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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세계, 그리고 기후 위기
글로벌 기독교 지도자들의 행동을 요청한다
by Kuki Rokhum, Jasmine Kwong, Dave Bookless
2024-01-20
로잔에서 서울까지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기후 관련 사건은 거의 매일 뉴스에 등장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전도 사역에 방해가 되는가, 아니면 선교를 위한 기회가 되는가?John Stott on Creation Care[1]에서, 존 스토트는 생태학적 참여가 ‘선교 사역’의 범주에 적절히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환경 참여를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선포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생태 위기를 무시할 수 없다. 기독교의 사랑은 우리가 증가하는 기후 위기와 재난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게 대응할 것을 요구한다.케이프타운 서약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예수님이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과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모든 창조세계를 포괄하는 것이기에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복음 선포는 창조세계 전체를 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는 복음적 이슈이다(CTC I-7).[2]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는 복음적 이슈라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글로벌 기후 문제2023년 7월,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그달이 사상 최고로 더운 달로 기록될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발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글로벌 열대화(global boiling)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 리더는 이끌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주저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변명할 필요도 없으며,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3]기후 문제는 인간과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며 전 세계가 점점 더 심각하게 겪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셋은 천연자원과 농업에 대한 의존도, 인구 밀도가 높은 해안 지역, 취약한 제도, 만연한 빈곤으로[4] 인해 기후 변화에 특히 더 취약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이 글을 쓴다.기후 변화는 오늘날 북반구의 부유한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난한 나라들에게 그것은 이미 고통스러운 현실이 되었다. 필리핀과 같은 섬나라의 경우 해안 어촌과 해양 생태계는 더욱 심해지고 빈번해지는 폭풍으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다. 토지 이용 변화(예: 삼림 벌채 및 채굴)로 인해 발생하는 기후 문제는 식량 안보와 생물의 다양성을 위협한다.마찬가지로, 인도는 전 세계에서 재해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나라에 든다. 위치와 지형으로 인해 사이클론, 가뭄, 홍수, 지진, 화재, 산사태 등 자연재해에 취약해졌으며, 이러한 자연재해는 더욱 극심해졌다. 생태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피해와 함께 인간에게도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중에도 이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에 가장 적은 책임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이다. 2019년 인도에서는 최소 10,281명의 농부가 극단적 선택을 했으며, 이는 전체 자살의 7.4퍼센트를 차지한다.[5]필자들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이러한 사례들은 글로벌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이에 대응하고 행동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많은 지역의 교회들이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많은 교회가 감당하기에 벅찬 도전으로 인해 마비되었다. 이러한 도전들은 무엇이며, 글로벌 기독교 공동체로서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기후 문제로부터 기회 창출2012년 창조세계 돌봄과 복음에 관한 로잔 글로벌 협의(Lausanne Global Consultation on Creation Care and the Gospel)에서 비롯된 문서인 자메이카 행동 촉구(Jamaica Call to Action)는 세계 교회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절박하고 시급하며 우리 세대에서 해결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6] 이 문서는 발표된 지 이제 10년이 되었지만 중요한 문제들을 주목하고 있어 여기서 그중 일부를 논하고자 한다.도전 1: 세계 교회는 기후 문제에 더 많이 관여해야 한다.기후에 대한 교회의 참여가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증가하는 고통을 무시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독교 복음 증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호주,[7] 영국,[8] 캐나다[9]의 조사에 따르면 창조와 기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갈망하는 기독교 청소년들이 있지만 그들이 속한 교회가 이 분야에 너무 적게 관여하고 있다고 느낀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후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더 갖추게 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온 교회는 창조와 구속의 성경 이야기 안에서 기후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창조세계 돌봄은 기독교 사역에 전문가용 옵션처럼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지구를 돌보는 책임을 주신 첫 번째 선교적 과업이었다. 피조물을 돌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우리의 핵심이며 지도자로서 우리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기회 1: 현재 창조세계를 돌보는 일에 우리가 최소한으로 참여하는 상황을 기후 문제를 배우고 참여할 기회로 전환한다.[10]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 이웃, 창조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지구를 돌보고 지구에 있는 풍부한 자원을 책임 있게 사용한다.”[11]실천 단계 #1기후 문제에 대해 더 배우자. 창조 신학과 실천에 관한 책과 기사를 읽자. 과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도전 2: 많은 그리스도인이 편안한 생활 방식에 익숙하고 단순한 삶의 방식을 주저한다. 기후 문제에 대응하려면 우리 일상생활 속 선택에 대한 정직한 평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창조세계에 대한 공정성과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소비를 조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정의롭고 겸손하게 자비롭게 살기 위해서는(미가 6:8) 이기심을 인정하고, 새로운 습관을 받아들이고,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물론, 우리는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완벽한 환경 의식과 정의로운 생활 방식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기회 2: 교회는 예수님의 삶, 즉 다른 사람을 돌보며 단순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적용하며 본받아야 한다.모든 피조물이 갈망하는 회복의 약속인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해지는 것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완전한 사람도 완전한 세상도 없다(롬 8장). 그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따라 노력해야 한다.실천 단계 #2교회안에서 그리고 공동체의 실제 필요에 따라 시작하라. 우리가 행하는 일이 환경에 해를 끼치고 있는지 평가하자. 지역의 소규모 농부들을 돕자. 제철 음식을 먹고 육류 소비를 줄이자. 대중교통을 이용하자. 소그룹으로 모여 각자의 실천에 대해 나누고 격려하자. 환경에 보존하는 전통적인 방식들을 연구하고 찾자.도전 3: 부실한 창조 신학. 우리는 성경을 가르치고 선교할 때 인간, 특히 영혼에 초점을 맞춰 왔다. 복음주의 교회는 창조세계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육체의 문제보다 영혼의 문제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수님의 주되심은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있다. 우리는 새로운 관점으로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하며, 창조세계 전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 계획의 일부인지 성찰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도자들이 창조세계 돌봄을 복음의 문제로 가르친다면, 우리는 ‘지구를 구하라’는 압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지구를 맡아 돌보도록 명하신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순종과 예배의 마음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더욱이 창조는 개인으로나 신앙 공동체로서 우리의 기도와 예배에 통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관해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가? 우리는 애통의 습관을 회복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우리는 고통과 억압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우리는 야생 동물에게 해를 끼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 얼마나 자주 회개하는가?기회 3: 세상은 주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반응한다.우리가 창조세계 돌봄을 제자도로서 수용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구원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반응할 것이다.실천 단계 #3창조세계 돌봄을 기도, 성경 공부, 그리고 예배와 함께 일상적인 리듬이 되게 하자. 자연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도전 4: 우리는 사람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이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창조세계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창조세계를 돌보는 일은 사람들의 영적, 육체적, 사회적 필요(건강, 일, 가정, 안전)를 돌보는 것을 포함하며, 이 모두가 환경에 달려 있다.많은 교회와 기독교 단체는 이미 사람들의 사회적, 경제적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계를 포함하도록 우리의 선교를 확장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돌보는 것과 자연을 돌보는 것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둘다 하나님께 중요하고 회복을 위한 그분의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기회 4: 이미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 기독교 전통/교단으로부터 배우자!우리 모두가 창조세계의 모든 측면을 잘 돌볼 수는 없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고려하도록 초대받았다.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면서 우리는 각자의 공동체와 상황에서 충실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곳이 어딘지를 분별할 수 있다.실천 단계 #4당신의 교회/단체에서 이미 이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요청하자.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구체적인 기회들에 대해 듣자. 토착 공동체들로부터 배우자.도전 5: 지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기후는 복잡하고 세계적인 문제이며,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 대해 쉽게 낙담하거나 무시하고 말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기후 위기를 해결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순종하고자 한다. 창조세계 돌봄은 우리가 걷는 제자도 여정의 일부이다. 우리가 기도와 성경 공부를 일반적인 기독교 리듬으로 삼는 것처럼, 창조세계에 대한 관심도 일상생활의 일부로 통합해야 한다.우리는 결코 창조세계의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제자도의 일부로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충실하게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실수와 갈등을 창조세계를 돌보는 여정의 일부로서 포용하는 자세도 필요하다.우리는 인내하고 그 과정을 함께 통과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롬 8:19). 그리고 이것은 피조물의 탄식 소리에 교회가 반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기회 5: 당신의 공동체가 머리, 가슴, 손 등 다양한 수준에서 참여하게 하라.창조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소망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매우 큰 격려가 될 수 있다.실천 단계 #5일회성의 행사를 넘어 다년간에 걸친 참여에 헌신하자. 당신의 공동체가 숲, 강, 바다, 도시 등 어느 한 곳에 집중해서 헌신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적소를 발굴하자.