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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부 하나님처럼 선교사 가정 환대하기
by 김형익
2021-09-10
이번 여름, 선교사 가정의 방문이 유독 많았다. 예정된 방문 일정을 앞두고 선교사 가정들에게 ‘아낌없는 환대’를 베풀자는 나의 제안에 교우들은 풍성한 연보로 호응하여 주었다. 그리고 방문하는 선교사 가정들에게 2박 3일의 짧지만 즐거운 가족 휴가를 제공하며 아낌없이 환대한 일은 선교사 가정들 뿐 아니라 교회에게도 큰 기쁨이 되었다.팀 켈러는 그의 책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을 통하여, 탕자를 가리키는 영어 ‘prodigal son’의 ‘prodigal’(방탕하다는 뜻)이 하나님을 수식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쓰일 때, ‘prodigal’은 ‘방탕하게 낭비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낌없이 베푸는, 낭비하듯이 베푸는’이란 뜻이다. 이런 환대가 선교사들에게만 국한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선교사와 그 가정들을 향한 아낌없는 환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아낌없는 환대’는 죄인의 자연스러운 행동은 아니다. 언제나 자기 쓸 것도 모자란다고 느낄 뿐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뿌리 깊은 죄성을 가진 것이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아낌없는 환대는 은혜를 필요로 하며, 이런 환대는 복음이 자라서 맺는 열매이고 은혜의 결실이다. 또한 환대를 받는 입장에서도 유연함이 요구된다. 내가 말하는 유연함은 받을 때 받아 누리고 또 베풀 때 아낌없이 베푸는 여유이다. 사실 이 유연함도 은혜의 작용이다. 나는 환대와 관련하여 두 입장을 말할텐데, 먼저 환대를 받는 선교사와 가정의 입장이다. 선교사와 가정—환대를 받는 사람들선교사로 15년을 살아온 내 경험을 돌아보건대, 나는 정말 누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30년 전의 일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사역하던 우리는 자카르타에 일이 있을 때마다, 친근하게 지내는 교민의 집에 묵는 은혜를 누렸다. 여느 호텔 못지않게 편하고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좋은 음악이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랬더니, 그 안주인 권사님이 CD를 꺼내서 주신다. 나도 모르게, “그림에 떡이네요”라는 말이 튀오나오고 말았다. 그 말에 당황한 권사님은 우리가 떠날 때, 500불을 쥐어주며 말했다. “좋은 CD 플레이어를 구입하시라고 드리는 선물입니다.” 당시 그 댁에서 보았던 ‘그것’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나는 수마트라로 돌아와 당연하게도(?) 그 돈을 종족 사역을 위해 사용했다. 자랑하려고 한 말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잘잘못의 가치 판단의 문제도 아니다. 당시 전시체제의 생활방식(Wartime lifestyle)이나 검소한 생활방식(Simple lifestyle)을 많이 말하던 나는 때때로 주어지는 환대를 누릴 수 있을만한 자유를 잘 알지 못했다. 또 하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선교단체의 대표로 있을 때의 일이다. 신학생들을 인솔하여 2주간의 단기선교(field trip)를 떠났다. 고된 일정 중의 한 밤은 도시의 저렴하지만 괜찮은 호텔에서 묵도록 일정을 계획했다. 호텔에 묵는 것이 거의 생소하던 시절, 그것도 선교 훈련의 일종이었다! 그때 신학생 중 용감한 한 자매가 모두를 대변하여 말했다. 단기선교 중에 이런 호텔에 묵는 게 마음이 불편하다고. 바로 이런 마음이 그전에 나를 지배하던 그 마음이었다.바울 사도는 선교사들과 같이 교회들의 후원을 받던 선교사였다. 물론 자신의 삶을 위해서는 텐트메이커로 일을 했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이 설립했고 또한 자신의 사역을 따뜻하게 후원했던 빌립보 교회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바울 사도는 비천에 처하기만 한 게 아니라, 풍부에도 처할 줄 안다고 말했다! 그는 배고픔과 궁핍에만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게 아니라, 배부름과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말이다(빌 4:13). 주님은 사역에 지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일할 때와 쉴 때를 잘 구분할 수 있다면, 두 가지 모두를 잘 감당하고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교회 방문은 그들에게 사역으로서의 보고만큼이나, 그 가정에게 쉼의 시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이번 여름, 교회의 아낌없는 환대를 경험한 선교사들은 “이런 환대는 처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특히 즐거움이 뚝뚝 떨어지던 어린 자녀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온 만 9살의 루지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우리 여기에 더 있다가 가자고 목사님에게 말씀드리면 안 돼?” 다른 이유로 비록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들은 모두 이런 환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교회—선교사를 환대하는 사람들선교사에게 환대를 베푸는 교회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교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관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다가 잠시 한국에 들어와 모교회이자 후원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가정과 사역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던 교회이다. 어머니의 친구분들이기도 하셨던 권사님들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김 선교사 얼굴이 두 배가 되었네.” 살이 쪘다는 말이다. 그 말의 뉘앙스는 알아서 생각하시라! 나는 정말 그때 살이 쪘었는지 모르겠다. 놀라운 것은 권사님들의 반응이 내 어머니의 반응과 너무나 달랐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나를 보았을 때, “아이고, 너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라고 하셨으니까. 여기서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내 아들로 볼 것인가, 우리가 돈을 보내서 선교의 일을 시킨 일꾼—선교사로 볼 것인가? 한 선교단체의 책임을 맡고 있던 시절, 나는 기회가 되는대로 교회들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여러분의 아들, 딸, 형제와 자매로 여겨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인도네시아 우리 집을 잠깐 방문하셨던 나의 아버지는, 365일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어찌 에어컨도 없이 사느냐고 나무라시고는, 직접 나가서 에어컨을 사오셨다. 한국의 가정집에서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의 일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선교사를 자기 자식이나 친형제로 여기는 관점은 그들을 대하는 교회의 방식을 결정한다. “우리도 휴가 못 가요. 우리도 별로 가보지 못하는 호텔에, 우리도 먹지 못하는 값비싼 음식을 꼭 대접해야 하나요?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지요!”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선교사들, 그리고 그 자녀들은 낯선 나라, 낯선 문화, 우리와 다른 피부의 사람들 속에서 살아간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물리적 환경이 열악한 곳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 있든 간에, 그들은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려고 자신들의 생명, 그리고 가정을 주님께 드린 우리의 형제들이다. 우리가 물질과 기도로 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교사와 가정들이 고국 교회를 방문하여 아낌없는 환대를 경험할 때, 주님은 그 환대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넉넉하게 하시고 웃게 하신다. 즐거이 사명을 감당할 마음을 회복하게 하신다. 메시지 성경이 완간 되었을 때, 그 성경으로 시편을 읽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시편 23편을 읽을 때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선하신 환대를 느끼며 전율했던 기억이 새롭다. “You serve me a six-course dinner!” 주님께서 나에게 성대한 코스 요리를 차려 주신다고? 개역개정역이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라고 번역한 부분이다. 마지막 날,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보는 앞에서 성대한 코스 요리로 우리를 환대해 주실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때때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사람들을 통해 선교사와 그 가정들에게 ‘성대한 코스 요리’를 차려 환대하신다. 물론 주님이 직접 차려 주시는 상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충분하고 넘치도록(More than enough)당신과 당신의 교회는 우리를 환대하시는 탕부 하나님처럼, 선교사와 그 가정들을 아낌 없이환대하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될 의향이 있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충분한 것보다 더 많이(more than enough)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분이시다. 탕부 하나님(Prodigal God)처럼, 아낌없이 환대를 베푸는 프라디걸(prodigal) 교회들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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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단체
시편23편
베푸는교회
남겨진 선교사 가족 돌보기
by Candace Echols
2021-09-06
우리 교회는 매년 겨울이 끝나갈 때면 세계 각국의 국기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세계 선교 컨퍼런스(World Missions Conference)를 개최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컨퍼런스의 마지막 세션에서는 모든 청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십자가 높이 들고”를 찬양했다. 참으로 감동적인 찬양이었다. 설교는 힘이 있고 은혜를 깨닫게 했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그러나 나는 일찍 자리를 떠났다.딱 한 가지를 빼고 모든 것이 다 훌륭했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소명, 내가 중심에서부터 붙들고 있는 그 사실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 선포를 위해 내 동생은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 사역하고 있다. 스테피(Steppie)와 나는 여섯 살 차이가 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리는 같은 침실을 사용했다. 우리는 잠들기 전까지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밤을 보냈다. 그런 순간이 모이고 또 모여서 끈끈한 자매애가 생겨났다.스테피는 2주 후면 첫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다. 귀여운 아기는 하나님이 그녀와 남편을 풀타임 선교사로 부르신 이탈리아에서 출생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출산을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귀여운 조카의 요람을 흔들어주는 좋은 이모가 되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힘든 사명선교사로 떠난 이의 남겨진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는 지상명령의 사역 뒤에 숨어있는 또 다른 부르심이 있다. 그건 “힘든 사명”(Hard Commission)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로 떠난 이의 남겨진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는 선교사로 떠난 가족에게 생명을 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소리 없이 감내해야 하는 그들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가족 누군가는 자신의 사명을 따라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은 남은 가족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가족을 해외에 선교사로 보내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세계 선교 컨퍼런스에 참석할 수 있다. 그 자리에서 선교를 위해 떠나 보낸 후 고군분투하는 사람들과 함께 세계의 깃발이 행진하는 것을 보며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다. 선교지에 있는 이들의 헌신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선교 컨퍼런스 참가 여부와 상관없이 선교사들이 남겨두고 간 가족을 도울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1. 물어라타지로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는 선교사 가족들과 관계를 맺고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진심 어린 호기심을 가져라. “그녀가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 가족의 경우 스테피를 파송한 교회가 그녀를 선교지에 보낸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2. 조언하라출장 또는 여행에서 얻은 유용한 정보는 사랑하는 사람을 선교지로 보낸 가족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다. 선교사 가족은 이런 궁금증이 있을 수 있다. 좋아하는 스낵을 생일선물로 꼭 보내고 싶은데 해외로 음식을 보낼 수 있는 건가? 