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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끝났는가?
by R. C. Sproul
2019-03-07
이 글의 주제에 대해서는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개진해 왔다. 그중 한 사람은 이렇게 설명했다. “루터의 주장이 16세기 당시에는 옳았지만, 지금은 칭의라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게 다뤄질 사안이 아니다.” 또 자칭 복음주의자라고 일컫는 한 사람은 내가 참석했던 어느 컨퍼런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신칭의에 관한 16세기 종교개혁의 논쟁은 그리 중대한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과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매우 저명한 유럽의 한 신학자는 이신칭의 교리가 더 이상 교회에서 다뤄질 핵심적인 논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개신교인(프로테스탄트)이라고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무엇에 저항(프로테스트)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다.그런데 16세기의 권위 있는 개혁자들이 제시한 이신칭의에 대한 견해는 그 교리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오늘날의 입장과 사뭇 달랐다.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야말로 그에 따라 교회가 서고 넘어질 수 있는 조항이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칼빈은 조금 다른 비유를 사용해서, 칭의란 모든 가르침이 움직이도록 돕는 경첩(hinge)과 같다고 했다. 또 20세기로 넘어와서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이신칭의란 “다른 모든 교리를 어깨에 지고 있는 아틀라스[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라고 표현했다.이러한 논의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다뤄야 하는 질문은, ‘과연 16세기 이래로 역사의 어떤 측면이 변화되었는가?’이다. 아마도 지난 역사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의 측면에서 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이라면, 사람들이 훨씬 더 교양 있는 모습을 보이며 신학적인 논쟁에서도 관용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더 이상 교리에 대한 입장 차이로 누군가가 화형이나 고문을 당하는 광경을 보지 않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대속적인 죽음 및 성경의 영감성과 같은 정통 기독교의 주요 논제들에 대해 타협하지 않고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 온 역사도 목격하게 되었다(이에 반해 수많은 자유주의적 개신교인들은 그러한 개별적인 교리들을 전부 부정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가 낙태나 윤리 상대주의와 같은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뿐 아니라 개신교를 대하는 입장에서도, 가령 19세기에 소집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인들을 “이단이며 분열주의자들”이라고 언급했지만, 20세기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분리되어 나간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난 역사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정통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교리들이 지속적으로 공포되어 온 것이다. 가령 마리아 교리(Mariology)에 관한 거의 모든 신조들이 지난 150년 동안 계속 선포되어 왔다. 교황 무오류(Papal Infallibility)에 관한 교리도 이미 형식화되기 이전부터 실재했으나,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서는 공식적으로 정립되어 구원을 위한 믿음의 필수 조항으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교리문답이 발간됐는데, 이는 칭의 교리에 관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의를 담고 있어 그 자체로 종교개혁이 주창한 이신칭의에 대한 극심한 반감을 보여 주고 있다. 즉 트리엔트 공의회의 입장을 재천명함에 따라 연옥(purgatory), 면죄(indulgences), 공로주의(the treasury of merits) 등 로마 가톨릭교회의 필수적인 가르침이 함께 선언된 것이다.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이신칭의 교리의 지속적인 적실성에 관한 주제로 여러 탁월한 신학자들과 논의하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1세기 당시의 복음을 하찮게 만든 최근의 변화는 무엇인가?” 분명 칭의에 관한 논쟁은 전체 성경 진리의 한 부분에만 국한될 수 있는 전문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 또 별로 중대하지도 않은 문제가 과장되어 다뤄지게 된 사안도 아니었다. 오히려 칭의는 처음부터 심각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노출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중대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바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핵심에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선언한 내용을 인정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거나 혹은 의롭지 않다고 하시는 데 필요한 근거는 그 사람 안에 있는 ‘내재적 의’(inherent righteousness)라고 하는 주장을 계속해서 고수한다. 그렇기에 만일 어떤 사람 안에 의가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지옥으로 가거나 아니면 다행스럽게도 연옥에 가서 남아있는 부정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적인 관점에서 칭의를 이해하고자 하는 개신교의 입장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라고 가르친다. 또 이는 신자들에게 전가되는 의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는 순간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이 그 사람에게 속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우리 안에 있는 의인가, 아니면 루터의 표현대로 우리 밖에 있는 ‘외부적인 의’(an alien righteousness), 즉 우리와 떨어져 있는 타자(他者)이신 그리스도의 의인가 하는 문제이다.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로마 가톨릭교회도 칭의란 믿음, 그리스도, 은혜에 근거해 있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에 근거해 있고, 오직 믿음을 통해 얻게 되며, 오직 은혜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구원의 여부를 결정지을 만큼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이 직면하는 문제 중에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신칭의라는 성경의 교리를 비난했을 때, 사실상 그들은—기독교 정통성을 대변하는 다른 교리들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결국 복음을 부인하고 적법한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성경의 교리를 계속해서 거부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정통 교회로 옹호한다면, 이는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신학적인 대립이 그저 정치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실제로는 화합되지 않은 양측 간의 입장에서 화합을 말하는 태도는 복음의 핵심과 정수에 반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Is the Reformation Over?번역: 장성우
역사
종교개혁
이신칭의
루터
교리문답
개신교
이단
마이클호튼
사역의 불안을 잠재우는 하나님의 은혜
by Jonathan Worsley
2019-03-05
화요일 아침이다. 당신은 아마도 교회 사무실로 가는 차 안에서 주일에 설교한 내용을 되돌아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일 설교가 그런대로 잘된 듯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몇몇 핵심 가족이 불참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문을 닫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을까?"하고 염려가 된다. 헌금에 관해서도 걱정이다. "교회의 재정이 충분하게 돌아갈까?" 당신은 교회 건물에 도착하여, 차를 주차하고, 걸어 들어가며,건물이 파손된 곳을 목격하게 된다. 이런 느낌이 든적이 있는가? 바로 지금, 화요일 아침에, 당신에게 필요한 교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이다. 우리는 주일이면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시 3:8)라는 성구를 기억한다. 우리의 머리로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부활에 관여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살리심을 알고 있다(엡 2:1, 5; 골 2:13).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께 결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요 6:44-45). 우리는 새신자가 교회에 와서 앉아 있을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이러한 성찰은 훌륭하다. 하지만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에서 희망을 얻어야 하는 날이 주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불안을 느낄 때,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며 길 잃은 자를 그분에게 인도하신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월요일 아침에 교회 지붕이 새는 사실을 발견할 때, 혹은 수요일에 회계 집사가 교회 재정이 충분하지 않아서 전도사를 쓸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설교가 마침내 완성된 금요일 저녁에, 많지도 않은 우리 교회의 성도 중에 상당한 교인들이 주일에 다른 곳에 가게 되어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도, 그리고 그 외에도 순간마다 목회자로서 우리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나는 비교적 부유한 지역에서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거의 5년 동안 목회를 하고 있으며, 주님이 하고 계신 일에 용기를 얻은 일이 몇 가지 있다. 