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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
by Keith A. Evans
2023-11-29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이유”도 함께 소개합니다. 신학교(신학대학원) 첫 수업을 들었을 때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결혼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스물두 살이었다. 신학교 수업은 내 수준에서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성경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 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당신은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럼 지금 내가 왜 과거의 당신과 똑같은 젊은이들에게 신학교를 가라고 권유하고 있는 걸까? 이유는 명확하다. 그러함에도, 단점보다 장점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를 볼 때,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사역을 추구했다. 목회에 필요한 신학 교육을 위해서 기존의 직업을 그만두는 경우는 서구 기독교에서 상대적으로 드물다. 물론 좀 더 인생에 노련한 사람이 되어서 신학교를 가면 분명한 이점이 있다. 교인들의 삶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들로부터 존경받을 이유도 더 갖춰져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젊을 때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신학교에 진학하면 상당한 이점이 있다.1. 장수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두 번째 직업이나 노년의 부름을 받아 간 사람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사역할 수 있다. 사역에서 금혼식은커녕 은혼식을 맞는 사역자를 거의 찾기 힘든 시대에 남들보다 일찍 시작해서 오랫동안 인내하며 사역한다면, 그런 사역자의 신실함은 눈에 뛸 수밖에 없다. 일찍 사역을 시작할수록 성장하고 성숙할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아무리 최고의 신학교라고 해도 사역에 관한 전부를 배울 수는 없다. 목회자의 진짜 교육은 사역지에서 이루어진다. 실전에 더 일찍 투입되는 일꾼인 만큼, 더 많은 경험과 성숙을 기초로 영혼을 목양할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 2. 에너지와 열정젊음은 젊을 때 낭비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건 나름 재치있는 과장이지만, 젊은이일수록 더 큰 에너지와 야망을 갖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조심하지 않으면 열정에 넘쳐 과격해지는 유혹에 직면한다. 젊은 남자들이 신학교 시절에 쌓은 신학이 소위 말하는 “새장에 갇힌 단계”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열심(딛 2:14)을 목표로 삼되, 그렇다고 지나치면 안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헌신하되, 그렇다고 선동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젊은이가 젊음과 열정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할 때, 그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 다른 직업과 달리 젊음의 에너지를 사역에 쏟을 때, 교회에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전도하고, 봉사하고, 심방하고, 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일에 인생을 바치라. 빠를수록 좋다.3. 집중쟁기를 잡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게 그리스도의 말씀이다(눅 9:62). 힘든 사역을 하다 보면 채 일 년이 되지도 않아서 모든 걸 벗어버리고 싶은 경우를 여러 번 만난다.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이 단지 마구잡이로 사역에 투신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마음대로 사역을 떠나서는 안 된다. 그렇다. 때때로 사역에서 한 발 떨어지는 게 지혜로울 때가 있다. 예상치 못하게 만난 장애 또는 부양의 책임이 사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전적 헌신을 방해할 수도 있다. 더불어서 가족 간의 불화, 특히 부부 관계 또는 자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는 가족에 집중하는 게 우선순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비상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역을 포기하는 것은 당신에게 사역이 부르심이 아니라 단지 직업이고 개인적인 결정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목사 안수는 교회를 통해서 추수할 밭에서 일할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이다. 그렇다면 일찍 시작한 신학교가 어려움을 만난 사역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계속 집중하는 데에 어떻게 도움이 될까? 신학을 일찍 시작할수록, 아무리 사역이 어렵다고 해도 다른 곳에 한눈팔 가능성이 줄어든다. 그러나 애초에 목사가 아닌 다른 직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사역이 어려워질 때 얼마든지 다른 직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세상 직업에서 받는 돈이 사역에서 받는 사례보다 더 많을 때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교회 밖에서 다른 교육을 받거나 기술을 익히는 게 잘못이라는 건 아니지만, 일찍부터 오로지 목회에만 집중하면 분명한 유익이 있다. 한눈팔 가능성을 현저하게 줄이는 동시에 참고 견디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4. 유연성젊을수록 오로지 공부에만 신경쓰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젊을수록 어떤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최고의 신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하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교육이 항상 온라인 교육보다 우수하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식의 이동이 모든 사역 후보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감당할 수만 있다면, 교수, 급우, 지역 교회 공동체와 함께 생활이 가능한, 보다 완전한 신학교 경험을 하라고 권면하고 싶다. 젊은 가족일수록 유연한 선택이 가능하다. 신학생의 가족이 기존의 삶에서 시작하는 대신에 새로운 환경에서 온 가족이 사역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도 있다. 젊기에 적응과 변화는 좀 더 쉽고, 온 가족이 사역을 중심으로 함께 성장하는 통일된 경험은 소중하게 남을 것이다. 나는 반복되는 이사에도 잘 적응하는 우리 어린 자녀들의 회복력에 몇 번이나 놀라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역사회와 특정 장소에 매이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한번 내린 뿌리를 뽑기는 어렵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섬기는 것은 특권이다. 왜 굳이 늦게 시작해야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기쁨이다. 그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은 축복이다. 경건한 교수들로부터 멘토를 받고 동료 학생들로부터 격려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젊은 세대가 일어나 봉사하는 건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이다. 왜 하루라도 빨리 사역에 투신하지 않는가? 젊은이들이여, 무엇을 기다리는가? 신학교 교육을 받는 데에 지금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원제: Why You Shouldn’t Wait to Go to Semina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이유
by Ryan Williams
2023-11-29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도 함께 소개합니다.나는 막 신학교를 졸업했다. 불과 몇 달 전에 졸업장을 받으려고 연단에 올랐다. 정말 멋진 하루였다. 지금 벽에 졸업장이 붙어 있다는 것은 내가 복음 사역을 위한 훈련을 정식으로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럼 졸업하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나는 십이 년 동안 전담 사역을 해왔고, 그중 십 년은 담임목사로 섬겼다. 이번에 건축 프로젝트, 재개척, 코로나19 팬데믹, 몇 번의 논쟁적인 정치 시즌 등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두 교회에서 목회했다.나는 좀 예외에 속한다. 서구에서 일반 목사는 보통 소명을 받으면 신학교부터 간다. 따라서 목사 안수 전에 신학교 훈련을 하는 교단이 대부분이다. 사역을 시작한 지 무려 십 년이 넘게 지나서야 신학교에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왜 젊은이가 신학교 입학을 기다리는 게 좋을까? 이게 과연 좋은 판단일까? 지금 당신이 신학교 입학을 고려하거나 다른 학위 취득에 관심이 있다면, 왜 좀 더 기다리는 게 가치가 있는지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하겠다. 1. 사역에 관한 비전이 좀 더 성숙해야 한다나는 모태 신앙이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고, 따라서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지,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리고 목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패러다임이 없었다. 성경 대학에 진학한 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역의 길에 접어들었다. 입학하고 나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공부가 정말로 싫었다. 겉보기에 경박하게만 보이는 신학 토론, 겉보기에 천박하게만 보이는 성적에 대한 관심,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만 보이는 강의 자료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강의 시간에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상상하곤 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헬라어를 배우는 동안 저들은 과연 어디에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까? 나는 교회에서 인턴으로 섬기기 위해 성경 대학을 중퇴했다. 그리고 그 기간에 목회 사역 훈련과 제자훈련 과정을 거쳤다. 교인들을 만나서 조언하고 보살핌을 주면서 나는 신학교 수업에서 토론한 진리가 어떻게 개인의 고통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사역을 통해서 “성장”한 후에야 나는 마침내 사역을 위한 정규 교육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었다.2. 