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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칼빈대학교, 성에 관한 이단적 견해 수용
by Joe Carter
2022-11-17
사건: 칼빈대학교(Calvin University) 이사회가 성적 부도덕과 관련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교수진을 계속 임용하기로 결정했다. 과연 교단이 이 문제에 개입할까? 아니면 교단조차도 학교가 이단적 견해를 수용하도록 허용할까? 배경: 칼빈대학교 이사회는 최근 이성 부부 사이의 성관계 외 다른 성관계를 죄로 간주하는 신앙 고백서 조항에 대해서 반대를 표명한 일단의 교수진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Religion News Service에 따르면, 일단의 교수진이 신앙 고백서 내용의 난제들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이사회는 이를 승인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달리 말해서, 신앙 고백서에 반대하는 교수들이 칼빈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이사회가 승인한 것이다.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에 있는 이 학교는 교인 수가 대략 이십만 명인 네덜란드 칼뱅주의 교단인 북미기독교개혁교회(CRC)가 소유하고 있다. 신앙 고백서에 반대한 교수의 숫자와 이름은 기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았다.칼빈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는 니케아 신경,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를 포함한 일련의 역사적 기독교 신조 및 고백과 자신의 신념이 일치한다는 문서에 서명해야 한다. 교수 핸드북은 또한 교수들이 “신앙 고백과 일치하게 가르치고, 말하고, 또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2016년, CRC는 성(sexuality)과 관련해서 기본이 되는 성경 신학을 명확히 하기 위해 연구 위원회를 구성했다. 2021년, 이 위원회는 성경이 “성적 부도덕”으로 간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포함한 내용을 담은 자세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Sarah Eekhoff Zylstra가 쓴 “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Corrected Course”를 참조하라.)이 보고서는 또한 성경이 금지하는 성적 부도덕에 대한 태도는 교단 내에서 이미 신앙고백에 버금가는 의미(confessional status)를 가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의 고백에 따르면, 교회는 외설물, 일부다처제, 혼전 성관계, 혼외 성관계, 간통 또는 동성애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성적 부도덕에 대한 승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관용해서도 안 된다. 도리어 교회는 성적인 죄와 더불어 우상 숭배와 탐욕 및 기타 다양한 죄를 회개하기 거부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든 교회 앞에서 분명하게 경고해야 한다(고전 6:9-11). 그런 죄를 짓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교회는 반드시 징계해야 한다(고전 5-6장).현재 칼빈신학교 이사회는 비성경적인 성에 대한 견해를 수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단의 권위를 존중한다”라는 내용으로 교수 지침을 수정 중인데, 개정된 지침은 앞으로 몇 주 안에 나올 예정이다. 의미: 죄를 옹호하거나 가담하는 사람, 또는 죄를 조장하거나 용인하는 그리스도인을 교회가 징계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교단 내에서 퍼질 수도 있는 이단으로부터 교회 기관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성적 부도덕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명백한 이단의 사례이다. 성도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해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는 성경의 명령을 알게 되고, 나아가서 그 명령이 어떻게 혼외 성관계까지 포함하는지(마 19:4-5)를 배우게 된 이상,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게 무슨 의미인가? 순종하지 않는 건, 진짜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점을 분명하게 하셨다. 우리가 그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요 14:15).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할 때, 성적 부도덕이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기독교 대학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건 말도 안 된다. 간음, 음란물 즐기기, 동성애 관계에 빠지기 또는 혼외 성관계 등은 그리스도인도 얼마든지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학문적 자유”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CRC가 보고서에서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권징이 필요한 이유는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권징에는 용기와 확고한 정통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주변 세속 문화와 비교해서 행여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하는 대학에서는 찾기 어려운 자질이다. 칼빈대학교 이사회는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사회는 잘 알고 있다. 성적 부도덕을 인정하자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지지하고 조장하는 교수를 징계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의 의무는 명약관화하다. 지난 165년 동안 교단이 지키고 고백해 온 입장은 사실 이천 년 이상 이어져 온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이사회는 단지 그 점을 명확히 견지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대학 그리고 그들을 신뢰한 교단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대신,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는, 공개되지 않은 숫자의 교수진을 용인하기로 결정했다. 불행하게도, 이사회는 불일치와 비일관성이라는 입장을 선택했다. Religion News Service의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학교는 … 학생들의 혼전 성관계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결혼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앞으로도 이 규칙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학교 대변인이 말했다.” 정작 가르치는 교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어도 관계없는 사항들에 관해서 왜 학교는 학생들만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걸까? 학교는 왜 혼전 성관계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고 하면서, 학생들에게는 그런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금지하는가? 혼전 성관계는 성적으로 부도덕하거나 아니면 도덕적으로 옳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그 중간은 있을 수 없다. 더불어 교수에게 적용하는 지적 기준과 학생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달라서도 안 된다. 칼빈이사회 의장인 브루스 로스(Bruce Los)는 이렇게 말했다. “대학이 CRC 신앙고백의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다양한 관점을 가진 교수진을 갖추는 것은 학교 발전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지금 이 대학은 CRC가 고백하는 신앙의 기준을 지키지 않고 있다. CRC의 신앙고백 기준은 명확하다. 그렇기에 교수진은 거기에 관해서 의무 면제가 필요했다. 분명한 것은 이제 많은 교수가 CRC 신앙고백의 기준을 아예 무시하고 있고, 의장인 로스와 이사회조차도 그 기준을 지키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로스와 이사회는 신앙 고백서에서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는 부분은 어디인지, 나아가서 애초의 의미와 반대가 되어도 관계 없을 정도로 재해석해도 되는 부분은 어디인지를 스스로 결정함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남용했다. 로스는 이단적 견해조차도 “다양한 관점”이라는 명목으로 허용하고 싶어 한다. 칼빈대학교는 다음 단계로 무엇을 허용할까? 성적 부도덕과 기독교 정통을 결합한 혼합주의조차 기꺼이 용인하는 학교에서 도대체 허용하지 못할 견해가 뭐가 있을까? 점성술 또는 환생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교수가 나오지는 않을까?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인가? 칼빈대학교 이사회에서 “이건 너무한데?”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이단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는 비성경적인 타협이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미국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똑똑하게 알고 있다. 입으로는 칼뱅과 루터를 존경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원조 개혁자들의 성경적 견해와 기준을 포기한 “개혁주의”(Reformed) 주류 교회를 보라. “성적 부도덕”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버림으로 칼빈대학교는 지금 과거 주류 교단이 걸어간 유사한 길을 가고 있다. 문화적 수용이라는, 눈에 보이는 단기적 열매를 얻기 위해 그들은 영원한 저주의 길을 선택했다. 정통을 버린 이사와 교직원으로부터 누가 이 학교를 구할 수 있을까? 과연 CRC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사람들로부터 교단의 대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칼뱅을 구출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비록 작지만 유서 깊은 이 교단은 이단으로의 추락이 기독교 고등 교육 기관이라면 반드시 직면하는 불가피한 결과가 아님을 증명하는 역사를 일으킬 것이다. 원제: Calvin University Votes to Allow Faculty to Embrace Heretical Views on Sexu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칼빈대학교
성윤리
신앙고백
개혁주의
죽음의 그늘이 청춘을 짓누르고 있다
by 조성돈
2022-11-02
