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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가 양극화 대신 설득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by Tim Keller
2021-08-01
책 리뷰: 크리스 베일(Chris Bail)의 ‘소셜 미디어 프리즘 깨기: 사회 플랫폼이 어떻게 해야 덜 양극화될까 (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 How to Make Our Platforms Less Polarizing)’최근에 나는 기자와 학계가 주도하는, 점점 더 심해지는 미국 문화의 양극화 현상에 관한 줌(zoom) 포럼에 참석했다. 포럼 중 한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민간 담론을 훼손하고 또 사회적 분열까지 조장하는 공개 포럼을 만들고 싶다면, 트위터 계정만큼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소셜 미디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거의 일 년 동안 일해 온 존경받는 여성 저널리스트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나는 그들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셜 미디어엔 엄청난 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는 특히 젊은이들 정신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젠 아무리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소셜 미디어를 무시할 수 없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이런 목적에 도움을 주는 책이 한 권 나왔는데, 듀크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 크리스 베일(Chris Bail)이 쓴 ‘소셜 미디어 프리즘 깨기: 사회의 플랫폼을 어떻게 해야 덜 양극화시킬까(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 How to Make Our Platforms Less Polarizing)’이다. 이건 종교 서적이 아니라 사회 과학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또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소비하는 게 옳은지에 관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게다가 저자가 제시한 최종 원칙 중 많은 부분이 기독교 윤리와 실질적으로 일치한다. 다음은 그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다.소셜미디어는 사상(ideas)이 아닌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사회적, 정치적 양극화 문제에서 시작하여 소셜 미디어가 양극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짐으로 저자는 책을 시작한다. 양극화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알고리즘이 내가 원하는 진영의 뉴스와 의견만 계속 노출시킴으로 우리를 메아리실(echo chambers) 또는 거품 속에 가두고, 그 결과 점점 더 분열과 극단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일은 다른 연구 결과는 제시하는데, 오히려 반대되는 정치적, 문화적 견해에 매일 노출될 때 사람들이 자신의 기존 견해를 더 강하게 그리고 훨씬 더 극단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인 사람일수록 기존 견해를 전혀 조정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더 균형을 잡거나 온건해지지도 않았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에게 소셜 미디어는 자신을 더 잘 관리하고 지키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반대 견해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인식한다.찰스 호튼 쿨리(Charles Horton Cooley)는 “다양한 나의 모습을 제시할 때 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나 자기에 관한 개념을 더 발전시키는 방법”에 관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쿨리는 인간에게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존감은 그다지 필요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진짜 중요한 자존감과 정체성은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내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해서 어떤 말을 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쿨리의 “거울을 보는 자아(looking-glass self)” 개념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실제로 매우 유사하다. 거울이 스스로 빛을 생성할 수 없고 반사만 하는 것처럼 우리는 외부의 검증이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검증할 수 없다.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님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국가를 얼마나 잘 섬겼는가에 따라서 정체성을 확보했다. 정체성과 관련해서 우리는 (1) 가족과 이웃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를 발견하고, (2) 우리의 행동에 대해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3) 그러한 기대에 따라 삶을 재정렬함으로써 매일 얼굴을 대하면서 사는 공동체가 인정하는 사회적 확인과 인정을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그러나 오늘날 모바일, 개인주의, 치료 중심, 그리고 기술이 주도하는 문화에서 우리는 점점 더 직접 얼굴을 보며 소통하는 대면 공동체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세속화되는 사회에서 하나님과 믿음은 더 이상 정체성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는 얇아지고 정체성은 이제 더 취약해졌다. 비록 현대에 만연한 치료 문화가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권고하고 있고,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 자신에 관한 확신을 키우라고 하지만, 저명한 많은 사상가(대표적으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이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며, 우리는 사실상 환원 불가능한 수준의 관계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연약한 자아를 가진, 게다가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들이 어떻게 스스로에게 필요한 긍정을 찾을 수 있을까? 소셜 미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에 관한 포스팅(presentation)을 통제하도록 하고(굳이 사람들과 매일 직접 대면할 필요가 없음), 전례 없는 규모와 속도로 포스팅에 대한 피드백을 받도록 하며(51쪽), 그런 다음 (가능한 한 큰 규모의) 내가 속한 커뮤니티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조율하도록 한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는 결코 사상 토론의 장이 아니다. 사상은 단지 자신을 정의하고 내가 속한 그룹에 신호를 보내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내가 반대하는 그룹과 관련지어 다른 사람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는 사람의 말을 가능한 한 가장 무자비한 의미로 해석하는 악의적 글 읽기 기술(the art of bad-faith readings)이 완성되는 것을 목격한다. 논증을 논증 자체로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려는 노력이 사라진다. 목표는 나와 생각이 다른 글쓴이를 어떻게 하든지 수치스러운 “외부 집단”과 연관시키는 것이다.물론 이것이 소셜 미디어에서 토론이 진행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이 방식이 가장 빈번하게 담론을 형성하는 소셜 미디어의 역동성이라는 베일의 진단에 나는 동의한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에서의 공개 토론은 새로운 사회의 등장과 함께 공백이 생긴 과거 사회의 역할인 정체성 형성, 지위 추구 및 사회적 유대라는 기능을 새롭게 담당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53쪽).실질적인 결과베일은 두 가지 실질적인 결과를 관찰한다.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를 조장하고 온건한 사람을 침묵시킨다. 좌파나 우파를 가리지 않고 정치적 또는 문화적 극단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증폭하고 강화하는 한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억누른다. 1.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를 조장한다베일은 ‘극단주의자’와 ‘온건주의자’를 객관적으로 정의한다. 사회학자는 미국 대중의 정치적, 문화적 관점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베일이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가 관찰하는 것은 숫자이다. 그가 극단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가장 보수적이거나 가장 진보적인 5-10퍼센트에 속한다. 베일은 모든 트위터 사용자의 6%가 모든 트윗의 20%를, 그리고 국가 정치를 언급하는 모든 트윗의 70%를 생성하며, 이 6%가 주로 극단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76쪽). 이건 그리 놀라운 발견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책이 깨달음을 주는 중요한 지점은 인터넷에서 시끄럽고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많은 사람들에 관한 연구이다. 첫 번째로, 그의 연구에 따르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n)이 “부패한 정체성”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실제 생활에서 그들은 낙오자인 경우가 흔하다. 극단주의자들은 “종종 오프라인 생활(실제 생활)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많은 경우에 소외를 경험한다 (56쪽).두 번째로, 그들이 온라인에서 보여주는 페르소나는 많은 경우에 오프라인 속 성격과는 많이 다르다. 온라인에서 그들은 훨씬 더 공격적이다(56쪽).세 번째로, 그들은 일반적으로 (5-10%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극단주의자로 낙인 찍히는 것에 강하게 반대한다. 넓은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위치한 작은 극단주의자나 주변부로 간주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쾌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숫자를 과장할 뿐 아니라 다른 극단의 힘과 숫자도 같이 과장한다. 이 방법을 통해서 양 극단이라는 스펙트럼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대신 두 개의 군대가 싸우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중간에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소수의 겁쟁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극단주의자들은 자기네 진영에 속한 온건파에 대한 공격을 즐긴다. 온건파를 비원칙적인 타협자나 상대방의 은밀한 구성원으로 공격함으로써 그들은 문화를 양 극단 스펙트럼이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주류의 선과 악 사이의 다가오는 전투로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64-65쪽).이처럼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자들이 현실과 전혀 다른 자아를 관리함으로, 심각하게 왜곡된 사회 이미지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를 개인과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왜곡하는 “프리즘”이라고 부른 것이다. 2. 소셜 미디어는 온건한 사람들을 침묵시킨다대다수가 가진 정치적, 문화적 견해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온건파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극단주의를 조장하는 것 외에도 소셜 미디어는 이런 온건파를 침묵시킨다. 어떻게 하는 걸까? 첫 번째로, 온건파는 더 큰 성공과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훨씬 더 많은 대면 커뮤니티를 가진, 강력한 오프라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극단주의자들은 온라인에서만 지위와 소속감을 얻을 수 있지만, 온건주의자들은 굳이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말을 해서 자신의 경력이나 관계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를 행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단주의자의 취약한 정체성은 인터넷에서 오히려 많은 부분 은폐되지만, 온건주의자의 정체성은 정반대로 위협받을 수 있다. 두 번째로, 소셜 미디어는 왜곡된 프리즘이기 때문에 온건파는 중간층이 사라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일은 오히려 “잘못된 양극화”(“자신과 다른 정당의 이념적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가 크게 증가했지만, 정치적 견해의 분포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통계적으로, 정치적 온건파(또는 “자유주의”와 “보수적” 견해를 혼합한 사람들)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세 번째로, 앞에서 살펴보았듯 온건파는 종종 엄청난 비판의 공격을 받는다.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을 지지하는 정치적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극단주의자는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 중도파는 자신의 견해가 ‘악의적 글 읽기 기술’(가능한 한 최악의 방식으로 글을 해석하는 것)에 의해서 또는 자신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전혀 소유하지도 않는 사회적 위치나 정체성을 부여받음으로써 공격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정말로 백인 우월주의자 또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네요.” 또는 “지금 당신의 처지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등등이다. 새로운 플랫폼 만들기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요약해보자. 첫 번째로,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를 주도하고 온건한 사람을 침묵시키기 때문에 결코 사상의 교환이 아닌 정체성 생성의 장소가 될 뿐이다. 두 번째로, 온라인 극단주의는 사회적 현실을 (극단적으로) 왜곡하고, 또한 온라인 페르소나는 종종 개인의 현실과 분리되기 때문에, “소셜 미디어 프리즘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을 왜곡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망상적인 형태의 자기 가치를 만든다”(66쪽).오늘날 소셜 미디어가 광장 모임, 마을 모임, 신문, 그리고 인쇄 출판을 대체하는, 말 그대로 사상 교환과 토론을 위한 새로운 장소로 부상하기에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소셜 미디어 속에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건 언론계과 학계도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같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가장 강력한 문화의 문지기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과 학자조차도 여러 연구를 통해 드러나는 소셜 미디어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소셜 미디어가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마지막 두 장에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가 단순히 붕괴되고 그 자리를 더 건강한 무언가가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그러면서 그는 소셜 미디어를 욕하는 사람들이 결국 다시 소셜 미디어로 돌아가는 빈도를 보여준다. 베일이 제시하는 것은 대안이다. 정체성이 아닌 아이디어가 실제로 토론될 수 있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잠정적인 아이디어이다(9장, “더 나은 소셜 미디어” 참조). 그의 아이디어에는 많은 장점이 있으며 우리는 베일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응원해야 한다. 기본 취지는 다음과 같다. “좋아요”를 없애고 대신 해당 포스트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소구하는(appealing) 가치를 계산하는, 그래서 그 가치가 큰 포스트에는 더 큰 보상이 따라가는 식의 미터기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 진영의 사람이 해당 포스팅에 동의하는 수준을 표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플랫폼이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양측이 모두 다 공정하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게시물에 대해 보상과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그의 제안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소셜 미디어의 왜곡에 영향받지 않으면서 종교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견해를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가능할 거 같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 해킹하기8장에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에서 발견하는, 양극화라기보다는 설득을 향한 움직임이라고 믿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내가 확인하기에 다섯 개는 성경에서 스쳐 지나가면서도 내가 주목했던 사실들과 기이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1. 