인격적으로 더 성숙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난 직후에 나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은 있었지만,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 삶에 깊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목회자는 내 주변에 없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풀타임 학위 프로그램에 뛰어들기 전에 좀 더 기다리면서 성숙함을 키우라는 조언을 들었을 것이다. 내가 만났던 야심 찬 많은 신학생이 공감할 거다. 그들은 지원서의 핵심 부분을 놓치고 있다. 즉, 이 사람이 신학교에 갈 준비가 되었다고 그가 다니던 지역 교회의 교인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추천하는 부분 말이다. 신학교는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훈련하기 위한 곳이 아니다. 그건 온전히 지역 교회의 몫이다. 따라서 신학이라는 고등 교육에 뛰어들기 전에 당신의 소명을 지지하고 학교생활 내내 당신과 동행하며 헌신할 정도로 성숙한 기독교 지도자가 있는 지역 교회에서 성장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3. 학습 습관을 길러야 한다성경 대학에 다닐 때, 한번은 구약성서 교수가 세 시간 강의를 마친 후에 나를 옆으로 부르더니 말했다. “앞으로 너는 내 강의 시간에 스트레스를 푸는 고무볼을 손에 들고 주무르면서 강의실 뒤에 서서 수업을 들어라.” 다시 학생이 되기 전까지 나는 법 집행 기관에서 근무했고, 따라서 수업이라는 환경을 떠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난 상태였다. 그런 내게 세 시간짜리 강의는 말 그대로 고문이었다.단지 신학책과 교회사 관련 서적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신학교 전 과정을 따라가는 건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헬라어 어휘, 교회사 읽기, 여러 주제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처음 다운로드했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압도당했다. 성경 대학 입학은 내게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목사로서 공부에 더 익숙해진 후에조차도 전임 신학생이 되기 위해서 나는 학습 역량을 더 키워야만 했다. 4. 먼저 가족 부양과 사역에 들어가는 비용도 계산하라처음 계획은 인턴십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턴십을 수료한 나를 교회에서 목회자로 청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교 입학을 고려할 때마다 교회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길을 가로막았다. 단지 학위를 추가하기 위해 결혼 생활과 가장의 책임을 저버리는 것은 옳지 않았다. 게다가 교회에 들어가는 비용도 계산해야 한다. 신학교는 몇 년에 걸쳐서 주당 몇 시간이 들어가는 긴 과정이다. 그렇게 바쁜 학위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는 약간의 브레이크를 밟고 조금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교회를 개척하고, 또다시 개척하고, 또 그러다 보면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고,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건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도전적인 사역 기간에는 평소보다 목회자와 사역 지도자에게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사역에 정신이 없는 상태라면, 신학교 학위를 취득하는 데 여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교회와 가족을 목양하고 돌보는 것이 더 높은 우선순위이다. 신학교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다.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사역 훈련을 위해 성경적으로 신실한 신학교에 가야 한다. 하지만 먼저 비용을 계산하라. 좀 더 기다리거나 레지던트나 인턴십이라는 비전통적인 경로를 택하는 것이 최선의 결정일 수도 있다. 때로는 당신 자신과 가족, 섬기는 교회가 당신의 신학교 경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좀 더 기다림이 필요할 수도 있다. 원제: Why You Should Wait to Go to Semina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커피와 설교
by 전재훈
2023-11-16
천국에 커피가 없을까 봐 걱정될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달달한 맛에 라떼나 마끼야또를 좋아했지요. 봉지 커피나 자판기를 이용하면 200원으로 해결될 수 있는 커피를 3,000원 넘게 주고 마셔야 하는 부담감이 커서 아무 때나 마실 수는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사 줄 때 한 번씩 마시던 고급 커피를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제게 주는 상으로 한 번씩 마시곤 했지요.개척 후 아내와 함께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카페라떼 한 잔 들고 차에 올랐다가 타박을 받았습니다. 개척교회 목사가 정신이 있냐는 말을 들었지요. 300원이면 될 커피를 3,000원씩 주고 마실 형편이냐는 것입니다. 그 후 2년 정도 라떼를 마시지 못했습니다. 커피에 대한 한이 맺히고 말았지요. 그 뒤로 누군가가 밥을 사 준다고 하면 밥 대신에 커피를 사 달라고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초라해 보였을 것 같습니다만 덕분에 제 주변 목사님들이 감사하게도 제게 늘 커피를 권해 주십니다. 우리 교회 인근에 에스플러스라는 카페가 생겼습니다. 목사님 부부가 하시는 카페이고, 교회에서 가깝다 보니 자주 갑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면, 늘 과일을 내어 주시고, 드립 커피도 한 잔 권해 주십니다. 카페에 앉아 목사님과 담소를 나누면서 과테말라에서 케냐AA까지 다양한 커피를 마시고, 텀블러에 아메리카노 한 잔 가득 담아 나옵니다. 드립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든 생각이 커피는 내려 마시는 것이었는데, 그동안 마셨던 커피는 녹여 먹는 커피였습니다. 인스턴트커피를 마실 때는 티스푼으로 저어서 마셨는데 드립은 그냥 마시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커피는 원두를 사다가 볶고 분쇄하여 머신으로 내리거나, 핸드드립을 해서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커피 원액을 에스프레소라고 합니다. 여기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이 아메리카노이지요. 그러나 원액을 건조하여 가루로 만들면 인스턴트커피가 됩니다. 인스턴트커피는 원액을 건조시킨 것이니 물에 녹여 마셔야 했던 것입니다. 커피는 맛도 중요하지만 향이 중요한 음료이지요. 인스턴트커피를 만들 때 향이 사라지기 때문에 향을 따로 저장하는 장치를 갖추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가루와 향을 잘 배합시켜서 우리가 마시는 봉지 커피가 만들어집니다.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이런 봉지 커피에는 커피 원액이 10퍼센트 미만인 것이 많습니다. 캔 커피의 경우에는 원액을 1퍼센트만 넣고 커피향을 이용해 감히 커피라는 이름을 도용하지요. 그것도 눈속임하느라 ‘1.00%’라 적어 놓습니다. 요즘은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시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갖추신 분들이 많아졌고, 교회에서 커피 교실을 운영하는 곳도 많습니다. 커피 가격이 로스팅한 것과 분쇄한 것의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로스팅한 원두를 사다가 직접 분쇄해서 마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는 아예 원두를 사다가 로스팅해서 드시는 고수들도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초 향기가 많았다면 이제는 커피향이 많아졌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일에 청년이 먼저 와서 커피를 내려놓고 있기에 커피향이 진하게 납니다. 커피는 그 종류도 굉장히 많습니다. 이름조차 외우기 힘들지요. 커피 원액을 에스프레소라고 합니다. 에스프레소를 기본으로 물을 부으면 아메리카노가 되고, 우유를 넣으면 라떼, 우유 거품을 많이 넣으면 카푸치노, 우유와 초코 시럽을 넣은 것을 모카라고 하구요, 우유와 카라멜 시럽을 넣으면 카라멜 라떼나 카라멜 마끼야또가 됩니다. 에스프레소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것을 아포카토라고 하는데 제가 좋아하는 커피입니다. 그 밖에 우유와 커피의 혼합비율로 도피야나 콘파냐 등이 있지만 별로 대중적이지는 않습니다. 카페 로얄, 아이리시 커피, 카페 깔루아, 파리제 등은 커피에 술을 넣어서 만든 것들입니다. 커피를 찬물로 오랫동안 내린 커피를 더치커피라고 합니다. 카페인이 비교적 적다고도 하구요. 그 맛이나 향이 진해서 ‘커피의 와인’ 혹은 ‘커피의 눈물’로 불립니다. 일반 카페에서 마실 수 있는 커피 중 제일 비싸기도 합니다. 더치커피에 사이다를 부어 마시는 것을 더치소다라고 하는데요. 저는 한 번 마셔보고 다시는 안 마시는 커피입니다. 그러나 더러 더치소다를 즐기시는 목사님들이 계신 듯합니다. 커피가 맛과 향으로만 즐기던 시대에서 이제는 눈으로 즐기는 시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커피아트라고도 불리는 라떼아트의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라떼의 우유 거품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나뭇잎이나 하트 같은 간단한 것에서, 곰돌이 푸우나 고양이 그림 같은 고난이도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달인들은 입체 캐릭터도 그려내고 심지어 커피 주문한 사람의 초상화까지 그리는 사람이 있다니 가히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커피가 아무리 종류가 다양하고, 멋지고 예쁜 작품까지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저는 아메리카노가 맛있는 집이 좋습니다. 좋은 원두를 쓰고, 원두에 맞게 섬세하게 로스팅한 다음, 신선하게 내린 질 좋은 커피를 제일 좋아하지요. 이런 기본을 무시한 채, 달달한 맛이나 예쁜 그림으로 내놓는 커피는 금방 질려 버립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손재주가 좋은 바리스타가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분들을 주변에서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럴 바에는 손재주 있는 분들보다 투박하고 느려도 기본에 충실한 바리스타가 더 좋습니다.커피처럼 설교에서도 기본에 충실하시고, 손재주도 뛰어나신 설교가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의 설교를 들으면, 복음적이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참 재밌습니다. 하지만 많은 목사님의 설교는 복음적이다 싶으면 졸립고, 재밌다 싶으면 남는 게 없을 때가 많지요. 설교는 이 둘 사이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해 보입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설교의 내용을 이루는 신학을 배웁니다. 하지만 졸업하고 목회 현장에 나오니, 세미나 같은 곳에서 내용보다 스킬을 더 많이 배우게 됩니다.