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성경과 신학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고난을 이겨낼 때 필요한 교훈
by Marshall Segal
2020-05-18
고난을 잘 이겨내는 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돈 카슨(Don Carson) 교수는 “크리스천이 감당 못할 정도로 슬퍼하고 혼돈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의 기대 수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고통과 악의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우리 스스로가 비극에 당면하기 전까지는 결코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라고도 말했다(‘How Long O Lord?’, 11).이 세상 그 누구도 인내를 가지고 점점 더 집요하게 하나님을 찾지 않는 한 슬픔에 빠져 있으면서 동시에 “항상 기뻐하는”(고후 6:10),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질 수는 없다. 고난을 잘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폭풍이 밀려올 때 어디에 서서, 어디를 봐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리고 고난이 오기 전에 미리 배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왜 내게 고난이 닥치는 건지, 모든 대답을 다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 알고 싶다고 해도 결코 알 수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몇 개 되지 않지만 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고 신앙의 선배 또는 동료가 고난 속에서 걸어갔던, 그래서 이미 그 효과가 증명된 길이다.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필요한 세 가지 교훈베드로 사도는 크리스천이 고난을 잘 이겨내도록 돕기 위해서, 고난 극복에 필요한 여러 교훈을 담은 베드로전서를 썼다. 물론 그들이 당한 고난이 반드시 모든 크리스천에게 다 해당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 사는 많은 크리스천은 이런저런 고난 속에 있고, 또 베드로전서가 담고 있는 지혜와 희망은 오늘날에도 그들에게 강력한 능력을 발휘한다. 지금부터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능력, 안정감 그리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 가지 길을 알아보도록 하자.1.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하라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제대로 경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천국에서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비춰서 이 땅에서 만나는 고난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베드로전서 1장 6절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고난받는 이들의 고난에 공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고난받는 이들이 이 땅이 아닌 천국을 바라보게 한다. 고난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우리가 여기서 겪는 모든 고통이 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또 우리 존재가 겪는 모든 경험이 다 이 고난의 순간 속에서 농축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고난은 결코 이 세상의 전부(ultimate)가 아님도 알고 있다. 고난은 여간해서 죽는 날까지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이라면, 고통이라는 놈이 언젠가는 순식간에 종말을 맞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즉, 천국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고난을 전혀 다른 태도로 맞을 수 있게 된다. 랜디 알콘(Randy Alcorn)도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최근에는 암에 걸린 부인과 함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천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함으로 그 부부는 지금 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고 있다. 천국을 바라본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고통을 경감시키고 또 고통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한다. 천국에 관해 명상하는 것은 고통을 이겨내는 위대한 진통제다. 천국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이 단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우리의 존재는 고통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통과 죽음은 단지 끝없는 즐거움으로 가득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관문일 뿐이다(‘헤븐-천국은 이런 곳이다’, 460).“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전 5:10–11).천국은 당신이 잃은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천국에서 당신은 더이상 아무 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천국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땅에서 당신을 통해서 시작하고 또 만들어 가신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똑바로 알게 할 것이다. 천국에서 당신은 약하다고 느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될 것이다. 천국은 당신을 온전히 세울 뿐 아니라 아무런 고통 없이, 오로지 전율만을 주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히 죄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당신이 이 땅에서 아주 잠깐 고난을 겪은 후에 만날 현실이다. 2. 연단의 소중함을 깨달으라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슬퍼하지만 그럼에도 기뻐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난 속에 감춰놓은 선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한, 이렇게 고백하는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연단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면서 과연 고난이 주는 진정한 기쁨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고난은 다른 축복을 앗아감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볼 수 있도록 한다. 교묘하게 하나님 대신 피난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이 무엇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육신의 소욕과 타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자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에서 떨어져 나오고 있는가(마 7:13-14)? 그런 가운데서 고난의 그림자는 그 어떤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성화로 가는 긴 길에 빛을 비춘다.사탄은 고난이 안개와 같이 걷히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맴돌기를 원한다. 사탄은 고난이라는 안개가 우리 눈을 어둡게 함으로 거룩을 향한 우리의 싸움 가운데 지속적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죄악을 보지 못하길 원한다. 사탄은 또한 우리가 계속해서 고난이라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이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또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단의 불이 되길 원한다. 3. 그럴수록 서로에게 더 의지하라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고, 오늘이 우리 삶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또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로부터 고립되게 만들어 점점 더 나는 혼자라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벧전 4:8). 고난을 당하면 약하다고 느끼기 쉽다. 고립은 그럴듯하게 보여도 결코 자기 보호가 아니다. 고난 속에서는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고 봉사하기도 힘들다고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만약에 고난이 당신을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든다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누구나 다 도망치고 싶고 또 자기 자신의 슬픔과 치유에만 집중하고 싶은 충동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고, 강하게 하고, 또 치유하신다. 그것도 모퉁이 조각이 아니라 몸 전체의 일부로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을 의지하도록 하라. 스스로가 약하고 지쳤다고 느낄수록 더더욱 그래야 한다.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베드로 사도의 편지를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이다.“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 3:8).“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 4:9).고난이 찾아올 때 누구나 다 기운이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사랑한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내 힘을 의지하는 사랑은, 약할수록 우리를 더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결코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고후 12:9). 고난이 찾아올 때, 그래서 당신이 약해지고 완전히 지쳤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사용함으로써 새롭고 더 의미있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기를 기대하라.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그리스도 안에 거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난을 받는 것 같아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1세기에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베드로가 이런 글을 쓴 이후에 지금 당신처럼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중국에서는 갑자기 교회가 문을 닫고, 믿는 이들이 매를 맞는다. 또 이라크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으로부터 절연을 당하며, 케냐에서는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크리스천이 죽임을 당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성도들의 군대를 바라봄으로, 바다 건너 또 수 세기에 걸쳐서 우리가 겪는 고난 보다 더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항상 함께 하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했던 그들을 바라봄으로, 우리도 넉넉히 고난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 당신은 단지 고난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이들이 고백하는 간증뿐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사 당신을 위해서 대신 고난받게 한 하나님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1, 24). 그는 당신을 고치기 위해 상함을 입었다. 그를 십자가에 박은 못은 이제 천국에서 당신의 위치를 보장하는 증표가 되었다. 당신을 위해 흘린 그의 눈물은 이제 당신이 받고 있는 고난 속에서 의미를, 희망을, 아니 심지어 기쁨까지도 찾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의 피는 당신에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족을 가져다주었고, 결코 잴 수 없는 놀라운 사랑으로 그 모든 이를 하나로 묶었다. 그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넉넉히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친히 고난을 당했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w to Suffer Well: Three Ways to Prepare Now번역: 무제