제게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1999년생입니다. 아들이 중학교 2학년이었던 때 세월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받았던 충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남의 일 같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아들 또래는 수학여행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정부에서 내린 대책은 수학여행을 금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수학여행이라는 학창 시절의 가장 신나는 경험을 못 했습니다. 2017년 아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때 포항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수능시험 전날이었습니다. 지진 피해는 상당히 컸기에, 수능 시험장으로 동원된 일부 학교가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수능은 1주일 미루어졌습니다. 다행히 대학을 가고 2년을 보냈는데, 전 세계가 경험하는 코로나19가 닥쳤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에게 불안이 밀려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곧 졸업도 하고 취직도 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되었습니다. 3학년을 마치고는 늦게 군대를 갔습니다. 작년에는 한강에서 손군이 익사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논란 가운데 술에 취해서 일어난 우발적 사건으로 결론이 났습니다만, 아직도 한강에 가면 의문을 밝혀 달라는 게시물이 있습니다. 손군은 아들의 한 건너 친구입니다. 학교 동창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아들에게는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그 트라우마는 아직도 집 앞 한강을 나갈 때마다 찾아옵니다. 지난 주말에는 이태원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직 이것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건이 맞는지, 참사라 해야 할지, 또는 재난이라고 해야 할지 말입니다. 꽃다운 청춘이 오늘 기준 155명 사망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그날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뉴스를 보자마자 분주해졌습니다. 카톡이 불이 났습니다. 현장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는 사진들이었습니다. 뉴스와는 다른 현장의 모습들이 속속 들어왔습니다. 그 충격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은 그날 가자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대학 친구들, 동네에 있는 중고등학교 친구들이 그룹 지어서 같이 가자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혼자 빠졌는가 봅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아들은 밤새 카톡을 한 것 같습니다. 서로 생사를 확인하느라 그랬을 것입니다. 다음 날 물어보니 대학 선배 하나가 밤새 연락이 안 되었는가 봅니다. 현장에서 경험하고 정신이 나가서인지, 이태원에서 국민대까지 걸어갔다고, 카톡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궁금한데, 살아 있냐고 물어볼 수가 없어서 기척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오후에 물어보니 직접 친구는 괜찮은데, 한 다리 건너의 친구 중에 사망자가 있다고 합니다. 덤덤한 듯 말하지만 큰 충격인 것 같습니다. 그다음 날 퇴근하는 아들에게 별일 없냐고 물으니 아는 이들 중에 사망자가 한둘이 아닌 것 같다고만 합니다. 그 말을 듣는데 저도 충격이었습니다. 아들이 더 충격을 받았을 거라 생각이 드니 더 이상 물어보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뉴스를 껐습니다. 아들이 이제 그만 보라고 합니다. 뉴스가 남의 일이 아니니 충격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아들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 일보다 더 무서운 일들이 우리 가운데 더 많이 있었을 것이고요. 구의역에서, 노동 현장에서 아직 어른도 되어보지 못한 친구들이 죽어간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강남 화장실에서, 최근에는 신당역 화장실에서 죽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버티지 못하고 자신의 삶의 중앙에서 스스로를 포기한 이들도 있습니다. 자살 예방 사업을 하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청년들의 자살입니다. 10대, 20대, 30대에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것은 이미 오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망원인 통계표를 보다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20대 사망자 중에 자살로 인해서 죽은 사람의 비율이 56.8퍼센트인 겁니다. 즉 20대 사망자 10명 중 6명은 자살로 인해서 죽은 것입니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죽인다는 자살이 사망원인의 거의 60퍼센트에 이른다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저는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결코 산발적인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관통하는 한 가지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 경시입니다. 돈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만 치열하게 달려가는 이 사회의 문화입니다. 죽음조차도 불사하겠다는 죽음의 문화가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가볍게 흩날리며, 죽음을 향해 가는 나방과 같이 불빛을 향해서만 달리는 이 땅의 가치관, 즉 문화가 그 이유입니다. 이러한 문화 가운데 생명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그것이 남의 생명이 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안전을 비용으로 계산하게 되고, 생명을 돈으로 생각하게 될 때 이런 일들은 끊임이 없을 것입니다. 생명은 대한민국에서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세월호 때 학습한 바가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으로 인해서 생때같은 아이들이 선실에 머물러 죽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는 하나의 생명 구호와 같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정부를 믿고, 주최측을 믿고, 공권력을 믿고 ‘가만히 있다’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정말 슬픈 이야기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지켜주고, 나를 살려 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 이 땅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내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생존의 가치라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지요. 그리고 우리 청년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3포, 5포 하다가 이제는 세는 것도 힘들어서 N포 세대라고 하는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이제 꿈꾸는 것조차 포기하고 남은 80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망막하기만 한 이 청춘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며, 그들의 성공에 손뼉 치지만, 그게 현실인 것을 알아버린 이 청춘들에게 우리는 삶의 소망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태어나서 대학 갈 때까지, 그리고 취직할 때까지 갇힌 공간에서 치열한 경쟁을 해온 청년들에게 이제 와서 구호 물품 나누어 준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철창 경기장 안에 맹수로 사육해 놓고, 이제 와 소여물 나누어 준다고 해결될 일은 아닙니다. 아들놈 힘들어하는 거 옆에서 보다가 이 세상이 너무한 것 같아서 쏟아놓아 봅니다. 이제 겨우 다 키워놓고, 그 빛나는 모습 쳐다보다 시신으로 만나게 된 그 부모가 너무 안되어서 이렇게 넋두리해 봅니다. 하지만 정말 이 사회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암만 빛나는 성과가 있어도 사람이 살 수 없다면, 그건 지옥과 같습니다. 우리의 청춘들을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버티고 사는 것도 힘든 이들을 이제 더 이상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 생명을 갈아 돌아가는 이 톱니바퀴를 멈춰 세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3천 5백 년 전 안식일을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지혜를 다시 새겨볼 때입니다. 안식일이 되면 너와 네 자녀들과 네 종들과 네 집의 객들과 네 집의 가축들이 모두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7일에 하루를 반드시 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7일에 하루를 쉬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한 약자들의 권리입니다. 이 명령과 권리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세상은 더 많은 노동과 수고로, 그리고 더 많은 착취와 폭력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은 그 세상의 원리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과 세상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범위가 놀랍습니다. ‘너’뿐만 아니라 자녀와 종들과 객들에게도 안식을 허락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가축들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너’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까지, 그리고 그 가축까지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에게 안식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어 이렇게 모든 피조물에까지 이릅니다. 생명은 사랑으로 지켜집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있을 때 생명은 절대적 가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걸 놓쳤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생명이 없는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유가족들과 대한민국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보내드립니다.
이태원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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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핼러윈이 문제였을까?