더 깊이 나아가기 기독교 자료를 통하여 과학자들과 전 세계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창조세계 돌봄의 깊이를 더하는 데 유익할 것이다. (교회와 선교 지도자들에게 적극 권장되는 내용은 다음의 ‘주’를 참조하라.)• 보다 체계적인 창조세계 돌봄의 신학을 개발하자:[12] [13] [14] [15] • 생태학 렌즈로 성경을 공부하자: [16]•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되심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예배하자: [17] [18] • 모든 창조세계를 위해 세계교회와 함께 기도하자: [19]• 교회 네트워크에 가입하고 지역 상황에 맞는 환경 활동에 참여하자: [20] • 전 세계의 현재 창조세계 돌봄 행사에 대한 업데이트를 받아보자: [21]• 창조세계 돌봄에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개인 및 단체과 함께 활동하자: [22] [23] • 기후 정책 토론에 국제적 수준으로 참여하자: [24]요약하자면, 우리가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은 이것이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 세상을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고자 하는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25]주1. RJ (Sam) Berry with Laura Yoder, John Stott on Creation Care (Illinois: IVP, 2021), https://ivpbooks.com/john-stott-on-creation-care. 2. ‘The Cape Town Commitment,’ Lausanne Movement, Part 1, Sec. 7, accessed 1 August 2023, https://lausanne.org/content/ctc/ctcommitment. 3. Ajit Niranjan, ‘‘Era of global boiling has arrived,’ says UN chief as July set to be hottest month on record,’ The Guardian, 27 July 2023, https://www.theguardian.com/science/2023/jul/27/scientists-july-world-hottest-month-record-climate-temperatures. 4. Venkatachalam Anbumozhi, Meinhard Breiling, Selvarajah Pathmarajah, and Vangimalla R. Reddy, eds. ‘Climate Change in Asia and the Pacific: How can countries adapt?’ ADBInstitute (India: SAGE, 2012), https://www.adb.org/sites/default/files/publication/159335/adbi-climate-change-asia-and-pacific-how-can-countries-adapt-highlights.pdf 5. ‘Accidental Deaths and Suicides in India,’ National Crime Records Bureau, accessed 1 August 2023, https://ncrb.gov.in/sites/default/files/ADSI-2019-FULL-REPORT.pdf. 6. ‘Creation Care and the Gospel: Jamaica Call to Action,’ Lausanne Movement, accessed 1 August 2023,https://lausanne.org/content/statement/creation-care-call-to-action. 7. ‘Leader’s Summary: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 Tearfund Climate Report,’ Tearfund,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tearfund.org.au/resources/leaders-summary-they-shall-inherit-the-earth-tearfund-climate-report. 8. ‘We are Burning Down the House,’ We Are Tearfund,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earetearfund.org/burning-down-the-house/. 9. ‘For All the Earth,’ Tearfund Canada, accessed 1 August 2023, https://tearfund.ca/climatesurvey/ 10.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Devastating Fires and the Church’s Mission’ by Tim Carriker in the March 2020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0-03/devastating-fires-churchs-mission. 11. ‘The Cape Town Commitment,’ Lausanne Movement, Part 1, Sec. 7, accessed 1 August 2023, https://lausanne.org/content/ctc/ctcommitment. 12. Colin Bell and Robert White, Creation Care and the Gospel: Reconsidering the Mission of the Church (Peabody,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2016). 13. R.J.(Sam) Berry with Laura Yoder, John Stott on Creation Care (Illinois: IVP, 2021). 14. Douglas Moo and Jonathan Moo, Creation Care: A Biblical Theology of the Natural World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2018). 15. Dave Bookless, Planetwise: Dare to Care for God’s World (Nottingham: InterVarsity Press, 2008). 16. ‘Why care for creation?’ OMF International, accessed 1August 2023, https://omf.org/resources/why-care-for-creation/. 17. Climate Vigil,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climatevigil.org/album-leadsheets. 18. ‘Doxecology,’ Resound Worship,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resoundworship.org/projects/doxecology. 19. ‘Season of Creation 2023,’ Season of Creation, accessed 1 August 2023, https://seasonofcreation.org. 20. ‘Become an A Rocha Church Partner,’ A Rocha International, accessed 1 August 2023, https://arocha.org/en/church-partners/ 21. The Pollinator: Creation Care Network News, accessed 1 August 2023, http://news.lwccn.com. 22. The Oikos Network, Oikos,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oikos-network.org 23. ‘Join the Rubbish Campiagn!’ Renew Our World Campaign,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renewourworld.net. 24. Christian Climate Observers Program (CCOP) 2023, accessed 1 August 2023, http://www.ccopclimate.org. 25. Berry, John Stott on Creation Care, 193. 원제: Climate Crisis and God’s Creation: Calling Global Christian Leaders to Act출처: lausanne.org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
by 복음과도시
2024-01-17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로잔 운동, 그 시작은로잔 대회는 ‘이벤트’가 아닙니다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1) ‘세계’ 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2) ‘복음주의’
왜 서울 2024인가?
by David Bennett
2024-01-13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2024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대한민국 서울에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제4차 로잔대회(일명 서울 2024 대회)가 개최된다. 이 중요한 모임과 이 모임에 이르기까지, 그 이후에도 계속될 다년간의 다중심적인 로잔4(L4) 여정의 목적은 예수님의 지상대위임령 성취를 위한 협력적 행동을 가속하는 데 있다.도전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마 28:19-20)는 사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동안 전 세계 인구 중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30퍼센트를 웃도는 수준에 머물렀다.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말씀을 증언할 그리스도인들은 부족하다. 도처에 제자를 양육할 수 있는 교회가 없는 사람들, 장소들이 있다. 수많은 교회와 일터의 분야에서 시대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회 곳곳의 영역에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절실히 필요하다.지상대위임령은 총체적이고 포괄적이며, 로잔운동이 추구하는 세계 선교는 가정, 직장, 지역 사회, 사회 전반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모든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세계 교회에는 진정으로 포괄적이며, 조율된 그리고 협력적인 세계 선교가 부족하다.우리는 전 세계 교회가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한 국가, 한 민족, 한 교파 혹은 문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양하지만, 한 몸된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물론 지역적 차원에서도 이 사명을 향한 진전에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 4년 전 로잔운동의 지도층은 이를 염두에 두고 네 번째 국제대회를 소집하고, 이 대회까지 이어지는 다년간의 과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현재 격차가 존재하는 곳과 새로운 격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을 파악하기 위한 여정을 전 세계, 또 각 지역에서 계속해 왔다.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현재 격차가 존재하는 곳과 새로운 격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을 파악하기 위한 여정을 계속해 왔다. 또한 가장 큰 도전 과제와 가장 눈에 띄는 기회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획기적인 혁신과 고무적인 돌파구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도 노력해 왔다. 우리는 협업을 통해 함께 일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지속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을 경험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경청하고, 모으고, 배우며 함께 행동하는 여정을 계속 이어 나가고자 한다.우리는 현존하는 격차를 해소하고 현재의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현장에서 기능할 수 있는 협업 이니셔티브(Initiatives)와 협업 행동팀(Collaborative Action Teams)이 속히 진행되기를 바란다. 이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삼고,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목표로 삼을 것이다.경청의 과정지난 3년 동안 로잔운동은 전 세계 다양한 계층을 초청하여 5가지 질문에 대한 답에 경청하는 과정을 가졌다:1.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격차 혹은 남아있는 기회는 무엇인가?2.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가속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돌파구 또는 혁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3.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해 어떤 분야에서의 협력이 가장 중요한가?4. 어떤 분야의 연구가 더 필요한가?5. 우리는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분별하고 2050년 세계 선교의 최전선에서 일할 차세대 리더를 준비하기 위해 글로벌 공청회를 주최하고, 세계 및 지역 모임을 통해 경청에 참여하고, 포커스 그룹을 개최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선교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왔다.지상대위임령 현황 보고서추가적으로 우리는 전 세계 100명 이상의 연구진으로 구성된 팀에게 지상대위임령 현황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의뢰했다. 이 보고서에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기 위한 우리의 세계적 노력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발전 요소와 가장 관련성이 높은 동향이 담겨있다. 지상대위임령 현황 보고서는 2024 서울 대회 몇 달 전에 발표될 예정이며, 이를 통해 제4차 대회의 모든 참가자들이 현재의 세계 상황과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이슈, 각 지역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서울 선언문우리가 말하는 격차 중 일부를 위해서는 전략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부 격차는 성서적 그리고 신학적 이해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신학위원회 역시 로잔의 세 가지 기본 문서, 즉 로잔언약, 마닐라 선언문 그리고 케이프타운 서약에 기반한 서울 선언문의 토대를 다지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서울 선언문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재확인하고 성서적 통찰력, 명령, 그리고 우리 시대에 대한 의미를 강조할 것이다.2024 서울 대회는 이러한 다년간 경청 과정의 정점이자, 현재까지 확인된 격차와 기회를 모두 다루기 위한 협력적인 행동을 촉진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서울 2024는 전 세계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보여줄 기회이다.처음 세 차례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대회는 1974년 스위스 로잔; 1989년 필리핀 마닐라; 그리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개최되었다. 