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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에서 아름다움은 반드시 인식되어야 한다
by Matt Capps
2018-12-31
작년에 나는 ‘크리스천이 신학에서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5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한 기독교적인 연구의 첫걸음을 제안하고 싶다.아름다움이라는 주제에 관한 대부분의 생각과 글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신학과 철학 및 전문 분야로서의 미학을 전공한 사람들 때문이다. 심지어 이 철학자들 중에는 아름다움은 폐기되어야 하는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하지만 아름다움은 반드시 인식되어야 한다.크리스천은 아름다움에 관해 뚜렷한 기독교적 관점을 공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는 자주 등한시되는 주제이지만 이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은 강변하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선물이다. 아름다움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크리스천에게 있어 아름다움에 관한 연구는 계시 교리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알려질 내용을 설명하고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신다. 칼 헨리(Carl F. H. Henry)의 말처럼, “하나님은 계시의 조건과 이유만이 아니라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드러나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결정하신다.”계시 교리는 자신을 능동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는 그분의 아름다움이 포함된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 위에 인간을 두신 일은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가 나아갈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첫째,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근원이시다. 둘째, 인간이 아름다움과 미적 경험에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권적인 성찬식과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경험을 주신다. 저녁 노을의 위엄 앞에서 생각에 잠기거나 혹은 모차르트의 작품을 주체적으로 즐기는 골든 리트리버를 찾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을 즐기고 경험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이다.아름다움과 일반 계시역사적으로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자연, 문화, 인간의 이성, 선한 행위 등 일반 계시를 통해 미적 진리와 아름다움을 계시하신다고 믿어 왔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일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얻을 수 있지만 그 범위, 일관성, 깊이에 있어서는 제한된다고 생각하곤 했다. 죄의 효력은 항상 일반 계시를 파괴한다.일반 계시가 본질적인 권위는 아니지만 신학 안에서 고유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다.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이 “매우 좋다”라고 7번이나 선언하시며 창조의 순간을 기뻐하셨다고 명백하게 보여 준다. 이는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이 즐겁고 유쾌할 만한 결과라는 뜻이다. 따라서 최초의 창조물을 기준으로, 이 선언은 하나님이 판단하시기에 그분이 만든 것들이 미적 특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성경은 땅, 나무, 돌 등 창조의 요소들을 아름답고 유쾌한 것으로 자주 묘사한다.그렇다면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무엇을 알려 주는가?아름다움과 특별 계시일반 계시 속 아름다움과 죄로 인한 영적 무감각이라는 현실은 특별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일반 계시를 제한적이고 왜곡적으로 인식하게 되므로, 성경을 통해 일반 계시를 알려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시편 19편 1-4절은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명확히 알려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또한 바울 역시 하나님이 창조 질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확실히 선포한다. 이는 루스드라(행 14:15-17)와 아덴(행 17:22-32)의 이방인을 향한 그의 연설에서 잘 나타난다. 더불어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도 이 사실을 알렸다.“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19-20).세계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은 하나님의 예술 작품이다. ‘시’라는 문학이 저자의 분명한 설계와 의도를 담고 있듯이 하나님은 우주라는 강력한 시를 통해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시편 19편의 하늘에서부터 마태복음 6장의 백합화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풍부한 아름다움에 반영되어 있다.아름다움과 성경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인간에게 계시하는 책인 성경은 ‘그 자체로’ 위대한 아름다움을 지닌 중요한 문학 작품이다. 성경은 미학의 중요성을 그 기록뿐만 아니라 특유의 문학적 형식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말한다.아름다운 문학적 전통들이 성경 전체에 존재하는데 심지어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기록된 역사 부분에서도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평행법 같은 문학적 구조들, 이야기 속 세심하게 만져진 표현, 예술적 복합성을 지닌 시는 하나님의 계시 속에 자리한 아름다움의 중요한 역할을 증명한다. 릴랜드 라이큰(Leland Ryken)이 말했듯이, 성경에서 아름다움이 중요한 몫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작가들이 정교한 패턴을 지닌 운문 형태로 기록하거나, 혹은 탁월한 솜씨로 간단하고 주의 깊게 이야기를 구성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아름다움이 우리를 이끄는 곳아름다움이 없는 세상에서 발타자르(Balthasar)는 이렇게 선언한다. “남은 것은 단지 존재하는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아름다운 것들을 이렇게 많이 만드실 필요가 없었지만, 분명히 그렇게 하셨다.아름다움이 눈길을 끈다면, 그 아름다움에 주목해 보자. 인간의 내면에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본성이 존재한다면, 그 본성이 우리를 이끌어 가게 해 보자. 이 세계와 말씀은 주권자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이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 자체를 넘어 하나님의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을 부르는 강력한 표지판이다. “보라. 참되고 유일한 진리인 하나님은 선하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In Christian Theology, Beauty Demands to Be Noticed번역: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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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자르
아름다움과성경
복음이 낳는 문화
by Ray Ortlund
2018-12-28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복음은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와는 다른 분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의 흔한 모습처럼 뽐내거나, 자랑하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자신에 대해 방어적이거나, 타인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태도를 갖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겸손하시다. 우리는 그분과 싸우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와 다투려고 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부풀리며 그분에게 대항하지만, 그분에게는 허영이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비우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우리 같은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순종하는 겸손을 보이셨다. 이처럼 성경 안에 있는 복음 교리는 교회 안에 복음 문화를 만든다.복음 교리 - 복음 문화 = 위선복음 문화 - 복음 교리 = 취약복음 교리 + 복음 문화 = 능력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다음과 같이 복음 문화와 비복음 문화를 구분하고 있다.“영적 교만은 악마가 기독교의 진보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그것은 마음을 어둡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지옥의 연기가 흡입되는 통로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 위해 악마가 소개하는 모든 나쁜 짓의 주요 자원이다. 영적 교만은 비통이나 비웃음으로, 그리고 경솔과 경멸로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게 한다. 그러나 순전한 크리스천의 겸손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침묵하게 하거나, 아니면 슬픔과 긍휼로 말하게 한다. 영적 교만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게 하지만, 겸손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교만한 사람의 마음에는 자신만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아무것도 의심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성도들이 은혜 가운데 있지 않을 때, 또 그들이 냉랭하거나 활기가 없을 때, 그들의 결점을 자주 관찰하고 빨리 지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겸손한 크리스천은 가정에서 할 일이 너무 많고, 그 자신 안에 있는 사악성을 보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주목하기 위해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spel Doctrine, Gospel Culture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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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에서 예술을 생각하다