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에서, 다양한 설교의 형태, 효과적인 언어 전달법, 미디어 사용법 등 다양한 방법론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정작 설교의 내용은 세미나에서 나눠 주거나, 다른 목사님들의 것을 표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설교의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전한다 해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내용보다 전달력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설교를 할 때, 교인들이 졸아 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졸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유머나 예화도 자극적인 것을 사용하고, 영상도 틀고, 연극도 보여주고, 원맨쇼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 현실상 목사님들이 설교 준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시대라 목회 말고도 다른 일을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만 전념한다고 해도 일주일에 8번에서 12번 정도 설교해야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전도사님 한 분 없이 혼자서 교회 일을 다 꾸려가야 할 경우, 설교를 위해 책 한 권 읽어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이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시간을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하는데, 오히려 영상을 편집하고, 미디어를 만들고, 유머나 예화를 찾는 일에 시간을 더 많이 소비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좋은 예화를 만나면 예화를 살리기 위해 설교 본문을 바꿔 버리기까지 합니다. 바리스타라 해도 좋은 원두를 볼 줄도 모르고, 로스팅을 전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저 로스팅된 원두를 사다가 갈아서 우유 넣고, 카라멜 시럽 넣고, 예쁘게 그림이나 그려내는 바리스타가 더 많지요. 바리스타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성경을 제대로 연구할 줄 모르고 묵상하는 힘도 없이, 그저 다른 사람의 설교를 가져다가 예쁘게 흉내만 낸다면 사람들의 귀는 즐겁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힘을 잃게 되고 맙니다. 재밌고 좋은 설교를 들을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재밌는 설교보다는 좋은 설교가 듣고 싶습니다. 설교를 듣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지나가는 것보다, 설교자가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하고 묵상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설교가 더 좋아진 것입니다. 손재주를 가르쳐 주는 세미나보다 좋은 원두를 고를 줄 알고, 그에 걸맞게 로스팅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세미나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자의 고뇌가 설교의 형식보다 내용에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사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by Trevin Wax
2023-11-05
얼마 전에 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처럼 영원한 심판을 다뤘다. 우리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인 이상, 나는 아무리 불편한 진리라고 해도 결코 살금살금 피해 가며 성도들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정말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에 관한 경고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내용, 그리고 분노와 정욕이 지옥불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또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성경에 있는 그대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말고는 없다. 그게 현대인의 귀에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말이다.예배가 끝난 후에 한 여성이 내게 다가와서는 그동안 많은 교회를 다녔는데 지옥에 관해서 말하는 목사를 처음 봤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중요한 메시지를 큰 소리로 선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마치 저주의 단어로 남용되는 지옥이 그 힘을 잃은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비밀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신실한 신자들은 그 단어가 여전히 정통 기독교의 일부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소리 내서 말하지 말아야 할 누군가의 목적지임을 알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심판을 언급하지 않고 어떻게 예수를 전한다는 걸까? 예수님의 그 다양한 비유를 어떻게 설명한다는 걸까? 멸망에 대한 그의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경고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걸까? 이게 다가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양자택일과 대조를 강조하셨다. 비록 당신이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교리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교단을 초월한 급진 그리스도인(red-letter Christian)이라고 할지라도, 멸망과 사라지는 영혼을 경고하신 예수님의 육성(the red letters)과 지옥을 상징하는 죽지 않는 벌레와 꺼지지 않는 불의 이미지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굿바이, 사탄지옥이 없다는 사실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은 사라지는 사탄이다. 점점 더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마귀나 귀신, 세력과 정사에 관한 말씀을 듣는 게 힘들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사탄이 사라졌다. 그렇다. 은사주의 교회나 오순절 교회에는 종종 나타나지만, 점점 더 부유해지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는 복음주의 교파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사탄이라는 고소자에 관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치를 떤다. 악마가 모든 문제의 배후에서 엿보고 있고, 사탄의 영향력이 성경의 증언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지나치게 강조되는 다른 신앙 전통에 만연한 일종의 과장을 피하고 싶어 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절제된 방식으로 가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거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유일한 장애물에 있는데, 그게 바로 성경이다. 성경뿐만 아니라 교회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비서구 지역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성경이 이런 태도를 반대하고 있으며, 기독교 역사 속 모든 신자도 그러했고, 또 서구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의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우리는 지금 많이 특이하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침묵은 꽤나 정교하다고 여겨지는 거 같다. 사탄이 사라지고 생긴 여러 여파문제는 이거다. 당신이 사탄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말하는 구원은 성경이 증언하는 죄와 구원이 아니다. 고작해야 일반적인 좋고 나쁨으로 구분되는, 심리치료적이고 세속적인 범주를 넘어설 수 없다. 지옥에 대해서 당신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나누는 복음 속에는 긴박감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전하는 복음은 단지 사람들이 듣기에 더 좋고 더 만족스러워 보이는 삶의 방식일 뿐이다. 이게 바로 인스타그램 인플루엔서부터 불교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는 일이다. 당신이 악마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천사도 언급하지 않을 거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성경이 실재라고 말하는 영의 세상을, 즉 보이지 않는 영역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고작해야 말씀에서 벗어난 우주관을 가진, 빈약한 상상력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고대 교회는 분명하게 성경의 주장을 확증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교회는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 더욱이 천사, 귀신, 사탄, 지옥에 대한 빈약한 시각은 우리가 죄와 싸울 때,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자 할 때,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의 순결을 추구할 때, 우리를 불리하게 만든다. 사탄의 상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맥락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며, 영적 전쟁터가 어느새 평화로운 위로와 성취의 현장으로 변형되었음을 드러낸다. 영원이란 지분의 무게를 줄임기독교가 말하는 영원이 달린 문제의 중요성을 낮출 때 수반되는 필연적인 결과는 결국 사소한 문제가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달한 생사의 긴급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무슨 결과가 생길까? 우리는 생사의 긴급성을 다른 문제에 삽입함으로 세상 문제를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구 교회에서 목격하는 현실이다. 우리가 우주적 관점을 잃고 “이 세상”과 관련된 삶의 측면만을 강조할 때, 미래의 심판이라는 엄중한 현실을 경시할 때, 우리는 결국 영원한 정의에 대한 희망마저 잃게 된다. 이는 결국 지상의 정의만이 우리에게 남은 전부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완전한 정의를 달성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정의가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현실을 만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남은 결과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각종 정의 추구는 사실상 생사의 투쟁이 된다. 진짜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할 무언가를 찾는 과정에서 싸워야 할 진짜 전쟁 대신에 우리는 쉬지 않고 계속되는 작은 전투에 매료된다. 위대한 드라마를 놓친 사람의 눈에는 이 세상이 만드는 작은 세속적 드라마가 중요해 보인다. 예수님처럼 가르치고 있는가? 나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사탄, 지옥, 천사, 악마에 대한 설교가 어떻게 다가갈지 깊은 고민 없이 섣부르게 하는 설교를 권하지 않는다. 