앞선 세 대회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이번 서울 대회는 5,000명의 현장 참가자와 5,000명의 온라인 참가자가 모여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의 선교에 영향을 미치는 남녀가 ‘현세대에 단 한 번’ 함께 모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참가자는 젊은, 노년 세대를 모두 포함하며, 일터는 물론 교회와 선교 관련 직업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를 대표할 것이다. 로잔의 한 리더는 서울 2024를 ‘사일로(silos)의 혼합’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이 모임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파트너십이 탄생하며, 새로운 협업 행동팀이 출범할 것으로 기대한다. 대회 시작 전 준비 과정과 주제 강연, 테이블 그룹 대화, 그리고 오후에 진행되는 다양한 분과 세션을 통해 참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참가자들이 지역 및 세계 차원에서 다른 참가자들과 협력하여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시급한 필요와 격차, 전략적 기회를 다룰 기회를 허락하실 것을 믿는다.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며 각 지체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한 몸으로 지어졌음을 상기시킨다. 이런 모임을 통해 우리는 전 세계 그리스도의 몸이 서로에게서 배우고 서로의 자원을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서울 2024는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한 협력적 행동에 속도를 붙일 것이다.양극화되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세계 교회가 가장 주된 사명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양극화되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세계 교회가 가장 주된 사명을 기억하고, 삶의 모든 영역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주권을 선포하고 드러내며, 도움이 필요한 혼란스러운 바다에서 희망과 방향의 등대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로잔은 네 가지 비전이 함께하는 여정에서 세계 교회를 선도해 왔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 모든 사람과 지역을 위해 제자 삼는 교회• 모든 교회와 사회 부문을 위한 그리스도를 닮은 지도자•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미치는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협업 행동을 위한 헌신이 여정 동안 우리는 예루살렘을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 틈새를 성벽과 성문의 재건을 통해 메꾸는 느헤미야의 소명을 떠올렸다. 느헤미야 4:6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느헤미야 3장에 묘사된 것처럼, 이 프로젝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일부는 개인으로, 일부는 팀으로 참여했다. 이 모두는 서로 협력하고 서로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을 한데 모아 성벽을 재건한 것처럼, 로잔운동은 2024년 대회를 필두로 출범할 ‘협업행동팀’이라는 이니셔티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전 세계 교회를 하나로 연합하고자 한다. 로잔은 이 팀을 통해 전략적 협력과 세계 자원의 공유를 촉발하는 연결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업무 중복과 자원 낭비를 초래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일로를 극복하고자 한다.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핵심은 전 세계 수천 개의 단체가 함께 협력 행동을 약속하는 ‘협업 행동을 위한 헌신’에 함께하는 것이다.어언 50년 동안 로잔운동은 세계 선교를 가속하는 데 힘써왔다. 우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협업행동이 계속해서 가속화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이 땅 모든 나라의 신자들과 함께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선포하자’라고 외치기를 소망한다.원제: Why Seoul 2024?출처: lausanne.org
더 깊이 들어가야 길을 잃지 않는다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우리 신앙의 정체성과 귀속성
by 김선일
2024-01-1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종교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우선 한국의 3대 종교인 개신교, 불교, 천주교 모두에서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응답이 가장 높다. 이는 우리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지난 2023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마음의 평안을 신앙생활의 이유로 꼽은 개신교인들은 42퍼센트로 나왔는데, 이전 조사들(2017년, 2012년)의 37-38퍼센트에 비해서 유의미하게 높아진 수치이다. 반면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개신교인들은 42.5퍼센트에서 35.9퍼센트로 많이 떨어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신도들과의 친교를 위해서’라는 응답이 종전의 1퍼센트대에서 2023년 조사에서는 6.5퍼센트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사회적 교제를 위해서 종교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조짐이지만, 이는 그만큼 현대인의 외로움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구원과 영생이라는 신앙의 핵심적 목표보다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응답이 더욱 높아진 것은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점검하게 한다. 그런데 다른 종교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정체성과 귀속성은 더욱 강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신앙을 갖는다는 응답이 천주교의 경우에는 73.4퍼센트, 그리고 불교에서는 68.9퍼센트가 나왔으니 개신교(42%)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라는 답을 택한 이들도 개신교 35.9퍼센트인데 반해, 불교는 2.7퍼센트, 천주교는 7.2퍼센트로 현저히 낮다. 구원과 영생이 불교도에게는 낯선 언어이기 때문에 선택지로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건강, 재물, 성공 등의 ‘현실적 복을 받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12.2퍼센트로 나와서 개신교(6.1%), 가톨릭(5.9%)보다 두 배 이상 높다(한목협,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67).같은 뿌리의 종교라 할 수 있는 개신교와 천주교 간 비교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드러난다. 구원의 확신 여부를 묻는 질문에 개신교인은 66.9퍼센트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반면, 천주교인은 47.7퍼센트로 큰 차이를 보여줬다. 이는 지난 2017년 조사에서 천주교인들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이 68.8퍼센트였던 것에 비해서 대폭 낮아진 것이다. 그전에도 천주교인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이 60퍼센트 중반대였으나 이번 조사에서 크게 하락한 것이다. 개신교인들은 그동안 천주교인들과 비슷한 비율로 구원의 확신 여부에 대해 긍정응답을 해오다가 이번에는 큰 차이로 앞서 것이다(한목협, 75).자기 신앙의 정도를 묻는 질문에서도 네 가지 신앙단계, 즉 기독교 입문층, 그리스도 인지층, 그리스도 친밀층, 그리스도 중심층의 네 단계 중에서 천주교는 개신교에 비해서 초보 단계인 기독교 입문층(50.1% 대 31.8%)과 그리스도 인지층(35.7% 대 27.5%)에 더 많은 신도가 분포하는 반면, 개신교인은 천주교인에 비해 더욱 성숙된 단계인 그리스도 친밀층(28% 대 12.6%)과 그리스도 중심층(12.6% 대 1.6%)에서 더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한목협, 79). 이는 개신교인들이 유사 종교인 천주교인들에 비해서 신앙의 정체성과 귀속성에서 더욱 적극적임을 시사한다.종교의 교리에 대한 인식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주요 교리에 대한 입장을 보면, 개신교인들은 종말론에 대해 50퍼센트만 믿고, 종교다원론을 믿는 사람이 31.8퍼센트, 유일신 신앙을 믿는 이들은 62.9퍼센트로 나왔다. 이러한 수치는 일단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교리적 신앙이 점점 약화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 비교하면 이러한 현상은 비단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불교인의 경우에는 가장 대표적인 교리로 알려진 윤회설을 믿는 이들이 21.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다소 충격적이게도, 개신교인들 중에서 12.5퍼센트, 천주교인 중에서 15.8퍼센트가 윤회설을 믿는다고 대답해서 불교인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내세와 영생의 신앙이 혼합된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개신교인들의 66.2퍼센트가 믿는데, 2017년 대비 8.9퍼센트포인트 하락했다(한목협, 82-83) 이러한 결과들을 통해서 우리는 선교한국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우선, 기독교가 여전히 다른 종교들에 비해서, 신앙의 목적, 교리에 대한 믿음, 신앙의 활동성에 있어서 더욱 적극적이라는 점은 청신호다. 한국 교회가 아무리 대외적 신뢰도와 이미지가 낮다고 하지만, 교인들이 무기력하거나 퇴조된 신앙생활에 빠져있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설령 습관적이라 할지라도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인생에서 신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 점은 한국 기독교의 자산이다. 타종교와 비교되는 부정적 이미지로 교회가 위축될 필요까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신앙의 잠재적 활동성을 담아내고 분발시킬 신앙의 방향과 공동체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 기독교의 상대적으로 견고한 신앙 정체성과 귀속성이라는 자산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까? 최근 선교적 교회 운동에 가장 큰 영감을 준 고 레슬리 뉴비긴이 서구 기독교의 쇠퇴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신앙의 역사성과 공공성을 잊어버리고 복음에 대한 고유한 자신감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 힌두교 친구가 기독교에 대해서 지적한 바를 회고한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성경을 읽어 보니, 거기에는 우주 역사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과 더불어 인간을 역사의 책임 있는 행위자로 보는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당신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또 하나의 종교 경전인 것처럼 이야기한단 말이야. 우리 인도에는 그런 유의 종교 서적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75).뉴비긴은 이교도의 이러한 지적을 상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인류 역사의 실마리를 푸는 거대한 이야기이며, 기독교의 복음이 공적인 영역에서도 진리임을 확신하고 증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날도 기독교 신앙의 효력이 내면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용도로, 또는 개인의 문제 해결, 혹은 기껏해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에 정신 승리를 제공하는 내세주의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개인적인 효용성에 머무는 복음은 온전한 변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세대에서 세대로 지속가능할 수 없음은 서구 기독교의 쇠퇴가 보여줬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상대적으로 강한 신앙적 정체성과 귀속성은 그 자체로 선교한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산이다. 그러나 이 신앙의 성격이 더욱 역사적이고, 공공적이어야 하며, 특정 이데올로기나 문화적 패러다임에 끌려다니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지녀야 한다. 유한한 인간은 더 큰 세계와 이야기 안에서 비로소 존재와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그 큰 이야기는 오직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발견된다. 신앙의 지경을 넓히는 과제는 선교한국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기초 작업이 될 것이다. 오랜 경험의 한 산악구조 전문가는 왜 등산객들이 산에서 조난을 당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충분히 깊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등산객들이 산속으로 너무 깊이 갔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달랐다. “사람들이 더 많이 가야 길이나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지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자기들의 불안함과 짧은 생각으로 중간에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길을 잃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 기독교의 부흥과 회복은 대외적 이미지를 재고하고 외형적 신뢰를 얻기 위한 제스처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의 하드코어로 더 깊이 들어가서 전인격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복음적 갱신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다.
