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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왜 논쟁을 좋아할까?
by Russell Moore
2020-10-02
월터 퍼시(Walter Percey)의 소설 ‘영화보러 가는 사람’(The Moviegoer)의 주인공인 빙크스 볼링(Binx Bolling)은 이렇게 회고한다.“기분이 좋지 않으면 난 도서관에 가서 논쟁적인 잡지를 읽는다. 나는 자유주의자도 그렇다고 보수주의자도 아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상 내게 있어서 미움은 이제 이 세상에 몇 개 남지 않은 생명의 증거(signs)처럼 느껴진다. 이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돌아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이제 다정하고 착한 사람들은 내게 죽은 것처럼 느껴진다. 미워하는 사람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퍼시는 아마도 이 한 구절 속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요약하는 거 같다. 아니, 그는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사는 게 세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논쟁이야 어느 시대에나 일어나기 마련이고, 또 종종 무엇이 진짜 중요한 문제인가를 놓고도 서로 간에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사도 바울이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딤전 6:4)라고 경고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물론 바울 자신도 그 누구보다 기꺼이 논쟁에 뛰어들곤 했던 인물이다. 한때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이유로 베드로를 면전에서 꾸짖었고, 또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아주 거친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부부의 사랑이 난교와 다른 것 만큼이나 바울의 경우는 논쟁 자체를 위한 논쟁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실, 바울이 경고하는 다툼은 바로 난교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일”(갈 5:17-21)에 대한 경계이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을 때 다툼과 성적 부도덕은 결국 정죄와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을 맞게 된다(갈 5:21). 끊임없이 “어리석은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시정되어야 하고, 경고와 꾸짖음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뒤틀린 자” 그리고 “스스로 정죄한 자”(딛 3:9-11)로 간주되어야 한다. 주님의 종이라면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또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서 “다툼이 나오기” 때문이다(딤후 2: 22-23).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경이 성적 부도덕을 논쟁하고 싶어하는 투쟁심과 연결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왜 그런 걸까? 가십거리가 주는 엔터테인먼트를 향한 열정지난 수년 간 나는 필요할 때 논쟁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보았고,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논쟁에 뛰어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선함에 대한 사랑과 잘못된 것을 믿는 사람들을 바로 인도하기 위한 열정 때문이지 결코 논쟁 자체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진리를 위한 열정” 때문에 논쟁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그냥 열정 그 자체를 느끼고 싶은 욕심 때문에 싸우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깊은 상처와 종종 심각한 스캔들을 일으키는 죄를 숨기던 사람들의 진실이 수면 위에 드러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빛 가운데로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어느 연로한 목사님은 내게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를 폭발시키게 만드는 것도 없어.” 그말은 수없이 진실로 입증되었다.그러나 퍼시의 소설 속, 영화관에 가는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생명을 주는 성령님이 없을 때 인간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오로지 감각적인 자극을 통해서만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소설가, 퍼시가 죽은 개구리의 다리를 움직이게 만든 전기 충격과 비교한 인간 삶의 모습이다. 종종 다툼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거나 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위해서, 또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갉아먹는 지루함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인간이 벌이는 필사적인 시도이다. 지금은 천국에 가신 또 다른 노 목회자는 오래 전 사람들이 자기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얼마나 절망감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내게 토로한 적이 있다. “누구누구가 목사님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게다가 지난 주 설교에 관해서도 그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더라고요…” 등등.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런 말에 신경쓴다는 게 아니에요. 아니, 문제는 내가 신경을 너무 쓴다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이런 모든 게 물론 삶의 계획과는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인정하는가 여부에서 나의 가치를 찾는 쪽으로 나를 유혹하거든요. 또 다른 문제는 나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내가 정말로 바라는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에요. 그들이 나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아예 몰랐다면 훨씬 더 쉽게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요.” 나는 왜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목사님에 관해서 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옮겨다주는지 물었다. “글쎄요. 내가 알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 같고요. 또 그들이 내 편이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을 거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인간의 본성 때문이에요. 가십거리는 재미있거든요. 게다가 가십에 관한 가십은 더 재미있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가십거리를 옮기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아니라고 착각하게 만드니까요.”잠시 멈췄다가 목사님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엔터테인먼트에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게 직장이든, 이웃이든 아니면 교회든지 간에 남의 이야기를 하는 건 일종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비슷한 거거든요.” 목사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병원 심방을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목사님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SNS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실지 궁금하다.다시 말하지만, 때때로 다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상황에 따라 그러한 논쟁이 성령님께 충실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적인 부도덕에 연루된 사람이 그런 부도덕을 “사랑”, “소울 메이트” 또는 “운명”이라는 식으로 의미부여를 하면서 스스로 특별하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논쟁에 대한 불건전한 갈망을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초래한 논쟁 열정에 사로잡힌 포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죄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끊임없는 다툼에 빠져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연민이 우러나오는 것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나 연민을 가진다고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리더십의 위치에 두거나 대화 과정을 지시하도록 허용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건 이웃 동네 나이트클럽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전도지 배포를 담당하게 하는 것 만큼이나 황당한 자기 패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연민은 논쟁을 위한 논쟁이라는 불건전한 갈망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사랑하고 기도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의 종말이 어떤지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을 살펴보면 된다. 남북 전쟁 당시 역사 재현(Civil War re-enactor)을 주장하거나 또는 한때 이단 사냥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을 말이다. 자신에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고 가치를 주던, 쓰라린 분노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내내 그들은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모든 게 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고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게 진실이다. 위협과 두려움으로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런 시도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결코 주거나 받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이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확실히 예수님도 논쟁을 많이 하셨지만, 그의 논쟁은 결코 선민사상(tribalism)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선민사상에 굴복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마 21:45–22:22; 눅 4:26–28; 19:7). 더욱이, 예수님이 촉발한 논쟁을 볼 때, 당시에도 많은 논쟁이 줄을 잇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이미 논쟁하는 주제와 관련해서 예수님이 덧붙여서 논쟁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은 아주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젤롯파는 헤롯파와 원수였고, 사두개인은 바리새인을 반대하는 등, 예수님 시대에 이런 식의 적대감은 만연했다. 예수님은 때때로 그들이 제기한 논란이 되는 질문에 대답하셨고, 때로는 그들이 실제로 진실에 관여하기보다는 단지 다투고 싶어하는 진심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아예 대답을 거부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전혀 제기되지 않은 질문을 던짐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성전이 실제로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인지 여부에 관해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되는지 여부에 관해서,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인지 여부에 관해서 말이다. 드물지만 우리는 분노한 예수님도 만난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가치관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위해 관행과 관련한 분노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권력을 얻는 것과 관련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다툼을 위한 게 아니었다. 동물적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육체의 소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분노하는 것은 마귀이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계 12:12). 마귀는 갇힌 동물에 불과하지 결코 양치기도 또 양도 아니다. 결국 다툼을 위해 다툼으로 이끄는 지루함과 생명 없음은 논쟁에서 당신이 옳다고 결론이 난 경우에 조차 당신으로 하여금 논쟁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데, 그건 논쟁이 주는 즐거움이 지루함과 생명 없음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다다르는 곳은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선함이 아니다. 그건 단지 행여나 “적”이 말실수를 하길 기다렸다가 함정에 가둘 기회만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자세로 이어질 뿐이다. 자신을 향해 사람들이 가졌던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견디신(마 22:15) 예수님은 결코 스스로 그런 본보기를 만들지는 않았다.요즘과 같은 세상에서는 항상 다툼을 일으키는 주체인 상처 입은 영혼들이 의제를 정하고, 누군가가 거기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지도자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화재의 원인이 가솔린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군중의 칭찬(요 15장)과 다른 사람들이 정한 다툼의 의제(마 26:51-56)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하셨다. 