by Makoto Fujimura
2018-12-28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온다. 나사로의 죽음과 마리아와 마르다의 근심을 보며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말 그대로 진(truth), 선(goodness), 미(beauty)로 가득하다.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고” 베다니로 오셨다(요 11:4). 예수님이 도착했을 당시, 마르다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요 11:25).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곧 자신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권능을 갖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주려고 베다니에 오셨다면, 왜 간단하게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하셨더라면, 즉각 찬사가 쏟아졌을 것이고, 눈물을 흘릴 일도 없으셨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헛된 일, 아니 소모적인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망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연약한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스스로 연약한 상태 속에 들어가셔서 사망의 괴로움을 직접 느끼셨다.눈물을 흘린 다음 예수님은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셨다(요 11:43). 예수님의 깊은 감정적 반응은 부활의 순간을 위한 준비 단계였던 것이다. 나사로는 비틀거리며 무덤에서 걸어 나왔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어서 당국자들이 나사로를 죽이려고 획책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계속 길을 가셨다.예수님의 눈물은 주님에 관한 마리아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베다니의 단단한 땅을 흠뻑 적신 예수님의 눈물은 마리아의 눈물과 뒤섞였다. 예수님은 구주이기만 하셨던 것이 아니다. 친밀한 친구로도 드러나셨다. 이 인자와의 깊은 친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밝게 드러났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제자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이후에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달려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바쳤다. 마리아는 제자들이 있는 비좁은 방으로 들어가 결혼을 위해 준비해 둔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 이 향유는 당시의 노동자 1년 임금에 해당되는 값비싼 나드 향유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예수님의 모든 이적이 예수님을 속죄의 죽음으로 한걸음 더 가까이 이끌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리아는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동시에 의도적인 헌신의 행위로 반응해야 했다.마리아의 이런 행동에 (특히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불평했으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중략)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6-9).예수님의 눈물은 베다니의 어떤 집에서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마리아의 헌신을 낳았다. 여기서 벌어진 한 여인의 일탈적인 행동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활짝 열어 놓았다. 곧 고통 소리로 가득 찬 우리의 부서진 세상 속에 복음이 침투하는 현실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이 걸치신 유일한 땅의 것은 마리아의 나드 향유였다.예수님의 눈물과 마리아의 나드 향유와 같이, 예술도 어떻게 보면 여분 혹은 낭비처럼 여겨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우리의 삶 속에 널리 퍼진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인생의 ‘여분’으로 생각한다. 곧 여가 생활에 불과한 장식품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쇼팽의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희생해야 할까? 아니면, 무용수가 링컨 센터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은 어떠한가? 많은 사람이 ‘여분’으로 생각하는 것, 심지어는 낭비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을 규정할 수 있다. 그날 밤 베다니의 한 집에서 마리아가 뿌린 향기 속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그림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칸타타도 함께 떠돌고 있었다. 모든 창작 행위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그분께 바치는 직관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이 직관을 왜곡하고, 부정하고, 유해한 것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의 동력은 창조주에게서 나온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셨다.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격분하고 나드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막 14:5). 실용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탐욕은 덧없는 아름다움이 갖고 있는 힘을 파악할 수 없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율법주의다. 율법주의는 영혼을 서서히 질식시켜 죽이는 완고한 결정론이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겪는 고난에 실용주의적인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해를 끼친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발에 나드 향유가 부어지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생명을 빼앗는다. 예술가들은 마리아처럼 직관적으로 창조하여 그런 억압을 깨뜨릴 수 있다. 때때로 교회와 세상에서 실용주의와 율법주의는 방해가 된다.예술가들은 창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눈물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물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예술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진실로 기쁨으로 나누어 주는 자는 단지 풍성히 베푸시는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는 것임을 잘 알고 계신다. 우리가 낭비하고 허비하는 행동으로 간주하는 일을 예수님은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후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후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나는 작업장에서 그림 위에 물을 붓고 그곳에 무기 안료를 섞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은혜를 추구한다. 내가 사용하는 재료는 낭비적이고 비싸다. 금, 백금, 은, 손으로 들어 올린 종이와 실크, 백 년 된 잉크 등 모두 내 그림의 표면을 장식하는 재료들이 된다. 나는 내가 마리아와 같다고 생각한다. 또 예수님의 눈물과 같다고 생각한다.그리스도는 위대한 예술가시다. 아마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보신 것은 자신의 위대한 희생을 모방하고 반사하는 한 작은 예술가였을 것이다.마리아는 왕이 기름 부음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로 전율하면서 그런 사랑의 행위로 당시의 문화 규범을 어겼다. 이 한 행위로 마리아는 그 순간의 신비를 깨고 열어 놓았다. 마리아의 나드 향유는 퍼져서 향기로 방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덧없는 행위였다. 곧 마리아가 ‘예술’로 생각조차 못했던 행위였다. 그녀의 행위가 기념될 것이며, 영원한 유산을 남겨 놓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리아가 도리어 깜짝 놀랐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리아가 행한 일은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퍼져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특별한 선언이 갖고 있는 논리적 결과를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복음 사역은 마리아의 나드 향유의 향기로 흠뻑 적셔 있는가? 유다의 가면을 벗기는 우리의 아름답고 호화로운 예물, 곧 장차 임할 우주적 혼인을 준비하는 예물은 무엇인가?우리가 낭비로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은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하셨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셨다. 그분의 눈물은 아름다웠으며, 우리를 부활에 대한 가장 큰 소망으로 이끈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eautiful Tears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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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나라는 실패의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by Mark Dever
2018-12-23