상황화는 중요하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해석하라고 설교자를 주셨다. 단지 말씀은 소리 내서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작 필요한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주의 깊게 설명하고 성경이 쓰였을 당시와 지금의 문화적 거리를 인정하면서 사람들이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초대하는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세심하게 배려한다고 해도 이상한 점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고 현대인의 귀에 이상하게 들리는 모든 부분을 다 없애겠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특이한 점은 눈에 띄기 마련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그를 전하는 예수님의 선포자가 된다면, 우리는 그가 말씀하신 모든 것, 심지어 오늘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까지도 고심해야 한다. 그건 독선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확장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교묘함으로 심판에 대한 경고를 비웃는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이중적인 공격도 포함하고 있다. 정통적이고 건전한 신앙고백을 고수하는 교회도 얼마든지 성경이 강조하는 가르침에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있다. 올바른 교리를 따르면서도 거기에 따른 합당한 엄중함을 가지고 그 교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가능하다. 오늘날 사탄이 신자들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의 하나가 목회자들이 예수님처럼 말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예수님에 관한 참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처럼 설교하게 하는 것이다. 원제: Whatever Happened to Sat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사가 목사 된 것은...오로지 주의 은혜
by 전재훈
2023-11-01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했을 때였습니다. 복학을 신청하러 학교에 갔는데 채플실 올라가는 계단을 시각장애인 학우가 혼자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팔을 내어 주고,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그 학우가 대뜸 ‘재훈이 형?’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인지 다시 봤지만 전혀 기억이 없어서, 나를 어떻게 아는지 물었더니,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도와드렸던 시각장애인 선배가 이맘때쯤 전재훈이 제대해서 도와줄 거라고 “예언”했다네요. 사람들은 대개가 도와줄 때 팔을 잡지, 자기 팔을 내어 준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나는 부모님이 시각장애인이셔서 몸에 밴 습관이라 팔을 내어 드렸던 것입니다. 자기 팔을 내어 주자 저를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 친구를 신대원 졸업할 때까지 6년간 도와주었습니다. 신대원 다닐 때는 장애인신학연구회를 맡아서 장애인 학우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길을 가다가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팔을 내어 드리고 가는 곳까지 안내해 드립니다. 신대원 졸업할 때 시각장애인 교회에서 전도사로 와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받았으나 전부 거절했습니다. 장애인들을 잘 알고 그들을 돕는 법도 알지만, 하기가 싫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장애인 사역으로 부르시지 않는다고 믿었고, 그냥 평범한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장애인들을 돕다가 지쳤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사역을 감당하려면 장애인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사역에 대한 소명이 확실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장애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목회자가 소명 없이 일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만, 특수 사역이라고 부르는 일들에는 그만큼의 특수한 소명이 필요한 법이지요.최근에 목사 안수식에 갔다가 들은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목사님들을 대접하려고 집에서 기르던 개를 끌고 다리 밑으로 갔습니다. 개를 죽이기 위해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는데, 그만 빗맞아서 개가 도망갔습니다. 할 수 없이 개를 포기하고 닭이나 몇 마리 잡아서 보신탕 대신 삼계탕으로 목사님들을 대접하셨지요. 그리고 집에 돌아가 보니 도망간 그 개가 집에 와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보면서 반갑게 꼬리를 치면서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 개를 보면서 장로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죽이려 했는데도 그런 자기를 주인으로 알고 여전히 꼬리치는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목사님이 목사안수를 받는 분들에게 이 개처럼 충성해야 한다고 권면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지요.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 땅의 부귀영화를 바라고 사는 것은 아니기에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분명한 자기 확신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개처럼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보내시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는 헌신과 이름도 빛도 없이 살겠다는 희생정신이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나는 장애인 사역과 선교사로만 부르지 말아 달라는 조건부 헌신을 했던 전도사로 그런 면에서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최소한 소수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을 보고 자신도 성공하려고 목사 안수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솔직히 나는 할 수만 있으면 큰 교회를 하고 싶었고,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화성에서 평범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섬기고 있지도 않고, 선교사로 나갈 마음도 여전히 없습니다. 큰 교회에 대한 동경과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도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 안수를 받을 때와 비교하면 변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그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는 목사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한 바울처럼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기 일을 버리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종은 자기 일도, 자기 시간도, 자기 소유도 없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또한 목사는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대로 주님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자나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개념에 목사의 지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는 성도들보다 조금 높고 하나님보다는 조금 낮은 존재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예수님만큼은 아니어도 성도보다 좀 더 거룩해야 한다고 느꼈고, 집사님이나 장로님보다는 더 신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권사님보다 1분이라도 더 기도해야 하고, 구역장보다 한 장이라도 성경을 더 읽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성도가 21일 작정 금식기도를 하면, 목사는 40일쯤은 해야 하고, 성도가 방언하면, 목사는 통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목사로 살면서 느끼는 긴장감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종 주제에 자기 시간과 소유가 많다는 것이 죄책감으로 작용했고,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이유로 돈의 유혹에 너무 약한 것도 불편했습니다. 거룩해 보이고 신령해 보이는 성도들과 경쟁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세속적인 오락과 쾌락에 눈이 돌아갈 때마다 거부할 힘이 없어 몰래 숨어서 해야 하는 숨바꼭질도 상당한 스트레스였습니다. TV에 걸그룹이 나올 때 눈을 떼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고, 컴퓨터로 영화를 보다가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다가도 누가 오면 성경 보고 있었던 것처럼 쇼할 때마다 ‘나는 가짜다’라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목사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돕는 것이 아무런 보상 없이 그저 나의 희생과 헌신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매우 힘들게 했습니다. 차라리 다른 일을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잘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학원 강사라도 했더라면 아내를 공장에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거, 갖고 싶다는 거 다 사 주고, 남들 다 가는 학원에 우리 아이들도 보낼 수 있었을 거라 여겼습니다. 나와 내 가족이 다 희생하면서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보상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이 땅에서 거지같이 살아도 하늘에서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으니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는 말에 발끈해서, 천국은 들어가기만 하면 됐지 무슨 면류관이냐고, 차라리 이 땅에서 돈으로 바꾸어 쓰게 미리 가불해 줬으면 좋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천국은 가게나 매장도 없을 텐데 거기에 보화가 있다고 한들 어디에 쓰겠냐고 하면서, 이 땅에서나 유용한 것이니 쓰다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지요. 