어리석은 논쟁으로부터 멀리하기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한 논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논쟁이다. 이 논쟁의 시작은 온유함과 이성이고, 다른 쪽의 반응에 따라 논쟁에 더 깊이 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논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논쟁 태도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추수감사절 테이블에서 총기를 휘두르거나 가구를 뒤집으면서까지 굳이 논쟁에서 이길 마음이 없는 사람들도 기꺼이 감수하는 “단점”이기도 하다. 물론 논쟁에서 마지막 말을 뱉는 사람은 아마도 거칠게 욕설을 지르는 사람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전혀 아니다. 당신의 결론이 다음과 같기를 원하는가? “내년에 우리 의견이 좀 더 영향력을 가지려면, 아무래도 코카인과 무기가 더 많이 필요할 겁니다.” 아니다. 대신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건 역기능입니다. 내년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아니, 우린 지금 떠납니다.”오래 전 마크 놀(Mark Noll)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을 썼는데, 그가 말한 스캔들이란 제대로 된 지성이 별로 없는 현실이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 현재의 스캔들은 복음적 변연계(limbic system, 성적 흥분을 포함해서 흥분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의 스캔들이고, 스캔들이라고 해봐야 그나마 변연계가 남아있는 전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논쟁 중에 던질 “한마디 말”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할 말을 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영혼을 더 소중히 여기는, 전혀 다른 방법을 모델로 삼는 것이다. 다툼이 생명인 사람들을 상대로 승리하는 방법은 논쟁이라는 게임 자체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추구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y Unhealthy People Crave Controversy번역: 무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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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다툼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가십거리
엔터테인먼트
복음주의지성의스캔들
부모가 가르쳐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
by Melissa Kruger
2020-09-21
엄마로 산다는 건 기쁘지만 벅찬 일이다. 아이가 계속 크기 때문에 엄마로서 전문가가 되었다고 말하는 건 쉽지 않다. 아장아장 걷던 아기가 금방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열 살 전후의 아이들에 대해서 좀 이해했다 싶으면 어느새 눈앞에는 사춘기가 된 아이가 서있고, 거기에 조금 적응하다 보면 아이는 손을 흔들고 대학으로 떠난다. 부모라면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적합한 바른 교육을 위한 주제들로 항상 분주하기 마련이다. 두뇌가 잘 발달하도록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으세요. 장난감은 가장 교육적인 것으로 선택하세요.여행을 하면서 경기하는 스포츠 팀을 일찍 시작하여 대학에서도 운동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건강한 음식만 먹도록 하세요.악기 하나 정도는 할 수 있게 하세요. 좋은 학교에 가려면 좋은 이웃이 있는 동네에서 살아야 합니다.과외 선생을 고용하여 모든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도록 하세요. 부모로서 할 일을 모두 제대로 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종종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혼란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목적을 찾고 있고 또 성공이라는 것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기독교인 부모로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 우리 아이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 바로 그 목표를 놓치고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사는 게 바로 사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을 잊고 있다. 나는 ‘네가 어디에 가든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Wherever You Go, I Want You to Know)’를 썼는데, 그건 우리 아이들에게 최대한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네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또 따르는 것이다.” 어떤 직업을 갖든지, 어떤 운동을 하든지, 성공 또는 실패를 하든지,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가 모르는가의 문제이다. 이게 바로 우리 아이들과 부모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어린 자녀들은 계속 들어야 한다우리의 자녀들은 매일 수도 없이 많은 잔소리를 듣는다.방 치워라.양발 주워라.머리 빗어라.안전벨트 매라.숙제해라.삶의 모든 오고가는 일에서 일상적인 일로 너무 바빠서 영원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 버리기 쉽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전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복음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모인 나의 입술을 통해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그들을 만드셨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또 예수님은 선하고 친절하며 참되다는 것을 말이다. 책은 우리가 가장 소통하고 싶은 이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대신 말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또한 책은 아이들이 이 중요한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미지를 따뜻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제공함으로 부모를 도울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메시지는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 자리 잡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힘을 갖게될 것이다. 십대는 계속 들어야 한다나는 아이들이 십대가 되었을 때에도 ‘네가 어디에 가든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를 썼다. 사람들과의 관계 뿐 아니라 얼굴의 변화 때문에도 십대는 쉽지 않은 시기이다. 아이들이 듣는 세상적인 성공과 칭찬의 중요성이라는 메시지는 십대에 접어 들면서 점점 더 커지고 빈번해진다. 주변에서 받는 압력은 강해진다. 선의를 가진 어른들은 정기적으로 “무엇이 되고 싶니?”, “대학은 어디로 갈건데?” “전공은 뭐로 할 거니” 등을 묻는다. 아이들 주변의 모든 것이 올바른 대학에 진학하고, 올바른 전공을 선택하고, 올바른 배우자를 찾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만 같다. 그 누구도 당신이 남은 생애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 17 살 때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대화를 하고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거의 매일 이런 질문을 접하는 청소년들이 받는 느낌은 어른의 생각과는 다르다. 십대에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 좋은 성적을 위해 노력하고 열심히 스포츠 팀에서 뛰고 또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압박 중에서도 우리는 최대한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는 계속 상기해야 한다‘네가 어디에 가든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는 어린 자녀와 십대에게는 책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부모에게도 하나의 책이다. 자녀를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시험 점수를 조작하고 또 불법적으로 수십만 달러를 지불하는 부모가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아이들 뿐만이 아니다. 부모도 자신의 성공이 자녀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 문화적으로 우리는 지금 자녀의 행복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잘못된 것을 바라고 있다.그렇기에 부모는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교훈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부차적이다. 자녀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칠 때,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선물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부모가 하는 양육만으로 자녀를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번성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을 조성하기 위해 가정을 사용하신다. 그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가르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 희망, 자녀를 위한 기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아이들과 함께 하는 날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세월은 흐르기 마련이다. 부모라면 여러 활동과 교육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전달하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전부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Most Important Lesson Parents Teach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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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통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20-09-19
최근 나는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내 첫 반응은 화를 내는 것이었고 그리고 나서 그녀에게 상처 받았던 모든 다른 경우를 떠올리며 불만에 대한 목록을 정신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거기서 마무리 되었을지 모르지만, 내가 우연히 A. W. 토저의 글을 읽게 되었을 때, 이 상황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를 더욱 더 그리스도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그것은 많은 불안을 해소한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나를 더욱 더 그리스도와 같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예외는 없다. 기쁨과 고통. 평안과 혼란. 충만함과 공허함. 고통과 안락함. 나를 사랑해주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과 나에게 상처를 주고 무시하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밀한 것까지 다스리신다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통하여 나를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나를 덜 근심하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겪는 어려움은 결코 하나님의 정죄하심이 아니다(롬 8:1).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위하시는 분이시다(롬 8:32). 그분은 나의 영원한 선을 위하여 모든 상황을 계획해 주신다(롬 8:28). 내 삶의 모든 것들은 내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한다. 진정 그러하다.갑자기 난 친구의 조언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을 중단하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내 삶에 허락해 주셨을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았다.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보다 내 마음에 대해서 더 많이 밝혀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얼버무리고 넘어 갔을지 모르는 내 삶의 죄의 한 꺼풀을 드러내기 위해 내 친구의 행동을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내 반응 속에 드러난 죄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었다.짜증나고, 좌절하고 혹은 화가 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내가 외부에 집중하는 것 대신에 마음을 잘 점검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나의 불편한 감정은 아마도 나를 주님과 더 깊은 관계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초대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보다 내 안에서 더욱 더 중요하고 지속적인 무엇인가를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길에 마주하는 모든 일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경험도 결코 버릴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대해 선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에, 내 삶의 경험은 전부 내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어려운 상황들은 그리스도께 의존하도록 장려한다. 