동성애에 대한 여론이 점점 더 변화하고 있다. 물론 이 변화는 더 큰 변동의 흐름 중 하나일 뿐이다. 가족, 사랑, 성, 관용, 하나님 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점은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점점 더 방어 태세를 갖게 한다. 알 몰러(Al Mohler)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윤리적 범법자’(moral outlaws)가 될 것이다. 기독교 원칙을 옹호하는 사람은 점점 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는 법적으로도 난관에 봉착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지지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실직이나 다른 불이익의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견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천들은 당황하여 움츠러들거나, 혹은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굳이 위험에 처할 필요가 없다는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핍박 앞에 그렇게 반응할수록, 스스로가 비성경적인 명목상 크리스천임을 증명할 뿐이다.현재 우리에게 닥친 사회문화적 변화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음의 일곱 가지 원칙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1. 교회는 초자연적인 변화를 위해 존재함을 기억하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영적으로 죽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새생명을 주신다는 변치 않는 진리, 즉 복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역사적으로 회개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기나 문화는 전혀 없다. 그런 문화는 존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천과 교회, 그리고 특히 목회자는 언제나 우리가 초자연적인 일에 관여하고 있음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최근의 문화적 변화는 우리의 사역을 이전보다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2. 핍박이 정상적인 현상임을 이해하라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요한복음을 설교했다. 그중 ‘핍박’을 주제로 삼은 것에 대하여 여러 교인들이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내 설교의 주제가 크게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990년대의 베드로전서 강해 등, 나의 이전 설교를 되짚어 보면 핍박에 관한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따라서 설교의 주제보다는 이를 듣는 교인들의 귀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크리스천들 앞에 놓인 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핍박은 타락한 세상에서 모든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직면하는 현상으로, 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예언하신 부분이다(요 16장). 어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삶을 다 바쳐서 예수님께 순종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별다른 모욕이나 핍박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근사한 교회에 현혹되지 말라.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국가적 범죄자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얼마 전 동료 목사가 기독교 핍박 역사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핍박의 원인이 ‘복음’이 아닌, 다른 부차적인 문제인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핍박자들은, “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으니 내가 너를 핍박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크리스천으로서 주장하는 어떤 신념이나 관행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상반되거나 혹은 그들의 세계관을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를 핍박한다. 다시 말하지만, 변화하는 문화에 당황하여 움츠러들거나 또는 굳이 안 해도 되는 불필요한 말은 삼가자는 식의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말하는 제자도를 위배하게 만든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명목상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특히 목회자는 성도로 하여금 희생자인 척 행동하지 말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설교와 기도를 통해 핍박이 정상적인 현상임을 지속적으로 알려야 한다. 설령 사회적인 비판, 특권의 상실, 재정적 불이익, 심지어 법적인 핍박이 따르더라도 성도들이 담대히 예수님을 따르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그것이 목회자의 역할이다. 3. 유토피아 사상을 주의하라 크리스천은 사랑과 정의의 사람이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작은 유치원이든 거대한 국가든 이 사회의 공동체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과 정의를 위해 일하더라도,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탈바꿈 시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임무를 부여하지 않으셨다. 대신, 언젠가 이 세상을 완벽하게 만드실 그분을 널리 알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선을 이루어야 한다. 만일 유토피아 사상을 향한 유혹을 느낀다면, 성경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그리고 역사 속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랐던 인물들조차 유토피아주의로 인해 속임을 당하고 길을 잃었던 사례를 떠올려라. 4. 민주적인 청지기 직분을 활용하라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서 크리스천은 정책이나 정부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고 이해한다면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바울은 국가에 순종할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적인 상황에서는 국가의 권위를 개인이 공유하고 행사하는 것, 그 행위가 곧 정부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정부의 힘을 공유한다면, 그들의 폭압 정치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 민주적인 절차가 우리 손에 있는 한,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곧 청지기 직분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만들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가 소유한 것을 제대로 관리할 청지기가 될 수 없음을 뜻하거나, 혹은 공익을 위한 일에 민주적인 절차를 활용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우리는 민주적인 청지기 직분을 활용해야 한다. 5. 인간적인 환경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라 크리스천에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결코 없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에서도 아버지를 의지하셨다(히 12:2). 우리에게 닥칠 그 어떤 어려움도 우리의 왕께서 당하신 고난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가 견뎌야 하는 모든 상황을 통해 자신의 신실함을 입증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의 증거가 되어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6.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라 크리스천은 지옥이 아닌 이상, 그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크리스천이 소유한 모든 것은 곧 은혜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잘 유지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직장 상사, 친구, 가족, 그리고 정부를 과하게 증오하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바울이 감옥에서 노래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용서받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장차 자신이 받을 영광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선물을 제대로 알고 있었고, 또 소중히 여겼다. 7. 그리스도의 확실한 승리 안에서 안식하라 지옥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동성 결혼의 대두 등 사탄이 조장하는 사회문화적 변화 때문에 마치 그들이 승리하였다고 판단하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결국 우리는 여기서 패배할 거야”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세계 도처의 크리스천과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크리스천이 겪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난을 겪었다.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사탄이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 나라와 시대마다 하나님을 공격하는 독특한 타락의 방식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패배하게 한 십자가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죽으셨다. 하지만 사흘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전혀 실패의 위기에 처해 있지 않다. 크리스천과 교회와 특히 목회자는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디데이(D-Day)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 시대에서 아무리 세속적인 생각과 행위가 지지를 얻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택하신 사람들이라면 그중 단 한 명도 구원을 얻는 데 낙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논쟁으로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이 우리의 책이나 글에 설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신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또한 오늘 우리는 겸손과 확신, 그리고 기쁨으로 이 세상에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How to Survive a Cultural Crisis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문화
세계관
사회적문화변화
존재감
핍박
유토피아사상
청지기
주님의지
하나님의은혜
그리스도의승리
완전히 망가진 이 세상에서의 소망
by Paul Tripp
2018-12-18
