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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서들로 읽는 '코로나19'의 정국
by 장대선
2020-03-10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 특히 신천지 집단의 일방적이고도 맹목적인 신앙의 태도에서 발생한 급격한 바이러스의 전파는 급기야 경기도지사의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는 단계에 이르게 했다. 국회에서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파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안타까운 것은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고 있는 경기도지사 또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점이다. 아울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한 국회의원의 상당수도 기독교 신자이다. 즉 기독교 관원이라 할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확립하신 신앙과 양심의 자유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혹은 거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 중에도 현 정권에 대한 반대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일부 급진적 성향의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대정부 차원의 반대와 퇴진 운동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과 같은 대책을 신학적인 비평과 국가 권세와 교회의 적절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정교분리’(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전혀 별개로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존재와 구성원들이 모두 국가라는 제도적인 영역 안에 포함된 이상,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서로 교차하는 영역을 얼마만큼으로 할 것인가, 혹은 서로 교차할 수 없는 영역을 얼마만큼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와 규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교회의 문제에 국가의 공권력이 관여해서는 안 되고, 세속정치에 교회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철저한 정교분리가 교회의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한다면, 미군정 하에서 교회가 받았던 적산가옥의 활용이나 군사정권 하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역할로 받은 수많은 혜택은 전부 불법이며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사실 장로교회는 교회와 국가권력 사이의 적절한 영역설정에 성경적인 지침을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로부터 17세기 개혁신학이 융성했었던 시기에 이미 충분한 경험과 신학적 검증 가운데서 적절한 영역을 설정한 것이다. 16세기에 이미 융성한 장로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신앙고백(1559)에서부터 17세기 장로교회의 신앙 표준을 완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 이르기까지, 장로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 사이의 적절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입증하는 신조와 교회 정치의 원리들을 산출해 둔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 신앙고백 제39조를 보면, 관원의 역할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무질서와 정욕을 억제할 굴레로 세상에 세속정부와 법률을 세우셨다고 믿는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만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 만이 아니라 첫 번째 돌판을 거스르는 범죄까지 억제하시기 위하여 관원들의 손에 검을 쥐어 주신 것이다.”라고 했다. 제40조에서도 관원에 대한 복종에 관하여 “우리는 관원들의 법률과 규칙에 따르며, 세금, 조세, 그 밖의 의무를 수행하고, 비록 그들이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침해받지 않는 한 자율적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하는 멍에를 메야 한다.”고 했다. 벨기에 신앙고백(1561)에서는 제36조에서 위정자들에 관하여 “그들의 직책은 단지 국가의 복지에 관심을 두고 감시할 뿐 아니라, 거룩한 목회사역을 보호하며, 모든 우상숭배와 거짓된 예배를 제거하며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위정자들은 어디서든지 복음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장려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사람에게서 존귀와 예배를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서도 제23장 국가의 관원에 관하여 서술하는 과정 중 3항에서 이르기를 “관원은 말씀과 성례의 집행도,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에 일치와 평화가 유지되도록, 또한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한 상태로 간직되도록, 그리고 모든 신성모독과 이단들의 활동을 금지하도록, 아울러 예배와 권징에서 생기는 모든 부패와 악습을 예방하거나 개혁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가 정당하게 확립되고 시행되며 준수되도록 적절한 수단을 강구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의 의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이처럼 이미 언급한 프랑스 신앙고백과 벨기에 신앙고백,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 하더라도 교회와 국가의 위정자 혹은 관원들에 대한 분명한 역할과 한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개혁된 교회들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에서 동일한 맥락의 문구를 찾아볼 수 있을 만큼 교회들은 이미 그에 관한 입장을 충분히 정리했다. 물론 현대사회의 관원들이 모두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다종교국가로 존재하는 실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의 신자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얼마든지 적절한 실천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의 신앙을 가진 관원들의 경우라면 더더욱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자신이 감당해야 할 적절한 실천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행해야 마땅한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교회들에 출석하는 관원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행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현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한 일련의 항목은, 작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정국 가운데 엮여 있는 신천지 이단이나 무분별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 일부 단체들에게, 그리고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는 현 실정에 대해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판단과 조언을 할 수 있는 지침들을 서술하고 있다. 선동을 주도하는 일부 세속정치 지향의 사역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적인 권세든지 교회적인 권세든지 간에 어떤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한 4항 초반부의 신앙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고 있는 가운데 그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할 기독교 관원들에게는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거나 예배의 문제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2항 초반의 신앙고백을 살펴보아야 한다. 작금의 ‘코로나19’ 정국 가운데 깊이 엮여 있는 신천지 이단과 그들에게 빠진 자들에게는 “그리고 ‘맹목적인 양심’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2항 후반부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판단과 조언을 들어야 한다.교회의 사역자들과 신앙인들 가운데 이러한 신앙고백의 문맥을 특정한 시대, 곧 16세기와 17세기 유럽 지역의 종교․사회적인 특수성으로 이해하고 고려해야지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 견해를 흔히 볼 수 있다. 신앙고백은 단순히 그 시대의 영주들이나 관원들의 견해나 입김을 의식하여 작성한 것이 아니며,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그러한 견해를 결코 섣부르게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적인 권세든지 교회적인 권세든지 간에 어떤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한 4항 초반부의 신앙고백이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중략]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한 벧전 2:13-16절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거나 예배의 문제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2항 초반의 신앙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한 행 4:19절 말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울러 “그리고 ‘맹목적인 양심’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2항 후반부의 신앙고백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한 롬 10:17절의 말씀과 그 외의 수많은 성경 구절들에 근거하여 정리하며 고백한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롯한 역사적 신조와 신앙고백의 문구들을 그처럼 쉽게 시대적인 산물로 간주할 수가 없을 것이다.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 가운데서, 많은 신앙인이 의외로 간단하게 자신들의 신앙적 밑바닥을 보이는 것 같다. 즉 국가 위정자들에 관하여, 이단들에 대하여, 그리고 예배에 관하여 너무도 쉽게 자신들의 오류와 불신앙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결코 간단하고 짧은 생각 가운데서만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과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이 시대의 변화가 제시하고 있는 질문에 대하여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는지를 스스로 통찰하는 의미로서, 이미 역사를 통해 충분히 논의되고 검증되었던 신앙고백서와 신조들을 깊이 있게 탐구해 보는 차분하고 건전한 열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 섣부른 답변을 남발하기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행 17:11-12)았던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과 같아야 할 것이다.