에든버러 2010을 넘어서
1920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이후 선교의 현주소
by Kirsteen Kim
2024-01-06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역사적인 1910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이후 100년 동안 모든 대륙에서 거의 100개의 대회와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1] 그 후 10년이 지난 2010년에, 우리는 그간에 우리가 배운 내용과 오늘날 그 내용이 선교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우선, 세 차례의 주요한 100주년 행사들을 돌아보고, 둘째로는 에든버러 2010 대회에서 비롯된 주목할 만한 도서 시리즈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러한 자원이 2020년대의 상처받은 세계에서 선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제안하려고 한다.10년이 지난 2010년에, 우리는 그간에 우리가 배운 내용과 오늘날 그 내용이 선교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서로 다르게 기념하다 : ‘가나의 세 자녀’1978년에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풀러 신학교에서 교수로 역임했고 그 당시 미국세계선교센터 책임자 랄프 윈터(Ralph Winter)는 그가 20년 전에 ‘결혼’이라고 일컬어온 일을 돌아보았다. 그는 1910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의 계속위원회로 출발한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 같은 뿌리에서 나온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에 합병된 결정이 가나의 아크라에서 이루어졌다고 언급했다. 그것은 IMC와 WCC의 통합이 서구 기관들과 이전에 식민지화된 국가들, 즉 제3세계 교회들 간의 선교를 위한 구조적 연합을 이루도록 의도된 결정이었다. 그러나 윈터는 사실상, 이 ‘합병(marriage)’이 상이한 세 ‘자녀들’을 낳았다고 주장했다.[2] 첫 번째 자녀는 WCC 세계 선교와 전도위원회(Commission for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CWME)였다. 두 번째 자녀는 스위스 로잔에서 역사적인 첫 번째 대회를 열었던 로잔운동[3]이었다. 세 번째 ‘가나의 자녀’는 윈터와 다른 미국 선교학자들이 ‘타문화 선교 사역’에 헌신한 선교사들의 결집을 위해 초안을 잡은 ‘부르심’에서 구상되었다.[4]2010년도를 돌아보면서 나는 윈터의 예측이 대체로 성취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100주년을 맞아 윈터가 말한 ‘가나의 세 자녀들’은 각각 대규모 행사를 열었다.에든버러 2010은 WCC의 후원을 받았으므로 에든버러 1910의 제도적 계승자였다. 이 대회는 특히 존 모트(John Mott)가 에든버러 1910의 폐회 연설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 – 현재 ‘세계 기독교’와 유사한 – 과 함께 이룰 교회의 전 세계적인 성장을 언급하면서 ‘확산되는 그리스도(a larger Christ)’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비전을 포착했다.[5]로잔 운동이 2010년 케이프타운[6]에서 개최한 제3차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대회는 세계 복음화에 주목한 에든버러 1910의 비전에 기초하여 제1차 로잔대회에서 제시된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는 표어를 해석했다. 이 대회는 위대한 계명(Great Commandment)에 근거하여 지상 대위임령(Great Commission)을 설정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했다.[7]도쿄 2010은 윈터[8]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에든버러 1910이 전 세계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려는 타문화 선교사들을 결집하려는 대회임을 강조했다. 이 대회는 현대선교 운동이 다양한 멤버십과 다양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9]윈터는 에드버러 세계선교대회 100주년을 맞아 단일 대회를 희망했지만, 글로벌 선교 네트워크의 다양성을 문제 삼지 않고 그것을 ‘생산적인 결혼’으로 표현했다.[10] 필자는 한 부모 아래 태어난 이런 여러 행사들이 에든버러 1910을 충실하게 회고하면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용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나누려는 공동의 열망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세 자녀 모두가 서로에게서 배우고 협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11]레그넘 에든버러 100주년 시리즈: 선교학자를 위한 자료 에든버러 2010 프로젝트는 2005년에 연구 프로젝트와 컨퍼런스로 시작되었다.[12] 그 프로젝트는 WCC가 시작했지만, 가능한 모든 교회가 모이는 모임을 소집하기 위해 WCC가 직접 주관하지는 않았다.[13] 에든버러 2010 ‘공동의 부르심(Common Call)’은 가톨릭, 복음주의, 정교회, 오순절, 개신교, 독립 교회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예배 가운데 확인되었다.[14] 그 ‘부르심’은 프로젝트의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고 레그넘 에든버러 100주년 시리즈 (Regnum Edinburgh Centenary Series, RECS)에서 나온 광범위한 책들의 기초를 형성했다.[15] 에든버러 1910에서 출판된 9권의 책에서 영감을 받은 레그넘 시리즈의 핵심 설계자는 크누드 요르겐센(Knud Jørgensen)이었다. 그는 에든버러 2010 연구 프로젝트를 감독했고 동시에 케이프타운 2010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당시 옥스포드 선교연구센터(Oxford Center for Mission Studies, OCMS)의 학장인 마원석 박사와 부속 출판사인 레그넘과 협력했다.[16] 나는 에든버러 2010 프로젝트팀의 일원으로서 편집팀에 합류했으며, 토니 그레이(Tony Gray)는 레그넘의 제작 편집자였다.2009-2016년에 출판된 이 시리즈는 2018년에 35권의 책과 두 권의 개요서(Compendium)로 구성되었다. 각 권은 상충되지 않는 다양한 관점들을 대표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종합적으로, 그것은 21세기 초의 선교적 사고에 대한 광범위한 관점(cross-section)을 제공한다. 이 시리즈의 많은 책들은 에든버러 프로젝트에서 나왔다. 예를 들어, 제2권인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에든버러 2010 대회에서 모든 대표자들이 소지한 책이다. 이 책은 여러 대륙에서 수년간 일해 온 9개의 연구 그룹들의 보고서와 현재의 선교 주제와 연관된 교회 분열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선교의 기초; 타종교와 기독교 선교; 선교와 포스트모더니티; 선교와 권력; 선교적 참여의 형태; 신학 교육과 형성; 현대의 기독교 공동체; 선교와 일치-교회론과 선교; 그리고 선교적 영성과 참된 제자도. 100 주년 시리즈의 에든버러 2010 대회 책자는 ‘선교적 영성을 갱신하고, 더 많은 반성을 자극하며, 역사상 이 독특한 시점에서 교회의 공동의 행동을 장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리즈의 다른 책의 기조를 설정한다.[17]이 보고서들은 에든버러 2010의 토론과 ‘공동의 부르심’의 토대를 형성했다. 이후 9개 그룹 모두 시리즈용 책을 제작했으며, 이 주제를 검토하는 다른 그룹들의 작업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타종교 선교’에 관한 두 권의 책이 있다.[18] 또한, 이 시리즈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오순절을 포함한 다양한 고백적 선교 신학에 관한 연구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한국, 동북부 인도, 중부 유럽과 동유럽 등 세계 여러 지역의 관점에서 본 선교에 관한 책들도 포함한다. 다른 그룹들은 총체적 선교, 글로컬 선교, 디아스포라 선교, 교육 선교 등 다양한 종류의 선교에 대한 책자; 선교와 성경, 어린이, 일치, 형성, 종교자유; 그리고 화해로서 선교, 주변부 선교, 섬김과 창조 세계 돌봄으로서의 선교에 관해 저술했다.‘가나의 세 자녀들’은 각각 에큐메니컬 선교학(35권), 로잔운동(22권), 복음주의 및 전방개척 선교(9권) 시리즈로 대표된다.[19] 이 시리즈는 모두 오늘날 선교와 세계 기독교에 있어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매우 소중한 자료다.상처 입은 세상에서의 선교: 2020년과 그 이후2021년의 세계는 10년 전보다 어두운 것처럼 보인다. 식민지 시대의 선교 모델에 대한 강한 비판이 있었지만 에든버러 2010의 분위기는 축제와 다름없었다. 서구 기독교 왕국의 사고방식(Christendom mindset)과는 대조적으로, 이 대회는 전 세계에 걸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와 여러 센터에서 선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세계 기독교에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비전에 따라 ‘공동의 부르심’은 ‘상호성, 파트너십, 협력, 네트워킹’으로 귀결되는 성령을 통한 전 세계적 상호 연결성을 강하게 표현한다. 세상에 대한 공동의 부르심의 접근은 ‘진정한 대화, 정중한 참여와 겸손한 증언’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민감하게 접근하는 것에 유의하는 한편, 희망적이고 ‘담대한 확신(bold confidence)’이라는 특징을 띤다.에든버러 1910은 대영 제국에 의해 세계화된 세계에서 열렸고, 이런 조건으로 인해 전 세계의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대회에 직접 모일 수 있었다. 하지만 불과 4년 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세계의 여러 지역들이 분열되었다. 그 후, 세계는 전염병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대공황을 촉발한 보호주의에 의해 분열되었으며, 소위 냉전으로 인한 이념대립이 확립되기 전에 더 큰 규모의 세계적인 전쟁을 초래한 부상하는 민족주의에 의해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20] 냉전 시대에 이은 세계화는 2010년에 동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이 에든버러, 케이프타운, 도쿄에서 모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이 글로벌 연결 시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대신 민족주의, 보호무역주의, 이동 제한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팬데믹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상처를 드러냈다; 병든 본성과 인간의 고통과 이기심뿐 아니라 부의 뿌리 깊은 불공평,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및 환경의 질도 그렇다. 이런 대부분의 불평등은 인종, 민족 및 위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 구조적이다. 현 상황은 이런 공동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계가 함께 모이기를 요구하지만, 많은 면에서 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세계화를 심화시키며,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든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조차도 기술 민족주의와 강력한 지도자의 조작에는 취약하다.2010 년은 하나님의 선교에 다 함께 동참하기 위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선교를 분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런 대회에서 얻은 자원들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케이프타운 서약(Cape Town Commitment, CTC)’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통합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의 종족적 화해’(CTC II-B-1)에서 모델이 되는 길을 설명한다. 정부와 초국가적 비정부 기구들이 세계를 하나로 묶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모든 나라, 민족, 백성과 언어(계 7:9)의 그리스도인들이 협력하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한지 모른다.[21]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현세와 내세, 육체와 영혼, 가깝고 먼 곳을 아우른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적인 요인이나 외적인 요인이 초래한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화해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를 구축하고, 상처와 불의를 해결하며 함께 나아갈 길을 구성하는 과정이다.[22] 에든버러 2010 ‘공동의 부르심’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영광과 심판 가운데 오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고, 모든 피조물을 변화시키고 화목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교에 참여하는 일에 모든 사람이 우리와 함께하도록 초대한다.’1. 이 프로젝트 리서치 코디네이터로 있을 때 에든버러 2010 웹사이트www.edinburgh2010.org에 이 내용을 문서화해 정리했다. 2. Ralph D. Winter, ‘Ghana: Preparation for Marriage’,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67, no. 267 (July 1978): 338-53. 3. 이후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위원회 4. Winter, ‘Ghana’, 351-53. 5. John R. Mott, ‘Closing Address’, in World Missionary Conference, 1910, Vol. 9: The History and Records of the Conference (Edinburgh: Oliphant, Anderson, & Ferrier, 1910), 348.6. 편집인 주: See article by Doug Birdsall entitled, ‘A Personal Reflection on Cape Town 2010’ in November 2015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7. 케이프타운 서약, 서론. https://lausanne.org/content/ctcommitment#p2-2.8. 윈터는 2009년 작고했다. 9. 2010 Tokyo Declaration 2010. 10. Winter, ‘Ghana’, 353.11. 나는 기쁘게도 세 회의 모두에 참석할 수 있었다.12. For the background, see Daryl Balia and Kirsteen Kim, ‘Introduction: Experimenting with a Multi-Regional, Cross-Denominational, Poly-Centric Study Process’, in Daryl Balia and Kirsteen Kim, eds., Edinburgh 2010: Witnessing to Christ Today, RECS 2 (Oxford: Regnum, 2010), 1-9.13. 다른 주요 파트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에든버러 대학교였다.14. 에든버러 2010, 공동의 부르심(Common Call), http://edinburgh2010.org/fileadmin/Edinburgh_2010_Common_Call_with_explanation.pdf.15. 