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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 복음’ 팩트체크
by Joe Carter
2023-11-21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번영 복음 관련 신앙을 믿는 교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Lifeway Research 이사 스코트 맥코넬은 “지난 오 년 동안 훨씬 더 많은 교인의 신앙이 사실상 번영 복음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축복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이단적인 믿음도 포함된다”라고 말한다. 맥코넬이 지적한 것처럼 문제는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축복을 주신다는 생각(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제공되는 모든 좋은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롬 8:32])이 아니라, 그런 축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무슨 일이라도 다 해야 한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있다. 번영 복음에 관해 알아야 할 아홉 가지는 다음과 같다.1. 번영 복음은 다양한 이름과 브랜드를 자랑한다.번영 복음은 “건강과 부의 복음” 또는 “원하는 것을 선포하고 쟁취하라” 등의 용어를 다 포함하는 모든 신학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많은 사람에게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는 “믿음의 말씀” (Word of Faith) 운동이다. 이는 실로 엄청난 추종자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현대 기독교 운동이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재정적으로 번영하고 신체적으로 복지를 누리기를 원하며, 믿음과 긍정적인 말, 특정 기독교 사역처에 대한 헌금이 바로 이 두 가지 축복을 증가시키는 비결이라고 가르친다. 다음은 스티븐 헌트의 설명이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육체적 건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에 관한 교리는 번영 복음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최전선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건강과 부”가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동으로 갖는 신성한 권리이며, 이런 축복의 결과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 패키지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단지 죄만이 아니라 질병과 빈곤도 함께 제거했기 때문이다. 2. 번영 복음은 신사상으로 알려진 신비주의 운동에 뿌리를 둔다.신사상(New Thought) 운동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정신철학이다. 명시적으로 기독교 사상은 아니지만 기독교뿐만 아니라 동양 철학, 형이상학적 전통, 심리학 및 자기 계발 같은 신흥 분야의 영향을 받았다.이 운동은 긍정적 사고(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상황을 가져온다는 믿음), 끌어당김의 법칙(좋아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것을 끌어당긴다는 생각, 바라는 것을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그리면서 오로지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그 결과, 바라는 결과를 이뤄내는 환경을 갖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마음에는 몸을 치유하고 번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신사상은 기독교 신비주의와 성경의 요소를 통합하지만, 이를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해석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같은 성경 구절은 흔히 끌어당김의 법칙을 확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신사상은 힌두교, 불교 및 기타 동양 철학의 사상까지 통합해서 혼합적인 영적 틀을 만든다. 3. ‘번영 복음의 아버지’는 오클라호마 출신의 신유 설교자이다.현대 번영 복음 교육의 아버지로 여겨질 수 있는 사람은 오랄 로버츠(Oral Roberts)이다. 1918년 오클라호마 폰토톡 카운티에서 태어난 로버츠는 20세기 중반에 명성을 얻었으며, 오늘날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기독교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다. 가난하게 자랐고 십대 때 결핵으로 고생했던 그는 부흥회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된 후 자신의 삶을 기독교 사역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복음 전파의 매체로서 텔레비전의 잠재력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 시청자는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 신유 은사를 가진 이 복음 전도자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Oral Roberts University라는 학교를 시작했다. 전성기 시절에 그는 연간 수익 1억 1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사역을 총괄했다.4. “믿음의 말씀”이 번영 복음 전파에 큰 역할을 했다. 로버츠가 신사상 원리와 신유 은사를 결합한 최초의 사람 중 하나라면, 번영 복음의 가장 저명한 전도자이자 “믿음의 말씀” 운동의 아버지는 케네스 E. 해긴(1917-2003)이다. 1962년에 해긴은 Kenneth Hagin Ministries를 설립하여 믿음의 말을 선포함으로 건강과 부, 기타 축복을 불러올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파했다.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의 하나는 로고스(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와 레마(입을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의 구분이다. 그는 레마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활성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셀 우드브리지가 말했듯이,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믿음의 말씀 운동이야말로 20세기 후반에 미국 전역에 번영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5. “씨앗 믿음”이 번영 신학 운동의 초석이다. “씨앗 믿음”(seed-faith) 교리는 번영 복음 설교자의 사역에 금전으로 기부하는 것이 결국 축복의 수확을 가져올 씨앗을 심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믿음의 행위로 사역에 금전의 “씨앗”을 뿌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금전의 번영, 육체의 치유 또는 기타 형태의 은혜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축복의 형태로 그 씨앗을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주장은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헌금을 통해서 더 긴밀해지는 거래 관계라는 것이다. 로버츠는 세 단계 모델을 사용하여 씨앗 믿음 개념을 분명하게 했다. (1) 씨앗을 심는다: 가치 있는 것(보통 돈)을 사역에 씨앗으로 심는다. (2) 기적을 기대한다: 당신의 헌금이 하나님의 개입을 촉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 (3) 기적을 거둔다: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그 축복은 종종 물질적 또는 재정적 형태로 주어진다. 6. 텔레비전이 번영 복음 전파에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텔레비전을 활용하여 예배와 기독교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방식인 텔레벤절리즘(Televangelism)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방송 규제가 완화되고 케이블 TV가 확대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텔레비전 전도사 중 다수가 번영 복음 운동 및 그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로버츠는 많은 청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 매체를 사용한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한때 그의 비행기를 조종하고 또 자동차 운전사였던 케네스 코플랜드도 나중에 가장 악명 높지만 (가장 부유한) 번영 설교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로버츠와 코플랜드는 짐과 타미 베니커(Jim and Tammy Faye Bakker), 베니 힌 (Benny Hinn),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로버트 틸튼(Robert Tilton), 그리고 프레드 프라이서(Fred Price)를 포함하여 19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린 텔레비전 전도사들을 위한 길을 열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조엘 오스틴(Joel Osteen), 크레플로 달러(Creflo Dollar), 조이스 메이어(Joyce Meyer), T. D. 제이크스(T. D. Jakes), 그리고 폴라 화이트(Paula White) 등 가장 저명한 번영 복음 지도자들도 TV를 통해서 먼저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7. 번영 복음은 성경의 가르침, 특히 부와 고통에 관한 내용을 무시한다. 많은 기독교학자와 윤리학자는 물질적 번영에 초점을 맞춘 번영 복음이 겸손, 연민, 고통의 당연함을 강조한 예수의 가르침을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존 파이퍼 목사는 2005년 11월 1,000명이 넘는 대학생 모임에서 “나는 당신이 번영 복음, 즉 건강, 부, 돈을 가져다준다는 그런 복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했다. “아주 미워합니다.”2014년에 파이퍼는 번영 복음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여섯 가지 핵심 사항을 정리했다. ·고난의 성경적 필요성과 고난의 당연함에 관한 진지한 교리의 부재· 자기 부인이라는 명확하고 두드러진 교리의 부재· 성경에 대한 진지한 설명의 부재· 성경 속 긴장을 다루지 못함· 사치를 즐기는 교회 지도자들· 자기의 탁월함을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소외시키는 것8. 번영복음 신앙은 미국 신자들 사이에서 흔하다. Lifeway Research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 개신교 신자 중 절반 이상(52%)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 지도자가 교회 또는 자선 단체에 더 많이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더 크게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리고 네 명 중 한 사람(24%)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2017년 연구에서는 같은 질문에 38퍼센트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재정적으로 번영하기를 원하신다고(76% 대 69%),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45% 대 26%) 믿을 가능성이 2017년보다 더 높아졌다. 오늘날 교인 넷 중 셋(76%)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재정적으로 번영하기를 원하신다고 믿고 있으며, 그중 43퍼센트는 그 주장에 강력하게 동의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 응답자는 무려 45퍼센트였으며, 21퍼센트는 강력하게 동의했다.9. 번영 복음은 거짓 복음이다.2015년 The Gospel Coalition의 기사에서 기독교 윤리학자 데이비드 존스는 번영 복음 가르침의 다섯 가지 신학적 오류를 설명했다.· 아브라함 언약은 물질적 권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 예수님의 속죄는 물질적 빈곤이라는 “죄”까지 확장된다.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보상을 받기 위해 헌금한다. · 믿음은 번영으로 이끄는 스스로 만들어 내는 영적 능력이다. · 기도는 하나님께 번영을 달라고 강요하는 도구이다. 존스는 “성경에 비추어 보면 번영 복음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라고 말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빚어진 거짓 복음이다. 간단히 말해서, 번영 복음이 사실이라면 은혜는 쓸모없고 하나님은 무의미하며 만물의 척도는 사람으로 바뀐다. 아브라함의 언약, 속죄, 나눔, 믿음, 기도 등 무엇을 이야기하든, 번영 신학 전도사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돈으로 주고받는 거래 수준으로 전락시킨다.”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Prosperity Gospe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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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적’ 기독교: 우려와 희망
by 김선일
2023-11-2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올해 초에 인기 연예인 이승기씨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에게 좀 더 충격적인 소식은 원래 교회에 다녔던 그가 결혼을 하면서 처가의 종교인 불교로 개종한다는 것이었다. 모범적인 이미지의 그는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교회 오빠” 이승기가 “절 오빠”가 되었다는 아쉬움이 번졌다. 결혼과 함께 종교를 바꾸는 일은 한국에서는 흔하다. 종교 배경이 다른 남녀가 결혼한 뒤에 가족의 화목을 위해 상대방의 종교로 바꾸는 현상을 종종 본다. 이번에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사례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본 것 같다. 이처럼 가족의 화목과 일치를 위한 개종이 빈번하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종교보다 가족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선택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서 결혼과 함께 개종을 하거나, 혹은 부모의 영향으로 인해 종교를 갖게 된다는 것은 가족이 더 큰 종교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세우고 전하는 데 있어서 우려와 가능성을 모두 안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특징 중 하나가 가족 종교다. 그리고 가족 종교 현상은 계속 심화하고 있다. 가족 종교란 신앙이 가족 외의 다른 이들에게 전파되지 못하고 자기 가족 안에서만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처음 신앙을 가진 시기가 모태신앙인 경우는 10년 전보다 두 배나 높아졌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75퍼센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신앙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113-114). 즉, 성인 이후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율이 낮아진다는 것인데, 이는 가족 밖에서 신앙의 전파가 활성화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격적이고 진지한 결단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문화적 관습에 의한 명목상 신앙의 비율이 늘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유별나다.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지난 세기에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가족이었다. 가족 간 애정을 중시하는 문화는 어느 곳에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때로 혈연 가족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가족이 아니어도 나이 드신 분을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따뜻하고 예의 바른 관행으로 여겨진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이모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한국인의 가족주의 문화는 사회를 향해 더욱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것 같다. 건강한 가족 경험이 다른 이들을 향한 가족적 연대로 이어진다면 이는 성경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하다. 다만 불안과 불신 속에서 더 큰 사회를 외면하고 내 가족만 챙기는 가족 이기주의가 장애물이었다. 요즘에는 전통적 가족의 해체가 더 큰 문제로 떠오른다. 화목한 가족은 줄어들고 병든 가족은 늘어난다. 최근 유행하는 비혼 비출산의 풍조도 좋은 가족의 모델을 경험하지 못해서라는 뼈아픈 진단이 있다. 혈연 가족이 가족의 전부는 아니지만 사회의 가족적 연대를 위한 기초가 된다. 끈끈한 관계가 약해지고 느슨한 관계가 대세라고 하지만 인간에게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의 경험은 기본적인 생명력이다. 