내 마음 구석진 곳에 하나님을 장애인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느꼈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은 인정도 안 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럴 바에야 뭐하러 목사 할까 싶어도, 쉽게 그만두지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목회가 하나님의 일에서 나의 일로 슬며시 바뀌면서 교회가 내 사업장이 되고, 성도는 고객이 되었으며, 헌금은 내 수입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상품이 되었고, 십자가는 인테리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에서 하나님과 동업자로 바뀌더니, 심지어는 주객이 전도되어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이 나의 동역자가 되는 이상한 목회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할 주님이 영리법인, ‘(주)예수 그리스도’가 되어버렸습니다.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을까 고민하면서 깨달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였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셈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내가 목사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했고, 나를 목사님으로 불러주는 성도들이 내게 필요한 존재였습니다.대학가 한복판에서 꼭 필요한 직업을 묻는 설문 판을 만들어 세워 둔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쪽은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 20개를 나열하고, 다른 쪽에는 ‘없어도 되는 직업’ 20개를 나열한 뒤 스티커를 붙이게 하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 미용사, 건축가, 일용직 근로자, 택시 기사 등을 목사와 함께 두면, 20개의 직업 중 목사는 몇 위쯤 할까요?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에서는 하위권에, ‘없어도 되는 직업’에서는 상위권에 오를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부르신 종이나 동역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사가 성도보다 거룩하거나 신앙이 좋아서 특별히 선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성도를 돌보는 일도 목사가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전도하고 가르쳐 회개시켜서 구원받게 하고, 예배와 설교를 통해 은혜받게 하고, 제자 양육으로 성화하도록 하는 일도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고전 3:7).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는 찬양처럼, 내가 목사가 된 것은 나의 헌신과 희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을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목사가 되려고 했었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목사가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행복한 목사가 되게 하시려고 인내심 많은 성도님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목사로서 하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나에게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목사도 그저 당신의 어린 양일 뿐이고, 사랑받아야 할 당신의 자녀였습니다. 목사 안수식 때, 선배 목사님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며 충성된 목사가 되려고 하셨는지를 설교하거나 권면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으로 그 자리까지 오게 되었음을 고백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예비 목사님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며 희생과 헌신을 결단하도록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으로 예비 목사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해 주면 좋겠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워지고, 성도님들이 계셔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설교의 허구
by 전재훈
2023-09-18
설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기록된 성경, 설교하는 목사, 그리고 설교를 듣는 회중입니다.성경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기록한 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쓰신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면 죽습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을 죽지 않을 만큼만 경험했습니다. ‘미스터리’는 ‘입을 다물다’라는 말에서 기원한 말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미스터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경험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성경 기록자들은 하나님을 경험하되 말을 할 수 있을 만큼만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단편적 경험밖에 되지 않습니다.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험한 다양한 사람들의 기록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입니다. 본 것을 백 번 들어도 그 사람의 경험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은 뜻과 톤과 의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정확히 들어야 말을 그나마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안 그러면 자칫 야단치는 말을 칭찬하는 말로 오해하게 됩니다. 성경은 아쉽게도 녹음된 책이 아니라 기록된 책입니다. 우리는 톤과 의도가 사라진 뜻만 있는 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험을 글을 통해 바르게 전달받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마저도 그 성경의 원본이 없습니다. 사본만 있을 뿐입니다. 사본은 원본과 다른 점이 분명 존재합니다. 이는 오해의 소지가 분명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마저도 설교자는 사본을 보고 설교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 설교자는 역본을 거치고 개역을 거친 우리말로 기록된 한글 성경을 보면서 준비합니다. 그나마도 개역개정4판을 기본 텍스트로 합니다. 개역하고 개정하기를 4번이나 더 한 텍스트라는 말입니다. 원본에서 멀어져도 한 참 멀어진 글이 되는 셈입니다. 설교는 목사가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기준으로 볼 때, 나는 원어의 의미를 모릅니다. 원어가 쓰이던 당시의 문화나 생각, 가치관, 역사관, 세계관,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입니다. 같은 말도 어느 문화권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뜻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과 다른 인식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경 지식이 다르고 이해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더군다나 20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지구 반대편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기와 건기를 살던 사람들과 사계절을 사는 사람의 생각이 비슷할 수 없습니다. 저녁이 되니 새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쓴 책을 아침이 되니 새 날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설교해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공간과 문화와 언어와 역사를 가지셨으며 회중을 완벽하게 이해하시고 모든 이적과 기사를 행하실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읽으셨던 분이 하는 설교에서도 안 믿는 사람들이 기적처럼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 부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물리적 기억이 있는 동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도들이 설교할 때가 되면 예수님이 하셨을 때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안 믿습니다. 교부들은 사도들의 제자로서 같은 문화권 속에서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설교는 안 믿는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보다 더 훨씬 후대의 사람입니다. 내가 설교할 때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설교는 회중에게 하는 행위입니다. 회중의 듣기 실력에 따라 설교는 얼마든지 오해와 곡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회중의 태도에 따라 설교의 전달 능력은 현저한 차이를 보입니다. 설교 시간에 수면 보충하는 사람들, 빨리 끝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 그저 재밌기를 원하는 사람들, 이들이 회중이라면 설교는 그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회중의 상태도 문제가 됩니다. 지식수준의 차이, 나이의 차이, 경험의 차이, 생활수준의 차이, 학력의 차이가 매우 큰 집단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시간의, 공간의, 역사의, 능력의 갭을 가진 내가 원어 성경도 아니고 한글 성경 개역개정 4판을 가지고 다양한 욕구와 스팩을 가진 회중에게 행하는 이야기가 설교인 것입니다. 최초 하나님을 경험한 성경 기록자들의 하나님 경험을 100이라고 한다면 나를 통해 회중이 인식하게 될 하나님 경험은 0.000000001쯤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최초 기록자들 역시 하나님을 100퍼센트 경험한 것이 아닐 터이니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설교를 통해 회중이 갖게 될 하나님은 몇 퍼센트일 것 같으십니까?아주 아주 희미하게나마 갖게 된 하나님 인식이 그마저도 오해나 곡해나 왜곡된 하나님 인식일 가능성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인간인 목사가 인간이 기록하고 베껴 쓰고 번역하고 개정한 성경을 가지고 인간들에게 행한 설교에 그 어떤 은혜나 믿음을 기대한다면 그건 죄악입니다. 은혜나 믿음은 사람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있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수고나 학력이나 권위는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설교를 통해 성도의 변화를 기대한다면 교만입니다. 누가 만약 내 설교에 은혜를 받거나 믿음이 생기거나 하나님을 좀 더 알게 된다면 그건 둘 중 하나입니다. 왜곡된 은혜나 믿음일 가능성이 가장 크고, 참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린도전서 2:4-5).
