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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설교자가 되려는 욕망에 도사린 위험
by Kwazi Buthelezi
2023-01-29
잭 에즈윈(Zack Eswine)의 글이다. “하나님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단지 설교를 위해 또 청중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의 책을 읽었고 또 설교까지 들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미 기독교 사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에즈윈이 하는 이야기는 내게 익숙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러나 에즈윈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내가 사실상 듣고 있는 건 따로 있었다. 은연중에 나는 그를 나와 비교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과거에도 또 지금도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는 결코 내가 꿈꾸는 위대한 설교자, 미래의 나와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사역하는 캠퍼스 사역에서 누구나 손에 꼽는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에서 풍기던 지독한 무지와 오만의 냄새를 맡느냐고, 굳이 당신에게 물을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이런 무지와 오만이야말로 주님의 영광보다 위대한 사역이 우리의 야망이 될 때 따라오는 결과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런 비극이 내게 일어났다. 목사여, 위대한 설교자 이상을 갈망하라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항상 설교하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목회를 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을 때, 그 중심에는 설교가 있었다. 나는 성공적인 (다른 말로 신실한) 사역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몰랐다. 물론 적지 않은 설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설교만으로는 제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물론 설교로 교인을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자도는 관계 유지가 따라오는 헌신의 문제이다. 목회 훈련 첫해에 내가 발견한 게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을 사역에 대한 실질적인 나의 접근 방식으로 결정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다. 설교는 사역의 일면에 불과하다훈련하는 동안 나는 지도자들에게서 다소 실망감을 느꼈다. 일 년 내내 내게 주어진 설교 기회는 몇 번에 불과했다. 신학교에 들어가자 사정은 더 나빠졌다. 신학교에서는 당연히 설교 기술을 연마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망스럽게도, 신학교 삼 년을 통틀어서 내가 실제로 설교한 시간은 한 시간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은 나의 주된 관심인 설교, 그러니까 내게서 설교할 시간을 뺏는 다른 모든 사역에서 내가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대학생 사역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원하는 만큼 설교할 기회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마침내 꿈이 이루어졌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설교했으니까. 어떤 달은 두 번에서 네 번 설교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즐겼다. 그러나 설교를 하면 할수록, 내 속에서 뭔가 점점 커지는 괴로움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위대한 설교자의 모범을 조심스럽게 따르라설교를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훌륭한 많은 설교자를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스타일과 방법을 관찰했다. 그러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된 특정 설교 스타일이 생겼다. 열린 귀와 배우겠다는 지혜로 어떤 이야기를 듣는 대신에,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묵살해 버렸다. 그 결과 내가 존경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지극히 적었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겠다. 나는 지금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간절하게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처럼 설교하고 싶어졌을 때, 문제가 생겼다. 나는 존경하는 설교자들처럼 소리 내고 또 글을 쓰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사역 경험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장 수준에 만족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다른 목사의 사역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설교에 대한 열정보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랑에 더 집중했더라면, 나는 설교에서 무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설교의 세 가지 특징1. 불만족첫째, 설교가 점점 더 나를 마비시켰다. 모든 목회자가 짊어져야 할 설교의 부담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할 책임의 결과로 따라오는 부담이다. 그러나 메시지를 간과하고 강대상 그 자체에만 집중할 때, 설교자를 마비시키는 또 다른 부담이 있다. 내 설교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하나님의 과정(process)에 만족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꿈꾸는 설교자의 모습이 있는데, 나를 만드는 하나님의 손길은 너무도 느렸다. 2. 지나치게 기술적이고 영적으로 메마른 설교 준비둘째, 설교가 점점 단순노동으로 전락했다. “단순”(pure)이라는 말이 순수함에 가까운 무엇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설교에 접근하는 내 방식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기보다는, 이해 능력이 부족한 교인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숨겨진 암호 책, 그래서 힘들게 해독해야만 하는 일종의 전문 서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런 내 해석 능력은 매우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하게 주석을 의존하게 되었다. 3. 인정 갈구마침내, 설교는 내가 괜찮은 목사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본문 연구를 마쳤으니, 이제 남은 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교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설교로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나를 응원하고 또 나를 위해 기도하는 교인들의 투자가 헛되지 않았음을 설교를 통해서 증명하고 싶었다. 잊지 말자: 우리가 섬기는 대상은 구주이시다 이 모든 과정 내내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우리의 청중은 오직 한 분이다.’ 바로 하나님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 것보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고치는 더 좋은 해독제는 없다. 내가 기쁘게 해야 할 유일한 분은 이미 그의 아들 안에서 나를 기뻐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으로 그분을 섬기기만 하면 된다. 원제: The Danger in Desiring to be a Great Preach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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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교회 교육에도 색깔이 있다
by 최창국
2023-01-28
교회 교육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달해 가는 세대별 신앙의 색깔을 이해하고, 그들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양육하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 교육의 목적으로 신앙교육을 생각할 때 발달과 관련된 많은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비록 성숙한 신앙과 더욱더 나은 신앙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와 신앙발달의 보편적인 단계를 이론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세대별 신앙의 다양한 색깔과 형태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신앙발달의 역동적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 교육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대별 신앙의 특징과 형태를 통해 그들의 변화와 성장을 돕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교회 안의 세대별 그리고 다양한 그룹의 특성에 맞는 교육을 할 때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세대별 특징을 이해하고 교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아부와 유치부는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인 차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각, 미각, 촉각, 청각, 후각 등 공감각적으로 교회의 사랑을 느끼도록’(feeling the church) 서술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을 교육해야 한다. 교회에 오면 가정과 같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곳으로 느껴지도록 안내하고 교육해야 한다. 다시 서술하면, 어떤 지식적인 내용을 주입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교회에 오면 어머니 품같이 따뜻한 곳으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 성경적, 교리적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을 몸으로 느끼도록 교육해야 한다. 초등부와 소년부는 논리보다는 감각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 시기이므로 성경 말씀이나 교리를 시각, 미각, 촉각, 청각, 후각 등 공감각적으로 교회를 알도록(knowing the church) 교육해야 한다. 초등부와 소년부는 추상적인 진리와 지식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단순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 시기에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팔복, 성령의 열매 등과 같이 추상적 사고를 요구하는 교육보다는 단순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을 교육해야 한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교리와 같은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성경의 주요 인물들인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님, 베드로, 바울 등을 소개하는 형태의 교육을 해야 한다.청소년부는 성경의 교회 정체성 등을 인식하도록 교회의 해석화(interpreting the church)가 가능한 시기이다. 교회가 왜 그리스도의 생명의 몸인지, 삼위일체의 교리, 십일조 문제, 교회의 사명. 사회적 사명 등을 인식하게 한다. 성경의 정신을 내면화할 수 있는 시기이다. 청소년의 시기에는 자기 생각이나 느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상당히 향상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도 활발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많은 교회 교육 전문가들은 신앙의 여정에서 청소년기의 중요성을 밝혀냈다. 신앙적 회심과 발달은 청소년기에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삶의 여정에서 종교적 체험 또는 회심이 대부분의 기독교 청소년, 여자는 16세, 남자는 13중에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보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청소년기에 회심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가? 청소년기는 자아 정체감이 생기기 시작하며, 생리적 변화와 추상적 사고가 가능하게 되는 인지 발달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정체감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청소년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특정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청소년기에 영적 체험 혹은 회심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그들의 육체적, 정서적, 지적 혹은 사회적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교회는 청소년기가 신앙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그들의 특성에 맞게 소통하는 교육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특히 교회는 청소년기는 탐구하는 신앙(searching faith)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탐구하는 신앙은 주로 청소년에 나타나는 유형으로, 이전에 가졌던 신앙에 대한 이해에 대해 회의하면서 지적이고 비판적인 성찰과 탐구를 하게 되며, 공동체의 이야기들과 가르침 그리고 행동들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해석적 경향을 보이고 질문을 제기하는 경향을 보인다(John Westerhoff III, Will Our Children Have Faith?, 96-97). 이 단계의 사람들은 배움의 목적과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자신을 위해서 배우지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배우는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이 단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상당히 성찰적인 신앙이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 비판적이고 저항적일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현상은 신앙이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에 대한 비판은 저항으로 표현된 믿음이며, 거부로 표현된 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청소년기에는 비평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많이 하는 시기이므로 교회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때,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라고 꾸중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시기의 비평적 사고는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들의 비평적 사고를 잘못된 신앙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장년부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교회의 생활화(living the church) 차원으로 교육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이 시기에는 지식을 추구하려는 경향보다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이므로 성경을 교육할 때도 단지 성경 분석이나 해석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삶의 지혜를 얻기를 원하는 경향이 강하다. 장년부는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신앙공동체이며, 화해와 선교의 생명공동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청지기 직에 대해 논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팔복, 십계명과 교회의 절기를 내면화하도록 교육하면 좋다. 장년부는 성경적 삶의 의미를 깊이 내면화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교회 교육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교육할 대상자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효율적인 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 교육에도 색깔이 있다. 바로 세대별 색깔이다. 빨간색을 노란색으로 이해하고 교육하게 되면, 그러한 교육은 오히려 왜곡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 안의 세대별 색깔을 바르게 이해하고 교육할 때 효과적인 교육을 할 수 있다.
