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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다
by 최창국
2023-08-26
12세기의 영성가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는 신자의 영적 성숙에 따라 경험하는 하나님 사랑을 네 단계로 설명하였다. 제1 단계는 자기를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다. 원초적이고 본성적인 사랑의 단계다. 이기적인 사랑의 단계다. 이 사랑의 단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온 인격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한다(마 22:37-40). 제2 단계는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다. 이 단계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복을 받고, 환난 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적인 욕구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은 타산적 사랑이다. 이 단계의 신앙은 기복신앙에 머무르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전환기이기도 하다.제3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다. 나의 영적인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다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그 자체로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단계의 사랑은 하나님이 나에게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 단계의 사랑은 이타적 사랑이다. 제4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는지 알아 나를 사랑하는 단계다. 여기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제2 단계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목적과 이유가 다르다. 여기서 자기를 위한 사랑이 둘째 단계와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신이란 창조주의 사랑에 의해 압도된 자신을 의미한다. 성령을 통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언제나 계시며,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충만한 자신을 의미한다. 제2 단계에서 자기 사랑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이지만, 제4 단계에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서 살기 위해서이다. 특히 이 단계에서는 내가 가진 소유나 명예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나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 나의 자랑할 만한 것이 내 자존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이 단계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다.버나드가 제시한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는 일이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에 가리켜 하는 말이나 우리가 소유한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 정체성의 덫에 빠진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모든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진리가 계시된다고 이해하고, 모든 영적 유혹은 이 근본 진리를 의심하고, 그 밖의 다른 정체들을 믿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정체성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행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눅 3:21-22)는 말씀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깊은 방식으로 체득하게 된다. 나우웬에 따르면, 광야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시험(눅 4:1-13)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말씀하신 진정한 정체성을 앗아가려는 유혹이었다. 사탄이 예수님의 진짜 자기(true self)를 가짜 자기(false self)로 대체하려고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탄은 “너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자다.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자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네 권세에 절하게 만들 수 있는 자다”라고 유혹하였다. ‘네가 하는 것이 곧 너다. 네가 가진 것이 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너다’라는 사탄의 유혹에 예수님은 “아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다”라고 선언하신다. 나우웬은 영적 삶의 가장 큰 적은 자기 거부라고 진술한다. “삶의 가장 큰 덫은 성공이나 인기나 권세가 아니라 자기 거부, 자신의 참 존재를 회의하는 것이다. 성공과 인기와 권세도 과연 큰 유혹일 수 있으나 그 유혹의 질은 자기 거부라는 훨씬 큰 유혹의 일부라는 데에 있다. 우리를 무익하고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고 부르는 소리를 믿게 되면, 성공과 인기와 권세가 어느새 매력 있는 해답으로 다가온다”(헨리 나우웬, 영성 수업, 51).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것을 망각할 때, 수많은 형태의 자기 부정에 빠지게 된다. 자기 거부나 부정의 유혹은 때로는 교만의 형태로 때로는 열등감의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부정은 자신감 부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지나친 자만심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기 거부는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이다.버나드가 설명한 본성적 사랑과 타산적 사랑은 기복적인 경향이 있으므로 진짜 자기를 가짜 자기로 대체하기 쉽다. 본성적 사랑과 타산적 사랑은 자기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보다는 감각적인 소유와 성과와 인기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자기를 가짜 자기로 쉽게 대체한다. 물론 우리에게 소유와 성과와 인기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자기 부정의 덫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정체성이 진짜 자기가 아니라 가짜 자기로 대체 될 때 무엇보다도 낮은 자존감에 노출되기 쉽다. 가짜 자기는 우리를 끊임없는 욕망과 비교의 터널로 끌고 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버나드가 제시한 제4 단계의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는 단계다. 이 사랑은 건강한 자존감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의 행위나 소유에 따라 우리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자기 사랑은 진정한 자기 사랑에 이를 수 없고, 감각적인 우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진정한 자기를 사랑하게 되므로 가장 복된 자기 사랑이다.
시편 1편: 분주한 일상을 극복하는 묵상의 즐거움
by Brian Tabb
2023-08-24
시편의 하나님· 시편 1편: 분주한 일상을 극복하는 묵상의 즐거움· 시편 2편과 복음전도 · 시편 135편: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 시편 1:1-2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시편 1편은 두 가지 (단 두 가지) 삶의 길을 제시한다: 세상의 길과 말씀의 길.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들을 쫓아다닐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패망에 이르는 넓고 편한 문이 열려 있다(마 7:13).겨가 아니라, 나무가 되어라.시편 1편의 “악인”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독립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오로지 인간의 관점, 세상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성공과 인기와 번영의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시편 73편을 보라). 그렇지만 시편 1편은 우리가 궁극적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게 한다: 악인의 번영은 덧없으며, 이는 그들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기 때문이다.달리 선택해야 할 삶이 있다. 하나님의 교훈에 의지하며 즐거워하는 삶이 그것이다. “의인”은 세상의 지혜와 가치의 빈곤을 알아보며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삶은 곧 신앙의 삶이다(예레미야 17:7-8을 보라). 이러한 삶은 지금 그리고 영원히 복되고 열매 맺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으로 이끈다. 아름답고, 튼튼하고, 물이 풍족하고, 열매 맺는 나무를 그려보라(3절). 바람에 나는 겨가 아니라, 이런 나무가 되어야 한다. 꾸준한 생각과 따뜻한 응답2절이 핵심 구절이다.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과정에 주목하라: 즐거워함, 그다음에 묵상. 즐거워함은 무언가의 또는 누군가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런 반응이다. 하지만 묵상은 신중하고 꾸준한 사고를 요한다. 묵상은 실행과 의지가 모두 필요하다.잘 이루어진 묵상은 즐거움을 제공하고 강화하며 지속시킨다. 묵상은 말씀이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의지에 더욱 깊이 파고들게 한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이 새로워지고 변화가 일어난다”(롬 12:2). 묵상은 우리의 뿌리가 더욱 깊이 내려가도록 하여, 말씀의 생명수를 더욱더 많이 흡수하게 한다. 묵상 향상하기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분산되어 있다. 우리는 멀티태스킹, 서핑, 스키밍에 능하다. 그러나 묵상은 너무나 힘들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의식적으로 향상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되도록 일관된 시간과 장소와 계획을 찾자. 그다음에는 천천히 그리고 집중해서 읽자. 다시 읽고 또 읽자. 소리 내어 읽자(시편 1:2에서 묵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는 큰 소리로 읽는다는 뜻이 들어 있다). 기도하는 자세로 읽자. 손에 펜을 들고 읽자. 읽은 본문을 암송하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고 내가 본 것을 함께 나누자. 좋은 주석서를 활용하여 성경을 연구하자. 성경 묵상 계획을 세워 기도하고, 나의 계획을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들려주자.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의 아름다움과 가치 안에서 즐거워하고 의지적인 묵상을 통해 그 즐거움을 지속해 나가고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당신에게 시편 1편의 복이 함께하기를. 원제: Psalm 1: When Delight Overcomes Distractio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김은홍
모든 목회자가 강해 설교를 말하기 시작했다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08-23
월터 카터가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하기까지는 이 년이 걸렸다. “우리 흑인 교회에서는 말이죠, 부르심을 받으면 바로 즉시 설교 기회가 생깁니다.” 카터도 다르지 않았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그는 청년부 지도자로 바로 사역을 시작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일반 성도에게까지 설교할 기회를 얻었다.신학교를 간 적이 없는 카터의 말이다. “제가 틀리지 않았어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어요. 그리고 가르치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맡은 건 주로 주일학교 공부 수준의 주제였어요. 세 가지 포인트만 잘하면 되는 거죠. 시작을 잘하고, 기발한 예화를 들고, 그리고 결론을 열정적으로 맺는 겁니다.” 약 15년 후, 그는 시카고에 있는 Union Tabernacle Missionary Baptist Church의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위원회 주도에서 장로 주도의 교회로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던 카터는 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건강한 교회의 아홉 가지 지표)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나는 교회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교인들이게 이 책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첫 번째 지표인 강해 설교는 나의 몫이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그는 H. B. 찰스의 교회에서 열리는 설교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여러 선생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그는 데이브 헬름의 클래스에 가장 먼저 앉는 실수(?)를 저질렀다.“한마디로 나는 완전히 매료됐어요. 사흘 내내 하루 종일 그의 수업을 들었어요. 다른 사람 클래스는 아예 참석도 안 했지요. 완전히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카터의 그날 경험은 사실상 헬름 자신이 25년 전 영국인 목사 딕 루카스로부터 강해 설교를 처음 배웠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헬름의 말이다. “내 속에서 전구가 켜진 것 같았지요. 하나님이 실제로 말씀하시려는 명령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 같았습니다.”단지 배우는 데에 만족할 수 없었던 헬름은 2001년에 그와 몇몇과 힘을 합쳐서 루카스의 원리를 전파하기 위한 Charles Simeon Trust(CST)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전구는 점점 더 많이 켜졌다. “2007년 다시 시작했을 때는 워크숍은 고작해야 10개 남짓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여성을 위한 주제만 25개를 포함하여 전체 150개 넘게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CST의 여성 워크숍 책임자인 콜린 맥패든의 말이다.워크숍 책임자 케빈 워커에 따르면 지난 일 년 동안 전 세계에서 6,300명 이상이 워크숍에 참석했다. 거기에 더해서, 온라인 참석자도 6,300명에 이른다. 몇 달 전 나이로비에서 모임을 연 개혁파 케냐인 크리스 키아기리의 말이다. “여기 와서 이런 경험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카터가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가 대각성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팬데믹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신경 쓰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의 필요성을 분별하도록 우리를 떠밀었습니다. … 그 결과 지금 복음이 역사하고 있습니다.”무의식적 무능CST를 시작한 것은 헬름과 College Church의 켄트 휴즈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목회자들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만 해도 그들이 모르던 게 있었다. 설교에 있어서 정작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요즘 CST 팀은 그것을 “무의식적 무능”이라고 부르는데, 4단계 교육의 첫 번째 과정이다. 물론 당시에는 휴즈나 헬름도 그런 용어를 쓰지 않았다. 헬름이 말하는 휴즈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믿는 성경에 푹 빠진 사람”이다. 헬름은 일리노이 휘튼에 있는 College Church에서 휴즈의 직원으로 일했다. 휴즈와 헬름은 모두 성경 속 하나님의 계시가 설명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모세가 십계명을 설명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바울이 청중에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가르쳤던 시절부터 이어진 사실이었다.그리고 두 사람 모두 설교가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한 수준의 역량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대부분 설교자가 성경을 사용하는 형태를 보면 일종의 주제-교리적 설교라고나 할까요?” 