성공하는 개인 전도를 위한 세 가지 법칙
by Sean McGever
2023-09-15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구원의 계획”과 “영적인 법칙”을 사용하시는 게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도 방법’ 운운하는 책을 볼 때면 불편함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런 책이 사실로 가정하는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전도 관련 책들은 주로 정보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건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오로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서 말씀을 들고서 실제로 누군가를 만나서 전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전도 전략은 사람이 하는 논쟁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그러니까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과 말씀을 통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에서 나오는 말을 혼동할 위험이 있다. 어떤 사람이 전도에 반응한다는 것은 논쟁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에 반응하는 것이므로 전도는 단지 정보 제공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전도는 인격적이어야 한다. 진정으로 인격적인 전도가 되도록 돕는 새로운 “법칙”을 소개하겠다. 법칙 1: 경청하라전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과 하나님 말씀의 좋은 소식,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의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일 때 번성한다. 복음 전도자들은 소책자나 팜플렛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사람의 영혼을 보살피는 전도자는 귀를 기울인다. 먼저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 자신의 죄에 대해 변명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당신 스스로 초래한 수치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행여라도 당신의 마음에 속삭이는 사탄의 거짓말을 분별하겠다는 결심에서 멀어진 건 아닌가? 나 자신의 실패를 알게 되었다면, 나를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의 진리로 모든 실패를 당당히 대면함으로 대응해야 한다. 전도자라면 항상 성경 속 복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당신이 사는 공동체를 구원하고 싶은가?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 기도실로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새롭게 압도하도록 만들라. 오늘 복음을 들었는가? 얼마 전에 저지른 죄를 똑똑하게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말씀을 들었는가? 그리고 그 죄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어떻게 처참하게 패배했는지를 한 번 더 마음속에서 그려보았는가? 복음을 제대로 들었다면 이제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세우신 사람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영혼이 성경으로 적셔지고 새롭게 된 마음과 영혼과 생각으로 무장한 전도자는 이제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다. 전도는 천편일률적인 일이 아니기에 경청은 매우 중요하다. 환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의사는 모든 증상에 같은 약을 처방함으로써 환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런 의사는 대학을 다시 다녀야 한다. 귀 하나는 앞에 있는 사람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다른 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앞에 있는 사람의 특별한 상황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현명하게 선포할 준비를 하라. 법칙 2: 선포하라전도는 들은 내용을 전도 대상자에게 지혜롭게 연결하고 적응시키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선포할 때 번성한다. 대부분의 지도 앱은 상황에 따라서 믿을 수 있는 대체 경로를 제공한다. 심지어 다양한 교통수단(자동차, 대중 교통, 도보 등)의 경로까지도 조정해준다. 마찬가지로 현명한 전도자는 십자가에 이르는 많은 경로에 능숙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이 매번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미리 결정된 도로, 일련의 법칙 또는 다리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도하시는 성령의 지혜를 의지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그리스도 예수가 주님이심을 선포할 가장 적절한 기회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복음의 선포는 주일 예배 중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설교, 세례, 성만찬, 또는 확신의 말씀 중에 선포되기도 한다. 또는 예배가 끝나고 나누는 주차장 대화에서도 선포될 수 있다. 때때로 자녀를 재우는 부모의 입에서 복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다. 복음의 선포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가능하다. 복음은 뒤뜰, 사무실, 문자 메시지, 피자 가게, 기차역 등등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성령의 음성에 예민하다면,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선포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바로 다음 말이 될 수도 있다.법칙 3: 반복하라전도는 우리가 경청하고 선포하는 습관을 규칙적으로 만들 때에 번성한다. 영혼을 직접 돌보는 전도자는 반복해서 듣고 또 반복해서 복음을 전한다. 그들은 자신을 계속해서 성찰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선포는 여러 조각을 맞춰야 하는 깨진 기록과 같다. 전도는 결코 제자도에 따라오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도야말로 철저한 전도, 그 자체이다. 경청할 수 있는 기회와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많이 찾으라. 그리스도인이라면 개인적으로 영혼을 돌보기 위해 얼마든지 많은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언제나 복음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만유의 주가 되셨다는 선포야말로 평생 동안 우리의 마음을 고치는 향유, 연고, 치료제이다. 복음의 선포는 그리스도인 삶의 시작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십자가로 짊어지셨고 부활을 통해 죄를 정복하셨다. 세례는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선포는 믿음으로 사는 삶의 중심이다. 우리 앞에 놓인 길, 기쁨, 시련이 무엇이든,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성찬식에 정기적으로 참여함으로 우리는 이 진리를 끊임없이 상기한다. 마지막으로, 복음 선포는 우리의 삶이 끝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주님께도 그러하셨듯, 우리의 부활의 날이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장례식도 이 사실을 기념할 것이다. 전도는 결코 은사를 가진 소수에게 맡겨진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물론 전도에 은사가 있는 일부가 있을 수 있다.) 전도는 단지 일회성의 논쟁하는 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그럴 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전도가 반복해서 상대의 말에 경청하고 또 반복해서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일어나는 지속적이고 개인적인 목회 활동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원제: 3 Laws for Truly Personal Evangelism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지친 목회자를 위한 소망
by Ryan Ross
2023-09-11
목회 서신서 연구는 신학교 목회 인턴십, 레지던트, 사역 과정의 필수 요소이다. 미래의 목회자라면 이 편지들로부터 기초를 쌓아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 서신서야말로 모두가 동의하는 신약성경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는 직분의 성격, 목회 소명의 구체적인 내용, 그리고 목회자가 교회를 돌보는 방식이 나와 있다.Pastor, Jesus Is Enough: Hope for the Weary, the Burned Out, and the Broken(목사들이여, 예수님으로 충분하다: 지친 이들, 탈진한 이들, 부서진 이들을 위한 소망)의 저자 제레미 라이트볼은 목회자를 격려하기 위해서 바울이 쓴 세 권의 목회 서신에만 내용을 국한하지 않는다. 저자는 미시간 플리머스에 있는 Woodside Bible Church의 담임목사이다. 그는 결코 사역이 주는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가 어떻게 목회자에게 격려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첫 세 장은 교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목회자가 깨달아야 하는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Pastor, Jesus Is EnoughJEREMY WRITEBOL만족한다는 것은 곧 지쳐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사들이여, 좋은 소식은 당신만으로는 결코 충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예수님 한 분으로만 충분할 수 있다. 제레미 라이트볼은 이 책에서 요한계시록 2-3장 속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를 통해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고 목회자들을 초대한다. 요한계시록 2-3장의 권고는 교회 전체를 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목회자들을 향한 권면이 들어있다. LEXHAM PRESS. 192 PP.목회 초점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에 관해서 기록한다(계 1:16). 그는 “이들이 일곱 교회의 천사들(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20절)이라고 설명한다. 교회 자체는 “일곱 촛대”로 묘사된다(12, 20절).그러면 “일곱 교회의 천사”는 누구일까? 얼핏 문맥을 보면 “천사”는 초자연적인 수호천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피터 라잇하르트(Peter Leithart)와 개혁주의 가르침의 오랜 역사를 따르는 저자는 요한이 지금 말하는 사자가 교회마다 특별히 지정된 천사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사자(使者, messenger)인 목사라고 주장한다. “이 편지는 예수님이 목회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목회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개인적인 가르침이다.”(6) 이런 해석적 접근 방식은 난시를 교정하는 렌즈 역할을 한다. 마치 안경을 새로 맞추는 것처럼 목회적 의미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춘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왜곡되었던 이전의 나 자신과 나의 사역을 깊이 되돌아 볼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목회자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직접성은 회개가 필요한 곳을 지적하고,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사역하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목회자들에게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 책이 가지는 중요성이다. 