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신자에게 있어 ‘은혜’와 ‘기도’에 관하여
by 장대선
2020-10-17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단연코 ‘은혜’(Gratia)일 것이다. 물론 은혜 외에도 ‘감사’나 ‘기쁨’같은 단어들도 흔히 사용되지만, 신앙의 대화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단어가 바로 은혜이며 거의 일상의 감탄사라 할 만큼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하지만 동시에 은혜에 대한 이해와 그 용법에 있어, 보편적으로나 광의적(broad sense)으로 사용되는 실정이어서 종종 그 의미와 실천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산을 판매하는 신자에게는 비가 자주 내리는 일을 은혜라고 하겠지만, 또 소금을 판매하는 신자에게는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 은혜가 되는 모순의 상황에 종종 직면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은혜라는 단어는 다분히 주관적인 개념이며, 자신에게 감사와 기쁨을 야기하는 일련의 현상들이 바로 은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그런데 사실 신학적 의미에서의 은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통용하는 주관적인 개념과 다르게 아주 보편적이고 공적인 개념의 단어다. 대표적으로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 있어 기초적인 바탕을 이루는 인물인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수고(노력)를 반영하는 신학인 펠라기우스 주의(Pelagianism)를 반박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 가운데서 다루어지는 전적인 은혜(summa gratia)가 바로 은혜라고 설명한다. 즉,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반응으로서의 선행(beneficium)에 반대하여,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뤄지는 역사와 은총만을 그 은혜로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칼뱅(Jean Calvin, 1509-1564)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개혁적 신학자들이 말하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전가되는 일련의 내용들을, 특히 구원과 관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총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미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교리 가운데서 편만하게 용인된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것의 발현으로서의 선행, 그리고 공로(meritum) 등의 사상을 개혁하여,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맥락 가운데 있는 ‘은총론’(gratia doctrina)의 요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그러한 은혜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이나 수고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란,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만 기인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반면에 펠라기우스 주의의 자유의지론과 선행의 이해를 충분히 수용한 로마 가톨릭 신앙에 있어서 은혜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되, 우리의 의지와 노력(수고)이 충분히 반영되어 제시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전적인 은혜를 베푸시되, 아무런 준비나 기대도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준비하며 소망하는 자들, 곧 스스로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베푸신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바로 그러한 공로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다. 고행(ascetismus)을 비롯한 온갖 공로적 도구로서 이해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인 것이다.사실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라고 믿고 사는 우리에게도 별로 생소하지 않은 실정이다. 개혁된 교회에 속한 신자들마저도 기도에 대해 공로적 이해가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은혜’ 혹은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간절하면서도 열심이 있는 기도를 통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는 것으로 은혜에 대한 진솔한 고백들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7장 7-8절에서 주님은 간절하면서 열심이 있는 기도를 통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게 되는 은혜에 대하여 다소 지지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구절들 가운데서 또 이르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마치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바 소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최상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 분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7장 12절에서 조금 이상한 뉘앙스의 말씀이 이어진다. 갑자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시며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신다. 더구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10장 13절에서는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전체적인 문맥과 다소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이다.하지만 누가복음 11장의 본문에서는 마태복음 7장과는 다르게 상당히 축약 기록하여 주님께서 전체적으로 어떤 취지의 말씀을 하시려는지를 더 넓게 파악해 볼 수 있다. 즉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Lord's Prayer)에 관한 언급 가운데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신 것이 바로 이어지는 말씀의 문맥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구하여 기도할 것이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과 교훈으로 축약되는 율법의 취지를 따라 행하는 것이며, 아울러 이러한 율법의 취지를 깨닫고 따라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시리라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11장 13절의 언급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의 문맥과 취지를 따라서 우리의 개혁된 신앙에서는 기도가 자신의 소망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한 의지와 노력의 도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적용된 구원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사실 이 같은 성경의 취지는 이미 개혁된 교회들의 유산인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 가운데 잘 정리되고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은 제18장에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 가운데서 ‘은혜’를 고백하고 있고, 또한 제21장의 경건한 예배와 안식일로서의 주일에 관한 교리 가운데서 ‘기도’에 관해 다루고 있다. 