더 간절하게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며, 사역을 위한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성공의 순간들은 내가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내 교만함을 발견하게 하여 고백하도록 인도한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순간 속에서도 낮은 자리를 취하게 하시며 겸손을 배우게 하신다. 삶의 모든 일들이 거룩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벼랑 끝의 축복친구의 배려심 없는 행동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은 배우자의 배신이나 쇠약케 만드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것과는 동 떨어진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초대와 동일하다. 난 세 가지 이 모든 시련을 경험했고, 비록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인도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눈물의 시간을 통과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각각의 상황을 사용하셨다고 간증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주님 품에 안기게 될 때에, 나는 더욱 그분의 아들처럼 되어 갔다. 유진 피터슨(Eugen Peterson)의 산상 수훈 강해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 아름다운 울림을 준다. 그가 쓴 ‘메시지’(The Message) 성경은 마태복음 5장 3–4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기록하였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벼랑 끝에 서있을 때 복이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에 복이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정신 나간 말이다. 이것은 세상이 정의하는 “축복”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세상에서 축복을 받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 그 이상을 소유하는 것이다. 당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벼랑 끝에 서있는 상황이나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었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축복을 받는 삶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우리에게 인간적 자원이 남아있지 않는 순간에 우리는 복된 삶을 살게 된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그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때.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상황이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하심이 우리 삶 속에서 확장되는 순간이다. 우리의 자아는 더 약화 되며 하나님이 드러나게 된다.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던 것을 잃게 된 그 순간,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맞아주심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된다. 그분의 안아주심은 우리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 어떠한 것보다 더 사랑스러우며, 더 소중한 것이며 더 경이로운 것이다. 그분의 사랑의 손길을 바라보라1600년대 프랑스 가톨릭 작가인 마담 귀용(Madame Guyon)은 질병과 무시와 수치로 얼룩진 힘든 삶을 살았다. 그녀가 16세 때, 아버지는 그녀를 속여서 22살이나 나이가 많고 통풍을 앓고 있던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거짓말을 퍼뜨린 후에도 시어머니 집에 살면서 남편의 간병을 맡아 끊임없이 그를 돌보았다.귀용의 기도는 그녀의 깊은 신앙과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오 하나님, 제가 수녀가 되고자 했을 때 당신은 아버지가 나를 속이게 하셨고 그래서 제가 주께로 향하며 주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오 나의 하나님, 주님은 제 시어머니가 나에 대한 거짓을 퍼뜨리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제가 겸손한 마음으로 주께 돌아갈 수 있었고 주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겪은 고통의 순간 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며 억울함과 분노를 키우는 것 대신에, 그녀는 그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바라보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모든 그녀의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모든 그녀의 상황이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기회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꺼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고 모든 것을 그분께 내려놓았다.모든 만물이 그분의 종시편 119편 90–91절은 말씀한다.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 백성들의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선하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마주한 모든 것들은 우리를 더욱 더 거룩하게 할 것이다. 우리의 짜증냄은 우리의 죄성을 드러낸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육체의 질병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가르친다. 반항하는 자녀들은 우리가 멈추지 않고 기도하도록 훈련시킨다. 우리 삶에서 힘들고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그분의 초청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온전하게 살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삶의 매 순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드러내시는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함께 하고 계심을 인지하고 모든 상황을 통해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더욱 더 그리스도 닮은 자들로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Uses Everything: Why Our Suffering Is Never Wasted번역: 정진호
영성
영적성장
고통
축복
사랑의손길
유진피터슨
메시지성경
산상수훈
마담귀용
삼위일체 하나님, 가정, 그리고 질서
by 노승수
2020-09-08
성경이 말하는 남녀의 질서는 가부장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문화가 가부장제 문화여서 성경이 말하는 질서가 가부장제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eisegesis라고 하는데 성경 본문에 자기가 속한 문화적 경험과 세계관을 개입시켜서 하는 해석을 말한다. 성경의 진리는 당연히 석의(exegesis), 곧 본문에서 참된 의미를 이끌어내어야 한다.우리가 가부장제의 사회에 살기 때문에 성경의 질서가 가부장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맞지 않다. 라쿠나(Catherine Mowry LaCugna)는 삼위일체와 가정을 유비적으로 빗대었다. 성부에 대한 성자의 순종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부부관계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같다. 존엄성은 동등하지만, 성부는 창시자이고 성자는 응답자이다. 그러므로 성삼위일체 제2위격에 유비되는 아내는 감응, 복종, 순종으로 특징지어 진다”(Catherine Mowry LaCugna, 우리를 위한 하나님: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 삶, 대한기독교서회, 385쪽)잘 아는 대로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본질(home ousios)로서 위격에서 구분되시나 동등하시다. 그 동등하신 성자께서 질서를 따라 성부께 순종하신다. 같은 원리가 남녀의 질서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가정의 질서를 논하면서 아내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아내의 지위가 남편보다 낮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질서의 반영이기 때문이다.타락으로 인해 더러워진 우리 눈이 이 질서를 사시를 뜨고 볼 뿐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 남자는 여자보다 위에 있지 않다. 성부와 성자가 동등하시듯이 하나님은 아담의 발이나 머리에서 하와를 취하지 않고 그의 갈비뼈에서 취하셨다고 창세기 본문을 메튜 헨리는 주석했다. 이런 비유적 해석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섬기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에 따른 예배가 우리의 일상의 삶이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 당시 여자들은 사람의 숫자로 헤아려 지지조차 못했다. 복음서는 그런 시대에도 여인들을 인격체로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먼저 증언한 이도 여인들로 기술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당시 문화로 볼 때, 정당성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이런 기록 방식을 취했다는 것은 남녀의 질서를 평등하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사실 우리 전통 문화에서도 가부장제가 원래 유교적 문화도 아니었다. 하버드 대학의 한국학 학자인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은 조선시대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17세기 후반 이전까지도 재산 상속, 족보의 기재, 제사 문제 등에서 남녀가 평등했다는 것을 박사논문으로 밝혔다(Mark Peterson, ‘유교사회의 창출-조선 중기 입양제와 상속제의 변화’, 일조각). 현재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일반 은총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의 정치 철학이었던 유교의 경전들은 남녀의 질서로부터 사회 질서를 창출했다. 오경 중 하나인 예기(禮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남녀 구별이 있은 연후에 아비와 자식이 친하게 되고, 아비와 자식인 친한 연후에 의(義)가 생기고 난 연후에 예가 일어난다. 예가 일어난 연후에 만물이 안정된다. 구별이 없고 의가 없으면 금수의 길이다(男女有別, 然後父子親. 父子親, 然後義生. 義生, 然後禮作. 禮作, 然後萬物安. 無別無義, 禽獸之道也) “예기_교특생(郊特牲) 중에서”남녀의 구별이 있다는 것은 차별이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역할에서 차이가 난다는 의미다. 역할 상의 차이에 대해 성경은 여성을 돕는 자로 만드셨다고 기록한다. 돕는 자라는 표현에 열등함을 떠올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자시라”고 할 때, 그 단어가 그대로 쓰였다. 부부는 동등하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으로 대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을 인정하고 순종으로 대해야 한다. 가정에서의 이 질서는 교회에서도 적용된다. 원래 리더십이란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다. 주님의 정복은 전쟁이 아니라 십자가였다. 미 해병은 지휘관이 맨 마지막에 식사를 한다. 수고한 해병들에게 열매가 가장 먼저 돌려지는 것이다. 인도받는 자보다 인도하는 자의 책임이 더 크다. 교회에서 여성의 순종이 합당하게 요구되려면 먼저 남성이 바르고 참되게 인도하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해병들처럼 교회에서도 수고한 여성들에게 가장 먼저 돌려져야 한다. 이런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관계가 없다면 단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에서 타락의 문제로 인해서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라고 말씀하는데 이 역시 삼위하나님의 내적인 질서를 따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타락에 따른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 남녀의 본질적인 지위의 차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선악수 열매에 대한 금령을 직접 들었고 하와는 그것을 아담에게 전해 들었다. 직접 들은 금령을 잘 설명하지 못한 죄가 아담에게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유전을 설명할 때, 하와를 대표자로 하지 않고 아담을 대표자라고 하며 대표 원리를 따라 새로운 우리의 대표이신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신다(고전 14:45). 디모데전서는 이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질서는 현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위계의 구조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상호 이해와 돌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믿는바 하나님께서 상호 동등의 원리 안에서 사랑과 순종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 영광을 반영하는 사람 역시 그것을 드러내는 존재여야 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아담 하나만을 지어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이렇게 주석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 2:15). 경건한 자손을 얻는다는 말씀은 부부간에 삼위하나님의 관계 안에 반영된 사랑과 순종의 원리가 반영된 자손을 얻는다는 의미다. 삼위하나님의 “내재적 자기-관계됨”(internal self-relatedness)은 신자의 신앙의 양식(mode)이며 생활의 방식이다.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타인으로서 아내와 남편에 대한 질서의식이 교회 안에 있어야 참된 교회다.
