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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Advent Concert
by TGC
2023-12-01
TGC Advent Concert '소망의 찬양'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찬양사역자들의 출연으로 크리스마스 찬양과 성구들이 매우 잘 구성된 콘서트입니다. 찬양과 시와 말씀을 통해 평안을 누리고 소망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Songs of Hope: A TGC Advent Concert].1. 오 거룩한 밤(쉐인 앤 쉐인)2. 황량한 한 겨울에(키스 & 크리스틴 게티)3. 엘리사벳의 기쁨(푸어 비숍 후퍼)_말씀(누가복음 1:39-42)4. 임마누엘(테니엘 네다, 존 구에라)_말씀(이사야 7:14)5. 마침표!(퀴나 아라곤)_말씀(이사야 11:1)6. 엘리사벳을 위로하는 마리아(산드라 맥크라켄)_말씀(마태복음 1:21)7. 저 들 밖에 한밤중에(솔버린 그레이스 뮤직)_말씀(누가복음 2:10-12)8. 누우실 곳 없는 왕(리즈 바이스, 매디슨 커닝햄)_말씀(마태복음 2:13-14)9. 그날이 오면(캐롤라인 콥)_말씀(이사야 2:4)10. 어두운 곳의 크리스마스(글렌 스크리브너)_말씀(이사야 9:2)11. 참 반가운 신도여(솔버린 그레이스 뮤직)_말씀(갈라디아서 4:4-5)12. 그리스도(푸어 비숍 후퍼)_말씀(마태복음 1:17)13. 얼마나 아름다운지(퓨처 오브 포레스트리)_말씀(히브리서 2:14-15)14. 마리아의 송가(블레어 린)_말씀(누가복음 1:46-19)15. 산 위에 올라가서(쉐인 앤 쉐인)_말씀(이사야 52:7)16. 기쁘다 구주 오셨네(산드라 맥크라켄)_말씀(시편 98:2-4)17. 곧 오소서 임마누엘(조쉬 게럴스)_말씀(이사야 35:10)18. 깨어 있으라(캐롤라인 콥)_말씀(마태복음 25:13)19. 기쁨이 충만하기를(키스 & 크리스틴 게티)_말씀(요한복음 1:9)20. 오 거룩한 밤(퓨처 오브 포레스트리)_말씀(요한복음 1:14)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
by Keith A. Evans
2023-11-29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이유”도 함께 소개합니다. 신학교(신학대학원) 첫 수업을 들었을 때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결혼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스물두 살이었다. 신학교 수업은 내 수준에서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성경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 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당신은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럼 지금 내가 왜 과거의 당신과 똑같은 젊은이들에게 신학교를 가라고 권유하고 있는 걸까? 이유는 명확하다. 그러함에도, 단점보다 장점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를 볼 때,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사역을 추구했다. 목회에 필요한 신학 교육을 위해서 기존의 직업을 그만두는 경우는 서구 기독교에서 상대적으로 드물다. 물론 좀 더 인생에 노련한 사람이 되어서 신학교를 가면 분명한 이점이 있다. 교인들의 삶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들로부터 존경받을 이유도 더 갖춰져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젊을 때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신학교에 진학하면 상당한 이점이 있다.1. 장수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두 번째 직업이나 노년의 부름을 받아 간 사람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사역할 수 있다. 사역에서 금혼식은커녕 은혼식을 맞는 사역자를 거의 찾기 힘든 시대에 남들보다 일찍 시작해서 오랫동안 인내하며 사역한다면, 그런 사역자의 신실함은 눈에 뛸 수밖에 없다. 일찍 사역을 시작할수록 성장하고 성숙할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아무리 최고의 신학교라고 해도 사역에 관한 전부를 배울 수는 없다. 목회자의 진짜 교육은 사역지에서 이루어진다. 실전에 더 일찍 투입되는 일꾼인 만큼, 더 많은 경험과 성숙을 기초로 영혼을 목양할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 2. 에너지와 열정젊음은 젊을 때 낭비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건 나름 재치있는 과장이지만, 젊은이일수록 더 큰 에너지와 야망을 갖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조심하지 않으면 열정에 넘쳐 과격해지는 유혹에 직면한다. 젊은 남자들이 신학교 시절에 쌓은 신학이 소위 말하는 “새장에 갇힌 단계”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열심(딛 2:14)을 목표로 삼되, 그렇다고 지나치면 안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헌신하되, 그렇다고 선동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젊은이가 젊음과 열정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할 때, 그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 다른 직업과 달리 젊음의 에너지를 사역에 쏟을 때, 교회에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전도하고, 봉사하고, 심방하고, 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일에 인생을 바치라. 빠를수록 좋다.3. 집중쟁기를 잡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게 그리스도의 말씀이다(눅 9:62). 힘든 사역을 하다 보면 채 일 년이 되지도 않아서 모든 걸 벗어버리고 싶은 경우를 여러 번 만난다.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이 단지 마구잡이로 사역에 투신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마음대로 사역을 떠나서는 안 된다. 그렇다. 때때로 사역에서 한 발 떨어지는 게 지혜로울 때가 있다. 예상치 못하게 만난 장애 또는 부양의 책임이 사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전적 헌신을 방해할 수도 있다. 더불어서 가족 간의 불화, 특히 부부 관계 또는 자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는 가족에 집중하는 게 우선순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비상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역을 포기하는 것은 당신에게 사역이 부르심이 아니라 단지 직업이고 개인적인 결정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목사 안수는 교회를 통해서 추수할 밭에서 일할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이다. 그렇다면 일찍 시작한 신학교가 어려움을 만난 사역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계속 집중하는 데에 어떻게 도움이 될까? 신학을 일찍 시작할수록, 아무리 사역이 어렵다고 해도 다른 곳에 한눈팔 가능성이 줄어든다. 그러나 애초에 목사가 아닌 다른 직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사역이 어려워질 때 얼마든지 다른 직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세상 직업에서 받는 돈이 사역에서 받는 사례보다 더 많을 때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교회 밖에서 다른 교육을 받거나 기술을 익히는 게 잘못이라는 건 아니지만, 일찍부터 오로지 목회에만 집중하면 분명한 유익이 있다. 한눈팔 가능성을 현저하게 줄이는 동시에 참고 견디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4. 유연성젊을수록 오로지 공부에만 신경쓰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젊을수록 어떤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최고의 신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하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교육이 항상 온라인 교육보다 우수하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식의 이동이 모든 사역 후보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감당할 수만 있다면, 교수, 급우, 지역 교회 공동체와 함께 생활이 가능한, 보다 완전한 신학교 경험을 하라고 권면하고 싶다. 젊은 가족일수록 유연한 선택이 가능하다. 신학생의 가족이 기존의 삶에서 시작하는 대신에 새로운 환경에서 온 가족이 사역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도 있다. 젊기에 적응과 변화는 좀 더 쉽고, 온 가족이 사역을 중심으로 함께 성장하는 통일된 경험은 소중하게 남을 것이다. 나는 반복되는 이사에도 잘 적응하는 우리 어린 자녀들의 회복력에 몇 번이나 놀라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역사회와 특정 장소에 매이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한번 내린 뿌리를 뽑기는 어렵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섬기는 것은 특권이다. 왜 굳이 늦게 시작해야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기쁨이다. 그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은 축복이다. 경건한 교수들로부터 멘토를 받고 동료 학생들로부터 격려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젊은 세대가 일어나 봉사하는 건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이다. 왜 하루라도 빨리 사역에 투신하지 않는가? 젊은이들이여, 무엇을 기다리는가? 신학교 교육을 받는 데에 지금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원제: Why You Shouldn’t Wait to Go to Semina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이유
by Ryan Williams