사실, 우리 교회는 700%의 성장을 이루었다. 우리는 세 명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스물한 명이 되었다.하지만 나는 비교적 적은 교인 수 때문에 아직도 실망될 때가 있다. 한 주가 시작될 때, 나는 교회 건물 주변을 돌아보며, 유아실이 이미 비좁아졌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나는 교회의 선교 예산이 턱없이 적은데, 세속주의자들, 명목상의 크리스천들 그리고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조금이라도 선교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할 때도 있다. 나는 많은 교인들이 일 때문에 여름에 떠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염려하며 곰곰이 생각하기도 한다.이 모든 걱정의 결과는 무엇인가? 나는 걱정이 더 열정적으로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더 기뻐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의 나는 두려워하며 가시적 열매에 매달리고 있다. 우리가 교회 건물을 확장해야 하면 어떻게 하지? 우리가 이번 복음적 행사를 위해 자금을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 가족이 이사를 가면 어떻게 하지? 이러한 생각들로 불안이 몰려올 때가 많다. 물론 교회 건물 확장, 복음적 행사 계획, 새로운 선교 사역 등 이 모든 일들은 훌륭한 사역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역이 모두 성공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없다. 당신에게 월요일 아침에 화이트 보드 앞에서 머리를 짜내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하며 신실하게 인내하는 일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며 한 주간의 사역을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교회로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하시면 그분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과 약속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믿음의 첫 걸음을 떼었을 때처럼 그 다음의 모든 걸음에서도 진실로 주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나의 회심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지지한다. 내가 열 살이었을 때이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청소년 행사로 교회 강당 안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지도자는 우리에게 그 장소 가운데로 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중앙에 모여 앉았다. 한 친구 엄마가 큰 종이판에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의 동그란 종이 세 장을 붙였다. 그 다음 그녀는 기도에 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은 때로 ‘그래 알겠다‘(초록색 불)라고 하고, 때로 ‘기다려라’(노란색 불), 그리고 때로는 ‘아니다’(빨간색 불)라고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것이 주목을 끄는 메시지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모두 기도에 관하여 정확하게 설명한 메시지였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메시지는 내가 기도하지 않고 있었을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시켜 주었다. 생애 첫 십 년 동안 내게 모든 것을 주신 분을 의식하지 않고 지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천로역정 초반부의 크리스천처럼, 처음으로 죄짐을 등에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모임이 끝났을 때, 나는 새로 발견한 가르침의 무게로 집으로 가는 길이 힘겹게 느껴졌다. 나는 엄마에게 확실하게 크리스천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 살피고 들은 후에, 그날 저녁, 나는 그렇게 크리스천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목회자의 훌륭한 계획의 결과인가? 그날 그 교회 건물 안에서 가장 위엄있는 사람에 의해 복음이 가장 확고하게 전달되었는가? 아니다. 그날 밤, 하나님이 내게 새로운 마음을 주셨다.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손가락을 내 귀에 넣고 ‘에바다!’(열려라!)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누군가는 매주 청소년 집회가 열리도록 열심히 일해 왔다. 누군가는 복음의 메시지를 애써 준비했다. 또 누군가는 축구 경기의 심판을 담당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빨강, 노랑, 초록의 교통신호등 색깔 종이를 잘라 준비했다. 하나님은 분명 이러한 수고를 사용하셨다. 하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게 된 이유가 축구 게임이 재미있었거나, 청소년 그룹이 흥미진진했거나 혹은 그 메시지가 아주 적절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비로운 주권자 하나님이 나를 이끄셨고 믿음과 회개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복음을 믿게 되었다. 그의 은혜는 멈출 수 없는 선물이었다. 2019년 나의 목회 사역 계획을 살펴보면서, 내가 열 살 소년으로서 교회 강당 카펫에 앉아 있던 때보다도 지금, 인간의 재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온다는 사실을 더 자주 상기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형제 목회자들이여, 변함없이 신실함으로 인내하기 위하여, 우리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놀라운 교리를 날마다 묵상해야 한다.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출처: www.9marks.org원제: Dilapidated Buildings, Small Budgets, and Struggling Congregations: How Irresistible Grace Creates Steadfastness in Ministry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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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복음을 고백하는 우리의 노래
by Eric Schumacher
2019-03-04
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양은 회중 속에서 오직 나와 주님과의 관계만을 추구하는 개인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저 사적으로만 경건하게 드리는 예배 행위가 아니라는 말이다.오히려 예배 시의 찬양은 교회의 온 회중이 함께 부를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제공한다. 성경은 성도가 복음으로 지도를 받고 변화되는 과정에 있어 찬양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함께 찬양하라신약성경에서 세 군데 본문—골로새서 3장 16절, 에베소서 5장 18-20절, 고린도전서 14장 15-17절—이 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양에 관한 지침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먼저 골로새서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이 본문에서 바울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명령하는데, 이때 언급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어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만을 가지고 노래하라는 지침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라는 헬라어 소유격의 문법적 기능상)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the word about Christ) 또는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말씀’(the word which consists of Christ), 즉 그리스도와 동격이 되는 말씀을 의미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 이 어구는 결국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메시지, 바로 복음을 가리킨다.따라서 복음 곧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가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 복음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는가?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함으로써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다. 단지 목사나 설교자만이 아니라 모두가 복음으로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함으로써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성도가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하는가? 바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름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배 시의 찬양은 서로가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본문에서 누구에게 노래하라고 하는지에도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청중이 있다. 먼저는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는 하나님이다. 즉 하나님께 믿음을 가지고 찬양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본문이 함축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도 찬양한다.이어서 에베소서 5장 18-20절은 골로새서 3장 16절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라는 명령 대신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명령을 제시한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두 본문을 비교해 보면, 복음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일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일 사이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복음을 떠나서는 우리에게 내주하지 않으신다.