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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주시는 시련보다 크다
by Abigail Dodds
2024-01-08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 오래되고 진부한 이 말이 나를 조롱했다. 나는 살면서 하나님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주신 게 분명하다고 여러 번 느꼈다. 생명을 위협하는 발작으로 인해 임사 체험까지 한 아들을 둔 사람에게, ‘그건 당신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입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는 또 어떤가? 무력함? 만성통증? 어쩌면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나쁜 시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모든 상황을 견디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그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옆방에서 구급대원들이 발작하는 아들을 치료하는 동안 땀에 젖어 기절한 채 욕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나를 생각하면, 그건 도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사자와 우리의 한계“갤럽, 브리, 뛰어. 너희는 군마라는 사실을 기억해”(The Horse and His Boy, 270). 자신의 조국 칼로르멘의 악을 피해 도망친 어린 공주 아라비스는 말하는 말 브리에게 적들로부터 최대한 빨리 도망가라고 재촉했다. 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7권 중 하나인 말과 소년(A Horse and His Boy)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브리와 친구 흐윈(Hwin)은 각자 나름 생각하기에는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거 같다. “확실히 두 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리고 이렇게 지적한다. “하지만 그 둘은 결코 같은 게 아니다.”말하는 두 마리의 말과 그 등에 올라탄 소년과 소녀의 필사적인 질주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공포의 정점을 향해서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 그들은 칼로르멘 군인들로 이루어진 끔찍한 군대의 추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가까이에서는 더 위험한 적인 위대한 사자가 바로 뒤에서 포효하고 있었다.“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271). 동화 속 이 단순한 장면이 지난 십 년과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측면에서 내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어려움 속에서 나의 “한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2)어려운 시기에 나를 짓누르는 분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3)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정도까지 짓누르기로 선택하셨는지와 관련해서도 그분의 선하심을 엿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욕실 기절 사건에 적용하기브리는 위대한 사자 아슬란을 등에 태우고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내 경우에는 위기를 맞은 아들과 필사적으로 함께하고 싶었던 바로 그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는 점에서, 거기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정신을 잃어버린 끔찍한 생리 반응을 어떻게 사자를 등에 태우고 속도를 더 내는 브리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겉으로만 봐서는 전혀 비슷한 게 없다. 하지만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던 나는 나만의 새로운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거기 누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내 아들을 구해 달라고 간구했고, 동시에 주님을 더 믿기 위해서 내게는 새로운 변속 기어가 필요했다. 내가 매 순간 아들 곁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은 항상 계셨다. 나는 아들의 발작을 멈출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다. 아들이 죽는다고 내가 따라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내 아들 곁에도 계실 것이다. 브리와 마찬가지로 나도 내 생각에 괜찮다 싶을 정도만 믿음을 가졌다. 사실 그게 대단한 믿음도 아니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내가 다 감당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로 대단한 시련이 아니었다. 위대한 사자의 추격과 함께 나는 새로운 믿음의 차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당신은 알고 있는가? 당신이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상 한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창조자이자 유지자가 아니기에,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당신의 한계를 결코 제대로 알 수 없다. 내 한계를 넘어서 우리는 모든 걸 다 바쳤고, 남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나의 한계를 제대로 시험해 본 적이 없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나는 안 돼, 이건 내 한계를 넘은 거야, 이런 손해는 감당할 수 없어, 이런 시험은 말도 안 돼, 난 이런 결과를 감당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필요한 압력을 행사하신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9)알다시피, 고난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믿음이 우리가 원래 강인한 체질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는 건 내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다.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화장실 바닥에서 박박 기는 동안에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할 수 있다. 변치 않는 사랑의 길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서(그분을 의지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음을 종종 보여주신다. 그리고 직관에 거슬리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단지 격려나 긍정적인 사고 또는 확언을 통해서 우리를 그 믿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다. 브리의 경우처럼 고통과 시련을 증가시킴으로,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해서 달려나가도록 인도하신다. 브리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속도를 높이자, 위대한 사자는 그들과 그들을 쫓는 진정한 적들 사이의 거리를 더 벌어지게 했다. 아슬란이 그들을 겁주었지만, 결국에는 그게 다 그들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서였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느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고 선한 일에만 복종하게 하실 뿐, 필요 없는 고통은 단 한 방울도 더하지 않으실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일이 합력하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신다(롬 8:28-29).하나님께서 우리가 죽어라 질주하고 숨에 헐떡이도록 몰아가실 때, 그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은혜이다. 그분은 오로지 선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는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바라보라고 우리를 압박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옛 적들, 즉 세상과 육신과 마귀 사이에 거리를 두심으로써, 정말로 해를 끼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당신이 위대한 사자의 압력을 받는다고 느낄 때 결코 잊지 말라. 그의 모든 길은 변함없는 사랑이다(시 25:10). 화장실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도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다. 원제: More Than Mom Can Bea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개미가 지혜를 지고 나른다
by 필립 정
2023-12-30
올해 4월경, 광화문에 있는 큰 서점에 책을 사러 간 적이 있다. 베스트 셀러를 진열해 놓은 곳에 자기 계발, 인간 관계론, 주식 투자, 토익, 경제 서적들이 뒤덮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 인문학 책 진열대에 갔더니 ‘니체의 말’ 번역본과 니체의 다른 책들이 압도적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냥 서점을 나와 벚꽃이 휘날리는 경복궁을 걸으며 한참 생각해 보았다. 자기 계발, 돈과 니체의 책들의 조화가 수상해 이들의 접점을 찾으려고 머리를 쥐어짜 보았다. 얼마 안 가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한국 청년들의 마음이 현재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사실 내가 현재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선택의 문제는 계속 꼬리를 물고 나를 붙잡고 늘어져 과거까지 끌고 간다. 한번 과거의 선택이 잘못되면 현재의 삶이 뒤틀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삶에서 경험된 지식이 충분히 쌓여야만 현재의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고 미래를 보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판단력, 통찰력, 결정 능력을 성경도 세상도 지혜라 부른다. 단지 성경이 말하는 지혜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와 그 출발점이 다르다. 그 출발점이 다르니 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모든 지식과 지혜가 시작된다고 한다(잠언 1:7). 경외란 하나님을 알아 가며 그의 능력에 탄복하여 존경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뜻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쌓인 놀라운 경험이 지식이고 이에서 생긴 통찰력으로 현안을 해결하며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판단력을 지혜라 부른다. 오늘 소개할 개미 선생님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가 어떤 것인지 좋은 예로 증언해 주고 있다. 개미가 인간의 스승이란다. 흥미롭지 않은가!게으른 자는 누구일까?잠언 기자는 잠언 6:6에서 게으른 자에게 “개미에게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며 나무란다. 그런데 저자는 게으른 자를 지혜가 없는 자라고 단정해 버린다. 왜 그런지 이유가 다음에 나와 있다. 이 게으른 자가 지혜 없는 자의 전형인 인격적 결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개미는 두령도, 감독도 통치자가 없어도 일하는데…(잠언 6:7)” “너는 언제까지 눕고 언제 일어나서 일하러 가겠느냐”(잠언 6:9)라고 한다. 이에 게으른 자의 반응이 매우 반항적이다. “나는 좀 더 자겠다. 졸겠다. 좀 더 누워 있겠다”(잠언 6:10)며 무시해 버린다. 저항, 반항, 분노의 모습이 여실히 그려진다.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언 1:7)는 말씀이 여기서 떠오른다.굳이 멀리서 이런 게으른 자의 예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철없던 어린 시절이 그려지지 않는가! “내 인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마세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외치며 이불을 뒤집어 쓰는 철없던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어느 날 후회를 할 모습이 여실히 그려지는 지혜 없는 자 즉 게으른 자의 전형을 여기서 보여 주고 있다.개미의 지혜개미는 게으른 자가 배워야 할 지혜로운 대상으로 묘사된다. 잠언 6장의 개미의 지혜에 묘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세밀해서 두려울 정도다. 