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이슈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기착지가 되어 주는 교회들
by Elliot Clark
2022-03-16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의 국경을 이루는 검은 티자 강 루마니아 국경 도시 시게투마르마치에이(Sighetu Marmatiei) 외곽, 흑 티서(Black Tisza) 강이 가로지르는 우크라이나 쪽에 캐러밴 한 대가 어둠속에 정차해 있다. 이 차량 전조등에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떠나온 가족이다. 이들의 탈출 여정은 느리고, 매우 조심스럽다. 자동차들이 15킬로미터나 길게 늘어서 있다. 일부는 추운 날씨 속에서 이미 하룻밤을 여기서 보냈다. 이들은 안전한 시게트[‘시게투마르마치에이’를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로 건너가기만 바랄 뿐이다. 이 국경을 건너기만 하면, 이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루마니아 북부 지역의 침례교회들과 오순절교회들이 난민들을 맞이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이런 일은 우크라이나의 서부와 남부 지역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의 검문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루마니아 교회에 난민을 위해 마련된 침구들 (사진 제공: Gabriel Michnea)유엔에 따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2주가 채 되지 않아 최소 200만의 우크라이나인을 비롯한 여러 나라 국적의 사람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를 떠났다. 그 중 절반 이상은 폴란드로 피했지만, 수십만 명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로도 흘러 들어가고 있다. 이런 추세는 더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오데사가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가운데 이웃나라 몰도바는 우크라이나 접경지대를 따라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몰려들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동유럽 전역의 교회들이 피난길에 오른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친 난민 행렬을 위한 중간 기착지로 탈바꿈한 이 교회들은 음식과 쉼터와 교통을 제공하고, 구원의 희망이 되어 주고 있다. 다음은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난민 사역을 담은 현장 풍경이다. 몰도바 키시너우우크라이나에 전쟁이 발발하자 몰도바의 수도 키시나우에 있는 이마고 데이(Imago Dei) 교회의 미하이 치사리(Mihai Chisari) 목사는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있는 친구 선교사를 대피시키려고 오데사로 떠났다. 그러나 국경지역 팔랑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 난리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곧 깨달았다. 수천 명이 대피하고 있었다. 몰도바 정부가 다 감당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치사리 목사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밴 하나를 렌트했다. 그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두 시간을 운전해서 팔랑카로 다시 돌아갔다. 이 국경지역에 처음으로 도착한 사람들은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이란 사람들과 오데사에 있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었다고 치사리 목사는 말한다. 치사리는 그들을 키시너우에 데리고 가서 교회 건물 안에서 쉼터를 제공해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 교회가 무슬림으로 절반이 채워질 것이라고는 내 인생에서 결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치사리 목사는 말한다. 초기부터 그의 교회가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섬긴 것은 아니었다. 처음 이마고 데이 교회는 나이지리아, 카메룬, 에티오피아, 네팔, 인도 유학생들에게 지낼 곳을 제공했다. 그들은 하룻밤이나 이틀 밤을 묵고 다음 장소로 계속해서 이동해 갔다.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주로 우크라이나 여성들과 아이들이다. 이마고 데이 교회는 이들에게 식사와 의복, 위생용품을 제공한다. 건물에 샤워 시설이 없기 때문에 교인들이 가정집을 오픈했다. (서른 시간을 차 안에서만 보냈다면 분명히 당장 샤워부터 하고 싶을 것이라고 치사리 목사는 귀띔한다.) 난민들 대부분이 교회에 머무는 시간이 짧고 언어 장벽이 있긴 하지만, 이마고 데이 교회는 그들의 정서적, 영적 필요를 채워 주려고 한다, 교인들 가운데 아이가 있는 여성들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 가운데 있는 난민 가족들을 방문할 때 자녀들을 데려간다. 아이들이 예배당에서 함께 노는 동안 어머니들은 모여서 기도한다.난민을 돌보는 이마고 데이 교회의 신자들 (사진제공: Mihai Chisari)이 교회 교인들은 또한 난민들이 다음 여정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지역의 다른 교회들과 협력하여 피난길에 오른 이방인들을 가까운 도시나 나라의 그리스도인들과 연결해 주고 있다. 힘을 합친 지역 교회들이 피난 경로를 짜고 물적 지원과 서류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탈출한 노예들에게 피신 경로와 안전 가옥을 제공했던 19세기 미국의 노예해방 운동 네트워크와 거의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음 장소로 떠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 머무는 쪽을 택하는 난민들도 있다. 지난 두 번의 주일을 지나는 동안에 이마고 데이 교회의 난민을 위한 섬김은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제는 예배를 위한 번역도 제공하고 있다. 여러 언어로 된 전도지도 만들었다. 이 전도지는 전쟁의 해악을 친구에게 신중하게 알리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치사리 목사는 말한다.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은 마음이 힘듭니다. 그들은 러시아는 악당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우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이런 악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는 바로 우리의 죄라는 사실입니다.”루마니아 시게투마르마치에이전쟁이 발발한 일요일 아침 가브리엘 미크네아(Gabriel Michnea) 목사는 밤에 2시간밖에 못 잔 채로 그의 작은 루마니아 교회 성도들 앞에 섰다. 그는 국경을 넘어 홍수같이 밀려들어오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도울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동기부여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밤새도록 했다. 가브리엘 목사는 성도들에게 헌신을 요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사람들을 위해,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입니다.” 그 날 오후에 시게트의 이 베다니 침례교회는 행동에 나섰다. 남성 팀은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유아용 침대, 매트리스, 담요, 수건을 모았다. 이 교회는 지하실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배당도 난민 쉼터로 바꾸었다.베다니 침례교회 지하실 난민 쉼터에 머물고 있는 엄마와 아이 (사진제공: Gabriel Michnea)베다니 침례교회가 수용한 난민 120명 중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우크라이나 목사의 아내인 보스야 포티아크(Vosya Potiak)였다. 보스야는 임신 6개월이었다. 그녀가 살고 있던 도시 크리초보(Krychovo)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그녀는 우크라이나에 남아 사람들을 섬기기로 한 남편을 남겨 두고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여기 베다니 교회에서 보스야는 동료 난민들을 위한 번역과 봉사를 쉬지 않고 하고 있다. 동유럽 국가의 다른 많은 신자들이 하는 것처럼 시게트의 교회들은 난민들을 받아주고 먹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난민들에게 주유비를 제공하여, 인근 도시에서 주거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부다페스트나 프라하 같은 더 먼 도시로 이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고 있다. 가장 최근에 미크네아 목사는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함께 차량을 몰고 우크라이나로 찾아가기 시작했다. 루마니아 북부의 교회들은 협력하여 기름, 밀가루, 물 같은 기부품목을 트럭에 실어 국경을 넘어 운송하고 있다. 이들은 이 물품들을 받을 우크라이나 목회자 네트워크를 (비밀 장소에서) 확인한 다음, 우크라이나 자카르파탸 지역 도시들로 가서 물품들을 나눠주는 일을, 곧 인도주의적이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한다. 미크네아 목사는 그의 성도들이 이 위기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기뻐한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돌들입니다.” 그들은 기꺼이 돕고자 한다.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모인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미크네아 목사는 지난 2주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다. “지금은 우리가 그간에 설교해 온 것을 행동에 옮길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믿는 대로 살고 우리가 부름 받은 대로 선을 행하기에 완벽한 시간입니다” 세상의 빛무료 급식소이건 따뜻한 잠자리이건, 임시 진료소이건, 기도의 집이건, 아니면 인생여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곳이건, 교회는 지친 난민들을 위한 중요한 중간 기착지이다. 그것은 교회 건물들이 최고의 숙소나 가장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 있는 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새 창조의 아름다움은 그가 구원하신 사람들과 그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교회가 어둠 가운데 빛이 되는 사명을 완수함에 따라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목적을 행하고 계신다. 루마니아 이야기로 돌아가서 미하이 치사리 목사는 오늘의 어둠 가운데서도 이미 희망의 여명을 보고 있다. “저는 개방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원제: Churches as Waystations on the Refugee Road from Ukrain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관련 기사•우크라이나 난민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폴란드 교회•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남아서 섬길 것이다•우크라이나 선교사들에게도 밀려든 불안한 위협
우크라이나전쟁
러시아침공
난민사역
동유럽교회
루마니아교회
몰도바교회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폴란드 교회
by Jamie Dean
2022-03-15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일주일 만에 복음주의 교회 개척 목사인 벤 레이어는 폴란드의 시에들체 자택에서 전화를 받았다. 국경에서 가까운 폴란드 교회의 목사가 현재 자신이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돌보고 있는데 주일에 누군가 그를 대신해 설교하러 와줄 수 있겠냐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레이어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의 한 장로가 난민들로 가득 찬 건물에 교인들이 매트리스와 용품을 준비하고 있는 국경 인근의 교회에 두 차례의 예배 설교를 위해 방문하였다. 이 장로가 폴란드어로 설교할 때, 몇몇이 그의 설교를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그리고 현장에 있는 소수의 미국인을 위해 영어로 통역했다. 레이어 목사는 악화되는 위태로운 기간의 사역에 대해 “혼란하다. 모두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말했다.폴란드의 교회들은 한계에 대해 알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는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들인 이 나라 인구의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레이어 목사는 그 수치가 약 0.2퍼센트(일부 추정치보다 약간 낮음)라고 생각한다. 그는 종종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2퍼센트가 아니라 0.2퍼센트”라고 설명해야 한다. 이는 복음주의자들이 소수인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과 비교해서도 낮은 수치이다. (우크라이나의 복음주의 교인 수는 이 나라 인구의 4퍼센트가 되지 않는다.) 세계기도정보(Operation World)가 제공하는 중동 국가들의 수치와 비교하면 폴란드의 복음주의 교인 수가 얼마나 적은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복음주의 교인 수가 폴란드와 비슷하다.“우리 도시에는 8만 명이 살고 있고, 우리는 40명 정도입니다” 그의 교회 성도들에 관해 레이어 목사는 말한다. “이곳에는 여기로부터 40마일 이내에 다른 [복음주의] 교회는 없습니다. 좀 더 가야 한 20명 정도가 있는 또 다른 교회를 찾을 수 있습니다.” 21년간 폴란드에서 사역하고 있는 미국인인 레이어 목사는 이 사역을 위한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는 것이 “폴란드 동부 지역의 복음주의 교회의 현실”이라고 말한다.이런 현실은 평화로운 시기에 늘 목회를 위한 도전이 된다. 거기엔 언제나 더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시에 새로운 도전이 늘었다고 레이어 목사는 말한다. 폴란드의 교회들은 우크라이나를 탈출하는 난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제한된 자원을 사용하여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분주해진 사역지난 2주간의 혼란 가운데 200만 명이 넘는 우크라이나인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난민 위기 속에서 우크라이나를 탈출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인구의 약 5퍼센트를 차지한다. 그 난민들 중 100만 명 이상이 폴란드로 넘어왔다.또 다른 100만 명은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이들 중 다수는 시민들이 러시아로부터의 잠재적인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서부 도시 르비우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기독교 교회와 학교, 선교단체들은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다.르비우에 있는 우크라이나 침례신학교 야로슬라프 피즈 총장은 신학교가 수업을 진행하던 곳에서 하룻밤 사이에 피난민을 수용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5일 만에 확 늙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첫 주말까지 신학교는 700명 이상의 난민을 맞이하였다. “우리는 전쟁이 멈춰지는 큰 기적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현재의 위기에 대하여 한 영상에서 말하였다.전쟁이 시작된 지 2주째, 폭격이 더 끔찍해짐에 따라 끝은 보이지 않았다. 수요일, 우크라이나 관리들은 마리우폴의 한 산부인과 병원이 잔혹하게 폭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민간인에 대한 공격과 더 많은 파괴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난민들이 르비우 같은 도시에 있는 피난처를 떠나 이웃한 폴란드와의 수 마일에 걸친 국경을 넘게 되었다.