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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더 기이하게 만들자
by Darryl Dash
2023-11-09
지난 토요일에 나는 불신자들이 적지 않게 참석한 결혼식에서 설교를 했다. 나는 신랑신부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불신자에게 복음까지 전하는 성경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어려운 구절을 골랐다. 에베소서 5:22-33. 나는 신랑신부에게 주례자로서 하기 쉽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고 말했다. 바로 복종과 사랑이다. 동시에 긍정적인 말도 있다고 말했다. 서로 사랑하고 복종할 때,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두 사람이 반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 나는 복종에 관해서 말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주제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런 일이 퍽 자주 발생한다.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설교하다 보면 지금 우리 생각과 모순되고 이상해 보이는 부분을 성경 속에서 꼭 만나곤 한다. 전에는 그런 구절을 부드럽게 하거나 아니면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나는 어려운 구절들로 곧장 달려간다. 나이가 들수록 기독교의 어려운 부분이 지렛대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굳이 어려운 주제를 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어려운 구절을 적극적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더 정직하다어려운 문제를 피하는 교회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만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실망스럽다. 이건 마치 고객을 유인하는 상술 같다. 성경 속 어려운 주제는 적지 않다. 따라서 교인들이 나중에 그런 부분을 일부러 숨겼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솔직하게 알릴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사도행전의 설교를 보라. 사도들은 적대적인 청중과의 의사소통에 매우 능통했다. 종종 그들은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으로 바로 이동했다. 그런 내용은 피하거나 부드럽게 페달을 밟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공개하는 것이 좋다.더 힘 있다어려운 주제의 공개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우리에게 필요한 대위법을 제공하는 지점이 바로 성경 속 난제가 있는,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성경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올바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소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따라서 어려운 구절일수록 피하기보다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과 우리가 메시지를 전하는 교인들 사이의 긴장 지점은 무엇인가? 그 지점을 피하지 말라. 적극 끌어안으라. 성경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변화를 어떻게 이뤄내는지를 보여주라. 결국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삶과 사고방식으로 고쳐 나가야 한다. 어려운 구절을 피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무엇보다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복음의 타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 모두와 모순된다(고전 1:18-25). 우리는 믿기 어려운 많은 내용을 믿는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성육신. 그의 죽음, 장사, 부활이 역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 더불어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이다. 믿지 않는 귀에는 이 모든 게 이상하며, 복음을 타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부드럽게 바꿀 수 없다.내 생각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경향과 기독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응답을 요구한다. 말씀이 현대인의 감성과 모순될 때, 올바른 접근 방식은 모순의 완화가 아니라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더 나은 말씀을 어떻게 제공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려운 부분을 부드럽게 하지 말라. 정면으로 제대로 이야기하라. 달려가라. 어려운 부분, 이상한 부분, 괴이한 부분은 오히려 하나님 계시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보다 더 나은 말씀을 어떻게 주시는지 더 잘 보여줄 수 있다.원제: Keep Christianity Weir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에서도 아기 울음이 사라지고 있는데…
저출산 시대의 교회
by 이춘성
2023-11-08
최근 셋째를 출산하고 여러 교회에 가서 특강과 설교를 하면서 출산 소식을 전하면 사람들이 내게 박수를 보내 준다. 노산(내 나이는 47, 아내의 나이는 46, 첫째는 고2, 둘째는 중2)이고 셋째라는 말에 격려해 주는 의미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리라. 또 심각한 저출산의 시대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난 이런 반응이 어색하기만 하다. 아이를 낳고 며칠 후에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에 가서 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을 했다. 강의 시작 한 시간 전에 담당 장로님을 만나 차담을 잠시 나누면서, 늦은 나이에 셋째가 태어났다고 말했다. 매우 기뻐하시면서 요즘 청년들의 비혼, 신혼부부들의 딩크족 등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면서 나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래서 난 “교회가 문제입니다”는 첫 문장으로 내 말을 이어 나갔다.“장로님. 제 생각에, 저출산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입니다. 남을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 명령(창1:28)을 믿는 우리가 그 말씀대로 교회를 운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직원과 사역자들에게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이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다행히 대형교회에는 교회 직원들, 특히 여자 직원들에게는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극히 일부이지만요. 그리고 그것도 사역자들에게는 예외입니다. 남자 사역자들이 출산 휴가와 휴직을 사용한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일반 직장은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기에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교회는 가치와 성경을 믿고 따르면서 이를 보여 주고 교회의 성도들이나 세상을 향해 성경의 가치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가정사역, 어머니 기도회, 부부 세미나, 자녀 교육 세미나 등. 오늘도 저를 부르셔서 이런 강의를 부모들에게 하고 있지만, 사실 교회의 목사와 전도사, 직원들은 이렇게 실천할 시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정작 목사들은 아이가 태어나도 아이를 신앙으로 돌볼 시간이 없지요. 사모들은 방치당하고…. 이런 상황을 교회를 위한 희생이라고 말하고 포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목사들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거룩하게 기르라고 설교하고 가르치면 누가 듣고 따르겠나요? 저는 청년 사역을 오랜 시간 했는데, 이런 위선을 보면서 결혼하고 딩크족으로 살겠다는 청년들에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의 교회가 먼저 사역자들의 출산 휴가, 육아 휴직을 추진해 주세요. 이런 유명한 교회가 이를 추진하면 다른 교회도 배우고 따르겠지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진지하게 내 말을 듣던 장로님은 자신이 당회에 적극적으로 건의해 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사역자는 당회의 분위기는 지출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지금 있는 사역자도 줄이려 한다고 귓속말로 알려 주었다. 교회도 나름 여러 고민이 있으리라 생각한다.교회의 아이들이 없다. 새신자 전도도 문제이지만, 교회 안에 신혼부부도 적고, 결혼한 부부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지방에서는 장례식과 병원 심방은 많지만, 산모 심방과 유아 세례는 일 년에 몇 차례 기회가 없다고 한다. 개선되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여전히 교회의 구조와 시스템이 사역자들이 아이를 많이 낳으면 사역을 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이런 환경에서 다자녀를 두고 어렵게 생활하며 성도들을 섬기는 사역자들의 믿음이 위대하고 감사할 뿐이다.끝으로 교회와 대기업을 비교하는 분들이 있다. 대기업처럼, 삼성처럼 일하라고 사역자들에게 요구하는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있다. 하지만 가치를 위해 일하는 직업은 그렇게 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수천 년 전 그리스인도 알았던 지혜다. 학자라는 뜻의 영어 단어 스콜라(scholar)는 그리스어 스콜레(σχολή)에서 온 단어이다. 스콜레는 레저(leisure), 여가(free time)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의 철학자와 정치가들의 일은 스콜레의 일이었다. 이들은 정신없이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가치와 철학, 깊이 있는 영적 삶을 추구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먹고 살기 위한 일에서 여유로운 사람들, 즉 스콜라들이 가치를 고민하고,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들과 이 가치를 공유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의 정치였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이런 스콜라적 목사가 극소수라는 점이다. 모두 삼성, 현대 등의 대기업보다 더 일하는 목사들만 원한다면, 교회는 미래가 없다. 결코 성경의 가치를 성도들에게, 세상에 전할 수 없다. 가치를 가르치거나 살 수 없는 교회에는 위선만 가득해지는 것이다.