2023-11-29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도 함께 소개합니다.나는 막 신학교를 졸업했다. 불과 몇 달 전에 졸업장을 받으려고 연단에 올랐다. 정말 멋진 하루였다. 지금 벽에 졸업장이 붙어 있다는 것은 내가 복음 사역을 위한 훈련을 정식으로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럼 졸업하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나는 십이 년 동안 전담 사역을 해왔고, 그중 십 년은 담임목사로 섬겼다. 이번에 건축 프로젝트, 재개척, 코로나19 팬데믹, 몇 번의 논쟁적인 정치 시즌 등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두 교회에서 목회했다.나는 좀 예외에 속한다. 서구에서 일반 목사는 보통 소명을 받으면 신학교부터 간다. 따라서 목사 안수 전에 신학교 훈련을 하는 교단이 대부분이다. 사역을 시작한 지 무려 십 년이 넘게 지나서야 신학교에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왜 젊은이가 신학교 입학을 기다리는 게 좋을까? 이게 과연 좋은 판단일까? 지금 당신이 신학교 입학을 고려하거나 다른 학위 취득에 관심이 있다면, 왜 좀 더 기다리는 게 가치가 있는지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하겠다. 1. 사역에 관한 비전이 좀 더 성숙해야 한다나는 모태 신앙이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고, 따라서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지,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리고 목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패러다임이 없었다. 성경 대학에 진학한 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역의 길에 접어들었다. 입학하고 나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공부가 정말로 싫었다. 겉보기에 경박하게만 보이는 신학 토론, 겉보기에 천박하게만 보이는 성적에 대한 관심,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만 보이는 강의 자료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강의 시간에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상상하곤 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헬라어를 배우는 동안 저들은 과연 어디에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까? 나는 교회에서 인턴으로 섬기기 위해 성경 대학을 중퇴했다. 그리고 그 기간에 목회 사역 훈련과 제자훈련 과정을 거쳤다. 교인들을 만나서 조언하고 보살핌을 주면서 나는 신학교 수업에서 토론한 진리가 어떻게 개인의 고통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사역을 통해서 “성장”한 후에야 나는 마침내 사역을 위한 정규 교육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었다.2. 인격적으로 더 성숙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난 직후에 나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은 있었지만,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 삶에 깊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목회자는 내 주변에 없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풀타임 학위 프로그램에 뛰어들기 전에 좀 더 기다리면서 성숙함을 키우라는 조언을 들었을 것이다. 내가 만났던 야심 찬 많은 신학생이 공감할 거다. 그들은 지원서의 핵심 부분을 놓치고 있다. 즉, 이 사람이 신학교에 갈 준비가 되었다고 그가 다니던 지역 교회의 교인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추천하는 부분 말이다. 신학교는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훈련하기 위한 곳이 아니다. 그건 온전히 지역 교회의 몫이다. 따라서 신학이라는 고등 교육에 뛰어들기 전에 당신의 소명을 지지하고 학교생활 내내 당신과 동행하며 헌신할 정도로 성숙한 기독교 지도자가 있는 지역 교회에서 성장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3. 학습 습관을 길러야 한다성경 대학에 다닐 때, 한번은 구약성서 교수가 세 시간 강의를 마친 후에 나를 옆으로 부르더니 말했다. “앞으로 너는 내 강의 시간에 스트레스를 푸는 고무볼을 손에 들고 주무르면서 강의실 뒤에 서서 수업을 들어라.” 다시 학생이 되기 전까지 나는 법 집행 기관에서 근무했고, 따라서 수업이라는 환경을 떠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난 상태였다. 그런 내게 세 시간짜리 강의는 말 그대로 고문이었다.단지 신학책과 교회사 관련 서적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신학교 전 과정을 따라가는 건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헬라어 어휘, 교회사 읽기, 여러 주제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처음 다운로드했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압도당했다. 성경 대학 입학은 내게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목사로서 공부에 더 익숙해진 후에조차도 전임 신학생이 되기 위해서 나는 학습 역량을 더 키워야만 했다. 4. 먼저 가족 부양과 사역에 들어가는 비용도 계산하라처음 계획은 인턴십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턴십을 수료한 나를 교회에서 목회자로 청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교 입학을 고려할 때마다 교회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길을 가로막았다. 단지 학위를 추가하기 위해 결혼 생활과 가장의 책임을 저버리는 것은 옳지 않았다. 게다가 교회에 들어가는 비용도 계산해야 한다. 신학교는 몇 년에 걸쳐서 주당 몇 시간이 들어가는 긴 과정이다. 그렇게 바쁜 학위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는 약간의 브레이크를 밟고 조금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교회를 개척하고, 또다시 개척하고, 또 그러다 보면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고,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건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도전적인 사역 기간에는 평소보다 목회자와 사역 지도자에게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사역에 정신이 없는 상태라면, 신학교 학위를 취득하는 데 여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교회와 가족을 목양하고 돌보는 것이 더 높은 우선순위이다. 신학교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다.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사역 훈련을 위해 성경적으로 신실한 신학교에 가야 한다. 하지만 먼저 비용을 계산하라. 좀 더 기다리거나 레지던트나 인턴십이라는 비전통적인 경로를 택하는 것이 최선의 결정일 수도 있다. 때로는 당신 자신과 가족, 섬기는 교회가 당신의 신학교 경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좀 더 기다림이 필요할 수도 있다. 원제: Why You Should Wait to Go to Semina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번영 복음은 미국 태생이다
by Russell S. Woodbridge
2023-11-28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기독교 도서전에 참석한 나는 잔뜩 쌓인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만이 아니었다. 내 마음도 그 책들을 탐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책을 정독하는 동안 갑자기 내 눈이 한 곳을 향했다. 바로 내 앞에 놓인 테이블에 조엘 오스틴의 러시아어판 ‘긍정의 힘’이 있었다. 이날 만난 ‘긍정의 힘’은 미국의 번영 복음 설교자들이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심지어 동유럽 등지로도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이 글에서는 번영 복음의 기원을 간략하게 추적하고 말 그대로 그것이 왜 미국에서 번성했는지, 그 이유를 몇 가지 알아보겠다. 신사상이 그 뿌리이다번영 복음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에서 유행한, 일명 신사상(New Thought)으로 알려진 준기독교 이단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이 철학은 건강과 부를 획득하는 열쇠가 올바른 말을 생각하고 시각화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뉴욕시의 Marble Collegiate Church의 목사 노만 빈센트 필(1898-1993)은 그의 책 ‘노먼 빈센트 필의 긍정적 사고방식’을 통해서 미국에서 신사상 사상과 기술을 대중화했다. 그러나 신사상을 가장 널리 퍼뜨린 사람은 랄프 왈도 트린(Ralph Waldo Trine, 1866-1958)이다. 이 두 사람의 글에서는 하나 같이 번영 복음의 반복되는 핵심 요소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즉, 올바른 말을 할 것, 성공을 가져다주는 보편적인 법칙을 말에 적용할 것,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신사상 사상은 특히 전도자이자 목사이며 베델성경연구소의 설립자 E. W. 케년(1867-1948)에게 영향을 미쳤다. 신학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은 번영 복음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의 기초가 되었다. 새로운 현실을 가져오기 위해 올바른 말을 하라는 것이다. 당신의 고백이 바로 당신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다. 케년은 현대 번영 복음 운동의 기초를 형성한 대중적인 번영 설교자들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다.예를 들어, 1940년대 후반에 오럴 로버츠가 신유와 금전의 번영을 외치며서 혜성과같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 그가 진행하는 텔레비전 쇼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비록 로버츠가 확실히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번영 신학을 전파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번영 복음의 가장 저명한 전도자이자 믿음의 말씀 운동의 아버지로 인식하는 사람은 케네스 E. 해긴(1917-2003)이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믿음의 말씀’ 운동은 20세기 후반 미국 전역에 번영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해긴은 1962년에 자신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한 전도사역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번영 복음을 전파한 게 해긴 혼자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해긴이 전파하는 오염된 교리를 받아들인 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미디어 사역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해긴의 아들인 케네스 해긴 주니어, 케네스 코플랜드(Kenneth Copeland), 프레드릭 프라이스(Frederick Price), 로버트 틸튼(Robert Tilton), 베니 힌(Benny Hinn), 찰스 캡스(Charles Capps) 및 제리 사벨(Jerry Savelle) 등이다. 믿음의 말씀 또는 번영 복음을 대표하는 교단은 없지만 많은 조직이 번영 복음 옹호자들의 사역을 지원하고 미디어를 통해 그들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수출한다. 1973년에 폴 크라우치(Paul Crouch)와 젠 크라우치(Jan Crouch)는 짐과 페이 베이커(Jim Faye Bakker and Tammy Faye Bakker)와 함께 TBN(Trinity Broadcast Network)을 설립했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TBN은 현재 세계 최대의 기독교 TV 네트워크이다. TBN은 로드 파슬리(Rod Parsley), 크레플로 달러(Creflo Dollar), 폴라 화이트(Paula White), 케네스 코플랜드, 제시 듀플란티스(Jesse Duplantis), 케네스 해긴 주니어 같은 잘 알려진 건강 및 부를 전파하는 설교자들을 포함하여 번영 신학 교사들이 수백만 명에게 다가갈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조엘 오스틴, T. D. 제이크, 그리고 조이스 마이어(Joyce Meyer) 등의 사역을 통해 번영 복음이 다시 한번 인기를 얻고 있다. 2007년에 나온 ‘잘 되는 나’에서 오스틴은 이렇게 썼다.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또 말하라. 성경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을 인정할 때 우리의 믿음이 효력을 발휘한다’라고 말한다. … 우리의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인정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 ‘나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다. 