내가 조앤(Joan)을 만나기 수년 전에, 그녀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성공해서 부유한 크리스천 사업가인 헨리(Henry)를 만나 결혼했다. 그들은 교외에 여유롭게 맨션을 짓고, 훌륭한 크리스천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몇몇 흥미진진한 사역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수년이 훌쩍 지나, 조앤은 건강한 자녀를 셋이나 낳았다. 전반적으로 조앤에게 부족한 것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조앤은 헨리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아니며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더욱이 그는 항상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기질이 있어 보였다. 조앤은 헨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일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급속하게 확장되는 그의 사업 때문에 그가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조앤이 옳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둘의 부부 관계가 불편하고 느슨해졌다. 그들은 단지 스케줄이나 재정적인 문제가 생길 때에만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의 부재감이 점점 더해 갔다. 조앤은 둘 사이의 소원한 관계에 대해 말하려고 했지만, 그는 항상 대화를 회피했다. 절박감을 느낀 조앤은 결혼 생활을 위해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헨리에게 다시 접근하기 전에 제대로 된 조언을 받기를 원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나를 만났다. 조앤은 상처 입고, 좌절하고, 완전히 지쳐서, 주말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 두 명과 함께 멀리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올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18개월 동안, 헨리도 빠져나갈 출구를 철저히 계획하고 있었다. 모든 자산을 그의 동업자의 이름으로 전환하면서, 회사에서 손을 뗐다. 그는 빠져나가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조앤을 정서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궁지에 빠뜨리기를 원했다. 조앤이 운전해서 나간 지 30분도 되지 않아, 트럭들이 집에 도착했다. 조앤이 일요일 늦은 밤에 집에 돌아와서 맨 먼저 발견한 것은 집이 완전히 어둡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이 목까지 차 올랐다. 안에 들어가서 문 옆의 라이트 스위치를 찾았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벽과 텅 빈 거실과 커튼도 없는 창문에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히스테리 상태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집안 곳곳을 뛰어다녔지만, 모든 방은 텅 비어 있었고,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녀는 부엌의 차가운 대리석 조리대 위에서 한 장의 쪽지를 발견했다. 그 쪽지에는, 헨리가 절대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만약 조앤이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보러 오도록 허락하겠지만, 그녀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조앤이 월요일 오후에 나에게 처음 한 말은 “저는 모든 소망을 다 잃어버렸어요”였다. 오랫동안, 조앤의 소망은 위험한 소망이었다. 그것은 한 남자에 대한 소망, 물질적인 대상들에 대한 소망, 집에 대한 소망, 가정에 대한 소망,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소망이었다. 사람들, 사회적 위치, 또는 재산 등을 귀하게 여기는 것 자체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것들은 결코 소망의 원천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무일푼이 되고 말았다. 헨리는 여전히 그들 부부가 다니던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조앤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여럿에게 그녀를 비난하는 말을 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몰랐고, 그 아이들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법정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조앤은 이 깨어진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아픈 삶의 현실을 직면하고 있었으며, 달아날 출구가 없었다. 그녀가 매일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의존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쉬워 보이는 매우 낙심되는 시기였다. 상황이 어떻게 그토록 엉망이 되어버렸는가? 조앤과 당신,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너져버린 집과 같다. 모든 방들이 다 죄로 인해 더러워지고 손상되었다. 그 가운데 어떠한 부분도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순수한 영광 같은 것으로 빛나지 않는다. 죄는 이 세상을 애석하고 끔찍한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당신은 매일 육체적, 정서적, 영적, 관계적인 깨어짐으로 고투하는 우리 각자의 삶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국소 마취 상태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사는지 잊어버렸다. 우리는 현재의 삶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망가진 집이며, 이것이 우리를 온갖 종류의 문제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이 손상된 시력은 대체로 세상과 관련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그림을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성경은 영적 헌신의 신비한 삶을 수록한 고차원적인 두꺼운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일상 생활의 깨어짐으로부터 분리되는 더 없이 행복한 상태를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이 세상에 대한 책이다. 성경은 불행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진실한 책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세상을 실제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큰 화면으로, 세밀한 내용까지 나오는 고화질의 화면으로 직면한다. 성경은 참되고 정확한 내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의 상황에 대한 성경의 솔직함은 철저하게 진단하는 관찰을 통해 나온다. 좋은 진단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말해 주며, 성경은 매 페이지마다 인간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6장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3장 10-18절에서도 거의 같은 말씀을 한다. 이 본문들 각각은 원래 의도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당신과 내가 직면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성경은 그 진단적인 관찰에서 정직할 뿐 아니라, 타락한 세상의 생생하고 사실적인 스토리를 보여 주는 데에도 정직하다. 당신은 창세기 4장에서 형제를 잔혹하게 살해한 충격적인 기사를 접할 수 있고, 열왕기와 역대기에서는 표리부동한 이스라엘의 암담한 우상숭배, 그리고 성과 권력과 돈에 얽힌 권모술수를 접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정치적인 동기로 영아들을 살해한 헤롯의 이야기와 메시아에 대한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진 비뚤어진 정의를 보여 준다. 성경의 진단이 우리 자신의 마음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속에는 성경이 우리에 대해 말하는 내용과 우리가 자신에 대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내용 사이에 전쟁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당신과 나는 각자 자신을 실제의 모습보다 더 지혜롭고 성화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지적할 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잘못 판단되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세상의 가장 정확한 진단 도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들여다 볼 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본질을 본다. 이것은 나의 가장 큰 결핍이 환경적인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의 가장 큰 결핍은 타락의 깨어짐이 모든 상황, 모든 관계, 모든 환경을 파괴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내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무엇을 직면하든지 상관없이, 삶에서 내가 겪는 최대의 문제는 나의 밖이 아닌 나의 안에 존재한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도덕적인 상태에서 발견된다. 내 안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며, 그것은 내가 갈망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성경은 이 무너진 집의 가혹한 현실을 최소화하거나 축소하거나 부인하려는 시도를 거부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죄인인 자신의 정체성만을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도 없다. 그 무게를 우리가 감당할 수도 없다. 그런데 당신은 죄인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당신은 은혜의 자녀이기도 하다. 이러한 두 가지 정체성은 건강한 긴장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오직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는 사람만이 은혜에 대해 감격할 수 있고, 오직 은혜만이 당신의 죄와 이 세상의 깨어짐의 어마어마한 현실을 겸손하게 직면할 용기를 줄 수 있다. 성경 전체는 과분한 구속의 스토리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기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 가운데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의 임재를 통하여, 이 타락한 세상의 쓰레기 한복판에 일방적으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우리의 본 모습(곧 죄인의 모습)으로부터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새로운 모습(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깊고 철저하게 변화시키신다. 