끝으로 또 다른 구절인 고린도전서 14장 15-17절의 내용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이 본문에 의하면, 교회에서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단지 우리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찬양을 듣는 사람들이 또한 “덕 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찬양은 사적이고 은밀한 예배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으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행위이다.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17).어떻게 찬양해야 하는가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분명히 노래해야 한다. 예배를 위해 찬양을 선곡할 때도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내용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준비해야 한다. 예배 시간에 복음이 전혀 선포되지 않는 찬양만 부르게 되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은 노래를 통해 표현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찬양에 관한 지침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이는 물론 예배 시의 모든 찬양이 복음의 요소를 전부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찬양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나 그분의 사역에 대한 언급 없이도 하나님의 거룩과 은혜와 성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한 노래들이 많다. 하지만 그러한 주제들 역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해될 때만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고 좋은 소식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 예배에서 드리는 찬양의 범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을 포괄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준비하는 위원들은 그 예배에서 복음이 제시되고 노래를 통해서도 고백되며 회중에게 적용될 수 있는 구성을 갖추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복음적 찬양의 실례에드워드 모트(Edward Mote)가 지은 오래된 찬송가인 ‘이 몸의 소망 무언가’(The Solid Rock)는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사역을 설명하고, 적용하며, 기념하는 데 아주 탁월한 효과를 갖춘 찬양이다. 여기에서 1절은 우리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피 외에는 어떤 것에도 근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내 주의 의와 그의 피 내 소망 근거 되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 있네 그 위에 내가 서 있네”이러한 주제가 전체적으로 이어지면서 찬양은 인생의 고난과 어둠을 다루기도 하고 또 어떻게 구주와 맺은 언약이 소망의 토대가 되는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모트는 4절에 가서 그리스도가 돌아오시는 마지막 날에 펼쳐질 광경을 묘사하는 데까지 이른다. 곧 우리가 영광 가운데 하나님을 뵙게 되는 그날에도, 우리의 확신은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구주의 의를 힘입어” 주어진다는 사실을 노래하는 것이다.“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또 다른 예는 개인적으로 지은 찬양인데, 여기서 나는 복음의 메시지를 그 중심에 담아 보고자 노력했다. 바로 ‘다 사라졌네’(All Gone)라는 제목의 찬양으로서, 이는 사죄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묵상하는 스펄전의 설교를 반영하는 곡이다. 여기에서 1절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고백한다.“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죄, 그가 사랑하시는 아들을 몰아낸 죄, 그가 주신 율법을 거부한 죄, 우리가 행하였도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우리가 뻔뻔하게 꿈꾸었던 죄는 세상의 모래보다 많도다”그리고 2절로 넘어가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을 노래함으로써 처음에 고백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우리가 받아야 했던 공의, 우리에게 내려야 했던 형벌, 그동안 참아 오신 거룩한 분노, 그 의로운 사람에게 쏟아졌네, 단번에 영원한 사역을 이루신 주님, 승리를 쟁취하셨도다”그리고 후렴에 가서는 우리가 죄의 짐을 벗게 되었다는 사실을 노래한다.“이 무슨 은혜인가, 끔찍한 죄 짐이 모두 사라졌네, 사라졌네, 죄 짐이 사라졌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가 멀리 옮겨졌네, 옮겨졌네, 죄 짐이 옮겨졌네, 우리 빚을 탕감하사 수치와 후회를 가려 주셨네”이처럼 복음을 노래로써 표현하며 적용하는 찬양을 통해 온 성도는 복음을 기억하고 그 메시지를 고백하게 되는데, 이때 인생의 풍랑을 경험하는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복음을 노래하라만일 우리가 다가오는 주일 예배를 위해 찬양을 선곡해야 한다면, 앞서 설명한 성경의 지침을 마음에 두고 그 일을 했으면 좋겠다. 곧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더불어 회중 안에서 서로를 향해서도 찬양하도록 하자. 단지 개인의 덕만 세우기 위해 노래하지 말고, 서로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해 노래하자. 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의 메시지가 우리 속에 풍성하고도 넓게 자리하여 공동체가 함께 누리게 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관한 일반적인 진리를 찬양하는 일도 바람직하고 유익하지만, 복음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해 구체적으로 찬양하는 일이 필요하다.그리하여 복음의 중심성을 따라 예배하러 모일 때, 우리가 노래하는 찬양 속에 복음이 실제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하자. 그럼으로써 감정만 불러일으키는 노래가 아닌, 복음의 내용을 고백하는 찬양을 하도록 하자.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우리의 왕을 피차 간에 찬양하도록 하자. 바로 이 노래로 고백하는 복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n’t Sing Only to God in Church번역: 장성우
영성
예배
찬양
복음
고백
노래
복음적
그리스도의말씀
에드워드모트
방언, 흥분, 눈물 그리고 성령의 역사
by Jeff Robinson
2019-02-28
나는 지금까지 늘 남침례교단 소속의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파 은사주의 교회에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우리 교인들을 부드럽게 표현하여 ‘경직된 신자들’이라고 불렀다. 나는 친구의 초대로 그들의 은사 부흥 집회에 참석해 보고서야 그들이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제일침례교회 성도들은 찬송가에 있는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를 조용히 경청하며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질서를 깨는 것이라고는 겨우 설교 중에 가끔씩 ‘아멘’이라고 하는 말들 뿐이었다.은사주의 교회에서의 경험이 내게 생소한 느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절제된 표현일 것이다. 친구의 초청으로 참석했던 그 부흥 집회의 첫 날 밤에, 나는 수많은 방언을 들었다. 절제할 수 없는 웃음(그들은 성령의 웃음이라고 불렀다), 기절, 강렬한 대성통곡, 두통과 암에서 나음을 입는다거나 하나님의 노하심이 몇 개의 미국 도시에 내린다는 예언 등이었다. 그리고 남녀 성도들이 예배당 안을 뛰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한쪽 구석에서는 한 젊은 남성이 마치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붙잡은 것처럼 경련을 일으키며 위아래로 펄쩍펄쩍 뛰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의 몇 줄 뒤에서는 한 여성이 주님을 찬양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춤추는 꼭두각시처럼 보였다. 한번은, 어떤 나이든 여성이 내게 다가와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안수를 받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내가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 제안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이런 일을 몇 번 경험한 후에, 은사지속론자인 내 친구는 내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친구에게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사실 그러한 현상들이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인지 확실히 모르겠다고 시인했다. 나는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내가 하나님의 사역을 거역할까봐 두려워서 내 눈으로 본 모든 현상을 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만일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정말로 방언이 아니라면, 그리고 사람들이 기절하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모르겠어. 그리고 내가 현재 은사중지론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무엇이 사람의 몸과 감정을 그렇게 완전히 동요시키는지 궁금하기는 하네.”1990년대 중반 즈음에 토론토와 펜사콜라 같은 장소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오순절파 은사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났다. 많은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로 여겨졌다. 거기에서 기적 같은 치료가 일어났고, ‘거룩한 웃음’과 ‘성령의 파도타기’가 있었다. 하늘에서 금가루와 천사의 깃털이 내려온다는 주장도 있었다. 논란이 된 그러한 현상은 캘리포니아 레딩에 있는 베델교회와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은사주의 교회와 기관들에서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영들을 분별하라 이러한 현상들 중에 몇 가지는 명백하게 성경 말씀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현상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내 친구가 20여 년 전에 “이러한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물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러한 현상이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하는 결과의 산물인가, 아니면 절제되지 않은 감정에서 단순히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자기 암시에 의한 결과인가? 