우크라이나인 가족 7명이 국경에서 서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레이어 목사의 교회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보낸 스무 시간을 포함하여 서른여섯 시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안야라는 이름의 한 여성은 어린아이 넷과 그녀의 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교회의 집사인 그녀의 남편은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18세에서 60세 사이의 수백만 명의 다른 남자들과 함께 뒤에 남았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남아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 안야의 아버지는 61세였기 때문에 피난에 동행할 수 있었다. 지난 2주 동안 동유럽을 가득 메운 난민은 여성과 어린이, 노인이 거의 전부다. 위기가 시작된 이후 레이어는 60세 미만의 우크라이나 남성을 만나본 적이 없다며 “여성, 어린이, 나이든 남자만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많은 난민들이 폴란드를 거쳐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면서, 일부 교회들은 가족들이 단기간 머물다가 이동하는 것을 보곤 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기다리고 있다.불확실한 미래피오트르쿠프 트리부날스키(Piotrkow Trybunalski)의 복음주의 교회 목사인 다니엘 크리스턴은 난민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면서 교회가 딜레마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자 그의 교회 성도들은 추운 겨울 동안 이미 엄청난 난방비를 지불하지 못했다.“난방비를 지불할 방법이 없는데도 건물에 난방을 하고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는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1993년부터 복음주의 교회에서 섬겨온 이 폴란드인 목사는 지금까지 언제나 그들의 접근 방식은 ‘우선 사람들을 돕고 비용은 나중에 걱정하자’는 것이었다고 말한다.교회가 도와준 가족 중 하나는 12살 아들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싱글맘이다. 교회는 최소 한 달 동안 다섯 개의 게스트룸 중 한 곳에서 이 가족을 돌보기로 약속했다. 폴란드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난민들은 이미 이곳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교회의 성도들과 연락을 통해 들어온다. 어떤 이들은 교인 가정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대부분은 곧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지만 크리스턴 목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현재로서는, 그들은 우크라이나인들과 함께 섬기며 예배드리고 있다. 그는 “어제 우리는 폴란드인만큼 많은 우크라이나인과 예배드렸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회가 꽉 찼어요.”현재의 희망시에들체(Siedlce) 출신의 레이어 목사는 우크라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다른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 힘든 폴란드 동부의 작은 교회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전개되는 상황 가운데 악에 대한 우크라이나인의 반응에 감동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우리를 다른 나라로 보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라고 우크라이나 여성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또한 이번 위기가 더 많은 폴란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만들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다. 인근 군부대 소속 전투기들이 마을 상공을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있어 전쟁이 폴란드로 번지지나 않을지 염려하고 있다. 그는 주일에 교회가 꽉 찼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레이어 목사는 앞으로 오랫동안 모든 것이 정상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미 전쟁의 초기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저는 지금 우리의 사역이 영원히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원제: Churches in Poland Stretch to Serve Ukrainia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관련 기사•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기착지가 되어 주는 교회들•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남아서 섬길 것이다•우크라이나 선교사들에게도 밀려든 불안한 위협
우크라이나전쟁
동유럽복음주의교회
러시아침공
폴란드복음주의교회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by 김선일
2022-03-12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단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앞당겨진 온라인 생활의 본격화와 더불어 떠오른 버즈워드(buzzword)였다. 지난 2021년은 메타버스의 원년이라 할 만큼 메타버스는 게임과 경제적 투자 대상으로뿐 아니라 미래의 일상을 위한 필수 코드로 성큼 다가왔다. 물리적 세계 너머의 세상을 뜻하는 메타버스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 우리가 현재 발을 딛고 경험하는 물리적 세계를 대체하는 실제를 가리키는 총괄적 용어라 할 수 있다. 메타버스의 지경이 더욱 확대될수록 우리는 물리적 세계에서 느꼈던 거리와 감각을 가상세계에서 진짜인 것처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대면세계에서만 가능한 거의 모든 활동을 비대면에서도 현실과 유사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과 전망이 일시적 유행이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메타버스가 말하는 변화를 실현해 주는 기술의 발전은 아직 시기상조이며, 메타버스 경제의 주축이라 할 NFT(대체불가토큰)의 제도화도 난망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버스가 사이버공간과 증강현실의 확대와 연관된 새로운 트렌드라는 면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다. 트렌드 서적들에서 주목하는 현상은 실재감테크와 다중자아(부캐)의 출현이다.실재감테크최근에 떠오른 광고 모델 ‘로지’는 가상인간이다. 서울 출생 22세 여성으로 설정된 로지는 늙지도 않고 학폭 등의 논란도 일으킬 걱정 없이, 지난해에 광고 계약 건수 8건에, 협찬은 100건이 넘고, 수익은 15억 원에 이른다. 전에도 사이버 가수 아담이 있었지만, 로지는 훨씬 더 실재에 가까운 모델로 나타났다. 3D 그래픽으로 구현되어 한눈에 봐도 사이버 캐릭터였던 아담에 비해, 로지를 처음 동영상으로 봤을 때는 그냥 실제 사람인줄 알았고 나중에 가상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는 흠칫 놀랐다.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는 2022년의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시공간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완전한 실재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실재감테크를 꼽는데, 이는 현실과 가상,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혼합하는 메타버스의 중요한 특성이다(357). 이 책은 실재감테크를 메타버스에 국한하지 않고 다중감각 SNS, 라이브커머스 등에 연결시키지만 현재의 일반적인 용례는 이 모든 경험을 메타버스라는 범주에 귀속시키는 추세다. ‘트렌드 코리아 2022’는 실재감테크의 세 가지 요소를 다중감각, 동시성, 체험성이라고 말한다(359-364). 먼저 다중감각이란 예를 들어 옷가게에서 제품의 시각적 효과뿐 아니라, 음악이나 자연의 소리를 전달하는 청각과 식물 향기를 통한 후각 등의 여러 감각들을 상호작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성은 현실의 시간과 동일한 흐름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라이브커머스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인간 소통에서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효과를 보인다. 셋째로 체험성이란 현실의 움직임과 유사한 체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교육에서 비대면이라 할지라도 현장에서 학습을 받는 것과 같은 생생한 환경을 기술적으로 조성해 준다면 한결 효과적일 것이다. 이러한 실재감테크가 가능한 이유는 인간의 신체 오감이 경험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의 뇌가 외부의 자극을 전기신호를 통해서 처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냄새 맡고, 만지는 경험을 뇌의 신경전달물질 분비를 통해서 하게 해주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현재의 답답하고 고립된 비대면 세계를 혁신적으로 확장해 줄 것이다. 가령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자.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 넘게 날아가서 긴 줄을 기다리고 북적대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모나리자 그림을 봐야 하는데, 내 집에서 최첨단 가상현실 헤드셋을 착용하고 편안하고 쾌적하게 루브르 박물관을 거닐 수 있다면? 물론 긴 여행의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또 다른 가치들을 많이 있지만, 그림 관람이라는 목적만을 놓고 본다면 꽤 매력 있는 경험이지 않을까? 다중자아: 부캐의 전성시대‘라이프 트렌드 2022’에서는 메타버스에서 현실과 가상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으로 본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끌었던 TV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기 방송인 유재석은 지미유, 유산슬로 여러 캐릭터들을 선보이면서 대중에게 부캐라는 개념을 각인시켰다. 메타버스는 사람들이 현실의 유일한 자신과는 또 다른 자아들을 구현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할 수 있다(라이프 트렌드 2022, 176). 영화 ‘인셉션’을 보면 사람이 의도적으로 꿈속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원하는 세계와 공간을 구축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메타버스는 이처럼 자기가 설정하는 세계에서 새롭게 표현되는 자아를 만들 수 있다. 현재 대중이 접근 가능한 메타버스 플랫폼들에서도 자기의 생김새, 옷모양, 닉네임을 스스로 만들어 표현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싸이월드가 메타버스의 전조였다는 말이 나온다. 이처럼 다중자아의 표현이 훨씬 신장된 기술력을 통해서 현실에 가깝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메타버스에서 여러 부캐들을 만들며, 또 다른 자아의 실현을 추구할지도 모른다. 이는 자칫 희망 없는 현실에 대한 피상적 위로에 그칠 수 있다. 라이프 트렌드 2022에서 저자 김용섭은 그런 의미에서 현실세계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10-20대가 제한된 조건을 극복하고 주도권을 쥐고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제페토, 로블록스, 이프랜드, 게더타운과 같은 메타버스 서비스들은 단순히 놀이 공간이 아니라 경제활동의 공간이라는 것이다(179). 앞으로 메타버스는 게임과 경제뿐 아니라, 교육 및 종교 영역에서도 새로운 자아들이 참여하는 매일의 플랫폼이 될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실재감테크와 다중자아라는 측면에서 메타버스는 교회에 어떤 효능성을 줄 것인가? 메타버스와 교회교육, 예배를 연계시키는 시도는 계속 나오고 있고, 관심 또한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메타버스의 효능성은 현실적 기술 발전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더구나 코로나 팬데믹이 진정세를 보이게 되면 당분간 그야말로 ‘실재감’을 실제로 경험하려는 보상욕구가 높아지고, 더불어 메타버스 기술의 실질적 발전도 더디어지면 관심의 버블이 꺼질 우려가 크다. 메타버스의 세계는 부캐와 아바타들이 활동하는 공간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예배에 메타버스를 접목할 경우 나의 부캐나 아바타로 참여하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 4:24)가 될까? 따라서 필자는 메타버스를 준비하는 교회의 태도는 새로운 메타버스 서비스를 강박적으로 좇기보다는, 향후 메타버스의 세계를 디자인할 수 있는 세계관과 그곳에서 나를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와 자아의 개발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재의 다음 글에서 살펴 볼 세계관과 내러티브 놀이라는 트렌드는 메타버스의 핵심 쟁점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본래 현실 세계를 그 이상의 세계적 조망에서 해석하고 살아가는 존재다. 기독교 전통을 보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나라와 지상 나라를,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영적 통치와 세속 통치의 두 왕국론을 설파했다. 메타버스를 이러한 신학 전통과 연결시키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적어도 눈에 보이는 세상 그 너머를 바라보는 상상력에서 그리스도인은 뛰어난 내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성령은 그의 나라를 섬기는 소명을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신다. 필자는 메타버스를 통해서 다중자아를 재발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풍성한 활용과 연결되리라 본다. 지금까지는 나의 다른 은사들을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는 영역이 현실에서 무척 제한되었다면, 메타버스는 은사를 펼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리라 기대한다. 메타버스의 시대를 위해서 기독교 공동체가 준비할 것은 첨단 기술을 기웃거리는 것보다, 새로운 플랫폼에 적합한 세계관과 내러티브를 구상하며, 사람들이 각자의 건강한 자아와 은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리라. 자아와 은사의 재발견과 정립은 지금 당장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전 글: • 복음중심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다음 글:•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메타버스
메타버스세계관
메타버스와교회의미래
현실과가상
두왕국
복음중심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by 김선일
2022-03-05