비행기 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저렴한 항공편을 찾는 웹 사이트는? 평판이 좋은 웹 사이트를 어떻게 찾지? 이러한 궁금증과 고민은 갑작스럽게 혹은 처음으로 국제적인 교류를 해야 하는 선교사 가족들을 힘들게 한다. 해외여행이 당신에게 자연스럽다면 당신의 조언은 그들에게 매우 유용할 것이다. 그들이 물어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조언하라. 3. 도우라스테피는 로마 외곽의 올리브 농장 걸을 때 영상 메시지를 보냈고, 휴가 때면 신선한 올리브 오일을 보내주었다. 그녀의 남편인 레이드(Reid)는 이탈리아 정통 파스타 기술을 익혔다. 그들의 새로운 삶을 듣는 것은 항상 재미있지만, 직접 만나지 않고는 완전히 알 수가 없다.많은 선교사 가족은 먼 곳을 방문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여분의 항공 마일리지가 있거나 넉넉한 마음이 있다면 비행기 표를 제공하겠다고 제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선교사 가족을 현실적으로 축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선교사 부모가 자녀와 함께 칠레에서 엠파나다를 먹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그러면 당신은 네 번째로 소개할 ‘기도하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선물을 주게 될 것이다. 4. 기도하라선교사와 그 가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라. 그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 해외 사역, 특히 언어에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라. 언어는 누구에게나 힘든 도전이다. 아니면 그들을 떠올리며 무엇이든 기도하라.몸이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선교사와 그 가족 모두의 마음을 계속해서 새롭게 함으로 그들의 생활이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6).그리고 선교사의 가족이 기도할 때마다 그들이 기도하는 대상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특별히 간구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oving Those Whom Missionaries Leave Behind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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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선교사에게 던지는 다섯 가지 도전
by Josh Manley
2021-09-02
이 아티클은 CROSS19 컨퍼런스 직전에 게시되었던 글이다. CROSS19는 8세에서 25세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지도자를 위한 컨퍼런스로 이 컨퍼런스의 목적은 모든 부족, 언어 및 국가의 사람들이 예수를 알고 예배하는 영원한 기쁨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6년 전 우리 가족은 바다를 건너 아랍 세계에 교회를 세웠다. 아랍인 통치자는 복음주의 교회를 위한 땅을 아낌없이 주었다. 이주와 관련된 위험이 있었지만 아내와 나는 복음의 문이 분명하게 열렸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하시는 목적과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 비춰볼 때 그 정도의 위험은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CROSS19가 다가오면서 나는 주님께서 이 컨퍼런스를 사용하여 다섯 가지 근본적인 신념을 마음속에 깊이 심어주시기를 기도한다.1. 복음에 대해서 명확하라대부분의 운동팀 코치는 기본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선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복음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잃게 된다. 부활한 예수님이 투옥된 바울에게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행 23:11) 하라고 지시하신 것처럼, 우리의 사명은 예수에 관한 사실을 잃어버린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사람이라면 들어야 하는 권위있는 공적 사실의 발표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명료함과 복음의 절박함을 함께 가지고 선교 현장에 나갈 젊은이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믿도록 전도하고, 예수에 관한 사실을 바로 선포하겠다는 헌신이 필요하다.2. 행복하게 또 전적으로 지역 교회에 헌신하라“행복하게 그리고 전적으로”라는 말이 중요하다. 지역 교회는 선교 사업을 추구하는 데 불필요한 장애를 가져다주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단순히 선교에 필요한 승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지역 교회는 선교사 파송을 담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위임하셨고, 예수님이 대사명을 주신 기관이기도 하다. 교회가 없는 곳에서 개척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건강한 선교사라면 교회와 떨어져 사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지역 교회에 행복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묶여 있는 존재다. 그리고 지역 교회가 감당하는 책임과 격려를 감사할 뿐 아니라 신중하면서도 성경적인 사고를 통해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선교사들이 필요하다.첫 선교 여행을 끝낸 바울은 교회에서 장로들을 가르치고 임명하기 위해 자신이 박해를 받았던 도시들을 다시 여행했다(행 14:24-28). 교회는 그를 보냈고(행 11:30), 교회 개척이 그의 목표였다. 바울처럼 우리의 선교 전략도 교회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3. 기꺼이 가서 머물라어쩌다 한 번 정도는 크게 성공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목격한다. 히트곡 하나만 내고 다시는 히트곡이 없는 가수가 허다하다. 장기간 헌신하는 젊은 선교사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영원한 가치는 수년간 헌신을 하면서 또 수많은 시험을 겪고도 열매가 거의 없는 종들의 삶을 통해서 더 크게 드러난다. 애도니럼 저드슨(Adoniram Judson),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이 지속적인 성공은 결코 눈에 즉시 보이는 열매에 의해 측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 가르쳐주는 것에 대해서 나는 감사한다. 교회와 세상은 땅에 밀알처럼 떨어져 죽고 그 결과 많은 열매를 맺겠다는 큰 뜻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요 12:24). 컨퍼런스가 주는 흥분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꾸준하고 신실하게 사역하겠다는 사람이 간절하게 필요하다.4.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며 인내하라선교지에 가면 위험할 것이다. 정착할 때 극복해야 할 초기 결정과 과제들이 적지 않다. 또한 당신이 떠나면서 뒤에 남겨놓은 즉각적인 위험도 있다. 내게 가장 많은 가르침을 준 선교사들은 편안하게 정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이 주는 위험을 지속적으로 감수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의 끝에 보이는 지평선은 은퇴가 아닌 영원이다. 영원을 생각하며 살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닥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통해서 바울은 많은 회심자를 만들었고 많은 교회를 세웠다. 바울은 그 정도로 안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죄수로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행 21-28장). 성경이 말하는 주권자 하나님에게 단단히 자신감의 뿌리를 내린 선교사들을 더 많이 키움으로써 우리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길 바란다.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또 그분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킨다는 사실을 믿을 때에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선교사를 더 키움으로써 우리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길 바란다. 5. 항상 기도하라성령님이 선교 전략의 중심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지금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선교는 항상 꾸준하고 믿음 충만한 기도에 달려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고 희생적인 기도를 통해 얼마나 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는 오로지 천국에 갔을 때에만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교회는 기꺼이 그런 희생을 하고자 하는 남녀 젊은이들이 필요하다. 사도행전은 분명하다. 기도에 대한 엄격한 헌신(행 1:24; 4:31-35; 6:6–7; 28:8) 없이 복음은 결코 땅끝까지 전파되지 않을 것이다(행 1: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그의 고통에 대한 상을 받을 때까지 천국을 이 땅에 오도록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며 선교 현장에서 계속 싸울 더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달라고 나는 주님께 기도한다.새로운 컨퍼런스는 또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CROSS19가 가까워질수록 추수의 주님이 그의 복음과 교회를 사랑하는 일꾼, 또 그의 영광스러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선교의 사명을 장기적으로 감당할 일꾼을 일으키시길 바란다(마 9:38).원제: 5 Challenges to Future Missionaries출전: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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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시대에 대사명은 우리의 인도자이다
by Kathy Keller
2021-08-24
“복음이 모든 것을 바꾼다”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한 계간지 ‘생명의 복음'(The Gospel in Life) 1주년 기념판에 실린 글이다. 2020년 3월 창간한 계간지 The Gospel in Life는 복음이 어떻게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과 공동체 전체를 변화시키는지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를 실어왔다.양극화 시대가 가져다주는 정치권력 다툼이나 문화 분쟁으로 인해 교회의 영향력이 점점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주님이 주신 대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마음과 헌신을 바쳐야 한다.갈라디아서 4장 4절은 여러 번역판에서 일관적으로 “적절할 때, 합당할 때, 구분되었을 때, 택함을 입었을 때, 찼을 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점령된 팔레스타인에 오신 건 우연이 아니다. 성육신한 하나님이자 사람인 그는 완전한 순간에 그의 피조물에 들어가 구원하기 위해 영원 전부터 가장 적절한 시간을 선택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당시는 그렇게 좋은 시기가 아닌 것 같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이 징수하는 세금 때문에 압제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던 식민지였다. 오늘날 역사는 당시 통치했던 로마 황제들과 그들이 꼭두각시로 삼았던 유대 지도자들을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선동가로 기억하고 있다. 칼리굴라, 네로, 헤롯.그런데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자세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제자들은 스승이 승천하기 직전까지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왕국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압박했다.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했다. 세상 국가의 회복을 신경쓰지 말고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개종시키며 세상에서 제자의 수를 늘리라는 것이다. 마태는 이런 대사명(마 28:18-20)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성경을 사랑하고 특히 붉은 글씨로 표시된 예수님의 말씀에 특히 주목하는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정치적 영향력을 추구하기보다 복음을 전하라는 우리 구세주의 이런 확고부동한 명령은 오늘날 고도로 격렬한 정치 문화 상황에서 더 “필요하고, 관련있고, 적절한” 문제라는 우선순위에 밀려서 무의미한 것으로 무시되고 있다.다양한 분야에서 신학적 입장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더 적대적인 오늘날 문화에서 더 중요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전략을 포기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단체가 적지 않다. 다양한 미디어(SNS, 인쇄, 방송)를 통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사역과 설교, 그리고 공동체 생활이라는 기존의 접근 방식으로는 더 이상 기독교가 오늘날 우리 문화가 직면한 현실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도자들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정치적 차이를 극복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파함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도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로지 인간의 영광과 권력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도 교회만은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인간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바로 제시할 것이라고 소망했다. 