사회이슈
코로나19
바이러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프랑스신앙고백
벨기에신앙고백
정교분리
COVID-19
‘코로나19’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by John Piper
2020-03-02
Podcasts_Ask Pastor John 특별 중계! 긴급 ‘코로나19’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팟캐스트 인터뷰를 아티클로 전합니다.[토니 랭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의 특집 녹음을 위해 존 파이퍼 목사님과 함께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온 세계에 전파되고 있다는 신문보도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으며, 현재 53개국에 걸쳐 확산되고 있습니다. 감염자는 세계적으로 8만3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사망자 수는 거의 3천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몇몇 국가에 확산되던 현상에서 이제 전세계적으로 유행처럼 퍼져가는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부통령에게 미국에서 이 바이러스를 멈추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또 많은 이들은 절망적으로 봅니다. 바이러스 전파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몇 달 동안 계속될 거라고 말합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결국 많은 미국인들이 이 바이러스에 노출될 거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여전히 많은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 시장 경제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습니다. 수출입과 국제 무역 중단으로 다우존스 지수는 이번 주에 계속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헤드라인과 검증되지 않은 뉴스들로 정보에 대한 신뢰를 잃고 두려움에 빠지기 매우 쉽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불확실성이 이제 미국에도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남부아시아에 사는 팟캐스트 경청자들로부터 현지의 최근 정보를 제공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싱가포르에 사는 한 남성이 이런 질문을 보내주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 안녕하세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시작하여 전세계 여러 나라를 감염시키는 양상으로 펼쳐지는 상황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싱가포르에 들어왔을 때, 정부와 시민들은 이에 대처를 잘했고, 우리가 힘을 합쳐서 잘 대응하여 국제적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대응은 엇갈렸습니다. 몇몇 교회는 예방 대책을 주지하면서 주일 예배를 지속해서 드렸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예배를 모두 중단했습니다. 몇몇 목회자들은 ‘믿으면 바이러스에 전염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막아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죄악 가득한 도시와 교만한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목사님, 크리스천들이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을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존 파이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라고 물은 질문에 저는 성경에 근거하여 대답해보려 합니다. 우선 답을 하기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의문을 품도록 잘못 말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고통에 대비하도록 돕는 것과 고통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을 제가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누군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에 신학에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현재 죽어가고 있으며, 수십만의 사람들이 애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그분들의 삶과 시간적으로 잘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한 교회의 입장에 서 있다면, 지금 여기서 말할 때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이제 받은 질문으로 돌아가 대답해 봅시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한 이해. 임상적, 역사적 사실과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사실로 시작합시다. 2004년 12월 26일, 주일에 인도양에서 일어난 쓰나미로 인해 20만 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던 사람들도 예외없이 쓸려내려 갔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크리스천들이 거기에 있었다면, 이러한 일은 크리스천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이제 성경적 사실을 봅시다. 마가복음 4장 41절은 “그(예수님)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그래서 이 두 사실-역사적 사실과 성경적 사실-을 함께 연결하면 이러한 진리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자연 재해를 멈출 수도 있었으나 2004년에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지혜롭고 옳으며 정의롭고 선한 것을 행하시므로, 그 치명적 재해 속에 지혜롭고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입니다.그러므로 이번 ‘코로나19’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서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제지할 수도, 제지하지 않을 수도 있는 완벽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일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죄나 사탄, 질병이나 피해 그 어느 것도 예수님보다 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주도권을 잃어본 적이 없으며, 원치 않는 일을 용인하도록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11).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그러므로 문제는 예수님이 모든 죄악되고 사악한 차원까지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재난과 질병을 감독하고 제한하며 인도하고 지배하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 그리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성경에 근거하여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 입니다.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우리가 토대로 사용할 수 있는 4가지 성경적 근거들이 여기 있습니다.1. 타락의 결과로 탄식하게 된 세상아담과 하와를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인 우리의 몸을 포함하여 창조된 만물들이 타락과 허무를 경험할 것이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죽을 것이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육체적 타락과 허무와 사망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 20-23절의 요점입니다.“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다음 구절은 크리스천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모든 창조물이 질병과 재해와 죽음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의 자유를 물려받을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크리스천들도-바울은 “성령을 받은 우리들도”라고 말합니다-타락과 허무와 질병과 재해와 죽음을 모든 창조물들과 함께 나누며 탄식할 것입니다. 탄식하며 (부활의 때에 일어 날)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들에게 다른 점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타락한 현실이 정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고통은 정화시키기 위함이지 징벌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살전 5:9). 우리는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처럼 질병으로 죽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원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처럼 죽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쏘는 것이 제거되었습니다(고전 15:55). 이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토대로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입니다.2. 은혜로서의 질병하나님은 때로 그분의 백성들을 정화시키고 심판에서 구하시기 위해 질병을 주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정죄가 아니라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은혜 행위입니다. 이 점은 고린도전서 11장 29-32절을 근거로 합니다. 이 본문은 주의 성만찬을 잘못 사용하는 점을 다루고 있지만, 그 원리는 더 폭넓게 적용됩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크리스천들]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질병과 연약함과 죽음으로]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어린 아이와 같이]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이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합시다. 주 예수님은 연약함과 질병을 통해 사랑하는 자의 생명을 거두십니다. 예수님은 연약함과 질병을 치유실 때(마 4:23; 8:17; 14:14)와 그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갈 때를 묘사하기 위해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의 행보를 끊으시고 그것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들은 질병으로 죽지만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전 11:32)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고린도에 있는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 몇 명을 그리 하실 수 있다면, 지금도 ‘코로나19’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에게도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주의 성만찬을 잘못 사용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종류의 죄악된 행보에 대해서도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죽음이 특정한 죄 때문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근거입니다. 3. 심판으로서의 질병하나님은 그분을 거절하고 스스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심판을 내리기 위해 때로 질병을 사용하십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왕은 스스로 높여 신이 되려했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모든 이들에게 그같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한 우리의 많은 통치자들이 매일 바로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 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는 순전히 일반 은혜와 자비일 뿐입니다.또 다른 예는 동성애적 성교의 죄입니다. 로마서 1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그것은 로마서 1장 1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것이 세 번째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길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때로 심판을 내리기 위해 질병을 사용하실 수 있고, 지금도 사용하고 계십니다. 4. 하나님의 천둥소리모든 자연 재해, 즉 홍수, 가뭄, 메뚜기 떼, 쓰나미 혹은 질병 등은 심판을 내리려 하시는 하나님의 천둥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영원한 은혜로 모든 사람들에게 어디 있든지 회개하고 그들의 삶을 바르게 하라고 부르시는 촉구입니다. 이 근거는 누가복음 13장 1-5절에 있습니다. 빌라도는 성전에서 예배자들을 대량 학살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옆에 서 있던 사람 18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그 이유를 듣기 원합니다. 제가 받은 질문처럼 말이죠. “좋아요. 예수님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 좀 시켜주세요. 이 자연 재해와 그 잔혹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이 사람들은 그냥 그 옆에 서 있다가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4-5절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이것이 이 순간 ‘코로나19’로 탄식하는 이 세상의 모든 개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저와 경청하고 있는 여러분, 토니와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 이에 대해 듣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회개하라”는 천둥소리 메시지를 받고 있는 겁니다. (저는 중국 당국이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 읽은 기사에 따르면, 그들은 최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점점 가혹하게 대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에 맞추기를 바랍니다. * 방송 직접 연결 Podcasts_Ask Pastor John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w Do We Make Sense of the Coronaviru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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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파이퍼
전염병 앞에 역사적 기독교회는 어떻게 했을까?
