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주께서 바라는 한 가지’
애즈베리 부흥 8개월이 지나고
by J. T. Reeves
2023-10-23
2023년 봄, 리브스(J. T. Reeves)는 휘튼 칼리지 4학년이 되었다. 그와 친구들은 애즈베리 대학교 캠퍼스에서 일어나는 영적 각성 소식에 차를 몰고 그곳으로 갔다. 8개월 후, TGC는 리브스에게 그때의 경험이 그와 동료 학생들의 삶에 어떤 지속적인 영향이 미쳤는지를 물었다. 작년부터 나는 이 모든 것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관해서 자주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말로 정의하기에는 참으로 답답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에즈베리의 그 부어 주심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단지 이 글을 통해 내게 부어 주신 그 은혜를 당신이 상상하길 바랄 뿐이다. 세속화의 습격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린 세속주의의 폭풍 속에서 자랐다고 상상해 보라.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믿기에 당신은 너무 현명하거나 또는 너무 냉소적이다. 사춘기가 오기 전, 만연한 개인주의는 당신을 서커스 동물처럼 강제로 우리에 가두고 외롭지 않은 척하라며 아이폰을 건넨다. 당신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그래서 때로는 외롭지 않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효과가 없을 때, 불안감이 커지고 더 많은 벽을 쌓게 된다. 달리 말해서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수준의 만족함에 참석하라는 도전이나 초대를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타인에게 압력을 가하지 말라는 포스트모던적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어려운 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당신의 삶은 오로지 가상 세계에서 이뤄진다. 엔터테인먼트는 삶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말 그대로 신이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회사의 알고리즘이 당신의 관심(숭배 대상)을 독점한다.때로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삶의 속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는 마치 움직이는 스포츠카에서 뛰어내려 안전하게 착지하겠다는 것과 같다.Z세대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인”은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그 어떤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신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최선을 다하지만 솔직히 “그런 것” 중 어느 것도 당신에게 그렇게 끔찍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불가피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당신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다. 그런데 중에 예기치 않은 입소문 하나가 들린다. 켄터키 주 한가운데에 있는 한 대학에서 뜨거운 예배 모임이 있다는 말이었다.처음에는 절대 갈 수 없다고 속으로 말하지만, 어느날 친구가 그런다. “지금 너한테 진짜로 중요한 일이 있어? 아니잖아?” 친구의 말은 상처를 준다.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당신은 30분 후에 짐을 싸서 자동차의 시동을 건다. 그리고 앞으로 7시간 운전을 누가 하고 아는 사람 누구 집에서 어떻게 자는지 등등을 의논한다. 거기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게 이상하기만 하다. 당신은 당연히 회의를 느낀다. 왜 다들 “여러분 모두 다(y’all)”라고 말하지? 거기서 만난 광경은 틱톡에 나온 것만큼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가 당신을 붙잡아 떠나지 못하게 한다….사람에 따라서 몇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또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당신의 경우는 몇 주가 걸린다. 캠퍼스로 돌아가서 몇 주에 걸친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수년 동안 갇혀 있던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조금 더 선명해지며, 당신과 친구들은 왜 지금까지 그분의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의아해하며 서로를 바라본다. 아니,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뿐. 영광을 목격함당신은 기적을 믿지 않았지만, 친구 몇몇이 의학적 설명으로 불가능한 일을 경험한다. 불행하게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은 성경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제는 불가능한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 외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막 11:23).당신이 원하는 것은 예배뿐이다. 더 이상 아닌 척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느새 개인주의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당신은 마음이 녹았고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고백을 쏟아낸다(약 5:16).당신과 당신 친구의 친구들이 매일 서로에게 나사렛 예수를 따르도록 도전을 (아니, 초대를) 할 때 불안이 금세 사라질 것이다. 밤새도록 기도하는 일(눅 6:12), 자발적인 예배(시 27:4), 그리고 눈물로 중보하는 일(빌 3:18)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닌 것 같다.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모든 “재미있는” 것에 대한 당신의 식욕은 언젠가부터 사라졌고, 공부방에 들어간 당신의 눈앞에 죄책감을 가지고 당신을 바라보는 친구가 있다. “정말 끔찍해.” 그녀가 말한다. “뭐가?”하고 당신이 묻는다. “할 일이 너무 많아. 하지만 도무지 성경 읽기를 멈출 수가 없어!” 그 말에 당신은 그만 웃음을 터뜨린다. 실상은 당신도 출애굽기 27-30장을 마저 다 읽고 싶어서 공부방에 들어온 거니까. 잠시 중단.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당신은 출애굽기 27-30장을 읽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당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분이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는 빠르게 움직이는 당신 삶의 안개 속으로 들어가서 당신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그의 말에 매료되었다. 당신은 애초게 그가 더 나은 삶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경험할 시간이나 관심을 결코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달라진 상상나는 다양한 캠퍼스에서 다양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2023년 봄 성령님과의 만남은 매우 달랐지만, 우리 대부분은 다들 비슷한 말을 했다. 애즈베리의 부어주심은 독특했다. 그것은 대규모 개종이나 대규모 회개, 대규모 선교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감미로운 노래처럼 보였다. 그건 예배 받아 합당한 분에게 드리는 우리의 관심과 예배를 근본적으로 재고하라는 초대였다.비명을 질러대는 알고리즘의 흐름 위에서, 질투하는 하나님이 속삭였다. 나는 네가 내게 주려고 꿈꾸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네게서 요구할 것이다. 그래야만 나는 네가 꿈꾸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네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내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가?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내 모든 상상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그 일을 하실 거라고 믿으며 우리는 살고 있다. 애즈베리 부흥 관련 기사 보기• 애즈베리 부흥 앞에서 진짜 던져야 할 질문• 평범하고도 특별했던 하루•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다원제: ‘All You Want to Do Is Worship’: A Student Reflects on 8 Months After Asbu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이스라엘 상황에 관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by Paul Carter
2023-10-21
요즘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스라엘의 위기에 관해 대화가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그에 관한 목회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 유용하겠다고 생각했다.당신은 아마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하마스의 이런 끔찍한 공격을 단호하게 규탄한다. 여성, 어린이, 노인을 살해하는 것은 지극히 야만적이다. 그리고 나는 적으로부터 국민과 영토를 방어할 책임이 있는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권리를 지지한다. 여기에 더해서 추가 의견을 제시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더해서 나는 이스라엘에게 전쟁 규칙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국제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가자 지구의 민간인 사상자의 최소화를 위해서 모든 합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추가 의견을 제시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팔레스타인인이 하마스와 동조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마스는 종종 무고한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는 억압적인 테러 국가이다. 하마스에 반대한다고 해서 팔레스타인인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다. 우리는 그들과 여전히 특별한 연대를 나누고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추가 설명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면 좋을 것이다.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특별한 중심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는 새 언약 공동체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함께 구성된다. 로마서 9장 속 사도 바울의 분명한 가르침처럼, 그 누구도 단지 아브라함과 유전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근거만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나는 유대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인 믿음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으며 또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순간 분명하게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 설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서 또 모든 민족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과 아랍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크게 부어지도록 기도하자. 원제: How to Speak to Friends and Loved Ones About the Situation In Israe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어린이 질문: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여기 함...