그도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제안하듯이 사탄의 역사일까? 성경 말씀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기 위하여 영들을 점검하라고 요구한다(요일 4: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그들 진영 밖의 이방 문화가 아니라 그들 내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거짓 선지자들은 참 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군중을 끌어들였고 더 잘 알려져 있었다. 표면적으로, 금송아지 사건은 크고, 소란스럽고, 심지어 축하하는 대규모의 군중들이 있는 진정한 부흥의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것은 생기 있는 예배나 성령에 의해 인도된 예배와는 정반대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분별의 표지’우리보다 앞서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씨름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 강림 이후로 모든 부흥 운동은 참과 거짓, 알곡과 쭉정이가 뒤섞여 있는 듯하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하여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1730-4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부흥 운동이 있었는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를 포함한 여러 설교가들의 설교로 미국과 유럽 대륙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회심을 하는 성령의 엄청난 역사가 있었다.많은 이들이 분명하게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에드워즈와 다른 설교가들은 그 부흥 운동 기간 동안에 성령의 역사를 왜곡하는 여러 문제들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그들이 시인하는 사항들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현상과 유사한 급격한 감정적 신체적 징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부흥 집회에서 나타난 과도한 행위를 비판하며 이를 ‘과도한 열정’이라고 일축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사탄의 일로 철저히 거부했다.에드워즈는 ‘성령의 사역을 분별하는 표지들’(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1741)에서 부흥 운동을 요한일서 4장에 비추어 평가하였다. 그는 그가 ‘불확실한 표지들’이라고 부른 징후들, 즉 진정으로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부인하기도 어려운 징후들을 조사했다.에드워즈가 제안하는 분별의 표지들은 내 친구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제기되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 쭉정이에서 알곡을 골라낼 수 있는, 훌륭한 지혜를 제공한다.불확실한 표지들에드워즈는 ‘분별의 표지들’(Distinguishing Marks)의 제1부에서 성령의 역사로 인한 표지가 아닐 수도 있는 현상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나열한다.1. 몸에 나타나는 결과기절이나 고함을 치는 등의 감정적이거나 신체적인 반응은 성령에 의한 표지가 아닐 수도 있다. 경련, 비틀거림, 웃음 등 여러 많은 징후들이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이러한 현상이 개인의 특성일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압박을 받을 때 나타나는 돌발적인 행동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반드시 성령에 의해 촉발되는 현상은 아닐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성경은 성령의 영향력 하에 몸과 감정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에 대하여 정확한 공식을 제공하지 않는다.2. 흥분된 감정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영혼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을 압도하고 그들의 감정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감정적인 반응을 공식화하는 일에 대하여 경고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령의 영향에 의해 영적 경험을 했음에도, 감정적으로 그렇게 격하게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3. 즉각적인 개인적 계시현대 은사주의자들은 이것을 “형제님, 하나님이 저에게 당신을 위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때로 그 말씀은 성경 말씀일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사탄도 성경을 알고 잘 인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자극에 의한 현상은 성경 말씀이 인용되더라도 항상 신뢰할 수는 없다. 에드워즈는 부흥 운동이 항상 지도자들과 참가자들의 판단 오류로 인해 문제가 있었고 사탄의 속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주의를 기울이고 분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확실한 표지들그러면 성령의 역사로 여겨지는 일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성경의 역사라고 구별할 수 있는 5 가지 확실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1. 그리스도의 사역을 돕는 사랑이 깊어짐성령이 사람을 온전히 움직이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의 복음에 대한 큰 애정이 솟아난다. 그리스도는 신자에게 최고의 기쁨이 된다. 더 나아가, 성령은 신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게 한다. 2. 죄를 제거하고 세상에 속한 것을 끊으려는 열망성령은 크리스천이 죄를 싫어하고 거룩한 열망이 일어나도록 그를 새로 창조하신다. 세속적인 쾌락을 높이 사는 마음은 비록 그것이 좋은 일이더라도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3.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망이 깊어짐 에드워즈는 성경 말씀이 죄인들을 그리스도와 거룩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졌기 때문에, 사탄은 사람들 안에 성경 말씀을 사랑하는 열망을 결코 넣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악마는 거룩한 책인 성경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증오심을 보여 왔으며, 성경이 어둠의 왕국을 멸망하게 할 빛임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4. 건전한 교리에 대한 신념이 확고해짐성령은 성경 말씀에서 가르치지 않는 교리를 신자에게 수용하도록 이끌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하시면, 성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영원성의 실재와 심판날의 확실함을 사람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이러한 신념은 영적 눈이 열린 사람들에게 단단한 초석이 된다.5.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짐 성령의 참된 역사는 크리스천에게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도록 인도하는 겸손을 심어줄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반드시 이어지게 된다. 에드워즈가 말했듯이, “사랑은 값없이 주신 은혜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든 탁월함과 자기 의를 포기하게 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적대하고 증오하는 자들과 비교하여 우리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을 위한 지혜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에드워즈가 은사지속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과장된 표현을 지지한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그가 유작으로 남긴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Its Fruits)의 고린도전서 13장 설교에서, 은사 중단의 표지들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부흥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통찰에서 은사지속주의자나 은사중지주의자나 모두 똑같이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흥 운동을 제기하는 오늘날의 주장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우리는 에드워즈의 저술로부터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부흥 운동에 대한 그의 풍성한 저술을 통해서, 우리는 아마도 네 가지 정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첫째, 모든 현상이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영적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기 바란다. 만일 그것이 말씀에 어긋나 있으면, 거짓된 표지로 여길 필요가 있다.둘째, 모든 영들이 다 거룩한 것은 아니다. 스프로울(R. C. Sproul)이 말하고 있듯이, 거룩의 영은 또한 진리의 영이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봄으로써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다. 만일 영적 경험이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영적 경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셋째, 지역 교회와 교회의 설교 사역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심을 해야 한다. 현대의 부흥 운동은 그 운동을 이끄는 개인과 운동이 일어나는 초교파 모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고의든 아니든, 그러한 경험은 특히 성경적 설교처럼 지역 교회 내에서 평범한 수단을 통해 행해지는 은혜 사역을 경시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운동은 종종 내가 ‘번개 영성’이라고 부르는 일을 조성한다.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특정한 목사가 특정한 장소에서 제공하는 매우 극적인 감정적 경험을 통해서만 성화를 추구하며, 거기에서 영적 번개불에 맞고 즉각적으로 더 성화되기를 원한다. 이 반응은 성경에서 성화를 점진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은 성화가 하나님의 평범한 은혜를 통하여 일생을 거쳐 천천히 진행된다고 가르친다. 에드워즈는 회심자들에게 개인 숭배를 멀리하고 예수님께 향하며, 부흥 운동 모임에서 떠나 지역 교회로 향하라고 말한다. 예수님 때와 같이 오늘날에도 성령의 진정한 역사에 대해서는 그들의 열매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마 7:16). 그러면 오늘날 내 친구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20여 년 전에 내가 본 현상에 대해 나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령과의 친밀한 만남은 삶에 극적인 변화를 동반한다는 에드워즈의 생각에 동의한다. 경직된 신자이든 열정적인 은사주의자이든 영적 경험의 결과가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d’s Spirit or Human Hysteria? My Time Among the Charismatics번역: 정은심
