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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예수님: 팀 켈러 추모 예식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08-17
캐시 켈러는 팀 켈러를 추모하기 위해 오늘 모인 2,000여 하객들에게 “오늘 예배가 보통 하는 그런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추모식에는 고인을 기리는 물건도, 또 켈러의 사진과 비디오도 없었다. 캐시가 말을 이었다. “이건 팀이 원한 방식입니다. 그는 다른 성도들도 이런 식으로 장례식을 하길 좋아했어요. 예, 장례식은 죽은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예, 맞아요.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진짜 이야기해야 하는 주제는 고인이 지금 만나고 있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그것이 바로 켈러 추모 예배에서 일어난 일이다. 뉴욕 시에 있는 리디머 장로교회의 설립자이자 The Gospel Coalition의 공동 설립자인 팀 켈러가 췌장암으로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일흔두 살의 나이였다. “팀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캐시는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교회의 하나인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열린 90분 예배 중간 정도에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추모 예배 참석은 배우 Max McLean, 여배우 Patricia Heaton,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David Brooks, 래퍼 Lecrae, 최근에 회심한 역사학자 Molly Worthen, 그리고 The Gospel Coalition 공동 설립자 돈 카슨을 포함한 초대 손님으로 한정되었다. 전 세계에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Redeemer City to City에서 방송하는 생중계로 동참했다.“팀은 St. Michael 묘지에 묻혔습니다. … 하지만 그곳은 워낙 커서 아무리 찾으려고 돌아다녀도 못 찾을 거예요.” 캐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니까 무덤에 가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끝부분을 보면, 누군가가 죽은 사람 기념비 앞에서 고인과 마음속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죽은 사람하고 대화한다고? 그 사람이 거기에 없어요. 그래서 그런 장면을 볼 때면 우리 부부는 항상 불편했습니다.”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신 팀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치유받고, 사랑받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고, 더 행복합니다. 비석과 관련해서, 나는 다양한 성경 구절을 고려했다고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어요. …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알려드릴게요.”그녀가 이사야 25:6-9을 읽고 말했다. “이건 비석에 새겨놓을 게 아닙니다. 이걸 다 새기면 높이가 20피트는 될 거예요. 이 말씀은 단지 맥락일 뿐입니다.”그녀가 이사야 26장에서도 특히 주목한 건 1, 12, 19절이었다. “그 날이 오면, 노래를 부를 것이다. … 우리가 성취한 모든 일은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칠 것입니다.”이사야는 더 이상 죽음이나 눈물이 없는 미래의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캐시가 말을 이었다. “팀은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로 그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그 잔치에 함께 앉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팀이 지금 얼굴을 맞대고 경배하시는 하나님을 우리 모두 믿고 의지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사랑하는 아빠이어서 그녀는 28쪽짜리 프로그램으로 짜인 대본을 벗어나 장남과 막내아들에게 “조나단, 뭐 하고 싶은 말 있어?”라며 마이크를 넘겼다. 조나단은 할 말이 있었다. “아빠는 정말 뛰어난 격려자였습니다. 친구들과 가족 여러분, 슬프지만 그의 삶을 기억하면서 격려를 받읍시다. 제 아버지의 삶이야말로 이 세상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크고 영원한 다른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조나단의 형제 데이비드는 기도하는 동안 눈물을 참기 위해 여러 번 멈춰야만 했다. 추모 예배에 참석한 모두의 감정이 가장 격해진 순간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상실감이 슬프지만 아버지가 지금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습니다.” 캐시와 조나단이 옆에 선 상태에서 데이비드가 기도를 이어갔다. “하나님, 슬픔에 잠긴 우리를 만나 주시고, 이 시간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희생의 사랑으로 당신께서 이미 죽음을 정복하셨음을 깨닫도록 도와주세요. 그래서 당신이 우리를 본향으로 부르실 때, 우리도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를 본향으로 불러주소서.’” 복음에 찍힌 방점추모식 나머지는 순서에 따라서 성경과 C. S. 루이스 낭독, 켈러가 선택한 찬송가 부르기, 가족 친구인 샘 올베리의 강론으로 이어졌다. 올베리가 말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팀의 모든 자질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이 발견하는 바로 그 자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팀이 불완전했던 부분에서 그리스도는 항상 완전하셨습니다. 팀이 했던 말 중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을 하나 빌리자면, ‘예수는 참되고 훨씬 더 나은 팀 켈러이다’입니다. 따라서 팀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살았던 가장 강력한 한 사람인 예수가 우리를 섬기고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왔다고 올베리가 말했다.“팀은 예수님의 섬김을 받을 만큼 비범한 종이었습니다. 팀이 그토록 아름답게 우리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순간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섬기도록 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다면, 지금, 바로 이 시간에 예수님이 여러분을 섬기도록 하시겠습니까?”올베리의 복음주의 메시지의 어조는 복음주의 인물 중에서 마지막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한 사람의 장례식을 떠올리게 했다. 2018년에 빌리 그레이엄이 죽었다. 그가 죽기 전 가족과 친구들에게 남긴 메시지도 장례식에서 복음을 나누라는 것이었고, 2,000명 넘게 참석한 추모 예배에서는 그의 유언대로 복음이 선포되었다. 올베리는 TGC 인터뷰에서 말했다. “팀은 추모 예배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를 원한다는 점을 매우 분명히 했습니다.”목적이 분명한 예식복음 선포라는 똑같은 목적은 찬송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켈러는 지난 4월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열린 예배에서 참석자들에게 “나는 모든 찬송가를 선택했고, 거기에는 순서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선택한 이유가 프로그램에 실렸다. “영원히 계시는 주 하나님은”은 하나님과 그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고, “굳도다 그 기초”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삶에 관해서, 그리고 “Jesus Lives and So Shall I”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소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구원받은 천국의 성도들”은 세상의 수고로부터 쉼을 얻은 모든 성도가 언젠가는 다 다시 모일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켈러의 추도식은 말씀으로 넘쳤다. 개회와 축도 시에 낭독한 구절 외에도 요한복음 14장, 고린도전서 15장, 고린도후서 4장, 로마서 8장, 그리고 마가복음 10장을 리디머 교회 캠퍼스 네 곳의 리더들이 낭독했다. 모든 메시지가 다가올 부활을 가리킨다. “우리는 슬픕니다. 그러나 소망 속에서 슬퍼합니다.” 켈러의 차남이자 목사인 마이클 켈러가 예배를 마치면서 말했다. 그는 사실상 안내서에 인쇄된 D. L. 무디의 말을 반복한 것이다. “언젠가 여러분은 신문에서 East Northfield의 D. L.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그 말을 믿지 마세요! 신문에 부고가 실리는 그 순간, 나는 더 살아있을 겁니다. 나는 더 높이 올라가 있을 겁니다.” 마이클이 말을 이었다. “다가올 세상은 더 밝고 더 좋고 더 생생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서 그를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곳은 기쁨과 은혜, 사랑과 빛이 영원합니다. 이 사실로 나는 여러분이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지금 그리고 항상 이 진리가 당신을 지탱하도록 하십시오.”원제: All About Jesus: Tim Keller’s Memorial Servi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by 고상섭
2023-08-11
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01 복음의 재발견02 문화의 상황화03 기독교 변증04 복음 생태계05 그리스도 중심 설교06 우상숭배와 복음07 정의와 자비 사역08 신앙과 직업09 통합적 사역10 팀 켈러의 저서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10) : 팀 켈러의 저서...
by 고상섭
2023-08-11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우리 곁을 떠난 이후에 팀 켈러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 아내와 대화하면서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 내 책은 필요하지 않으신 것 같다” 라는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팀 켈러의 책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크지만, 지금까지 공저를 포함해서 40권이 넘는 책을 남겨주신 것은 귀한 유산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팀 켈러가 직접 쓴 책뿐 아니라 팀 켈러와 관련된 책들도 속속 연구되어 나오고 있다. 팀 켈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팀 켈러를 공부하고 싶지만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저마다 처한 상황과 이해가 다르니 어느 하나의 로드맵을 그리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팀 켈러의 저서 전체의 숲을 그리는 과정일 것이다. 팀 켈러의 유산을 정리하면서 팀 켈러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전체 책의 목록을 정리해보았다. 분류 기준 팀 켈러의 다양한 책들은 어떤 기준으로 정리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분류될 것이다. 필자는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 나오는 통합적 사역을 중심으로 전체 내용을 분류했다. 독서를 위한 분류 체계이기 때문에 팀 켈러가 말한 “∼에게 연결하는 것”이라는 큰 틀을 따랐지만 세부 주제들은 임의로 정했다.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교회 사역의 통합성을 강조하면서 다섯 가지의 사역 접점을 소개한다.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서)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서)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사역을 통해서)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통해서)5.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생태계를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의 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출간된 팀 켈러의 저서들을 분류해보았다.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1) 복음 ① 탕부 하나님 /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두 책은 동일한 The Prodigal God을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역간한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경계하며 복음 안에서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책은 팀 켈러의 복음에 대한 기초 이해를 가지게 하고,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알려준다. 탕부 하나님의 기초가 된 설교는 스승인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3장 ‘아버지의 환영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누가복음 15장의 설교이다. 탕부 하나님을 클라우니의 책과 비교해서 보면 팀 켈러가 복음의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또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평신도와 목회자 모두에게 첫 번째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② 방탕한 선지자 원서 The Prodigal Prophet의 제목이 탕부 하나님과 비슷하다. 선지자 요나를 통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인간에 내재된 본성임을 알려주고 복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기술한 책이다. 탕부 하나님과 함께 읽으면 복음에 대해 더욱 선명하게 이해되는 책이다. 탕부 하나님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로 비유했다면, 방탕한 선지자에서는 요나서 1-2장을 통해서 둘째 아들의 모습을, 3-4장을 통해서 첫째 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 안에는 늘 복음을 거부하는 두 성향이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할 때 생기는 영적 질병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복음의 감격을 제시한다. ③ 복음으로 세우는 센터처치 센터처치라는 한 권으로 된 책을 복음, 도시, 운동이라는 세 권으로 나누면서 팀 켈러 인터뷰를 부록처럼 포함했다. 센터처치의 제1권 ‘복음’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와 설교에서도 시작을 ‘복음’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팀 켈러가 말하는 은혜의 복음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이들은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와 에드워드 피셔의 개혁 신앙의 정수를 추천한다. ④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짧은 소책자이지만 내용의 힘은 엄청난 책이다. 복음을 단순히 신학적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칭의의 복음이 인간의 자존감과 정체성의 문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원서는 The Freedom of Self Forgetfulness로 ‘자기 망각의 자유’이다. 세속 심리학에서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사랑하라’ 말하지만, 성경은 ‘자기 부인’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이 결국 자기를 망각하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임을 설득력 있게 선포하고 있다. 복음을 통해 정서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⑤ 내가 만든 신 / 거짓 신들의 세상 팀 켈러는 죄를 설명할 때 ‘우상숭배’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설명한다. 단순히 행위로 짓는 죄를 넘어 마음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모두 우상숭배임을 알려주고, 우상을 숭배할 때 노예 상태로 예속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 불렀다. 결국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랑의 순서를 회복할 때 참된 질서 아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상의 문제를 깊이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⑥ 복음과 삶 성경공부 ‘복음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라는 주제로 만든 성경공부 교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복음이 적용되는 대상인 마음, 공동체, 세상, 그리고 영원까지 변화시킨다는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날 임할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까지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인생 전체를 조망한다. ⑦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 복음이 핵심이다 / 복음, 자유를 선포하다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2018년 한국에서 개최된 ‘센터처치 콘퍼런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에게 설교하기’와 ‘복음의 상황화’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이 실렸다. 비신자에게 설교하는 구체적인 원리들이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복음이 핵심이다는 The Gospel Coalition에 속한 저자들이 열네 편의 글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D. A. 카슨과 ‘복음중심의 사역’이라는 주제로 TGC 정신에 대해 썼고, 브라이언 채플, 케빈 드영 등의 저자들이 한 편씩 기고했다. 복음, 자유를 선포하다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면 2017년 TGC에서 갈라디아서를 강해한 책이다. 팀 켈러는 그중에서 갈라디아서 6장을 설교했다. 2) 전도와 변증 ① 하나님을 말하다 / 살아있는 신 팀 켈러를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The Reason for God을 번역한 책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기독교를 변증한다. 팀 켈러의 변증은 복음을 향해 나가기 위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어떤 믿음이 존재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믿음의 모순을 드러내 주고 복음의 원리를 따라 세상을 바라볼 때 가장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논증해준다. ② 답이 되는 기독교 하나님을 말하다 출간 후 제기된 다양한 의견과 반대의견에 대해 다시 반론하면서 기독교의 합리성과 요즘 시대 사람들이 가지는 잘못된 신념들을 밝히고 복음이 가장 삶을 행복하게 한다고 증명한다. 시대마다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어가는 ‘문화 내러티브’가 존재하는데, 그 문화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 주고 복음으로 답을 해준다. 문화를 향해 설교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게 해준다. ③ 인생 질문 / 예수를 만나다 하버드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요한복음을 통해 복음을 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전도와 전도설교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팀 켈러가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달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다. ④ 탈기독교시대 전도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전도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전 시대는 교회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회에서도 권위 있는 목소리로 통용되었지만, 지금 교회의 메시지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화 내러티브와 동떨어져 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를 소개한다. 3) 개인 경건 ① 묵상: 예수의 노래들 시편을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아내인 케시 켈러와 공저했다.