by 전재훈
2022-10-31
지난밤의 참사 소식에 주일인 오늘 예배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 교회도 교인 자녀들을 체크하며 혹시라도 사고를 당한 가정이 있는지 확인했다. 모두 안녕했지만, 평소처럼 기쁨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는 힘들었다. 이태원 참사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어느 유명인이 이태원 어딘가에 나타났다는 소리에 갑자기 사람들이 쏠리면서 압사가 발생했다는 말도 들리고, 질서를 유지해야 할 경찰 인력이 부족해서 대형참사를 막지 못했다고 하는 비판도 있다. 현 정부에 대한 비난과 전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 글들도 나오고 있다. 핼러윈이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핼러윈이 낯선 어르신들 가운데는 이 축제를 크리스마스처럼 종교적 행사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다. 핼러윈 축제에 사용되는 소품과 분장이 대부분 귀신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보니 귀신들의 축제, 마귀의 축제라며 눈살을 찌푸리는 분들도 많다. 아마도 많은 교회에서 핼러윈의 이교적 요소들을 언급하며 이 축제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을 것이다. 핼러윈 데이는 11월 1일인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 All Hallows’ Day)의 전날을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즐기던 문화에서 비롯됐다. 만성절은 가톨릭에서 지키던 ‘모든 성인의 대축일’을 의미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국을 빛낸 위대한 위인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기리는 행사 같은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종교와 상관없이 상업적으로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즐기는 축제가 된 것처럼, 핼러윈도 가톨릭의 만성절이나 귀신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상업주의와 결합하여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끼와 열정을 드러내며 즐기는 세계적인 축제가 되어가고 있다.고대로부터 축제는 억눌렸던 민중의 삶에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우리의 추석과 같은 민족 고유의 명절도 이런 축제의 한 요소를 담당했다. 농사일로 벅찼던 삶에 쉼을 제공하고 굶주림에서 하루 정도는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기에 “매일이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도 생겨났다. 하지만 어떤 축제라도 전통이 덧입혀지고 규율이 엄격해지면 정작 힘든 삶에 탈출구가 되기보다 또 다른 짐으로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한다. 이렇기에 “매일이 한가위만 같으면 큰 일”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더욱이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추석 같은 명절은 결코 자기네가 즐길 만한 축제와 같지 않기에 새로운 탈출구로서 어른들은 잘 모르는 축제가 필요했다. 이런 젊은이들의 욕구가 가장 잘 맞아떨어진 것이 바로 핼러윈 데이다. 어떤 축제라도 사람들이 몰리면 반드시 사고의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1755년 11월 1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였던 리스본에 큰 지진이 발생해 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진이 일어난 날은 만성절 예배가 있던 11월 1일 오전 9시 40분이었다. 사람들이 만성절을 축하하기 위해 교회에 모여 있다가 큰 참변을 맞이한 셈이다. 리스본 대지진은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고, ‘신정론’이라는 신학적 개념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09년 만성절에는 필리핀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16명이 숨지고 60여 채가 불에 타면서 한 동네가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만성절을 맞아 집에 켜 둔 촛불이 넘어지면서 일어난 사고였다. 미국에서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평균 300여 건의 화재 사고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렇듯 어떤 축제이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는 늘 사고의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사전에 충분히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만 큰 사고라는 것 자체가 아무리 대비해도 부족한 사고를 의미한다면 큰 사고는 언제나 충분한 대비를 했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발생하기 마련이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고가 났다고 해서 그 축제 자체를 비난하고 비하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는 격이 될 소지가 크다. 핼러윈 축제가 전 세계 모든 젊은이가 열광하는 축제이지만, 그렇다고 핼러윈 데이를 휴일로 지정한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 역시 핼러윈을 통해 상업적으로 돈벌이는 하지만 이를 크리스마스처럼 휴일로 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핼러윈 데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더욱 금지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왜 많은 젊은이가 이토록 핼러윈 데이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 시대가 규범과 획일화에 질려버린 젊은이들이 기존의 관념 체제를 부정하고 해체주의를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인 탓도 있다. 문명의 발전 속도는 인공지능(AI) 시대를 향해 가고 있는데 소위 어른들은 과거의 사상 체제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질 못하니, 빠른 문명과 더딘 사상 사이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좀처럼 해소할 수 없는 답답함에 빠지게 되었다. 이들은 어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들을 즐기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 한다. 이 때문에 노랫말은 점점 알아듣기 힘들어지고,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언어는 갈수록 어른들을 배제하고 있다. 청소년들만의 문화가 생기고 그들에게 소비 능력이 생기게 되면서 상업은 그들을 중심으로 재빠르게 재편되고 있는데, 기성세대는 그런 문화에 소외감을 느끼며 꼰대로 전락하고 만 것이 현대사회의 모습이다. 한국은 특별히 유교적인 관습과 남북으로 갈라진 이데올로기가 BTS의 세계적인 성공과 함께 공존하는 나라이다 보니 세대 단절이 더욱 크게 다가오고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문화를 즐기고 싶은 욕구가 큰 사회가 되었다. 이번 이태원 참사는 우리 사회가 이런 세대를 품어 주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기성 문화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세대를 키우면서 그 아이들이 자신들의 끼와 욕망을 풀 수 있는 장은 협소하게 제한해 두고 도리어 아이들의 문화를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우리 아이들을 바르게 키울 수 없다. 특히나 이런 사고와 아픔 뒤에 교회에서 뿌리는 소금으로는 상처를 더 크게 만들지언정 결코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게 한다. 한국 사회가 아무리 경직되었다 해도 이번 이태원 사고로 인해 안전관리에 더 신경을 쓰고 사람들이 분산해서 축제를 즐길 방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갈 텐데, 도리어 교회가 뒷걸음질 치며 핼러윈 데이는 귀신의 축제라며 비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것이라 정죄하는 것으로는 결코 다음 세대를 교회로 모으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리스본 대지진으로 촉발된 하나님의 섭리 논쟁은 여전히 그 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기만 하다. 우리나라 역시 세월호 이후 신정론 담론이 홍수처럼 넘쳐나도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기 전까지는 제2의 리스본 대지진이나 세월호는 다시금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신정론에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대형 참사나 사고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는 몰라도 그 사고로부터 고통과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돕고 위로할 힘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장 큰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듯 우리 역시 세상 속에 나가 큰 슬픔을 가진 자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해야 한다. 부디 십자가에서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이들을 위해 사랑으로 중보하신 예수님의 음성이 단상에서도 들려지기를 소망한다.
핼러윈
만성절
신정론
축제
청년문화
세대차이
청소년과 소셜미디어에 관한 최신 통계
그들을 제자로 키우려면 알아야 할
by Chris Martin
2022-09-02
청소년들은 소셜미디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가?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셜미디어는? 다양한 소셜미디어가 있겠지만,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발표한 새로운 통계에 따르면 유튜브와 틱톡이 현재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소셜미디어이다. 우리가 이 통계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오늘날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를 매개로 맺은 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이 통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우리 사회 전체의 소셜미디어 사용방식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가 활성화하던 초창기에 청소년들이 거의 모든 측면에서 그 방향을 결정했다. 새로운 앱의 성공 여부는 청소년이 그것을 얼마나 사용하느냐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오프라인에서 문화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콘텐츠들도 청소년 이용자들이 만들고 전파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자녀든, 교회 청소년이든, 아니면 우리가 돌보는 청소년이든,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의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파악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몇 가지 통계를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1. 청소년 95%가 유튜브를 사용한다. 그중 19%는 “거의 항상” 사용한다.사실 유튜브는 전통적 의미의 소셜미디어(페이스북, 인스타그램)보다는 TV 대체품처럼 보이지만 유튜브는 분명히 소셜미디어이다. 퓨 리서치의 통계에 따르면 유튜브는 전 세계에서 나이, 성별, 인종, 경제 수준과 상관없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소셜미디어이다. 거의 모든 청소년이 유튜브를 사용하고 있으며, 다섯 명에 한 명꼴로 “거의 항상” 유튜브를 사용하고 있다.청소년 다섯에 한 명이 '거의 항상" 유튜브를 보거나 이용한다. 현재 유튜브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따라서 가장 중요한 웹사이트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청소년이 유튜브를 사용하고 있으며, 퓨 리서치의 2021년의 최신 통계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81퍼센트가 유튜브를 사용하고 있다. 가히 유튜브는 소셜미디어 세계의 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튜브는 IT 기업 알파벳의 자회사인 구글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인터넷 검색엔진이기도 하다. 2. 청소년 67%가 틱톡을 사용한다. 62%는 인스타그램을, 59%는 스냅챗을 사용한다.아마도 미국 청소년의 95퍼센트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통계(2014-15년에는 73%)만큼이나 놀라운 통계는 틱톡 관련 통계일 것이다. 틱톡이 지금의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으니 틱톡의 인기 자체에 대해서는 그리 놀라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틱톡이 청소년 사이에서 점유율을 확대하며 단기간에 인스타그램과 스냅챗을 추월한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사실 6년 전에 퓨 리서치에서 같은 조사를 했을 때 틱톡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다.청소년 사이에서 인스타그램과 스냅챗의 이용률도 2014-15년 조사(각각 10%, 18%)에 비하여 큰 폭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틱톡이 이들 두 소셜미디어를 빠르게 추월하며 등장한 것은 매우 인상 깊다. 청소년들의 소셜미디어 이용 추이주: 이 조사에서 청소년은 13-17세 사이의 십대를 말한다. 물론 틱톡은 중독성 있는 알고리즘이라는 점부터 중국 정부와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틱톡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나는 원래 바인(Vine)이라는 소셜미디어를 가장 좋아했다. 