교회교육
세대별교육
세대별신앙
교리교육
나는 트위터 청중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by Brandon Cooper
2023-01-27
꽤나 벼르고 있다가 던진 농담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요즘 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화와 관련해서 퍽 재치 있는 해석을 담은 유머인데,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내 유머에 어김없이 예의 바른 웃음을 짓던 아내조차도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다룬 주제는 지난 며칠 내내 사람들이 계속 이야기하던 주제, 다름 아니라 트위터에 관한 것이었기에 내 놀라움은 더 컸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내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나는 몸서리쳤다. 온라인이라는 배타적이고 왜곡된 세계에서 빠져서 산다는 건 설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설교를 검토하니, 설교의 주제, 태도, 그리고 적용에까지 내게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하던 설교를 중단하고, 대신 조작된 증오와 비인간적인 내용으로 넘치는 알고리즘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내 실수의 심각성을 깨닫는 데에는 기도도, 깊은 수준의 성찰도 필요 없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열정이 대신할 수는 없다. 정치와 문화 전쟁과 관련해서 얼마든지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지만, 사랑 없는 설교는 열매 맺지 못한다. 트위터에 신경 쓰는 설교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논란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훨씬 더 나은 목표를 달성하는 “더 나은 길”이 있다(고전 12:31).설교의 목표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논란이 되는 추측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왜 그럴까? 바울은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딤전 1:5)라고 썼다.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더 키우는 것이다. 우리가 소셜 미디어 논쟁에 집중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진짜로 함께함으로만 가능하다. 예수님도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요 1:14; 3:16).예수님은 오로지 사랑의 사명에만 일편단심 초점을 두셨고, 사람들을 갈라놓기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셨다. 예수님은 정반대의 두 사람, 열심당원 시몬과 로마에 고용된 세금 징수원 마태를 택해서 제자로 삼으셨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그건 샌더스를 추종하는 사람과 트럼프 열성 지지자를 같은 그룹에 넣고 사역하는 목사와 비슷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정치의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를 보셨다. 시몬과 마태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가? 그들이 불편한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거나 소속 정당을 바꿨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단지 그들이 구주를 따랐다고만 말한다. 트위터가 아니라 성도에게 직접 설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새로운 세 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1. 두려움에서 사랑으로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트위터를 목격하면서 나는 최악의 사람들을 가정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가상 문화에 갈수록 길들어졌고, 나와 생각이 다른 성도에게 아예 선제적인 태도로 냉정해졌다. 어리석게도 나는 내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익명이라는 핸들 뒤에 숨은 온라인 속 낯선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도 온라인 속 적대자들처럼 나를 대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설교하려고 할 때면 공포를 느꼈다. 행여라도 나와 내 메시지를 모두 다 거부할까 봐 두려웠다.고맙게도 하나님이 선언하셨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완전하게 사랑하신다. 이 진리는 잘하고 싶은 덫에서 나를 자유롭게 했다. 그리고 성도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도록 만들었다. 덧없는 이슈의 반대편에 서 있는 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는,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양 무리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이런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됨으로써, 나는 이제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더 사랑하라고 설교한다. 진리는 내 설교의 어조와 강조 포인트 및 목적까지도 바꾼다. 2. 논쟁이 되는 문제에서 새롭게 만나는 복음으로온라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때 생기는 문제 중 하나는 설교마저도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에게 맡겨진 양 떼의 필요가 아니라, 가상 세계가 주도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이 문제가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실로 목회자에게는 위험한 현실이다. 온라인에서 사는 설교자는 교인들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을 모를 수 있다. 이런 현실은 교인들에게도 위험하다. 많은 교인이 교회의 리더만큼 온라인 속 문화 충돌을 즐긴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은혜받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은 설교가 논쟁이 되는 문제에 관한 긴 불평을 쏟아놓았을 때인지, 아니면 복음을 신선하게 선포했을 때인지. 목회자여, 이 점을 확신하라.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는 안 되고, 충분한 권위가 있고, 또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키는 데 충분하다면, 오바댜가 에돔에 대해 말한 내용은 이런저런 사람들이 온라인 토론방에서 떠드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중요하다. 9.11일이나 팬데믹의 첫날처럼, 반드시 한 손에는 성경을 또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고 설교해야 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미망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멀고 다른 먼 데서 열리는 학교 이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중요하다. 우리는 교인이 들어야 할 내용, 바로 오늘 그들의 영혼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3. 두려움과 분노에서 진짜 순종으로연구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 미친 듯이 스크롤을 할 때 사람들은 불안감에 짓눌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편재(遍在)의 능력을 주신 적이 없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속성이다. 인간과 공유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굳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슬픔을 다 알기 원하지 않으신다. 멀리서 벌어지는 비극을 볼 때면, 도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야 한다는 간절함에 우리는 쉽게 슬픔에 압도된다. 멀리 떨어진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해서 주로 설교하는 경우에 두 가지 악을 낳는다. 첫째, 이미 불안에 빠진 교인의 두려움을 증폭하게 된다. 둘째,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교인을 오도한다. 끊임없는 분노 말고는 구체적으로 적용할 길이 없을 때 특히 그렇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개개인이 또는 단체로 다룰 수 있는 지역 문제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 교회가 전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바꿀 수는 없지만, 교회 주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을 가정으로 초대할 수는 있다.바로 이 자리에 있는 내 마음에, 우리 가정과 지역 사회에 설교를 집중한다면, 그리고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보여줌으로써 설교를 지역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보편적인 진리를 지역 문제에 적용해서 설교하자. 그리고 (서로 정치성이 다를 수도 있는) 교인이 복음이라는 공통된 소식을 가지고 서로 손을 잡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헐벗은 이들을 입히고, 병든 이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나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다. 우리 주님처럼 목양하고 싶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지금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트위터를 스크롤하고 계시지 않는다. 인터넷 논객들과 악의에 찬 논쟁을 벌이려고 준비하지도 않으신다. 주님은 말씀을 선포하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성령을 통해서 직접 교회에 임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메시지를 바로 전하는 신실한 대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원제: I Was Preaching to My Twitter Fe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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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가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by 고상섭