② 오늘을 사는 잠언 잠언을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아내인 케시 켈러와 공저했다.③ 고통에 답하다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임을 알게 해주고 고난 속에서도 주와 동행할 수 있는 은혜를 나누어 준다. ④ 기도기도 안내서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구하는 대화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하나로 묶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또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임을 아우구스티누트, 루터, 칼뱅 등 교회사의 기도의 거장들로부터 기도를 배우고, 더 깊은 기도를 위한 지침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의 교본으로 균형 잡힌 책이다. 4) 예배 ①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예배라는 주제를 다양한 교파의 목회자가 공저한 내용이다. 팀 켈러는 ‘대도시에서 드리는 개혁주의 예배’라는 주제로 기고했다. 오늘날 예배에 대해 다양한 논쟁들이 있지만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역사적인지를 구분하며 사랑 안에서 질서를 세워가는 과정들을 설명한다. 또 리디머 교회의 예배 형식을 예로 소개하고 있다. ② 21세기 복음전도 예배예배에 대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21세기 복음전도 예배’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센터처치 제7부 통합적 사역의 제2장 ‘사역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의 내용과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1) 교회와 공동체 ① 복음과 삶: Part 3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복음과 삶’ 성경공부 교재의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는 공동체와 전도,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②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교회에 대해 다루지만, 특히 Part 2 ‘통합적 사역을 추구하라’의 제6장 ‘공동체를 만나도록 연결하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③ 개혁주의 실천신학팀 켈러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강의할 때 사용한 교재이다. 목회 사역의 근거와 특별직무, 소명, 목회사역을 위한 계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용서를 배우다팀 켈러가 직접 쓴 마지막 작품이다. 용서를 거부하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어떻게 복음이 용서로 이끌어가는지를 보여준다. 팀 켈러의 인격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책이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로잡고, 진정한 용서의 출발이 오직 은혜임을 알려준다. 복음이 대인관계의 영역까지 확대되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가정 ① 결혼을 말하다 결혼에 관한 여덟 편의 설교를 모은 책이다. 독신에 관한 내용도 한 장이 포함되어 있다. 제6장 ‘다름의 복을 누리라’에서 서로 다른 부부를 포용하는 것에 대해 또 남편의 머리됨에 대해서는 케시 켈러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② 결혼의 의미결혼과 가정에 관해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캐시 켈러와 공저. ③ 인생 베이직 시리즈 : 태어남, 결혼, 죽음에 관하여 태어남, 결혼, 죽음에 관하여 기록한 짧은 소책자이다. 전도와 변증의 책으로 유용하다. 팀 켈러 소천 이후에 ‘죽음에 관하여’의 내용은 마치 생생한 그의 신앙고백처럼 들린다.3. 사람들을 세상과 연결하는 것 1)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① 여리고 가는 길정의와 자비 사역을 다룬 책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도시를 섬기는 과정을 설명한 책이다. 복음주의 교회는 주로 개인 구원에 편향되어 있고, 사회 구원에 대해 소리를 높이는 교회는 복음이 약한 편인데, 팀 켈러는 그런 공식을 깨고 복음을 바로 이해하면 이웃과 세상을 섬기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웃을 섬기는 구체적인 적용들도 많이 제시한다.② 정의란 무엇인가‘여리고 가는 길’에 기초한 확장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왜 지역을 섬기는 정의 사역이 필요한지 설명한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을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돌려주는 정의의 문제로 바라본다.③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센터처치의 ‘도시’ 부분을 따로 분권한 책이다. 복음의 상황화, 도시비전, 문화참여로 구성되어 있고, 팀 켈러와 앤디클라우치의 인터뷰가 있다. 교회와 도시의 관계와 도시목회에 대해 잘 설명해준다. 2)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① 일과 영성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추구하는 책이다. 일과 직업의 관계를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으로 구성했고 서문에 나오는 돌킨의 ‘니글의 이파리’라는 예를 통해 회복의 관점까지 소개하고 있다. ②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와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는 도시와 문화라는 구분 없이 두 주제 모두 포함하고 있다. 특히 복음 생태계를 이루는 과정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③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가이드라인과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예로 들어 소개한 책이다. 팀 켈러는 프롤로그에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과 2장 세속 도시 속에서 소금이 소금되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목회자로서 어떻게 살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4.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 생태계를 만드는 것 ① 센터처치 /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② Church planting (교회 내부 자료) 5. 그 밖의 자료들 마인드맵(이 글 끝에 있음)에서는 설교와 설교집, 주석 및 성경공부 교재를 ‘하나님과 연결’이라는 부분으로 구성했다. 1) 설교와 설교집 ① 팀 켈러의 설교 ② 왕의 십자가 마가복음 설교집 ③ 예수, 예수: 이 시대가 읽어버린 이름 성탄 설교집 ④ 천국 묵상 천국에 대한 설교 2015년 TGC 콘퍼런스 설교(1장 생명을 선택하라, 패널토의)⑤ 그분의 사역 누가복음 설교 2014년 TGC 콘퍼런스 설교(누가복음 24장 무죄를 입증하다, 패널토의)2) 주석 및 성경공부 ① 당신을 위한 로마서, 1, 2② 당신을 위한 사사기③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④ 당신을 위한 팀 켈러의 90일 성경공부: 갈라디아서, 사사기, 로마서⑤ 로마서 성경공부 ⑥ 복음과 삶 성경공부3)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 팀 켈러가 직접 쓴 책은 아니지만 팀 켈러와 함께 사역한 TGC 편집장 콜린 핸슨이 3년 동안 팀 켈러와 주위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쓴 팀 켈러 전기이다. 팀 켈러의 업적을 기리는 전기가 아니라 팀 켈러를 오늘날 팀 켈러로 만든 팀 켈러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추적하여 조사하고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지를 잘 보여준다. 팀 켈러의 저서를 읽기 전에 팀 켈러의 전기를 먼저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9) : 통합적 사역
by 고상섭
2023-08-02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균형’ 또한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의 하나이다. 그의 삶을 통해서 학자로서 삶과 목회자로서 삶의 균형을 이루었고, 또 목회 이론과 사역의 균형을 이룬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유산일 것이다.팀 켈러는 복음이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을 회심시키는 일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능력있게 한다고 말하면서, 복음은 말씀을 통해서 세상에 선포되는 것만이 아니라 실천과 공동체를 통해서도 선포되기 때문에 복음을 통해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고 강조한다.[1] 교회 안의 각 사역은 독립적이거나 선택사항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상호의존적이어야 한다. 어떤 교회는 전도, 교회 성장에 초점을 두고, 어떤 교회는 교제와 공동체에 역점을 둔다. 또 빈곤층을 돕는 정의 사역에만 집중하는 교회도 있고, 문화와 예술을 강조하는 교회도 있다. 빈곤층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직업과 신앙을 통합하는 것”을 엘리트주의라고 여기고, 공동체, 제자훈련, 경건을 강조하는 것은 영적 천박함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상 이 모든 접점에 참여하는 것이 요구된다.“깊이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경험하면서 복음에 의해 변화되는 그리스도인의 수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알려지는 그리스도인의 수가 모두 증가해야 한다.”[2]네 개의 사역 접점 어떤 교회도 은사와 강점의 완벽한 균형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한 리더십과 재정 능력을 다 갖춘 교회도 없다.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비유들에 충실한 교회란 실제적으로 어떤 것인가? 교회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단점을 강화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루어야 하는 힘든 균형이다. 모든 것을 균형 있게 다 잘할 수 있는 교회는 없지만, 어떤 역할이라도 성경이 요구하는 전체 그림에서 지워서는 안 된다.[3]팀 켈러가 말하는 네 가지 사역 접점을 제안한다. 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를 통해)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을 통해) 팀 켈러가 제시하는 네 가지 사역 접접의 특징은 ‘연결’이다. 또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결국 팀 켈러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세 가지 방향으로 설명하고 있다.[4]교회는 먼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이다. 또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세상을 향해 사역하며 전도하는 전도 공동체이다. 또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 자신을 위해서 서로 교제하고 양육과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양육 공동체로 존재한다. 릭 워렌은 목적이 이끄는 교회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예배, 교제, 훈련, 사역, 전도이다. 이 다섯 가지 목적도 하나님을 위한 예배, 교회를 위한 교제와 훈련, 세상을 위한 사역과 전도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사역은 교회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이런 교회의 존재 목적의 분류와 팀 켈러의 분류를 비교해보면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팀 켈러의 리디머 교회는 하나님과 연결에서 예배뿐 아니라 전도를 포함시킨다. 이것은 예배를 통해 전도하는 것을 말한다. 또 세상을 향해서도 ‘도시에 연결하기’와 ‘문화에 연결하기’로 나눈다. 도시에 연결하는 것은 사역에 해당하지만, 문화에 연결하는 것은 기존 교회의 목적에는 볼 수 없었던 상황화라고 할 수 있다. 직업과 신앙을 연결해 주지 못하면, 진정한 교회로서 이 땅을 바르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 : 예배, 전도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바로 예배이다. 팀 켈러는 성경에 예배에 대한 규정적인 방식이 나와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성경, 전통, 문화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예배의 형식을 바꾸어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로지 시편 찬양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역사적 예배의 수호자들도 있다. 이런 의견들 속에서 팀 켈러는 “사랑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안전하다”는 칼뱅의 가르침을 수용한다.[5]또 팀 켈러는 예배를 통해 비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동시에 신자들의 영적 성숙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첫째,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를 만들라’가 먼저와야 하지만 팀 켈러는 의도적으로 둘째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다. 이 직무는 사실 두 번째로 일어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이것이 첫째라고 생각한다. 전도적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비신자들을 예배에 오게 하는 것이 먼저라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 순서가 맞다. 예배가 이미 전도적이지 않다면 비신자들은 예배에 오지 않는다. 비신자들이 예배에 참여하려면 평소의 설교를 듣는 성소들이 “아, 이 설교 예수님 믿지 않는 내 친구 ○○가 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는 비신자들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비신자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며 복음 앞에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의 목적은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6] ① 친숙한 어휘를 사용하라오랫동안 로마가톨릭은 모든 예배를 라틴어로 진행했다. 매우 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오늘날도 비슷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려면 그들이 친숙한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 ‘칭의’ ‘언약’ 등의 개념이 나온다면 풀어서 설명해주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진정성을 원한다. 가식으로 보이는 것을 피해야 한다. 너무 영적인 표현들을 삼가고, 대신 친숙하고 평범한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선별해 사용해야 한다.[7] 문화에서 공인된 권위자를 인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배우나 강연자나 베스트셀러 작가 등의 일반 대중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경과 연결되는 가르침이 있다면 사용하는 것이 좋다. 바울도 사도행전 17장에서 아레오바고의 철학자들을 전도할 때 에피메니데스의 시를 인용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28)라고 말한다. 또 아라토스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도 말한다. 철학자들이 잘 아는 사람의 인용구를 통해 바울은 진리를 더욱 밝게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 청중이 그 인물을 존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할 때 비그리스도인이 존경하는 어떤 권위자를 인용하여 대화를 펼치면 우리가 말하는 내용의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좋다. 오로지 성경만으로 대화를 주도하게 되면, 상대가 완전히 설득되지 않아 이야기를 끌고 가기 어렵게 된다. ② 예배 흐름에 따라 설명을 제공하라 예배에 의미를 짧게 설명하는 말을 하면 새로운 사람들을 예배 가운데 교육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③ 비신자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환영하라정기적으로 이렇게 말하라. “여러분들 중에 이것을 믿지 않는 분들 또는 무엇을 믿는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몇 가지 반대 질문을 다루어라. 그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진지한 공감을 갖고 표현하라. ④ 수준 있는 예술을 예배에 사용하라 음악의 수준, 당신의 설교, 그리고 예배의 시각적인 미적 요소들이 특히 문화 중심지에서는 전도적 역량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음악적 수준이 탁월하면 사람들은 초월을 경험하기가 쉬워진다. 심미적으로 뛰어난 예술은 외부인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⑤ 자비와 정의의 실천을 고취하라교회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추락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말뿐인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비와 정의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외부인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전도적 예배는 실천 사역을 위한 헌금을 강조하며 그 사역들을 보고하고 증언하고 기도해야 한다. ⑥ 복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성례를 시행하라세례 받을 때 개인 간증을 하는 기회를 주라. 그리고 질문에 답하도록 하라. 성찬은 보이는 복음으로 청중의 삶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안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⑦ 은혜의 복음을 설교하라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복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하라, 복음은 단순히 구원 얻는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성장시키는 도구이다. 결국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고 적용할 때 비신자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신자들은 예수님을 닮도록 성장하게 된다. 사람들을 결신으로 이끄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고 또한 예배 후 지속적인 후속 모임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결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함으로 전도와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한다. 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 제자도“사람들을 제자화하는 주된 방법은 공동체 훈련을 통해서이다. 은혜, 지혜, 그리고 성품에서 성장하는 것은 수업과 강의, 그리고 대형 예배 모임, 또는 고독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성장은 깊은 관계와 공동체에서 일어난다.”[8]팀 켈러는 사람이 변화되는 제자도의 중요한 요소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어떤 요소들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① 공동체와 전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단순한 지원 그룹이 아니라 오히려 대안 사회이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통해 다른 종교들과 무신론자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인간은 모두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공동체는 반드시 교제의 수준을 뛰어넘어 반문화를 구현해야 한다. 복음이 아니라면 결코 함께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연합하여 사랑하는 것을 세상이 볼 수 있어야 하며 자기를 주는 방식으로 성, 돈, 힘을 사용하는 것을 세상이 보아야 한다.”[9]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대안 사회가 되어서 ‘언덕 위의 도시’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어야 한다.[10] ② 공동체와 성품공동체는 성품을 만든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강의실에서 강의로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교실이 아닌 삶을 이끄셨다. 