베드로전서
랜디알콘
돈카슨
신학
신약성경
고난
예수님, 쉐마, 그리고 영광스런 삼위일체
by Scott Redd
2020-05-15
흔히 쉐마로 불리는 신명기 6장 4절에서 5절(4절의 첫 히브리어의 뜻은 “들으라!”다)은 모세에 의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어진 과거의 언약(old covenant)을 설명하는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이 본문은 신약 시대에도 중요하게 취급되었는데, 다른 이들과 나눈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그 중요성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마 22:36-40; 막 12:28-34; 눅 10:25-28).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쉐마를 향해 귀를 열어 놓고 신약을 읽는 사람이라면,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도 이 쉐마를 언급하는 곳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6절에서 바로 이 쉐마의 의미를 발전시킨다. 다름 아니라, 그는 신명기가 쉐마를 통해서 분명하게 선포하는 사실, “하나님이 한 분이다”라는 메시지는 삼위일체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바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God)과 “주”(Lord)를 사용함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두 위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성령님까지 이 쉐마의 공식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되심 안에서 성령님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바울은 지금 쉐마가 기독교 복음에 의해 쓸모 없게 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늘나라에서 삼위일체로 아버지와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령님의 충만이라는 측면까지 고려하여 바로 이 쉐마의 가르침을 지키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쉐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신약 성경에서 쉐마에 관한 가장 광범위한 신학적 읽기와 설명은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대제사장 기도(요 17:20-26)의 피날레에서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는 그의 백성과 관련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그의 백성의 정체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쉐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된 그의 백성들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이 온전히 드러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1절에서 요약된, 이 구절 전체를 관통하는 논리에 주목하라.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삼위일체의 제1위격과 제2위격의 단일성은 실제로 하나됨에 필요한 근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인간의 온전함(wholeness)에 대한 근거까지 제공한다. 그리스도는 지금 당신의 백성들이 그분 자신과 실질적으로 연합함으로 삼위일체가 누리는 사랑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는 성령님의 내주에 의해 이런 연합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됨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이 기도가 말하는 하나됨과 온전하게 됨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신약 학자인 리차드 보컴(Richard Bauckham)의 설명은 이 질문에 도움을 준다. 그는 요한복음이 다루고 있는 ‘하나됨’이라는 주제는 ‘하나’라는 의미 속에 두 가지의 다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로 ‘하나’는 고유성 또는 독특성(uniqueness)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것은 쉐마의 가르침에서 첫 부분이 바로 여기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신 6:4-9). 하나님은 한 분이고 그렇기에 그는 고유하고 독특하다. 그는 다른 어떤 것과도 달리 오로지 홀로 계신 존재다. 하나님의 독창성에 관한 이런 가르침은 신약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도 쉐마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그럼 세 위격이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이 한 분일 수 있는가? 보컴은 요한복음 17장 주석에서 그 부분을 다루고 있다. 주석가들은 여기서 쉐마가 암시하는 바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하나’라는 단어 때문에 쉐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교제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신의 독특함은 다름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뤄지는 교통에 있다고 예수님은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식의 하나됨에 대한 주장, 하나님 안에서 형성된 공동체로 인한 하나됨의 주장은 초기 유대교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Richard Bauckham, ‘Gospel of Glory’ in Richard Hays, ‘Reading Backwards’를 참조하라).그러나 하나됨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하나는 사물이나 사람의 통일된 특성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쉐마의 두 번째 부분에서 하나님 백성의 통일된 온전함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의미인 것 같다. 그들의 마음과 영혼과 힘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가 되었다. 보컴은 이런 식으로 하나가 된 백성의 사례가 구약 성경 속에는 여러 번 등장한다고 지적한다(사 45:20; 겔 34:23; 37:15-24; 미 2:12; 호 1:11). 그러한 하나됨의 개념은 쿰란과 그 주변의 유대 사막 종파 공동체에도 존재했으며, 이들은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됨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인 예하드(yehad)라고 불렸다(미 2:12). 예하드는 종종 ‘커뮤니티’라는 영어 단어로 번역되는데, 그 어원 역시 하나됨 또는 단일성이라는 개념을 반영한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기도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통일된 공동체가 회복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과 백성들과의 연합이야말로 그의 백성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현실, 서로 사랑할 때에만 가능한 통일됨의 기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일부로서 그의 위치와 또한 그의 백성과의 연합으로 인해,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세 위격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더 나은 일치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모세의 언약보다 더 크고 더 나은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대제사장 기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모세의 쉐마를 역방향(read backwards)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신명기 6장에 등장하는 온전함과 사랑에 대한 부르심은 그 자체로는 실패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부르심은 새 언약을 통해서 더 개선되고 더 명확해진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분과 우리의 연합을 이루었고 또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하는 하나됨 속에 참여하게 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신명기의 쉐마가 언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엇이 부족한지를 보게 된다. 그렇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하나님이자 또한 우리와 하나된 주님의 성품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으로 흘러넘친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성품이 요구하는 수준에 맞게 우리 주님을 바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통해서 말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고전 12:3),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주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천명한 목표를 명심해야 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2–23).우리가 사랑의 목표, 즉 텔로스(telos, 헬라어로 ‘목표’를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사랑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목표도 삼위일체라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어 그들의 사랑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를 기도했다. 쉐마에서도 하나님 백성의 사랑은 개인적인 노력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해 선포되는 선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우리의 목표는 성령님 안에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 세상이 알도록 하는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Jesus, the Shema, and the Glorious Trinity번역: 무제
삼위일체
쉐마
리차드보컴
새언약
복음
예수그리스도
대제사장
요한복음
연합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과 복음
by 노승수
2020-05-12
개혁주의는 항상 율법주의라는 부작용에 노출되어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속 교리도 형벌적 대속 교리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했다는 것이 이 교리의 근간이며 받아야 할 이 형벌에는 율법이 전제되어 있다. 이처럼 율법 이해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개혁파 교리의 근간이다. 그러다 보니 율법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언제라도 율법주의가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심지어 복음의 핵심을 전달받은 갈라디아 교회도 쉽게 복음의 정수로부터 벗어나 율법주의에 미혹된 것을 보면 아마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겪는 피할 수 없는 함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렇게 빗겨가기 힘든 함정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신자의 삶을 파고들까? 역설적이게도 율법에 순종하길 멈추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자라기 시작한다. 더 정확하게는 율법의 기준을 낮추거나 변화시켜서 적절하게 타협하는 순간부터 발생한다. 그럼 이런 종류의 타협은 왜 발생할까? 신자가 처음 예수를 믿고 기쁨에 젖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적인 죄에 노출되면서 몇 가지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자신이 쓰레기 같다는 느낌이 들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자신을 주님이 용서하지 않을 거 같고 그렇게 주님 앞에 서기에 자신이 너무 염치가 없어 보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자기 상황을 정당화해 줄 어떤 해석이나 방식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이제 막 예수를 믿고 감격해하는 십 대 청소년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자. 