2023-01-21
팀 켈러가 신학생들에게 조언한 짧은 유튜브 영상이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영상에서 팀 켈러는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네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은퇴한 목회자가 젊은 사역자들에게 한 조언이기에 더욱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1. 사역지 선정의 중요성 사역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대부분 젊은 신학생들은 대형 교회에 가려합니다. 그곳에서 청소년 사역 등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을 가는 것이 좋습니다. 설교, 목양, 상담, 전도, 주례, 장례까지 할 수 있다면 그것을 하는 작은 교회로 가는 것이 다양한 면의 사역을 배울 수 있습니다.많은 젊은 교역자들이 하나의 특별한 사역을 잘하는 스페셜리스트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목회는 어느 하나를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사람을 상대하는 목양적 일이기에 스페셜리스트보다는 제네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부교역자일 때는 자신이 맡은 분야만 잘하면 되지만 담임 목사가 되었을 때는 다양한 면을 갖추어야 한다. 담임목사가 되면 자신의 약점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목회는 장점을 극대화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단점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팀 켈러의 조언은 말 그대로 큰 교회가 아니라 작은 교회로 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작은 교회에서는 다양한 사역을 맡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고, 큰 교회에 있으면서 하나의 사역만 집중하는 것의 우려를 말하는 것이다. 작은 교회에서도 마치 담임목사의 부속품처럼 사역하다가 끝마치기도 한다. 팀 켈러의 조언의 핵심은 교회의 크기가 아니라 사역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2. 목양의 중요성 아마 여러분은 목양하는 것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설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신학생들은 삶과 상관없는 설교를 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그것을 ‘앙상한 설교’(Bony Sermon)라고 부릅니다. 온통 뼈밖에 없는 살이 없는 설교를 말합니다. 좋은 예화도 없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도 않고 그저 신학만 제공할 뿐입니다. 설교가 삶과 동떨어진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과 함께해야 하고 그들의 삶에 푹 잠겨야 하며 그들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며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설교를 훨씬 더 좋게 만들고 성도들이 여러분의 지도를 따르게 해줄 것입니다.사람들은 목회자의 비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인격을 따른다. 좋은 비전이 사람을 매료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비전을 누가 제시하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목회는 설교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도들과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그 관계성 안에서 목양이 이루어진다. 설교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소그룹과 목양은 그 방향을 따라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하는 것이다. 설교가 불이라면 목양과 소그룹은 불이 계속 타오를 수 있도록 땔감을 공급하는 것이다.고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 소그룹이 설교를 더 잘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소그룹을 통해 성도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으면, 설교의 방향과 적용도 성도들의 고민과 현실적 아픔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딱딱하게 메마른 명제가 아니라 깊은 공감이다. 팀 켈러는 이것을 상황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팀 켈러 자신도 목양을 통해 설교의 방향과 내용을 바꾸기도 했다.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 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그것이 비록 좋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삶을 어디에 건설하든지 그것은 우리의 열정과 선택을 빼앗아같 것이고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설교했다(센터처치, 271).3. 특정한 교회 모델을 따르는 위험성 아마도 여러분은 가장 좋아하는 교회 모델을 무리하게 적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자신의 상황과 관계없이 그 모델을 도입하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융통성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많은 사람이 팀 켈러가 사역하는 리디머 교회에 찾아와서 건강하게 사역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지만, 목회자들이 주로 궁금해하는 것은 본질보다는 “어떤 프로그램을 사용했는가”였다. 본질이 아닌 프로그램만 찾는 사람들에게 팀 켈러는 이렇게 조언한다.이것은 스타일이나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다. 몇 년간 컨퍼런스를 하면서 리디머 교회가 열매 맺는 비결이 어떤 프로그램을 사용했는가 하는 것보다 더 깊은 수준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참관자들이 붙잡아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리디머 교회에서 어떤 방법의 사역들을 사용했느냐가 아니라 그 방법들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센터처치, 22).팀 켈러는 리디머 교회가 열매 맺은 더 깊은 차원은 ‘신학적 비전’이라고 말한다. 교리적 기초와 사역의 형태 사이에 있는 것이 신학적 비전인데, 신학교에서 배운 교리가 어떻게 사역의 현장에서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고민에서 신학적 비전은 시작된다. 어떻게 복음을 특정 문화적 상황과 역사적 순간 안으로 가져갈 것인가에 대해 잘 고안된 비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적 신념보다 훨씬 더 실천적인 것이며, 이렇게 하라는 방법론들보다 훨씬 더 신학적인 것이다(센터처치, 25).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도 셀교회, 가정교회, 제자훈련 교회등 다양한 사역의 형태들이 있지만 무분별하게 적용하기보다는 교리와 현실을 고민하는 신학적 비전을 통해 접목해야 한다. 성경적 교리가 내가 사역하는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을 때 단지 특정 사역의 모델만을 따라가게 되고 특정 목회자의 설교 스타일을 따라가게 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좀 더 깊은 상황화가 필요하다. 4. 기도의 중요성 여러분은 기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역과 설교를 잘 해내야만 한다는 불안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다양한 공부를 하지만 기도를 위해서는 한 시간도 마련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가장, 가장,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원합니다. 기도는 가장 중요합니다. 기도를 경시하지 마십시오.팀 켈러가 은퇴 후에 기독교 잡지 World와 가진 인터뷰 중에 받은 마지막 질문이 “다시 돌아간다면 좀 더 다르게 했을 사역은 어떤 것인가”였다. 팀 켈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더 기도했을 것입니다.”팀 켈러의 기도에서도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이 기도라고 소개하면서 존 오웬의 고백을 인용한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모아 예배당을 채우고, 성찬예식을 인도하고, 대중의 입을 채워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진면목은 은밀한 가운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느냐에 달렸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기도, 43).목회자가 누구인지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기도에 달려있다. 화려한 설교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는 그의 기도에서 판가름 난다. 팀 켈러의 설교에서도 그는 목회자의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감 있는 설교에 필요한 또 한 가지는 깊고도 풍성한 개인 기도 생활이다. 우리 마음이 정기적으로 찬양과 회개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홀로 하나님의 은혜의 경이 앞에 서는 거룩한 고독의 시간이 없다면, 공적인 자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가 설교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과 거의 같다(설교, 227).목회자가 설교할 때 그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설교자의 기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을 쏟는 경험이 필요하다. 성도들이 죄의 고백을 통해 회개하기를 원한다면 단지 “회개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로는 부족하다. 설교자의 준비 시간에 죄를 향한 애통함과 통곡이 먼저 있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우리의 개인 기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설교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설교할 때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역지
목양
교회모델
기도
부교역자
우리 교회 제자훈련, 놓친 건 없을까?