오직 은혜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일깨워서 죄로 망가진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성경의 사건들을 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은혜로 인해 영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그 결과, 안팎의 잔해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원에 귀 기울임으로써, 지금 바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영원의 관점에서 인생을 보기 전까지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고, 이 삶에서 직면하는 현실의 진상을 파악할 수 없으며, 또는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영원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은 어떤 상황에서나 기독교적인 참된 소망을 가져다 주며, 소망은 통찰과 용기를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손으로 하라고 명령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이라고 하는 분명한 실재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 이생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라고 말한다(고전 15:25-26). 이것은 우리의 세상이 우연과 혼동의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구속주의 인격적인 통치 아래에 있는 세상이며, 그 구속주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자애로우시고, 심지어 사망까지도 패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시다. 악은 지금 패배하는 과정에 있다. 사망은 궁극적으로 죽을 것이다. 심지어 당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소망을 품을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 정의와 긍휼은 이길 것이다. 그렇다면, 조앤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니, 조앤의 남편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의 아이들은 부모의 결혼 파탄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조앤은 대부분의 친구들을 영원히 잃었고, 아마도 앞으로 다가올 수년 동안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조앤은 예전에는 전혀 품지 못했던 소망을 가졌다. 그 소망은 그녀를 결코 수치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며, 그녀를 낙담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조앤은 영원에 대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망을 보증하는 것이 그녀의 은행 통장이나 집 크기, 친구들, 남자의 사랑, 어머니로서의 일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이 그녀에게 보증하는 영원에서 발견되어야 했다. 당신도 그 영원에, 바로 당신의 참된 소망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여기서 당신에게 주어진 약속들, 즉 당신의 통치자가 하신 모든 말씀들은 믿을 만하며 확실하다고 보증하는 약속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배신, 불의, 분노, 복수 등이 없는 영원한 날이 올 것이다. 더 이상 고통이 마음을 채우지 않고, 더 이상 눈물도 흐리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 조앤은, 그리고 당신과 나는, 마침내 회복된 집에 들어가며 우리의 동료 순례자들과 함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7:10)라고 말할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pe in This Broken-Down World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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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헌신
성경은 관용을 권장하는가, 불관용을 권장하는가?
by Josh Moody
2018-12-12
성경은 관용을 권하는가? 아니면, 금하는가?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사랑과 자비와 친절을 권하는 책이라고 말한다. 이때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생각한다(눅 10:25-37). 또한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린다(마 5:39). 그리고 “비판하지 말라”는 유명한 구절도 떠올린다(마 7:1). 이처럼 사랑, 친절, 하나님과 이웃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들을 고려할 때, 과연 어떻게 성경이 관용적인 사회를 억제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런 성경 구절들은 우리에게 단순히 관용 베푸는 수준보다 더 나아간 삶, 즉 적극적인 봉사와 사랑 및 긍휼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 확실하다.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성경이 관용과는 너무 거리가 먼 책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엘리야가 직접 자기 손으로 바알의 선지자를 죽이는 역사도 보여 준다(왕상 18:40). 또한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지옥에 관해 자주 말씀하신다. 이런 성경 말씀들은 관용과는 거리가 멀다.그렇다면, 성경이 권하는 것은 관용(tolerance)인가? 아니면, 불관용(intolerance)인가?1. 성경은 관용과 불관용 모두를 강조한다우리는 성경을 시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이상적인 관용의 본보기들을 보여 주는 책으로 가정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편향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규정하면, 해석상 중대한 실수들을 많이 범하게 된다. 성경의 균형적 특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다음처럼 소리를 높일 것이다. “잠깐만 멈춰 봐요. 당신은 지금 해석을 문제 삼는데, 누가 당신처럼 해석하는 것을 옳다고 할까요?” 나는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만약 우리의 모든 대화를 단 한 가지의 방법으로만 해석하는 세상 속에 산다고 가정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또 만일 우리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영원한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단 하나의 행동 규범으로 삼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아니면, 현대인들을 위한 윤리적 행위의 기준으로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만을 지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혹은 공항의 체크인 설명서와 똑같은 방법으로 시를 해석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또 어떠할까? 분명히 심각한 혼란과 혼동이 우리 삶에 찾아올 것이다.성경의 각 권이 ‘참되고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지만 각 권이 모두 다 ‘똑같은’ 말씀은 아니다. 성경 전체는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지만, 각 권 안에 제시된 본보기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가 피해야 할 본보기이고, 다른 것들은 닮아가야 할 본보기이다. 2.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관용하신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당신은 하나님이 강간, 근친상간, 살인, 혹은 학살을 너그럽게 관용하시기를 원하는가?성경은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날이 있음을 가르친다(롬 14:10; 고후 5:10). 성경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삼상 2:2; 사 6:3), 우리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신 6:24; 시 31:19). 또 성경은 심판하시는 권세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심판할 권한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다(마 25:46; 막 9:43). 하나님의 영원한 지옥 심판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구약성경에 나오는 정복 전쟁과 살상에 대한 기록을 마주할 때, 반드시 확인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누구인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해야 했던 주변 나라들의 침략, 그를 통한 고난, 그리고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야 했던 슬픔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신명기 28장은 순종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애굽이나 이스라엘이 정복한 나라들에게 내리신 형벌과 같은 심판을 말한다. 이러한 신명기의 저주 예언은, 의로운 왕들과 선지자들이 예견했던 것처럼(왕하 22:13; 렘 25장),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배로 성취되었다.3. 관용(tolerance)과 상대주의(relativism)의 차이를 기억하라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 시대에는 상대주의가 넘쳐난다. 진리는 보는 사람의 관점이나 교육 배경 그리고 성격에 의하여 다르게 정의된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주의가 사람들이 서로를 판단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편협함을 방지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이 시대의 사고관이 과연 관용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된 관용은 상호 간의 차이를 전제한다. 예를 들면, 관용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진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가졌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내가 이미 동의하는 것처럼, 당신이 지금 주장하는 바는 단지 상대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이처럼 상대주의는 옳고 그름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관용의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4. 관용이 어디서 오는지를 기억해야 한다로마 제국이 가진 상대적인 관용의 사례가 있었다. 거기서는 황제와 그가 섬기는 신을 따르는 종교들만 선택적으로 용납되었다. 