by Brandon D. Smith
2023-10-20
어린이 질문(Kids Ask): 목사, 성경 교사 및 신학자가 성경에 관한 어린이들의 질문에 답하다 질문이 많은 어린이는 때때로 하나님에 관해서 중요한 질문을 한다. 최근에 나온 질문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모든 곳에 동시에 계실 수 있지요?”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면, 그럼 지금 제 코와 입 안에도 계시나요? 많은 사람과 동시에 함께 계시는 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러기에는 세상에 사람들이 무척 많은데요!”어떻게 답변하면 좋을까?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우리에게는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누구나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한다. 천둥 번개로 무섭거나 멀리 이사 간 친구로 슬퍼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돌봐주길 원한다. 이건 좋은 바램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며, 누구보다 우리를 잘 돌봐주실 능력이 있으시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 계시며 그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또 그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에 계신 분이 동시에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을까?오랜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늘로 가실 것이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성인이었지만, 예수님이 함께 있지 않을 때 만날 어려운 일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걱정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떠날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슬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6:6). 그들은 예수님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돌봐주시며 심지어 하늘에 올라가시고도 그들 가까이에 계실 것을 확신하길 원했다.예수님은 제자들이 걱정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돕는 자” 곧 예수님을 돕는 이를 그들에게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7절).예수님은 누구인가? 돕는 자가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다. 두 명의 예수님이 아니라 한 명의 예수님이다. 그 한 명이 하나님이면서 또 사람이다. 어떻게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게 들리겠지만,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성경은 하나님은 세 가지 형태로, 즉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예수라고 불림), 그리고 하나님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세 분의 하나님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는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하신다. 이것은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을 수 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기도 하기에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완벽한 삶을 살고 완벽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이 큰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넘치시는예수님은 하나님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크고 강력하다고 말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을 한곳에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을 강아지처럼 줄에 묶어둘 수 없다. 하나님을 물고기처럼 어항에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을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에게 하듯 매트에 누르고 못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큰 바다조차도 하나님을 가두지 못한다!하나님은 너무나 강력하시기에 어디서든 언제든 원하는 곳에 계실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있었던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분은 불타는 덤불에서 모세를 만났다. 그분은 또한 모세와 산에서 만났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그의 백성을 광야에서 길고 긴 유랑 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분은 심지어 그들과 성전(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러 오던 건물)에서도 함께 계신다.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 무엇도 그를 억제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우주 전체를 통틀어서도 찾을 수 없다. 그분은 너무나 강력해서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다.돕는 자를 보내주시기에 충분할 정도로 친절하신예수님은 인간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인간이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한 완벽한 인간이다.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완벽한 속죄의 죽음을 치르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죄와 사망을 이기기 위해 무덤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성경은 말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주의 왕으로서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제 우리로부터 멀리 떠난 걸까? 아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은 항상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바로 하나님 성령이 바로 예수님이 약속한 돕는 자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좋은 소식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여전히 지구에 계시면서 우리가 아프거나 슬플 때 곁에 오시길 바란다. 우리 집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얘기하기를 원한다. 그게 바로 제자들이 바랬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가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게 그들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요 16:7).왜냐하면 예수님이 지구에 계실 때는 한 번에 단지 몇몇 사람들하고만 가깝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의 영을 보내준 뒤로,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과 가까이 계신다. 성령님이 오셨기에, 예수님은 이제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그들의 영을 살려서 예수님을 믿도록 돕는다(8-11절). 그리고 성령님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지까지도 알 수 있다(13-15절).성경은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한다고 말한다(롬 8:26-27).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또 다른 예수님의 제자인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님이 부활한 직후에 예수님을 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그녀는 무척 행복했고 그를 감싸 안아서 다시는 떠나지 못 하게 하려고 했다.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을 그녀 곁에 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마리아 막달라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대신에 예수님은 앞으로 그가 전보다 더 그녀와 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와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요 20:17).예수님은 돕는 자를 보내셨기에 하나님은 이제 항상 그의 백성과 함께하신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이 바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너무 멀리 있어서 당신을 못 보거나 기도를 듣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당신은 언제나 예수님께 대화를 요청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돕는 자로 보내셨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수님은 재림하는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요 17:24; 마 28:20).원제: Kids Ask: How Can Jesus Be in Heaven and with 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은 아말렉의 전술을 심판하신다
by Peter J. Leithart
2023-10-19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은 고대 암흑기의 전쟁을 연상케 했다. 약탈자는 영토나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인질을 잡기 위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그들은 젊은 여성들을 살해했고, 노인들을 거리에서 납치했으며, 심지어 자녀들과 함께 있는 가족을 살해하고 불태웠다.하마스가 쓴 전술은 성경에 나오는 아말렉의 전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여호와의 저주모세가 아론과 훌의 손을 잡고 언덕에 앉아 있는 동안 여호수아는 아래 계곡에서 적을 물리쳤다. 모든 일이 끝나고 여호와가 맹세했다. “‘주님의 깃발을 높이 들어라. 주님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실 것이다’ 하고 외쳤다”(16절). 여호와는 아말렉에 대한 기억이 하늘 아래에서 아예 지워질 때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했다(14절).여호와는 약속을 지키신다. 그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삼상 15:1-3). 사울은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었고 엄청난 약탈을 일삼지는 않았다. 사무엘은 길갈에서 아각을 쳐부수지만, 그럼에도 아말렉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다윗이 블레셋에서 유배 생활을 마무리할 무렵,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에 있는 다윗의 진영을 공격하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납치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다윗이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아말렉의 약탈자들을 쫓아내고 그의 아내와 자녀와 재산을 되찾은 것이었다(30:1-20).400명이 다윗의 손을 피해서 탈출했고(30:17), 아말렉은 또다시 살아남아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는 자신의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악당은 사울 왕과 싸웠던 왕의 후손인 “아각 사람” 하만이다(에 3:1; 8:3). 에스더는 교묘하게 하만을 함정에 빠뜨렸고, 주님(이름은 밝혀지지 않음)이 모든 사건을 뒤에서 조율했고, 그 결과 하만이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든 교수대에서 그 자신이 죽게 된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말렉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다. 여호와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잊힌 민족이 된 아말렉은 이제 단지 성경에서만 기억될 뿐이다.고대 세계에는 사악한 민족이 적지 않게 있었다. 아시리아 민족의 잔인성은 악명 높았고, 가나안 족속들은 여호와의 진멸 명령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도 여호와는 왜 하필이면 아말렉을 특별히 적대하여 지목했을까?전쟁 중인 아말렉아말렉은 약자를 공격하는 데에 특화된 민족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아말렉의 정체를 상기시켰다. “그들은 당신들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에, 길에서 당신들을 만나, 당신들 뒤에 처진 사람들을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신 25:18). 다윗과 그의 용사들이 사울과 싸우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고 있을 때 아말렉 침략자들이 시글락을 공격했는데, 거기에는 오로지 여자들과 아이들만 있었다(삼상 30:2-3). 하만은 포로로 잡혀간 유대 민족을 멸절하고자 아하수에로 제국의 힘을 모을 계획을 세웠다.아말렉 민족은 단지 잔인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정반대, 즉 네거티브 필름(photonegative)과 같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고아, 과부, 나그네, 기타 취약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거듭 지시했다(출 22:22; 신 10:18; 14:29; 24:19-21; 26:12-13).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이스라엘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않는 자”(신 27:19)를 향한 저주를 선언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선지자들은 약한 자들을 학대하는 이스라엘과 지도자들을 비난했다(사 1:17; 렘 7:6; 22:3; 겔 16:49; 슥 7:10).아말렉 민족에 의한 여성과 어린이의 “민간인 피해”는 우연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선택된 성읍에서 시행했던 남자, 여자, 어린이, 동물을 죽이는 문제에 있어서의 금지령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다. 