by 장대선
2020-03-01
일반적으로 교회는 구약시대로부터 항상 있어온 것이지만, 특별히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회로서의 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하신 바에 따라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형성된 소위 ‘초대교회’(Early Church)로 본다. 그리고 그 때에 사도들과 전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던 자들을 가리켜서 교회의 ‘비상직원’(Extraordinary Officer)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통상적인 교회의 직무를 감당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교회의 ‘통상직원’(Ordinary Officer)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의 직원들 혹은 사역자들은 통상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며, 그런 직원들에 의해 유지되는 교회는 통상적인 형태로 운영되는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운영과 관련한 치리규정들은 통상적인 운영의 원칙들과 규정들로 정해져 있다.그러나 통상적인 교회의 운영이 항상 통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데, 예컨대 전쟁이나 전염병 혹은 재해와 같은 비상적인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들은 통상적인 교회의 운영을 기록한 여러 치리서들에서 쉽게, 혹은 세세하게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독특하게도 16세기 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에서는 이미 그러한 경우들에 관해 상당히 상세하게 기록한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먼저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 제10장에서는 “신실한 모임에서 행해진 신앙 행위에 관하여” 다루는 가운데, 3조에 명시하기를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 내용: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임직을 받을 때, 그리고 전국 총회의 소집에 관하여 의문이 생길 때, 하루 혹은 그 이상의 날을 공적 그리고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 그러나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신이 없이 행하며, 또한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섭리의 근거와 명분의 성숙한 고려 하에 행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가능하면 금식을 시행하도록 조언하며, 그들이 만장일치로, 편리하게 그것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면, 가능한 한 많이 행할 수 있다.”고 언급하여 명시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또한 성찬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12장에서도, 10조에서 “성찬이 시행될 때와 마찬가지로, 잡다한 병자들이 들어올 경우 건강한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잔을 취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므로, 이 경우에 목사와 장로들은 최대한의 신중한 태도로 이 일을 행하며, 경건한 질서가 유지되고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공히 언급된 전염병의 상황에서 교회는 최대한 신중하고 성숙한 고려 가운데 행하도록 권장하되, 아울러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과 같은 특별하고 비상적인 행실 가운데서 그처럼 신중함과 조심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한 비상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프랑스 개혁교회는 신중하고 조심스런 대책 마련뿐 아니라, 오히려 신실하고 간절한 기도와 금식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로 말미암아 최근 한국의 교회들은 공예배 중지 및 예배당 폐쇄와 같은 초유의 일들을 급작스럽게 겪고 있다. 특별히 예배당에 모이는 집회와 행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던 그동안의 교회 운영으로 볼 때에, 그처럼 공예배 및 각종 모임들을 중지하거나 잠정적으로 폐쇄하는데 따른 대비책 또한 실질적으로 갖추고 있지 못한 실정이기에, 그 충격과 혼란이 상당하다 하겠다.하지만 일찍이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하루 혹은 그 이상의 날을 공적 그리고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을 하도록 했는데, “그러나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신이 없이 행하며, 또한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섭리의 근거와 명분의 성숙한 고려 하에 행해야 한다.”고 하여, 그러한 기도와 금식이 결코 신비적으로나 미신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그렇다면 그처럼 신비적이거나 미신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고려 하에 시행하는 비상 기도와 금식과 같은 것의 실제적인 시행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스코틀랜드 가정예배모범’으로 흔히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가정예배모범(The Directory for Family Worship)으로서, “개인 및 사적 예배와 성도 간의 상호 교화를 위해, 그리고 가정예배를 소홀히 하는 일들을 책망코자 총회는 아래와 같이 지침을 마련하여 준수하도록 결의한다.”고 한 문구를 배경으로 한 개인 및 사적 예배, 그리고 가정예배를 지도하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장로들의 역할이다. 즉 “본 총회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장로들이 개교회에 소속된 각 가정들에서 이 같이 중요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부지런히 살펴보고 돌아보도록 명한다. 만일에 그러한 가정이 발견된다면 그 가정의 가장이 먼저 그 잘못을 시정하도록 사적인 권면이나 경고를 받아야 할 것이며,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러한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려 한다면 지교회의 치리회(혹은 당회)에 의해 엄중한 책망을 받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처럼 책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그와 같이 심각하게 당회의 지침을 위반하는 그 강퍅함으로 인해 성찬을 받기에 합당치 못한 자로 간주되고 이를 뉘우치고 돌이키기까지 성찬참여를 금함이 마땅하다.”고 한 지침과 같은 맥락으로, 평소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적인 예배와 행사 뿐 아니라 사적이거나 개인적인, 그리고 각 가정에서의 예배를 통해서도 경건한 신앙을 유지하고 도모할 수 있는 훈련과 여건이 전제될 때에,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를 제대로 대비할 수가 있는 것이다.안타깝게도 우리의 신앙과 경건의 패턴에 있어서 그 동안 간과되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사적이고 개인적인, 무엇보다 가정예배를 통한 신앙과 경건생활이다. 양적 성장을 위주로 하여 구성된 대부분의 교회들 가운데서 이처럼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건생활, 그리고 가정에서의 경건생활을 유지하는 예가 드물며, 그조차도 지교회의 지도와 치리와는 거의 별개로서 철저히 개인적인 사안으로만 인식되어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 동안 우리들이 드려온 예배와 공적인 모임들이 혹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었기에 공적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으로까지 내몰리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러한 재앙과 질병의 때를 극복할 사적이고 개인적인, 무엇보다 각 가정을 책임지는 영적인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지원이 교회적으로 이루어져 왔었는지 진지하게 고려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일 것이다.
코로나19
가정예배
기도
금식
경건생활
공적예배
성찬
프랑스개혁교회치리서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
by Steve Hoppe
2019-05-22
톰은 아내 사라의 외모에 일일이 간섭을 하며 자신의 취향에 따르도록 강요한다. 아내의 옷을 골라주고, 헤어스타일을 정해주며, 몸매를 유지하도록 식사량도 제한한다. 사라가 톰의 간섭에 대항하면, 그는 에베소서 5장 22절 말씀을 인용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미란다는 자녀를 과잉 보호하는 엄마다. 19살인 딸 케이트가 나쁜 친구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홈스쿨링을 한다. 또한 딸이 운동이나 댄스 수업에 가지 못하도록 막고, 운전 면허도 따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양육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5장 33절 말씀을 인용한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빌은 아내 엔지가 원치 않을 때에도 성관계를 강요한다. 그는 관계 중 아내를 거칠게 다루고 가끔 때리기까지 한다. 빌은 고린도전도 7장 4절 말씀을 대며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이 세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배우자나 부모가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례들이 극단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이보다 더욱 심하다. 부부 생활 상담가이자 목사로서 나는 그간 가정에서 벌어지는 소름 끼치도록 끔찍한 영적 학대의 사례들을 경험하였다.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란 무엇인가먼저 가정의 영적 학대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가족을 통제하는 데 성경 말씀이나 성경적 원칙, 영적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다.학대는 성적(빌의 사례), 신체적(빌의 사례), 사회적(미란다의 사례), 정서적(톰의 사례), 언어적, 경제적 또는 심리적 폭력의 성격을 띨 수 있고, 이 중 한 가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지는 문제는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가해자의 굳은 마음이 말씀을 흐릿하고 이기적인 렌즈에 비춰 해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진실을 왜곡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계명에 반하는 행위이다.영적 학대가 가정에서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영적 학대가 가정에서 이토록 자주 그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가족은 우리에게 기쁨부터 고통까지,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안겨줄 수 있는 강력한 관계성을 가진 대상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만큼, 서로를 통제하고 싶은 유혹 또한 크다. 가정의 영적 학대자는 이런 악한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다.둘째,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는 비교적 그 현장을 감추기가 쉽다. 해가 지고 문이 닫히면 그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친구도, 친척도, 교회도, 그리고 경찰도 알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정 학대를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가해자들이 노리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영적 학대가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각 가정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정에서 영적 학대가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는 15가지 신호가 있다. 모든 신호가 포함됐다고 할 순 없지만, 이 체크 리스트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만약 당신의 배우자나 부모가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아래의 행동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적 학대를 당하고 있다.1. 신체적 상해를 입힌다2. 성생활을 강요한다3. 모욕적인 말이나 욕을 한다4. 다른 가족으로부터 고립시킨다5. 협박을 한다6. 당신의 친구 관계를 비이성적으로 제한한다7. 재정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8. 다이어트나 운동을 강요한다9. 불합리한 이유로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10. 개인 이메일이나 SNS 계정을 통제한다11. 