by Elliot Clark
2023-01-08
제자도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누군가에게는 커피를 마시며 하는 성경 공부, 또 거기에 기도와 서로 섬기고 돌봄까지 포함한 모임이 떠오를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사역 과정에서 수행하는 책임일 수도 있다. 내 신학교 생활은 수업과 관계없이 특히 나를 성장으로 이끈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우리 교인 가정을 다니면서 제자훈련을 받았는데, 그들은 진정한 겸손과 인내, 봉사와 친절을 통해서 내게 더 나은 배우자와 부모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교육과 경험만이 아니라 성숙한 성도의 모범을 통해 천천히 제자로 만들어졌음을 깨닫는다. 나는 제자 삼는 모든 사역에 관한 성경적 패턴에는 본받음을 통한 이런 식의 성장(formation)이 반드시 포함된다고 믿는다. 일반적인 접근제자도에 관한 인식은 종종 서방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추구하는 방식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제자 삼는 방법은 크게 다음 두 가지 기본 범주에 포함된다. 하나는 가르침을 통해서, 또 다른 하나는 위임을 통한 제자 삼기이다. 교육적 모델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종종 소수의 교사를 통해 제자훈련이 이루어지는 교회 출신이다. 이런 제자훈련은 주로 주일 아침 수업, 비공식 성경 공부, 강해 설교,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경 학교나 신학교에서 일어난다.누구나 자신이 훈련받은 방식으로 제자 삼는 경향이 있기에, 교육적 모델의 배경을 가진 서양 선교사는 종종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제대로 배우는 제자를 만들기 원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기존의 인지적인 접근 방식에 대응하여 또 다른 제자훈련 방법이 등장했다.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많은 선교사가 위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새로운 신자를 즉각적으로 전도와 교회 개척 사역에 투입함으로써 그들의 제자됨을 증명하도록 하는 것이다.이러한 방법은 식민주의(colonialism)에 대응한다는 측면에서 동력을 얻었다. 서양 선교사가 토착 신자에게 가할 수 있는 외부 사상의 강요나 필요 이상의 영향력 주입을 피하도록 하는 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순수한 교육 모델, 특히 신학교 훈련으로 끝나는 모델은 개발도상국에서 느리고 비용이 많이 들며 제대로 구현이 안 되는 것으로 이미 입증되었다.교육 모델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는 선교사는 그것을 넘어선 방법을 채택할 뿐 아니라 심지어 비판하기까지 한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섬기는 능력을 지닌 새로운 신자를 보기를 간절히 원하기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는 제자를 삼고자 노력한다. 성경의 패턴그러나 두 가지 접근 방식이 다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자도는 교육과 위임이 다 필요하다. 그러나 온전한 제자 삼는 성경적 패러다임은 본받음을 포함하기에 단지 이 두 가지 접근 방식만으로는 불완전하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더 나아가 더 넓은 제자 공동체를 가르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셨다. 또한 짧은 시간 안에 사도들에게 책임을 맡기심으로, 그들이 예수님이 없어도 충분히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세까지 주셨다.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첫 번째 요소는 “그와 함께 있는 것”(막 3:14)이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 하나님 나라 선포이든, 귀신 축출이든,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임으로 알려주셨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에게 꼭 필요한 섬김과 고난을 본보기로 제시하셨다(막 8:34; 10:45). 교육받지 못한 갈릴리인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을 때,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행 4:13)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가 처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그의 제자임을 세상에 입증할 것이라고(요 13:34-35).공유 경험과 본받음에 대한 강조는 예수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자 삼기에 대한 바울의 접근 방식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생생한 모범에 크게 의존했다(고전 4:17; 빌 3:17). 그는 가는 곳마다 성경을 가르쳤다(교육). 동료와 지역 주민이 자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투자). 그러나 바울은 끊임없이 제자들을 모아 시간을 함께 보냈고, 자신의 사역에 동참하게 했다(행 20:4). 바울은 교회 지도자와 교인이 그를 본받아(고전 11:1; 살전 1:6; 딤후 3:10),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살전 1:7 ; 딤전 4:12; 딛 2:7).바울의 제자도 여정을 관찰한 사람이라면, 제자도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바울은 새로운 신자를 향한 권위 있는 가르침이든, 궁극적인 사역의 위임이든, 계속해서 멘토링 모델을 사용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의 제자 삼는 모든 과정에는 모방이 스며들어 있다. 모방을 통한 형성물론 교육 모델에 전념하는 사람이라고 신자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위임에서 항상 실패한 것은 아니다. 위임을 통한 사역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이 성경 교육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제자 양육을 위한 성경적 모델이 교육과 위임과 모범을 다 포함하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숙(Christian formation)에 대해서 더욱 관계적인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따르는 사람들에 관해서 좀 더 잘 알아야 한다(히 13:7).서구식 선교 방법은 사역을 주로 정보와 거래 중심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르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모델이 되고, 멘토가 되고, 또 무엇보다 서로 함께해야 한다. 이런 풍토는 신자들이 서로를 환대하고 책임을 다하는 지역 교회의 상황 속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교회 내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모범의 가치는 단지 중재된 존재 또는 가상 모임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충실한 제자를 삼을 수 있다는 가정을 약화시킨다. 본받음이 성숙의 중심이라면, 교회가 의미 있는 관계를 제공하는 물리적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제자훈련이라는 중심 과제에서 교회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선교를 예로 들자면, 단기 선교, 가상 훈련, 또는 부업 차원에서 촉매제 및 컨설턴트로 봉사하는 선교사와 함께해서는 결코 제대로 된 제자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사실은 지역 교회가 사역자나 선교사를 찾을 때 단순히 학력(교육)이나 경험(위임)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거기에 더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본받음). 당당하게 나의 삶을 닮으라고 말할 수 있는 입증된 성품을 갖춘 후보자를 찾아야 한다. 성경 공부와 개인적인 관찰을 통해 나는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이 단지 교육이나 위임을 통해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눈에 띄는 행실, 모범적인 봉사,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길 때 진정한 제자도는 실현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게 어떤 모습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수 있다. 원제: Is Your Discipleship Model Missing Someth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제자훈련
제자도
제자됨
모범
본받음
지상명령
교회는 얼마를 예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까?
by Stephen Story
2023-01-02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늘어나는 재산을 저장하기 위해 곳간을 늘이는 부자를 비난하는 데에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눅 12:13-21). 곳간을 채우는 게 그토록 큰 문제라면 당장 생각할 게 있다. 교회의 은행 예금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교회가 예비비로 보유해야 하는 최소 금액은 얼마일까? 교회가 곳간을 늘이는 어리석은 부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건 언제일까?이런 질문은 불편하다. 교회 재정 관련한 이야기를 진짜(real) 복음 사역과는 별개의 사항인 것처럼 어색하게 취급하는 그리스도인을 종종 대하는 게 당연한 이유이다: 안타깝지만 재정 관련해서만은 교회도 사업자의 마인드로 바라봐야 한다.” 설교와 전도와 제자도는 진짜 영적인 활동으로 보면서도, 재정은 다르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부차적인 차원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재정 문제는 사역이 아닌 사업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돈을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문(마 6:21)이라고, 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빌 4:14-18)라고 부른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는 교인의 마음 상태와 하나님 나라 발전의 관점에서 현금 보유량을 고려해야 한다. Budgeting for a Healthy Church(건강한 교회를 위한 예산 편성)에서 제이미 던롭(Jamie Dunlop)은 교회 예산이 알려주는 사실이 있음을 지적한다. “교회의 적절한 예산 유지는 이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과 그분의 약속이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 안에 교회의 예금 통장이 담당하는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계획 원칙교회가 얼마나 많은 현금을 보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은 무궁무진하다. 일반적인 접근 방식은 교회가 매달 운영하는 평균 비용을 고려한 다음 특정 메트릭을 사용하여 예금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보통 2-3개월 분량이 공통된 지침이다. 이 접근 방식의 장점은 단순성이다. 계산과 이해가 쉽다. 지금 손에 쥔 현금 액수를 바탕으로 세밀하게 조정된 저축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이 직장을 잃고 일정 기간 전적으로 저축에만 의존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는 개인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순식간에 모든 수입을 다 잃을 가능성이 없는 교회에는 별로 유용하지 않다는 게 던롭의 지적이다. 교회가 쓰는 비용은 일 년 내내 상대적으로 일정하지만, 수입은 썰물과 밀물을 반복한다. 따라서 헌금이 적은 달에도 급여와 기타 고정 비용을 지출할 수 있을 정도로는 예비금을 보유해야 한다. 그 외에도 예상보다 적은 헌금에 발생하는 연말 적자까지는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보유하는 게 현명하다. 그렇게 해야 다음 해에 재정적으로 회복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더불어서, 금년도 예산이 전년도에 비해 10퍼센트의 지출 증가를 요구한다면, 적어도 그 10퍼센트 차이에 상응하는 금액은 예비금으로 보유하는 게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헌금 부족을 점진적으로 회복하고 위기를 예방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 전혀 계획에 없던 대규모 지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큰 교회도 있다. 예를 들어, 시설이 많은 교회는 갑작스럽게 큰 비용이 드는 에어컨이나 지붕 문제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집회 공간을 임대하는 교회에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현금 보유 철학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게가난한 교회와 부유한 교회, 모두에게 다 기회와 위험은 넘친다. 현금이 부족한 교회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 왜 돈이 더 필요한 거지? 이런 욕망은 정당한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합심 기도로 주님께 돈을 달라도 제대로 매달리고 있는가? • 몇 년 동안 점진적으로 저축을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비 계좌에 매달 조금씩만 저축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이를 만들 것이다(잠 6:6-8 참조).