길게 그리고 집중해서 들어라야고보서 1장 19절을 보자.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즉각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지 말라. 팔로우하고 잠시 들으라.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가장 잘 구성된 것을 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그들이 말하는 내용에서 가치 있는 것을 찾도록 하라.2. 그들이 쓰는 단어와 권위를 활용하라사도행전 17장 23절과 28절을 참조하라. 사도행전 17장에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들에게 연설하는 바울이 인용하는 사상가는 다름 아니라 그들이 따르는 에피메니데스와 아라투스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복음서 저자 또한 헬라 철학 용어인 로고스를 사용한다. 3. 비판할 때에도 그들이 가진 세계관에서 동의할 부분은 동의하라 사도행전 17장 29절과 고린도전서1장 22~24절을 참고하라. “당신이 설득하려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상대도 공감하는”(110쪽) 논쟁을 진행하라. “나는 옳고 너는 다 틀렸어”라고 말하기보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좋아요. 근데 이런 것도 믿는다고요? 말이 되는 거 같네요.”라고 말하라. 바울이 사도행전 17장 29절에서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하라. “너희 철학자들의 말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가 만든 우상의 경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가 유대인과 그리스인 모두에게 복음을 어떻게 제시했는지도 살펴보라. 그들의 문화적 목표를 확인하고, 또 그들이 추구하는 우상 숭배 방식에 도전하고, 그리고 나서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내면이 가진 가장 깊은 문화적 열망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꿨다. 4. 자기 자신에게 비판적이어야 한다마태복음 3장 2절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말한다. 당신이나 당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집단의 모든 주장과 행동을 다 옹호하지 말라.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5. 사상과 정체성 사이의 고리를 느슨하게 유지하라디모데후서 2장 24~26절을 참조하라. 당신과 다른 생각이 당신이란 존재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상을 정체성에 포함시키지 말라. 우리는 지금 소셜 미디어 프리즘으로 정체성을 위조함으로써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라는 성경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행위에 기초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가 값없이 준 선물이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때문에 화를 내지도 또 위축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스스로가 내린 자기 평가에 근거했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고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전체 참조).바울(예수님 포함)도 반대자를 향해 날카롭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건 결코 화가 나서도 또는 위협받는 정체성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종종 소셜 미디어의 집단(tribes) 의식에 빠져 왜곡된 프리즘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조금도 분노나 불쾌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에게 그들의 필요를 근거로 얼마든지 엄격하고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말하도록 돕는, 굳건한 정체성과 자존감을 제공하는 자원이 있다.특별한 사랑기독교인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특별한 사랑을 통해서 이 세상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오셨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요 17;1; 요한일서). 그러나 소셜 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는 특별한 사랑을 보여줌으로 세상과 전혀 다른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우리 기독교인이 지금 처한 처지가 요원하기만 하다.그래도 일부 기독교인이라도 인터넷에서 그들의 사랑 때문에 유명해질 수는 없을까?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믿음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동시에 신중하고 겸손하게 비평가의 말을 듣는 공개 담론이 가능한 새로운 공간까지 재건하는 데에 과연 참여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다. 그럼 거기에 당신도 포함될까? 원제: Can Social Media Foster Persuasion (Not Polariz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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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 Carter
2021-07-14
이야기: 최근 갤럽 조사에 의하면, 성경이 정죄하는 행동을 점점 더 많은 미국인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배경: 2000년대 초부터 갤럽은 다양한 주제와 행동에 대해 도덕적 수용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인의 생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경향은 분명하다. 성경이 분명히 죄라고 말하는 행동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다. 갤럽이 지적했듯이 낙태, 미혼 상태에서의 성관계, 혼외 출산,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수용해도 된다는 생각은 지금 사상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각 범주의 첫 번째 숫자는 해당 행동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비율이고, 두 번째 숫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비율이다. 갤럽 조사 이후 최고 기록인 경우에 옆에 별표가 붙었다. 의미: 낙태에서 자살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대해, 생각이 보다 더 관대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2000년대 초 갤럽의 처음 조사 때와 비교할 때, 성경이 가르치는 방향으로 개선된 항목은 단 하나도 없다. 과반이 넘는 51%가 성 정체성 전환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 수치도 나이 든 사람들 때문에 왜곡된 것이다. 65세 이상에서는 64%, 50세에서 64세 중에서는 52%가 성 전환을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답했지만, 30세에서 49세까지로 오면 그 수치가 51 %로 떨어졌고, 18세에서 29세에 이르러서는 55 %가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다. 만약에 미국이 무 종교 국가라면 이런 결과에 놀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미국 성인의 65%는 여전히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한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부도덕한 행동을 용인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부도덕을 도덕적으로 용납한다고 말할 때, 그건 무슨 의미인가?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들은 애초에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 문제에 대한 많은 혼란은 복음이 나누는 경계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한다.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닌가 여부에 관한 특정한 입장이 구속 또는 의롭다 함(justification)의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틀린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후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입장을 갖고 있다면, 그것 또한 틀린 것이다. 복음은 우리 삶에서 변화를 요구한다. 스스로가 죄인임을 진정으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할 것이다. 데이비드 파울리슨(David Powlison)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죄인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바꾸시려는 의도가 들어있다.”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우리의 도덕관은 바뀌어야 한다. 기독교인에게 “도덕적으로 용납되는가 아닌가”의 여부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표준에만 근거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성경을 펼쳐야 한다 (딤후 3:16).설문 조사 속 13개 주제 중 7개가 ‘성적 부도덕’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견해를 바꿔야 하는 도덕적 문제의 사례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성경은 성적 부도덕을 결코 도덕적으로 용납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바울은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게 하는 행동 목록에 그것을 포함시켰을 정도이다(고전 6: 9-11).성 도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는 성경의 명령을 알게 되고 또한 결혼 밖에서 갖는 모든 형태의 성관계가 그 명령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마 19:4-5)까지 알게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의무를 갖게 된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당신께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요 14:15).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동을 향해서 “도덕적으로 용납된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간음하고 음란물에 빠지고 동성애를 즐기고 또 미혼 상태에서 성관계를 갖으면서, 그 모든 게 다 “도덕적으로 용납된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성적 도덕과 관련한 성경 말씀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선택권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물론 우리 모두는 다 선택권이 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거나 또는 솔직하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원제: Why You Can’t Love Jesus and Condone Immor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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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차이: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by Andrew Wilson
2021-07-02
'아름다운 차이: 가정과 교회 안에서'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아버지와 형제들장로 자격이란 것이 사실상 성경이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 보다 훨씬 더 막중한 사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감독자가 남자인 것이 당연시되고 또한 실제로 “한 아내의 남편”(딤전 3:2)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게 아니다. 이것은 성 중립을 따질 사항이 아니다. 교회는 아버지와 어머니(딤전 5:1-2)가 있어야 하는 가족이며, 바울은 감독자를 아버지로 바라보았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바울이 여성으로 하여금 그 사명을 금지시켰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바울이 말하는 정확한 의미와 관련해서 이 구절은 사실상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데, 그럼에도 이 구절이 명확하게 연결하는 사실에 관해서는 혼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아버지가 가정을 잘 이끌고 자녀를 복종시켜야 한다는 요건도 마찬가지이다(3:4). 사실상 이건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구절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바울이 감독자와 집사에 대한 자격을 부여한 후 “여자”에 대한 자격을 부여한 것도 사실이다(3:11). 우리는 이것을 여성 집사(나는 그렇게 본다)에 대한 언급으로 보든 아니면 집사의 아내(일부 번역자처럼)에 대한 언급으로 보든, 바울이 “감독자”와 “집사” 그리고 “여성과 아내”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때문에, 바울이 후자를 전자의 하위 집합으로 간주했다고 보는 시각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평등주의 해설자들조차도 이런 구절을 근거로 바울은 “감독자를 남편과 아버지로 제시”(Towner)하고 있고 “주교를 시종일관 남자로서 언급한다”(Wright)는 데에 동의한다. 이 본문에서 최소한 장로직은 결코 성 중립적이지 않다.교회를 괴롭히는 이단이 주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을 노리기 때문에 감독자와 장로는 그런 교회일수록 더더욱 남자여야 하지만, 그 외 다른 교회에서도 남자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에베소서에 언급된 유일한 거짓 선생이 남자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딤전 1:20; 딤후 2:17), 이 주장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섬에 있는 장로들에게도 동일한 요건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딛 1:6). 바울이 말하는 장로의 자격은 에베소의 특정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크레타에서도 거의 동일하며 그 외 다른 모든 곳에서도 다르지 않다. 아담에서 시작해서 레위 제사장, 이스라엘의 왕, 열두 사도 및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온갖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든 사람은 남자이다. 어머니와 자매들다른 한편으로, 강조해야 할 또 하나의 성경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도는 남자의 씨로 언급되기 훨씬 전에 이미 여자의 씨로 확인되었다(창 3:15). 아담보다 전혀 열등하지 않은 하와(성경에서 ezer 또는 “도우미”라는 단어는 하나님 자신에게 가장 많이 적용된다)는 실제로 다가올 약속과 관련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창 4:1,25). 가부장 시대의 여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또한 종종 어리석은 남편 또는 아들, 어떤 경우에는 두 사람을 다(사라, 하갈, 리브가, 레아, 라헬) 능가한다. 여종 하갈은 성경에서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인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이다(창 16:13).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구속 이야기가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하와, 하갈, 레아, 십브라, 부아, 미리암, 삼손의 어머니, 룻, 한나, 에스더, 엘리자베스, 마리아 등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어리석거나 악한 사람들에게 압제당하고 있다. 여자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고(드보라) 군사적 승리를 거둔다(야엘). 여자들은 그들의 남편을 구하고(아비가일), 그들의 자녀를 구하며(요게벳), 그들의 도시도 구하고(드고아 여자), 나아가서 나라를 구한다(에스더). 여성이 예언하고(훌다, 빌립의 딸), 성경에 나오는 시편과 노래를 작곡하고(한나, 마리아), 하나님의 말씀을 남성에게 설명하고(브리스길라), 교회를 운영하고(글로에), 사업을 운영하고(루디아), 집사로 봉사하고, 후원자(뵈뵈), 복음에서 바울과 협력(유오디아와 순두게), 그리고 사도로까지 인정받는다(유니아). 그리고 인류 역사상 메시아를 태어나게 한 일에 여자보다 더 큰 책임을 감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들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주인공이 되는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여자로서 섬긴다. 많은 이들이 어머니, 자매 또는 딸로 묘사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경계는 결코 모호하지 않다.