나는 재능이 있다. 사람들은 다 나를 좋아한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와 같은 말을 확실하게 선언하라.”이런 메시지는 긍정적 사고의 신사상과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말의 힘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번영 복음 지도자들의 미디어 제국은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번영 복음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이게 여전히 미국에서 울려 퍼지고 번성하는 걸까?성공 비법 성공 요인은 단 한 가지가 아니다. 아마도 혼합된 여러 가지 이유로 번영 복음이 미국에서 정착했을 거다. • 번영 복음은 성공하고 건강하며 금전적으로 안전해지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에 호소한다. 이러한 욕망이 본질적으로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해야 할 우리의 욕망을 대신한다면 죄가 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건강이나 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대하는 태도에 달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이나 다른 사람을 믿을 때마다 우리는 우상 숭배자가 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애쓰는 고집 센 마음에 최악의 상황을 가져다주는 게 바로 번영 복음이다. 물론 이 이유는 사는 지역에 상관 없이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지만, 다음 몇 가지 이유는 오로지 미국에만 해당한다. • 번영 복음은 아메리칸드림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미국인에게는 매력 있게 다가간다. 집과 자동차 두 대를 소유하고, 금전적 안정을 누리며 행복한 가족을 이루라. 아메리칸드림을 강화하는 것은 광고주가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건강, 외모, 재정 상태, 현재 소유물에 대해 불만을 품게 만드는 것과 하나 다르지 않은 소비자 문화이다. “당신은 지금보다 나아질 충분한 자격이 있으며, 우리 제품을 사용하면 삶이 개선되고 더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개인적 성취, 심지어 자격 부여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는 미국 문화에서 바로 그것을 약속하는 게 번영 복음이다. 성공의 징표는 신실한 믿음이 아니라 긍정적인 고백과 믿음의 말을 통한 개인적 성취를 이루는 것이라는 게 이 가르침이다. 그리고 번영 복음은 하나님에 대한 비물질적인 믿음이 언제나 물질적인 부를 불러온다고 가르친다. 번영 복음은 아메리칸드림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것을 당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자 축복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번영 복음은 미국 문화의 특정 측면에 호소한다. 미국에는 낙관주의와 개인주의가 넘쳐난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 역경을 극복하라.”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 되라.” 이런 만트라, 구호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개인적인 책임감과 긍정적인 태도는 바람직한 특성이지만, 그러한 낙관주의와 개인주의로 인해 미국인들은 인간의 본성과 잠재력에 대해 고상한 견해를 갖는 경향이 커졌다. 번영 복음은 당신이 충분히 선하다고 가르친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당신의 뜻에 맞게 상황을 바꾸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과 말을 바꾸고 믿으면 된다고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당신의 개인 비서인 우주 벨보이 하나님이 당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길로 인도할 것이라 한다. • 자본주의와 강력한 노동 윤리의 틀 속에서는 부를 창출하고 증대할 기회가 존재한다. 미국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서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는 분명히 장점이 있으며, 정직한 노동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것은 사회에 좋은 일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번영 복음은 매력 있게 다가온다. 얼마든지 상향 이동이 가능하고 번영하는 경제 시스템이 있는 나라에 살 때, 당신 편에 선 하나님이 경제 시스템이 당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축복하는 것은 추가 보너스이다. 충분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축복이 흘러나올 것이다. 결국 왕의 자녀가 되는 것은 당신의 권리이자 특권이다. • 교회에 성경보다 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교인으로 넘친다. 그리스도인은 종종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행복과 기쁨, 성공을 정의한다. 우리는 종종 성공을 거룩함과 신실함,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아니라 지위와 부, 지위의 관점에서 본다. 불행하게도 번영 복음은 책, 콘퍼런스, 소셜 미디어,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 예상치 못한 곳까지 마구 퍼졌다. 작년에 나는 아르메니아에서 설교했다. 거기서 요청한 주제가 바로 번영 복음의 진실이었다. 미국에서 시작한 번영 복음은 지금도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이 글은 2015년에 TGC에 발표된 글입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철 지난 글이 아닙니다. 이 미국 태생의 ‘번영 복음’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습관에도 이미 깊숙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미국산번영 복음은 한국 나름의 구복 신앙, 기복 신앙과 이종교배하여 더욱 질긴 변종을 만들어 냈습니다. 송구영신의 시간이 곧 다가옵니다. 번영 복음과 기복 복음, 이 가짜 복음이 ‘복음’으로 위장하기 딱 좋은 시즌입니다_복음과도시원제: Prosperity Gospel Born in the USA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번영복음
SQ란 무엇인가?
by 최창국
2023-11-27
인간의 삶-생명은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에 의해 육체와 마음과 영(시 16:9)으로 선(先, 태초에/최초에) 형성된 통전적 존재다. 인간의 삶-생명은 생체적 육체 또는 몸, 역할적 마음 또는 정신, 초월적 영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되어 가는 존재다. 인간의 세 차원은 내적으로 상호 대화적, 상호 침투적, 상호 형성적 작용을 통해 온전한 삶을 형성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어느 한 차원만으로는 온전하게 형성될 수 없다. 인간의 세 차원은 내적 차원이면서 동시에 내적 형성의 장이다. 사회-역사적 차원은 외적 형성의 장으로서 인간의 삶을 함께 형성하는 근원적 차원이다. 인간은 사회-역사적 상황 안에서 현존하면서 세계로부터 형태를 부여받고 또한 형태를 형성해 가는 존재다. 인간의 생체적, 역할적, 초월적, 사회-역사적 차원이 상호 작용을 통해 공명(consonance)을 형성할 때 온전한 삶을 형성할 수 있다. 천연적인 통전적 존재로 선 형성된 인간은 생체적, 역할적 차원을 통해 발현되는 IQ와 EQ와 초월적 또는 영적 차원을 통해 발현되는 SQ를 창조적 선물로 받았다. SQ(Spiritual Quotient 영성 지수 또는 지능)는 인간의 정신 또는 마음과 유기적인 관계 안에 있지만, 몸과 정신을 초월해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와 마음과 뜻과 공명하게 하는 지능으로 초월적 지능이다. SQ는 인간으로 하여금 근원적 문제인 선과 악을 질문하게 하고, IQ와 EQ를 통합하며, 제한된 삶의 조건을 초월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게 하는 지능이자 인격이다. 데오도르 로작이 “우리는 이제 영혼의 운명이 곧 사회적 질서의 운명이라는 것-만일 우리 안의 영이 말라비틀어지면 우리 주변에 세워 놓은 온 세계 역시 말라비틀어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Theodore Roszak, Where the Wasteland Ends: Politics and Transcendence in Post-industrial Society, xxii-xxiii)라고 간파했듯이, 인간의 영의 지능인 SQ는 인간의 삶-생명에서 중요한 지능이자 인격이다. 인간은 타락 후에 공명적 삶에 기능 장애가 발생하여 조화로운 삶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불공명적 삶은 SQ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불구 상태가 되었다. 원래 히브리어의 사탄은 ‘무응답’, ‘응답하지 못하는 자’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은 하나님께 응답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SQ가 불구 상태가 되어 하나님과 불공명적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한다. SQ가 불구 상태에 놓이면 실제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즉, 인간은 SQ가 불구 상태가 되면 자신의 IQ와 EQ를 통해 얻은 지식과 명예와 소유 등에 스스로 지배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의식에만 의존하게 되고, 삶의 겉모습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 삶의 근원적인 것들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인간의 SQ가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로부터 분리되면 결국 악의 힘에 노출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인간의 심리 내적 에너지마저 불공명적 상태가 된다. SQ가 결여된 인간의 불공명적 삶은, 쇠렌 키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부른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절망은 죽음, 생명의 결핍,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반응의 결핍이 그를 구속한다. 인간이 자살을 하는 근본 원인도 SQ의 결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SQ가 결여되면 인간은 삶의 궁극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자살은 절망의 극한적 행위이고, 무의미성에 대한 항복과 관계되기도 한다. 인간 사회에서 자살이나 자살 시도가 유행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여러 요인으로 나타나지만, SQ와 깊은 관계가 있다. 1990년대 후반에 런던 선데이 타임스는 젊은이들이 자살을 시도하는 원인 중 하나는 삶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어서 자살을 시도한다고 보고하였다. 의미의 상실은 결국 SQ의 결여와 관계가 깊다. SQ가 결여되면, 삶의 의미를 순간 너머를 바라보거나 사태를 더 큰 의미와 가치의 구조에 자리매김하는 능력이 부족하게 된다. SQ의 결핍은 심각한 영적 왜곡 상태를 낳는다. 인간을 자살로 몰아넣는 절망은 영적 왜곡 상태의 가장 심각한 형태다. 