그리스도인을 위한 재테크 전문 작가였던 고 래리 버켓(Larry Buckett)이 생전에 쓴 소설 토르 음모(The Thor Conspiracy)를 보면 21세기 미국에서 환경주의 독재 정부가 탄생하여 환경보호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이 나온 1995년 당시에 꽤 흥미롭다고 생각했지만, 현실감을 느끼진 못했다. 더군다나 그때 한국의 상황에서 환경론자들이 독재 권력을 쥔다는 상상은 너무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이제 그와 같은 환경 권력까지는 아니지만 친환경적, 생태적 삶의 규범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태세의 전환이다. ‘라이프 트렌드 2022’의 저자 김용섭은 2022년의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의 현상으로 친환경적 라이프 스타일의 부상을 꼽는다. 다른 트렌드 서적들이 주로 개인주의나 메타버스에 주목하는 반면 김용섭은 독특하게 전망하는 트렌드 서적 중에서 이러한 생태적 삶의 양식을 가장 중요하게 꼽는다. 특히 현재의 MZ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해서 환경 문제에 관한 민감성이 훨씬 높게 나타난다. 기성세대에게는 좋은 삶을 위한 선택이었던 친환경적 라이프 스타일이 젊은 세대들에게는 공동의 생존 과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친환경적 민감성은 인류 공동의 과제로 그 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이 또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더욱 경각심을 갖게 된 주제다. 동물행동학자 최재천은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코로나 팬데믹은 근본적으로 기후 위기와 인간의 생태계 파괴로 말미암았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재앙적 바이러스의 발발은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약물 백신이 아니라 ‘생태 백신’이라고 한다. 즉 사람이 동식물의 서식지에 함부로 침입하지 않고, 그러한 침입과 고갈을 유발하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사실 이제는 ‘환경’이라는 용어보다 ‘생태적’(ecological)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적확하다. 환경이 여전히 인간이 중심이 되어 다른 동식물 세계를 안전하게 관리한다는 뉘앙스를 띤다면, 생태라는 말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된 통일체로서의 의미로서 인간도 거대한 생명 체계의 일부라는 겸손한 의식을 더욱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무튼 생태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은 갈수록 고조되어 오다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보편적인 삶의 양식을 변화하는 동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회 전반의 친환경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김용섭은 코로나 이후의 뉴노멀, 아니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베터 노멀’(better normal)이라고 부른다. 환경친화적 트렌드는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 고립과 마스크 착용이 기본 값이 되어버린 코로나 시대의 삶은 맑은 공기와 자연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가드닝과 비거니즘은 베터 노멀의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한다. 최근에 새로 문을 열거나 리모델링을 하는 백화점들은 상점으로 꽉 채우던 공간에 넓은 실내 가든을 조성한다. 가드닝과 반려 식물은 사람들의 고급 취미가 되었고, 채소와 과일만 먹는 사람을 뜻하는 비건(vegan)은 식습관뿐 아니라 옷과 주거에도 영향을 주며 ‘올라운드 비거니즘’으로 발달하고 있다. 이는 “동물 착취 반대와 채식에서부터 기후 위기와 탄소 배출, 일회용 플라스틱과 미세 플라스틱 등을 비롯한 환경 문제, 생태계 파괴, 인권과 차별 문제 등”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트렌드다(‘라이프 트렌드 2022’, 102). 일상에서 친환경적인 삶을 실천하는 방식은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 일회용 용기를 덜 쓰거나, 조깅이나 산책을 하면서 길가의 쓰레기를 수고하는 플로깅(plogging)과 같은 활동에서부터, 탄소배출과 자원 낭비를 가속화시키는 새로운 제품에 대한 무한 선호에 제동을 걸고 기존의 옷이나 가방 등을 수선해서 쓰는 서스테이너블 패션(sustainable fashion)이 등장한다. 이는 빈티지 패션이라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과제가 되었다.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데 물이 얼마나 소비되는지도 꼼꼼히 따져 본다. 청바지 한 벌을 생산하는 데 물이 6,814리터, 티셔츠 한 벌에는 2,700리터의 물이 소비된다. 이러한 생산 과정에서 사용되는 물은 산업 폐수가 된다. 물뿐 아니라 면화나 케시미어의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도 엄청나다. 새로운 세대에게 기후와 환경의 위기는 직면해야 할 생존의 문제다. 기성세대가 이러한 환경오염에 대한 민감한 인식과 고민 없이 살아가며 결정하는 모습은 생태적 감수성을 지닌 젊은이들에게는 지구에 민폐를 끼치는 오염 엘리트로 비쳐진다. 기업 경영에서도 E-Environmental(환경), S-Social(사회적 기여), G-Governance(지배구조)를 뜻하는 ESG가 비즈니스의 지속가능성과 건강성을 가늠하는 주요한 핵심 척도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고, 위장된 환경 친화적 허세를 부리는 기업은 오히려 대중을 기만하는 행위로 더 큰 불신을 받게 될 것이다. 한 화장품 회사가 “Paper Bottle”이라는 종이 화장품 패키지를 홍보했는데, 사실 종이 패키지에는 플라스틱이 소량 들어가기 마련이다. 문제는 자기네 제품을 친환경적인 것으로 어설프게 홍보함으로 인해 기만적 위장술로 더 질타를 받은 것이다(‘라이프 트렌드 2022’, 139). 친환경적 삶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고, 인간과 생태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숙고를 요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 삶 전반에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 잡는 생태적 감수성과 교회는 얼마나 가까운가? 위와 같은 라이프 스타일과 사회문화적 변화에 교회는 익숙한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엡 1:23)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지구를 살리자는 친환경적 실천을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해하는 구원이 죽어서 우주 먼 곳 어딘가에 있는 천국으로 이동하고, 이 땅은 멸망하여 영원 폐기될 운명이라고 믿지 않는 한, 이 땅을 돌보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은 영원토록 유효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약속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비전이다(계 21:1-2).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책임은 절박하고 엄중하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 그 바라는 것도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 21).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태계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보존과 돌봄의 책임을 지닌 청지기이다. 복음중심적 신앙은 신자들로 하여금 영혼의 구원과 교회 활동에 집중하는 데 머물지 않고,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의 책임과 역할을 회복하게 한다. 일찍이 복음주의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는 ‘환경오염과 인간의 죽음’(The Pollution and the Death of Man)이라는 책을 통해서 구원받은 인간의 생태계 위기에 대한 책임을 일깨운 바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반향은 복음주의권에서 널리, 오래 퍼지지 못했다. 만일 복음주의 그리스도인과 목회자들이 환경 문제에 대한 당사자 의식을 결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개인주의적, 기복주의적, 내세주의적 구원과 복음이라는 잘못된 울타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영적으로 충만한 교회생활을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병들어 가고 있다면, 그와 같이 병든 지구에서 건강한 교회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이는 선교학자 하워드 스나이더가 그의 의미심장한 제목의 책 ‘구원은 치유된 창조세계다’(Salvation Means Creation Healed: The Ecology of Sin and Grace)의 서문에서 제기한 질문이다(이 책의 우리말 역간 제목은 ‘피조물의 치유인 구원: 땅과 하늘의 이혼을 극복하는 죄와 은혜의 생태학’).온전한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생태적 감수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회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존재로 새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게 한다. 생태적 감수성은 약자의 고통에 대한 책임 있는 연민으로 이어진다. 많은 교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구제에 참여한다. 그러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해 주는 구제도 중요하지만, 고통과 빈곤을 증가시키는 오늘날의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에 대한 근원적 책임의식이 수반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른다고 볼 수 없다. 생태적 감수성과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은 복음적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이다. 이전 글: •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다음 글:•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생태적감수성
새하늘과새땅
생태주의와교회
창조세계에대한책임
생태적삶
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남아서 섬길 것이다
by Vasyl Ostryi
2022-02-27
지난 며칠 사이에 에스더서의 사건이 우크라이나의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한 민족을 말살하라는 왕의 칙령이 내려졌고, 하만의 손에 그 도륙을 실행할 수 있는 면허장이 주어진 그 위기가 우리 앞에 도달했다. 교수대는 세워졌고, 우리는 지금 그 아래 서 있다. 전쟁 발발을 기정사실이라고 말하는 세계 언론의 소리를 지난 몇 달 동안 매일 들어야 하는 사회가 어떤 분위기일지, 이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제대로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나라에서 쏟게 될 피가 얼마나 많을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지난 몇 주 사이에 거의 모든 선교사가 우크라이나를 떠났다고들 한다. 서방 국가들은 자국 대사관 직원과 국민에게 이 나라를 뜨라고 했다. 수도 크이우의 거리에 인적이 현저히 줄고 있다. 관료들, 사업가들,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임박한 전쟁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서 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할까? 어디로? 아내와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르핀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 크이우에서 멀지 않은 이 도시에서 우리는 이르핀 교회 성도들과 함께 이곳 주민들을 돌볼 것이다. 이르핀 교회는 2016년부터 내가 목회자로 동역하고 있는 교회다. 들이닥칠 재난에 대비하여 우리는 식량과 의약품과 연료를 비축했다. 이런 걸로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또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준비한 것이다. 우리 가족은 모두 여섯이다. 우리는 딸 넷을 키우고 있다. 편도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대학까지 매일 대중교통으로 통학하는 16살 딸이 가장 걱정되었다. 언론은 러시아가 침공하면 이동통신이 끊길 것이고, 대중교통도 마비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고맙게도 대학생 딸아이의 수업은 이제 온라인으로 전환됐다. 크이우에서 벨라루스 국경까지는 150킬로미터밖에 안 된다. 그래서 러시아가 벨라루스를 통해 공격할 가능성도 높다[이 글은 러시아의 본격적인 침공이 개시되기 전인 2월 24일에 쓰인 글입니다_역자]. 이 지역 언론은 피난가방을 꾸려 두라고 권고하고 있다. 나도 아이들에게 각자 3일치 정도의 배낭을 챙기라고 일러두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배낭을 챙기는 건 곧 즐거운 휴가나 여행을 의미했다. 그래선지 6살, 8살 두 딸이 계속 묻는다. “아빠, 어디로 갈 거야?” 처음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에도 안 갈 거야.”교회가 할 일전쟁의 위협이 고조되고 있은 곳에서, 두려움이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위기의 시간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교회는 평화의 시간에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2014년에도 이런 위기를 겪었다. 그때 많은 교회들이 부패하고 권위적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나섰다. 독립광장에 기도 천막이 세워졌고, 그리스도인들이 따뜻한 식사와 뜨거운 차를 나눠주었으며, 교회들은 문을 활짝 열어 군경에 쫓기는 시위대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그렇지만, 공공연하게 야누코비치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시위대를 비난하는 교회들도 있었다. 또 방 안에 들어와 있는 코끼리를 못 본 체하는 교회들도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듯이 침묵하며 지내는 교회들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교회들과 부패한 권력자들을 지지했던 교회들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서 신망을 잃었다. 반대로, 시련의 시대에 국민과 함께한 교회들은 사회로부터 가장 높은 신뢰를 얻었다. 이 나라를 위한 우리의 싸움확신하건대 교회는 영적 투쟁의 장이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선포했고, 매일 밤 함께 모여 하나님께 간구했다. 3일 연속으로 도시에 불이 꺼졌을 때 우리는 어둠 속에서 모여야 했지만,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더욱 엄숙해졌다. 금식기도 주간을 함께하면서 우리 내면에 버티어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함께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우리는 확신과 평화를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 엄중한 시간에, 우리 교회는 또한 섬김의 장이기도 하다. 평상시 주일에 1,000여명이 모이는 우리 교회는 최근에 응급처치 교육을 받았다. 지혈대 사용법과 지혈법, 붕대 감는 법, 기도[氣道] 확보법을 배웠다. 이건 걸 배운다고 우리 교인들이 의사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를 통해 우리 교인들은 위급한 상황에 처한 이웃을 돌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응급처지 교육을 받을 거라고 내가 처음 발표한 날, 한 형제가 내게 말했다. “제가 왜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그도 떠날 계획이었다. 군인도 아니고,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니, 떠날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는 이 나라에 남아 부상당한 사람들을 돕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자 한다. 위급 상황이 되면 교회 시설은 피난처로 전환될 수 있다. 우리 교회에는 괜찮은 지하실이 있다. 난방 설비를 들여 놓을 준비도 되어 있다. 야전병원 부지로도 기꺼이 제공할 것이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응팀을 꾸리고 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우리는 연료, 식량, 부상자 치료 물품 같은 전략 물자를 내놓을 준비도 되어 있다. 의사, 정비사, 배관기술자 교인 정보도 모아 두었다. 단수 상황에 대비하여 우물을 갖고 있는 교인도 알아 두었다. 남아서, 기도할 것이다우리 가족도, 우리 교회도 남기로 결심했다. 이 위기가 끝나면,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도움이 절실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주었는지 기억할 것이다. 교회가 국가처럼 싸우지는 못할 것이지만, 이 싸움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노약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줄 것이다. 아픈 사람들을 돌볼 것이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그리스도의 소망과 그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할 것이다. 이 위기 앞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에스더처럼 기도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주께서 오래 전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하셨던 것처럼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내실 것이라 소망한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것이다. 남아서, 우크라이나의 교회가 주께 의탁하게 해 달라고, 이웃을 섬기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원제: To Stay and Serve: Why We Didn’t Flee Ukrai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관련 기사•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기착지가 되어 주는 교회들•우크라이나 난민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폴란드 교회•우크라이나 선교사들에게도 밀려든 불안한 위협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교회