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도 하고, 여자가 하는 일을 남자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때때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마치 2차 페미니즘을 암시하는 구절처럼 쓰이기도 하는데, 그러나 바울은 결코 여기서 남녀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지 않으며 심지어 교회의 리더십 직분과 관련해서도 그런 식의 모호함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바울은 성별, 민족성 또는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다 신앙에 기초하여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장은 바울이 쓴 모든 서신서 중에서도 가장 다양한 성별이 표현된 장이다(아들들, 아버지, 예수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들, 아바 아버지, 출산의 고뇌, 노예 여인, 자유 여인, 위에 언급된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 바울은 이를 통해서 생물학적 성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비록 단지 생물학적 성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는 것도, 세례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이러한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남자가 도무지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여자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이면,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 융합(conflation)도 아니고 또한 남자만이 모든 중요한 일을 하고 여자는 보조적인 역할만 해야 한다는 식의 성적 왜곡(alterity)도 아니다. 남자는 여자를 필요로 하고 여자는 남자를 필요로 하며, 이 둘이 함께 봉사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내는 진정한 상보성의 비전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를 제거하거나 둘 중 하나의 가치를 줄이는 순간, 우리 모두가 다 피폐해진다. 교회는 가족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와 자매, 아들과 딸 모두가 필요하고,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할 때에만 교회라는 가족은 번영한다. 따라서 진정한 상보성은 여자를 사역의 장애로 보는 게 아니라 여자를 사역 현장에 투입하도록 하는 기초가 된다. 로마서 16장은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도발이다. 로마 교회에서 젊은 여자가 롤 모델이 되는 여자 사역자가 없다는 사실을 한탄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는 많은 사람을 후원한 집사 뵈뵈를 모델로 삼을 수도 있다. 브리스길라는 또 어떤가? 그녀는 바울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또한 가정 교회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당신을 위해서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유니아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으며, 사도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주를 위해 헌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와 루포의 어머니를 향해 바울은 “나에게도 어머니였다”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많은 여자들이 등장한다. 여자들의 이름은 이 장에서 지명된 개인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종종 집사를 임명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서 장로직만을 고집하는 단점 중 하나가 내포하는 사실은 중요한 사역일수록 남자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교회의 리더십 개발 기회, 공식 사역 역할 분담 및 급여에서 까지도 드러나는 문제점이다. 교회가 만약에 이런 식이 남자 중심의 사역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래서 은사가 있는 여자를 단지 사역팀의 순결성 및 또는 공동성에 대한 우려라는 핑계로 무시한다면, 교회는 결국 로마서 16장이 말하는 영광스러운 상보성을 남자 중심의 작업 현장으로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리고 여자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아이들을 보거나 찬양 목사 뒤에서 백업 코러스나 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교회가 이런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상황적인 도전특히 상황적 요인으로 인해 신실하게 사역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그중 하나는 북미 복음주의의 문화적 환경인데, 그게 좋든 나쁘든 대부분의 신학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1950년대에 있었던 이 주제와 관련한 보수적이고 짧은 토론과 1960년대 있었던 진보적이지만 여전히 짧았던 토론은 이제 그 어떤 곳보다 미국에서 점점 더 크게 부상하고 있으며, 그 문제는 이제 기존 전통, 사회 변화, 질서, 인종 관계, 성문제, 총기 문제, 낙태, 경제, 그리고 정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다른 대화와 얽혀있다. 문화적 상황은 이제 누가 장로가 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 결정을 내리는 사람, 심지어 누가 가족 차량을 운전하는지에 대한 질문까지도 연결되며, 문화적으로 급변하는 현실이 일상 속으로 제대로 전파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 결과 때때로 교회는 문화적 조류에 맞서야 하는 입장을 너무도 걱정하게 된 나머지, 우리 스스로를 과도하게 수정하게 되고 그 결과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심지어 비 성경적이기도 한) 입장에 서기도 한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전후 중미 상황을 신약 성경 속에서 억지로 읽어내고, 교회의 자매들을 비하하고,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라며 무시하고, 이단적 삼위일체의 견해를 옹호하기까지 한다. 특히 서양에서 발생한 또 다른 문제는 교회를 가족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점점 더 기업 조직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다. 가족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이끌어가는 곳이고 또 때로 아버지가 하는 일이 있고, 어머니가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가정은 궁극적으로 가정을 보호할 책임을 가진 남편이자 아버지가 이끄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건 아내이자 어머니이다. 그러나 비즈니스 또는 기업 환경에서는 존중과 명예가 그런 식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기업은 직위, 직급, 공개된 프로필, 재무 감독, 공식 권한 및 급여를 통해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의 신학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실제로 가족이 아니라 기업처럼 기능하고 있다면(물론 거기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상보성은 전락하여 결국 누가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고, 누가 누구를 지휘하고, 누가 월급을 얼마를 받고 등등에 따라 모든 결정이 이뤄지는 결과가 될 것이다. 교회는 가정이지 사업장이 아니다이런 현실이야말로 교회가 가족이라고 설교하는 내용을 교회 내에서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여자 장로를 부정하는 것은 여자가 사장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여자가 아버지가 되는 건 불가능하지만, 남자가 어머니가 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우기는 것과 오히려 더 비슷하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성경적인 사고가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교회가 단지 가족이라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가족으로 보여야만 한다. 여자가 모든 주요 직책이나 토론에서 배제되는 기업 모델로 교회가 운영되는 대신 가정에서처럼 남자는 아버지로 또 여자는 어머니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모습이 교회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지는 문화, 상황, 교회 규모, 그리고 가족 표현 방식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할 것이다. 가장 좋은 모범 사례를 수립하려면 남녀 모두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영역은 특히 더 서양에 사는 우리들이 전 세계에 흩어진 형제자매들로부터 많이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차이를 누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원제: Beautiful Difference: The (Whole-Bible) Complementarity of Male and Fema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남녀차이
현대교회
상호보완성
상보성
평등주의
교회리더십
교회사명
아름다운차이
아름다운 차이: 가족과 교회에서
by Andrew Wilson
2021-07-01
'아름다운 차이: 창조 원리'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상보성과 가족 기독교인은 이 시대에서 남자와 여자 간의 상보성을 표현하도록 부름받았다. 이것은 단지 특정한 성경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뿐 아니라 – 물론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지만! – 그 사실을 봐야함에도 불구하고 무시하는 세상을 향해서 그 아름다운 차이를 드러낼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이슬람이 말하는 것처럼) 멀지도 않고, 또 (이교도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안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건 무슨 의미인가?” 라고 물을 때,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는 바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이다. 그리고 그 관계를 드러내는 가장 좋은 콘텍스트는 바로 가족이다. 이것의 가장 명백한 형태는 결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한다. 사랑, 성실, 차이, 연합, 희생적 리더십, 상호 봉사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남편은 머리가 몸을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그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말씀의 물로 그녀를 거룩하게 하고 그녀를 빛나게 만들어야 한다(바울이 여기서 일반적으로 여자가 하는 일인 세탁, 청소, 다림질을 남편이 하도록 묘사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바울은 고의적으로 당시 그레코-로마가 말하는 남성의 이미지를 뒤집고 있다). 이에 따라 아내도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 그럼 복종은 일방통행인가? 아니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 복종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인가? 바울은 방금 성령 충만한 교회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그런 다음 그는 고대 평균 가정을 묘사하고 이를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녀, 그리고 노예와 주인에게 적용한다. 복종의 상호성(5:21)이 복종이 표현되는 방식(5:22-6:9)의 차이점을 무시하는가? 아니면 바울은 단지 아내, 자녀, 노예만이 (각각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할 때, 대답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복종하도록 부름 받았지만 실제로 부모와 자녀가 또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복종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서로를 섬기지만 같은 방식은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한 예수님은 우리를 섬긴다. 우리는 그의 주인되심에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그를 섬긴다. (물론 우리 둘 다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물로 우리 자신을 바치지만, 그건 매우 다른 방식이다. 만약에 이 둘을 잘 융합하게 되면, 전체 복음이 더 잘 풀릴 것이다.) N. T. 라이트(N. T. Wright)는 이렇게 설명한다. “바울은 대부분의 문화가 그렇듯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단순한 생물학적 및 생식 기능을 뛰어넘는, 훨씬 더 큰 차이점이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그들의 관계와 역할은 동일하기보다는 상보적이다. 투표권과 고용 기회 및 보수 (많은 곳에서 여전히 현실적이지 않음)의 평등이 그러한 정체성을 모두 다 암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결혼 생활에서 그가 주는 지침은 분명하다. 남편은 솔선수범해야 한다. 물론 그 솔선수범은 메시아가 보여준 자기 희생적 모델을 염두에 둔 모습이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 “솔선수범”이 괴롭힘이나 거만함으로 변질된다면, 가족은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상보성이 단지 결혼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독신, 유족, 이혼 또는 버림받은 사람은 여성성 또는 남성성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게 된다(교회에는 언제나 상당수의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이건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는 죽을 때까지 남자와 여자로 남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르고, 형제는 자매와 다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또 다르다. 나는 아버지나 형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 어머니와 자매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건 내가 그들에 대한 권한이 있음을 의미하거나 내가 그들을 위해 대신 결정을 내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나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내 여동생은 런던 병원에서 응급실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사고를 당하면 나는 그녀가 시키는대로 하고 그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지침도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간 성적 차이를 가정한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딤전 5:1-2). 그렇기에 우리는 친척, 교회 가족, 직장, 심지어 소셜 미디어에서조차 연로한 사람들을 아버지 또는 어머니와 같은 존경심을 갖고 대해야 한다. 물론 이 원칙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서구에서는 나보다 어린 여자도 얼마든지 나의 상사가 될 수 있지만, 예멘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이성과 식사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족과 함께 사는 독신 남성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은 독신 여성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과 중요한 면에서 달라야 한다. 그리고 “젊은 여성을 자매로 대하는 것”의 범위를 단지 “그들과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으로만 제한한다면, 그건 바울의 가르침을 완전히 곡해하는 것이다. 상보성과 교회 교회와 관련해서, 넓은 신학과 인류학의 시각을 잃고 단지 성경 구절 몇 개와 복종과 주인(hupotassō or authenteō)과 같은 잡초에 불과한 단어 몇 개에 집착해서 길을 헤매기 쉽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와 그것을 지역 교회에 올바르게 적용하는 방식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 장로의 경우는 여기에서 다루지 않는다. 주목할 점은 다음 두 가지 관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a) 장로들이 근본적으로 교회의 수호자라는 것과 (b) 에덴 동산에서 장막, 성전, 예수의 사역, 신약의 교회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구속 역사의 모든 단계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그들을 해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남자라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의 “장로”, “목자”, “감독자”라는 용어가 대체로 서로 호환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행 20:17-38; 딛 1:5-9; 벧전 5:1-4). 각각의 직책을 맡은 사람은 교회를 해로부터 보호하고, 그러므로 교회를 섬기는 책임을 갖고 있다. 성경적으로 말해, 장로는 교회의 보호자이다. 여기 인용한 구절들을 하나씩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라. 1. 