 근데 저 질문의 행간을 보면, 질문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 머뭇거리고 자신이 없는 것 같기도 해요.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일까요?’ 물은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 그래서 제가 시작할 때 그 과외 선생님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지나 성경을 펼치지 않고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복음을 전합니다. 과외 선생님의 말과 행실이 그 학생에게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만일 그 선생님이 다른 믿지 않는 선생님들과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학생은 ‘이 선생님은 뭔가 다르구나’ 느꼈을 겁니다. 우리의 언행과 태도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훨씬 더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김: 사실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느냐가 이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그래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있다면 사영리나 다리 예화 같은 특정한 프로그램의 ‘전도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이미 전도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좋은’ 전도를 하느냐 ‘나쁜’ 전도를 하느냐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사람들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쁜 전도가 되겠지요.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통적 의미에서 전도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는 점에서 말과 행실의 전도자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상황에서 전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김: 예,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질문은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앞서 일터에서, 즉 일을 위해서 만난 자리에서 전도라는 종교 활동을 해도 되느냐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리 과외라 해도 일은 공적인 것인데, 여기서 개인의 종교를 나누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고민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이런 문제가 더욱 심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터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전도라는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을 나누어도 괜찮은가?’ 이런 의문이 함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의 신학은 일터에서 우리의 일차적 사명은 하나님 앞에서 일 자체를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이 선생님의 경우도 학생에게 과외를 가르치는 일이 전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성껏 학생을 지도하면서 학생이 공부하는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세심하게 돌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이 선생님의 소명입니다. 일 자체의 소명에 충실하고 고 어린 사람일지라도 존중하며 대하는 선생님의 그러한 모습이 복음을 전하는 기반을 마련할 것입니다. 김: ‘행동은 말보다 더 크게 들린다.’ 이런 영어 속담이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들려진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전서 3:1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순종하며 선한 행실을 보일 때 그 남편들이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의 메시지이고, 좋은 소식이어야 합니다. 이: 선생님이 학생에게 귀감이 안 된 상태에서, 공부를 지도하는 일에 대한 진실한 관심과 열정이 없는 상태에서 복음만 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전도에 더 장애가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말과 행동이 같이 전달되어야 설득력이 훨씬 높아집니다. 김: 우리가 종종 디모데후서 4:2의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라는 구절을 전도에 적용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도를 해야 한다는 전도 제일주의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도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도지를 나눠주고 복음제시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 사역자로서의 소신과 영적 권위를 가리킵니다. 당시 연소한 목회자였던 디모데에게 스승 바울이 교회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이 원하는 말만 하려 하지 말고 인내와 용기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말이지요. 물론 이러한 자세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자세와 동기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한 다음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하라]”고 권합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의 목양과 교육을 의미합니다. 교회 밖에서 불신자를 만나면 아무 때라도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들에서 그 말씀을 너무 아무 때나 전도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저도 종종 봅니다. 일보다 전도가 우선이라고 하거나, 그래서 일은 전도의 도구라고 생각하면 복음의 더 큰 차원을 놓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과 일을 대하는 태도가 이미 복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 예, 물론 이렇게 개인적으로 과외지도를 하는 경우라면 가르침과 돌봄이라는 공적인 일에서 선생님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 형성과 선한 행실이 일종의 예비적 전도사역이 될 것입니다. 사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 또한 근대 계몽주의가 가져온 여러 폐해 중 하나입니다. 공적인 일에 최선을 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인간미가 필요합니다. 좋은 배려와 돌봄의 관계에서 복음을 나눌 기회는 언제든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너희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벧전 3:15)하는 자세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주셨을 때 적절하게 할 말을 준비하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주께서 바라는 한 가지’