예수님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진리를 토론하고 대화하고 적용하면서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세우셨다. 우리가 학문적인 상황에서가 아니라 소그룹과 우정 관계 속에서 가장 잘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강점과 재능을 긍정하고, 동등하게 중요성을 인정하고, 가시적인 애정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공간과 물건과 시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필요와 문제를 공유하며, 서로 신앙과 생각과 영성을 공유하고, 상호책임 관계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섬기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성품이 자라게 된다.[11]③ 공동체와 윤리적 행동 공동체는 우리의 윤리를 형성하며 우리의 행동을 지도하는 명시적이며 암묵적인 규칙들을 형성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윤리 명령은 개인보다 공동체에 훨씬 많이 주어지고 있다. 모세오경은 한 개인에게 준 성경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을 더 잘 믿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주신 것이며 신약성경에 나오는 빌립보서, 에베소서 같은 서신서는 교회 회람용 서신이었다. 성경을 묵상할 때 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하지만 또한 공동체적 적용이 필요하다. 로마서 12:1-2의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흔히 개인적인 헌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너희 몸들을 거룩한 산 제물들로 드리라”는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다. 성경은 단순히 개인 신자들을 위한 윤리적 지침이 아니다. 사랑과 거룩의 영적 열매를 맺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는 모두 경험상 개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은 훨씬 힘든 일이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책임 있는 관계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반복적으로 미끄러지고 쓰러질 것이다. … 공동체는그 자체로 믿음을 따라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줄 수 있다.”[12]④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감 혼자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함께 공동체 안에서 나눌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더욱 풍성해진다. C. S. 루이스는 찰스 윌리엄스, 톨킨과 친구였지만 윌리엄스가 죽고 톨킨과 두 사람만 있었을 때는 우정을 혼자만 더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윌리엄스와 톨킨이 있을 때 누렸던 풍성함이 줄어들었다고 고백했다. “내 친구들 각각 안에 오직 어떤 친구만이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있다. 나는 나 혼자서 한 사람의 전체를 끄집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지 않다. … 찰스가 죽은 다음 나는 더 이상 캐롤라인의 농담에 로날드가 하는 반응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찰스가 가면서 로날드가 “내게만” 남게 되었는데, 로날드는 더 작게 남았다. 진정한 우정은 사랑을 질투하지 않는다. 두 친구는 세 번째 친구가 오길 기뻐한다. 셋은 네 번째가 오길 기뻐한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친구의 수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각각의 친구를 덜 갖는 것이 아니라 더 갖게 된다. … 우리는 천국의 떡 되신 분을 더 많이 나눌수록 우리들은 더 많이 서로를 갖게 된다.”[13]인간은 혼자서는 하나님을 정말로 알 수 없다. 에덴동산에서 죄가 들어오기 전이지만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통해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끽하고 계시므로) 삼위일체의 행복을 나누시기 위해서이다.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정의와 자비 사역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치유하고 먹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자비와 정의의 행동이라는 두 가지를 통해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할 수 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며 동시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봉사하는 사역을 ‘디아코니아’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자신을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말씀하셨다. 팀 켈러는 “교회의 제자훈련은 반드시 멤버들이 지역을 사랑하고 신앙과 직업을 통합하며 더 정의롭고 건강한 사회와 문화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공공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많이 가르치고 설교하고 강조해야 한다”고 말했다.[14]① 구제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하여 신체적, 물리적, 사회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② 개발사람이나 공동체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자급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돕는 과정이다. ③ 개혁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15]이 세 가지는 정의와 자비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과정이지만 제도 교회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구제와 개발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개혁은 한 교회의 일이 아니라 지역이 연합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각종 단체에 들어가서 지역을 위해 협회와 조직을 통해 개발에 동참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또한 얼마나 도와야 하는가? 누구를 도와야 하는가? 언제, 어떤 조건에서 도와야 하는가? 어떤 방법으로 도와야 하는가?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 이런 일들에 대해 고민을 통해 각 지역교회에서 적절한 과정들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 오늘날의 문화는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직장이라는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속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문화를 바꾸려면 문화 내러티브를 거부하며 문화에 참여하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에 참여하여 탁월성, 구별성, 책임성을 갖고 직장에서 일해야 하며 그 정신과 발판을 교회가 마련해 주어야 한다. 복음은 우리 직업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일에 대한 동기에 변화를 준다. 많은 사람이 일을 통해 자신의 중요함과 정체성을 찾는다. 그러나 복음만이 “마음을 다해 주를 섬기듯이 일할” (골 3:23) 동기를 부여한다. 또 복음은 일에 대한 개념을 변화시킨다. 일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수단이다. 또한 복음은 일터에서 높은 윤리 수준을 제공하며 또 일을 하는 방식을 새롭게 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이런 복음을 수단으로 해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복음과 직장을 연결해 주어서 도시 안의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① 책임감 있게 일하기: 직업에 관련된 영적 성장 기본적으로 은혜의 수단들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 창조적인 방법으로 월간으로 직접 모이고 주중에는 온라인으로 모이는 등 다양한 방식의 영적 공급이 필요하다. 또한 도덕적 쟁점, 윤리적 난제, 유혹, 실망 등 그리스도인들이 직업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다루어주어야 한다. 같은 직군별로 서로 보살피고 지지하는 그룹을 만들어 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② 구별성을 갖고 일하기: 세계관 개발과 훈련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주님이시라면 직업의 영역에서 어떻게 주님의 주재권을 실현하도록 가르칠 것인가? 팀 켈러는 의도적인 학습 공동체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나이 있고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 둘째, 젊고 이제 막 시작하는 그리스도인. 셋째, 성경, 신학에 정통한 교사들, 이 세 부류가 한 공동체를 만나서 직업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어떤 것을 수용하고 반대해야 하는지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③ 탁월성 있게 일하기: 멘토링 및 문화 갱신 “일반적으로 문화 창출에 협력한다는 것은 신자들끼리 모여 악한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지어 비신자들과 함께 일하여서 세상을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업무에서의 탁월성이다. 업무의 탁월성은 우리 신앙에 대한 신뢰성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임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일이 형편없다면 말로 하는 전도는 듣는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을 단지 경멸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주요 문화 중심 지역 속에 살면서 그들의 일을 탁월하게, 그러면서도 구별된 방식으로 한다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이루어낼 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 이런 종류의 공동체가 성장할 때 세상 속에서 복음의 문화를 심을 수 있게 된다. 이전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행위로 구원을 추구했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직업적인 성공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이런 문화적 내러티브를 변화시키는 원천이 된다. “남들이 애쓰고 수고해서 얻으려는 것들(구원, 자부심, 선한 양심, 평안 등)을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그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일하면 그만이다. 즐거이 감당하는 희생이자 자유가 보장된 제한이다. …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16]팀 켈러는 존 아니주와 함께 편집한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문화를 가진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연합하여 살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의 원제는 ‘Uncommon Ground’이다. 신앙인과 다른 그라운드를 가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면서도 복음적 확신을 유지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질문하며,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복음이 주는 겸손과 인내, 관용과 용기를 통해 살아가라고 권면한다. 겸손은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게 한다. 세상 사람들의 의견보다 더 뛰어난 의견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이 행위가 아닌 은혜로 받은 구원임을 인식할 때 더욱 겸손히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런 행위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인내는 경청하고 이해하고 질문하도록 권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발휘한다고 해서 이념적 거리를 늘 넘어서지는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경청과 공감적 이해, 사려 깊은 질문으로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관용은 우리가 공유하지 않는 믿음과 실천을 실제로 참아내는 일이다. 관용하라는 말이 동의하지 않는 믿음을 수용하거나 그런 실천에 찬성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과 생각을 분리하는 어려운 일, 즉 상대의 믿음이나 행동에 전적으로 찬성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그와의 관계를 추구하는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관용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서 흘러나오고,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제거한다. 우리는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하심을 온전히 확신한다면, 비판과 불안정을 직면할 용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자질을 통해 직장생활을 한다면 변화가 보장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 길은 어려운 길이며 성공이 보장된 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사명의 길이다.[17]팀 켈러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설교와 가르침, 기도, 예배, 성찬, 교제와 우정을 사용하여 교인들의 마음에 복음 신앙의 불길이 타오르도록 부채질하면,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자라나 두려움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방법을 알아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사랑은 반드시 길을 찾기 마련이다.”[18]복음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도 한다. 인생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사역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팀 켈러는 복음이 사람을 하나님과 사람들과 세상과 연결해 주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죄로 인해 분리된 관계가 회복되면서 복음은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된다. 팀 켈러는 이런 사역들이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변화를 꿈꾸며 기도했다. “그러나 상상해보라 만일 맨해튼과 같은 곳에 많은 신자들이 있어서, 대부분의 뉴요커들이 자기가 존경하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을 실제로 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많은 도시 거주민들을 기독교의 메시지로부터 방해하는 강력한 장벽이 제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만 명의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술, 과학, 학문, 기업 등에서 핵심 역할들을 수행할 때,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가진 권력, 재물, 영향력을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선을 위해 사용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19]복음은 개인의 삶을 균형 있게 하고 또한 교회의 사역을 균형 있게 한다. 복음을 통해 통합적 사역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겨준 또 다른 유산이다. 주1. 팀 켈러, 센터처치, 610.2. 같은 책, 612.3. 같은 책, 616.4. 팀 켈러는 네 가지 사역 접점에 ‘도시 교회 개척’을 추가하여 다섯 가지 접점으로 소개한다. 5. 팀 켈러 외,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 284.6. 센터처치, 637.7. 팀 켈러 외,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26.8. 센터처치, 651. 9. 센터처치, 653. 10. 팀 켈러, 복음과 삶, 100.11. 복음과 삶, 101-122.12, 센터처치, 656. 13. 센터처치, 658.14. 센터처치, 681. 15. 센터처치, 685. 16. 팀 켈러, 일과 영성, 91. 17. 팀 켈러, 존 이나주,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16-17.18. 같은 책, 6-67.19. 센터처치, 789.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8) : 신앙과 직업
by 고상섭
2023-07-12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사역’ 또한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빼놓을 수 없는 유산이다. 영국 교회가 부흥할 때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레슬리 뉴비긴이 사역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의 영국 사회는 마치 이교도의 국가처럼 보였다. 쇠퇴하고 있는 영국 교회를 보면서, 뉴비긴은 교회가 신자들의 개인적 삶을 위한 내적 활동(성경공부와 기도 등)에 초점을 맞추어 훈련하고 있을 뿐, 공공 영역(정치, 예술, 사업 등)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살도록 훈련하지 못했다고 분석한다.[1] 팀 켈러도 직업이라는 영역이 신앙과 분리되는 시대정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전 시대에는 신자의 제자도와 훈련을 기도, 성경공부, 전도로 국한해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직장과 이웃과 학교에서 비기독교적 가치를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오늘날 선교적 교회는 신자들이 현저하게 비기독교적인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 … 오늘날 문화는 신자들의 종교적 신념은 직장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신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그들이 직업을 수행하는 방식과 단절시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2]신앙과 직업의 통합이런 시대 속에서 직업과 신앙을 통합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교회의 사명으로 대두된다. 팀 켈러는 리디머 교회의 다섯 가지 중요한 영역 중 하나를 ‘세상 문화와 사람들을 연결하기“라고 명명하며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강조한다.팀 켈러가 직업과 신앙을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된 계기가 있다.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됐을 때 한 유명한 탤런트가 예수님을 믿게 된 후 그에게 와서 이렇게 질문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이제 방송에서 연기할 때 제가 해야 하는 역할과 하지 말아야 할 역할이 있습니까? 화내야 하는 연기를 할 때 정말 화를 내야 합니까? 아니면 화내는 연기를 해야 합니까? 또 누군가와 연애하는 연기를 할 때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기를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들었을 때, 팀 켈러는 목회자로서 성도들의 현실의 문제에 어떤 해답을 줄 만큼 준비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직업과 신앙의 통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여성 CEO 캐서린 알스도프와 함께 쓴 팀 켈러의 일과 영성, 그리고 다양한 직업에 관한 리디머 교회의 프로그램들이다.[3] 캐서린 알스도프도 팀 켈러의 설교에 매력을 느낀 이유의 하나가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일과 직장처럼 내게 대단히 중요해 보이는 영역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고백했다.[4]오늘날 직업과 그 직업을 통해 이루고 싶은 욕망은 하나의 큰 우상으로 자리 잡았다. 