근현대교회
방언
눈물
성령의역사
조나단에드워즈
분멸의표지
그리스도의사역
사랑과열망이깊어짐
건전한교리
지혜
교회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할 때
by David ‘Gunner’ Gundersen
2019-02-25
교회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할 때는 당신이 교회에 가고 싶지 않을 때이다. 나는 최근 교회에 나가기 힘들어 하는 크리스천 세 명과 대화를 했다. 두 명은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고 한 명은 힘든 이별을 겪고 있었다. 이들은 이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들과 모이기를 힘들어 했고, 어떤 사람은 몇 주, 또 어떤 사람은 몇 달 동안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한 명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 교회에 가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헤어진 이성친구와의 만남이 어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한 명은 교회에 있고 싶지 않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짐의 무게가 별것 아니라고 말하거나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정죄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만족스럽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고 어색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 힘들어하는 모든 크리스천들을 위해 이 글을 쓰기 원한다. 나는 이 세 명의 친구들에게 한 말을 여기서 나누려고 한다. “교회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때는 당신이 교회에 가고 싶지 않을 때이다.”장소를 초월하는 곳교회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크리스천 그 자체이지 크리스천들이 가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주일뿐 아니라 주중에도 함께 만나고 공부하고 식사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친목을 나누는 가족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러분도 하나님과 동행해 본 적이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교회는 또한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형성되고, 확장되며, 생기를 갖춘다(히 10:24-25). 우리의 신체도 각각의 부분이 하나로 연결되어 유기적인 움직임을 갖기 때문에 생명력 있는 조직이 되는 것이다. 만약 몸의 부분들이 아무런 연결성도 이루지 못한 채 각기 독립적인 상태에 머문다면, 이는 신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원들끼리 식사나 외출을 함께 하지도, 전혀 모이지도 않는다면, 그들은 분명 건강한 가족이 아니다. 당신이 찬양을 듣고 인터넷으로 설교를 들을 수는 있어도 교회에 가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삶을 나누고 얼굴을 마주보며 교제할 수 없고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당신은 혼자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지만, 당신을 위한 목자의 가르침과 보살핌과 조언들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전에 다니는 교회에서 만족을 얻지 못해 다른 교회를 찾아 떠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를 언약의 공동체로 대하는 자세가 아니다. 언약은 좋은 시기보다 어려운 시기를 위해 존재한다. 좋은 시기에는 언약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좋은 감정으로는 공동체가 잘 유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약 공동체는 우리가 불안정할 때 견디고 실패했을 때 일으켜 주는 공동체이다. 또한 언약 공동체는 우리가 지쳐 있을 때 격려해 주고,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깨워 준다. 언약 공동체는 우리 속에 있는 생각들을 꺼내 주고 책임과 헌신의 자리로 불러 준다. 이 언약의 공동체는 우리가 자라날 수 있는 크리스천 공동체로 우리를 초대한다. 교회는 당신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찬양팀이 당신이 좋아하는 찬양을 부르지 않을 수 있고 목사님이 시간과 역량이 부족해서 감동적인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멘토가 되어 줄 나이든 성도들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젊은 성도들이 적절히 분배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쉽게 다가오는 다정한 성도들 역시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바는 그 교회가 성경을 믿고, 복음을 설교하며, 교회법에 충실하고, 이웃을 섬기는 교회라면, 거기에는 성도가 있을 것이고, 그 성도는 당신의 형제이자 자매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당신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이집트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를 받으며 당신과 함께 지친 발걸음을 약속의 땅으로 옮기는 순례자이다. 즉 교회는 당신만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와 친구가 되어 주고 보살펴 줄 사람들 또한 당신이 그렇게 해 주기를 원한다(갈 6:9-10). 당신이 설교를 더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목사님은 아마 그날 아침에 당신이 더 좋은 청취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막 4:3-8; 약 1:22-25). 당신이 필요로 하는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아마 당신이 가진 성령의 은사를 필요로 할 것이다(엡4: 15-16). 당신이 생각하기에 불쾌하거나 불필요하고 어색한 만남을 가졌던 사람들은 당신의 비판보다는 복음 안에서의 동역을 필요로 한다(빌 4:2-3).하지만 당신이 교회에 있지 않다면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공동체의 목숨과도 같은 은혜의 의미성도의 모임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자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이다. 크리스천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이유는 모이는 일 자체가 기적적인 도움을 주거나, 섬기는 사람들이 예배를 완벽하게 준비하거나, 혹은 그저 미소 짓으며 적당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성숙하게 되고, 힘을 얻고, 위로받는 주된 수단으로 우리의 모임을 정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단지 찬양이나 기도나 설교나 주일학교 교육을 통해 우리 영혼이 만족감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그 모임을 통해 자신의 사람들을 세우시기 때문이다. 들판에 내리는 비와 같이 교회의 모임은 서서히 결과를 낳는다. 은혜를 구하고 나아가자당신이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가기 싫을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교회에 나가기 싫어진 지 엄청 오래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당신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은 교회에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주일 기억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에 나가 그분을 생각하고 예배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이다. 당신은 교회에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울감의 동굴에서 당신의 앞을 막고 있는 바위는 밤사이에 굴러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시면 로마의 병사나 유대의 제사장도 그분을 막을 수 없다. 교회로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교회에 나가서 당신이 소망했던 미래의 결혼보다 더 큰 주님과의 연합을 기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나가야 한다. 당신의 시련들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성찬 테이블에 놓여진 빵과 포도주가 당신이 범할 수 있는 최악의 죄와 당신이 경험한 최악의 악몽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나가서 성장하기 바란다. 교회에 나가서 섬기기 바란다. 성도들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세워져 가는 하나님의 장기 건축 프로젝트에 헌신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모자이크와 같이 당신의 조각난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란다(엡 4:15-16).교회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간은 당신이 내키지 않을 때이다. 그러니 형제자매여, 교회로 나가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Most Important Time to Go to Church번역: 조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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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정말 초기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가졌을까?