가정
가족
부부관계
삼위일체
창조질서
가부장적
유교사회
예기
선악수
멘토링이 필요한 세 가지 이유
by Melissa Kruger
2020-09-06
“나의 멘토가 되어주시겠어요?” 이 말을 들은 당신은 아마도 방안을 둘러보며 이 젊은 여성이 도대체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하고 의문을 가졌을 지도 모르겠다. 절대로 나한테 이런 말을 할 리는 없잖아 라고 생각하면서. 아니, 이 여성은 나보고 정확하게 뭘 요구하는 거야? 나는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 무엇보다 이 여성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내가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에 빠져 사는 우리들 대부분은 지금 나야말로 멘토링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쉽다.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면 나도 교회와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기독교 여성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 건 사실이다. 주변 자매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양육되어 하나님 왕국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 자신이 멘토가 되어 그 역할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겁부터 나는 게 현실이다. 올해 봄 성경 공부를 하던 한 사람이 내게 자신의 멘토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멘토가 되기에 내가 얼마나 부적합한가라는 것이었다. 지난 2년 간 멘토링에 대한 책을 쓴다고 세월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에 든 첫 번째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 여성은 이미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 내가 줄 게 거의 없어. 그런데 왜 나한테 멘토가 되어달라는 거지?”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 외에 사람들에게 흔히 떠오르는 또 하나 걱정거리는 멘토링 관계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멘토링을 받아본 여성이 거의 없기에 멘토링이라는 관계를 가지면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물론 모든 멘토링 관계가 다 다르고 또 무엇보다 타인에게 시간을 투자한다는 그 자체로도 유익한 점은 많다. 여기 언젠가 나를 멘토링 해준 한 나이 많은 여성으로부터 배운 몇 가지 지혜가 있다. 1. 멘토링은 당신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멘토링의 성공여부가 당신에게 달린 건 아니다어렸을 때 어느 날 오후가 기억난다. 아버지는 잡초를 뽑는 등 앞마당을 가꾸느라 바빴고 나는 아버지 가까이에서 놀고 있었다.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춘 아버지가 차고로 가서는 기구 하나를 들고 나오더니 내가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어떤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앞마당에는 얼마 전 불어닥친 폭풍우 때문에 휘어진 어리고 가는 나무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는 밧줄로 그 휘어버린 어린 나무를 훨씬 더 크고 단단한, 그리고 똑바로 뻗은 오래 된 나무에 묶었다. 왜 나무 두 개를 묶냐고 묻자 아버지는 그렇게 하면 큰 나무가 지지대가 되어 어린 나무가 더 이상 휘지 않고 똑바로 자라도록 만든다고 했다. 큰 나무는 오랜 세월 바람과 폭풍우를 견딘 나무였다. 그런 나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작고 어린 나무는 이제 걱정할 게 없는 것이다. 제자도를 생각할 때마다 그 때 생각이 난다. 핵심만을 말하자면, 영적 멘토링은 아직 신앙이 어린 사람을 당분간 보다 더 성숙한 사람에게 묶어 그 사람이 믿음에서 보다 더 자라게 함으로 사역에 필요한 준비를 더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나로 하여금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두려움을 가라앉혀 주었고, 또 나로 하여금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큰 나무가 어린 나무를 자라게 하는 건 아니다. 그건 태양과 물의 몫이니까. 마찬가지로 멘토가 멘토링 하는 사람의 영적 성장을 책임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니까. 멘토는 단지 하나님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라게 하실 때에 필요한 힘을 공급하면서 어린 사람 곁에 서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질문에 해답을 다 갖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냥 바른 말만 하면 된다. 멘토링은 당신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멘토링의 성공 여부가 당신에게 달린 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영적 성장을 가져다 줄 수 있다. 2. 명확한 기대 수준을 정하는 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세상에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지 않은 관계란 없지만 멘토링 관계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몇 달간 한 젊은 여성을 만나고 나서 나는 우리가 멘토링과 관련해서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그녀가 상상하던 멘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우리 만남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바란 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친구로서 재미있게 노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요구하는 건 성경 공부 커리큘럼에 따라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고, 과제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녀 때문에 나는 나대로 절망을 느꼈다. 우리는 점점 더 정기적인 미팅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계는 “언제 시간 되면 한 번 만나요”라는 식으로 이상하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나는 그 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와의 멘토링 이후, 나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에서 방법을 바꿨다. 그 중 첫 번째는 바로 시작 시점에서부터 무엇을 달성할지에 대한 목표를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이었다. 멘토링 관계의 목표는 언제나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을 함께 읽으면서, 함께 기도를 하면서 또는 책을 함께 읽으면서도 달성할 수 있다(멘토링 커리큘럼이 필요하다면, 곧 나올 나의 새 책 “함께 성장하기(Growing Together)”를 참고하라). 무엇을 하기로 결정하든지 간에, 함께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지에 대해서 처음부터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디테일은 만나는 횟수와 함께 있을 때 보낼 시간의 길이를 정확하게 정하는 것이다. 특정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를 정하라. 한 달에 한 번, 한 달에 두 번 또는 일주일에 한 번? 매달 첫 번째 화요일 아침 시간에 만나는 것으로 또는 격주 목요일 저녁에 공원에서 만나는 것으로? 언제가 서로에게 가장 좋은지 결정하고 그 시간에 충실하라. 또 하나 중요한 건 나중에 다시 재검토하기 전까지 한 번 만났을 때 보내는 시간의 길이를 정하는 것이다. 6개월 또는 일 년을 일련의 과정을 마치는 기간으로 정했다고 할 때, 한 번 만났을 때 보내는 시간을 어느 정도로 해야 서로가 끝까지 지킬 수 있을지 명확하게 정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 함께 보내는 시간에 대한 건강한 기대 수준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3. 멘토링을 하는 데에 더 나은 때라는 건 없다너무 바빠서 멘토링 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벽하게 딱 좋은 시간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나름 바쁘기 마련이다. 시간이 날 때를 기다리지 말고 누군가를 당신의 삶 속으로 초대하는 것을 하나의 자연스런 삶의 일부로 여기라.주변을 돌아보고 당신의 하루 일과를 점검해보라. 혹시 주변에 함께 있으면 즐거운, 당신보다 나이 어린 여성이 있지는 않은가? 매주 일요일 저녁 식사에 초대하거나 토요일 아침에 함께 산책을 하는 건 어떨까? 교회에서 함께 유아부를 봉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미 당신이 하고 있는 무언가에 그 사람도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건 어떨까? 그녀를 당신의 삶에 초대함으로 그녀는 배우게 될 것이다. 당신으로부터 친절함을 느낄수록 그녀는 맘 속에서 친절함을 키워가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애정도 키울 것이다. 말씀을 삶에서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배워감에 따라서 말씀에 대한 그녀의 이해도 자랄 것이다. 당신과 함께 기도하면서 그녀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배우게 될 것이다.당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주님과 함께 걷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다른 누군가와 나눌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그 지혜가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지혜이다. 다른 여인과 함께 기도하라. 성경 구절을 함께 외우고 또 함께 읽으라.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주라. 그리고 신실하게 그녀가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하라. 모든 노력은 다 가치가 있을 것이고 멘토링을 통한 축복은 당신 두 사람 모두에게 다 쏟아질 것이다. 당신들은 함께 배움으로, 함께 자라게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Reasons You Can Say ‘Yes’ to Mentorin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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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by John Perritt
2020-09-01