하나님을 알면 그에 대한 탄성과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왜 개미가 지혜롭다고 할까? 잠언 저자는 개미가 두령, 감독자, 통치자가 없이도 먹을 것을 위해 여름 동안에 예비하여 추수 때에 양식을 모은다(잠언 6:7, 8)며 개미의 자발적인 미래 대비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개미의 이 대비 능력은 그냥 말 한마디하고 지나갈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한마디 뒤에 첩첩이 쌓인 무수한 개미들의 지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우선 개미들에게 두령, 감독자, 통치자가 없다는 말씀에 주목해 보자. 사실 이 말씀은 과학적 사실과 맞지 않아 보인다. 분명 개미 사회는 여왕개미가 최정점에 있고 이들의 페르몬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왕개미는 페르몬을 뿌려 다른 암컷들인 일개미들의 생식 활동을 통제하고 혼자 자손 번식 활동을 도맡아 한다. 수명도 여타 개미들보다 10배 정도 길고 몸집도 거대해 생산 활동에 적합하다. 그래서 여왕개미가 사라지면 생산이 멈춰진 개미 사회는 급격히 무너져 버린다. 개미들의 생과 사가 여왕개미의 존재 여부에 따라 결정되니 여왕개미를 최고 권력자라고 보기 쉽다. 그러나 여왕개미를 인간 사회의 왕이나 통치자로 보면 개미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여왕개미는 생산 활동 이외 어떤 힘도 없고 통치할 권력도 갖고 있지 않다. 다른 암컷 일개미들이 콜로니를 벗어나 몰래 알을 낳으려는 것을 저지할 수도 없고 알을 못 낳을 정도로 병이 들거나 노쇠하면 일개미들에게 끌려가 굴 밖으로 버림을 받는 신세로 무력하니 여왕개미는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95퍼센트가 넘는 일개미들이 여왕개미가 낳은 알을 돌보고 새끼들을 먹이고 전쟁이 나면 나가서 싸우기도 한다. 혼내거나 책망해도 일하지 않는 고집 세고 저항적인 게으른 자들과는 전혀 다르다.잠언 6장의 기자인 솔로몬은 이 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있다. 솔로몬은 자신이 비록 왕이지만 자신의 힘이나 권력이 게으른 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게으른 자들이 개미 조직의 일 개미들처럼 스스로 움직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사실 개미의 자발적 분업 사회에 대해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중반에 들어서야 진화론적 관점에서 개미들의 사회적 분업의 발달에 관심을 갖고 생식 계급과 비생식 계급으로 나누고 어떻게 이들이 서로의 갈등을 이겨내고 진화해 왔는지 연구하였다. 개미가 만 이천 종이 넘어 어떤 보편적이고 일관된 질서를 찾기가 어렵지만 개미 사회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서로 돕는 역할로 진화해 왔다고 연구 결과를 내었다. 이 진화론적 관점의 연구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솔로몬은 이것을 이미 3천년 전에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왕이지만 권력 없는 여왕 개미처럼 힘으로 눌러 억지로 일하게 만들 수 없음을 알고 개미의 자발성에 눈을 뜨도록 게으른 자들에게 책망과 동기 부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종적인 지시 체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돕는 개미 같은 횡적 조직 체계에 솔로몬이 이미 눈뜨고 있는 것 같다.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솔로몬이 여왕개미의 존재나 특성에 대해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어떤 미물의 조직이라도 통치 체계가 존재하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데, 솔로몬이 개미의 두령이 없다고 전제하는 것은 개미의 자발적 협력 체계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 분명하다. 솔로몬은 개미의 자발성을 보고 하나님의 창조에 감탄하여 인간 사회도 개미 사회 같아야 한다고 보고 좋은 예를 제시하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왕정 시대에 자기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움직여 일하는 유기적 체제를 꿈꾸고 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왜 일개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 알아볼 차례다. 단지 성경대로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일까? 그 이상의 지혜가 숨어 있다. 왜 개미들은 자기의 자식도 아닌 여왕과 그 후손들을 위해 일하고 협력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실 찰스 다윈도 이 점을 매우 궁금해했다. 대부분 개미의 병사 계급은 나이 많은 일개미이다. 평생 생산 활동에 참여해 보지 못한 늙은 처녀개미가 자기 자식이 아닌 여왕개미와 그 자식을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운다. 다른 일개미들도 역할만 다를 뿐 여왕과 그 자손을 위해 먹이를 구하러 다니거나 건축을 하는 등 다양한 일을 몸 바쳐 한다. 다윈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타적인 동물이 소멸하지 않고 매우 성공적으로 진화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솔로몬이 하필이면 다른 동물이 아닌 개미에게 배우라고 한 것은 이런 개미들의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헌신 때문으로 보인다. 개미는 이 이타성을 빼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개미의 이타성의 비밀은 유전자 연구가 활성화 된 현대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인간은 남녀 모두 염색체 한 쌍을 갖고 있는 이배체의 동물이다. 개미의 암컷 역시 이배체이다. 그러나 개미의 수컷은 염색체 한 벌만 갖고 있는 반수체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형제자매간 유전자의 1/2을 갖고 있지만 개미는 형제자매 간에 유전자의 3/4을 공유한다. 그러니 자기를 더 많이 닮은 형제자매의 번성을 위해 자기들의 생산 활동을 포기하고 자기의 어머니인 여왕과 여왕의 자식이자 일개미들의 형제자매를 위해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보다 훨씬 이타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 조직 사회를 유지해 나간다. 그래서 동물 학자들은 모두 개미를 지구에서 가장 성공한 동물이라고 인정하고 있다.솔로몬의 개미에게 가서 그의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말씀은 이런 개미의 공동체적 특성을 가르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게으른 자들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좀더 눕자”고 저항하며 솔로몬을 무시해 버린다. 이 게으른 자들의 태도는 그들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 결과는 무섭게 나타난다.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궁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언 6:11). 미래에 대해 아무런 준비 없이 살다가 강도와 적군같이 예고 없이 찾아온 궁핍에 무너져 버리는 인생의 비극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게으른 자들의 선택은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자신들을 기대하고 있는 공동체조차도 무너뜨린다. 솔로몬의 권면의 당사자인 르호보암이 그 좋은 예이다. 솔로몬의 사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과 그를 따르는 참모들은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없었다. 그저 세제를 더 강화하고 부역의 짐을 백성에게 가중시켜 집권층의 이익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반란으로 국가의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사회적 약자와 공동체를 위하며 섬기는 마음이 그들에게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은 북쪽의 10지파를 르호보암에게서 빼앗아 가셨다. 솔로몬의 경고가 그의 게으른 자식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게으른 자들은 이렇게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어버렸다.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선택하라우리의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조금 더 분명히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좌우된다. 하나님의 통치와 솜씨에 놀라고 경탄하며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이고 이를 우리의 삶에 하나둘 적용하면 통찰력과 판단력, 실천하는 능력, 즉 지혜가 자라나 우리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지나치게 염려하여 두려움에 싸이면 맘몬 신앙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 대형 서점에 수없이 진열된 자기 계발 서적, 주식, 코인 투자 안내서, 니체의 책들은 여실히 미래에 대해 열심히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보여 준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지 내가 사는 이 미국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들의 고군분투 속에서 엄청난 부담감과 염려와 공포에 눌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삶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지나치면 그것들이 우리를 사로잡아 지배해버린다. 이는 신앙과 같다. 마태복음 6:24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말씀하며, 주님이 하나만 선택하라고 지혜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재물에 대한 두려움과 지나친 염려는 하나님을 중히 여기지 않는 불신앙이니 여기서 떠나라는 것이다.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현대인들이 니체에 열광하는 이유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신의 부재에 공포를 느끼며 그 부재를 극복하려고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고 스스로에 열광하는 광적인 태도가 아니면 이 불안한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하지 않음에서 오는 공허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초인적 자기 극복이 현대의 뉴 노멀 시대를 겪는 공포와 많이 닮았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그 공포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압도되면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느끼는 내 존재의 무익함은 니체의 공허와 다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지식으로 채워지면 거기에서 오는 통찰력과 판단력의 지혜가 나를 인도하여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문제들은 풀기가 어렵고 답이 없다.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삶의 고통이 내 능력 위에 있다고 인정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그를 경험하여 얻은 지식만이 세상을 이기는 참 지식이다. 이 지식은 일개미들처럼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의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때 지혜로 실현된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결단하고 선택을 해야 미래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한번에 건너 뛰려 하지 말고 말씀 한 구절을, 삶의 한 찰나에 적용하면 언젠가 이런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날을 기대하며 꿈꾸기를 원한다.나는 이 글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앞길이 안 보여 절망하는 한국 청년들에게 오해되어 읽히거나 그들에게 잔소리 조의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의 설교 인용 도구로 쓰이지 않기를 바란다. 주를 깊이 의지하고 경험하여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가 충만한 목회자들의 손에 들려 지치고 힘든 한국의 청년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혜의 왕으로 오신 주가 탄생하신 날을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친다.