‘디지털 영’에 우리 아이들이 사로잡혔다
by Isaac Serrano
2023-11-07
“휴대폰 때문에 우리 애를 잃었어요. 애가 아예 딴사람이 되었어요.” 이렇게 한탄하는 부모의 말을 듣곤 한다. 이건 마치 “병으로 남편을 잃었어요”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과 비슷하다. 이 두 가지가 그토록 유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유사성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까? 영향 아래에서 술과 휴대폰, 둘 다 개인에게 작용하는 외부 영향이다. 도수가 높은 알코올의 경우, 그 물질을 흔히 ‘영’(spirit)이라고 부르곤 한다. 사람들이 증류주에 이 용어를 붙이기 시작한 데에는 신비한 역사가 있지만, 중요한 건 이 말이 도무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는 점이다. 술은 과음한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 적당하게 마셨다면, 술기운은 빨리 사라지고 몇 시간 내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술이라는 영이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초대받으면 어떻게 될까? 술은 이제 그 사람 안에서 영주권을 갖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바꿔버린다. 술을 남용하는 주체가 처음에는 당신이다. 그러다가 불길한 교환 속에서 학대하는 주체가 서서히 술로 바뀐다. 그리고 학대의 피해자는 당신이 된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악한 영처럼, 술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을 왜곡시켜 결국에는 아예 달라진 성격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이와 같은 현상은 거의 모든 중독에서 발견된다. 무언가를 우리 속에 받아들이는 순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슬그머니 위험이 들어오다디지털 시대는 잠재적으로 유해한 각종 장치를 우리 집에 공개적으로 초대하는 세상을 가져왔다. 좋은 부모는 중독성 있고 유해한 물질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만, 그럼에도 디지털이라는 기술 자체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많은 위험이 생겼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자명하다. 부모들 대부분이 디지털 기기를 자녀가 새로운 기술 세계에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만 해도 잘 몰랐지만, 이제 연구 결과는 분명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화면과 소셜 미디어는 중독성이 강하고 행동을 바꾼다.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단절되고, 더 비참하고, 외롭다. 대부분의 중독성 물질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장치는 기쁨을 약속하지만 불행을 더 많이 가져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디지털 시대의 정신이 우리 자신이나 아이들을 통제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현명한 사람이라면 술과 같은 전통적인 유해 물질에 관해서 절제하고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부모와 법률이 접근 자체를 제한한다. 중독성을 가진 이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을 취해야 한다. 디지털 소비를 규제하고 접근을 제한하는 명확한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건 너무 위험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 기술이 아이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조치는 뭐가 있을까? 미국의 법적 음주 연령은 21세이다. 아동 온라인 개인정보 보호법(COPPA)은 13세 미만 어린이의 소셜 미디어 사용을 제한하지만, 법 시행 메커니즘은 효과가 떨어진다. 그러므로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부모는 지혜롭게 자녀를 위해서 결정해야 한다. 나는 16세 미만의 자녀에게는 소셜 미디어의 금지를 제안한다. 책임감 있는 성인이 포도주 두 잔을 음주 제한으로 설정하듯, 어린이와 성인 모두 화면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하루 최대 한두 시간을 제안한다. 앤디 크로우치의 The Tech-Wise Family 같은 지침서를 활용해서 다양한 방안(예를 들자면, 집의 열린 공간에서만 화면을 보는 것)을 구현한다면, 디지털 시대에 성공하는 자녀로 교육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건강한 습관이 하루아침에 들지는 않는다. 중독성 있는 디지털 기술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완화하도록 다양한 예방 아이디어를 한 번에 하나씩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구현해야 한다.절박한 시대에어쩌면 당신은 ‘이젠 너무 늦었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디지털 중독으로 자녀들이 학교, 스포츠, 가족 관계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능력은 이미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게 현재 당신의 현실이라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즉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녀를 위한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하라. 일정 시간을 정해서 화면 시청 시간을 크게 줄이거나 아니면 아예 보지 않도록 하라.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30일간의 청정 식습관 도전으로 생각하라. Screen Strong은 가족이 디지털 기술로부터 완전한 해독을 구현하도록 돕는 훌륭한 30일 계획을 제공한다. 핵심은 디지털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대담한 시도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전을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자녀를 지배하는 디지털 영의 영향력이 약해질 수 있다.성령으로 충만하여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 5:18)라고 경고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중독이 우리 가족을 사로잡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풍속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 우리 몸은 성전이며,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현재의 디지털 시대에도 신실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디지털을 제한하고 대체하는 패턴을 개발하라. 생명을 빼앗는 디지털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바꾸라. 정욕을 채우기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롬 13:14).휴대폰을 내려놓고, 소셜 미디어에서 로그아웃하고, TV를 꺼라.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라. 식사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고,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라. 픽셀의 빛에 취해서 잠자리에 들지 말고 하나님 말씀이 주는 빛의 인도함을 받아 잠자리에 들라. 자녀가 당신을 항상 지켜보고 있음을 기억하라. 자녀는 당신을 보고 그대로 본받는다. 기술이 나쁜가? 당연히 아니다. 기술의 성취는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많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성경은 포도주를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남용에 관해서만은 엄중하게 경고한다. 나 자신과 아이들이 디지털 중독이라는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지혜와 신실함으로 이 위험한 디지털 시대의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 원제: What If Our Kids Are Addicted to the Spirit of the 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젊은 기독교에서 가능성을 찾자
by 김선일
2023-11-06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현재 대한민국은 세속화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종교 인구가 계속해서 감소한다. 한국갤럽에서 2022년에 9,18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종교인은 36.6퍼센트이고, 무종교인이 63.4퍼센트이다. 조사 대상의 약 2/3가 종교가 없는 셈이다. 연령이 낮을수록 종교인의 비율은 더 떨어진다. 20대는 19.1퍼센트, 30대는 24.5퍼센트로 평균과 큰 차이를 보인다. 각 종교(개신교, 불교, 천주교)의 인구도 모두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비종교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있다. 20대와 30대를 기준으로 종교별 인구 비율을 비교하면 개신교가 불교와 천주교보다 훨씬 높다. 20대의 개신교 인구는 11퍼센트로서 불교(3.5%)보다는 3배, 천주교(4.5%)보다는 2배 이상이 높다. 30대에서도 개신교 인구는 14.6퍼센트인데, 이는 불교(4.7%), 천주교(4.8%)보다 3배 이상 높은 수치다. 40대에서도 개신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지만(21.5%), 그 차이는 줄어든다(불교=15.6%, 천주교=7.5%). 그러나 50대로 가면 불교(27%)가 개신교(17.8%)를 훨씬 상회하고, 60세 이상에서는 그 차이가 더 커진다(불교=33.5%, 개신교=21.3%). 어쨌든 젊은 세대에서 종교를 갖는 이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다. 물론 이들에게서도 사실상 기독교 인구는 계속 줄고 있으므로, 이러한 차이가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다. 비록 종교를 가진 2030에서 개신교인이 제일 많지만, 그 비율은 이전 조사에 비해 현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20대의 개신교인 비율은 2017년 조사에 비해 9.8퍼센트나 감소했고, 30대는 5.5퍼센트가 줄었다. 전체적인 비종교화, 탈교회 현상은 2030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위의 통계에 대해서는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를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가진 2030세대에서 여전히 기독교 인구가 가장 높다는 사실은 선교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치가 있다. 기독교는 젊은 층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친밀한 종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앙이나 영성에 관심을 지닌 젊은이가 있다면 주변의 교회나 선교단체를 먼저 떠올릴지 모른다. 교회는 사찰이나 성당에 비해서 젊은이들에게 접근이 가장 수월한 종교적 공간일 것이다. 가시성과 접근성 모두 높으며, 젊은 또래의 신앙 공동체도 활발한 경우가 많다. 개인주의를 넘어서한 인터뷰에서 캠퍼스 선교단체 간사는 최근 대면 수업이 전면 재개되면서 유례없는 상황을 경험했다. 믿지 않는 청년들이 자기 발로 기독교 동아리 방을 찾아온 것이다. 대학 축제 때 그 간사가 사역하는 동아리 부스를 차려 놓고 모임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한 번도 교회에 다닌 적 없는 청년들이 직접 신앙 공동체를 찾아왔다. 이들은 코로나가 터진 직후 신입생으로 왔기 때문에 처음으로 캠퍼스 현장 수업에 참여했다. 그동안 대학생 공동체를 경험한 적 없는 이들이었는데, 대면 수업 이후 재개된 교내의 모임이나 동아리는 가볍게 즐기고 생각 없이 노는 분위기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그와 같은 전형적인 또래 문화와는 달리 진지하고 탐구심이 많은 구도자 유형에 가까웠다. 이 청년들과 대화해 본 간사는 요즘 청년들이 자유로움 속에서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들이 겪는 외로움이나 관계의 문제가 하나님을 알고 변화의 여정에 들어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하의 인터뷰 내용들은 2023년 10월 5일 국민미션포럼의 ‘한국교회 다음세대 희망터치’ 발표문에 근거한다.)현대 젊은이들의 문화는 개인주의를 기본값으로 한다. 혼자 사는 게 익숙하고 다른 이들과는 아무리 친해도 적절한 경계를 긋는다. 하지만 인간은 개인주의 영토 안에서 오롯이 살아갈 수는 없다. 개인이 중요한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주의에 편승하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선교가 아니다.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어떠한 공동체를 원할까?안전한 공동체인터뷰에 응한 여러 청년은 ‘안전’이라는 단어로 그들이 열망하는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안전은 불안과 위험에 대응하는 단어다. 청년세대는 불안하다. 생계의 문제로 불안하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하다. 기후 위기, 폭력, 사회 갈등의 증폭으로 인해 위험을 느낀다. 그럼에도 교회는 아직 안전한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때로 기독교 지도자들의 발언과 행태가 위험을 조장한다. 교회에서 전하는 하나님은 편파적이고 무섭게 느껴진다. 외로움과 불안을 느끼는 청년들은 안전한 공동체를 찾는다. 여러 청년이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주고 안전함을 느꼈던 교회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나 한때 신앙을 잃고 스스로 불신자로 간주했던 한 청년은 외로운 유학생 시절,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 준 한인교회의 경험으로 다시 신앙과 기도의 의미를 회복했다. 또 다른 청년도 한동안 “가나안 성도”로 지내다가 자기를 잊지 않고 문자로 안부를 묻는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보채지는 않는) 교회 어른이 고마워서 그가 섬기는 청소년부에 보조교사로 참여하다 신앙을 다시 회복한다. 교회를 멀리 한 자신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친절히 기다려 주다가 결국에는 돌아온 자신을 환대하는 어른들에게 감명을 받는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안전한 공동체를 마련하는 일에는 기성세대의 역할도 중요하다. 사회에서 회자되는 세대 갈등론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발붙일 자리가 없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신앙 유산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단, 환대와 존중의 안전한 공동체 안에서 그렇다.