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는데 오늘날 시대는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의 시대이고 …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제하는 자유,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도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5]이전 시대에는 공장장이 노동자를 착취했지만, 성과주의와 능력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스스로 착취자가 되어서 더 많은 성과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음을 한병철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이전 시대보다 더 심각한 이유는 착취자가 동시에 피착취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 문화 속에서 신앙과 직업을 연결하지 못하면 신앙과 직업이 분리되는 이원론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그래서 팀 켈러는 문화 속에 있는 우상들의 모순을 드러내어 성경 메시지와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목회자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설교자는 성경 메시지와 그 문화의 근본 신념들(그 안에 속한 사람들 눈에는 잘 안 보인다)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아,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깨닫게 된다. … 사람들에게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을 향한 그들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6]성경적 믿음이 일에 미치는 영향 1. 일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준다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직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전문직일 경우에는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의사나 목사 등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사람들을 섬기는 노동을 한다고 생각해서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기 쉽다. 결국 자신의 직업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기술로 최고의 도시를 만들고 싶어 했고 단순히 살 곳을 마련하는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 더 은밀하고 깊은 두 번째 의도가 숨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이름을 온 지면에 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최고의 기술을 통해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자신들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 이것이 인간 나라의 특징이다. 팀 켈러는 이 노동의 동기가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우리 삶 속에서 있는 문화 내러티브라고 규정한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노동의 동기는 바뀌지 않았다. 권력과 영예, 만사를 제 뜻대로 통제할 권한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교만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분열,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는 삶이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일치와 사랑을 빚어내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그런 마음가짐은 스스로 숭배의 대상이 되든지 집단을 우상으로 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간다. 인류가 그토록 애타게 구하는 영광과 관계는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공존할 수 있다.[7]자신의 일에 정체성을 둔 바벨탑이 무너졌듯이, 오늘날도 자신의 일에 정체성을 두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무너지게 된다.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성공에 이르렀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교만해지게 된다. 자신의 성취와 노력으로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노력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친절한 행위까지도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해서라기보다 자신보다 못하기 때문에 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자선처럼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자신의 성취로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라는 교만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오직 은혜를 이해할 때만 그 교만을 버릴 수 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나의 노력이 아니라 그 노력까지도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성공이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은혜의 복음은 실패했을 때도 좌절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준다. 복음은 일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2. 모든 일이 가치 있는 존엄한 일임을 알려준다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 태초에 ‘일’이 있었다. 일과 노동은 타락한 세상의 고통이 아니라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의 역할을 주셨다. 결국 일과 노동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며,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직업에 가치의 높낮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성경이 아니라 세상의 사고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세상에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 말한다. 오늘의 시대는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지위가 낮거나 수입이 적은 일을 할 때 그 사람의 존엄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경비원, 가사도우미, 정원사 같은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을 업신여기는 사례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 2017년 6월, 그리스의 환경미화원들이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서 파업을 한 사건이 있었다. 열흘째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자 도시 곳곳에 악취가 심했고 관광 사업도 차질을 빚었다. 만약에 청소를 하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전부 파업하거나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전 세계가 악취와 병균으로 들끓고 수많은 사람이 병원 신세를 져야 하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청소하는 노동자들을 존경하지 않고, 또 그들이 많은 보수를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직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아름답게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고 존엄한 일이다. 루터는 “하나님은 소젖 짜는 여자아이의 일을 통해 친히 우유를 내고 계신다”고 말했다.[8]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존엄한 하나님의 일이며 이웃 사랑을 위한 실천의 장이다.[9]3. 우리의 일을 탁월하게 행하는 동기를 부여한다모든 일이 존엄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어떤 일이든지 주님에게 하듯 해야 하며 탁월하게 일해야 한다. 탁월함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경쟁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감사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팀 켈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일하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아마도 그는 성경공부와 기도와 전도를 하라는 말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팀 켈러는 “일을 잘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일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는 바로 일을 잘하는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이렇게 말했다.교회가 총명한 목수를 대하는 걸 보면 보통 취하도록 술을 들이키지 말고, 여유 시간에 망나니짓을 하지 않으며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에 출석하라고 타이르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교회가 해주어야 할 얘기는 따로 있다. 신앙을 좇아 살려면 무엇보다 훌륭한 테이블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가르쳐야 한다.[10]4. 믿는 자에게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한다포스트모던 시대의 비즈니스는 주로 ‘목적이 없는 수단’으로 표현된다. 현대인들은 브랜드를 통해 페르소나를 창출하고, 행복한 삶의 기준을 잘 되어 가는 것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반면 고대 문화는 성품과 용기, 겸손, 사랑, 정의라는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 규정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마케팅과 홍보는 단순히 상품을 사는 것 이상의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11]회사에서 도덕적으로 너무 힘든 스트레스를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팀 켈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직장에서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있으십시오,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기술과 관계를 사용하여 높이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정직하게 올라가십시오, 그러나 정말 양심에 부딪히는 문제가 있으면 그때는 사직서를 쓰고 새롭게 창업하십시오.” 오늘날 사회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윤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둔다. 하지만 복음은 직장의 문화 속에서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한다. 겉보기에는 다른 회사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복음이 기반이 된 회사는 고객들을 섬기고, 적대적인 관계와 착취가 없으며, 생산물의 탁월함과 품질을 강조하고, 설령 수익이 줄어들지라도 조직의 현장에서 일상적인 기업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윤리적인 환경을 갖추기 마련이다. 복음이 아닌 다른 직업관은 자신의 이윤과 이익에 따라 선택하게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더욱 윤리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며, 더 건강한 직업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12]5. 직업에 소망을 불어넣는다직업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직업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낙관주의이며, 또 다른 오해는 내가 열심히 일해봤자 세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생각하는 비관주의이다. 양극단을 오가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상주의는 속삭인다. “일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고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해야지!” 반면에 냉소주의는 비아냥거린다. “일한들 뭐가 변하겠어? 쓸데없는 희망을 품어선 안 돼, 그저 먹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공들이지 말라고 여건 되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워!” 이런 양극단을 배제하면서도 믿음으로 일하고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팀 켈러는 타락한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창세기 3:18)팀 켈러는 먼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타락한 세상에서 일은 가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사람들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가 많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해서 힘든 것이지 원하는 직업을 가지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직업이라는 정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만족시키는 자기만족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현대사회의 불안 요인은 개인주의라고 꼽는다. 개인주의를 근대 문명의 최고 업적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테일러는 말한다. “개인주의는 자기 자신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보다 광범위한 시야를 상실해 버렸다. … 개인주의의 어두운 면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의 초점 이동에 있다. 이를 통해 삶은 덤덤하게 되고 협소해진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우리는 타인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진다.”[13]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삶은 협소해지고 의미가 사라진다. 인생의 의미란 나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할 때 오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말한다. 목사가 되고 싶었고 주위에서도 권유했다. 또한 열심히 목회해서 어느 정도 성공한 목회자가 되었지만, 돌아보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진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사람조차도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던 이상적인 삶을 직업에서 찾았다고 고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팀 켈러는 일과 영성 서문에서 톨킨의 니글의 이파리를 소개하고 있다. 화가인 니글은 하나의 이파리로 시작해서 큰 나무를 그린 후 그 나무 뒤로 마을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자신이 생각했던 나무를 그리지 못하고 고작 이파리 하나를 그렸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는 아직 못다 한 일들에 대해 아쉬워했다. 큰 꿈을 가졌지만, 그가 인생에서 이룬 것은 고작 이파리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니글은 아주 익숙한 곳을 만나게 된다. 그는 얼른 그리로 달려갔고 거기에는 늘 꿈꾸었던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 그의 나무가 완성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잎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지는 길게 자라서 바람에 나부꼈다. 자주 느끼거나 어림짐작으로 추측해 보았지만 좀처럼 포착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상태였다. 니글은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팔을 들어 활짝 벌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선물이야!”자신은 이파리 하나를 그렸지만, 자신이 상상하던 그 나무가 천국에 있었던 것이다. 팀 켈러는 이곳의 소제목을 “There Really is a Tree”(정말로 그곳에 나무가 있다)라고 붙였다. 그리고 일과 영성의 원 제목은 “Every Good Endeavor”(모든 선한 수고)이다. 결국 모든 선한 수고에는 선물이 있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니글의 이파리를 통해 우리에게 이 땅에서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록 완전한 모습을 구현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지 못하지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이지만, 우리의 수고와 땀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팀 켈러는 이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완벽한 모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라는 뜻이다."우리의 일을 통해 이 세상이 완전히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땅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완벽한 모델, 완벽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을지라도 우리 순종의 방향이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면 그 순종은 결국 천국에서 아름답게 완성될 것이다. 모든 선한 수고에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 이것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에서 우리가 땀 흘리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의미이다.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의 방향이 옳다면 그 이파리는 결국 천국에서 나무로 완성될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 나무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성경적 믿음은 우리의 일터에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어 준다. 열매가 없어도 낙심하지 않는 천국의 소망을 주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인생의 순종은 천국에서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될 것이다. 하나의 퍼즐로만 보면 별로 이루지 못한 인생일지 모르지만,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완성되는 하나님의 큰 그림 속 하나의 퍼즐 조각으로 동참하게 되면 내 작은 인생이 하나님의 큰 역사의 작품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작은 인생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작품이 탄생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을 이루도록 동참시켜 주신다. 우리가 힘든 직장생활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천국에 가면 정말로 그곳에 나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늘도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57-58)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모델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가 저기 있다고 가리키는 나침반으로 이 땅을 살고 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이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먹을 밭의 소산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로하신다.주1. 팀 켈러, 센터처치, 525.2. 센터처치, 690. 3. 전재훈, 고상섭, 박두진,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77.4. 팀 켈러, 일과 영성, 12. 5. 한병철, 피로사회. 27. 6. 팀 켈러, 설교, 35. 7. 일과 영성, 144.8. 일과 영성, 88. 9.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93. 10. 일과 영성, 94. 11. 일과 영성, 184. 12. 팀 켈러을 읽는 중입니다. 299. 13.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13.14. 일과 영성, 38.