야고보서의 기도 문법을 배우자
by 최창국
2023-12-28
야고보서는 교회 공동체의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교회 공동체는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약 5:13-16). 여기서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는 명령문은 현재시제로, 기도는 교회 공동체의 일상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야고보서 5:16 하반절은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제시한다. 즉, 의인의 기도는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기도에 대한 전체 단락의 핵심이다(존 윌킨슨, 성경과 치유, 374-75). 효과적인 기도는 바로 의인의 진심 어린 믿음의 기도이다. 하지만 모든 믿음의 기도가 효과적인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믿음의 기도가 반드시 효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가 치유되기를 전심으로 기도했지만 치유되지 않았다(고후 12:8). 여기서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을 통한 질병의 제거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 동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바울의 관계성 속에서 나오는 질병의 새로운 용도가 곧 치유였다.중요한 것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기도의 효과를 의미하는 현재분사 에네르고우메네(energoumene, 효과적인)에 대한 문법적 또는 해석학적 논쟁이 있다. 분사 에네르고우메네가 수동태 혹은 중간태로 해석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메이어는 이 분사는 수동태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의인의 기도는 성령의 초월적인 능력 안에서 효과가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J. B. Mayer, The Epistle of St. James, 177-79). 반면에 기도의 효과에 대한 중간태(middle voice, 능동태와 수동태 사이의 어법)의 의미는 성령의 초월적인 능력보다는 기도 자체로써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현대 주석가들이 선호하고 있다(James Adamson, TDNT (1064), vol. 2, 923-38). 기도의 효과에 대한 이 두 해석은 기도는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인 역사의 경험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영 등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기도의 문법을 수동태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해 성령은 능동적으로 역사하고 우리는 수동적으로 응답을 받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기도의 문법을 중간태로 이해할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은총 또는 창조적 선물이 활성화되도록 하나님의 생명력과 리듬에 참여하는 행위로 이해하게 된다. 잭 레비슨도 기도 실천에서 중간태의 특성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밝힌다.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직접 개입하여 역사하기보다는 출생 때 주어진 하나님의 숨-영(창 2:7)이 넘칠 정도로 채운다(toping up)고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채운다는 것은 없던 것을 갑자기 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마음과 영 등이 온전해진다는 의미라는 것을 구약 과 신약, 그리고 고대 유대 문헌과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헌에 드러난 영(ruach)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밝힌다. 따라서 “우리 속의 하나님의 영이 계속 거룩한 영으로 유지되려면 올바른 실천이 반드시 필요하다”(잭 레비슨, 성령과 신앙, 102). 특히 하나님의 숨-영이 이미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기도 방법도 달려져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숨-영이 우리를 자극하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출생 시 주어진 “우리의 영이야말로 일차적인 기도의 동인이고, 하나님과 신자 간의 처소이며, 인간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장소이다. 하나님의 영이 이 기도를 승인할지는 몰라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이런 촉발과 영감은 내면에서 나온다”(잭 레비슨, 성령과 신앙, 84).야고보서에서 효과적인 기도의 문법이 수동태의 특성보다는 중간태의 특성이 더 타당하다고 할 때, 현대 교회의 기도 이해에 주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기도의 중간태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미흡했기 때문이다. 기도의 문법은 능동태와 수동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중간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단지 기도하는 사람이 성령의 능동성, 즉 기적과 능력을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인 기도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데 텔로스(telos), 즉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명력을 나누는 데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움직이고,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이며, 만남과 응답의 리듬이다”(케네스 리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19).유진 피터슨도 기도의 특유한 특성을 그리스어 문법의 중간태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스어 문법책에는 중간태가 ‘행위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묘사하는 동사 용법을 말한다’고 적혀 있다. 지금 그것을 읽고 있는데, 마치 기도를 설명하는 문서를 보는 느낌이다. ‘행위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체들’이란 표현은 기도에 딱 들어맞는다. 나는 상대의 행위를 통제하지 않는다. 주문이나 의식으로 신을 움직이게 한다는 건 이미 비인격적이고 운명론적인 의지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건 힌두교적인 기도 개념이다. 나는 세상을 지으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분이 시작한 행위에 가담하며,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결과에 참여한다. 행위를 하지도, 행위에 지배받지도 않았지만 주님이 뜻하신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다”(Eugene Peterson, The Contemplative Paster, 103-04).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참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 존재론적 동역자가 아니라 실천적 동역자가 된다. 물론 인간의 욕구가 기도 생활의 가장 원초적인 동기가 된다. 그러나 기도에서 욕구를 위한 차원이 기초적이지만 모든 것은 아니다. 기도의 본질적 목적은 단지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력을 경험하는 데 있다.레오나르도 보프는 그가 어느 날 그를 설레게 했던 한 부인과의 만남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을 소개한다. 그가 만난 부인은 열다섯 살 된 아들과 함께 도시의 쓰레기 집하장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수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그 여인은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경직되어 웅크리고 있었고 울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보프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지경에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그때 그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부드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눈으로 그녀는 나를 바라다보았다. ‘저요?’ ‘어떻게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제 아버지가 아니었던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제가 그의 손에 있음을 느낄 수 없다면, 그 누구에게 제가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보프는 이 만남을 통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마르크스는 잘못 생각하였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서 신앙은 마약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빛을 발하는 해방이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삶이다”(Dorothee Solle, The Silent Cry, 294에서 인용). 우리는 여기서 기도는 단지 말이 아니며, 생산품도 아니며, 신비적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기도의 이러한 신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통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변화시킨다. 방향이 잘못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통치 관계로 만들지만,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만든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사랑이 통치를 무너뜨리고 사랑이 드러남을 알게 되는 바로 이 점에서 기도 또한 작용한다. 그것은 사랑의 한 언어다. 그리고 기도가 사랑의 언어가 아닌 곳에서는 그것을 생략할 수 있다”(Dorothee Solle, The Silent Cry, 296). 여기서 사랑은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어’라고 말하는 종속성과 같은 것이다. 이 종속성은 서로를 충만하게 하는 종속성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사랑이 넘치는 종속성이다. 기도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중 경청’의 엄중한 교훈
by Trevin Wax
2023-12-27
내 믿음의 영웅 중 한 명인 존 스토트는 “이중 경청”라는 개념을 대중화했다. 그는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의 진리에 따라 형성되고 또한 현대 세계의 현실에 완전히 몰입한” 기독교인의 지성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스토트는 “이중 거부”라는 맥락에서 이중 경청이 필요하다는 프레임을 만들었다.이중 거부첫째,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성경 공부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말씀이 세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둘째, 우리는 세상을 따르기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주변의 사건과 경향, 또는 이론에 너무 매료되어 이 세상을 말씀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또는 더 나쁘게는 세상의 기준으로 말씀을 판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이중 거부가 의미하는 바는 현실도피적 후퇴의 길과 혼합주의적 순응의 길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토트의 비전은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이 옹호하는 “선교적 만남”과 유사하다. 선교와 만남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중요하다. 세상에 순응하는 것은 선교적 접점이 없는 만남이라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면 순결이라는 환상에는 이를지 몰라도, 우리가 다가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은 만날 수 없다. 이중 경청의 필요성스토트는 이중 경청을 이중 거부가 가진 긍정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우리는 기대와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혼란스럽고 원하지 않는 말씀을 주실 수도 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주변 세계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먼저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그들에게 말씀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고 노력한다. 스토트의 설명이다. 우리는 겸손한 경외심으로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이해하게 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비판적 예민함으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을 믿고 순종한다는 건 아니다. 단지 세상과 공감하고 복음이 세상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발견하기 위해 은혜를 구하겠다고 결심한다. 팀 켈러는 이중 경청에 있어서 최고의 모델이다. 성경에 뿌리를 두고, 청교도에 대한 독서와 더 폭넓은 개혁 전통에 참여하면서 신학적 성찰에 흠뻑 젖었던 이가 켈러이다. 그는 또한 사회 동향에 대해 늘 호기심이 많았으며, 비그리스도인의 문헌과 분석에도 정통했다. 