전쟁과평화
전쟁과교회
기도와섬김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by 김선일
2022-02-26
근래에 일상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부쩍 높아졌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자기만의 시간이 대폭 늘어나면서 일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과제가 강요되었다. 우리의 삶을 성장시키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나 경험이 아니라 하루하루 반복되는 습관과 실천이라는 깨달음도 덤으로 주어졌다. 슈퍼개인의 시대는 이제 삶의 질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한다. 자기 발전을 위한 시간과 습관 관리는 진정한 슈퍼개인이 되는 과정이다. 김난도와 공저자들은 이를 가리켜 ‘바른생활 루틴이’라고 부른다(트렌드 코리아 2022, 327).루틴 열풍루틴(routine)은 습관과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 둘 다 규칙적이라는 측면에서 비슷하지만, 습관이 무의식적 반복을 포함한다면, 루틴은 구체적인 목적과 방향을 갖고 삶을 통제하는 의식적인 노력이다(트렌드 코리아 2022, 333). 바른생활을 위한 루틴으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셀프바인딩, 즉 자기 묶기이다. 셀프바인딩이란 다이어트나 공부 등의 목표를 세워 놓고, 중도에 이탈하지 않도록 벌금이나 보상 체계를 세우거나 타이머를 통한 시간 관리로 스스로를 구속하고 각성시키는 방식이다.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카카오 프로젝트 100’은 스스로 계획(책 읽기, 일기 쓰기, 운동하기 등 무한히 다양하다)을 세워 놓고 일정 금액을 예치해 놓은 다음 일정대로 실천하면 예치금을 돌려받지만, 계획된 과제를 제시간에 못 마친 경우에는 금액을 차감하는 형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매일의 과제를 수행하면 선생님이 도장을 찍어 주듯이, 성인들도 자신에게 필요한 독서나 취미, 자기계발의 상황을 감독하고 인증해 주는 프로그램과 앱을 통해서 도장을 받는 스탬핑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서 공부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열’정을 ‘품’은 ‘타’이머라는 의미의 ‘열품타’ 앱이나 ‘스터디윗미’(Study with Me) 앱은 가상 독서실 역할을 한다. 이러한 셀프바인딩과 스탬핑 방식은 회사에서 직원들의 업무를 측정하는 데도 사용된다. 재택 근무 시대에 직원들의 인터넷 방문과 근무 여부, 집중도를 체크하는 보스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회사도 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발과 논란도 있지만, 직원들은 개인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다면 이러한 실질 업무 감독 프로그램에 대해서 의외로 수용성을 보인다고 한다.온라인 리추얼 바른생활 루틴이 습관화되고 정례화되면 리추얼(ritual) 곧 의례로 발전한다. 원래 의례는 한 집단이나 공동체가 구성원들에게 정체성과 소속감을 부여하기 위해서 통과하게 하는 특별한 절차를 말한다. 예를 들어, 국가주의 시대에 우리는 국기의 게양식과 하강식을 통해서 전 국민이 날마다 의례를 경험했다. 학교에서도 모든 중요한 행사에서는 국민의례를 먼저 가졌다. 제사는 한 집안의 가장 대표적인 의례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의례의 효력이 약해지고 있는데, 인간은 의례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는 동기부여를 얻는다. 이러한 의례의 결핍 지점에 개인의 자기 계발을 위한 온라인 리츄얼이 파고들고 있다. 예를 들어, ‘밑미’(MeetMe)라는 리츄얼 메이커는 글쓰기, 생각정리, 차마시기, 피아노 연주기록 같이 60개가 넘는 다양한 유료 리추얼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의 신청을 받는다. 밑미의 홈페이지를 보면 스스로를 ‘자아성장 큐레이션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타인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고유하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리추얼이라는 용어가 온라인에서 개인의 차원으로 사용되는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회고를 위한 기록이와 같은 루틴의 개발과 통제는 궁극적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자신을 보듬으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다. 큰 성과나 이벤트가 없어도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며 성찰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은 루틴의 중요한 결과물이 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해서 시선을 모으려는 브이로그가 아니라, 진정성 있게 자신을 돌아보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공간인 블로그가 다시금 중요해지고 있다. 블로그는 개인의 회고와 정리를 위한 공간이면서 상호 방문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이기도 하다. 자신의 경험, 생각, 감정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가장 유력한 공간이다. 이러한 기록은 블로그, 또는 다이어리를 통해서 서사와 비하인드 스토리의 형식으로 남겨지고 전달된다(2022 트렌드 노트, 166),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은 ‘그냥 하지 말라’에서 앞으로는 우리가 남긴 모든 종류의 기록들이 그 사람을 보여주고 알려주는 메시지이자 브랜드가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상의 복음위와 같은 일상의 돌봄과 개발은 기독교 공동체의 전통에서도 발견된다. 종교개혁 운동은 로마가톨릭의 성직주의적 수도원적 영성 추구와는 평범한 일상에서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자 한다. 청교도들은 주일 이후에 소그룹으로 모여서 주일의 말씀을 요약하고 각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집담회’(conference)를 실천하며 영적 성장을 도모하였다. 리처드 백스터는 몇 년간 설교를 듣고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집담회를 통해서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말씀에 따르는 삶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Joanne Jung, Godly Conversation : Rediscovering the Puritan Practice of Conference).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도 속회, 신도회, 연합신도회 등의 조직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상호 격려하고 돌보아 주는 일상의 영적 관리 체계를 갖추었다. 교회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체화시키는 성스러운 루틴을 격려하는 곳이기도 하다. 큐티(QT)와 신앙의 필요에 따른 소그룹은 영적 루틴 관리의 장소이자 만남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미 교회는 바른생활 루틴이를 양산하는 경험과 기회를 더 많이 제공했었고,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자신의 일상을 의미 있게 관리하고 성찰하는 일은 오롯이 혼자만의 역량으로 가능하지 않다. 루틴 관리와 회고적 기록이 자기의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기 위함이라면, 이는 더욱 상호 책임감 있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때 가장 건강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렇게 일상에 대한 상호책임의 공동체를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종교적인 목적의 공동체뿐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영역인 취미, 배움, 봉사를 위해서도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와 소그룹들이 보완된다면 선교적 접촉의 영역도 더욱 넓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개신교회의 전통은 아니지만, 예수회의 창시자 성 이그나티우스가 제안한 ‘성찰의 기도’(prayer of examen)는 일상의 영적 회고와 성찰을 위해서 우리도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원이다. 성찰의 기도는 하루를 끝내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오늘의 모든 경험과 사건들을 회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하루의 회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기억하며 감사하기, 2)하루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기, 그리고 3)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의 기뻐하시는 요구대로 살지 못한 것을 고백하기이다. 이 기도의 취지는 우리의 단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점검 없이 보내지 말자는 것이다. 어떠한 습관과 루틴이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매일을 돌아보고 성령의 위로와 능력을 경험하는 일상이야말로 가장 참되고 능력 있는 자아성장의 플랫폼일 것이다. 이전 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다음 글:• 복음중심적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트렌드
리추얼
의례
루틴
습관
일상
사라진 중간고리,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by Jeremy Linneman
2022-02-24
2020년 대통령 선거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뉴스를 확인하고(당선자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었다) 자전거 사이클링 팀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라이딩을 했다. 한 바퀴 돌고나서 팀원 한 명과 도넛 가게 앞에서 앉아 있었다. 물론 2미터 거리를 유지한 상태였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보다 더 다를 수 없는 관계였다. 우리는 나이대도 달랐고, 종교에 대한 관점도 달랐고, 다른 후보자에게 투표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기까지 했었다!)우리는 뜨거운 커피와 멋진 도넛을 들고 앉아서 팀 켈러의 교회 개척에 대한 인용문의 여파에 대해 말했다. “음, 나는 이제 우리만 빼고 여기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데 솔직히 말해서 그렇다면 당신에 대해서도 무엇이라 더 이상은 확신을 할 수가 없어.” 우리는 선거 이야기를 하며 웃었고, 주 집계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을 내놓았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분열된 정도에서 어떻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국가적 위기를 그날 아침에 다 해결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는 해결했을 수도 있다, 최소한 우리는 올바른 결정의 한 걸음을 내딛었다. 또 다른 팬데믹 코로나 이전에 우리는 이미 미국에서 외로움의 전염병에 직면해 있었다. 내가 2018년에 말했듯이, 사회적 고립은 미국인의 삶을 빚어내는 함수로 기능하게 되었고, 외로움은 우리의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 지역사회 생활에 깊고 비극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가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 집에 갇혀서 격리를 했어야 했던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작년에 팬데믹을 치료하기 위해 했던 것들은 그저 또 다른 질병을 심화시켰을 뿐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의 해결책인 사회적 고립과 거리두기는 미국 공중보건국장이 이름붙인 “외로움의 전염병”을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코로나가 일으킨 주된 비극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미국에서만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75만 명을 넘었다. 팬데믹은 유색인종과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장기 의료 요인들은 아직 다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는 앞으로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한줌의 희망으로 말해 보자면 포스트 코로나가 아니고 코로나-후기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거대하고 어느 정도 측정 가능한 비극 한가운데 우리의 관계와 우정,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계산할 수도 없다. 팬데믹이 초래한 개인적, 관계적, 영적 피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이것이다: 미국인들의 이미 약해진, 특히 친구관계에서, 중간고리(middle-ring) 관계들은 2020년 3월 이후로 크게 감소하였으며, 그것들은 대부분 영상을 보는 시간이나 끼리끼리 모이는 친구관계(faction friendships)로 대체되어 교회에서나 사회 전반에서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경향을 역행하기 위해서 교회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본 뜬 제자도의 새로운 리듬을 창조하여 우정을 회복하고 공동체의 쇄신을 촉진해야 한다. 팬데믹이 바꾸어 놓은 일상먼저, 코로나가 우리의 시간 사용을 변화시킨 주요 방식을 살펴보자. 뉴욕타임스의 연구에 따르면 2020년 5월부터 12월까지 8개월 동안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극적인 시간 사용의 변화가 (놀랄 것도 없이) 나타났다(팬데믹이 심각했던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데이터가 수집되지 않았다). 미국인이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보내는 평균 시간은 1시간 줄었다. 