그런데 2017년 1월 트위터가 바인을 폐쇄한 후에 비디오 클립 시장에서 틱톡이 바인의 빈자리를 빠르게 채워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2014-15년 조사에서 바인은 미국 청소년의 24퍼센트만 사용하던 소셜미디어인데, 현재 틱톡은 67퍼센트의 청소년이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3. 청소년 46%가 ‘거의 항상' 인터넷을 사용한다고 말한다.청소년들은 항상 온라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들이 일이나 공부 때문에 온라인에 접속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들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영상이나 사진을 즐기는 데 하루에 7시간 넘게 사용한다. 또한, 60퍼센트가 넘는 청소년이 소셜미디어에서 하루 4시간 이상을 사용하고 있다.항상 온라인에 있는 그들을 두고 데렉 톰슨(Derek Thompson)은 그의 책 히트 메이커(Hit Makers)에서 청소년들은 “항상 그 복도"에 있다고 말했다. 소셜미디어는 현대판 학교 복도나 식당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친구들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고 있다.그러다 보니 청소년들은 관심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많은 청소년이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4. 청소년 36%가 소셜미디어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고 말한다. 청소년 46퍼센트가 거의 항상 온라인에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48퍼센트의 청소년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인터넷에 접속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신이 “너무 많은” 시간을 소셜미디어에서 보낸다고 말하는 청소년은 36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이 조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이가 많은(15-17세) 청소년일수록 어린(13-14세) 청소년보다 자신이 너무 많은 시간을 소셜미디어에서 보낸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나이 많은 청소년 중에서는 42퍼센트가 너무 많은 시간을 소셜미디어에서 사용한다고 말하지만, 어린 청소년 중에서는 고작 28퍼센만 같은 말한다. 여기서 그 이유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어린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더 적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나이 많은 청소년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소셜미디어에서 보내는 것에 대하여 더 심각한 경각심을 갖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5. 단 32%의 청소년만 페이스북을 사용한다. 2014-15년에는 71%가 사용했다.이는 그리 놀라운 통계는 아니지만 주목해 볼 만한 통계이다. “무엇이든지 빨리 만들고 빨리 파괴한다”는 신념으로 온갖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황소 같았던 실리콘 밸리 괴물은 청소년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물론 페이스북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2012년에 10억 달러에 인스타그램을 인수했다(이는 2018년에 1,000억 달러 가치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2013년에는 스냅챗을 30억 달러에 인수하려고 노력했다(스냅챗은 그 제안을 거절했고, 현재 170억 달러 가치의 기업으로 성장했다).청소년들의 거의 절반이 '거의 항상' 인터넷을 사용한다고 말한다.주: 이 조사에서 청소년(십대)은 13-17세 사이의 십대를 말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왓츠앱의 지주회사인 메타는 주력 사이트인 페이스북에서 젊은 이용자들을 잃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인스타그램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틱톡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데, 때로는 그런 시도가 사용자들을 실망케 하기도 한다.제자훈련의 맞수소셜미디어는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 청소년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는 데 가장 강력한 맞수가 될 수 있다. 부모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압도적인 화려함으로 쉬지 않고 항상 청소년들을 유혹하는 소셜미디어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모와 교회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첫째,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삶의 습관부터 바꾸어야 한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연령대의 사용자들이 하루에 평균 2시간 30분을 소셜미디어에서 보내고 있다. 청소년들이 소셜미디어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퓨 리서치에 따르면 소셜미디어가 청소년의 문제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것은 청소년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돌보는 청소년을 가르치기 전에 반드시 우리 자신을 먼저 되돌아봐야 한다.둘째, 오프라인 생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당수 청소년이 소셜미디어가 자신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으며, 최소한 그들의 친구들에게 인터넷이 심각한 악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 온라인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질책하는 것보다 그들이 오프라인에서 보내는 아름다운 시간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늘 온라인에 있는 청소년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한다고 해서 그들을 강제로 오프라인으로 끌어내서는 안 된다. 더 좋은 방법은 소셜미디어 밖에 있는, 더 아름답고 좋은 오프라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눈에 보이는 실제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한다. 어쩌면 우리 가정이나 교회에 있는 청소년들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이 교회 공동체와 그 의미를 발견하게 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 어쩌면 최고의 방법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정확하게 드러내 주고,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교회의 모든 활동에 청소년을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성경 공부, 예배, 공동체 모임에 청소년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교회가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한다.인터넷 시대에 청소년을 제자 삼는 일은 마치 물총을 가지고 불난 집에 물을 뿌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를 의지하면서 그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원제: 5 New Stats You Should Know About Teens and Social Medi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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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 속의 교회: 우크라이나 전시 사역 6개월
by Jamie Dean
2022-08-24
세르게이 나쿨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키이우의 붐비는 기차역에서 펼쳐졌다. 나쿨 목사는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교인 몇 명을 공격을 받고 있는 나라 밖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있었다.몇 주 전 나쿨 목사의 아내는 남편과 사랑하는 교회에 남겠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고 키이우를 탈환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기에 나쿨이 부드럽게 타이르자 잠시 떠나 있기로 했다. “여보,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됐어요.” 그는 붐비는 플랫폼에 서서 아내의 손을 잡은 채 아내와 아들들, 교인들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이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이자 목사로서 가장 끔찍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말한다. 떠나보낸 그들이 접경 국가에 안전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나중에 왔을 때 나쿨은 안도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 그는 두려움 없이 섬길 수 있게 되었다.우크라이나 정부 조치에 따라 45세의 나쿨 목사도 18-60세의 여느 남자들처럼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나쿨은 이런 전시 계엄령과 상관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저는 목사입니다. 대답은 이겁니다.” 키이우 그의 집에 있는 그는 전화상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양 떼를 절대로 떠나지 않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목자인 제가 어떻게 교인들 곁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나쿨은 곧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날을 바라며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교회를 섬기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서 섬기는 것은 반년을 넘긴 이 예기치 않은 전쟁에서 나쿨 같은 사역자들이 적응하게 된 기독교 사역의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폭격, 1,200만 명의 난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사역자들에게 변하지 않는 복음의 소망을 품고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도록 했다. 나쿨은 복음에 굳게 닻을 내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는 주님의 놀라운 신실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값진 경험입니다.”뜻밖의 메신저주님의 신실하심은 나쿨이 예수님을 알기 오래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소련 치하의 우크라이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그는 성경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경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는 도서관에서 무신론 서적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책에는 성경을 논박하려고 인용한 성경 구절들이 꽤 많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의 조작들”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돌이켜보면, 설명할 수 없는 그의 관심은 “[그의] 삶 가운데 있던 순수한 은혜”였다.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후 소련의 붕괴는 구소련 국가들은 경제 위기에 빠졌다. 시대는 암울하고 절망적일 때가 많았다. 그러던 1994년 어느 날 오후 나쿨은 거리에서 두 명의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들은 그에게 간단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으세요?”복음주의 교회를 다녔던 그 두 사람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나쿨에게 신약성경도 한 권 주었다. “그 시절에 무료로 신약성경을 얻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상이 안 되실 겁니다.” 나쿨이 말한다.그 성경을 읽으면서 그가 발견한 메시지는 “신선한 공기와 같았다.” “빛과 같았습니다.” 그가 회상한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 열린 것 같았습니다.” 몇 달 후에 나쿨은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믿음을 받아들였고 그의 삶을 사역자로 헌신하기로 했다.전시 사역나쿨의 사역에는 키이우 은혜개혁교회 담임목사 사역 9년이 포함되어 있다.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나쿨은 교회 지하실을 폭격 대피소로 바꾸었다. 이 교회는 이곳에서 예배 참석자 수가 한때는 4명까지 줄었지만 계속 예배를 드리고 있다.피난을 떠나는 교인도 있고 또 군 복무하러 떠나는 교인도 있기에 교인 수에 기복이 심하지만, 이제 나쿨 목사는 이런 상황에 적응됐다. 나쿨 목사는 군사 훈련에 지원했지만, 군 당국이 그를 돌려보내면서 교인들을 섬기게 했다. 최근 인근 침례교회 담임목사 친구는 군 복무를 하게 됐다. 세르제이 나쿨 목사가 키이우의 폐허를 가리키고 있다. Image courtesy of FEBC.한편, 나쿨은 국제 기독교 라디오 네트워크인 극동방송(FEBC)의 선임 방송인으로서 이번 전쟁의 참상을 알렸다. 러시아 침공 초기에 그는 인근의 파괴된 건물을 영상에 담고 남아 있는 키예프 주민들이 겪고 있는 참혹한 상황을 보도했다.극동방송의 다른 방송인들도 온라인 기도회를 열고 청취자들을 이 방송 사역이 진행하고 있는 상담 센터로 안내하여 영적 도움을 받도록 했다. 6월 기도 모임에 한 청취자가 옆집 건물이 로켓에 맞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청취자는 이렇게 적었다. 방송 진행자는 겁에 질린 청취자를 위해 기도했고 몇 분 후에 응답을 받았다. “당신의 기도 덕분에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의 기도가 저의 마음에 평화를 주고 있습니다.”전쟁의 상흔을 어루만지는 사역우크라이나의 일부 지역은 유난히 치안이 불안한 상태이고, 전쟁이 할퀸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이러한 긴장은 영적인 돌봄을 요구하고 있다. 