그랬기에 켈러는 현대의 우상 숭배가 성경의 진리와 접촉하도록, 그것도 가슴을 찌르는 방식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켈러를 그토록 효과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이중 경청이다. 즉 말씀에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임과 동시에 말씀에 비추어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분석하는 자세이다. 존 웹스터의 중요한 상기이중 경청에 대한 스토트의 제안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그건 스토트 때문이 아니라 그 표현이 오용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세상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말씀을 듣고 적용하는 방법을 알기 전에 세상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먼저 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쉽게 바뀔 수 있다. 스토트의 비전은 말씀에서 시작하여 그 말씀을 세상에 적용하려는 노력이다. 그에 반해서 이중 경청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목사나 교사가 우선 성경에 깊이 빠졌다가 나중에 때가 되면 세상의 문화를 분석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야 세상이 더 집중해서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 웹스터(John Webster)가 “제자도와 부르심”이라는 강의에서 주는 중요한 교훈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는 사실상 스토트의 말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임무가 항상 세상이 아닌 말씀에서 시작하고 계속해서 말씀을 강조되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실한 교회는 세상의 리듬을 따라가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흥분되고 불안정한 교회는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으며, 안정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이고 인내심 있는 관심, 그리고 과도한 자극을 피하는 데서 비롯된다. 교회가 주변의 변화하는 문화만큼 유행에 빠지고 흥분한다면, 교회는 참으로 독특한 무엇인가, 즉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 안정된 확고함을 제공하는 능력을 잃을 것이다. 마치 스토트의 “이중 거부”가 피하려고 하는 또 다른 함정을 예상이라도 하듯이 웹스터가 말한다. 물론 교회는 세상이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질 것이다. 정중하고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자기중심적이고 반응이 없는 일종의 긴장증에 빠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도피주의자의 후퇴란 있을 수 없다! 웹스터의 요점은 신실한 교회가 세상의 말을 들을 때 “세상이 떠드는 내용에 매료되거나 압도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복음은 우리를 매료시키고 우리를 모든 것으로 채워 준다. 예수에 집중하기웹스터의 말이다. 복음은 언제나 세상을 능가한다. 예수님 자신은 세상보다 더 권위 있고, 합법적이며, 승리적이고 또 흥미롭게 말씀하신다. 교회가 정말로 세상을 사랑한다면, 교회는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표현을 듣기 위해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복음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복음을 잘 듣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을 돕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이중 경청이 끝없이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말씀을 다 들었으니까 이제는 세상과 소통하면 되겠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쉬지 않고 말씀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배워야하고 또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향해서 진리를 드러내는 길이다. 어쩌면 세상은 후기 현대, 포스트모던, 후기 자본주의, 세계화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는 우리가 지금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고백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와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곳에 머물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에게 이미 성취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제시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분은 자신에게는 마땅한 권리이자 우리에게는 성취가 되는 순종을 기대하신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가볍고 찰나이다. 그러나 말씀은 무겁고 영원하다. 이중 경청이 가능하려면 말씀에 일시적인 우선순위를 두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꾸준히 말씀을 파고 또 파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바라본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참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말씀을 가져간다는 의미이다. 원제: A Crucial Reminder for ‘Double Listen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 없음의 유혹
by Trevin Wax
2023-12-23
유혹 하면 보통 마음을 끌어당기는 특정한 태도와 행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유혹받는 게 뭔지 잘 안다. 분노를 터뜨리는 것, 음란한 환상에 탐닉하는 것,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또는 내가 당한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그러면서 연민에 빠져서 쓰라린 자아의 뿌리를 키우는 모습 등이다. 유혹이라고 하면 보통 죄를 생각한다. 또한 이기적인 충동을 떠올린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진리로 죄와 유혹에 맞서 싸우기를 소망한다. 간과된 유혹특정한 죄에 대해서 선하고 경건하게 저항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가 행여라도 정작 훨씬 더 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혹, 이기심의 더 깊은 근원이자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심각한 유혹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이 유혹은 다른 모든 죄악의 중심에 있으며, 개인 차원의 죄나 사소한 태도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하나님 없음의 유혹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또한 하나님에 관한 특정 성경 가르침을 부인하는 영적 또는 종교적 사람들에 관한 것도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일상생활과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삶, 그래서 우리의 창조주를 아예 언급하지 않고 살고 싶어 하는 유혹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그는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자 저자를 내가 직접 쓰는 이야기의 각주로 축소한다. 이런 유혹을 “하나님 없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그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현실 대부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 부재점점 더 세속화되는 사회에서 이 문화를 정의하는 것은 죄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이다. 우리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건설하고, 하나님을 주변으로 몰아낸다. 그래서 하나님은 삶의 가장자리 여기저기를 떠돌며, 필요할 때 치료를 공급하거나 고난받을 때 위로의 원천 정도로만 소환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게 아니라면, 나와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안전하게 안주하며 내 일상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기를 원한다. 종종 개인적이자 사적 종교라는 감옥에서 하나님을 내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언제나 우리가 만든 조건에 부합할 때이다. 이제 우리는 나를 괴롭히고, 자유를 침해하고, 또 욕망을 방해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안전하다. 이것은 세속 시대의 삶이 직면한 큰 유혹이다. 아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편한 대로 만들어 저기 어딘가 내놓은 존재로 인식하면서 살고 싶은 유혹이다.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유혹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살아가는 이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러나 스포트라이트가 정작 우리를 비췰 때 눈을 가려서는 안 된다. 이 유혹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부재를 당연시하며 사는가? 전능한 ‘내’가 내 생각과 열망의 중심에 있는 진짜 위대한 ‘나’를 얼마나 자주 밀어내는가? 우리의 예배, 모임과 외출, 봉사와 사역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실제적인 고려가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세속 시대 교회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각종 활동으로 바쁘고 싶은 유혹에 항상 직면한다. 문제는 그 하나님이 사실상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일상적인 기독교 용어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조를 암송한다…. 단지 기능적 세속주의자로서.기도하지 않음우리가 하나님을 잊거나 무시하려는 유혹에 굴복했다는 가장 분명한 신호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라진 기도야말로 내 가면을 벗기고 나의 자급자족 정신을 드러낸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현실 세계”를 권력, 정치, 일과 여가, 심지어 사역의 중심으로 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결과 우리는 교회라는 영적 영역과 세상의 거칠고 험난한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을 받아들였다. 한편,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분, 즉 우리가 가진 위대함과 자립이라는 환상을 벗겨내시는 하나님은 옆으로 제쳐둔다. 우리가 진짜로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안다면, 그래서 나를 부르신 분을 의지하지 않고는 길이 없음을 진정으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조용한 절망 가운데에서 그분이 함께하심을 갈구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고 또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하얀 불빛 같은 거룩하심과 함께 다가오는 부드러운 손길의 신선함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하나님을 옆으로 밀어내기세속 시대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가져다준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변으로 밀어낼수록 우리는 더욱 더 중심 무대에 선다. 이제 중요한 건 오로지 인간의 활동이다. 우리의 목표와 열망. 우리의 전략과 기술. 우리의 목적과 계획. 영원하신 분이 단지 보조 역할에 그치기에, 우리는 이제 영원이란 관점을 잃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정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것들은 이제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 숨겨져 있다.뜨거운 기도의 부재로 드러나는 하나님 밀어내기, 이것은 확실히 우리 시대가 직면한 가장 큰 유혹이다. 원제: The Temptation We Most Often Overloo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C. S. 루이스가 남긴 마지막 글: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
by Trevin Wax
2023-12-16