그러므로 형태와 정도와 관계없이 모든 영적 왜곡 상태는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며, 종종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SQ가 결여되거나 배제되면, 인간의 생체적, 역할적, 영적 성향 모두가 왜곡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삶은 불공명적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 인간의 영적인 병도 삶-생명의 불공명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적 건강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SQ와 IQ와 EQ가 전체적으로 공명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SQ는 영적인 병에서 영적 건강 상태로 가게 하는 원형적인 원동력이다. SQ는 의미의 회상과 관계된 지능이다. 여기서 회상은 문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분열된 조각들을 ‘다시 모으다’(recollect), ‘모으다’(gather)라는 뜻이다. SQ는 삶-생명의 차원들이 흩어져 불공명적 상태에 놓일 때, 다시 모아 공명적인 상태로 전환하는 지능이자 인격이다. 깊은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인간의 IQ와 EQ와 SQ의 공명적인 관계의 회복과도 관계된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SQ는 인간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은 신비로운 지능이자 인격이다. 이것은 공명을 위한 근원적인 지능이다. SQ는 다른 형성적 지능인 IQ와 EQ의 성향들을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들을 더 새롭고도 심오하게 뿌리내리도록 한다. SQ는 IQ와 EQ가 자신들의 성향들 자체에 사로잡히게 되는 일이 없이 서로 생동적으로 공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인간의 공명, 즉, 인간의 정신 또는 마음과 몸의 평화의 신비스러운 원천이다. 인간의 SQ가 병들면, 인간은 오로지 역할적 성취나 생체적 만족 또는 사회적 조정에만 중심을 두게 된다. 이런 성향의 인간의 역할적 에고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의 목소리에 대해서 합치적 순종 속에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의 역할적 정신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역할적 정신이 인간을 일방적으로 사로잡아 버리게 되면, 자기만족과 자아도취, 그리고 교묘하게 자기를 낮추는 듯 과시하는 오만함으로 왜곡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인간은 너무도 자주 공격적인 분석적 방식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성향을 분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역할적 정신에 지나치게 중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역할적 정신의 역할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여러 형태로 발현되었다. 예를 들어 역할주의의 한 형태인 관념론에서는 마음이 물질을 형성한다고 여기고, 유물론에서는 물질이 마음을 만들어 낸다고 여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삶-생명에 대한 환원주의적 형태들이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역할적 정신을 중심에 두는 환상을 초래했다. 이러한 역할주의적 삶의 형태는 본질적으로 오만이다. 삶의 오만 형태는 이성주의, 주지주의, 심리주의, 물질주의 등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삶의 오만 형태인 역할주의적 야망은 불공명적 삶을 야기한다. 인간의 SQ가 결여된 역할적, 생체적 차원은 언제든지 이성주의와 유물론주의와 같은 형태 등으로 발현될 수 있다. SQ는 삶의 차원들을 분열하게 하지 않고 다른 차원, 즉 IQ와 EQ와 공명하도록 한다. 이것은 역할주의적 정신이 갈라놓은 것을 다시 온전하게 한다. SQ는 해체적이고 공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오히려 모든 불공명적 성향들 속에서 삶과 세계의 더 깊은 일치를 묵상적이고 회복적이고 온유하게 보존하게 하는 지능이다. SQ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근원적 3중 요소와 관계된 지능이자 인격이기도 하다(마 22:37-40; 고전 13:13). SQ는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에 의해 형성된 인간의 삶-생명의 근원적 형태가 영적 존엄과 신비와 관계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와 공명하게 하는 지능이다. 이러한 예는 성경의 바울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회심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에 의해 발현된 영적 체험이었다. 하나님에 의해 그의 SQ가 발현되었을 때, 그의 생체적 몸, 역할적 정신을 통해 얻은 신학적 지식과 교리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빌 3:5-9). 또한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에 의해 그의 SQ가 발현되었을 때 역할주의의 성향에 의해 형성된 율법주의적 삶의 성향이 근원적 삶의 성향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성향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고전 13:13). 인간의 평화의 상태와 온전한 상태는 태평하고 아무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삶-생명의 차원들이 영적인 중심에 의해 질서가 잡혀 공명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SQ는 인간의 삶-생명의 공명 형성, 즉, 인간을 더 온전하고 더 넓은 삶-생명의 흐름 속으로 이끄는 지능이자 인격이다.
SQ
영성지수
함께 가는 길
시편 133편 묵상
by 고명환
2023-11-25
1 신학교 교회사 시간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는 분열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이다. 개신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그 가지 수를 늘리고 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한국에서 그 실상은 쉽게 발견된다. 교파를 가르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교파 안에 수많은 교단이 정통의 깃발 아래 간판을 달리하고 있다. 개신교를 방어하는 혹자는 이를 다양성이라는 미명으로 애써 포장하지만, 다양성을 낳은 태생의 동기를 파헤쳐 보면 얼마나 허전한 변명인지 금방 알아채게 된다. 분리는 연합보다 쉬운 선택이다. 일치를 위해 애쓰는 것보다 떠나 독립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며 나아가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이 긴 고민 없이 분리를 선택하는 큰 이유일 것이다. 덩치가 큰 기독교 집단이 분리하는 이유와 그리스도인들끼리 협력보다 분리를 선택하는 이유는 일맥상통한다. 그 속성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갈등하며 같이 가는 것보다 혼자 자신의 길을 가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함께 가기 위해 맞춰주고 받아주고 기다리고 설득하고 때론 싸워 조정하는 데에는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렇지만, 떠나고 숨고 거부하고 무관심한 편을 선택하면 그런 일과 씨름할 필요가 없어진다.나 역시 쉽게 떠나는 편을 선택해 왔다. 어떤 그룹은 세상적이라고, 아니면 그 친구들은 너무 보수적이라고 하면서. 생각이 맞지 않는다며 동역자들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들의 모임을 피하려 했다. 소수라도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일하려 했지, 껄끄러운 분들을 적극 설득해서 같이 하려 하지 않았다.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가 교회를 떠나면, 어쩔 수 없다며 적극 다시 끌어오려 하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 앞으로 속 썩지 않아도 된다는 얄팍한 계산도 했던 것 같다. 2시편 133편은 시의 분량이 말해주듯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간결한 시이다. 그런데, 시작이자 시 전체를 수렴하는 1절은 긴 공명을 일으킨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새번역)시편 133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1그 얼마나아름답고 즐거운가!형제자매가 어울려서함께 사는 모습!2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3헤르몬의 이슬이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주님께서 그곳에서복을 약속하셨으니,그 복은 곧 영생이다.형제자매들(하나님의 백성)이 연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사는 모습은 밖에서 보기에 좋아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즐거움이 있다(1절). 주님의 사람들이 선한 일에 연합하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즐겁고 기쁜 일은 없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은 두말할 필요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답다. 이런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며 마음껏 복을 주신다(3절). 형제들과 함께하며 얻는 즐거움은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시편 122편을 시작하는 구절이다. 시 전체는 성전을 비롯한 예루살렘을 둘러보고 느낀 황홀한 감격을 그린다. 이 잊지 못할 경험은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는 형제들의 제안에서 시작된다. ‘기뻤다’는 표현이 말해주듯 같은 마음을 품은 형제들과 좋은 일을 함께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전도서에는 주님의 백성이 연합하여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때 비단 즐거움을 얻는 데 그치지 않음을 들려준다.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받는 유익을 얻게 됨을 가르친다. 물론, 힘을 합하여 큰일을 도모할 수도 있다. 홀로 일어나지 못할 때 서로 일으켜 줄 수 있으며, 혼자의 힘으로 맞설 수 없는 상황에서 힘을 보탤 수 있다. 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여럿이 힘을 합쳐 이루어 낼 수 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 4:9-12, 새번역).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 없이 뜻하신 일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다. 그런데도,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과 다니며 일하셨다. 이 땅을 떠나시기 전,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그들이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요한복음 17장). 잡히실 것을 아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깨어 기도하라 부탁하기도 하셨다. 부활 후에는 제자들 곁을 아주 떠나지 않으신 채, 한동안 세상에 머무시며 확신을 심어 주시고 사명을 부여하셨다. 마침내,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교회가 시작되게 하심으로 주님의 원대한 계획에 제자들이 동참하는 영광을 얻게 해 주셨다. 