애즈베리 부흥 8개월이 지나고
by J. T. Reeves
2023-10-23
2023년 봄, 리브스(J. T. Reeves)는 휘튼 칼리지 4학년이 되었다. 그와 친구들은 애즈베리 대학교 캠퍼스에서 일어나는 영적 각성 소식에 차를 몰고 그곳으로 갔다. 8개월 후, TGC는 리브스에게 그때의 경험이 그와 동료 학생들의 삶에 어떤 지속적인 영향이 미쳤는지를 물었다. 작년부터 나는 이 모든 것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관해서 자주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말로 정의하기에는 참으로 답답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에즈베리의 그 부어 주심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단지 이 글을 통해 내게 부어 주신 그 은혜를 당신이 상상하길 바랄 뿐이다. 세속화의 습격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린 세속주의의 폭풍 속에서 자랐다고 상상해 보라.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믿기에 당신은 너무 현명하거나 또는 너무 냉소적이다. 사춘기가 오기 전, 만연한 개인주의는 당신을 서커스 동물처럼 강제로 우리에 가두고 외롭지 않은 척하라며 아이폰을 건넨다. 당신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그래서 때로는 외롭지 않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효과가 없을 때, 불안감이 커지고 더 많은 벽을 쌓게 된다. 달리 말해서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수준의 만족함에 참석하라는 도전이나 초대를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타인에게 압력을 가하지 말라는 포스트모던적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어려운 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당신의 삶은 오로지 가상 세계에서 이뤄진다. 엔터테인먼트는 삶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말 그대로 신이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회사의 알고리즘이 당신의 관심(숭배 대상)을 독점한다.때로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삶의 속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는 마치 움직이는 스포츠카에서 뛰어내려 안전하게 착지하겠다는 것과 같다.Z세대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인”은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그 어떤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신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최선을 다하지만 솔직히 “그런 것” 중 어느 것도 당신에게 그렇게 끔찍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불가피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당신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다. 그런데 중에 예기치 않은 입소문 하나가 들린다. 켄터키 주 한가운데에 있는 한 대학에서 뜨거운 예배 모임이 있다는 말이었다.처음에는 절대 갈 수 없다고 속으로 말하지만, 어느날 친구가 그런다. “지금 너한테 진짜로 중요한 일이 있어? 아니잖아?” 친구의 말은 상처를 준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당신은 30분 후에 짐을 싸서 자동차의 시동을 건다. 그리고 앞으로 7시간 운전을 누가 하고 아는 사람 누구 집에서 어떻게 자는지 등등을 의논한다. 거기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게 이상하기만 하다. 당신은 당연히 회의를 느낀다. 왜 다들 “여러분 모두 다(y’all)”라고 말하지? 거기서 만난 광경은 틱톡에 나온 것만큼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가 당신을 붙잡아 떠나지 못하게 한다….사람에 따라서 몇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또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당신의 경우는 몇 주가 걸린다. 캠퍼스로 돌아가서 몇 주에 걸친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수년 동안 갇혀 있던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조금 더 선명해지며, 당신과 친구들은 왜 지금까지 그분의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의아해하며 서로를 바라본다. 아니,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뿐. 영광을 목격함당신은 기적을 믿지 않았지만, 친구 몇몇이 의학적 설명으로 불가능한 일을 경험한다. 불행하게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은 성경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제는 불가능한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 외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막 11:23).당신이 원하는 것은 예배뿐이다. 더 이상 아닌 척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느새 개인주의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당신은 마음이 녹았고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고백을 쏟아낸다(약 5:16).당신과 당신 친구의 친구들이 매일 서로에게 나사렛 예수를 따르도록 도전을 (아니, 초대를) 할 때 불안이 금세 사라질 것이다. 밤새도록 기도하는 일(눅 6:12), 자발적인 예배(시 27:4), 그리고 눈물로 중보하는 일(빌 3:18)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닌 것 같다.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모든 “재미있는” 것에 대한 당신의 식욕은 언젠가부터 사라졌고, 공부방에 들어간 당신의 눈앞에 죄책감을 가지고 당신을 바라보는 친구가 있다. “정말 끔찍해.” 그녀가 말한다. “뭐가?”하고 당신이 묻는다. “할 일이 너무 많아. 하지만 도무지 성경 읽기를 멈출 수가 없어!” 그 말에 당신은 그만 웃음을 터뜨린다. 실상은 당신도 출애굽기 27-30장을 마저 다 읽고 싶어서 공부방에 들어온 거니까. 잠시 중단.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당신은 출애굽기 27-30장을 읽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당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분이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는 빠르게 움직이는 당신 삶의 안개 속으로 들어가서 당신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그의 말에 매료되었다. 