이전에 쓴 칼럼 둘(아메리칸드림은 저절로 불이 켜졌을까?와 자유와 한계, 행복에 대한 ‘권리’)에서 나는 아메리칸드림, 행복 추구,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하는 자유를 살펴보았다. C. S. 루이스는 1963년 사망하기 직전에 Saturday Evening Post에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라는 논평을 기고함으로써 마지막 글을 남겼다. 이 짧은 글은 영원한 법칙에 대한 순종과 ‘행복’의 분리라는 문제, 그리고 나아가서 ‘성적인 행복’이라는 권리를 추구함으로 인해서 행복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뿐 아니라, 결국에는 인류 문명의 본질까지 필연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 준다. 다음은 루이스의 글 전문이다. C. S. 루이스: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중요한 건 말이지요. 그들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라고 클레어가 말했다. 우리는 이 동네에서 언젠가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A는 B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버리고 이혼했고, B도 A와 결혼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이혼했다. A와 B가 서로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 둘의 사랑이 변하지 않고, 또 건강이나 수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들이 앞으로 매우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 두 사람이 과거 배우자에게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도 똑같이 분명했다. B의 경우에, 그녀는 한 때 남편을 아주 사랑했다. 그러나 남편은 전쟁에서 몸이 망가졌고, 그 결과 남자로서 능력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직장까지 잃고 말았다. 그런 남자와 함께 사는 삶은 애초에 B가 원했던 게 아니었다. 불쌍한 건 A의 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외모가 망가졌다. 더불어서 한때 밝게 빛나던 활력도 없어졌다. 여러 번의 출산과 또 오랫동안 A를 간병하는 중에 그녀의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졌다는 사람들의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그렇다고 A가 마치 단물 다 짜 먹은 마른 오렌지를 내다 버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를 저버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녀의 자살은 그에게도 끔찍한 충격이었다. 우리 모두 그 점을 모르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언젠가 직접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그가 말했다.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잖아? 딱 한 번 오는 기회인데, 나는 그걸 놓칠 수 없었어.” ‘행복할 권리’라는 건 도대체 뭘까? 나는 그날 ‘행복할 권리’라는 말의 개념을 생각하면서 그와 헤어졌다.얼핏 보면, 이 말은 마치 행운을 누릴 권리만큼이나 이상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저런 도덕주의 학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관계없이, 행복이나 불행이란 건 인간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무언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게 행복할 권리라는 말은 내 키가 180이 넘는 권리, 백만장자를 아버지로 갖는 권리, 소풍 가는 날에는 항상 날씨가 좋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나는 사회의 법으로 보장되었다는 측면에서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이 사회가 자유를 주기에, 나는 공공 도로를 사용해서 여행할 권리를 가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로에 “공공”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이유이다. 나는 또한 권리(right)를 법이 보장하는 요구이자 그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지워지는 의무로도 이해한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백 달러를 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건 당신이 내게 백 달러를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A가 아내를 버리고 이웃의 아내를 유혹하는 것을 법이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엄밀히 말해서 A에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있다는 것뿐이지, 거기에 무슨 행복이니 하는 말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행복과 자연법물론 지금까지 말한 게 클레어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는 법적 권리뿐 아니라 도덕적 권리도 있다는 게 클레어의 말이었다. 즉, 클레어는 토마스 아퀴나스, 그로티우스, 후커, 로크의 스타일을 따르는 고전적 도덕주의자이다. 물론 그건 그녀가 자기 말을 곱씹었을 때 그렇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국가가 보장하는 법 뒤에 자연법이 있다고 믿고 있다.나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 개념은 모든 문명의 기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없다면, 국가의 실정법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된다. 판단할 기준이 없기에 비판도 할 수 없게 된다. 클레어의 격언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의 유래는 8월 선언(the august declaration)이다. 모든 문명인, 이건 특히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말로, 인간의 권리 중 하나가 아예 “행복을 추구할 권리”로 규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진짜 요점에 도달했다.8월 선언을 만든 사람들은 그럼 무슨 의미로 쓴 것일까? 자연법의 의미그들이 의미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인간이 아무리 행복하고 싶더라도 살인, 강간, 강도, 반역, 사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아예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의미는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법이 궁극적으로 승인하고 나아가서 국가의 법까지 승인하는 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보기에 따라서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권리를 가지는 한도 내에서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식의, 격언의 원래 의미를 축소하는 동어반복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적절한 역사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동어반복이 항상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은 아니었다. 이 선언의 핵심은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해 왔던 정치 원칙을 부정하는 데에 있다. 그 도전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 개혁 법안 이전의 영국, 그리고 부르봉 프랑스에 던져졌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수단이 누구에게나 합법적이어야 하며 특정 계층, 계급, 지위 또는 종교의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어느 나라에서도 또 어느 당에서도 이 사실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세기였던 만큼, 이것을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이라고 치부하지 말자. 그러나 어떤 수단이 “합법적”인지, 즉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자연법에 의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지 또는 특정 국가의 입법부에 의해 법적으로 허용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나는 클레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무제한의 “행복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확실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성적인’ 행복우선 나는 클레어가 ‘행복’이라고 했을 때, 그건 아주 단순한 ‘성적인 행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클레어와 같은 여성들이 결코 다른 의미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클레어가 다른 종류의 “권리”에 관해서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치에 있어 다소 좌파적인 그녀이기에 만약에 누군가가 오로지 돈을 버는 데에서만 행복을 찾는 무자비한 살인마 재벌이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그녀는 분명히 크게 분개했을 것이다. 그녀는 또한 광적인 금주론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술에 취하면 행복하기에 알코올 중독자로 산다는 사람을 변명하는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다.클레어의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 특히 여자 친구들은 말 옮기기 좋아하는 클레어의 귀를 틀어막으면 자신들의 행복이 눈에 띄게 커질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자, 클레어가 과연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그녀의 이론에 친구들의 이런 바람까지도 적용할까? 내 생각에는 그러지 않을 거다. 사실 클레어는 지난 40여년 동안 서구 세계 전체가 하던 일을 그대로 반복했을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모든 진보 진영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거야? 다른 모든 충동을 다루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섹스를 다루자고”라며 말하곤 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그들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나는 그들이 사실상 정반대의 의미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문명이 다루는 인간 본성의 다른 모든 충동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섹스 충동이 다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충동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다 인정한다. 자기 보호 본능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는 비겁함이라고 부른다. 다 가지고 싶은 충동은 탐욕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경계를 서는 보초라면 자고 싶은 충동도 참아야 한다. 그러나 목표가 오로지 “침대 위 벌거벗은 네 개의 발”로 바뀌는 순간, 모든 불친절과 믿음의 배신까지도 얼마든지 용납되는 것 같다. 이건 마치 과일을 훔치는 게 잘못된 일이지만, 그게 복숭아인 경우에는 괜찮다는 식의 이상한 도덕성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이런 견해에 항의하는 사람은 아마도 “성”의 정당성과 아름다움, 신성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성을 나쁜 무언가 또는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청교도의 편견을 품고 있다는 비난까지 받을 것이다. 나는 이런 혐의를 부인한다. 거품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 황금의 아프로디테… 키프로스의 성모…. 나는 당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복숭아를 훔치는 소년을 반대한다고, 내가 복숭아 전부를 반대하는 걸까? 아니면 소년들 전부를 다? 내가 반대하는 건 단지 도둑질일 수도 있다.성적 충동과 터무니없는 특권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A에게 아내를 버릴 ‘권리’가 있는가를 일종의 ‘성도덕’에 관한 문제 중 하나로 간주함으로 실제 상황을 교묘하게 은폐하는 것이다. 과수원 강탈이 ‘과일 도덕’이라는 특별한 도덕에 대한 위반이 아니다. 이는 정직성에 대한 위반이다. A의 행동은 (엄숙한 약속에 대한) 선의, (깊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감사 그리고 공통되는 인간성에 대한 위반이다.따라서 오늘날 성적 충동은 터무니없는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놓여 있다. 성적 동기가 포함되는 순간, 다른 경우에서라면 무자비하고 비열한 배신이며 불의하다고 비난받았을 모든 종류의 행동까지도 다 용인되는 게 현실이다. 나는 섹스에 이런 식의 특권을 부여할 타당한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거기에는 강력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것이다.성 충동은 강하고 에로틱한 열정이라는 본질을 가진다. 이것은 일시적인 식욕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무엇이다. 그렇기에 다른 어떤 감정과는 달리 더 큰 약속을 하도록 만든다.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욕망은 무슨 약속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게 대단한 건 아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계속 사랑할 것이라는 거의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을 포함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한다는 사실은 또한 빈번한 황홀경 뿐만 아니라 안정되고 결실을 맺으며 뿌리 깊은 평생의 행복까지 얻을 것이라는 거의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이 경우에 모든 것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는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남은 인생을 헛되게 살 거 같은 위기감마저 느낀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자기 연민에 빠진다. 불행하게도 이런 사랑의 약속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어른이 되면 성적인 열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잘 안다. 