말씀을 듣고 피 끓는 십대 청소년은 자위행위에 죄책감을 깊이 느끼고 있다. 사실 그 전에도 자위행위를 하고 밀려오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오랜 기간 말 못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예수 믿는 기쁨도 잠시 이 반복되는 죄 때문에 고통을 받기 시작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줄 합리적인 답들을 인터넷을 뒤지면서 찾기 시작한다. “자위는 해도 괜찮다.” “자위는 죄다.” 등의 조언들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그중에 더러는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자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답으로 선택한다. 이것을 답으로 취하고 자위를 정당화하지만 여전히 자위행위 후에 밀려오는 죄책감과 수치심은 당황스럽다. 여기서 문제는 자위행위 자체에 있지 않다. 그 후에 밀려드는 죄책감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밀려드는 죄책감은 율법을 의식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율법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의 문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너무 쉽사리 조언한다. 예수를 믿고 은혜 받았다면 어떻게 참 신자에게 그런 게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설교라도 듣는 날에는 내 신자 됨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기도 한다.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의 문제란 율법이 본질적으로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는 전제가 몇 개 깔려 있는데 율법의 죄를 드러낼 때,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이유는 “내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 혹은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전적 부패 교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그런 죄가 드러난 상황에 이것을 예수께 가지고 가기보다 자기 안에 촉발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무마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율법의 행위’다. 할례와 같은 의식적 제의를 다 함으로 자기 죄를 덮고 그것을 자기 긍지나 자부심으로 가지고 오는 심리적 태도가 나타난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자기 의’라고 표현했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의미 있는 사람이고 싶고 인정받는 사람이고 싶다. 이런 심리적 욕구들은 자연스러운 욕구다. 이것은 아주 어렸을 때, 아이가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시기부터 있어 온 것이다. 어른이 된 후에도 이 기제는 계속 반복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명품가방을, 남성들이 좋은 차를 선호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부럽게 쳐다보며 인정의 눈길을 주는 것을 통해서 그런 명품과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따면, 마치 내가 뭔가를 해낸 것처럼 내 긍지가 올라가는 것과 같다. 흔히 ‘국뽕’이라는 높은 가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았는데 자기는 뭔가 딱히 한 것이 없었다. 그럴 때 거짓 선생들이 와서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런 높은 가치와의 동일시를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로 율법의 행위를 취함으로 ‘자기 의’를 얻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동일시는 자기 위안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신칭의라는 근본적 믿음의 도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행동들은 율법을 한갓 의식적 제례로 전락시켜버린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더 강화시키는 해석을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첫째, 원래 율법이 그런 요구를 하며 하나님의 통치는 도덕적 통치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 율법의 그와 같은 요구를 명백히 드러냄으로 우리가 거기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 존재이며 그러기에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역설적이게도 율법에 순종하길 멈출 때, 우리는 스스로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순종하려고 할 때만 우리가 스스로 순종할 수 없는 무능력과 전적 부패를 자각할 수 있다. 순종이 멈추면 외식이 시작되고 외식은 자기를 성찰케 하는 성령의 조명을 무디게 만든다. 그 결과 외식뿐만 아니라 타인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의 행위를 자기 의로 가지고 오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율법이 드러내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어서 자기 정당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인 셈이다. 오히려 어떤 행위에서 비롯된 죄책감과 수치심은 드러날수록 그리고 그것이 심각하다고 느낄수록 우리가 더 간절히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만든다. 자기 병이 중할수록 더 필사적이 되듯이 율법은 내 죄의 병이 중함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그렇게 죄를 혐오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사모하는 힘이 내면에 자리 잡아야 ‘자기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내 정당성으로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대충 통과하려는 자는 모두 ‘자기 의’라는 율법주의나 ‘자기기만’이라는 반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복음
예수그리스도
개혁주의
율법
죄책감
자기의
자기기만
반율법주의
기독교는 분별의 종교다
by 김형익
2020-05-07
요즘처럼 많은 영역에서 혼란스러운 시대가 있을까 싶다. 정치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적으로도 온갖 이단과 사이비들이 이렇게 기승을 부린 시절이 있었던가. 가짜 뉴스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요즘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분별은 필수 덕목이다. 세상에서야 우리가 무얼 그리 기대하겠는가? 정말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을 들을 때 이게 같은 기독교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프로테스탄트가 해석의 개별성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종교적으로 치우친, 진리가 아닌 메시지에 휘둘리는 교인들을 보고, 주님의 몸이 이리저리 찢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무너진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어제 오늘의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일은 이미 에덴동산에도 있었고, 성경이 기록되던 대부분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진리가 있기 때문에 진리를 가장한 거짓도 존재하고, 진리가 있는 그 곳에 유사 진리도 자리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행하는 일이다. 아합이 다스리던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시드기야처럼 악한 거짓 선지자들이 넘쳐났고(왕상 22), 멸망하기 전 남왕국 유다에는 하나냐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했다(렘 28). 거짓 선지자들은 영적으로 중병이 든 나라와 백성에게 ‘샬롬!’의 거짓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길을 막아섰다(렘 6:14; 8:11). 이들에게 현혹된 왕과 백성들은 참 선지자였던 미가야와 예레미야를 거절하고 핍박했다.사도들이 살아있던 초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왜 저주를 언급하면서까지 강한 어조로 갈라디아서를 시작해야 했을까?(갈 1:6-9) 고린도 교회는 왜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을 그토록 거부했던 것일까?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경험해야 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라지인 독보리는, 성장 초기에는 그 외형이 밀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잘 때 가만히 와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 마귀는 이 일을 쉬지 않고 지금까지 행한다.제자들이 예수님께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과 세상 끝에 대해서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었다(마 24:4).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주님이 친히 경고하셨고(마 24:5), 요한 사도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말씀하였다(요일 4:1). 성경 시대에 이러하였다면, 교회 역사에서 나타났던 유사 복음-거짓 진리의 문제는 다 헤아릴 수도 없다. 2천 년의 교회 역사에서는 진리의 싸움이 그칠 새가 없었다. 그리고 이 진리의 싸움에서 중요한 무기는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 근거한 분별력이었다. 다신론이나 미신적 신앙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하는 신이고 그 신이 어떤 존재이든 나에게 유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진리와 유사 진리, 참과 거짓을 분별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상상과 필요와 목적으로 만들어 낸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분별하여 섬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이것이 먹히는가?(Does it work?)’가 아니라, ‘이것이 진리인가?(Is this the truth?)’ 또는 ‘이것이 성경적인가?(Is this biblical?)’를 물어야 한다.나는 오늘날 분별력 향상을 위한 진리의 훈련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다는 점을 우려한다.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주의를 주셨고, 그토록 많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교회가 큰 위기들을 경험한 사례들을 성경에 기록하여 경고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진리를 분별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구비시키는 것 같지 않다. 진리의 교육과 훈련을 통한 분별력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 교회 안에는 모호함의 영역이 확장되고, 모호함의 영역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고 만다.그 결과를 우리 한국 교회는 고스란히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신천지의 기승이 그 한 사례다. 단순히 교회 문 앞에 “신천지 출입금지”라고 쓰인 포스터를 붙여 놓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신천지와 같은 이단, 사이비의 가르침을 분별할 줄 아는 견고한 신자들을 길러내는 진리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일평생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이런 현실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분별을 하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별을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몫으로 돌리게 되었다. 주님은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또, 요한 사도는 “영들을 분별하라”는 메시지를 목사들에게만 준 것이 아니었다. 모든 성도들이 진리와 유사 진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신학의 실종이고 교리의 실종이다.