일
직업
신앙과직업
일터신학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7) : 정의와 자비 사역
by 고상섭
2023-07-05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의 소천에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참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이 다양한 찬사를 그에게 보냈다. 팀 켈러가 자신이 속한 교단을 넘어 범교회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사역이 큰 몫을 했다. 복음주의권 교회들은 구원에 집중하면서 사회참여에 소홀한 경향이 있는데, 팀 켈러는 복음은 반드시 사회참여와 선교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고, 또 그 말대로 스스로 실천했기에, 다양한 교단의 사람들에게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도 어렵고 아픈 사람들을 돕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구호 활동은 흔히 부차적인 의무로 여긴다. 교육과 전도사역 등을 충분히 한 후에, 게다가 시간과 예산과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 그러나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1]복음과 정의 사역 팀 켈러는 복음주의 교회의 약점인 사회참여에 대해 강조했지만, 이것은 균형을 이루기 위한 보완이 아니라 복음을 분명히 알면 자연스럽게 정의와 자비 사역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교회 리더십과 사역자들은 복음을 단지 신앙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교리적 내용쯤으로 여길 위험이 있다. 그 결과 많은 설교자와 지도자들이 더 심오한 교리, 더 깊은 영성, 더 깊은 공동체나, 더 심오한 제자도, 심리적 치유, 또는 사회 정의나 문화 사역에 열정을 쏟기 쉽다. … 그러나 이런 경향 속에서 전체 그림을 놓칠 수가 있다. 비록 우리가 집중하는 사역이 있을 수는 있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 모든 형태의 사역은 복음에 의해 동기부여가 되고, 복음에 기초해야 하며, 또한 복음의 결과이어야 한다.[2]팀 켈러는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이 분리되는 이유는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두 개의 사역을 합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복음에서 출발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다.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복음으로 파생된 사역들을 하게 된다. 리디머 교회 홈페이지 처음에 등장하는 화면이 ‘리디머 교회의 비전과 가치’를 설명한 그림인데, 복음과 사역의 관계들을 잘 설명해준다. 그림을 보면 예배와 전도, 공동체 형성, 교회개척 운동, 신앙과 직업, 자비와 정의 사역의 한가운데 복음이 있다.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면 다섯 가지 영역의 일들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특히 정의와 자비 사역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역이 아니라 복음을 알면 반드시 해야 하는 사역이라 말한다. 참된 복음이 선포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은혜를 경험한 개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모든 세상일에 대해 아픔을 느끼고, 세상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힘쓰게 된다. 이것은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정서이고 복음은 사회의 정의와 자비 사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정의와 자비 사역의 기초가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에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일에 자연스럽게 헌신한다.[3]왜 정의 사역인가팀 켈러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을 ‘구제 사역’이라고 하지 않고 ‘정의 사역’이라고 부른다. 왜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미가서는 ‘겸손하게 하나님과 행한다’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를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인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무차별적인 은혜와 동정을 의미하는 말이고, ‘공의’와 ‘정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구약성경에 200번 이상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 말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을 공평하게 대한다’이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위기 24:22)여기서 ‘그 법’에 해당하는 단어가 ‘미쉬파트’이다. 인종이나 사회적인 지위와 상관없이 옳고 그름에 따라 유무죄를 가려 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든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으면 똑같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미쉬파트는 징벌이든 보호든 보살핌이든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주라는 뜻이다.[4]구약에서 이 단어가 등장할 때는 주로 ‘4대 취약계층’인 과부와 고아, 나그네,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라는 의미로 거듭 사용된다. 즉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이런 집단을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한 사회의 미쉬파트 곧 정의와 공의를 평가하는 척도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취약계층을 돌보지 않는다면 자비와 자선의 부족의 차원을 넘어 정의 곧 하나님의 미쉬파트를 짓밟는 행위이며, 하나님은 사회경제적인 약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분이시기에 그리스도인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공의’ 곧 ‘정의를 행하는 일’이다.[5]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도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7-28)를 해설하면서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한다.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선은 경제적 물리적 필요를 채워주는 실제 원조여야 한다. 이것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 단지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6]팀 켈러가 이 사역의 이름을 ‘정의와 자비 사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구제’라고 하면 내가 안 해도 되는 일이지만 하면 더 좋은 일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정의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위해 사회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었다. 그것은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성품을 열방에 드러낼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외침을 외면한다면, 세상이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 셈이 되므로 입으로 그 어떤 신앙고백을 한다 할지라도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7]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외면한다면 팀 켈러의 표현대로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 정의 사역의 동기 정의 사역은 복음에서 흘러나온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팀 켈러의 스승이었던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요구할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자비를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에게서 너그러움이 흘러나와야 한다.”[8]“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3).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실 때 언급한 내용이지만, 정의 사역의 동기와 근거도 동일하다. 단순히 그 사람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반응으로 정의가 흘러나와야 한다. 복음과 종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순종하느냐 아니면 순종을 통해 원하는 복을 추구하느냐의 차이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통해 어떤 보상이나 공로 또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진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의 문제로 이어진다. 교회의 정의 사역은 교회가 더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돕는 구제의 의미가 아니라 마땅히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돌려주는 의미이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이며 그것을 나눠주어야 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확인해야 한다. 은혜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공로로 사람을 돕게 되면 정의 사역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가난하기는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돈이 없어서 도와달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의 집에 가보면 다 살만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돕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다. 그런 태도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태도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문제라면 벼랑 끝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어떻게든 손을 쓰려고 하면서, 왜 이웃에게는 굶어 죽을 지경이 되야 도움을 주려고 하는가?”[9]내가 도와준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면 도움을 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내가 도움을 준 사람은 나보다 못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한 가닥 남은 자존심이라는 것에 대한 배려가 없는 생각일 수도 있다. 팀 켈러의 리디머 교회에서도 싱글맘을 도왔는데, 그녀가 교회가 제공한 돈으로 번듯한 식당에 다니고 새로운 자전거를 아이들에게 사주는 데 돈을 사용한 것이 드러났다. 그러자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팀 켈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를 통해 사람들을 설득했다. 에드워즈는 교회에서 재정지원을 받았는데 돈을 술먹는 데 쓰거나 규모 있게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에게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유가 이웃을 돕는 의무를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도 똑같은 상태에 빠진 인간을 찾아오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재정지원을 끊어버리면) 그럼 나머지 식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부모가 무책임하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자녀들을 생각해서 그 가정을 꾸준히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0]리미더 교회가 지원했던 싱글맘도 아이들이 아빠 없이 자라면서 동네에서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는 자전거 하나 없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사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해주면 정상적인 가정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더미 교회는 재정지원 이상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실재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또 “나누고 자시고 할 여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기네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누굴 도울 힘이 없다는 말은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잘라내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누군가를 도와줄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상대방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하신 것처럼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그 이웃의 몫을 나누는 것이다.”[11]정의 사역의 실천 팀 켈러는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권면한다. 교회가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와 지역 공동체로 관심의 원을 넓혀가야 한다. 직계 가족을 포함한 근친 중에서 장애인, 노인, 만성질환 환자가 있다면 그들을 돌보는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지역사회를 섬기면서도 혈연에게조차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율배반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그다음은 교회이다. 먼저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조사해서 다각도로 섬겨야 한다. 때로 교회에서 기금을 조성해서 전달하거나 비공식적인 통로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또 이웃이나 공동체를 섬겨야 한다. 슬픔, 상실, 이혼, 질병, 장애, 개인 문제 등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을 찾고, 이주민 가정이 눈에 보이거나 노숙을 하는 사람들을 섬길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노력하면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관심의 원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정의 사역의 첫 번째 실천은 바로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정의 사역이 단순히 긴급한 필요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장기적인 사역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 지역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단순 후원금 이상이 필요하다.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위협적인 사회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정치인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런 장기적 계획에 대해 세 단계로 나누어서 소개한다. 1) 원조 원조(Relief)란 신체적, 물질적, 경제적으로 시급한 필요를 직접 채워주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응급처치부터 해주고 회복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는 원조행위를 한다. 노숙자에게 임시로 숙소를 마련해 준다거나, 궁핍한 이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나눠 준다거나, 최소 비용을 받거나 무료로 병을 고쳐주고 상담해 주는 식의 서비스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조 사역이다. 좀 더 적극적인 형태로는 법률, 주거, 다양한 형태의 가정 폭력 따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할 수 있다. 2) 개발개발(Development)은 개인이나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여 원조에 의존하는 데서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을 보면 종의 부채를 면제하고 해방해 줄 때는 새로운 삶을 꾸려 갈 수 있도록 경제적 자원들을 넉넉히 제공하라고 주인들에게 명령했다. 여기에는 식량과 생업에 드는 각종 도구가 모두 포함된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법은 공동체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립할 기회를 보장해준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기회라면 재정적인 자원이 먼저 떠오를지 모르지만, 교육이나 법률 지원, 일자리 창출 따위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요소들은 쓰고 남은 걸 넘겨주거나 선심 쓰듯 베푸는 차원을 넘어 권리의 문제이다.” 개발은 단순히 지원을 받는 데서 벗어날 수 있는 자립할 수 있는 교육과 일자리 창출 등이 포함된다. 물론 개발은 원조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모되고 복잡하며 비용 부담이 크다. 교회는 단순히 구제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한 개발 단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은 단순히 개인의 구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회복이었다.[12] 개인의 위한 개발에는 교육, 직장 창출, 훈련 등이 포함된다. 이웃이나 지역에 대한 개발은 사회적, 재정적 자본을 사회 시스템에 투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택 개발, 주택 소유 그리고 여러 자본 투자를 의미한다.[13]3) 개혁개혁(Reform)은 즉각적인 필요를 채우는 구제와 의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의 차원을 넘어 의존성의 문제를 만들거나 약화하는 사회적 조건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노력이다. 여리고 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던 사마리아인이 여리고를 갈 때 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일만으로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여리고 가는 길에 강도가 출현하지 않도록 방법을 강화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구조적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은 결국 사회 개혁의 문제까지 나아가게 한다. 욥은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욥 29:17)고 말했고, 모세는 부자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는 법률 체계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말했다(레 19:15). 또한 사람들의 근소한 수입을 쥐어짜는 대금업 시스템에 대해서도 반대를 표명했다(출 22:25-27).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을 직접 바꾸는 일에 헌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회를 변화한다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도 적지 않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회 전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개인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는 데 집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죄를 교회가 외면한 채 구제 활동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중요한 목표임에 동의하더라도 여전히 어떻게 제도적 교회가 참여할 것인지는 고민이 필요한 영역이다.[14]그렇다면 한 교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는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구제하는 일이다. 또 개발의 단계에도 어느 정도 참여하고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개발의 단계는 한 교회가 전부 맡아서 하기에는 힘든 일이기에 지역 교회의 연합이 필요하다. 한 교회가 세 단계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복음과 말씀 사역이 흔들릴 수도 있다. 개발과 개혁의 단계는 교회가 지역사회 단체들과 연관해서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 교인들에게도 비영리 조직과 연합하여 개발과 개혁에 동참하여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쉽게 말해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교인들을 훈련하여 복음의 영향력이 담긴 작품을 만들게 할 수는 있지만 교회가 스스로 영화를 찍는 회사를 설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는 기관이나 조직은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구체적인 적용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 주권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지역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양육하는 책임이 있다. 그럴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세상과 구별된 방식으로 예술, 과학, 교육, 언론, 영화,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는 그리스도인을 낳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개인을 길러내지만, 지역교회가 자체적으로 특정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카이퍼는 그래서 제도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를 구분했다. 제도적 교회는 교회의 기관으로 공동체 안팎의 식구들을 구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바탕으로 복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도들을 양육하는 기능을 감당한다면, 유기적 교회는 개발과 사회 개혁 활동을 위해 다양한 기관, 단체와 연합하여 활동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 사역은 극도의 정밀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지역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일꾼들을 통해 말씀과 행동 양면에 걸쳐 움직여야 한다. 빈곤의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단순히 총과 칼로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그 종류가 다르다. 복음으로 무장해야 하고 교회가 함께 교회와 지역사회를 도와야 하지만 또한 개혁의 차원에 눈을 뜨고 동참하여 활동해야 한다. 단지 구제에만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또 복음을 제쳐두고 사회 개혁만을 부르짖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언제나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고, 하나님의 복음은 개인과 사회 구조 모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제 교회는 단순한 구제를 넘어 개발과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의무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하나님을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여길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가난한 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드리는 일이기에 기꺼이 나설 뿐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흡족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15]이러한 자세는 구제를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좌절하지 않게 우리를 도와준다. 결국 교회가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떨쳐 버리고 정의로워지라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에 먼저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나라의 샬롬이라는 이 땅의 번영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정말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일이 있으려면 반드시 정의 사역이 동반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행전 4:32-35)복음이 충만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문장은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행 4:34)라는 말이다.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모두 개인의 만족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관대함과 복음이 주는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 사역은 복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매이다.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건강한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삶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빈곤의 문제는 가난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이다. 주1. 팀 켈러, 여리고 가는 길, 45.2. 팀 켈러, 센터처치, 72.3. 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42.4. 같은 책, 34.5. 같은 책, 36.6. 팀 켈러, 오늘을 사는 잠언, 42.7. 정의란 무엇인가, 41.8. 여리고 가는 길, 84.9. 정의란 무엇인가, 116. 10. 정의란 무엇인가, 12011. 정의란 무엇인가, 117. 12. 정의란 무엇인가, 171-173. 13. 센터처치, 683. 14. 같은 책, 68. 15. 정의란 무엇인가, 170.