나쿨을 비롯한 목회자들은 육체적인 필요만큼이나 영적인 돌봄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페디아 미나코우는 이런 돌봄 사역은 신학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우크라이나 복음주의 개혁 신학교의 히브리어 및 구약학 교수인 그는 2월에 폭격이 시작되었을 때 키이우에 있는 자신의 집을 탈출했고, 서쪽 국경 근처에 정착했다. (그는 네덜란드로 피신해 있던 가족과 이후 재회했다.)그 신학교는 우크라이나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학생들을 위해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면서 전시 상황에 적응했다. 이미 정원이 거의 찬 새로운 과정—군목 과정—이 포함될 가을 학기를 준비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갑자기 전쟁에 소집된 나라이니 이해가 가긴 하지만, 군목 훈련이 군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미나코우는 말한다. 수개월 간 계속되는 폭격, 사망, 파괴, 가족 이산 및 피난으로 인해 PTSD 같은 문제로 고통받는 주민들과 성도들을 돕는 방법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훈련을 목회자들이 요청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에서는 목회자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절실한 도움이 됩니다.” 그는 말한다.목회자들에게는 또한 비상한 상황들 가운데서도 일상의 교회 개척 사역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미나코우는 우크라이나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는 목사들과 신학생들이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잘 반응하고 있는 지역에서 올바른 설교를 하는 더 많은 교회의 필요성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생명에 위협받고 있기에, 큰 질문을 던집니다.” 지역 사회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필요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성경과 그리스도가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추수할 밭이 된 전시세르게이 라쿠바는 고향 우크라이나를 포함하여 유럽 전역의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하고 동원하는 복음주의 사역인 미션 유라시아(Mission Eurasia)의 대표로서 목격한 지역 교회 반응 사역에서 용기를 얻는다.이 사역은 인도주의 단체는 아니지만 지난 6개월 동안 많은 구호 사역을 폈다. 지역 교회들과 협력하면서 이 단체는 수천 명의 어린이를 위한 난민 센터들과 데이 캠프들을 지원한다. 우크라이나 내에서도 이 단체는 러시아가 점령했다가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탈환한 지역의 주민들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을 가장 먼저 보냈다.세르게이 라쿠바 미션유라시아 대표가 피해를 입은 본부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Image courtesy of Mission Eurasia.라쿠바는 사역팀이 2, 3개월 동안 러시아가 장악했다가 우크라이나군이 탈환한 지역에 있는 , 약 5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한 마을에 최근에 닿았다고 말했다. 그 팀은 주민들이 굶주림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러시아 군인들이 이 작은 마을에 있는 소를 전부 도살했다고 보고했다. 그 팀은 주민들에게 음식과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이 사역은 다른 지역에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라쿠바는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하면서 최전선에서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는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교회들이 파괴의 잿더미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한다.미래에 대한 희망다시 키이우. 세르게이 나쿨 목사는 계속해서 적응하고 있으며, 극동방송 라디오 네트워크에서뿐만 아니라 키이우에 있는 그의 회중과 함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계속 목격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 곧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지만, 최근에 피난 후 처음으로 아내가 찾아와서 힘을 얻었다고 말한다. “신혼여행 같았습니다.” 그가 말한다. “완전하게 새 기운을 얻은 6일이었습니다.”이 목사 부부가 다시 결합할 때까지는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새 힘을 얻을 것이라고 나쿨 목사는 말한다. “저는 사람들에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보증은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소중한 약속을 신뢰하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나쿨은 전쟁이 처음 시작됐을 때 자신이 강조한 메시지가 그가 지금도 여전히 선포하고 있는 메시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관련 기사•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기착지가 되어 주는 교회들•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남아서 섬길 것이다•우크라이나 선교사들에게도 밀려든 불안한 위협•우크라이나 난민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폴란드 교회원제: Church in the Trenches: 6 Months of Wartime Ministry in Ukrai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우크라이나
전쟁
전시사역
거대한 우주 너머에, 그리고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by Chris Martin
2022-07-25
과학 교육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초등학교에 나를 입학시킨 부모님 덕분에 나는 천문학과 밤하늘의 신비에 푹 빠져들었다. 우리 학교에는 초급 천문대도 있었고, 나는 그 시절 여느 아이들처럼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저런 게 정말 저 하늘에 다 있을까?”그리고 스타워즈,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그리고 특히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서 천문학을 가르치셨던 제임스 루소 선생님이 내 가슴에 호기심의 불을 붙였다. 별들을 너무나 좋아하셨던, 그리고 그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셨던 루소 선생님은 우주에 대한 내 열정이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에게 닿을 수 있게 해주셨다. 그래서 나사(NASA)가 지난 크리스마스에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을 발사했을 때, 나는 이 망원경이 몇 달 뒤에 보내올 것들을 기대하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난 천문학자가 아니다. 밤하늘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다. 창피하게도 망원경도 없다. 하지만 최근에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보내온 이미지들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장엄함에 놀라 숨을 헐떡이는 데는 굳이 천문학자가 될 필요도 없고 망원경을 장만할 필요도 없다. SMACS 0723 이미지를 찬찬히 보자. 나사가 “지금까지 먼 우주에서 가장 깊고 선명한 적외선 이미지”라고 부르는 그 이미지 말이다. 며칠 전에 제임스웹의 첫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중요하다.그 이미지들을 보면서 우리 우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상상하면, 오늘 직장에서 있었던 힘든 일도, 곧 있을 휴가도, 나의 멋진 가족도 특별히 중요할 게 없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곧바로 광대한 우주의 티클 만한 이 행성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음미하고 볼 수 있다는—그리고 그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다는—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가?우주의 거대함을 파악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나사는 SMACS 0723 이미지가 “팔을 쭉 뻗은 공간 안에 있는 모래 알갱이 한 알만 한 크기”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모래 알갱이 하나를 찾아서 밤하늘에 올려놓고, 그 안에 우리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수천수만의 은하들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는 더 많은 은하가 분명히 존재한다. 가장 깊은 우주의 먼 과거를 바라보면서 나는 궁금해졌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실까?”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주 저편의 은하에 있는 먼 행성에 계시면서 그의 나라가 지구에 임할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깊은 우주와 우리가 우주-시간을 통해 되돌아보는 먼 과거를 초월하여 계신다. 그러나 내가 SMACS 0723 이미지에 처음 시선을 고정했을 때, 고백하건대 나의 경이로움은 의심과 섞여 있었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실까?그렇다. 말씀으로 수조 개의 별들을 존재하게 하신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가장 먼 은하계들을 넘어서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또한 그 은하계들을 둘러싸고 계시며, 그리고 그 은하계들을 통하여 실제로 존재하신다. 우주의 거대함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하나님이 그보다 더 크고 그 너머에 계신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훨씬 더 어렵다. 그렇다.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믿기 어렵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수 있다!우주의 가장 깊은 범위에 있는 수천 개의 은하를 담고 있는 SMACS 0723 이미지는 많은 사람이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을 통해 본 최초의 이미지이다.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이 정말로 그런 이미지를 넘어서실까 생각했다. 그러나 카리나성운 이미지(아래)를 보았을 때, 나는 깨달음의 답을 얻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모든 것 배후에 계실 수 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의 배후에 계시고, 이 모든 것을 품으시고, 또 이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실 뿐만 아니라(시 121; 사 40:28), 이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다(렘 32:17).오직 하나님만이 이러한 아름다움을 빚어내실 수 있다! 오직 한없이 강하신 하나님만이 이토록 헤아릴 수 없이 크고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으셨다.어떤 이미지가 130억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우주의 먼 과거를 보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상당히 긴장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것이다. 우주의 나이를 둘러싼 논쟁들이나 창조론과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들은 교회 안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카리나성운이 존재하고 하나님께서 이 성운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경외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음식이 꼭 맛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꽃이 꼭 향기로워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몇 광년 높이의 우주 절벽이 있는 카리나성운이 꼭 아름답고 신비로워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 우리는 카리나성운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보는 것만 같다(시 33:6). 하나님께서 별을 탄생시키는 초거대 광경을 만드시면서 아름다움까지 더하셨다. 지금까지는 어떤 인간도 이것을 보지 못했다. 우주의 어느 구석에는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다른 비길 데 없는 경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감지하지 못한, 당신의 지극한 즐거움을 위해 또 어떤 영광을 손수 빚어두시지 않았을까? 그분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폭발적인 창조성은 끝이 없으니 우리는 결코 그 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지구라고 불리는 우주 암석의 조각에 있는 한은 말이다. 영원의 이쪽에 있는 한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신다하나님은 당신의 이름과 내 이름을 아신다. 그리고 그는 지금 카리나성운에서 태어나고 있는 별들의 이름을 아신다(시 139:13-14; 시 147:4).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무엇을 보여주건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은 또한 당신 안에 계시고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우리처럼 사시고 죽으신, 그리하여 그를 통하여 우리가 영원히 그와 함께할 수 있게 하신, 작고 연약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아마도 당신도 나처럼 이 놀라운 이미지들을 보고서는 궁금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은 정말 이렇게 크신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나만 이렇게 크다. 그리고 너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엡 3:20)그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시다(골 1:16). 당신을, 나를, 그리고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은하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온 피조물이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소리높여 외친다(롬 1:20). 그 합창에 참여하자(시 95:6; 계 5:13). 원제: God Is Beyond and Behind the Enormous Univers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우주