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가 ‘신학실종’(부흥과개혁사, 2006)에서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가 현대 세속주의 앞에 굴복하게 된 원인을 진리가 설 자리를 잃어버린 현상, 즉 신학의 실종이라고 분석한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를 지적하여 한 말이지만,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지난 삼사십 년의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을 지상 목표처럼 강조하는 동안,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목회와 설교에서는 신학 무용론이 고개를 들었고, 신학과 진리의 자리를 ‘꿩 잡는 게 매’라는 실용주의가 대체해버렸다. 그리고 교회와 목회에서 교리 교육은 실종되었고 그 자리를 다양하고 세련된 프로그램들이 대체하고 말았다.이런 상황에서 지난 십 년 어간에 한국 교회에서 교리에 대한 관심이 일부 목회자들과 교회들에서 급증했다는 것은 정말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신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우리말로 번역되거나 한국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교리 교육에 대한 자료들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리 교육 서적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교리 교육 서적들이 우리말로 번역이 될 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저자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체적으로 보자면, 기본적인 교리 교육이 시행되는 교회들은 미미하기만 하고, 혹 교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삶에서 유리된 딱딱한 이론처럼 가르치는 미숙함도 많이 보이지만, 현재의 흐름으로 보자면 희망적이다. 교회의 목회에서 실종되었던 교리 교육이 오래 입어 왔던 옷처럼 교회에 잘 어울리도록 정착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지 않겠는가?한국 교회의 한구석에서 섬기는 한 사람의 목사로서, 내가 한국 교회에 바라는 것은 단순히 이단과 사이비에 휘둘리지 않는 기독교가 아니다. 자기가 만들어 낸 하나님으로부터 성경에 계시된 대로의 하나님을 분별하고, 율법으로부터 복음을 분별하며, 번영 신학과 같은 유사 복음으로부터 복음을 분별하는 성도들이 가득한 한국 교회를 보는 것이다.
신학
교리
분별
사이비
신천지
데이비드웰스
신학실종
신학무용론
번영신학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가?
by 이승구
2020-04-21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의 매우 중요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별다른 느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성경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땅하다. 기독교 유신론(Christian Theism)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삼위일체에 대한 생각이 많은 부분 모호해져 있다.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교회 성도들조차도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그저 모호하게 이해할 뿐이다. 이것은 신약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나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들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려고 하던 때와는 상당히 다른 현상이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잘 의식하였다. 그런데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을 때는 몽롱한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지 않았고, 그 결과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배도(背道)의 길로 가기도 했다.그러므로 아주 모호한 상태에 있는 오늘날의 교회들도 이 모호한 상태에 계속 있지 않기 위해서, 결국 배도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정확히 알려고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참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바른 교회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이신 분이다(신 6:4; 고전 8: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만난 분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아주 명백히 밝히고 있다(요 1:1, 14, 18, 3:16, 18, 5:18-25, 10:36, 20:28; 롬 9:5; 고후 4:4; 갈 4:4.; 빌 2:6; 골 1:15; 딤전 3:16; 딛 2:13; 히 1:1-4; 요일 4:9, 5:20 등). 예수님을 그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참된 인간성을 취하셨지만, 동시에 참된 신성을 가진 분이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를 바르게 믿는 것이다.이렇게 예수님을 바르게 믿을 때,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성령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성부로부터 보내실 성령을 말씀하셨으니(요 15:26), 성자와는 구별된 성령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 성령도 온전한 신성을 가지셨음을 성경이 증언한다(마 28:19; 행 5:3, 4; 롬 8:11, 9:1, 15:19; 고전 2:10, 11, 3:16, 12:11; 고후 13:13; 딤후 3:16; 딛 3:5; 히 9:14). 여기까지 내용을 인정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바로 믿기만 하면 여기까지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잘못 생각하면 이단이 된다. 우선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즉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이거나 16세기에 시작된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19세기에 시작된 성부 단일주의(Unitarianism)와 같은 이단이다. 예수님은 인간이신데 로고스가 그 안에 역사했다고 말하던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sm)도 역시 이단이다.성부, 성자, 성령을 믿되,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삼신론 또한 명백한 이단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명확한 삼신론은 아니지만 삼신론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성자의 온전한 하나님 되심을 생각하지 않고, 성자는 조금 못하신 하나님, 심지어 피조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4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아리우스(Arius)를 따르던 아리우스주의(Arianism)도 역시 이단이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께 기도하면 안 된다는 아주 이상한 생각도 했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구약 시대의 성부께서 성육신하신 분이 성자이고, 그가 하늘로 오르면서 다시 오신 분이 성령이라는,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고, 성자가 성령이라는 양태론(Modalism)도 이단이다. 215년경에 리비야와 로마에서도 융성하게 활동했던 사벨리우스(Sabellius)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를 쉽게 설명한다고 하면서 양태론적인 설명을 하는 일이 주변에 많다. 한 사람이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학교에서는 교수이며, 가정에서는 아버지인 것과 같이, 하나님이 성부이시고, 성자이시고, 성령이시라는 설명이 그런 예이다. 또한, 물과 얼음, 수증기의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다 같은 분자 구조를 가지듯이, 성부, 성자, 성령은 다르게 나타나지만 다 같은 본질을 가졌다고 설명하는 것도 양태론적인 설명이다. 이것이 이단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면 교회에서 이런 예를 들지 않을 것이다.이런 이단적 생각들을 다 배제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1) 한 본질(one and the same essence)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2)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distinction)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분명히 하려면, 성부와 성령은 성육신하지 않으셨고, 오직 성자만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유념하는 것이 좋다.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실 때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는 정황을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이 한 장면에 이 땅에 계신 성자와 그 위에 임하신 성령, 말씀하시는 성부가 나타나고 있다. 성부가 곧 성자이고, 그가 곧 성령이라고 말하려는 양태론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본질을 지니신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되심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다.이 삼위(三位)는 합해서 하나가 되시거나(fused), 혼합될 수(mixed together) 있는 것도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영원히 구별되는 존재들(subsistence)이시나, 하나의 동일 본질을 가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하거나, 성령이 성자에게 종속하지 않고 영원히 동등하시다.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성자께서 성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나 그것은 성자가 본질상 성부에게 종속적이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동등하신 성자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겸손히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그래서 “위격상의 동등하심과 사역상의 순종”이라는 말을 기억해 놓으면 좋다. 여기 참된 겸손이 드러난다. 성부와 동등하신 분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야말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요구를 하는가? 다음 세 가지를 제대로 해야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첫째로,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하고, 누구를 찬양하는가? 이때 아주 명확히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물론 계속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탐구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모호하게 “하나님, 주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명시하던 이전 시대의 찬양을 많이 하는 것이 좋고, 오늘날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 찬양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둘째로,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 기도할 수도 있고, 성부나 성자나 성령께 기도할 수도 있다. 성자나 성령께 기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나, 그런 가르침은 이단적인 것이다. 항상 기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해야 한다.셋째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일상생활에서 느끼고 있는가? 우리에게 오신 성령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요 14:16) 이를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마 28:20) 이것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성부께서도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추상적 교리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함께 사는 역동적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부디 우리가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바른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란다.