삶으로 침투하는 영성공동체만으로 젊은이들의 신앙이 온전히 회복되진 않는다. 청년의 시기는 존재의 외로움과 허무감을 겪는다. 공동체를 통한 관계와 정서적 위로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현실과 미래를 더 큰 세계관 안에서 마주해야 한다. 교회는 청년세대의 가볍고 재미있는 문화를 복제만 할 것이 아니라, 인생과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인 설명 체계를 제공해야 한다. 오랫동안 취업 준비를 하면서 낭패감에 시달리던 한 청년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넘어서 나의 삶을 계획하시고 지금 자신의 상황도 그분의 타이밍 안에 있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면서 큰 위로와 더불어 ‘감각의 확장’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는 인식의 전환을 통한 삶의 재구성이다. 인식의 전환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에서 비롯된다.싱클레어 퍼거슨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교훈의 본’(롬 6:17)을 따라 완전히 새로운 모양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 복음 교리가 그리스도인에게 확실히 각인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이나 영향을 남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성도의 삶, 23). 젊은이들이 교회에 원하는 것은 말랑말랑한 위로나 재미있는 경험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존적 상황을 해석하고 인생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견고한 답을 원한다. 성경의 큰 맥락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기도와 봉사만 요구하지 말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이 언어와 상황에서 들려지도록 전달하는 일은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역자가 끌어안아야 할 과제다. 인간은 생애 주기에 따라 위기와 숙제를 마주한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20대는 주체적 성인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자아와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30대는 자립과 가족의 구성이라는 과제를 갖는다. 그때 그들 곁에 누가 선한 조력자의 역할을 할 것인가? 누가 가장 견고하고 분명한 진리를 친절하게 들려줄 것인가? 복음과 그 복음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는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기독교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사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by Trevin Wax
2023-11-05
얼마 전에 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처럼 영원한 심판을 다뤘다. 우리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인 이상, 나는 아무리 불편한 진리라고 해도 결코 살금살금 피해 가며 성도들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정말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에 관한 경고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내용, 그리고 분노와 정욕이 지옥불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또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성경에 있는 그대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말고는 없다. 그게 현대인의 귀에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말이다.예배가 끝난 후에 한 여성이 내게 다가와서는 그동안 많은 교회를 다녔는데 지옥에 관해서 말하는 목사를 처음 봤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중요한 메시지를 큰 소리로 선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마치 저주의 단어로 남용되는 지옥이 그 힘을 잃은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비밀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신실한 신자들은 그 단어가 여전히 정통 기독교의 일부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소리 내서 말하지 말아야 할 누군가의 목적지임을 알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심판을 언급하지 않고 어떻게 예수를 전한다는 걸까? 예수님의 그 다양한 비유를 어떻게 설명한다는 걸까? 멸망에 대한 그의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경고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걸까? 이게 다가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양자택일과 대조를 강조하셨다. 비록 당신이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교리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교단을 초월한 급진 그리스도인(red-letter Christian)이라고 할지라도, 멸망과 사라지는 영혼을 경고하신 예수님의 육성(the red letters)과 지옥을 상징하는 죽지 않는 벌레와 꺼지지 않는 불의 이미지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굿바이, 사탄지옥이 없다는 사실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은 사라지는 사탄이다. 점점 더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마귀나 귀신, 세력과 정사에 관한 말씀을 듣는 게 힘들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사탄이 사라졌다. 그렇다. 은사주의 교회나 오순절 교회에는 종종 나타나지만, 점점 더 부유해지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는 복음주의 교파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사탄이라는 고소자에 관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치를 떤다. 악마가 모든 문제의 배후에서 엿보고 있고, 사탄의 영향력이 성경의 증언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지나치게 강조되는 다른 신앙 전통에 만연한 일종의 과장을 피하고 싶어 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절제된 방식으로 가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거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유일한 장애물에 있는데, 그게 바로 성경이다. 성경뿐만 아니라 교회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비서구 지역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성경이 이런 태도를 반대하고 있으며, 기독교 역사 속 모든 신자도 그러했고, 또 서구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의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우리는 지금 많이 특이하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침묵은 꽤나 정교하다고 여겨지는 거 같다. 사탄이 사라지고 생긴 여러 여파문제는 이거다. 당신이 사탄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말하는 구원은 성경이 증언하는 죄와 구원이 아니다. 고작해야 일반적인 좋고 나쁨으로 구분되는, 심리치료적이고 세속적인 범주를 넘어설 수 없다. 지옥에 대해서 당신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나누는 복음 속에는 긴박감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전하는 복음은 단지 사람들이 듣기에 더 좋고 더 만족스러워 보이는 삶의 방식일 뿐이다. 이게 바로 인스타그램 인플루엔서부터 불교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는 일이다. 당신이 악마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천사도 언급하지 않을 거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성경이 실재라고 말하는 영의 세상을, 즉 보이지 않는 영역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고작해야 말씀에서 벗어난 우주관을 가진, 빈약한 상상력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고대 교회는 분명하게 성경의 주장을 확증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교회는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 더욱이 천사, 귀신, 사탄, 지옥에 대한 빈약한 시각은 우리가 죄와 싸울 때,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자 할 때,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의 순결을 추구할 때, 우리를 불리하게 만든다. 사탄의 상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맥락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며, 영적 전쟁터가 어느새 평화로운 위로와 성취의 현장으로 변형되었음을 드러낸다. 영원이란 지분의 무게를 줄임기독교가 말하는 영원이 달린 문제의 중요성을 낮출 때 수반되는 필연적인 결과는 결국 사소한 문제가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달한 생사의 긴급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무슨 결과가 생길까? 우리는 생사의 긴급성을 다른 문제에 삽입함으로 세상 문제를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구 교회에서 목격하는 현실이다. 우리가 우주적 관점을 잃고 “이 세상”과 관련된 삶의 측면만을 강조할 때, 미래의 심판이라는 엄중한 현실을 경시할 때, 우리는 결국 영원한 정의에 대한 희망마저 잃게 된다. 이는 결국 지상의 정의만이 우리에게 남은 전부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완전한 정의를 달성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정의가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현실을 만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남은 결과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각종 정의 추구는 사실상 생사의 투쟁이 된다. 진짜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할 무언가를 찾는 과정에서 싸워야 할 진짜 전쟁 대신에 우리는 쉬지 않고 계속되는 작은 전투에 매료된다. 위대한 드라마를 놓친 사람의 눈에는 이 세상이 만드는 작은 세속적 드라마가 중요해 보인다. 예수님처럼 가르치고 있는가? 나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사탄, 지옥, 천사, 악마에 대한 설교가 어떻게 다가갈지 깊은 고민 없이 섣부르게 하는 설교를 권하지 않는다. 상황화는 중요하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해석하라고 설교자를 주셨다. 단지 말씀은 소리 내서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작 필요한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주의 깊게 설명하고 성경이 쓰였을 당시와 지금의 문화적 거리를 인정하면서 사람들이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초대하는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세심하게 배려한다고 해도 이상한 점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고 현대인의 귀에 이상하게 들리는 모든 부분을 다 없애겠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특이한 점은 눈에 띄기 마련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그를 전하는 예수님의 선포자가 된다면, 우리는 그가 말씀하신 모든 것, 심지어 오늘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까지도 고심해야 한다. 그건 독선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확장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교묘함으로 심판에 대한 경고를 비웃는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이중적인 공격도 포함하고 있다. 정통적이고 건전한 신앙고백을 고수하는 교회도 얼마든지 성경이 강조하는 가르침에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있다. 올바른 교리를 따르면서도 거기에 따른 합당한 엄중함을 가지고 그 교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가능하다. 오늘날 사탄이 신자들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의 하나가 목회자들이 예수님처럼 말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예수님에 관한 참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처럼 설교하게 하는 것이다. 원제: Whatever Happened to Sat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by 고성제