미국 장로교 서기이자 Christ-Centered Preaching: Redeeming the Expository Sermon의 저자인 브라이언 채펠의 말이다. 설교자는 용서, 섭리, 결혼 같은 주제를 일단 먼저 선택하고 거기에 맞는 성경 구절과 철학을 조사함으로 일종의 교리 설교를 발전시킨다. “시사적 메시지가 항상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도 종종 깊고 아름다운 진리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그러나 채플도 The Gospel Coalition의 공동 설립자인 돈 카슨의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은 잠재하는 위험을 본다. 카슨의 말이다. “주제 설교에서 당신의 의제를 결정하는 건 다루는 주제입니다. 그 주제는 설교자의 상상을 자극하는데, 현재의 필요 또는 이 주제가 필요하다라는 인식 때문이죠. 지난 몇 년 동안 팬데믹을 거치면서 ‘정체성’에 관한 설교가 얼마나 많이 선포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20년 전만 해도 그 주제로 설교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현재 논의되는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건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는 주제의 우선순위가 성경 말씀의 인도함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더 많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슬픕니다. 이게 반해서 좋은 강해 설교는 교인 중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주제를 놓고도 충분한 성경 자료를 바탕으로 다루는 일입니다. 그게 바로 설교자의 사명입니다. 인기 있는 주제로 구성된 설교 시리즈는 거의 항상 성경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는 일부 주제를 무시합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는 순간,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아사 상태에 빠뜨립니다.” 지난 세기 동안 많은 교회가 주일 아침 예배는 복음 전도를, 주일 저녁 예배는 성숙한 신자들과 함께하는 더 깊은 성경 연구 시간이었다는 게 카슨의 말이다. 그러나 이런 모델이 하나 간과하는 게 있는데, 죄를 자각하고 용서를 확신하는 기본적인 복음 메시지는 가장 성숙한 신자에게조차도 정기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복음이 단지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 해당하는 ABC가 아닙니다. 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전부, A부터 Z까지입니다.” 카슨은 친구 팀 켈러를 인용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어떤 면에서 복음은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그 포용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다름 아니라 최근 수십 년 동안 “구도자에 민감한” 교회가 채택한 모델이다. 그런 교회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쉬운 방법으로 주제 설교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설교자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설교하지 않는다면, 비록 4, 50년 동안 교회를 다니며 수천 편의 설교를 들었다고 해도, 교회가 이사야나 요한복음 또는 로마서가 말하는 진짜 메시지가 무엇인지 영영 모르는 신자들로 넘칠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설교는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는 바른 방법을 가르칩니다!” 카슨의 주장이다. 주제 설교에서 강해 설교로딕 루카스가 1991년 시카고 지역 목사들의 초대를 받고 방문했을 때, 설교의 발전을 갈구하던 휴즈와 헬름은 그를 만나러 갔다. 그때까지 루카스는 이미 삼십 년 동안 런던의 St. Helen’s Bishopsgate에서 강해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의 교회는 부흥했고, 사업가들을 위한 성경 강의도 성공적이었다. 오 년 전에 그는 목회자를 위한 설교 세미나 Proclamation Trust를 시작했다.“딕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몇 가지를 살펴보았고, 켄트와 데이브,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강해 설교라는 게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는 사실을 확신시켰습니다.” CST의 사역 책임자인 로버트 키니의 말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단지 사랑에 대한 감상적인 송가가 아니라는 게 루카스의 주장이었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을 보면 사실상 그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책망임을 알 수 있다.“딕은 제대로 본문을 관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특정 부분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가 풀어내는 논증 전체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 우리가 하는 설교는 종종 마치 특정 구절을 독립된 내용으로 다루면서 설교했으니까요.”루카스가 보여주는 성경 관찰 방식은 짜릿하고 생명을 주는 경험이었다고 헬름은 고백했다. 더 배우고 싶었던 그는 시카고에서 세인트루이스까지 가는 다섯 시간 동안 루카스의 운전기사를 자청했다. 단지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였다. 강해 설교는 정의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또 쉽다. 가장 기본적으로 말해서, 내가 정한 주제를 뒷받침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찾는 대신에 성경 구절로부터 내용을 뽑아서 설교하는 것이다. 헬름은 강해 설교를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텍스트의 모양과 강조점이 설교의 모양과 강조점을 알려줄 때입니다.”해당 구절이 원래의 맥락에서 원래의 청중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파악한 다음에, 그 메시지를 지금 청중에게 적용함으로써 강해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게 헬름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레위기의 율법이든 요한계시록 속 말 탄 사람이든, 일단 그 구절이 어떻게 성경의 요점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의 요점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성경의 요점이라는 측면에서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목회자에게 콜린 스미스가 제안하는 방법이 있다. “이슬람 모스크나 유대교 회당에서 당신이 설교하면 과연 쫓겨날까요?” “나는 …. 내가 전에 했던 설교 중 일부는 기독교의 내용이 아니라(sub-Christian)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몇 년 전 Simeon Trust 모임에서 콜린 스미스가 말했다. “특히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한 경우에, 하나님과 삶, 성경, 경건 등에 관해 많은 좋은 것을 말했지만, 그중에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명확하게 인도하지 못한 설교가 꽤 있었습니다.”따라서 훌륭한 강해 설교는 항상 성경의 요점인 예수님을 가리켜야 한다. 의식적 무능“헬름과 휴즈는 오후 시간 어느 시점에 자기들이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다가, ‘이봐, 우리가 지금 문제가 많아, 배울 게 너무 많아’라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키니의 말이다. “그들은 더 나아지겠다는 데에 열광적으로 헌신했습니다.”그리고 그들은 많이 배웠다. 그 결과 전에는 결코 다루지 않았을 구절을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무엇을 설교할까 하는 걱정을 벗어던졌고, 성경에 대한 더 깊은 이해 속에 성장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확신을 얻었다.그 후 오 년 동안 휴즈와 헬름은 되도록 많은 시간을 루카스와 함께 보냈다. 헬름은 런던에서 반년의 안식년을 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사역을 좋아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교사로서 딕의 사역은 재현 불가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딕은 사실 약간 특이한 사람이었지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어요. 거의 유기적으로 나타나는 건데요. 그렇다고 거기에 반드시 무슨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고, 왜, 그리고 어떻게입니다’라는 식의 설명이에요.”좀 이상하긴 해도, 정작 거기에 설명을 하는 건 헬름이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는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루카스의 작업을 역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과정을 인턴들에게, 또 연례 Wheaton Workshop에서 다른 목사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수업을 강화하는 작은 과제까지 만들었다.“2000년까지 약 백 명의 사람들이 Wheaton Workshop에 왔습니다.” 키니의 말이다. 그들이 가졌던 유일한 불만은 시카고가 일부 참석자에게 너무 멀다는 것이었다.그렇다 보니 헬름은 지역에 기반을 둔 워크숍과 인턴십, 목회 레지던트 및 자료 제공 등의 사역 잠재력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 헬름과 공동 목사 존 데니스, 휴즈,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학습이 가능한 게 설교다’라고 믿었던 19세기 목사의 이름을 딴 Charles Simeon Trust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시므온은 죽기 전까지 영국 성공회 목사 3분의 1에게 설교를 가르쳤다).그 후 삼 년 동안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헬름에게 CST를 운영하는 건 전혀 시간이 들어가지 않는 일이었다는 게 키니의 말이다. 게다가 헬름은 거기에 시간을 쓰기에는 다른 사역이 너무 바빴다. 헬름과 데니스는 1998년 시카고에 Holy Trinity Church를 세웠고, 2002년에 두 번째 교회 캠퍼스를 시작했습니다.마침내 헬름은 모든 사역을 혼자 하기에는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고, 키니를 고용했다. 사역의 인수인계는 길지 않았다. “이게 캘거리에서 워크숍을 주최하는 사람 전화번호고, 이게 Spokane에서 주최하는 담당 전화번호야. 그리고 리치먼드 쪽은 전화번호를 찾아봐야 해. 아, 그리고 필라델피아 제십장로교회의 필 라이큰 목사가 그쪽에서 시작하고 싶어 하던데, 잘 도와줘.” 키니는 헬름의 인수인계를 이렇게 설명했다.의식적 유능처음에 키니가 하려고 한 것은 일주일에 한두 번 진행되는 대면 수업을 중심으로 루카스의 Proclamation Trust를 따라 CST를 패턴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영국은 전국이 두 시간 거리 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아니지요. 둘째, 미국 교회는 영국 교회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자격증(credentials)을 강조합니다.”대부분의 미국 교회는 공인된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목회자를 기대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러나 학위는 CST가 제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또한 원래 계획했던 책, 팟캐스트, 그리고 기사 등의 자료를 제공할 시간이나 인력도 없었다.그래서 키니와 헬름은 집중 영역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우리가 사용한 은유는 스프링 트레이닝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올스타든 신인이든 매년 2월에 애리조나나 플로리다로 가서 기초부터 다시 배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려는 일입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설교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확신과 기술을 되찾도록 돕는 것이지요.” 키니의 말이다. 전임 목회자들이 수업받을 수 있도록, 그들은 지역 사흘간 진행되는 워크숍과 온라인 사전 녹화 수업에 집중했다.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소크라테스식 방법을 사용했다.남아프리카에서 Simeon Trust 워크숍을 가르치는 머빈 엘로프의 말이다. “많은 달 동안 저는 신학교에서 설교 수업을 진행했는데, 주로 말을 하는 건 나였어요. 결국 학생들이 나에게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질문을 통해 그들이 스스로 원리를 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내게는 큰 기쁨입니다.”CST 도구의 명확성과 의도성이 “학생들이 정확하고 적절하게 설교하는 데 정말로 큰 도움을 줍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은 더 이상 나에게 친숙한 이야기를 엮어 놓은 게 아닙니다. 이 훈련을 통해 전에는 한 번도 만져 본 적이 없는 성경 구절과 레위기 같은 책까지도 다룰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카터의 말이다. 어려운 성경 중 하나가 까다로운 이미지로 악명 높은 요한계시록이다. 카터가 이어서 말했다. “방금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요한계시록에 관한 CST 워크숍을 인도했습니다. 내가 이 시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때, 그만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그게 그가 목격한 유일한 변화가 아니다. “설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적절하게 설교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 교회가 이렇게 눈을 뜨게 된 것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카터의 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회중은 성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그의 설교에 더욱 뜨겁게 반응했으며, 교회가 장로들을 선임하는 데에 관해서도 더 마음을 열었다.확장설교자가 말하기 시작할 때, CST 워크숍도 크기 시작했다. 2008년이 되자, 여성 사역자들의 요구가 늘어나면서 이 워크숍을 여성에게까지 확대해야 할지를 이사회가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맥패든은 성경 이해와 교육에 대한 여성 워크숍을 진행했다.기본적인 골격은 같았지만, 설교 대신에 성경 공부, 커리큘럼, 자녀 교육 커리큘럼에 더 많은 내용을 할애하도록 내용이 구성되었다. “남녀 워크숍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여성 워크숍은 여성 성경 교사가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성이 여성을 가르치길 원합니다. 남성 워크숍이 신학교 교수가 아닌 설교 목사가 이끄는 것처럼 여성 워크숍은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강해를 가르치는 여성이 주도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완주의를 구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여성이 여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워크숍에는 여성을 교육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맥패든의 말이다. 첫 번째 워크숍이 매진되었다고 맥패든이 말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거, 더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워크숍을 두 개로 확장했습니다. 계속해서 확장했고 이제 내년에 제공할 여성 워크숍은 25개입니다.” CST의 모든 워크숍이 미국에서 하는 건 아니다. 2013년이 되자, 쿠바와 인도, 케냐의 목회자들로부터 지역 워크숍에 대한 요청이 들어왔다. 국제 워크숍의 경우에 참석자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기에 키니는 이사회의 의견을 물었다.“전 세계에 오픈하자”라는 게 이사회의 결정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 2개국에서 31개국으로 진출했습니다.” 케니의 말이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이 운영하기 어려운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면으로 이루어지며,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조만간 CST 대면 워크숍이 열릴 예정이다. 