모든 남자가 사라진 뒤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여리고와 아이, 호르마 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견고한 성읍들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그 모두를 연기와 불로 여호와께 바쳤다. 그에 반해서 아말렉 사람들은 특히 여성과 어린이, 약한 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아말렉은 반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인류를 향한 여호와의 목적에 정반대되는 생활 방식과 가치관, 군사 전술을 가진 민족이었다. 아말렉의 메아리하마스는 아말렉이 아니다. 말하자면 하마스가 지금 여호와의 금지와 저주 아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똑같은 것도 아니다.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이 그리스도인이며, 많은 무슬림 팔레스타인은 하마스와 폭력에 반대한다. 하마스를 아말렉과 비교하는 게 대량 학살의 정당화 또는 암시가 아니다.그럼에도 10월 7일에 하마스는 아말렉의 전술을 사용했다. 하마스가 아말렉처럼 싸우는 유일한 테러 집단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테러 단체는 여성과 어린이를 방패로 삼았다. 인도네시아 이슬람주의자들은 여성을 자살폭탄 테러범으로 활용했고, 보코하람은 어린이를 “인간 폭탄”으로 악용했으며, 아프가니스탄 테러리스트들은 산부인과 병동에서 임산부와 아기를 살해했다. 하마스에 대응하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방식을 모방할 위험이 있다.아말렉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우주의 주인이시다. 여전히 폭력적인 사람들, 특히 무력한 사람들을 죽이는 악한 이들을 파괴하기로 결심하신 분이다. 아말렉 민족뿐 아니라 피를 흘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주님은 의인을 가려 내시고, 악인과 폭력배를 진심으로 미워하신다”(시 11:5).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여섯 가지 것 중에는 다음이 있다. “교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와 무죄한 사람을 피 흘리게 하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꾸미는 마음과 악한 일을 저지르려고 치닫는 발”(잠 6:17-18).정의를 위한 기도예수님은 쇠지팡이를 손에 들고 다스리시며 세상 나라들을 질그릇 같이 깨뜨린다(계 2:27). 그는 하마스의 아말렉 사람들뿐 아니라 폭력을 사랑하고 자비를 미워하는 모든 원수를 그의 발 아래로 끌어들일 것이다. 때때로 예수님은 폭력적인 사람들을 개종시킴으로써 패배시킨다. 또 어떤 때는 아예 그들을 멸망시키심으로써 패배를 안긴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그에게 그렇게 하시도록 요청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정의와 악인에 대한 심판을 위한 기도로 가득한 기도서이자 찬송가인 시편이 있다. 지금은 저주하는 시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아말렉인이 하늘 아래에서 제거되어 정의로운 세상이 되도록 해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할 참으로 좋은 때이다. 원제: Hamas Is Borrowing Tactics from the Amalekit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호남 선교, 태동하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군산구암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10-18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군산에 선교거점이 마련된 것은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유대모(A. D. Drew)의 사역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그는 1894년 호남지역 선교를 위한 여행을 하면서 육로여행의 어려움을 경험했다. 이듬해인 1895년 3월 군산 선교거점을 확보하는 일에 책임을 맡은 의료선교사 유대모는 같은 남장로교회 동료 선교사이자 훗날 호남선교의 아버지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는 전위렴(W. M. Junkin) 목사와 함께 인천을 떠나서 배로 군산에 도착함으로써 군산 선교가 시작되었다.이 두 선교사는 약 1개월 동안 군산을 중심으로 환자들을 치료해 주면서 주민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인심을 얻게 됨으로써 자신감을 얻은 그들은 군산항 가까운 곳에 집 두 채를 마련해서 선교를 위한 거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완전히 군산으로 이사를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듬해인 1896년 2월이었고, 같은 해 4월 6일에 김봉래, 송영도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군산 선교의 시작이자 호남지역에 선교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 의사인 유대모는 자기 집 사랑방에 진료소를 개설하고 치료를 했다. 전위렴은 그곳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중심으로 전도함으로 협력 선교의 개가를 올릴 수 있었다. 그해 7월 20일 김봉래, 송영도 두 사람이 전위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고, 호남선교의 효시가 되었다.하지만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군산항 일원에서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인들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조선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교사들과의 접촉이 어려워졌다. 따라서 선교부는 마련했던 처소를 처분하고, 그해 12월 21일 외각의 궁말(구암리)로 옮기게 됐다. 본격적으로 식민지 정복을 위한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 옴으로써 군산의 분위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군산의 인구 분포를 보면 한국인이 780명에 일본인 거주자가 422명이나 되었다는 통계는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최초 군산의 공동체는 선교사들을 따라서 구암리에 가서 예배를 하게 되었다. 또한 일부는 후에 새롭게 시작하는 공동체에 합류하여 군산 개복동교회를 형성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렇게 유대모와 전위렴 선교사가 인천에서 뱃길로 군산을 찾아와 거점을 확보한 것이 사실상 호남선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그 후 1898년에 해리슨(W. B. Harrison, 하위렴) 목사, 1899년 봄 불(W. B. Bull, 부위렴) 목사, 데이비스(L. F. Davis) 양, 알비(L. Alby) 양 등이 도착함으로써 군산 선교에 활기가 돌게 되었다.1899년 5월 1일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일제의 강점은 가시화되었다. 군산 선교는 개항보다 일찍 시작되었지만, 개항과 함께 선교사들의 활동은 오히려 어려워지면서 현재의 구암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1899년 12월 21일 옮기게 되었다. 이때 군산항 주변에서 시작한 초기 공동체의 일부 신자들이 궁말로 옮겨온 선교사들을 따라왔고,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군산 선교의 역사를 이은 것이 현재의 구암교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00년 봄 구암교회는 95명의 세례교인을 가진 교회로 급성장했다. 전위렴 목사는 구암교회를 중심으로 선교를 하면서 40년간 군산과 호남지방의 선교의 선구자로서 사명을 다했다. 유대모 선교사는 의사로서 자원 전도자들을 동반하여 배를 타고 강변과 군산 앞바다의 섬들을 찾아다니면서 치료와 전도를 겸했다. 하지만 유대모는 과로로 건강이 악화하여 1901년에 귀국하였고,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구암교회는 미국 남장로교회가 호남지역 선교를 하면서 최초로 거점으로 확보했던 군산 선교부(군산교회로도 불렸음)의 역사를 잇는 사실상의 호남의 모교회이다. 하지만 초기 군산지역의 선교 역사는 사료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있고, 확실한 사료로서의 신빙성도 확인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있는 것 같다.그러한 한계를 전제로 구암교회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우선 구암교회 스스로가 설립기념일을 1893년 1월 7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군산 선교의 시작을 1896년으로 본다는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없지 않다. 다만 1896년이라는 시점은 그 어간에 있었던 조선의 정세, 즉 1894년에 있었던 동학혁명으로 인해서 선교사들이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정읍이나 김제를 중심으로 동학군이 일어났고, 그 여세는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이러한 여파로 군산지역에서 선교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일하던 선교사들이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일단 서울로 철수했다가 다시 내려와 거점 확보를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 1896년인데, 이것을 군산 선교의 시작으로 설명하는 자료들이 많다고 본다.이때 군산에 내려와서 군산 선교거점을 만들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은 전킨(W. M. Junkin), 드류(A.D. Drew)와 한국인 조사 장인택 등이었다. 이들이 군산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하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군산 선교부의 시작이며, 이것이 후에 현 구암교회의 역사로 이어지게 된다. 그중에 조선인 장인택은 남장로교회가 조선에 도착하면서 구성하게 된 장로교 정치를 사용하는 선교회연합공의회(Council of Mission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에 유일한 조선인 회원이었다. 따라서 장인택 조사가 군산 선교에서 수행한 역할이란 지대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구암교회의 시작은 곧 그와 함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92년 11월 3일에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입국하여 선교지 확보를 위한 호남지역을 여행하게 되었다. 당시는 내륙교통이 극히 빈약했던 상태라 선교사들은 제물포에서 배를 이용해서 군산에 도착했다. 이는 당시에 가장 효과적인 접근방법이었다. 이렇게 해서 도착한 선교사들이 군산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1893년 1월 27일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다. 그런데 왜 구암교회가 이날을 구암교회의 설립기념일로 지키는가? 비록 동학군 때문에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역사가 단절된 것이 사실이지만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군산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을 기점으로 한 역사를 잇겠다는 의지가 아닐까.그 후 1899년 군산이 개항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왔고, 그로 인해서 선교사들의 활동이 지장을 받게 되자 군산 선교부를 궁말(현 구암교회가 있는 옛 지명)로 옮겨왔다. 따라서 군산항 근처에 있던 군산 선교부(군산교회) 신자들은 궁말로 예배를 드리러 와야 했다. 반면에 궁말로 따라오지 못한 신자들이 중심이 돼서 새롭게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개복교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군산지역의 선교 역사에 있어서 군산 선교부의 역사를 계승하는 또 다른 교회가 있는 셈이다. 동학이 잠잠해진 다음인 1896년경부터 남장로교회의 초기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온 데이비스(Linnie Fulkerson Davis)라고 하는 선교사가 궁말을 중심으로 사역하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여자의 몸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외진 곳이 궁말에 자리를 잡고 지역민들과 접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아마 1896년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군산으로 내려올 때 같이 내려와서 데이비스는 궁말에 자리 잡고 나름의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던 차에 군산항(시내)에 있던 선교부가 옮겨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때 군산의 선교부와 궁말에서 활동하고 있던 데이비스의 공동체는 정식으로 합병되었고, 군산교회로 불렸던 군산 선교부는 궁말로 옮겨온 것이다. 자연히 군산 시내에 있던 군산교회는 구암교회로 역사를 잇게 되었기 때문에 그 시작을 1896년이 아닌 선교사들이 처음 도착해서 예배를 드린 1893년 1월 27일로 기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구암교회 예배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본래 작은 섬이나 다름이 없었다. 섬과 육지 사이가 농지로 개간되고 육로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작은 산봉우리 하나를 뒤에 두고 그 기슭에 집들이 몇 채 있었던 곳인데,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선교사들이 주택을 지었고, 그 아래로 진료소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처소, 그리고 맨 아래쪽으로 학교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작은 언덕과 같은 동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군산 선교부가 자리를 차지했다.지금 그곳엔 복원된 영명학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선교사들 주택이나 학교 건물은 이미 사라졌다. 다만 해방 이후에 벽돌로 지었던 예배당 건물은 군산3·1운동기념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영명학교가 복원된 후 이 학교로 기념관이 옮겨지면서 구 예배당은 더 이상 그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곳에 선교사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당시의 건물은 없다.구암교회는 2003년에 호남선교100주년기념 예배당을 완공했다. 