나는 잠을 잘 못 이룬다. 머리가 베개에 닿으면, 마치 저녁식사를 알리는 종처럼 내 모든 불안을 불러내 “자, 와서 먹어라” 하는 것 같다. 마감일, 약속, 관계의 어려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가정, 그리고 교회의 책임, 모두가 1순위가 되기 위해 밀고 밀치고 있다. 나는 데이비드 머레이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몇몇 가지는 수면처럼 신학적이다. 내게 잠자는 패턴을 보여주면,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신학을 보여주겠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잠결에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많은 수면 전문가들은 잠자리에 들고 한 시간 이내 잠이 오지 않으면 침대에서 나오라고 말한다. 여러 날 밤마다 나는 그렇게 해왔고 결과는 매번 엇갈렸다.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몰래 침대로 돌아가려고 할 때면 한 번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났다.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내게는 무릎에서 나는 소리를 조용히 시킬 능력이 없다. 조용한 밤을 깨우는 건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갈라지는 큰 소리이다. 그리고 이 소리는 종종 내 아내에게 남편이 침대로 되돌아왔다고 알린다.나의 모든 치밀한 계획과 닌자 같은 은밀한 솜씨가 내 몸 때문에 좌절된다는 것이 종종 나를 화나게 했다. 그러나 내 무릎이 갈라지는 소리는 수면방해보다 더 큰 문제를 보여준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가? “존, 너는 죽어가고 있어.” 필연적인 죽음의 무덤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를 위해 창조되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부자연스러운 일이고 에덴동산에서 창조주에게 저지른 인류의 반역의 결과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다.성경은 바로 지금 우리가 영원한 영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은 끊임없이 이 사실과 충돌한다. 우리는 육체이기도 하다. 관절이 쑤시든지, 수면 부족이든지, 만성적 통증이든지,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현실이라는 진리이든지 간에, 이것들은 우리 영혼에 달갑지 않은 현실이다. 지구상에 모든 존재는 걸어 다니는 역설이다. 우리는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게 될 영원한 존재이다.우리 몸은 닳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도중에도 늙어가고 있다. 여러분 중 몇몇이 쓰고 있는 안경으로 증명할 수 있는데, 시력은 유통기한이 있다. 이 글의 문장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은 뇌가 피곤하고 지쳤다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일종의 만성적 통증일지 모른다. 당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일 수도 있다. 그들의 끊임없는 필요는 우리가 다른 곳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상기시켜 준다.더 냉정하게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묻히는 것을 이미 목격했거나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이 땅에 묻히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실이다. 당신이 죽음과 병에 대해 읽을 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무언가가 잘못된다는 증거이다. “원래 이런 식이 아니었어! 이것은 내가 창조된 삶과 모순되는 것이야.”텅 빈 무덤질병과 죽음이 당신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친다고 생각할 때 당신이 느끼는 두려운 감각과 감정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당신은 육체와 분리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창조주와 함께 육체와 영혼의 대연합을 갈망한다. 요컨대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하지만, 사후에 당신의 영혼이 부활한 육체와 재회할 때까지 어떤 불완전성이 있을 것이다.하나님의 자녀들은 창조주 앞에서 몸과 영혼, 완벽한 존재를 누리기를 갈망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벽한 존재를 가지셨고 인간의 본성에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더해주셔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그분은 신성에 인성을 더하셨다. 그분은 병과 슬픔의 존재로 들어오셨다. 천사들의 기쁨을 주는 소리를, 부정과 거짓, 가십, 기만 등의 비명소리와 맞바꾸셨다. 불화와 분열을 위해 평화와 연합을 제쳐두셨다. 채찍과 가시, 창, 못 박힘의 고통을 느끼셨다. 숨이 끊어지고 심장 박동이 멎고 눈이 죽음으로 감기는 것을 경험하셨다.창조주는 스스로 창조세계에 내려오셨다. 왕은 종이 되셨고 무죄한 사람이 형을 선고받았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써 우리의 자리에서 벌을 받으셨다.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두려움과 고통, 어려움, 질병, 슬픔 그리고 심지어 당신의 죽음까지도 떠맡으셨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안고 무덤으로 가셔서 그곳에 남겨두고 몸과 영혼이 영광스럽게 되어 걸어 나오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모든 백성들을, 영혼과 몸 둘 다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 원제: Fear of Disease and Disability번역: 송유희
죽음
질병
두려움
예수_그리스도
불면증
부활
건강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by Brett McCracken
2020-08-29
몇 주일 전 우울한 헤드라인 소식과 한숨만 나오게 하는 소셜 미디어에 지친 한 주를 끝내고 나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동네 공원으로 나갔다. 한 살이 된 아들 체트는 나뭇가지를 모으거나 벌레를 잡았고 나는 잔디에 누워서 하늘을 향해 뻗은 캘리포니아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고 있었다. 위를 향해 뻗은 나뭇가지는 마치 내 눈에 찬양을 하기 위해 위로 올린 팔처럼 보였다. 이사야서 55장 12절에 나오는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라는 구절과 더불어 이 나무는 실로 창조된 모습 그대로, 창조 질서에 순종하며 기쁨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 나무는 끝없이 이어지는 디지털 인생에도 무심하며 오로지 단순하고 조용하게 나무로서 받은 소명인 가지를 뻗고, 그늘을 만들어주며, 산소를 생산하고, 그리고 나무에게 생명을 주는 빛을 향해 위로 또 위로 뻗어가는 소명을 완수하며 묵묵히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나무의 나무됨을 온전히 느끼던 그 순간, 나는 순식간에 평안과 경이로움 그리고 예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가 다 이 플라타너스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 창조주를 향한 끝없는 찬양을 올리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우리 인간은 사실상 이런 나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기쁨에 찬 감사와 예배를 드리는 단순한 생활을 하기에 우리 인간은 너무도 바쁘기만 하다. 아마 당신도 이런 순간,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물과 온전히 하나가 된 느낌을 가졌던 때가 있을 것이다. 방향을 잃어버린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방향과 목적을 느끼던 순간 말이다. 꼭 나무 아래 누었을 때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강, 바닷가 또는 놀라운 산세를 바라보면서 그런 느낌을 가졌던 때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우리에게 말을 한다(시 19).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게 하며 또 감사하게 한다(롬 1:19-21).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자연은 가상 세계가 가져다주는 혼란 속에서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줌으로 온라인 세상을 견디며 생긴 트라우마와 피로를 치료하는 반가운 진통제의 역할을 한다. 이게 바로 내가 나의 지혜 피라미드에서도 자연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은 이유이다.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창조물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거의 언제나 웹 서치를 하거나 소셜 미디어에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삶에 활력을 주고 지혜를 솟구치게 한다. 여기 왜 그런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자연은 객관적이다사실과 진실은 이제 어려운 시대를 만났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객관성이란 것은 불가능하다”는 좌파에 대한 비판적 이론과 더불어 “전문가는 엘리트주의자!”라는 우파에 대한 회의론에 의해 촉발된 우리의 대화는 점점 더 편협해지고 있고, 그 결과 이제 현실은 “사실(facts)”이란 것은 거의 쓸모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조차도 객관성에 대해서 주장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자연이다. 몇 년 전 LA 타임즈에서 나는 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탈 진리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지 않다.” 자연은 인간의 정치에 신경쓰지 않는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자연이 가진 객관성을 무시하고 날씨를 정치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날씨를 바꿀 수는 없다. 날씨는 비가 오거나 오지 않을 뿐이다. 그게 다이다. 눈이 내리고 또 태양이 떠오른다. 날씨는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에게 똑같다. 자연은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은 선입관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아무리 당신이 스스로를 수퍼맨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당신은 하늘을 날 수 없다. 자기가 원래 물고기인데 인간이라는 잘못된 몸을 입고 태어났다고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도 물 속에 들어가면 몇 분 안에 죽을 뿐이다. 자연은 이래야 하고 또 저래야 한다는 인간이 가진 주관성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티모시 트레드웰(Timothy Treadwell, 미국의 곰 애호가이자 환경보호론자)에게 비극이 생긴 이유이다. 그는 알래스카 곰과 함께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다는 환상을 품었지만 결국 곰에게 잡아먹혔다. 베르너 헤어초크(Werner Herzog)는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 맨(Grizzly Man)’을 제작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이지 인간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미친 세상에서도 여전히 온전함을 유지하는 자연에는 선천성(givenness)이 있다. 그 선천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자연이 주는 선천성을 무시하고 마치 생물학적 성이 존재하지 않는 양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과학을 그리스도인들이 더 포용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점점 더 손상되어만 가는 진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또 뭔가를 진정으로 제대로 아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면, 그런 사람에게 과학은 적이 아니라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밖으로 나가서 자연을 연구하고 관찰하라. 그렇게 함으로 자연이 가진 객관성이 우리 시대가 가진 형태가 허물어지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명확한 경계를 그리도록 만들라. 우리 속에 제대로 된 생각을 불어넣도록 만들라. 자연은 지친 마음과 영혼에 안식을 준다너무도 바쁘고 자극성이 강한 지금 사회에서 자연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은 우리를 느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영혼과 폐와 뇌에 좀 더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준다. ‘자연은 고친다: 왜 자연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건강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만들까(The Nature Fix: Why Nature Makes Us Happier, Healthier, and More Creative)’에서 플로렌스 윌리암스(Florence Williams)는 실제로 도시 생활이 인간의 뇌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도시 생활은 정신분열증, 불안감 그리고 정서적 장애의 가능성을 훨씬 더 높인다. 게다가 오늘과 같이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필터링하는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뇌는 엄청난 과부하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 있을 때 뇌가 처리하는 정보량은 훨씬 더 줄어든다. 