목자/목사목자(또는 “목사”)가 존재하는 주된 이유는 양을 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그는 양을 새로운 목초지로 인도하고 그들을 위해 음식과 물을 준비한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목자를 고용하는 주된 이유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부상과 도둑질, 분산과 늑대 및 기타 야생 동물 등등. 이런 사실은 성경의 핵심 본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자는 자신의 피를 흘린다. 이런 사실은 구약에도 잘 드러나있다. 다윗과 같은 목자는 양떼를 지키기 위해 사자와 곰을 죽이고 지팡이로 양을 보호했다. 목자에게 중요한 것은 양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 양을 지키는 일이었다.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목양하는 것은 약하거나 다친 양을 보호하고 공격하는 적으로부터 전체 무리를 보호하는 일이다. 2. 감독자/주교영어 단어 “감독자”는 ‘episkopos’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그 단어의 공명을 감안할 때 “주교(bishop)”보다는 확실히 감독자라는 단어가 더 낫지만, 여전히 콜센터를 감독하는 관리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성경에 쓰인 그리스어에 따르면 이 단어에는 “가디언, 수호자”의 의미가 있다. 에스겔에 나오는 스코포스(skopos, 파수꾼)처럼 들렸을 것이다. 존 칼빈은 스코포스(skopos)를 이렇게 이해했다. “신실한 감독자는 양떼를 돌보며 다른 남자는 잠자는 동안에도 일하는 ‘충실한 파수꾼’이다.” 여기서 말하는 파수꾼은 노동자를 감시하는 관리자라기보다 보초의 의미가 더 강하다. 물론 감독자의 역할은 교회에서 건전한 교리를 보존하는 것이었으며, 이 역할은 시간이 흘러 결국은 1세기 후반에 들어서 장로(Elder)와 주교로 구분되게 되었다. 3. 장로놀랍게도 장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렉 빌(Greg Beale)은 신약에서 장로의 목적이 종말론적 환난 동안 교회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오순절과 재림(parousia) 사이의 기간은 속임수와 거짓 가르침, 그리고 박해와 고통으로 특징되며, 목회 서신이 강조하는 장로의 역할은 그 무엇보다 교회가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이런 명령을 담은 구절로 빌이 제시하는 것은 사도행전 20장뿐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의 첫 번째 선교 여행 중에 제자들에게 쓴 다음 구절도 포함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14:22),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14:23). 마치 이것이 고난에 대한 해결책인 것처럼 말이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주교와 장로는 그들이 섬기는 교회를 대신하여 순교했다. 오늘날에도 똑같은 역동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동우크라이나에서 장로들이 체포되는 이유는 적대적인 당국이 회중이 아닌 교회 지도자를 표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레고리 대왕은 6세기에 교회를 지키는 것이 고귀한 일이라는 바울의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사람이 보통 가장 먼저 순교의 고통으로 인도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장로의 책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세 가지 D를 사용한다. 교리(doctrine), 규율(discipline), 지시(direction)가 그것인데, 우리는 거기에 네 번째 D를 포함해야 할 지도 모른다. 죽음(death).이 세 단어를 취합하면 분명한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장로는 다름 아닌 보호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성경 역사 속 모든 시기에서 사람들과 하나님의 성소를 보호하는 지키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아담은 “경작하며 지키도록” 에덴동산에서 창조되었다(창 2:15). 같은 두 개의 동사가 레위 인에게도 사용된다(민 3:7-8; 18:7).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를 죽인 타락이 일어났을 때, 그 책임은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 져야 한다.- 족장들은 모두 남자이다.- 성소 보호와 더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보호하는 레위 제사장들은 모두 남자이고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하면 폭력을 행사해야 했다. 그들은 동물을 죽였고, 심지어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일 정도로 야훼를 향한 열망이 있었기에 그들은 처음 제사장으로 선임되었다(출 32:25-29).- 이것은 유다에서 남자 군주제와 함께 남자 사제직이 운영되었던 첫 번째 성전 기간 동안에도 동일하다(아달랴는 결코 “여왕”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 저자에 의해서 합법성을 부여받은 적도 없다. 그런 예외는 남성 중심의 규칙이 합법적이었음을 증거한다).- 스가랴와 세례 요한 시대에 이르는 두 번째 성전 시대까지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모두가 다 남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세계 교회를 하나로 묶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라고 하셨다. - 신약 교회의 감독자, 늑대와 거짓 목자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일을 맡은 장로와 목자 그리고 파수꾼의 자격은 오로지 남성에게만 주어진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여성의 도시(역자 주: 모든 믿는 이는 예수의 신부가 되기 때문에 여성의 도시라고 표현함)로 끝난다. 그 도시는 성별과 상관없이 남자 구세주에 의해서 구원받은 모든 이가 다 그의 신부가 되는데, 도시의 기초와 성벽은 남자 사도와 남자 족장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아름다운 차이: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로 이어집니다.원제: Beautiful Difference: The (Whole-Bible) Complementarity of Male and Fema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상호보완성
상보성
NT라이트
교회
장로
목자
감독자
결혼
아름다운 차이: 창조 원리
by Andrew Wilson
2021-06-30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tohu wa’bohu)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어둠과 빛을, 낮과 밤을,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그리고 바다와 땅을 분리하셨다. 그는 태양과 달, 물고기와 새, 가축과 기는 것, 야생 동물을 구별하셨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지닌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남성과 여성을 구별했다. 하나님은 평범한 날에서 안식일을 구별하셨고, 가인에게서 아벨을 그리고 평범한 것에서 거룩함을 구분하셨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무형태(tohu)에 질서를 가져오고, 공허함(bohu)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일련의 구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식일을 끝내면서 유대인이 기도하는 하브달라(Havdalah) 기도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 주 우리 하나님, 우주의 왕 이시여, 빛과 어두움을,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를, 거룩한 일곱째 날과 노동하는 나머지 여섯 날을 구분하시는 당신은 복이 있습니다.”상호보완성(상보성, Complementarity,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무엇이 상대의 자질을 향상시키거나 또는 그 자질을 강조하는 관계 또는 상황”)은 창조물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 중심에는 적합함, 상호 간의 향상, 아름다운 차이가 존재한다. 모든 우주는 다 이런 식의 상호 보완적인 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자와 여자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그래서 우주적 보완성은 인간 언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der Tag / die Nacht, le ciel / la terre, el sol / la luna 등). 성적 보완성에 관한 유대-기독교의 비전은 우주적 상보성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반영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창조자와 창조세계,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어린 양과 신부의 아름다운 차이를 반영한다. 똑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르지도 않은따라서 상보성은 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른 두 가지 사고방식과 현저하게 다르다. 한편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남자와 여자가 동일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늘과 땅, 낮과 밤처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한 가지주의(one-ism)가 아니라 분리와 구분을 드러내는 두 가지주의(two-ism)를 통해 이뤄내는 질서와 생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구분이 무너지는 곳에 생명은 없다. 생명이란 아름다운 차이를 통해 생겨난다. 그러니까 하늘이 땅과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태양과 비를, 또 식물과 동물이 살아 움직인다. 그에 대조적으로 모든 것이 똑같이 생긴 동굴(위에도 땅 아래에도 땅) 또는 목성(위에도 하늘 아래에도 하늘)은 그 어떤 생명도 잉태하지 못한다. 이런 성적인 상보성과 우주적 상보성의 연관성을 감안할 때, 하늘과 땅의 구분을 폐지하는 건 다름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폐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흔히 도마 복음서라고 알려진 영지주의 복음서에는 유대인 예수에 관한 한 가지 희극적인 사례가 네 복음서에 담긴 예수님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한 진짜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마 19:4). 그런데 영지주의 문서 속 예수는 요즘 현대적 인물들처럼 뭔가 구분이 흐릿하고 아주 애매하게 말한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속을 겉과 같이, 겉을 속과 같이, 그리고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된 자로 만들어 남자는 남자가 아니며 여자는 여자가 아닐 때, 그리고 너희가 한 눈 대신 눈들을, 손을 위해 손을, 발을 위해 발을, 그리고 모습을 위해 모습을 만들 때, 그러면 너희는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토마스 22). 이렇듯 명확한 구별이 없을 때 창조물은 엉망진창으로 무너진다. 상보성은 그렇기에 동일성이 아니다. 또 한편으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남자와 여자가 아예 전혀 다른 종류에 속할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고도 믿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전적으로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다르지도 않다. 그렇기에 성별 구분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차이를 너무 과장해서도 안 된다. 남자와 여자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정체성은 성별보다는 인간성 그 자체로 인해서 훨씬 더 근본적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으로 남자와 여자로 나눠진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남자와 여자로서의 차이는 아예 사라진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화해하고 주인은 노예를 섬기며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함께 상속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받는다.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많은 철학자들에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상보성과 조화가 아니라 타자 성과 갈등으로 표현되어 왔다. 남자와 여자는 개인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문명적 차원에서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서구의 생각은 남성적이고 선형적이며 또한 상승적이고 질서를 중심으로 해서 창조세계를 압도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동양적 사고는 여성적이고 순응적이며, 순환적이며, 혼란성을 받아들이며 창조세계에 굴복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의 두 가지 사고는 일면 친숙할 뿐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적으로도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모두 다 상보성이 아니라 변형(alterity)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적 차이 또는 생소함인 것이다. 그런 세계관은 갈등, 승리, 경쟁, 반대, 경쟁, 심지어 폭력으로 구성된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가 없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랑이 사라지고 없다.정체성에 관한 이교도의 비전에는 구분 자체가 없는 통일성(union)이 있다. 변형을 특징으로 하는 이신론적 비전에는 통일성이 없는 구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보성을 가진 기독교적 비전에는 통일성과 더불어 구분이 있다. 같음과 다름이 있고, 다수와 유일성이 있다. 기독교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그 둘은 서로가 없이는 결코 온전할 수 없다. 그리고 창조물 안에 존재하는 분명한 구분은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우리는 그 삼위일체 안에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변이, 동일성과 타자성, 그리고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을 만난다)과 성육신(하늘이 땅을 만나고 말씀이 육신이 되는) 안에서 극적인 조화를 이룬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우리는 원초적인 투쟁과 폭력이 아니라 삼위일체 안에서 반복되는 평화와 기쁨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미래 희망은 하늘과 땅이 다시 하나가 되고, 영광 속에서 우리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1장 속 대부분의 대비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초월적으로 표현된 이유이다. 달, 태양, 바다, 어둠, 성 관계가 없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아름답게 결합한다). 우주 최후의 운명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은 한 사람의 영광이 다른 한 사람 속으로 스며들어 가득차게 되어, 더 이상의 갈등과 무너짐도 없는, 완벽한 상보성을 이루는 모습을 반영한다. 어린 양의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들은 실로 복이 있도다!상보성과 창조이런 신학적 틀을 감안할 때, 남자와 여자가 문화적 다양성을 초월하는 모든 방식에서조차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적 중립 사회에서는 도리어 분명한 성적 차이가 사라지기는커녕 도리어 더 증가한다는 증거가 있을 정도이다. (널리 알려진 한 보고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물 인식 능력(mental rotation)의 차이는 성적 평등성이 높은 국가일수록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종 모양 통계 곡선은 여러 분야에서 명백하게 그 차이를 드러내는데, 누가 봐도 명백한 키와 힘, 머리카락 등등의 신체적 특성에서 뿐 아니라 호르몬, 심리상태, 대인 관계의 특성에서도 적용된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더 공격적이고 경쟁적이며 두려움이 없으며 위험을 감수하고 난잡하고 폭력에 취약하다.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은 높은 수준의 자신감, 성욕 및 지위에의 갈망과 동의어이다. 여자는 평균적으로 정서적 안정과 공감을 중요시한다. 결과적으로 남자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상층이 아니면 최하층에 모여있다. 그러니까 남자는 매우 부자이거나 매우 큰 권력을 가질 가능성이 높지만 (물론 이런 주장은 다양한 반론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동시에 범죄자와 살인자 또는 노숙자로 살 가능성이 여자들보다 훨씬 더 높다. 남성 그룹은 스파링, 싸움, 권력 구조 및 희롱 등으로 더 많이 특정지어지는 반면, 여성 그룹은 일반적으로 더 소규모의 간접적인 대결, 평등한 구조, 능수능란한 말주변 및 사물보다는 사람 중심의 특징으로 구분된다. 성별에 따른 특징적인 경향은 아이들이 자신의 성별을 제대로 인식하기 전부터 이미 드러난다. (비극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2015년에 발생한 유아 총격 사건 마흔세 건 중에 남자 아이가 일으킨 사건은 무려 마흔 건이다). 그건 동물도 다르지 않다. (수컷 히말라야 붉은 털 원숭이는 인형 보다 트럭 장난감을 더 좋아한다). 슬레이트(Slate)의 편집자인 줄리아 터너(Julia Turner)는 최근 그녀의 쌍둥이 아들이 보여준 남성다움(boyishness) 때문에 평소 갖고 있던 사회적 구조로서의 젠더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큰 도전을 받았다면서, 그녀가 평고 갖고 있던 성적 평등주의적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했다. “남자애는 정말로 다르구나.” 