신학
교리
삼위일체
기독교유신론
신성
인성
아리우스주의
양태론
시아버지 유다도 다말의 의로움을 인정했어요
by 배경락
2020-04-16
안녕하세요. 저는 시아버지 유다와 부적절한 관계로 아이를 낳은 며느리, 불미스러운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여자랍니다. 여러분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구약 시대 여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결혼해서는 남편, 그리고 아들을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여자의 삶은 가장 낮은 빈곤층으로 떨어집니다. 우리 시대 남자들의 수명은 매우 짧았습니다. 전쟁으로 죽는 경우뿐만 아니라 양을 치다 사나운 짐승을 만나거나, 도적을 만나 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만 노후가 보장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에는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형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씨를 잊게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레비리트(levirate) 제도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화겠지만,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저는 가나안 여자로서 가나안의 문화와 풍습에 익숙합니다. 어느 날 동네에 한 가족이 이사를 왔습니다. 산 위 동네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다 집안이었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혈통과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고향 땅 하란까지 가서 아내를 얻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부족을 떠나서 우리 가나안 족속이 있는 지역으로 이사 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동네에 여러 가지 소문이 많았지요. 유다가 우리 부족장 히라와 친구라는 둥, 저들이 여호와 신앙보다는 가나안 족속의 신앙을 더 좋게 생각한다는 둥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습니다.1)저는 어려서부터 호기심도 많았기에 유다 집안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다 집안에서 섬기는 하나님에게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유다 집안은 우리에게 청혼했습니다. 그 집 큰아들 엘의 청혼이었습니다. 뜻밖이긴 했지만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결혼 초기에 유다 집안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그들은 가나안 족속보다 더 세속적이고 사악했습니다. 남편 엘의 죄악은 이루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직접 쳐 죽였습니다.2) 하루아침에 과부가 된 저는 난감했습니다. 관례에 따라 둘째 아들 오난과 잠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그는 제게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 고의로 그랬습니다. 형의 재산을 자기가 독식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형의 혈통이나 저의 경제적 상황 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족속도 하지 않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둘째 오난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이 연이어 내리자 시아버지 유다는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죽은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재혼하지 말고 수절하라. 그리고 친정에 가서 셋째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 저는 시아버지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명령을 내린 줄 알았습니다. 보통 가나안 족속 같으면 재혼하도록 해서 여자에 대한 부담을 덜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친정에 와서 시아버지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세월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잊힌 여자가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장례도 다 치렀다는 소식도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그제야 시아버지가 말했던 것이 거짓인 줄 알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거십(거짓의 도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로부터 고엘(기업 무를 자, 속량자, 구속자) 제도의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은 동네에서 수치를 당했습니다. 종처럼 신발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게 되어 있습니다(신 25:9). 그리고 첫 번째 사람이 그 역할을 감당하기 싫으면 두 번째 사람이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유다 집안의 첫 번째 사람은 셋째 아들 셀라입니다. 이제 시아버지는 저를 완전히 잊어버렸고, 셋째 아들을 저에게 줄 계획은 전혀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저는 고엘 제도의 첫 번째 사람에게 두었던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겐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냥 유다 집안을 ‘신발 벗은 자’의 집안으로 수치와 불명예를 당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희생하더라도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고, 가문의 혈통을 이어갈 것인가? 저는 비록 가나안 여인이지만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딤나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신전 창기로 분장하고 그를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시아버지 유다는 고엘 제도의 두 번째 기업 무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 여자로서 정욕에 불붙어 남자를 구하러 나간 것이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하여 돈을 벌기 위함도 아닙니다. 목적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가문의 명예와 집안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제 결정을 알아준 분은 의외로 시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제게 말하였습니다. “그녀가 나보다 더 의로웠으니(She hath been more righteous than I)”(창 38:26, KJV). 하나님은 아무나 의롭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인정할 때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말했지요.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5-8).저는 경건하지도 않고 잘한 것도 없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시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유다 집안의 죄악을 저 같은 이방 여인을 통하여 가리시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혈통이 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후일 룻이 두 번째 기업 무를 자 보아스와 결혼할 때도 마을 장로들이 저의 이름을 이용하여 복을 빌어준 것3)도 다 이런 까닭입니다(룻 4:11-12). 부디 고리타분한 유교 윤리에 젖어서 저를 윤락녀나 음탕한 여자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4) 감사합니다. _____________1) 유다가 이사 간 동네는 ‘거십’으로 ‘거짓의 도시’이다. 이 도시는 속고 속이는 것이 풍습이 된 도시로 유명하였다. 유다는 큰아버지 에서가 가나안 여인을 부인으로 삼은 것 때문에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몹시 마음이 상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나안 사람과 교제를 하고 가나안 여인을 부인으로 맞았으며, 아들에게도 가나안 여인을 주었다. 2)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때 인류를 향한 심판을 하시긴 했지만, 어떤 개인을 직접 심판하신 것은 유다의 아들 엘이 처음이었다. 하나님께서도 엘은 살려두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죄악은 극악하였다. 3)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베들레헴 장로들은 두 사람의 결합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한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그대(보아스)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인(룻)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 두 여인 곧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에브랏 가문에서 그대가 번성하고, 또한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떨치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그 젊은 부인(룻)을 통하여 그대(보아스)에게 자손을 주셔서, 그대의 집안이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베레스의 집안처럼 되게 하시기를 빕니다”(룻기 4:11-12, 새번역).4) 구약학자 카일 델리취는 그의 주석에서 “다말을 구약의 성녀, 거룩한 여자”라고 평하였다.