2023-11-03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옮기던 중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죽이신다(삼하 6장). 이런 기사를 읽으면 누구나 불평하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화를 낸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느냐!” 그도 그럴 것이 웃사가 무얼 잘못했는지가 썩 잘 이해되지 않는다.물론,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운반한 것부터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법궤는 사람들이 메거나 들고 운반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법궤의 네 귀에 고리를 달라고 명하셨다. 그러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이 큰 잘못인데…. 그럴지라도 그것은 웃사의 잘못이 아니라, 다윗 왕이나 그의 종교 담당 비서관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장대에 꿰어서 나르게 했더라면, 짐승이 날뛰어서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은 일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아져 손을 내민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웃사야! 고맙다!”는 음성이 들려야 할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고, 독자의 감정이 좋지 않다.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화내기 전에 다시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무엇을 보게 될까? 우선 그 현장에 ‘웃사의 죽음’만 있는 게 아님을 보게 된다. 거기엔 언약궤도 거기 있고, 그뿐만 아니라 뒤돌아보면 성경에는 그때까지 언약궤에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웃사의 죽음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기보다 마치 펼침막처럼 이 사건 배후에 펼쳐져 있는 그 에피소드들을 함께 살피며 묵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에피소드 1첫 번째 에피소드는 사무엘상 4장에 있다. 엘리 제사장이 다스리던 시대, 그 어두운 시대에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는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그 지역에 전쟁이 잦았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약 4,000명이 죽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한다. “법궤를 가져오자.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이기게 해 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그 전쟁터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나게 할 수 있고, 그러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자동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될 것’이라고 믿은 그들의 생각은 미신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단히 모욕적이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들은 하나님을 조작가능한 분으로 본 것이다.하지만 우리의 상황도 이와 똑같다. 사실 오늘 우리도 성경 계시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도 똑같이 흐를 것이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분이라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 생각과 다르다는 건 우리로서는 생각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늘 보는 것이 뭔가? 늘 애쓰시는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분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걸 알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계신 것이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또 거룩한 분! 쉽게 말하면 다르고 다르고 다른 분이다. 너무 다르고 다르고 달라서 어디 견주어 설명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법궤와 관련된 모든 에피소드가 동일하게 바로 그 점을 가리킨다. “나는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같은 얘기였다. 장로들의 제안은 이제 다시는 패배하지 않게 할 놀라운 제안처럼 보이지만, 그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조작이 가능한 분이 아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이라, 마음대로 살고, 그러다가 어려운 일 생기면 그냥 하나님을 동원하려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래서 전쟁의 결과도 기대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들은 다시 패배했고, 그 결과는 이전보다 더 비참했다. 전사자 수가 이전의 8배에 달했다. 게다가 법궤마저 빼앗겼다.알다시피 이런 상황은 당시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지역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것은 다곤이 여호와보다 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영광스럽지 않은 분인가? 이제 더 이상 만왕의 왕이 아닌가?우리의 하나님 되시기를 거절하고 사임하셨나?블레셋인들도 생각했을 것이다. ‘다곤이 최고란 말인지? 우리의 다곤이 이제 이스라엘 신의 사업을 인수합병한 것이지?’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것이다.에피소드 2-3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블레셋 땅에서 일어난다. 법궤를 빼앗아 간 블레셋인들은 그것을 다곤 신전에 두었다. 그들은 승리에 몹시 들떠 있었고, 법궤는 그들에게 마치 승리의 트로피와 같았다.하지만 다음 날 아침,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아침에 신전에 들러본 그들은 경악했다. 다곤 신상이 법궤 앞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랐지만, 우연이라 생각하고 신상을 다시 원래대로 세워 놓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 그들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다곤의 머리와 손목이 아예 잘려져 있는 것이다. 얼마나 불길하였을까?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온 동네에 갑자기 독한 종기가 돌았다. 그 재앙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곳저곳으로 옮기곤 했는데, 어디로 옮기든 피할 길이 없었다. 법궤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재앙이 내렸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라고 아우성쳤다.에피소드 4얘기는 자연스레 네 번째 에피소드로 이어진다(삼상 6장). 법궤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제 그것을 돌려보낼 방도를 강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군가가 제안했다. 궤를 보내되, 그 재앙이 그 신으로부터 왔는지 우연이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니냐고. 그가 제안한 방법은 간단했다. 새끼를 낳고 아직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준비해서 그것들로 수레를 끌고 가게 하자는 거다. 새끼는 집에 놔두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소들이 새끼를 두고도 이스라엘 쪽으로 간다면, 그건 이 일에 이스라엘의 신이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가져오면 안 되는 법궤를 가져왔다는 뜻이라고 보기로 한 것이다. 나름 논리적으로 치밀한 방법이었는데, 그렇게 시행한 결과는 놀라웠다. 소들이 곧장 이스라엘 땅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끄는 사람도 없는데, 길을 잘못 들지도, 멈추지도, 무얼 먹으려고 곁길로 빠지지도 않았고 새끼에게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이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 틀렸다는 거다. 하나님은 포로였던 적이 한순간도 없으며, 블레셋 땅 다곤 신전에 있을 때도 그곳에서 여전히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았다. 블레셋은, 하나님을 포로로 잡기는커녕, 언약적 관계가 없는 그들은 그분의 상징물조차 그들 가운데 두고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법궤를 두고도 저럴 정도니, 그분의 실재(real presence)를 감당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명백했다.그뿐만 아니라 ‘그런 분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은 젖먹이를 둔 암소의 본능보다도 강렬했다. 그들이 그토록 잘못된 믿음의 미몽 속에 있을 때조차 말이다. 주님은 훗날 포로로 잡혀갈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결국 이 에피소드들은 무얼 말해 주나?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거룩하신데, 그의 사랑도 자비도 모두 남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신도, 블레셋인들이 생각하는 신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그분을 배워가야 하는 것이다.에피소드 5이제 법궤가 벧세메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궤를 보고 너무 반갑고 궁금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것을 들여다보려고 그만 그 뚜껑을 열려고 했다. 그리하여 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언약궤는 고핫 자손만 다룰 수 있고, 그들조차 만지는 건 금지되어 있는데,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그 안을 들여다보려 했던 것이다.여기서도 하나님은 다시 한번 거룩하심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분은 완전 타자였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있어야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이해할 텐데, 달라도 완전히 달라 알거나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 단지 만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가 불가능한 분이었다. 그분은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순종할 분이지, 분석하고 판단할 “그것”이 아니란 말이다. 놀랍고 위대하기를 상상 자체가 불가할 정도라는 것이다.에피소드 6이제 본문 곧 마지막 법궤 얘기다. 이 일은 다윗이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시는 중에 일어났다. 다윗은 이 일을 위해 군대를 모으고 풍악을 울렸다. 그때까지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다시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궤를 옮기던 중에 갑자기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놀란 웃사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고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지금까지 배후의 법궤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은, 본문을 읽을 때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들이 잘못했는데, 왜 웃사가 죽어야 하나…. 설혹 웃사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이렇게 죽는 건 좀 심하지 않나….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얄팍한 감정을 앞세워 성급하게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설교자로서 우리는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비극을 대할 때마다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하나님이 이런 비참한 비극까지 감수하고도 하시고자 한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을 겸손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고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평범한 돌도 뒤집어 보고 나뭇잎도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웃사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처벌이거나, 다시는 만지지 말라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게 복음의 복음 됨을 더욱 밝히 보여주고자 하는 계시임을 보게 된다.단순히 “이제 웃사는 지옥 갔다”는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면 안 된다. 사실 성경 인물들은 우리를 위한 드라마에 등장한 등장인물들이다. 드라마에서의 배역이나 내용을 가지고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말하는 것은 무리다. 드라마에서 배우 아무개 씨가 죽었다고 실제 그가 죽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실 웃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 말하도록 위임받지 않았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그러면 웃사 사건은 복음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어떤 하나님이 어떤 죄인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드러냄으로 그렇게 한다. 사실 복음이 정말 제대로 기쁜 소식이 되려면, ①하나님이 어떤 위대한 분인지를 알아야 하고, ②동시에 인간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③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어떤 위대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세 요소 중 어느 하나도 깊고 풍성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이 왜 그렇게 기쁜 소식인지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그렇다면 웃사 이야기는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이 본문에서 웃사의 죽음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웃사의 죽음을 그 이전에 이어져 온 법궤에 얽힌 이야기라는 펼침막 앞에서 법궤와 함께 보아야 한다고 했다. 웃사는 왜 죽었나? 법궤에 손을 대는 바람에 죽었다. 그는 왜 손을 댔나? 소들이 날뛰는 바람에 법궤가 굴러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법궤가 떨어져 더러워질까 염려한 것이다. 길에는 짐승의 배설물을 비롯해 더러운 게 많으니까 말이다. 이 점에서 그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더러운 것은 길에 떨어진 짐승의 배설물이 아니라 웃사 자신이라는 거다. 사람들이 보기에 불결하고 더러운 것은 짐승의 배설물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든 것 중에 가장 더러운 것은 웃사를 포함한 인간인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 17:9). 웃사는 자신이 그렇게 더러운 걸 모르고 손을 뻗어 하나님의 궤를 만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다. (기억할 것은 바로 이때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해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우리 보라고 일으키신 사건이라는 말이다!)그 현장에 법궤가 있고, 그 뒤로는 이런 펼침막이 있다. 