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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더 나은 의”
by 이춘성
2020-10-23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마태복음 5-7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산상설교’로 불린다. 산상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이 설교가 산 위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5장 1절에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만 보면 예수님만 산에 계시고 무리와 제자들은 산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핑크(Gerhard Lohfink)와 같은 신약학자들은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셨고, 무리 중에 제자들만이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갔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누가 예수님을 따라 산행을 하였는지, 특별히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고된 산행을 할 만큼 적극성이 있는 자들이며, 이들은 소수라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구약의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시내 산에서 갈릴리 이름 없는 산으로산상설교의 도입부는 시내 광야에 있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나안에 세울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와 법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습은 출애굽기 19장 20절 이하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출 19:20) 하나님은 시내 산에 계시고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장로들은 광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산상설교에서도 예수님이 산에 계시고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런 구도는 구약의 시내 산 설교와 신약의 산상설교가 서로 비교되도록 한다.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가르치시며 주신 것이 무엇인가? 십계명 두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이다.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킬 삶의 원리, 윤리이며 법이다. 그렇다면 산상설교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이루실 대속의 구원 사건 이후에 죄에서 탈출한 사람들로 만들어질 하나님 나라의 삶의 윤리와 법이 산상설교이다. 그러기에 산상설교는 오래전에 있었던 좋은 말씀, 혹은 따르기에는 너무 높고 숭고한 이상적인 말씀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며, 지켜야 하는 삶의 윤리이며, 법이 산상설교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이제 산상설교의 내용으로 우리의 삶을 판단 받고 우리가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의롭지 않은지 알게 된다. 더 높은 기준과 본질적인 기준으로 우리의 삶이 판단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알아볼 ‘더 나은 의’다.산상설교의 주제산상설교의 핵심 주제는 ‘더 나은 의’다. 이 내용을 담고 있는 17-20절에는 비교급으로 표현된 ‘더 나은 의’의 비교 대상이 무엇인지 나온다. 그리고 그 관계성을 규정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 예수님은 시내 산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한다. 완전이란 가득 채워서 부족한 부분은 메꾸고 채워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 시내 산의 윤리와 법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시대와 상황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분히 요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앞으로 이룰 하나님 나라와 그곳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더 고차원의 완전한 법과 원리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를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창세부터 발전하여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 점진성, 하나님 나라 윤리의 완전을 향한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이 무엇이며, 신자들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율법 혹은 선지자우선 17절의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율법이나 선지자(τὸν νόμον ἢ τοὺς προφήτας·)”는 무엇을 의미할까? 앞과 뒤가 동일한 운율과 단어로 끝나는 시적인 용법인 대구법과 같이 ‘율법과 선지자’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인 7장 12절에도 나온다. 예수님은 설교의 마무리에서 “율법과 선지자(ὁ νόμος καὶ οἱ προφῆται)”라고 말씀하셨다. 차이점은 17절은 ‘율법 혹은 선지자’로서 이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하지만, 7장 12절은 ‘율법 그리고 선지자’로 둘 다를 뜻한다는 것이다. 당시에 7장 12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통용하는 관용어로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은 토라로 불리던 율법이 기록된 모세 오경과 그 외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구전, 기록된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주신 하나님의 법, 말씀으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십계명과 그 외에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5개의 성경책을 가리킨다.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자(삿 21:25), 이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토라로 이끌기 위해 선지자들을 대언자로 보내셨다. 이들 선지자에 대한 기록은 역사와 시, 지혜, 예언 등의 다양한 문학적 장르로 기록되었고, 히브리어 성경은 이것들을 선지서라고 불렸다. 그러한 이유로 구약 성경은 토라로 불리는 모세 오경과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불렀던 것이다.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토라와 선지서에 대해서 이해하는 방식과 그 위상의 문제 때문에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이것은 성경 해석을 둘러싼 신학적 이유에 근거하였다. 먼저 성전의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즉 토라만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여 주신 토라만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이와 달리 지방을 중심으로 개혁 운동을 일으키며 신앙과 삶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던 신진 세력이었던 바리새인들은 토라 외에 선지서의 말씀들도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토라를 재해석하고 토라로 돌아오라고 가르친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단지 토라를 쉽게 풀어쓴 것이 아니라 발전된 토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토라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선지자들을 통해 더 발전되고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바리새파는 토라도 중요하지만, 더 향상, 발전된 내용을 담은 선지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 바리새파의 랍비들은 주석과 책들에 근거해서 십계명과 그 부속 조항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바리새파는 토라 외에 더욱 더 많은 항목의 법을 만들어 이것을 따르는 것을 경건의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두 세력의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시지 않았다.율법예수님은 율법(토라) 혹은 선지자 중 하나를 폐하고 이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여 긍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긍정하였고, 더 나아가 이 둘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18절에서 율법(토라)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은 토라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루리라”는 헬라어의 중간태의 동사이다. 중간태란 능동태도 아니고 수동태도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능동태는 주어의 의지와 주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수동태는 주어의 뜻이 아닌 타인의 뜻에 따라 주어가 움직인다. 하지만 중간태란 주어가 주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동적이지도 않은 상태,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유진 피터슨은 중간태의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특유의 환경 속에는 극단적인 대비가 불가능한 순간이 너무나 많다. 두 가지 의지가 작용하지만, 두 가지 모두 상대편을 배척하지 않고, 상대편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서로 존중하는 경우가 있다. 헬라어 문법책은 이렇게 말한다. “중간태는 어떤 행동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어들을 묘사하는 동사의 용법이다.” … 나는 다른 존재 - 창조와 구원을 이루신 주님 - 에 의해 시작된 행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 속에 참여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나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이미 의도된 행위 속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 삶 속에서 촉진시키기 위해 줄을 잡아당기지 않는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단적인 정체성에 굴복하도록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작(능동태)하거나 하나님에 의해 조작(수동태) 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행위 속에 포함되고 거기에 참여하지만 그것을 조종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중간태).” (유진 피터슨, ‘묵상하는 목회자’, 좋은씨앗, 157-159쪽)선지자이어서 예수님은 선지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 여기의 ‘가르치는 자’는 선지자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선지자들은 계명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르치며, 이를 따라 살아서 모범을 보였던 자들이었다. 선지자들은 토라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토라를 해석하고 당시의 사람들에게 토라로 다시 돌아오라고 가르친 사람들이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율법을 가르치고, 원래 의미를 밝혀 주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각성시켰고, 이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오길 그들의 삶으로 보여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법이 과거의 관습이나 문화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법, 불변하는 삶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삶에 대해서 긍정하시면서 이들을 천국에서 큰 자로 칭찬하셨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이러한 이들의 좋은 삶이 일종의 새로운 법과 규정이 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율법과 선지자예수님은 제자들이 취해야 할 바른 입장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20절의 말씀은 토라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던 사두개인이 다수였던 제사장과 서기관, 상대적으로 선지자를 중요시여긴 바리새파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양쪽을 다 취하라는 기회주의적 가르침도 아니다.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인정하시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이 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더 낫다는 것의 결론은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황금률이라 불리는 7장 12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또한 산상설교 전체는 이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기에 산상설교의 결론에 이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낫지 못하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더 나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 ‘정의’가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앞으로 “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윤리” 시리즈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논리를 따라서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그리스도인의 길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과거를 대표하는 보수와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진보라는 두 프레임 속에서 ‘더 나은 의’가 하나님 나라 윤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하는지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서기관이 다수인 사두개파로 대표되는 사회의 보수주의자들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개혁적인 진보주의자들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들 중 하나의 편에 서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들 중 한 편에 서는 것이나 이 둘을 적절히 조화하고자 하는 중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뛰어넘는 더 나은 길에 서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과거를 보수하고 지키려는 사두개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과거에만 집착하고 현재와 미래를 무시하는 비전 없는 보수주의자를 보셨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나가려는 진보파인 바리새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과거를 재해석한다고 하면서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 새로운 기득권으로 자리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위선을 보셨다. 이를 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런 자들에게 농락당할 수 없는 거룩한 말씀이라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인 이 두 세력의 해석과 가르침보다 낫지 않으면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들 중의 하나와 같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강하게 경고하신 것이다(마 5:20).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강한 경고의 말씀이다. 보수 기독교, 진보 기독교와 같은 정치 진영화 된 기독교와 교회가 ‘더 나은 의’를 추구할 수 있는 교회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강요받는다. 예수님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두고도 율법 혹은 선지자로 나누고 이를 현실 정치의 진영으로 나눠 싸운 것처럼, 지금도 보수 혹은 진보라는 선택지 속에 기독교인들을 프레임화 하려는 세력과 유혹이 있다. 결국, 이 때문에 교회 안에서 편 가르기를 하고 서로를 향해 미움을 만든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이 선택지를 모두 취하겠다는 어정쩡한 중립이 아닌 이것들을 모두 뛰어넘는 ‘더 나은 제3의 길’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분명한 것은 이 제3의 길은 보수와 진보를 모두 담을 수 있으며, 이 둘을 모두 조화롭게 하는 길일 뿐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더 나은 길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천 년 전이나 지금도 산상설교를 통해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신 예수의 길, 하나님 나라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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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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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 통신 8: 영역 주권은 신정주의적인가?