그 결과 깊은 사고와 명상 또는 묵상과 같이 높은 수준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뇌가 최적화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나온 두 개의 논문에 따르면 테크놀로지에 중독된 아이들을 숲으로 보내서 시간을 보내게 하고 돌아온 후 뇌를 조사했는데, 뇌 속의 코르테솔(cortisol, 부신피질 호르몬의 하나) 분비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늘고 초조감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자연이 주는 안정 효과에 대한 경험적 증거는 한국과 일본과 같은 국가로 하여금 과도하게 작동하는 디지털 유령이 지배하는 도시를 탈출해서 걷기와 산소 호흡, 그리고 재조정 등을 할 수 있는 “치유의 숲”까지 지정하도록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도 “숲 요법”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으며 일부 의사들은 “자연 처방전”을 작성해서 환자들이 더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내도록 처방하고 있다. 왜 이런 방식이 효과가 있을까? 경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 이유를 알아내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중요한 건 영적인 현실이 그 답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 속에 있을 때 더 평화를 느끼는데, 그건 인간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될 때(그건 우리가 자연 속에 있을 때인데 고도가 높은 곳에서 거칠게 숨을 쉴 때나 또는 습도 높은 벌판에서 땀을 흘릴 때 등등), 우리는 자연스럽게 창조주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되고 그 결과 더 깊은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궁극적으로 있어야 할 바른 곳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자연은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한다내가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가 웬델 베리(Wendell Berry)가 쓴 ‘거친 것들의 평화’인데, 이 시는 정신적으로 초조한 세계에서 자연이 주는 선물을 잘 표현하고 있다.세상에 대한 절망이 커지면그리고 나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자다가 깬다나와 내 아이들의 삶에 행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무서워서나는 청둥오리가 있고 큰 왜가리가 서식하는 아름다운 물가로 내려가 눕는다나는 야생이 주는 평화 속으로 들어간다거기에는 아무도 슬픔을 미리 예측하면서 고통을 주지 않는다나는 고요한 물이 주는 존재감을 느낀다그리고 나는 내 머리 위에 뜬, 찬란하게 빛날 시간을 기다리는 별들을 느낀다아주 잠깐 나는 세계가 주는 은혜 속에서 쉬면서 자유를 느낀다‘거친 것들이 주는 평화’는 내가 공원에서 플라타너스 나무 가지를 보면서 경험한 것이다. 그것은 관점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깨달음이었는데, 우리의 삶이 아무리 정신없고 분주하더라도 이 자연은 여전히 원래 갈 길을 변함없이 간다는 것이었다. 새 아침을 맞아 우는 새소리에서부터 석양에 우는 귀뚜라미까지,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서 여름날 습기찬 천둥번개까지, 아기의 첫 울음에서부터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숨까지, 자연의 사이클과 리듬은 우리로 하여금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전 3:1).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거대한 창조라는 설계 속에서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닫게 함으로 평화를 준다. 절벽 끝에 한번 서보라. 굉음을 내는 폭포 앞에 서보라. 아니면 그냥 별들로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당신이란 존재가, 그리고 그 존재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라는 것이 사실상 얼마나 작은지를 생각해보라. 우리의 인간됨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다. 놀라운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다윗이 시편 8편에서 표현한 것처럼 일종의 예배하는 마음과 경이로움이라는 영감을 불어넣는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3-6)우리의 작음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이 하나님의 크심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심이야말로 진짜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개미집뿐만 아니라 안데스 산맥을 만드신 분, 플라타너스 나무의 견고한 몸통 뿐 아니라 장미의 섬세한 꽃잎까지 만드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진정한 평화를 맛보게 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rained and Depressed by the Internet? Go Outsid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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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휴식
자연치유
처방전
소셜미디어
치유의숲
독을 마신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by Benjamin R. Merkle
2020-08-25
지혜로운 사람이 항상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힘든 과정을 통해서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나는 교회에 있으면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복음주의에 심취한 순진무구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냥 교회에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내가 뭔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바짝 마른 내 몸에 근육을 키울 수 있으면 좀 더 안정감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해병대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내가 살던 동네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탱크를 담당하는 예비 부대가 있었고, 그 덕에 나는 주중에는 대학을 다니고 주말이면 탱크를 모는 두 가지 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다. 만세! 나는 이제 “내가 말이야, 해병대에 있을 때….”와 같은 말을 남들에게 할 수 있는 진짜 남자가 된 것이다. 화생방 훈련이 기억난다. 방 하나에 최루가스를 잔뜩 채워놓고 훈련 교관은 우리를 그 방안에서 한참 뛰도록 한 후에 마스크를 벗으라고 명령했다. 잠시 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교관이 주먹을 들면, 우리는 다시 마스크를 쓸 수 있었다. 시간은 꽤 빨리 흘러갔고 교관이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숨을 참을 수 있었다. 다시 마스크를 쓸 때, 중요한 것은 마스크 필터를 손으로 빼서 마스크 안에 있는 공기를 밖으로 세게 불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마스크 안에 있던 모든 최루 가스가 사라지고,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쉽다. 내가 속한 화생방 훈련 그룹의 시작은 괜찮았다. 우리는 마스크를 벗고 숨을 참았다. 일 분 정도 지났을 때 교관은 우리에게 다시 마스크를 쓰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잘 참았다. 이제 다시 마스크를 쓰고 그 속의 공기만 깨끗하게 만들면 된다.나의 어리석은 생각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루 가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이다호 주에서 자란 깡마른 기독교 청년들 중에 나 같은 이런 경험을 한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은 계속되었다. 이제 나는 피부와 눈으로는 최루 가스의 위력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가스가 폐로 들어오면 어떤 느낌일까? 결심이 섰다. 마스크 쓰기 전에 가스를 조금만 마셔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나는 새로운 또 하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 경험 때문에 조금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최루 가스를 아주 조금 마셨다.내 폐는 순식간에 불이 붙은 것처럼 터질 것 같았고, 나는 미친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네이팜 폭탄이 내 목구멍 안에서 터진 것 같았다. 패닉에 빠진 나는 급히 마스크를 썼지만 마스크 속 오염된 공기를 제거하기 위해 숨을 내쉴 산소가 내 폐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마스크 속 최루 가스까지 마시고 있었다. 엄청난 패닉이 몰려왔고 마스크를 벗었다. 머리 속에는 어떻게든 문으로 달려가 이 방을 나가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스크를 썼다. 마스크 속 최루 가스 속에서 끙끙거리고 헉헉거리며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깨끗한 공기의 일부라도 마실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참았다. 금지된 지혜사실 그것은 엉뚱한 충동에 빠진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듣고 “와, 잘 했네”라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누구나 다 “아니, 왜 그런 짓을 했는데?”라고 물을 뿐이었다. 애초 내 생각이 멍청했고, 게다가 실행까지 한 것은 더 어리석었다. 멍청하게 들린다는 걸 알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그때 그것을 하나의 기회로 보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를 구분시켜줄 아주 좋은 기회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결코 경험한 적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 기회는 더 근사하게만 보였다.이런 어리석음은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기본적인 오류고, 그것은 우리의 첫 선조 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뱀은 금지된 과일을 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면 눈이 떠지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와를 유혹했다(창 3:3). 사탄의 유혹이 가진 매력은 단지 선악과의 맛만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차원이 달라질 것이라는 사탄의 말을 들은 하와는 그 유혹에 굴복했다.이런 식의 유혹은 여전히 엄청난 힘을 가지고 지금도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 또한 금지된 무언가의 맛을 보게 됨으로써 엄청난 지혜를 갖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 눈에도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아직까지 짓지 않은 여러 죄를 짓게 됨으로 얼마나 큰 수치심을 느낄지를 말이다. 게다가 스스로 봐도 너무 순진하기 그지 없었다는 생각에 더 부끄러워질 것이다. 세상에 그 누가 순진하고 경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할까? 결혼할 때까지 성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동정(virginity)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 하는 기독교 학생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이런 혼란 속에서 순수함은 어느새 불안정으로 바뀐다. 그러나 그런 혼란은 이 간단한 질문을 하나 던짐으로 정리될 수 있다. 죄를 통해 얻는 경험이 당신을 더 지혜롭게 만들까 아니면 더 어리석게 만들까? 진짜 죄에 빠지는 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꿈꾸는 모습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할까 아니면 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책하도록 만들까?