사도 바울은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전도 여행에는 언제나 동행자들이 있었다. 때론 그들 가운데 뜻이 맞지 않아 의견 다툼이 생기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혼자의 길을 고집하지 않았다. 새로 만나는 주님의 일꾼들과 거리낌 없이 협력했고, 의견이 다른 일꾼들과 잠시 갈라서기도 했으나 영영 결별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편지에는 받는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들이 그가 하는 일에 기도와 마음으로 동참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3즐겁고 아름다운 형제의 연합은 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는,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다름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인식하기보다 다양성의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같은 모습으로 만드시지 않았다.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에서 각각 차이가 난다. 이처럼 각 사람을 독특하게 지으신 목적은 자기만의 색깔을 내며 홀로 독불장군이 되어 독립적으로 살아 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아니하면서 다른 색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큰 그림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사람들의 모습과 성격이 다르듯이 살아가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한 아버지를 모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양태 역시 제각기 다르다. 유사한 사람들로 그룹을 지을 수 있지만, 면밀하게 뜯어보면 그 안에도 똑같은 생각이나 방식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란 없다.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고, 형편에 따라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신앙인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TV를 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제 될 게 없다고 하는 신앙인이 있다. 어떤 사람은 좋은 프로그램만 골라 보면 된다고 한다. 유행가를 불러도 된다 혹은 안된다. 교회 안에서 반바지를 입지 말아야 한다, 괜찮다 등등, 다양한 의견 차이와 생활 방식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 미국에 사는 동안 현지 목사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 목사님들의 삶에 익숙한 내게 미국 목사들은 너무도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매일 새벽잠 깨어 교회로 향하지 않아도 되고, 밤늦은 시간에 기도회를 인도하지 않아도 된다. 주일 오전 예배에 사용할 설교 한편이면 설교 준비는 끝난다. 주중에는 교회에 마련된 목사실로 며칠 출근하여 스스로 정한 근무 시간을 채우면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개인적으로 활용하든 상관하는 사람이 없다. (미국 목사들은 ‘오피스 아워’라고 부르는 시간 동안 사무원처럼 사무실에서 일한다.) 본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특별한 요청이 있을 때 어쩌다 교인을 심방하기 때문에 심방으로 시간을 빼앗기지도 않는다. (계절별로 대심방이나 성도들의 기념일로 심방 하는 일은 없다. 병원을 방문하거나 상을 당한 성도를 심방 하는 일 정도가 심방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상대방이 원하는지 잘 판단해야 한다.) 게다가 일 년에 한 달 이상 휴가를 다녀오고 두세 주 정도의 독서를 위한 특별휴가까지 받는 것이 보통이다. 설교 시간에 지난주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거나, 프로야구 경기장에 가서 친구들과 환한 얼굴로 찍은 사진들을 교회 프로젝트 화면에 띄우며 자랑하기도 한다. 사명감에 불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회 일에 분주한 한국 목사들에 비하면 그들은 놀고먹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직무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설교 준비에 성의를 다하고, 매일 새벽에 교회로 향하지 않지만 개인의 처소에서 경건 생활을 위해 힘쓴다. 단지 그들은 한국의 목사들과 다를 뿐이다. 목사라는 직책을 수행하는 방법이 다르고, 목회 철학이 다르고, 세상과 가정과 개인 생활을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은 어떤 이유에서 건 다 다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반목과 무시로 서로를 대하기 쉽고 불협화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가진 것만이 옳다고 믿고 주장할 때, 다른 그룹의 사람들은 어울리지 못할 타인들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합과 조화에서 오는 즐거움은 고사하고 분열에 따른 아픔만 남게 된다. 이는 서로 사랑함으로 그 정체성을 세상에 알려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히려 분열함으로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은 차가울 것이고 나아가 주님에게 큰 손해를 끼칠 건 뻔하다. 어떤 그룹이나 개인이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면 그다음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작은 이슈들에 집착해서 서로 옳고 그름을 따져 거리를 두기보다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집중하면 좋겠다. 하나님 나라는 흑백으로만 그려져야 할 지루한 평면적인 그림이 아니다. 형형색색이 어울려 그려져야 할 화려하고 아름다운 입체적인 그림이다. 다음으로, 이해와 포용, 용서와 화해의 자세를 가질 때 연합과 조화의 아름다운 그림은 그려진다. 이해와 포용의 기반 위에 협력과 동행의 좋은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관계를 이어가는 힘은 이해와 포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용서와 화해는 이해와 포용보다 차원 높은 기독교의 핵심 정신이다. 이해와 포용이 상대의 연약함이나 약점을 덮을 수 있는 정도라면 용서와 화해는 상대방의 잘못과 허물까지 덮을 수 있다. 용서와 화해가 없는 기독교는 정의와 법만이 지배하는 삭막한 종교의 수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해와 포용을 넘어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기까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대학 시절에 교회의 청년부에 속해 있으면서 대학생선교회 활동을 했다. 분명 두 그룹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한쪽은 모이면 전도와 민족복음화를 얘기하는 순수 열정 대학생 모임이었고, 다른 쪽은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대화로 가져와 웃고 즐기는 세상적인 기독 청년 모임이었다. 한창 뜨거웠던 나의 눈에 비친 교회 청년들의 모습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이런 비교는 점점 그들과 거리를 두게 했고 그들 속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소속한 대학생선교회에 대한 자부심은 또한 다른 그룹의 대학생선교회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각자의 특성대로 일하는 동역자이자 형제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못했고 칭찬은 고사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열리는 연합 행사에 건성으로 협조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의 관점에서 대학생선교회를 지도하시는 간사님들은 최고로 헌신된 주님 나라의 일꾼들이었다. 일정한 소득 없이 매달 불안정한 후원으로 살아가면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묵묵히 일하던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사도들처럼 보였다. 반면에, 의식을 집전할 때는 근엄한 태도의 성직자들이 되지만, 단을 내려오면 언어나 생활에 본이 되지 않는 교회의 목사님들은 그저 그런 일꾼으로 판단했다. 이런 좁은 생각으로 인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고 가까이하여 그분들의 좋은 점들을 배울 기회를 놓쳤다. 기도로 기꺼이 돕지도 못했다. 미국 교회의 원로 목사님이 해 준 말씀이 생각난다. 아마 그분과의 대화 중 당시 내가 섬기던 교회의 한 성도의 흠을 잡았던 것 같다. 이혼을 거듭했고 말을 사납게 하는 여자 성도가 교회에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자 노령의 목사님은 그 성도를 잘 품어 주라고 당부하며 덧붙였다. “당신이 아주 비싼 벤츠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데 헤드라이트 하나가 나갔다고 차를 버리겠냐?” 내 좁은 속을 부끄럽게 만드는 적절한 충고였다. 그 당시의 나는 전체의 가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트집 잡으며 가치를 절하시키고 나중에는 폐기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다 실수하고 때론 죄를 지으며 산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고 죄를 꼬집는 나 또한 실수와 죄의 비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잘못했다고, 실수했다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죄를 지었다고 멀리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주님은 그분의 사람들이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고 연합과 조화를 이루기를 원하신다. 상대의 약점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함께 가라고 하신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되어 주님 나라를 확장해 가라 요구하신다. 세상은 혼자 당당하게 사는 당신이 아름답다고 한다. 당신에게 유익을 주지는 못하면서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사람을 손절하라고 가르친다. 홀로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부각하며 동경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혼자 살아가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어울려 즐겁고 아름답게 살도록 부름받았다. 그리고 함께 일하도록 부름받았다. 어울려 살아가고 조화를 이루며 함께 일하려면 서로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형제라도 끝까지 참아 주고 곁에 있어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분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모두 주님에게서 손절당할 무익한 존재들이다. 이를 생각한다면 하찮게 여겨지는 관계라도 함부로 끊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관계들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의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 가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길 바래 본다.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는가?