그 펼침막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거룩하다.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너희가 만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다. 나는 너희가 예배하고 순종해야 할 대상이지, 연구하고 분석하고 이제 ‘알았다!’라고 말할 “그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와 맺어준 언약 없이는 너희는 나의 상징물조차 너희 가운데 두고 누릴 수 없다. 나는 너희에 의해 조종될 수 없으며, 어느 신들보다 뛰어나며 어디서든 다스린다.이렇게 거룩하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몇 번이나 죽었을까? 앞에 나온 에피소드들을 보며 생각해 보았나? 그 펼침막 속에서 죽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숫자가 무얼 말해 주나? 언약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몇 번 죽었어야 할지 모르는 자들이라는 거다. 우리는 매일 죽을 수밖에 없고, 어느 순간에 죽을지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성경은 그런 분이 죄인을 사랑하신 얘기다.웃사 얘기는 웃사가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웃사의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이 “위하여 언약궤를 준비하신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가를 드러낸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작정하시고, 아브라함을 대표로 삼아 구체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시내산에서 더욱 구체화하여, 궤에 담아, 손에 쥐어 주신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웃사와 같은 인간 혹은 그보다 못한 인간들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못났고, 그렇게 도덕적으로 망가져서,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더러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자신들이 그러한 줄을 모르고, 넋 놓고 행동하는 우리들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런 얘기다.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이 얼마나 무지하고 더러운 인간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셨는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법궤는 오래전부터 바로 그 사랑의 증거로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 언약으로 인해 그들은 지금까지 그나마 하나님 임재를 누릴 수 있었다. 그 법궤로 인해 죄인들도 그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 법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 계획 속에서 웃사와 같은 죄인은 배제된 것이 아니라 포함되어 있었다. 기실 그 법궤와 거기에 담긴 언약은 웃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도 모르는 인간을 위해 말이다. 그들이 아직 연약하고 원수되고 죄인되었을 때, 본문의 그림으로는 웃사가 자신이 어느만큼 죄인인지도 모르던 그때에 하나님은 이미 그 언약궤를 주셨고,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 아들을 내어주고 계셨던 것이다. 웃사는, 오늘도 그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 이미 수 없이 죽고 또 죽어야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게 한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성제 목사의 설교영상 보러가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역사적...
by 고상섭
2023-11-02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현재까지 이스라엘-하마스 사이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 종교적 이권 다툼 속에서 선량한 사람들까지 희생당하는 고통의 현장을 보고 있다.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한 손에 성경을, 또 한 손에 신문을 들라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이 문제를 역사적 시선과 성경적, 신학적 시선 모두를 통해 바라보아야 한다. 앞으로 두 차례의 글을 통해 역사적인 시선과 신학적인 시선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하마스를 지지한다는 대학가의 움직임과 개인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다. 미국 쪽의 기사나 목회자들이 쓴 글들은 대개 이스라엘을 호의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 안에서도 비슷한 입장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서 선과 악의 구도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단순한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신학적 뿌리가 있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중동의 역사중동지방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오스만제국이 통치하던 하나의 나라였다.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지만 한 국가 안에 있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제국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와 동맹국 편에서 이 전쟁에 참여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의 연합군에 패한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후 현재의 아랍 22개 국가가 분리, 형성되었다. 한 나라를 여러 나라로 임의로 나누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나누어진 한 나라 안에 다양한 종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고, 또 민족이 여러 국가로 쪼개져 편입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현재 이라크는 같은 이슬람을 믿지만, 이슬람의 지도자를 선발하는 방식 등 여러 면에서 차이가 큰 시아파와 수니파가 각각 60퍼센트, 3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기타 종파들도 3%). 수니파 중에서도 아랍권이 20퍼센트, 쿠르드 민족이 17퍼센트를 차지하는 등 한 나라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있어서 서로 간의 이권 다툼 등으로 내전이 반복되는 상황이다. 그들의 종교적, 정치적 이권들이 개입되어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이라는 나라를 임의로 나눈 것이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이스라엘은 기원전 1세기경에 하스몬 왕조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66년부터 세 번의 유대 전쟁을 통해 독립을 꿈꾸었지만 로마 제국에 진압되었고, 그 과정에서 티투스 장군에 의해 현재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이방인의 뜰 부분의 서쪽 담장만 남아 있고, 성전이 무너졌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에서 축출되어 여러 나라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시작된다. 나라를 잃어버린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다양한 핍박을 받고 편견과 오해에 극심하게 시달렸다. 특히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은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의 서러움을 폭발시켰다. 포병 대위 드레퓌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명을 쓰고 재판에 회부되어 감옥에 가게 된다. 러시아에서도 반유대주의의 확산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았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열망은 결국 시온의 땅, 곧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자는 ‘시온주의운동’으로 이어진다. 이 운동은 테오도르 헤르첼이 ‘유대국가’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급물살을 탔고, 이런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벨푸어 경이 시온주의운동의 재정 후원자 로드 차일드 가문에 편지를 보내 영국에 재정을 후원해 주면 유대인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벨푸어 선언’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벨푸어 선언’은 이전에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인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맥마흔 선언’과 상충하기 때문에 영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맺었던 두 개의 조약이 지금의 중동 전쟁의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었다. ‘벨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시온주의는 점점 확산하였고,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긴장이 시작될 무렵 1948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가결한다. 이스라엘은 유엔의 결의안을 따라 독립을 선포했고, 팔레스타인은 반대했다. 팔레스타인으로서는 2,000년 동안 자신들의 땅이었던 터전에 이스라엘이 과거에 자신들이 살았던 땅이라며 나라를 세우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은 유엔의 분할안을 거부하면서 결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에에 전쟁이 벌어졌다. 3차까지 이어진 중동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인근 아랍 국가의 상당한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스라엘은 현재까지도 그 점령지에 유대인 정착촌을 세우는 등 그 땅들을 차지하고 있다. ‘두 국가 해법’과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해결책으로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 등장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 자기의 영토에서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는 것이 두 국가 해결론의 핵심이다. 이 해결책은 시간이 흘러 1993년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아라파트 의장이 미국의 빌 클린턴의 중재로 맺은 오슬로협정으로 이어졌다. 이 협정으로 세 지도자는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의 극우파들은 이에 반발했고, 결국 이스라엘 라빈 총리는 이스라엘 극우파에 의해 1995년 11월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뒤이어 이스라엘에서는 우파 연합의 강성 지도자인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가 되면서 중동 문제는 다시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스라엘 극우 세력은 그들의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을 전부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이들의 지지를 받는 강성 정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해 나갔다. 정착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이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와 있으며, 이로써 분쟁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착촌은 국제법상 불법이지만 시온주의를 신봉하는 종교적 유대인들을 계속해서 정착촌으로 이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하마스의 공격은 규탄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단순히 선량한 이스라엘에 하마스가 이유 없이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팔레스타인이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는 갈등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과 악의 구도로 나누지 말라 중동지역은 오스만제국이 소멸하면서 여러 국가로 나뉘어졌고, 한 국가 안에서도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뒤섞여 살기 때문에 갈등과 내전이 빈발하지만, 같은 이슬람권 또는 아랍권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공통의 적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할 때는 전 아랍이 연합하여 공격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2023년 10월 17일 가자지구에 있는 알하흘리 병원 폭발 사건은 하마스의 오발이라는 주장과 이스라엘이 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아랍과 협상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스라엘의 전략이라는 주장 등 여러 설이 난무한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이유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단일 사건이 아니라 복잡한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 이유도, 단순히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전체 아랍국가의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마스가 예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민간인을 습격하고 인질로 잡아간 반인륜적 행위이기에 철저한 보복과 공격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마스 입장에서는 자신의 터전을 무단으로 장악하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만행에 대한 정당한 저항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공격과 정착촌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국민들은 무장단체 하마스를 정식 투표를 통해 정당으로 인정해 주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 이 전쟁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위험성 때문이다. 