당신은 애초게 그가 더 나은 삶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경험할 시간이나 관심을 결코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달라진 상상나는 다양한 캠퍼스에서 다양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2023년 봄 성령님과의 만남은 매우 달랐지만, 우리 대부분은 다들 비슷한 말을 했다. 애즈베리의 부어주심은 독특했다. 그것은 대규모 개종이나 대규모 회개, 대규모 선교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감미로운 노래처럼 보였다. 그건 예배 받아 합당한 분에게 드리는 우리의 관심과 예배를 근본적으로 재고하라는 초대였다.비명을 질러대는 알고리즘의 흐름 위에서, 질투하는 하나님이 속삭였다. 나는 네가 내게 주려고 꿈꾸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네게서 요구할 것이다. 그래야만 나는 네가 꿈꾸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네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내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가?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내 모든 상상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그 일을 하실 거라고 믿으며 우리는 살고 있다. 애즈베리 부흥 관련 기사 보기• 애즈베리 부흥 앞에서 진짜 던져야 할 질문• 평범하고도 특별했던 하루•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다원제: ‘All You Want to Do Is Worship’: A Student Reflects on 8 Months After Asbu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이스라엘 상황에 관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by Paul Carter
2023-10-21
요즘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스라엘의 위기에 관해 대화가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그에 관한 목회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 유용하겠다고 생각했다.당신은 아마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하마스의 이런 끔찍한 공격을 단호하게 규탄한다. 여성, 어린이, 노인을 살해하는 것은 지극히 야만적이다. 그리고 나는 적으로부터 국민과 영토를 방어할 책임이 있는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권리를 지지한다. 여기에 더해서 추가 의견을 제시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더해서 나는 이스라엘에게 전쟁 규칙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국제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가자 지구의 민간인 사상자의 최소화를 위해서 모든 합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추가 의견을 제시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팔레스타인인이 하마스와 동조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마스는 종종 무고한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는 억압적인 테러 국가이다. 하마스에 반대한다고 해서 팔레스타인인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다. 우리는 그들과 여전히 특별한 연대를 나누고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추가 설명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면 좋을 것이다.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특별한 중심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는 새 언약 공동체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함께 구성된다. 로마서 9장 속 사도 바울의 분명한 가르침처럼, 그 누구도 단지 아브라함과 유전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근거만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나는 유대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인 믿음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으며 또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순간 분명하게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 설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서 또 모든 민족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과 아랍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크게 부어지도록 기도하자. 원제: How to Speak to Friends and Loved Ones About the Situation In Israe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어린이 질문: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여기 함...
by Brandon D. Smith
2023-10-20
어린이 질문(Kids Ask): 목사, 성경 교사 및 신학자가 성경에 관한 어린이들의 질문에 답하다 질문이 많은 어린이는 때때로 하나님에 관해서 중요한 질문을 한다. 최근에 나온 질문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모든 곳에 동시에 계실 수 있지요?”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면, 그럼 지금 제 코와 입 안에도 계시나요? 많은 사람과 동시에 함께 계시는 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러기에는 세상에 사람들이 무척 많은데요!”어떻게 답변하면 좋을까?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우리에게는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누구나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한다. 천둥 번개로 무섭거나 멀리 이사 간 친구로 슬퍼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돌봐주길 원한다. 이건 좋은 바램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며, 누구보다 우리를 잘 돌봐주실 능력이 있으시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 계시며 그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또 그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에 계신 분이 동시에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을까?오랜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늘로 가실 것이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성인이었지만, 예수님이 함께 있지 않을 때 만날 어려운 일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걱정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떠날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슬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6:6). 