이는 8개월 동안 사람들이 주변 관계에 보낸 시간이 2019년에 비해 2020년에 244시간이 줄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간은 대신 어디에 사용이 되었을까? 거기에는 가족 구성원들(특히 어린 자녀와 부모 사이)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시간 사용의 가장 큰 변화는 영상매체로의 대체에 있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문자 메시지, 전화 통화, 화상 회의, TV 스트리밍, 컴퓨터 사용 및 비디오 게임이 증가하였다. 직장과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미국인의 평균 일일 영상 매체 사용 시간은 약 60분 증가하였다. 이 두 경향을 종합하면 (2020년 3월과 4월 사이에는 최소한 거의 모든 미국인이 격리되었다고 가정하고) 다음을 알 수 있다. 2020년에 평균 미국인은 친구, 교회 성도 및 이웃들과 대면으로 보낼 수 있었던 300시간을 소셜 미디어나 TV, 그리고 인터넷 사용으로 대신 보냈다는 것이다. 2021년이 이러했다면 2022년은 더욱 그럴 것이라고 확실히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언급하자면, 2017년에도 이미 일어났던 일로서 미국 공중보건국장이 우리의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외로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그러나 대인관계만 영상매체 시간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나마 나은 것일 수도 있다.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 미국인들이 유지하는 관계의 유형도 급진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중간고리’ 관계의 위험한 쇠퇴사회학자 마크 던켈만(Marc Dunkelman)은 2014년 그의 저서 ‘사라지는 이웃’(The Vanishing Neighbor)에서 미국 공동체의 쇠퇴를 중간고리 관계의 상실로 우선적으로 진단했다. 내부고리(inner-ring) 관계는 가장 친밀한 관계 즉 배우자와 자녀, 직계가족, 가장 헌신적인 몇몇 친구를 말한다. 외부고리(outer-ring) 관계는 잘 지낼 수는 있지만 깊은 대화가 거의 또는 전혀 필요하지 않는 이웃과 동료가 포함된다. (즉, 내 외부고리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나에게 실질적인 영향이 없다.) 던켈만의 설명에 의하면 미국이 21세기에 잃어버린 것은 중간고리 관계 즉 우리가 주기적으로 보는 친구들, 교회 소그룹, 직장 소그룹 모임, 또는 매일 만나게 되는 사람들 등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동료 교인, 이웃, 직장 동료 간의 관계의 깊이를 잃어버렸고 사이클링 팀이나 농업 협동조합, 볼링 경기 같은 사회적 활동이 혼자서 하는 게임이나 인터넷 활동으로 대체되었다. 올해 초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Michelle Goldberg)는 2020년도에 사람들이 정치적 지도자를 전례 없이 추종했던 충성심에 대해 회고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록 밴드 그룹을 따라다니듯이 지지하는 후보자들을 따라다녔다. 그렇게 정치 지도자들을 헌신적으로 따라다녔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이었나? 무엇보다 선재하는 외로움이 정치 지도자를 가장 열렬히 추종하는 자가 되게 했다. 가족이 없거나 가족과 멀리 떨어진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 그룹 안에서 자신들을 환영하는 공동체를 찾으려 한다. 이 정치적 그룹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자기 그룹으로 끌어들이려는 자금 부족의 교회 개척자들과 둘도 없는 경쟁자가 된다.‘끼리끼리’ 관계의 부상 데이비드 프렌치(David French)가 보여주었듯이 미국인들은 실제 세계 즉 중간고리 친구관계를 잃어버렸고 그 공백은 종종 온라인에서 애호성을 기반으로 한 친구관계로 채워졌다. 프렌치가 말한 이 “끼리끼리 친구관계”는 “당신은 우리 편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적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체가 파괴적이거나 거짓 일수 있는” 목적의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리고 만약 우리나라가 끼리끼리 친구관계로 가득차고 중간고리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큰일이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나 소수의 좋은 친구라도 없다면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 성향에 거의 모든 기반을 둔 우정이라 불리는 그물에 빠져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동일한 사회적, 정치적 견해에 기초하지 않은 가족, 친구, 교회의 건강한 네트워크가 없는 이러한 끼리끼리 우정은 개인과 교회와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 프렌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수백 번이고 더 말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하여 팩트 체크, 변론, 논쟁을 할 수 없는 주된 이유가 된다. 왜냐면 당신은 음모론 당사자가 있는 그들의 공동체와 이 모든 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의 우리의 경험에 의해 외로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구분을 할 수 있다. 하나는 수동적 외로움(친구나 공동체가 없음)이고, 다른 하나는 분열적인 외로움(당신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견해에 완전 동의하지 않는 친구나 공동체는 거부함)이다. 다르게 말해서 소속감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매우 다른 두 사람 사이일지라도 서로 공유하고 서로에게 관대할 수 있는 도넛 가게 유형의 대화를 다시 세울 수 없다면 우리의 함께하는 사회생활이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은 거의 없는 셈이다. 소셜 미디어의 역할소셜 미디어는 더욱 과도기적이고 변환기적으로 이동하는 문화에서 소통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당신의 친구들이 어디에 살고 있든 소통이 유지된다고 소셜 미디어는 말한다. 그것은 정말 너무 좋은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프로젝트는 지난 10년 반 동안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왔으며, 이제 이러한 사이트들은 선별된 광고와 사회적 분류 즉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연결하게 하는 플랫폼이 되었다. 올해 초에 팀 켈러는 사회학자 크리스 베일(Chris Bail)의 ‘소셜 미디어 프리즘 깨뜨리기’(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을 서평했다. 이 책에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가 사회적, 정치적 양극화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질문한다. 이에 대해 켈러는 이렇게 요약한다. 일반적인 대답은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 우리를 우리 자신 쪽의 뉴스와 의견을 듣게 하는 “에코 방”이나 “버블”에 가두고, 그것은 분열과 극단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베일은 다음과 같은 연구를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반대되는 견해에 매일 노출될 때 (단지 그 견해들의 불쾌하고 신랄한 버전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견해들에 대해 더 강하고 극단적으로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규칙적으로 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견을 조정하지 않았고 더욱 균형을 잡거나 겸손해지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소셜 미디어는 자신을 잘 다듬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 견해를 자신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소셜 미디어는 극단적 견해를 부추기고 온건한 의견을 무시하는 이상적인 플랫폼이 되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견해를 제시하고, 대안적인 견해를 받고, 시민 담론에 참여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다. 대신 특정 그룹(다른 그룹에서는 안 되는)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개인 브랜드를 구축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켈러의 결론은 아무튼 소셜 미디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 긍정적으로 이로운 점도 있기 때문에 소셜 미디어를 완전히 떠나기보다는 그것을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개혁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운이 좋게도 가장 가까운 관계들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중간고리 관계, 특히 친구관계는 전례 없는 속도로 해체되거나 사라졌다. 그 공백은 주로 소셜 미디어가 현장 대면 대화를 대신하는 의사소통의 장으로 사용되면서 영상매체 시간과 끼리끼리 우정은 더욱 증가되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름답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우리의 친구관계, 즉 신자 들 간에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 같은 중간고리 관계는 우리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적 선을 위한 강력한 힘이다. 교회 친구관계의 사회적 힘 2012년,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과 ‘아메리칸 그레이스’(American Grace)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교 연구원인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은 중요한 발견을 했다. 그는 먼저 종교단체 소속 여부와 이타적 행동(자선단체 기부, 자원 봉사, 자신이 속한 종교단체 외부의 사람들을 위한 봉사, 심지어 상점에서 잘못 받아온 거스름돈 반환 같은)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했고, 이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종교인들은 그들의 지역사회에 더 친절하고 사심 없는 이웃이 되는가? 그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교단의 전통, 신념의 강도 등의 요인들도 연구했다. 알고 보니 사실 좋은 이웃이 되게 하는 데 지속적으로 관련이 있는 오직 한 가지 요인은 친구관계와 교회 내에서 가지는 개인적 관계들이었다. 다시 말해, 신앙 공동체에서 가장 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신앙 공동체 밖에서도 가장 친절하고 이타적인 사람들이다. 퍼트넘은 이렇게 요약한다. 더 많은 친구를 갖는 것은 이타주의와 관련이 있지만 “교회 친구”는 그 사실을 뛰어넘어 더욱 중요하다. 교회친구는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데이터에 따르면 교회 친구의 역할은 종교적으로 된다는 의미와 친구를 가진다는 의미 이상의 힘이 있다. 가만 보면 우리와 세상에게 위험한 유형의 소속감이 있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정치적으로 연계된 끼리끼리 관계이다. 그들은 “우리 편이 아니면 우리 적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회 집단은 종종 그들이 반대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가지며 그들의 관계의 열매는 종종 갈등, 분열, 외부인에 대한 무자비한 견해가 포함된다. 반면에 건강한 기독교 공동체는 친절과 온유, 선함, 자제력이 증폭되어 있다. 그래서 외부인에 대해서도 두려움이나 의심, 배제가 아니라 사랑과 존엄성, 환대로 대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신자들과 교회들과 사역들은 외로움의 전염병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우정을 다시 세우고 교제를 회복하며 이런 문화적인 요인이 지배하는 도시에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삶(사랑)을 재정렬하기 지난 2년간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고 소비했던 것으로부터 배웠던 습관을 제자도 패턴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넓은 의미에서 제자도라는 것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사로잡히는 대로 되어간다. 우리의 깊은 감정들, 생각들, 동기들은 지시하고 인도해 가는 패턴대로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마음과 성격, 생활 방식이나 이념에 순응해 가게 되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영성훈련’(The Spirit of the Discipline)에서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길은 (우리가 그와 연합하고 거듭한 후에) 예수님의 지상 생활의 전반적인 패턴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의 삶의 방식을 실천함으로써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가 아버지 하나님과 죄가 없으신 신인(God-man)의 완전한 나타나심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또한 그분이 이 깨어지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처럼 되는 길이 그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가 지상 생활에서 행하셨던 친구관계가 우리 인간관계를 풍성하게 하는 이상적인 패턴을 제시해 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어떤 유형의 관계를 볼 수 있는가? • 절친한 친구에 대한 절대적 헌신(열두 제자)• 미움 받는 공동체 구성원에 의도적인 친분 맺기(삭개오)• 다른 문화권 사람과의 대화(사마리아 여인)• 친구, 가족 구성원, 외부인과 함께 식사하기• 결혼식, 장례식 및 문화 행사에 참석하기•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과 관계 맺기(“죄인들”과 함께 식사)아우구스티누스가 오래 전에 썼듯이 우리의 모든 문제가 무질서한 사랑의 결과라면, 우리의 삶을 재정렬하는 것과 우리의 사랑을 재정렬하는 것은 함께 가야 할 일이다. 우정의 회복과 공동체 재건 우정을 다시 세우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복잡한 일은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다. 수단과 목적이 같기 때문에 복잡하지는 않다. 우정을 다시 세우는 길에서 우정을 다시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 일도 우선순위와 생활패턴의 재정렬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렵기는 하다. 우리의 생활 시스템은 우리가 얻어낼 결과를 위해 완벽하게 설계되었으므로 결과물을 바꾸기 위해서는 입력물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 삶을 재조정해야 한다. 우리가 관계 구축을 위한 오랜 순종을 우선시하지 않는다면 교회라고 불리는 이 공동체에서 관계적 하나님을 계속 설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 전반에 걸쳐 알고 있듯이(알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움) 관계를 세워 나간다는 것은 모임마다 모습을 보이고, 먼저 다가가고, 우리와 선천적인 관계가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고, 서로가 인내하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1. 얼굴을 보이고 관계를 계속 유지하라우정과 공동체에는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다시 말해서, 가치 있는 일은 지향성과 인내가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으며 서로가 필요하며, 모든 종류의 친구관계가 없다면 개인적으로 고통을 겪을 것이고 우리의 교회들도 어려움을 겪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반문화적인 규칙적 일정을 가지고 나타나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2020년에 300시간의 우정과 교제를 잃었다면, 2021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올해 이미 잃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수백 시간을 회복할 수 있을까? 