그녀의 이 말에 대해서 윤리학자인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Christina Hoff Sommers)는 페더럴리스트(The Federalist)에서 다음과 같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당연히 다르지. 너무도 뻔한 그 차이가 안 보인다면, 대학교 가서 학위를 받아야겠지.”난잡함과 폭력을 향한 남성의 성향을 변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든 남녀의 차이를 덕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위해 과학이 애쓰는 것처럼, 내가 지금 남녀의 모든 차이를 어떻게든 확증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음 네 가지이다. 1. 상보성은 세속적 주류 과학 및 사회학적 연구의 관점에서 보아도 우리 인간에게 이미 고정된 팩트로 보인다. 대다수의 인간 사회는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고국을 지키는 전쟁에 나간 적도 없고, 출산 중에 죽지도 않으며, 광산에서 일하거나, 개척지에서 고생한 적도 없기에, 이 사실은 오늘날 현대 문화에서 잊혔다. 그러나 팩트는 확고하다. 2. 창세기 1장에서 4장까지의 내용이 진리라면, 우리가 발견하는 많은 특성들과 우리가 찾게 될 사실들 사이에는 흥미로운 일치가 존재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남자(adamah =“땅”)는 땅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받았고, 여자(havah =“생명”)는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3. 목회적 차원에서, 남자와 여자가 일반적으로 다른 종류의 죄나 약점(#MeToo, #ToxicMasculinity, #HeForShe)에 걸리기 쉽다는 것은 단지 상상이 아닌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특성에 맞게 제자훈련을 해야 한다. 4. 이 사실은 또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매우 명백한) 생물학적 차이와 그 중요성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이 특정 성별이 다른 성별보다 키가 크고, 더 강하고, 털이 많고, 성기가 바깥 쪽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또 다른 성별의 성기는 내부에 있고 삽입과 임신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외계인이 발견한 건 그게 다가 아니다. 특정 성별은 주로 관계를 형성하고 소그룹을 모으고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데에 더 익숙하고 또 다른 성별은 주로 외부 기관에서 일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작업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외계인들이 탑과 도시, 전사와 정원, 사제와 사원, 피를 뿌린 신랑과 순수하고 흠 없는 신부와 같은 성별을 설명하는 성경의 범주를 접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외계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아름다운 차이: 가정과 교회 안에서’로 이어집니다.원제: Beautiful Difference: The (Whole-Bible) Complementarity of Male and Fema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천지창조
창조사역
상호보완성
상보성
피조물
남녀차이
통일성
삼위일체
카이퍼 통신 10 :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by 김은득
2021-06-25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미국의 독립 전쟁 시기에 행해진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 명연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를 기억하십니까? 헨리의 주장대로 인간에게는 절대로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human freedom)입니다. 명실공히 헌법에 명시된 보통 사람들의 자유는 역사적으로 왕의 권력(혹은 주권)으로부터 쟁취해 내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대개 이런 정치적 자유를 향한 불같은 열정이라면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사실 제(카이퍼)가 활동했던 19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소설 중의 하나가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입니다. 아직도 2012년 뮤지컬 영화로 제작된 레 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가 귓가에 울려 펴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성난 자들의 노랫소리가? 다신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함성!” 제가 이전 카이퍼 통신들을 통해 지적했던 것처럼,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네덜란드 역시 1848년도에 왕에게 주어진 실질적 권력(혹은 주권)을 의회(the parliament)로 이동시키는 헌법 개정을 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후광을 힘입은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인민 주권을 내세우며 거의 30년 동안 네덜란드 의회를 장악하였습니다. 이에 발맞추듯이 화란 개혁 교회 내부의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이 프랑스 혁명은 종교 개혁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면서, 장 칼뱅(Jean Calvin)과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에 대한 비교 연구가 성행했습니다. 200년의 역사적 간격을 제외한다면, 둘 다 프랑스 출신으로 동일하게 제네바를 무대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루소 본인이 사회계약론(Social Contract)이라는 저서에서, 칼뱅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칼뱅을 그저 신학자로만 높게 평가하는 자들은 그의 진정한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 모국에 대한 사랑, 자유에 대한 열정에 우리에게서 소멸되지 않는 한, 그 위대한 인물에 대한 기억은 영원토록 축복을 상기시킬 것이다.” 이런 종교 개혁과 프랑스 혁명의 관계 혹은 칼뱅과 루소에 대한 관심은 제 후배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에게서도 나타날 정도이니, 네덜란드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공적 담론의 주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이든 신학적이든 자유주의자들이 공론장의 대세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젊은 청년들을 제가 창당한 반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의 당원으로 가입시키는 것은 매우 힘든 과제였습니다. 그 때 작성한 제 아티클 제목이 “칼빈주의, 헌법에 따른 시민 자유의 원천과 요새(Calvinism, the Source and Stronghold of Our Constitutional Liberties)”입니다. “다신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함성”과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칼빈주의 교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혹은 “신적 선택 교리(the doctrine of divine election)”가 아닐까요? 저는 그런 칼빈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자라난 젊은 세대에게 칼빈주의에 대한 새로운 내러티브를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헌법적 시민 자유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칼빈주의에 근거한 혁명, 바로 권위와 자유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그런 혁명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인간의 자유를 억압할 것만 같은 여러분의 오해를 풀어드리고자 합니다. 16세기 칼빈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각종 성상이나 동상을 다 파괴하였는데, 이것은 공공 기물 파손(Vandalism)의 행태가 아니라, 우상숭배에 대한 혐오, 특히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에 근거한 활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왕정(monarchy)이든 민주정(democracy)이든 어떤 인간적 형태로도 재현될 수 없습니다; 다만 칼빈주의자들이 선호한 공화정(republicanism)은 일종의 왕정과 민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신학적 문제점을 보완하는 형태입니다. 도르트 총회에서 인정했듯이,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절대 주권을 부여한다 해도, 타락한 인간이기도 한 왕은 권력을 남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권력을 잘 사용한다면, 왕에 대한 일종의 우상 숭배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권력에 대한 법적 구속과 견제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중 역시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언제나 그들의 자유 역시 방종이 되기 쉽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다수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소수의 자유를 희생시켰습니다. 루소의 강력한 추종자인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루소의 인민 주권 사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 유명한 단두대를 설치하고 공포정치(the reign of terror)로 나아갔던 것을 늘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을 받아들이는 칼빈주의자들은 권력과 자유의 문제에서 양극단을 피하면서, 공화정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제 정치적 대부인 후른 판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에게 프랑스 혁명은 유럽 문명을 병들게 하는 암적인 존재였기에, 프랑스 혁명의 과실 역시 결코 따먹을 수 없는 금단의 열매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프랑스 혁명이 제공한 인민의 자유는 금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누려져야 할 소중한 열매입니다. 제가 이끄는 반혁명당의 모습은 시대의 흐름에 반동적인 정당에서 벗어나, 더 나은 매력으로 네덜란드의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는 정당입니다. 제가 묘사한 신적 선택 교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인간은 더 이상 교회(로마 가톨릭)나 성직자들(루터교의 교사 개념)을 매개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필요가 없으며, 개개인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후기 기독교세계(post-Christendom)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선택 교리를 통해 양심의 자유 개념으로 나아가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던 19세기의 상황에서 칼빈주의적 양심의 자유가 다양한 칼빈주의 국가들 내에서 정치적 자유로 발전했음을 보여 준 것은 파급 효과가 상당했습니다. 미국 독립 혁명, 영국 청교도 혁명, 네덜란드의 독립 혁명은 칼빈주의 국가들 내에서 어떻게 인민들이 충분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국가의 질서가 안정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실례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제가 살던 시대보다 충분한 사료를 누적하고 있는 여러분의 상황에서 이런 혁명들 가운데 너무나 듣기 불편한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청교도 혁명에 존재하는 폭력적 내란, 국왕 살해, 아일랜드 지역에 대한 테러 등은 제가 비판했던 프랑스 혁명의 문제점들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던 19세기에 칼빈주의가 하나의 문화적 패턴으로서 근대 시민 국가의 권위와 자유 개념의 원천임을 보여주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주장은 당대 지성인들 (조지 밴크로프트(Goerge Bancroft), 막스 베버(Max Weber),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공통된 전제였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사회적 상상력이기도 했습니다. 다소 저의 특이점은 반혁명당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프랑스 대혁명보다 더 나은, 칼빈주의 국가들에서 발생한 혁명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근대 시민 국가의 자유의 원천은 프랑스 대혁명이 아니라, 칼빈주의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이런 칼빈주의 정치 철학적 문맥 속에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을 살펴보면, 영역 주권 교리는 다름 아닌 삶의 각 제반 영역들이 국가나 권력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각 영역 자체의 권위와 책임 하에 운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국가(the State)를 “내재적인 하나님(the immanent God)”으로 신격화하면서 권력이 행정부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 됩니다. 인간의 전적 부패를 다시 한번 상기한다면, 미국의 삼권분립처럼 견제와 균형으로 조화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저는 이런 권력의 분립과 균형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창조 원리에 따라, 삶의 각각의 영역들은 분화된 권력과 책임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영역은 또 다른 영역에 부당하게 간섭하거나, 자체의 영역에 통용되는 원리를 다른 영역에 부과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중세 크리스텐돔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교회가 학문이나 예술과 같은 다른 영역에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는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국가가 교회를 대체하였을 뿐이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국가나 교회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대학교, 즉 암스텔담의 자유대학교 설립식에 영역 주권에 대해 연설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바로 삶의 각각의 영역들이 그 영역 주권에 따라 발달하기 위해서는 그 영역 자체 내의 윤리적 퇴보에 저항해야 합니다. 만일 학문의 영역이 진리에 부합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따라 운영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종교)의 영역이 신앙이 아닌 자본의 논리에 따른다면 어떨까요? 바로 영역 자체 내 윤리적 퇴화가 심화되어 법적 문제가 생겨날 때, 국가의 개입이 그 영역에 대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각 영역의 자유로운 발전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윤리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국가는 모든 삶의 영역들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 문명이 더욱 발달하면서, 국가의 이런 지배적 성향은 더욱 강화됩니다. 한 개인이 이런 국가 권력과 충돌하게 될 때, 소위 시민 사회(civil society)로 구성된 중재 기관(mediating institutions)의 도움이 없다면 정당한 대우를 받기 어렵습니다. 토크빌이 당시로선 신생국가인 미국의 민주주의를 유럽보다 높게 평가한 이유 중 하나가 국가의 권위와 개인의 자유 사이를 중재하는 시민 사회의 역동성이었습니다. 시민 사회의 발달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삶의 각 영역들이 자체 영역 원리에 따라 자유롭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각 영역 자체에 능력이 출중하면서도 도덕성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고, 바로 자유대학교의 존재 이유는 이런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칼빈주의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때론 혁명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사랑합니다. 마치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절대 주권을 행사하는 타락한 국가 권력에 대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기꺼이 외쳐 왔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의 자유에 대한 열정은 혁명의 한 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국가 권력의 부당한 간섭을 벗어나 삶의 각 영역이 그 자체의 영역 주권 원리를 따라 자유롭게 발전하는데 이릅니다. 그러나 이런 칼빈주의자들의 자유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같은 윤리의식과 결부되면서, 국가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왕이든지 국가든지 심지어 민중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의 권력은 부패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의 자유는 방종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칼빈주의가 프랑스 대혁명보다 더 나은 헌법적 자유의 원천이며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칼빈주의자들은 국가의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교회에서부터, 삶의 각 영역 원리에 따른 자유로운 시민 사회를 구현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칼빈주의적 자유에 대한 열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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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문화 속에서 믿음을 지켜내기