하나님의속성
천문학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를 파헤치다
by Josh Howerton
2022-07-23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관련 기사· 승리의 팡파르가 아니라 긍휼을: 낙태 판결 이후 교회가 해야 할 일·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 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미국의 낙태권 찬성론자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를 두고 그리스도인들은 태아 생명에 대한 정의 실현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며 기뻐하지만, 기독교 바깥에 있는 상당수의 우리 이웃은 이를 실존의 위협으로 느끼고 있다. 이들은 대법원의 결정이 위선적이고 심각한 국가적 비극이라고 비난하며 종교 단체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이들은 왜 이토록 불안해하는 것일까? 우리의 친구와 가족과 동료들이 한탄하는 이 결정을 신앙을 가진 우리가 환영하는 이유를,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바로 알릴 수 있을까?사랑의 마음으로, 사실에 기초하여 이웃의 잘못된 통념에 접근해 보자. 다음은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 곧 잘못된 통념과 그에 관한 우리의 대답을 그 근거와 함께 제시한 것이다.신화 #1: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태아만 존중할 뿐이다.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옹호한다는 주장에 반감을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태아만 옹호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태아만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나 상처받고 소외된 생명 모두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는가? 다음의 수치는 “물론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미국의 도시 도처에 있는 위기 임신 센터 대부분을 그리스도인이 시작했다. 이 밖에도 그리스도인의 입양률은 미국 전체 평균의 두 배를 웃돈다.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비율도 일반 시민보다 그리스도인이 훨씬 높다.입양 비율 미국 전체 가구 2%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5%출처: Barna Research, 2013 report기부지난 일주일 동안 가난한 이웃에게 돈, 시간, 물품을 기부한 적이 있다.주일마다 교회 가고, 매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65%그 외 1%출처: Pew Research Center, 2014 data신화 #2: 낙태를 반대하는 쪽은 남성이다.과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한 것일까? 자궁이 없는 남성이 어떻게 여성을 대신해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게 할 수 있겠는가? 다음의 수치를 보자.아래의 그래프는 여성이 남성보다 낙태 반대론자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한 예로 2014년 가디언 기사의 제목은 이렇다. “여성은 왜 낙태에 더 부정적인가?”) 신화 #3: 나의 몸, 나의 선택 “나의 몸, 나의 선택”은 낙태권 찬성 운동의 슬로건이다. 이 구호는 픽사 영화에도 등장한 바 있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태아는 여성의 발톱과 유사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려고 한다. 솔직히 이러한 관점은 과학이 태아 발달과 정체성에 관해 말하는 내용과 반대된다.뱃속의 태아도 그만의 고유한 DNA, 지문, 심장 박동, 사고, 감정, 고통과 쾌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태아는 다른 사람의 몸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만의 뚜렷한 몸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과학은 확증한다.신화 #4: 대부분 합당한 이유로 낙태를 한다.선의를 가진 낙태 찬성론자들은 미국 낙태 대다수의 사유를 강간, 근친상간, 빈곤,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 등과 같은 끔찍한 상황에 돌린다. 그러나 다음의 낙태 통계 분석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유일하게 모든 낙태 사유를 상세하게 기술하는 플로리다주의 낙태 사유 통계를 보면, 2020년도 낙태의 75퍼센트 가까이가 특별한 이유가 없이 이루어졌다. 하나의 주에 국한된 결과이긴 하지만, 미국 전체 실정을 예증한다고 할 수 있다.플로리다는 해마다 주에서 일어나는 낙태의 사유를 모두 기록한다. 지난 2020년 플로리다에서는 총 7만 4,868건의 낙태 시술이 행해졌는데, 아래의 표는 각각의 이유와 그 비율이다.백분율 이유 0.01%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0.15% 강간에 의한 임신 0.20% 여성의 생명에 위협 0.98% 태아에 심각한 기형 1.48% 여성의 신체적 건강에 위협 1.88% 여성의 정신적 건강에 위협 20.4% 사회경제적 이유 74.9% 이유 없음(여성의 선택)신화 #5: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폐기는 수많은 여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미국의 낙태 찬성론자들이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시대(post-Roe world)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로 임신하게 된 여성들이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많은 사람이 자궁외임신, 패혈성 자궁염, 유산을 경험한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보살핌을 받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다.현실은 이렇다. 낙태를 강하게 규제하는 주에서도 산모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절차를 반드시 따르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돕스 판결 이후 이러한 것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낙태 반대론자도 낙태 찬성론자만큼이나 산모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신화 #6: 낙태 반대 정서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들어 있다.일부에서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폐기는 백인 우월주의라는 더 큰 질병의 징후라고 주장한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소수 집단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특권이 있는 위치에서 백인 중산층과 상류층이 자기네 의견을 훨씬 더 수월하게 내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종이나 사회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낙태 반대론자들은 존재한다. 슬픈 사실은 1976년 이후 다른 어떤 인구 집단보다 소수민족의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낙태 찬성 운동은 인종차별주의와 연관성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낙태 합법화 운동을 주도하는 Planned Parenthood의 설립자인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 1879-1966)는 소름 끼치는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유색인종을 차별했다. 신화 #7: 대부분의 미국인이 낙태권을 지지한다. 대법원은 6대 3으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지만, 만약 이것을 일반 투표에 부쳤더라면 명백한 다수의 동의를 얻었을까? 미국은 일반적으로 낙태권 찬성이 다수 의견이라고 간주한다. 그렇다면 ‘돕스 판결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체제를 뒤엎은 것이라는 말인가?간단히 대답하자면, 아니다. 미국인의 약 71퍼센트는 여성의 선택권을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아래의 그래프는 낙태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의 수치의 격차가 실제로는 상당히 근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낙태는 예외 없이 항상 합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역시 극소수의 사람들이 낙태는 예외 없이 항상 불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중간 그 어디쯤 자리하고 있다. 이 둘이 합의에 이르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대부분이 여성의 선택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한에는 동의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임신 후기 단계에서는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증가한다. 임신 24주 이후의 낙태에 대서는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법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거의 두 배나 많다. 미국 성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임신 6주가 되면 심장 박동이 감지된다고 합니다. 이 시점에 낙태는 법적으로...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6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25%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6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19%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6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12%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임신 초기가 끝나는 무렵인 임신 14주가 되었을 시점에 낙태는 법적으로...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14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15%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14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22%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14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19%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임신 24주가 되면 건강한 태아는 엄마의 몸 밖에서도 의학적 도움을 받아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시점에 낙태에 대해서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24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3%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24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18%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24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34%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신화 #8: 낙태 금지가 낙태율을 줄이지 못한다.낙태 금지법은 효과가 있는가?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 방법 부재로 혹 임신을 중지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렇듯 낙태 금지법이 곧 낙태 감소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실용적이다. 그러나 낙태 반대론자의 입장은 실용성이 아닌 도덕성과 관계가 있다. 노예 해방 선언이 모든 주에 적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고 할 수 있는가? 노예제가 도덕적 악인 것처럼 낙태는 도덕적 악이다. 도덕적 악을 억제하고자 하는 모든 법률은 환영받아야 한다.더욱이 주 차원의 낙태 금지령과 함께 낙태율이 급감했다는 증거 자료도 있다.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오늘날과 같은 정치적 극단의 시대에 정직한 질문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이러한 논쟁에 관련된 영적 전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여 잘못된 가정과 주장에 맞서는 것은 이웃 사랑 실천에 꼭 필요한 일이다.우리는 은혜와 진리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가운데 이웃의 진리가 되어 버린 신화를 바로잡기 위해 겸손히 헌신해야 할 것이다. 우리 이웃의 양심을 위해서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의 삶을 위해서 말이다.원제: Debunk 8 Abortion Myth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by Anna Lynne Frazier