세계적인 헤지펀드를 운영하고 있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1년 일찍 예측한 것으로 유명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CEO 레이 딜레오는 그의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서 역사는 반복적인 빅 사이클을 가진다고 분석한다. 강대국이 무너지고 다른 신흥강국이 들어서는 일이 반복되는데, 특히 사이클의 마지막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폭동이 일어나거나 전쟁을 통해 강대국의 종말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국가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외부와의 전쟁을 통한 사이클이 반복되는데, 이 기간이 150-250년 정도이고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절대로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는 않지만,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에서 경제적 갈등에서 촉발된 분노가 외부의 전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한다. 특히 경제가 힘들어지고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지면 내전 또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고 서로 감정적으로 공격하게 되면서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레이 딜레오의 분석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메시지를 담고 있다. 존 스토트는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그리스도인은 화평케 하는 사역으로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기에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쟁과 다른 나라의 갈등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미래를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균형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고 평화의 본을 보이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권고한다. 또한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공적 토론의 장에서 평화를 위해 애써야 하는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음을 알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세계 곳곳에 벌어지는 기근과 전쟁의 소식들은 모두 세계를 품고 기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너무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현실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방산 회사 주식이 올랐다는 기사가 있었다. 모든 나라들이 자기네 나라의 이권을 먼저 생각하는 삭막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어려운 시기이기에 더욱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느 한 나라를 지지함으로 선과 악의 구도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중동지방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잘못된 유대 민족주의를 버리고 팔레스타인을 인정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도 더 이상의 무력 충돌과 전쟁이 아닌 타협점을 찾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때이다. 종교와 정치적 이권이 뒤섞인 인간의 탐욕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이 뿌리 깊은 갈등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넘어 우리는 세계를 위해 기도해야 할 사명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오늘도 무릎을 꿇고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이다.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4)
목사가 목사 된 것은...오로지 주의 은혜
by 전재훈
2023-11-01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했을 때였습니다. 복학을 신청하러 학교에 갔는데 채플실 올라가는 계단을 시각장애인 학우가 혼자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팔을 내어 주고,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그 학우가 대뜸 ‘재훈이 형?’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인지 다시 봤지만 전혀 기억이 없어서, 나를 어떻게 아는지 물었더니,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도와드렸던 시각장애인 선배가 이맘때쯤 전재훈이 제대해서 도와줄 거라고 “예언”했다네요. 사람들은 대개가 도와줄 때 팔을 잡지, 자기 팔을 내어 준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나는 부모님이 시각장애인이셔서 몸에 밴 습관이라 팔을 내어 드렸던 것입니다. 자기 팔을 내어 주자 저를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 친구를 신대원 졸업할 때까지 6년간 도와주었습니다. 신대원 다닐 때는 장애인신학연구회를 맡아서 장애인 학우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길을 가다가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팔을 내어 드리고 가는 곳까지 안내해 드립니다. 신대원 졸업할 때 시각장애인 교회에서 전도사로 와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받았으나 전부 거절했습니다. 장애인들을 잘 알고 그들을 돕는 법도 알지만, 하기가 싫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장애인 사역으로 부르시지 않는다고 믿었고, 그냥 평범한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장애인들을 돕다가 지쳤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사역을 감당하려면 장애인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사역에 대한 소명이 확실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장애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목회자가 소명 없이 일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만, 특수 사역이라고 부르는 일들에는 그만큼의 특수한 소명이 필요한 법이지요.최근에 목사 안수식에 갔다가 들은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목사님들을 대접하려고 집에서 기르던 개를 끌고 다리 밑으로 갔습니다. 개를 죽이기 위해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는데, 그만 빗맞아서 개가 도망갔습니다. 할 수 없이 개를 포기하고 닭이나 몇 마리 잡아서 보신탕 대신 삼계탕으로 목사님들을 대접하셨지요. 그리고 집에 돌아가 보니 도망간 그 개가 집에 와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보면서 반갑게 꼬리를 치면서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 개를 보면서 장로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죽이려 했는데도 그런 자기를 주인으로 알고 여전히 꼬리치는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목사님이 목사안수를 받는 분들에게 이 개처럼 충성해야 한다고 권면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지요.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 땅의 부귀영화를 바라고 사는 것은 아니기에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분명한 자기 확신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개처럼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보내시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는 헌신과 이름도 빛도 없이 살겠다는 희생정신이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나는 장애인 사역과 선교사로만 부르지 말아 달라는 조건부 헌신을 했던 전도사로 그런 면에서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최소한 소수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을 보고 자신도 성공하려고 목사 안수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솔직히 나는 할 수만 있으면 큰 교회를 하고 싶었고,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화성에서 평범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섬기고 있지도 않고, 선교사로 나갈 마음도 여전히 없습니다. 큰 교회에 대한 동경과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도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 안수를 받을 때와 비교하면 변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그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는 목사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한 바울처럼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기 일을 버리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종은 자기 일도, 자기 시간도, 자기 소유도 없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또한 목사는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대로 주님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자나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개념에 목사의 지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는 성도들보다 조금 높고 하나님보다는 조금 낮은 존재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예수님만큼은 아니어도 성도보다 좀 더 거룩해야 한다고 느꼈고, 집사님이나 장로님보다는 더 신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권사님보다 1분이라도 더 기도해야 하고, 구역장보다 한 장이라도 성경을 더 읽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성도가 21일 작정 금식기도를 하면, 목사는 40일쯤은 해야 하고, 성도가 방언하면, 목사는 통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목사로 살면서 느끼는 긴장감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종 주제에 자기 시간과 소유가 많다는 것이 죄책감으로 작용했고,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이유로 돈의 유혹에 너무 약한 것도 불편했습니다. 거룩해 보이고 신령해 보이는 성도들과 경쟁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세속적인 오락과 쾌락에 눈이 돌아갈 때마다 거부할 힘이 없어 몰래 숨어서 해야 하는 숨바꼭질도 상당한 스트레스였습니다. TV에 걸그룹이 나올 때 눈을 떼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고, 컴퓨터로 영화를 보다가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다가도 누가 오면 성경 보고 있었던 것처럼 쇼할 때마다 ‘나는 가짜다’라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목사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돕는 것이 아무런 보상 없이 그저 나의 희생과 헌신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매우 힘들게 했습니다. 차라리 다른 일을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잘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학원 강사라도 했더라면 아내를 공장에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거, 갖고 싶다는 거 다 사 주고, 남들 다 가는 학원에 우리 아이들도 보낼 수 있었을 거라 여겼습니다. 나와 내 가족이 다 희생하면서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보상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이 땅에서 거지같이 살아도 하늘에서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으니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는 말에 발끈해서, 천국은 들어가기만 하면 됐지 무슨 면류관이냐고, 차라리 이 땅에서 돈으로 바꾸어 쓰게 미리 가불해 줬으면 좋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천국은 가게나 매장도 없을 텐데 거기에 보화가 있다고 한들 어디에 쓰겠냐고 하면서, 이 땅에서나 유용한 것이니 쓰다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지요. 내 마음 구석진 곳에 하나님을 장애인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느꼈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은 인정도 안 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럴 바에야 뭐하러 목사 할까 싶어도, 쉽게 그만두지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목회가 하나님의 일에서 나의 일로 슬며시 바뀌면서 교회가 내 사업장이 되고, 성도는 고객이 되었으며, 헌금은 내 수입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상품이 되었고, 십자가는 인테리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에서 하나님과 동업자로 바뀌더니, 심지어는 주객이 전도되어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이 나의 동역자가 되는 이상한 목회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할 주님이 영리법인, ‘(주)예수 그리스도’가 되어버렸습니다.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을까 고민하면서 깨달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였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셈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내가 목사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했고, 나를 목사님으로 불러주는 성도들이 내게 필요한 존재였습니다.