비슷한 시기에 헬름은 Expositional Preaching: How We Speak God’s Word Today를 출판했다. “이 책의 출간은 확장할 준비가 된 성숙한 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라고 키니가 말했다. 출간과 국제 사역을 오가며 “사역의 모든 부분이 빠르게 증가했습니다.”2019년까지 CST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합숙 교육을 다시 한번 살펴볼 준비가 되었다. 가을에 시카고 코스를 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로나에 직면했다. 축소“당연히 대면 행사는 불가능해졌습니다.” 키니가 말했다. CST 직원은 온라인 워크숍으로 전환했지만 출혈을 멈출 수 없었다. 시카고 과정 등록이 어려움에 빠졌고, CST는 35개의 워크숍을 취소해야 했다. 이것은 그해에 제공되는 과정의 40퍼센트 이상이었다. 2021년에는 71개를 연기하거나 취소했다. 온라인 과정 등록자도 줄었다.프로그램 감독을 위해 시카고로 이사한 제레미 닉스의 말이다.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6개월 후에 코로나를 만나는 것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최악이었어요. 지난 사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회복이 가능할까? 아니면 CST는 단지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던 걸까? 다시 확장믹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등록자를 채우고 교육 과정 준비는 엄청나게 힘들지만, 매일 하는 수업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입니다. 하루 종일 내 속에서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는 게 신기해서 나 자신을 몇 번이나 발로 찹니다. 정말 최고예요.” 천천히 등록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코로나는 실로 많은 방식에서 세상을 바꿨습니다.” 믹스의 말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교회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또 다른 변화는 모든 목사가 자신의 설교를 스트리밍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코스에 온 사람들 가운데 세 명은 자기네 학교 졸업생이 하는 설교를 듣고서 ‘어디서 그런 법을 배웠지?’하고 물어서 온 사례가 있어요.” 믹스가 말했다.2022년, CST 워크숍 등록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나이로비에서 라스알카이마에 이르기까지 설교를 배우려는 목회자들이 다시 대면으로 모였다. “훈련이 참석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관해서 수천 개의 간증문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일 년에 15-20번 워크숍에 참석합니다.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목회를 해본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선한 눈으로 접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키니의 말이다. 탈진 직전의 목회자들이 새로운 동기를 찾고, 외로운 목회자들이 동지를 찾고, 고군분투하는 목회자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모습을 키니는 목격했다. CST는 또한 그들 주변에서 더 큰 움직임이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강해 설교가 크게 부활했습니다.” 채플이 말했다. 그는 2005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냥 무미건조하게 주석이나 빠는 게 강해 설교라는 개념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본문에 충실할 뿐 아니라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본문을 보는 것이 강해 설교라는 점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측면에서 점점 더 많은 방법을 발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The Gospel Coalition 이사로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텍스트의 설명과 더불어서 복음이 어떻게 동기를 부여하고 또 적용까지 가능하게 하는지를 결정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는 설교에서 큰 회복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복음이 없는 설교는 단지 바리새인일 뿐입니다.”시카고에 있는 카터의 교회는 또 다른 일곱 명을 CST 워크숍에 보냈다.카터는 고백한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를 적절하게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일로 인해 내 인생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말문이 막힙니다.”헬름의 말이다. “나에게는 CST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핵심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 같이 미약한 인간에게 어울리지도 어떤 영향력이 있다면, 그것은 다 주님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그가 사용하는 도구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모든 찬양은 오로지 주님만이 받으셔야 합니다.”원제: Why Everyone Started Talking About Expositional Preach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Mark Jones
2023-08-19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스티븐 차녹(1628-1680)이 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은 청교도 시대가 낳은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 신학적 거물들의 펜에서 수백 권의 방대한 저작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대였음을 고려하더라도 이 책은 대단한 성취이다. 차녹이 죽고 2년 후에 출판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미완성 상태였다. 총 14개의 담화 또는 14장이 완성되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에 관해서 더 쓰고 싶은 내용이 남아있었다. 책이 출간되고 차녹과 책을 향한 칭찬이 줄을 이었다. 역사가 에드먼드 칼라미(1671-1732)는 신학자로서 차녹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녹은 대단한 학자였다. 그가 손을 댄 학문에서는 통달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다. 그에게는 구약과 신약을 원어로 이해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애초에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확고한 판단력과 생생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차녹은 거의 신적 수준에 근접한 탁월한 학자였다. 에라스무스 미들턴(1739-1805)은 그를 “진정한 신성에 대해서 깊이와 명확성과 정확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섭리에 대해서 가히 비할 데 없는 담론을 남긴 저자였다.” 영국 성공회 찬송 작가 아우구스투스 토플라디(1740-1778)도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위대함에 대해서 비슷한 언급을 했다. “명확함과 깊이, 형이상학적 숭고함과 복음주의적 단순성, 엄청난 배움과 평범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추론, 더불어 인간의 신성한 판단력과 천재성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드는, 차마 그 가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인간이 성취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조엘 비키는 언젠가 내게 청교도 시대가 이해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차녹의 이 걸작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담론 하나만으로도 순금에 비할 가치가 있으며 모든 영문학 작품을 통틀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책이다.” 제리 브리지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담론을 여섯 페이지 정도 읽다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압도당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잠시 후 다시 일어나서 읽기 시작했는데,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서 그는 또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혼자 남겨진 내게 딱 두 권의 책만 허락된다면, 나는 기꺼이 성경과 차녹의 걸작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안에서 나는 매일 매일 행복하게 또 바쁘게 지낼 것이다!평신도를 위한 신학오늘날 독자들에게는 이 책의 각 장이 설교 목적으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도 있다. 실제 설교에서는 약간의 편집이 필요했겠지만, 오늘날 독자들이 읽는 내용은 다름 아니라 애초에 차녹이 토마스 왓슨과 함께 사역했던 교회의 성도들이 듣도록 준비되었던 내용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서, 당시 영국에 살았던 가장 재능 있는 두 신학자의 설교를 들었던 교인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이 작품의 내용이 정교하다고 해서 일반 독자가 접근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작품이 고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다름 아니라 가장 중요한 교리(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학자와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쓴 차녹의 능력이다. 물론 오늘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가벼운 기독교 서적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14개의 담화에는 예외 없이 잘 알려진 성경 본문에 대한 주석이 포함되어 있다. 차녹은 각각의 주제와 관련해서 주로 가장 유명한, 일종의 표준 구절(locus classicus)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룬 개혁주의와의 연관성을 고려했다(예: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시편 14:1). 이것은 신학 교리에 대한 설교적 담론의 전형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바로 눈치챌 수 있듯이, 차녹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가진 실제적인 의미에 관심을 가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내용 중에는 실천적 무신론에 관한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그 시기에 하나님의 존재라는 교리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고전적 이해에 대한 공격, 둘째, 마치 우리의 삶과 생각에 관심을 가진 하나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고 있는 인간의 현실이었다. 차녹의 작업은 이런 실질적인 문제를 아우르는 통찰력 있는 분석이었다. 더불어서 그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마치 무신론자처럼 행동하는 교인이 귀를 기울여야 할 많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차녹의 작업이 초점을 두는 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라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를 경시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각각의 담론 전반에 걸쳐서 흩어져 있는 내용은 말 그대로 황금 덩어리이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설명한다. 차녹은 각 장의 “용도”(uses) 섹션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그리스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그의 관찰을 담고 있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적용할 때조차도 차녹이 그 내용을 그리스도의 인격에 고정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쾌한 세련미“용도” (또는 “가르침”) 섹션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얼마나 실용적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식의 적용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은 바퀴 없는 아름다운 자동차에 그쳤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독자가 힘들어하는 부분은 신학책이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또 반대로 실용적인 책은 신학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러나 차녹의 책을 만나는 순간 이런 고민은 바로 사라진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은 신학적이면서 실용적이며, 실용적이면서도 신학적이다. 차녹보다 훨씬 더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1616-1683)과 리처드 백스터(1615-1691)는 매우 정교한 논문을 썼다. 그들의 학식은 아마도 17세기 영어권 신학자들 사이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종종 일종의 “번역가”가 필요할 정도이다. 외국어도 아닌 영어로 쓴 글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차녹의 책은 “번역가”가 필요하지 않다. 그의 글은 훨씬 더 단순하고 명확하다. 오웬과 백스터보다 훨씬 더 맥락을 따라가는 게 쉽다. 말하자면, 이 세 사람 중에서 트위터 세상에서 성공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단연 차녹(과 왓슨)이다. 칼뱅이 “명쾌한 간결함”으로 알려져 있다면 (애초에 칼뱅에게는 그것이 목표였다), 차녹은 명쾌한 세련미로 유명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차녹의 언어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자신의 학식을 설교를 듣는 평신도를 고려해서 적절하게 조정했기 때문이다. 그가 사용한 은유와 비유는 자연 세계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이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았다(“들의 백합화를 생각하라.” 눅 12:27). 또한 그는 탁월한 르네상스인이었다. 더불어서 그가 받은 의학적 훈련은 대부분의 페이지에 나타나는 은유, 삽화 및 비유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성경 주석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탁월한 통찰력 때문이다. 차녹이 소유한 하나님에 대한 학식 있는 이해를 통해 독자는 은혜를 입은 상태에서조차도 인간 영혼의 심연과 우리를 둘러싼 모든 죄악된 특성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강한 인상을 받는다. 큰 책 그리고 크신 하나님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왜 읽어야 할까? 차녹이 살았던 시대와는 다르게, 20세기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결코 위대한 시간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 관해서 비정통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 아마도 형편없거나 부적절한 가르침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었을 것이다. 치료는 강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강단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개인 또는 그룹 연구를 통해서도 치료가 일어나야 한다. 차녹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 다시 출간됨에 따라서, 이제 목회자들은 시간을 뛰어넘는 이 고전에 더욱 쉽게 접근하여 자신의 설교를 다시금 조명하도록 돕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J. I. 