멀리서 보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건물이긴 하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서 전면에 대리석 기둥이 중압감을 줄 만큼 웅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석조기둥이 웅장한 만큼 건물의 균형감이 받쳐주어야 하는데, 뭔가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정면에서 바라보면 나름 웅장함과 함께 설계자가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은 느낌은 든다.이 예배당을 보면서 제일 먼저 느끼는 또 하나는 예배당 전면에 대리석 원주 기둥이 여덟 개가 강력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기둥들은 그냥 건물 구조상 필요한 것이 아니고 설계단계에서부터 일부러 만든 기둥이다. 그 의미를 알려면 기둥 밑 부분을 보면 된다. 기둥 받침 부분에는 각각 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킨, 레이놀즈, 테이트, 레이번(전킨 부인), 볼링(레이놀즈 부인), 데이비스, 매티 테이트(테이트의 여동생) 등 7명의 선교사와 한 사람의 한국인 조사 장인택을 기념하기 위한 기둥을 세운 것이다. 이들은 모두 초기 군산 선교를 이끌었던 주역들이다. 교회가 예배당을 지으면서 예산상에 어려움이 동반되는 것인데, 어려운 결정을 하여 이러한 기념물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뜻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을 짓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에서 이러한 예산을 집행하는 것은 특별한 의지가 없이는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념물을 만들어서 후세에 전하기를 기뻐한 구암교회 신자들의 의식 또한 높이 사야 할 것이다.이와 함께 이 예배당을 찾았을 때 만나게 되는 건물 양쪽 끝에 타워가 특별하다. 이 또한 의도적인 설계에 따른 건축물이다. 단순히 계단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의미를 담아 설계했고,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 명칭은 군산 3·1운동과 선교를 기념하는 타워이다. 즉 하나는 군산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군산 선교를 기념하는 타워로 만들어진 것이다. 멀리서 보면 건물 양쪽에 각기 조금은 다른 모양을 한 타워가 보인다. 맨 위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것이 같으나 바로 밑 첨탑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그 아래 공간은 한쪽은 사료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정면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타워에 올라가면 사료들을 만날 수 있다. 반대편에 있는 타워는 특정 공간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사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두 타워는 조금 다른 모양을 한 채 군산 근대사의 두 사건, 즉 개항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과 그 사역을, 또 하나는 민족의 아픔을 높이 외쳤던 군산의 3·1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세웠다.구암교회를 찾아가면 언덕에 우뚝 솟은 예배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언덕을 오르자면 예배당보다 먼저 닿게 되는 것은 구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군산 3·1 만세운동 기념관으로 사용하다가 영명학교를 복원한 다음은 그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면 군산3.1만세운동기념관을 왜 여기에 두었을까? 구암교회는 3·1운동 당시 군산 만세운동의 발상지이며,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이 대부분 구암교회의 신자, 혹은 선교부가 운영하는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선생과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군산의 3·1 만세운동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군산의 만세운동은 서울의 만세운동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는데, 군산의 경우는 3·5만세운동, 즉 3월 5일에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군산에서 시작된 호남지역의 만세운동은 그 여파가 호남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군산의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구암교회와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들이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전개할 때 자연스럽게 군산 시민들이 합세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군산에서 기미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당시 영명학교 졸업생 가운데 김병수라는 사람이 졸업 후 서울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다녔는데, 그가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만세운동의 기획을 전달받았고, 그와 함께 독립선언문 200장을 받아 1919년 2월 26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의 은사인 박연세 선생의 집에서 서울에서 계획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알리고 군산에서의 거사를 모의하였다.군산의 만세운동은 본래 서래 장날인 3월 6일에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그 비밀이 새어 나갔다. 멜본딘여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장과 태극기를 만들어서 학생들이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3월 5일 새벽에 일본 경찰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주동자인 박연세, 김수영, 이두열 등을 체포했다. 거사는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거사를 함께 준비하고 있었던 김윤실 선생이 학생 간부들과 회의를 갖고 당일(3월 5일)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이것은 일본 경찰들이 방심한 틈을 이용해서 허를 찌르는 계획이었다.이렇게 영명학교 학생들과 멜본딘여학교 학생들과 선생들이 함께 나섰다. 그리고 구암교회의 신자들, 당시 교회 옆에 있던 예수병원 직원들, 그리고 일부 군산 시민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이 행진하면서 만세를 외쳤다. 이 행렬은 군산경찰서 앞에 이르렀고, 그때에는 이미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경찰서 앞에서 새벽에 끌려간 박 선생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구암교회와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가 중심이 되어서 전개한 만세운동은 군산에서 멈추지 않고 전주와 익산으로 확산하였으며, 이후 호남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군산지역의 만세운동이 구암교회와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가 중심이 된 것은 이 지역의 유일한 근대교육을 한 곳이 이 학교들이었고, 당시 신자들의 의식이 일반 국민들보다 앞섰기 때문에 정세를 볼 때 만세운동을 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앞섰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따라서 구암교회는 구 예배당 전체를 군산3·1독립만세운동기념관으로 꾸며서 군산지역의 3·1정신을 잊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군산시가 많은 예산을 드려서 기념관으로 꾸몄지만, 교회는 사실상 건물과 토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었다.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서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쉼과 함께 기념관을 관람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암교회 현재 예배당 좌측에는 교회가 세운 군산3·1독립운동기념비와 호남선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하지만 현재는 복원된 영명학교에 기념관이 마련되어 찾는 이들로 하여금 구암교회와 함께 3.1만세운동의 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세속적 신비주의인가, 그리스도 중심 영성인가
by 이춘성
2023-10-17
안정된 직장, 자랑하고 싶은 남편, 누구나 살고 싶은 뉴욕 맨해튼의 고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던 한 전문직 여성이 어느 날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이혼한 후에 1년간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여자는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에 가서 신나게 먹고, 인도에 가서 뜨겁게 기도하고, 발리에 가서는 열렬히 사랑한 후에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2010년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줄거리이다. 사실 이 영화의 원작은 미국의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자전적 이야기를 쓴 동명 에세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이다. 이 책에는 “난 내 안에 있는 신을 존중한다.” “‘나’만을 위한 식사를 즐긴다.” “내 안의 에너지가 응답한다.” “어느 목요일 오후 신과 하나가 되다.” 이런 신비한 영적 체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모든 신비적 체험과 일상의 중심에는 ‘나’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위와 같이 ‘나’를 찾기 위한 여행과 행복의 중심에 ‘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전부터 있었던 세속적 신비주의라는 영적 흐름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1976년 첫 출간된 후 3,500만 부가 넘게 팔린 웨인 다이어의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세속적 신비주의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 책에서 웨인 다이어는 세상에서 살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외부의 도움이 아닌 내면의 힘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내면의 힘이 영적인 힘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영적인 힘을 끌어내는 다섯 단계의 단순한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힘든 일과 마주치면 먼저 심호흡부터 하라.둘째, ‘나는 괜찮다’라고 선언하라.셋째, 기도하거나 간절히 원하라.넷째, 믿고 맡겨라.다섯째, 감사하라.웨인 다이어가 제안한 이 다섯 단계 명상법은 일종의 명상 매뉴얼이 되어, 지금도 각종 명상의 핵심 요소이다. 현재 이와 유사한 명상 방법은 여러 형태로 발전되어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구글과 아마존 등과 같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은 IT 업계에서는 직원 복지 차원에서 회사에서 명상 프로그램을 제공한 지 오래다. 번아웃 세대를 쓴 곽연선은 특히 MZ세대들이 이 명상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직장이나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있다가 말한다. 이제 세속적 신비주의의 명상은 현대인의 일상 안으로 들어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현상은 사람들이 세속적 신비주의의 명상과 기성 종교를 병행하면서 그 사이의 충돌이나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위의 다섯 단계의 명상법에서 주어만 바꾸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유사하기 때문이다.‘나’ 중심 영성첫째, 힘든 일과 마주치면 먼저 심호흡부터 해라.둘째, 하나님께 ‘나는 괜찮다’라고 선언하라.셋째,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간절히 원하라.넷째, 하나님께 믿고 맡겨라.다섯째, 하나님께 감사하라. 실제로 밑줄 친 부분에 다른 신의 이름이나 사람의 이름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다. 웨인 다이어의 명상법은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대중적인 성격이 있다. 문제는 웨인 다이어의 세속적 신비주의가 가르치는 영성은 꼭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된다는 메시지를 그가 제시하는 방식의 명상이나 영성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결론적으로 세속적 신비주의는 종교와 유사한 신비한 체험을 경험하게 하지만, 이러한 체험을 주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단지 내가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가르치고 있다. 내가 원하는 영적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그 영적 경험을 위해 내가 믿는 대상을 바꿀 수도 있으며,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세속적 신비주의 논리적 결론이다. 그러므로 신비적 경험의 주체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나’라는 주관적 자아이다. ‘나’는 행복의 기준이며, 의미의 판단자이고, 모든 윤리의 창조자이다.‘그리스도’ 중심 영성 사도 바울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쉬지 말고 기도하라.범사에 감사하라. 이 내용은 겉으로 보기에는 웨인 다이어가 가르친 세속적 신비주의 영성과 유사하게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기쁨과 기도, 감사는 주관적 행복과 의미를 찾기 위한 명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영적 활동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살전 5:18)이라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바울은 극도로 가난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들의 행복과 실용적 유익을 얻기 위한 기쁨, 기도, 감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기쁨, 기도, 감사를 명령하였다. 기독교의 영성은 ‘나’와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며, 그리스도로 감사하는 ‘그리스도 중심’ 영성인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기쁨과 감사를 찾는 여행이 아니다. 역으로 이미 받은 기쁨, 감사, 기도의 근거인 ‘그리스도’를 인생의 중심에 두고 사는 순종의 영성이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정직하게 묻고 싶다. 지금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지배하고 있는 영성은 과연 ‘그리스도 중심 영성’인가?