그러므로 “시저가 주님입니다”(Caesar is Lord)라고 말하기를 거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및 백성들은 고문과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로마 제국의 상대적인 관용은 왕과 그들이 정한 우상 이외의 다른 대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관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세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멸망 후에 그 제국이 가진 상대적인 관용의 정신을 계승하여, 자신들만의 관용 교리를 만드는데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중세교회는 자신들의 교회와 문명을 보호하려고 다양한 군사력과 지도자들에게 의존했다. 그리고 이런 군사적인 개입에 크게 의존했던 중세교회의 행보는 교회의 참 모습을 훼손시키고 말았다. 개신교 개혁자들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그들 역시 왕들과 군주들을 의존했다. 왕들과 군주들의 도움을 얻어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고 한 것이다. 존 로크(John Locke)와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의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현대적 관용은 그와 같은 부정적 교회 역사에 대한 개신교의 반성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관용 사상이 발전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의 출현에 기대를 갖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런 종교적 관용이 점점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위그노들과 유대인들을 포함한 다른 소수 종교의 성도들이 신변의 안전을 위해 런던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그 후 미국으로 건너 갔다. 관용은 확실히 기독교적인 사상이다. 관용의 근거는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관용은 종교적인 신념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삶을 막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공공장소에서 기독교의 윤리를 옹호하는 것을 금지하지도 않는다.물론 성경은 우리가 이웃에게 단순히 관용을 보이는 것 그 이상을 요구한다. 우리는 관용을 넘어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관용이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기독교 사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es the Bible Promote Tolerance or Intolerance?번역: 김재덕
문화
세계관
참된관용
기독교적사상
상대적인관용
상대주의
성경
가정에서의 세계관
by John Tweeddale
2018-11-29
오랫동안 크리스천들은 가정을 삶의 중심으로 보았다. 가정은 큰 꿈을 가진 우주 비행사를 키우는 육아실이고, 영웅이 되고자 하는 자를 위한 놀이터이며, 미래의 여행가가 즐기는 성소이다. 또 가정은 두서 없는 대화, 커다란 웃음, 정성스런 식사, 견디기 힘든 시련, 많은 고된 일들을 통해 덕을 일구는 장소이다. 당신이 읽기를 배우는 어린이이든, 기숙사에 들어간 대학교 신입생이든, 이제 막 결혼해서 처음으로 아파트에 입주한 신혼부부이든,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이든, 여러 명의 아이를 키우는 요란한 가정에 속해 있든, 아니면 배우자 없이 인생을 항해하는 과부이든, 가정의 위안은 우리 삶의 안정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가정은 천국이 아니라 지구상의 지옥과 같다. 가정이 학대와 폭력과 조종의 가마솥인 경우, 그곳은 피신처가 아니라 달아나야 할 감옥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따뜻함의 경험은 고사하고 가정을 피난처로 삼아 본 경험이 전혀 없다. 크리스천들은 가정의 가치를 논의하면서, 타락의 죄책과 부패가 가족과 이웃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더불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의 거처’이신 하나님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시 90:1). 가정에 관한 신학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두 가지 상반되는 오류들이 있다. 먼저는 가정 역시 타락한 세상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서의 삶이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착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 그릇된 종말론에 빠지는 죄를 짓게 된다. 우리는 교회의 회중석을 채워야 하고, 세상의 대로로 나가는 모험도 해야 한다. 지상명령에 나오는 “가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가정이라는 조용한 거처 속으로 숨고 싶은 유혹을 받는 이들에게, 가정에 안주하는 것은 자신의 취향과 전통에 따라 천국을 잘못 이해하는 행위임을 알려 준다. 우리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요 18:36).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야 한다(히 11:10).우리가 가진 한 가지 오류가 이처럼 가정을 이상화 곧 우상화하는 것이라면, 피해야 하는 또 다른 오류는 가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가정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서의 삶이 공적으로 행하는 활동과 (거의) 무관하다고 믿는 치명적인 함정에 빠진다. 그럴 때, 사적인 신념과 성품은 공적인 정책이나 생산과 무관하게 된다. 그 결과,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는 일은 사업장에서의 성공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기도하는 골방이나 식사하는 식탁과 같은 사적 영역이 다른 모든 공적 영역의 탁월한 삶을 위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생산성은 경건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앞에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나누는 장벽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요 34:21).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하게 행동해야 한다(벧전 1:15).가정은 무분별한 욕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중립적인 장소가 아니다. 단순히 전통적인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보루도 아니다. 가정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덕성을 함양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덕성을 함양하는 장소란 사적인 존재로서의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또한 우리의 공적인 일을 촉진시켜 주는 공간을 의미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가정들에게 편지를 쓸 때, 아내, 남편, 자녀, 주인, 종 모두에게 육신의 자랑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덕목들로 옷을 입으며, 말과 행위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가르쳤다(골 3:1-4:1). 그는 또한 에베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헌신 및 예배에 대한 가르침(엡 5:1-21)과 영적인 전투에 대한 가르침(6:1-20) 가운데 놓는다. 그리고 베드로는 가정에 대한 권면을 교회에 대한 논의와 함께 말하는데(벧전 2:1-11; 2:12-3:8), 이는 가정생활이 결코 교회생활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이 땅의 천국인 가정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활짝 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 여기서 믿음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소망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이기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기대를 가리킨다. 또한 사랑은 영광과 아름다움이 끝이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타락한 세상을 사는 크리스천 가정은 낙관론에 뿌리 내려야 한다. 그리고 이 낙관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주님의 나라에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 가정은 문화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황량한 전장과 같다. 교회가 참된 복음을 옹호하고 세속주의와 싸우는 동안, 우리는 가정에서 덕을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교회가 언덕 위의 도시로 남기 위해서는, 복음의 빛이 가정에서부터 밝게 빛나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ldview at Home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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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화
덕성
천국인가정
믿음소망사랑
복음의빛
그릇된종말론
우리의거처
예술은 우리가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준다
by Dustin Messer
2018-11-19