패커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마틴 로이드 존스에게 했던 최고의 칭찬은 그가 하나님을 강단으로 불러냈다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가 설교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는 실로 분명했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강단으로 부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차녹이 그토록 유창하고 자세하게 설명한 바로 그 하나님에 목회자가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관계없이, 차녹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사상가 한 사람을 읽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크고 넓은 기독교의 전통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던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당신은 이 책을 통해서 수 세기와 다양한 전통에 걸친 다른 사상가들을 (심지어 이교도 시인과 철학자들까지) 만날 것이다. 크신 하나님을 배우면서 동시에 더 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1,700쪽이 넘는 책을 읽는 것은 대단한 성취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묵상과 기도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결코 과거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은 진정으로 인생을 바꾼다. 책의 두께가 부담스럽다면, 일단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담론을 먼저 읽으라. 그리고 하나님이 매일 당신에게 보여주시는 다양한 자비에 대해서 겸손한 감사로 무릎 꿇을 준비를 하라. 아마도 당신은 지금도 쏟아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시한 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 백성의 지성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움직이실 하나님에 대한 더욱 견고하고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관점이 필요하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는 생각에, 차녹의 이 대작을 두 권으로 편집하면서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에 관한 바른 관점은 오늘날 교회가 가장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 요구가 이 책으로 충족되기를 바란다. 내 생각에 지난 수백 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차녹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처럼 교회를 준비시키고 도운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에 관해서는 그 어떤 칭찬도 결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원제: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나는 강간범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by Paul Carter
2023-08-16
몇 주 전 나는 목사와 성경학자가 종종 ‘죄인 안내서’(The Sinner’s Guide)라고 부르는 본문, 시편 51편을 가지고 설교했다. 흔히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진 이 본문은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 선지자 나단에게서 책망을 들은 후에 쓴 글이다. 그러니까 다윗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덕적, 영적 재난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쓴 시편이라는 의미이다. 설교에서 나는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하고 그녀의 남편을 살해했다고 말했다. 살인에 관해서 반론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강간은 그렇지 않았다. 몇 명이 와서는 정말로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한 게 맞냐고 내게 물었다. 다윗이 정말 밧세바를 강간했는가? 흔히들 그 이야기를 끔찍하고 죄 많은 일종의 “비열한 사건” 정도로는 생각하지만, 강간이라는 엄청난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 합리적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강간이야말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매우 가깝다. 따라서 우리가 강간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리처드 데이비슨(Richard M. Davidson)의 설명이다. 성인과 미성년자 사이의 성관계, 심지어 미성년자가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그건 “법정 강간”으로 불린다. 마찬가지로 다윗과 그의 아랫사람인 밧세바 사이의 성관계는 (설혹 밧세바가 권력자가 주는 심리적 압박 때문에 성교를 묵인했다고 하더라도) 성경적 법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야기 속 두 사람의 성관계는 강간으로 보는 게 맞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사건을 “위계에 의한 강간”이라고 부르며 책임은 피해자가 아니라 오롯이 가해자에게 있다.[1]다윗 왕은 무장한 군인을 보내어 밧세바라는 신하를 방으로 데리고 왔다. 이런 식의 행동은 모든 문명 국가에서 강간으로 간주된다. 다윗은 강간범이다. 강간죄를 숨기기 위해서 그는 살인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에서 명확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 시편의 처음 5절에서 다윗은 죄와 관련해서 가능한 모든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죄를 합리화하거나 최소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1절에서 그는 히브리어 “페샤”(pesha)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성경에서 흔히 “허물”(transgressions)”로 번역된다. 말 그대로 인간이나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의미한다.[2]다윗은 자신이 반역자임을 인정한다. 악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어놓으신 여러 개의 한계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2절에서 그는 “죄악”(iniquity)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아온”(aon)을 사용했다. 죄책감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한데,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알았을 뿐 아니라 기꺼이 인정했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2절에서 그는 히브리어 “카타아트”(khatta’ah)라는 또 다른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죄”(sin) 또는 “악”(evil)로 번역된다. 다윗은 자신이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야말로 악한 사람이라고 그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흔히 듣는 소위 말하는 고백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욕먹는 정치인과 스포츠인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판단에 오류가 있었다.” “실수였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런 식의 단어를 칭찬하지 않는다. 머핀 반죽에 설탕을 한 컵 대신 두 컵을 넣었다면, 그건 실수이다. 그러나 이웃을 강간하고 그 남편까지 죽이는 것은 악이다.다윗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도 또 하나님 앞에서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주님께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시편 51:1)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을 근거로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다. ESV에서 “변치 않는 사랑”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khesed)이다. 그것은 “언약적 사랑” 또는 “신실한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창세기 15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 자신이 둘로 쪼개진 제물 사이를 통과하며 피의 길을 걸으셨다. 사실상 인간이 저지를 미래의 불순종과 관련된 저주를 스스로 짊어지시겠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그 사건을 기억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이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갔다.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시편 51:4-7)우슬초에 대한 언급은 유월절 이야기에 대한 암시이다.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고 명하신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를 모두 불러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들과 함께 먹을 양이나 염소를 준비하여, 유월절 제물로 잡으십시오. 우슬초 묶음을 구하여다가 그릇에 받아 놓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리십시오. 여러분은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치려고 지나가시다가,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피를 보시고, 그 문 앞을 그냥 지나가실 것이며, 파괴자가 여러분의 집을 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1-23)유월절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양의 피 아래 피난처를 찾은 사람은 누구나 이집트인에게 내려진 심판으로부터 안전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을 위해 유월절의 은혜를 주장하고 있다.“어린 양의 피 아래 나를 숨기소서!”“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좋은 회개이다. 다윗은 끔찍한 죄인이었다.다윗은 강간범이자 살인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동시에 선한 회개자였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자신의 죄를 미워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고 주님께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근거해서 또한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약속을 근거로 다윗은 자비를 구했다.그리고 기적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은혜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추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추악한 죄와 아름다운 구주의 이야기이다. 너무도 정직한 성경 내용에 마음이 상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다 추악하고 비열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잘못된 상황에 처하고 또 잘못된 시기를 만나면, 인간은 누구나 사악하고 악한 일을 할 수 있다.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치유 받을 수 있다. 용서받고 강건해지며 회복될 수 있다. 다윗에게 가능했던 그 은혜의 기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능하다.지금, 죄를 회개하라. 어린양 보혈을 붙잡고 용서를 빌라. 그리하면 구원받을 것이다. 이게 바로 복음이다. 이것이 자비하심이다. 옛 언약이요 또 새 언약이다.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1. Did King David Rape Bathsheba? A Case Study in Narrative Theology in Journal of the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17/2 (Autumn 2006): 81?95. Article copyright ⓒ 2006 by Richard M. Davidson.2. KM Hebrew Dictionary, Accordance Version, H7322.원제: Did King David Rape Bathsheb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대배교에 관해서 알아야 할 열 가지
by Paul Carter
2023-08-10
예수님과 사도들은 재림과 그의 나라가 완전히 완성되기 직전에 일어날 대배교를 예상한 것 같다. 다음은 대배교에 대해 알아야 할 열 가지이다.대배교와 배역은 거의 같은 것이다흔히 감람산 담화로 알려진 마태복음 24장의 중간 부분에서 예수님은 말세에 대규모로 발생할 일종의 배교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10-14)바로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나야 할 “배신”(the rebellion)을 가르친 배경이 된 것 같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우리가 그분 앞에 모이는 일을 두고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영이나 말이나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에 속아서,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데살로니가후서 2:3에서 바울은 “배교” “걸려 넘어짐” “반역” “배신”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헬라어 아포스타시아(apostasia)를 사용한다. 따라서 지금 같은 사건을 놓고 예수님과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배교는 가시 교회 또는 제도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대배교란 기독교 신앙에서 심각하게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불신자들이 일으키는 정부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이전에 믿고 한 형제였던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기독교 신앙과 실천에 대한 반란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개혁파와 복음주의 학자들 대부분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안토니 A. 후크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교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다.”[1]그레고리 빌(G. K. Beale)도 비슷한 말을 했다.“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참된 성도들이 존재하는 가시 교회 공동체가 너무 배교하여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큰소리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교회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공언하겠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참 신자가 아닐 것이다.”[2]대배교는 종말의 방아쇠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마태복음 24장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 모두에서 대배교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10-14)위에 인용된 데살로니가후서 부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일어날 수 없는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데살로니가후서 2:3).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배신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를 설명한다. “그 때에 불법자가 나타날 터인데, 주[예수]께서 그 입김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고, 그 오시는 광경의 광채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따라서 두 기록 모두에서 대배교로 대표되는 불법자의 행동이 주님의 재림 직전에 발생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사실, 예수님은 감람산 말씀에서 하신,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는 진술을 포함하여 다음 구절을 통해서도 그 기간에 일어날 일을 설명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마태복음 24:15-16)종말의 사건은 분명히 일종의 정해진 패턴을 따라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열심히 읽는 성도와 표적 관찰자라면 종말이 가까웠음을 분별하고 적절한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감람산 말씀을 직접적인 맥락에서 보자면야 예루살렘의 포위와 멸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만, 말씀 자체라는 큰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종말을 예고하는 크고 마지막 산고를 예견하도록 돕는 성경 해석에 꼭 필요한 렌즈 역할을 한다. 