흘러가는 시간, 흘러오는 시간
by 전재훈
2023-10-16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부자의 아들이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져 간다는 내용이지요. 영화로도 만들어져 꽤 인기를 얻었던 작품입니다. 시간이 거꾸로 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한 번쯤 상상해 볼 만한 것은 되나 봅니다.시간에 대해 사람들은 진리처럼 믿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는 것이지요. 빅뱅에 의해서 지구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의 인류를 만들어 내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어 갑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지나간 시간이 쌓여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지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간관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고 그들의 무한 번식으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는 에덴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지요.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고 그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인간들이 지은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행동에 의해 나타난 결과물이지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대학도 가고 대학원도 가고 자기 분야에서 맡겨진 소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짱이처럼 놀기만 한 사람들은 그 결과로 가난의 수렁에 빠지거나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거나 화를 주시는 것도 사람들이 과거에 살아온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정직하게 행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 망령되이 행했던 사람은 저주를 받아 질병에 걸리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의 행동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에 미래의 나는 현재 어떻게 사느냐가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은 사람은 복 받을 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거나 하는 모든 일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지요.이런 시간관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사는 성공한 사람들의 과거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인생관이나 습관, 행동, 철학 등을 연구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공통적인 모습이 있어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책들이 만들어 지지요. 인터넷에 ‘십계명’을 쳐보면 온갖 종류의 십계명들이 검색됩니다. 건강한 습관 십계명, 웃음 십계명, 부부 십계명 등등 다양한 버전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모두 이런 십계명을 지키며 살다 보면 보다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도 동일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쓰임 받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신앙으로 아이들을 길렀고, 그 사람들은 정직했으며, 그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한다면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언제든지 쓰실 수 있게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운영합니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사는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고민하며 삽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복이 내 삶에 임하거나 내 자녀에게로 흘러갈 거라고 믿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포기하지 않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어머니가 기도 열심히 하는 권사님이라면 그가 성공한 이유에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온다고 말이지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현재의 내 모습은 과거에 내가 한 어떤 행동의 결과라고 생각하기보다 미래의 어떤 내가 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과거에 사업을 한번 실패했던 것은 그 전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오늘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목사님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계십니다. 모세가 80세 때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이유에 대해 모세가 애굽에서 40년을 살고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왕자로 40년을 살게 하고 광야에서 양을 치며 40년을 살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를 들면 베드로가 훌륭한 삶을 살아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삶을 살 것이라서 제자가 됐다고 하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으신 이유가 베드로의 과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미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목사님들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내가 목사가 되기 위해 이런저런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기보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일을 하는 목사로 세우시기 위해 이런저런 삶을 살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내 현재가 과거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가 현재의 삶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지금 내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것은 내가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해 예비하신 연단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듣기에 따라선 두 가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로 성공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과거가 자기 의나 자기 공로가 됩니다. 혹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과거는 자기를 정죄하는 근거가 되지요. 자기 의나 자기 정죄는 둘 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악들입니다. 그 두 가지 경우 모두 다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과거의 삶이 오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어려움과 고난 앞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거나 자기 정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게 됩니다. 과거에 방황하며 헤맬 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느냐’고,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이냐’라고 원망하던 사람이 그 일로 인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때의 그 기도를 회개하고 도리어 그런 삶을 하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시는 것 같았지만 항상 내 곁에 계셨노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 하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일을 견딜 힘을 주시고 계셨노라고 고백하지요. 과거에 내가 행한 어떤 일로 인해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퇴색되거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해 과거의 어떤 일을 겪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오늘 이런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소망을 품게 됩니다. 보다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이 내 삶의 역사에 부분 개입하신 것인가 아니면 내 삶에 전적으로 개입하신 것인가 하는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이는 물론 내 삶의 선택의 책임이 내게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있는가 하는 문제도 만들어 내지요. 하나님이 내 삶에 전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이라면 내 선택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제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내일 제 딸이 학교에 가면 놀다가 손가락이 부러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까지만 알고 있다면 저는 제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온전한 지혜는 손가락이 다치는 일로 생겨나는 다음 일들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이 다치는 바람에 덤벙거리는 습관이 고쳐지고 조심성이 생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또는 그 손가락을 치료하러 병원에 갔다가 아이의 삶에 좋은 스승이 될 만한 의사를 만나게 될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면 저는 제 딸이 학교에 가는 것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제 딸아이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막는 것만이 개입이 아니지요. 그냥 보내는 것도 딸아이의 삶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딸아이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제 딸이 저에게 울면서 왜 자기가 학교에 가게 두었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아픔이 너무 커서 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원망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 그 일로 매사에 조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또 의사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알게 되면 제게 했던 원망을 감사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제 딸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다치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나 사랑해서 그냥 다치게 두었고 회복할 때까지 함께 아파해 주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병원 다녀준 것을 알게 된다면 제 딸아이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저렇게 될 수 있다’라고 하고,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렇게 되려고 이렇게 사는 것이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가르치는 사람과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이렇게 살게 하신다’고 선포하는 사람의 차이를 만들지요. 작은 생각의 차이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 둘 사이의 고백은 너무나 다르고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며 삶의 무게도 다르게 느낍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이 졸거나 주무시거나 방심하신 탓이 아닙니다. 그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온 인류가 알게 되고, 또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그 죄를 해결하게 하시는 것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도 알게 하지요. 수가성 여인이 잘못된 삶을 살아서 남편 다섯을 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시간에 물 뜨러 나와서 사마리아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만나게 하시려고, 또한 자신의 삶을 통해 그 메시아를 수가성에 알리는 선교사가 되게 하시려고 남편 다섯을 두게 하신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은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오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올 수 있는 개념입니다. 가수 김장훈이 다들 포기한 비행 청소년들을 상담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비행 청소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김장훈을 두고 하나님이 이 땅의 비행 청소년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아픈 과거를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는 잘못된 과거를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과거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소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여러분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흘러오고’ 있습니까?