by Justin Dillehay
2021-06-14
우리는 신학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고있다.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y)가 최근 시행한 ‘신학 상황(State of Theology)’에 관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이들 중에서도 30퍼센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고, 46퍼센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믿으며, 22퍼센트는 성 정체성은 ‘개인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수세기 전에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해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화는 특히나 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를 인정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강한 상대주의와 개인주의에 물들어 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명확하게 정의된 신앙을 저항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기독교를 선호한다. 이 모든 상황은 지금이야말로 예수님의 형제가 우리에게 전한,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유다서 3절을 묵상하기에 좋은 환경임을 의미한다. 나는 이 구절을 세 가지 각도에서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덕적·신학적 혼란의 시대에서 믿음을 위해 싸우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바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1. 명확한 경계와 내용이 있는 믿음이 ‘믿음’이라는 단어는 보통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한 유일한 소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마음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믿음’은 믿는 행위가 아니라 믿는 ‘무엇’을 가리킨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1세기에도 모든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사도들이 기대한 일련의 정리된 가르침이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유다는 AD 65년의 기독교인에게 ‘믿음’을 위해 싸우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유다가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한 명령이었다. 현대의 일부 회의론자와 달리 유다는 ‘여러 기독교’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 바울처럼 그도 오직 ‘하나의 믿음’(엡 4:5)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에 반하여 가르친 사람들은 단지 대체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거짓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갈 1:6-9).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모든 것에 다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롬 14장), 그럼에도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동의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고전 15:3; 갈 1장).유다의 명령은 또한 성경이 비록 엄청나게 방대한 책이지만, 그 안에는 정확하게 요약할 수 있는 가르침이 들어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신조나 고백이 의미하는 바이다. 교회 웹 사이트에 ‘우리가 믿는 것’이라는 섹션이 없는 교회를 나는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무엇을 믿는지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음은 유다에게 빈 깡통이 아니라 내용이었다. 이 사실은 바로 다음 질문을 부른다. 믿음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 2. 도덕적 그리고 교리적 진리로 가득한 믿음유다와 초대 교회에게 믿음은 근본적인 도덕적 진리와 교리적 진리를 모두 포함했다. 도덕적 진리첫째, 믿음에는 죄와 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덕적 진리가 포함된다. 실제로 유다는 이렇게 경고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4절).욕정에 빠져 살면서 그런 삶을 위한 신학적 합리화를 만드는 것은 믿음과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기독교 사랑의 이름으로 무지개 깃발(역자 주 - 동성애 옹호를 의미)을 날리고 있는 일부 교회가 존재하는 오늘날 우리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 교회를 향해 지금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경고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7절).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의 사도적 믿음은 “죄 사함을 믿는다”(고전 6:9-11, 골 1:13-14).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면,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따라서 가장 중요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계명을 완화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세상의 도덕적 수준을 낮추기 위해서 죽으신 것도 아니다(마 5:19). 그는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용서받고 해방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서 죽으셨다. 또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시 부활하셨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거짓 선생들이 부정한 믿음의 내용이다. 유다 시대뿐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말이다. 내가 너무 일방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말을 덧붙여야겠다. 우리는 성적 부도덕을 허용함으로써 믿음을 거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연로하신 부모를 돌보지 않음으로써도 믿음을 부인할 수 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우리에게 음행을 피하라고 가르치는 바로 그 믿음은 동시에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한다. (보통 성 혁명을 주장하는 이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초기 신조에 포함된 교리적 진리에 대한 믿음을 축소하려는 시도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헛된 꿈이다. 교리적 진리어떻게 사는가는 관계없이 단순히 교리적 가르침만 인정하면 되는 것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는 한 부류가 있는 반면, 또 다른 부류는 기독교를 무엇을 믿는가와 관계없이 그냥 착한 사람으로 살도록 하는 종교로만 보고 있다. 이 말은 결국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무신론자와 힌두교인이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계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리고 예수님에 따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 17:3).기독교인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특정 사실을 믿는 사람이다. 믿음은 특정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확증한다. 우주 창조와 예수의 부활과 같은 사건이다 (히 11:3; 고전 15장). 믿음은 또한 “예수가 주님이시다”, “여호와는 한 분이시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다른 신은 무가치한 우상이다”(롬 10:9; 고전 12:3; 신 6:4; 고전 8:6; 시 96:5)와 같은 진술이 진리임을 증거한다. 또한 믿음은 악인의 심판과 육체의 부활과 같은 특정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 것임을 확증한다 (유다 6절, 14절; 고전 15장; 딤후 2:18).행동이 없는 믿음(belief)은 죽은 것이지만, 믿음이 없는 행동도 치명적이다. 믿음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단 한 순간도 좋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이 ‘선한’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도덕주의에 불과하다. 그것은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3. 믿음은 시대정신(Zeitgeist)을 이긴다정통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이런 말을 들어왔다. “현대인이라면 기독교의 ________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는 거기에 맞게 변하거나 아니면 사라져야 해.” 흥미로운 점은 다음과 같다. 트레빈 왁스(Trevin Wax)는 100년에 살았던 ‘현대인’이 믿지 못했던 것이 대개는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과 같은 교리적 진리였음을 지적한다. 1920년에 살았던 현대인은 성경 속 도덕성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았지만 기적 이야기는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거의 그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우리 문화가 특히 기독교를 보면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성에 관한 성경의 도덕적 가르침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독교는 진화하거나 사라져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듣고 있다. 그러나 20세기를 되돌아 보면 정반대의 현상을 볼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진화했던 교회는 다 죽었다. 목숨을 잃을 각오로 교리를 지킨 교회들은 지금도 살아남았다. 유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믿음은 시대주의에 맞게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이 발명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문화는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서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믿음의 측면을 이리저리 바꾸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앞에는 언제나 걸림돌이 놓여 있다. 감각적인 욕망에 빠진 사람들은 단지 선행만 하면 얼마든지 자신을 용납하는, 그런 하나님을 원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 두 가지를 다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더 나은 것을 제시한다. 우리는 실제로 신학적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자 하는 유혹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믿음 자체를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들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도 있다. 그것은 바로 유다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원제: Contending for the Faith in a Confused Cultur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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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거스르는믿음
믿음의실체
신학적혼란의시대
자기 주장으로 넘치는 세상, 급진적 태도로 현실을 적시하라
by Brett Mccracken
2021-05-31
나는 오늘날 서구 문화에서 가장 크게 떠오르는 갈등이 반드시 정치적 좌파와 우파 사이에 발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편의 주장(narrative)이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 현실에 맹렬하게 헌신한 사람들과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현실보다 주장 그 자체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들 간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미국에서는) COVID-19가 바로 여기에 딱 맞는 사례를 제공했다. 전염병에 대한 접근 방식이 정치적 주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적지 않은 우파가 존재하고 있고, 결과적으로 코로나에 대한 그들의 자세는 현실을 정직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유모 역할을 하는’ 거대 정부의 과도한 권한, 부패한 대형 제약회사, 개인의 자유 침해, 정부 통제의 수단으로서의 백신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그들에게는 현실이 되었다. 어떤 수준의 과학적 합의나 통계도 그들로 하여금 그런 주장을 재고하게 하거나 최소한 복잡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좌파 진영에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결과 그들은 객관적인 현실보다 자신들의 주장과 편견에 더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안 쓰는 사람은 무조건 백신 혐오자나 또는 인류 학살을 좋아하는 보수주의자라는 식의 생각이다. 아틀란틱(The Atlantic)에 실린,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진보주의자에 관한 기사인 ‘폐쇄를 중단할 수 없는 사람들’에서 엠마 그린(Emma Green)은 이렇게 썼다. “COVID-19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증거에 의해서 지지받지 않는 정책과 행동을 계속 수용하고 있다. 운동장 출입 금지, 해변 폐쇄, 대면 학습을 위한 학교 재개 거부 등이 그것이다.”현실을 향한 감정보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사실에 비추어 사는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주장과 분노보다 증거와 논리에 의해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급진파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당파적 주장에 빠져있어서 제대로 된 현실을 보지 못한다. 이런 현실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 교회에서조차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궁극적으로 주관적인 주장이 경쟁하는 이 세상에서 보다 많은 기독교인이 급진적인 태도로 바른 현실에 올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정보 환경에서 사람들의 주장이 왜 그렇게 흡수력이 좋은지, 그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왜 특정 주장에 빠지는가?인간은 항상 불편한 현실보다 나를 편하게 해주는 이야기를 선호하는 유혹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본성은 뱀의 이야기를 믿은 하와의 선택에서 시작되었다(창 3:1-7). 그러나 오늘날 현대 기술 시대에는 이런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특정한 역학 관계가 있다. 여기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우리는 차고 넘치는 정보에 짓눌리고 있다 (특정 주장은 따라서 더 쉽다) 너무 많은 기사, 연구, 통계, 의견 및 ‘전문가’ 권장 사항과 같은 정보로 가득 찬 세상에서 현실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아예 불가능해 보인다.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가 뇌를 강타할 때,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깔끔한 주장을 반영하지 않는 정보는 그냥 배제하는 게 모든 증거를 검토하면서 그 증거가 말하는 진짜 현실이 무엇이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이미 갖고 있는 주장에 적합한 새로운 데이터만 그때그때 빠르게 연결하는 것은 정보 과부하의 세계에서 살아남도록 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이런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은 나태한 것이며 심지어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 현실은 종종 우리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현실을 바로 파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힘든 노력이고 인내를 요구한다. 2. 