따라서 대배교 자체와 주인공인 불법자의 행동은 궁극적인 종말 직전에 발생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종말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대배교는 “불법자”와 연관되어 있다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보면 반역은 불법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4)3절에 나오는 “그리고”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학자들과 주석가들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있다. 바울은 반역이 불법자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역이 발생한 와중에 불법자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는 의미일까? 불법자와 반역이라는 사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문법상 의미가 결정적이지 않기에 둘이 별개이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단순하고 안전한 해석일 것이다. 반역의 계절은 단지 한 사람의 행동이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더 넓고 광범위하다. 그러나 그 계절에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들어서는 순간 불법자라는 중요한 인물이 하는 행동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불법자는 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인 것 같다대다수의 저자와 주석가는 “불법자”와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같은 의미로 취급한다. 예를 들어 샘 스톰스(Sam Storm)는 그가 쓴 ‘Kingdom Come’의 17장에 “성경적 종말론의 적그리스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 연구”(The Antichrist in Biblical Eschatology: A Study of 2 Thessalonians 2)라는 제목을 붙였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그 구절에서 바울은 단지 “불법자”만을 언급한다. 그러나 신약학자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스톰스에게도 이 용어는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사도 요한이 유일하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2:18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요한이 말하는 의미는 확실하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항상 우리 가운데에 거할 뿐 아니라 크고 마지막에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의 신비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동시에 또한 위대하고 전형적인 불법자가 미래에 올 것을 말하는 바울과 다르지 않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바울은 특정한 시대의 끝에만 나타날 사람에 대해 쓰고 있다. 불법자는 종말론적 인물이다.”[3]이 두 용어가 다니엘서가 처음으로 소개하는 이야기, 마지막 때에 예언 단계를 성취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항해서 싸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묘사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니엘 7-10장에서 우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인물을 만난다. 그는 요한이 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하고 바울이 불법자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가진 일종의 패턴 또는 “예증된 사례”라는 역할을 한다. 트렘퍼 롱맨 3세(Tremper Longman III)는 그의 다니엘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티오쿠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적그리스도로 이해하던 한 사람의 적절한 상징이 되었다.”[4]다니엘서 7:25은 그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삼 년 반 동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혀도 된다는 광범위한 허가를 받았고 그 기회를 끝까지 다 썼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유대 땅에 헬라식 휴일, 관습 및 법률을 부과함으로 유대 민족의 독특한 종교적 표현을 지우려고 했다. 실로 잔인하고 절박한 계절이었지만 결과는 26-28절에 예언된 그대로였다.“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나 다니엘은 이 생각 때문에 고민하여, 얼굴색이 변하였지만,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다니엘 7:26-27)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언약 백성의 믿음을 말살시키려고 시도하던 중에 하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그의 왕국은 갑자기 붕괴했고, 그의 영토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통치할 성도들에게 넘어간다. 이것이 환상의 끝이다. 마태복음 24:14에 주어진 결말과 도무지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비슷하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로도 알려진 불법자는 다니엘서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통해서 확립한 패턴 그대로 삶과 망상과 타락이라는 단계를 그대로 이행한다. 적그리스도 또는 불법자는 현재 억제되고 있다데살로니가후서 2:7에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신약성경에서 “신비”라는 단어는 나중에 일어나고 나서야 명백해지는 사건, 현재에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고 숨겨진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따라서 바울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어떤 일이 결국에 가서는 훨씬 더 두드러지게 될 것이며 억제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훤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악마는 항상 성육신을 자신의 조잡한 해석으로 훼손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그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사탄의 모든 노력은 실패한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주인공을 아직은 역사의 무대 중앙에 두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사탄의 노력으로 인한 영향력과 활동은 영적 눈을 뜬 사람의 눈에는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레고리 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비록 이 마귀가 아직 역사의 마지막 때에 그렇게 눈에 띄게 오지는 않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속이는 자들, 거짓 선생들을 통해 언약 공동체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5]억제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지금 그것을 억제하는 자”의 정체는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6-7에서 바울은 말한다.“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자가 지금은 억제를 당하고 있지만, 그의 때가 오면 나타날 것입니다.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 혼란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성 및 남성 명사의 비정상적인 사용 때문이다. 6절에서 중성 단어를 사용한 바울이 7절에서는 남성 단어를 썼다. 당신은 “무엇”이 억제하는지 알고 있다. 현재 억제하고 있는 오로지 “그”만이 “그”가 사라질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억제할 것이다. 후자에 나오는 “그”가 진짜 “그”인가 아니면 “그것”인가? 그게 질문의 핵심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주석가가 구속자와 로마 제국을 동일시했다. 테르툴리아누스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는 제국 자체에 초점을 두는 경우에는 “그것”으로, 또는 통치하는 황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는 “그”로 언급할 수 있다고 이해했다. 현대의 주석가들도 보다 일반적인 의미이지만 동일한 견해를 채택한다. 로마 제국이 사라진 현재,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것”을 정부로, “그”를 실제 지도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천사의 힘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다니엘서에서 감지된 유사점에 근거하는 경향이 있다. 다니엘 10장에서 우리는 영적 존재(일부는 천사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성육신한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를 만난다. 그는 또 다른 영적 존재에 의해 대적되고 세 번째 영적 존재인 대천사 미카엘의 도움을 받는데, 그 결과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지상과 천상의 영역에 걸쳐서 영향을 미친다. 다니엘 10:13-14은 이 신성한 존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기록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국의 천사장이 스무하루 동안 내 앞을 막았다. 내가 페르시아에 홀로 남아 있었으므로, 천사장 가운데 하나인 미가엘이 나를 도와주었다. 이제 내가 마지막 때에 네 백성에게 일어날 일을 깨닫게 해주려고 왔다. 이 환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주는 것이다.”다니엘서는 땅에서 발생하는 지정학적 현실이 어떤 면에서 영적 영역에까지 작동한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 역학을 활용해서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의 “그/그것”의 언어를 설명할 수 있다. 천사가 “그”일 수도 있고, 그가 활용하는 어떤 종류의 지상 계획, 공급 또는 능력이 “그것”일 수도 있다.이건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지금 그것을 막는 자”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그는 가죽끈을 잡고 있다. 열고 닫는다. 그리고 그는 죽이기도 하고 살아나게도 한다. 그분은 다양한 대리인과 수단을 통해 일하시지만 완전하고도 전적인 주권자이다. 이사야서 마지막 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문제가 논의될 때, 하나님은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로 내가 아이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낳게 할 수 없겠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아이를 낳게 하는 이가 나이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못 나오게 막겠느냐?” 너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사야 66:9)흥미롭게도 9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ESV에서 “닫다”로 번역되었으며, 문자적으로는 “제지하다”를 의미한다. 히브리어 atzar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이사야 66:9에서 “내가 항상 자제해야 하는가?”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담긴 암묵적인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태를 완전히 여실 것이며 영원 전부터 계획되고 정하신 모든 것이 나올 것이다. 이 구절과 가장 가까운 신약 평행선인 디모데전서 6:14-15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정한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이 구절에서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주님의 날이 언제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분은 언제 예수님을 이 땅에 다시 보내실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는 타임라인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그의 백성들에게 굳이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들 알고 있지?”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결과가 그게 아니었다면, 바울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의 시기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후서 3:9)베드로에 따르면,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무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모든 지연은 복음의 진보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올 것이다. 베드로는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3:15)베드로는 자신이 말하는 포인트가 바울 서신서 속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가정한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바울의 글은 데살로니가후서일 것이다. 억제는 결국 제거될 것이다감람산 말씀의 예수, 데살로니가후서의 바울, 그리고 베드로후서의 베드로까지 예외 없이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모두 구원의 복음이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파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으로 하나님이 이 위대한 마지막 사건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관리 아래에 있다. 그 과업이 완수되면 억제가 풀리고 말세의 대투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마침내 끝이 올 것이다. 신약성경에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깊이 파고들라고 말하는 구절은 없다. 단지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점은 자신들에게 위임된 사명이다. 사도행전 1장에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사도행전 1:6)이건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나쁜 질문이 아니다. 구약의 독자로서 그리고 1세기 유대인으로서 제자들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묘사하신 산고의 궁극적인 지점을 모든 이방인을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재통일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왕국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한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에스겔 37장 마른 뼈들이 소생하는 환상 직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에스겔 37:16-17)일단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온 수단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에 관해서 묻는 것은 큰 비약이 아니다. 오순절 날에 각지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은 구원받았고 성령 충만을 입었다.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완전한 성취를 위한 시간표가 어느 시점에서도 제자들과 공유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시작을 엿볼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살아서 마지막까지 목격할 거라는 약속은 받지 못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불필요한 호기심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의 관심을 당면한 과제로 돌렸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7-8)이스라엘 왕국의 재건을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일을 시작하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가지고 나가라. 