악의 문제는 오랫동안 크리스천에게 도전거리였다. 모든 이를 사랑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선한 피조물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나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다면, 나는 그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 미래에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언뜻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제안은 ‘미술관에 가라’는 것이다.미술은 늘 영성 형성과 교회 갱신의 주요 열쇠처럼 여겨졌다. 미술은 더 높이, 더 깊이 살펴보라고 우리에게 손짓한다. 캔버스나 찰흙처럼 일상적인 사물에서 초월성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이러한 초월적인 경험은 악의 영향력을 경험할 때 느끼는 딜레마와 비슷한 딜레마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악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묻는다. 반대로 선(善)과 질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고 묻게 한다. 분명 우리는 초월적 기쁨의 순간에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위기의 순간에서도 세계의 추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고통의 문제를 우리에게 준비시키는 일이다. 초월하여 보기위대한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레오나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그 사실을 아름답게 적고 있다.“베토벤은 놀라운 정확성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정확성 말이다. 음악은 진정한 그 무엇, 하늘에서 온 어떤 것, 우리가 마지막에 느낄 수 있는 힘, 혹은 이 세상에 정확하게 자리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거기에는 자체의 질서를 따르며 일관되게 진행되는 어떤 흐름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으며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기독교가 말하는 세계에서 피조물은 성스럽다. 그것은 그 자체를 초월한 어떤 대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창조의 심포니에서 질서와 의미를 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비극의 한 가운데서 고통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음악, 그림, 조각을 감상할 때도 그 질서와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예술은 현재를 넘어서 무한성을 보도록, 창조물 그 자체를 넘어서 창조자 그분 자신을 보도록 우리를 이끈다.이것이 C. S. 루이스가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에서 말하고 있는 바이다.“책이나 음악이 아름답다고 우리가 그 자체를 신뢰하면 우리는 배반당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그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은 그 대상을 통해 나오며, 그 아름다움은 다시 우리 안에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다움과 과거의 기억들은 우리가 정말로 갈망하는 실체에 대한 좋은 이미지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잘못 인식하면,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대상은 어리석게도 우상으로 변해 버리고, 그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거기에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꽃의 향기, 아직 듣지 못한 선율의 메아리, 아직 방문하지 못한 나라의 소식일 뿐이다.”탈신화화된 서구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대상의 외양을 보고 분석하는 일은 배웠지만, 그 대상을 통찰하거나 초월해서 바라보는 일은 배우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적 현상을 객관주의, 과학주의, 실용주의 등 뭐라고 부르든지 결과는 뻔하다. 우리는 창조물을 단순히 자연 그 자체로만 보도록 훈련 받았다. 생명력 없는 해부의 대상이지 기쁨의 대상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이런 문화에서 예술을 감상하는 작업은 이전보다 더 많은 훈련과 노력을 요구한다. 일단 진흙은 흙덩어리 그 자체로 보인다. 당신이 미술관을 방문할 때마다 같은 조각상 옆에 멈춰서는 훈련을 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은 그 진흙 덩어리가 뭔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물론 그 대상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흙덩어리를 보는 방식이 변한 것이다. 보는 방식은 보여지는 객체(the seen)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는 주체(the see-er)에 의해 바뀐 것이다.잘 보는 일은 특히 방해를 많이 받는 시대에서는 의도적으로 행할 필요가 있다. 조각상에서 흙덩어리 이상을 보기 위해서는 초고속 시대에는 흔치 않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들을 존중하기 원한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보는 태도를 기를 필요가 있다.고통과 기쁨의 문제들예술 감상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들은 악의 문제를 어렵게 여기도록 만드는 조건들과 상통한다. 조각상에서 진흙덩이만을 보는 눈으로는, 큰 수술 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변색과 흉터자국들만 보게 된다. 반대로, 미술관 벤치에 앉아 의미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훈련된 눈으로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지만 하나님의 피조물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비록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겠지만 말이다.그렇다고 무언가를 열심히 보기만 하면 항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예술에서의 의미는 고통에서처럼 때로 포착하기 어렵거나 접근이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끊이지 않는 고난은 자주 비상식적이거나 불합리하게 느껴져 그로부터 의미를 전혀 찾아내지 못할 수 있다. 명백하게 예술적인 특성을 지닌 음악과 영화도 같은 식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을 관찰하는 방법을 더 많이 익힐수록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의미를 더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예술은 현실을 바르게 보는 기술을 회복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진선미 안에 있는 질서와 결합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친숙하면, 그와 반대되는 추함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표준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쁨의 순간에 의미를 찾는 일에 익숙해지면, 그와 다른 절망의 순간 역시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그러므로 우리가 기쁨의 문제를 깊이 묵상할 줄 안다면, 고통의 문제 역시 더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Art Can Prepare You for Suffering번역: 정은심
문화예술
고통
미술관에가라
초월적기쁨
레오나드번스타인
루이스
예술감상
예술관찰
인내심
태풍 속 우산보다 강한 피난처, 나의 하나님
by Christopher Catherwood
2018-11-14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19세기 영국인 판사였던 찰스 보웬(Charles Bowen)은 저명한 법조인이었다. 반면, 시인으로서는 그다지 명성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법적 판결이 현대의 영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듯이, 그가 남긴 짧은 시구는 여전히 선한 영향력으로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한다. 의로운 자들을 향한 비그리고 악한 자들에게도 내리는 그 비왜 정의로운 자들에게 더 가혹할 수밖에 없는가그 이유는 우산이 악한 자들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문학적으로 그다지 뛰어난 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지은 이 짧은 시구에 뛰어난 신학적 통찰이 담겨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TV를 떠들썩하게 했던 홍수나 태풍을 떠올려 보라.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그 엄청난 재난을 피할 수 있었을까? 무서운 장마가 크리스천의 집만 비껴갔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믿음과 상관없이 태풍의 영향권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집이 물에 잠기거나 목숨을 잃는 고통을 경험했다.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더 가혹한 고통을 겪는 일도 빈번하다. 특히, 크리스천들이 종교적 이유로 박해받는 땅에서는 그 고통의 정도와 빈도가 더 심하다. 이와 같은 지역에서 하나님을 믿는 일은 자신의 직업과 자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베드로는 박해에 대하여 ‘믿음을 향한 아름다움이니 고난으로 여기지 말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박해의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실로 감당하기 힘든 수많은 고통을 수반한다.한국이나 기독교 국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이러한 박해의 위험에 크게 노출되지 않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실천적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일이 미래에도 지금처럼 평온한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보았을 때, 찰스 보웬의 시에 담겨 있는 신앙적 고민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다.“하나님이 계시다면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종종 듣게 된다. 하지만 돈 카슨(Don Carson)은 그의 명저인 ‘얼마나 더 인내해야 하는가? 고통과 악에 대한 고찰’(How Long O Lord? Reflections on Suffering and Evil)에서 이러한 세속적 사고가 신학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모든 사람은 영적 죄인이다. 이미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모든 사람은 선하지 않다. 우리는 타락했으며 죄인이다.그리고 죄로 가득한 타락한 세상 속에 살아간다. 하나님의 백성(의인 혹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나 동일하게 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만약 우리가 범람 지역에 거주한다면,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홍수를 겪는다. 또한 우리가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살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재해를 만날 수 있다.고난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한 이치를 개개인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질병이나 죽음 등 인간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는 난제들을 만난다. 때때로 이러한 고통은 설명되지 않는 문제로 느껴진다. 그러나 고난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결과물이다. 욥 역시 왜 그러한 고통의 시간을 겪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처럼,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설명이 불가능한 일로 다가온다.지속적인 간구이 문제에 대한 묵상 중에 시편 121편을 읽게 되었다.“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하나님은 이러한 분이다. 이 시편의 내용이 곧 크리스천의 삶이자 운명이다. 