혈연 가족의 해체와 위기는 사회 전체의 정서적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가족적 연대가 상실되는 시대에서 종교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비기독교인 심리학자의 진단은 의미심장하다(한국인의 마음속엔 우리가 있다, 235). 가족주의적인 한국 사회가 가족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그로 인해 취약한 소속감과 연대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역할을 다시 일깨워 준다.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종교를 선택할 때 영향을 준다. 가족 간 종교가 다를 경우에는 더욱 신앙이 절실한 가족에게로 끌릴 수 있다. 과거에 비해서 신앙의 헌신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기독교는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서 신앙의 정체성이나 활동성이 훨씬 강하다. 신앙의 목적도 마음의 평안과 같은 개인적 유익보다 구원과 영생이라는 종교적 이유가 현저히 높게 나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복음적 신앙과 선교적 헌신이 필요하다. 믿지 않는 이에게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토대로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을 믿고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면 이는 비록 낯설지라도 신선한 도전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믿는 가족이 혼자만의 신앙에 그치지 않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하여 섬김과 관심의 삶을 보여 주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준다면 그것은 그들의 영혼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족을 섬기는 교회가족의 해체와 위기가 현실이 되는 이 시대에 교회는 인간 공동체의 기본인 가족을 섬겨야 한다. 성경은 혈연 가족주의나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을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의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라고 경고한다. 디모데전서가 교회의 직분과 목회적 소명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가족을 섬기는 의무는 교회의 중대한 사역이다. 인간은 가족 안에서 가장 원초적인 자기 정체성과 정서적 신뢰를 얻게 된다. 따라서 가족의 불안정은 인간됨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올바른 부부 관계와 자녀 양육을 지원하는 것은 설령 교회 성장을 위한 동기가 가미되었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서 화급한 과제를 맡는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교회의 가정사역이 소위 통념적인 ‘정상 가족’의 범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혼, 저출산, 이혼 등으로 인해서 다양한 가족 형태들이 등장하고 있다. 가족을 섬기는 교회의 사역은 생물학적 가족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이들을 사회적 가족까지 포괄하는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 사실은 교회 자체가 새로운 가족의 친교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러한 가족적 유대관계의 맥락 안에서 신앙의 전수와 나눔이 이루어질 때 교회의 선교적 역량은 가족이라는 관계망을 타고 넘쳐흐를 것이다. 교회를 섬기는 가족 로드니 클랩은 “기독교 가정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갈 때 선교 기지(mission base)가 된다”고 말한다(Families at the Croissroads, 61)고 말한다. 기독교 가정이 선교기지라는 말은 섬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족이 함께 단기선교에 가거나, 주변의 이웃에 열심히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실천도 포함될 수 있지만, 이는 기독교 가정이 혈연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을 확장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가족은 아무리 중요해도 그 자체가 하나님 백성 가족인 교회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유한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을 사모하며 그 나라를 알리고 넓히는 소명을 안고 있다. 기독교 가정의 건강성은 자기 혈육의 안정적이고 윤택한 삶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으로 품기 위한 사명과 능력을 양성하는 데 있다. 기독교 가정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선교적 사명에 응답하도록 지원하고 협력하는 곳이다. 화목한 가족만으로는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부응하지 못한다. 기독교 가정은 상호 섬김과 환대를 가족 내에서부터 가족 외의 이들에게로 확대하도록 부름 받았다. 몇몇 조사들에 의하면 새로이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의 상당수는 가족의 권유를 통해서 교회에 나온다(가족전도, 35-39).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데 있어서 가족적 요인이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 기독교가 가족 종교화되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가족을 섬기는 사역뿐 아니라, 가족에게 선교적 삶의 가치를 알리고 경험하게 한다면 한국의 가족 문화는 기독교 신앙을 지속시키는 토양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목포양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11-18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호남에 선교사들이 찾아든 것은 군산과 전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을 선교구역으로 정한 미국남장로교회 선교부는 1893년 입국과 동시에 군산으로 가서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를 찾았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동학혁명이 정읍, 김제, 전주를 점령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자 선교사들은 서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동학혁명이 수습되면서 다시 호남선교를 위해서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선발대라고 하는 7명의 선교사를 전주로 파송함으로써 비로소 호남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전주에 거점을 마련한 선교부는 호남의 각 지역에 선교거점을 만들어 나갔다. 선교부가 목포에 정착하기 전인 1894년 4월 18일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와 드루(A. Damer Drew)가 처음으로 목포 선창가에 첫발을 디뎠다. 처음 방문과 함께 전도를 하고 있을 때,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개종을 했다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목포를 찾기 전에 서울에 전해진 복음을 듣고 개종한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곳까지 전해지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이에 선교사들은 목포가 또 하나의 선교거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만복동에 2,500평의 토지를 매입한 후 1897년 3월 5일, 벨(Eugene Bell)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면서 조사인 변창인이 전도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사실상 양동교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10월 목포항이 공식적으로 개항을 함으로써 외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듬해인 1898년 11월에 벨과 오웬(Clement C. Owen) 선교사가 목포에 내려와 자리를 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목포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남장로교회가 호남지역에 전주, 군산 다음에 세운 거점이다. 이후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광주와 순천에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호남선교를 위한 교두보를 만들었다. 변창인의 전도로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 벨과 오웬이 내려왔고, 여자 선교사 미스 스트래퍼(F. E. Straeffer)도 동참했다. 벨은 변창인이 전도한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목포에 선교거점과 함께 양동교회의 시작을 이끌었다. 그들 중에는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목포라고 하는 항구가 갖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내륙 교통이 없었던 시대인 만큼 뱃길로 연결되는 다른 도시에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이렇게 시작된 목포 선교는 오웬은 의사로서 프렌치병원을 개원하여 진료를 시작했고, 스트래퍼는 정명학교와 영흥남학교를 열어서 목포의 아이들에게 신교육을 시작했으니, 이것은 목포에 있어서 서양병원과 근대교육이 효시가 되었다. 1897년 전도를 시작한 후 1년 만에 50여 명의 신자들이 형성되었고, 그들 중에 노학구를 비롯한 7명이 1899년에 세례를 받음으로 양동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00년에는 30명의 세례 지원자가 나왔지만 문답한 결과 6명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세례 지망자는 많았지만 실제로 문답에서 탈락하게 된 것은 관습과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세례를 받는 조건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주초나 축첩 같은, 당시 우리 사회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가운데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신앙고백이나 성경 지식에는 합격했어도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세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동교회의 경우 “김 씨”라는 사람이 세례를 받기 원했지만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 그의 직업이 술빚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고민을 했고, 결국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나서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그러다가 벨 선교사의 부인이 갑자기 별세함으로 벨은 두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오웬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면서 목포와 양동교회의 지도자가 없어지게 됨으로 일시적이지만 위기를 맞았다. 또한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정책적으로 광주선교부를 중심으로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스트래퍼와 프레스턴(J. F. Preston)도 광주선교부로 옮기고 폐쇄하려고 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목포선교부를 유지하는 결정을 했다. 벨과 오웬이 다시 돌아왔고, 군산에서 활동하던 해리슨(H. B. Harrison) 선교사가 새로 합류함으로써 목포선교부와 양동교회는 활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날로 성장하게 됨으로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1898년 8칸짜리 마련한 한옥 예배당으로는 수용에 한계가 있어서 1903년 18칸 규모로 증축했지만, 그마저도 수용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예배당을 지어야 했다.그 후 양동교회는 성장을 거듭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500여 명으로 늘어난 신자들이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한옥 예배당에서 정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좁은 공간에서 예배하자니 남자들은 예배당 안에서, 여자들은 영흥남학교 교실에서 따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양동교회 신자들은 어려운 생활고 중에서도 예배당을 짓기 위한 연보를 드리기 시작했고, 유달산 주변에서 건축에 필요한 돌들을 주워 모았다. 그렇게 준비하여 1910년 3월부터 시작한 건축은 1년이라는 기간이 걸려서 완공되었다. 지금의 예배당은 기본적으로 이때 지은 것으로 서쪽에 있는 남자들의 출입문 위의 아치에 태극문양과 함께 새겨진 “大韓隆熙四年”(대한융희4년)이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자들의 출입문인 동쪽 출입문 위의 아치에는 “쥬강생일쳔구백십년”이라고 새겨 놓은 예배당 건축 연도는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 예배당이라는 것으로도 의미가 크다. 또한 예배당을 완성한 다음에 “로티 위더스픈 벨 기념예배당”이라고 명명했다. 다만 현재의 예배당은 처음 건축 때와는 조금 다르다. 처음에는 정사각형 예배당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강대상 뒤쪽으로 20평 정도를 증축함으로 직사각형으로 바뀌었다. 또한 1982년 남쪽에 중앙출입문을 만들면서 4층 높이의 종탑을 세웠다. 그러나 그 원형을 훼손한 것은 아니기에 2004년에 등록문화재 제114호로 등재되어 관리를 받고 있는 예배당이다.대개의 지역에서도 그랬지만 양동교회와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들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지역 만세운동의 중심이었고, 교회나 학교의 지도자들과 학생들은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이었다. 목포와 양동교회도 다르지 않았다. 목포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정명학교와 영흥남학교 학생들과 양동교회 신자들 200여 명이 독립선언서를 뿌리면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양동교회 담임인 이경필 목사와 서기연 장로, 양일석 장로, 그 외 신자들, 그리고 정명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은 예배당 지하실에서 목판에 태극문양을 새겨서 태극기를 급조했다. 또한 독립선언서는 광주에서 만들어 왔다.이경필 목사가 이끄는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면서 시내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군은 칼을 휘둘렀고, 그 칼에 서상봉이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별세했고, 박상술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는데, 결국 그 후유증으로 별세했다. 이경필 목사 역시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1926년에 양동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박연세 목사는 이미 군산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죄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민족지도자였다. 그가 양동교회로 부임한 후 설교를 통해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 제국주의 망상에 빠진 일본이 조선을 포함한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전쟁이라고 설교하면서 비판했다. 칼과 힘으로 천황을 숭배하도록 강요한다고 할지라도 천황도 주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고 설교했다. 이런 설교를 하는 박연세 목사를 보고만 있을 일본이 아니었다. 결국 1942년 11월 11일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박 목사는 체포되었고,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가했으며, 그럼에도 변화가 없자 겨울에 감옥에서 동사하게 만들었다. 1944년 2월 15일 박연세 목사는 믿음 하나로 살면서 신자들과 함께 신앙을 지키는 것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그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차가운 감옥에서 차라리 얼어 죽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현재 예배당 앞에 있는 ‘선교기념비’는 1986년 부활절에 한국 선교 100주년을 맞아서 목포의 교회들이 연합예배를 드리고 모은 헌금으로 세웠다. 교파와 교단을 떠나서 목포 지방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 감사하고, 특별히 선교 100주년을 맞이해서 목포 선교의 출발지인 양동교회에 이 기념비(“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를 세움으로써 감사한 마음과 함께 복음의 빚진 것을 잊지 않기를 원했다.