그들은 예수님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돌봐주시며 심지어 하늘에 올라가시고도 그들 가까이에 계실 것을 확신하길 원했다.예수님은 제자들이 걱정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돕는 자” 곧 예수님을 돕는 이를 그들에게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7절).예수님은 누구인가? 돕는 자가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다. 두 명의 예수님이 아니라 한 명의 예수님이다. 그 한 명이 하나님이면서 또 사람이다. 어떻게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게 들리겠지만,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성경은 하나님은 세 가지 형태로, 즉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예수라고 불림), 그리고 하나님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세 분의 하나님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는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하신다. 이것은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을 수 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기도 하기에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완벽한 삶을 살고 완벽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이 큰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넘치시는예수님은 하나님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크고 강력하다고 말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을 한곳에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을 강아지처럼 줄에 묶어둘 수 없다. 하나님을 물고기처럼 어항에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을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에게 하듯 매트에 누르고 못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큰 바다조차도 하나님을 가두지 못한다!하나님은 너무나 강력하시기에 어디서든 언제든 원하는 곳에 계실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있었던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분은 불타는 덤불에서 모세를 만났다. 그분은 또한 모세와 산에서 만났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그의 백성을 광야에서 길고 긴 유랑 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분은 심지어 그들과 성전(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러 오던 건물)에서도 함께 계신다.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 무엇도 그를 억제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우주 전체를 통틀어서도 찾을 수 없다. 그분은 너무나 강력해서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다.돕는 자를 보내주시기에 충분할 정도로 친절하신예수님은 인간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인간이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한 완벽한 인간이다.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완벽한 속죄의 죽음을 치르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죄와 사망을 이기기 위해 무덤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성경은 말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주의 왕으로서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제 우리로부터 멀리 떠난 걸까? 아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은 항상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바로 하나님 성령이 바로 예수님이 약속한 돕는 자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좋은 소식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여전히 지구에 계시면서 우리가 아프거나 슬플 때 곁에 오시길 바란다. 우리 집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얘기하기를 원한다. 그게 바로 제자들이 바랬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가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게 그들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요 16:7).왜냐하면 예수님이 지구에 계실 때는 한 번에 단지 몇몇 사람들하고만 가깝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의 영을 보내준 뒤로,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과 가까이 계신다. 성령님이 오셨기에, 예수님은 이제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그들의 영을 살려서 예수님을 믿도록 돕는다(8-11절). 그리고 성령님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지까지도 알 수 있다(13-15절).성경은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한다고 말한다(롬 8:26-27).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또 다른 예수님의 제자인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님이 부활한 직후에 예수님을 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그녀는 무척 행복했고 그를 감싸 안아서 다시는 떠나지 못 하게 하려고 했다.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을 그녀 곁에 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마리아 막달라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대신에 예수님은 앞으로 그가 전보다 더 그녀와 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와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요 20:17).예수님은 돕는 자를 보내셨기에 하나님은 이제 항상 그의 백성과 함께하신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이 바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너무 멀리 있어서 당신을 못 보거나 기도를 듣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당신은 언제나 예수님께 대화를 요청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돕는 자로 보내셨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수님은 재림하는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요 17:24; 마 28:20).원제: Kids Ask: How Can Jesus Be in Heaven and with 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은 아말렉의 전술을 심판하신다