신학
구약성경
고엘
유다
다말
기업무를자
레비리트제도
빈 무덤, 다시 살아나신 주
by Chris Donato
2020-04-12
많은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그냥 십자가에 매달아 놓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부활을 소홀하게 다루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많은 관심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도록” 만든 “한 의로운 행위”이기에(롬 5:18) 그렇다. 다른 말로 해서, 예수님의 삶 전체에 걸친 아버지의 뜻과 목적을 향한 순종은 그가 자신의 생명을 그의 백성을 위해서 내어놓았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그게 바로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이다. 이것을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는 십자가가 상징하는 공적인 부끄러움과 분노 아래에서 사는 것을 더 자연스럽게 여길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생각을 조금 더 발전시키면 우리는 고통의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십자가야말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공감을 드러내는 완벽한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한 의로운 행위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이가 이뤄낸 확실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아직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면 도대체 그는 어떤 승리를 이뤄낼 수 있을까?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데에 실패한, 환상에서 깨어난 어느 한 갈릴리 출신 청년의 이야기 속에서 승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다. 전혀 아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말 그대로 어리석음일 뿐이다. 십자가는 결코 역사 속의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 이 모든 것이 합하여 전선을 이룸으로 죄와 죽음의 시대와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부활절 아침만큼 죄와 죽음이라는 끔찍함의 패배를 더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 부활은 인간 예수님이야말로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고” 또한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선언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고 또한 그를 “주와 하나님”(행 2:36)으로 높이셨을 때, 예수님과 그의 놀라운 사역은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만약에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약에 그리스도가 다시 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이 여태까지 목격한 가장 저주받고, 불행하고, 가여운 운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상 죄와 잡초, 그리고 죽음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기극을 영광스러운 구원이라는 희망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부활은 일어났고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쓴 이유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절). 부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주는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여기에는 양보(협상)의 여지가 없다.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결코 자신을 ‘사도적 기독교’(Apostolic Christianity)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것은 신약 전체의 메시지이며 무엇보다 로마서 10장 9절에 명확하게 나온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친절과 존경’(벧전 3:16)으로 대접받는 사람들과는 친교의 식탁을 같이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고백하는 ‘기독교’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질문은 부활의 증거가 아니다. 부활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가지는 중요성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서, 부활은 타락이 가져다준 저주(죄, 잡초, 그리고 죽음)를 뒤집었다. 물론 그건 부활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고, 부활까지 이어진 다른 모든 사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예수님(종종 ‘적극적’인 순종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의 순종(‘소극적’ 순종)이다. 전자의 형태로 볼 때 두 번째 아담으로서 예수님의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는 완전한 순종으로 아담이 범한 불순종의 죄를 물리쳤는데, 이는 언약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를 극복한 것이기도 했다.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복음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추려고 했다(사 41:8-9; 49:3-6). 그리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왔다. 오로지 그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 또는 왕은 국가를 향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대리자라는 의미 외에 하나님을 향한 국가를 의미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삼하 19:43; 20:1).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경우에(사 63:16),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 또는 시 2:6-7). 물론 이스라엘의 왕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신성시되지는 않았다(물론 우리 예수님은 예외이다. 그분은 하나님도 되고 사람도 된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경우,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의 정체성이 그의 백성과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최소한 원칙적인 의미에서 그의 백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에게(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롬 9:4-8)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그랬듯이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약속의 상속자가 되고, 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충실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롬 6:1-14)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완전한 신실성(fidelity)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물은 바로 생명 그 자체이다(“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한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죽음까지 감내한 예수님의 순종이야말로 처음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의 차이를 극명하게 가르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롬 5:15). 참으로 이 은사는 훨씬 더 위대하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는 아담의 범죄를 가리고도 남는다. 그럼 그 은혜는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맡긴 책임은 위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따라서 살아감으로 아담의 타락이 초래한 저주와 멸망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 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것은 바로 아담이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남아 있는 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선’은 언제나 율법을 어기고 싶은 ‘악’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죄가 정복되고 오래된 아담의 모습이 구원받으려면 주님의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사 53:11). 누가 우리를 이 죽음의 몸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 대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을 포함한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아담의 믿음 없음을 뒤집었다. 그리고 이 타락하고 더러운 세상이 회복의 길에 들어서도록 했다(롬 8:21-22).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 있다.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결국 우리도 그의 승리와 높이 되심을 같이 누린다는 것이다(롬 6:1). 완전한 순종으로 인해서 죄가 패배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죄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는 마치 죽음을 받치고 있던 양탄자를 빼버린 것처럼, 죽음은 예수님을 무덤에 가두어 놓을 힘을 잃었다. 바로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라면 한 번은 죽어도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 이 탁월한 부활은 다가올 위대한 부활의 ‘첫 열매’였다(고전 15:12-33; 51-57 참조). 예수님의 피값으로 살게 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하나님과 율법에 따라 그리스도의 높이심에 참여하고 거룩한 재판관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세 번째 날, 그러니까 부활절 아침은 새로운 날을 목격하는 새벽이다. 그 전에 있었던 다른 날들과 전혀 다른 의미의 새로운 날이다. 이날은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그 속에 품고 있다. 오래된 전쟁을 비유로 한 말이 떠오른다. 승리는 이미 선언되었다. 비록 죄와 죽음은 아직도 그 소식을 들어야 하지만 전쟁은 끝에 다다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죽음을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더 이상 그것들의 노예가 아니다. 승리자 예수님이 죄와 죽음의 멍에를 감당함으로 파괴했다. 말 그대로 진짜 비어버린 예수님의 빈 무덤은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희망이 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으로 겪을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게 한다. 이 세상이 주는 불확실성과 혼돈은 종종 무서울 정도지만 우리는 거기에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룬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런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슬픔과 비극 속에서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는 새로운 창조와 이 땅에 이루어질 천국의 약속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일이면 반복해서 믿음으로 선언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달콤한 포도 덩굴에 의해 잡초가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다. 진정한 정의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며, 한때 감금된 죄인들은 전능자 앞에서 완벽하고 겸손하게 부활한 몸으로 살게 될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He is Not Here, He is Risen번역: 무제