by 김은득
2020-10-22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 1880년 10월 20일에 화란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를 설립하면서 ‘영역 주권(Souvereiniteit in Eigen Kring)’이라는 취임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라!’ 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 유명한 연설 문구를 일생에 한번쯤은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풀러 신학교(Fuller Seminary) 전 총장 리차드 마우(Richard Mouw)는 정작 유명해진 이 연설 레토릭(rhetoric)에도 불구하고, 저의 영역 주권 사상에 대해선 그 누구도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마우의 지적은 미국 개혁주의를 향한 것이었지만,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할만한 그런 비판입니다. 신정주의적(theocratic) 뉘앙스를 지닌 그런 레토릭이나 용어들이 유명해지면서, 제 영역 주권 사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각각 미국과 한국에서 기독교 정부/국가(Christian State)를 추구하는 운동이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유대학교의 설립식 자체는 암스테르담의 신교회(Nieuwe Kerk)에서 상징적으로 이뤄졌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신교회(Nieuwe Kerk)가 차지하는 국가(민족)적 위상은 암스테르담의 가장 주요한 광장인 담 광장(Dam Square), 그것도 바로 왕궁(Royal Palace) 옆에 위치한 교회인 것뿐만 아니라 1815년부터 시작된 왕족의 대관식이 예외없이 이곳에서 치뤄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마치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나 미국의 워싱턴 내셔널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과 같이 한 국가(민족)을 대표하는 종교 기관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역사적으로 네덜란드가 자랑스런 기독교 민족/국가(Christian Nation)임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 국가(Nation)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정부 기관으로서의 국가(State)라기 보다는 민족(People)에 가까운 단어입니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민족-국가(Nation-State)로 변모하였습니다. “신교회가 차지하는 국가(민족)적 위상” 혹은 “한 국가(민족)을 대표하는 종교기관”에서 언급되듯이, 국가와 민족은 혼용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국가 교회(National Church)라고 할 때, 정부 기관에 포함된 국가 교회도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 교회, 즉 민족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교회도 있음을 알아야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에 암스테르담의 신교회(Nieuwe Kerk)는 어느 국가 교회에 속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둘 다입니다. 원래 신교회(Nieuwe Kerk)는 도르트 총회 이후 화란 민족을 대표하는 공적인 국가 교회인 화란 개혁 교회에 속하였습니다. 그러나 1816년 빌렘 1세의 일반 조례 이후 화란 개혁교회가 정부 기관의 감독 아래 들어가면서 민족을 대표하는 교회에 정부 기관에 속한 국가 교회의 색채가 덧입게 됩니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유아 세례 증서가 신앙 고백을 따른 결과이면서도 더 나아가 유아의 출생을 증명해 주는 공문서라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민족을 대표하는 공교회이면서 정부기관에 속한 교회인 신교회(Nieuwe Kerk)에서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라!’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쳤으니, 어쩌면 제가 신정주의자라고 보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1886년 정부기관에 속한 화란 개혁교회와 결별함으로써, 교회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교회(free church)가 되어야 함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1886년 애통(Doleantie) 교단의 출범은 사실 신교회(Nieuwe Kerk)의 당회실을 점거하고자 제가 당회실 패널을 직접 톱질하여 떼어버린 사건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886년 1월 5일에 저는 당회원으로서 신교회(Nieuwe Kerk)의 당회실에 들어가고자 했는데, 당회실 문이 어떤 열쇠로도 열리지 않도록 목재 패널로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몇 시간을 허비하다가, 다음날 아침 변호사들을 대동한 채, 저는 그 패널을 직접 톱질하여 떼어버립니다.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저는 화란 개혁교회에서 면직을 당하게 되고, 저와 함께 면직된 분들과 더불어 애통 교단이 출범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신교회(Nieuwe Kerk)의 당회를 신교회(Nieuwe Kerk) 자체가 운영하는가 아니면 정부 기관과 결탁된 국가 교회의 운영을 따라야하는가의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저희가 국가 교회와 결별한 가장 큰 이유는 교회는 국가의 하부 기관이 아닌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영역 주권 원리가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어떠해야 함을 잘 보여줍니다. 교회는 신앙의 순결을 위해 기꺼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대두된 문제는 국가 교회와 결별한 애통 교단이 어떻게 화란 민족을 대표하는 공교회가 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화란 민족에게서 개혁파 교인들이 공공성을 획득하려면, 교회(교단) 내부에만 갇혀 지내서는 안되고, 적극적으로 세상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게 하라고 개혁파 교인들을 독려한 것입니다. 저 역시 정치 영역에 직접 참여하여 오랜 상원 의원 활동뿐만 아니라 반혁명당 당수 및 수상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신정주의적 기독교 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먼저 정교분리를 강조했던 프랑스 혁명 이후, 신정주의적 기독교 정부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저 역시 영역 주권을 통해 교회는 정부의 권력과 어떤 결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다음으로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세속 정부를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정치 영역의 주권은 얼마나 정의를 실현하고 공공선에 기여하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각자의 신앙 양심에 걸맞게 가장 정의롭고 공공선에 최상으로 기여할 만한 정치인을 지지하고 투표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독 정치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정치 영역에 들어가 정의와 공공선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이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제 평생의 신학적 비전이었다면, 이 비전을 이루는 것에 있어서 영역주권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은 정치적으로도 엄청납니다. 당시 네덜란드 정치 영역은 모더니즘이라는 하나의 꽃으로만 도배된 정원과 같았고 다른 꽃 특히 종교적 색채를 띠는 꽃은 그 정원에 심겨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치 영역이나 공론장에서 신정주의적이라는 비판 아래 기독교적 양심이나 목소리가 제거 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침묵을 강요받는 화란 개혁파 대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독교 사회로부터 세속적으로 변해버린 정치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지, 또 무엇보다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이 그 세계에서 드러나게 할지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저의 해답은 영역 주권(sovereignty in its own sphere)이었는데, 모든 삶의 영역의 절대적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각각의 인간 삶의 영역(예를 들어,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은 하나님께서 영역 그 자체에 부여하신 일종의 파생된 주권, 영역 주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 영역은 그 영역 자체의 원리와 운영방식에 적합하다면,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가졌든지 간에 누구나 자유롭게 그 영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치 영역에서 누구든지 정의와 공공선을 실현하는 것에 있어서 자유롭게 경쟁하면서 그 영역 자체의 권위를 획득하고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역 주권이 함축하는 구조적 다원주의(Structural Pluralism)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제 레토릭이나 용어가 유행하면서 저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 즉 신정주의자로 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언급했듯이, 주권이라는 용어는 어떠한 방해나 반대 없이, 아니 반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사실상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이런 권한은 성경적으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런 영역 주권을 마치 하나님께서 기독교인에게만 부여한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주권은 누가 정의와 공공선에 더 기여했는지, 학문의 영역에서 주권은 누가 더 진리에 충실했는지, 예술의 영역에서 주권은 누가 더 아름다움에 기여했는지에 있는 것이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부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 레토릭 자체가 전투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해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공적 영역을 모더니즘의 손아귀에 내버려둔 채, 개인 영성과 교회 활동에만 만족하는 개혁파 교인들을 각성시켜서 하나님의 군사로 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해두어야 할 부분은 제가 그런 전투적 이미지와 레토릭을 사용한 것은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청중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라!’ 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문구는 불신자들도 포함된 공론장에서 외친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원칙에 따른 기독교 사립대학을 설립하는 역사적 현장에서 부르짖은 연설입니다.한국의 성도 여러분,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를 넘어서 정치적 영역에 들어갈 때, 굳이 이런 신정주의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울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주권이 성경적 용어일지라도, 불신자들이나 더욱이 안티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공론장에서 전투적인 레토릭을 사용하여 불필요한 논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 영역 자체에 창조 때부터 부여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신뢰한다면 각 영역에 걸맞는 탁월한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정의를 실현하고 공공선에 기여하는 탁월한 기독 정치인 혹은 기독 시민이 되십시오. 학문의 영역에서 탁월한 지식인이 되시고, 예술의 영역에서 창조적인 예술인이 되십시오. 직장의 영역에서 실력 있는 직장인이 되시고, 종교의 영역에서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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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선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는 결국 하나다
by David Mathis
2020-10-21
칼로 자를 수 있을 만큼 빽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해외로 나가 다른 지역을 섬길 것이냐를 두고 공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때로는 전면전이 펼쳐지기도 한다.어떤 환경에서든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대개는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가 잘 짜여진 한 벌의 옷처럼 조화를 이룬다기보다 마치 경쟁하듯 교회의 관심을 더 끌기 위해 대립하는 갈등 관계를 일으킨다.한편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당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물리적 근접성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을 깊이 일깨운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혹 복음이 이미 전파된 지역에 살고 있더라도, 그 메시지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자들은 우리 주변에 여전히 많다. 잃어버린 영혼이 우리가 속한 도시에 너무도 많은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전 세계에 아직 복음을 접하지 않은 민족이 칠천 민족이나 된다는 사실에 우리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깊은 사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들이 생명의 소식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 이 둘 중 어디에 더 주력해야 할지 과연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새로운 긴장이 아니다제한된 물질과 재정, 그리고 개인의 소명을 고려한 인적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에는 어려운 결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선교든, 그 실행에 앞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예수님이 분부하신 사명이 얼마나 원대하면서 또한 단순한지를 한번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기독교 선교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우리의 관점이 분산되지 않기 때문이다.최근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 간에 존재하는 긴장을 해소하고자 어디서든 선교 지향적인 삶을 살자는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이러한 강조가 혹 신선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사실 두 선교 유형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은 새롭게 발생한 게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전인 1984년 11월,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는 베들레헴 침례교회에서 그러한 주제에 관해 설교한 적이 있다. 