by Peter J. Leithart
2023-10-19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은 고대 암흑기의 전쟁을 연상케 했다. 약탈자는 영토나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인질을 잡기 위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그들은 젊은 여성들을 살해했고, 노인들을 거리에서 납치했으며, 심지어 자녀들과 함께 있는 가족을 살해하고 불태웠다.하마스가 쓴 전술은 성경에 나오는 아말렉의 전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여호와의 저주모세가 아론과 훌의 손을 잡고 언덕에 앉아 있는 동안 여호수아는 아래 계곡에서 적을 물리쳤다. 모든 일이 끝나고 여호와가 맹세했다. “‘주님의 깃발을 높이 들어라. 주님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실 것이다’ 하고 외쳤다”(16절). 여호와는 아말렉에 대한 기억이 하늘 아래에서 아예 지워질 때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했다(14절).여호와는 약속을 지키신다. 그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삼상 15:1-3). 사울은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었고 엄청난 약탈을 일삼지는 않았다. 사무엘은 길갈에서 아각을 쳐부수지만, 그럼에도 아말렉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다윗이 블레셋에서 유배 생활을 마무리할 무렵,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에 있는 다윗의 진영을 공격하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납치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다윗이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아말렉의 약탈자들을 쫓아내고 그의 아내와 자녀와 재산을 되찾은 것이었다(30:1-20).400명이 다윗의 손을 피해서 탈출했고(30:17), 아말렉은 또다시 살아남아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는 자신의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악당은 사울 왕과 싸웠던 왕의 후손인 “아각 사람” 하만이다(에 3:1; 8:3). 에스더는 교묘하게 하만을 함정에 빠뜨렸고, 주님(이름은 밝혀지지 않음)이 모든 사건을 뒤에서 조율했고, 그 결과 하만이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든 교수대에서 그 자신이 죽게 된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말렉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다. 여호와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잊힌 민족이 된 아말렉은 이제 단지 성경에서만 기억될 뿐이다.고대 세계에는 사악한 민족이 적지 않게 있었다. 아시리아 민족의 잔인성은 악명 높았고, 가나안 족속들은 여호와의 진멸 명령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도 여호와는 왜 하필이면 아말렉을 특별히 적대하여 지목했을까?전쟁 중인 아말렉아말렉은 약자를 공격하는 데에 특화된 민족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아말렉의 정체를 상기시켰다. “그들은 당신들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에, 길에서 당신들을 만나, 당신들 뒤에 처진 사람들을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신 25:18). 다윗과 그의 용사들이 사울과 싸우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고 있을 때 아말렉 침략자들이 시글락을 공격했는데, 거기에는 오로지 여자들과 아이들만 있었다(삼상 30:2-3). 하만은 포로로 잡혀간 유대 민족을 멸절하고자 아하수에로 제국의 힘을 모을 계획을 세웠다.아말렉 민족은 단지 잔인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정반대, 즉 네거티브 필름(photonegative)과 같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고아, 과부, 나그네, 기타 취약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거듭 지시했다(출 22:22; 신 10:18; 14:29; 24:19-21; 26:12-13).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이스라엘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않는 자”(신 27:19)를 향한 저주를 선언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선지자들은 약한 자들을 학대하는 이스라엘과 지도자들을 비난했다(사 1:17; 렘 7:6; 22:3; 겔 16:49; 슥 7:10).아말렉 민족에 의한 여성과 어린이의 “민간인 피해”는 우연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선택된 성읍에서 시행했던 남자, 여자, 어린이, 동물을 죽이는 문제에 있어서의 금지령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다. 모든 남자가 사라진 뒤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여리고와 아이, 호르마 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견고한 성읍들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그 모두를 연기와 불로 여호와께 바쳤다. 그에 반해서 아말렉 사람들은 특히 여성과 어린이, 약한 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아말렉은 반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인류를 향한 여호와의 목적에 정반대되는 생활 방식과 가치관, 군사 전술을 가진 민족이었다. 아말렉의 메아리하마스는 아말렉이 아니다. 말하자면 하마스가 지금 여호와의 금지와 저주 아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똑같은 것도 아니다.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이 그리스도인이며, 많은 무슬림 팔레스타인은 하마스와 폭력에 반대한다. 하마스를 아말렉과 비교하는 게 대량 학살의 정당화 또는 암시가 아니다.그럼에도 10월 7일에 하마스는 아말렉의 전술을 사용했다. 하마스가 아말렉처럼 싸우는 유일한 테러 집단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테러 단체는 여성과 어린이를 방패로 삼았다. 인도네시아 이슬람주의자들은 여성을 자살폭탄 테러범으로 활용했고, 보코하람은 어린이를 “인간 폭탄”으로 악용했으며, 아프가니스탄 테러리스트들은 산부인과 병동에서 임산부와 아기를 살해했다. 하마스에 대응하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방식을 모방할 위험이 있다.아말렉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우주의 주인이시다. 