이혼하겠다며 내세우는 다섯 가지 잘못된 이유
by Joe Carter
2023-10-14
Forbes Advisor가 결혼이 실패하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이혼했거나 이혼 과정에 있는 미국인 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조사에 따르면 이혼자 63퍼센트가 결혼 서약을 좀 더 잘 이해했더라면 이혼을 막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56퍼센트는 배우자의 도덕성과 가치관을 더 잘 이해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 거라고 말했다. 어떤 방법을 썼더라고 이혼을 막을 길은 없었다고 대답한 사람은 놀랍게도 불과 5퍼센트 미만이었다. 결혼의 신성함이 점점 더 위협받는 세상에서 이혼의 이유로 자주 언급되는 사항을 재평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기, 학대, 또는 외도와 같이 성경에서도 허락하는 이혼의 사유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설문 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헌신과 가치에 대한 더 나은 이해만으로도 얼마든지 더 유지될 수 있었을 관계도 퍽 많다. 다음은 결혼을 끝내는 합법적인 근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주 이혼의 이유로 인용되는 다섯 가지이다. 1. 사랑이 식었다: 감정적 오류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혼 사유 중 하나가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모두가 “사랑이 식었다”라는 생각이다. 문학, 영화,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은 현대의 사랑 개념은 낭만적이고 감정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 관점은 사랑을 주로 감정적 경험으로 오해하는 데 뿌리를 두며, 그 결과 성경이 말하는 헌신과 행동에 기반을 둔 사랑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사랑에 대해 가장 자주 사용되는 용어는 아가페인데, 이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전서 13:4-7에서 사랑을 오래 참고, 친절하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결혼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아가페의 사랑이다. 사랑에는 선택의 의미가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보다는 결정의 문제인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단순한 선택이란 의미는 아니다. 존 파이퍼의 말이다. “우리의 사랑이 단지 선택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아직 사랑이 갖춰야 할 모습을 제대로 드러낸 게 아니다.” 파이퍼의 지적대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라고 부르셨고, 그 부르심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의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물을 통해서만 우리는 결혼의 유대를 유지하는 바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2. 불일치: 완벽한 짝에 대한 신화현대 시대가 제공하는 가장 파괴적인 개념 중 하나가 ‘소울메이트’ 또는 ‘완벽한 짝’이라는 환상이다. 일치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일치하는 두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남자와 여자는 죄인이므로 다 각자의 몫에서 결함이 있고 부서진 상태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불완전성과 불일치는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이다. 우리는 소울메이트가 아닌 희생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희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모델이다. 결혼생활에서 부부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서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섬기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과 선호,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유익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상대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고난과 불편까지 기꺼이 감수하는 사랑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5:25은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수준의 희생적인 사랑은 불일치가 이혼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됨을 말한다. 도리어 불일치야말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고 또 해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직관에 반하는 현실이 알려주는 사실은 종종 필요한 희생을 치른 후에야 진정한 일치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일치란 갈등 없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건 발견하는 게 아니다. 도리어 당신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이뤄야 하는 목표이다. 바로 로마서 12:18에 나오는 바울의 이 권면을 따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결혼했다면 이 권고의 수행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 있으며 배우자와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즉 조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경제적 갈등: 일시적인 관점과 영원한 관점결혼생활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흔히 거론되는 게 재정의 어려움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임은 사실이지만, 이혼의 구실로 성급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는 이 문제를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초점을 전환하도록 돕는 기회로 보아야 한다. 금전의 어려움은 대부분 일시적이고 그 뿌리는 부패하기 쉬운 물질의 부에 초점을 맞추는 데에 있다. 예수님은 땅에 보물을 모으는 어리석은 짓에 대해서 친히 경고하셨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마 6:19). 결혼생활의 초점이 물질의 축적에 있어서는 안 되며, 사랑, 충실함, 영적 성숙과 같이 관계가 함양해야 할 영원한 가치에 맞춰져야 한다. 부부가 직면하는 재정적 어려움은 우선순위를 재평가하고 이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더욱 밀접하게 맞추는 기회를 제공한다. 재정의 어려움은 또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만족과 믿음을 키우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4:11-13에서 모든 상황에 풍부하든지 궁핍하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썼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에 뿌리를 둔 만족이다. 마찬가지로 재정적으로 어려운 부부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만족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이 충고를 하나 마나 한 순진한 소리라고 너무 성급하게 일축하지 말라. 우리 주변에는 재정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채택하고 현세적 관점을 영원한 관점으로 전환함으로써 결혼의 유대를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하는 방식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헤쳐 나간 수많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있다. 4. 개인적 행복: 나 중심의 접근 방식1970년대 이후로 개인의 행복과 자기실현 추구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가 미국 문화를 지배해 왔다. 이러한 관점은 개인의 행복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시사하는 미디어, 문학, 심지어 많은 세속 심리학 이론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가진 문제점은 더 큰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결혼생활에서 요구되는 상호의존성까지 적극적으로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성경은 삶과 관계에 대해서 자기중심적 접근 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서사를 제공한다. 빌립보서 2:3-4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상호 복종과 자기희생이 참된 번영의 비결인 결혼생활에서 이 원칙은 특히 더 잘 적용된다(엡 5:21).세상이 주는 행복은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느헤미야 8:10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이 기쁨은 일시적인 감정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데서 오는 깊고 지속적인 만족이다. 5. 지루함: 안주가 주는 위험결혼생활에서 느끼는 안주는 종종 서로를 향한 관심과 열정의 부족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건강한 결혼생활에 필수적인 친밀감과 신뢰의 유대를 점차 약화시킨다. 안주는 지속적인 양육과 소중히 여기며 의도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성경적인 결혼 모델과 정반대이다(엡 5:29).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에서 지루함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영적인 여정에 참여하는 부부는 평범한 일상을 초월하는 목적의식과 방향을 발견할 것이다. 영적 성장을 촉진하는 공동 활동에 참여하는 부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각각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서로를 향한 관심도 함께 커질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 새뮤얼 존슨의 말이다. “런던에 사는 게 지친 사람은 인생에도 지치게 된다. 왜냐하면 런던에는 삶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에도 마찬가지이다. 배우자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인물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과 점점 더 닮아간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그 사람에게서 지루함을 느끼겠는가?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각종 결점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단지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 중심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한 살아있는 은유 역할을 한다. 일시적인 만족과 피상적인 약속에 빠져 있는 세상에서 복음에 기반을 둔 결혼은 소망의 등불이다. 결혼은 단지 사회 계약이 아니라 신성한 계약이며, 무엇보다 그 계약에 가장 많이 투자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부부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그들은 감정적 거리, 재정적 스트레스, 불완전함 등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 공동 희생의 만족, 그리고 믿음으로 관계를 맺을 때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화를 발견한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부에게 복음은 더 나은 이야기를 제공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림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선택이다. 그 사랑이 기초가 될 때,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당신도 이해할 것이다. 가능한 모든 것 안에는 세상이라면 일찌기 포기했을 수도 있는 결혼의 갱신과 회복, 심지어 제2의 신혼까지도 포함된다. 세상 표준에 기초한 결혼생활의 활력에 대해서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결혼을 만든 분이 하나님이고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길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께 의지하고 성경에 설명된 원칙을 받아들이라. 그렇게만 한다면, 다시 뜨거워지는 사랑, 새롭게 구축되는 신뢰, 그리고 잃었다고 생각했던 깊은 친밀감까지 회복하는 게 가능하다. 아니,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당연하다. 이것이 복음 중심의 결혼에 대한 소망이자 약속이다. 원제: 5 Bad Reasons to Get a Divor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갈 때