권고와 격려요한계시록 처음 세 장의 대상이 목회자라는 주장을 펴는 저자는 일곱 편지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자신과 목회자에 관해서 하시는 말씀을 끌어낸다. 저자는 목회자를 변명하지 않는다. 목회 사역이 얼마나 가치 있는 소명임을 이해하기에 결코 목회 기준을 낮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꾸짖음을 강조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목회자가 자신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는 목회 사역에 충실하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게 아님을 상기시킨다. 목사라면 누구나 드는 유혹이 있다. 내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기도하고, 상담하고, 또 잘 목양한다면 교인들이 다 나를 좋아할 것이고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저자는 “목회자에게 고통은 사역의 당연한 현실”(35)이라고 주장한다. 이 지적은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목사들이여,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목회자가 얼마나 교묘하게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사역을 악용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나는 단지 신실하고 싶을 뿐입니다”라는 영적인 언어조차도 개인적인 유산을 남기려는 죄악된 욕망의 은폐 수단일 수 있다.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여라도 그 영광의 일부에 내가 동참할 때만 그런 거 아닌가? 이런 내용은 격려라기보다는 숲속으로 밀어 넣는 압박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처럼, 저자는 독자들을 향한 비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이 주는 안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안도감은 오로지 복음을 통해서만 온다. 저자는 쉬지 않고 예수님의 속죄를 통해서만 오는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목회자는 이미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다. 그들의 사역은 오로지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현실을 저자는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언제라도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복음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정체성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목회자들은 더 이상 실패를 축소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자유롭게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저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목회자의 회개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그를 정죄하는 증언자가 그를 위한 치료법도 함께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127). 목회자들이 은혜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 달려갈 때, 그들은 은혜를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목사들이여,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목회자들이 거룩함을 추구하되 궁극적으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찾도록 격려한다. 이 책은 목회자들에게 하나의 축복이다. 그렇기에 더 널리 읽힐 가치가 있다.원제: Hope for Weary Pastors: Review: ‘Pastor, Jesus Is Enough’ by Jeremy Writebo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작은 교회도 얼마든지 파송 교회가 될 수 있다
by Stephen Witmer
2023-08-31
예수님은 슈퍼 교인이나 대형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교회에 세계 선교의 임무를 맡기셨다. 이것이 마태복음 28:18-20의 의미이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신다. 따라서 그가 주신 임무는 그를 섬기는 모든 백성의 사명이다. 그러나 작은 교회라면 과연 어떻게 세계 선교에 기여할지 궁금할 것이다. 작은 교회라면 어디를 가도 글로벌 차원에서 선교사를 재정으로 지원할 뿐 아니라 특별 프로그램까지 운영하며 정기 선교팀을 파송하는 대형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형편이 좋은 대형 교회와 달리 작은 교회는 목회자 사례비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관리비를 지출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떻게 그런 교회가 파송 교회가 될 수 있을까?좋은 소식은 그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대사명에 깊은 관심을 품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단지 접근 방식에서 더욱 사려 깊으면 된다. 작은 교회가 세계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1. 희생하는 마음으로 바치라작은 교회가 대형 교회와 같은 수준으로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는 없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얼마든지 대형 교회에 풍부한 자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예수님의 관심이 결코 돈의 액수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큰 금액을 헌금하는 부자들 사이에서 고작 동전 두 닢을 헌금한 과부를 주목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자. 과부는 가난 중에 구제했기에 넉넉한 가운데서 헌금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헌금했다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었다(막 12:41-43). 바치는 재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액수가 아니라 희생 정도이다. 이 원칙은 단지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가치를 부여하는 선교는 희생의 헌금이다. 작은 교회들이여, 바로 여기에 좋은 소식이 있다. 교회가 작기에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희생하며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신약에서 가장 관대한 교회의 하나가 마케도니아의 작은 교회들이었다.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고후 8:2-3). 희생하는 헌금에는 큰 예산이 필요하지 않다. 단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뛰겠다는 관대하고 헌신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작은 교회는 헌금 액수에 고민하는 대신 세계 선교에 얼마나 헌금을 늘릴 수 있는지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려해야 한다. 2. 창의성 있는 파트너가 되라뉴잉글랜드 지역에 더 많은 교회를 개척하겠다는 목표로 나는 지금 뉴잉글랜드 한 지역에서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다른 교회에 비하여 규모와 자원이 열악한 우리 교회는 교회를 함께 개척하기 위해 다른 일곱 개의 소규모 교회와 협력했다. Village Green Collective의 목회자들은 깊은 형제애를 키워 왔으며, 우리는 지금 새로운 교회 개척을 위해서 재정 자원을 공유하고 있다. 작은 교회들끼리 맺는 관계, 재정 파트너십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세계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같은 생각을 가진 같은 지역의 다른 작은 교회들과 힘을 합쳐서 선교사를 지원하는 건 어떨까? 세계 선교라는 사명이 진전됨에 따라 이런 파트너십이 여러분의 교회를 어떻게 하나로 묶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파트너 교회 회원들이 모여서 팀을 만들어 세계에 흩어진 선교사를 방문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교회가 작을수록 쉽게 고립된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창의성 있는 파트너십을 위한 많은 기회가 있다. 나는 최근에 미시시피주 허리케인 피해자들에게 수천 달러의 구호금을 제공하기 위해 교단과 협력한 경험이 있는 소규모 침례교회의 이중직 목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거기에 더해서 이 교회는 세계 선교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교단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80개의 작은 교회가 함께 헌금한다면, 그 전체 금액은 결코 적지 않다. 열방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을 보기 위해 작은 교회들이 힘을 합쳐 새롭고 창의성 있는 파트너십의 구축을 함께 꿈꾸는 것은 어떨까?3. 관계에 투자하라세계 선교를 앞두고 작은 교회는 할 수 없는 일을 한탄하기보다는 대형 교회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거기에 투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워싱턴주의 어느 작은 교회 목사는 작은 교회야말로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선교사를 지원하는 데에 특히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했다. 교인이 70명인 교회의 경우에 교인 모두가 다들 선교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은 교회는 방문 선교사에게 훨씬 더 쉽게 강단을 오픈할 수 있으며, 이는 교회와 선교사와의 관계에 대한 교인들의 이해와 지식을 더 깊게 만든다. 작은 교회는 가족과 같다. 교회에 방문한 선교사에게 온 교회가 존경과 환대를 보여줄 수 있고 한 가족으로서 따뜻하게 환영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워싱턴주의 목사는 어느 아프리카 선교사가 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인 대부분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나눴다고 말했다.내가 목회하는 교회는 대형 교회에 비해 선교사를 지원할 자원은 적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관계의 성장에 창의성을 발휘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교회 소그룹은 각각 선교사 한 사람을 선택해서 기도하고, 또 돌봄 패키지를 보낸다. 우리는 그들을 방문하기 위해 평신도 지도자를 포함한 팀을 보낸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일꾼들에게 이보다 더 큰 격려는 없다. 4. 쉬지 말고 사랑하라작은 교회는 길게 내다 봤을 때 사랑을 나누는 데 능숙하다. 끈질긴 믿음이야말로 작은 교회의 생존 수단이다. 그들은 어쩌다 사랑하는 게 아니라 깊이 사랑한다. 한때만의 사랑이 아니라 그치지 않고 사랑한다. 선교 동역자에게는 필요한 게 바로 꾸준한 헌신이다. 작은 교회가 탁월한 부분이 바로 선교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견고한 사랑이다. 나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서 선교사로 사는 가족을 꾸준하게 지원한 아주 작은 교회를 알고 있다. 그 교회 목사는 예배 시간에 종종 선교사 가정의 자녀를 포함하여 가족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기도한다. 선교사 가족은 그 교회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작은 교회 목사들이여, 우리 한번 솔직하게 말해보자. 우리가 지금 세계 선교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건 교인 수가 적어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빛나도록 하겠다는 열정이 부족해서이다. 예수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에 우리가 품어야 할 관심이 너무도 작다.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희생의 사랑을 베풀려는 우리의 의지가 너무나도 작다.더 잘 파송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꼭 숫자로 성장해야 하는 건 아니다. 진짜 키워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 열방에 대한 당신과 나의 사랑이다. 원제: How a Small Church Can Be a Sending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그들의 마지막 설교에서 배우다