소그룹이나 교회 모임 등의 사회 활동 시 당신이 할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을 정해준다12. 방이나 옷장, 지하실에 당신을 가둔다13. 이동 수단을 차단한다14. 상담가나 멘토 등 신앙의 리더에게 연락하지 못하게 한다15. 당신의 죄에 대한 벌을 준다나는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모든 학대의 사례를 보았다. 하나님은 이를 증오하신다하나님은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그분은 이를 명백하게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영적 학대를 증오하신다. 디도서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단을 가르치는 유대인들을 꾸짖는다. 그들의 행위가 영적 학대와 매우 흡사하지 않은가?"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0-11, 16).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영적인 학대를 혐오하신다.침묵을 깨라영적 학대는 수 세기 동안 가정에서 행해졌지만, 이를 폭로한 피해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왜 다수의 피해자는 침묵하고 있을까?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첫째, 일부 피해자들은 자신이 학대를 당하는지도 모른다. 신앙이 어리기 때문에 아직 성경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다. 혹은 본가에서 비슷한 영적 폭력을 경험하며 자라서 이런 행동이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가해자를 너무 사랑하여 학대를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많은 피해자들은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니 하지 못하는 것이다.둘째, 어떤 피해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가해자들은 종종 교회에서 존경 받는 장로나 목사 혹은 영적 리더, 심지어 의지할 대상인 부모 등의 위치에 있다. 그들은 대개 피해자들이 가지지 못한 신앙적, 관계적 자산을 공개적으로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피해자들이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해 보이는' 가해자의 편을 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입을 열지 않는다.셋째, 피해자들은 대개 두려워한다. 이 사실을 알렸을 때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아닌지? 상대가 사실을 부인할 뿐더러 피해 사실을 알린 것 때문에 더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영적으로 미성숙하다고, 혹은 정신이 이상하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악하다고 망신을 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외에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황에 대한 걱정으로 피해자들은 공개적으로 학대의 실상을 알리는 것에 대해 꺼리게 된다.진작에 우리 목회자들과 교회 리더들은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항했어야 했다. 여기엔 교회와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도 당연히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가정의 영적 학대는 생각보다 훨씬 더 흔하게 일어난다. 순진한 양이 매일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리고 가정과 교회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다.그러므로 우리 모두 가정의 영적 학대를 몰아내기 위한 민감하고도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반드시 기울여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 Hidden Epidemic God Hates 번역: 박현아
문화
사회이슈
영적학대
가정
피해자
증오
두려움
침묵
교회는 중독자에게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by Kent Dunnington
2019-02-15
중독자들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가 있었다. 중독자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들이 중독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중독자’ 개념, ‘중독’과 ‘중독 물질’에 해당하는 개념은 현대의 산물이다. 중독자라는 명사를 처음 사용한 기록은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현재 통용되는 중독이라는 개념은 분명하게 미국적 상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개념이 미국의 금주 운동의 상황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전에는 중독자들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면, 오늘날에는 모든 이들이 중독자인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초에 중독의 개념이 형성된 이후, 이는 대중의 의식 속에서 동화되고 점점 더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 중독의 목록들은 점점 더 늘어났고, 이제 현대인들은 ‘중독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독은 우리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주요 중독(major addict)은 우리 시대의 무서운 질병이다”와 같은 말은 중독이 사회 전반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방증한다. 중독의 보편화라는 개념은 특히 서구에서는 거의 모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다.작금의 한국 사회 역시 중독이라는 렌즈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려는 경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에 중독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 걱정한다. 예전에는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여기던 것을 이제는 초콜릿 중독으로 보게 되었고, 또 사무실에서 오래 일하는 것을 이제는 일 중독이라고 보게 되었으며, 정욕이라고 여기던 것을 현대에는 성 중독이라고 보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중독이 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이유일까? 우리 시대와 문화가 중독 그 자체를 마치 매력적인 선택으로 보게 하고, 우리의 행동과 경험을 자연스럽게 중독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묘사하도록 만드는 이유는 정확하게 무엇일까? 사실 나는 중독이 현대성에 대한 구체화된 문화적 비평의 일종이며, 중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현대 시대의 선지자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무의식적이지만 선지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그들의 말을 경청하면, 교회의 고유한 문화가 어떻게 중독을 만들어 내는 일에 일조했는지, 교회가 이에 대한 대안 문화를 제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대안 문화에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게 될 것이다. 중독이라는 매혹적인 우상중독은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우상의 한 형태이다. 다시 말해 중독은 그 대상이 곧 신이라는 거짓 약속을 아주 잘 이행하기 때문에, 독특하게 매력적이며 사로잡는 힘이 강력하다. 모든 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번영과 성취를 자신의 능력으로 달성하고 스스로 확립하게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특히 중독은 우리의 시도가 거의 성공에 근접하게 하는 반역이기 때문에, 매우 강력하고 유혹적이며 매력적인 반역죄이다. 또한 너무나 극적이고, 총체적이며, 끊기 힘들만큼 집요하게 사람을 유혹하므로 중독은 막강한 우상 숭배로 쉽게 넘어간다. 따라서 중독자는 실제로 고통을 피하고 싶거나 기분 전환을 하기 원할 때,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평범한 오락에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성도들은 중독이라는 우상을 위협적으로 느끼고는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지 중독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인식해서만은 아니다. 중독의 막강한 힘에 비해, 과연 복음이 그것을 이겨낼 만큼 매력적인지에 대해 스스로 의문이 들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가 교회에 나타나거나 목회자가 지난 10년 동안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크리스천들이 절망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상황들이 복음의 힘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복음은 정말로 이 모든 것들을 이겨낼 만큼 충분히 강력한가?하지만 이러한 위협감과 의구심의 뿌리는 복음의 힘 자체가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독자와는 달리, 크리스천인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온통 다 빼앗기고자 하는 열망도 부족하고, 거룩한 삶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도 적은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에서 황홀함을 찾고자 하는 욕구 역시 중독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중독자들을 구해낼 만큼 능력이 있는지를 의심하는 그 마음의 뿌리이다. 평안한 교회를 위협하는 중독자들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오늘날의 중독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크리스천의 갈망이 미약하고 보잘 것 없으며 심지어 평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스스로의 신앙과 중독자들이 본인들의 우상에 완전하게 빠져있는 모습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불성실하고 불충분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중독자라는 존재 자체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더불어, 스스로의 미지근한 신앙을 바라보며 우리는 크리스천로서 자신의 삶이 중독자에게 진정한 대안을 제공할 만큼 충분히 매혹적이고 아름답지 않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의 깊이를 조금 더 확장시킨다면, 우리가 진정 중독자들처럼 하나님께 빠지기를 과연 원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 중의 다수는 품위 있고 점잖은 신앙 생활을 원한다. 그런데 중독자들의 갈망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반성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그 품위 있는 신앙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교회가 중독자들을 품고 자유케 되도록 돕는 행위에 대하여 반감을 갖는 상태에 이르른다. 혹시 중독의 문제를 말할 때, 기질적으로 중독되기 쉬운 사람이거나 혹은 절제력이 약해서 발생하는 일이므로 교회가 그들을 긍휼히 여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치부해 버리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 속에도 크리스천으로서 중독자에 대한 위와 같은 종류의 반감이 새겨져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과연 교회가 중독자의 삶에 설득력 있는 신앙적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고민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교회가 중독보다 더 매혹적이고 강한 힘으로 하나님께 완전히 빠지는 삶을 구현해 낼 수 있는가를 고심해 보아야 한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예수님이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병자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눈먼 자에게 보게함을, 포로된 자에게 놓임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중독자에게 새 삶을 주러 오셨다. 이러한 메시지와 사명을 구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Addict as Modern Prophet번역: 정은심
문화
사회이슈
중독자
우상
유혹
복음
긍휼
소비주의에 저항하라
by Carl Trueman
2018-12-26