우정과 중간고리 관계들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롬 12:10)해야 한다. 시간과 사랑과 존경을 들인다면 우리의 관계는 깊어질 것이다. 2. 먼저 다가가고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환대는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기독교의 독특한 행동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 친구이든 곧 친구가 될 사람이건, 사람들에게 우리의 집과 삶을 활짝 열어 주는 그리스도와 같은 삶의 방식인 것이다. 나는 15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안 된다고 하거나 사람들이 자기에게 연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손 대접하는 것을 힘쓰며”(롬 12:13) 먼저 다가가는 사람들이다. 먼저 다가가고 공간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계의 서클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3. 당신의 그룹 밖에 있는 사람들과 우정을 키워라 앞에서 보았듯이, 어두운 유형의 소속감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고집스러운 신념의 체계만 공유하고 우리 서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소그룹 친구모임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그러하다.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의 본래 그룹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의 우정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친구들이 다 나와 비슷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비슷하거나, 학력 배경이 나와 같다면 나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범을 따라가는데 그다지 큰 진전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와 거의 닮은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그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인내를 가져라 학대받거나 배제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모두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직히 말해서, 우리도 바로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아마도 교회나 소그룹, 친목모임에서 사람들을 참아주는 것이 유난히 어려울 수도 있다. 아마도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신약성경은 명백히 우리에게 “인내를 가지라”고 말했다 믿는다. 바울이 거기에 대해 가장 잘 말하였다.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팬데믹은 우리 모두에게 불평등하고 다른 방식으로 힘들게 하였고 또 여전히 어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 모두를 해로운 방식으로 형성해 왔으며,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2년간 영원히 사라진 몇 가지를 포함하여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므로 덜 소외된 교회와 번영하는 우정을 가진 공동체로 가는 길은 이러하다.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서로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다. 우리의 삶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디자인이다. 이것이 바로 우정과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돌아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원제: How COVID Has Affected Our Friendships-and What to Do About It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코로나19
중간고리관계
외로움의전염병
소속감
소셜미디어
끼리끼리관계
개인주의
공동체주의
팀 켈러, 어떻게 읽을 것인가
by 고상섭
2022-02-23
팀 켈러의 저서가 국내에서 30권 넘게 역간되었다. 더하여, 다른 저자와 함께 쓴 책들과 팀 켈러 관련 도서들까지도 속속 나오고 있다. 팀 켈러를 공부하고 싶지만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막막하거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각기 처한 상황과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로드맵을 그리는 것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필요하고 도움이 될 만한 작업이 팀 켈러의 저서 전체의 숲을 그리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팀 켈러의 저서 목록을 나름의 분류 기준을 세워 정리해 보았다. 분류 기준 팀 켈러의 다양한 책들은 (다른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기준으로 정리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분류될 것이다. 필자는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 나오는 통합적 사역을 중심으로 전체 내용을 분류해 보았다. 독서를 위한 분류 체계이기 때문에 팀 켈러가 말한 “∼에 연결하는 것”이라는 큰 틀을 따랐지만 세부 주제들은 임의로 정했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교회 사역의 통합성을 강조하면서 다섯 가지의 사역의 접점(Ministry Fronts)을 소개한다. •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전도와 예배를 통해서)•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자비와 정의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통해서)•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생태계를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 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국내 역간된(2022년 2월 기준) 팀 켈러의 저서들을 분류해 보았다.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1) 복음 ① 탕부 하나님/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동일한 책 ‘The prodigal God’을 각기 다른 두 출판사에서 역간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경계하며 복음 안에서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복음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가지게 한다.② 방탕한 선지자 원제는 ‘The prodigal prophet’이다.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과 비슷하다. 선지자 요나를 통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인간 안에 내재된 본성임을 알려주고 복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기술한 책이다. ③ 복음으로 세우는 센터처치‘센터처치’라는 한 권으로 된 책을 ‘복음’과 ‘도시’와 ‘운동’이라는 세 권으로 나누면서 팀 켈러와 인터뷰 부록처럼 포함했다. ‘센터처치’의 1권 ‘복음’을 묶은 책이다. ④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팀 켈러가 아닌 “티모시 켈러”라는 이름으로 판매가 되어서, 검색에서 잘 찾지 못하는 책이 되었다. 복음을 정체성과 자아상의 문제로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소책자이다. ⑤ 내가 만든 신/거짓 신들의 세상 우리말 역서의 제목은 다르지만 동일한 책이다. 복음을 만나는 장애물인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인 마음의 우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⑥ 복음과 삶 성경공부‘복음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를 주제로 만든 성경공부 교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으로서의 도시를 이야기하고, 복음이 그 적용되는 대상인 마음을, 공동체를, 세상를, 그리고 영원까지 변화시킨다는 주제를 다룬다. ⑦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복음이 핵심이다/복음, 자유를 선포하다세 권 모두 공저다.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두란노)는 2018년 한국에서 개최된 ‘센터처치 컨퍼런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에게 설교하기’와 ‘복음의 상황화’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이 실렸다. ‘복음이 핵심이다’(아가페북스)는 TGC로 불리는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에 속한 저자들이 열네 편의 글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D. A. 카슨과 ‘복음중심의 사역’이라는 주제로 TGC 정신에 대해 썼고 브라이언 채플, 케빈 드영 등의 저자들이 한 편씩 기고한 내용이다. ‘복음, 자유를 선포하다’(생명의 말씀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으로 2017년 TGC에서 갈라디아서를 강해한 책이다. 팀 켈러는 그 중에서 갈라디아서 6장을 설교했다. 2) 전도와 변증 ① 하나님을 말하다/살아있는 신 팀 켈러를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The Reason for God’를 번역한 책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기독교를 변증하는 책이다. ② 답이 되는 기독교‘하나님을 말하다’ 이후에 다양한 의견들과 반대의견들에 대해 다시 반론하면서 기독교의 합리성과 요즘 시대 사람들이 가지는 잘못된 신념들을 밝히고 복음이 가장 삶을 행복하게 한다고 증명한다. ③ 인생 질문/예수를 만나다 하버드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요한복음을 통해 복음을 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전도와 전도설교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3) 개인 경건 ① 묵상: 예수의 노래들 시편을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그의 아내 케시 켈러와 공저했다.② 오늘을 사는 잠언 잠언을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그의 아내인 케시 켈러와 공저했다.③ 고통에 답하다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4) 예배 ①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예배라는 주제를 다양한 교파의 목회자들이 공저한 내용이다. 팀 켈러는 ‘대도시에서 드리는 개혁주의 예배’라는 주제로 기고했다.② 21세기 복음전도 예배예배에 대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21세기 복음전도 예배’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센터처치’ Part 7 통합적 사역에서 2장 “사역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라는 부분의 내용과 ‘복음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1) 교회와 공동체 ① 복음과 삶 성경공부: Part 3.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복음과 삶’ 성경공부 교재 안에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부분은 공동체 그리고 전도라는 두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②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에서는 교회에 대해 다루지만 특히 Part 2 “통합적 사역을 추구하라”의 6장 “공동체를 만나도록 연결하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③ 개혁주의 실천신학팀 켈러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강의할 때 사용한 교재이다. 목회 사역의 근거와 특별직무, 소명, 목회사역을 위한 계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 가정 ① 결혼을 말하다결혼에 관한 여덟 편의 설교를 모은 책이다. 독신에 관한 내용도 한 장 포함되어 있다. ② 결혼의 의미결혼과 가정에 관해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아내와 공저 ③ 인생 베이직 시리즈 : 태어남에 관하여/결혼에 관하여/죽음에 관하여 태어남, 결혼, 죽음에 관하여 기록한 짧은 소책자이다. 전도와 변증의 책으로 유용하다.3. 사람들을 세상에 연결하는 것 1)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① 여리고 가는 길정의와 자비사역에 대한 책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도시를 섬기는 과정을 설명한 책이다.② 정의란 무엇인가‘여리고 가는 길’을 기초한 확장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왜 지역을 섬기는 정의 사역이 필요한지에 대해 설명했다.③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센터처치’에서 ‘도시’라는 부분을 따로 분권한 책이다. 복음의 상황화, 도시비전, 문화참여로 구성되어 있고 팀 켈러와 앤디 크라우치의 인터뷰가 있다. 교회와 도시의 관계와 도시목회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2)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① 일과 영성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위해 쓴 책이다. 일과 직업의 관계를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으로 구성했고 서문에 나오는 돌킨의 ‘니글의 이파리’라는 예를 통해 회복의 관점까지 소개하고 있다. ②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도시를 품는 센터처치’와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는 도시와 문화라는 구분 없이 두 주제 모두 포함하고 있다. 특히 복음 생태계를 이루는 과정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③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가이드라인과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의 예를 소개한 책이다. 팀 켈러는 프롤로그에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과 2장 세속 도시 속에서 소금이 소금되게’라는 부분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목회자로서 어떻게 살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4.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 생태계를 만드는 것 ① 센터처치/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② Church planting(교회내부자료) 5. 그 밖의 자료들 마인드맵에서는 설교와 설교집, 주석 및 성경공부 교재를 ‘하나님과 연결’이라는 부분으로 구성했다. 1) 설교와 설교집 ① 팀 켈러의 설교② 왕의 십자가: 마가복음 설교집 ③ 이 시대가 잃어버린 이름 예수, 예수: 성탄설교집 ④ 부활을 입다: 부활절 설교집⑤ 천국 묵상: 천국에 대한 설교 2015년 TGC 컨퍼런스 설교(1장 생명을 선택하라, 패널토의)⑥ 그분의 사역: 누가복음 설교 2014년 TGC 컨퍼런스 설교(눅 24장 무죄를 입증하다, 패널토의)2) 주석 및 성경공부 ① 당신을 위한 로마서 1/당신을 위한 로마서 2② 당신을 위한 사사기③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④ 당신을 위한 90일 성경공부: 갈라디아서, 사사기, 로마서⑤ 로마서 성경공부 ⑥ 복음과 삶 성경공부
팀켈러
팀켈러독서법
팀켈러저서
팀켈러저서분류
사역의접점
‘나의 사실’과 ‘너의 사실’: 우리는 과연 진실을 알 수...