여전히 폭력적인 사람들, 특히 무력한 사람들을 죽이는 악한 이들을 파괴하기로 결심하신 분이다. 아말렉 민족뿐 아니라 피를 흘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주님은 의인을 가려 내시고, 악인과 폭력배를 진심으로 미워하신다”(시 11:5).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여섯 가지 것 중에는 다음이 있다. “교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와 무죄한 사람을 피 흘리게 하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꾸미는 마음과 악한 일을 저지르려고 치닫는 발”(잠 6:17-18).정의를 위한 기도예수님은 쇠지팡이를 손에 들고 다스리시며 세상 나라들을 질그릇 같이 깨뜨린다(계 2:27). 그는 하마스의 아말렉 사람들뿐 아니라 폭력을 사랑하고 자비를 미워하는 모든 원수를 그의 발 아래로 끌어들일 것이다. 때때로 예수님은 폭력적인 사람들을 개종시킴으로써 패배시킨다. 또 어떤 때는 아예 그들을 멸망시키심으로써 패배를 안긴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그에게 그렇게 하시도록 요청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정의와 악인에 대한 심판을 위한 기도로 가득한 기도서이자 찬송가인 시편이 있다. 지금은 저주하는 시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아말렉인이 하늘 아래에서 제거되어 정의로운 세상이 되도록 해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할 참으로 좋은 때이다. 원제: Hamas Is Borrowing Tactics from the Amalekit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호남 선교, 태동하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군산구암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10-18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군산에 선교거점이 마련된 것은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유대모(A. D. Drew)의 사역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그는 1894년 호남지역 선교를 위한 여행을 하면서 육로여행의 어려움을 경험했다. 이듬해인 1895년 3월 군산 선교거점을 확보하는 일에 책임을 맡은 의료선교사 유대모는 같은 남장로교회 동료 선교사이자 훗날 호남선교의 아버지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는 전위렴(W. M. Junkin) 목사와 함께 인천을 떠나서 배로 군산에 도착함으로써 군산 선교가 시작되었다.이 두 선교사는 약 1개월 동안 군산을 중심으로 환자들을 치료해 주면서 주민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인심을 얻게 됨으로써 자신감을 얻은 그들은 군산항 가까운 곳에 집 두 채를 마련해서 선교를 위한 거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완전히 군산으로 이사를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듬해인 1896년 2월이었고, 같은 해 4월 6일에 김봉래, 송영도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군산 선교의 시작이자 호남지역에 선교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 의사인 유대모는 자기 집 사랑방에 진료소를 개설하고 치료를 했다. 전위렴은 그곳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중심으로 전도함으로 협력 선교의 개가를 올릴 수 있었다. 그해 7월 20일 김봉래, 송영도 두 사람이 전위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고, 호남선교의 효시가 되었다.하지만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군산항 일원에서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인들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조선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교사들과의 접촉이 어려워졌다. 따라서 선교부는 마련했던 처소를 처분하고, 그해 12월 21일 외각의 궁말(구암리)로 옮기게 됐다. 본격적으로 식민지 정복을 위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 옴으로써 군산의 분위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군산의 인구 분포를 보면 한국인이 780명에 일본인 거주자가 422명이나 되었다는 통계는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최초 군산의 공동체는 선교사들을 따라서 구암리에 가서 예배를 하게 되었다. 또한 일부는 후에 새롭게 시작하는 공동체에 합류하여 군산 개복동교회를 형성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렇게 유대모와 전위렴 선교사가 인천에서 뱃길로 군산을 찾아와 거점을 확보한 것이 사실상 호남선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그 후 1898년에 해리슨(W. B. Harrison, 하위렴) 목사, 1899년 봄 불(W. B. Bull, 부위렴) 목사, 데이비스(L. F. Davis) 양, 알비(L. Alby) 양 등이 도착함으로써 군산 선교에 활기가 돌게 되었다.1899년 5월 1일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일제의 강점은 가시화되었다. 군산 선교는 개항보다 일찍 시작되었지만, 개항과 함께 선교사들의 활동은 오히려 어려워지면서 현재의 구암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1899년 12월 21일 옮기게 되었다. 이때 군산항 주변에서 시작한 초기 공동체의 일부 신자들이 궁말로 옮겨온 선교사들을 따라왔고,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군산 선교의 역사를 이은 것이 현재의 구암교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00년 봄 구암교회는 95명의 세례교인을 가진 교회로 급성장했다. 전위렴 목사는 구암교회를 중심으로 선교를 하면서 40년간 군산과 호남지방의 선교의 선구자로서 사명을 다했다. 유대모 선교사는 의사로서 자원 전도자들을 동반하여 배를 타고 강변과 군산 앞바다의 섬들을 찾아다니면서 치료와 전도를 겸했다. 하지만 유대모는 과로로 건강이 악화하여 1901년에 귀국하였고,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구암교회는 미국 남장로교회가 호남지역 선교를 하면서 최초로 거점으로 확보했던 군산 선교부(군산교회로도 불렸음)의 역사를 잇는 사실상의 호남의 모교회이다. 하지만 초기 군산지역의 선교 역사는 사료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있고, 확실한 사료로서의 신빙성도 확인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있는 것 같다.그러한 한계를 전제로 구암교회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우선 구암교회 스스로가 설립기념일을 1893년 1월 7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군산 선교의 시작을 1896년으로 본다는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없지 않다. 