문화에 대한 상반된 목소리는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현대 복음주의의 상징적인 주제가 되었다. 성경에 기반한 문화 저항론과 기독교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문화 옹호론 사이에 문화가 논의의 중심에 있는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현대 문화를 옹호하는 크리스천에 대하여 한 가지 당혹스러운 사실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화’가 우리가 일컫는 대중문화, 특히 젊은이들이 거의 주도하는 영화, 인터넷, 음악 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들이 ‘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사회가 삶의 방식을 대대로 전승시키는 전통, 제도, 장치로서의 ‘문화’를 염두에 두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늘날 ‘문화’는 대중문화를 의미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개념이 공급과 소비로 대표되는 시장주의의 틀 안에 축소되어 있다. 음악이나 영화 등은 사회가 삶의 방식을 대대로 전승시키는 전통, 제도, 장치로서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당장 잘 팔릴 것과 잘 팔리지 않을 것, 즉 상품성을 반영한다. 그러한 대중문화는 단순히 현대인의 기호를 반영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들의 기호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문화에 대해 논의할 때 현대의 상투적인 관념 가운데 하나인 ‘현대 문화는 항상 변하고 있다’라는 관념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관념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현대 문화가 항상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변화 자체가 현대 문화이다. 오늘날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들(패션, 음악, 연예)은 늘 변화를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문화의 변치 않는 본질인 소비주의의 단면이다. 소비를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서는 그 집단을 유지시켜 나가는 본질적 엔진이 곧 변화이다. 의도적인 진부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상품과 이를 팔기 위한 시장, 새로운 것에 대한 탐욕 등이 문화를 급속한 변화로 이끄는 필수적 요인이다. 만약 이러한 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한 대의 텔레비전, 한 대의 냉장고, 한 대의 스마트폰으로 만족하고, 또 한 벌의 멋진 정장을 입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2년에서 3년 사이에 스마트폰을 바꾼다. 자주 바꾸는 것이 좀 부담스럽더라도 우리는 삶의 많은 물질들을 계속해서 바꾸어 나간다. 이전 모델보다 기능적으로 더 나은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유행에 더 맞는 것으로 바꾼다. 심지어는 대중문화의 초국가적 대표들(청년문화와 스포츠)도 똑같이 급속한 변화에 종속되어 있다. 어떤 청년이 작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싶어 하겠는가? 또한 국가대표 팀을 비롯해서 갈수록 많은 스포츠 팀이 유니폼 디자인을 매우 자주 교체한다. 이는 관중들로 하여금 최신 디자인의 유니폼을 구입하도록 유도하고, 더불어 그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마치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 기를 불어넣어 그 경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이 모든 변화는 내가 위에서 암시한 것처럼 일종의 착시 현상과 같다. 세상은 영원히 변하고 있는 상태로 보일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마치 어지럽고 변화무쌍한 그림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한없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착시 현상일 뿐이고, 모든 세대가 자신에 관해 믿고 싶어 하는 일종의 만들어진 신화(神話)를 낳는 현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은 독특하고 특별하며, 작년에 나와 세상을 지배했던 것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가치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우리는 마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변치 않는 일관된 한 가지 문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변화를 숭배하는 소비주의 문화다. 이 소비주의 문화는 교회가 반드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대 문화의 본질이다.그러면 교회는 소비주의 문화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다. 바로 그 문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교회는 지역 차원에서든 교파 차원에서든 반-문화의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정책이나 TV 프로그램 등을 대상으로 선포한 ‘문화 전쟁’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문화에 저항할 필요가 있고, 이 부분에 있어서 교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 소비주의의 열매 안에 기독교 정통주의를 반대하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견고하거나 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끊임없이 이동하거나 해체되거나 무너지거나 변형되거나 심지어는 그와 정반대의 것으로 변화할 때, 고정 불변의 진리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래서 의미의 참된 정의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세상이 물질적 소비를 따라 가는 방식과 세상이 진리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은 그 방향이 동일하다. 끊임없는 변화가 세상을 유지시키는 한 요소로 간주될 때, 이 변화의 문화는 불가피하게도 우리가 어떤 옷을 사야 할지를 결정하는 방법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시 말해, 변화의 미학이 곧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결정짓는다.둘째, 소비주의가 끌고 가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은 상품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안에서는 시장에서 내쳐지지 않을 상품을 찾는 것, 그리고 내 상품을 소비자가 사고 싶게끔 매력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물론 이러한 문화 안에서 정통주의가 상품으로서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팔린다고 해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소비주의 문화는 정통주의를 손질하여 변화시키고, 재포장하고, 더 매력적인 것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시장에 등장하는 다른 매력적인 상품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부추긴다.요약하면, 기독교는 그 자체로 현대 문화에 대한 저항이다. 즉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고, 바울 당시의 예수님은 오늘날의 예수님이며, 하나님은 유일한 조물주이시고, 그 외의 존재는 모두 피조물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은 소비주의 문화의 피상적인 특성과 근본적인 특성 모두에 저항한다. 피상적 특성이란 ‘안정된 것은 존재하지 않고 변화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소비주의의 겉모습’을 말하고, 근본적인 특성이란 그 소비주의를 변함없이 유지시키는 방식인 생산자-소비자 형태의 사회구조적 역학 관계를 의미한다.이 즈음에서 우리가 한가지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혁명을 팝니다’(Nation of Rebels: Why Counterculture Became Consumer Culture)라는 흥미로운 책에서 조셉 히스(Joseph Heath)와 앤드류 포터(Andrew Potter)는 1960년대에 ‘노 로고’(No Logo)와 같은 표어의 등장을 통해 소비주의가 어떻게 반-문화주의마저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였는지 보여 준다. 1960년대의 미국에서는 브랜드와 소비로 점철되는 현대 문화에 대한 저항 운동이 부상했는데, 시장은 이를 ‘노 로고’라고 하는 또 하나의 유행으로 만들어 관련 상품과 이미지를 판매하는 전략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반-문화주의가 상품이 되면서 그 진정한 저항 정신은 흔적 없이 종식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노 로고와 연관된 상품은 엄청난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를 진지하게 되짚어 봄으로써, 소비주의는 지금도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가장 강력한 문화의 힘 가운데 하나이고, 심지어는 소비주의에 저항하는 정신까지도 상품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 강력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그러므로 교회가 단순히 변화에 변화로 대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 문화를 이끄는 동력들, 곧 상업적 마케팅, 탐욕, 능력과 성공에 대한 세속적 개념, 복음보다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는 욕구 등과 교회가 어떠한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현대 정치에서 사용되는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행동은 지역적이되 계획은 글로벌하게 유지해야 한다. 지역 교회는 확실히 문화에 대한 저항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집단이다. 예컨대 매주 예배를 드리는 동안 사도신경을 낭송함으로써, 기독교는 다시 만들어지는 종교가 아님을 교회와 세상에 명확히 선포해야 한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들은 자신의 직분이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사다리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나 이런 저런 정치적 연설에 대해 공허한 통찰력을 전파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는 일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 그렇게 공허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일은 장려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소비주의 문화의 가장 피상적인 증상에 불과하다.멈출 줄 모르고 변화하는 특성의 우리 문화는 진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다시 바꾸고, 재포장하는 가공할 만한 힘을 자랑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소비자에게 그 진리를 상품의 형태로 판매함으로써, 변화의 문화는 본연의 힘을 유지 및 확장시켜 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로서의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저에 흐르는 소비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변화는 빙산의 일각처럼 실제적인 위협이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위협은 수면 아래에 있음을 기억하라. 다시 말해, 교회는 모든 것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드는 이 변화의 문화에만 저항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본질적 특성에 저항하도록 부름 받았다. 저항해야 할 그 특성은 바로 소비주의다. 소비주의는 우리의 전체적인 경제적 관점과 행위를 장악하여 대중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삶과 사회를 지배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w Consumer Culture Fuels Change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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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히스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by Matt Redmond
2018-12-24