다만 그 맥락과 의미가 좀 더 포괄적인 범위 가운데서 다루어지고 있어 그 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은혜의 상태’에 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은 1항에서 고백하기를 “주 예수를 참으로 믿으며,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에 따라 행하려 애쓰는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으로 확신할 수 있는데, 이러한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또 제21장에서는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로서 ‘기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하지만 기도에 관해 개혁된 신학의 설명이 항상 전체적인 맥락으로서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기독교 교리를 강론하는 일련의 문답서들, 특히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논문 또는 신학의 전체와 실체’(a treatise of christian religion or, the whole body and substance of divinity)라는 책에 담긴 교리문답 가운데서 확연하게 구별하여 살펴볼 수가 있다. 카트라이트의 교리문답 제40장은 기도 혹은 기원(invocation)에 관하여 설명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라고 물은 뒤에 “기도와 맹세다.”라고 답하여, 기도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할 것으로 설명한다. 계속해서 “첫째로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둘째로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셋째로 어떤 힘과 능력에 의해, 넷째로 어떤 이유로 기도해야 하는가?” 라는 일반적 질문들을 통해 기도의 속성을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는 ‘간구’와 ‘감사’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간구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가 구하는 것”이며, 이는 마태복음 6장과 7장, 그리고 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 설명하시려는 의미와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또 카트라이트는 기도의 다른 부분인 ‘감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기도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한다”라며 “일반적으로는 세상의 통치에서, 특히 교회의 통치에서 보여 지는 그 분의 선하심, 지혜, 권능, 긍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한 간구에 의해서 주신 그 특별한 은총들로 인해 찬양하며, 그밖에 우리가 그 분의 긍휼의 손길로부터 받았던 것들로 인해 찬양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교리의 맥락에서뿐 아니라 기도라는 주제에 더욱 집중한 교리의 맥락에서도 확연하게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하고 끌어내는 수단(혹은 도구)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 반응하며 수반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요한 한 요소를 이루는 것이다.끝으로 기도에 관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간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하여 보면,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들에 대해서는 성령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곧,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에서 파악할 수 있다. 또 성령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합당하게 구할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바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들이니(마 7:1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 6:31절) 염려하며 간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33절)는 것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절)라고 하는 주기도문의 가르침에 충실한 기도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 우리들이 구하는 것들 대부분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구하는 것들이라면, 우리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은혜라기보다는 믿음의 형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관련해서 이미 주님께서는 가르쳐 이르시기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러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신자들이라면, 아마도 주기도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절)이라고 한 문구의 의미를 깊이 실감할 것이다. 그런 신자들의 기도는 이미 받은 은혜 가운데 있는 믿음으로 기꺼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기도, 곧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에서 고백한 것처럼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로서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교리
은혜
기도
어거스틴
펠라기우스
로마가톨릭
칼뱅
은총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주기도문
성도라면 해내야 할 일곱 가지 역할
by Jonathan Leeman
2020-10-16
‘교회 정치’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너무도 자주, 사람들은 공동 의회, 당회, 아니면 예산이나 카펫 색깔을 놓고 벌이는 싸움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교회 정치는 단순히 그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영위하는 교회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의 등록교인인 ‘당신에게’ 예수님이 할 일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섬기는 교회 장로들의 직분이 특별한 것은 맞지만, 당신의 직분 역시 그러하다. 예수님이 뜻하신 바는 당신이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 장로들이 당신을 훈련시키는 것이다.예수님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에서는 모두에게 역할을 주시는데, 그 역할에 따르는 의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적어도 일곱 가지가 있다. 1.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라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의 등록교인인 당신에게는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근본적인 의무에 대해 성경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가르치는데, 이는 당신이 사랑과 선행과 격려에 당신 자신을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히브리서 저자는 모이기를 게을리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심판에 대해 경고한다(26–27절).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지 않으면 아래에 나올 다른 여섯 가지 의무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교회에 출석해야 다른 일도 할 수 있다. 2. 복음을 수호하는 일에 참여하라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의 일원인 당신에게는 교회 안에서 복음 그 자체 및 복음에 관련된 사역을 보호하고 지킬 책임이 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바울을 상기해보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6절). 그는 목사가 아닌 교회 성도들을 꾸짖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르길, 다른 복음을 가르친다면 그들이 사도들이나 천사들이라 해도 등을 돌리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 모두 복음을 공부하고 복음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60초 이하로 복음을 요약해서 말할 수 있는가?