우리는 너무 조급하다 (특정 주장은 빨리 알 수 있다)사실을 수집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특정 주장은 빠른 답변을 제공한다. 모든 복잡한 영광(glory) 속에서 현실을 발견하는 것은 시간을 요구한다. 즉각적인 만족을 약속하는 세계에서 누가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가? 현실을 특정 주장으로 깔끔하게 바꾸는 선택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주장을 팔고 있다. 뉴스 속보가 발생하면 특정 주장을 양산하는 기계들이 작동하며 새로운 ‘증거’를 기존 주장 속에 포함시킨다. 2016년 펄스(Pulse) 나이트 클럽에서 학살이 있었을 때, 그 사건은 즉시 동성애 혐오 주장 속으로 편입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는 그런 프레임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서 수년에 걸쳐 위세를 떨치던 ‘동성애 혐오 증오 범죄’라는 주장이 와해되었다. 너무도 빠른 뉴스 주기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잘못된 주장을 수정하기 위해 오래된 뉴스를 검색하지 않는다. 일단 어떤 주장이 집단적으로 채택되면 사실과 상관없이 후대 사람들에게 그 주장은 ‘현실’이 된다. 3. 우리는 너무 자기 중심적이다 (특정 주장은 그런 우리를 만족시킨다)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현실보다 특정 주장을 더 중시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바로 인간이 자기 중심적인, 죄 많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정 주장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을 우리 맘대로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통제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저항한다. 죄인 된 우리는 현실이 우리에게 아무리 틀렸다고 말해도 나 자신에게 ‘옳다’는 느낌을 주는 특정 주장을 더 선호한다. 그리고 특정 주장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가 가지는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존 편견을 확고히 하고, 내가 가진 견해의 정당성까지 확신시키는) 특정 주장을 담은 뉴스는 잘 팔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내가 믿고 싶은 뉴스만 더 많이 보게 만드는 알고리즘은 우리를 소셜 미디어에 더 중독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해당 광고주에게 더 많은 돈을 벌도록 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악순환이지만, 그럼에도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고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부인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다면 이런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자아 밖에 존재하는 진리를 향한 겸손한 복종만이 우리를 특정 주장으로 왜곡된 거품과 교만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특정 집단을 넘어 진리로나는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의 전 칼럼니스트인 바리 와이스(Bari Weiss)가 서브스택(Substack) 뉴스레터 창간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을 보고 감탄했다. “이 뉴스레터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다. 어떤 팀이나 특정 집단의 안락함이 아니라,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뉴스레터다.”어떤 팀이나 특정 집단의 안락함이 아니라, 진리를 찾는 사람들.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을 이 세상에서 찾으라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문화적, 정치적, 개인적 주장이 주는 편안한 애착을 포기할 때에만 가능하다. 교회는 각종 주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바른 현실을 가장 분명하게 옹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우리에게는 진리의 기초(성경)와 해방의 진리(예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완전하고도 진정한 주장이다. 성경의 주장은 현실을 뒤집는 게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한 기준과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렌즈를 제공한다. 내가 작년에 ‘에코 챔버를 탈출하라. 지금은 설득할 때다(Exit the Echo Chamber. It’s Time to Persuade)’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파가 아니라 선지자다(We Need Prophets, Not Partisans)’에서 주장했듯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당파적 권력이나 집단 내 지위를 요구하기보다는 초월적인 진리를 위해 싸워야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면에서 많은 기독교인이 현실보다는 특정 주장을 더 강조하고 있고 또는 특정 주장이 그들이 인식하는 현실을 결정하도록 만들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오늘날 우리 복음주의권을 찢어놓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쓴 ‘지혜의 피라미드(The Wisdom Pyramid)’에서 이렇게 제안했다.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각종 주장을 쏟아내는 매체(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좀 더 많은 시간을 우리로 하여금 현실 속에 뿌리박게 하는 소스(성경, 교회, 자연)에서 보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월적이고, 시간을 통해 검증되고 손에 잡히는 진짜 현실을 보라는 것이다.성경과 기독교 전통 안에는 각종 주장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도 현실에 뿌리박도록 하는 충분한 자료가 담겨있다. 지혜를 형성하는 자원에 시간을 쏟자. 트럼프 탄핵과 같은 음모론에 쏟을 시간을 성경에 쏟도록 하자. 스쳐 지나가는 잡담 같은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에 교회가 이천 년 동안 쌓은 전통으로 나 자신이 만들어지도록 하자.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헛되고 추상적인 유혹을 떨쳐내고 창조를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연과 생물학 속에서 나 스스로를 제한하도록 하자. 하나님이 만드신 현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현실은 내가 만들고 나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의 헛된 주장보다 훨씬 더 큰 만족을 준다. 기독교인이여, 헛된 주장이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싸우자. 원제: In a World of Narratives, Be Radically Committed to Re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인터넷시대
소셜미디어
당파
코로나19
백신
급진파
자기중심적
특정주장
믿음이 아니라 문화를 해체하라
by Hunter Beaumont
2021-05-18
해체 여정을 보내고 있는 많은 내 친구들과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 없는 상황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자라온 믿음을 이해하고, 진부하고 숨막히는 것들을 버리고 싶어할 뿐이다. 그들은 실제로 믿음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강한 믿음을 원하며 예수님을 오히려 더 원한다.이것이 당신의 이야기라면,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찾고 있는 것은 해체가 아니라 바로 탈문화화(Disencultruation)라는 것이다.탈문화화는 복음을 문화와 구별하기 위해 선교사들이 사역의 과정에서 사용하는 한 방법이다.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이동한 선교사들은 복음이 마치 겉껍질(문화)에 의해 보호되는 알맹이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사역은 복음이라는 알맹이가 오래된 껍질에 갇혀 있지 않고 새로운 문화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역사는 초대 교회가 이방 문화를 접했을 때 유대교로부터 복음을 구별해야만 했던 사도행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마찬가지로 당신은 복음주의 하위문화로부터 복음을 구별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학창시절에 이러한 과정을 겪었다! 나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고등학교에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가르쳐준 복음과 사랑에 빠졌지만, 이러한 복음주의 세계 안에는 복음에 포함되지 않은 문화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복음주의 문화로부터 복음을 분리하는 탈문화화를 배운 것은 나의 믿음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내가 복음을 더욱 더 사랑하도록 해주었다.당신이 해체의 여정 대신에 탈문화화의 여정을 떠나고 싶다면, 여기에 그 방법들이 있다.1. 문화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라물속의 물고기가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종종 우리가 속한 세상을 설명하는 문화, 언어 및 이야기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문화는 관습을 만들어 멋진 삶을 살게 하고 외부인의 질문을 차단하는 방어 체계를 세운다. 문화는 그들의 이상을 잘 따르는 인물들을 치켜 세운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을 마무리한 뒤에 문화는 은밀히 행동한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한다. 문화는 스스로를 ‘그냥 그런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문화란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신앙 경험에 있어서도 항상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즉, 첫 번째 단계는 문화와 그 힘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복음주의 하위문화 속에서 자란 내 친구들은 기독교를 떠날 때까지 기독교를 의심하지 않았다.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 하위문화는 그들의 믿음을 지탱해 왔다.그러나 이 하위문화는 또한 그들이 새로 발견한 질문을 하게 했다. 많은 이들이 의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오랫동안 타당하게 여겨졌던 구조를 대체하는 문화적 변화다. 많은 이들이 ‘개인 신앙의 해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개인이 위치하는 문화가 바뀐 것으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정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문화의 힘을 깨닫게 될 때, 당신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알게 된다. 즉 문화 속에서 기독교를 학습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새로운 문화로 이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단계는 이 새로운 문화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때의 긴장은 기독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문화적 변화로 인한 것이다.2. 올바른 문제와 씨름하라의심은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 탈문화화는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당신을 구할 수 없지만, 당신이 바른 상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문화적 껍데기와 복음의 알맹이를 구별함으로써 “알맹이 문제와 씨름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나는 하나님의 심판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성에 대해 배웠으나, 생각이 깊은 비기독교인과 친구가 되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들은 내게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지만, 심판 교리는 갑자기 그들을 나빠 보이게 했다.이 이야기를 되돌아보면서, 내가 씨름하고 있던 것 중의 일부는 성경적인 것이었고 일부는 단지 문화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약 성경은 주님께서 세우신 자를 통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행 14:17; 롬 2:5–16). 예수님은 ‘불의 지옥’, ‘울며 이를 가는 것’, 그리고 ‘밖의 어둠’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시며 그분의 나라 밖에 거하는 상태를 묘사하셨다(마 5:22; 8:22; 22:13). 이러한 식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그러나 나의 혐오감 중 일부는 복음주의 하위 문화 안에서 심판을 가르치는 방식 때문이었다. 강압적인 설교는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는 지옥 탈출에 더 중점을 두었다. 죄는 기괴하게 설명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설교자는 그것을 경멸의 어조로 뿜어냈다.몇 년간 나는 내 머릿속에서 설교자들의 목소리(껍데기)를 거부하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알맹이)을 다시 배우려고 노력했다. 나는 또한 과거의 설교자들처럼 전달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을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 선생님들을 찾아보았다. 점차 이것은 놀라운 발견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심판이라는 것이 내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정의로운 세상을 내가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복음주의 하위 문화 외부에서 내 질문과 관심을 다루는 방식으로 이 교리를 다시 배웠기 때문이다.3. 복음과 문화를 관련시키는 교회를 찾으라탈문화화는 우리에게 복음을 문화와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지만, 이것이 문화 없이 복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 문화로부터 복음을 자유케 한다는 핵심 요지는 결국 다른 문화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와 상관없는 기독교 신화(unicorn)를 발견하는 것이 당신의 임무가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현재 당신이 속한 문화에서 당신의 믿음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당신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교회는 특정 문화에서 복음을 구현한다. 당신이 문화를 학습하는 순간, 각 교회마다 고유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최고의 방법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교회는 복음이 교회 내부의 문화를 형성하도록 했다. 교회는 교회 밖의 문화와 연결되는 방식으로 복음을 가르치며, 분명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주변 문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 구성원들을 제자화한다. 이러한 교회들 가운데 하나를 찾아서 참석하라. 복음과 주변 문화를 사랑하는 교회는 기독교에 대한 난해한 질문들로 씨름하는 자들을 기쁘게 환영한다. 교회의 태도로 그것을 알 수 있고, 설교를 통해서도 들을 수 있으며, 리더들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4. 새로운 복음을 기대하라복음이 문화적 껍질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로 나아가게 될 때 그것은 종종 신선하며 아름다운 방식으로 빛나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 중의 하나는 유명한 매튜 챈들러(Matt Chandler) 목사의 설교다. 텍사스에 있는 교회의 목사인 챈들러는 다소 민망한 성적 금욕에 대한 주제를 다룬, 1990년대 청소년 사역 행사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 행사에서 한 설교자는 장미 하나를 청중에게 주어서 그것이 훼손되어 돌아올 때까지 서로에게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주변에 여러 사람과 잠자리를 하는 사람에게 일어날 일을 비유한 것이었습니다. 그 설교자는 조롱하는 말투로 “자 누가 이런 장미를 원할까요?”라고 질문했죠.” 챈들러 목사는 이어서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한다. “예수님이 바로 이 장미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이 메시지가 왜 그렇게 강력한 것일까? 챈들러 목사의 청중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은 복음주의 순결 운동이 왕성하던 시대에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시대에 그 운동으로 성경적 성 윤리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려움, 압박, 수치심, 의지력에 의존한 환경 속에서 그것을 배웠다. 이러한 환경 안에서, 기독교 성 윤리는 부담스럽고 나쁜 소식처럼 들렸다. 더 심한 것은, 순결 문화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경향 때문에 성적으로 죄를 지은 많은 사람들이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챈들러 목사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자신의 하위 문화에서 벗어났다. 그는 혼외정사를 하고 있는 미혼모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챈들러는 그녀와 친구였고 어느 날 밤 그녀를 교회 행사에 초대했다. 그날 밤 설교가 성에 대한 것일지는 모른 채 말이다. 설교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그러한 메시지가 그의 친구를 수치스럽게 하고 그녀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챈들러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도 같은 경험을 했다. 그러나 챈들러가 “예수님이 바로 그 장미를 원하십니다!”라고 외쳤을 때, 그는 순결 문화를 ‘무시’의 양동이에 넣어 버렸으며, 복음은 자유롭게 그 아름다움을 발산했다.나는 당신도 탈문화화가 가진 동일한 이점을 사용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당신의 믿음을 해체하지 말고 그 대신 탈문화화 하라.원제: Deconstruct Your Culture, Not Your Fai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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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문화