진짜 남자는 경건한 남자다이 원칙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여기서는 남자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기독교인 남자는 경건하면서도 남자답고 싶은 부담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정욕에 빠진 이 세상에서 사탄은 진짜 남자라면 남이 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고 유혹한다. 술에 취해서 정신도 잃어봐야 하고, 이곳저곳에서 섹스를 하고, 또 주먹질도 몇 번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모든 것을 다 하는 남자는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되는 모든 것을 다 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런 사람이 나중에 구원받으면 간증 때 할 얘기는 아주 많다.)이 세상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고 말한다. 이 세상 기준에 따르면, 남성다움은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Christlessness)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 세상이 말하는 남성다움은 하나님을 저버린 상태다. 지금 교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자들이 뭘 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세상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세상이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 거짓말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교회는 결코 남성다운 기독교(masculine Christianity)의 바른 모습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죄를 맛보는 것이 더 나은 남자로 만들 거라는 생각은 최루 가스를 마시는 게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 거라는 생각만큼이나 어리석기 그지 없다. 이미 충분하다죄에 찌든 세상 경험이 우리를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성장시키지 않는다. 마약과 방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구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간증이 듣기 좋다고, 그런 간증하는 인생을 꿈꿔서는 안 된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간증이 지루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죄를 많이 지었든지, 아니면 적게 지었든지, 죄는 그것으로 족하다. 지루한 간증을 한다고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독과 지혜를 혼동하지 말자. 지혜는 결코 죄를 맛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마시고, 또 그 말씀이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할 때에만 생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경험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ipping Poison Won’t Make You Wise (Take My Word for It!)번역: 무제
에덴동산
영성
영적성장
최루가스
죄의유혹
경건
남성
지혜
화생방훈련
마스크
영적으로 깨어 있는 훈련
by Brian G. Hedges
2020-08-16
나는 여름에 텍사스의 개간되지 않은 굉장히 넓은 한 초원에서 메스키트 나무를 제거하는 일을 해본 적이 있다. 살초제 탱크를 등에 지고 손에는 분무기를 들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 사이로 끊임없이 걸었다. 이 일은 매우 지루한 일이었다. 방울뱀과 마주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그곳은 해마다 방울뱀 제거로 유명한 곳이었다. 나를 보호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은 바지 위에 덧입는, 방울뱀의 송곳니가 뚫지 못할 만큼 딱딱한 고무 바지였다. 하지만 그 고무 바지는 나를 보호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의 어린 시절 영웅이었던 인디애나 존스처럼, 나는 뱀을 정말 싫어했다(지금도 싫다!). 내가 가는 길에 방울뱀이 지나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번은 방울뱀을 거의 밟을 뻔 했다.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바짝 경계하고, 한걸음 한걸음 조심하며, 작은 소리라도 그것이 방울뱀 소리는 아닌지 주의를 기울여 듣고, 뭔가 갑자기 움직이면 바로 점프할 준비를 하게 만들었다. 위험이 임박했음을 느꼈고 나는 경계심으로 가득찼다. 영적 경계심무언가를 경계하는 것은 영적 경계심 훈련에도 중요한 요소다. 경계한다는 것은 마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도시의 파수꾼은 적의 접근을 지켜보며 경계한다. 그들은 경계심으로 가득하여 모든 움직임을 주시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여기면 바짝 긴장하고 경계심을 품는다. 적들에 둘러싸여 있는 십자가 군병들로서 우리도 이와 같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오래된 찬송가의 가사에 이렇게 나온다.신자여, 아직 쉬지말고편안함을 꿈꾸지 말라적들이 둘러싸고 있으니깨어 기도하라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묵상과 기도처럼 건강한 영적 삶에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고 하신다.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의 서신들은 한결같이 도덕적으로 경계하고 깨어 기도하라고 우리를 촉구한다(고전16:13; 갈 6:1; 골 4:2; 딤전 4:16; 벧전 4:7; 요이 8). 그리고 히브리서는 우리 영혼을 지켜보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도 서로 권고하며 조심하라고 한다(히 3:12; 13:17). 하지만 성경에서 이렇게 강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현대 영적 훈련 매뉴얼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실천방법의 하나다.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늘 적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17세기 청교도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과 이의 실천에 대하여 자주 기록했다. 예를 들면, 초기 청교도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는 1602년에 ‘일곱 개의 논문’(Seven Treatises)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펴냈다. 7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저서는 기독교적 삶에 대한 폭넓은 시각과 경험을 탐구하고 있다. 세 번째 논문에서 로저스는 “경건한 삶에 도움이 되고 계속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논하고”, 이것들을 공동체적 영역과 개인적 영역으로 나눈다. 경건한 삶에 도움이 되는 개인적 영역에 속하는 훈련에는 묵상ㆍ기도ㆍ금식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런데 로저스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개인적 영역의 첫 번째 목록에 놓았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나머지 모든 것들이 바르게 잘 사용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 의미는 명확하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무시하면 다른 영적 훈련이 방해를 받는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영적 훈련이라는 칼을 가는 숫돌이며, 다른 습관을 예리하게 지키게 하는 실천 방법이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라영적으로 깨어 있는 훈련은 소극적 차원과 적극적 차원 모두를 포함한다. 소극적 차원은 세속적인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죄와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잠 4:23; 마 26:41; 롬 13:14).이것은 자기 성찰이 요구되는 방법이다. 청교도 아이작 암브로스(Isaac Ambrose)가 ‘들릴라 죄’라고 부른 것과 같이, 특정한 죄를 향한 개인적 경향에 대하여 우리가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것을 말한다. 삼손의 애인 들릴라처럼, '들릴라 죄’는 우리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귓속에 달콤한 말로 속삭이지만,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의 도덕적 힘을 끊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고의적이고 상습적인 죄를 짓도록 방치하는, 우리가 키운 특정한 죄의 패턴이다. 진흙탕 길에 깊이 파인 고랑 자국처럼, 이러한 악덕은 매일의 일과와 자기 합리화와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우리 삶 속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죄의 패턴을 알아차림으로써 죄가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입구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존 번연(John Bunyan)은 ‘거룩한 전쟁’(The Holy War)이라는 우화에서 이 입구를 맨소울 도시(the city of Mansoul)의 다섯 개 문, 즉 “귀문, 눈문, 입문, 코문, 감각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살펴보지 못하면, 그 문을 통해 유혹이 우리 마음으로 기어 들어온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려면 우리가 방문하는 웹사이트, 읽는 책, 시청하는 프로그램이나 영화, 자주 가는 장소 그리고 우리 귀를 채우는 음악과 메시지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영적으로 깨어 있는 훈련은 집을 안전하게 지키는 보안 시스템과 같다. 효과적인 감시 장치는 감시 카메라, 움직임 포착 센서, 투광 조명등, 전기 잠금장치, 고음의 알람장치 등과 같은 여러 요소들을 포함한다. 이 모든 장치들은 위험한 침입자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자기 점검ㆍ기도ㆍ묵상ㆍ책임감과 같은 다양한 실천을 포함하며, 이 모든 것은 마음을 지키는 데 사용된다.예수님을 바라보라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에는 적극적인 차원도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단지 죄를 거부하고 유혹을 피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향하여 그 시선을 고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맨소울이라는 은유의 도시를 다시 언급하면, 위험한 침입자로부터 우리 영혼의 문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복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을 빈 상태로 두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거주하도록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엡 3:17).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주의깊게 살피는 것이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영혼은 흔들림 없이 멀리 보고, 위를 보고,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 오실 우리 주님을 기대하며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마24:42; 25:13; 눅 12:37; 계 16:15). 눈을 위로 향하는 것은, 바울이 우리 마음을 위에 있는 것, 즉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향하여 두라고 한 말씀을 의미한다(골 3:1-2). 우리는 발 밑을 보지 않고, 마라톤 선수처럼 결승선을 향하여 앞으로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는 사람이다. 19세기 스코틀랜드 목회자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은 아마도 내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방법을 가장 잘 가르쳐준 사람일 것이다. 맥체인은 방황하고 있는 신자에게 쓴 편지에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데 보내라. 자기 자신을 한 번 살펴보면, 그리스도를 열 번 바라보라”고 했다.바로 그것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의 핵심은 자신이 아니라 구세주에게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ur Most Neglected Spiritual Discipline번역: 정은심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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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심