대학가 한복판에서 꼭 필요한 직업을 묻는 설문 판을 만들어 세워 둔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쪽은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 20개를 나열하고, 다른 쪽에는 ‘없어도 되는 직업’ 20개를 나열한 뒤 스티커를 붙이게 하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 미용사, 건축가, 일용직 근로자, 택시 기사 등을 목사와 함께 두면, 20개의 직업 중 목사는 몇 위쯤 할까요?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에서는 하위권에, ‘없어도 되는 직업’에서는 상위권에 오를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부르신 종이나 동역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사가 성도보다 거룩하거나 신앙이 좋아서 특별히 선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성도를 돌보는 일도 목사가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전도하고 가르쳐 회개시켜서 구원받게 하고, 예배와 설교를 통해 은혜받게 하고, 제자 양육으로 성화하도록 하는 일도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고전 3:7).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는 찬양처럼, 내가 목사가 된 것은 나의 헌신과 희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을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목사가 되려고 했었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목사가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행복한 목사가 되게 하시려고 인내심 많은 성도님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목사로서 하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나에게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목사도 그저 당신의 어린 양일 뿐이고, 사랑받아야 할 당신의 자녀였습니다. 목사 안수식 때, 선배 목사님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며 충성된 목사가 되려고 하셨는지를 설교하거나 권면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으로 그 자리까지 오게 되었음을 고백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예비 목사님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며 희생과 헌신을 결단하도록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으로 예비 목사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해 주면 좋겠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워지고, 성도님들이 계셔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가톨릭! 그러나 ‘로마’는 아니다
교회를 사랑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by Matthew Barrett
2023-10-31
종종 마르틴 루터를 로마 성문을 향해 돌격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격렬한 시위자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캐리커처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루터는 종파주의자도, 분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교회를 분열시키지도 않았다. 더더욱 로마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은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로마가 마침내 가톨릭(보편) 교회의 풍부한 유산을 드러내는 더욱 현대적인 혁신의 시대로 전환했다고 확신했던 루터의 원래 의도는 내부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의 생각은 그가 내건 95개조 반박문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반박문을 제시한 이유가 공개 토론을 위해서였지만, 서두에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그것을 밝히려는 열망”이었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밝혔다. 루터의 반박문은 열정, 심지어 심각한 경악까지 드러내고 있지만, 그의 대담한 불만 뒤에 숨은 더 깊은 동기, 곧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로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다. 면죄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면죄부의 남용은 루터가 이 95개조 반박문을 쓰도록 자극했다.당시에 반박문을 작성하고 게시하는 게 참신한 건 아니었다. 루터가 토론을 위해서 이런 식의 글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관행이 루터의 독점물도 아니었다. 중세의 많은 이들이 비슷한 행동을 했다. 아마도 루터는 앞서 살았던 여러 사람을 모방한 것 같다. 이건 루터가 일으킨 자극을 경시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의도한 게 대중의 반란이 아니라 학문 논쟁이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요한 테첼(Johann Tetzel)의 면죄부 설교를 주관했던 브란덴부르크 대주교 알베르트(Albert of Brandenburg)에게 이 반박문을 보냈다. 그 외에 여러 친구에게도 보냈다. 그리고 서서히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루터의 궁극적인 목표가 학문 논쟁이 아니라 구원 자체만큼 중요한 어떤 문제에 대한 공개적이고 목회적인 해명이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적 관점을 반영하는 그의 반박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죄에 대한 회개와 형벌루터의 첫 번째 논제는 마태복음 4:17에 대한 로마의 해석에 도전한다. “우리의 주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의 삶이 되기를 바라셨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죄인에게 “참회하라”(라틴어는 poenitentiam agite 명령했다고 생각했다.루터는 죄에서 돌이키라는 단순한 명령을 면죄부를 포함한 로마의 전체 참회 제도로 독해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회개하라”라는 대체 번역을 선호했다.그는 “이 단어는 성직자가 집전하는 고해성사, 즉 고백과 속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라고 썼다. 오히려 그것은 “오직 내면의 회개”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한 경험을 바탕으로 루터는 외적인 열매가 없는 “회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육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외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내적 회개는 무가치하다.”죄에 대한 언급에서 루터는 죄가 주는 자책감과 죄의 형벌에 대한 로마의 구별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남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터는 마치 교황이 그리스도인을 모든 죄의 형벌에서 전부 없애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교황에게 호소하는 것을 반대했다.더욱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라면 결코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모든 면에서 그를 겸손하게 하시고 그의 대리자인 제사장에게 복종하게 하지 않는 한 누구의 죄도 사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했다.1517년까지만 해도 루터는 사제직에 관한 로마의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제들, 특히 연옥의 개념을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며, “죽는 사람의 경우에 연옥을 들먹이며 성경의 형벌을 유보하는 사제들은 무지하고 사악하게 행동한다”고 지적했다.루터가 “형벌은 진정한 회개를 시험하기 위해 죄 용서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부과되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통 알려졌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 점은 루터를 끝없이 괴롭힌 문제였다. 아마도 루터는 일단 용서받으면 처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반 교회 신도들에게 비슷한 말을 했을 수는 있다. 연옥과 면죄부루터는 연옥에 대한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테첼 같은 연옥 설교자들은 연옥의 목적을 전달하려고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사용했다. 루터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이 줄어들고 사랑은 늘어나는 것 같다”라고 썼다.루터는 모든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잘못된 인도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교황이 “모든 형벌의 전면적 용서”를 허용했을 때, 그가 “실제로 의미한 건 ‘모든 형벌’이 아니라 교황 자신이 부과한 형벌만을 의미했다.”루터는 한탄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든 형벌에서 면제되고 교황의 면죄부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테첼 같은 연옥 설교자들이 면죄부 구입으로 연옥에서 즉시 석방될 것이라고 약속하며 거짓말을 선포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돈이 상자에 딸깍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탈출한다는 인간의 교리만을 설교한다”라고 썼다.돈 상자가 많아질수록 ‘욕심과 탐욕’은 더욱 커졌다. 자기가 하는 회개가 진짜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면죄부로 인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사해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겠냐며,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했다. 의분에 불탄 루터가 면죄부 탁자를 뒤집었을 수도 있다. “면죄부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가르친 교사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불타는 언어, 목자의 마음루터의 강한 언어인 ‘저주’는 그의 목회적 혐오감을 전달했다. 면죄부를 살 만큼 충분한 돈만 있다면 회개 여부에 상관 없이 언제라도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인들은 면죄부 테이블을 향해서 달려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강간한 사람도 면죄부만 있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 “미쳤다!”라고 루터는 소리쳤다. “이 얼마나 끔찍한 참회 시스템의 남용인가? 진정한 참회와 관계없이 또 어떤 죄를 지었는지와도 아무런 상관없이 마치 죄에 대한 일시적인 형벌에 대한 속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마음의 진정한 성화를 희생시키는 값싼 은혜라고 확신했기에 루터는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했다.그리고 루터는 테첼 같은 설교자들을 화나게 했을 논제를 내놓았다. “진정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용서받을 권리를 가진다.”“조심하기”를 거부한 “교황의 면죄부” 설교자들은 평신도들에게 다른 “사랑의 선행”은 덜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루터는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루터는 면죄부 제도 전체를 뒤흔들었고,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의 동기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가치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가톨릭, 그러나 로마는 아니다!루터는 교황이 면죄부 사건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을까?처음만 해도 루터는 교황의 선의를 믿었다. 면죄부가 어떻게 남용되는지를 알기만 한다면, 교황이 앞장서서 면죄부 판매와 구매를 중단하리라 생각했다.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이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를 안다면, 양의 가죽과 살, 뼈로 세워지는 성 베드로 대성당 대신 그는 차라리 그 성당이 불타서 재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자신이 얼마나 틀렸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종교개혁 여정 중 이 시점에서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완전히 거부한 게 아니었다. 단지 교황의 권위를 분명하게 했는데, 즉 그 권위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남용될 것을 두려워했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일반 주교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한은 모든 주교나 큐레이터가 자신의 교구나 성당에서 신도들에 관해서 갖고 있는 권한과 동일하다.”루터는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받아서 교황에서 물려준다는) 열쇠에 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했다. “교황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열쇠의 권능이 아니라 양을 사랑하는 중보의 마음으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사죄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 95개조 반박문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데 있어 아직 초심자였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그가 나중에 포기한 신념도 여전히 담겨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의 핵심 우려는 분명히 담겨있고, 그 반박문이 올바른 손에 쥐어졌을 때 폭발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루터의 진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단지 교회의 진정한 유산을 회복함으로써 교회를 갱신하려는 중세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때가 다다랐을 때, 그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로마에 종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글은 Zondervan Academic과 협력하여 출판되었으며 Matthew Barrett의 The Reformation as Renewal: Retrieving the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Zondervan, 2023년 6월)에서 간추렸다.원제: Catholic, Not Roman: Luther’s Ninety-Five Theses of Love for the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그는 현대판 ‘하나님의 도성’을 쓰고 싶을 것이다