팀 켈러 이후 기독교 변증의 과제는 무엇인가?
by 김선일 ·신국원
2023-07-03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리디머 교회 설립자이자 전 세계에 복음적 도시교회 운동을 일으킨 팀 켈러 목사가 주님의 품으로 떠나고 한 달이 지났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21세기 문화에서 복음변증의 과제는 한국 교회에도 중요한 사명으로 다가온다. 이에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신학의 권위자인 신국원 교수(웨신대 초빙교수)와 복음전도와 회심 연구의 전문가인 김선일 교수(웨신대 교수)가 팀 켈러 이후 한국 기독교 변증의 과제와 방향을 주제로 대담했다. 이 대담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 정인찬) 주최로 6월 26일에 경기도 성남시의 공유공간인 분당살롱에서 진행되었다. 김선일: 오늘 이 귀한 자리에 한국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문화신학자이자 기독교세계관 학자인 신국원 교수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 교수님은 저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선교와 문화를 강의하고 계십니다. 신국원: 이 자리에 와 주신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의 형제자매님들, 그리고 공부하는 목회자들의 모임인 오르도토매오 소속 목사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김: 오늘 주제가 팀 켈러 이후 기독교 변증의 과제입니다. 사실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주제인데요. 먼저 팀 켈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잠깐 살펴볼까요? 그분은 미국의 고든콘웰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를 하셨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 Min,)를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1981년에 뉴욕에서 리디머교회를 설립하였고 2017년에 은퇴하셨습니다. 은퇴 이후에는 복음과 도시 사역 지원 단체인 City to City에 전념하시는 줄 알았는데, 돌연 2019년 췌장암을 앓고 있음을 알리셨고, 지난 5월 19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신: 팀 켈러가 나온 대학이 버크넬(Bucknell)이라고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작은 리버럴아츠 컬리지인데, 그 학교가 고전을 섭렵하도록 철저하게 교육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팀 켈러도 이미 광범위한 인문학적 소양을 축적하고 신학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 켈러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도 살펴볼까요? 고전적인 인물들로는 조나단 에드워즈, C. S. 루이스, 프란시스 쉐퍼, 레슬리 뉴비긴 등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의 저술이나 강연에도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시대에 그와 교류하면서 영향을 준 인물들도 있는데요. 도시선교로 유명한 하비 칸, 복음주의 영성신학의 책을 쓴 리처드 러블리스, 그리스도 중심설교에 관한 책을 쓴 에드먼드 클라우니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 그중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하비 칸일 것입니다. 하비 칸의 대표작 정의를 행하고 은혜를 설교하라(Evagelism: Doing Justice and Preaching Grace)는 복음전도와 사회정의를 통합시킨 유명한 책이지요. 오늘 주제가 하비 칸이 아니지만 참고로 하비 칸이 한국 선교를 하면서 굉장한 도전을 받은 것은 서구의 정통신학 위주 사상에서 1970년대 한국 용주골에서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하면서 큰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하비 칸은 그들에게 설교하면서 “한 주일 동안 열심히 사세요”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라는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 후 예수님의 삶을 정말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고민이 중첩되다가 결국 “I Change!” 즉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변증학 교수가 된 이후에 도시 선교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팀 켈러에게 영향을 준 하비 칸에게는 필라델피아(웨스트민스터신학교 소재지)와 뉴욕(리디머교회 소재지) 이전에 서울이 있었고, 서울 이전에는 의정부, 동두천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팀 켈러가 말하는 도시 목회는 세계 최대의 도시인 뉴욕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모인 그곳에서 어떻게 삶이 녹아있는 목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최근까지 한국 교계에서도 팀 켈러에 대한 추모 열기가 많았습니다. 전반적으로는 긍정적 평가가 많은 가운데 일부에서는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지성적이고 모범적인 목회자였지만 서구의 보수적 개혁주의 한계를 못 벗어났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신: 저도 그러한 비판을 본 적이 있는데 보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현재 있는 곳에서 성실하게 내 눈앞에 있는 분들을 잘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켈러라고 해서 생전 알지도 못하는 아프리카나, 미얀마 산골에서도 통하는 얘기를 해야 할 필요는 없지요. 그러한 비판은 일반적으로 지성인들이 제기할 수 있는 비판이긴 해요. 하지만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맨해튼의 중산층 이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성향에 맞게 복음을 전한 것이 비판받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에요. 자기가 뉴욕 사람이 아니면 잊어버리면 되는 거고요. 그의 책들이 범용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일리 있는 비판이긴 하지만 저는 오히려 칭찬같이 들립니다. 김: 팀 켈러의 사상 중에 또 하나 인기 있으면서 논란이 된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는 포스트모던시대에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닌 이들에게 죄를 우상숭배로 설명했습니다. 그의 책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에 잘 나오는데요. ‘우상’(idols)이라는 말로 인간의 문제를 설명한 이는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의 철학자 하웃즈바르트입니다. 팀 켈러도 하웃즈바르트의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Idols of Our Time)에서 착상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 교수님은 자유대학에서 공부하셨는데 하웃즈바르트는 어떤 분인가요? 신: 하웃즈바르트는 원래 경제학자이시고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다. 심지어 제가 박사 논문 디펜스하러 들어갈 때 저에게 메모를 건네시면서 격려하셔서 제가 감동받았어요. 당시 제 논문이 자유대학교 안에서 좀 논란이 돼서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이분의 키워드가 “우상”인데 켈러가 인용한 개인적인 우상이 아니고 민족주의, 이념, 혁명, 자본주의의 번영과 같은 우상을 말합니다. 팀 켈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민해야 하는 죄의 의미의 폭을 넓히기 위해 이 우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문화적 가치. 세계관. 거기에 깔린 치명적인 악과 독이 우상이라는 거지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좌우하고 결국 인간을 타락과 멸망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에 대한 경각심으로 의도적으로 쓴 표현인 것 같습니다. 맨해튼에 와 있는 사람들의 상황과 쉽게 연관 지을 수 있는 말로 접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쓴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구약과 신약의 선교적 내러티브에서 우상숭배의 문제를 일관되게 지적하던데요. 오늘날 우리가 “우상”이라고 하면 다소 미신적인 뉘앙스여서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기 쉬운데, 굉장히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팀 켈러의 기독교 변증에서 중요한 선행 작업이 문화 서사(cultural narrative)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상숭배가 현대인의 행복을 위한 집착이나 중독이라고 한다면, 우상숭배가 세련된 형태의 공통적, 객관적 가치관이 된 것이 문화 서사가 아닐까 싶은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 문화적 서사는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경처럼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는 겁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그것을 팀 켈러는 문화적 서사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문화나 유행을 보면 그것의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강남스타일’과 같은 노래는 강력한 쾌락주의적 문화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요즘 K-Culture가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한국이 만드는 문화적 서사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김: 말씀하신 대로 K-Culture, K-Pop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그걸 교회에서 활용하는 것에는 유의해야 할 점이 없을까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쾌락주의 서사가 깔려 있다면 은근히 그러한 세속적 가치가 스며들 수 있을 텐데요. 교회에서 아무 필터 없이 대중문화를 가지고 와서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신: 제 큰딸이 전에 베트남 오지에 선교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저한테 소녀시대의 영상을 보내달라는 거예요. 거기에 있는 아이들이 소녀시대를 너무 좋아해서 떼창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해요. 문화 서사를 교회 밖 사람들과 하나의 연결고리로 쓰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복음성가나 CCM 역시 세속음악을 차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여기까지가 기독교적이고, 여기서부터는 비기독교적이라고 경계를 짓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껍데기는 섞을 수 있는데 내용까지 섞어 버리면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민감하게 접근해야 합니다.김: 자, 이제 팀 켈러의 기독교 변증서들을 볼까요? 대표적으로,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The Reason for God)와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Making Sense of God)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말하다를 읽으면서 C. S. 루이스가 생각났고, 답이 되는 기독교를 읽으면서는 레슬리 뉴비긴이 떠올랐습니다. 신: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는 켈러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이 책이 정말 변증 서적인 이유가 의도적으로 기독교 출판사에서 출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어요. 이 책은 회의주의 시대에 종교적 관심은 있으나 삶의 의미를 상실해서 공허해하는, 성공한 젊은 층이 대상이었습니다. 현재 한국도 비슷한 상황에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회의주의에 빠져있어요. 이들보다 더 중요한 독자는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고, 한때 믿었다가 지금은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소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읽힐 수 있는 책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김: 저는 개인적으로 답이 되는 기독교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가 고전적인 변증의 주제들을 다루고, 기독교 변증의 토대가 되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답이 되는 기독교<답이 되는 기독교>는 가장 최근의 인식론과 시대정신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켈러가 이 책에서 “의미는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의미를 지어낸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후기구조주의나 사회구성이론이 현대인의 주요 가치관이 되었음을 말하거든요. 그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으로 켈러는 은혜를 제안합니다. 즉, 인생의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발견할 때 진정한 의미와 만날 수 있습니다. 팀 켈러의 이러한 사상적 성실성과 순발력이 놀랍습니다. 신: 답이 되는 기독교는 하나님을 말하다에 비해서 좀 더 적극적인 변증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공격적인 변론을 한다는 점에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스타일입니다. 세속의 사상들이 왜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 ‘종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당신이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도 종교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칼뱅이 말한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우상, 결국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입니다. 그런 질문 끝에 기독교는 왜 답이 되는가를 제시합니다. 번역이 참 잘 된 책인 것 같습니다. 김: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현대인들의 가치관을 다룰 때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정서주의’(emotivism)나 찰스 테일러의 세속시대(a secular age)와 같은 개념이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현대인의 신화에 대해서 켈러는 유한하고 제한된 조물 됨의 미덕을 해법으로 말하고, 자율적 자아와 자기용납을 최고선으로 여기는 정체성주의에 대해서 십자가의 겸손과 진정한 자신감이라는 해법을 내놓습니다. 근거를 잃은 세속적 낙관주의에 대해서는 기독교 안에 더 깊은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 아까 말씀하신 사회구성주의, 즉 ‘진리는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만든 것’이라는 사상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진리이고 선이고 아름다움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결국에 이 사회는 난장판이 될 위험이 있고, 현실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됩니다. 이 세상에 객관적 질서가 없다면, 완전 무질서와 상대주의가 됩니다. 결국 회의주의가 팽배하고, 회의주의는 허무주의를 낳게 되지요. 그래서 답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정서주의(emotivism)도 정서라기보다는 자기가 옳고, 자기 욕구에 충실하게 살자는 것이지요.김: 예,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emotivism이 번역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기 기분이나 마음에 좋은 대로 살면 된다는 풍조로 보입니다. 찰스 테일러가 말한 ‘자기 진실성’(self-authenticity)도 그와 비슷한 말인 것 같습니다.신: 제가 이번 학기에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의 학생들과 레슬리 뉴비긴의 The Other Side of 1984라는 책을 같이 읽었는데요. 뉴비긴이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다음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기독교적으로 볼 때 영국 사회가 절망적이라는 것, 희망의 소멸이었습니다. 켈러가 사역하던 상황은 뉴비긴의 때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목회자 입장에서 굉장히 안타깝게 설교하면서 답이 되는 기독교를 얘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저는 이게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본다. 이 <서구 기독교의 위기>를 목회자들께서 꼭 읽었으면 좋겠어요. 이 책은 곧 성경의 메시지인 우리들의 소망은 현실을 보는 눈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역사에 닿아있는 시선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 속에서 소망을 얘기해야 합니다. 김: 뉴비긴의 깊은 희망이라는 개념을 들으니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이사야가 앗수르의 위협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이방 종교 어디에 여호와 하나님처럼 역사를 주관하며 설명하는 신이 있느냐고 계속해서 물어보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이는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사상이 이사야가 제시하는 강력한 희망의 증거였던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책들 외에 기독교 변증에 도움이 되는 팀 켈러의 다른 책은 뭐가 있을까요?신: 그 외에도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도 역시 변증적 성격의 책입니다. 고통, 악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철학과 종교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를 무시하거나 내 삶과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뉴욕의 세속적인 지성인들에게 팀 켈러의 이러한 책이나 중요한 현대 사상가들이 인용되는 그의 설교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정말 자기들의 인생에 답이 되는지를 궁금하게 하고 탐구하게 한 것입니다. 김: 지금까지 팀 켈러의 변증적 유산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나눴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역자들을 위해서 한 말씀 해주실까요?신: 팀 켈러는 굉장히 학자적인 목회자였습니다. 대단히 광범위한 주제의 독서가 그의 설교와 변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정말로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과거처럼 적당히 목회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요즘 한국의 젊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처럼 깊고 넓은 독서를 기반으로 해서 설교를 준비하고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회를 준비하시는 분들은 대충하면 이러한 경쟁자들, 아니 동역자들에게 분명히 밀릴 것 같습니다. 충실한 독서를 통해서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현장에서는 온유와 겸손으로 진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무례한 기독교나 소심한 기독교가 아닌 적절한 기독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 복음에 대한 담대한 확신을 어떻게 적절하게 전할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팀 켈러에게서 배울 점이기도 합니다.