지금 논의에 적용해서 볼 때, 우리는 이 거대한 종말론적 사건의 시기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예 묻지 않는 게 좋다는 권고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무법하고 반항적이고 유혹적이며 선동적인 활동을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상 명령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복음을 들을 기회의 창을 열어 두신다는 사실이다. 그 일이 완성됨에 따라, 마귀의 사슬은 더 길어질 것이며 사탄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반역이라는 문이 열릴 것이다. 큰 환난과 박해, 체질의 계절이 시작되고, 그 후에야 비로소 끝이 올 것이다. 불법자가 성도들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기를 높일 것이다우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 불법자가 그에게 주어진 확장된 허가 기간에 어떤 활동을 할지를 예상할 수 있다. 롱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티오쿠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적그리스도라고 아는 한 사람의 적절한 상징이 되었다.”[6]다니엘서 7:25은 그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삼 년 반 동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광범위한 허가를 받았고 그 기회를 끝까지 다 썼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유대 땅에 헬라식 휴일, 관습 및 법률을 부과하려고 했다. 아예 그들이 지켜온 삶의 방식을 지우려고 했다.그는 또한 자기 자신을 충성과 종교적 신앙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려고 시도했다. 다니엘 8:9-11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작은 뿔”이라고 언급한다. “그 가운데의 하나에서 또 다른 뿔 하나가 작게 돋기 시작하였으나 남쪽과 동쪽과 영광스러운 땅 쪽으로 크게 뻗어 나갔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강해지더니, 그 군대와 별 가운데서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았다. 그것이 마치 하늘 군대를 주관하시는 분만큼이나 강해진 듯하더니, 그분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마저 없애 버리고, 그분의 성전도 파괴하였다.”성경 본문은 안티오쿠스가 “지상 수준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하늘 그 자체, 심지어 하늘의 군대와도 전쟁을 벌일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리고 안티오쿠스가 마치 우주적 분쟁에서 라이벌이 되어서 겨루는 것처럼 보이는 하늘 군대를 주관하는 분은 누구인가? 이것은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어떤 이들은 대천사 미가엘을,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영웅인 가브리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우리는 단지 아는 건, 영적 전쟁이 분명히 매우 치열하다는 사실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 지상과 천상의 영역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지고 잠시나마 그 결과는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데살로니가후서 2:4에 나오는 구절과 아주 잘 일치한다. 사도 바울은 불법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바울이 다니엘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 때의 무법자에 대한 그의 묘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역사적 현실에 크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람산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위대한 마지막 사건의 시기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심어놓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마태복음 24:15-16)예수님은 마치 다니엘 이야기가 반복되는 현실을 만난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는 거 같다. 산으로 도망가라!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예수님 자신이 다니엘서 패턴의 반복을 하나의 방아쇠 사건, 특히 그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그게 과연 무엇인지 호기심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다니엘은 이런 식의 표현을 8:13, 9:27, 11:31 그리고 12:11에 걸쳐서 총 네 번 사용한다. 이 표현은 그 자체만으로 해석이 어렵기에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몇 가지 추가 설명을 제공한다. 누가복음 21:20-22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예루살렘이 군대에게 포위 당하는 것을 보거든, 그 도성의 파멸이 가까이 온 줄 알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고, 그 도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고, 산골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그 때가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징벌의 날들이기 때문이다.”누가의 버전에서 예수님은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기 시작할 때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도망가라! 위대한 복수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예루살렘의 멸망을 첫 번째 “큰 환난”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면, 마지막 “큰 환난”에도 동일한 접근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따라서 마태복음 24:15-16에서 방아쇠 사건을 주시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적들에게 온통 둘러싸인 교회를 볼 때, 모두에게 미움받는 교회를 볼 때, 그리고 불법자가 교회의 목을 발로 누르며 마치 교회가 완전히 그의 손에 잡힌 것처럼 보일 때, 도망가라!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이 모두는 데살로니가후서 2:4에서 바울이 불법자가 자신을 높이는 것에 대해 말할 때 필요한 모든 맥락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불법자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일어난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물론 물리적 의미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은 없다. 성전은 주후 70년에 이미 파괴되었는데, 지금 그런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그 부분에 있어서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가 도움이 된다. 그의 말이다. “성전에 앉는 것은 신성한 속성이며, 따라서 자신에게 신성한 영예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7]대부분의 주석가들도 그렇게 이해한다. 프레드릭 F. 브루스(F. F. Bruce)는 이 표현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할 계획을 가진 그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8]이 예언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실제로 물리적인 성전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데살로니가후서 외에 열 번 사용되었으며, 그중 무려 아홉 번은 기독교의 교회를 의미한다. 스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신약의 다른 곳, 특히 바울의 글에서 성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보면 이 단어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유일한 성전 이외의 것을 가리킬 수 없도록 만든다.”[9]따라서 우리는 일단 적그리스도가 겉보기에는 교회를 완전히 자신의 권세 안에 두게 될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게 맞을 거 같다. 그는 우리의 목을 발로 누르기 시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교회가 자신의 신성을 인정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그게 바로 방아쇠 사건이다. 그럴 때는 산으로 도망가야 한다. 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대배교와 불법자는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종말을 맞을 것이다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잠시 동안 하늘의 군대와 경쟁하는 사건 속 인물로 나타났다. 그는 합리적으로 볼 때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고 또 놀라운 힘을 축적했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참혹한 종말을 맞았다. 다니엘 7:26-28은 이렇게 말한다.“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나 다니엘은 이 생각 때문에 고민하여, 얼굴색이 변하였지만,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의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오만하고 불경스러운 원정을 벌이던 기원전 164년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갑작스럽게 질병으로 사망했다.그가 왔다. 그리고 그는 허락받은 일을 했다. 그리고 죽었다.“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다니엘 7:28)이러한 패턴은 우리로 하여금 갑자기 나타난 말세의 불법자가 급속히 세력을 키우고 마귀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다가 파국적으로 멸망할 것을 예상하게 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예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 같다.“그 때에 불법자가 나타날 터인데, 주 [예수]께서 그 입김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고, 그 오시는 광경의 광채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그의 통치는 짧고 잔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끝은 갑작스럽고, 아무도 그의 패망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다니엘 7:27)불법자의 출현이 비록 단기적으로는 끔찍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전조이다. 그가 휘두르는 잔인함과 공포의 통치는 최종적인 체질의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재림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정금처럼 단련하고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대망하는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끔찍한 산고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근심에 잠긴다. 진통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지금 너희가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16:20-22)하나님께 감사하자!1.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153. 2. G. K. Beale, The Temple and the Church’s Mission in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80.3. Leon Morris, The First And Second Epistles To Thessalonians i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221.4. Tremper Longman III, Daniel i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09.5. G. K. Beale, The Temple and the Church’s Mission in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87.6. Tremper Longman III, Daniel i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09.7. Herman Ridderbos as cited in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160.8. F.F. Bruce, 1&2 Thessalonians in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Word Books, 1982), 169.9. Sam Storms, Kingdom Come (Geanies House: Mentor, 2013), 530.원제: 10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Great Apostas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 추구하기, 나의 모든 만족
진짜 보물에 관한 토저의 가르침
by Dieudonne Tamfu
2023-08-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을 보물로 모신 사람, 그분 하나로 온 세상을 다 가진 자로다. 하나님을 통한 영혼의 만족을 아는 사람은 만족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때 텅텅 비어서 갈망으로 가득하던 영혼이 참된 기쁨을 맛보면, 결코 다시는 빈 수조 같았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만족을 동시에 느끼면서 산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그들은 더 이상 주리고 목마르지 않다(요 6:35). 대신 더 간절히 하나님을 갈망하고 목말라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을 구하며 평생을 보낸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충만함을 구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결코 하나님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신자라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더 많이 찾기 위해 성경을 읽고 또 읽는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성경 구절을 암송한다. 우리의 갈망은 단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기쁨을 다시 경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으로 날마다 새로운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똑같은 복용량으로는 처음에 느꼈던 즐거움을 맛볼 수 없기에 점점 더 양을 늘리는 마약 중독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산의 아름다움을 더 맛보기 위해 매 순간 더 높이 오르는 등산가이다. 토저와 함께 하나님 추구하기내가 막 신학 공부를 시작한 2002년, 1963년에 죽은 A. W. 토저가 나를 제자 삼기 위해서 다시 살아났다. 어릴 때 나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부는 어쩔 수 없을 때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회심시키셨고, 그때부터 나는 성경을 폭넓게 읽기 시작했다. 나의 첫 성경 NIV 검은색 양장본은 수도 없이 많은 밑줄과 하이라이트 별표로 가득하다. 그 후 나는 다양한 독서를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한 여정에 푹 빠졌다. 특히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알아가는 여정은 황홀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내가 누군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누군가를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또 누군가를 아버지처럼 대할 수 있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2002년, 성경 외에 나는 다른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나는 우연히 A. W. 토저가 쓴 하나님을 추구함을 만났다. 얼마 읽지 않아서 다음 구절을 만났다. 