by Chris Watkin
2023-10-30
기독교 고전 재발견C. S. 루이스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불고 있는 깨끗한 바닷바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스쳐 지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리고 루이스에 따르면 그건 오로지 “오래된 책을 읽어야만 가능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잊고 지낸 기독교 고전을 재발견하는 시리즈(Rediscovering Forgotten Classics series)를 시작한다.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도움을 주는,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기독교 고전을 하나씩 찾아나갈 것이다. 이와 닮은 주제를 크리스 왓킨은 그의 신간 Biblical Critical Theory: How the Bible’s Unfolding Story Makes Sense of Modern Life and Culture(성서 비평 이론: 성서 속 이야기를 통해 현대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에서 탐구한다. TGC 편집장 콜린 핸슨은 이 책을 “내가 읽은 최고의 책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자, 다음과 같은 사회를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무런 논리도 없이 오로지 상대를 향해 소리만 지르는 완강한 파벌로 쪼개진 사회. 자유와 개방성에 대한 자축에 가까운 수사학으로 시대가 숭상하는 우상을 향한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 압박을 교묘하게 가리는 사회. 엘리트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 및 경제 세력의 공모가 판을 치는 사회. 그리고 미신을 따르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역사의 올바른 편”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정작 수많은 기괴한 미신과 오래된 편견으로 가득한 사회. 이런 사회,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지 않은가?5세기 로마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유명한 사회 및 정치 이론서 하나님의 도성을 집필할 당시의 로마는 말 그대로 복잡하고, 비틀거리고, 분열되고, 자기모순에 가득 찬 사회였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이 책은 당시 로마 상황을 반영하는 현대 사회를 향한 문화적 비평에 필요한 강력한 틀을 제공한다. 다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걸작에서 뽑은, 그리스도인이 현대 문화에 참여하는 방식을 심화하고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여섯 가지 도구이다. 1. 안에 머무는 아웃사이더가 되라아우구스티누스는 단지 후기 로마 문화에 대한 이런저런 목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로마 문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의 글은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카르타고와 로마에서 수사학을 강의했고, 진심을 담은 경외감으로 키케로를 인용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 책을 쓴 건 단지 당시 쇠퇴하던 로마 문화를 부당하게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로마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화가 왜 그토록 찬란했던 건지,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시에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현대 알제리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출신인 그는 그리스도인 어머니와 이교도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무엇보다 그를 로마 문화의 외부에 두는 요소는 바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참여라고 할 때 보통 “민감한 인사이더” 또는 “용감한 아웃사이더” 중에서 선택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일반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2. 문화 전체를 다루라아우구스티누스는 후기 로마 문화 내에서도 고립된 경향만을 따로 떼어내서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심오한 구조와 근본적인 가정을 탐구했다. 즉 문화의 악덕만 아니라 미덕까지, 철학만 아니라 경건까지, 그리고 대중적 오락만이 아니라 정치적 환경까지 고찰했다. 하나님의 도성은 어떤 특정한 문화 도깨비를 박멸하기 위해서 뛰어든 특수기동대가 아니다. 이 책은 로마 사회 전체의 길이와 폭을 다 아우르는 경찰 전체의 감시망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까지 그 누구도 이런 작업을 한 사람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자 찰스 매튜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도성은 특정 사회 환경 속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성찰하지 않는 현실을 대상으로 누군가 오늘날 비판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포괄적인 모든 사회이론과 비판이론의 뿌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3. 성경 전체를 다루라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몇 구절과 애용하는 기독교 교리 몇 가지를 가지고 로마 문화를 다루지 않았다. 하나님의 도성 11-20권에서 그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개관한다. 그리고 성경이 어떻게 로마가 가진 각종 해괴망측한 믿음을 대체할 수 있는 일관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지 보여준다. 성경은 문화적 범주에 끼어들지 않고 성경만의 방식으로, 성경만의 강조점을 제시하며 독창성 있게 스스로를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은 일부 현대 패러다임과는 달리 창조, 죄, 심지어 구속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의 문화 비평은 일관되게 성경적 균형을 유지한다. 4. 표면 아래를 살펴보라아우구스티누스의 문화 비평은 전혀 얄팍하지 않다. 그는 문화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분석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표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밝히기 위해 지각판을 파헤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구조 분석의 핵심은 사랑이다. 두 도시가 두 가지 사랑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실제로 사랑은 사상보다 더 깊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영혼을 움직이는 건 사랑이고, 몸을 움직이는 건 무게이다.” 문화 사상과 행동 또는 태도를 접할 때 그의 반사적인 반응은 “이것이 드러내는 건 어떤 사랑인가?”라는 질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문화를 고찰할 때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예리한 질문이다!5. 대립과 성취 사이의 잘못된 선택을 거부하라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도시 사이의 대립만을 보는 그리고 하나님의 도시가 지상 도시의 가장 깊은 갈망을 어떻게 충족시키는지만 보는, 쌍둥이처럼 닮은 두 가지 함정을 피한다. 더불어서 대립과 성취 차이를 애매하게 가로지르는 미지근한 타협도 피한다.그의 독특한 전략은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를 통해서 놀랍도록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영광”은 로마를 특징짓는 가치였다. 로마가 적을 어떻게 정복하고 멸망시켰는지를 보면 로마의 영광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로마의 영광은 결코 기독교의 미덕이 아니었다. 만약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날 책을 쓴다면, 그 책은 현대인에게 가장 감각적으로 다가갈 단어를 써서 이런 식으로 시작할 것이다.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해방된 이가 그리스도인이다.” 또는 “나의 하나님은 당신보다 더 깨어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언어는 선을 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신은 지금 현대 문화의 상징인 Kool-Aid를 마신 거요[Drink the Kool-Aid: 무언가를 심각할 정도로 믿는다는 뜻의 은어_편주]. 그런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됩니다. 불필요하게 도발적이고 잠재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로마인과 어울리다가 같이 망하지 말고 그들로부터 탈출하세요!”그러나 이런 식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영광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가 로마가 말하는 영광의 정의와 정반대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영광은 자신을 높이고 노예를 거느리는 가이사의 영광이 아니다. 자신을 비우고 남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영광에 대한 호소는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는 화려한 시발점으로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로마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영광을 가장 깊고 진실하게 실현하는 형태로서 설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광에 대한 로마의 이해는 한낱 뒤틀린 환상에 불과하며 로마 안에는 진짜 영광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은 성경의 패턴을 따른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함을 세상 지혜와 철저한 대조(20-23절)인 동시에 세상 지혜가 추구하는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25, 30-31절)로 제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 선포를 대조 또는 성취 중에서 선택할 이유가 없다. 복음은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6. 교회와 문화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라아우구스티누스가 주는 마지막 교훈은 하나님의 도시와 지상의 도시가 현시대에는 서로 얽혀서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최종 심판의 날 완전히 분리될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대조를 강조하는 문화 비평의 접근 방식은 두 도시를 완전히 별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문화가 형성하는 여러 방식에 무지하기 쉽다. 반대로 지나치게 성취를 강조하는 접근 방식은 두 도시를 근본 가치에서 동일한 대안의 표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복음 외에는 세상을 향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선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여주는 성경의 틀은 우리가 굳이 감당하기 힘든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도 두 도시는 여전히 얽혀 있다. 세상 “문화”는 결코 문밖에 서서 교회가 문을 열어주기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 좋든 싫든 세상 문화는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형성한다. 동시에 전혀 다른 운명을 가진 두 도시의 운명은 후기 현대적 사고방식이 아무리 편안하게 느껴지더라도 이 세상은 결코 본향이 아니고 우리는 세상을 비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행여라도 우리가 후기 현대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우리 시대에 성경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민감함을 잃지 않고 현대 문화 속에 참여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청사진을 제공한다. 지난 세월, 이 책이 가진 광채를 모방하려는 작가가 적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능가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도성아우구스티누스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역사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도성은 가장 위대한 신학 저서 중 하나이다. 로마제국이 무너지기 직전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쓴 이 책은 로마의 고대 이교, 그리스 철학자의 주장, 그리고 성경의 계시를 고찰한다. 로마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정치 경험을 뛰어넘어 영원히 지속될 시민권을 제공하는 하나님 나라 시민이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도성은 기독교 발전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저작 중 하나이다. 원제: Augustine Could’ve Written ‘City of God’ in 2022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도성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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