by Michael Kruger
2019-02-21
초기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는 비평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주장한 신학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견해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 중 대부분에 대해서 그들은 동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처음 몇 세기 동안 기독교는 자신들만이 원류이며 사도성을 지닌다고 내세우는 여러 가지 분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그러다가 오늘날 우리가 ‘정통 기독교’라고 부르는 특정 그룹이 신학적 대립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렇게 도전한다. “왜 우리는 결과적으로 승리한 그룹만이 그 논쟁에서 패배한 다른 그룹들에 비해 더 정당하다고 여겨야 하는가? 만일 영지주의와 같은 그룹이 논쟁에서 이겼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랬다면, 당연히 우리가 기독교라고 부르는 종교는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비평학자들은 초기 2~3세기에는 ‘기독교’라고 불릴 만한 어떤 단일한 체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그렇기에 신학적 패권을 놓고 쟁투를 벌인 모든 분파를 일컫는 ‘기독교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바트 어만의 주장이런 주장의 기원은 발터 바우어(Walter Bauer)의 1934년 작품 ‘초기 기독교의 정통과 이단’(Orthodoxy and Heresy in Earliest Christianity)으로 소급된다. 하지만 오늘날에 있어 그러한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대변하는 사람은 바트 어만(Bart Ehrman)이다. 그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초기 기독교의 특징인 넓은 다양성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예수의 추종자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가진 신학적 견해들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당연히 2~3세기에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은 기독교인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두 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서른 분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삼백예순다섯 분의 하나님이 계신다고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이런 내용과 더불어 어만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주장한 견해들 가운데 서로 상충하는 의견의 리스트를 제시한다. 물론 이 리스트는 일반 독자들이 충격을 받고 놀랄 수밖에 없도록 소개된다.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용어 사용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정말로 초기 기독교는 어만이 지적하듯이 여러 가지 신념으로 이루어져 있었을까? 과연 2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할 수 있는 내용이 너무 많은데, 그중 상당수를 이미 나는 ‘정통과 다른 이단’(The Heresy of Orthodoxy)이라는 책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따라서 이 짧은 글에서는 어만의 방법론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을 살펴보며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어만이 두 분이나 서른 분, 심지어는 삼백예순다섯 분의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그룹들을 모두 다 ‘기독교인’으로 언급한다는 것이다.왜 그렇게 언급할 수 있는가? 다름 아닌 그들이 “스스로를 예수의 추종자라고” 여긴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용어 사용의 문제가 자리한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주장하고 다녔다.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어만의 접근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용어가 자신의 신학을 정확하고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신분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초기 기독교인들은 한 분 하나님을 믿었다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두 분이나 서른 분 혹은 삼백예순다섯 분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구약성경뿐 아니라 그 성경이 가르치는 유일신 사상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다.어만이 언급한 삼백예순다섯 분의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그룹은 사실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아마도 어만은 (초기 영지주의 교사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를 염두에 두고 그런 주장을 하였을 텐데,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분이 아니라 창조주의 역할을 하는 천사들과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그리고 영지주의 신학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기독교’라는 표어를 붙일 수 있는 그룹이 전혀 아니다.물론 비평학자들이 왜 그러한 이단에 대해서도 ‘기독교’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려고 하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초기 기독교의 신학적 불일치가 실제 역사적인 상황보다도 더 심각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기독교’라는 단어가 기준 없이 사용되면 될수록 기독교인들은 무엇이든지 믿기 쉬워진다. 당연히 그러는 사이에, 그 단어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언어 사용의 속임수이런 이유 때문에, 어만의 설명을 따라가는 독자들은 언어 사용의 속임수에 빠지게 된다. “이 사람들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으니, 그 외에 내가 그들을 누구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실은 역사를 오해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현대의 예를 거론한다면, 마샬 애플와이트(Marshall Applewhite)가 창설한 ‘천국의 문’(Heaven’s Gate)이라는 UFO 종교 단체를 들 수 있다. 이 단체는 자신들이 죽은 후에 헤일 봅 혜성(the Hale-Bopp comet)을 추적하는 외계인 우주선을 타게 된다고 믿었으며, 바로 이 믿음을 따라 서른아홉 명이 1997년에 집단으로 자살했다. 그런데 이 단체도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계시록의 예언을 성취하는 중이라고 주장했다.만일 어떤 신문 기자가 “UFO의 존재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헤일 봅 혜성을 따라가는 외계인 우주선을 타기 위해 집단으로 자살했습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또 누군가가 그런 기사에 반론을 제기했는데, 그 기자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면 어떠했겠는가? “뭐가 잘못되었죠? 그들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답변이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느 정상적인 언론인도 그 단체의 믿음이 역사적인 차원의 기독교 신앙을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그렇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사건을 보도하지는 않을 것이다.결론적으로 말해, 자기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든지 참된 기독교인으로 간주되면 안 된다. 이 기본적인 원리가 2세기 기독교 연구에도 균형 있고 공정한 방식으로 적용되었다면, 초기 역사에 심각한 수준의 신학적 분일치가 있었다는 발언은 대부분 수정되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Much Did Early Christians Disagree Over Their Theology?번역: 장성우
역사
초대교회
영지주의
신학적
어만
속임수
초기기독교
오해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들을 환대하라
by Ronnie Martin
2019-02-19
당신은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우리는 각자의 태도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약간은 어색하지만 그래도 열정적으로 다가가 기꺼이 초대자를 자처하는 성도, 아니면 경계심 혹은 무관심으로 그들의 눈을 피하는 성도. 둘 중의 어느 경우일지라도, 고민해야 하는 동일한 문제는 우리가 그들을 ‘명백한 외부인’으로 대한다는 사실이다. 복음을 거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내 제안은 단순하다. 우리는 복음의 전파자로서 환대를 베풀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그들에게 환대를 베풂으로써 복음이 전파될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복음적 환대많은 경우, 사람들이 교회에 처음 들어올 때 ‘내가 여기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한다. 그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교회에서 복음적 환대를 보여 줄 수 있는 간단한 방식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친절하라진정한 따뜻함과 친절을 베푸는 크리스천들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외부자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환대의 영역에서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나는 교회가 친절을 어떻게 베풀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에는 환영을 담당하는 집사가 따로 있다. 그녀는 교인들에게 부드럽게 다가서는 방법을 가르친다. 친절은 이론적으로만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행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과 환대를 베풂으로써 시작한다.2. 도움이 되라낯선 자로서 교회에 처음 들어오는 일은 긴장되고 또 혼란스러울 수 있다. 교회의 규모와는 전혀 상관없이, 두렵고 압도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풀 수 있는 친절은 그들이 질문하기를 주저하고 있을 때 먼저 다가가서 묻고 대답하는 일이다. 찾기 어려운 장소에서 성도 간의 모임이 열리고 있다면, 그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와 모임 장소를 알려주고, 질문이 있으면 기꺼이 대답해 주겠다고 말하라. 이러한 소소한 친절이 교회를 처음 찾은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고, 또한 그들을 교회의 중앙으로 나아오도록 이끈다.친절과 도움을 바탕으로 새신자들에게 복음적 환대를 잘 베푼다면, 이는 그들에게 복음으로의 초대장을 건네는 것과 같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초대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건네는 3 가지 방법을 배울 수 있다. 1. 교회에서 마주치는 낯선 이들을 외면하지 말라“외부인들에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 4:5). 교회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의 사람들이 찾아오면 예배 시작이나 마지막, 혹은 중간에라도 그들에게 존중과 환영을 표하라. 이러한 소통은 다양한 신앙과 관점 및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교회의 한 좌석을 차지할 가치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또한 목회자가 비그리스도인을 잃은 양이라고 표현할 때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배타성을 내려놓고 우호적으로 다가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향기를 전할 수 있다. 2. 