2022-07-16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관련 기사· 승리의 팡파르가 아니라 긍휼을: 낙태 판결 이후 교회가 해야 할 일·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를 파헤치다낙태할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경우라면 낙태라는 선택권이 있으면 좋겠다는 게 한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낙태에 대한 내 생각은 즉시 바뀌었다. 우리를 잘 아시고(시 139:13-18),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신(창 1:27)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이상, 나는 낙태를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낙태를 찬성하는 쪽이었다. 낙태에 관한 내 개인적인 견해는 바뀌었지만 다른 여자에게까지 내 견해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 자신의 선택을 한 것이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선택을 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영어 교수가 프레데릭 더글라스의 회고록 미국 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 삶에 관한 이야기를 과제로 내주었다. 그 책에서 더글라스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절망을 준 이들은 다름 아니라 개인적으로 노예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남부 지역 노예제도에 저항하지는 않는, 남과 북의 접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들 중에는 법을 따른다는 핑계로 탈출한 노예를 노예주에게 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추론은 이것이다: 나야 노예도 사람이라고 믿지만 내 이웃은 노예가 자기 소유물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나야 결코 노예를 소유할 일 없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내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 말이 나를 때렸다. 노예 주인의 법적 권리를 중시한다는 핑계를 대는 노예제도 폐지론자와 내가 하나 다를 바 없었다.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낙태 찬성론자에서 낙태 반대론자로 바뀌었다. 낙태는 반(反)여성적이다나는 낙태 합법 판결을 뒤집은 이번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똑똑하고 사려 깊은 많은 여성이 애도하는 이유가 그 결정을 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이 여자이기에 낙태가 여자에게 좋다는 생각은 매우 불쾌하다. 합법화된 낙태가 여자에게 해로운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1. 낙태 지지자는 여자에게 가장 좋은 건 남자처럼 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우리 사회는 사실상 남자에 의해 형성된다. 대부분의 사회 기관을 설립한 게 남자이기에 모든 관점은 다 남자 중심이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일어난 모든 여성 권리 투쟁은 여자에게도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달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관점은 법적 보호, 권한 부여, 노동력 접근과 관련해서는 아주 유용한 기준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남성이 가진 것을 얻으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면 남자 중심으로 구조화된 사회를 더 영속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달리 말해서 여성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이 이바지하는 여성의 가치를 경시함으로써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여성의 능력을 약화한다. 여자인 우리가 오로지 남자의 관점에 근거해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사랑스러운지를 정의할 때, 우리는 결국 본질적으로 여성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평가절하하게 된다.여자도 성공하려면 남자와 같아야 한다고 믿는 세상에서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에 대처하는 최선의 선택은 중단이다. 그러니까 낙태도 얼마든지 좋은 방법으로 보일 수 있다. 계획에도 없는 아빠가 되지 않으려는 남자는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데, 왜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지? 게다가 출산을 사회적, 직업적, 경제적 희생을 감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세상에서, 낙태는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나는 이런 수준의 사회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와 똑같이 가치를 인정받고 성공하고 또 행복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태어나기도 전에 죽여도 된다는 세상, 설사 낳았다고 해도 경쟁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버려도 된다는 세상의 의견에 나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또한 여자가 출산과 모성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 남자처럼 되려면 극복해야 할 책임과 부담으로 보는 생각에도 도무지 찬성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세상이 싫다. 그런 세상을 보면서 통곡한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싸우고 싶다. 2. 낙태 찬성은 여성을 아기와 싸우게 만든다. 낙태 찬성자가 흔히 하는 주장의 하나가 낙태 반대자는 산모가 아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 지지자”라는 말이다. 누군가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엄마 편을 들지 아기 편을 들지 선택하라고 낙태 찬성자들은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임산부에게 너 자신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삶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겨줄 뿐 아니라 잘못된 이분법이기도 하다. 엄마 대 아기라는 대결 구도는 엄마와 아기라는 기적적 관계를 부자연스럽게 뒤틀어 버린 비극적인 결과물이다. 적대적 관계와는 거리가 먼 엄마와 아기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유대 관계를 보여준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최대 9개월 동안 이 두 존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그 후에 두 사람 다 각각 개인으로서 성장하고 투쟁하고 또 성공하기 위한 일생을 갖게 된다. 임신은 결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매우 드물고 슬픈 상황을 제외하고는 결코 이 삶과 저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그런 게 아니다. 엄마와 아기에게는 둘 다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애초에 엄마의 자궁 밖에서 살 기회조차 주지 않고 아기를 죽인다면,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3. 낙태 지지는 여성의 죽음을 허용하는 것이다.아기의 대략 절반이 여자이다. 이것은 낙태로 인해 파괴된 아기 중 적어도 절반이 여자로 성장할 어린 소녀라는 것을 의미한다. 매년 수백만의 소녀를 살해하면서, 어떻게 여성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남녀 차별을 고려할 때, 선택적 낙태로 인한 소녀의 죽음은 전 세계적으로 따진다면 50퍼센트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다.출생 시 성별 비율(SRB, 여성 100명당 남성 출생 수)을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초음파 같은) 산전 진단 도구와 합법화된 의료 낙태가 더욱 널리 보급된 1970년대 이후 불균형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일반적인 SRB는 여성 100명당 남성 105명 정도이다. SRB가 가장 높은 국가는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국가이며, 그중 많은 국가에서는 아들에 대한 문화적 선호도가 높다. 이런 지역에서는 여자 100명당 남자 121명이고, 일부 지역은 무려 130명 이상에 이른다. 문제 지역(특히 중국과 인도)의 많은 인구를 감안할 때, 이러한 불균형이 드러내는 사실은 선택적 낙태로 인해 사망하는 여성의 숫자가 매년 무려 수백만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메시지 전투우리는 지금 다른 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내 아기라도 죽이는 게 지금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탈출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하기를 거부한다. “낙태는 필수지요. 낙태 없이 여자가 어떻게 제대로 경쟁하겠어요?”낙태 합법을 금지한 대법원의 판단은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자궁에서 아이의 생명을 끝내는 것이 여자를 돕는 선택이라는 거짓말을 거부하는 데 이 결정이 이바지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현재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낙태가 불법이지만 여전히 많은 주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합법이다. 법정 투쟁은 계속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또한 낙태를 둘러싼 메시지 싸움에도 전념해야 한다. 여자와 아기에게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더욱 진실하고 더욱 영구적인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남자와 하나 다를 것 없는 같은 사람으로서 제공하는 가치가 아니라 오로지 여자만이 고유하게 제공하는 가치를 인정하고, 기뻐하고, 또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여자는 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써나가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권한 부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재고해야 한다. 설혹 여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경우를 만나더라도 자신의 삶이 계속되려면 반드시 아기를 죽여야만 한다는 사악한 방정식이 결코 발을 붙일 수 없는 사회를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 아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임신을 놓고 낙태라는 타협으로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여성으로서의 부르심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기꺼이 생명을 끌어안는 선택을 우리 여자는 하게 될 것이다. 원제: Why Overturning Roe Is Good for Wome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낙태
생명의존엄
하나님의은혜
낙태찬성
낙태반대
프로라이프
프로초이스
생명존중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
by Winfree Brisley
2022-07-15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는 연방대법원에서 낙태권을 제안하는 새로운 판례가 나온 당일에 발표된 글입니다. 관련 기사· 승리의 팡파르가 아니라 긍휼을: 낙태 판결 이후 교회가 해야 할 일· 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를 파헤치다‘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 뒤집혔다. 우리는 이날이 오기를 수십 년 동안 기다려왔다. 굉장히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 기념비적 사건의 의미를 한꺼번에 다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번에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판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번 판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이 질문들을 고민하면서 나는 시편 126편을 떠올렸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해방될 때의 기쁨을 노래한 축제의 시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1절). 이 시는 오늘 우리가 기뻐해야 할 또 다른 구원을 찬송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더 나은 이야기를 하자!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고백한다(1절). 우리도 때로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비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기를 꿈꿔왔었고 드디어 이 판결이 뒤집혔는데, 이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 꿈같은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지금 우리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의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다”(시 126:2). 지금은 정말 기뻐하며 축하해야 할 시간이다. 그동안 우리가 부르짖은 기도와 이를 위하여 수고한 시간과 정치인들에게 보냈던 수많은 편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서 수고한 형제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 이 모든 것을 멈추고 오늘 일어난 이 일을 기뻐하며 축하하자!그렇게 함께 기뻐하면서 축하할 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이해하고자 때 우리는 그 사건과 관련 있는 사실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려 한다. 