성경적 창조의 관점‘들’ (2)
OPC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의 교훈
by 이윤석
2023-07-01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근래에 팀 켈러가 유신진화론자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대체로 젊은지구론에 경도되어 있다. 물론 젊은지구론 자체도 주요한 관점이므로, 이 입장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젊은지구론 역시 기원의 문제를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겸손한 자세가 요청된다. 하지만 그들은 젊은지구론이 아니면 유신진화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창조론을 공격하는 듯하다. 그들에게, 미국장로교회(PCA) 교단의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에 이어, 여러 기독교 교단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정통장로교회(OPC)의 관점을 알려주고 싶다. OPC 교단은 1936년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이 주도하여 미국장로교(PCUSA) 교단에서 독립하여 나온 교단이다.OPC 교단은 2001년에 창조의 여러 관점을 연구하는 교단 차원의 특별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3년간 연구 활동을 수행하고 2004년 OPC 교단 총회에 ‘창조의 관점들 연구위원회 보고서’(Report of the Committee to Study the Views of Creation)를 보고하였다.이 위원회가 창조에 대한 여러 관점을 고찰할 때 준거로 삼은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1. 참되고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이 영원 속에 홀로 계셨으며 그 옆에는 아무런 물질도 에너지도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2. 참되고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이 그의 주권적 작정에 따라서 무로부터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보이든 안 보이든)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다. 3. 우주의 어떤 부분도 또는 어떤 생물도 우연히 또는 주권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지 않고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4. 하나님이 사람,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로 불멸의 영혼을 소유한다. 따라서 인간은 비록 그의 몸이 그 주변 환경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다른 모든 지상의 생물들과는 다르다. 5.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이 된 것이지, 이미 선재하는 어떤 생물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긴 것이 아니다. 6. 전체 인류 가족은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첫 번째 인간 부부로부터 내려왔으며, 이 계승은 일반적인 세대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7.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거룩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과 행위언약에 들어갔다. 언약에서 아담은 그의 후손들을 대표하며, 그가 그 요구사항을 어겼을 때 일반적 세대에 의해 계승되는 모든 인류는 그 안에서 죄를 범하였고 그와 함께 죄의 상태로 떨어졌다. 8.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6일 동안에 하셨다. (우리는 ‘날’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인식하였으며, 한 해석이 여타 해석을 모두 배제하고 주장되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위의 신학적 입장은 이 위원회가 건전한 신학적 기반에 서서 연구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위원회 위원들은 위 여덟 가지 확언에 모두 동의하였다. 다만 마지막 여덟 번째에 대해서는 창조의 일을 6일 동안에 하나님이 하셨다는 진술 자체에는 동의하나 ‘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해가 있었고 그런 서로 다른 이해들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다. 필자가 다년간 팀 켈러의 저작들을 연구한 경험에 의하면 팀 켈러 역시 이 위원회 위원들이 동의한 위 신학적 진술들과 같은 신학적 입장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필자의 관찰로는 팀 켈러는 특정한 창조의 관점을 선택하여 그것만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몇 가지 의견을 살짝 언급한 적은 있어도 어떤 특정한 관점의 지지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팀 켈러가 성경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격려하고 장려할 수 있도록 과학적 성과가 성경과 조화되도록 유연하게 접근한 것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일부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주간의 ‘날’을 24시간 하루로 못 박고 이 해석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타협이론이라며 비성경적이라고 공격하는 그들은 건전한 기독교 교단이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지 깊이 공부할 필요가 있다. OPC 교단의 특별 연구위원회는 교단이 수용할 수 있는 창조에 대한 관점을 다섯 가지로 크게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위원회는 이 다섯 가지 관점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가진 교리 체계의 정합성을 부정하는지 아닌지 잘 검토하였고, 주석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이 다섯 가지 관점은 다음과 같다.첫 번째 관점은 ‘일반적인 길이의 날 관점’(the days of ordinary length view)이다. 이 관점은 24시간 길이를 갖는 일반적인 날들에 걸쳐서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이해하며, 교회사에서 주된 입장을 차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총회 참석자들이 24시간 하루 관점을 특정하여 창조를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며, OPC 교단 내에서도 이 관점만을 유일한 창조의 해석이라 하지는 않는다고 밝힌다.두 번째 관점은 ‘특정되지 않은 길이의 날 관점’(the days of unspecified length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 주간의 일곱 날이 인접해 있는 것은 맞지만 각 날의 길이는 특정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린(W. H. Green), 바빙크(Herman Bavinck), 워필드(B. B. Warfield), 영(E. J. Young) 등이 이런 관점을 주장한다. 세 번째 관점은 ‘날-시대 관점’(the day-age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의 날들 하나하나가 긴 기간을 갖는 각 시대를 가리킨다는 입장이다. 핫지 부자(C. Hodge와 A. A. Hodge), 메이첸 등이 이런 관점을 주장한다. 네 번째 관점은 ‘틀 관점’(the framework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의 여섯 날을 일반적인 24시간 하루의 날로 생각하지만, 그 날들이 비유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여긴다. 창조 주간의 전반부 3일과 후반부 3일을 대응시켜, 전반부 3일에는 각 공간을 만들고 후반부 3일에는 각 공간을 채울 것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클라인(Meredith G. Kline), 페스코(John V. Fesko), 아이언스(Lee Irons) 등이 주장하는 관점이다. 다섯 번째 관점은 ‘유비적 관점’(the analogical view)이다. 이 관점은 창조 주간의 하루는 분명 역사적인 개념이지만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이루어진 기간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유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콜린스(C. John Collins), 갓프리(W. Robert Godfrey) 등이 이 관점을 주장한다.이 다섯 가지 관점은 모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교리 체계 정합성을 위배하지 않는다. OPC 교단은 이처럼 유신진화론은 배제하되 젊은지구론의 관점인 ‘일반적인 길이의 날 관점’ 외에도 네 가지 다른 관점들, 즉 ‘특정되지 않은 길이의 날 관점’, ‘날-시대 관점’, ‘틀 관점’, ‘유비적 관점’도 수용 가능한 창조에 대한 타당한 관점이라고 판단하였다.팀 켈러가 속한 PCA 교단뿐만 아니라 OPC 교단도 이처럼 다양한 관점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팀 켈러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젊은지구론
유신진화론
조던 피터슨과 그의 실용적 하나님
by Dani Treweek
2023-06-30
최근에 나는 어쩌다가 조던 피터슨의 2022년 호주 투어 마지막 밤에 참석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그가 진행하는 좀 이상한 팟캐스트 인터뷰를 한두 번 들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반영하는 기사도 몇 편 읽었다. 친척이 내게 투어 표가 한 장 남는다고 말했을 때, 나는 피터슨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고, 따라서 별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피터슨의 폭넓은 사상에 대한 지식의 부족은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게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물론, 그날 투어에서 나는 깨알같이 메모하며 열심히 들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강의 한 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내가 그의 사상에 정통하지 않다는 게 이 글을 쓰는 데에 매우 이상적인 위치를 부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알다시피 나는 피터슨의 열성 팬도 아니고 또 그의 ‘안티’도 아니다. 그의 강의를 듣고 그 내용에 대해서 깊이 숙고한 한 여성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내 생각 중 일부를 공유하려고 한다. 먼저 피터슨의 놀라운 퍼포먼스에 그날 나는 경외감을 느꼈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메모 하나 없이 무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내내 그는 달변을 쏟아냈고, 말 그대로 9천 명을 쥐락펴락했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굴곡진 강의 속으로 그는 우리 모두를 능수능란하게 이끌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해냈고, 그 현장에 참여한 것은 나름 특별한 경험이었다. 피터슨은 심각한 주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뤘다. 나는 그 점에 크게 감동했다. 그는 개인에게 인간관계와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광범위하게 풀어냈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가진 중심 위치와 생명력을 강조했다. 인간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이 성장하는 존재라는 사실 앞에서 그는 매료된 게 분명해 보였다. 피터슨 사상에 중심을 차지한 핵심은 인간의 열심(human endeavor)이다. 인간 이야기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보시다시피 피터슨에게 인간의 이야기는 실제로 인간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는 게 분명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각자의 삶에서 각 개인이 만들어가는 “최적화”(optimization)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근본적인 인간의 임무가 우리의 삶, 즉 우리 자신을 지속해서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라는 게 아니다. 자기 개선과 향상을 향해 올라가라는 것이다. 인생이란 오르막을 오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두 팔을 좌우 대각선으로 아래에서 위로 뻗기까지 했다. 우리 각자는 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책임져야 한다. 인간의 책임은 자신의 삶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매우 어려운 이야기이다. 세상은 얼마든지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곳이 될 수 있다. 세상은 우리를 최적화에 전념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오히려 쇠퇴에 굴복하도록 유혹한다. 그래서 피터슨은 궁금했다. “적응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에 다다른 도전의 시기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이야기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 이야기에 다 있다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잡성과 고통 속에서 최적화를 촉진하게 하는 이야기(또는 패턴 내지 원형)이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올바른 이야기 또는 최고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피터슨의 강의가 조만간 나올, 인류의 “영적 및 신학적 노력”에 초점을 맞춘 그의 책 내용과 교차한다. 어떤 이야기가 가장 좋은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항상 종교가 추구하는 탐구였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최적화의 이면에 있는 패턴은 종교 산업의 근본적인 임무이다.” 자기 개선의 오르막 여정은 모든 종교, 모든 종교 경전, 모든 종교 선생,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종교 실천이 항상 몰두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목표는 인류에게 최적화의 패턴을 담은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 속에 담긴 잠재력을 잘 활용하는 데 필요한 자원까지 제공한다. 이런 주장은 피터슨으로 하여금 성경을 최적화된 이야기 전달을 위해 매우 구체적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된 메타 스토리로 바라보게끔 만든다. 그러나 피터슨이 제시하는 성경적 내러티브는 대체로 내가 알던 것과 크게 달랐다. 그가 강의에서 소개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브라함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의 모험그리스도인에게 아브라함 이야기는 타락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이야기이다(창 12:1-3; 15:1-6). 아브라함의 후손을 큰 민족 곧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고 그들을 통하여 온 땅에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헌신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아브라함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과 목적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서 시작하시기로 결심한 일에 관한 것이다(로마서 4장).그러나 피터슨에게 아브라함 이야기는 “모험”을 시작함으로써 자신을 최적화하려는 한 사람의 열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기존의 위치에 머무르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피터슨의 눈에 아브라함 이야기는 모험을 통한 인간 최적화의 이야기이다. 지금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는 그곳을 당장 떠나서 모험하라고 당신에게 명령하는 이야기의 원형이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자리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모험이라는 부름을 받는 데 꼭 필요했던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 더 살펴보자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이야기에 대한 피터슨의 언급이다(마 6:19-21). 그리스도인은 이 구절을 천국 시민으로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예수님의 긴 가르침인 산상 수훈의 맥락에서 읽는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권고로 그 구절을 이해한다. 우리의 보물과 마음은 지금도 천국을 다스리시는 예수님께 속해 있다. 그러나 피터슨에게 예수님은 지금 단지 “생계에 대한 추상적 개념, … 인생의 고통과 불행이 닥칠 때 무엇 또는 누구와 함께하게 될까”에 관해서 고민하라는 권고일 뿐이다. 따라서 피터슨의 해석에 하나님 나라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제공하는 것은 이생에서 최적화하는 삶을 사는 데에 꼭 필요한 일종의 “보물”에 투자하는 데 필요한 청사진에 불과하다. 피터슨에게 성경은 인간을 최적화하는 데 필요한 프레임워크이다. “인간에게 구현된 가장 초월적인 패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사랑은 인간 최적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건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또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 없이 우리는 자신을 성공적으로 최적화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피터슨에게 사랑은 궁극적으로 이기적이다.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피터슨은 다른 사람의 최적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들의 최적화를 나의 최적화만큼 중요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최적화에 투자하지 않으면 그들이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 그들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그건 궁극적으로 나의 최적화를 위협한다. 이처럼 피터슨에게 사랑은 이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 이웃을 사랑한다. 하나님에 대한 피터슨의 태도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이다. 하나님이 주인공 같아도 실상은 인간 최적화라는 목표에 구조와 자극을 제공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주인공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거나 최적화에 가장 유익한 “보물”에 투자하도록 부름받을 때 꼭 필요한 매개체이다. 아담을 초조하게 만들어 인간의 조상이 되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하와를 하나의 “유익한 적수”로서 창조했다고 이야기하는 데 꼭 필요한 구조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존재다. 인생 오르막 끝에 있는 목표를 은유하는 용어, ‘약속의 땅’을 살짝 엿보는 데 필요한 장치도 하나님이다. 피터슨의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하고 의롭고 사랑스럽고 인격적인 존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 역사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이야기의 근본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다. 피터슨의 방대한 작업이 가지는 여러 측면을 중요하고 통찰력 있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게 꼭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거기에도 나름에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는 피터슨의 모든 작업을 다 평가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지금 내가 평가하는 건 그날 밤 내 두 귀로 똑똑하게 들은 그의 강의 한 편이다. 그날 그가 가르친 내용은 내가 도무지 인식할 수 없는 성경 이야기였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관해서도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무엇보다 내가 생전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묘사였다. 피터슨과 대조적으로, 성경 이야기는 철학적으로 추상화된 은유로 쓰인 것이 아니다. 실제 역사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기록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궁극적으로 성경은 창조된 인간의 지상적 “최적화”에 관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화로움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피터슨의 말은 옳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의 형성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원제: Jordan Peterson and His Useful G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조던피터선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6) : 우상숭배와 복음
by 고상섭