by Joanna Kimbrel
2023-11-24
소셜 미디어에 관한 또 다른 관점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왜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었는가?” 중학교 때 가족용 데스크탑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화 접속 인터넷의 친숙한 소리를 기다렸다가 Internet Explorer를 두 번 클릭하고 MySpace로 이동하곤 했다. 종종 몇 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내 순위를 확인하고 완벽한 프로필 노래를 내 페이지에 삽입할 수준이 되도록 HTML을 배우고, 작은 빨간색 알림이 주는 반복되는 도파민 자극을 느끼기 위해 브라우저를 계속해서 누르며 페이지를 새 화면으로 바꾸곤 했다.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소셜 미디어는 크게 발전했다. 중독성은 여전하지만, 훨씬 더 복잡하다. 불쾌한 트위터 싸움과 열띤 댓글 싸움을 볼 때면, 상대에 대한 고려 없이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인간의 타락성을 다시금 생각한다. 필터를 통한 이미지 조작과 핏스포(fitspo: fitness inspiration)는 우리를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 채우는 동시에 불가능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나는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왜? 나는 하나님이 그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소셜 미디어까지도 얼마든지 구속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위험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소셜 미디어에 로그인하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연결을 이루는 장소온라인 관계가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대체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온라인은 내가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우정을 나누고 있다는 환상을 줄 수 있다. 사실상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함에도 나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온라인 연결을 맺었다. 그 일부는 나중에 콘퍼런스나 커피숍에서 만났고, 또 수시로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도 있다. 나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은 내게 일종의 가상 지원 시스템이다. 소셜 미디어는 내가 일자리를 찾을 때 통로 역할도 했다.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자원과 사람들을 소셜 미디어에서 만났다. 내가 Gospel Coalition을 알게 된 것도 사실상 소셜 미디어 덕분이었다. 성장을 위한 기회요리법과 생활 꿀팁부터 육아와 영적 성장에 이르기까지, 내가 팔로우하는 수많은 계정의 포스팅을 통해서 나는 격려를 받고 성장을 체험한다. 긍정적인 성장을 장려하는 피드만을 골라서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내가 얻은 리소스를 생각할 때 그건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이다. 명확한 의도성과 분별력을 갖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전에는 고려하지 전혀 않았던 관점에도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신념이 다른 사람들의 포스팅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포함하여 모든 걸 다 시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와 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인식과 공감이 커진다. 복음 전파의 통로틱톡이 전도에 필수도 아니고,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대면 사역을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수십억의 사람들이 이러한 앱을 사용하고 또 듣고 있는 게 현실이다.온라인 플랫폼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더불어서 성경 공부 도구와 영성 훈련을 실행하는 실제적인 방법, 그리고 지역 교회 공동체를 향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다양한 기회까지 제공한다. 경계 설정이처럼 소셜 미디어에는 잠재적인 이점이 많이 있지만, 심각한 위험도 따라온다. 중요한 건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로 제대로 탐색하는 자세이다. 경계를 설정하지 않거나 내 삶과 영혼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소셜 미디어는 시간 낭비, 불안 고조, 탐심이라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나는 건강한 소셜 미디어 사용을 위해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가드레일을 설치했다. 내가 실천하는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시간을 제한해 둘 것무의식중에 휴대폰 소셜 미디어 앱에 빠져 있는 나를 보며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소셜 미디어의 중독성은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에베소서 5:15-16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지혜 없는 자처럼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때가 악하니 시간을 활용하라”고 권고한다. 이 명령을 따르기 위해 나는 휴대폰에서 소셜 미디어 앱에 대한 시간제한을 설정했다. “15분 추가” 버튼을 누르고 싶은 유혹이 너무 강하다면, 시간이 다 되었을 때 다른 누군가가 해당 앱을 잠그도록 하는 비밀번호 설정을 고려하라. 2. 시간을 정해 두고 휴식을 취할 것나는 주말에는 휴대폰에서 소셜 미디어 앱을 완전히 삭제한다. 또 일 년에 몇 번 장기간 소셜 미디어 방학을 가진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오로지 기도하고, 성경 묵상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으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며칠이라도 앱을 제거하면 다시 앱을 다시 설치한다고 하더라도 휴대폰을 사용하는 빈도가 줄어든다. 3. 포스팅을 잘 선별할 것스크롤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사고 싶고, 외모에 더 집중하게 되는가? 유혹에 빠지는가? 아니면 괴로움과 불안을 느끼는가? “팔로잉” 목록 조사에 시간을 투자하라. 당신이 팔로우하는 계정들이 과연 참되고, 경건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칭찬할 만하고, 탁월하고, 칭찬할 만한 것인지를 확인하라(빌 4:8). 대답이 ‘아니요’라면, 당장 ‘팔로우 취소’ 버튼을 클릭하라. 4. 게시물 올리기 전에 생각할 것내가 게시하는 내용은 내가 먹는 음식만큼이 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게시하기 전에 스스로 물어 보라. 내가 이 게시물을 성취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이 게시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이기적인 야망과 헛된 자만심에서 포스팅하는가, 아니면 겸손함이 동기인가? 내 게시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가?5. 정기적으로 재점검하기나는 소셜 미디어를 계속 사용하기로 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 내가 사용하는 방식이 항상 같을지도 확신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라. 소셜 미디어가 내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아직도 내가 시간을 잘 활용하고 있는가? 변경해야 할 사항은 없는가? MySpace에 처음 가입했을 때, 위험한 개인 정보를 낯선 사람과 공유하지 않겠다는 것 외에 나는 딱히 무엇이 현명한 사용법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친구들과 연결하는 재미있는 방법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몇 년 후,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소셜 미디어가 가진 선과 악의 잠재력을 점점 더 깨달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소셜 미디어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를 기도한다. 그건 당신을 위한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원제: Why I’m Staying on Social Medi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었는가?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11-23
소셜 미디어에 관한 또 다른 관점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는가?”9개월 전, 소셜 미디어에 관한 팟캐스트를 녹음하던 중에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뒀다.계정을 삭제하기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슬플지, 외로울지, 아니면 사람들과 연락이 끊길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과연 소셜 미디어를 안 하고 살 수 있을지 자체도 가늠할 수 없었다. 사실 직업 면에서 소셜 미디어는 내가 활용하는 자료가 온라인에서 뒤떨어지지 않는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게다가 또 온라인에도 얼마나 좋은 일이 많은가? 상호 연결이 있고, 다양한 성경 해석을 접할 수 있으면 기쁨이 공유되고 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등 아름다운 활동이 일어난다. 내가 정말로 이 모든 것에서 나 자신을 영구히 차단하는 게 맞을까? 하지만 여기에 솔직한 진실 하나가 있다.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고 40주가 흘렀는데 한 번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여름 방학, 생일, 그리고 이런저런 휴일을 지나면서 단 한 번도 사진을 게시하지 않았고,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또 오랜 친구가 올린 인생 전환 스토리도 보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놓치고 사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다시 돌아갈 계획이나 욕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소셜 미디어에 가입하기 이전의 내 삶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나아졌기 때문이다. 왜 소셜 미디어를 시작했는가나는 스물일곱 살 때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었다. 홈스쿨링을 하는 젊은 엄마로서 소셜 미디어는 (말 그대로) 내가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건 우리 가족이 무엇을 하는지 그들과 공유하고, 또 나와 같이 홈스쿨링하는 다른 엄마들과 서로 기뻐하거나 위로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페이스북이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고 말한 성경 말씀(롬 12:15)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소셜 미디어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훌륭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아이들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하는 게 어색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대화를 중단했다. 