내부자들만의 언어를 줄이라“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하라”(골 4:6). 그리스도의 은혜를 잘 설명하는 용어인 속죄, 칭의, 성화와 같은 단어들을 삼가라는 의미는 아니다. 내부자들만 사용하는 은밀한 언어를 피하라는 말이다. 그러한 언어는 당신의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내부자들만의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들릴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서 그들에게 배타적인 느낌을 줄 필요가 있는가?사역과 행사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축약어나 과장되게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 주일 예배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다.3. 어리석은 자를 품으라“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그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굳이 메시지를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 복음의 메시지는 명확하고 강렬해야 하며, 이를 전하는 사람은 선포하는 복음의 본질을 두려움 없이 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을 품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길이다. 죄 문제를 다루지 않는 변형된 복음은 죄로 인해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교회를 찾은 외부인들에게 환영받는 느낌을 주는 손쉬운 속임수나 일련의 술책은 없다. 성도들이 복음적 환대를 겸손히 실천할 때,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성령의 일하심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피로 세우신 공동체가 아직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돌아올 집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to Help Outsiders Feel Welcome in Your Church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사역
환대
복음적
십자가
바울
은혜
친절
솔직한 고백은 개인과 소그룹에 변화를 가져온다
by Kristen Wetherell
2019-02-15
내가 참여하는 소그룹은 여느 다른 그룹과 다르다. 그 다름은 비록 우리가 서로 잘 어울리고 생각도 비슷하지만 거기에서 오는 탁월함 때문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함께 나누기 때문만도 아니다. 내가 이 소그룹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게 유익한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방식으로 소그룹 모임을 하는데, 그것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구성원들의 삶을 변화시켜 주었다. 이는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방식, 기도하는 방식, 그리고 신실함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고백은 관계를 변화시킨다모두가 빛 속에서 선을 행하면 깊은 관계를 가로막던 모든 장벽이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이런 일이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장벽의 무너짐을 경험하려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 놓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더 빨리 고백할수록 더 빨리 은혜로운 관계의 그룹이 될 수 있다.솔직한 고백은 지금까지 누군가를 보며 ‘나보다 더 나은 크리스천’일 것이라는 편견과 시기를 깨도록 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비교, 죄책감, 허영, 비난과 같은 거짓 세계에서 벗어나, 서로에 대한 긍휼과 섬김의 삶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고백에 대한 용기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빛된 삶을 살고 있다면, 다른 사람 앞에서도 그와 같이 행함이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하나님은 소그룹별로 각각의 독특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개별 그룹은 고백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면을 보일 것이다. 당신이 속한 그룹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하는가?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진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죄의 문제에 대해서 대충 넘어가는가? 나는 당신이 속한 그룹이 은혜로 충만하고 정직한 관계를 추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를 위하여 죄를 고백하는 문제를 앞에 놓고 더욱 함께 기도하고 실천하기를 권한다. 우리 소그룹 구성원들은 고백의 결과로서 신뢰하는 방법을 배웠고, 그 결과로 소그룹 모임을 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우리의 상호작용은 매우 좋아졌다.고백은 기도를 변화시킨다성경은 서로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양하게 가르쳐 준다. 소그룹에서 행하는 정기적인 고백은 이러한 기도를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장이 된다. 예를 들면, 나는 믿음의 자매를 위하여 시편 119편 37절을 가지고 ‘주님, 그녀가 사는 동안 허망한 것들을 쫓지 않게 보호하시고, 주의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 이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기도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자신의 동료와 비교하면서 특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내밀한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에서 한발 더 나아가 좀 더 구체적인 기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님, 그녀가 친구와 자신의 성취를 비교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며, 그녀를 위하여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자신과 주님을 위한 삶을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 그룹은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이를 삶에 직접 적용한 후에, 기도로 모임을 마친다. 구체적이면서도 말씀으로 충만한 기도 시간은 구성원들의 마음에 찔림이 되는 것들을 겸허하게 고백하고 낮은 자세로 대화하도록 이끈다. 이때에 지도자와 조력자들은 앞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모임 안에서 이러한 고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도울 수 있다. 첫 발걸음을 내딛어라. 그리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진실함으로 고백하라. 그 다음 당신의 고백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기도를 요청하고, 그 모임의 구성원들이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마지막으로 이렇게 행함이 그룹 기도의 역동성을 어떻게 바꾸는지 잘 살펴보라. 고백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킨다앞의 두 가지 변화보다 더 큰 변화는 영적 성장의 발돋움이다. 이는 겸손한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보혈의 복음 때문에, 우리는 죄를 고백하는 신앙만을 통하여서도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함을 입을 수 있다. 이 은혜를 통하여 우리는 진리 안에 거하고 또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죄 짓는 행위를 멀리할 수 있다. 이처럼 고백과 회개는 크리스천의 삶에서 진보를 이루게 하는 핵심 요소이다. 고백은 현재의 영적 상태에 거룩한 불만을 느끼도록 우리를 이끌고, 그 결과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은 갈망이 생기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마음을 열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은혜로운 마음으로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서로의 신실한 성장을 도울 수 있다. 소그룹에서 고백의 가치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개인과 그룹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경험하게 된다. 그분의 사역이란 죄를 징계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훈육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안에 의와 평강의 열매가 맺히도록 이끄심도 포함된다(히 12:11). ‘진정성이 취약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기쁨으로 우리의 약함을 고백해야 한다. 이러한 고백이 없이는, 특히 이를 회피한다면, 진리에 가까워질 수 없다. 하지만 고백을 실천할 때, 우리는 은혜로운 관계, 말씀으로 풍성한 기도, 그리고 성령 충만한 삶을 즐길 수 있게 된다.고백은 예수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킨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Power of Confession in Your Small Group번역: 정은심
목회
모임
소그룹
고백
관계
기도
변화
‘오직 믿음’에 대한 묵상
by Thomas Schreiner
2019-02-04
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 중 하나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이 표어가 선포하는 내용은, 구원이란 우리 자신이 행한 의로운 일들을 바라보는 데서 비롯되지 않고,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바라보는 데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경과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기 위한 갈망에서 시작된 이 구호는 교회를 개혁하고 성경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외침이었다.종교개혁 이후 5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른다. 오늘날도 여전히 ‘오직 믿음’의 교리가 중요한 문제인가? 이신칭의 개념은 단지 지나간 시대의 향수만을 불러 일으키는 오래된 유물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오늘날에도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 시대의 부르짖음을 끊임없이 교육하고 또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외침은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해 주고 있으며, 더불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결코 변화시키는 능력을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전파된다.누군가는 단순히 전통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오직 믿음’의 교리를 고수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기 때문에 지켜 내야만 한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은 경직되고 까다로운 정통의 산물이 아니다. 이신칭의는 역사 전반에 걸쳐서 우리의 사고와 마음에 호소하는데, 이는 인간 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 가운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78)은 이신칭의가 갖는 목회적인 연관성을 입증한 바가 있다. 튜레틴은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에만, 칭의 문제에 대한 ‘논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우리는 하늘의 법정에 이르러 눈앞에 계신 재판장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광명함은 별들도 어둡게 하며, 그 능력은 산을 녹이고, 그 진노하심은 땅을 진동케 한다. 그의 공의하심은 그 어떤 천사도 나타낼 수 없고 유죄인 자를 무죄라 판결하지도 않으며, 죄에 대한 그의 형벌은 지옥의 가장 깊은 곳까지도 이른다. 