당시 교회는 세계 선교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한 지 일 년 정도 되었고, 이에 지역 선교를 앞세우는 이들은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 양자 간의 긴장은 설교 제목에도 반영되어 있다: ‘다양화된 국내 사역과 개척 선교의 관계’(The Relationship Between Diversified Domestic Ministries and Frontier Missions).그러므로 이러한 긴장이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며 또 하나님이 그 두 가지 사역을 조화로운 방식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지역 공동체를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 모두 용기를 낼 수 있다.왜 세계 선교는 지역 선교를 필요로 하는가그렇다면 왜 세계 선교가 지역 선교를 필요로 하는지,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선교 지향적인 삶을 사는 일이 왜 미전도 종족을 위한 사역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지, 여기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밝히고자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는 존 파이퍼의 1984년 설교에서 취한 내용이고, 세 번째 이유는 그로부터 도출한 내용이다.1. 지역 선교가 세계 선교의 ‘신뢰성’(credibility)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우리가 있는 장소에서 맺는 선교의 열매가 해외에서 진행되는 세계 선교에 신뢰성을 가져다줄 수 있다. 파이퍼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교회가 먼저 국내 사역 현장에서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사역[곧 지역 선교]에 헌신해야 최전방[즉 세계 선교]에 보냄 받아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사들에 대해 현지인들이 지속적으로 신뢰감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내 사역은 세계 선교의 신뢰성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신뢰성은 선교사의 모교회에 대해 궁금해 하는 현지인들만 아니라, 복음이 새로운 민족에게 전파될 때 큰 변화가 일어나기를 꿈꾸는 선교사들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2. 지역 선교가 세계 선교를 위한 ‘자원’(resources)을 제공하기 때문이다지역 선교는 세계 선교를 위한 자원을 제공한다. 이는 재정 자원과 인적 자원 모두를 말한다. 다시 한 번, 파이퍼의 설교를 인용해 보겠다. “국내 사역은 그리스도의 지상사명에 헌신할 새로운 지원자를 모집하여 그들에게 값진 훈련을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곧 세계 선교를 후원하는 데 쓰일 일꾼과 재정이 국내 사역을 통해 마련되지 않으면, 해외로 진출하여 제자를 삼으려는 고된 선교란 달성될 수 없다.3. 지역 선교가 세계 선교를 준비하는 ‘훈련’(training)의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이 이유도 파이퍼가 언급하기는 했으나, 여기서는 좀 더 발전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자국의 문화에서 우선적으로 익혀 또 다른 환경인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나 네 번째) 문화에서 상황화해야 하는 사역의 원리들이 있다. 만일 우리가 본토 문화에서 사역의 핵심 원리들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만큼 타지 문화에서 행해지는 독특한 관습을 잘못된 관점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기독교 신학의 대략적인 구성과 제자훈련의 기본 원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는 기술 등을 철저히 익히는 과정은 타문화권에 가서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환경에서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어려운 결정 사항을 다루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선행 학습이 된다.왜 지역 선교는 세계 선교를 필요로 하는가물론 세계 선교만 지역 선교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지역 선교도 세계 선교를 필요로 한다. 왜 세계 선교가 지역 선교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지, 여기서도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살펴보겠다.1. 세계 선교가 지역 선교의 ‘진정성’(authenticity)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해외로 전파되어야 할 만큼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지역 선교의 메시지도 진정성을 갖추게 된다. 즉 우리가 속한 도시나 국가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이 필요하다는 지역 선교의 메시지는 세계 선교를 통해서만 진정성을 확보하게 된다.예수님은 특정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 민족과 우리 언어와 우리 국민과 우리 나라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민족과 언어와 국민과 나라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곳에서 자신을 찾는 예배자들을 불러 그 비교할 수 없는 존엄성을 드러내고자 하신다. 인간의 마음에는 어느 한 민족이 섬기는 우상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깊은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살아계신 하나님, 즉 모든 민족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와 구속하신 참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역 선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소개하려는 분도 바로 그 열방의 하나님이지 그저 우리 지역만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아니다.이런 점에서 세계 선교는 우리에게 있는 복음이 해외로 전파되어야 할 만큼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2. 세계 선교가 지역 선교를 돌아볼 수 있는 ‘관점’(perspective)을 제공하기 때문이다복음을 품고 타문화권에 가서 선교하며 발견하게 된 내용은 본토 문화를 위한 사역에도 많은 지침을 제공해 준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존 문화권에서만 복음 사역을 하다 보면 사각지대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타지역에 가서 새로운 문화권 속에 교회가 정착하는 과정을 보며 여러 가지 경험을 하기에, 다시 파송 교회에 돌아오면 적지 않은 도전을 끼치게 된다. 이런 식으로 파송 교회도 선교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교사들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단지 그들의 사역을 알아주거나 그들이 추진하는 전략이나 기술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역을 제대로 평가하고 개혁하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이와 같이 지역 선교는 세계 선교가 제공하는 관점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도 서구 사회가 점차 탈기독교화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우리가 지속해 온 사역 방식을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런 접근은 지금까지 해 보지 못한 방식이야”라며 무조건 따라하다가는 교회가 성장하는 데 장애만 발생한다. 그런 자세보다는 “여기에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경청하며 그들의 도전을 받아들일 때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한 마디로, 자신이 파송한 선교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는 교회일수록 본토에서도 그만큼 더 훌륭한 사역을 수행하게 된다.3. 세계 선교가 지역 선교의 성숙도를 ‘확인’(confirmation)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세계 선교를 통해 지역 선교가 얼마나 성취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 선교는 훌륭한 지역 선교에 뒤따르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역 선교는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일꾼을 생산하고 파송하며 후원하는 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사역의 성숙과 건강 상태는 그런 목표를 얼마나 실현하느냐에 따라 측정된다. 물론 선교사 파송으로 지역 선교가 완성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선교사를 파송할 정도로 지역 사역이 진행되었다는 말은 이제 그 사역이 성숙한 운동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그와 반대로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는 사명에 교회가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는 그 공동체가 어딘가 병들어 있거나 매우 미숙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준다. 혹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공동체가 고립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교회가 지역 선교만이 아니라 세계 선교에도 참여하고 있다면, 이는 그 공동체가 건강하고 성숙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로써 교회가 해당 지역에서 견실한 복음 사역을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주님 안에 한 선교가 있을 뿐결국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는 서로에 의해 위축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활성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에 각 지역을 위한 사명과 세계에 흩어진 모든 민족을 위한 사명을 함께 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를 함께 명하셨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주님 안에서는 하나의 선교가 있을 뿐이다. 이에 우리는 복음이 이미 전파된 지역과 아직 전파되지 않은 지역을 위한 사역을 따로 구분하여 어느 쪽을 지원할지를 두고 갈라져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명하신 선교는 우리가 사는 도시와 세상에 있는 모든 영혼을 다 덮어 주는 하나의 옷자락과 같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Seamless Garment of Christian Mission번역: 장성우
선교지침
존파이퍼
지역선교
세계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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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진정성
문화권
성숙도
이웃들이 고백하는 새로운 신조
by Brett McCracken
2020-10-20
2017년, 반 트럼프 저항의 일환으로 파생된 세속적 의미의 “종교적” 부흥이 시작되던 그해에, 나는 그런 사회적 변화를 처음 알아차렸다. 실버레이크(L.A.),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및 기타 진보적 정치 세력이 주도하는 지역의 커피숍과 빈티지 미용실 창문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여기서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다양한 소외 집단의 목록이 열거되어 있는 문구 또는 표지판(sign) 이야기이다. 이 표지판은 점진적인 동맹과 포용성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표지판을 내건 곳은 “안전지대”라는 말을 하고 싶겠지만, 사실 나처럼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성 윤리를 믿는 기독교인도 거기서 환영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나는 일반 주택 마당에 이 표지판의 2.0 버전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고백하는 신조(신앙고백)와 비슷한 언어로 시작하기 때문에 진보주의가 표방하는 “세속적 종교”라는 모티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집에 사는 우리는 믿기를 …” 외에도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가장 자주 본 것(남가주 지역에서만 최소한 12군데에서 보았다)은 다음과 같다.이 집에 사는 우리는 믿기를:흑인 생명은 소중하다여자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다불법적인 인간은 없다과학만이 진짜이다사랑은 사랑이다친절은 모든 것이다이런 표지판을 마당에 자랑스럽게 세워 두는 사람들의 정치관을 공유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메시지가 가진 중요성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인들에게 깨달음과 더불어 확신을 주어야 한다. 다름 아니라 진보적인 이웃과 해야 할 것은 논쟁이 아니라 공유점을 찾는 상호간의 연결이라는 점이다. 탈 기독교 신조표지판의 언어가 주는 깨달음은 이것이다. 한 줄 한 줄의 의미 속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정치적 부담을 내포한 정치적인 함의가 포함되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안타깝게도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이제 이 신조를 한 줄 한 줄 살펴보자.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문제 많은 BLM 조직은 잠시 잊자. 어느 특정 그룹의 생명만 중요시하는 게 내포한 부작용도 잠시 옆으로 밀어 놓자. 이 구호가 가진 핵심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인간 생명이 가진 고유한 존엄성의 확인에 있다. 이 경우에는 그게 흑인에게만 해당되지만, 이런 메시지는 사실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성경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창 1:27). 기독교인이라면 흑인 생명이 소중하다는 주장에 동의해야 할 뿐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다른 종교도 생명의 소중함에 관해서 기독교만큼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피력해야 한다. 여자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다안타깝게도 이 문구를 올려놓은 사람들은 ‘여성의 권리’ 속에 무제한적인 낙태의 권리가 포함된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인권’에 대한 도덕적 권위가 바로 그 순간 훼손된다는 점이다. 태어나지 않은 인권도 결국은 인권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여성의 존엄성과 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은 실제로 그리스-로마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존엄하게 했던 성경(창 1:27, 갈 3:28)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여성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게다가 레베카 맥래플린(Rebecca McLaughlin)이 지적했듯이, 보편적 인권에 대한 개념 자체는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불법적인 인간은 없다진보적 정치 신념의 맥락에서 볼 때 이것은 미국 이민 정책에 대한 진술이다. 그러나 국경과 정책의 특수성이라는 맥락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 주장 또한 신학적 진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또는 골로새서 1장 21-22절 “전에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를 보라.