우리는 친구들이 떠버리는 사랑에 대한 끝없는 허세 정도는 아주 쉽게 무시한다. (물론 자신이 느끼는 건 제외하고) 우리는 그런 사랑이 지속될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까지 사랑한다고 해도 그게 꼭 시작할 때 했던 약속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두 사람이 지속적인 행복을 얻은 건 그들이 꼭 훌륭한 연인이어서가 아니라, 좀 거칠게 말하면 (이런 표현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 그러니까 스스로 통제하고, 신실하고, 공정하고, 상호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행동의 모든 일반적인 규칙을 대체하는 수준으로까지 “(성적인) 행복에 대한 권리”를 확립한다면, 그건 평소의 경험이 그 사실을 증언해서가 아니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 열정에 빠져 있는 동안에 그것을 한 없이 소중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쁜 행동은 실제로 비참함과 타락을 가져오지만,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행복이라는 대상은 여전히 환상으로 남을 뿐이다. A와 B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일 년 정도 지나면 A가 옛 아내를 버렸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B를 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또 인생의 전부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한 번 더 진짜 사랑이 필요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A가 자신을 향해서 느끼는 동정심은 그로 인해서 불행해질 여자를 향한 마음이 조금도 없기에 가능하다. 성적인 행복 위에 세워진 사회살펴볼 게 두 가지 더 남았다. 하나는 이것이다. 부부간 불륜이 용인되는 사회는 결국 여성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몇몇 남자들의 노래와 풍자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여자는 천성적으로 남자보다 일부일처제를 지향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필요가 만든 결과이다. 따라서 난잡한 행위가 만연한 곳에서 여자는 주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또한 가정의 행복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필요하다. 여자가 남자를 쉽게 사로잡았던 바로 그 특성, 여자의 아름다움은 성숙함을 지나면서 매년 감소한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여자로 생각하도록 만든 내적인 특성에 있어서는 그 어떤 감소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하나 기억할 건, 남자의 외모에 관해서 여자는 단 십 원어치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무자비하고 난잡한 전쟁에서 여자는 이중의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아무리 더 높은 지분을 위해 싸운다고 해도 여자는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점점 더 야박해지는 여자들의 도발에 눈살을 찌푸리는 도덕주의자를 나는 동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두 번째로, ‘행복에 대한 권리’가 주로 성적 충동에 대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단지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리 치명적인 원리라고 해도 일단 특정 분야에서 자리를 잡는다면, 그건 조만간 우리 삶 전체에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각 개인 뿐 아니라 각자가 느끼는 모든 충동에까지도 백지 위임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우리가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그 중심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라는 부사를 덧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다. 원제: C. S. Lewis’s Last Written Word: We Have No Right to Happin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시편으로 자녀에게 감정의 소중함을 가르치라
by Courtney Reissig
2023-12-12
벤 사스는 The Vanishing American Adult(사라지고 있는 미국 어른)에서 회복력이 뛰어난 아이들로 키우는 사례를 제시한다. 그는 인내, 노력, 고난을 배우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이야기한다. 이 책은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는 내내 장기간 관찰한 연장된 사춘기에 대한 대응과 함께 미국에 필요한 다음 세대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이들이 회복력을 키우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스의 말에 동의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회복력을 목표로 하는 순간,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탐색하도록 어떻게 도울까에 관한 질문이 필연적으로 제기되며, 거기에는 우리가 쉽게 빠지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하나는 어려운 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예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너진 이 세상 때문에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힘들 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려고 한다. 반면에, 자녀가 부서진 내면을 가지고 살기를 원치 않는 부모는 무심코 자녀들이 감정을 꾹꾹 채우게 만든다. 그러나 정서적 회복력을 가진 자녀를 키우는 보다 나은 방법은 성경에 있다. 우리는 좋은 때나 나쁜 때나 자녀에게 감정을 가르치는 데 시편을 활용할 수 있다.감정은 좋은 것이다하나님은 감정을 지닌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고통과 슬픔, 설렘을 느낀다. 이 모든 감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 대해 뭔가를 말해 준다. 때때로 감정은 무언가를 하라고 지시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큰 개에게 겁을 먹고 도망가기도 한다.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사랑처럼, 감정이 소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불안감이나 압도감과 같은 감정은 우리의 한계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자녀로 하여금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좋은 것임을 인식하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다.“슬프다”라고 말하는 자녀에게 그 즉시 등을 두드리며 입에 발린 말로 격려하지 말고, 시편을 가르치라. 너와 똑같이 슬퍼했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슬픔에 신실하게 귀를 기울여 주셨다는 사실을 시편으로 가르치라. 시편에는 구약성서의 서사와 평행을 이루는 내용이 많으며, 따라서 성경 속 인물들의 영혼을 엿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우리는 배반을 말하는 다윗을 시편에서 만난다(55편). 짧은 인생의 허무함을 알려 주는 모세의 글도 있다(90편). 그리고 의심과 환멸을 겪는 에스라 사람 헤만을 본다(88편). 시편은 한 마디로 구약의 신자들이 자신의 어려움, 감정, 시련, 의심을 하나님께 드러내고 기도한 내용을 모은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서 부모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보여 주는 모델로서 시편 앞으로 자녀를 데려갈 수 있다.감정이 반드시 죄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탐닉해서도 안 된다. 때때로 감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친구의 새 장난감이나 운동 경기의 성공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낄 수 있다. 느낌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 말라.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죄(탐심)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 주라. 질투심을 결코 슬프거나 행복한 감정과 똑같이 간주해서는 안 된다. 시편 4:4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짓지 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시편 시인은 우리에게 아예 화를 내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분노하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죄에 굴복하지 않으며 화를 내는 방법, 곧 온전히 느끼면서도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이 있다. 시편 시인은 감정이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자녀가 분노든 또는 비슷한 과도한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이 자신을 죄로 이끄는지 물어 보고, 그렇다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치라. 시편 51편은 회개의 모델을 제시한다. 감정은 나눌 수 있다시편 4:4이 분노를 마음에 담더라도 잠잠하라고 말하지만, 다른 시편에서는 주님께 마음을 쏟아붓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시편이 고난 중에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이다. 시편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개인 기도도 있지만, 적지 않은 내용이 집단이 부르짖는 기도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울부짖으며 회중으로서 겪는 고통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제심을 발휘하는 한도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은 얼마든지 성경적이다. 자녀에게 감정을 가르칠 때, 그들의 감정을 듣고 싶어 하며 또 믿을 수 있는 친구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모든 감정을 주님 앞으로 가져가야 한다. 감정을 항상 믿어서는 안 된다 시편 73편에서 우리는 악인의 형통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돌보심을 의심하려는 유혹을 받는 시인을 만난다. 그는 시기와 탐욕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강렬한 느낌이다(22절). 그는 거의 미끄러질 뻔하였다(2절). 내내 신실하게 행하던 그가 거의 실족할 뻔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자신의 감정을 주님께 가져갔을 때 그의 마음과 관점이 바뀌는 것을 본다. 자신의 감정을 믿고 싶은 유혹을 받는 자녀에게 시편 73편 같은 시편을 읽게 하라. 자녀가 이 부서진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가르침과 동시에 오로지 감정만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개념에 당당히 맞서도록 가르치라.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자신만의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내 솔직한 기분이었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존중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패한 게 마음이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한다(예. 17:9-10). 감정을 믿는 순간 우리는 감정에 속아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것이다. 진리의 표준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라. 우리의 모든 감정까지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감정이 우리를 배신할 때가 있다. 행여라도 감정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지 우리는 수시로 감정을 성경과 비교해야 한다.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다면, 그건 결국 우리를 배반한다는 말이다. 자녀에게 더 나은 길을 보여 주라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에는 자녀의 눈에 마치 감정만이 유일한 실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감정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그들을 이끌 수는 없다. 그들이 감정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장점을 가르침과 동시에 그 감정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는 타락한 감정을 지닌 존재로 존재하는 현실까지 모두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삶에서 감정의 위치를 인정하고, 더불어서 죄에 대한 충동과 어떻게 싸우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얼마든지 자녀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타당성을 분별할 자격을 가진다. 우리 문화는 감정에 대해 두 가지 옵션을 제공하는 것 같다. 감정을 항상 신뢰하거나, 아니면 아예 감정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둘 중 어느 쪽도 진짜 회복력을 가진 아이들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건전한 방법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시편을 지침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더 나은 방법을 보여 주라. 그것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올바르게 느끼도록 가르치기 위해 성경 전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이다. 원제: Use the Psalms to Teach Kids About Feeling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손편지의 온기