종이책 또는 전자책 구입 링크 https://www.regnumbooks.net/collections/edinburgh-centenary. 개인용으로 사용시 무료 PDF 다운로드 링크 https://www.ocms.ac.uk/regnum-centenary-free-downloads/.16. 마 박사는 현재 미국 Oral Roberts 대학의 신학 및 목회학 대학 학장이자 세계 기독교 석좌교수다.17. Kirsteen Kim and Andrew Anderson, ‘Introduction’, in Kirsteen Kim and Andrew Anderson, eds., Edinburgh 2010: Mission Today and Tomorrow, RECS 3 (Oxford: Regnum, 2011), 6.18. Lalsangkima Pachuau and Knud Jørgensen, eds., Witnessing to Christ in a Pluralistic World: Christian Mission among Other Faiths, RECS 7 (Oxford: Regnum, 2011); Marina Ngursangzeli Behera, Interfaith Relations after One Hundred Years: Christian Mission among Other Faiths, RECS 8 (Oxford: Regnum, 2011).19. Kenneth R. Ross, Jooseop Keum, Kyriaki Avtzi, and Roderick R. Hewitt, eds., Ecumenical Missiology: Changing Landscapes and New Conceptions of Mission, RECS 35 (Oxford: Regnum, 2016); Margunn Serigstad Dahle, Lars Dahle, and Knud Jørgensen, eds., The Lausanne Movement: A Range of Perspectives, RECS 22 (Oxford: Regnum, 2014); A. Scott Moreau and Beth Snodderly, Evangelical and Frontier Mission: Perspectives on the Global Progress of the Gospel, RECS 9 (Oxford: Regnum, 2011).20. Bryant L. Myers, Engaging Globalization: The Poor, Christian Mission, and Our Hyperconnected Worl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7); Peter Sedgwick, ‘Globalization’, in Peter Scott and William T. Cavanaugh, The Blackwell Companion to Political Theology (Oxford: Blackwell, 2007), 486-500.21. 편집자 주: See article by Kirsteen Kim entitled, ‘Unlocking Theological Resource Sharing Between North and South’ in November 2017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17-11/unlocking-theological-resource-sharing-north-south.22. See, for example, Al Tizon, Whole and Reconciled: Gospel, Church, and Mission in a Fractured Worl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8). 원제: Beyond Edinburgh 2010출처: lausanne.org
명목상 교인들,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3-12-2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저명한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그의 책 Biblical Perspectives on Evangelism(Abingdon, 1993)에서 구약 관점의 전도 대상자들을 세 유형으로 분류한다. 첫째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교회 바깥 불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신자가 되는, 가장 전형적인 전도 과정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들’이 다시 그 언약을 ‘기억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율법을 들으며 여호와를 경배하는 광경(느헤미야 8장)은 이름뿐인 하나님 백성이 회복되는 장면이다. 이는 바로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시키는 사역의 전형이다. 브루그만이 말하는 세 번째 전도 대상은 믿음의 자녀들이다. 그것은 사랑받는 자녀들이 믿음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신앙이 후대에 게 전수되지 않고 교회학교가 사라지는 현상은 바로 명목상 기독교가 뚜렷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위의 세 유형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명목상 기독교를 형성하는 가장 주된 집단이다. 신앙의 정체성을 잃은 교인들, 그리고 신앙이 전수되지 않는 교회의 자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중요한 복음 사역의 대상이다. 이번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현상에 관한 조사를 보면 눈에 띄는 특징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연령이 낮을수록 명목상 교인의 비율이 높게 나왔다. 명목상 교인의 연령별 비율이 20대는 50.1퍼센트, 30대는 41.2퍼센트인데, 40대 이상에서는 30퍼센트대로 나온다. 이는 모태신앙인이나 어릴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이들의 경우 주체적인 신앙 결단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면서 명목상 교인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브루그만이 언급한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믿음이 있는 성인으로 자라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번 조사에서 나온 두 번째 특이한 결과는 한국에서 명목상 교인에 이르는 과정은 단순히 기독교 가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명목상 교인들에게 처음 교회 출석한 시기를 물으니, 비명목상 교인에 비해서 훨씬 높은 응답률을 보인 시기는 ‘결혼 후’였다. 명목상 교인의 19.5퍼센트가, 비명목상 교인의 9.9퍼센트가 결혼 후 처음 교회 출석을 했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 글 “가족적 기독교: 우려와 희망”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로 인해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 많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신앙 그 자체보다는 가족과의 관계로 인해서 교회에 다니는 명목상 교인들이 있다는 의미이다. 현재 교회를 선택한 이유에서도 비명목상 교인들은 설교 때문이라고 답한 이들이 가장 많았지만, 명목상 교인들은 가족이 다니기 때문이라는 답이 가장 높았다.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조사에서 나타난 세 번째 특이점은 명목상 교인들의 비율이 중형 규모의 교회들에서 더욱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결과는 중형 규모의 교회들(100명 이상 2,000명 미만)에서 명목상 교인의 비율이 평균보다 높았다(약 43.5%). 반면 2,000명 이상의 대형교회 출석한다는 명목상 교인은 34.7퍼센트, 100명 미만의 소형 교회에 출석하는 명목상 교인은 약 35.3퍼센트로 나타났다. 명목상 교인을 산출하는 여러 조건(20회 이상)을 대입해 봐도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에서 중형교회보다 비율이 낮은 것은 일관된 결과였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몇 가지 추론적 설명이 가능하다. 일단, 상당히 다양한 신앙 양육 프로그램들이 제공되는 대형교회의 교인들은 그러한 환경에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도전을 자주 받으리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적용할 순 없지만, 성장하고 있는 대형교회라면 좀 더 생동감 있는 영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반면 정체되거나 쇠퇴하는 기성교회의 경우 오래되거나 습관적으로 교회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좀 더 많을 수 있다. 혹자는 이 결과에 대해서 코로나로 인한 교회의 재편 가능성도 이야기한다. 코로나 시기 동안에 사람들이 온라인 예배 시스템이 잘 갖춰진 교회들에 관심을 쏠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대형교회로 이동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명목상 교인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거나, 혹은 가족에 이끌리어 수동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이들(한국형 명목상 기독교), 또는 기독교를 문화적으로 받아들이는 크리스텐돔(Christendom) 체제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서구형 명목상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창 기독교가 확산하는 곳에서도 복음의 혼합과 약화로 인한 명목상 기독교가 일어날 수 있다. 현재 세계 기독교의 성장은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의 일부 지역이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성장하는 만큼, 번영신학과 혼합주의 신앙의 문제도 심각하다. 얼마 전 만난 동남아 지역의 한 선교사는 그곳에서 자신이 다녀봤던 현지 교회들 대다수가 번영신학에 물들어 있다고 안타까워한 적이 있다.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진정한 회심과 온전한 제자도를 위한 과제이며,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늘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다. 이번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조사에서는 명목상 교인들의 신앙 의식과 윤리적 삶에 주목해야 할 결과들이 있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에 대한 동의 비율에서 명목상 교인들은 객관적인 교리들인 성경, 예수의 속죄, 성육신, 성령, 창조, 동정녀 탄생에 동의하는 비율이 70퍼센트 후반에서 80퍼센트 후반에까지 이르렀다. 반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인’(48.1%)이나 ‘하나님이 지금도 인간의 삶에 개입하신다’(68.3%)에는 동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 가장 동의하지 못하는 항목은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38.2%)였다. 이 결과를 보면 명목상 교인들은 기독교에서 표방하는 일반적인 신앙 주제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죄 문제와 하나님의 개입과 같은 실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신앙이 그들의 실제적인 삶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신앙 윤리와 관련된 물음에서도 명목상 교인들은 가장 관용적인 항목은 1위가 음주, 2위가 이혼, 3위가 혼전 성관계, 4위가 흡연 순으로 나왔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목상 교인과 비명목상 교인 간에 허용하는 격차가 가장 크게 나타난 항목들이 있다. 사주, 점, 풍수지리에 있어서 ‘해도 무방하다’는 응답 비율이 명목상 교인은 41.3퍼센트, 비명목상 교인은 7.7퍼센트로 나와서 약 5.5배 차이가 난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명목상 교인은 23.9퍼센트가 허용, 비명목상 교인은 5.3퍼센트가 허용한다고 답해서, 약 4.5배의 차이다. 제사에 대해서 무방하다는 응답도 명목상 교인은 48.7퍼센트가, 비명목상 교인은 13.9퍼센트로 나와서 약 3.5배의 차이가 난다. 이같이 실제 생활의 문제로 들어가면 명목상 교인들은 비교적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과 비교할 때 윤리관과 가치관에서 큰 괴리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명목상 교인들을 위한 사역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이번 조사에서는 명목상 교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교회에서 사람들의 신앙 수준에 맞는 눈높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 첫 번째 진단이다. 교회 안에 많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지만 정작 신앙의 기초에 관해서, 즉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서 문외한인 많은 “숨은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는 모임은 드물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양육은 상시 제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특정 초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회중 전체가 복음의 기초를 갱신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둘째로 명목상 교인을 포용하는 소그룹과 같은 공동체 사역이 필요하다. 명목상 교인이 된 이들 중에는 교회 안의 구역이나 모임이 형식적이거나 이미 친하게 지내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것에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셋째는 아직 신앙이 미숙하거나 자라지 못한 이들을 위한 목회적 돌봄의 필요성이다. 목회자들은 주로 공식적인 사역에 전념하다 보니 교회 내의 직분자들이나 신앙의 연륜이 있는 이들 중심으로 교제권을 국한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아직 신앙의 언저리에 있는 이들에게 목회적 돌봄이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명목상 교인에 대한 사역을 목회자가 도맡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목회자 중심주의, 성직주의는 명목상 기독교를 유발하는 한 가지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목회적 돌봄은 전임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 리더들이 상호 유기적 체계를 이루어 교회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수행되어야 한다.명목상 교인들을 위한 사역의 방향으로 신앙의 기초 교육과 공동체, 그리고 세심한 목회적 돌봄의 필요성을 거론했지만, 이 모든 것은 은혜의 복음 선포라는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 신앙 교육과 공동체, 그리고 목회적 돌봄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반복되며 강조되어야 한다. 팀 켈러는 복음적 부흥은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을 돌아오게 한다고 말한다(팀 켈러의 센터처치, 167).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정교한 사역 프로그램의 설계로 해결되지 않고, 은혜의 복음이 회중 전체의 확신과 기쁨이 되고,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들 때 원천적인 해결로 이어질 것이다.