또 내가 하는 일을 이리저리 떠드는 것도 내 자랑 같아서 점점 줄여나갔다(잠 27:2). 게다가 어떤 이슈에 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고, 그래서 나는 그런 이야기도 전혀 쓰지 않았다(잠 17:28).그 시점에 이르자 나는 사실상 잠수를 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내가 올린 게시물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도파민의 흥분 호르몬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둘 수 없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행여라도 내가 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왜 그만두었는가나름 조사한 결과, 나는 소셜 미디어 계정을 폐쇄하는 사람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강하게 반대하는 내부 충동을 극복하는 데에는 어떤 자극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의 첫 번째 작은 시작은 에밀리 젠센이 쓴 통찰력 있는 Social Sanity in an Insta World를 읽으면서였다. 그녀는 내가 소셜 미디어를 하면서 일찍이 느꼈던 여러 증상을 하나씩 나열했다. 남는 시간을 때우려고 소셜 미디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 긴 독서에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느끼는 낮은 수준의 불안감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게 결정적인 충격을 준 것은 통찰력 있고 경건한 Z세대 여자아이들과 대화하는 중에 그들을 얽매고 있는 소셜 미디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였다. 그들을 통해서 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얻는 것은 거의 없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셜 미디어를 떠나는 데에는 겸손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리즘에 맞설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소셜 미디어에 접속할 때마다 느끼는 도파민이 주는 기대감을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내 페이지를 계속 업데이트하며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완전히 성공할 수 없었다. 데이비드 앨런(David Allen)의 표현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정복하기 불가능한 일종의 무한 고리이다. 나라고 소셜 미디어를 적절하게 활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마침내 아예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 친구 로라의 경우에는, 소셜 미디어에 며칠 내내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거기에 조금도 매여 있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도구를 통해서도 그녀의 사역을 아름다운 방법으로 축복하고 계신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아무리 관대하고 은혜로운 마음으로 로그인하려고 해도, 다른 글들을 읽을 때면 조급해지거나 지루해졌다. 흥미로운 글이 내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열리도록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날카로운 분노나 좌절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소셜 미디어를 그만뒀을 때, 나는 결코 그 이전보다 더 친절하고, 더 똑똑하고, 더 현명하거나, 주님을 더 사랑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다 없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그리고 트위터까지. 왜 나는 소셜 미디어를 여전히 하지 않는가에밀리가 옳았다. 소셜 미디어는 그녀와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손을 떼고 난 이후 나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 더 명확하게 생각하고, 더 효과적으로 내 삶을 조절하면서 집과 직장에서 눈에 띄게 효율성이 높아졌다. 이제 나는 지루함 없이 성경과 다른 책들을 읽을 수 있다. 가족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사랑한다. 사라지지 않던 낮은 수준의 불안감이 없어졌다. 더 편안하고 더 잘 참는 사람이 되었다. 선택을 내릴 때도 훨씬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하는 무언가가 소셜 미디어에서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장점을 계속 이야기할 수 있다. 더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팟캐스트 Gospelbound에서 내가 Collin Hansen과 나눈 이야기를 권한다.)이제 나는 누군가가 소셜 미디어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 덕에 나는 트위터에서 벌어졌을 수백 번의 싸움과 험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진짜 생활과 다른 사람이 온라인에 올린 인스타 생활을 비교하는 일도 내 삶에서 사라졌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다. 물론, 분명히 몇 가지는 놓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 즉 순전한 기쁨, 향상된 집중력, 주님의 인도에 대한 민감성이 주는 장점은 분명하다. 소셜 미디어 사용 여부의 장단점을 결정하는 저울의 추는 하지 않는 쪽으로 더욱더 기울고 있다. 내게는 이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보통 미국인이 하루에 소셜 미디어에서 쓰는 시간이 두 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신도 ‘내가 왜 이걸 계속해야 하지? 이게 그럴 가치가 있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원제: Why I Left Social Media—and Won’t Go Bac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소셜미디어
상(床)을 베푸시는 하나님
by 박혜영
2023-11-22
우리는 성찬의 말씀을 나누고, 주의 떡과 잔을 함께 먹는 시간을 갖습니다. 매번 이 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자세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찬식의 기원은 흔히 알고 있는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고전 11:23)보다 훨씬 이전인 광야 시대의 성막에 놓인 ‘상’에 있습니다(참고. Brant Pitre, Jesus and the Last Supper). 레위기 24:5-9과 출애굽기 25:23-30은 둘 다 광야의 성막 안에 설치한 ‘진설병 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지며, 상 위에 진설병[떡]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출 25:29-30). 숟가락까지 준비해 놓은 걸 보면, 이는 식사를 위한 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내 앞에”]서 먹고 마시는 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베푸신 상일까요? 하나님이 베푸신 상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여기에 놓은 떡(진설병)이 특이합니다. ‘기념의 떡’이었으며,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영원한 언약”이었습니다(레 24:7, 8). “기념[기억]”을 위한 것이라니, 먼저 이런 상을 베푸신 적이 있다는 뜻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시내산 언약식 장면입니다.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0-11).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대표들에게 하나님이 상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니, 이는 하나님 앞에서 먹었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출애굽기 24장)이 끝나자마자 성막 설치에 대한 지시(출애굽기 25장)가 나오는 걸 보면, 성막 안 ‘진설병 상’은 시내산 언약 식사의 축소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성막을 ‘휴대용 시내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진설병 상’의 떡을 ‘기념의 떡’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시내산 언약 식사를 기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베푸신 상이라니 얼마나 거룩하고 중요합니까! ‘진설병 상’이 언급된 구약의 본문을 찾아보면, 거의 언제나 지성소 안의 ‘증거궤’ 다음으로 등장합니다. 얼마나 거룩하고 중요한지 지성소의 증거궤와 ‘진설병 상’만 삼중 포장하여 이사합니다(민 4:6-8). 성막의 다른 기구들은 이중 포장이면 충분했습니다.그렇게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 12지파를 위해 베푸신 ‘진설병 상’을 유월절에 예수님이 12 제자에게 베푸셨습니다(눅 22:14-20). 이 상은 예수님이 베푸신 게 분명합니다. 14절 문장을 원문 순서로 읽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앉으시니, 제자들이 함께 하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었고, 12제자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위한 초청입니까?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 식사 자리에서 떡을 주시며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으며(눅 22:19), 잔을 주시면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 하셨습니다. 구약 12지파를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얼굴의 떡[진설병]’(출 25:30)을 먹었듯이, 12제자는 “내 몸”(눅 22:19), 곧 ‘주의 몸’을 먹었습니다. 정리해 보면, ‘진설병 상’이 이어져 내려온 순서는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24:10-11→출애굽기 25:23-30(레위기 24:5-9)→누가복음 22:14-20.광야 백성에게 상을 베푸신 분이 하나님이듯, 교회의 신자들에게 상을 베푸시고 초청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 상의 기원은 시내산 언약이며, 예수님은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눅 22:7)에 새 언약을 세워 시내산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사도들에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하셨기에, 오늘날 교회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일러 ‘성찬식’이라 하는데, 주님이 베푸신 ‘언약의 식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진설병 상’을 그렇게 거룩하고 중요하게 여겼다면, 교회의 신자들도 예수님이 베푸신 상을 거룩하고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다른 일이 있다는 이유로 빠지는 교회의 정회원들이 있다면 유감스러운 일입니다(참고. 눅 14:16-20). 자신에게 흠이 있어 이 거룩한 식사를 감당치 못해 피한 것이라면, 더 좋은 방법은 참석하여 그런 내용을 주님께 고백하고, 한 몸이 된 교회의 성도들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세워가야 합니다.