• 지금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 교인과 지도자의 영적 건강과 관련한 경고 사인은 아닌가? 헌금에 불순종하는 교인과 현명하게 지출하지 못하는 지도자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헌금에 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지도자. • 재정적으로 어려운데도 제자 삼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어떻게 충성할 수 있을까? 자금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우리만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고후 8:1-7 참조)?충분한 현금 보유고가 있는 교회는 재정적 풍요가 영적 건강의 표시라는 성급한 결론을 경계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숙고하는 게 필요하다. • 지금 왜 돈을 모으고 있는 거지? 하나님 나라의 발전을 위해 쓸 계획이 없어서인가? • 교회를 먹이시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현금 사재기를 하고 있는가? 지금 현금 보유량 수준이 주님을 향한 필요마저 무시하게 하진 않는가(잠 30:8-9)?• 목회자, 직원, 현재 사역자에게 충분한 공급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써야 할 곳에 안 쓰고 있어서 현금이 모이고 있는 건 아닌가(잠 3:27-28 참조)?• 지금 교회 내에, 주변 사역 파트너에, 그리고 교단에 우리가 도와야 할 곳이 있는 건 아닌가? 현금에 여유가 있는 게 그 이유 때문이 아닌가(행 4:34-35)?• 가까운 곳에 새로운 교회 개척을 하라고 또는 세계 다른 지역에 선교사를 지원함으로 복음의 새로운 전선을 열라는 하나님의 인도가 아닐까(롬 1:11-12 참조)?재정은 가르침이다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말씀하셨다. 교회가 보유한 예비금은 교회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나타낸다. 지금 교회의 예금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음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교회의 저축 철학은 그 자체로 교육의 한 형태이다. 지출에 인색하거나, 지출에 대한 원칙이 없거나, 또는 돈을 모으는 데에만 급급한 교회에서는 딱 그 수준에 맞는 제자가 만들어진다. 그와 반대로, 재정에서도 청지기의 소명을 가지고 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 신중하게 꼭 필요한 액수는 저축하지만 나머지는 왕과 그의 나라를 위해 기쁘게 사용하는 교회는 교인들에게 똑같은 삶을 살도록 선한 영향을 미친다. 원제: How Mouch Money Should My Church Sav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재정
예산
어리석은부자비유
돈
우리 교회의 사모에 관해 알아야 할 열 가지
by Shari Thomas
2022-12-27
활기찬 성격의 루카스 목사와 그의 아내 미아는 뉴욕 트라리베카 지역에 자리 잡은 작지만 성장하는 교회에 딱 맞았다. 루카스는 다양한 리더십 능력을 발휘했고, 미아는 뉴욕의 냉소적인 지식인까지 매력적으로 끌어들이는 탁월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부부는 뉴욕시 비즈니스 엘리트 사이에서 점차 성장하는 네트워크를 키워나갔다. 부임하고 24개월이 지나고 교회는 크게 성장했지만, 루카스 부부는 그렇지 않았다. 8개월이 더 지나고 루카스 목사는 교회에 사임을 발표했고, 닷새 후 부부는 아파트 사택을 비웠다.왜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가 이런 식으로 사역에서 떠나는 걸까? 목사가 사임하면 보통 수많은 소문이 떠돌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게 목사의 부부관계, 특히 사모에게 가져다주는 목회의 어려움이다. 남편과 아내의 개인적인 행복이 결혼 생활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당연한 소리이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놓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사모의 안녕이 교회의 장기적인 활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 둘 사이의 상관관계이다. 목사와 결혼한 여자, 사모는 독특한 도전에 직면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사모와 그녀의 결혼 생활을 위해서 꾸준히 기도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불어 다음 사항을 염두에 둠으로써 교회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1. 사모도 인격을 가진 주체이다. 사모는 목사의 부속물이 아니다. 얼마든지 남편과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성서적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견해를 공유했다가는 언제라도 남편의 사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사모를 하나의 인격으로 대우하라. 애초에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녀만의 매력에 분명 놀라고 기뻐할 것이다. 2. 사모에게도 소명이 있다.그 소명이 당신의 맘에 안 들 수도 있다. 또 소명을 놓고 여전히 고민하는 사모도 있을 수 있다. 많은 사모가 남편의 목회 소명을 자신의 것으로, 그러니까 두 사람에게 주어진 공동 소명으로 간주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모도 있다. 그리고 사모 중에는 다른 사람을 실망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먼저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다. 혼란스러운가? 우리도 그렇다. 몇 년 동안 사역 속에서 허덕이다 보면, 아예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는 사모가 적지 않다. 봉사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사모 중에는 교회 밖에서 찾은 소명에 초점을 맞추느라 교회 사역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경우도 있다. 3. 재정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모가 있을 수 있다.우리 사모 모임(Parakaleo)에서 한번은 재정적 어려움을 두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최대한 무겁지 않은 분위기에서, 달랑 1달러를 벌기 위해 어떤 일까지 해야 하는지, 우리는 이런저런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꺼내놓으면서 함께 웃었다. 그러다가 나는 지나가는 말로 교회에서 받는 사례가 모자라서 혹시 정부가 주는 식품권이 필요했던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무려 절반이 손을 들었다. 사역에 전념하는 많은 사모에게 재정적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나는 그날 새삼 깨달았다. 4. 사모는 남편을 온 교인과 나눠 갖는다.교회 규모와 유능한 직원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연중무휴 24시간 내내 목사가 대기해야 하는 교회도 있을 수 있다. 가족 저녁 식사, 휴일 및 휴가는 종종 위기 상황으로 인해 중단되기도 한다. 종종 이런 식의 혼란이 발생하는 건 목회자가 가정과 사역 사이의 경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서인데, 사역의 특성상 예상치 못한 위기가 쉬지 않고 발생하는 건 당연하다. 특히 고위험 지역에서 목회하는 경우에 그 정도는 더 심하다. 자살을 시도했을 때, 감옥에 갔을 때, 가정에서 학대받을 때, 그리고 결혼 생활이 깨졌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연락하는 사람이 바로 목사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결혼식과 운동회 또는 세례식 같은 축하 행사도 목사가 가족과 보낼 시간을 갉아먹는다. 교인들의 모든 삶을 함께 나누는 건 목사 부부에게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들도 가족을 위해서 써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5. 뒤에서 떠드는 소리가 사모에게 상처를 준다.가십은 다른 사람의 사적인 일에 관해서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 또는 그것을 퍼뜨리는 행위이다. 가십이 반드시 악의적일 필요는 없다. 가장 간단한 원칙은 이것, 곧 다른 사람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그 사람 본인이 하도록 놔두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듣는다면, 이렇게 말함으로써 당신은 가십이 퍼져가는 통로를 막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있지, 그 얘기는 마저리가 직접 하고 싶을 거 같은데?” 그러나 악의적인 가십이라면, 단호한 태도를 취하라.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나는 그런 이야기에 가담하고 싶지 않아요.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한테 나랑 같이 가서 더 이상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지 않을래요?”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나에 관한 이야기가 교회에서 퍼지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6. 자신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의 비현실적인 기대 속에서 사는 게 사모이다. 사실 이건 누구나 다 겪는 일이다. 엄마든, 아이들이든, 상사든, 어려운 이웃이든, 우리는 모두 남들이 가진 기대가 주는 압박을 느끼면서 산다. 그러나 교회에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세상에서 느끼는 똑같은 압박감을 교회에서까지 느끼고 살아야 하는 부담이 어떨지 한번 생각해보라. 옷차림 때문에 이런저런 소리 듣는 건? 자녀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말을 어떻게 가려서 할지, 돈은 어떻게 써야 할지, 저녁 식사에 누구를 초대해야 할지 등등. 교회에서 사모가 사소한 일로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는지 알게 되면, 당신은 아마도 꽤 놀랄 것이다. 적지 않은 사모가 전임으로 일한다. 다양한 교회 사역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부부 상담에 지역 사회 행사에도 참석한다. 이미 정신없이 바쁜 삶이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사모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 역시 가장 중요한 유일한 청중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7. 교회에서 친구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사모는 알고 있다. 교회 안에 사모에게 친구가 있다면, 그게 인간적으로 끌려서인지, 아니면, 남편이 목사라서 그런 건지, 사실상 구분은 불가능하다. 많은 사모가 한때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남편이 사역을 그만두는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아픈 경험을 한다. 크리스마스카드, 소셜 모임 초대, 긴 커피 대화 또는 해변으로의 여행이 우정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사모가 적지 않다. 남편이 목사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을 우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건 사모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반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 부부와 특히 더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목사 가족이 교회를 떠날 때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이런 현실은 관련한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깊은 우정은 소중하다. 그러나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부 주제에 관해서는 말을 조심하는 이해와 성숙도가 필요하다. 8. 남편이 비난받을 때 사모는 상처받는다.노력이 부족하다, 제자훈련을 충분히 하지 않는다, 설교를 잘한다, 그 정도면 심방은 합격이다 등등 수도 없는 평가 속에 사는 게 목사이다. 어느 목사나 나름의 사역 방침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교인의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목사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목사는 몇 시간 일해야 할까? 쉰 시간? 여든 시간? 사역은 끝도 없지만, 사모 외에 목사에게 좀 쉬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욕을 먹는 남편을 볼 때, 남편이 삶에 좀 더 건강한 경계를 유지하도록 돕지 못한 것 때문에 사모는 죄책감을 느낀다.목사는 종종 불만을 표현하는 평신도 사역자의 말이나 논쟁적인 모임에서 나왔던 말을 사모와 공유한다. 그러나 상황이 해결되었음에도 관련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사모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남을 수 있다. 그런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사모에게 애매한 상황을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다른 직업의 배우자와 달리, 사모는 남편과 관련한 모든 이들과 함께 예배드린다. 놀라울 정도로 지혜롭고, 개인으로서 당당하며, 또 진실을 지혜롭게 말하는 사모를 알고 있는가? 그녀는 실로 엄청난 불 시험을 통과한 여인이다. 