by 양혜원
2023-10-13
학교 앞에 짧게는 넉 달 길게는 여섯 달에 한 번 가는 미용실이 있다. 오래전부터 내 머리는 파마도 염색도 하지 않고 그냥 단발 정도의 길이로 자르기만 하는데, 어떻게 손질해도 추레해 보인다 싶으면 한 번씩 가는 주기가 넉 달에서 여섯 달이다. 주문하는 스타일은 늘 같다. 이전에 머리를 자르고 찍은 셀카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해주세요, 하는 한마디가 끝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석 달 만에 미용실을 찾게 되었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머리 형태가 망가져 손질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금 기르면 손질이 쉬울까 하는 생각에, 이번에는 지금 상태의 머리를 다듬고 조금 기르는 방향으로 해달라고 추가 주문을 했다. 일하던 연구소 직원에게 소개받은 이 미용사는 만지는 손이 거칠고 말이 투박하다. 게다가 커트비도 비싸게 받는다. 하지만 머리를 잘 자른다. 반곱슬인 내 머리를 단발로 자르면서 삼각김밥 모양이 안되게 자르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터였다. 그래서 그날도 그의 거친 손에 머리를 맡기고 예쁜 머리로 거듭나길 가만히 참고 기다렸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머리 손질이 끝나면 휙 하니 가버리던 미용사가 평소와 달리 내 머리 형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두상이 변하는데,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란다. “예에? 머리에서도 콜라겐이 빠져나간다고요?” 처음 듣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의 말인즉슨, 두피에 콜라겐이 빠지면서 뼈의 울퉁불퉁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래서 나이 들면 머리 손질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십 대 머리 만지는 사람은 쉽지요. 그냥 웬만큼 해도 이쁘게 나오니까.” 그는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미용실에 올 때마다 있었던 손님들이 최소한 내 또래 혹은 그 이상이었더랬다. 그러니까 이 미용사는 나이 든 손님의 머리를 만지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나처럼 그 거친 손에 머리를 맡기러 꾸역꾸역 찾아들 왔나 보다. 하지만 두피에서까지 콜라겐이 빠진다니…. 관절이 뻣뻣해지고, 주름이 늘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심지어 키가 줄어드는 신체 변화까지도 익히 알고 있는 노화의 현상이었고, 그런 신체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느 정도 마음의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 머리 모양을 잡기가 힘들다니, 이건 뭐 머리카락 빠지는 거에만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신경을 쓰긴 어떻게 쓰는가. 머리카락이야 빠지는 게 눈에 보이기라고 하지,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콜라겐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콜라겐을 잡아둘 방법은 없고, 있다 한들 나 같은 서민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의 기술은 아닐 것이다. 혹 감당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까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해 본들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큰 의미가 있을까. 물론, 이건 내가 돈이 있어 보질 않아서 하는 소리겠지만. 개인적 감상이야 그렇다 치고, 한 가지 분명하게 이해되는 게 있었다. 왜 할머니들의 머리 스타일이 다들 비슷한지. 한때는 아줌마들의 머리 스타일도 비슷했지만, 우리 세대가 아줌마가 되면서는 그래도 조금 다양해졌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머리 스타일은 여전히 거기서 거기였는데, 그것은 제한된 신체적 자원 안에서 그나마 택할 수 있는 스타일의 폭이 정말 좁기 때문이구나, 했다. 흔히 노인이 되면 다들 비슷비슷해진다고 한다. 한때 똑똑했던 사람, 이뻤던 사람, 잘생겼던 사람, 모두 개성을 상실하고 비슷해진다. 심지어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어려워진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그저 노인 혹은 늙은이로 통칭되는 이 그룹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생각이 있는지조차도 때로는 의심한다. 가까이에서 나의 부모님만 보아도, 동생과 둘이 앉아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할 때가 있다. 간혹 그런 내색을 엄마에게 직접 내비치면, 너도 늙어봐라, 하는 말이 되돌아온다. 상대의 말문을 막는 것 같은 이런 반응을 접하면 내심 울컥하지만, 두피에서 빠지는 콜라겐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살짝 수긍한다. 어느 순간 나도 저 자리에 앉아, 도대체 노인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은 부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젊은 세대로부터 나온다. 한때 여성에 대한 지식도 여성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남성에게서 나왔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맹렬하게 저항하며 2백년이 넘게 여성 운동이 이어지고 있지만, 젊은이들이 노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에 저항하는 노인 운동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여성에 대한 집단적 대상화에 민감한 여성학자들도 노인 연구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젊은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노인들의 고루함만 뭐라 할 뿐. 하지만 이 말을 하는 나는 내심 두렵다. 왜냐하면, 노인을 변호하는 듯한 이 말이 마치 이미 누릴 거 다 누린 세대의 사람 사정 봐주자는 말처럼 들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시대는 노인을 미워하고, 노인들 자신도 그것을 감지한다. 일본의 10년 후를 상상한 영화를 며칠 전에 보았다. 몇 개의 단편을 모은 영화였는데, 제일 첫 편이 노인에 대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기업체를 내세워 75세 이상이 된 노인들로부터 사망 신청서를 받기 시작했다. 돈이 있는 노인들은 괜찮았다. 그들은 계속 소비를 하기 때문에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돈도 없고, 병들었고, 돌봐줄 가족도 마땅치 않은, 단지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도 부양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주 고객이었다. 신청을 내고 서명하면, 약 백만원에 달하는 돈을 주었다. 그 돈으로 남은 기간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배려였다. 큰돈이 아닌데도, 그 돈을 받은 노인은 이렇게 큰돈을 주냐며 기뻐한다. 그동안 생활의 곤궁함을 짐작하게 하는 대사이다. 자신이 죽기로 한 날 2주 전부터 먹을 약이라며 직원은 돈과 함께 그 약을 노인에게 내민다. 그리고 죽기로 한 날 시설에 찾아오면 작은 패치 하나를 목 부근에 부쳐주며 누워있으라고 한다. 고통이 전혀 없다고 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지 옆 칸에서는 빨리 죽여달라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얼마 후 마스크를 낀 간호사가 와서 그의 시신을 내간다. 도대체 인류는 무슨 생각으로 대책 없이 수명을 늘려온 것일까….새삼스레 노인 공경하자고, 부모님께 효도하자고, 끝까지 부양 잘하자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사회의 짐이라고, 나라의 정책에서부터 개념 있는 청년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는 집단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 시선에 대응하며 살아갈 나의 자세를 고민할 따름이다. 알다시피 이런 데에 역할 모델이 우리 세대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죽는 것보다 늙는 것이 더 두려운 마냥 흰머리로 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는 과연 어떻게 늙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떠오르는 성경의 한 장면이 있다. 바로, 파라오 앞에 선 야곱이다. 아들 요셉의 손에 이끌려 파라오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이 조상에 비하면 길게 산 게 아닌데도 “험악한 세월”을 보내어 지금 신세가 이렇다고 말한다(창 47:9). 어쩌면 그는 제국의 왕 앞에서 예를 갖추느라 불편한 몸을 다잡으며 힘겹게 서서 이 말을 하지 않았을까. 걸음걸이도 편치 않아 요셉의 손을 붙잡고 겨우 그 앞까지 나왔을 것 같다. 형의 축복을 가로채서 내뺀 후에 원하는 아내를 얻을 때까지 남의 집 살이를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힘겹게 다시 형과 화해하고, 제일 이뻐했던 아내를 제일 먼저 보내고, 자식들의 불화로 아들 하나가 죽은 줄 알고 살았던 그는 분명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험악한 세월. 그 어떤 고난도 주를 위해 이겨냈다는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내 인생 돌아보니 참 험난했다고 스산하게 말하는 이 한마디에 묘한 울림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연로하신 분 중에서 자신이 산 세월이 험악하지 않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별 어려움 없이 살았을 것 같은 분들도 나름의 맺힌 마디와 울분, 어두운 골짜기들이 하나씩은 다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이제 오십 초반인데도, 그리고 이 나라가 풍요로워지기 시작한 시대에 성장했음에도,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도 풍족한 시절에 태어나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크게 참지 않고 자란 이십 대의 아들도 사는 게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그때가 좋은 때라고 말하면, 분명 상처받겠지. 