복음
부활
십자가
예수님
구원
순종
죄
죽음
감사
사나 죽으나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
by Keith Getty
2020-04-11
‘코로나19’에 관한 뉴스를 지켜보며,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이 사태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가족은 평소 여름 시즌에는 북아일랜드에서 여름을 보내곤 했는데, 이젠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국내에서만 지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에 비하면 이건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이 바이러스의 확산이 언제쯤 진정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 먼저 오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그래서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 딸들과 함께 피아노 주변에 둘러 서서 새로 출시한 찬양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기쁘다. 이 곡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삶의 소망을 찬양하는 곡이다.이 곡이 나오기까지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작곡가 조던 코플린(Jordan Kauflin)과 맷 머커(Matt Merker)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이 내게 소망에 대한 찬송을 작곡하도록 독려했다. 그 때만해도 작사 팀의 맷 보스웰(Matt Boswell)과 맷 파파(Matt Papa)가 1563년에 완성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첫 번째 문답인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란 내용을 기초로 가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각각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마침내 이 곡의 작업을 하기 위해 북아일랜드에 있는 우리 집 피아노 앞에 모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나 죽으나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라는 신곡이 탄생하게 되었다.“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왜 이 질문으로 시작해야만 했을까?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 가운데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소망은 죽음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 분을 믿을 때에만 찾아온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오직 이 선언만이 매일 어떻게 살아가고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알게 하며 소망을 갖고 변화를 지향하게 한다.부활에 대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광스런 미래를 보장해 주셨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는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사나 죽으나 내 몸과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 나의 신실한 구세주에게 속해 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결코 죽음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닥칠 죽음에 대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노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야만 이 힘든 세상에서 참된 소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이 평소처럼 부활절을 앞두고 교회에 모여 함께 찬양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각자의 집에서, 또 어느 공간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믿음으로 찬양할 수 있다. 부활하심으로 죽음에서 승리하신 분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 이 곡이 찬양하고 있듯이,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다.* 오늘 영상QT로 “Christ Our Hope in Life and Death”(한국어 가사)를 감상할 수 있다. 영상 QT로 가기[1절]사나 죽으나 우리의 소망은오직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오직 우리의 믿음은우리 영혼 그분께 속해 있네우리의 삶 누구에게그분의 명령 말고 또 무엇에죽기까지 우리 지켜 주시는그리스도의 사랑 거기 우리 서 있네[후렴]찬양하라 할렐루야!우리의 소망 영원히송축하라 할렐루야!지금부터 영원히 고백하네사나 죽으나 우리의 소망 그리스도[2절]곤고한 영혼 위로할 수 있는 진리는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그분의 은혜와 선하심우리의 크신 구세주의 보혈두려움 일 때 우리 믿음 붙드시는 분폭풍 같은 시련 위에 서 계시는 분누가 그 파도 보내시나해안으로 인도하실 반석 되신 그리스도께[3절]무덤까지 우리 부를 찬송그리스도 살아 계시네 그리스도 살아 계시네천국에서 우리 받을 보상그분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부활하여 거기서 주님 만나리 죄와 죽음 없어지고영원한 기쁨 누리겠네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영원히작사: 맷 보스웰ㆍ맷 파파작곡: 키이스 게티ㆍ조던 코플린제작: 게티뮤직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 Our Hope in Life and Death번역: 정은심
부활
복음
사나죽으나우리의소망
그리스도
게티뮤직
코로나19
죽음
찬양
소망
위로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by Marshall Segal
2020-04-10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빛이신 성자 하나님은 깨지고 캄캄한 어둠의 세계를 뚫고 들어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다. 하지만 그의 백성들은 어둠을 사랑하여 그를 거부했다. 이제 어둠이 골고다 언덕 위의 그에게 내렸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셨다.예수님은 이를 감당하기 위해 탄생했고, 대적자들은 생애 내내 그를 힘들게 했다. 걷기도 전에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있었다(마 2:16). 광야에서 자신을 시험하는 악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마4:1)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고소했다(마 10:2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인 중에 거하였으나, 그들은 그를 잔혹하게 공격했다.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고, 구타했으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조롱했다.이제 십자가에서 그의 침묵은 그들의 반란에 따른 적대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그는 마침내 시편 22편 1절 말씀으로 침묵을 깼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5-46).사방으로 에워싸였다못 박힌 손과 기능을 상실한 폐를 가지고 예수님은 시편 22편 말씀을 붙잡았다. 이 구절은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는 죄 없는 사람의 절박한 말이었다. 이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에워쌈을 당했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입이 찢어질 듯 부르짖는 힘센 황소처럼(시 22:12-13), 마지막까지 그를 괴롭혔다. 바리새인들은 독사가 피를 찾아 나서듯이 어떻게 그를 죽일까 강구했다(마 12:4). 그가 결코 매달려 있을 곳이 아닌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그들은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중략]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마 27:42-42)라고 희롱하였다. 이것은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예언된 시편 22편 8절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다.날카로운 이를 가진 개들처럼(시 22:16), 무리는 그를 죽이고 싶어 들끓었다. 그들은 살기가 등등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소리 질렀다(마 27:22). 빌라도는 “어찜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물었지만, 그들은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했다(마 27:23). 무리는 격노한 아이들처럼 그들의 유일한 희망을 미움으로, 거대한 분노로 표출했다.풀잎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자 무리나 먹이를 짓밟고 있는 야생 황소처럼(시 22:21),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멸시와 고통을 가했다. 그들은 가시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웠다(마 27:29). 죄 없으신 얼굴에 침을 뱉었다(마 27:30). 그들은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시편에 적힌 그대로(시 22:18), 그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다(마 27:35). 그의 고통을 즐거워했고, 해 같이 빛날 그의 얼굴을 비웃었다.스스로 죄를 지어 심판에 직면하고 있는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멸시하는 말을 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서기관과 무리, 로마 군병들과 강도들의 멸시와 비웃음으로도 불충분했는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그가 죽도록 놓아두고 떠났다. 베드로는 예수를 안다는 사실을 거듭하여 격렬하게 부인했다(마 26:70). 나머지 제자들은 두려움에 모두 도망쳤다(마 14:50). 예수님은 사방으로 에워싸였다. 이제 그는 들소와 개와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홀로 놓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위협은 그가 감내해야 하는 진노, 위로부터 오는 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사 53:10)고 쓰고 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슬픔을 삼켜버릴 만큼 너무나도 큰 슬픔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타락한 인류의 잔학 행위를 싫어하셨는데, 이제 이에 대한 적대감이 마침내 아들에게 엄습했다.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 사도들은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라고 성부 하나님에게 기도했을 것이다. 창세 전에 이 참혹한 시간이 있을 것이 기록되었다(계 13:8). 역사의 모든 순간은 이 순간으로 이어졌다. 죄 없는 어린 양 학살의 순간으로 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알고 있었지만(마 20:17-19), 그것이 고통을 줄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가 겪은 괴로움의 깊이를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십자가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그냥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말씀우리는 시편 22편을 예수님이 버림받는다는 선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편 1절을 외치실 때, 그는 그 시편이 어떻게 끝나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다윗 왕도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았음을 느꼈을 때 이렇게 말했다.“[여호와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그리고 두 구절 뒤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시 22:26)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1절의 무게를 알고 있었지만,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통치할 것을 말이다. 죄로 인해 죽었으나 다시 살아 아들로서 보좌에 앉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 이루었다히브리서 저자가 피로 물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받은 영광의 왕관을 보았을 때, 그는 시편 22편을 인용했다.“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 2:10-12).예수님이 시편 22편 1절을 외치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그 노래를 언젠가 마저 부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했을 때는 영원한 왕국 건설을 막 시작했을 때다. 그때 그는 첫 열매를 맺기 전에 시작된 전쟁을 마치고 있었고, 그의 영원한 왕국을 위한 서문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그리고, 시편 22편이 예언했듯이(시 22:30-31), 그가 무엇을 이루셨는지 항상 이야기될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e Was Forsaken by the Father: The Horror of Good Friday번역: 정은심