by Steve Bateman
2023-08-22
예수님의 마지막 공식 설교는 서기 33년 3월 31일 화요일 또는 그즈음에 있었다. 마태복음 23:1-39에 나오는 설교 내용은 위선, 특히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교만한 설교자에 대한 경고이다. 4월 3일 금요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가 역사상 가장 비범한 겸손함을 보여주며 예루살렘 도성 밖에서 처형당했다.그의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호흡 사이에는 딱 사흘이라는 간격이 있었다. 모든 목사는 마지막 설교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달리 우리 대부분은 무슨 설교를 할지 알 수 없다. 다음은 역사에서 만나는 몇 번의 사례이다. 장 칼뱅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개혁을 이끈 칼뱅은 성경 48권을 주석했다. J. I. 패커는 기독교강요를 “문학계의 불가사의”라고 불렀다. 이 모든 집필 과정에서도 칼뱅은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빡빡한 설교 일정을 유지했다. 주일에 두 번, 주중에 여러 번 설교했는데, 평균 “두 주마다 총 열 번의 새로운 설교”를 했다.1564년 2월 6일, 칼뱅이 의자에 앉은 채로 교회로 옮겨졌을 때, 모든 사람은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테오도르 베자는 칼뱅이 “천식 때문에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설교했다고 썼다. 육체의 고통과 연약함 속에서 이 위대한 개혁자는 마지막 설교를 선포했다. 나는 그날 칼뱅이 설교한 내용을 찾지 못했다. 단, 그는 임종을 앞두고 여호수아서 주석을 완성했다. 그 서론에서 칼뱅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재능 있는 지도자들을 일으키셨다가 없애시기도 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러나 그분은 그 자리에 꼭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항상 준비하신다. … 그의 강력한 능력은 결코 사람의 능력에 달려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보기시에 좋은 적절한 후계자를 때에 그때그때 맞춰서 찾아내신다”라고 덧붙였다. 며칠 후 1564년 5월 27일에 칼뱅은 54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리고 아무런 표시도 없는 무덤에 묻혔다.존 플라벨칼뱅의 사역은 대부분의 미국 목회자라면 결코 견디지 못했을 환경에서 무려 41년 동안 설교한 존 플라벨에게 영향을 미쳤다. 옥스퍼드에서 교육받은 그는 성경 강해와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유명했다. 그러나 찰스 2세 치하에서 국가는 설교 내용과 예배 형식, 그리고 모임 장소까지 일일이 지시했다. 국가의 정책에 반대했던 플라벨은 교회에서 파문당했고, 5마일 이내 교회 접근이 금지되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든, 다른 사람의 집에서든, 밤늦은 숲에서든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를 돌보며 여러 해 동안 불법 설교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조지 휫필드를 포함한 후세의 설교자들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여섯 권의 두꺼운 책을 출판했다. 1691년 6월 21일, 엑서터를 방문한 플라벨은 고린도전서 10:12을 설교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닷새 후에 그는 64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죽었다. 조나단 에드워즈플라벨은 “모든 미국 신학자 중 가장 뛰어난”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에드워즈가 살아있는 동안 설교집 17권이 출판되었지만, 그 이후로 더 많은 설교집이 나왔다. 그의 모든 작품은 현재 예일대학교출판부(Yale University Press)에서 출판한 26권에 담겨있다. 에드워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인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잡힌 죄인들”로도 유명하다. 1758년 1월 15일 매사추세츠 스톡브리지에서 행한 고별 설교는 예일 컬렉션에 포함된 그의 마지막 설교이다. 설교 본문은 누가복음 21:36이었다. 현존하는 내용이 희미하기는 하지만, 율법과 복음을 제시하는 에드워즈 특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회중에게 모든 사람이 심판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날에는 “두려운 일이 많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장차 올 그 두려움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권고했다. 두 달 후, 천연두 접종에 실패한 그는 1758년 3월 22일 54세의 나이로 프린스턴에서 죽었다. 조지 휫필드역사가 마크 놀은 영국 태생의 조지 휫필드를 “조지 워싱턴 이전까지 가장 잘 알려진 미국인”으로 평가한다. 설교를 들으려고 온 군중을 수용할 건물이 없었던 당시에 그는 종종 옥외에서 설교해야만 했다. 평생 그는 18,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고, 두 대륙에 걸쳐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무려 천만 명을 넘었다. 1770년 9월 29일, 뉴햄프셔 엑서터에서 휫필드는 무려 6,000명의 청중을 향해서 두 시간 동안 노천 설교를 했다. 그 설교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외쳤다. “공로로! 공로로! 사람이 공로로 천국에 간다고? 차라리 모래로 만든 줄을 타고 달에 오르라고 하십시오.” 그날 밤 피로에 절어서 잠자리에 든 55세의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찰스 스펄전역사상 설교가 가장 널리 읽힌 설교자인 스펄전은 다른 어떤 목회자보다도 설교가 많이 인용되었다. 2,500만 단어로 이뤄진 그의 설교가 지금 63권의 인쇄본으로 제공된다. 이 런던 목사의 삶은 고통, 반대, 상실, 우울, 육체의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극심한 고통을 주는 통풍을 “바이스에 발을 넣고 최대한 조이는 아픔”으로 묘사했다. 그러함에도 그는 주일마다 강단에 서서 설교했다. 1891년 6월 7일, 병든 스펄젼은 사무엘상 30:21-26을 본문으로 그의 마지막 설교를 선포했다. 그가 평생의 고통을 통해 배운 것으로부터 교인들은 많은 유익을 얻었다.믿음이 적은 자들, 낙담한 자들, 두려움이 많은 자들, 마음이 연약한 자들, 노래하는 것보다 한숨을 더 많이 쉬는 자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자들, 거룩함에 대한 열망은 크지만 영적 투쟁에서 항상 패배하는 자들이여,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자녀에게 사랑과 은혜와 호의를 베푸실 것입니다.1892년 1월 31일, 프랑스 남부의 따뜻한 곳에서 회복 중이던 스펄전은 57세의 나이에 통풍과 신부전으로 죽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대부분의 런던 교회가 쇠퇴할 때도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은 로이드 존스의 지도력 아래에서 성장을 구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래, 그의 사역은 그곳에서 30년 동안 계속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그는 강해 설교를 고집했으며, 이를 “타오르는 논리”라고 정의했다.로이드 존스는 영국 전역에서 설교하면서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1980년 5월 18일, 그는 웨일스의 애버리스트위스에서 시편 2편을 설교했다. (그는 그 본문을 가지고 여러 차례 설교했는데, 그 하나는 온라인에서 들을 수 있다.) 암으로 약해진 몸을 이끌고서 그는 1980년 6월 8일 영국 바콤에서 여호수아 4:6을 가지고 마지막 설교를 했다. 7월 26일에 그는 이안 머레이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설교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매우 힘들 거라고 말하곤 하는데요. 아뇨, 설교 못 해서 힘든 거 조금도 없습니다. 나는 설교에 의지해서 살지 않았으니까요.”마틴 로이드 존스는 1981년 3월 1일, 81세의 나이로 죽었다.그들의 마지막 설교에서 배우는 네 가지 교훈1. 모든 목사는 마지막 설교를 한다.어쩌면 그건 최고의 설교도 또 훌륭한 설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 설교가 좋은 설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좋은 설교를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디모데후서 2:15에 드러난 두 가지 특징은 기본이다. 바로 성품과 능력이다. 성품과 관련하여 설교자는 자신을 겸손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리고 설교하는 내용을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설교자라면 디모데전서 3장의 기준에 따라 “책망할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온전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슬프게도, 위에서 다룬 사례가 공적인 삶에서는 이 기준에 모두 다 부합하는 건 아니다.) 능력에 있어서, 설교자는 말씀을 올바로 다뤄야 한다. 힘들더라도 주석 작업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 본문을 능숙하게 설명하고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2. 모든 목사는 불완전한 성화 상태로 마지막 설교를 할 것이다.맹점이 가져다주는 결함에서 자유로운 목회자는 없다. 그리고 그건 여기에서 논의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숨결 사이 어느 시점에서 칼뱅은 “나는 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데 수없이 실패했다”라고 고백했다.이런 고백은 결승선을 앞에 둔 목회자 대부분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3. 모든 목회자는 마지막 설교를 좋은 설교로 만들 수 있다.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유명 목회자를 보면서 세상은 즐거워하고 조롱한다. 난파선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마지막 설교가 좋은 설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설교라는 것을 알고 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가 마지막 설교일지 모르는 우리는 모든 설교를 좋은 설교로 만들어야만 한다. 좋은 설교를 할 수 없다면, 아예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4. 모든 목회자는 섭리가 가져다주는 역경이 필요하다.많은 교인을 끌어모으는 목회자도 있다. 스펄전의 말을 빌리자면, “그분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하십시오”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은밀한 곳에서 충실하게 수고한다. 그리고 채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잊힐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가 정죄하는 교만을 키우는, 숫자가 가져다주는 성공이라는 유혹이 언제라도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경과 성공을 같이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고후 1:9).겸손하게 하시는 그분의 자비로움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설교를 준비시키신다. 원제: You Don’t Know When Your Last Sermon Will B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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