이땅첫교회들을찾아
AI, 두려워할 필요 없다
by Mike Kirby·Matthew Emadi
2023-11-17
감성 지능, 창의 지능, 그리고 최근 들어 “인공” 지능 등, 말 그대로 우리는 지금 “지능”이 넘치는 세대에 살고 있다. 인공 지능(AI)은 게임 플레이부터 자동차 운전까지,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컴퓨터 과학의 광범위한 연구 분야이다. AI의 두 가지 주요 하위 분야는 “특정” 형태와 “일반” 형태이다. 특정 AI 기술이 특정 작업에 참여하는 인간을 모방하는 시스템(예: ChatGPT)인 반면, 일반 AI는 보다 광범위하게 생각, 언어 및 행동에서 인간을 모방하려는 시도이다(예: Star Trek 속 Data 역할인 The Next Generation). 이제 ChatGPT 같은 특정 AI 도구가 사회에 출시되었으므로 “기계 학습”이라는 용어도 심심찮게 들린다. 이는 특정 또는 일반적인 작업을 실행하는 방법을 “학습”한 시스템을 의미한다. 기술자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매우 흥미로운 시기이다. 많은 사람은 AI 기술이 과거 인쇄기(계몽주의 시대), 연소 엔진(산업 시대), 그리고 컴퓨터(정보 시대)만큼 사회를 바꾸어 놓을 거라 예상한다.일반 은총 또는 현실 속 터미네이터? 단지 도구로만 볼 때, 역사적으로 기술 발전에 대응했던 앞선 그리스도인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AI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한마디로 도구는 선하고 현명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일반 은총에 따라 부여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관점이다.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대장장이를 창조하였다. 그는 숯불을 피워서 자기가 쓸 연장을 만든다. 군인도 내가 창조하였다. 그는 무기를 가지고 사람을 죽인다”(사 54:16). 하나님께서는 역사 전반에 걸쳐 기술 발전이 증가하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선하든 악하든 관계없이 우리가 일반 은총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이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AI 기술이 너무 멀리 나아간 게 아닌지 물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AI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수단과 별개로 신성한 형상을 재창조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고유한 권위를 찬탈하려는,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인간이 벌이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인류의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이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더 멀리 개발하고 배포할 수 있는지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AI는 초창기부터 인간을 연구하고 모델링한 만큼 부분적으로 인간을 모방했다. AI 연구와 신경과학의 상호작용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AI가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가깝게 모방할 수 있을지는 유토피아적 추측과 디스토피아적 추측, 두 가지를 전부 다 불러일으킨다. 좀 더 환상적인 측면에서 The Jetsons 또는 스타 트렉의 희망적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좀 더 부정적인 측면에서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영혼을 창조하지 못하는 존재를 두려워하지 마라목회자들과 교인들은 AI가 무엇인지, 그리고 AI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질문하고 씨름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심오하고 미묘한 질문을 던진다. AI가 인간의 독창성과 산업을 쓸모없게 만들 것인가? AI에 대한 성경적 대응은 무엇인가? 인쇄기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자원의 전파를 가속하는 신성한 선물이 맞는다면, 전 세계에 하나님 나라를 성장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AI는 과연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 이 간단한 글의 목적이 이 모든 질문에 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많은 질문 뒤에는 미지의 것에 대한 일반적인 불안이나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새롭고 복잡한 기술에 대한 숨어 있는 두려움에 맞서면서 동시에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성경적 원칙을 다루고자 한다. 1.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거룩하고 지혜로우시다. 그분은 권능 있는 주권의 역사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AI의 발전이 흥미롭고 놀랍기도 하지만, 인간이 이루는 최고의 기술 발전도 하나님의 눈에는 고작해야 어린아이 소꿉놀이에 불과하다. 즉 창조주의 귀여운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혁주의의 기본 전제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탐험가이자 발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처음부터 종말을 보시고,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다(사 46:10). 그분은 인간 세상에서 AI 기술의 수준을 포함하여 모든 일을 오로지 당신 뜻의 결정에 따라 행하신다(엡 1:11). 2. AI 기술(다른 모든 인간의 업적과 함께)이 죄인의 구원을 통해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없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우리는 AI에 대한 열정이나 두려움을 완화할 수 있다. AI가 큰일을 할지는 몰라도 궁극적인 일을 이룰 수는 없다(행 4:12). AI를 구세주나 적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은 AI에게 그 목적을 넘어서는 역할을 잘못 할당하는 것이다. 죽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모방하여 “그들”과 다시 대화하기 위해 Seance AI를 사용하는 시도를 볼 때, 우리는 죽음의 저주 아래에 있는 이 세상이 구현하는 기술이 얼마나 무익한지를 새삼 상기한다. AI 기술이 인간 산업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더 나쁘게는 인간 생명을 근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 세계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AI가 아니라 성경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세계사는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노선을 따라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줄거리의 반전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하늘에 앉으셨으며, 새 창조를 위해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를 지키실 것이다. 그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나란히 존재한다(마 13:24-30). 두려움을 지혜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3.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AI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었다), 결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는 없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의 존재가 아니라 영의 존재이다. 우리는 단지 생물학 주머니나 복잡하고 유기적인 슈퍼컴퓨터가 아니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육신과 영혼 둘 다를 갖춘 피조물(psychosomatic creatures)이다. 하나님은 흙으로 첫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창 2:7). 우리는 결코 기계에 똑같이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 인간을 제사장이요 왕으로 만드셨다(창 1:26-28). 어떤 기술적인 발명도 영광과 영예의 면류관을 얻을 수는 없다. 그 특권은 사람이 되신 말씀, 곧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에게만 주어졌다. 오로지 인간만이 구원의 소망을 가진다(시편 8편).AI 기술은 인류에게 하나님이 주신 독창성을 증명한다. 이 독창성은 그분을 섬기는 데 사용된다(물론 많은 사람이 자신의 창의 지능을 악을 위해 사용하지만). 하지만 인공 신체를 만들지는 몰라도 결코 영혼을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몸과 영혼을 다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해야 한다(마 10:28).4. 변화의 시대를 맞아서 기술적으로는 밝지만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겠다는 그리스도인의 결의를 재확인하자. 두 건축자의 비유에서처럼, 폭풍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반석 위에 집과 모래 위에 집이 다르지 않았다(마 7:24-29). AI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드러내는 어떤 사상적 “기반”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도록 한다. 당신이 죽은 후에 AI가 당신의 목소리를 흉내 낼지는 모르지만, 당신을 무덤에서 살릴 수는 없다. 따라서 이 기술로 우리가 의기양양하거나 낙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고, 하나님의 계획에서 우리의 위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AI 시대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그 기술을 복음 전파에 참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믿음을 보여 주고, 희망을 전하고, 또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흥미로운 개척지이다.원제: Christians Shouldn’t Fear AI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커피와 설교