비록 교제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단지 관찰을 통해서라도 그녀로부터 최대한 배우도록 하라. 9. 사모는 스트레스와 모호함 속에서 산다.사역에 있어서 모호함은 피할 수 없는 풍토병 같은 것이다. 목회자 가족에게 목회 시스템은 명확하지 않다. 목회자 가족 전부가 사실상 직간접으로 사역에 참여한다. 목회자, 아내, 심지어는 자녀들까지 감당해야 하는 교인들의 기대 수준이 있다. 이런 식의 모호성은 사모에게 결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혹시 최근에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적이 있는가? 똑같은 위로의 손길을 사모에게 내밀어보라. 왜냐고? 사모에게는 각종 안타까운 소식이 거의 쉬지 않고 생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픔을 겪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모는 다른 사람과 어떤 일이 생겼는지, 또 그 일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제대로 공유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 믿던 직원이 사임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소식, 핵심 교회 지도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소식, 교회가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는 소식, 남편의 사역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소식, 가장 친한 친구가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은 사모가 사실상 정기적으로 직면하는 힘든 뜻밖의 소식들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모가 다 이런 일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많은 사모가 훌륭하고 사랑에 넘치는 교회 공동체를 만끽하면서 산다. 그리고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모는 남편과 협력하여 사역하는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가 커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모두가 다 다른 환경에 있지만, 사모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다음 열 번째는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다. 10. 사모의 의로움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당신과 나처럼, 사모도 다른 사람의 표준에 부합한다고, 그러니까 교회 출석, 성경 지식, 지출 수준 등에 따라서 의로움을 얻지 못한다.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이미 그녀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녀의 결점, 실수, 수치, 그리고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다. 그리스도가 그녀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으셨다. 거기에 더해서, 하나님은 그녀를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히셨다. 사모는 이제 의롭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딸이라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원제: 10 Things the Woman Married to Your Pastor Wants You to Know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모
사모의고충
목회자가정
목사의 도덕적 실패 뒤에는 나르시시즘이 있는가?
by Dan Doriani
2022-12-06
왜 최근 몇 년 동안 그토록 많은 교회 지도자가 도덕적으로 실패한 걸까? 거기에 관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현재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When Narcissism Comes to Church(나르시시즘이 교회에 들어올 때)를 쓴 척 디그로트(Chuck DeGroat)는 대중의 높은 인지도를 즐기는 목회자 사이에서 특히 흔한 게 나르시시즘이라고 지적한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일수록 권력과 존경과 무대를 갈망하고, 또 교회는 자기애에 빠진 유명 목사를 선호한다. 그런 나르시시스트일수록 사람을 “반짝이게(glittering)” 하는 “자신감과 강력한 지도력, 명확한 비전”으로 가득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디그로트는 말한다(1장과 4장). 공감 능력이 부족한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낙담에 빠트릴 수 있다. 필요할 때는 온갖 매력을 발휘해 자기 사람을 만들려고 하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내친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느끼는 게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다. 따라서 누군가 나르시시즘에 빠진 목사에게 회개를 외치면, 그저 무의미한 공격으로 여겨지고 만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분노가 쏟아진다. 한편으로 나르시시스트의 매력과 능력으로 이익을 얻은 교회는 그런 목사를 비호하기 마련이다. 그럼 디그로트는 과연 목회 실패의 원인을 제대로 찾은 걸까? 모든 사람에게 결함과 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교회에도 결함 있는 지도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진짜 물어야 할 것은 권력에 굶주린 사람과 나르시시스트가 교회에 특히 더 많은지의 여부이다. 에고의 문제 성경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이기주의자를 비난한다. 예수님은 지위와 권력 추구에 몰두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했다. 마태복음 23:1-15에서 예수님은 남자들이 영적 지도력이 가져다 주는 (예를 들자면 “랍비”와 “아버지” 같은) 지위와 권위와 타이틀을 추구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디모데후서 3:2-4에서 바울이 열거한 악덕 목록을 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게 다름 아니라 자기 사랑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시작과 끝이 거짓 사랑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과 돈과 쾌락을 사랑한다. 도널드 거스리(Donald Guthrie)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모든 도덕적 부패는 잘못된 사랑에서 비롯한다.” 나르시시스트 목회자에 대한 오늘날의 강조가 유행에 불과하고 또 과장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바울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우선하는 이기주의자를 비난한다. 바울이 언급한 악덕, 교만과 욕설은 확실히 이기주의의 열매처럼 들린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 자기애의 결과인가? 나르시시즘은 확실히 나쁜 품행이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목사도 얼마든지 그 유혹에 굴복할 수 있다. 그런데 특히 교회에 특히 나르시시스트가 많은 게 사실일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디그로트는 성격 테스트 결과 “대부분의 목회직 후보자”가 “자기애, 나르시시즘을 특징으로 하는 성격 장애”의 스펙트럼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르시시즘의 비율이 그중에서도 “교회 개척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높다”(19)고 덧붙인다. 왜 그럴까? 디그로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사역은 나르시시즘의 성격을 끌어들이는 자석과도 같다.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면 그 누가 매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고 싶겠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대중 연설을 힘들어한다. … 그런데 그것을 정기적으로 또 ‘신의 권위’로 하는 사람들이 바로 목사이다”(19).나르시시즘에 대한 디그로트의 작업은 나르시시스트와 함께 사는 사람 또는 나르시시스트 지도자와 싸우는 사람에게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교회에 나르시시즘이 만연하다는 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르시시즘 성향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상 대부분의 선지자, 사도, 교사, 설교자가 다 나르시시스트였다는 말인가(엡 4:11-16)? 디그로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르시시스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목사를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시에 모든 설교자의 동기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사실상 “경건한 설교자”라는 말 자체를 모순어법으로 만들어버린다. 성경은 설교자의 동기를 달리 이야기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을 준비시키고 부르시면 전파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고후 5:20).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별하여 그분을 위해 설교하고 권위를 가지도록 하셨다(행 5:42; 9:15; 롬 10:14-15). 그래서 바울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소심해서 문제가 되었던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딤후 4:2).목사에게는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필요하다 일부 교사와 설교자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건 확실하다. 마이크 코스퍼(Mike Cosper)는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과 마스힐 교회(Mars Hill Church)의 몰락에서 나르시시즘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훌륭하게 설명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많은 목사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이고, 그러면서 교인들을 유혹하고, 또 권력을 남용했다. 나르시시즘과 도덕적 실패에 대한 우려가 성품보다 재능을 더 중시하는 교회에 경종을 울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건전한 비판이다. 더불어서 그 비판이 한편으로 특권을 놓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혹하게 상대를 비판하는 데에 여념이 없는 상처 주는 목사를 경계하기 위해서라면, 그것 역시 교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의 초반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역은 자기애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끌어들이는 자석이다.” 나중에 그는 나르시시즘 스펙트럼에는 공감, 겸손, 호기심뿐만 아니라 “확신이 아닌 자신감”을 특징으로 하는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36). 디그로트가 목회 후보자의 “대다수”가 나르시시스트라고 주장한 직후에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언급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목하고 설명하지 못하면 독자들이 목회 리더십을 의심하게 될 위험이 있다. 어네스트 베커(Ernest Becker)가 말했다. “실무 수준의 나르시시즘은 자존감 그리고 기본적인 자기 가치감(self-worth)과 분리할 수 없다.” 심리학자들은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적절한 자기 보호, 주체 의식, 적절한 자존심, 그리고 계획을 세우려는 의지와 연결한다. 물론 “건강한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이것보다 더 나은 용어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도자에게는 건강한 자존감이 필요하다. 외과의, 정치인, 프로 운동선수, 최고경영자에게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이 세계에 자신이 뭔가를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기 위해서는 자아의 힘이 필요하다. 지도자에게는 자신의 역량,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사명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각종 비난과 반대, 질질 끌기, 사보타주, 그리고 쑤군거림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목사에게는 그 누구보다 더 큰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자신감이 “건강한 나르시시즘”의 한 측면이라면, 목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 어떤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있어야 한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책 후반부에서 디그로트는 “누구나 나르시시즘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라고 말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탐구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167-70). 