by 양혜원
2023-12-11
예쁜 카드나 엽서를 보면 사는 것도 좋아하지만, 거기에 몇 자를 적어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도 좋아한다. 간단한 안부든, 감사의 표현이든, 생일 축하든, 크리스마스나 신년 축하든, 비록 글씨는 잘 못 쓰지만, 그래도 직접 손으로 써서 봉투에 담아 어울리는 스티커 하나 장식으로 붙이고, 주소를 적어 우체국의 손을 거쳐 상대에게 보내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나면 제법 마음이 훈훈해진다. 지난가을에는 처음으로 일본어로 그런 감사 엽서를 교토 어느 카페의 여사장에게 적어 보냈다. 교토의 가을을 노래하는 친구의 꼬임에 짬을 내어 조금 긴 주말의 형식으로 짧게 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그때 교토의 어느 절 근처에서 다리를 쉬기 위해 들어간 카페의 사장은 마실 것도 몇 개 없는 메뉴가 전혀 허전하지 않게, 카페라테의 거품을 직접 내와 풍성하게 얹어 주고 교토의 다과라며 서비스도 주고, 지도를 펼쳐 보이며 근처에 가볼 만한 곳들을 소개해 주었다. 볼펜으로 경로를 표시해 주면서, 다리는 튼튼하냐, 튼튼하다면 여기까지 한 50분 걷는데 가 볼 만하다는 둥, 상대의 연령대를 감안하는 듯한 세심한 안내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별다른 간섭없이 편하게 커피를 마시고 경치를 감상하다 가게 해 주었다. 적절하게 다가가고 적절하게 물러나는 그 주인의 손님 접대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 여운 또한 길었다. 받아온 지도에 마침 그 카페의 이름과 주소가 도장으로 찍혀 있기에, 나중에 기억할 요량으로 보통은 현지 여행이 끝나면 버리고 오는 지도를 한국까지 챙겨서 왔는데, 아, 주소가 있으니, 카드도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마침 교토에서 산 가을에 어울리는 엽서가 있었고, 새로 산 잉크 펜도 있었다. 일본에서 알게 된 지인들과 말은 짧은 일어로 해도, 편지나 카드를 보낼 때는 영어 아니면 한국어로 썼었기에, 일본어 편지는 처음이었는데, 볼펜과는 다르게 새로 산 잉크 펜으로 일본어를 쓰니 글씨가 제법 그럴듯하게 써졌다. 그때 참 고마웠다, 당신이 안내해 준 곳도 가 보았는데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거품 폭신한 카페라테 마시러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쓰고는, 봉투를 봉하고, 스티커를 붙이고, 우체국에서 떠나보냈다. 그 여사장이 이 엽서를 제대로 받았을지 어땠을지, 받고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환대에 이렇게 반응함으로써 내 나름으로는 한편의 마음이 아니라 주고받는 마음이 되고 싶었다. 카드를 쓰는 즐거움은 일찍이 십대 시절에 터득했다. 크리스마스를 유난히 좋아해 11월 말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놓고 누구에게 카드를 보낼 것인지 리스트를 만들고 선물은 누구에게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십대 초반을 영국에서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장식부터 선물 아이템까지 일찍이 가게와 거리를 장식하는 통에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쉬웠지만, 우편물이 몰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에 카드가 한국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나의 크리스마스는 일찍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안에 우편물이 도착하려면 언제까지 발송해야 하는지 날짜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카드를 부치기 위해서 일찍부터 리스트를 만들고 카드를 준비하고 카드 메시지를 썼다. 나의 카드 쓰기는 크리스마스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누군가의 생일에는 생일 카드를 썼고, 그 외에 편지도 수시로 썼다. 사실 핸드폰도 없고, 전화기도 한 가정이 하나를 쓰던 시절을 살았던 우리 세대에게 편지로 그간의 일을 전하고 상대에게 하고픈 말을 하는 것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학보를 보내는 것으로 안부를 전하는 풍습도 있었다. 중학교 이후 소식이 끊긴 친구로부터 어느 날 대학교 과사무실로 그가 보내온 학보를 받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학보를 감싼 하얀 띠지는 편지지와 봉투의 역할을 다하여 겉에는 주소가 적히고 뜯어서 펼치면 안에 편지글이 있었다. 대개는 간단한 인사말 정도였지만, 그래도 이런 우편물을 받으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주었다는 기분이 들어 하루 종일 마음이 따뜻할 수 있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도 더는 편지도 카드도 쓰지 않은 시절이 오고 나서도 나는 제법 꾸준히 카드도 쓰고 편지도 썼다. 물론 그 대상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문자와 이메일이 주된 소통 수단이 되고 나서는 손으로 쓴 카드나 편지는 아무래도 좀 특별한 계기나 대상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 또한 40대로 들어서면서는 그나마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크리스마스카드를 미리 챙겨 해외로 대량 발송하는 일도 없어졌다.그러다가 카드를 보낼 사람의 리스트를 다시 짜게 된 것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본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지낼 때였다. 카드라기보다는 사실 연하장이었는데, 일본의 큰 명절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신년이었고, 그때 일본 사람들은 카드가 아닌 엽서 형태의 연하장을 인사로 주고받았다. 일본에서 산 지 1년 정도 지나면서 나에게도 친구와 지인들이 생겼기에 그곳에서 생긴 인연들을 챙기면서 나는 연하장을 준비해 보냈고, 그들도 내게 연하장을 보내주었다. 비단 연하장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내가 다니는 길목에 우체국이 있어서도 그랬지만, 일본 문화 전반에 아직도 편지 쓰는 관습이 남아 어딜 가나 쉽게 이쁜 편지지와 엽서 등을 접할 수 있어서 일본 사는 동안 한동안 잊었던 편지 보내는 습관을 다시 붙여 부지런히 이 나라 저 나라의 지인에게 우편물을 보냈다. 이제 긴 편지는 쓰기 어렵게 되었어도, 이쁜 카드나 엽서에 제법 빽빽이 적어 보냈다. 이 재미가 쏠쏠했는데, 귀국하자마자 맞닥뜨린 코로나 기간 아주 비싼 특급 우편 외에 일반 우편물을 해외로 보낼 수 없다는 게 내게는 매우 답답하고 힘든 일이었다.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에서는 해외로 비싼 특급 아니면 일반 우편은 아예 부쳐주지를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우편물이 왔다. 연하장을 보내준 은퇴하신 여교수님도 있었고, 엽서와 기념품을 정기적으로 챙겨서 보내주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받기만 하고 보내지를 못해, 문자로, 이메일로 고맙다, 아직 한국에서는 우편물을 부칠 수가 없어 안타깝다 메시지를 보내며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문자도 보낼 수 있고, 이메일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줌으로 얼굴도 볼 수 있었지만, 인간 대 인간의 접촉을 최대한 자제해야 했던 시절에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좋은 기분이 며칠간 이어질 만큼 훈훈한 일이었다. 편지 쓰기를 자제해야 했던 그 시절에 딱 한 번 특급 우편을 보낸 일이 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내가 유일하게 반송을 받은 편지가 되었다. 수신인은 작고한 유진 피터슨의 아내 잰 피터슨이었다. 2018년 10월, 일본에서 유진 피터슨이 작고한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의 책을 열두 권 번역했고, 2012년에 몬태나에 있는 그의 집에도 방문하여 하룻밤을 머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유진과는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사적인 대화는 잰과 더 많이 했던 거 같다. 둘째 아들이 막 이혼의 아픔을 지나고 새로운 출발을 했을 무렵이라 그런지 나에게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도 물었고, 나의 스스럼 없음이 편했던지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는 말도 해 주었다. 혹시 잰은 글을 쓰지 않냐고 물었더니, 꾸준히 써온 일기가 있다며 주변에서 출판하라는 말도 한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나 또한 꼭 출판해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을 떠나기 마지막까지 유진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나는 늘 유진과 잰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와서 어느 정도 정착이 된 후에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처음으로 답장이 없었고, 그로부터 1년 후 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마음은 당장 잰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 아,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를 기억하는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큰마음 먹고 몇만 원짜리 특급 우편으로 그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남편이 작고했으니, 여전히 몬태나의 그 집에 그가 살고 있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 집의 내력을 생각할 때 어떻게든 편지가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 편지가 반송되었을 때, 한편으로는, 그래 내가 너무 늦었지,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쩐지 내 마음을 거절당한 것 같아 조금 슬프기도 했다. 내가 그 편지를 보냈을 때 그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내가 만났을 때의 잰은 유진과 달리 여전히 힘이 있어 보였기에 나는 그가 이디스 쉐퍼처럼 남편을 먼저 보내고도 그 후로 오래 살면서 책도 쓰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가고 불과 8개월 만에 그도 갔다는 것이다. 수취인불명이라더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에게 보낸 이 편지는 정말로 수취인불명인 채로 발신인에게로 돌아와 버렸다. 나의 편지쓰기가 조금 이례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는 사실 매우 친숙한 매체이다. 알다시피 신약 성경의 태반이 편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편지처럼 개인 대 개인 사이의 글은 아니지만, 불특정 다수를 위해 쓰는 소설과 같은 장르의 글과 달리, 편지는 수신인이 있고, 그 수신인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이다. 하지만 분명한 수신인이 있다고 해서 의도대로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 또한 편지의 특징이다. 편지는 우편 사고로, 혹은 나의 경우처럼 상대가 사망해서,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못할 수 있다. 제대로 전달된다고 해도 내가 전하고자 한 마음 그대로 수신인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사실은 없는 게 편지이다. 자기 나름으로는 정성스레 쓴 편지가 상대의 손에서 찢겨버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만난 적이 없는 로마의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가 제대로 그들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얼마나 확신할 수 있었을까. 다른 서신서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빌레몬에게 쓴 편지의 경우도, 감정적으로 제법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오네시모와 빌레몬과 바울의 관계에서 과연 이 편지는 그 필자가 의도한 대로 전달자와 수신자 사이를 화해시킬 것인지, 그것은 제법 권위 있게 비치는 바울조차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선의처럼 빌레몬의 선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그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달력이 12월을 넘기니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아,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 이다. 그와 동시에 몇 명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직장을 옮기면서 7월부터 유례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늦기 전에 짬을 내어 새로 산 잉크 펜을 들고 ○○에게, 혹은 ○○께와 함께 시작하는 카드 편지를 몇 장을 써야 할 것 같다. 지금도 서랍에는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온 카드 편지가 봉해진 그대로 남아 있다. 제대로 도착할지 받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 손을 떠난 보낸 편지의 운명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온기를 전하는 한쪽 편의 일은 하고 싶다. 원래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선의(good will)가 당신과 함께한다는 좋은 소식(good tidings)을 전하는 시즌으로 오랫동안 교회는 지켜 왔다. 이 소식을 받는 사람의 반응과 상관 없이 전하는 사명을 받은 것도 교회이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선의가 함께하시기를, 그리고 그 선의의 온기도 계속 전해 나가시길 빈다.