‘명목상 기독교’ 현상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3-12-04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언젠가 카페에서 지인과 대화를 하는 중에 옆 좌석에 앉은 청년들이 하는 얘기를 엿듣게 됐다. 그들의 대화에서 “교회~”가 언급되자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했다. “우리 부모님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고 신앙을 되게 중요하게 여기셔. 그래서 나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잘 다녔지.” “그러면 너도 기독교 신자야?” “아니, 난 그 정도의 신앙은 없어. 그래도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있지. 우리 집이 기독교 배경이고, 나도 교회에 적은 두고 있으니까.” 이들의 대화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명목상 기독교 현상을 보여 준다. 한국 교회 내에서 우리가 흔히 ‘선데이 크리스천’ ‘나일론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얼마 전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서 실시한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실태에 대한 첫 번째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s)이란 교회에 다니거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면서도, 신앙에 대한 명확한 이해나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 또는 교회 출석 외의 실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번 조사에서는 만 19세 이상 개신교인 교회 출석자 1,000명 가운데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39.5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1) 신념 영역, (2) 신앙 활동 영역, 그리고 (3) 신앙 정체성 영역으로 나누어 명목상 교인 규모를 파악하고자 했다. 신념 영역, 즉 자신에게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묻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근거’ ‘신앙생활의 목적’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들을 명목적 교인의 기준으로 설정했다. 신앙 활동 영역에서는 예배 외의 다른 활동에 참여하는지, 그리고 평소의 기도생활 및 성경읽기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실천하지 않는’ 명목상 교인의 여부를 파악하고자 했다. 여기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대답을 신앙 정체성의 결여로 인한 명목상 교인에 포함시켜, 최종 39.5퍼센트가 산출됐다(조사 결과의 자세한 내용은 웹사이트 참조).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와는 달리 현재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명목상 그리스도인’보다는 ‘명목상 교인’으로 분류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명목상 교인에 관한 조사는 가나안 성도 조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가나안 성도는 현재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교회가 있는지의 여부로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명목상 교인은 ‘신앙의 정도’에 관한 질문이기에 좀 더 복합적인 접근을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 2018년 명목상 기독교에 관한 로잔위원회에서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범주를 (1)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교회 소속이 없거나’(not affiliated), (2) ‘규칙적으로 교회활동이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not practicing), (3) ‘회심, 또는 거듭남이 없는’(not converted, unregenerated), 그리고 (4) ‘헌신하지 않고 피상적인’(not committed, superficial)이라는 네 가지로 제시한다(Evert Van de Poll, “Defining Nominal Christianity,” 4-12). 따라서 이번 명목상 교인 조사는 위의 네 가지 범주에서 가나안 성도에 해당하는 (1)의 경우를 제외하고, (2)-(4)의 명목상 교인 범주들을 고려해서 한국의 명목상 교인 비율을 산출한 것이다. 선교학자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그리스도인 됨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경계집합적 접근과 중심집합적 접근을 구분한다. 경계집합(bounded set)이란 교회출석, 세례, 신앙고백 등과 같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경우다. 그러나 히버트는 중심집합(centered set)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인 됨을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중심집합은 경계를 나누는 외적 표지보다는 중심으로부터의 거리 및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됨의 진정성을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 중심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부응하는 믿음과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를 통해 그리스도인 됨을 진단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경계보다는 중심을 향한 방향과 거리가 중요하다. 명목상 교인에 관한 조사는 이러한 중심집합적 개념에서의 그리스도인 됨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누군가를 명목상 교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명목상 기독교 현상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던 로잔운동에서도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는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술적으로 제안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해당 문서의 16페이지). 이번 조사에서도 명목상 교인을 산출하는 로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결과값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때문이 아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이들을 명목상 교인으로 포함해야 할 것인가? 명목상 기독교에 관한 조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앙의 진정성을 묻는다면 단순히 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긴다는 답변은 미흡해 보인다. 이들을 포함하면 명목상 교인의 비율은 50퍼센트대로 올라간다. 실제로 어떤 양육모임에 참여한 이들 30명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100퍼센트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때문이 그리스도인 됨의 근거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선행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최종 결과에서는 예수님,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라는 답을 하지 않은 이들만 명목상 교인으로 분류했다. 이와는 반대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을 명목상 교인으로 포함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연구자들 내부에서 이견이 있었다. 확신이라고 단어가 주는 단정적인 어감 때문에 겸양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비록 자신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음에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 여부를 명목상 교인 구분에서 제외하면 최종 결과는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단순히 신앙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믿음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 간주하여 포함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념이 교회에서 다소 인위적으로 쓰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미국 기독교에서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파악하는 데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의 여부를 묻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보다 구원의 확신이 설문조사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더욱 자주 쓰인다는 현실을 고려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이 상당 부분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복음주의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는 점도 감안해야 했다. 가장 최근에 명목상 그리스도인에 관한 미국의 조사는 2022년도에 Personal Faith Journey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이 조사는 미국 전역에서 9,500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과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는 두 집단을 분류했다. 분류의 기준 질문은 (1)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이상 교회(또는 신앙 모임)에 참석하는지의 여부와 (2) 자신들의 삶에서 신앙이 높은 혹은 가장 지대한 중요성을 지니는지의 여부였다. 이 조사는 두 기준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한 경우에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해서 응답자의 33.3퍼센트가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66.7퍼센트가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분류됐다. 일반적으로 서구권의 명목상 교인 조사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소위 ‘가나안 성도’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이번 목회데이터연구소 조사는 가나안 성도를 제외한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명목상 교인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가장 최근의 가나안 성도 비율이 29.3퍼센트가 나왔고, 이번에 파악된 명목상 교인 39.5퍼센트를 가나안 성도를 제외한 70퍼센트에 비례해서 산출하면 27.9퍼센트가 나오므로, 가나안 성도를 포함하는 서구식 명목상 교인의 비율은 57.2퍼센트가 나온다. 이는 미국의 66.7퍼센트에 비해서 약 10퍼센트가량 낮은 수치인데,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고려할 때 수긍할 만한 측면이 있다.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이러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통계는 없었는데, 이번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 교회 내부의 실질적 신앙생활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졌다는 의의가 있다. 사실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오래된 관심 사안이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경고하셨다. 입술로만 표명하는 신앙이 아니라, 열매 맺는 신앙이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라는 주님의 교훈은 우리가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중요한 이유이다. 역사적으로도 기독교 신앙이 관습화되고 힘을 잃을 때마다 명목상 기독교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청교도들은 명목상 기독교 현상을 넘어서기 위해 진정한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명목상 기독교(nominal Christianity)는 주로 탈기독교세계(post-Christendom)에 접어든 서구 교회의 현상이었지만, 기독교가 전래된 지 4세대가 지난 곳에서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한 세대를 25-30년으로 볼 때, 기독교가 전래된 지 138년이 된 한국 교회에서 명목상 기독교 현상은 주목해야 할 과제이다. 최근 가나안 성도와 탈교회에 대한 우려가 많은데, 사실 명목상 교인은 가나안 성도와 탈 교회 현상의 전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목상 교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고민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앙은 있으나 자신의 가치관으로 인해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나, 심지어는 기독교에 대한 회의적 판단으로 무신론자가 된 이들보다도 더욱 약한 고리가 될 수도 있다. 명목상 교인 조사는 누군가의 신앙을 등급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인생 여정 가운데 명목상 신앙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영적 변동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동적이며 불확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명목상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아예 신앙을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명목상 교인은 교회 내의 양육 대상일 뿐 아니라 선교적 대상이기도 하다. (다음 글에서는 명목상 교인들의 주요 특징과 사역 방향을 다루겠다.)