by Samuel James
2022-02-21
가짜 뉴스 및 허위 정보의 문제와 더불어 그 해결책을 제시한 조너선 라우시(Jonathan Rauch)의 책 ‘지식의 헌법: 진리 수호’(The Constitution of Knowledge: A Defense of Truth)를 생각하면, 이제는 고전이 된 1997년 영화 ‘맨 인 블랙’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정부 요원 K(토미 리 존스)는 외계 생명체를 은폐하고 통제하는 자신들의 임무를 J 요원(윌 스미스)에게 설명하고 있다. 어느 시점에서 K는 신문 가판대로 J를 데려가더니 타블로이드 더미를 가리킨다. 머리가 세 개 달린 채로 태어난 아이들, 여전히 살아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위치타에서 공연을 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전하는 그런 선정적 출판물들 말이다. K는 이렇게 말한다. “지구상에서 최고의 조사 보고서지. 뭐, 원하면 뉴욕 타임스도 읽어봐. 운이 좋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이것은 단지 절묘하게 구성된 재미있는 대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적절한 은유이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대답이 있는가? 아니면, 전적으로 그건 당신의 세계관에 달려 있는가? 답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에 관한 논문을 읽고, 또 실제로 아는 사람은 또 다른 논문을 읽고 있지 않은가? 현대 서구 문화에서 이것은 공상과학 여름 블록버스터의 단순한 줄거리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 위기에 수반되는 질문들이다. 지구로 이주하는 외계인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야 아마도 없겠지만, 확실한 건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읽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자 잡지 애틀랜틱(Atlantic)의 기고 작가인 조너선 라우시는 이런 사회적 위기가 끝날 때라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보호하며 촉진하는 사회적 계약의 회복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런 계약을 형성하고 보호하는 공동체는 “현실 기반 공동체”로 알려져 있으며, 증거에 근거한 사실을 추구하고 전파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두터운 네트워크이다. 라우치는 이런 공동체가 “지식을 만드는 데에는 옳거나 그른 방법이 있다는 공유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5). 이러한 현실 기반 공동체로부터 하나의 지식의 헌법(Constitution of Knowledge)이 나오게 되며, 그것은 대중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의 기본 합의가 되는데, 그 결과 대중적 담론에 필요한 조건이 형성된다. The Constitution of Knowledge: A Defense of Truth(지식의 헌법)조너선 라우시그릇된 정보. 고의적 논쟁, 악의적 선동. 음모. 소셜 미디어를 통한 집단 공격. 캠퍼스의 편협함. 표면적으로만 봐서는 최근 일상 어휘에 추가된 이런 용어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말은 우리를 인식적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고 거짓보다 진실을 높이는 미국의 능력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다. 이 획기적인 책에서 조너선 라우시는 18세기 자유 민주주의와 과학 발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지식의 헌법”이라고 부르는 것, 즉 불일치를 진실로 바꾸기 위에 필요한 사회 시스템을 설명한다. 지식의 헌법을 설명하고 현실과의 전쟁을 조사함으로써 라우시는 진리의 옹호자라면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제공한다. 라우시의 이 책은 모든 미국인이 러시아만큼 멀리 있는 동시에 휴대폰처럼 바로 곁에 있는 위협으로부터 객관적인 진실을 방어하고 자유로운 탐구를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포괄적이고 읽기 쉬운 설명이다.BROOKINGS INSTITUTION PRESS. 280 PP.현실 기반 공동체 라우시에 따르면, 이런 공동체는 진지한 사고를 추구하는 모든 지적 분야에 존재하며 “현실 기반”이라는 지식 표준에 대한 책임을 자신과 다른 구성원의 작업에 일관되게 적용함으로 진리 추구라는 대의에 기여한다. 이것은 경험주의 회복이라는 계몽주의에 그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철학자 찰슨 샌더스 피어스(Charles Sanders Peirce)와 그의 “실용주의”에 크게 의존하는 라우시는 가짜 지식을 실제 지식에서부터 구분하는 것이 반증의 원리(principle of falsification)라고 주장한다. 충분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추론하려는 모든 사람을 궁극적으로 설득할 수 없는 주장은 현실 기반 공동체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현실 기반 네트워크는 생태계처럼 작동한다. 검증된 명제의 생산과 관련해 인간이 그 구성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통제는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현재로서는 최선의 실재(reality)이다”(87).따라서 지식의 헌법은 언론을 보호하고 악의적 행위자를 걸러내며 진리에 대한 특권적 주장을 방지한다. 따라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럼 그런 현실을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라우시의 이 책은 현실 기반 공동체에 대한 선언문이다. 라우시의 비전에서 인식론적 왕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객관성, 오류가능성(fallibilism), 그리고 불일치 및 기타 근본적인 인식론적 주장(commitments)을 고수하고 방어할 책임을 가진다. 양극화를 넘어선 미래라우시의 현실 기반 공동체는 진짜 좋은 것을 성취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공동체는 권위를 희석하는 인터넷의 폭정에 단호히 반대하며, 당파적 약속이나 수익성을 노리는 조회수 미끼가 진실을 가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인기와 반직관적인 관점만을 근거로 누군가를 괴롭히고 처벌의 대상으로 만드는 취소 문화(cancel culture)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이기도 하다. 부정적 인식론과 집단 사고에 대한 열정적 주장으로서, 라우시의 이 책은 압도적이고 설득력 있으며, 알고리즘과 엘리트주의를 초월한 미래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자극한다. 지식의 헌법이 다루는 문제는 위기 식별이 아니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 제안이다. 라우시에게서 건전한 인식론 현장의 본질인 실용주의는 심각한 상상력의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는 진리, 선, 아름다움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 또한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그다지 인식하거나 염려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건 아마도 현실 기반 공동체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그가 쓰는 “현실 기반”이라는 용어는 잘못된 이름으로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학력주의(credentialism)와 대중 지식의 문지기로서의 전문가 합의의 중요성에 대한 라우시의 강조는 그를 대중의 신뢰뿐 아니라 제도적 무결성의 위기, 그리고 현재의 사건으로부터도 크게 동떨어진 사람으로 만든다. 실용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라우시는 현실 기반 공동체의 승리를 독단주의에 대한 경험주의의 승리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 기반 공동체의 핵심 가치는 정의(definition) 상 신이 있을 여지뿐 아니라 기적 또는 초월적 사건도 배제한다. 라우시는 이러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사실 대 진실이라는 이분법을 제안하며 이를 막으려 한다. 진리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도덕적 실체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진실을 말할” 자유가 있다. 대조적으로 사실은 아홉 가지 인식론적 약속으로 판단할 수 있고 또한 판단되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진술이다. 라우시에 따르면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은 진리의 영역을 떠나 사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우시는 핵심 섹션에서 “지식의 헌법이 공적 지식의 영역에서는 최고가 되어야 하지만 사적 믿음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썼다. 비유하자면, 미국 헌법은 미국 중앙 정부에 대한 규칙을 설정하지만 가족을 운영하고, 자녀를 가르치고, 커뮤니티를 조직하거나, 우리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규칙은 명시하지 않는다. 헌법은 단지 헌법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본연의 능력을 훼손하지 않고 지지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행동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지식의 헌법은 개인이 여러 종류의 개인적 신념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인식론적 틀을 만든다(115).바로 여기에 라우시 접근 방식이 갖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그의 방식이 이미 과거에 시도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과학과 종교에 관한 유명한 주장인 “비중첩 교도권”(non-overlapping magisterial, 역자 주: 종교는 ‘왜’라는 질문에, 과학은 ‘무엇’과 ‘어떻게’라는 질문에 각각 대답을 주는 고유의 영역을 갖고 있다는 제이 굴드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을 접한 사람이라면, 현실 기반 공동체에 대한 라우시의 비전에서 동일한 느낌을 받아야 한다.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상대적으로 존경받는 굴드의 책 ‘시대의 암석: 충만한 생명 속의 과학과 종교’(Rocks of Ages: Science and Religion in Fullness of Life)은 1999년에 출판되었다. 그의 주장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 있는가? 그로부터 7년 후인 2006년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출간했다. 이 책은 개인 차원으로 믿는 종교적 신앙까지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다른 책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굴드와 라우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도킨스가 이해하는 것은 종교적 계시라는 주장이 결코 삶에서 동떨어져 어느 경건한 구석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도킨스는 종교를 지적 삶의 주변부로 격하하려는 노력은 아무리 미소를 지으면서 하려고 해도 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라우시의 사실 대 진실 이분법은 철학적으로도 건전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미국 헌법이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종류의 개인적인 신념”을 허용한다는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가 이렇게 말한 건 헌법이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수용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주기를 거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사실이 아니다. 정치 시스템은 단순히 효율성의 네트워크가 아니다. 정치 시스템은 인간의 타고난 타락에 대한 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권력 분립을 하는 이유), 악을 통제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강제적 법 집행 메커니즘이 필요한 이유), 또한 공정성과 공평성의 선함도 인지하고 있다(법원의 존재 이유). 또한 미국의 경우에 모든 인간 속에 신의 형상이 있다고 확신한다(생명, 자유, 행복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이유). 그러나 이러한 믿음 중 그 어느 것도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 그것들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며, 라우시 자신의 인식론적 범주에 따르면 지식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학력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라우시 주장의 두 번째 큰 문제는 현실 기반 공동체가 비현실에 굴복할 가능성에 대해 이상하게 침묵한다는 점이다. 라우시의 이 책 대부분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책 속에 지난 2년 동안 공중 보건 공무원이 시민을 이끌거나 계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논의가 없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수많은 논평가들이 지적했듯이, 팬데믹은 라우시가 자주 찬양하는 제도와 학력주의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학력주의 형태의 공공 지식 시장이 궁극적으로 자체 수정이 가능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옳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자체 수정의 비용은 그의 생각에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현실 잊기‘맨 인 블랙’은 반전으로 끝난다. 