진리를 찾는 지성인에게 기독교는 가장 안전한 플랫폼이다
by Brett Mccracken
2021-05-17
자유로운 사고, 두려움 없이 나누는 열린 대화, 인기 없는 소수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의지, 이런 자세는 이제 조지 오웬(Orwellian)이 경고했던 세상, 사상 경찰에 의해 더욱 감시받는 사회에서는 멸종의 위기에 처한 종(species)이 되어버렸다. 철저한 충성(adherence)의 요구라는 신조와 함께 새롭고도 근본주의적인 세속 종교가 등장했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여성도 여성이다”와 같이 어떤 세속적 신조가 가진 논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증오받아 마땅한 이단자로 스스로를 낙인 찍는 행위가 된다. 오늘날 현존하는 정통에 논리적으로 도전하는 책은 지금 아마존에서 금지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무신론자의 영웅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트랜스젠더리즘에 대한 새로운 정통성에 대해 (매우 논리적인) 질문을 담은 트윗을 게시한 사실 때문에, ‘자유로운 사상(freethinkers)’을 옹호하는 것이 조직의 존재 목적 중 하나라고 명시적으로 표명한 무신론자 조직에서 탈퇴 당하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미국 휴머니스트 협회는 트랜스젠더리즘이라는 용어에 관한 새로운 정통성 부여에 관한 도킨스의 매우 합리적인 트윗을 논하기보다는 그의 트윗을 시대를 역행하는 오류(retroactive cancellation)의 근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상의 옹호’라는 말 속에 단지 주류의 생각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제명(canceling)해도 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오랜 기간 편협하고 반지성적이며 또한 어려운 질문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비난받아 온 기독교가 서구 문화가 유발한 빈틈을 채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하나의 반전이다. 논쟁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대해 언제 어떻게 또는 과연 공개적으로 말하는 게 가능이나 한지에 관해서 조마조마해야 하는 오늘날 사회에서 기독교는 호기심 많은 질문자, 의심을 품은 반체제자, 그리고 당파적 서사가 우위를 점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로 가득한 안식처가 될 수 있다. 비록 최근에 들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기독교는 그래도 지난 이천 년 동안 인류 지성의 토대가 되어왔다. 간단히 말해서, 그런 기독교에게 오늘날 다시 한번 과거처럼 가장 비옥한 지적 토대가 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진정 풍요로운 지적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린, 기독교처럼 결코 흔들리지 않는 초월적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토대가 없다면, ‘진리’에 대한 모든 담론은 임의적이며 결국에는 권력 투쟁으로 이어질 뿐이다. 모든 주장은 공유된 지적 프로젝트를 구축하는 건설적인 벽돌이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 또는 나와 다른 정체성에 상해를 입히는 탄약에 불과하다. 성경적 토대가 지적 호기심에 영감을 주어야 한다담론에 대한 세속적 접근은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해체로만 이어질 뿐이다. 진리에 대한 합의를 얻을 능력 자체가 없는 세속주의는 취소, 비난, 금지, 침묵만을 자행한다. 이 모두는 다 근본적인 파괴다. 그러나 기독교적 접근 방식에는 토대를 놓을 견고한 기반이 있기에 얼마든지 건설적으로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쓴 ‘지혜의 피라미드(Wisdom Pyramid)’ 속 표제에서 성경이 모든 지혜의 기초가 되는 이유다.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은 ‘단단한 기초’를 이루는 수평적 토대가 될 뿐 아니라, 그 토대 위에 놓이는 모든 지식 체계가 흔들리지 않고 고정될 수 있도록 하는 수직적 질서까지도 제공한다. 인간은 책, 예술, 자연/과학, 이성, 공동체, 생생한 경험과 같은 모든 종류의 자료를 사용하여 지식을 구축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흔들리지 않는 기반 위에 구축되지 않는 한 결코 구조적으로 건전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객관적이고, 초월적이며, 또한 모든 사람에게 진실이 되는 하나님의 진리는 제한적이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를 검열하는 진리도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에는 자유함과 세상을 넓히는 확장성 그리고 활력을 불어넣는 목적이 있다. 그 진리는 지적 추구를 위한 공통된 언어와 방향을 제공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유롭게 하는 진리’(요 8:32)다. 자유를 주는 이 진리는 옥스포드, 하버드 및 대부분의 위대한 대학을 창립하게 했을 뿐 아니라 번영에 필요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holas Copernicus),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같은 인물들이 이룬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견과 혁명적인 아이디어의 바탕이 된 진리도 바로 이 진리다. 수많은 예술가, 작가, 철학자에게 생명을 주는 깨달음과 탐험의 원동력을 제공한 진리이기도 하다. C. S. 루이스의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태양이 떠올랐음을 믿는 것과 똑같은 원리로 기독교를 믿는다. 내 눈으로 태양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지적 안일함을 흔들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신비한 깊이를 더 탐구하도록 만드는 흔들리지 않는 진리다. 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광범위하게 읽고 공부하도록 독려하며 또한 나와 다른 생각의 상대적인 장점을 평가하는 프레임을 제공한다. 또한 이 진리는,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또 거짓인 각종 사상으로 가득한 이 타락한 세상을 탐색할 때 방향을 잃고 좌절하지 않도록 바른 길을 제공하는 나침반이기도 하다. 교회에 닥친 도전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역사를 되돌아볼 때 성경 속에서 심오한 지적 에너지와 호기심을 위한 촉매제를 발견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R.C. 스프로울(R.C. Sproul)이 지적했듯이,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바른 의미는 단지 성경이 기독교인에게 유일한 권위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만이 유일하게 오류 없는 권위라는 사실이며, 이 말을 모든 기독교인이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지적 싸움을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성경으로 시작해야 하지만 반드시 거기서 끝날 필요는 없다. 성경의 무오성은 우리로 하여금 타락한 창조 세계로부터 배우는 자유뿐 아니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자유까지 제공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에 눈을 뜬 기독교 공동체는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으로 비옥한 공동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오히려 황당하게 들린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기독교 역사가 제공하는 지적 풍요로움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문화 현실은 교회에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 캠퍼스는 이제 상호간 대화와 그룹적 사고라는 측면에서 동질적인 단일체다.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유익한 공간이라는 말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오늘날 소셜 미디어다. 소셜 미디어에서 대중이 가진 ‘상식(commons)’은 이제 리처드 도킨스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단 한 번이라도 주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소셜 미디어는 한마디로 폭탄으로 가득한 지뢰밭이 되어버렸다.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교회와 기독교 기관이 가장 흥미롭고 은혜로 가득 찬 지적 활력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물론 여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1. 어려운 질문을 반갑게 받으라교회에서 양육된 많은 젊은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해체하는 여행 속으로 들어서는 이유는 그들에게 교회가 결코 의심하는 사람을 지켜주는 안전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서 과연 이런 질문을 해도 될까?” 이런 의문은 너무도 흔할 뿐 아니라 안타깝게도 너무도 당연한 두려움이다. 수많은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가 의심하는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질문을 막거나 어려운 교리를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좋지 않다! 활기찬 지적 문화를 교회 속에 회복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교회가 어려운 질문에 대한 안전한 장소가 되겠다는 의지를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 카렌 스왈로우 프라이어(Karen Swallow Prior)는 TGC가 출판한 그의 새 책, ‘신앙을 버리기 전에(Before You Lose Your Faith)’에서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했다. “올바른 방식으로 묻는 올바른 질문은 진리로, 그것도 참 진리(the Truth)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신앙을 버리기 전에 기독교에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기억하라. 우리가 손에 쥔 것이 지적 건설을 위한 도구인 반면에 세상이 갖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해체를 위한 도구라는 것을. 똑똑한 아이들, 호기심 많은 예술가, 과학자, 그리고 ‘자유 사상가’까지도 환영받고 영감을 받는 환경을 우리 기독교가 조성해야 한다. 세상은 플랫폼을 해체하고 또한 거부하며, 자유로운 토론마저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모두를 수용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무한히 견고하며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면밀한 까다로운 조사까지 다 이겨낼 수 있다. 선의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던지는 질문(잠 9:10)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더 많은 층(layer)을 발굴하고 그 안에서 더 많은 보물을 발굴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2. ‘비핵심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너그럽게 반대하는 모델을 만들어내라기독교인들이 지적으로 관대하고 ‘열린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선언하는 진리에 관해서까지 ‘마음을 닫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신앙의 지적인 활력은 정통 기독교인들이 수천 년 동안 믿어 왔던 명백한 ‘핵심 고백(first things)’에 대한 분명한 합의에 달려있다. 교회의 지적 건강을 위해서 단지 ‘대화’를 위한 대화 자체를 목적으로 삼거나 또는 이단적이고 명백하게 비정통적인 사상에까지 대화의 발판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건전한 토론과 ‘비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탐구는 교회가 과거보다 지금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 Z세대는 기독교 장로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담론을 보며 그것이 트위터에서 만나는 싸움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욕하기, 논리적 오류, 그리고 인종주의적 배타주의(깨어나라! 인종 우선!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는 의미 있는 대화 자체를 가로막는다. 아이디어는 날카로울 수 있지만 어조는 부드러우며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는 실제적이고 실질적이며 또한 너그러운 토론 방법을 만들어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는 다 진리를 찾는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핵심’과 ‘비핵심’을 결정하는 것조차 열띤 논쟁을 부르는 문제다. 신학적 분류는 중요하고 도전적인 목회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우리에겐 두려움 없이 함께 해야 할 또 하나의 대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함께 대화하자. 3. 호기심과 비판적 사고를 키우라‘자유로운 사고’는 경계가 없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내 눈에 맞는 대로 생각한다의 동의어가 아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고는 탐구를 강화하는 초월적인 진리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 동료 크리스 콜킷(Chris Colquitt)이 성화된 개인주의(sanctified individualism)라고 이름 붙인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기초해서, 기독교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항상 홀로 설 준비가 되어있음.”기독교인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상가가 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진실을 상대화하는 당파적 의제에서 벗어나라. 총체적인 주관성이 주는 무의미함에서 자유로워지라. 주님의 말씀과 상충되는 시대의 정신을 거스르는 자유함이 있는가? 가능한 곳에서 시대 정신(zeitgeist)의 한 측면을 긍정하면서도 또한 반대할 것을 분명히 반대하는 용기가 있는가? 세상에 넘치는 책, 영화, 강의, 그리고 논쟁을 접하길 두려워하지 말라. 그 속에는 진리도 있지만 거짓도 있다. 전자로부터 배워서 후자를 버리거나 거기에 도전하라. 그러나 이런 자세는 교회뿐 아니라 오늘날 세상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도움이 되는 생각과 해로운 생각이 모두 포함된 작품을 감상하고 씨름하면서, 그 속에서 숨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다. 예를 들어, 너무도 자주 우리는 책에 있는 모든 내용을 무의식적으로 다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는 그 반대로 무조건 무시하고 읽기조차 거부한다. 그러나 인간이 쓴 대부분의 책에는 옳고 그름이 섞여 있다. 이런 혼합된 가방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게 바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이여, 우리가 이런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의 피난처오늘날 이 세상에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전한 피난처란 거의 없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과 창의적인 사상가의 특정 질문이나 반대되는 생각에 대해서까지 충분히 편안하게 느끼면서 토론하는 포럼은 거의 없다. 교회여, 지금 이런 기회를 포착하여 우리의 세속적인 이웃을 교회로 초대하자.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전율을 주는 지적 커뮤니티를 그들이 경험하도록 만들자. 차마 트윗에는 할 수 없는 질문이 있는가? 교회에서는 해도 된다. 비슷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진리를 발견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가? 우리도 그렇다. 리처드 도킨스 씨? 당신도 여기 와서 우리와 함께 대화를 나누자. 얘기하다 보면 동의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겠지만, 당신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원제: Christianity Can Be the Safest Space for Truth-Seeking Intellectual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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