그 뿐 아니라 교회는 예술, 미디어, 정치, 그리고 비즈니스라는 대중의 삶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기독교인(제자가 된 신자)을 파송하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이처럼 교회가 문화를 변화시키는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는가에 따라서 교회의 성장(동시에 사회에서는 ‘소금과 빛’으로 봉사하는 신자의 수)과 대중의 수용 정도가 좌우되었고, 이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이뤄졌다. 오늘날 다른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는 기독교인이라도 시대가 바뀌었고 교회와 관련한 이런 의제가 더 이상 적절하지 않거나 효과적이지 않다는 데에는 한결같이 동의한다. 그런 기독교인은 세속적이고 진보적 좌파에 속한 기독교의 적이 신자를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고 ‘무시(cancel)’하며, 또한 대중적 영향력에서 배제되거나 완전히 사라지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오늘날 강력한 목소리는 표현과 실천(예를 들어,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한 현대적 관점의 영역에서)을 통해서 반대 의견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제거할 새로운 체제를 강제로라도 부과할 것을 원하고 있다. 이런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아카데미, 예술 및 정부 부처 등 많은 부분에서 문화에 영향력을 끼치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신자들은 곧 대기업, 대학, 그리고 공무원 취업에서 아예 제외될 수도 있다. 따라서 많은 기독교인에게 균형, 정중함, 정치적 중립 및 “기독교의 매력을 발산하는 문화 참여”를 기대하는 시대는 이제 끝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설교자는 더 이상 “정치 위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더 이상 전도를 하는 등의 신실한 신자의 모습을 보일 수 없게 되었다. 구형 모델은 이제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우익 우선순위(낙태 종식)” 또는 “좌익 우선순위(고통 중에 있는 산모 중심)” 중 하나를 지지하는 진정한 신자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해법(정치권력)이다. 이런 논쟁에 발을 담근 많은 개인과 교회도 다 좋은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결국은 현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런 교회의 설교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특집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그 교회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와 관련해서 교인들이 좀 더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한 책망이 주된 내용이다. 남편(팀 켈러 목사)과 나는 교회에서 다뤄지는 주제가 사회 정의 밖에 없는 사실에 절망해서 교회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과 매주 고통스러운 대화를 나눠왔다. 이들은 하나같이 장벽을 허무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선한 의도를 갖고 일부러 다인종 교회에 합류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결과적으로 교제와 대화를 가로막는 온갖 장벽을 경험하고 있다.우리가 자주 대화를 나누는 또 다른 그룹은 목사들이다. 그들 중에 일부는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기독교인이 나서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고통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사회 정의에 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아 괴로워하는 목사들도 적지 않다. 우리 부부는 단지 집회에서 마스크를 쓰라고 한 것 때문에 교인을 잃고 교회 분열까지 겪어야 했던 목회자의 이야기도 들었다. 낙태라는 악을 인식하고 끝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은 분명히 교회의 우선순위 중 하나이다. 낙태를 살인이라고 부르고 끝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문제는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이다. 오로지 생명의 소중이라는 메시지만 전하겠다는 교회의 생각도 말씀을 바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그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배한 후에야 비로소 낙태 문제에 대해 확신하게 될 현재의 불신자에게 우리는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자궁을 통해 태어나지 않은 아기와 엄마를 이미 하나로 묶어 주신 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신경을 써야할까?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복된 소식이 전해지고, 그래서 복음으로 마음이 변하게 되면 과거에 낙태를 찬성하던 사람들조차 생각을 바꿀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기꺼이 산모와 가족, 청소년을 지원하는, 낙태를 줄이는 사역에 동참할 것이다. 그런 역사는 반드시 일어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이미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이어진다. 좌익과 우익의 여부와 관계없이 어느 한쪽의 신념에 깊이 빠진 열렬한 옹호자는 정치 및 사회 정책에 대해 말할 때에 한해서는 예의, 균형, 그리고 겸손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정치 이데올로기의 모든 범위에 상주하는 죄와 일반 은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대신, 그들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특정 지점과 교회를 동일시하면서 공공연하게 교회를 향해서도 정치적 집단이 되라고 요구한다. 극단주의자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일을 이제는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대담한 전술이 필요할 때라고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또 자기 백성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마 5장)와 같은 예수님의 명령은 무시당하거나 심지어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비난받기까지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의견을 성경적 권위의 수준으로 높이는,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도 그들은 무시한다. 오늘날 문화 현실은 놀라울 정도로 심각하게 부패했고, 더불어 세속적이고 편협한 좌파 진보주의가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층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이런 현실 속에서조차 신실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건설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종교적 신념을 민족주의 및 정치 권력과 결합하고 심지어 광신적인 음모론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우익 신념의 놀라운 증가세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기쁜 소식은 이들에게도 전해져야만 한다. 이것은 “양비론 또는 양시론(both-sides-ism)”이 아니다. 오히려 스펙트럼의 모든 지점에 대한 비판이다. 로마서 3장 10-17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시편과 이사야서를 차례로 인용하고 있다).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 3:10-17)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정치적, 사회적 가치의 어느 지점이든 가릴 것 없이)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잘못되고, 해롭고, 죄가 있고, 심지어 사악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아니한 사람이 없기에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 바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복음을 믿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새 생명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복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술사이자 코미디언인 펜 질렛(Penn Jillette)은 이렇게 말했다.나는 전도하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항상 말해왔다. 그렇다, 나는 그런 기독교인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는다. 말로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영생을 얻지 못할 수도 있고 등등을 믿는다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전도하지 않는 건, 천국이니 지옥이니 그런 대화를 하는 게 사회적으로 어색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럴 가치가 없다고? …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전도하지 않는 대상을 도대체 얼마나 미워하는 걸까? 아니,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라니, 도대체 얼마나 미워하기에 그게 가능한 걸까?그러나 현재 미국 교회의 상황이 생각과 행동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제자를 양성하기에 부적절하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공동체와 예배, 그리고 교리 교육을 강화하여 기독교인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이 세상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조차, 지금 우리에게 닥친 새로운 사회와 세계를 향한 건전한 복음주의 전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문제는 교회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마음을 변화시키고 제자를 삼는데 효과적이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복음으로 인해 사회 정책으로까지 전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특정 방식에 대해서 서로 동의하는, 이미 개종한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만 만족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복음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초대 교회는 우리만큼이나 소외된 존재였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여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그들에게는 엄청나게 효과적인 전략이 있었다. 교회는 도시에서 성장했다. 또한 주변화(marginalization)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는 내내 초대 교회는 우리가 지금이나 앞으로 겪게 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박해를 받고 있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적대적이고 소외된 문화 속에서 살던 신자들이 받아들인 전도 전략은 무엇이었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되셔서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과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와 같은 학자는 초기 기독교인이 주로 그들의 관계 네트워크 내에서 비공식적인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전도를 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로마 이교도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득력 있게 구현하고 분명히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건 효과가 있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부르셨다. 소금과 빛이라는 각각의 이미지는 차이와 참여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보여준다. 소금은 고기와 화학적으로 다르지만 고기 속으로 퍼졌을 때에만 도움이 된다. 빛은 어둠과 다르지만 바구니 아래에 숨겨지지 않고 밖에서 감지할 수 있을 때에만 어둠을 밀어낸다(마 5:15). 따라서 교회는 비신앙 문화에 동화되는 대신 고유성을 유지해야 하며, 그 문화에서 분리되지 않으면서 계속 참여하고 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비기독교인, 세속화된 기관 및 현장과 지속적인 관계와 대화를 유지해야 한다. 그들을 단순히 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런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예수님이 주신 대사명을 포기하고 대신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모든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돈을 투자하라는 허락을 당신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받았는가?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묻는 것은 언제 그가 왕국을 회복할 것인지, 즉 언제 로마를 쫓아내고 이스라엘이 이교도에게 압제당하는 나라가 아닌 경건한 나라로 재건될 것인지이다. 