윗세대가 우리 세대를 보고 고생을 모른다고 하면 화가 나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다 나름대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고, 또한 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렇다면 뭐, 굳이 늙는다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마치 늙는 것에 바른 길이라도 있는 것처럼 애써 고민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젊은이에게 젊은이의 자세를 요구하는 게 꼰대 짓이라면, 늙은이에게 늙은이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꼰대 짓 아니겠는가? 지나간 시대의 경험으로 젊은 세대의 경험을 넘겨짚으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면, 두피에 콜라겐도 안 빠져 본 세대의 경험으로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개척해가는 세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 아니겠는가? 매뉴얼도 없이 아직 인류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제일 앞에서 가고 있는 그들의 시행착오는, 이번 생은 처음인 다른 모든 세대의 경험처럼 적당히 개성적이고 적당히 보편적일 것이다. 다만 기력 달린 그들의 소리가 워낙 희미하여 잘 들리지 않을 뿐.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긴 노인이 많지 않기에 최근에 읽은 사노 요코라는 일본 작가의 책은 보물 같았다. 1938년에 태어나 미술을 전공하고 그림책 작가가 되어 큰 상도 받은 그는 2010년 72세에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내가 읽은 책은 그가 암 투병을 시작하던 무렵인 60대 중반에서 후반의 기록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 바르게 늙으려 애쓸 필요 없이 그냥 자기 생긴 대로 늙어도 괜찮은 거구나, 생각하며 위로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결코 착한 할머니가 되지 못해 친구를 자꾸 잃는다고 하면서도 별로 착해질 생각이 없고, 반항할 때 가장 생기가 돈다. 암에 걸리니 지인들이 비싸고 맛있는 거 사 들고 찾아와줘서 좋고, 암보다 더 힘든 게 우울증이라고 한다. 암은 그냥 덤 같은 것이라고 하는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문방구 할아버지가 친절할 때보다 꼬장꼬장할 때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하니 개성 넘치게 산 만큼 개성 넘치게 늙어갔던 것으로 보인다.결국 다 그런 것 아닐까. 자기 생긴 대로 살고 자기 생긴 대로 늙는 것 말이다. 그러니 나이 들면 누구나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겠지만, 어떤 사람은 기를 쓰고 그것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잠시 아쉬워하다가 포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쓰면서도 아직 마음으로는 노인이 되고 싶지 않은 나는, 3개월이 되어갈 무렵 손이 거친 그 미용사를 또 찾아가 삼각김밥 머리가 되지 않게 잘라달라고 주문을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9/11: 도덕적 명확성이 필요한 때
by Bernard N. Howard·Ivan Mesa
2023-10-11
지난 토요일, 가자 지구에 본부를 두고 이란의 자금 지원을 받는 이슬람 테러 단체 하마스가 육해공 전반에 걸쳐서 이스라엘 남부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점, 이스라엘인 900명이 사망했고, 2,400명이 부상당했으며, 수백 명이 인질로 잡혔다.소셜 미디어에 등장하는 사진과 영상은 참혹하다. 아무 생각 없이 음악 축제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지붕으로 아이들을 탈출시키던 아버지가 살해당했다. 테러리스트가 픽업트럭에 벌거벗은 여자를 태우고 행진하고 나이 든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총을 들고 하마스 군인과 함께 포즈를 취하도록 강요당한다. 다섯 살과 세 살 먹은 두 딸을 둔 젊은 여성이 인질로 잡혀갔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겪은 심리적 피해를 미국의 9/11 테러에 비유했다. 이는 홀로코스트 이후 하루 만에 발생한 가장 치명적인 유대인 대량 학살이며, 앞으로 이스라엘 사회를 심오한 방식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라는 맥락에서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의 다양한 견해와 상관없이,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도덕적으로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도덕적 명확성의 가능성 죄 많은 세상에서 갈등하는 양쪽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는 건 당연하다. 한쪽을 비난하는 사람은 당장에 내로남불이라는 반박에 직면할 것이다. “웃기고 있네. 이건 어떤데? 너희가 저지르는 잔혹한 짓은 뭐가 다른데?”우리는 팔레스타인 국민을 향한 이스라엘의 행동이 항상 흠잡을 데 없이 정당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지금 상황에서 이 글을 쓰는 우리 두 사람은 친이스라엘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이스라엘 정부나 군대가 출범부터 오늘날까지 취한 모든 행동을 은폐하자는 건 아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좌절, 고통, 슬픔을 보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를 포함해서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게 다 피할 수 없는 범죄가 있다고 해서 항상 도덕적 안개가 생기는 건 아니다. 때때로 안개가 걷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라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저 없이 비난해야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도 모호함 없이 단호하게 비난해야 하는 유사한 범죄 행위의 명백한 사례이다. 기독교적으로 올바른 식별은 행동의 성격과 목적을 모두 다 살펴야 한다. 하마스가 단순히 민간인 인질을 잡았다면 그 행위는 자체로 악하다(성경은 납치를 금지한다). 그러나 납치의 목적에는 틀림없이 어느 정도 군사적 정당성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름 가능하다. 과거에도 인질을 팔레스타인 포로와 교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마스는 단순히 인질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군사 작전은 애초에 민간인을 살해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설계되었다. 민간인 희생자는 군사 목표물에 대한 공격으로 인한 부수적 피해가 아니었다. 민간인 자신이 표적이었다. 이 학살에 대해서는 그 어떤 성경적 정당성도 찾을 수 없다.도덕적 명확성의 유익정치적으로 분열된 교회를 목회해 본 사람이라면 정치적 문제에 관해서라면 균형의 유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그러다 보니 문제의 양면을 제시하는 데에 너무 익숙해진 우리는 어느 한쪽만 주장하는 것을 명백한 목회적 실수처럼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덕적 명확성이 정당화되면, 큰 이점이 따라온다. 1. 도덕적 명확성의 일반적인 이점진 엘쉬타인(Jean Bethke Elshtain)의 관찰이다. 교통사고로 인한 우발적인 사망과 고의적인 살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형사사법제도는 붕괴될 것이다. 만약에 전투원 살해와 평화로운 민간인을 겨냥한 살해 의도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도덕적 허무주의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동일한 회색 음영으로 전락한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태도를 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구별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이 방식에 근거해서 방향을 잡으면 우리는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신뢰해야 할지 쉽게 알 수 있다. 카타르 외무부 등 일부 외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국민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침해하는 정책을 확대하는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부 아랍국을 포함한 다른 정부들은 이스라엘을 비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런 종류의 가면을 벗기는 것은 외교 정책에 관여하거나 중동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유용하다. 현재 갈등에 대한 도덕적 명확성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언제 발생할지도 모를, 미국과 좀 더 밀접한 사건에 대비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분별력을 발휘함으로 우리는 미래에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잘 갖추게 된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도덕적 통찰력은 많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당시에 증거가 모호하다고만 생각하던 나치즘의 가면 아래 숨은 공포를 똑똑히 보게 만들었다. 그의 강력한 도덕적 비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도 꼭 알아야 할 사건에 대해서 분명하게 분별함으로 본회퍼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하자. 2. 도덕적 명확성의 구체적인 이점도덕적 명확성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명령을 만들어 낸다. 비정치적인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악한 자를 그들 중에서 쫓아내라”(고전 5:13)고 요구했다. 구절 속 문제의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었고(1절), 그로 인해서 그는 지역 교회에서 파문되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대한 명확성은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데에 필요한 명령을 내린다. 일요일 뉴욕시에서 열린 친팔레스타인 집회에서 행진 참가자들은 “사람들이 점거되면 저항은 정당하다”고 외쳤다. 그리스도인은 방어할 능력이 없는 민간인을 향한 고의적인 학살을 옹호하는 그러한 종류의 집회(또는 그에 상응하는 소셜 미디어 집회)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변호해서는 안 되는 것을 옹호하는 것(살인, 강간, 납치를 “저항”으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방식이 아니다.동시에 도덕적 명료함은 한쪽을 위한 적절한 기도를 하도록 한다. 우리는 하마스의 조속한 패배를 기도해야 한다. 하마스의 살인적인 작전실은 결코 가자지구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좋은 지도력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양쪽 모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즉, 그들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말이다. 더불어서 그들의 보호와 치유, 위안을 기원하자. 그리고 양국 국경 안에 있는 교회가 성장하도록 기도하자. 우리가 이처럼 양방향을 향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비로소 테러리즘에 빠진 한쪽을 완전히 좌절시키고 패배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더 담대히 간구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원제: Israel’s 9/11: The Need for Moral Clar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처음
이전
11
페이지
12
페이지
13
페이지
열린
14
페이지
1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