나르시시스트를 끌어들이는 분야로 의학,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미디어, 법 집행, 정치, 기업 리더십, 종교 리더십 및 학계를 언급하는 자료가 차고 넘친다. 대중을 이끌거나 연설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목사의 도덕적 실패 뒤에는 나르시시즘이 있는가?” 그리고 “나르시시스트가 교회에 특히 더 많은가?”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많은 분야에서 도움이 된다.” 그리고 “리더라면 누구나 자신감과 사람들을 얻는 능력을 오용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얼마든지 그러한 유혹에 맞서서 싸울 수 있다.” 관심의 중심이 서는 데 목을 매는 설교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디모데와 많은 선지자(이사야 6장, 예레미야 1장, 아모스 7장)는 아예 하나님을 대변해서 말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다고 고백하는 목회자가 지금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설교는 오히려 자기 의심과 자기 비판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그들이 버티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스트 목사가 있는 것도 맞다. 그러나 목회 사역에는 다른 위험들도 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젊은 목사들이 적지 않다. 최근 내가 이끄는 신학교에서 행한 자기 평가 결과를 보면, 요즘 목회 후보자들은 권력과 스포트라이트를 얻기보다는 오히려 피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목회자가 그러했듯이, 그들도 하나님 안에서 강인함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대사(고후 5:20)라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는 올바른 것이고 또한 꼭 필요하다. 댄 도리아니는 이 주제를 다룬 논문을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2023년 봄호에 발표할 예정이다. 원제: Is Narcissism the Problem Behind Pastors’ Moral Failure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나르시시즘
자기애
이기심
리더십
정치적으로 분열된 사회,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by Patrick Schreiner
2022-11-14
최근에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서 더 이상 교회를 다닐 수 없다는 교인의 통보를 들은 어느 목사의 하소연을 들었다. 또 문화적인 문제를 놓고 분열된 당회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나아가서 교회 내 정치적 분열이 너무 극심하여 결국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목사의 이야기도 알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이야기에 익숙하다. 지난 육 년에 걸쳐서, 정치라는 전염병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교회를 강타했다. 최근 라이프웨이 설문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 중 무려 63퍼센트가 잦은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요인 중 하나가 다름 아니라 정치적 분열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여기 네 가지 방안을 권면한다. 1. 가장 먼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되새겨주어라.교회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그리스도인이 충성을 바쳐야 할 첫 번째 대상이 예수님과 교회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사실상 그 핵심에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교인들이 알게 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세상적인 의미에서 사적이거나 당파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지를 들고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당연한 시대이다. 보통 이런 식이다. “이스라엘은 전사로서의 왕이 백마를 타고 와서 로마를 무너뜨리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다. 예수님은 단지 당신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실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이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선언을 하셨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막 1:15; 15:2, 26).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기에, 우리에게는 충성을 바쳐야 할 오로지 한 명의 통치자가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왕이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분은 내 삶의 주님이시다”라는 정도의 의미로만 축소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상이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며, 이 세상의 모든 정치적 분열을 뛰어넘어 그 위에서 다스리는 왕이시다. 그리스도인에게 다른 충성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이 전 세계에 걸쳐서 만든 왕국이자 도시에서 왕되신 주님만을 섬기는 백성이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가 해야 하는 가장 정치적이고 또 실행해야 할 사명은 우리가 충성을 바쳐야 할 왕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교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2. 정치적인 영역에서 교인을 제자로 만들라. 정치와 관련해서 교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 말이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교회에서는 최대한 정치에 관해서 자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따라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 더 많이 가르쳐야 합니다.”하지만 정치로 인해 교회가 분열된 게, 행여나 우리가 정치에 관해서 어떻게 토론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서가 아닐까? 현재 정치 문제 때문에 고생하는 몇몇 목사에게 물었다. “뭘 제대로 하지 않아서 지금 사태가 벌어졌다고 생각합니까? 과거로 돌아간다면, 뭘 바꾸고 싶나요?” 그중 몇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했다. 개인 간 대화라는 측면에서 왜 그들을 좀 더 빨리 제자로 만들지 않았는지를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평화라는 명목으로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되는 대화나 말이 그냥 퍼지도록 방치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어려운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쳐서 해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좋든 싫든 교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 의해서 제자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정치를 우리가 다루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케이블 뉴스와 세속 문화는 지금도 교인들이게 분노의 정치를 훈련시키고 있다. 목회자는 부정적인 대화와 질문의 근원을 방향에서부터 바꿔야 한다. 나아가서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해에 도전할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목회자는 합당함과 근신함과 바른 말로 자기 백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친다(빌 4:5, 딛 2:2, 8). 이 교훈을 우리는 다른 모든 영역과 더불어서 정치적 삶에도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 기억하자. 지금 당장 정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면, 정치가 나중에는 훨씬 더 분열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며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3. 불안해하지 않는 존재가 되라.격동하는 분노의 바다에서 교인들이 불안에 휘둘리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 교회의 문화는 일반적으로 목회자의 지도를 따라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근심하지 않는, 평화로우면서도 고요하고 또 한결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둡고 위험한 세상에서도 밝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중하게 말하고, 행여 실수했다면 사과하는 데에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린 상태에서 우리 시대 당면한 문제를 바르게 처리하는 모범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교인 각자가 공적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강단에서 그 문제를 다룸으로써 보여줘야 한다. 정치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피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흥분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하신 것도 아니었다. 헤롯당이나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단지 질문에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가이사의 주권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정당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다(마 22:15-22).4.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분야에서만은 똑같이 분명하라.마지막으로, 교회 지도자는 성경이 분명하게 밝히는 곳에서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침묵해야 한다. 말씀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마치 성경의 입장이 서로 충돌하는 것 같기에, 정치에 관해서 그리스도인이 의견의 일치를 보는 건 어렵다. 성경은 정치와 정책에 대한 답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이다. 많은 질문에 대한 체계적인 답변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정부 시스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정부 예산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민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성경 속 어떤 이야기는 대답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또 어떤 명령은 전혀 다른 대답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해석을 하다 보면 적지 않은 함정을 만나게 되고, 더불어서 우리 자신의 편견을 텍스트 속에 이입해서 읽기도 한다. 또한 시대착오적인 생각에서 고대 정치 시스템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를 현대 정치 시스템에 적용해서 이해하려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구약의 정치 상황과 신약의 정치 상황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내 취향에 맞는 성경 속 정치 성향 중 하나를 받아들이고, 나머지 다른 것을 향해서 그냥 눈을 감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 하원 의원이 워싱턴 DC에서 목회하는 마크 데버(Mark Dever) 목사에게 국가 예산 문제와 관련해서 어떻게 투표해야 하는지 물어봤다는 이야기를 어느 목사가 내게 들려주었다. 데버 목사는 그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 나는 나름 확고한 생각이 있었지만, 문제는 성경이 확실하게 알려주는 메시지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의원님,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데버 목사는 성경이 분명하게 알려주는 문제에 관해서만은 목회적 권위를 양보하지 않았다. 정치적 제자도와 관련해서 교회 지도자는 첫 번째 방어선이다. 세상 문화는 쉬지 않고 교인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그렇기에 교회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대안 사회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신실한 삶을 산다면, 그것부터 세상을 향한 우리의 증거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된 모습을 보고 세상이 이렇게 감탄하지 않을까? “와, 저 사람들 서로 사랑하는 것 좀 보세요!”(요 13:35). 원제: What Can Pastors Do About Political Divis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와정치
정치적분열
교회의일치
고독한 목회자가 기댈 곳은 어디인가?