‘가족적’ 기독교: 우려와 희망
by 김선일
2023-11-2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올해 초에 인기 연예인 이승기씨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에게 좀 더 충격적인 소식은 원래 교회에 다녔던 그가 결혼을 하면서 처가의 종교인 불교로 개종한다는 것이었다. 모범적인 이미지의 그는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교회 오빠” 이승기가 “절 오빠”가 되었다는 아쉬움이 번졌다. 결혼과 함께 종교를 바꾸는 일은 한국에서는 흔하다. 종교 배경이 다른 남녀가 결혼한 뒤에 가족의 화목을 위해 상대방의 종교로 바꾸는 현상을 종종 본다. 이번에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사례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본 것 같다. 이처럼 가족의 화목과 일치를 위한 개종이 빈번하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종교보다 가족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선택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서 결혼과 함께 개종을 하거나, 혹은 부모의 영향으로 인해 종교를 갖게 된다는 것은 가족이 더 큰 종교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세우고 전하는 데 있어서 우려와 가능성을 모두 안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특징 중 하나가 가족 종교다. 그리고 가족 종교 현상은 계속 심화하고 있다. 가족 종교란 신앙이 가족 외의 다른 이들에게 전파되지 못하고 자기 가족 안에서만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처음 신앙을 가진 시기가 모태신앙인 경우는 10년 전보다 두 배나 높아졌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75퍼센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신앙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113-114). 즉, 성인 이후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율이 낮아진다는 것인데, 이는 가족 밖에서 신앙의 전파가 활성화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격적이고 진지한 결단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문화적 관습에 의한 명목상 신앙의 비율이 늘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유별나다.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지난 세기에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가족이었다. 가족 간 애정을 중시하는 문화는 어느 곳에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때로 혈연 가족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가족이 아니어도 나이 드신 분을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따뜻하고 예의 바른 관행으로 여겨진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이모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한국인의 가족주의 문화는 사회를 향해 더욱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것 같다. 건강한 가족 경험이 다른 이들을 향한 가족적 연대로 이어진다면 이는 성경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하다. 다만 불안과 불신 속에서 더 큰 사회를 외면하고 내 가족만 챙기는 가족 이기주의가 장애물이었다. 요즘에는 전통적 가족의 해체가 더 큰 문제로 떠오른다. 화목한 가족은 줄어들고 병든 가족은 늘어난다. 최근 유행하는 비혼 비출산의 풍조도 좋은 가족의 모델을 경험하지 못해서라는 뼈아픈 진단이 있다. 혈연 가족이 가족의 전부는 아니지만 사회의 가족적 연대를 위한 기초가 된다. 끈끈한 관계가 약해지고 느슨한 관계가 대세라고 하지만 인간에게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의 경험은 기본적인 생명력이다. 혈연 가족의 해체와 위기는 사회 전체의 정서적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가족적 연대가 상실되는 시대에서 종교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비기독교인 심리학자의 진단은 의미심장하다(한국인의 마음속엔 우리가 있다, 235). 가족주의적인 한국 사회가 가족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그로 인해 취약한 소속감과 연대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역할을 다시 일깨워 준다.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종교를 선택할 때 영향을 준다. 가족 간 종교가 다를 경우에는 더욱 신앙이 절실한 가족에게로 끌릴 수 있다. 과거에 비해서 신앙의 헌신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기독교는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서 신앙의 정체성이나 활동성이 훨씬 강하다. 신앙의 목적도 마음의 평안과 같은 개인적 유익보다 구원과 영생이라는 종교적 이유가 현저히 높게 나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복음적 신앙과 선교적 헌신이 필요하다. 믿지 않는 이에게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토대로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을 믿고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면 이는 비록 낯설지라도 신선한 도전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믿는 가족이 혼자만의 신앙에 그치지 않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하여 섬김과 관심의 삶을 보여 주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준다면 그것은 그들의 영혼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족을 섬기는 교회가족의 해체와 위기가 현실이 되는 이 시대에 교회는 인간 공동체의 기본인 가족을 섬겨야 한다. 성경은 혈연 가족주의나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을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의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라고 경고한다. 디모데전서가 교회의 직분과 목회적 소명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가족을 섬기는 의무는 교회의 중대한 사역이다. 인간은 가족 안에서 가장 원초적인 자기 정체성과 정서적 신뢰를 얻게 된다. 따라서 가족의 불안정은 인간됨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올바른 부부 관계와 자녀 양육을 지원하는 것은 설령 교회 성장을 위한 동기가 가미되었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서 화급한 과제를 맡는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교회의 가정사역이 소위 통념적인 ‘정상 가족’의 범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혼, 저출산, 이혼 등으로 인해서 다양한 가족 형태들이 등장하고 있다. 가족을 섬기는 교회의 사역은 생물학적 가족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이들을 사회적 가족까지 포괄하는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 사실은 교회 자체가 새로운 가족의 친교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러한 가족적 유대관계의 맥락 안에서 신앙의 전수와 나눔이 이루어질 때 교회의 선교적 역량은 가족이라는 관계망을 타고 넘쳐흐를 것이다. 교회를 섬기는 가족 로드니 클랩은 “기독교 가정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갈 때 선교 기지(mission base)가 된다”고 말한다(Families at the Croissroads, 61)고 말한다. 기독교 가정이 선교기지라는 말은 섬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족이 함께 단기선교에 가거나, 주변의 이웃에 열심히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실천도 포함될 수 있지만, 이는 기독교 가정이 혈연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을 확장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가족은 아무리 중요해도 그 자체가 하나님 백성 가족인 교회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유한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을 사모하며 그 나라를 알리고 넓히는 소명을 안고 있다. 기독교 가정의 건강성은 자기 혈육의 안정적이고 윤택한 삶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으로 품기 위한 사명과 능력을 양성하는 데 있다. 기독교 가정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선교적 사명에 응답하도록 지원하고 협력하는 곳이다. 화목한 가족만으로는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부응하지 못한다. 기독교 가정은 상호 섬김과 환대를 가족 내에서부터 가족 외의 이들에게로 확대하도록 부름 받았다. 몇몇 조사들에 의하면 새로이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의 상당수는 가족의 권유를 통해서 교회에 나온다(가족전도, 35-39).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데 있어서 가족적 요인이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 기독교가 가족 종교화되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가족을 섬기는 사역뿐 아니라, 가족에게 선교적 삶의 가치를 알리고 경험하게 한다면 한국의 가족 문화는 기독교 신앙을 지속시키는 토양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기독교에서 가능성을 찾자
by 김선일
2023-11-06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현재 대한민국은 세속화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종교 인구가 계속해서 감소한다. 한국갤럽에서 2022년에 9,18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종교인은 36.6퍼센트이고, 무종교인이 63.4퍼센트이다. 조사 대상의 약 2/3가 종교가 없는 셈이다. 연령이 낮을수록 종교인의 비율은 더 떨어진다. 20대는 19.1퍼센트, 30대는 24.5퍼센트로 평균과 큰 차이를 보인다. 각 종교(개신교, 불교, 천주교)의 인구도 모두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비종교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있다. 20대와 30대를 기준으로 종교별 인구 비율을 비교하면 개신교가 불교와 천주교보다 훨씬 높다. 20대의 개신교 인구는 11퍼센트로서 불교(3.5%)보다는 3배, 천주교(4.5%)보다는 2배 이상이 높다. 30대에서도 개신교 인구는 14.6퍼센트인데, 이는 불교(4.7%), 천주교(4.8%)보다 3배 이상 높은 수치다. 40대에서도 개신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지만(21.5%), 그 차이는 줄어든다(불교=15.6%, 천주교=7.5%). 그러나 50대로 가면 불교(27%)가 개신교(17.8%)를 훨씬 상회하고, 60세 이상에서는 그 차이가 더 커진다(불교=33.5%, 개신교=21.3%). 어쨌든 젊은 세대에서 종교를 갖는 이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다. 물론 이들에게서도 사실상 기독교 인구는 계속 줄고 있으므로, 이러한 차이가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다. 비록 종교를 가진 2030에서 개신교인이 제일 많지만, 그 비율은 이전 조사에 비해 현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20대의 개신교인 비율은 2017년 조사에 비해 9.8퍼센트나 감소했고, 30대는 5.5퍼센트가 줄었다. 전체적인 비종교화, 탈교회 현상은 2030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위의 통계에 대해서는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를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가진 2030세대에서 여전히 기독교 인구가 가장 높다는 사실은 선교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치가 있다. 기독교는 젊은 층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친밀한 종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앙이나 영성에 관심을 지닌 젊은이가 있다면 주변의 교회나 선교단체를 먼저 떠올릴지 모른다. 교회는 사찰이나 성당에 비해서 젊은이들에게 접근이 가장 수월한 종교적 공간일 것이다. 가시성과 접근성 모두 높으며, 젊은 또래의 신앙 공동체도 활발한 경우가 많다. 개인주의를 넘어서한 인터뷰에서 캠퍼스 선교단체 간사는 최근 대면 수업이 전면 재개되면서 유례없는 상황을 경험했다. 믿지 않는 청년들이 자기 발로 기독교 동아리 방을 찾아온 것이다. 대학 축제 때 그 간사가 사역하는 동아리 부스를 차려 놓고 모임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한 번도 교회에 다닌 적 없는 청년들이 직접 신앙 공동체를 찾아왔다. 이들은 코로나가 터진 직후 신입생으로 왔기 때문에 처음으로 캠퍼스 현장 수업에 참여했다. 그동안 대학생 공동체를 경험한 적 없는 이들이었는데, 대면 수업 이후 재개된 교내의 모임이나 동아리는 가볍게 즐기고 생각 없이 노는 분위기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그와 같은 전형적인 또래 문화와는 달리 진지하고 탐구심이 많은 구도자 유형에 가까웠다. 이 청년들과 대화해 본 간사는 요즘 청년들이 자유로움 속에서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들이 겪는 외로움이나 관계의 문제가 하나님을 알고 변화의 여정에 들어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하의 인터뷰 내용들은 2023년 10월 5일 국민미션포럼의 ‘한국교회 다음세대 희망터치’ 발표문에 근거한다.)