문화 참여에 필요한 네 가지 ‘R’
by Trevin Wax
2023-12-07
Mere Orthodoxy에 실린 브래드 이스트(Brad East)의 에세이 “한 번 더, 교회와 문화”는 올해 나온 글 중에서 가장 통찰력이 번뜩인다. 이 글은 기독교왕국(Christendom, “사회, 문화, 법률, 예술, 가족, 정치 및 예배가 교회의 영향력으로 포화되고 교회의 권위에 의해 정의될 때 기독교 문명에 부여하는 이름”)의 흥망성쇠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그리고 1951년에 처음 출판된 리처드 니버의 고전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시 살펴본다. 그리스도와 문화니버는 그리스도인이 주변 문화와 관련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기준을 개신교인에게 제시했다. • 문화에 반대하는 그리스도 • 문화의 그리스도 • 문화 위의 그리스도 • 역설 속의 그리스도와 문화 • 문화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니버의 분류법에 대한 개요는 내가 쓴 요약 및 비평을 참조하라.)이스트는 미국 상황을 표준 규범으로 가정하는 한 교회와 관련해서 이런 식의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사고방식은 힘들다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비판은 돈 카슨이 니버의 작업을 재검토한 지점과 일치한다. “모든 것에 다 들어맞는 하나의” 사고방식을 반대하는 카슨은 성경이 각기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다른 요소를 옹호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사면초가에 시달리고 억압받는 북한의 신도들에게 “문화를 변혁하는” 자세를 취하라고 말하는 게 말이 되는가?”)신실한 존재? 이스트는 계속해서 교회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다른 유형을 찾아낸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의 To Change the World도 그중 하나다. 헌터는 (1)방어력(Defensive Against), (2)적실성(Relevance To), (3 순결성(Purity From)이라는 세 가지 용납할 수 없는 접근 방식을 설명한 다음에 대안으로 (4)내부의 신실한 존재(Faithful Presence Within)라는 방식을 제시한다. 헌터는 신실한 존재가 대사명에 대한 순종일 뿐 아니라, 긍정과 대조를 모두 포함하여 문화에서 선하고 진실하며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우상 숭배적인 것은 무엇이든 전복시키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스트는 헌터의 작업을 인정하지만, 거기에는 네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1. 충분히 글로벌하지 않다. 미국이라는 맥락에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2. 충분히 역사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세속성 정착을 교회 역사에서 만나는 예외가 아니라 표준이라고 가정한다. 3. 충분히 폭넓지 않다. 중상류층과 관련된 전문직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므로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적용을 회피한다. 4. 충분히 경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금지된 기관과 직업에 대한 경계선을 제대로 긋지 않으므로 예리한 모순이 요구되는 미묘한 삶의 영역을 놓치고 있다. 앞에 놓인 더 나은 길이스트는 우리가 니버와 헌터 및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건 오로지 하나의 “올바른” 유형, 자세 또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고집을 포기할 때만 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교회가 문화에 충실하게 참여하는 네 가지 주요 방식이 있다.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중복되고 본질적으로 서로 비경쟁적이다. 어떤 방식이 필요한가는 전적으로 콘텍스트와 콘텐츠에 달려있다. 교회가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같은 공동체에 있든, 다른 공동체에 있든, 더 큰 교회의 개별 구성원에 있든, 모두가 동시에 작동한다.”이스트의 작업이 가진 장점은 폭이다. 우리는 전근대와 포스트모던, 확립된 것과 해체된 것, 특권을 가진 것과 박해받는 것 등 가능한 모든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각각의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그는 네 가지 방식을 네 개의 R로 요약한다. 1. Resistance(저항)“언제 어디서나 불의와 우상 숭배가 발견되는 곳에서 교회는 저항하도록 부름받았다. 교회가 목소리를 높일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적 명성이 있든 없든 그렇게 해야 한다. 교회는 현존하는 권력에 ‘반대’하거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 정권이 그리스도인에게 우호적일 때에도, 심지어 정권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적이라고 할 때도, 저항이라는 과업은 필요하다. 저항은 다년생이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순전한 인내뿐이다. 때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2. Repentance(회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교회가 저지르는 죄와 범죄, 실패를 회개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즉, 교회가 보편적으로 저항해야 하는 불의와 우상숭배는 무엇보다도 교회 외부가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확실하게 발견된다. 심판은 하나님 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여기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리스도 자신의 몸에서 발견되는 부패와 사악함을 ‘거스르며’ 또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상태로 살라는 뜻이다. … 복음의 신뢰성이 교회의 실패 때문에 위협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리어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더 끔찍한 경우는 그 부패를 은폐하려는 태도로 인해서 복음의 신뢰성이 위협받는다.” 3. Reception(수용)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많은 축복을 받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창조한 세상은 선하다. 그리고 오로지 그분만이 모든 민족과 모든 문화의 주인이시다. … 간단히 말해, 세상은 결코 기독교 신앙에서 근원을 찾을 수 없는 중요한 지식과 귀중한 유물로 가득하다. (물론 궁극적인 근원은 바울의 말 대로 그리스도이다.) 신자들은 결코 순진하거나 무비판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러한 경우에도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전에 겸손히 손을 내밀어 받아들이는 것이다.”4. Reform(개혁)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말씀인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포괄적이다. 그것은 마음과 지성, 몸, 영혼에 다 전달된다. 말씀은 농민과 하인의 문제뿐 아니라 상인과 치안판사의 문제도 다룬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정의를, 민족들 가운데 정의를 명령한다. 거기에는 분리의 벽이 없다. 삶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곳에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복음은 한 마디로 개혁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한 관점에서 사물이 있는 방식 안에 새로운 조정을 생성한다. … 때와 장소가 적절할 때,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이뤄지는 복음 선포는 문화를 뼛골까지 잘라낸다. 그럴 때 문화는 결코 더 이상 동일할 수 없다. 심지어 그 후로도 문화는 절뚝거리며 걷는다.”이스트의 제안은 니버 및 헌터의 분류법을 단일 모델로 축소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강점을 취한다. 그는 문화적 조건이나 역사적 상황과 상관 없이 실행 가능한 한도 내에서 모든 적절한 방법을 다 고려하라고 촉구한다. 나는 특히 오늘날 전 세계 교회에 적용이 가능한 방법을 찾도록 격려하고 또한 역사를 통틀어 교회가 했던 다양한 선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 이스트에게 감사한다. 그의 에세이 전체를 읽기 바란다. 시간이 들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스트의 분석과 주장에 대한 나의 요약이 당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길 바란다. 원제: The 4 Rs of Cultural Engage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일부다처 이단에서 나를 구하신 하나님
by Jared Larson
2023-12-05
우리 부부가 어떻게 만났는지 묻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맺어주셨는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글쎄요, 우리는 사실 일부다처 모르몬교에서 만났어요”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 피할 수 없다.그럼 사람들의 눈이 커지면서 말을 더듬거린다. “뭐라고요? 잠깐만요….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당황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한한 은혜에 대한 간증으로 인도한다. 그건 의심,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몇몇 죽은 친구들, 그리고 팀 켈러의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컬트나는 주류 모르몬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내 조상의 모든 줄기는 모르몬교 설립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우리 부모는 주류였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떠나 컬트 집단인 모르몬 근본주의에 가입했다. 그들은 현대 모르몬교를 비판하고 조셉 스미스 시대 이후로 이루어진 모든 변화를 비난했다. 순종적인 아이로서 나는 부모를 따랐고 종말 시나리오로 가득 찬 세상에 몰입했다. 나의 전 생애는 온통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 쓰였다. 우리는 음식과 탄약을 비축했다. 외부 교육은 비난받았고, 젊은 결혼이 장려되었다.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고 나흘째 되던 날 아내는 나와 결혼했다.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오른팔이라고 믿었던 컬트 지도자인 예언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에게 가치있는 존재인가의 여부는 그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 여부에 달려있었다. 내가 속한 컬트는 우리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받은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의 의로움에 달려있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재림 예수가 가장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신성한 능력을 우리 각자에게 부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조셉 스미스가 세운 교리를 마음대로 변경한 주류 모르몬 교회를 제거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우리가 제시한 “복음”을 거부한 나머지 세상도 심판할 것이다. 의심모든 게 의심스럽기 시작한 건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다. 우리 공동체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특정한 날에 관한 예언이 있었다. 수석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며 그 진리를 확증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그리스도는 재림하지 않았고, 내 속에는 의심이 생겼다. 의심은 숨 막히게 만드는 두려움을 동반했다. 행여라도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하는 내가 틀렸다면, 그것은 영원한 저주를 의미했다. 차마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에, 나는 의심을 억누르며 계속 버텼다.그러나 의심과 두려움은 손가락에 붙는 송진 수액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씻어내려 할수록 더 끈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절망감으로 바뀌어 서서히 겉으로 드러났다. 나는 갇혀버렸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이런 생각을 품기 시작한 건 의심이 시작하고 약 육 년쯤 지났을 즈음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합리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두려움이 비합리적이라는 걸 의미했다. 나는 은밀히 무신론을 즐겼지만, 아무리 하나님을 내 속에서 없애려고 애써도 내가 창조주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깊은 자각과 그분이 나를 본향으로 데려가길 원하신다는 생각을 차마 떨칠 수는 없었다.그렇다면 타고난 그런 사랑의 감각이 나를 달래줬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도리어 나를 화나게 했다.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 하나님이 왜 나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내버려 두는 걸까? 나는 컬트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떠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줄 명확한 대답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이 사 년이 더 흘렀고, 두려움은 계속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신앙어느 날 밤, 지혜로운 아내의 권유로 나는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시에는 내가 너무 부족합니다. 제발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데려다주세요. 더는 못하겠습니다. 나는 당신 것입니다.”이 모든 기도가 내 입술을 떠나는 순간, 깨달음이 나를 덮쳤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그때까지 내가 알던 모든 건 다 종교와 행위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는, 움직이는 모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진짜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성경에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하나님을 알려면 그리스도 위에 나의 기초를 세워야만 했다.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만이 합당했다.그날 밤 나는 내 삶을 그리스도께 바쳤고, 그렇게 했을 때 모든 게 바뀌었다. 그리고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크리스마스의 유령처럼 하나님은 나를 다시 인도하기 위해 세 명의 죽은 영을 보내셨다. C. S. 루이스, 디트리히 본회퍼, 그리고 마르틴 루터였다. 물론 진짜로 그들의 영이 나를 찾았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만난 건 그들의 글이었다. 톨킨의 환상에 매료된 나는 루이스를 찾았다. 본회퍼를 알게 된 건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 덕분이었다. 그리고 성경 주석을 찾기 위해서 킨들 무료 책을 뒤지다가 루터를 만났다. 이 세 사람의 삶과 글은 나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잇는 새로운 관계로 이끌었고, 은혜에 대한 아름답고 새로운 이해로 나를 제자 삼았다.컬트를 떠나고 몇 주 지났을 때 하나님은 내게 살아 있는 작가를 보내 주셨다. 그때까지 나는 팀 켈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는 내가 접한 최초의 생존 그리스도인 중 한 명이었다. 컬트에서 살았던 내 이전의 삶을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에 나는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을 읽었다. 친숙한 비유에 대한 그의 생소한 접근에 나는 크게 놀랐다. 하나님은 나를 그의 나라에서 탕자 동생으로 이끄셨을 뿐 아니라, 화를 내는 형으로도 이끄셨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올바른” 일을 해왔다. 그러나 나는 자기중심적인 종교인에 불과했다. 켈러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참된 자유와 용납은 오로지 사랑으로 충만한 구주의 의로우심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으로 나의 작은 가족을 어두운 곳에서 끌어내어 그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다. 이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원제: God Saved Me from a Polygamist Cul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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