다만 1896년이라는 시점은 그 어간에 있었던 조선의 정세, 즉 1894년에 있었던 동학혁명으로 인해서 선교사들이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정읍이나 김제를 중심으로 동학군이 일어났고, 그 여세는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이러한 여파로 군산지역에서 선교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일하던 선교사들이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일단 서울로 철수했다가 다시 내려와 거점 확보를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 1896년인데, 이것을 군산 선교의 시작으로 설명하는 자료들이 많다고 본다.이때 군산에 내려와서 군산 선교거점을 만들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은 전킨(W. M. Junkin), 드류(A.D. Drew)와 한국인 조사 장인택 등이었다. 이들이 군산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하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군산 선교부의 시작이며, 이것이 후에 현 구암교회의 역사로 이어지게 된다. 그중에 조선인 장인택은 남장로교회가 조선에 도착하면서 구성하게 된 장로교 정치를 사용하는 선교회연합공의회(Council of Mission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에 유일한 조선인 회원이었다. 따라서 장인택 조사가 군산 선교에서 수행한 역할이란 지대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구암교회의 시작은 곧 그와 함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92년 11월 3일에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입국하여 선교지 확보를 위한 호남지역을 여행하게 되었다. 당시는 내륙교통이 극히 빈약했던 상태라 선교사들은 제물포에서 배를 이용해서 군산에 도착했다. 이는 당시에 가장 효과적인 접근방법이었다. 이렇게 해서 도착한 선교사들이 군산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1893년 1월 27일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다. 그런데 왜 구암교회가 이날을 구암교회의 설립기념일로 지키는가? 비록 동학군 때문에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역사가 단절된 것이 사실이지만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군산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을 기점으로 한 역사를 잇겠다는 의지가 아닐까.그 후 1899년 군산이 개항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왔고, 그로 인해서 선교사들의 활동이 지장을 받게 되자 군산 선교부를 궁말(현 구암교회가 있는 옛 지명)로 옮겨왔다. 따라서 군산항 근처에 있던 군산 선교부(군산교회) 신자들은 궁말로 예배를 드리러 와야 했다. 반면에 궁말로 따라오지 못한 신자들이 중심이 돼서 새롭게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개복교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군산지역의 선교 역사에 있어서 군산 선교부의 역사를 계승하는 또 다른 교회가 있는 셈이다. 동학이 잠잠해진 다음인 1896년경부터 남장로교회의 초기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온 데이비스(Linnie Fulkerson Davis)라고 하는 선교사가 궁말을 중심으로 사역하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여자의 몸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외진 곳이 궁말에 자리를 잡고 지역민들과 접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아마 1896년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군산으로 내려올 때 같이 내려와서 데이비스는 궁말에 자리 잡고 나름의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던 차에 군산항(시내)에 있던 선교부가 옮겨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때 군산의 선교부와 궁말에서 활동하고 있던 데이비스의 공동체는 정식으로 합병되었고, 군산교회로 불렸던 군산 선교부는 궁말로 옮겨온 것이다. 자연히 군산 시내에 있던 군산교회는 구암교회로 역사를 잇게 되었기 때문에 그 시작을 1896년이 아닌 선교사들이 처음 도착해서 예배를 드린 1893년 1월 27일로 기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구암교회 예배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본래 작은 섬이나 다름이 없었다. 섬과 육지 사이가 농지로 개간되고 육로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작은 산봉우리 하나를 뒤에 두고 그 기슭에 집들이 몇 채 있었던 곳인데,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선교사들이 주택을 지었고, 그 아래로 진료소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처소, 그리고 맨 아래쪽으로 학교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작은 언덕과 같은 동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군산 선교부가 자리를 차지했다.지금 그곳엔 복원된 영명학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선교사들 주택이나 학교 건물은 이미 사라졌다. 다만 해방 이후에 벽돌로 지었던 예배당 건물은 군산3·1운동기념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영명학교가 복원된 후 이 학교로 기념관이 옮겨지면서 구 예배당은 더 이상 그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곳에 선교사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당시의 건물은 없다.구암교회는 2003년에 호남선교100주년기념 예배당을 완공했다. 멀리서 보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건물이긴 하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서 전면에 대리석 기둥이 중압감을 줄 만큼 웅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석조기둥이 웅장한 만큼 건물의 균형감이 받쳐주어야 하는데, 뭔가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정면에서 바라보면 나름 웅장함과 함께 설계자가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은 느낌은 든다.이 예배당을 보면서 제일 먼저 느끼는 또 하나는 예배당 전면에 대리석 원주 기둥이 여덟 개가 강력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기둥들은 그냥 건물 구조상 필요한 것이 아니고 설계단계에서부터 일부러 만든 기둥이다. 그 의미를 알려면 기둥 밑 부분을 보면 된다. 기둥 받침 부분에는 각각 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킨, 레이놀즈, 테이트, 레이번(전킨 부인), 볼링(레이놀즈 부인), 데이비스, 매티 테이트(테이트의 여동생) 등 7명의 선교사와 한 사람의 한국인 조사 장인택을 기념하기 위한 기둥을 세운 것이다. 이들은 모두 초기 군산 선교를 이끌었던 주역들이다. 교회가 예배당을 지으면서 예산상에 어려움이 동반되는 것인데, 어려운 결정을 하여 이러한 기념물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뜻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을 짓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에서 이러한 예산을 집행하는 것은 특별한 의지가 없이는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념물을 만들어서 후세에 전하기를 기뻐한 구암교회 신자들의 의식 또한 높이 사야 할 것이다.