요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힘들어 하는지 알고 있다. 스크루지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한 편의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당연한 일들이 되었고, 어쩌면 늘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시즌의 즐거움은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자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이 되어 왔으리라.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나는 누군가의 가족에게 일어난 슬픈 사건으로 인해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어려운 시간이 될 수 있는지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는 거의 극단적인 절망과 실패가 자리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이 고통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즐거워하기란 불가능한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로도 나는 그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물론 이해한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휴일이란, 심지어 완벽한 상황 중에도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일은 꼭 암이나 이혼, 아니면 식사 자리에 빈자리가 생기는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연중 가장 멋진 시간으로 만드는 요인이 동시에 그 시간을 가장 잔혹한 시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돌아보면, 나 역시도 그런 어려움에 잘 대비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런데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통념과 조금 다른 생각을 말해 보고자 한다. 나는 어쩌면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행복한 사람들을 위한 날이라는 집단적인 문화 의식(collective cultural consciousness) 속에서 이날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가적인 분위기에서 가족들과 함께 벽난로 주변에 모여 앉아 행복해 하는 그런 날로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웃을 일이 늘 많은 사람들만을 위한 날로 생각한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정말로 그런 날인가? 그렇게 도심의 축복 가운데 살아가는 성공적이고 멋진 사람들은 휴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소파에 기대어 크리스마스 시즌의 클래식 영화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우리는 마치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이다. 크리스마스, 곧 우리를 구원하는 자가 육신이 되어 찾아오셨다는 위대한 이야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 소식이다. 특히, 구원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소식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알고 우리의 연약함을 끌어안기 위해 아기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게 하시고자 먼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즉, 죽음의 두려움과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찾아 오신 것이다. 예수님을 처음으로 경배했다고 알려진 자들은 고상한 사회적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지저분하며 생활과 노동에 짓눌린 목자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이들에게 무시당하는 자들이었다.예수님은 거울을 보면 추한 모습만 비추어지는 그런 자들을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결코 예쁘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는 딸들을 위해 오셨다. 크리스마스는 돈이 없어 ‘술집의 공연’이나 홀로 보러 가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암 때문에 삶이 절망스럽게 된 자들을 위한 날이며, 그 외의 다른 삶은 불가능한 꿈처럼 보이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소셜 미디어밖에 친구가 없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흔들리는 결혼 관계로 인하여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미술 도구들을 갖길 원하지만 아버지가 계속해서 공사 장비만을 맡기는 가정에서 살아가는 아들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사망 선고를 앞두고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릇된 장소에서 사랑을 갈망하는 창녀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세상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아이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실패한 꿈들에 갇힌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탕진하여 가정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감히 자신을 너그럽게 받아 줄 곳이 없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자녀들의 결혼 생활이 혼란 속으로 접어드는 상황을 지켜 보는 부모들을 위한 날이다.결국 크리스마스는 이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한 은혜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날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로 인해, 그 아기가 태어났을 때 뉘였던 구유는 절망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넘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니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크리스마스는 그날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날이다. 바로 그런 날이 크리스마스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mas Is for Those Who Hate It Most번역: 장성우
문화
사회이슈
죄인
희망
구원
예수님
은혜
복음
소셜 미디어의 위험과 약속
by Collin Hansen
2018-12-20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라는) 경쟁적인 두 가지 영역 사이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소셜 미디어는 가르치고 리더십을 행사하는 데 가치 있고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블로그 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증인 공동체인 지역 교회를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의 강점과 약점을 배우는 가운데, 지역 교회를 우선시하는 지혜와 분별력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공존하는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는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를 형성한다. 최근에 젊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칼빈주의의 부상을 살펴보라. 과거에 일부 칼빈주의자들은 이따금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설교테이프를 바꿔 들으며 교제했다. 반면에, 이제는 활기가 넘치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마음껏 활용하며 서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거대한 가상 네트워크를 즐긴다. 그러나 이런 네트워크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유명한 블로그 운영자들은 글 쓰는 재주와 매일 그 글을 업데이트하는 부지런함을 통해 온라인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탄탄한 교회론으로 무장하지 않고, 또한 교회 리더십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재능을 교회 밖, 세상에서 사용하게 될 것이다. 매일 컴퓨터 앞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이미 고립된 생활을 하는 블로그 운영자들은 인터넷 상에서 여러 유혹을 받게 된다. 그들은 교회에 대해 심히 회의적이 될 수 있고, 다른 저자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 될 수도 있다. 친구나 멘토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적절한 지혜로부터 단절된 활동을 하는 블로그 운영자들은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비록 직관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셜 미디어는 외톨이를 양성하고 조장한다. 개인주의는 미국 사회만이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확산되어 있다. 페이스북은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우리가 일반 대중에게 보이기 위해 프로필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만을 게시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가상 세계에서는 자신에 대하여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진 인간은 미국 문화의 주요 산물이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그의 유명한 책,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에서 남북전쟁 전 미국의 중산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자신을 고립된 사람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의 운명이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손에 달린 것처럼 상상하곤 한다.” 이는 오늘날 인터넷 시대의 생활상에도 일치하는 모습이 있다.소셜 미디어는 민주주의와 실력 위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혈통, 전통, 지역 등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직업 윤리와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무엇이든지 달성할 수 있다. 한편으로, 소셜 미디어의 이러한 특징은 기독교의 목적에 부합하게 활용될 수도 있다. 기독교 선교는 이러한 환경에서 확장될 수 있다. 온라인 공간은 크리스천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 메시지를 혁신적인 방식으로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제 캠퍼스 사역자들은 페이스북 이전의 시대를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과거에 그들은 새로운 학생들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셜 미디어는 기본적인 제자도를 훼손시킬 수 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윌 윌리몬(Will Willimon)이 이미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전에 ‘체류하는 이방인들’(Resident Aliens)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공동체와 전통을 피하는 미국의 무제한적인 자유는 결국, ‘자기중심성, 외로움, 피상성, 그리고 과도한 소비주의’ 등으로 바뀌고 만다. 이 문화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마 16:24)에 순종하기 더욱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토대 위를 걸으며 ‘다문화주의’의 짙은 이슬과 함께 어우러진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오늘날에는 서로를 함께 묶어 주는 공통 분모들이 없다. 예수님을 따르도록 도와주는 크리스천 공동체인 지역 교회가 오늘날처럼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는 결코 없었다. 하나님은 이 진정한 공동체를 우리 문화 속에서 신실하게 보존해 오셨다. 성경은 우리가 이웃들에 대해, 특히 믿음의 지체들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밝힌다(눅 10:29-37; 딤전 5:8). 우리는 소셜 미디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자유를 동경하겠지만, 만약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갖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3절에서 가르친 내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로 인해 서로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교회는 소셜 미디어가 결코 행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소셜 미디어 활동을 절제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존중한다. 그러나 즉각적이고 덜 제한받는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통해 원하는 청중들에게 가르침을 바로 제공하고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의 가능성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장기적으로 트위터, 정보 업데이트, 블로그 게시 등의 활동이 지역 교회의 도움으로 날마다 실제로 이루어져야 하는 성결과 사랑을 추구하는 일과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드 토크빌은 다음과 같이 썼다. “특출한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이웃들의 사랑과 존경은 오래 지속되는 일련의 자그마한 섬김들, 남모르는 선행들, 지속적인 친절한 습관들, 그리고 이타심을 통해 얻어야 하는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Perils and Promise of Social Media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문화