‘번영 복음’ 팩트체크
by Joe Carter
2023-11-21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번영 복음 관련 신앙을 믿는 교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Lifeway Research 이사 스코트 맥코넬은 “지난 오 년 동안 훨씬 더 많은 교인의 신앙이 사실상 번영 복음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축복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이단적인 믿음도 포함된다”라고 말한다. 맥코넬이 지적한 것처럼 문제는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축복을 주신다는 생각(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제공되는 모든 좋은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롬 8:32])이 아니라, 그런 축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무슨 일이라도 다 해야 한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있다. 번영 복음에 관해 알아야 할 아홉 가지는 다음과 같다.1. 번영 복음은 다양한 이름과 브랜드를 자랑한다.번영 복음은 “건강과 부의 복음” 또는 “원하는 것을 선포하고 쟁취하라” 등의 용어를 다 포함하는 모든 신학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많은 사람에게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는 “믿음의 말씀” (Word of Faith) 운동이다. 이는 실로 엄청난 추종자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현대 기독교 운동이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재정적으로 번영하고 신체적으로 복지를 누리기를 원하며, 믿음과 긍정적인 말, 특정 기독교 사역처에 대한 헌금이 바로 이 두 가지 축복을 증가시키는 비결이라고 가르친다. 다음은 스티븐 헌트의 설명이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육체적 건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에 관한 교리는 번영 복음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최전선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건강과 부”가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동으로 갖는 신성한 권리이며, 이런 축복의 결과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 패키지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단지 죄만이 아니라 질병과 빈곤도 함께 제거했기 때문이다. 2. 번영 복음은 신사상으로 알려진 신비주의 운동에 뿌리를 둔다.신사상(New Thought) 운동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정신철학이다. 명시적으로 기독교 사상은 아니지만 기독교뿐만 아니라 동양 철학, 형이상학적 전통, 심리학 및 자기 계발 같은 신흥 분야의 영향을 받았다.이 운동은 긍정적 사고(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상황을 가져온다는 믿음), 끌어당김의 법칙(좋아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것을 끌어당긴다는 생각, 바라는 것을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그리면서 오로지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그 결과, 바라는 결과를 이뤄내는 환경을 갖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마음에는 몸을 치유하고 번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신사상은 기독교 신비주의와 성경의 요소를 통합하지만, 이를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해석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같은 성경 구절은 흔히 끌어당김의 법칙을 확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신사상은 힌두교, 불교 및 기타 동양 철학의 사상까지 통합해서 혼합적인 영적 틀을 만든다. 3. ‘번영 복음의 아버지’는 오클라호마 출신의 신유 설교자이다.현대 번영 복음 교육의 아버지로 여겨질 수 있는 사람은 오랄 로버츠(Oral Roberts)이다. 1918년 오클라호마 폰토톡 카운티에서 태어난 로버츠는 20세기 중반에 명성을 얻었으며, 오늘날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기독교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다. 가난하게 자랐고 십대 때 결핵으로 고생했던 그는 부흥회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된 후 자신의 삶을 기독교 사역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복음 전파의 매체로서 텔레비전의 잠재력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 시청자는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 신유 은사를 가진 이 복음 전도자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Oral Roberts University라는 학교를 시작했다. 전성기 시절에 그는 연간 수익 1억 1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사역을 총괄했다.4. “믿음의 말씀”이 번영 복음 전파에 큰 역할을 했다. 로버츠가 신사상 원리와 신유 은사를 결합한 최초의 사람 중 하나라면, 번영 복음의 가장 저명한 전도자이자 “믿음의 말씀” 운동의 아버지는 케네스 E. 해긴(1917-2003)이다. 1962년에 해긴은 Kenneth Hagin Ministries를 설립하여 믿음의 말을 선포함으로 건강과 부, 기타 축복을 불러올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파했다.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의 하나는 로고스(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와 레마(입을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의 구분이다. 그는 레마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활성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셀 우드브리지가 말했듯이,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믿음의 말씀 운동이야말로 20세기 후반에 미국 전역에 번영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5. “씨앗 믿음”이 번영 신학 운동의 초석이다. “씨앗 믿음”(seed-faith) 교리는 번영 복음 설교자의 사역에 금전으로 기부하는 것이 결국 축복의 수확을 가져올 씨앗을 심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믿음의 행위로 사역에 금전의 “씨앗”을 뿌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금전의 번영, 육체의 치유 또는 기타 형태의 은혜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축복의 형태로 그 씨앗을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주장은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헌금을 통해서 더 긴밀해지는 거래 관계라는 것이다. 로버츠는 세 단계 모델을 사용하여 씨앗 믿음 개념을 분명하게 했다. (1) 씨앗을 심는다: 가치 있는 것(보통 돈)을 사역에 씨앗으로 심는다. (2) 기적을 기대한다: 당신의 헌금이 하나님의 개입을 촉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 (3) 기적을 거둔다: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그 축복은 종종 물질적 또는 재정적 형태로 주어진다. 6. 텔레비전이 번영 복음 전파에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텔레비전을 활용하여 예배와 기독교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방식인 텔레벤절리즘(Televangelism)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방송 규제가 완화되고 케이블 TV가 확대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텔레비전 전도사 중 다수가 번영 복음 운동 및 그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로버츠는 많은 청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 매체를 사용한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한때 그의 비행기를 조종하고 또 자동차 운전사였던 케네스 코플랜드도 나중에 가장 악명 높지만 (가장 부유한) 번영 설교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로버츠와 코플랜드는 짐과 타미 베니커(Jim and Tammy Faye Bakker), 베니 힌 (Benny Hinn),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로버트 틸튼(Robert Tilton), 그리고 프레드 프라이서(Fred Price)를 포함하여 19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린 텔레비전 전도사들을 위한 길을 열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조엘 오스틴(Joel Osteen), 크레플로 달러(Creflo Dollar), 조이스 메이어(Joyce Meyer), T. D. 제이크스(T. D. Jakes), 그리고 폴라 화이트(Paula White) 등 가장 저명한 번영 복음 지도자들도 TV를 통해서 먼저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7. 번영 복음은 성경의 가르침, 특히 부와 고통에 관한 내용을 무시한다. 많은 기독교학자와 윤리학자는 물질적 번영에 초점을 맞춘 번영 복음이 겸손, 연민, 고통의 당연함을 강조한 예수의 가르침을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존 파이퍼 목사는 2005년 11월 1,000명이 넘는 대학생 모임에서 “나는 당신이 번영 복음, 즉 건강, 부, 돈을 가져다준다는 그런 복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했다. “아주 미워합니다.”2014년에 파이퍼는 번영 복음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여섯 가지 핵심 사항을 정리했다. ·고난의 성경적 필요성과 고난의 당연함에 관한 진지한 교리의 부재· 자기 부인이라는 명확하고 두드러진 교리의 부재· 성경에 대한 진지한 설명의 부재· 성경 속 긴장을 다루지 못함· 사치를 즐기는 교회 지도자들· 자기의 탁월함을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소외시키는 것8. 번영복음 신앙은 미국 신자들 사이에서 흔하다. Lifeway Research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 개신교 신자 중 절반 이상(52%)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 지도자가 교회 또는 자선 단체에 더 많이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더 크게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리고 네 명 중 한 사람(24%)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2017년 연구에서는 같은 질문에 38퍼센트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재정적으로 번영하기를 원하신다고(76% 대 69%),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45% 대 26%) 믿을 가능성이 2017년보다 더 높아졌다. 오늘날 교인 넷 중 셋(76%)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재정적으로 번영하기를 원하신다고 믿고 있으며, 그중 43퍼센트는 그 주장에 강력하게 동의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 응답자는 무려 45퍼센트였으며, 21퍼센트는 강력하게 동의했다.9. 번영 복음은 거짓 복음이다.2015년 The Gospel Coalition의 기사에서 기독교 윤리학자 데이비드 존스는 번영 복음 가르침의 다섯 가지 신학적 오류를 설명했다.· 아브라함 언약은 물질적 권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 예수님의 속죄는 물질적 빈곤이라는 “죄”까지 확장된다.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보상을 받기 위해 헌금한다. · 믿음은 번영으로 이끄는 스스로 만들어 내는 영적 능력이다. · 기도는 하나님께 번영을 달라고 강요하는 도구이다. 존스는 “성경에 비추어 보면 번영 복음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라고 말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빚어진 거짓 복음이다. 간단히 말해서, 번영 복음이 사실이라면 은혜는 쓸모없고 하나님은 무의미하며 만물의 척도는 사람으로 바뀐다. 아브라함의 언약, 속죄, 나눔, 믿음, 기도 등 무엇을 이야기하든, 번영 신학 전도사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돈으로 주고받는 거래 수준으로 전락시킨다.”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Prosperity Gospe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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