by 전재훈
2023-11-16
천국에 커피가 없을까 봐 걱정될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달달한 맛에 라떼나 마끼야또를 좋아했지요. 봉지 커피나 자판기를 이용하면 200원으로 해결될 수 있는 커피를 3,000원 넘게 주고 마셔야 하는 부담감이 커서 아무 때나 마실 수는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사 줄 때 한 번씩 마시던 고급 커피를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제게 주는 상으로 한 번씩 마시곤 했지요.개척 후 아내와 함께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카페라떼 한 잔 들고 차에 올랐다가 타박을 받았습니다. 개척교회 목사가 정신이 있냐는 말을 들었지요. 300원이면 될 커피를 3,000원씩 주고 마실 형편이냐는 것입니다. 그 후 2년 정도 라떼를 마시지 못했습니다. 커피에 대한 한이 맺히고 말았지요. 그 뒤로 누군가가 밥을 사 준다고 하면 밥 대신에 커피를 사 달라고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초라해 보였을 것 같습니다만 덕분에 제 주변 목사님들이 감사하게도 제게 늘 커피를 권해 주십니다. 우리 교회 인근에 에스플러스라는 카페가 생겼습니다. 목사님 부부가 하시는 카페이고, 교회에서 가깝다 보니 자주 갑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면, 늘 과일을 내어 주시고, 드립 커피도 한 잔 권해 주십니다. 카페에 앉아 목사님과 담소를 나누면서 과테말라에서 케냐AA까지 다양한 커피를 마시고, 텀블러에 아메리카노 한 잔 가득 담아 나옵니다. 드립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든 생각이 커피는 내려 마시는 것이었는데, 그동안 마셨던 커피는 녹여 먹는 커피였습니다. 인스턴트커피를 마실 때는 티스푼으로 저어서 마셨는데 드립은 그냥 마시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커피는 원두를 사다가 볶고 분쇄하여 머신으로 내리거나, 핸드드립을 해서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커피 원액을 에스프레소라고 합니다. 여기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이 아메리카노이지요. 그러나 원액을 건조하여 가루로 만들면 인스턴트커피가 됩니다. 인스턴트커피는 원액을 건조시킨 것이니 물에 녹여 마셔야 했던 것입니다. 커피는 맛도 중요하지만 향이 중요한 음료이지요. 인스턴트커피를 만들 때 향이 사라지기 때문에 향을 따로 저장하는 장치를 갖추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가루와 향을 잘 배합시켜서 우리가 마시는 봉지 커피가 만들어집니다.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이런 봉지 커피에는 커피 원액이 10퍼센트 미만인 것이 많습니다. 캔 커피의 경우에는 원액을 1퍼센트만 넣고 커피향을 이용해 감히 커피라는 이름을 도용하지요. 그것도 눈속임하느라 ‘1.00%’라 적어 놓습니다. 요즘은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시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갖추신 분들이 많아졌고, 교회에서 커피 교실을 운영하는 곳도 많습니다. 커피 가격이 로스팅한 것과 분쇄한 것의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로스팅한 원두를 사다가 직접 분쇄해서 마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는 아예 원두를 사다가 로스팅해서 드시는 고수들도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초 향기가 많았다면 이제는 커피향이 많아졌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일에 청년이 먼저 와서 커피를 내려놓고 있기에 커피향이 진하게 납니다. 커피는 그 종류도 굉장히 많습니다. 이름조차 외우기 힘들지요. 커피 원액을 에스프레소라고 합니다. 에스프레소를 기본으로 물을 부으면 아메리카노가 되고, 우유를 넣으면 라떼, 우유 거품을 많이 넣으면 카푸치노, 우유와 초코 시럽을 넣은 것을 모카라고 하구요, 우유와 카라멜 시럽을 넣으면 카라멜 라떼나 카라멜 마끼야또가 됩니다. 에스프레소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것을 아포카토라고 하는데 제가 좋아하는 커피입니다. 그 밖에 우유와 커피의 혼합비율로 도피야나 콘파냐 등이 있지만 별로 대중적이지는 않습니다. 카페 로얄, 아이리시 커피, 카페 깔루아, 파리제 등은 커피에 술을 넣어서 만든 것들입니다. 커피를 찬물로 오랫동안 내린 커피를 더치커피라고 합니다. 카페인이 비교적 적다고도 하구요. 그 맛이나 향이 진해서 ‘커피의 와인’ 혹은 ‘커피의 눈물’로 불립니다. 일반 카페에서 마실 수 있는 커피 중 제일 비싸기도 합니다. 더치커피에 사이다를 부어 마시는 것을 더치소다라고 하는데요. 저는 한 번 마셔보고 다시는 안 마시는 커피입니다. 그러나 더러 더치소다를 즐기시는 목사님들이 계신 듯합니다. 커피가 맛과 향으로만 즐기던 시대에서 이제는 눈으로 즐기는 시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커피아트라고도 불리는 라떼아트의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라떼의 우유 거품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나뭇잎이나 하트 같은 간단한 것에서, 곰돌이 푸우나 고양이 그림 같은 고난이도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달인들은 입체 캐릭터도 그려내고 심지어 커피 주문한 사람의 초상화까지 그리는 사람이 있다니 가히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커피가 아무리 종류가 다양하고, 멋지고 예쁜 작품까지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저는 아메리카노가 맛있는 집이 좋습니다. 좋은 원두를 쓰고, 원두에 맞게 섬세하게 로스팅한 다음, 신선하게 내린 질 좋은 커피를 제일 좋아하지요. 이런 기본을 무시한 채, 달달한 맛이나 예쁜 그림으로 내놓는 커피는 금방 질려 버립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손재주가 좋은 바리스타가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분들을 주변에서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럴 바에는 손재주 있는 분들보다 투박하고 느려도 기본에 충실한 바리스타가 더 좋습니다.커피처럼 설교에서도 기본에 충실하시고, 손재주도 뛰어나신 설교가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의 설교를 들으면, 복음적이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참 재밌습니다. 하지만 많은 목사님의 설교는 복음적이다 싶으면 졸립고, 재밌다 싶으면 남는 게 없을 때가 많지요. 설교는 이 둘 사이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해 보입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설교의 내용을 이루는 신학을 배웁니다. 하지만 졸업하고 목회 현장에 나오니, 세미나 같은 곳에서 내용보다 스킬을 더 많이 배우게 됩니다.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에서, 다양한 설교의 형태, 효과적인 언어 전달법, 미디어 사용법 등 다양한 방법론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정작 설교의 내용은 세미나에서 나눠 주거나, 다른 목사님들의 것을 표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설교의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전한다 해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내용보다 전달력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설교를 할 때, 교인들이 졸아 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졸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유머나 예화도 자극적인 것을 사용하고, 영상도 틀고, 연극도 보여주고, 원맨쇼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 현실상 목사님들이 설교 준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시대라 목회 말고도 다른 일을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만 전념한다고 해도 일주일에 8번에서 12번 정도 설교해야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전도사님 한 분 없이 혼자서 교회 일을 다 꾸려가야 할 경우, 설교를 위해 책 한 권 읽어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이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시간을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하는데, 오히려 영상을 편집하고, 미디어를 만들고, 유머나 예화를 찾는 일에 시간을 더 많이 소비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좋은 예화를 만나면 예화를 살리기 위해 설교 본문을 바꿔 버리기까지 합니다. 바리스타라 해도 좋은 원두를 볼 줄도 모르고, 로스팅을 전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저 로스팅된 원두를 사다가 갈아서 우유 넣고, 카라멜 시럽 넣고, 예쁘게 그림이나 그려내는 바리스타가 더 많지요. 바리스타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성경을 제대로 연구할 줄 모르고 묵상하는 힘도 없이, 그저 다른 사람의 설교를 가져다가 예쁘게 흉내만 낸다면 사람들의 귀는 즐겁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힘을 잃게 되고 맙니다. 재밌고 좋은 설교를 들을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재밌는 설교보다는 좋은 설교가 듣고 싶습니다. 설교를 듣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지나가는 것보다, 설교자가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하고 묵상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설교가 더 좋아진 것입니다. 손재주를 가르쳐 주는 세미나보다 좋은 원두를 고를 줄 알고, 그에 걸맞게 로스팅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세미나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자의 고뇌가 설교의 형식보다 내용에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동성애를 논하신 적이 있는가?