사회이슈
소셜미디어
개인주의
다문화주의
민주주의
가상의 우정
by John Muether
2018-12-11
여러분은 아마 이 글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다. 이는 필자의 글이 지루하기 때문만은 아니다(물론, 어떤 독자에게는 지루함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예견은 사람의 집중 시간이 얼마나 짧은 가에 대한 믿을 만한 통계에 근거한다.구글이 미국인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애틀랜틱 먼슬리'(The Atlantic Monthly)의 도발적 주장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대 검색 엔진인 구글 및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들은 분명 우리의 심리를 더 불안하고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 안에서 이전만큼 집중력을 갖기 어려워졌다. 멀티태스킹 작업은 우리의 사고를 단편화하고, 문자 메시지의 끊임없는 도착은 조용히 반성할 시간을 방해한다. 불과 글 몇 문단을 읽기도 전에 집중력은 금새 사라지고 만다. 오늘날의 우리는 심오하고 사려 깊은 독서 습관을 잃어버렸다.핸드폰, 이메일, 블로그, 트위터,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더 새로운 것까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전자시대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이들이 삶을 장악하도록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리는 독서 습관을 빼앗긴 것 외에도 최소한 두 가지를 더 잃었다. 첫째는 우정 관념이 하찮은 것으로 변했고, 둘째는 공동체 의식이 감소했다.1,035명에 달하는 페이스북 친구를 가진 동료가 있다. 페이스북 기준에 따르면, 그 정도 수는 그리 많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일부는 거짓 관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처럼 많은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페이스북의 목적은 넘쳐나는 나의 일상적 정보를 과시하는 정도다. 예를 들면, 오늘 당신이 받은 내시경 검사 결과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어김없이 페이스북 게시를 통해 내게 알려진다. 반면, 여러분과 진짜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당신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왜 트위터를 통해 알아야 하는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아무리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들을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이 많은 사람들과 꾸준히 연락을 취하며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페이스북 친구들을 모았는데, 약 400명 정도이다. 그런데 그 중의 4분의 1은 만나 본 적도 없는 관계들이다(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과 채팅을 나누었던 적도 두 번 정도 된다). 이러한 교제는 사실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나는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는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보낼 때, “곧 만나기를 바란다”라는 문구로 마무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온라인 친구들에게 이 말은 결국 상투적인 문구가 되고 말았고, 더이상 그 말을 붙이지 않는다. 이 경험은 진짜 우정이란 실제 만남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전자 문화는 정신을 산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인간관계를 멀리 갈라놓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역설은, 전자 문화는 우리를 가까운 사람들과 분리시키는 한편, 먼 사람들과는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거리를 극복하고 “다시 연결되었다”라고 헛된 자랑을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고립되고 있는 것이다.이런 과학 기술의 피상성은 전자-갈등(e-conflict)의 확산으로도 증명된다. SNS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의 상당수는, 심지어는 오랜 친구와도 심각한 불통을 겪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소소한 온라인 유머라고 생각한 컨텐츠를 친구에게 보냈다가 “장난이 심하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이유는 내가 보낸 유머에는 단지 컨텐츠만 있을 뿐 그것을 전달하는 나의 표정이나 태도, 언어, 혹은 억양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8장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직접 대면해서 화해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또한 소셜 네트워크는 우정을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우리는 보이기 위한 욕망으로 친구들을 모집한다. 또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주목을 끌게 될 때, 독자적인 온라인 인격이 조심스럽게 형성된다(심지어는 다중 정체성과 젠더 벤딩[성 역할 파괴]까지 생긴다). 크리스틴 로젠(Christine Rosen)은 “네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사이버 문화 속에서는 “네 자신을 나타내라”라는 말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사이버 문화 속에서 수치심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에 거침이 없는 이유는 새롭게 공유되는 엄청난 양의 무의미한 글들 속으로 나의 어제는 곧 묻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로젠은 페이스북을 “단조로운 독특성, 판에 박힌 개인성, 특이한 동일성을 가진 매우 둔한 곳”으로 묘사한다.우리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에서 보내는 시간은 참된 친구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깊게 교제할 시간을 빼앗아 간다. 클릭 한번으로 수십 명의 친구들을 ‘참견할’ 수 있는데, 왜 손으로 편지를 쓰고 전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겠는가? 게다가 꽃이나 선물을 보내려 해도 사이버 꽃은 실물보다 훨씬 싸거나 값이 아예 없다. 이 모든 특성이 결국 우정을 경쟁으로 둔갑시킨다. 나는 언제 내 친구의 계정에서 ‘좋아하는 소수 그룹’ 안에 속할 수 있을 것인가?이상의 모든 사례에서 보듯 우정은 실리적인 목적으로 변할 때 값어치를 잃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참된 우정을 성취할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 가족, 또는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도록 명령받은 이웃과 달리, 우정은 독특한 근거에 따라 전개된다. 우정은 선택을 필요로 하고(가족은 선택하지 않는다), 또 높은 수준의 신뢰, 존중, 그리고 일정 부분 사생활의 공유까지 요구한다. 요약하면, 참된 우정을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지난주에 일 때문에 한 젊은 여성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녀가 옛 친구의 조카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가 연락한 것을 삼촌에게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우리가 한 것이 연락인가? ‘연락하다’라는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우리가 지금 친구인가? 여기서 잠시 페이스북으로 돌아가자면,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실제적인 것이든 상상적인 것이든 얄팍한 친근함을 기초로 친구와 친구(또는 친구의 친구)를 서로 맺어 준다. 그것은 관계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흐르는 물과 같다. 다시 돌아와, 어쨌든 그 친구가 20년 넘게 당신과 연락이 끊겼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각자가 서로에게 우선적으로 연락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나는 소셜 네트워크의 몇몇 긍정적 측면까지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 내게 무척 기쁜 일이 있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테이블톡'(Tabletalk)의 편집자이자 나를 오래 참아 준 크리스 도네이토(Chris Donato)가 건강한 둘째의 아빠가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흠, 아마 그것 때문에 그는 내가 기고문의 기한을 넘긴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페이스북은 이미 확립된 관계를 돕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페이스북을 통하여 온라인으로 맺은 친구 관계는 과연 어느 만큼의 지속성을 갖게 될 것인가? 여기서 두 가지 추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페이스북을 통한 연락이 진정 필수적이고, 더 중요하게는 페이스북 친구들이 오프라인에서 교제하는 친구들과 견줄만한가?소셜 네트워크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 매체들이 거듭 강조하는 약속을 굳게 믿는다. 그 약속이란 SNS가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게 해 주고,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생긴 관계적 균열들을 매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약속을 확고하게 지키는 곳은 교회 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교회가 교인들을 향해 갖고 있는 열망은 개인이 진정한 친구들에 대하여 품는 열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교회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그 열망을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지 알게 되면 실로 놀랄 것이다. ‘전자시대를 살아가는 목사들’은 종종 인터넷을 통해 공동체를 세우는 데 열심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건강한 교회들은 성도 간의 직접 교제를 온라인 모임으로 대체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정확히 교회가 할 일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터넷을 통한 관계의 활성은 현실 세계의 관계를 희생시켜야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셰인 힙스(Shane Hipps)는 ‘깜박이는 픽셀’(Flickering Pixels)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실제적 소셜 네트워크—교회나 어떤 가정에서의 식사 혹은 친구들과의 점심 같은 모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함께 있으려는 욕구를 잠재우는 알약과도 같다. 당신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로그인을 할 때, 종종 진정한 소통에 대한 혼란이나 욕구가 찾아오지 않는가?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잠잠해지고, 결국 공동체가 아닌 혼자만의 교회에 남게 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이라는 책의 저자인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은 사이버 교회를 회의적으로 보는 학자 가운데 하나다. 온라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은 정말로 다양하다. 하지만 가상 공간에서의 동질성은 사실상 사이버 문화 특유의 격리성이 단지 공동체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퍼트남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사회 자본인 공동체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을 (인터넷으로는) 절대 되돌려 놓을” 수 없다.실제의 공동체가 불편함이나 비효율성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가상의 공동체는 참여만큼이나 탈퇴도 무척 쉬운 이점을 갖고 있다. 마치 이메일에 답장하지 않는 것처럼, 매우 간단하게 온라인 공간에서 사라질 수 있다. 또 조금이라도 불편한 온라인 친구는 단 한번의 클릭으로 ‘친구 목록’에서 삭제시킬 수도 있다. 이런 퇴출 전략을 가진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생활 방식 집단(life-style enclave, 역주—로버트 벨라[Robert Bellah]가 처음 사용한 말로 일부 생활 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외모, 소비, 레저와 같은 공통적인 요소를 통해 자기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집단을 가리킨다)보다 공동체적 연대감이 훨씬 약하다. 한 사회학자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를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로 매우 적절하게 묘사했다. 물론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는 인터넷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극대화시키고, 이 사상들의 부정적 단면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장악하도록 만든다.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받는 도전은 멀티태스킹, 분할 화면, 신호음 등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문화에 강력히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대학의 쿠엔틴 슐츠(Quentin Schulze)는 "과학 기술이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장단점"을 잘 구분하라고 권면한다. 당신을 실제로부터 격리시키는 과학의 진보를 경계하라. 이것이 당신의 영혼, 지성, 그리고 교회에 유익하다. 우리는 관심 분야를 확대시키고 친구들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심화시키기 위해 지금의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다.여러분이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작은 출발을 한 것이다. 그럼 이제 다른 글들도 여유를 가지고 한 번 읽어 보라. 그리고 연필을 들어 친구에게 편지도 써 보라. 문자 메시지나 블로그에 쓰는 것은 반칙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Virtual Friendship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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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빈곤 이야기