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불법”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합법적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과학만이 진짜이다표면적으로만 볼 때 아마도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동의할 수 없는 진술이 이것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이 말하는 메시지는 특히 기후 변화와 과학 거부(science denialism)와 관련한 특정한 정치적 분열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과학이 기독교 신앙에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말하는 현실과 모순되거나 과학의 가치를 저해하는 그 어떤 메시지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같은 과거의 과학자 또는 프란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와 같은 오늘날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사랑이다이 짧은 문장으로 된 슬로건은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등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모든 ‘사랑’을 다 긍정하려는 LGBTQ 운동의 주장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표지판에 적힌 내용 중에 가장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의미론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실로 성스럽고 소중한 것을 단지 “당신이 원하는 수준까지” 한없이 자유롭도록, 그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가 다 사랑이라면, 그건 결국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리스도인 또한 사랑이 사랑이라고 단언하지만, 반역적인 피조물이 아닌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식의 자기 참조 문장(역자 주: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것처럼 문장 자체가 역설을 담고 있다는 의미. self-referential sentence)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친절은 모든 것이다이 말이 의미하는 진보적 확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절이다.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친절하고(엡 4:32), 황금률에 순종해야 한다(마 7:12). 이것은 중요하고 또 성경적이지만, 이 슬로건이 틀린 부분은 인간의 친절이 마치 타락한 인간의 죄성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도하게 신봉하는 점이다. 기독교적으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친절이 모든 것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추가해야 한다. 하나님의 친절은 인간의 친절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회개로 이끄는 친절(롬 2:4)이고 또 구원을 가져다주는 친절(딛 3:4-6)이다. 연결점(bridges)을 인식하자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진보 진영의 신조가 결코 성경적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평등, 존엄성, 사랑, 친절에 대한 진리를 생각할 때, 처음 형성한 기독교 문화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고, 또 기독교의 가치를 철저하게 담고 있는 ‘탈 기독교’ 신조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집에 사는 우리는 …”이라고 써서 마당에 세워놓은 표지판이 결코 정치적 도발의 상징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복음적인 초대가 되어야 한다. 종종 모든 문제를 다 휩쓸어버리는 정치적 욕지거리와 두려움만 뛰어넘을 수 있다면, 이 표시야 말로 얼마나 생산적인 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 표지판에 담긴 성경적 사상 중 일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심지어 파괴적인) 정치적 방식으로 왜곡되고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왜곡은 보수적 우파의 메시지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성경적 진리가 당파적 목적 때문에 왜곡되거나 잘못 사용되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고 또 필요한 도전을 던져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은혜의 발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믿는다”라고 표현한 신조의 문장 구조는 모든 인간이 종교적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믿어야만 하는, 예배하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마당 표지판에 숨은 진짜 메시지가 무엇이란 말인가? 달리 말해, 이 표지판을 내건 사람들이 믿고자 갈구하는,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여기가 기독교인이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지점이다. 은혜와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사랑과 정의 그리고 진리의 원천과 표준 속으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종교적 감상주의로 가득한 이 표지판은 사실 기독교인을 향해 사랑과 호기심이 넘치는 대화를 하고 싶다는 간청이기도 하다.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흑인의 생명 또는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근거는 무엇이지요?”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에서 ‘사랑’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요?” “누군가 남들 앞에서는 친절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타락한 사람이라고 할 때, ‘친절이 모든 것이다’라는 이 말은 어떻게 되는 것이죠?”탈 기독교 시대를 맞아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는 과거와 다른 종류의 많은 새로운 도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조가 적힌 마당 표지판은 우리에게 여전히 새로운 기회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r Neighbor’s New Creed: ‘In This House, We Believe . . .’번역: 무제
복음
변증
탈기독교시대
하나님의형상
인권
낙태
신앙고백
기독교신조
BLM
우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by Eric B. Watkins
2020-10-19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출애굽기 12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소개된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아니면 최소하나마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위안이란 위기의 한복판에서 찾아올 때가 많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을 때도 그들은 결코 안락한 상태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백 년 동안 애굽인 아래서 거친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지만, 수세기 동안 철저히 침묵하고 계셨다. 그리고 애굽은 이방 신들로 가득한 땅이었으며, 그 신들 가운데 하나로 자처했던 바로는 앞서 활약한 요셉이나 그 요셉이 섬기던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이렇듯 세월이 흘러 과거의 따뜻한 기억은 서늘하게 식어 갔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인 전체를 위해 행하신 모든 역사조차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하나님 백성은 불타는 태양처럼 내리쬐는 바로의 허영 아래서 말라가며, 끊임없이 일하고 또 일하는 종살이로 수척해져만 갔다. 그렇게 위기의 시간이 무르익었다.바로 이러한 어두움을 가르는 서광은, 다름 아닌 구속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셔서 이전에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며 그 약속을 이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더불어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나며, 바로가 신봉하던 신들이 그분 앞에서 하나씩 무너진다. 마치 맹렬히 도전하는 성읍을 공격하기 전 그 성읍의 외곽 지역부터 짓밟아 들어가는 군주와 같이, 하나님은 바로의 신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신다. 그러나 바로는 지나치게 교만해진 자기 자아를 요새로 삼아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완고한 마음을 키워 나간다. 이에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이 더 완고해지도록 내버려 두신다. 이러한 긴장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 앞에서 바로의 권력이 공중의 연기처럼 무력히 사라지는 장면을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바로가 신뢰하던 애굽의 모든 신들은 그분의 심판이 바로 자신을 향해 엄습해 올 때까지 차례대로 고꾸라진다. 그러다가 결국 마지막 재앙이 이르게 되자, 바로의 주변부를 치는 공격이 아니라 바로의 우상 숭배가 일어나는 그 현장, 다시 말해 그 마음을 치는 습격이 이루어진다. 곧 바로의 장자를 앗아가는 재앙이 들이닥친 것이다.우리는 이 대목을 급히 읽고 넘어가면 안 된다. 애굽인의 신앙에서 바로는 대대로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애굽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바로가 그들 중 하나로 간주되었고, 그 신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도 다름 아닌 바로와 그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점에서 바로의 장자는 단지 왕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아닌 미래의 왕, 즉 애굽의 왕좌에 올라 온 땅을 다스리는 신의 권세를 누릴 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로의 장자와 애굽인의 모든 장자를 치신 일은 바로의 그 마음뿐 아니라 전체 애굽인의 세계관에 결정타를 날리신 사건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애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는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덮쳤다. 심판자가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이로써 바로는 처참하게 패배해 무너졌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구속의 소망은 죄와 고통과 사망으로 얼룩진 흑암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곧 심판이 다가오는 중에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절망 가운데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지막 재앙이 들이닥치기 전날 밤, 이스라엘 백성은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죽이고 그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뿌렸다. 이는 예고된 그날 밤 심판자가 애굽 전역을 지나가다가 어린 양의 피를 보면 ‘넘어가게’ 되리라는 약속에 근거한 의식이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구속을 보여 줌과 동시에 그분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보여 주기도 했다. 즉 어린 양의 죽음에서 예시되는 그 끔찍한 심판을 상기시키면서도, 또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 대신하여 심판을 당하도록 다른 대속물을 제공하신다는 사실 역시 그 어린 양의 피를 통해 확신시켰다. 바로 여기에 이중적인 전가가 암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어린 양은 흠 없고 순결했으며, 눈에 띄는 결점도 없었다. 그런 양은 때가 묻지 않은 만큼 값도 비쌌다. 이처럼 흠 없는 어린 양이 각 집안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게 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본성상 죄악되었지만, 어린 양이 그들 자리를 대신해서 자기 피를 대속 제물로 흘림으로써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를 가로막던 죄악이 속하여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심판자가 그 피를 볼 때, 그들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위안의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가 역전된 것이다.오늘날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위안의 약속이 있다. 우리의 위안은 단순한 어린 양과 같이 한 마리의 짐승이 보여 주는 구속의 약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구속의 보혈을 통해 찾아오는 참된 위안이다(요 1:29). 이 어린 양은 혈과 육을 입은 세상의 대적들이 아닌 우리가 지은 죄의 삯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이에게 임할 캄캄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드려진 제물이었다. 이 모든 점에서 오랜 세월 애굽에서 종살이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영혼의 노예 상태를 생생히 보여 준다.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자나 여자, 혹은 노예나 자유인이나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본성상 죄에 종노릇하여 그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지닌 가장 큰 위기가 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출애굽기에서 애굽 전역을 지나갔던 그 심판자가 마지막 날 종말론적 심판을 행하실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최후 심판은 그분의 은혜 아래 몸을 숨기지 않은 모든 이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복음은 바로 그 구원을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증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가리셔서 최후 심판을 행하실 때 그 피를 보며 우리를 넘어가신다고 증언한다. 나아가 이보다 더 좋은 소식도 들려주는데,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고 순결하고 거룩할 뿐 아니라 사랑 받는 자녀로 받아주신다고 증언한다. 왜냐하면 흠 없는 어린 양의 피가 우리를 가려 주기 때문이다.이처럼 복음은, 유월절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 주던 진리를 오늘날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 진리는, 우리의 어떤 능력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이처럼 죄악된 우리에게 소망과 위안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복음은, 율법이 요구하던 모든 사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다고 말한다. 이 복음의 위안을 어떻게 받겠는가? 오직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뿌려야 했듯이, 오늘날 하나님 백성인 우리 역시도 믿음으로 그분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졌기에 마지막 심판 때 심판자가 우리를 넘어가게 되리라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종살이하던 시절의 두려움을 벗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그 거룩한 임재 가운데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실 하나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위안이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rist Our Passover번역: 장성우