by Paul Carter
2023-11-15
예수님이 동성애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는지 묻는 것은 예수님이 노인 학대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지 묻는 것과 다소 유사하다. 그렇지만, 비슷하기는 한데, 꼭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노인 학대”라는 정확한 말을 사용한 적은 없지만, 그는 부모를 잘 섬기지 않는 바리새인을 꾸짖었다(막 7:12-13). 그리고 다섯 번째 계명을 지키라고 말하셨다.“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 20:12).따라서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노인 학대를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특정 단어를 사용해서 그 주제를 직접 언급하신 적이 없다.동성애에 관해서도 거의 비슷한 말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언약적 결혼에 대한 성경의 이상을 무시하는 바리새인들을 꾸짖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 19:4-6).분명히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성경의 비전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평생의 결합임을 확증하셨다. 그는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고 찬성하면서 그 특별한 맥락에서 성(sexuality)을 확증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구약의 한 구절을 권위 있게 언급했다. 더욱이 예수님은 모든 형태의 성적 부도덕을 부정적으로, 비난적으로 언급했다. 마태복음 15:19-2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마 15:19-20).‘더럽힌다’는 것은 부정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이는 예배 공동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 용어는 요한계시록 21:27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속된 것은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도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계 21:27).그러므로 예수님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성적 부도덕, 도둑질, 거짓 증언 및 중상이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하는 더러운 죄라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을 통해 고백하고 용서받지 못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적 부도덕”이라는 죄를 더럽게 하고 배제하는 것 중 하나로 언급하신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신약 및 기타 초기 기독교 문학의 그리스어-영어 사전(BDAG)에서는 대부분의 성경에서 “성적 부도덕”으로 번역되는 ‘포르노네이아’라는 단어를 “불법적인 성교”와 관련해서 정의한다. 유대법은 레위기 18-20장에서 불법적인 성관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긴 목록을 제공한다. 해당 법령에 따르면 남자는 다음과 같은 대상과 성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 1. 이웃의 아내(레 18:20)2. 다른 남자(레 18:22)3. 동물(레 18:23)4. 장모(레 20:11)5. 며느리(레 20:12)6. 자매(레 20:17)이들 중 누구와 성 관계를 갖는 것은 포르노, 그러니까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님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성은 사람을 더럽히고 예배 공동체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밖에 머물도록 만든다. 예수님이 동성애 문제를 긍정하셨거나 무관심하셨다고는 확실하게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구약의 비전을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맺은 불가침의 계약으로 분명히 지지하셨으며, 불법적인 성행위가 사람을 더럽히고 하나님 나라 밖에 두는 일임을 분명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동성애”라는 단어뿐 아니라 “근친상간”이나 “수간”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리스어 포르네이아를 사용해서 유대법이 합법적인 성과 불법적인 성에 대해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따라서 예수님에 따르면, 불법적인 성은 죄악이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속죄 제물로 바치러 오셨으므로 모든 범법자와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다.거기에는 당신도 포함된다. 그리고 나도 들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상처받은 남자와 여자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신다고 말씀하셨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잔을 건네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8).불법적인 성 관계는 죄이다. 도둑질은 죄이다. 살인과 간음과 거짓 증언과 비방은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통해 용서받고 영원히 씻겨질 수 있다.할렐루야!원제: Did Jesus Ever Talk about Homosexu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빈대는 이렇게 번져간다
빈대의 확산을 막는 지혜
by 필립 정
2023-11-14
요즘 빈대로 떠들썩한 한국 사회라 빈대가 어떤 벌레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빈대를 다루는 매체마다 매우 자세하게 빈대에 대해 알려주고 있으니 이 지면에 빈대에 관해 재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빈대에 감염이 되고 확산이 되는지는 어느 매체도 잘 알려주고 있지 못하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지난 16년간 빈대를 잡아 온 기록을 찾아보았다. 개인적으로 빈대 방역 처리 기록이 70여 차례가 넘고 나와 같이 일하는 직원들 기록까지 더하면 100차례가 넘는 것 같다. 여기에 빈대 검사만 하고 돌아온 기록까지 더 하면 훨씬 더 많은 경험이 축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달리 비교적 짧은 페스트 컨트롤 역사를 갖고 있고 빈대의 재출현도 시간적으로 얼마 되지 않아 빈대 감염과 확산 연구에 대한 자료가 충분치 않은 것 같다. 물론 내가 사는 이곳이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미국 남부라는 지역적 한계가 있고 한국과 주거 환경이 달라 일반화하기 쉽지 않겠지만 아직 빈대 출현의 빈도수가 낮은 한국에 보다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글을 써 본다.나는 이 글을 통해 빈대의 감염과 확산 경로, 빈대를 잘 옮기는 사람 특징, 그들의 직업적 특성, 문화적 특성, 주거 형태, 왜 주로 빈곤층에 빈대가 확산하는지, 나아가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빈대의 감염과 확산을 막기 위해 어떻게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고 빈대의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페스트 컨트롤 전문가로서 견해를 밝히고 싶다.빈대 감염과 확산 경로나는 고객들의 의뢰로 빈대를 잡으러 가면 제일 먼저 묻는 말이 있다. 최근에 여행 가서 어디서 묵었는가, 손님을 집에 재운 적이 있는가? 왜냐면 빈대의 감염 경로를 찾아야만 빈대의 확산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객들이 여행하면서 묵었던 숙박업소에서 감염되어 온 경우가 50퍼센트를 웃돈다. 그다음이 고객의 집에 다른 사람을 재웠던 경우로 30퍼센트 이상 되는 것 같다, 버리려고 내놓은 가구를 가져오거나 남이 입던 옷을 사 입었을 경우도 매우 흔하다.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아파트 천장 안에 비둘기가 살았는데 비둘기 몸에 있던 빈대가 거주인에게 옮겨 온 적도 있다. 빈대 감염과 확산은 직업과 매우 관련이 깊다. 출장이 잦거나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호텔에서 잘 수밖에 없으니 빈대에 잘 감염되어 집으로 옮겨 온다. 미국에서 호텔은 저가의 숙박업소나 고급 호텔 할 것 없이 빈대의 온상지로 유명하다. 호텔을 옮겨가며 잠을 자야 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빈대를 피할 수 없다. 한번은 매우 큰 호텔에서 호텔 전체에 빈대 약을 쳐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충격적으로 빈대가 많아 호텔 측이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호텔 측은 경영난에 빈대까지 겹쳐 영업을 포기하고 버티다가 결국은 다른 큰 호텔 업체에 인수되었다.많은 손님을 맞이하는 숙박업소 직원, 찜질방 종사자의 숙소에도 빈대가 번져 네 번이나 가서 처리해 준 적이 있다. 단체 생활을 하는 학생, 근로자들도 빈대를 많이 옮긴다. 기숙사에서 살던 대학생이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 빈대를 옮긴 경우도 여러 차례이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가방에 빈대가 함께 와 온 집안에 빈대를 확산시킨 적도 여러 번 있다.국가 간 문화에 따라 빈대 감염과 확산에 차이가 있다. 내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난히 공동체 의식과 유대감이 강한 문화를 지닌 민족일수록 빈대가 더 잘 퍼지는 특징이 있다. 한국, 남미, 인도 등 이런 나라들은 자기의 먼 친척, 오래전 친구라도 연락이 오면 쉽게 방을 내주고 잠을 재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초청받아 온 사람이 장기간 여행하며 여러 호텔을 거쳤다면 가정집 방문은 확산의 경유지가 된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빈대는 주로 잘 안 물리는 사람이 옮긴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데 사실 빈대에 전혀 물리지 않거나 거의 물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한집에 같이 사는 부부인데 한 사람만 물리는 경우가 흔하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가설이 가능하다. 빈대는 사람들이 입과 피부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에 반응하는데,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은 사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빈대에 잘 물리지 않는 사람들은 본인이 감염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리저리 다니며 빈대를 확산시킬 수밖에 없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무증상자들이 코로나를 확산시키는 원리와 동일하다. 내 자료에도 거의 40퍼센트 이상이 빈대에 물리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곳과 다른 곳에 빈대를 옮겨 온 것으로 나타났다.미국이 한국과 다른 것 중 하나는 중고 용품의 재사용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사용하던 가구나 옷들을 싸게 파는 유명한 가게들이 매우 많다. 이런 곳에서는 사실 빈대를 잘 옮겨오지 않는다. 헌 용품을 구매할 때 깨끗이 손질해 내놓거나 세탁하기 때문에 옮길 일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옷을 입어보고 벗어 놓는 과정에서 빈대를 옮겨오는 일이 매우 흔하다. 또 중고 물품을 위생처리 하지 않고 구입한 그 상태로 다시 되파는 가게들도 많다. 그래서 빈대가 헌 옷과 중고 가구와 함께 들어오는 것이다. 가장 흔한 경우는 빈대에 감염되어 버리려고 내놓은 가구들 때문이다. 주로 침대 프레임, 매트리스를 가져와 문제가 발생한다. 서랍장, 신발장에도 빈대가 딸려 오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내 자료에 의하면 이 경우 10건 가까이 된다.빈대의 확산은 주거 형태와 깊은 상관이 있다. 미국의 아파트나 한국의 고시원에서 빈대가 비교적 잘 번지는 이유가 있다. 미국의 아파트와 한국의 고시원은 매우 얇은 나무 합판 벽 하나로 나뉘어져 있다. 옆방에서 내는 작은 소리조차 들릴 정도라 한 곳에서 빈대가 나타나면 곧 옆집, 위아래 집으로 번져간다. 미국의 호텔도 마찬가지 원리다. 이런 곳에 빈대 처리 문제로 가면 한곳에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주거 형태가 구조 때문에 사방으로 빈대가 잘 번져 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기숙사도 같은 이유로 쉽게 번진다. 작은 규모의 방을 나무 벽으로 이어 붙였기 때문에 한곳에서 번지면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한다. 내 경우 제일 심했던 곳은 노인 아파트이다. 미국엔 65세 이상이면 약간의 돈만 내고 살 수 있는 노인 아파트가 있다. 세대 전원이 노인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그 안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같이 먹고 나누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어 바퀴벌레, 빈대가 상당히 번져 있다. 빈대도 너무 심하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하여 손을 쓸 수 없어 내 경우에도 여러 번 의뢰를 받았지만 포기한 적이 많았다.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외로운 노인들은 계속 다른 노인들의 아파트를 방문하면서 빈대를 계속 옮겨 왔기 때문이다.빈대는 주로 학생, 노동자들의 숙소, 노인 아파트 같은 저소득층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다른 곳으로 확산할 소지를 갖고 있다. 이유는 빈대 방역의 비용이 매우 비싸기 때문이다. 방 한 칸만 약을 쳐도 원화로 60만 원이 넘는다. 아파트라도 방 두 칸에 거실까지 합치면 원화로 150만 원 이상이 든다. 이 비용이 크기 때문에 저소득자들은 본인이 해결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빈대는 일반인들이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확산해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빈대의 유행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가 있다. 