훈련
초첨
창조 신앙으로 몸과 성을 바라보기
by 이춘성
2020-08-1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인류가 창조된 이후로 성(性)은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다. 그 이유는 성은 인간의 생명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창1:27)은 인간은 성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이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성이 지향해야 하는 것이 생명의 번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성의 사용을 생명의 탄생을 위한 거룩한 행위로 여겼다.하지만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은 ‘성’과 ‘생명 번영’이라는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결국, 인간들은 '생명 없는 성', '성 없는 생명'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성 없는 생명'이란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관계 밖에서도 인간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교만과 착각에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현대 의학과 생물학은 인간이 유전자 복제를 통해 생명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생명 없는 성'이란 성을 단지 남녀 사이의 쾌락만을 위한 놀이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요즘 단지 감정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책임감 없는 사랑과 같다. 책임을 제거하고 직감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성은 단지 감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성을 쾌락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남용하는 세속 문화는 20세기에 들어와 과학의 발전과 함께 가속되었다. 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난자와 정자가 어떤 방식으로 수정되어 아이가 되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긍정적인 면에서 이것은 불임의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부정적인 면에서는 임신 걱정 없이 순전히 섹스만을 즐길 수 있도록 각종 피임 방법을 고안해 내게 하였다. 결국, 피임법의 발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과 생명의 신성하고도 거룩한 연결 고리를 제거하고, 성을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재미있는 성인 놀이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신학자 칼 투르먼은 성을 거룩하고 신성시하였던 과거 사람들과 달리, 현대 사람들은 성을 경시하고, 개인화시켰다고 말하였다.유튜브, 트위터 등의 다양한 인터넷 매체들과 텔레비전, 신문 등의 대중 매체들은 성을 성인들의 놀이 정도로 취급한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매체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약 100여 년 전 1880년대에 미국에서는 YMCA, YWCA 등의 기독교 단체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을 시행하였다(Carrera). 당시의 성교육은 일종의 순결 서약 운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중 매체는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였고, 10대 임신율이 오르고, 불법 낙태로 여성들의 건강이 위험해지자 성교육은 방향성을 새롭게 갖췄다. 절제와 인내의 미덕보다는 호기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나쁜 결과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성교육을 시행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쳐 안전한 성관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미국 청소년들의 약 40퍼센트 이상이 성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또한, 질병관리본부의 2018년 “청소년 건강행태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청소년들의 5.7퍼센트 이상이 성관계를 경험하였다고 답하였고, 최초 성경험은 만 13.6세로 나타났다. 최근 소셜 벤처 EVE의 “2019 청소년 성(性)문조사”에 의하면 약 54.7% 이상의 청소년들이 성관계를 경험하였다고 답하였다. 비록 임신율은 낮아졌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성교육은 성을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 아닌 개인의 만족을 위한 도구라는 비뚤어진 인식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성과 생명을 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어긋난 것이다. 결국 성의 경시와 도구화는, 나의 생명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취하는 장기매매와 같은 생명 경시와 생명의 도구화를 가속 시킬 것이다.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현대의 성교육이란 성에서 책임을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교육이다. 그 결과 성은 일종의 성인 놀이로 폄하되고 있다. 그리고 어른을 흉내 내고자 하는 호기심 많은 10대 청소년들에게 성교육이 오히려 성적 호기심을 더 조장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성에 관한 관심이 없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성교육 전문가들과 교회에서는 조기 성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교육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신자와 비신자가 어울려 살아가는 공적인 영역에서 현대적 성교육을 제거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그 과정에서 교회가 입을 피해도 만만치 않다. 또한 현대의 성교육 중에서 몸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무시할 부분이 아니다.초기와 중세 기독교는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아 영과 몸을 분리하고 이를 차등하는 영육 이원론이 지배하였다. 즉, 영혼은 거룩하고 육체는 더럽다는 생각이다. 더러운 육체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몸을 학대하는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몸을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해 쾌락으로 탕진하는 쾌락주의에 빠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러한 영육 이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몸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정정숙).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하고 신성한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몸을 잘 알고 이해하는 것은 영혼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만 창조하시고 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창1:27).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몸과 영혼이 유기적으로 연합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이 몸에 대해서 아는 것은 간접적이지만 창조자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그리고 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욕구들(식욕, 수면욕, 성욕 등)을 이해하고 이를 균형 있게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번영하게 하고자 하신 문화명령을 시행하는 창조자의 대리 통치자인 인간의 기본적인 통치 자질이다. 비록 이 자질이 타락으로 어그러지고 무너졌지만, 이 기능은 여전히 인간만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 신자는 타락 이전의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창조의 세계관을 회복하고 이에 따른 교육을 통해 자신과 가족, 새로이 태어날 아이들을 양육하고 언약의 자녀들로 키워야 하는 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신자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자들이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자라는 자녀들에게 신체가 얼마나 소중하며 가치 있는지 가르쳐야 한다. 그러려면 어른들과 부모부터 신체의 여러 부위가 어떤 기능을 하며, 왜 창조되었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몸의 창조 질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교육도 이러한 맥락 가운데 이해하고 가르쳐야 한다. 단순히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것이라 답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춘기의 이차 성징이 일어나는 아이들이 신체 변화를 무방비로 맞이하게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 신앙 안에서 이것들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마지막으로 몸, 특별히 성과 관련된 신체와 성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은 아이들이 질문하거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방법들(인터넷, 잡지, 동영상, 친구, 책 등)을 찾지 않는 한 일부러 가르칠 필요는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호기심이 생겼을 때, 그때 구체적인 지식을 가르치고 답하는 것이 좋다. 솔로몬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남녀의 사랑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아가서에는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7;3:5;8:4)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성적인 욕망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것이라는 의미다(Thomas). 참된 사랑을 배우지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사랑의 감정만을 깨운다면 이것은 욕정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교육에 있어 신체와 성관계에 대한 지식이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각종 자극에 노출되어 있고, 아직 깨우지 말아야 할 성적 호기심이 조기에 발달하고 있다. 그런 아이들의 성과 신체에 대한 질문 앞에서 교회의 교사들과 부모들은 과거와 달리 적극적으로 성에 대한 창조신앙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지속적인 대화와 관심을 가지고 신체의 의미를 가르치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성과 몸에 대한 성경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 외에 현대의 타락한 성문화에 대항할 방법은 없다.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 성교육은 이 시대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며, 몸에 대한 바른 지식과 신학은 모든 신자가 알아야 할 신앙을 위한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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