2023-06-28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정리하면서 ‘복음을 가장 먼저 거론했다. 팀 켈러를 통해 복음을 재발견했다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복음 자체를 몰랐다기보다 복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았기 때문이다. 팀 켈러가 전한 복음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가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이 남달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팀 켈러를 통해 복음을 재발견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지만, 그 이전에 나쁜 소식이어야 한다. 내가 죄인이며 나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나쁜 소식이 선포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쁜 소식 이전에 나쁜 소식으로 인도하는 팀 켈러의 복음 전달 방식은 우상숭배를 깨닫게 한다. 무엇이 우상인가?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을 것일지라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는 뉴욕의 청중에게 기독교의 죄 개념을 가르친다는 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죄에 대한 문화적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팀 켈러는 시대에 맞는, 그러나 더 깊고 넓은 관점으로 죄를 설명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개념으로 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죄의 설명은 인간의 행위적 죄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팀 켈러는 죄를 짓는 마음의 동기를 살피고, 비록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이지만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람아, 이들은 여러 우상을 마음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며, 걸려 넘어져서 죄를 짓게 하는 올가미를 자기들 앞에 둔 사람들인데, 내가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에스겔 14:3)대체로 사람들은 우상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신상을 떠올린다. 유명 “아이돌” 가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우상숭배를 이야기한다.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상이다. 팀 켈러는 내가 만든 신에서 우상을 이렇게 정의했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2]그럼 내 안에 우상이 존재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팀 켈러는 슬픔과 절망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슬픔은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이다. 슬픔은 여러 좋은 것들 가운데서 하나를 잃었을 때 찾아온다. 예컨대 직장에서 낭패를 겪었다면 가정에서 위안을 얻어 헤쳐 나갈 수 있다. 반면에 절망은 위로받을 길이 없다. 궁극적인 것을 잃었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3]이렇게 내 삶을 절망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안의 우상일 가능성이 크다. 가장 의지했던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자녀를 우상숭배의 위치에 올리게 된다. 자녀를 하나님 자리에 두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부모를 실망시킬 때, 단순한 슬픔을 넘어 절망의 단계까지 나간다면 자녀가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배우자의 배신에 인생이 무너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성경을 읽고 싶지도 교회 나가고 싶지도 않을 만큼 절망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배우자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삶의 결과이다. 거기에서 회복될 때는 “내가 하나님보다 배우자를 더 사랑했습니다”라는 회개를 통해 회복된다.사랑의 순서결국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며, 이것은 사랑의 순서의 문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가장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다른 사랑이 대체된 것이 죄이며 곧 우상숭배이다. 사랑에는 순서가 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삶의 순서가 세워지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두 가지로 나누어 ‘향유하는’ 사랑(Frui)과 ‘사용하는’ 사랑(Uti)로 설명했다. 어떤 대상을 향유 곧 즐기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말이다. 반면에 어떤 대상을 사용한다는 말은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하여 잠시 수단으로 쓴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향유하는 사랑의 대상이시고, 나머지는 사용하는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4] 사용의 대상이 되는 사랑을 향유의 자리에 올릴 때, 우상숭배가 되고 우리는 가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죄는 순서가 바뀐 사랑이고, 죄에서의 회복은 사랑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상숭배가 된다. 반지의 제왕에서 중요한 소재는 악의 군주 사우론이 소유한 ‘절대반지’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라도 이 반지를 끼려는 사람은 누구나 탐욕에 물들게 된다. 톨킨에 해박한 톰 피쉬 교수는 이 반지를 ‘심리적 증폭기’라고 불렀다. 마음의 가장 절실한 갈망을 우상으로 확대한다는 뜻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선한 의도를 가진 등장인물들도 반지를 끼고 나면 그 선한 의도를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 반지가 좋은 것을 절대화해서 다른 모든 도의나 가치관을 전복시킨다.[5]톨킨이 말하는 ‘절대반지’는 좋은 의도와 좋은 목표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절대화될 때 악한 일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우상은 대부분 좋고 선한 가치들이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 공장이다. 성공, 사랑, 가족, 재물 등 모든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켜 버린다. 미국 캘리포니아 코너스톤 교회를 개척했던 프랜시스 첸은 부부 제자도에서 “결혼은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혼은 중요하고 선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선한 결혼도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릴 때 그것은 가짜 하나님, 우상이 된다. 우상숭배의 위험성 우상숭배의 위험성은 그것이 우리를 노예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숭배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속박된다. 사사기는 그 패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중 하나인데, 여기서 이스라엘은 죄와 회개와 우상숭배를 반복한다.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 그들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과 시리아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사람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주님을 저버려, 더 이상 주님을 섬기지 않았다. (사사기 10:6) 바알과 아스다롯은 가나안의 신이었다. 아람과 시돈의 신들은 북쪽의 신, 암몬과 모압의 신들은 동쪽의 신, 블레셋은 남쪽의 신이다. 이스라엘이 섬겼던 신들은 모두 그들을 억압했던 민족들의 신들이었다.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이 아람에, 에훗이 모압과 암몬에, 삼갈이 블레셋에, 드보라가 가나안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을 구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어느 나라의 우상을 숭배할 때마다 그 나라가 결국 이스라엘을 압제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우상을 숭배할 때 그 우상의 예속상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상숭배는 종살이로 이어지고, 그 종살이는 다시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이런 패턴은 사사기뿐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가치와 목적을 사람과의 관계에서 찾는다고 하자. 예를 들어, 결혼 생활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다가, 결혼 생활이 실패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연히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해, 더 좋은 배우자가 필요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우상숭배가 아니라 우상을 충분히 숭배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6]또 팀 켈러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비전 또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 목회자가 건강한 교회를 꿈꾸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교회가 건강해지지 않는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한 질책과 비난이 이어진다. “나는 잘 못해” “나는 개척이 맞지 않아” 같은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이 이어진다. “이런 설교를 듣고도 변하지 않는 성도들이 문제야.” 또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는 외부 환경의 문제에 두려움을 느낀다. 교회 월세가 오르거나 교회를 이전해야 하는 문제들에 불안해진다.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 꿈꾸고 날마다 기도하지만 목회자의 마음속에 자신을 향한 비난, 상대방을 향한 비판, 그리고 외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건강한 교회라는 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우상숭배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두면, 교회가 좀 건강해지지 않아도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알고, 또 교회가 건강해지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우상숭배가 위험한 이유는 죄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므로 죄가 아닌 선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돌아온 동생에게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눅 15:29)라고 토로한다. ‘여러 해’는 많은 시간을 의미하고, 그는 아버지의 명에 순종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선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도덕적 삶을 통해 아버지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우상숭배를 한 것이다.그가 아버지에게 그토록 노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집안의 옷이며 반지며 가축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게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당신의 모든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7]이렇듯 우상숭배는 우리의 삶은 가짜 신을 섬기지만, 입술의 고백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걱정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가장 큰 위험성이다.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상의 노예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팀 켈러는 우리 안에서 우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우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이 아닌 내면의 뿌리까지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자기 내면에 있는 우상을 발견할 때, 돈, 성공, 사랑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의 심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표면적 우상’은 더 구체적이고 눈에 잘 띄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돈을 사랑하는 표면적 우상도 근원적으로는 돈을 통해 인정을 원하는 우월감이 내면에 작용할 수도 있고, 돈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끼는 안정감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같은 돈이라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통제, 안정, 우월감 등의 다양한 근원적 우상이 존재할 수 있다.[8]근원적 우상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늘 피상적인 우상만을 다룰 위험이 있다. 팀 켈러는 제임스라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를 통해 근원적 우상의 위험성을 설명한다. 제임스는 예수님을 믿기 전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했고 매번 여자를 유혹해 잠자리를 갖고 나면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적 일탈을 끊고 기독교 사역에 매진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게 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 옮겨진 게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런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참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으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 기독교 사역도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인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상은 꼭꼭 숨어있다.[9]문화 내러티브 속의 우상 팀 켈러는 우상이 단지 개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영향을 주는 문화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한다. 우상은 한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18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신이 사라지고, 비록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신의 대리 역할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술, 이성, 문화라고 말한다.[10]데이비드 폴리슨은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Idols of the Heart and Vanity Fair)이라는 논문에서 우상숭배로 인간을 몰아가는 세 가지 대상이 있다고 말한다. 육신과 세상과 마귀이다. 육신은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죄의 문제가 아닌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다. ‘허영의 시장’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소를 비유한 것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믿음’을 만나 서로의 간증을 나누면서 도착한 곳이 ‘허영의 시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온갖 욕망을 팔고 있었고, 진리를 찾다가 믿음은 순교하고 크리스천은 감옥에 갇히는 일을 겪게 된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우상이 한 개인의 욕망만이 아니라, 허영의 시장이라는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팀 켈러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에서 기독교 상담이 가지는 약점 중 하나가 개인의 죄에만 집중한다는 것이었는데,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에 대한 폴리슨의 가르침 덕분에 문화에 내재하는 죄의 영향력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 수 있었고,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영향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고백했다.[11]팀 켈러가 설교와 변증에서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설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문화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상은 목상 앞에 절하는 원시인을 떠올리지만 … 현대도 동일한 우상을 섬기고 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와 경기장 같은 신전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 미모와 권력, 돈과 성취의 신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한다.[12]복음으로 우상을 깨뜨려라 팀 켈러는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문화 속에 있는 신념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즘 시대 사람들의 생각 밑에 당연한 듯 깔려 있는 배후 가정도 많다. 문화가 기독교에 관해 우리에게 주입하는 이런 신념들 때문에 기독교는 점점 더 개연성이 떨어져 보인다. 이런 신념은 보통 논증 과정을 거쳐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연예와 소셜 미디어의 이야기와 주제 속에 녹아들어서는 우리 사상을 파고든다. 그러면서 어느새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작업은 상당히 끈질겨서, 많은 기독교 신자의 마음과 생각에서조차 신앙은 점점 현실성이 없게 느껴진다. 아마 처음에는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13]결국 우리의 마음의 우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복음뿐이다. 그 예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그는 교인들이 재정 사용에 있어 서로 베푸는 관대한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억지로 후원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는 사도로서 명령하여 헌금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명령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에 관해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9)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관대한 은혜에 감동하도록 이끌었다. 즉 그리스도의 관대하심을 통해 어떻게 그들이 구원받았는지 생각하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 역시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사람이 타인에게 관대한 마음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교만과 염려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이 쓴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모은 나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스스로 얻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교만이다. 또 다른 요인은 염려이다. 자기 재물을 타인을 위해서 사용하면 자기 스스로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못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관대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들의 마음에 있는 문제, 즉 교만이나 염려와 같은 내면의 동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이런 내면의 정서에 반응하며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전부 내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구원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복음을 묵상할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교만이 깨어지고 우리가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복음을 묵상하면 염려가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주의 가장 강력한 존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겠는가?[14]바울은 헌금을 이야기하면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상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불쌍한 사람들의 영상을 보고 헌금을 했다면, 그것은 감정(emotion)의 변화에 불과하다. 몇 달이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게 될 가능성이 크고, 자신이 힘들어지면 헌금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참된 변화인 정감(affection)이 변화되려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물질주의’가 깨져야 한다. 그 물질주의라는 우상이 깨지고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어질 때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기쁘게 희생할 수 있는 복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의지적으로 행동을 바꾸려고 하거나, 아니면 돈이라는 피상적인 우상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교만과 염려의 문제를 해결할 때 비로소 참된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팀 켈러는 죄와 복음의 관계를 우상숭배를 통한 회개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기 전에 나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나쁜 소식을 깨닫게 하는 좋은 방식이 바로 우상숭배의 관점으로 죄를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보다 더 깊은 마음의 동기를 다루어주며, 또한 죄로 생각하지 않았던 도덕의 탈을 벗게 해준다.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에서 이렇게 말했다.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죄뿐 아니라 우리의 의도 회개하는 사람들이다.주1. 팀 켈러, 센터처치, 271.2.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22.3. 같은 책, 14.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향유의 대상으로 말하지만, 사람도 향유와 사용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향유한다고 할 때도 하나님보다 더 향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5. 같은 책, 19. 6. 팀 켈러, 당신을 위한 사사기, 179-180.7. 팀 켈러, 탕부 하나님, 71.8. 팀 켈러, 같은 책, 116. 9. 같은 책, 175.10.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6.11. Tim Keller, “Tim Keller Reflects on David Powlison(1949-2019)”12. 같은 책, 15.13. 팀 켈러, 답이 되는 기독교, 16. 14. 스티브 엄 엮음,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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