심판
재앙
유월절
하나님의언약
애굽
종말
복음
구원
예수그리스도
니체가 맞았다
by Tim Keller
2020-10-18
톰 홀란드(Tom Holland)는 본격적인 기독교 역사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는 근대 서구 문화가 형성되는 데에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조명하는 책을 한 권 썼다. 그는 기독교가 끼친 영향을 “역설”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건 아주 적절하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기독교 교회는 바람직한 교회상을 보여주는 데에 처참할 정도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놓고 서로 간에 심하게 분열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에 관한 연구로 상을 받기도 한 역사가이자 고대 헬라어 번역가, 또 기록가이기도 한 홀란드는 이런 교회의 슬픈 역사를 낱낱이 보여준다. 비록 기독교 신앙이 가진 몇 가지 측면에 관해서는 깊은 존경을 갖고 있는 저자이지만, 그렇다고 그는 결코 교회를 옹호하는 변증가는 아니다. 결론은 이것이다. 홀란드가 쓴 책 ‘도미니언 : 기독교는 어떻게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는가?’(Dominion: How the Christian Revolution Remade the World)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의 책은 쉽게 읽을 수 있고 또 무엇보다 정말로 탁월하게 서술된 사례들을 통해서 현대 서구 세속 문화의 중심이 되는 가치와 우선순위가 사실상 기독교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대부분 교육받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버리고 있고, 또 대중 속에서 종교 자체가 심각한 후퇴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도 사회 전반을 향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 만연한 영향력으로 인해서 교회의 실패를 비난할 때 조차 우리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믿음을 먼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홀란드는 프리드릭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처음 선포한 기본적인 사상에 대해서 길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나열한다. 니체는 유럽의 지식인이 기독교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과학적 자유 사상가로서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건 달리 말해, 하나님 없이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인권, 모든 사람이 가진 동등한 존엄성,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가치, 그리고 인간 모두를 돌보고 옹호할 필요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이 큰 가치이며 서로에 대한 용서를 중요시하고 있다고 니체는 믿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이 없다는 그들이 여전히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를 믿는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한데, 특히 약한 자에 대한 억압이 잘못되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이러한 모든 사상은 기독교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상은 동양 문화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런 사상을 처음 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라면서 비웃었다. 홀란드는 여러 사례를 통해서 앵글로 색슨, 프랑크 족(Franks) 그리고 게르만과 같은 고대 이교도가 지배하던 유럽의 수치-명예 문화(the shame-and-honor cultures)의 기준에서 볼 때, 기독교가 주장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또 가난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라는 가르침은 결코 당시 사회에 뿌리내릴 수 없는 이질적인 사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사상은 자신의 형상대로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단 하나의 인격적 신이 존재하고 또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인간에게 오셔서 죽으신 구세주가 지배하는 우주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한,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사랑은 오로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만 자랄 수 있고, 다른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는 의미가 없었다. 만약에 우리라는 존재가 적자 생존의 과정을 통해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믿는다면, 절대적 도덕이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삶의 중심은 사랑이 아니라 권력과 지배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한다면 오로지 그 길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니체는 선언했다.니체가 이런 논증을 펼쳤을 때, 그는 미치광이로 매도당했다.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세계는 우리가 교회의 지배에서 멀어지고, 또 교회가 조장하는 미신과 편견을 버리는 길만이 현대 세계가 노예 제도를 종식시키고 인권을 고양하고 경험적인 과학을 발전시키며 성적인 자유를 증진시키는 길이라는 식의 서사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러나 지난 오십 년간 비록 느리지만 확실하게 학계를 주도하는 학자들은 니체가 맞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통찰력의 보석코넬 대학교의 브라이언 티어니(Brian Tierney)는 보편적 인권과 모든 개인의 평등에 대한 사상을 만든 것이 계몽주의 철학이 아니라 창세기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이루어진 창조를 서술한, 기독교 정경을 만든 12세기 학자들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오클라호마 대학의 카일 하퍼(Kyle Harper)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섹스는 서로 간의 완전한 합의 하에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은 기독교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실로 놀라운 새로운 개념임을 보여주었다. 역사가들(홀란드를 포함해서)은 로마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 줄리안이 급증하고 성장하는 기독교에 맞서 이교도를 되살리려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멸시했고, 그와 반대로 기독교인들은 병자, 고아, 가난한 사람들, 버려진 유아들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 결과 대중은 점점 더 그리스도를 향했는데, 가난한 자들을 위한 당시의 자선은 실로 기독교 신앙에서만 찾을 수 있는 고유한 것이었다. 다른 학자(홀란드를 포함해서)들은 현대 과학의 탄생도 세상이 환상(illusion)이라는 동양적 사고와 달리 이 세상을 실재한다고 말하는 기독교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지금도 작동하는 우주의 법칙을 만드신 존재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노예 문제에 관해서는 교회의 기록이 섞여있다. 많은 유럽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근거로 타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화 했다. 그리고 널리 알려졌듯이 교회 대부분은 아프리카 노예 거래에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홀란드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그중 하나는 노예 제도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게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노예 제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와 같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바로 깨닫게 됨으로 시작되었다. 두 번째는 노예 해방과 노예 제도 폐지가 비록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그런 운동을 주도한 이가 다름 아닌 퀘이커와 같은 기독교 단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홀란드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왜곡해서 학대와 착취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악용하던 그때에 조차도 기독교 속에는 오히려 억압자들에게 역효과를 안겨다 주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반복적으로,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 운하를 통과하든, 매사추세츠 하구에 정착하든, 트란스발(Transvaal)로 깊숙이 트레킹을 떠나든, 자신들이 쫓아내고 있는 사람들보다 자기네가 다 우월하다고 믿던 유럽인들의 확신은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반복해서 [중략] 식민지 주민과 노예들에게 가장 확실한 목소리를 제공한 것은 [중략] 기독교였다. 그런 역설은 실로 심오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제국을 건설하는 그 어떤 정복자 중에서 지금껏 그 누구도 식민지 관리자의 명령에 따라 고문을 당하다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모습으로 그런 정복을 이룬 이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정복자 중에 그 누구도 [중략] 권력의 개념 자체가 문제가 될 정도로 양면적이기 그지없는 권력의 상징을 [중략] 만들어낸 이는 없었다”(504).홀란드의 책은 여기서 나열하기에는 너무나도 많고 훌륭한 이야기와 통찰력의 보석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더 큰 정의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 주는 희망이야말로 실로 독특한 기독교 사상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 사실, 다른 문화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정교 분리라는 개념 자체가 세속 세계에 의해 교회에 강요된 것이 아니라, 원래 어거스틴(Augustine)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또한 기독교가 근본적으로는 문화적 유연성을 지지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을을 알게 된다. 기독교는 결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러니까 어떻게 옷을 입고, 먹고, 살고, 일해야 하는지를 세세하게 지시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홀란드는 심지어 미투(#MeToo) 운동 조차도 애초에 남성에 대한 성적 이중 기준을 요구하지 않았던 최초의 기독교적 성 혁명이 이 시대에 맞게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한다.궁극적인 질문책의 마지막에 가서야 아주 짧지만 홀란드는 책 내용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이런 인본주의적 가치(humanistic values)가 정말로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기독교의 믿음을 저버리는 사회에서는 이런 가치 조차도 점점 더 그 의미를 잃어가는 건 아닌가? 홀란드는 이렇게 썼다. “세속적 인본주의가 이성이나 과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독교 진화의 독특한 과정에서 나온 게 사실이라면- 유럽과 미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이 죽었다면서, 신을 떠나는 현실 또한 그런 진화 과정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그런 인본적인 가치가 단지 죽은 신의 시체가 드리우는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단지 신화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이 갖고 있는 이 도덕성의 기초는 무엇이란 말인가”(540)? 홀란드는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개인의 세속인이 매우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크게 볼 때, 그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한 사회의 전반을 떠받치는 가치 체계가 사실상 기반으로 삼고 있는 믿음 자체를 내던지는 사회가 어떻게 그 가치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무신론자에게 다가가기’(Atheist Overreach)를 쓴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와 ‘자아의 근원’(Sources of the Self) 그리고 ‘세속적 시대’(A Secular Age)를 쓴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와 같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약화됨에 따라 이러한 가치가 지속될 수 있을지 여부에 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을 쓴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도 동일한 주장을 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점점 더 버리면서도 인본주의적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무신론자 조지 씨알라바(George Sciallabba)는 테일러의 책을 리뷰하면서 이 질문이 최소한 우리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미덕을 굳게 붙잡는 데에는 때때로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기 희생은 초월적인 정당화 또는 어떤 동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바탕이 되는 가장 일반적이고 또 가장 논리적인 동기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그게 아니면, 테일러는 이렇게 신중하게 논증을 펼친다. 현대의 자유는 초월성에 대한 거부를 수반하기 때문에 현대인이 가진 미덕은 전적으로 우발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오랫동안 선할 수 있을까? 그 점에 대한 테일러의 의심은 엄청나다. 그리고 또한 거기에는 빠르게 생겨나는 나의 불편함도 있다. 그 불편함의 근원은 비록 재치있고 잠정적으로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고 개연성 있게 표현된 테일러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상이 애초의 토대에서부터 잘못되었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고백한다. 아마도 이런 의심을 가지고 평생 살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새로운 이해(Chastened Understanding)톰 홀란드는 모든 장에서 기독교와 세속주의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해를 깨어부수고 있다. 그는 수 없이 많은 실패를 반복하는 교회를 위한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또한 세속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가 이성과 과학적 조사의 결과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self-evident)인 양 착각하도록 놔두지도 않는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양측이 다 홀란드로부터 배울 수만 있다면, 이들 간의 대화는 앞으로 훨씬 더 유익해질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좀 더 정확하게 반영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Nietzsche Was Right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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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에게 있어 ‘은혜’와 ‘기도’에 관하여