현대 과학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경이로움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잃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거의 잊고 있다. … 한 인격을 제대로 아는 게 단지 한 번의 만남으로 가능하지 않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두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는, 길고도 사랑스러운 정신의 교제를 거친 후에야 가능하다. (23)나는 인생이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한 번 만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을 계속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갈망을 온전히 채워 주신다. 신학 과정에서 하나님 추구하기토저 덕분에 신학을 하는 내내 내 목포는 오로지 하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싶었다. 하나님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누리고 싶었다.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위해서 불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토저의 생각이 옳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졌다. 세상은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다양한 출처를 제시하지만,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만족의 근원이심을 선포한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저에게 주님을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출 33:18)라고 끊임없이 부르짖는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오로지 “한 가지”만 구한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 27:4). 바울처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을 삶의 유일한 과제로 삼는다(빌 3:10). 영생을 정의하는 건 길이가 아니라 내용이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그리스도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는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라고 쓴 아우구스티누스도 바울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서 가장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아직도 그리스도를 만난 적 없다는 의미이다. 주님을 향한 굶주림을 모르는 영혼은 아직 생명의 떡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선교로 하나님을 추구하기하나님께서 나를 카메룬에서 미네소타로 옮겨서 공부하게 하셨을 때, 나는 더 부유한 나라가 가져다주는 유혹을 예리하게 느꼈다. 그래서 일기에 기도를 기록했다.주님, 제가 주님을 더 잘 볼 수 있는 정도까지만 이 도시와 미국의 아름다움을 감사하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저를 도우소서. 미국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 영광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제 눈을 세상에서 돌려 온전히 주님께만 향하게 하소서. … 오로지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의미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더 그리스도를 닮게 하소서. 미국인 같이 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소서. 미국은 그냥 미국일 뿐입니다. 주여, 예수님만이 지금도 또 앞으로도 영원히 나의 모든 만족이요 기쁨의 원천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유학 전보다 더 하나님을 기뻐하고 만족하게 되었다. 이후에 하나님은 교회 개척과 신학 훈련을 위해 나를 카메룬으로 옮기셨고, 다른 사람들도 오로지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는 똑같은 경험을 돕는 데에 도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의 그 어떤 보물도 그리스도만이 주시는 기쁨을 전하는 나를 막지 못했다. 하나님은 나를 오로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하셨다. 나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했다. 하나님은 내가 미국의 쾌락을 버릴 수 있도록 나를 자유롭게 하셨다.모든 만족, 모든 기쁨, 모든 즐거움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맛본 자유를 토저도 맛보았다. 하나님을 보물로 모신 사람, 그분 하나로 온 세상을 다 가진 자이다. 세상의 수많은 평범한 보물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설혹 그것들을 손에 쥔다고 해도, 그로 인한 기쁨은 너무도 소소해서 그의 행복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것들이 하나씩 사라진다고 해도, 그는 거의 상실감 자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한 분으로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잃더라도, 실제로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순전히 합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모든 것을 하나님 한 분으로 다 가진 사람이기에. (28)이런 자유를 원하지 않는가? 당신에게 이런 만족을 바라는 갈망이 있는가? 어떤 어려움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보물이 주시는 기쁨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계속해서 그분을 추구하라. 당신이 현재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도 희망이 있을까? 그렇다. 언제나 희망은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 이렇게 기도하자.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시편 90:14)주님의 백성이 주님을 기뻐하도록 우리를 되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85:6)당신은 확신을 품고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이사야 57:15)하나님을 가장 큰 보물로 삼자. 그러면 그 어떤 상실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큰 보물로 삼자.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 버리는 능력을 얻을 것이다. 소유물은 더 이상 사슬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궁극의 보물을 즐기게 하는 통로로 바뀐다. 꿈과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라는 고통조차도 소망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 이제 모든 즐거움, 모든 만족, 그리고 모든 욕망까지도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안에서 온전하게 소유하게 된다. 원제: My Satisfied Seeking of God: What Tozer Taught Me About Treasur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디모데전서 2:12은 정확히 무엇을 가르치는가?
by Robert W. Yarbrough
2023-08-03
편집자 주: 교회 안에서 자주 오해되는 성 역할이라는 주제를 기사 하나로 제대로 다루는 건 불가능합니다. 유익한 “성경 전체”의 설명이 궁금하다면, “아름다운 차이: (성경 전체에 걸친)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12을 지역 교회에 적용하기란 정말 까다롭다. 바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물론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쓰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 말에 사도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또 이 말이 갈라디아서 3:28(“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과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교회 봉사와 성별은 무관하다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을 견지하는 교회(complementarian church), 즉 자격을 갖춘 남자에게만 목사 안수를 주는 교회에 출석하는 경건한 여성이 디모데전서 2:12을 보고서 이런 궁금증을 갖는다고 가정해 보자.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녀는 과연 어떤 결론을 무엇을 근거로 내려야 할까? 이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10절)가 배워야 하는 것들(11절)의 맥락에서 좋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 들어 있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울이 오랜 동료인 디모데에게 목사의 중요한 책임들을 요약하는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1)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육한 것처럼, 충실한 성경 해석을 통한 가르침, (2) 예수님이 추종자들을 돌보고 또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방한 것처럼, 자비로운 감독과 목양(예: 벧전 5:1-5).디모데전서 2:12의 적용을 간략하게 다루는 정도로는 전체 문맥에 비춰서 바라봐야 하는 이 구절에 대한 완전한 설명에 이를 수 없다. 나도 이 주제를 다루었고(‘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137-89), 이 사이트에서도 평등주의에 기반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의 글을 포함해서 여러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설명조차도 위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성경의 난해 구절을 그 구절만으로 완전하게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한 구절이 주장하는 바는 그 구절에 빛을 비추는 구절들로 이루어진 더 큰 집합의 일부이다. 성경 전체라는 맥락에서 우리가 디모데전서 2:12에서 만나는 것은 경건한 여인에게 주는 교훈이다. 경건한 여인, 곧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데 헌신하는 여인이다. 그녀에게 추구하라고, 그리고 피하라고 권하는 몇 가지가 있다.경건한 여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추구”라는 측면에서 다음 것들이 있다. 1. 여성은 남성과 나란히 완전한 존엄성을 확보해야 한다(창 1:27).2. 여성은 남자의 특징을 보완하고(창 2:18) 출산을 통해 인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창 1:28) 성적 특징을 확증해야 한다. 3. 여성은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징벌적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속적) 영향을 미치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창 3:14-19).4. 여성은 개인적 죄와 공동의 죄를 의식하면서 엘리사벳과 마리아, 여선지자 안나와 같은 믿음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오심에 담긴 기쁜 소식을 보아야 한다(눅 1-2장).5.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후(막 1:15), 여성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눅 8:3),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고(막 15:40-41), 제자들이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간증하고(눅 24:10-11), 그 이후로도 초대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긴 많은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장은 뵈베, 브리스가, 마리아, 루포의 어머니, 드루배나, 드루보사, 유니아 같은 이름으로 채워져 있다.)신약 전체에서 성도에게 확신을 주고 그들을 인도하는 데에 대한 통찰은 결코 여자로부터 고립된 남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과 바울과 같은 지도자들은 여성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여성의 은사를 확인했으며, 그 은사를 활용해서 교회와 세상에서 복음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를 세워나갔다. 6. 마지막으로, 여성의 위치는 열두 제자를 오로지 남자로만 뽑은 예수님의 선택, 그리고 오로지 경건한 남자만 목회 교사와 감독의 위치에 임명하는 사도적 정책(신약 전체에 걸쳐서 통일되게 진술되는 사실) 속에 반영된 회중 질서 속에서 확인해야 한다. 이 점은 우리를 다시 디모데전서 2:12로 돌아가게 한다. 경건한 여인(2:10)은 예배 현장에서 배움에 헌신하라는 권면을 받았다(2:11). 그녀에게는 목회 교육(“가르치다”)과 감독(“권위를 행사하다”)의 역할이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건한 여인과 아내라면 자연스럽게 목양에 참여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니, 최소한 그래야 한다. 안수받은 남자들은 교인들을 향한 특정한 책임을 맡으며 교인 가운데 있는 여인들의 지혜로부터 유익을 얻는다. 목회자와 여성 사이에 건전한 관계가 있다면, 목회자가 자매들의 관심과 의견을 그들의 기도와 봉사와 지도력 측정에 반영할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그 모든 내용을 마음에 간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운영되지 않는다면, 교회에는 기능 장애가 발생하고 그에 따른 조정이 필요하다. 더 나은 목회 관행과 영적 갱신, 남편과 아내가 결혼 생활에서 경건한 역동성을 추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 교회 전체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앙금을 해소하고 유대를 강화하는 등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경건한 여인이 피해야 하는 것 디모데전서 2:12은 경건한 여자에게 무엇을 피하라고 권고하는가? 노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서구 환경에서 남자에게만 주어진 특정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개심을 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외 없이 수행해야 하는 제자 양육의 명령에는 여성도 최선을 다해서 충성해야 하지만(마 28:19-20), 성경을 가르치고 또 권면하는 목회 교육에 해당하는 의무는 교회에서 맡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자는 설교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서 교회의 구조와 관계없이 남자를 목회 감독해서도 안 된다. 제자 사역에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은 여자는 (믿는 모든 여자가 다 그렇겠지만) 얼마든지 그들의 보살핌과 영향력이 필요한 다른 여자들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원칙이 교인 전체의 행정에서 여성의 지도력을 배제하는 건 아니다. 종종 전체 목회자가 전체 교인 구조라는 틀 안에서 천재성을 가진 여성 행정가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 행정가는 목회자가 아니다. 역할이 서로 얽혀 있을 수 있지만 병합되거나 역전되어서는 안 된다. 겹칠 수는 있으나 같지 않은 사역의 영역짧은 글에서 너무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기란 어렵고 또 현명하지도 않다. 교단 관행과 회중 역학은 매우 다양하며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적용 범위에 따라서 주의 깊게 보완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 사도를 거쳐 초대교회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여성이 아닌 남성(비록 과분한 역할이기는 하나)이 목회자로 임명받은 사실을 확인한다. 여성들은 사생활에서부터 회중의 모든 활동과 이웃사랑,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에 이르기까지 경건한 봉사라는 측면에서 남자와 여러 영역에서 중복된다. 그러나 여자의 사명은 남성과 동일하지 않다. 개인 생활과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누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여성과 남성이 함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달콤한 시너지 효과에 달려있다. 여자와 남자의 상생 효과를 일으키는 목회 지도력은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서 상호 증진과 상호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세우려는 교회에 임하시길 기도한다. 디모데전서 2:12이 교회가 나아가는 길에 선한 빛을 비추시기를 기도한다. 원제: What Exactly Does 1 Timothy 2:12 Tea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몇 명이었을까?