그러나 예수님 초림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죽기 위함이었지, 억압적인 정치 질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실상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그들이 사냥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또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교회가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늘날에도 중국의 기독교인은 정부에 의해 압제, 투옥, 고문을 당하고 있고, 교회는 불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숫자는 아마도 올해 안에 1억 명을 돌파할 것이다. 2030년까지 그 수는 3억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며, 그들 모두는 가장 가혹한 고난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폭력으로 대응하거나 정치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개적으로(또한 조심스럽게) 예배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있으면,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을 때도 예배와 전도를 계속하고 있다. 서방 교회는 아시아에 있는 이런 형제자매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영적인 권세라고(엡 6:12)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적이 눈에 보이는 세상 권세라고 말하는 건, 시대를 초월해 거짓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해 온 위대한(?)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쉬지 않고 전파되어야 하고 또한 가르치고 생활 속에서 증거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 말씀을 고작 죽 한 그릇(권력)과 바꿔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며, 권력이 아닌 말씀과 삶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서 우리가 같은 생각을 가진 신자들 사이에서 살면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숨기고 보호할 수만은 없다. 우리는 죄인과 세리를 만찬에 참여시킨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전도 전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1950년대 인도 성공회 선교사였다.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영국은 사라지고, 대신 나라 전체가 세속적인 이교 문화에 빠져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귀환한 선교사는 애초에 그를 파송한 문화의 선교사가 되어야 했다!뉴비긴은 이렇게 썼다. 좋은 소식이 있다. 그것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생각하기 전에 부정적인 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지금 당면한 가장 큰 질문이 교회의 생존에 관한 것인지는 잘 전달되지 않고 있다. … 우리 사회는 이교도 사회이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인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비전과 (이 시대가 간주하는) 가정(assumptions) 사이의 모순이 얼마나 급진적인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에 빠져 교회를 단지 우리의 지원이 필요한 많은 “선한 일(good causes)” 중의 하나로만 생각한다. … 만약에 우리가 하는 “전도”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교회의 구조를 떠받치는 노력에 그친다면(때로는 그렇게 보인다), 결코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다. 교회의 안위에 관해 우리에게는 걱정할 권리가 없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거시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온 세상에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단순하다. 우리가 지금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예수님의 명령에 맞는, 복음의 능력으로 탄생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로마서 12장 9-21절에 요약되어 있다. 이 공동체는 때때로 다양한 설득을 통해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때로는 화나게도 하는,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에는 일종의 현기증 나는 혼합체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9-21)이 말씀은 상충되는 명령이 합쳐진 것처럼 들린다. 악을 미워하라는 명령에 주목하라. 원수들과 화목하게 지내며 심지어 원수를 축복하기까지 하라고 한다. 이 부분도 주목하라. 열심을 내야 하지만 동시에 인내심을 가지라고 한다. 이 부분 역시 주목하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물질을 나누라고? 잠깐만, 바울이 마르크스주의자였던가? 당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마라. 다른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연합하라. 서로 조화롭게 살고, 사람들이 당신을 화나게 하거나 다치게 했어도 복수하지 말라. 아니,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복음 전파는 오로지 마음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다른 어떤 메시지도 복음처럼 역동적인 기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완전한 삶을 사셨고 우리의 죄가 요구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하셨고, 지금도 만물을 새롭게 하고 계신다. 그리고 마침내 이 하늘과 땅을 재창조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바로 이런 복음의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삶과 공동체 등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이런 놀라운 복음을 이 세상에 전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원제: The Great Commission Must Be Our Guide in These Polarizing Times출처: https://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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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카니스탄 목사들이 믿는 하나님의 주권
by Mark Morris
2021-08-20
7월 초, 아프간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아프간 정부에 공식적으로 신앙을 등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독교로의 개종 자체를 금지하는 이슬람 공화국에서 기독교인으로 등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교회 지도자들은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참된 믿음을 법적으로 선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는 이런 희생을 치러야 다음 세대가 공개적으로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그렇게 정부에 신앙을 등록했고 외부에서 바라보는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주셔서 제발 다음날 아침에 바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들은 인터뷰를 마쳤고, 체포되지 않았다.놀라운 교회 후퇴지난 주말에 아프가니스탄/영국 교회 수련회가 열렸다. 수련회 첫날 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의 한 목사가 탈레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너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토요일까지만 해도 그 탈레반은 편지를 받은 목사의 집 앞에 있었지만, 그는 곧 사라졌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나는 또한 삼 일 전 탈레반에게 마을을 빼앗긴 신실한 신자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는 한 아프카니스탄 목사의 말을 들었다. 이 신실한 형제의 열네 살 딸은 아버지로부터 강제로 떨어져 나와 탈레반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그리고 여자라면 수행해야 하는 “의무적인 이슬람 특권과 책임”이라고 부르는, 사실상 성노예가 되어 끌려갔다고 했다. 토요일 들어서 탈레반이 이미 카불 거리를 걷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는 아프간 친구들과 함께 울고 기도하며 또한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기를 바라는 현지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가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떠날 수 없었다. 도로와 비행기는 이미 폐쇄된 상태였다. 많은 주제들 중에서도 주일 아침에 우리가 다룬 것은 출애굽기 7장에서 11장에 나오는 재앙이었다. 때때로 바로왕은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었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 방에 있던 한 아프가니스탄 복음 전도자가 이렇게 덧붙였다. “하나님이 예레미야 27장 6절과 예레미야 43장 10절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왕 느부갓네살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가장 확실하게 탈레반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출애굽기 33장 19절을 펼쳤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나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알고 믿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악이 아프가니스탄의 형제자매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악이 그 도시와 국가를 정복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로마서 9장을 펴고 선하고 자비로신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하는 우리 자신의 오만과 마주했다. 그는 토기장이이고 우리는 단지 그의 진흙일 뿐이다. 우리는 또 이사야서 8장과 이사야서 28장을 통해 기초석과 거칠게 하는 돌의 이미지를 묵상했다. 로마서 10장에서 우리 모두는 탈레반이라는 폭풍우를 뚫어낼 수 있는 유일한 초석인 예수님이라는 믿음 위에서 굳건하게 서야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고난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우리는 언젠가 십자가와 고난에 관한 비밀 교회 모임에서 데이비드 플랫(David Platt)이 주었던 훈계를 요약하는 것으로 모임을 마무리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더 높은 기대를 가지고 고난을 맞아야 한다. 2.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겸손한 시각을 가지고 고난을 맞아야 한다. 3. 예수님의 고난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과정이었던 것처럼, 고난과 악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4. 하나님은 다양한 목적과 방법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을 주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으로 이끄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그분을 의지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해서이다. 5. 마지막으로,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을 완수하려는 그분의 계획의 일부로 당신의 백성을 고통과 격동의 바다로 인도하신다. 찬양 리더가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골랐다. 마지막 구절을 부를 때 아프가니스탄 형제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방금 사임했습니다. 이제는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찬양했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다 빼앗긴대도진리는 살아서그 나라 영원하리라아멘더 힘들게 하는 뉴스월요일 아침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말에 예비하신 역사하심에 감사하면서 눈물의 기도를 올린다. 이 어려운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모두가 다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위로하고 기도하고 또 탄식하며 울었다. 주말을 기점으로 더 충격적인 보도가 나오고 있고, 아프간 교회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탈레반은 어린 기독교 소녀들을 뒤쫓고 있다. 탈레반이 조금 전 한 교회 지도자의 집을 습격해서 성경과 서적을 압수했다고 한다. 여기 멤피스에서 사역하는 한 아프간 목사는 이렇게 썼다. “나는 지금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단어조차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일이 되면 그는 어떻게든 Mohabat.tv와 facebook.com/afghantv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은 소망의 메시지를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라이브로 방송할 것이다. 토기장이는 오늘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토기를 만들고 있다. 원제: How Afghan Pastors Reflect on God’s Sovereign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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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준에서 바울은 모자란 선교사였을까?