by 장대선
2020-10-17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단연코 ‘은혜’(Gratia)일 것이다. 물론 은혜 외에도 ‘감사’나 ‘기쁨’같은 단어들도 흔히 사용되지만, 신앙의 대화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단어가 바로 은혜이며 거의 일상의 감탄사라 할 만큼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하지만 동시에 은혜에 대한 이해와 그 용법에 있어, 보편적으로나 광의적(broad sense)으로 사용되는 실정이어서 종종 그 의미와 실천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산을 판매하는 신자에게는 비가 자주 내리는 일을 은혜라고 하겠지만, 또 소금을 판매하는 신자에게는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 은혜가 되는 모순의 상황에 종종 직면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은혜라는 단어는 다분히 주관적인 개념이며, 자신에게 감사와 기쁨을 야기하는 일련의 현상들이 바로 은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그런데 사실 신학적 의미에서의 은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통용하는 주관적인 개념과 다르게 아주 보편적이고 공적인 개념의 단어다. 대표적으로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 있어 기초적인 바탕을 이루는 인물인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수고(노력)를 반영하는 신학인 펠라기우스 주의(Pelagianism)를 반박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 가운데서 다루어지는 전적인 은혜(summa gratia)가 바로 은혜라고 설명한다. 즉,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반응으로서의 선행(beneficium)에 반대하여,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뤄지는 역사와 은총만을 그 은혜로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칼뱅(Jean Calvin, 1509-1564)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개혁적 신학자들이 말하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전가되는 일련의 내용들을, 특히 구원과 관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총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미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교리 가운데서 편만하게 용인된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것의 발현으로서의 선행, 그리고 공로(meritum) 등의 사상을 개혁하여,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맥락 가운데 있는 ‘은총론’(gratia doctrina)의 요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그러한 은혜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이나 수고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란,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만 기인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반면에 펠라기우스 주의의 자유의지론과 선행의 이해를 충분히 수용한 로마 가톨릭 신앙에 있어서 은혜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되, 우리의 의지와 노력(수고)이 충분히 반영되어 제시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전적인 은혜를 베푸시되, 아무런 준비나 기대도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준비하며 소망하는 자들, 곧 스스로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베푸신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바로 그러한 공로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다. 고행(ascetismus)을 비롯한 온갖 공로적 도구로서 이해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인 것이다.사실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라고 믿고 사는 우리에게도 별로 생소하지 않은 실정이다. 개혁된 교회에 속한 신자들마저도 기도에 대해 공로적 이해가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은혜’ 혹은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간절하면서도 열심이 있는 기도를 통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는 것으로 은혜에 대한 진솔한 고백들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7장 7-8절에서 주님은 간절하면서 열심이 있는 기도를 통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게 되는 은혜에 대하여 다소 지지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구절들 가운데서 또 이르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마치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바 소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최상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 분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7장 12절에서 조금 이상한 뉘앙스의 말씀이 이어진다. 갑자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시며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신다. 더구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10장 13절에서는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전체적인 문맥과 다소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이다.하지만 누가복음 11장의 본문에서는 마태복음 7장과는 다르게 상당히 축약 기록하여 주님께서 전체적으로 어떤 취지의 말씀을 하시려는지를 더 넓게 파악해 볼 수 있다. 즉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Lord's Prayer)에 관한 언급 가운데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신 것이 바로 이어지는 말씀의 문맥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구하여 기도할 것이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과 교훈으로 축약되는 율법의 취지를 따라 행하는 것이며, 아울러 이러한 율법의 취지를 깨닫고 따라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시리라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11장 13절의 언급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의 문맥과 취지를 따라서 우리의 개혁된 신앙에서는 기도가 자신의 소망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한 의지와 노력의 도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적용된 구원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사실 이 같은 성경의 취지는 이미 개혁된 교회들의 유산인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 가운데 잘 정리되고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은 제18장에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 가운데서 ‘은혜’를 고백하고 있고, 또한 제21장의 경건한 예배와 안식일로서의 주일에 관한 교리 가운데서 ‘기도’에 관해 다루고 있다. 다만 그 맥락과 의미가 좀 더 포괄적인 범위 가운데서 다루어지고 있어 그 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은혜의 상태’에 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은 1항에서 고백하기를 “주 예수를 참으로 믿으며,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에 따라 행하려 애쓰는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으로 확신할 수 있는데, 이러한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또 제21장에서는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로서 ‘기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하지만 기도에 관해 개혁된 신학의 설명이 항상 전체적인 맥락으로서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기독교 교리를 강론하는 일련의 문답서들, 특히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논문 또는 신학의 전체와 실체’(a treatise of christian religion or, the whole body and substance of divinity)라는 책에 담긴 교리문답 가운데서 확연하게 구별하여 살펴볼 수가 있다. 카트라이트의 교리문답 제40장은 기도 혹은 기원(invocation)에 관하여 설명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라고 물은 뒤에 “기도와 맹세다.”라고 답하여, 기도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할 것으로 설명한다. 계속해서 “첫째로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둘째로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셋째로 어떤 힘과 능력에 의해, 넷째로 어떤 이유로 기도해야 하는가?” 라는 일반적 질문들을 통해 기도의 속성을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는 ‘간구’와 ‘감사’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간구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가 구하는 것”이며, 이는 마태복음 6장과 7장, 그리고 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 설명하시려는 의미와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또 카트라이트는 기도의 다른 부분인 ‘감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기도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한다”라며 “일반적으로는 세상의 통치에서, 특히 교회의 통치에서 보여 지는 그 분의 선하심, 지혜, 권능, 긍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한 간구에 의해서 주신 그 특별한 은총들로 인해 찬양하며, 그밖에 우리가 그 분의 긍휼의 손길로부터 받았던 것들로 인해 찬양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교리의 맥락에서뿐 아니라 기도라는 주제에 더욱 집중한 교리의 맥락에서도 확연하게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하고 끌어내는 수단(혹은 도구)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 반응하며 수반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요한 한 요소를 이루는 것이다.끝으로 기도에 관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간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하여 보면,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들에 대해서는 성령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곧,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에서 파악할 수 있다. 또 성령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합당하게 구할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바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들이니(마 7:1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 6:31절) 염려하며 간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33절)는 것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절)라고 하는 주기도문의 가르침에 충실한 기도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 우리들이 구하는 것들 대부분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구하는 것들이라면, 우리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은혜라기보다는 믿음의 형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관련해서 이미 주님께서는 가르쳐 이르시기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러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신자들이라면, 아마도 주기도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절)이라고 한 문구의 의미를 깊이 실감할 것이다. 그런 신자들의 기도는 이미 받은 은혜 가운데 있는 믿음으로 기꺼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기도, 곧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에서 고백한 것처럼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로서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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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라면 해내야 할 일곱 가지 역할
by Jonathan Leeman
2020-10-16