어떤 이들은 9명의 대법관이 어떻게 투표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힘을 잃고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목소리를 얻게 되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정치적인 전략과 복음주의권의 전략적인 투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를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목표가 성취되었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진실이 있는데, 그것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이야기의 핵심시편 126편의 시인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이야기를 이렇게 노래한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그리고 수많은 열방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보면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고 선포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정말 기적과 같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셨다. 또한 하나님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보다 더 위대한 일을 올 한 해 동안 행하실 수도 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아직도 주님께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실 수도 있다. 아마도 그리고 간절히 소망하기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이 영적인 각성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하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서 정말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그런데 시인은 열방의 찬양을 기록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우리를 핵심에서 멀어지게 할지도 모른다. 시인은 구원의 구체적이고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누가 이 구원을 베푸셨는지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반복하여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고 우리의 노력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이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다.그렇다고 구체적인 사안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당연히 감사하면서도 그분께서 이번에 사용하신 다양한 방법들을 자세히 살펴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방대법원이 이번 판결을 어떻게 내렸는지 분석해야 한다. 우리가 이번에 얻은 것이 무엇이고, 앞으로의 낙태 반대 운동(pro-life movement)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번의 판결을 통하여 우리가 얻은 것과 얻지 못한 것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방법을 자세히 검토해 보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이야기에서 찬양으로그러나 9명의 연방대법관이 어떻게 투표했는지 이야기하면서 우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잠 21:1)힘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힘을 얻게 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자!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시 103:6).정치적인 전략과 투표 전략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악을 물리친 선의 승리를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자.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시 129:4).우리의 목표가 이루어졌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이야기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4-5).‘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혔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통하여 일하시고 우리의 수고에 열매를 베푸셨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시편의 시인과 함께 이렇게 선포할 수 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내일이 되면 또 다른 일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선포하며 함께 기뻐하자.원제: Remember Who Overturned Ro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낙태권
낙태반대운동
프로라이프
승리의 팡파르가 아니라 긍휼을
낙태 판결 이후 교회가 해야 할 일
by James Forsyth
2022-07-09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관련 기사·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 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를 파헤치다 “나 임신했어.” 여자 친구의 말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우리는 화창한 봄날 공원 잔디밭에 앉았지만 내 감정은 주변 분위기와 어울리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만, 내 마음과 생각은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말이 안 돼, 분명 뭔가 착오가 있을 거야.몇 초 지나지 않아 충격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십대로서 우리가 나중에 겪게 될 일이 무엇일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인생이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정도는 즉시 알았다. 빠르게 돌아가는 생각과 더불어 우리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진짜 확실한 거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두려운 질문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둘 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부모가 된다는 건가? 우리는 둘 다 아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낳냐고?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를 처리할 수준의 성숙함이 없었고, 애를 낳고 키울 돈도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실행한 첫 번째 단계는 의사와 약속을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충격과 공포와 절망을 확인했다. 의사가 말했다. “애를 지우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이 글을 쓰는 지금 내가 당시에도 지금처럼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깊은 확신을 재확인하고 따라서 의사의 제안을 즉시 거부하고 과감하게 다른 길을 개척했다고, 자신 있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희망이 없는 십대에게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낙태는 마치 해결책처럼 느껴진다. 판결 이후, 다음은?연방대법원이 낙태에 대해 헌법적 권리가 없다고 6대 3으로 판결했다. 낙태 허용 여부는 이제 각 주가 알아서 결정하게 되었다. 대략 절반의 주가 해당 주 내에서 낙태 시술을 아예 금지하거나 아니면 낙태 횟수를 크게 제한할 것으로 예상된다.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판결을 환영해야 한다. 낙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정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에 부여하신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가치와 존엄성과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 판결을 환영하는 만큼 또한 이 판결에 우리가 이제 어떻게 대응할지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은 교회가 문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자축하고 좋아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향해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는 순간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1. 긍휼의 마음으로 무장을 해제하라. 낙태가 더욱 제한됨에 따라, 때로는 파트너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성이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충격과 공포와 절망을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제 희망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유일한 선택지가 사라졌다. 분명히 하자. 이 여성들은 그리스도인의 적이 아니다. 적이었던 적도 없다.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해야 한다. 정치적 문화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팡파르가 판단하기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쭐한 기분을 심어줄지도 모르겠지만 위기에 빠진 여성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더 나쁜 것은, 이런 자축 소리가 상처받은 여성들에게는 교회란 도움을 청할 데가 못 된다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지금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을 닮아야 할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과 똑같은 긍휼의 마음을 위기에 처한 여성들에게 보여주자. 2. 행동에 나서라.미국과 전 세계에서 수백만의 그리스도인이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미혼모를 지원하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영웅적으로 일하고 있다. 복음주의자의 특징이란 다른 게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음해가 만연해 있지만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수도 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이, 취약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소외당한 사람들이, 고향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이 교회가 잘한다고 등을 두드려줄 때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더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지역 임신 여성 지원 센터에 연락하라.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기부 금액을 늘리고 자원봉사에 나서라. 위탁 및 입양 기관에 연락해서 입양이나 양육을 고려하라. 이미 그런 사역을 하는 교회 가족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할 방법을 문의하라. 낙태 반대 사역을 생명이 달려 있는 일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지원하라. 믿음의 군병들이 이미 현장에서 싸우고 있다. 이제 우리도 각자가 행동해 나서야 할 때이다. 3. 협력하라.당신의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상처를 치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야말로 예배당을 정리해야 할 때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즉각적인 관심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자선 사역을 위한 구조를 마련하라. 집세를 지원하고 식료품과 기저귀를 구입하고 미혼모를 도울 수 있는 행사를 열라. 외로운 사람이 아무도 생기지 않도록 우애를 쌓으라. 돕고 싶은 마음을 널리 알리라. 광고하라.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교회가 와야 할 곳이라는 걸 지역 사회가 알도록 힘을 쏟으라.교회가 교회다움을 보여줄 때낙태와 관련한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던 어느 교회 공동체 때문에 오래전 우리는 낙태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이 내 딸의 생명을 구했다. 그들은 두려운 십대가 행복한 부모가 되도록 도왔다. 내 딸을 처음 안았을 때, 그리고 그 아기가 내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나는 생명의 무게를 느꼈다. 비록 2.7킬로그램에 불과했지만, 내 딸의 삶은 지금도 내게는 여전히 지속되는 영광스러움이다. 시간이 흘러 내 어린 딸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간호사로 성장했다. 낙태하라는 의사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지금도 당시 두려움에 빠졌던 내 마음이 낙태라는 제안에 얼마나 솔깃했었는지를 부끄럽게 기억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족과 목사님, 그리고 지지하는 교인들을 통해 더 나은 길을 보여주신 것에 감사할 뿐이다. 사랑은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 그의 영원히 아름다운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왔다. 내 기도는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사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건 바로 고통받는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긍휼을 보여주는 것이다.원제: After Roe, Choose Compassion over Culture Wa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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