by Joe Carter
2018-11-13
25년 전, 유엔 총회(United Nation General Assembly, UNGA)는 매해 10월 17일을 “빈곤퇴치를 위한 세계인의 날”로 선포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 결의의 목표는 “전세계의 빈곤(poverty)과 절대적 가난(extreme poverty)을 근절하기 위한 대중의 인식 제고”이다. 월드뱅크(World Bank)에 따르면 절대적 가난은 하루를 1.9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상황을 의미한다. 당신은 지난 3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절대적 빈곤층의 비율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고 있는가? (1) 증가했다, (2) 감소했다, (3)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 간단한 질문을 통해 절대적 가난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답은 (2)번이다. 지난 30년간 절대적 빈곤층은 조금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유의미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감소했다. 불과 1980년대만 하더라도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44퍼센트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으로 고통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수치는 10퍼센트 미만으로 대폭 하락하였다. 그러나 정답을 (1)번, 증가로 예상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기독교 여론조사기관인 바나그룹(The Barna Group)의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8명(84%)이 빈곤 계층의 국제적 감소 현상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3분의 2에 해당하는 67%의 사람들은 오히려 증가를 예상했다. 더욱이 이 조사에서 미국 성인의 68%에 달하는 대중들이 앞으로 25년 동안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하지만 이러한 비관적 전망과는 다르게 희망적인 관점을 제시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실천적 크리스천들이다. 바나그룹의 정의에 따르면, 실천적 크리스천이란 실제로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자신의 삶에서 종교적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특히, 그중 비교적 젊은 40세 이하의 그룹에서는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8%의 사람들이 빈곤 퇴치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 시각을 가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40세 이상에서 일반 대중은 32%만이 희망적 시각을 밝힌 반면, 이 나이대의 실천적 크리스천들은 역시 그보다 높은 37%가 낙관적 전망을 내비쳤다. 빈곤 퇴치를 희망적으로 볼 수 있는 이유가난의 전 지구적 감소 현상 속에서 크리스천들은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몇 십년 동안 빈곤 계층의 국제적 감소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가난의 퇴치 역시 다가올 미래에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목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의 그래프는 인류의발전(HumanProgress.org)이라는 단체가 작성한 것으로서 절대적 가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수치적으로 비교한 표다. 주황색 선이 절대적 빈곤 인구를 의미하고, 파란색 선이 그렇지 않은 인구를 의미한다. 선을 따라 계속 왼쪽으로 이동한다면, 아마도 두개의 선이 마주하는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래부터 1820년대까지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적 빈곤 아래에 놓여 있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인구의 일부는 최저생활선 이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제의 부흥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부의 생산은 지극히 한정적이었고, 절대다수에게 빈곤은 현실이었다. 그 예로, 1820년대에는 대략 11억 명의 인구가 지구상에 존재했는데, 이 중 약 10억 명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의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오랜 시간 지속되었는데, 이는 위의 표에서 두 개의 선이 1820년부터 1950년 즈음까지 좁혀지지 않고 거의 나란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경제 성장과 함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빈곤 문제 연구가인 맥스 로저(Max Roser)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는 대략 1970년대부터 경제의 성장과 빈곤 인구의 감소를 경험하고 있다. 분석에 따르자면 … 1970년대에는 22억 명의 사람들이 절대 빈곤의 상태로 살아갔으나, 2015년에는 그 수가 7억 5백만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절대 빈곤층의 수치가 1970년대와 비교했을 때 거의 3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또한 이러한 감소율은 1990년대 이후부터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로저의 분석에 따르자면, “1990년에 20억 명 수준이었던 절대적 빈곤층은 2015년 기준, 7억 5백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평균적으로 계산했을 때, 1990년부터 2015년까지 25년 동안 매일같이 13만 7천 명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한 사실은 지난 25년 간 매일 아침마다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법한 굉장한 일이다. 개발을 통해 세계의 모습이 이토록 놀랍게 바뀌고 있다. 물론 전체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 변화의 속도가 긴 시간 속에서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절대적 빈곤층의 유의미한 감소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성취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성취를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는가?어떻게 하면 빈곤의 문제를 줄여나갈 수 있을까?1990년 유엔의 새천년개발계획(UN’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은 2015년까지 빈곤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원래 계획했던 시기보다 5년이나 앞당겨서 달성되었다. 그리고 2015년, 유엔과 월드뱅크가 공동으로 수립한 새로운 개발 목표는 2030년까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는 일이다.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 계획일까?이 야심찬 목표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먼저, 1990년 이후에 경험한 빈곤의 감소는 인도와 중국의 경제 성장에서 기인한 부분이 크다. 1990년 51%에 달했던 인도의 절대적 빈곤 인구는 현재 20%대로 떨어졌다. 중국의 경우는 더욱 눈에 띈다. 1981년 기준으로 88%를 기록했던 절대적 빈곤 계층은 오늘날 무려 2%대로 낮아졌다. 이는 두 나라의 빠른 경제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와 동일한 성장이 현재 높은 빈곤율로 고통받는 다른 나라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사하라 이남 지역의 아프리카를 예로 들자면, 대내적으로는 부패와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고, 해외 원조가 오히려 자원 수탈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다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대내적 상황과 국제 질서 및 무역에 해당하는 대외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해당 지역의 국가들은 지난 30년간 빈곤 인구의 증가세를 보인 유일한 대상으로 남아있다(비록, 아프리카의 인구 대비 절대적 빈곤 계층의 ‘비율’은 1981년에 비하여 적게나마 줄어든 상황이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서 빈곤인구의 ‘수’ 역시 2배로 늘어났다).절대적 빈곤의 급락 혹은 종말 유엔과 월드뱅크가 제시한 원대한 목표가 달성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지구상의 모든 인구가 실제로 가난을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통계상으로 완전 고용을 이룬 상태라 할지라도 실제적으로는 ‘마찰적 실업’(노동력 수급이 일시적으로 불균형한 상태가 되어 생기는 실업. 전체 노동인구의 약 4% 정도의 비율로 발생)이 발생하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쉽다. 통계적으로는 절대적 빈곤이 ‘종식’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의 마찰적 빈곤(약 3%부터 8%까지 예상)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전 세계의 인구가 2030년에는 83억 명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을 바탕으로 계산해보자. 절대적 빈곤의 종말을 이룬다고 가정하더라도 약 2억4천9백 명에서 6억6천4백 명 가량의 사람들이 여전히 빈곤의 삶 속에 남게 된다. 전 세계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1.9달러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절대적 빈곤의 완전 퇴치는 어쩌면 달성하기 힘든 환상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모을 때 바람대로 그에 근접한 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절대적 빈곤의 종식을 달성하더라도,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삶의 기본적인 필요에 실제적으로 닿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가 절대 빈곤의 상태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 비율을 8%대 이하로 계속해서 줄여갈 수 있다면 이는 무척이나 고무적인 성취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030년까지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가늠하기 힘든 정도의 큰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임할 때, 이는 이룰 수 있는 목표가 된다. 만약 이 원대한 계획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를 경험할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시는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목도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Best Global News You (Probably) Haven’t Heard번역: 정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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