‘교회 정치’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너무도 자주, 사람들은 공동 의회, 당회, 아니면 예산이나 카펫 색깔을 놓고 벌이는 싸움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교회 정치는 단순히 그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영위하는 교회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의 등록교인인 ‘당신에게’ 예수님이 할 일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섬기는 교회 장로들의 직분이 특별한 것은 맞지만, 당신의 직분 역시 그러하다. 예수님이 뜻하신 바는 당신이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 장로들이 당신을 훈련시키는 것이다.예수님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에서는 모두에게 역할을 주시는데, 그 역할에 따르는 의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적어도 일곱 가지가 있다. 1.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라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의 등록교인인 당신에게는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근본적인 의무에 대해 성경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가르치는데, 이는 당신이 사랑과 선행과 격려에 당신 자신을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히브리서 저자는 모이기를 게을리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심판에 대해 경고한다(26–27절).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지 않으면 아래에 나올 다른 여섯 가지 의무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교회에 출석해야 다른 일도 할 수 있다. 2. 복음을 수호하는 일에 참여하라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의 일원인 당신에게는 교회 안에서 복음 그 자체 및 복음에 관련된 사역을 보호하고 지킬 책임이 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바울을 상기해보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6절). 그는 목사가 아닌 교회 성도들을 꾸짖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르길, 다른 복음을 가르친다면 그들이 사도들이나 천사들이라 해도 등을 돌리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 모두 복음을 공부하고 복음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60초 이하로 복음을 요약해서 말할 수 있는가?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가, 없는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가?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선행, 교제, 손대접이 교회의 복음 전파 사역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 교회의 정체성과 사역이 특정 정치 정당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복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질문들이 이런 것들이다. 장로들의 도움 없이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홀로 찾아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답을 구할 때 장로들이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 하지 않고 있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직무에 태만한 것이다.복음을 알라. 그리고 그 복음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라. 3. 교인을 받는 일에 참여하라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의 등록교인인 당신에게는 복음의 백성들을 교인으로 받거나 거부하는 것을 통해 복음 그 자체 및 복음에 관련된 사역을 보호하고 지킬 책임이 있다.권징 문제에 있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장로들이 아닌 고린도 교회 전체에게 권면한다(고전 5:1–13; 고후 2:6–8). 어떤 교인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바로 그리스도인 된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결국 신학적 자유주의가 일어나게 된다.물론 공동 의회에 참석해서 새 교인에 대해 투표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일주일 내내 동료 교인들을 알아가고, 또한 그들도 당신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고 그들을 감독할 수는 없다. 적어도 진정성을 가지고 하려 한다면, 그리는 못할 것이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 한 명 한 명을 다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이 일을 공동체로서 해낸다. 당신의 평온한 일상 안으로 동료 교인들을 초청하라. 바울은 이 일을 위한 유용한 점검 목록을 제공한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0–13)이 목록 내용을 잘 실천하고 있는가?4. 교회 성도들의 회의에 참석하라복음을 지키며 복음 백성들이 교인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교인들의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 교회마다 의사 결정 방식이 다르지만, 이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복음의 “내용”(복음의 교리)이나 복음의 “대상”(복음에 속한 이들)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곳에는 반드시 참석하는 것이 옳다.사무실로 출근해야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흔히, 사람들에게는 공동의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해가 되는 것은, 너무 많은 공동의회들이 건강하지 못한 논쟁과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에서 보는 결혼 생활들이 불행해 보인다고 해서 내 자신이 결혼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섬겼던 많은 교회들은 공동의회 분위기가 따뜻했고, 서로를 격려했으며, 모두가 참여하는 가족 모임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그 회의를 인도하는 목사들의 리더십과 철저한 회의 준비이겠지만, 그 회의에 참여하는 당신의 역할 또한 크다.5. 동료 교인들을 제자훈련하라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의 등록교인이라면 다른 성도들을 제자 훈련함으로써 복음 그 자체 및 복음에 관련된 사역을 보호하고 지킬 책임이 있다.에베소서 4장 15–16절을 기억하라. 교회는 각 지체가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면서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나간다.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부는 말씀 사역이다. 본문에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바울은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25절)고 한다. 서로에게 진리를 말함으로 함께 성장하라.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는 권면 역시 기억하라. 또한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를 지니라.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기독교의 기본은 다른 이들을 세워가는 것에 있다. 이 일은 지상 대명령 수행 및 제자 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6.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두 번째 아담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을 제사장과 왕 같은 이로 회복시키셨다면, 당신의 모든 삶은 그 말과 행위에 있어 복음을 반영해야 마땅하다. 당신은 하나님의 대사이다. 바울의 명령과 모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9b–20).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도록 간청하고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 역시 당신이 해야 할 일임을 기억하라.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은 당신에게 주신 것이다(마 28:19). 7. 리더에게 순종하라위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 의무를 우리가 수행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사역을 위해 성도들을 온전하게 인도하는 것은 목사와 장로들의 책임이다(엡 4:12). 장로들이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교회가 복음 안에 서도록 교리문답을 하지 않으며,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성장시키라는 명령을 제대로 수행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마찬가지로, 이는 장로들의 가르침과 권면에 따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딤후 1:13). 그들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사랑과 오래 참음과 박해를 받음과 고난을 따라가라(딤후 3:10–11). 잠언에서 보듯,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킴으로 지혜와 공의와 생명의 길을 택하는 지혜로운 아들과 딸이 되라. 보석이나 황금을 얻는 것보다 좋은 일이다.권위에는 책임이 따른다성경은 모인 회중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바로 이 때문에 회중에게는 책임 또한 있는 것이다. 권위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의 등록 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 교회가 가르치는 일에 대해, 또한 모든 교인의 제자훈련에 대해 당신도 책임을 지게 된다는 뜻이다. ▪ 만약 에드(Ed) 목사가 다른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면, 이를 막아야 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 당신은 교인 후보인 크리스(Chris)가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다. ▪ 수(Sue) 자매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라갈 뿐 아니라 그녀를 보살피고 성장시켜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자라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 교인인 맥스(Max)의 삶과 신앙이 더 이상 일치하지 않을 때 그를 성도들의 교제로부터 배제시켜야 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이 모든 일을 위해 누가 당신을 훈련시키는가? 교회의 장로들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과 장로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합쳐보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r 7 Job Responsibilities as a Church Member번역: 이정훈
교회생활
지역교회
역할
의무
제자훈련
책임
성도
등록교인
율법이 정한 손 씻기, 자가 격리, 마스크 쓰기
by 박용기
2020-10-15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10월 현재 전 세계적으로 3천6백만 명 이상이 코로나 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1백5만 명 이상이 치료 중 사망했다. 일반적으로 바이러스는 비말감염과 접촉감염으로 전파된다. 비말감염은 감염자가 입을 벌려 이야기하거나 기침, 재채기할 때 체액이 작은 물방울인 비말로 튀어나와 상대방에게 감염된다. 접촉감염은 감염자의 체액이 묻은 물건이나 사람을 접촉함으로 전염된다. 이러한 바이러스 감염을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방법은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를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약 3500년 전에 모세가 기록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오늘날 우리가 시행하는 방역 규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공 보건을 위해서 율법으로 주어졌다. 1. 손 씻기 성경에서 손을 씻는 의미는 정결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만남의 장소인 성막 안에 물을 담은 놋대야와 같은 물두멍을 만들라고 명령하신다. 제사장들은 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어야 했다. 제사장들은 손을 씻지 않고 성소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30:21). 시체를 만지고 자신의 몸을 씻지 않는 자 역시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민 19:20)이라고 말씀한다.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평생 손 씻기를 철저하게 지켰던 바리새인들에게 손 씻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함이라고 말씀하셨다(막 7:1-7). 이 말씀은 손을 씻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육체의 정결을 위해 손을 씻으라는 말씀이다. 손을 깨끗하게 씻은 직후 손에 묻은 수십 마리에 불과한 세균은 3시간 정도가 지나면서 일반적으로 26만 마리로 증가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권장하는 30초 손 씻기 방법을 참고하여 거룩한 손 씻기를 소개하겠다. 식사 전에는 거룩한 손 씻기를 통해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자. ① 깨끗한 흐르는 물에 손을 적신 후, 비누칠하고 손등과 손가락 사이 그리고 손톱 밑을 비누 거품으로 닦자. ② 최소 20초간 비누 거품으로 손을 씻어야 한다. 20초 동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양을 한 번 부르며 손과 마음을 동시에 씻자. ③ 흐르는 물에 비누 거품을 씻어낸 후, 타올이나 에어 드라이어로 손에서 물기를 말리자.2. 자가 격리 현재 해외에서 한국으로 입국하는 사람은 모두 코로나19 진단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그 결과가 음성으로 나와도 바이러스 잠복기를 고려하여 14일 동안 더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 레위기 13장에서도 피부 감염병으로 의심이 될 때 14일 동안 자가 격리를 해야 했다. 첫 번째 7일째에 제사장은 의심 환자를 진단한다. 이때 음성을 판정을 받더라도 의심 환자는 추가로 7일 동안 자가 격리 후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레 13:4-5). 만약 피부 전염병 환자로 확진 판정을 받으면 이스라엘 백성 캠프 밖으로 나가 격리된 채,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46).가족 중 한 사람이 피부 전염병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 공동체 캠프 밖으로 보내져 격리된 채로 평생을 살게 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나와 가족만 생각한다면 전염병 사실을 감추고 생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레위기는 전염병 진단 기간에 있는 자는 예배드리러 나가지 말고, 14일간 자가 격리를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삶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마 22:37-40). 레위기에서 전염 병균은 죄를 상징한다. 영문 밖으로 쫓겨난 전염병 환자는 범죄하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아담과 오버랩 된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고 격리된 인간은 결국은 외로움과 두려움 가운데 죽게 된다. 예수님은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죄인들을 위해서 친히 영문 밖으로 나가셨다.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지셨다. 그곳에서 부정한 자로 하나님께 철저하게 버림받았고, 죽임 당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예수님이 영문 밖으로 나가 부정한 자로 고난 받으심으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길을 열어주셨다. 3. 마스크 쓰기 피부 전염병으로 확진 판정을 받은 자는 “윗입술을 가리고 …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한다(레 13:45). ‘윗입술을 가리고’를 NIV 성경에서 ‘cover the lower part of their face’로 표현했는데, ‘그들의 얼굴 아랫부분을 덮고’라고 번역된다. 오늘날로 말하면 마스크를 쓰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얼굴 아랫부분을 덮는 것은 슬픔과 수치를 상징한다(레 13:45; 겔 24:17; 미 3:7). 마스크를 써야만 공공장소에 갈 수 있는 오늘 우리의 현실은 매우 답답하고 슬프다. 마스크로 답답함을 느낄 때 죄가 우리의 영혼을 수치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슬프게 함을 떠올리자. 예수님만이 슬픔의 마스크를 벗겨 주시고 찬송의 옷(사 61:3)을 입혀 주시는 분임을 늘 기억하자. 그리스도인은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몸을 청결하게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영혼이 죄에 감염되지 않도록 거룩한 영적인 방역 활동도 병행해야만 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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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3편에서 아삽이 말하는 좋은 죽음