현대 젊은이들의 문화는 개인주의를 기본값으로 한다. 혼자 사는 게 익숙하고 다른 이들과는 아무리 친해도 적절한 경계를 긋는다. 하지만 인간은 개인주의 영토 안에서 오롯이 살아갈 수는 없다. 개인이 중요한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주의에 편승하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선교가 아니다.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어떠한 공동체를 원할까?안전한 공동체인터뷰에 응한 여러 청년은 ‘안전’이라는 단어로 그들이 열망하는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안전은 불안과 위험에 대응하는 단어다. 청년세대는 불안하다. 생계의 문제로 불안하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하다. 기후 위기, 폭력, 사회 갈등의 증폭으로 인해 위험을 느낀다. 그럼에도 교회는 아직 안전한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때로 기독교 지도자들의 발언과 행태가 위험을 조장한다. 교회에서 전하는 하나님은 편파적이고 무섭게 느껴진다. 외로움과 불안을 느끼는 청년들은 안전한 공동체를 찾는다. 여러 청년이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주고 안전함을 느꼈던 교회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나 한때 신앙을 잃고 스스로 불신자로 간주했던 한 청년은 외로운 유학생 시절,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 준 한인교회의 경험으로 다시 신앙과 기도의 의미를 회복했다. 또 다른 청년도 한동안 “가나안 성도”로 지내다가 자기를 잊지 않고 문자로 안부를 묻는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보채지는 않는) 교회 어른이 고마워서 그가 섬기는 청소년부에 보조교사로 참여하다 신앙을 다시 회복한다. 교회를 멀리 한 자신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친절히 기다려 주다가 결국에는 돌아온 자신을 환대하는 어른들에게 감명을 받는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안전한 공동체를 마련하는 일에는 기성세대의 역할도 중요하다. 사회에서 회자되는 세대 갈등론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발붙일 자리가 없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신앙 유산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단, 환대와 존중의 안전한 공동체 안에서 그렇다.삶으로 침투하는 영성공동체만으로 젊은이들의 신앙이 온전히 회복되진 않는다. 청년의 시기는 존재의 외로움과 허무감을 겪는다. 공동체를 통한 관계와 정서적 위로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현실과 미래를 더 큰 세계관 안에서 마주해야 한다. 교회는 청년세대의 가볍고 재미있는 문화를 복제만 할 것이 아니라, 인생과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인 설명 체계를 제공해야 한다. 오랫동안 취업 준비를 하면서 낭패감에 시달리던 한 청년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넘어서 나의 삶을 계획하시고 지금 자신의 상황도 그분의 타이밍 안에 있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면서 큰 위로와 더불어 ‘감각의 확장’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는 인식의 전환을 통한 삶의 재구성이다. 인식의 전환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에서 비롯된다.싱클레어 퍼거슨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교훈의 본’(롬 6:17)을 따라 완전히 새로운 모양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 복음 교리가 그리스도인에게 확실히 각인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이나 영향을 남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성도의 삶, 23). 젊은이들이 교회에 원하는 것은 말랑말랑한 위로나 재미있는 경험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존적 상황을 해석하고 인생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견고한 답을 원한다. 성경의 큰 맥락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기도와 봉사만 요구하지 말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이 언어와 상황에서 들려지도록 전달하는 일은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역자가 끌어안아야 할 과제다. 인간은 생애 주기에 따라 위기와 숙제를 마주한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20대는 주체적 성인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자아와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30대는 자립과 가족의 구성이라는 과제를 갖는다. 그때 그들 곁에 누가 선한 조력자의 역할을 할 것인가? 누가 가장 견고하고 분명한 진리를 친절하게 들려줄 것인가? 복음과 그 복음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는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기독교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변증의 네 원칙
by Chris Watkin
2023-10-10
THE KELLER CENTER 변증에 관해서만은 받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필요하다. 최근 들어서 기독교 신앙을 변론하고 옹호할 때 내가 꼭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네 가지 현명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딱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1. 변증은 ‘우리’ 문제이다. ‘내’ 문제가 아니다. 변증을 잘하려면 서로가 필요하다. 우리 중 누구도 모든 문제를 원스톱으로 다 처리할 수는 없다. 철학자인 나의 주특기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동시에 이면에 숨겨진 가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전달 방식에 관해서 요청한다면, 그건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예를 들어,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거창한 사상의 실제적인 결과를 연구할 뿐 아니라 때때로 그러한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정치와 경제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모두가 힘을 합칠 때에만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완전한 사례를 개발할 수 있다.변증을 위해서는 나와 다른 형제자매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사나운 불독(바리새인과 싸우는 그리스도처럼)도 필요하지만 온순한 콜리(우물가의 여인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처럼)도 있어야 한다. 젊은이와 노인이 다 필요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흑인과 백인, 아프리카, 동부, 서부의 그리스도인, 모두가 힘을 합칠 때 비로소 우리는 나와 다른 그리스도인의 감수성과 사각지대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변하지 않고 영광스러운 복음을 제시할 수 있다. 2. 변증은 ‘무엇’만이 아니라 ‘어떻게’에 관한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은 단지 변증의 한 측면일 뿐이다. 똑같은 주장이라도 표현 방식에 따라 기억에 남을 수도 있고 평범하게 끝날 수도 있다. 눈에 띌 수도 있지만 전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문장이야말로 진리의 날카로움을 제대로 전달하는 최고의 방식이다. 나는 C. S. 루이스, 재키 힐 페리(Jackie Hill Perry), 그리고 프랜시스 스퍼포드(Francis Spufford)에게서 이 점을 배웠다. 그들은 진실이 스스로 노래하도록 하는 아름다운 문장 작성에 시간을 투자했고, 그 결과 그들의 글은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아마도 지난 수백 년 동안 G. K. 체스터턴만큼 이 일을 잘 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원한 사람에서 그는 “익숙함이 애정이 아닌 경멸을 불러일으킨다면, 익숙함을 차라리 낯설게 만드는 게 더 낫다”라고 말한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안다면 사람들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체스터턴의 생각은 이것이다. 기독교 예방 접종을 너무 많이 받은 서구인들은 대부분 자신이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유럽을 생소한 극동의 환경이라고 가정하고 복음을 전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기독교 이야기이기에 비난받는 환경에서는 차라리 기독교를 이교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관심을 받도록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예수님의 많은 비유 속에서 발견하는 탁월함이다. 어떤 비유 속 일부 행동은 옳지 않다. 또 어떤 태도는 우리의 고개를 갸웃거리게도 만든다. 오래되고 또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라. 하나의 참된 복음을 전하라.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말해보라. 불편할 정도로 신선하게 설교하라. 이전에 다 들어서 아는 이야기라고 떠나는 교인들이 결코 생기지 않도록 설교하라. 3. 변증은 또한 변증하는 사람의 ‘인격’에 관한 문제이다.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는 데에는 말보다 더 중요한 측면이 있다. 바로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사람됨(character)이다. 나는 언젠가 완고하고 지적으로 뛰어난 무신론자 친구를 데리고 가서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와 케임브리지 철학과의 무신론자 사이의 토론을 듣도록 한 적이 있다. 철학과 교수는 냉철했고, 목표가 명확했으며 무엇보다 완벽하게 일련의 주장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잔인한 방식으로 크레이그의 자격을 비웃었다.토론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완고하고 회의적인 친구에게 토론 감상을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비겁한 공격을 받은 크레이그가 반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가장 인상 깊은 점으로 꼽았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크레이그가 더 맘에 든다고 말했다. 그날 드러난 크레이그의 사람됨은 그이 말보다 더 큰 울림을 냈다(벧전 3:15).변증이라는 현장을 벗어나서도 인격은 여전히 중요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강력한 주장과 빛나는 산문으로 기독교를 옹호하던 몇 명의 저명한 기독교 변증가의 극적인 죽음을 목격했다. 안타깝게도 이들 변증가는 하나같이 세 번째로 중요하고 또 타협할 수 없는 특성인 경건을 놓치고 있었다.기독교의 진리가 아무리 탁월한 표현으로 강력하게 묘사된다고 하더라고, 그 말이 지속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전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건 카드로 만들어진 집처럼 단숨에 무너질 것이다. 누구나 죄를 짓는다. 그러나 다 똑같지 않다. 우리는 회개하고 투쟁하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통탄할 만한 잘못을 탐닉하고 심지어 숨기면서 사는 삶의 차이를 안다. 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소서!4. 오늘날 변증은 동시에 내부자와 외부자가 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피어스 테일러 힙스(Pierce Taylor Hibbs)가 곧 출간될 책에서 “내부자(insider)-외부자(outsider)”라고 표현한 그 입장을 가지려고 노력했다.이에 대한 훌륭한 모델 중 하나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문화를 관찰한 내부자였다. 그는 로마에서 극진한 존경을 받는 키케로가 왜 그토록 훌륭한 작가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단지 로마를 무너뜨리는 방법에 대해서 비겁하게 작성한 목록을 읽어 내려간 게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로마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독자가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로마에 대해서 썼다.그러나 그는 동시에 철저한 외부자였다. 생각과 감정이 성경적 시각에 맞춰진 사람의 눈으로 로마 문화를 바라보았기에, 로마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기이함과 특이함도 볼 수 있었다.누군가는 내부자(맥락화하라! 관련성을 가지라!)라는 게 더 자연스럽고, 또 누군가는 외부자 (선포하라! 충성하라!)가 더 자연스럽다. 변증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당신에게는 내부자-외부인의 어떤 측면을 더 노력해야 하는가? 이것이 내가 변증과 관련해서 내가 배우려고 노력하는 네 가지 원칙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변증의 사명을 실천하는 여러분에게 이 네 가지 원칙을 구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원제: 4 Principles for Practicing Apologetic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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