한국 매체의 기사를 보면 빈대 감염의 원인으로 외국인 유학생, 외국인 근로자 등이 많이 언급되는데 감염과 확산 이유는 매우 다양해서 누구나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함부로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예를 들자면 빈대의 확산은 고비용 때문에 저소득층에서 비교적 높게 나타나지만 오히려 외국 여행을 하며 호텔에서 숙식할 수 있는 중산층에서 감염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혀를 잘못 사용하여 스스로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여행과 이동이 잦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목회자들이나 고려해야 할 것 하나가 있다. 이들이 국내 다른 지역이나 외국에 초청받아 호텔에서 묵을 때 침대에 눕기 전에 유심히 침대 매트리스와 이불을 살펴야 한다. 나무 침대면 특히 침대 프레임 사이 사이와 매트를 잘 살펴 검은 점같이 생긴 빈대의 배설물이 있으면 즉각 방을 옮기거나 다른 호텔로 옮기는 것이 좋다. 혹시 모르고 하루를 보내더라도 몸의 혈관을 타고 일정한 간격으로 빨갛게 물린 흔적이 여러 개 있으면 입었던 옷은 버리거나 아니면 비닐봉지에 넣고 입구를 잘 묶어 봉하여 후에 세탁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호텔 예약할 때 빈대를 발견하면 호텔비용 반납이나 피해 보상을 처리해 주는지 꼭 물어보는 게 좋다. 호텔마다 빈대 문제 처리에 대한 정책들이 있다. 알고 계약할 것을 권한다. 호텔 측은 빈대를 눈으로 발견하지 않는 이상 절대 빈대가 있다고 인정하거나 피해 보상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호텔의 명예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을 꼭 찍어 두어야 한다. 빈대가 있던 호텔에 묵었다가 초청자의 교인 집에 묵는 것은 큰 실례이다. 그냥 호텔에서 묵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빈대의 유행은 잼버리, 올림픽, 엑스포 같은 국제 행사가 열리고 나면 한껏 올라갔다가 방역이 강화되면 다시 완화된다. 지금처럼 심할 때는 타인의 집에 묵는 것은 민폐 행위다.당분간은 중고 물품을 거래할 때 유의해야 한다. 빈대가 유행하면 유난히 중고 물품 거래가 많고 버리는 빈도가 급격히 늘어난다. 이때 중고 물품을 살 때 주의하여 살펴보고 남이 버린 물건을 가져오는 행위는 금지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감염된 물건을 버릴 때 반드시 빈대에 감염된 물건이라는 메모를 남겨 다른 사람들이 재사용하는 걸 막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하는 것이라 믿는다. 빈대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코로나 유행 시 우리가 들어가 앉을 곳을 가려가며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했듯이 지금은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자신과 주위를 항상 살펴야 한다. 극장같이 사람이 많은 곳을 다녀왔으면 바로 옷을 벗어 비닐에 넣어 묶어 두었다가 나중에 뜨거운 물로 세탁 또는 뜨거운 열로 말리길 권한다.매체에서 읽은 약간의 지식으로 빈대에 대해 아는 체하거나 조언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빈대 감염자를 돕는다고 어설픈 지식을 전수하는 것은 매우 해롭다. 빈대에 감염된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며 봉사 정신으로 이리저리 약을 쳐 주는 것 역시 100퍼센트 자해 행위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방역 비용을 보태 주거나 전문가를 소개해 주는 것이다. 가끔 외국 유학생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대부분 파리, 런던,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유학하는 한국인들이다. 이들은 엘리트층이라 자기가 인터넷을 찾아 빈대 약을 사고 약 치는 방법도 익혀 서로 약을 쳐 주며 한국인의 도전 정신을 시전한다. 그러다 한계에 막혀 나에게 전화하는 것이다. 이러면 너무 빈대 감염이 악화하여 힘들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이라도 전문가 부르세요’라고 조언한다. 비싸서 못한다고 하면 ‘그럼 나중에 훨씬 더 많이 들어요’ 대답한다. 약을 어설프게 치면 잠자리 근처에 머무르던 빈대는 집안 곳곳으로 깊이 들어가 숨는다. 가구 틈, 천장, 카펫 바닥, 창문틀, 어디든 살 곳으로 찾아 숨어 좀처럼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정도면 전문가들도 힘들어한다. 비용만 더 들 뿐이다. 어설픈 지식으로 더 많은 시간과 약을 써야 하도록 일을 그르쳤기 때문이다.다른 전염병과는 다르게 빈대는 어떤 질병도 옮긴다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빈대 처리 보조금이나 보험처리를 어느 나라 정부도 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냥 두면 학교, 극장, 전철, 버스, 호텔, 직장 등을 통해 온 나라와 세계로 퍼져갈 수밖에 없다.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자금을 모아 전달하거나 기금을 만들어 주위에서 빈대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정말 지혜로운 일이다. 빈대는 그야말로 공포를 부른다. 항상 새벽에 물기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것은 물론이고 알레르기 반응이 심각한 사람은 물린 부위가 심하게 부어오르고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어한다. 평상시에도 스멀스멀 빈대가 기어가는 느낌이 있어 스트레스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곤란할 정도다. 그래서 이들을 돕는 것은 중병 환자들 돕는 것 같이 시급한 일로 취급해야 한다.한국인들의 체면 문화 때문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밝히지 않아 문제가 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빈대 감염 여부를 주위에 빨리 밝히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좋다. 이런 일로 경제적 도움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오히려 지혜롭고 서로에게 선한 일이다. 빈대가 다 처리되는 동안 교회나 이웃, 직장 출근을 삼가는 것 역시 지혜로운 일이다.코로나 유행 시 교회는 비대면 세상에서 살았다. 많은 교인이 교회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교회의 따듯한 말 한마디와 도움이 필요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유의 일을 겪어야 했던 교회는 이 일로 좋은 경험을 쌓았다. 이제 빈대로 곤란을 겪는 이웃을 위해 어떻게 도울지 모를 수 없다. 앞으로 이런 감염과 질병으로 사회 문제가 계속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를 살아가는 교회는 지속적으로 이웃을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하는 도전을 받고 있다. 세상의 정부는 이런 것 하나 처리하려 해도 법을 만들고 시행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교회처럼 신속하게 결정하고 적절하게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이 또한 주가 주신 은혜를 베풀 기회가 아니던가!
소셜 미디어가 우리 영혼을 뒤틀고 있다
by Ian Harber
2023-11-13
“소셜 미디어는 중립 지대에 있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렸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거짓말이다. 온 나라가 정신 건강 위기를 맞고 있는 이때 소셜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이 기술이 결코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에 따라서 정부가 나서서 여기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몬태나는 틱톡을 완전히 금지한 최초의 주가 되었다. 아칸소는 미성년자가 특정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계정을 만들려면 부모의 승인을 받도록 요구하는, 일종의 유사 법률을 제정했다.소셜 미디어의 해로움이 영성 형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잘 알고 있다. 크리스 마틴(Chris Martin) 같은 작가가 지적했듯이, 소셜 미디어가 우리를 가르치는 핵심 스승이 되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가 소비하는 콘텐츠의 패턴(불안, 분노, 두려움, 무감각)에 맞춰서 우리의 마음을 재설계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드리는 예배 관행(열기, 스크롤, 스와이프, 좋아요, 댓글)에 따라서 우리의 습관을 바꾼다. 그리고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바치라(다른 사람이 소비할 수 있도록 콘텐츠를 게시하고 광고주를 통해 기업이 이익을 얻게 하라)고 요구한다.소셜 미디어는 현실에 대한 관점을 바꿈으로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영적, 인지적 왜곡 기계 역할을 한다. 이는 로마서 12:1-2을 체계적으로 뒤바꾼, 그리고 기업적으로는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뒤바꾼 버전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워지지 않는다. 대신에 성화되지 않은 욕망에 가장 잘 맞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선별된 세상의 특정 패턴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가 세상에 순응하도록 손짓한다.소셜 미디어는 결코 성화에 있어서 중립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에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활동적 행위자이다. 그렇다고 소셜 미디어가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미디어 섭취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도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게 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알고리즘이 소셜 미디어를 되살릴 가능성이 존재하는 우리의 욕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갈망할수록, 그리고 그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돕는 콘텐츠를 더 많이 추구할수록, 알고리즘은 제자도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 중심 콘텐츠 쪽으로 더욱 기울어질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바로 그 도구가 도리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가도록 재형성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소셜 미디어 사용자의 새로운 카테고리소셜 미디어의 영적 왜곡 영역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현명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예 소셜 미디어 자체의 중단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디지털 바빌론에서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범주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번영하도록 돕는 운영 방식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고려해야 할 네 가지 범주는 다음과 같다.1. 콘텐츠 개발을 통한 제자도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하여 떨어지는 콘텐츠 소비의 형성력을 낮잡아 평가한다.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면, 또한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콘텐츠를 만들고 모범 사례를 사용하여 의도한 청중에게 다가가는 충실하고 의도적이며 지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교회는 특정 청중을 향해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갖고 있다. 점점 더 목회자가 팟캐스트로 대체되고 평균 교회 출석률이 한 달에 한 번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교회는 사람들을 지역 교회와 연결하는 지역별 디지털 미디어를 제작하여 일주일 내내 성도들을 만날 수 있다.우리에게는 이미 몇 가지 초기 사례가 있다. Immanuel Nashville은 Substack을 사용하여 교인들을 위한 짧은 매일 묵상집을 제공한다. 애리조나에 교회를 개척한 Trey VanCamp는 수년 전부터 그의 유튜브 채널을 사용하여 사역을 공개하고 있다. 다양한 책을 추천하고, 경건의 시간을 독려하고, 자신의 교회에서 인도한 워크숍 동영상을 공개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Crossing Church는 성경의 여러 권을 소개하는 Ten Minute Bible Talks라는 주간 묵상 팟캐스트를 제작한다. 2. 인플루언서 대신 선교사가 된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대규모 플랫폼을 만드는 대신에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특정 청중을 위한 틈새 기반 콘텐츠를 만들고 자신을 그들을 섬기는 선교사로 여기면 어떨까? 소수의 유명 인사가 장악하는 기독교 미디어 환경 대신에 지역 교회에 뿌리를 둔 중소 규모의 기독교 콘텐츠 제작자들이 틈새 시장을 향해서 목소리를 내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함으로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아니라 오로지 플랫폼 자체에만 쏟는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줄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까? 한 가지 예가 Gavin Ortlund와 그의 유튜브 채널 Truth Unites이다. 개빈은 기독교(특히 개신교)를 옹호하는 명확하고 도움이 되는 냉철한 동영상을 만든다. 또 다른 예는 젊은 그리스도인 틱토커 Elijah Lamb(@doctrinewithlamb)이다. 그는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보다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더 친근한 플랫폼에서 7만 명이 넘는 청중을 대상으로 꾸준히 어려운 교리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두 제작자는 자신의 디지털 플랫폼에서 각각 고유한 형식으로 변증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콘텐츠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청중을 찾고 있다. 