시편22편
예수님
골고다
곤고한
복음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주권자의 자비가 서린 눈물
by John Piper
2020-04-06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9-10).종려주일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그분은 비천한 짐승에 올라타 성읍으로 들어가셨고, 이제 곧 어떤 일이 닥칠지를 알고 계셨다. 즉 원수의 세력이 득세하여 자신을 배척하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리고 한 세대 안에 예루살렘조차 완전히 파멸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3-44).하나님은 자기 아들이신 그분 안에서 백성을 보살피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 1:11). 그들은 “보살핌 받는 날을”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예수님을 보며 자신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돌(the stumbling stone)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분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버림당하셨다. 바로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예수님은 보셨다.왕이 우시다이에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눈먼 상태를 보시며 다가오는 비참한 상황 때문에 우셨다.당신이라면 이 눈물을 어떻게 묘사하겠는가? 나는 이를 ‘주권자의 자비가 서린 눈물’(tears of sovereign mercy)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만들고 또 다른 누구보다도 그분을 소중히 여기며 자비로운 주권자이신 그분만 예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자비에서 비치는 아름다움을 깨닫게 될 때, 우리도 비로소 그분과 함께(with him), 그분처럼(like him),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for his glory) 자비로운 마음을 품게 된다.그러므로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 함께 경배해야 한다.자비로운 주권을 생각하며 경배하라우리에게서는 상반되게 나타나는 여러 속성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모든 이들과 다르신 그분을 경배한다.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바는 이렇다. 곧 최고 통치자의 절대 주권 아니면 따뜻한 마음으로 베푸는 자비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게 되면, 자비로운 주권과 주권적인 자비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완전한 상태에 어떤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인 리더라도 감히 범접할 수가 없다.우리가 종려주일을 소개하는 본문을 읽으며 예수님의 주권을 묵상할 때, 유념해야 할 세 가지 포인트가 있다.첫째로, 당시 군중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 있는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눅 19:37).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시며 그 몸을 고치신 적이 있다. 또 눈먼 자로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한 자의 귀를 열어주셨으며, 못 걷는 자를 일으켜 걷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하시자 그들이 복종하며 떠나기도 했다. 나아가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거니셨으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의 사람을 먹이기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무엇도 그분의 입성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저 말씀만 하셔도 빌라도가 물러가고 로마 군대도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그분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둘째로, 군중은 이렇게 외쳤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눅 19:38). 예수님은 왕이지만 일반적인 왕이 아니셨다. 그분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지명하여 보내신 왕이셨다.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그분을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는 굳건한 나라의 통치자가 바로 그분임을 알고 있었다.“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영원한 나라가 언급되어 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통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와 먼 은하계까지 두루 미친다. 또 그분 앞에서는 미국이나 ISIS 혹은 그 어떤 정치 집단이라도 한 줌의 모래나 사라지는 입김에 지나지 않는다.셋째로,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며 찬양하는 군중의 소리를 바리새인이 멈추게 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분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그 이유는, 예수님이 찬양받아야 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온 우주가 오직 그리스도를 찬양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들이 그분을 찬양하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결국 예수님은 주권자이시기에 자신이 취하셔야 할 영광을 반드시 취하신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기쁨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다.실패가 아닌 성취를 보라그럼에도 예수님이 보이신 눈물을 지적하며 그분의 주권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까닭은 자기 백성을 위해 세우신 계획이 결국 실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 백성이 구원받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완강하여 그분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끝내는 십자가 처형에 그분을 넘겨주게 되었다. 이로써 자기 백성을 향한 그분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의 주권을 반대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그분은 돌들로도 찬양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마찬가지로 돌같이 굳어진 마음을 가진 예루살렘 백성으로도 찬양하게 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저들의 반대와 핍박, 그리고 자신을 죽인 행위까지도 다 받아들이셨다. 이는 그 모든 일이 자신이 세우신 계획의 실패가 아닌 성취를 이루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예루살렘 입성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한번 들어 보도록 하자.“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즉 계획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눅 19:31-33).배신과 희롱, 능욕과 침 뱉음, 채찍질과 살인, 이 모든 일이 다 계획되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완강하게 거절하며 불신과 적개심을 품고 예수님을 대적한 일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 계획의 일부일 뿐이었다.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이미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이렇듯 하나님은 저들이 굳은 마음을 갖도록 내버려 두셨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심판이었기 때문이다.전능과 자비를 함께 보이시다하나님의 자비는 주권자가 베푸시는 자비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종려주일에 깊이 묵상해야 할 진리가 여기에 있다. 바로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가 멸망을 앞둔 완고한 예루살렘 백성을 보며 우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비가 깃든 눈물을 보며 마치 흔들림 없는 주권에 상반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그릇된 판단이다. 예수님은 슬픔 가운데서도 흔들림이 없으셨고, 또한 흔들림이 없는 주권 가운데서도 슬퍼하셨다. 예수님의 눈물은 자비로운 주권자만 흘리실 수 있는 눈물이었다.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그분의 주권적 능력은 더욱 찬란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상호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자비’와 ‘전능’ 같은 속성들이 서로 하모니를 이룰 때, 그분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부르는 찬송처럼 말이다(“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여 성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비로우신 분의 능력이며 또한 그분의 자비가 전능하신 분의 자비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더욱 소리 높여 찬양한다.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종려주일에 그 진리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맛보기를 소망한다. 곧 주권자가 흘리신 눈물과 그분이 이루신 자기희생적 사랑, 그리고 고난주간의 모든 여정을 홀로 걸어가신 그분의 순종을 묵상하기를 소망한다. 더 나아가 이 주간에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며 찬양을 올릴 때, 우리가 바라보는 그 진리로 인해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마침내는 더욱 부드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타인의 필요를 채워 주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Savior’s Tears of Sovereign Mercy번역: 장성우
눈물
찬양
경배
군중
성취
예수님
묵상
순종
복음
십자가
처음
이전
31
페이지
32
페이지
33
페이지
34
페이지
열린
3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