by Chris Davis
2022-11-13
지난 가을, 사역에 지친 나는 외로움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고통에 온몸이 아릴 정도로 나는 혼자였다. 교회에 갈 때마다 내 몸이 그 사실을 알려줬다. 1990년대 후반부터 내 목회 열정의 전부가 설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달 동안 설교 준비에 집중할 수 없었다.도무지 제대로 사역을 할 수 없어서 결국은 긴급 안식년을 가졌고, 조용히 목회를 그만둘 계획을 세웠다.고통은 함께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외로움은 나를 질식시켰다. 내 존재 전체를 부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혼자 있는 아담을 보시고는 “좋지 않다”라고 선언하셨고, 벌거벗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완전하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관계를 위해서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타락 이후, 우리는 온통 자신을 가리고 산다. 마치 물에 둘러싸이고서도 목마름에 죽는 것처럼, 또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말이다. 모세는 이렇게 한탄했다.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민 11:14). 엘리야는 동굴에서 외쳤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왕상 19:10). 광야에서 함께 짐을 나눠 짊어지는 장로 70명에도 불구하고, 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목숨을 걸고 간구했다.모세와 엘리야처럼 내 주변에도 든든한 사역의 친구들이 있다. 나는 현명하고 자비로운 형제들과 함께 월간 목회자 모임에 참석한다. 나를 책임지는 파트너도 있다. 아내 및 형제자매와의 관계도 풍성하고 달콤하기만 하다. 그러나 사역의 현장에서 외로움을 짊어지는 것은 가까운 사람을 잃은 슬픔을 짊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한두 번 정도야 친구나 다른 교회 동료 목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느끼는 상실감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언제 그런 주제를 놓고 이야기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4년 전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돌아가셨을 때, 나는 상실감을 주는 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슬픔나눔(GriefShare) 그룹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외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 고통을 숨기는 대신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둔 기독교 치료사가 이끄는 지역 주간 그룹에 합류했다.연결의 리듬간증과 더불어서 주간 업데이트를 할 때, 인도자는 종종 일시 중지 버튼을 눌러 다른 사람들이 방금 전에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화가 납니다!” 또는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등과 같은 감정적인 소통은 바늘과 실을 연결하듯 서로의 마음을 묶는 역할을 했다. 진행자가 처음 간증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들었을 때 어땠냐고 물었을 때,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의 연결은 두 배가 되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또 다른 참가자들이 이어서 어떻게 느꼈는지 공유했을 때, 이야기를 나눈 사람의 말이 다른 이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 모두 한 번 더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가 경험한 관계의 깊이는 심오했다.이 지독한 외로움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인도자는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이와 비슷한 그룹을 시작해보라고 권유했다.내 기준은 간단했다. 매주 한 시간을 함께 보낼 만큼 연결을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세 명의 목사 친구에게 물었고, 그들은 즉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접근 방식에 관해서 약간의 망설임을 드러냈다. 뭐라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이야기하자고? 내 이야기를 하라고? 모임을 줌(Zoom)으로 했기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면 바로 나가겠다고 미리 말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몇 주 지나지 않고 시간을 매주 90분으로 늘이는 데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우리의 모임은 어느새 없어서는 삶의 일부가 되었고, 우리 중 누구도 이전에 그 어떤 모임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연결과 정서적 안정감을 키울 수 있었다. 마침내 자유함을 모임을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게 우리의 전문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목사인 내가 나 자신의 감정, 욕망, 동기 및 상처를 끄집어낸다는 건 어렵다는 사실이다. 지금 기분이 어때? 원하는 게 뭐야? 지금 무슨 이야기를 자신한테 하고 있어? 등의 자주 접하는 질문을 정작 내가 대답하려니까 쉽지 않았다. 강단이 주는 혜택이라고나 할까, 언어에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점이 목회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에게까지 나를 제대로 알리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임에서 종종 자기도 모르게 설교하려는 상대방을 설교 모드로부터 끄집어내야만 했다. 그래야 비로소 다시금 제대로 목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 자신뿐 아니라 상대에게 나를 제대로 알리는 목표 말이다. 동료 목사들과 시작한 모임을 기점으로 해서, 하나님은 우리 교회 안에 그와 비슷한 공간을 만들 기회를 열어주셨다. 나는 가정생활을 버거워하는 아빠 그룹, 그리고 7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과부 그룹을 매주 만났다. 각각의 경우, 모두는 다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다. 지금 우리는 아무도 원하는 사람이 없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했다고. 공유할 간증거리가 항상 있었지만, 내가 던진 질문은 각자가 감정의 폭발, 신분이 도용된 악몽, 그리고 성인 아들의 죽음에서 느낀 감정이 무엇인가 말하라는 것이었다. 상황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표면적으로는 가장 의심스러운 의미에서 쓰이기도 하는 용어, ‘치료’(therapeutic)처럼 보이는 이 새로운 상호작용 방식이 가져다준 가장 놀라운 결과는 그것이 어떻게 성화를 이뤄가는 새로운 통로를 열었는가라는 점에 있다. 감정과 욕망 그리고 이야기(narratives)에 대한 공동 탐구가 복음 전달 체계가 되어, 이전까지만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손길이 닿지 않던 곳에서 더 깊은 치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만날 수 있도록, 상처받은 부분이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나는 참가자의 심령이 더 온전하게 치유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나는 목회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외로움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감춰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사역 속에서 나는 이제 부분적인 것이 완전한 것에 자리를 내어주고,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온전히 알게 될”(고전 13:12) 그날을 꿈꾼다.원제: Where Can the Lonely Pastor Go?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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