우리는 절대 홀로 버려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보호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고, 하늘과 땅을 지으신 구세주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시는 나의 보호자이다.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는가?고난에 부딪힌 인간은 기본적으로 분노로 반응한다.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분노함으로써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이 과연 우리의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그러한 반응은 오히려 고통 위에 분노의 감정까지 더해 상황을 더욱 버티기 힘든 상태로 몰아갈 수도 있다. 또한 유일한 희망인 하나님과 대적함으로써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망연자실에 빠질 수도 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영원한 안식에 닿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나의 아내는 2018년 10월로 예정되어 있던 장인어른의 100세 축하파티에 무척이나 함께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날을 3개월 앞둔 지난 8월, 아내는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기대하던 기쁜 날을 잃어버렸고, 나는 아내 없이 홀로 축하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님 역시 크리스천이셨기에 사랑하는 딸을 영원한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그 마음을 잠잠케 하셨다. 한 친구는 내게 위로하기를 “함께할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안타까워”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내를 다시 만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아내와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재회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함께할 수 없던 아픔과 슬픔을 영원히 회복할 수 있으리라. 이것은 감정적인 위안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나게 될 예정된 사실이다.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분노하고 맞서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죄다. 홍수와 태풍, 그리고 죽음의 근본적 원인인 인간의 죄성과 싸워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구원자이며 진정한 희망인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비록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난을 피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방패가 세상 속 호우를 잠시 면하게 해 줄 우산이 아니요, 구원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d Is Better Than an Umbrella번역: 정새롬
문화
세계관
피난처
돈카슨
분노
인간의죄성
바로 지금이 영원히 중요하다
by R. C. Sproul Jr.
2018-11-01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죄는 적절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죄는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것보다 어떤 것을 더 사랑하거나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것보다 어떤 것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하게 사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와는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를 찾았다. 거기까지는 잘못된 것이 없었다. 하와가 그 열매를 보지 않으려면 눈이 안 보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와는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보다 그 열매를 더 사랑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보다 하나님의 법을 덜 사랑했다. 우리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흔히 우리의 시험은 어떤 죄를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며 옹호할 때 찾아온다. 우리가 “진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웃의 명예를 훔치는 일은 사랑으로 또 다른 죄를 합리화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웃의 아내를 훔치는 일도 죄를 옹호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적절하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적절한 척도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다. 적절하게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마땅히 사랑해야 해야 할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이 죄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모두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여호와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명령 받았다. 따라서 우리의 거룩한 열정은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하고, 다른 모든 감정은 이 열정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적게 사랑하거나 혹은 너무 많이 사랑함으로써 실패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는 말씀도 그런 교훈을 담고 있다. 우리는 적절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이 두 종류의 실패가 종종 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것을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너무 조금 사랑하고, 또한 반대로 어떤 것을 너무 조금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너무 지나치게 사랑한다.예수님도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실 때(마 6:33) 똑같은 요점을 제시하신다. 예수님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염려를 멈추라고 권면하신 후에 이 명령을 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 걱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진정으로 중요한 일에 마음을 집중할 것을 명령하신다.물론 이것은 먹고 마시고 옷 입는 것이 죄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천상적이고 신령하고 거룩한 것을 위하여 더럽고 비천하고 세속적인 것을 피하는 일이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동일한 맥락(마 6장)에서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우리의 양식은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문제이다(즉, 가치중립적이다). 우리의 음료도 아디아포라에 속한다.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이런 문제로 서로 비판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롬 14:13). 그러나 우리는 아디아포라에 속해 있는 대상들을 사랑함으로써 잘못된 길로 갈 때 죄를 범한다.한편, 산상설교의 이 맥락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지혜는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과도하게 분리시키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에 관해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다음에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촉구하심으로써 천국 지향적인 관점을 견지하여 이방인과 같이 그런 것들을 갈망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점을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또는 경멸의 눈초리를 보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온갖 좋은 선물에 대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감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선물에 눈이 어두워져 선물을 주시는 분을 보지 못하는 열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온갖 좋은 선물을 통하여 선물을 주시는 분을 보고 찬양해야 한다.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세계이다. 아버지의 법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만, 우리에게 감사하지 않을 자유란 없다. 하나님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죄로, 딸기 아이스크림을 의로 보시지 않지만, 바로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가 우리 아버지이심을 기억하며 자신에게 감사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분명히 우리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우리의 감사를 통해 드러난다. 다시 한번,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명심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세워진다. 하나님은 우리만이 아니라 이 세상도 다스리신다. 그러나 우리와 세상의 구별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반발하여 분노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감사함으로써 드러난다.이 세상의 평범한 일들, 곧 세상 것들은 단순히 문화의 산물이 아니다. 단순히 자연적 영역의 도구들이 아니다. 대신에 그것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온 보배로운 선물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감사는 영원히 메아리칠 것이다. 아디아포라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간에, 모든 것이 위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다. 단순히 인간에게만 속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Right Now Counts Forever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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