비밀과 고독 속에서 보낸 세월에 지친 K 요원은 J 요원에게 기억을 지워달라고 요청한다. 그에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잊는 것이다. 나는 서구 사회가 기억을 지우고 싶은 이 K 요원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자율성과 표현적 개인주의 감각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를 더 큰 존재에 우리 존재를 묶게 하는 현실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잃어버린 기억은 대체되어야 한다. 결국 내가 아는 사실과 당신이 아는 사실의 차이가 빚어내는 인식론적 위기는 세속화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진리 상태에 관해 경고를 했다는 점에서 조너선 라우시는 바른 일을 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현실 기반 공동체는 실용주의자의 기계 같은 것이다. 현대 사회와 진실에 대한 확고한 신뢰 사이에 서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과학적 또는 기술 관료적 전략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며, 또한 전문 분야에 관한 대중의 신뢰 상실이 단지 도널드 트럼프나 트위터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도덕적 추론 방법의 실용적 부재는 지식 헌법이 정작 진리 제공자 없이 진리를 찾기 위한 또 하나의 장황한 시도로 끝나지나 않을까 우려하게 한다. 원제: My Facts Versus Your Facts: Can We Really Know Truth? (Review: ‘The Constitution of Knowledge’ by Jonathan Rau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인식론
가짜뉴스
진실
실용주의
진리란무엇인가
현대성
스티븐제이굴드
리처드도킨스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by 김선일
2022-02-19
요즘 젊은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기성세대와 대조하는 가장 가벼운 표현은 ‘개인주의’일 것이다. 필자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사회가 점점 개인주의화되고 삭막하다는 푸념을 주변에서 자주 듣게 된다. 그런데 개인주의는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인간 개인이 자기의 존재 가치를 독립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서구 사상의 최대 발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에는 집단과 전통의 부분에 불과했던 자아가 독립적인 주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한 근대적 자아의 탐구가 200년 이상이 흐르면서 이제 우리 사회에도 뚜렷한 신념으로 자리 잡아가는 것이다. 김난도와 공저자들은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 2022년의 대표적 트렌드를 ‘나노사회’라고 표현하며, 이 나노사회가 우리가 경험할 변화의 근인을 이룰 것이라고 한다. “나노는 10억 분의 1을 뜻하는 접두사로, 보통 원자나 분자 단위를 측정할 때 쓰는 단위다. 사회가 공동체적 유대를 유지하지 못하고 유기체의 기본단위인 분자 또는 원자, 곧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쪼개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71쪽). 나노사회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초미세 가치가 인정받는 사회다. 개인의 자아도 특정한 집단이나 명분에 종속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존중된다. 그간 사회 곳곳에서 기존의 틀로부터 해방되는 개인의 몸부림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직장에서 퇴근 후 단체 회식 문화가 사라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근무 시간 중간의 점심식사도 자기만의 시간으로 삼으려고 한다. 엄마이자 주부로서 가족을 위한 의무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니는 모습은 중년 여성들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된다. 젊은 사람들은 결혼 하더라도 각자의 통장은 그대로 유지하며 공동의 생활비용을 합리적으로 분담하는 ‘따로 함께의 삶’을 실천한다. 물론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장기화가 우리에게 나만의 공간에서 홀로 살아가는 삶을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처럼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추구하는 가치관은 코로나가 창출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지속되어 오던 흐름이 코로나로 인해서 성큼 앞당겨진 것뿐이다. ‘나’ 중심의 시대적 트렌드는 우리 사회를 더욱 세분화할 것이다. 데이터 전문가 송길영은 그의 책 ‘그냥 하지 말라’에서 코로나 이후에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핵심 현상을 “분화하는 사회, 혼자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거대한 가속’의 저자 스콧 갤러웨이도 이를 마이크로 세대라고 불렀다. 누구보다 자기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위로하고 표현하는 것이 최대의 미덕으로 부상한다. 이 모든 나 중심의 현상을 총합하면 ‘슈퍼 개인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가 만들어 준 혼자만의 시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셀프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수제품을 의미하는 크래프트 맥주, 크래프트 커피, 크래프트 옷이 SNS에 열풍처럼 등장하며, 자기만의 경험과 성취를 보여 주는 징표가 되었다. 남이 부여하는, 또는 남과 함께 만드는 행복이 아니라 셀프 행복이다. 지난 몇 년째 불어 닥친 MBTI 열풍도 특이하다. MBTI가 소개된 것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MBTI 진단이 필수가 되었다. 사주, 운세, 타로점을 보는 젊은이들도 늘어난다. 이에 대해서 미래전문가 김용섭은 ‘라이프 트렌드 2022’에서 젊은 세대는 과거에는 자신의 인생을 위한 조언과 위로를 종교나 가족에서 찾았지만, 이제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찾은 것이라 한다(276-277쪽). 과연 위로가 될는지, 과연 의미 있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회의적이지만, 어쨌든 자신을 위한 정신적 위안거리를 찾는 방식임은 분명하다. 얼마 전 한 TV 방송에서 한 젊은 기자가 “점심 한 끼 2만원 시대”를 몸소 시연했다. 그런데 점심에 해장국을 먹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오전에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오후에는 꽤 고급스런 아이스크림도 필수로 포함시킨다. 이 뉴스가 나온 뒤 취지와는 달리 아이스크림까지 포함시키는 점심 끼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 댓글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힘든 불균형이 이미 부와 소비를 경험한 젊은 세대에게는 열심히 일하는 자신을 위한 마땅한 보상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개인의 선호와 취향에 갇혀 사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가 정치나 국제질서와 같은 거대담론에 무관심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은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바꾸는 것에 더욱 참여적이다. 따라서 슈퍼개인은 행동하는 자아이며 변화를 위해서 연대하는 자아이다. “돈쭐내기”는 행동하는 자아의 연대를 잘 보여 준다. “갑질” 하는 매장은 불매 운동을 하지만, 선한 주인이 운영하는 가게에는 다들 가서 매상을 올려주는 돈쭐내기 인증샷을 SNS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기도 한다. 작은 행동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행동 연대를 하는 의미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증대하는 슈퍼 개인이 되었다. ‘트렌드 모니터 2022’은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가리켜 ‘강력한 영향력을 원하는 슈퍼 개인’의 등장이라고 명명한다.슈퍼개인의 시대를 단순히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로 단정 짓는 것은 섣부르다. 현재 집단과 위계로부터 개인이 자기를 찾아가는 시간이자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슈퍼개인의 시대, 또는 나노사회, 사회의 분화 현상에는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모래알과 반향실 현상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조각조각 모래알처럼 흩어졌다가 비슷한 생각과 취향을 가진 이들끼리 자기들의 소리만을 반복해서 듣고 호응하며 다른 의견들은 차단하는 반향실(echo chamber)로 재집결하는 것이다. 예민한 사회, 정치적 이슈가 부각되면 이러한 반향실 효과는 극심해진다. 이는 앞으로 우리에게 묵직한 공동체적 과제를 안겨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하겠다.)이러한 슈퍼개인의 시대와 기독교 신앙이 조우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일까? 최근에 한국 교회에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 공공신학 등의 용어들이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관심을 얻고 있다. 교회가 개인구원, 내세신앙, 기복주의에 연연해서 교인들에게 사회적 책임과 공적인 의식을 함양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동의하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존재됨을 재각성해야 한다는 데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 하지만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부상하는 신앙의 공적 역할에 대한 강조가 본의 아니게 한 개인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성경은 절대군주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예 취급되는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개인의 존엄함을 인정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돌보는 데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다. 신약성경은 할례와 혈통에 의한 선민사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를 따르는 개인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언한다. 개인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 나라의 공적 의식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미 신약성경에서는 전통과 제도로부터 해방되는 새로운 존재로서 개인을 존중한다. 노예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한다. 이는 계급을 초월하는 기독교적 형제애를 반영하는 개별적 정체성의 존중을 암시하지 않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음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독특한 작품이라는 바울의 선언은 또 어떠한가?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도의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상호 협력한다는 말씀도 개개인의 은사가 성령의 선물임을 시사한다. 성경에서 순종이나 복종이 자주 등장하지만, 이 또한 인간의 위계 구조 안에서 무조건적 지배와 순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5장을 보면 복종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지만, 가부장제의 전형처럼 일방적으로 아내가 남편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절)는 대전제를 제시한다. 이는 전통적 위계질서를 근원적 층위에서 해체하며, 가족 안에서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복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개인의 취향이 존중받는 시대인데, 교회가 전통적인 끈끈한 연대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쇠퇴한다는 지적이 있다. 교회가 위계와 차별을 고착화하는 세상의 규범에 포로가 되었다면, 이는 뼈아프지만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아를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일원으로 형성시키는 공동체라면, 슈퍼 개인의 시대는 교회에게 새로운 선교적 도전이 될 것이다. 이전 글: •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다음 글: •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복음중심적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개인주의
슈퍼개인
나노시대
위계사회
가부장제
개인과교회
처음
이전
6
페이지
7
페이지
8
페이지
열린
9
페이지
1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