그리고 즉시, 인간의 헛된 믿음은 소멸하고 멸망하며,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윗처럼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며 울부짖는다. 죄 의식과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때,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의와 불완전한 거룩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 때문인가?”여전히 상관 있다우리는 왜 이와 같은 성경의 진리가 오늘날에도 중요한 문제인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신학적인 논쟁이 좋아서 신학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튜레틴이 지적하는 바 문제의 핵심은 개인적인 차원에 있다. 우리는 마지막 때, 즉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오직 믿음’의 교리는 ‘우리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거룩하신 분 앞에 서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한다.그런데 우리가 최후 심판 때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라고 동의하면서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오직 믿음’이 쉽게 오해 받기 때문에, 이를 버려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사용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검증되고 설명되어야 하는 이 슬로건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러한 반대의 목소리는 사실 모든 신학적 진리에 적용된다.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자주 오해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용어를 포기하지 않는다. 대신에, ‘삼위일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반드시 신중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때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의미하지 않는 바가 무엇인지에 주의해서 설명해야 그 설명을 듣는 이들이 크리스천은 삼신론자(tritheist)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용어가 때때로 잘못 해석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단어 자체를 폐기하지는 않는다.지키기만 해서는 안 된다간혹 개혁주의 크리스천들은 이신칭의와 같은 교리나 전통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 과도한 힘을 들인다는 비난을 받는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고백하는 진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상황에서 교리적 충성만 강조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하지만 믿음을 수호하는 일은 고귀하면서도 성경적인 노력이다. 유다서 3절은 우리가 그렇게 할 것을 분명히 요구한다. 또한 갈라디아서나 디모데후서 둘 다 강조하는 바는 심지어 다른 이들이 복음을 거부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복음을 수호하며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지키려는 노력 자체보다 그 복음을 통해 얻게 되는 생명의 자유와 기쁨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지키는 이유는 그 진리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 진리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고요하게 있을 때, 우리의 수많은 죄와 무가치함을 떠올리고는 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오직 믿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통합 찬송가 188장)라는 고백을 드린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오직 믿음’의 교리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그 누구도 사람을 자랑할 수 없도록 하며(고전 1:31),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선물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만든다(고전 4:7).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오직 교리(the five solas)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중 ‘오직 믿음’은 특별히도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에 긴밀히 연결된다. 믿음은 구원을 위해 내 행위가 아닌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일이며, 그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수학(math)이 아니라, 지도(maps)와 같다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과 교리 사용에 대한 마지막 말을 전하고자 한다. 안토니 레인(Antony Lane)은 교리란 지도요 본보기이지, 수학적 공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믿음’이라는 단순한 구호 사용에 의존하거나, 혹은 이 용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대화 가운데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이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그 대신 우리는 ‘오직 믿음’ 교리를 거절하는 자들이 이 교리의 타당성에 의구심을 갖게 될 때, 그들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이 교리를 거부하는 자들과 인정하는 자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한 과거의 판단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때 ‘오직 믿음’을 거부하는 자들의 염려가 오히려 이 교리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어 그에 대한 정당한 반박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물론 나는 모든 의견의 불일치가 단순한 오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뜻하는 바는, 우리가 속단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대화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오직 믿음’과 같은 슬로건은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런 슬로건은 우리의 신학을 명료하게 요약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혹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다른 정의와 개념을 가지고 대화 속에 참여하기 때문에, 슬로건은 또한 위험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기 전에, 그들이 진정으로 말하는 내용을 알아들었는지 확인하도록 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ustification = Faith + Nothing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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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튜레틴
교회를 정하기 전에 물어야 할 4 가지 질문
by Brian Croft
2019-01-31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거치는 절차가 있다. 먼저 거주할 집과 일터를 찾고, 아이들이 다닐 학교에 등록을 한다. 정착할 교회를 찾는 일은 종종 더 오래 걸리는 과제로 밀리기도 한다. 새로 이사한 지역에서 교회를 찾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궁금해 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받는 질문들 외에도, 최근에 내가 섬기는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묻는 질문들을 살펴보면, 주로 4 가지 질문으로 요약된다. 어떤 교회에 등록을 해야 할 지 고민이 될 때, 이 질문들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1. 우리 가족이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을 교회인가? 이것이 첫 번째로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나와 우리 가족의 영혼을 양육하기에 충분하가? 다시 말하면, 교인들에게 꾸준히 성경 강해를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교회가 나와 내 가족의 영혼을 성장시켜 줄 것인지를 평가하기에 좋은 첫 질문이다.2. 영혼의 돌봄을 가장 우선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교회인가? 이 교회의 목회자가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고 감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기는 진정한 리더인가? 그들이 강력하고 성경적인 설교를 한다고 하여 그것이 당신 개인의 영혼이 제대로 돌봄을 받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교회의 목회자에게 물으라. 그리고 그 교회 교인들에게 물어보라.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음으로써, 영혼을 돌보는 사역이 이 교회의 우선 순위인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3.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가족이 의미 있는 교제와 책임감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인가?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에서 어느 정도의 헌신을 하고, 관계를 맺고, 또 행사에 참석하며 목회자와 지도자를 알아 갈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당신이 아직은 정식으로 등록한 교인이 아닌 한, 그들의 일원인 것처럼 소속되어 교제할 수 있기를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4. 하나님의 백성을 섬길 수 있고 내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교회인가?당신의 은사가 무엇이고 그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교회를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단발적인 필요들은 당신이 잠깐 예배에 참석하고 헌신하는 것만으로도 채워질 수 있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에 살펴본 결과만을 가지고 어떤 영역에서 도움이 필요한지를 모두 안다고 쉽게 추측하지 말라. 한 교회에 몇 달 이상을 다니다보면 자연스럽게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네 가지 질문에 모두 긍정적인 답을 얻을 수 있으면, 당신이 정착할 교회를 찾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라는 확신이 서면, 등록을 더 지연시키지 말고 그 교회에 정착하라고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정착할 교회를 찾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마지막 요소는 인내이다. 그 교회에서 당신과 가족들은 아직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권위 아래에 있지 않고 또 등록 교인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어느 정도 지속적인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새 교회를 찾는 여정에서 당신이 느끼는 자유와 이와 동반된 책임의 부재는 현 상태에 안주하는 죄를 낳을 수도 있다.교회를 찾는 과정에서 당신이 목자의 돌봄을 받지 않고 양 떼를 떠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일을 즐기는 양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여정이 한때는 재미있고 신나는 느낌을 줄 수 있더라도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Questions to Ask Before Joining a Church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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