by Jonathan Worthington
2021-08-12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신다. 그건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그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사명을 “선교”라는 모자란 생각으로 축소한다. 하나님의 사명은 문자 그대로 우주적 규모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마지막에 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일부는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고 나머지는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물 속에 있는 미움을 없애고 있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부활해 이 세상을 통치하는 아들의 피를 통해서 이 우주적 평화를 이루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대사명하나님의 우주적 사명의 필수적인 부분 중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주신 대사명이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주적 평화를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과정을 책임질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회심하도록 이끄셨고, “모든 족속(panta ta ethne)을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을 가르치라”(마 28:19-20)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공동 사명이다. 왜냐하면 왕 되신 예수께서 그 사명을 수행하는 내내 흔들리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공동 사명을 수행한 지 몇 년 후, 바울과 바나바는 왕의 행군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일부 선교사, 교회 및 “선교” 기관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바울과 바나바의 실질적 사례바울과 바나바는 미전도 유대인과 비시디아 안디옥의 연합 이방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했다(행 13장). 두 번째 안식일 발표 후, 이방인(열방, ta ethne)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또 영화롭게 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과 저명 인사들이 그들을 쫓아냈다.바울과 바나바는 미전도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왕 되신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남쪽 갈라디아로 95마일(도보로 아마도 30시간 거리)을 여행하여 이고니온에 이르렀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 이방인(열방, ta ethne), 그리고 통치자들은 그들을 거의 돌로 쳐서 죽일 뻔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로이스, 유니게, 그리고 디모데의 고향인 루스드라까지 남쪽으로 20마일을 더 달려갔다(도보로 6시간 추가?). 그리고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 16절)의 일부이자 리카오니아 언어(행 14:8-20)를 사용하는 미전도 종족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고니온(20마일 떨어진 장소)과 심지어 비시디아 안디옥(115마일 떨어져 있음)에서 온 유대인들이 군중의 마음을 바꿨다. 그들은 바울을 돌로 치고 그의 몸을 성 밖에 내던졌다. 그러나 바울은 일어나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바울과 바나바는 갈라디아를 통해 더 동쪽으로 전진했다. 오늘날 인기 있는 선교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이 지역에서 작업(task)을 완료해야 했다. 그들은 이곳 갈라디아에서 이방인(열방)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더베까지 70마일을 더 걸었다. 그리고 더베의 미전도 종족 가운데 “많은 제자”를 삼았다(행 14:20-21).여기서 잠깐 멈추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까지 빨리 읽기만 하지 이 속에 숨은 암시적이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놓친다. 사도행전 14장 21절을 보면 중요한 선교적 결정이 더베에서 일어난다. 바울과 바나바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과 남부 갈라디아 전역의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했다. 이제 효과적인 선교사로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당신의 성화된 상상력을 사용하여 갈림길에 선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대화를 상상해 보라(다음 대화는 현대적 표현으로 약간 바꿨다).바나바: “글쎄, 어떻게 생각해? 시실리안 성문을 통해 남동쪽으로 우회해서 갈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다소에서 일단 당신 가족을 만나고 나서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야.”바울: “맞아. 파송한 교회에 보고도 해야하니까.”바나바: “그래, 그러고 나서 다른 미전도 지역으로 가면 되지.”바울: “응, 하지만… (잠시 생각)…. 여기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어. 갑바도기아 전역의 많은 미전도 국가들도 그리스도 왕국의 좋은 소식을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바나바: “당연하지.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왕이 주신 임무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완수해야 할까?”바울: “흠, 작업을 완료하려면”….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그와 공동 선교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 중이다)…. “알았다! 이미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야 해!”바나바: “아니, 돌을 맞은 거기로? 쫓겨난 거기로? 이미 복음을 들었고 그래서 더 이상 ‘미전도 종족’이 아닌 거기로 말이야? 아멘!”이게 당신이 예상한 결론인가?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 메모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선교를 끝내는 것은 복음을 가지고 미전도 종족에게 가는 것뿐이다. 아니면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위대한 대사명을 반으로 축소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 점을 이해했을 것이다.그리스도의 사명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에 거하도록 권하며,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함을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각 교회에서 그들을 위하여 장로들을 선발했고, 기도와 금식으로 주님께 그들을 맡겼다. (행 14:21b-23)바울이 신자들과 지역 지도자들을 더 세우고 가르치는 데 사용한 시간과 정력은 다름 아니라 그가 미전도 종족을 개종시키는 데 썼어야 할 시간과 정력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라. 한 마디로 그는 보기에 따라서 “덜 긴급한” 사역을 선택했다. 그가 갈라디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데에 들인 시간 또한 새로운 영혼을 개종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갈라디아에 있는 그 교회들을 계속해서 다시 방문하는 시간(행 16:1-5; 18:23; 19:1)도 마찬가지로 미전도 종족 개종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계속해서 이미 전도한 곳에 되돌아가고 또 되돌아가는 데에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했을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모든 족속을 회심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제자를 삼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명과 모든 자원을 투자했고, 그에 따라 다른 기독교인들로부터 지원받은 모든 자원까지 투자했다.그러나 오늘날 많은 선교 전문가들은 갈림길에 선 바울과 바나바에게 전혀 다른 가르침, 이런 식의 충고를 했을 것이다. "형제 여러분, 사명(mission)은 분명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습니다. 북쪽으로 향하여 갑바도기아에 있는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형제여, 이제 나가서 임무(task)를 완수하세요!"이것은 내 친구들이 선교 현장에서 실제로 받은 코칭 내용이다. 나는 너무 느리게 전도하고, 너무 비효율적으로 사역하며, 미 전도 종족을 외면한다는 이유로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선교사에게 자금을 지원하지 않으려는 교회와 많은 대화를 나눠왔다. 비록 선의라 할지라도 축소된 선교사의 사명은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상처를 준다. 선교사 사역의 내구성과 지속성을 해친다. 그리고 통계 수치가 그리 나쁘지만 않았다면 얼마든지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선교 파트너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가 지금 선교를 업무와 조언 그리고 투자라는 측면에서만 보기에 그리스도의 공동 사명을 축소한 건 아닌지, 또는 지금 축소하고 있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하나님이 이루시는 우주적 화해와 평화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 하나님에게 많은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닌가? 선교는 시급한 일이다. 그렇기에 더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다. 원제: Would Paul Be Considered a Bad Missionary Tod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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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직도 선교에서 미전도 종족이 중요한가
by Brooks Buser • Chad Vegas
2021-06-18
민족 고유의 언어를 쓰는 미전도 종족(ethnolinguistic people groups) 선교는 최근 들어 더 이상 선교에 있어서 전략적 우선순위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중요성이 떨어지고 있다. 그런 주장의 요지는 이것이다. 미전도 종족(UPGs, unreached people groups) 선교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에 세계 선교가 다소 위험한 영역에 들어섰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성경적 방법 대신 세속적인 선교 방법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도 있다. 미전도 종족 선교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각 나라 지역 교회 사역에 필요한 핵심 자원까지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게 맞는 말일까? 나는 예수님이 준 대사명 속에는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아직 완수되지 않은 사명을 완수하라는 명령이 들어 있고, 그러므로 미전도 종족 선교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믿는데, 거기에는 다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판타 타 에스네(Panta ta ethne)의 의미는 여전히 ‘종족’을 의미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종족이 복음을 접하지 못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명령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모든 민족’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바로 판타 타 에스네다. 이 구절 속 ‘모든 민족’이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정치적 국가의 개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보편적인 동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비유대인 또는 이방 민족으로 이해하는 게 맞다고 주장한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그의 책 ‘열방을 향해 가라’(Let The Nations Be Glad)에서 민족을 의미하는 헬라어 에스노스(ethnos)와 판타 타 에스네가 신약 안에서 단수와 복수로 쓰인 사례를 모두 열거하고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지금까지의 결과를 종합해서 볼 때, 판타 타 에스네는 ‘모든 민족(종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 물론 이 단어가 쓰일 때마다 항상 민족을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런 가능성은 헬라어 구약에 나오는, 거의 백 번에 가까운 판타 타 에스네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면 훨씬 더 자명해진다. 헬라어 구약에서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단 한 번도 ‘이방인 개인’을 의미한 적이 없다. 언제나 ‘모든 민족’을 의미했고,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밖에 있는 다른 종족을 의미한다. 성경이 말하는 종족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족인지 확실하게 규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했을 때 그의 제자들이 이해했던 바로 그 의미 그대로 이 종족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마 28:19–20; 눅24:45–47; 행 1:8; 롬 15:21).예수님의 대사명 속에 미전도 종족이 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대사명 속에 선교에 필요한 전략도 들어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전도자도 없고, 제자도 없고, 또 가장 중요한 교회도 없는, 전도해야 하는 3,193개의 종족이 무작위로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만연하다. 접근하기가 어렵고, 복음을 향한 정부의 적대적 태도 그리고 그 종족의 언어를 유창한 수준으로까지 배우는 데 어려움이 있는 정도에 따라 미전도 종족들이 분류되어 있다. 