나름대로 그들은 다 디지털 선교사이다. 3. 좋은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을 큐레이팅하자모든 사람에게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콘텐츠 제작은 시간과 정신의 노력이 들어가는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그러나 콘텐츠 큐레이팅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성장하는 데에 유익한 자원을 제시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목회자라면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더 깊이 파고드는 데에 필요한 추가 자료가 담긴 웹페이지를 만들어서 설교 시리즈와 함께 게재할 수도 있다. John Houmes 목사는 ‘몸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에 관한 설교 시리즈와 관련해서 바로 이 작업을 했다. 나는 누군가의 신앙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백 시간이 넘는 음악과 팟캐스트를 담은 Spotify 재생 목록을 만든 적이 있고 또 헌신적이고 지적인 성장을 바라는 교인들을 위해서 교회 역사 문서를 큐레이팅한 웹 사이트를 제작하기도 했다. 4. 떠남으로 저항하라아예 소셜 미디어 삭제가 답인 사람들도 있다. 그 결과는 종종 행복과 영적 건강의 증가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영적, 문화적 저항의 한 형태로도 기능한다. 때때로 기독교 진리의 증거는 참여보다는 금욕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느 그리스도인과 다른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서 눈에 띄는 그리스도인도 있지만, 동시에 전혀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는 사람도 있다. 떠난다는 목표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건 아니다. 다만 소셜 미디어를 당신의 삶에서 제거함으로써 당신의 정신적, 영적 건강을 도모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역 사회에 긴밀하게 밀착된 친밀한 관계를 세우려는 목표를 포기하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하는 역할소셜 미디어라는 새로운 선교 분야에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재능 있는 콘텐츠 제작자이자 전달자를 교회가 어떻게 식별하고 지원할 수 있을까? 교회는 교인 중에서 콘텐츠 제작자를 찾아서 서로 연결하고, 협력하고, 격려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더불어서 다른 선교사들을 돕는 방식과 유사하게 “디지털 선교사”가 소프트웨어나 광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소액의 급여를 준비할 수도 있다. 특정 상황에서 제작자가 장비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교회의 카메라나 마이크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는 또한 소셜 미디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영적 왜곡 지역을 떠난 피난민들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 공동체를 찾아 지역 교회의 문을 두드릴 때, 두 팔 벌려서 그들을 환영해 줄 건강하고, 눈이 맑고, 적응력 있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디지털 플랫폼을 주요 사역으로 삼은 교회라면, 소셜 미디어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라면 가정 교회, 성경 공부, 심방과 같이 오프라인 참여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대면 사역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오프라인을 선택한 사람들이 더 풍성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체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네 가지 범주가 겹칠 때도 있고 완전히 다를 때도 있다. 그러나 교회와 교인 모두 소셜 미디어를 변형시키는 기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셜 미디어 환경이 가져다주는 어두운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우리의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을 점점 더 타락시킬 것이다. 이 뒤틀린 공간에 어떻게 해야 복음의 소망과 개혁을 가져올 수 있을지 적극적으로 고민하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은 참으로 아름답다. 원제: Social Media Is a Spiritual Distortion Zo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빈대가 쏟아 놓은 판도라의 항아리
by 필립 정
2023-11-11
요즘 한국 사회가 빈대 출몰로 매우 시끄럽다. 내년에 올림픽이 열릴 프랑스 곳곳에서 빈대가 퍼진다는 소식을 듣고 온 세계가 촉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꿈쩍하지 않던 한국인들도 멀리 떨어진 나라의 작은 벌레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러다 인천의 한 찜질방과 대구의 한 대학 기숙사에서 빈대가 발견되고, 10월 한 달에만 서울의 18개 구에서 빈대가 출몰하자 코로나 이후 잠자고 있던 혐오 정서들이 빈대에 대한 공포와 함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나는 빈대를 잡으러 다니는 직업 때문에 빈대를 흔하게 본다. 그래서 빈대를 보아도 개미나 거미 같은 벌레 보는 것처럼 별다른 공포심을 느끼지 않는다. 진정 내게 공포를 일으키는 것은 신중치 못하게 빈대를 퍼뜨린 사람들을 속단하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공포와 불안을 투사하며 날 선 혀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코로나 유행기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나를 노려보던 미국인들의 눈길이 아직도 선하고 중국인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코로나 한풀이 하던 한국인들의 냉소도 여전히 끔찍하다. 그런데 요즘 빈대 출현과 함께 온라인의 댓글과 소셜미디어로 실어 나르는 혐오의 바이러스들이 다시 퍼져 나가고 있어 내 불안을 붙들어 맬 수가 없다.교회도 혐오, 편견, 인종 차별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역사가 있다. 흑사병으로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던 14세기 로마 교회의 모습은 코로나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와 매우 흡사하다. 로마 교회는 종말론 교리를 앞세워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페스트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이 과오로 이전까지 수백 년간 쌓아 온 영적 권위를 실추시켜 버렸다. 이 얼룩진 역사의 거울에 지금의 우리 사회를 비추어 보면 온전치 못한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반성할 수 있을까 싶어 이 글을 써 본다.페스트, 종말의 공포를 부르다14세기의 소 빙하기로 인한 대기근(1315-1322)과 페스트 전염병(1348)으로 유럽 인구의 30퍼센트 이상이 죽어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전부를 교회와 함께했던 유럽인들은 전쟁, 아사, 전염병을 겪으며 이를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종말의 징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하며 회개하여 재앙을 피하려 하였지만 페스트는 교회를 통해 더 번져 갈 뿐이었다.당시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건강을 살피고 공포를 극복하게 도울 곳은 교회가 유일했다. 교황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체계화된 조직력으로 유럽의 곳곳에 명령 전달이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속 권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기 지방만 관할하는 영주들의 분산된 힘으로는 범 인류적 재난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또한 영주들의 세력에 비해 아직 중앙집권적 왕권은 충분히 무르익지도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일한 희망이었던 로마 교회는 이미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오랜 십자군 전쟁의 여파와 패배로 그 단단하던 조직력이 붕괴하고 있었다. 대기근이 오자 농노를 기반으로 하는 장원 제도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페스트 전염병으로 농도가 절대 부족하자 교회 재정이 무너져 버렸다. 교회 권력의 와해는 곧 사회적 불안과 공포에 불을 지폈다.미국의 역사가 바바라 터크만(Babara W. Tuchman, 1912-1989)은 이 시기를 “폭력적이고, 고통스럽고, 당황스럽고, 붕괴된 시기였으며 사탄이 승리한 시기였다”고 정의하였다. 결국 교회가 무너져 가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선택한 것은 마녀사냥이었다. 세상이 불행해지는 것은 악마의 탓이라며 악마와 결탁한 마녀의 소행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기근과 전염병의 공포에 눌려 있던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도 현실을 잊고 광분하여 폭력의 불길에 휩쓸려 버렸다.1484년 교황 이노켄티우스 8세는 마녀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황령으로 단죄를 지시하였다. 곧 교황의 지시로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Malleus Maleficarum, 1486)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책에는 마녀와 악마와의 계약, 마녀들의 범죄, 마녀를 가려내는 방법, 재판과 처형 방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이후로 100년이 넘도록 28판이나 인쇄되었고 수십만 명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는 안내서가 되었다.교황이 처음에 마녀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지금의 독일 지역의 주술사들이었다. 성경(출애굽기 22:18)에 근거하여 마녀재판을 시작하였지만 사실 이들 다수는 전통적 의학을 시전하거나 신앙의 힘으로 전염병을 극복하도록 돕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교황은 이들이 교회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전염병은 몇 년이 더 지속되었고 교회는 계속 희생자를 찾아야 했다. 갈수록 걸인, 외국인 이주민, 저소득 여성, 어린아이, 특히 유대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마녀로 몰려 희생되었다. 철저한 정결 의식 때문에 전염병이 잘 안 걸리는 유대인들을 우물에 독을 타 질병을 퍼뜨렸다고 모함하여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내 수십만 명을 처형하였다.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절망에 젖은 농민들이나 배고픈 도시 빈민들은 종말론의 교리를 만나자 곧 자신들의 처지가 개선될 것 같았다. 지금 사탄이 잠시 승리해 재앙이 임하였지만 곧 그리스도가 이를 제압하고 천년왕국이 이루어져 살기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탄과 손잡은 마녀들을 심판하기 위해 불을 지르고 폭력 사태를 행하며 천년왕국을 도래시킬 하나님의 전사로 자처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한 초법적인 그들의 행태는 더 큰 혼란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 코로나인류는 언제나 재앙이 닥치면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양 삼아 혐오와 분노를 분출하며 사회적 낙인을 찍고 폭력을 가하는 행태들을 계속하였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천연두가 번지자 아시아인 이민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괴롭히고 추방법까지 만들 정도였다. 페스트 유행이 7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마치 페스트 유행 시대를 거울로 보는 것 같은 유사한 일이 코로나 시기에 일어났다. 내가 사는 미국에서 검은 머리를 한 아시아인들은 언제 폭력을 당할지 모르는 위기를 겪어야 했다. 코로나 유행 이후 미국에서 아시아인 증오 범죄는 급증하여 1년간 4,000건이나 된다고 인종차별 혐오범죄를 연구하는 AAPI가 발표하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한국인의 중국 유학생,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많은 한국인이 코로나19를 일부러 중국 바이러스 또는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고 국내 중국인들을 잠재적 바이러스 보균자로 낙인을 찍어버렸다. 그런데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코로나 이후 잠잠하던 혐오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빈대가 나타나 증오와 혐오가 가득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것이다. 빈대가 나타나자 매체마다 학자들의 입을 빌어 기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여러 편을 읽어 보았는데 한결같이 그 기사들의 행간들에 숨겨진 의도들은 불순하기 짝이 없다.오프라인, 온라인 가리지 않고 그 기사 내용은 대체로 이렇다. “최근에 발견되는 빈대들은 예전에 있던 종들과 다르게 주로 열대 지방에 사는 종인데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외국 이민자, 또는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한국인들이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 빈대 종이 발견된 곳이 주로 외국 유학생 기숙사, 고시원, 찜질방 같은 곳이다.” 