이와 함께 이 예배당을 찾았을 때 만나게 되는 건물 양쪽 끝에 타워가 특별하다. 이 또한 의도적인 설계에 따른 건축물이다. 단순히 계단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의미를 담아 설계했고,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 명칭은 군산 3·1운동과 선교를 기념하는 타워이다. 즉 하나는 군산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군산 선교를 기념하는 타워로 만들어진 것이다. 멀리서 보면 건물 양쪽에 각기 조금은 다른 모양을 한 타워가 보인다. 맨 위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것이 같으나 바로 밑 첨탑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그 아래 공간은 한쪽은 사료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정면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타워에 올라가면 사료들을 만날 수 있다. 반대편에 있는 타워는 특정 공간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사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두 타워는 조금 다른 모양을 한 채 군산 근대사의 두 사건, 즉 개항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과 그 사역을, 또 하나는 민족의 아픔을 높이 외쳤던 군산의 3·1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세웠다.구암교회를 찾아가면 언덕에 우뚝 솟은 예배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언덕을 오르자면 예배당보다 먼저 닿게 되는 것은 구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군산 3·1 만세운동 기념관으로 사용하다가 영명학교를 복원한 다음은 그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면 군산3.1만세운동기념관을 왜 여기에 두었을까? 구암교회는 3·1운동 당시 군산 만세운동의 발상지이며,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이 대부분 구암교회의 신자, 혹은 선교부가 운영하는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선생과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군산의 3·1 만세운동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군산의 만세운동은 서울의 만세운동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는데, 군산의 경우는 3·5만세운동, 즉 3월 5일에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군산에서 시작된 호남지역의 만세운동은 그 여파가 호남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군산의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구암교회와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들이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전개할 때 자연스럽게 군산 시민들이 합세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군산에서 기미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당시 영명학교 졸업생 가운데 김병수라는 사람이 졸업 후 서울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다녔는데, 그가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만세운동의 기획을 전달받았고, 그와 함께 독립선언문 200장을 받아 1919년 2월 26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의 은사인 박연세 선생의 집에서 서울에서 계획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알리고 군산에서의 거사를 모의하였다.군산의 만세운동은 본래 서래 장날인 3월 6일에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그 비밀이 새어 나갔다. 멜본딘여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장과 태극기를 만들어서 학생들이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3월 5일 새벽에 일본 경찰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주동자인 박연세, 김수영, 이두열 등을 체포했다. 거사는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거사를 함께 준비하고 있었던 김윤실 선생이 학생 간부들과 회의를 갖고 당일(3월 5일)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이것은 일본 경찰들이 방심한 틈을 이용해서 허를 찌르는 계획이었다.이렇게 영명학교 학생들과 멜본딘여학교 학생들과 선생들이 함께 나섰다. 그리고 구암교회의 신자들, 당시 교회 옆에 있던 예수병원 직원들, 그리고 일부 군산 시민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이 행진하면서 만세를 외쳤다. 이 행렬은 군산경찰서 앞에 이르렀고, 그때에는 이미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경찰서 앞에서 새벽에 끌려간 박 선생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구암교회와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가 중심이 되어서 전개한 만세운동은 군산에서 멈추지 않고 전주와 익산으로 확산하였으며, 이후 호남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군산지역의 만세운동이 구암교회와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가 중심이 된 것은 이 지역의 유일한 근대교육을 한 곳이 이 학교들이었고, 당시 신자들의 의식이 일반 국민들보다 앞섰기 때문에 정세를 볼 때 만세운동을 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앞섰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따라서 구암교회는 구 예배당 전체를 군산3·1독립만세운동기념관으로 꾸며서 군산지역의 3·1정신을 잊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군산시가 많은 예산을 드려서 기념관으로 꾸몄지만, 교회는 사실상 건물과 토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었다.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서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쉼과 함께 기념관을 관람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암교회 현재 예배당 좌측에는 교회가 세운 군산3·1독립운동기념비와 호남선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하지만 현재는 복원된 영명학교에 기념관이 마련되어 찾는 이들로 하여금 구암교회와 함께 3.1만세운동의 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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