이런 어려움에 더해서, 미전도 종족은 종종 선교에 필요한 자원의 먹이 사슬 가장 아래에서 논의되는 게 현실이다. 기독교인의 기부 중 1퍼센트도 채 안 되는 자원이 미전도 종족 선교에 쓰인다. 미전도 종족과 함께 사는 기독교인 선교 사역자는 전체 선교 사역자 중 4퍼센트도 채 안 된다. 이것은 지금 미전도 종족 선교가 지금 예수님의 대사명 속에서 얼마나 하찮게 취급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수치다. 상황이 이런데도, 마치 미전도 종족 선교가 여전히 선교에서 ‘전략적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혹자가 주장하듯이 미전도 종족에 대한 강조를 축소시킬 때(de-emphasizing) 과연 어떤 결과가 닥칠지는 상상만 해도 무섭다. 미전도 종족은 접근하기도 어렵고, 함께 살기도 어렵고 게다가 그 안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인격에 끈기와 좋은 훈련까지 받은 형제, 자매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히 회심자 숫자와 개척 교회 숫자로 성공을 평가하지 않는, 적절한 기대 수준을 가진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한다. 미전도 종족 전도는 가능하다. 오늘날에도 느리지만 체계적으로 미전도 종족 선교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향한 환호성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2. 잘못된 방법이 목적까지 바꾸지는 않는다많은 이들이 마태복음 24장 14절을 잘못 이해한 탓에, 오늘도 빠른 속도로 이 과업을 마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사역하고 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이 구절에 대해서 선교적으로 또 종말론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선교적인 오해는, 오늘날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초대 교회와 같이 교회를 개척하고 강하게 성장시킬 필요는 없이 단지 복음을 불신자에게 ‘선포’하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선교를 축소하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오해로는, 미전도 종족을 규명하고 그들에게 단지 복음을 선포하기만 하면 우리의 사명은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불러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식의 잘못된 선교에 대한 비전과 전략은 결국 제자 양육에 필요한 장기적인 관점을 훼손시킬 뿐 아니라, 신약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것을 힘들게 만든다. 이런 생각은 궁극적으로 무책임한 방법론으로 귀결된다. 선교사 양성 기관인 래디어스 인터내셔널(Radius International)에서 우리는 이러한 방법론을 서면으로 부인했으며 또한 최근에는 이와 관련해서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교회 개척 운동, 제자 양육 운동, 내부인 운동(Insider Movement), 단시간 교회 개척 외에 이런 비슷한 운동에서 만나는 속도와 실용주의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나쁜 선교 방법이 초래한 결과이지 결코 미전도 종족 선교를 지나치게 강조해서가 아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돈하는 것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해롭다. 오늘날 지배적인 선교 방법이 도입되기 한참 전에도 (기억하자, 방법론은 단지 신학의 산물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글래디스 아일워드(Gladys Aylward), 윌리엄 보든(William Borden), 그리고 존 페이튼(John Paton). 그들은 하나같이 영어를 쓰는 민족은 이미 충분한 복음의 빛을 받고 있지만, 다른 민족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3. 복음이 전파된 종족과 그렇지 않은 종족을 서로 대립 관계에 두는 대신, 우리는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복음이 전파된’ 종족과 ‘미전도’ 종족을 놓고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의 생각은 강제적이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선택을 요구한다. 물론 미전도 지역을 향해서도 해야 할 많은 사역이 있지만, 동시에 이미 복음이 들어간 지역에서도 할 일은 적지 않다. 신학교와 성경 학교, 또 국가별 훈련소 설립과 더불어 강력한 지역 교회를 세우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지역 교회를 통해서 양성하는 회심자와 제자들은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가지고 그 지역을 복음화 하는 데 가장 강력한 힘이 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해당 지역 또는 그 너머까지 미전도 종족에 복음을 전하는 데도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바울에 의하면 이미 복음이 들어간 종족과 그 지역에서 몇 퍼센트의 사람이 회심을 했는가는 상호간에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복음이 들어간 지역에서 선교를 하는 것이 덜 가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을 미전도 지역인 스페인으로 보낸(롬 15:23-24) 바로 그 하나님은 디도와 디모데를 이미 복음이 들어간 그레데와 에베소로 보내 계속해서 그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도록 했다. 바울이 받은 독특한 사명은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걸쳐서 자신이 이미 구축한 것과 동일한 토대를 모든 미전도 국가, 모든 종족 그리고 모든 언어마다 놓는 것이었다. 디모데와 디도는 단지 다른 사명을 받은 것일 뿐, 그게 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곳이 선교지다”라는 생각이 팽배한 상황에서 복음이 들어간 종족과 미전도 종족을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늘날 교회를 나설 때면 입구에 이런 글귀를 붙여놓은 교회가 많다. “당신은 이제 선교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선생님도 많다. “우리는 다 선교사입니다.” 이런 구호들이 다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는 그게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다. 자, ‘모든 기독교인은 선교사다’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그러면 지금 미국의 도시에서 사는 당신에게 이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결국 당신이 사는 도시에는 수천, 수만 명의 선교사가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케라리쉬(Kerarish), 파샤이(Pashayi) 및 암토(Amto) 종족에는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다. 그렇다면 전략적으로 볼 때 우리의 선교 에너지와 자원을 어디에 쏟는 것이 바른 것일까? 이미 복음이 들어간 지역과 미전도 지역에 대한 구분을 모호하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복음이 없고, 제자도 없고, 또 교회가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잃게 된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장소에 전략적인 우선순위를 두라고 말한 바울이 비난 받아서는 안 된다(롬 15:20). 그의 선교 사명은 해당 지역에 더 이상 선교할 대상이 없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선교의 개척자인 바울에 의하면, 이미 복음이 들어간 지역이 따로 있었고, 거기서 선교하는 것은 바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디도와 디모데는 교회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은 존중과 격려를 받았다. 역할의 차이는 명확하고 보완적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받은 사명에 따른 차이가 분명히 있다. 대사명에 따르면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무리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여전히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선한 목자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잃어버린 양들을 향한 사랑에 우리 교회가 게으르지 않기를 바란다. 원제: Why Unreached People Groups Still Matter in Miss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선교지침
미전도
종족
전략
일루리곤
존파이퍼
복음
소규모 교회를 위한 선교 전략
by Matthew Spandler-Davison
2021-05-26
나는 네 종류 국적의 소유자다. 아일랜드인 아버지의 아들로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스코틀랜드에서 성장하여 미국인 아내를 맞아 결혼했다. 현재 가지고 있는 미국과 영국 여권 외에 두 개의 여권을 더 가질 수도 있었는데, 그 이상의 여권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런데도 나는 현재, 대부분의 주민이 여권을 가져본 적조차 없는 작은 켄터키 마을의 교회를 섬기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미국의 많은 교회는 대부분 100명 미만의 교인이 출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교회의 대다수는 작은 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이런 교회가 선교를 위해 나서기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 교인 대부분은 해외여행을 해본 경험이 없다. 교인 대다수는 선교지까지 가기 위한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수천 달러를 지불할 여유도 없다. 게다가, 성장을 경험하지 못한 교회는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외부로 보유한 역량을 펼쳐보겠다는 계획에 회의적일 수도 있다.그러나 아무리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전략적 접근 방법을 가지고 있다면 해외 선교에 참여할 수 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은 결코 교회와 분리될 수 없다. 선교는 그 자체가 바로 교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고자 하는 선교적 열망을 가졌다면 아무리 교회 규모가 작더라도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잘 따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비교적 작은 지역사회(인구 약 20,000명)에 있는 소규모 교회(출석 교인 수 140명)에서 목회를 하고 있지만, 나는 이러한 숫자에 불과한 통계가 우리의 비전을 가로막거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30명 가까운 교인들을 보내 스코틀랜드의 교회 개척을 지원하였고, 필리핀 남부에서 핍박을 받았던 목사의 훈련을 위해 다른 지역 교회들과 협력하였으며, 해외에서 현재 풀타임 선교를 하는 두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을 도왔다. 이처럼 작은 규모의 교회라 할지라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불과 몇 주 전에 나는 켄터키에 있는 우리 교회 교인들과 더불어 복음 선포를 담당할 교회가 없는 스코틀랜드 마을의 거리를 걸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며, 공원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을의 유일한 성도의 가정에서 그들과 함께 그 지역에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세워지는 꿈을 그려보며 모임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 헌신하고 있는 작은 규모의 교회 신도들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믿음의 형제들을 격려하고, 복음 전도의 열망에 불타는 그들의 노력을 돕기 위해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기꺼이 정착하여 교회 개척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사역자들을 위해 자금 조달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재정 지원을 약속하는 것들은 우리가 이 소명을 이행하기 위한 몇 가지 실용적인 방법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고자 하는 작은 교회들은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다.미국에서 온 네 명의 목사가 필리핀 남부 지역을 함께 여행하며 핍박받는 목회자들과 함께 사역하며 일주일 동안 정글 속에서 성서 신학을 가르치고 그 지역의 성도들을 통해 선교를 위해 준비되도록 양육하는 일을 상상해 보라. 이들 중 두 사람은 해외여행을 해본 적이 없고 세계 선교에 관여해 본 경험도 없는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런데도 그것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며, 또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는 어떻게 다른 나라를 위한 선교적 헌신을 일으킬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다음의 네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복음을 선포하라선교와 관련된 여러 통계와 영상 자료들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할 수는 있겠지만, 오직 복음만이 성도들을 바르게 움직여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복음이 한 번도 전파된 적이 없는 곳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믿음의 자녀들이라면 ‘이에 대해 우리가 뭔가 해야겠다’라는 도전 정신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온 땅의 주인 되시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예배받기 원하시며, 예수님의 선포로 영화롭게 되신 하나님에 관한 설교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세계 선교의 책임에 대한 열정을 갖게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흐르는 선교적 사명의 실마리를 강조하는 성서 신학의 내용으로 설교하도록 한다.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라선교지가 있는 나라를 위해 예배 중에 기도하며 특정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를 드린다. 나는 Operation World(http://www.operationworld.org)와 같은 사이트를 이용하여 특정 기도 대상을 정해 집중적으로 기도한다. 