by Timothy Kleiser
2020-10-14
“줄거리를 포기하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지만, 마지막에 내가 죽는 걸로 하지요.” 이건 마가렛 에드슨(Margaret Edson)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연극 ‘위트(Wit)’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비비안 베어링(Vivian Bearing)의 대사이다. 이런 암울한 장면은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관객들로 하여금 비비안이 죽을 지 말 지에 대한 추측을 하게 하는 대신, 죽음 자체를 향한 비비안의(그리고 우리의) 태도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누구나 다 죽음을 맞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누구나 다 살기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죽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우리는 예외없이 이런 현실을 회피하는 데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자 제프 그린버그(Jeff Greenberg)가 이름 붙인 그대로, 죽음은 우리 삶의 “본질에 자리잡고 있는 벌레”이다. 소설가 필립 로스(Philip Roth)는 또 이렇게 말한다. “침착하고 합리적인 모든 사람 속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두 번째 사람이 숨어있다.”죽음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게 끝(finality)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지금도 다가오고 있고, 죽음의 도래가 가져다주는 질문은 너무도 많다. 내 인생은 가치가 있었던가? 내가 그동안 살면서 이룬 것에 어떤 목적이 있었던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질문들을 직면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우리는 “나는 이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극을 받는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좋은 죽음”을 갈망한다. 내가 “좋은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증명하는 죽음 앞에서 누리는 평안한 준비 말이다. 페트라르카(Petrarch)는 이렇게 썼다. “좋은 죽음은 한 평생에 대한 영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이를 보다 더 시적으로 표현했다. “잘 보낸 하루는 행복한 잠을 가져다주고, 제대로 산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다준다.”좋은 삶= 좋은 죽음?기독교인에게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이라는 공식은 역설을 가져다준다. 왜 거룩한 자가 고통받는데 악한 자가 잘 먹고 잘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가? 이 질문은 열두 편의 시편을 쓴 이스라엘의 음악가 아삽을 괴롭힌 문제였다(시 50, 73–83편).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인생의 문제와 슬픔에서 벗어나서 행복한 삶을 살다가 평안하게 죽음을 준비하면서 맞는, 사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다(4-5절). 이미 쓰고도 남을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부와 지위를 더 높이기 위해 폭력과 각종 억압을 사용하는 교만한 자들이다(6-7절). 이런 모든 과정 속에서 그들은 한없이 교만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거나 관심을 갖고 있다는 식의 생각을 비웃으며 조롱한다. 죽음 뒤에 자신들의 삶을 판단하는 그 어떤 심판도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아주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다(8-12절).이런 사람들과는 정 반대로, 다윗 왕 밑에서 수석 음악가로 또 예루살렘에서 언약궤 앞에서 찬양 사역을 감당했던 아삽은 실로 의로운 사람이었다(대상 16:1-5). 그러나 이런 아삽의 모든 신실함에 대한 보상은 그를 죽을 때까지 괴롭혔던 만성적인 고통과 각종 고난이었다(14 절). 그는 점점 더 악인을 질투하게 되었고(3절), 한 걸음 더 나아가 궁금해졌다. 내가 고통받는 동안 악인이 내내 번영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따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걸까(2, 13절)?믿을 수 없는 인간의 재치비비안 베어링이 ‘위트’의 말미에서 죽을 것이라고 밝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중은 그녀가 어떻게 죽을지를 알게 된다. 바로 난소암이다. 난소암의 예후를 들은 비비안은 자신이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야? 나는 영어로 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깊이 있게 죽음을 탐구했던 ‘존 던의 신성한 소네트(Donne 's Holy Sonnets)’를 연구한 학자니까.” 매우 성공적인 학자인 비비안에게 죽음은 본능적인 현실이 아니라 일종의 지적인 궁금함이었으며, 게다가 그녀의 놀라운 재치를 적용하기에 딱 알맞은 수수께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암이 그녀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하고, 죽음이 보다 더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아삽처럼 비비안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아삽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인간의 지혜 또는 재치(wit)야 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비참한 준비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지혜는 고통이 없고 번영으로 가득 찬 현실이야 말로 좋은 삶의 가장 확실한 표시이자, 동시에 좋은 죽음에 대한 가장 순수한 약속이라고 말한다. 물론 건강과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건 본질적으로 전혀 잘못된 게 아니다. 이러한 축복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시편 73편에 등장하는 악인처럼,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더 갈망할 때 발생한다. 아삽의 지혜가 그에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대신 고통과 당혹함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왔다(17절).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시는 주께서는 또한 빼앗을 수도 있음을 아삽은 깨달았다(욥 1:21). 사악한 자들에게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 누렸던 축복과 함께 언젠가는 “순간에 황폐하게 될 것”(19절)을 의미한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일어나서 “그들을 파멸에 던지시고”, 또 그들은 “완전한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18-20절).죽음으로 이끄는 평안‘위트’ 속 중요한 한 장면에서 비비안은 그녀의 교수였던 애쉬포드(E. M. Ashford)와의 대화를 회상한다. 그는 비비안에게 존 던(John Donne)의 시(sonnet) “죽음아, 교만하지 마라”에 대한 논문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 논문에서 비비안은 세미콜론과 느낌표를 사용하여 존 돈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분석을 어색하게 병치하는, 달리 말해 “엉터리로 구두점을 남용하는” 방식에 의존한 것 같다. 올바른 버전을 통해서 이 극적인 구두점은 단순한 쉼표로 대체된다.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죽음은 죽을 것이다.”“죽음은 이제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느낌표를 붙여서 연기해야 하는 게 아니야.” 애쉬포드는 말한다. “단지 호흡일 뿐이야. 삶과 삶을 영원히 구분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쉼표라는 거지.” 그러나 비비안은 여전히 지적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럼 재치가 중요하군요!” 비비안은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애쉬포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베어링 양, 재치가 아니야, 중요한 건 진리야.” 죽음은 실로 인간의 호흡처럼 순간에 지나가는 것이다. 시편 73편에 나오는 악인처럼,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 확실한 중단(hard stop),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단의 마지막 결말이라는 확신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런 믿음을 붙잡은 사람들은 그 어떤 어리석은 신이나 최후의 심판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살다가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사악한 자들이 임종시에 느끼는 안도감은 평안의 표시가 아니라 마비의 증거가 된다. 자기도 모르게 뱀에게 물려서 마비된 사람처럼, 악인은 치명적인 독이 지금도 자신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번영하던 악인이 평화롭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평화는 끝없는 죽음으로 이끄는 일시적인 평화일 뿐이다. 영원한 멸망이 악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아삽은 단 한 순간도 이 땅에서 행복한 악인을 부러워하지 않았다(21-22절).생명으로 이끄는 고통‘위트’의 이야기는 이제 비비안이 받은 항암 치료가 그녀를 일종의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암에 걸리기 전 비비안은 비할 데 없는 재치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런 성공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만을 의지하게 만들었고 또 오만한(highbrow) 자만심으로 타인과 거리를 두는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그러나 항암 치료가 끝날 무렵, 비비안은 그토록 자신하던 재치에 대한 확신은 떨어지게 되고, 오히려 별로 배운 거 없는(lowbrow) 간호사 수지를 어린 아이처럼 의존하게 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린아이처럼 바뀐 그녀의 변신이 완성된다. 애쉬포드 교수가 방문해서 존 던을 읽어주겠다고 말했지만, 비비안은 거부한다. 이 장면은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에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붙잡고 있던 번영의 수단을 거부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신 애쉬포드의 품에 안긴 비비안은 늙은 교수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듣는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집에서 도망칠 것을 꿈꾸는 새끼 토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생각을 알아챈 엄마 토끼가 새끼 토끼를 끝까지 쫓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새끼 토끼는 이렇게 대답한다. “에이, 그냥 지금 있는 곳에서 엄마의 새끼 토끼로 사는 게 낫겠다.” 애쉬포드 교수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 우리 영혼에 대한 우화 같지 않아? 우리의 영혼이 어디에 숨어있든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숨은 영혼을 찾아내시거든. 안 그래? 비비안?” 비비안은 교수의 말에 동의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삽도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잠시 무식한 동물처럼 행동했지만(22절), 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생각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이 결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23절).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져다주는 세 가지 유익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1) 아삽을 그의 손으로 지키신다, (2) 아삽의 길을 인도하신다, 그리고 (3) 아삽이 죽을 때 그를 당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맞아주신다(23-24절). 헤아릴 수 없는 이런 축복을 자신의 힘과 지혜만 믿고 사는 가난한 악인과 비교해보라.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만으로도 번영하는 삶과 평화로운 죽음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덤 너머에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실로 비참할 정도로 인간의 지혜는 부족하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다가 죽은 이들은 죽음이라는 짧은 잠을 자고 지옥에서 깨어났을 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들의 소망이 마침내 영원토록 이뤄졌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하고 나서야 아삽은 자기가 처한 상황이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을 느낀다. 오히려 반대로, 그를 슬프게 만들었던 고통은 오히려 새로운 종류의 축복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의지하는 처참한 구덩이에서 아삽을 들어올림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생명과 지속적인 만족을 알도록 하신 것이다. 감사함에 넘쳐서 그는 이제 이렇게 선언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5-26절). 고대 희곡 작가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는 이렇게 말했다. “번영 속에서 삶을 마친 사람에 한해서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번영(prosper)”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따라 이 말은 사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아삽이 배운 것처럼, 우리는 그 번영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인간의 지혜와 재치를 감히 믿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와는 달리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은 악인이 누리는 평화로 정의되지 않으며, 의인이 견디는 고통 때문에 부정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27절)은 가장 끔찍한 고통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28절)은 가장 고귀한 번영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죽음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Good Death in Psalm 73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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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삽
고통의의미
천국과지옥
악인의번영
하나님의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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