by Philip Ryken
2023-07-29
성경은 이집트 탈출을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런데도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근거는 자주 도전 받는다. 출애굽기 12장 내용을 놓고 가장 흔히 맞닥뜨리는 반론은 출애굽의 규모이다. 이건 대답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으로 갔는데, 딸린 아이들 외에, 장정만 해도 육십만 가량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다른 여러 민족들이 많이 그들을 따라 나섰고, 양과 소 등 수많은 집짐승 떼가 그들을 따랐다”(출 12:37-38). 이 기록에는 훌륭한 역사가라면 누구라도 빠트리지 않을 육하원칙에 입각하는 정보가 제대로 들어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건 ‘몇 명인가?’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는 것을 정말로 믿을 수 있는가?좋은 질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일반적인 답변이 있다.답 1: 부풀려진 숫자다남자가 600,000명이라면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 200만 정도였을 거다. 이 숫자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렇게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빠져나갔는데, 왜 이집트 역사에는 전혀 거기에 관한 언급이 없을까? 게다가 이만하면, 이스라엘은 당대의 세계에서 가장 큰 인구를 자랑하는 민족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고센 땅이 과연 이 정도 인구를 먹어 살릴 수 있었을까? 게다가 왜 우리는 시나이반도에서 그들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걸까?출애굽은 세계 역사에서 발생한 최대 인구이동 중 하나였다. 이동하고 있을 그들은 15킬로미터가 넘는 긴 줄을 형성했을 것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런 문제점들을 제기하면서, 성경 저자가 숫자를 부풀렸다고 결론을 내린다. 드라이버(S. R. Driver)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규모가 크게 과장되는 전통이 세월이 흐르면서 형성되었다”라고 썼다. 스나이드(N. H. Snaith)는 전체 숫자를 놓고 “환상적이고 또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답 2: 글자 그대로부풀려진 숫자라는 이의 제기를 처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성경이 참으로 600,000명이라는 숫자의 이스라엘 사람(여성과 어린이 포함)이 이집트를 빠져나왔다고 말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어려움을 느끼는 학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이집트 역사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 건, 그들이 단지 노예였고 또 그들의 탈출 방식이 이집트인들에게 워낙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시나이반도에 증거가 별로 없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유목민이었고, 그 유해는 3,000년 동안 모래로 덮여 있었다. 또한 600,000을 숫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가지 타당한 이유는, 이것이 출애굽기 다른 내용(출 38:26) 및 민수기의 내용(민 1:46; 2:32; 26:51)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답 3: 천이라는 숫자는 ‘씨족’을 의미성경 본문에 충실한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히브리어 엘레프(eleph)는 “천”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약 초기에는 상당한 규모의 무리를 가리키는 부정확한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가 ‘씨족’(clan)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는 소대와 같은 전투 부대를 가리키는 군사 용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12:37은 이렇게 읽어도 된다. “600개의 씨족이 있었다.” 또는 “600개 정도의 군사 단위가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인구는 수백만이 아니라 수만 정도였을 것이다. 제임스 호프마이어도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출애굽기 12:37의 쟁점은 해석의 문제이다. 엘레프라는 단어는 “천”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씨족” 또는 “군대 단위”로도 번역된다. 이집트 학자로서 이 질문을 볼 때, 이집트 제국의 전성기에 이집트 군대의 총인원은 20,000명 정도였다. 그리고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아이성 전투에서 전사한 36명은 이스라엘로서는 심각한 군사적 실패였다. 정말로 600,000명의 군대가 있었다면, 그 정도 숫자가 죽는 건 별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성경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말이다. “주님의 모든 군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출 12:41).원제: How Many Israelites Exited Egyp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출애굽
바른 신학 없이는 온전한 제자 될 수 없다
by Jen Wilkin·J. T. English
2023-07-27
마태복음 28장의 가서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는 보통 전도의 관점에서 받아들인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담은 소책자를 들고 세상에 흩어져서 전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상한다. 복음을 받아들여 기쁨에 넘치는 회심자들이 희열에 차서 세례를 받는 장면도 떠오른다. 그다음은 뭘까? 제자들의 전도를 받아 전도자가 된 그들이 여러 도시를 이동한다. 말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를 거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대사명에 대한 이해가 단지 전도에 대한 부르심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다. 바로 신학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회심하라는 부르심이 아니라 제자 삼으라는 부르심이다. 이 부분에 대한 대사명의 내용은 분명하다. 개종자들에게 “예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마 28:20) 가르치라고 요구한다. 제자도라는 측면에서, 믿음의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교리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교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회심은 순식간에 벌어지는 사건이다. 반면에 교리를 실천하는 제자도는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그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통 신앙을 포함한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통계 지표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2022년, Lifeway Research와 Ligonier Ministries는 “신학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를 대상으로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 즉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는 본질적인 믿음에 대한 이해도를 조사했다. 비그리스도인들의 결과는 예상대로 암울했지만, 정작 놀라운 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내어놓은 답변이었다. • 복음주의자의 48퍼센트가 “하나님은 다양한 상황을 접하면 거기에 맞게 학습하고 적응한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65퍼센트가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태어났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56퍼센트가 “하나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예배를 받아들이신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43퍼센트가 “예수님이 훌륭한 선생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었다”에 동의했다. 이 통계를 한번 곰곰이 숙고해보라.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앙의 핵심 신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신념에 자신의 생명을 걸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그들은 기본적인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신학 지식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는 게 조사 결과이다. 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개종자는 만들고 있는지 몰라도 제자는 기르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제자가 배우는 사람이라면 제자 삼는 사람은 선생이다. 그러나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달받지 않은 것을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을 먼저 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에서 결코 다른 누구에게 신앙의 기본 신념을 가르치려는 열망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럼 우리는 왜 그러지 않는 걸까? 교리 학습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뭘까? 다음 거짓말 중 하나를 믿기 때문이다. 거짓말 1. 신학은 학문의 영역이다.때때로 신학은 지나치게 학문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접근 불가라는 의미는 아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평신도라면 결코 하지 않을 수준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우리 모두가 신학을 기피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중 응용 수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기초 수준 이상으로 수학을 학습하면 일상생활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신학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교리는 모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 부모, 젊은 전문직 종사자,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 또는 검정 고시를 친 사람을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 거짓말 2. 신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누구라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삶을 바치고 싶어 한다. 지지하는 명분, 정치 신념, 심지어 좋아하는 스포츠팀에 사람들이 얼마나 열정적인지 살펴보라. 우리는 모두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 신학이 하나님을 설명하는 말이고, 하나님은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존재, 즉 궁극의 실재라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주제가 또 있을까? 그리고 이보다 더 실용적인 게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우리의 삶을 그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 신학이라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제대로 사는 삶보다 더 실용적인 것은 없다. 신학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나님이 준비시킨 수단이다.거짓말 3. 신학에는 감정이 없다.신학이 감정이 아니라 지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움직이는 게 신학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를 목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롬 12:2).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결코 차갑게 죽어서 먼지투성이로 남는 지식 유희가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과 열정만 남아서 이성적인 믿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마음만의 종교도 아니다.제대로 된 성경적인 신학은 지성을 숭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성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지식 활동에만 머무르는 신학은 실패한 신학이다. 활기찬 지성의 활동으로 마음에 뜨거운 연료를 공급하는 신학이 바른 신학이다. 이성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이성에 어휘와 비전을 부여하는 신앙생활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생각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깊은 느낌이라는 결과를 낳아야 한다. 송영(예배)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학은 헛된 지식 추구에 불과하다. 살아 숨 쉬는 신학: 제자도의 열쇠그렇다면 신학은 학문의 영역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신학은 모든 제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신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실제적인 일이다. 신학은 감정이 부족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참된 신학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도록 인도한다. 신학은 지적 수준뿐 아니라 정서적이고 실제적 수준에서 우리를 형성하기에 중요하다. 신학은 우리 삶에 총체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수준이 높아갈수록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고, 또 다르게 행동한다. 신학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학은 누가 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이다. 설교하고, 기도하고, 또 찬양할 때도 우리는 신학을 한다. 직장에 가고, 휴가를 떠나고, 연로한 부모를 돌보고, 죄와 싸우고, 자녀를 키우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애도할 때도, 돈을 쓰고 늙어갈 때도 우리는 신학을 한다. 신학이 왜 중요한가? 잘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사는 것이야말로 제자도의 핵심이다. 원제: Theology: The Missing Piece in Disciplesh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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