교회가 지원하고 있거나 교류가 있는 선교사를 위해 특별 기도를 드리도록 한다. 교회가 선교사와 직접 교류할 수 있도록 인터넷 영상통화 또는 사전 녹화된 비디오 메시지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선교 대상을 선정하여 정기적인 사역 현황 소개, 선교지의 여러 필요와 요구 사항 그리고 기도 요청을 모든 성도와 공유하도록 한다.파트너십 개발국제적인 협력관계를 활용하도록 한다. 우리 교회는 서서히 관심권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와 몇몇 교회, 그리고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는 목회자들과 교류하며 협력하고 있다. 우리의 다음 목표는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선교 대상의 선정을 위해 지역의 다른 교회와 협력하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금년에 우리는 스코틀랜드에서의 선교를 진행하기 위해 세 곳의 다른 교회들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우리 교회는 향후 5년 동안 스코틀랜드에 10곳의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에서 동역할 수 있는 교회를 찾기 위해 크게 애쓰고 있다.기회 제공마지막으로, 선교지로 가는 것을 고려하되, 이미 그곳에 있는 사역자들의 파트너로 참여하며 그들의 지침에 겸허히 따르도록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선교사 또는 기관과 협력하는 방법을 찾도록 노력한다. 복음 중심적인 사역을 하여야 함을 명심하고 그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목표로 삼도록 한다. 가능하다면 성도들에게 재정적인 지원까지도 고려하여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우리 교회는 여행 비용의 50퍼센트까지 재정적으로 후원한다. 지역의 침례교회 협의회에서는 목회자들의 선교를 위한 경비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선교에 참여하고 있는 교회들을 재정적으로 보조할 수 있도록 파트너십을 개발하였다. 만약 우리가 복음 하나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믿고 열방에 대한 우리의 부르심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모든 교회가 그 규모와 관계없이 선교에 관한 흥미진진한 잠재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원제: How Small Churches Can Support Miss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선교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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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선포
선교지
기도
비즈니스 선교가 필요한 이유
by Anonymous
2021-04-23
점점 많은 사람들이 비즈니스와 선교를 통합하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개념은 몇몇 영역에 있어서 아직도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어떤 교회들은 아예 그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어떤 교회는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기존의 전통적 선교 방식을 고수한다.그럼에도 '선교로서의 비즈니스'(Business-as-Missions, BAM)를 인식한 교회들은 제자를 만드는 것을 중점으로 하는 기존 선교에서 이탈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그러면, 교회는 이런 선교로서의 비즈니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일단 BAM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당면한 도전의 하나는 어떻게 이름을 붙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용어를 쓰게 될 때, 지금 우리는 미전도 종족들 사이에 교회 개척을 가능하게 하는 사업 구축을 의미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BAM이 선교를 촉진하기 위해 평범한 사업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BAM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선교를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용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필요왜 기존의 전통적인 선교 모델보다 BAM과 자비량 선교(tent making)가 점점 더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을까? 가장 먼저, 거기에는 복음에 대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이 세계에는 복음을 듣지 못한 6천 개 종족의 28억의 인구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을 전할 보다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기독교인의 복음 전파를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그런 나라의 경우 직업을 통해서 그 나라를 섬기면서 접근할 전문 기독교인이 필요하다. 세 번째로, 세계는 점점 더 도시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문가의 숫자도 증가하고 있다. 2008년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있다. 2030년까지 이 숫자는 60퍼센트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증가하는 인구와 자연스럽게 교류할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팀 켈러(Tim Keller)는 대도시에 사는 전문가들 사이에는 문화를 초월한 공통된 관심사가 있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전문가는 같은 나라의 시골에 사는 사람보다는 인도 뉴델리에 사는 비슷한 업종의 전문가와 훨씬 더 공통점이 많을 것이다. 해외에서 일하는 인력을 어떻게 준비시킬 것인가목회자는 해외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교인들을 어떻게 준비시켜야 할까? 첫 번째로, 교인은 서구에서 일할 때에 성실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탁월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두 번째로,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비전을, 특히나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비전과 그런 사명을 맡은 특권을 강조해야 한다(롬 15:20).해외에서 일하고자 하는 기독교인에게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그들이 직업에서 더 발전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더 원하는가? 좋은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두 가지 다 바른 결정이다. 그 중에 더 영적이고, 덜 영적인 구분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는데, 이 글 마지막에 언급하겠다.) 당신이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이 무엇인가는 당신의 준비와 기대수준에 영향을 미친다.직업적 발전을 강조하는 경우직업적인 발전을 더 강조하는 기독교인의 경우, 외국에서의 생활은 아마도 고작해야 2년에서 3년이면 끝날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들의 역할은 다른 선교사들이 만나기 힘든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신실한 교인으로서 봉사하고, 또 지역 신자들에게 직장에서 복음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이런 경우에 자기 직장에서 풀타임 일을 하기 때문에 그 지역 언어를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주로 관계를 맺는 것은 관련 업종 사람 또는 그 지역에서도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다. 그러면, 어떤 종류의 일이 가능할까? 종종 다국적 기관이 해외 근무 기회를 제공하면서 특히 임원직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꽤 괜찮은 보수를 제안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자리는 노동 시간이 길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중급에 해당하는 사람이 해외에서 받는 보수는 미국보다 적고 해당 지역의 전투력 높은 경쟁사와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것을 떠나서 첫 번째로, 해당 지역에 있는 좋은 교회를 찾아내고 또한 파견되어서 교회 개척을 하는 팀과 파트너를 맺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기회가 가능한 많은 도시가 있다(예를 들어, 두바이, 뮌헨, 그랜드 케이먼, 싱가포르). 이런 전략을 통해서 도시에서 활동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2 X 2 매트릭스다. 이 매트릭스에서 하나의 기준은 해당 도시가 어떻게 아직까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응 용이성에 대한 평가다. 그러나 좋은 교회 또는 교회 개척 팀이 아예 없는 지역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서 이집트에 있는 미국 다국적 기업의 고위층에서 일하지만, 영적으로 공급받지 못해서 또 이국땅의 여러 환경 때문에 대단히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목회자는 해외 거주를 고려하고 있는 교인들의 삶을 평가하는 데 특히 중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또 직장에서도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을 외국으로 보내야 한다. 행여나 현지 사람들에게 오히려 부담을 줄 수 있는 기독교인을 해외에 가라고 부추겨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또한 교인이 해외에 나가서 출석할 교회와 함께 일할 교회 개척팀을 잘 알아보고 평가하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만약에 그런 교회나 또는 파트너가 없다면, 아무리 해외 근무가 경력에 도움이 되더라도 목회자는 교인에게 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해야 한다. 따라서 해외로 나갈 준비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지역 교회에서 신실하고 열매 맺는 교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현지 언어를 미리 배우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 이것은 현지인과의 관계를 향상시킨다. 또한 다국적 기업을 통해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현지 언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유학 옵션과 시간이 넉넉한 대학생이라면 외국어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특히 이런 해외 선교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10/40 창(10/40 Window: 선교단체들이 규정하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북위 10-40도 사이에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 창 지역은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위키백과)에서 사용하는 아랍어, 터키어, 페르시아어, 러시아어, 만다린 또는 힌디어와 같은 언어를 배워놓아야 한다. 해외 근무가 하나님의 왕국 건설에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한계도 있다. 전문가의 자격을 갖춘 기독교인이라면 어떤 국가의 가장 큰 도시로 파견가는 기회는 얻을 수 있지만 중소 도시로 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중소 도시도 복음을 필요로 한다. 그런 곳은 심장부도 아니면서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를 전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이 든다. 그렇기에 그러한 장소에 복음을 전하고 또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교회 개척을 강조하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 개척에 집중하는 경우이 전략은 더 긴 기간을 필요로 하는데 외국에서 보통 5년에서 10년의 거주를 의미한다. 목표는 비즈니스를 하면서 동시에 회사 운영과 관리 그리고 비즈니스 개발 전반에 걸쳐서 선교적인 접근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은 가장 먼저 해당 지역 언어와 문화를 배워서 복음을 보다 더 지혜롭게 전하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AP(Access Partners, 접근을 돕는 파트너)는 BAM과 자비량 선교가 지향하는 바로 이런 목표에 중점을 둔다. 우리는 다양한 산업에서 교회 개척을 용이하게 하는, 복제가 가능한 사업 모델을 구축한다. 이러한 전략 중 일부는 새로운 비즈니스 창업이며, 또 다른 전략은 기존에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비즈니스와 제휴하여 구축한다. 직업적 발전에 중점을 두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른 교회와 교회 개척팀에 합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해외에 갈 사람이 다니는 교회의 장로들은 그들이 현명한 파트너십을 맺도록 도와야한다. 지역 교회는 궁극적으로 앞으로 선교사를 파견할 곳이므로 이런 전략에 더더욱 관심을 쏟아야 한다. 따라서 해외 이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목회자나 장로들과 이 문제에 대해 미리 의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중동 지역에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그들의 교회로부터 신속하게 승인을 받은 부부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이런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 이유는 그 부부가 몇 년 동안 장로들에게 잘 알려졌고, 또 이미 많은 분야에서 신실함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준비는 주로 영적인 부분에서 이뤄진다. 교회와 복음의 본질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소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익과 손해'라는 경험을 쌓는 것이 유익하다. 또는 BAM 참여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비즈니스와 팀을 운영해보는 것도 유익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에 거주하는 기독교 사업가들에게는 참여할 기회가 있다. 