이 글을 쓴 기자들은 전문가의 견해를 자기들의 입맛에 맞도록 편집하여 독자들의 혐오 정서를 자극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하여 많은 사람이 기사를 구독하고 읽게 하여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14세기에 ‘마녀들을 잡는 망치’를 쓴 학자들을 대신해 지금 21세기의 각종 매체가 혐오와 폭력의 광기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돈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조금만 더 알면 속지 않는다빈대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면 우리는 매체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빈대는 원래 박쥐의 몸에 붙어 있던 박쥐벌레(Batbug)였다. 석기 시대에 수렵 생활을 하던 조상들은 주로 떠돌며 동굴에서 생활하였다. 동굴에서 박쥐와 함께 기거하면서 사람들의 몸에도 박쥐벌레가 같이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수렵 생활을 끝내고 농작물 경작을 하며 주거 생활을 하면서 박쥐벌레도 사람들의 주거지에 같이 살게 되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이 벌레를 침대벌레(Bedbug)라 부른다.한국에 빈대가 급격히 퍼지게 된 계기는 미군정 시기에 들어온 미군 때문인 것 같다. 1차 세계대전, 2차 대전 이후 빈대가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렸는데 제일 극심한 곳은 미군 진영이었다. 미군을 따라 상륙한 빈대들은 1970년대까지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DDT를 사용하면서 그 이후 빈대의 출현이 더 이상보고 되지 않았다. 빈대가 다시 나타난 시기는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세계화의 진행과 더불어 외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부터다.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인 정서상 빈대가 얼마나 번져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이에 관한 어떤 연구나 조사도 이루어진 질 수 없었다. 최근에 발견되는 열대성 빈대 또한 언제 어디서 누가 들여왔는지 공식적인 보고조차 없다. 빈대에 관한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기숙사나 고시원이나 찜질방에서 기거하는 가난한 외국인 유학생들을 빈대 유입자로 낙인을 찍어 버리고 있다. 그리고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를 것처럼 분노를 표출한다. 이제 한국 교회가 과연 코로나로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달래 주고 위로가 되었는지 반성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코로나19가 번져 가자 정부에서 모이는 예배를 당분간 중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는 종교 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코로나19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라고까지 하며 예배를 강행하였다. 그러다 여러 교회에서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이 되면서 더 이상 변명할 수 없게 되자 국민들에게 사과하며 잘못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교회사에서 언제나 교회는 자기 생존 유지에 급급하였다. 교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성도들을 교회로 모이게 해서 페스트를 퍼뜨렸던 14세기의 교회와 지금의 교회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유사하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사회의 약자들을 향한 혐오와 폭력의 광기를 누그러뜨릴 영적 권위를 가질 수 없다.인간은 습관적으로 자기 죄를 부정하고 합리화한다.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누구에게서 옮았을까에만 집중한다. 머릿속에서 작동되는 원인과 결과의 계산기에 언제나 나는 피해자로만 남는다. 나는 절대 가해자일 수 없어 가해자는 언제나 남이 된다. 가해자를 찾아 징벌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고 덤벼들지만, 대상은 항상 자기를 대변할 수 없는 만만한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인정하기 힘든 뇌구조를 갖고 있다는 뇌 과학자 정재승 교수의 말이 맞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각종 방어기제와 거짓으로 무장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우리를 보면서 결국 아담의 후손이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원인과 결과의 체계는 계속 죄를 합리화할 수밖에 우리의 영혼이 쉴 자리가 없다. 오늘도 이 글을 마치면서 하나님의 돌발적인 은혜가 이 폐쇄적인 시스템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겸허히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해 본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자기가 만든 여자 판도라에게 항아리를 하나 선물한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자 혐오, 증오, 거짓 같은 죄악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놀란 판도라가 항아리를 막아 버리자, 그 안에 담겨 있던 희망은 끝내 세상으로 나아오지 못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이야기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과 다른 것은 판도라의 항아리에서 쏟아져 나온 것 같은 이 세상에 구원의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러 오셨다는 것이다. 빈대 때문에 쏟아져 나온 이 혐오와 폭력의 세상, 주의 은혜가 아니면 어디 희망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왜 욥을 회복시키셨을까
by Russell L. Meek
2023-11-10
TGC의 성경 읽기(Read the Bible) 운동에 참여하세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일 년 안에 힘을 합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어렸을 때 나는 암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머리카락이 화학요법으로 서서히 빠졌고, 암에 굴복한 몸은 말라갔으며, 할머니가 숨을 거둔 방 밖에서 쭈그리고 있던 나를 위로하던 간호사의 말까지, 나는 그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한다. 무엇보다 암 투병 내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며 쉬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야기하던 할머니의 모습은 여전히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할머니가 인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해하는 데에 무려 수십 년이 걸렸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욥기가 알려주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왜 욥을 회복시키셨을까? 나는 답을 숨길 생각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언제나 마음대로 행하신다. 하나님은 욥의 회복을 원하셨다. 이것이 욥기 전체가 추구하는 주제이다. 욥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욥의 (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무려 마흔한 장에 걸친 빽빽한 시에 이어 욥기의 마지막 여덟 구절[욥 42:10-17]에 도달한 순간 우리는 이 사실을 놓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욥기가 고난에 관한 책이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고난이라는 주제가 욥의 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욥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은 누구의 몫인가, 그리고 나아가서 고통을 피하는 방법에 대한 오랜 투덜거림은 이 책이 전하는 더 큰 신학적 메시지를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오늘날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짜 주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인간도 감히 하나님에게는 티끌 같은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고통받을 사람이 아니었다욥 역시 죄인이기는 하지만(롬 3:23), 그러함에도 욥기 서문은 욥이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욥 1:1)이라고 말한다. 3절은 욥의 막대한 재력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마치 그것이 욥의 정직함의 결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묘사된 순종에 대한 축복과 일치하는 해석이다(신 28:1-14).욥은 자신의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나 1장에서 벌어지는 여호와와 대적자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른다. 그러나 책 전반에 걸쳐 욥의 주된 불만은 자신이 그렇게 가혹한 형벌을 유발할 죄를 짓지 않았기에 지금 닥친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욥의 친구들은 그가 받는 고통이야말로 그가 지은 죄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독자들은 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곧 살펴보듯,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핵심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는 욥의 주장과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친구들의 주장 모두에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할지 저주할지 통제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이다. 신명기 28장에서,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 같은 신약성경에서도 분명히 밝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과 관련된 보상과 징계의 범주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욥기 속 당사자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범위를 가정하고 있다.그들은 고난과 죄, 축복과 순종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바라보았다. 축복은 항상 순종에 대한 보상이고 고통은 항상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서 순종은 항상 축복을 가져오고 죄는 항상 고통을 가져온다고 간주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는 우주의 사탕 자판기로 축소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을 높이고 하나님을 낮추는 행위이다. 여호와께서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신 이유이고, 또한 욥이 회개해야만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욥은 회복될 자격이 없었다욥기의 마지막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축복의 분명한 표시인 막대한 부와 많은 자녀를 얻은 이야기로 끝난다(신 28:1-14). 마치 저자가 미소를 지으며 독자들에게 해피 엔딩을 선물하는 것 같다. 아마도 1장 속 욥을 보면서 그가 충분히 복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독자라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욥기를 끝까지 읽고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욥의 시련과 야훼의 놀라운 자기 계시를 읽은 후, 하나님이 그의 무한한 지혜와 공의 안에서 선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욥의 고백에 마침내 우리도 동의하는가? 42장은 하나님이 욥을 회복시키신 내용이 아니다. 욥은 확실히 옳지 않은 말을 한 것에 대해서 회개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그러나 욥기는 여전히 욥에게 행한 악에 대해 여호와께 책임을 묻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주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욥 42:11). 우리는 다른 성경(예: 창 3장; 요일 1:5; 약 1:13)을 통해 여호와가 악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기 속 구절과 다른 구절(예: 암 3:6)은 하나님이 악을 이기고 악까지도 그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주권자이심을 분명하게 한다. 이건 인간이 풀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여호와께서는 욥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왜 “욥의 말년을 그의 처음보다 더 복되게”(욥 42:12) 했는지에 대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지 그렇게 하셨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욥의 상황에 중점을 맞추는 식으로 욥기의 결말을 해석하는 것은 특히 욥이 여호와와의 만남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드러난 앞선 이야기의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욥기를 다 읽어도 우리는 고통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가진다. 그럼에도 최소한 축복이나 저주의 경험이 사람의 의를 측정하는 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축복하거나 저주하실 수 있다.원제: Why Does God Restore Job?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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