그들은 더 적은 수의 신자들이 있는 곳에서 선교사들을 고용하면서 지역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목회자들은 그러한 사업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들의 사업을 포함하여 그들에게 주신 모든 재능을 적절하게 배치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복음을 위해 이주하기그러나 직업적인 발전과 교회 개척을 둘 다 추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방식의 한 예는 아예 복음을 위해서 영구적으로 다른 나라에 이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기 어려웠을 때의 선교 방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염색 공장을 세우고 대학을 설립했으며 또 원예 협회를 설립했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짧은 기간의 해외 선교는 최근에 개발된 선교 형태다. 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운다는 측면에서 볼 때 해당 나라에서 보내는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선교하는 사람은 소수지만 그럼에도 매우 고무적인 예가 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예전 공산주의 국가로 이주하여 교회를 시작했으며 업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그 나라의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었으며 지역 기독교인들에게는 고용 창출의 기회를 제공했다. 혁명적인 것은 아니지만 열린 문이다BAM과 자비량은 선교를 하는 혁명적인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열린 문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목회자들이 이 기회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워서 더 많은 교인들이 그들의 기술과 경험을 사용하여 땅끝까지 제자를 만드는 데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격려하길 바란다.작가 이름은 보안상의 이유로 무명으로 남겨두었다. 작가는 복음 전파가 되지 않는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구축하는 단체인 'Access Partners'를 이끌고 있다.-편집자원제: What is Business as Missions?출처: www.9marks.org번역: 무제
선교지침
비즈니스
자비량
직업
윌리암
BAM
복음
이주
해외 선교지와의 교류가 교회에 주는 유익
by Jen Oshman
2021-02-24
매주 당신도 정신없이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예배팀과 미팅하고, 소그룹을 인도하고, 위기에 빠진 부부도 만나 상담하고, 게다가 설교문까지 작성하면서 말이다. 또는 예배 규모까지 생각보다 커져 어떻게 돌봐야 할지 모르겠는데, 주일학교를 맡던 사역자가 갑자기 그만두기도 한다.나는 이밖에 더 많은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남편이랑 거의 이십 년 동안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 교회 개척자로 섬겨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시급한 일이 교회 개척자의 일상을 얼마나 쉽게 장악하려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때로는 그렇게 바쁜 일상이 좋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이러나저러나 결국에는 잠자리에 엎어져 곯아떨어진다. 교회 개척은 분명 고단한 사역이니까.이처럼 늘 시급한 하루하루의 사역은 마치 중력처럼 우리를 끌어당겨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그러한 생활이 당연하긴 해도 원래 의도한 바는 아니어서, 우리는 처음에 교회를 개척하며 그렸던 그림에서 점점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어쩔 수 없이 안으로 쏠리게 되는 교회 개척자당연한 말이지만, 교회 개척자란 선교를 지향하는 사역자다. 예수님의 제자를 삼고자 하는 열정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이다.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교회 개척자란 말은 무색하다.그런데 교회를 개척한 후에 그 지역 교회가 요구하는 엄청난 일로 시달리다 보면, 지상명령을 위해 다른 나라로 나갈 수 있는 여력은 거의 남지 않게 된다. 오히려 지역 교회의 필요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내부적인 사역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한 의도는 감히 품지 못하게 한다.더 나아가 자칫하면 교회에 혼란과 위기를 초래할까봐 세계 선교는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국제 사역이 가져다줄지 모를 골치 아픈 과제를 피하려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 사회의 필요에만 집착하기도 한다. 또는 세계 선교를 하는 데 필요하다 여겨지는 예산이나 스태프 혹은 교회 규모가 확보되는 날이 오면, 그날에야 사명을 감당하겠노라고 다짐하며 미루기도 한다.그 결과, 우리가 목양하는 교회의 성장만 확신하게 될 뿐 세계 선교는 뒷전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사실 국제적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에 동참하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가 않다. 오히려 그러한 파트너십은 놀랍게도 우리의 지역 공동체를 훈련시키는 데 매우 큰 유익을 준다.세계 교회의 성장이 낳는 지역 교회의 성장이 시대의 문화나 우리 각자의 본성 또는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제시하는 내용과 달리, 진정한 제자도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 할 때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 우리를 희생할 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풍성한 생명(요 10:10)은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타인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줄 때 누릴 수 있다(마 16:25).이런 차원에서 다른 나라에서 제자 삼고 훈련하는 사역에 교회가 동참하게 되면, 그 교회의 성도들 또한 함께 훈련되고 성장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도 가서 그러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하셨다. 이러한 식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추구하는 일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고 세상의 논리와도 상반되지만 충만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물론 그 일에는 시간이 든다. 곧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전통적 장벽을 뛰어넘는 데만 수년이 요구된다. 이러한 사역에서 성공을 맛본 자들은 국내 교회와 해외 교회가 함께 열매를 맺는 데는 최소한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하나님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실" 분이다(시 46:10). 그러기까지 일정 기간의 사역이 우리에게 요구되겠지만, 그 사역은 우리의 영원한 기쁨을 위한 일이 된다. 그분은 이미 자신의 교회를 세계 곳곳에 세우고 계신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가 꼭 필요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를 초청하고 계신다.상호적인 유익을 얻는 파트너십문화의 장벽을 넘어 두 교회 간에 이루어지는 파트너십은 서로가 공유하는 신앙을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상대편 교회에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파트너십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더 넓고 풍성한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상호 유익을 주고받는 관계는 두 교회가 소통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재정적인 부담까지 나누게 될 때 활성화된다.따라서 상황이 허락된다면, 각 교회 리더들과 사역팀들은 상대편 교회에 방문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각 방문자는 일종의 대사로서 상대편 교회의 이야기와 사진 그리고 필요를 가지고 돌아와 기존 성도들과 나누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두 공동체 사이에 교제의 길이 잘 닦여 마침내는 문화를 초월한 형제간의 친교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다. 마치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던 초대교회처럼 말이다(행 2:44).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단기 선교 여행을 가는 데 익숙해져 있다. 곧 현지에 가서 새로운 광경에 놀라기도 하고 나름의 보람도 느끼면서 여행을 한 후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해외에 있는 파트너들의 말에 의하면, 그런 사역은 현지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해로운 결과를 남길 때도 있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 단기 선교 여행을 추진할 때 현지 교회가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세워지는 데 초점을 두고 일정을 진행한다면 좀 더 효과적인 동역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보내어 상대편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현지에 연락을 취해 물어봐야 한다. “그쪽 교회의 강점을 개발하는 데 저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현지에서 진행 중인 사역을 저희가 가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예상한 선입견을 다 내려놓고, 겸손하게 상대편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그에 맞춰야 한다.그렇게 하면 우리가 겪지 못한 사역의 장애 요인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파트너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유럽에는 매우 적은 수의 기독교 인구가 살고 있고,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경우가 흔하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는 여전히 물질의 빈곤을 겪고 있는데, 이와 같은 지역에 세워진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그 교회가 속한 환경에서 요청되는 구체적인 필요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그에 따른 도움을 제공하며 상대편 교회를 격려할 수 있게 된다.나아가 두 교회가 서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게시하고, 최근 소식이나 기도제목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연중 절기를 앞두고는 카드를 써서 함께 나눌 수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교제하는 게 좋을지는 각 교회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정하면 된다. 이때 각 교회는 파트너에게 유익이 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 상대편 교회를 한 가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끝으로 두 교회 간의 교제에서 재정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흔히 우리의 신경을 예민하게 하면서도 파트너십을 다지는 데 큰 몫을 하는 게 재정이다. 당연히 더 부유한 교회가 상대편 교회를 섬겨야 한다. 그러나 이때 상대편의 요청을 따라 주의 깊게 도와줘야 한다. 이때 양측이 강자와 약자의 구도로 이해되어서는 결코 안 되며, 형제 관계에 근거한 섬김으로 그러한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재정 상태의 투명성과 상호 겸손, 그리고 이러한 섬김을 훌륭하게 이행한 적이 있는 다른 교회의 조언이 필요하다.우리의 과제성령이 우리에게 권능을 주셔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이 있다(행 1:8).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각자의 교회만 돌보려는 내향적인 시선을 돌려 외부에 관심을 갖게 될 때 우리 사역 가운데 신실하게 역사하신다.이런 점에서 현재 교회 개척이 어느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Acts29.com(또는 당신이 가입하고 있는 교회 개척 네트워크가 있다면 그 웹사이트)에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어떤 교회와 파트너십을 새롭게 맺을 수 있을지도 알아보기 바란다.더 나아가 우리 각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안으로 향하고 있던 시선이 밖으로 옮겨져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도록 리더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열방에 있는 세계 교회를 위해 물질과 기도로 섬기며 직접 방문하여 도울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선교의 불꽃을 일으킬 것이다.우리는 예수의 이름에 모든 자가 무릎을 꿇고 그분을 주로 시인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빌 2:10-11). 그러므로 지역 교회의 다급한 사역을 위해 세계 선교의 영원한 사명을 등한시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오히려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우리가 섬기는 지역 교회까지 함께 성장시키시는 그분의 역사를 목격하도록 해야겠다.원제: How an International Partnership Could Benefit Your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선교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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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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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지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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