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가, 없는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가?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선행, 교제, 손대접이 교회의 복음 전파 사역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 교회의 정체성과 사역이 특정 정치 정당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복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질문들이 이런 것들이다. 장로들의 도움 없이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홀로 찾아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답을 구할 때 장로들이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 하지 않고 있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직무에 태만한 것이다.복음을 알라. 그리고 그 복음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라. 3. 교인을 받는 일에 참여하라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의 등록교인인 당신에게는 복음의 백성들을 교인으로 받거나 거부하는 것을 통해 복음 그 자체 및 복음에 관련된 사역을 보호하고 지킬 책임이 있다.권징 문제에 있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장로들이 아닌 고린도 교회 전체에게 권면한다(고전 5:1–13; 고후 2:6–8). 어떤 교인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바로 그리스도인 된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결국 신학적 자유주의가 일어나게 된다.물론 공동 의회에 참석해서 새 교인에 대해 투표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일주일 내내 동료 교인들을 알아가고, 또한 그들도 당신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고 그들을 감독할 수는 없다. 적어도 진정성을 가지고 하려 한다면, 그리는 못할 것이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 한 명 한 명을 다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이 일을 공동체로서 해낸다. 당신의 평온한 일상 안으로 동료 교인들을 초청하라. 바울은 이 일을 위한 유용한 점검 목록을 제공한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0–13)이 목록 내용을 잘 실천하고 있는가?4. 교회 성도들의 회의에 참석하라복음을 지키며 복음 백성들이 교인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교인들의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 교회마다 의사 결정 방식이 다르지만, 이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복음의 “내용”(복음의 교리)이나 복음의 “대상”(복음에 속한 이들)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곳에는 반드시 참석하는 것이 옳다.사무실로 출근해야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흔히, 사람들에게는 공동의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해가 되는 것은, 너무 많은 공동의회들이 건강하지 못한 논쟁과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에서 보는 결혼 생활들이 불행해 보인다고 해서 내 자신이 결혼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섬겼던 많은 교회들은 공동의회 분위기가 따뜻했고, 서로를 격려했으며, 모두가 참여하는 가족 모임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그 회의를 인도하는 목사들의 리더십과 철저한 회의 준비이겠지만, 그 회의에 참여하는 당신의 역할 또한 크다.5. 동료 교인들을 제자훈련하라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의 등록교인이라면 다른 성도들을 제자 훈련함으로써 복음 그 자체 및 복음에 관련된 사역을 보호하고 지킬 책임이 있다.에베소서 4장 15–16절을 기억하라. 교회는 각 지체가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면서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나간다.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부는 말씀 사역이다. 본문에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바울은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25절)고 한다. 서로에게 진리를 말함으로 함께 성장하라.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는 권면 역시 기억하라. 또한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를 지니라.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기독교의 기본은 다른 이들을 세워가는 것에 있다. 이 일은 지상 대명령 수행 및 제자 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6.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두 번째 아담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을 제사장과 왕 같은 이로 회복시키셨다면, 당신의 모든 삶은 그 말과 행위에 있어 복음을 반영해야 마땅하다. 당신은 하나님의 대사이다. 바울의 명령과 모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9b–20).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도록 간청하고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 역시 당신이 해야 할 일임을 기억하라.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은 당신에게 주신 것이다(마 28:19). 7. 리더에게 순종하라위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 의무를 우리가 수행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사역을 위해 성도들을 온전하게 인도하는 것은 목사와 장로들의 책임이다(엡 4:12). 장로들이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교회가 복음 안에 서도록 교리문답을 하지 않으며,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성장시키라는 명령을 제대로 수행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마찬가지로, 이는 장로들의 가르침과 권면에 따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딤후 1:13). 그들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사랑과 오래 참음과 박해를 받음과 고난을 따라가라(딤후 3:10–11). 잠언에서 보듯,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킴으로 지혜와 공의와 생명의 길을 택하는 지혜로운 아들과 딸이 되라. 보석이나 황금을 얻는 것보다 좋은 일이다.권위에는 책임이 따른다성경은 모인 회중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바로 이 때문에 회중에게는 책임 또한 있는 것이다. 권위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의 등록 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 교회가 가르치는 일에 대해, 또한 모든 교인의 제자훈련에 대해 당신도 책임을 지게 된다는 뜻이다. ▪ 만약 에드(Ed) 목사가 다른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면, 이를 막아야 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 당신은 교인 후보인 크리스(Chris)가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다. ▪ 수(Sue) 자매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라갈 뿐 아니라 그녀를 보살피고 성장시켜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자라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 교인인 맥스(Max)의 삶과 신앙이 더 이상 일치하지 않을 때 그를 성도들의 교제로부터 배제시켜야 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이 모든 일을 위해 누가 당신을 훈련시키는가? 교회의 장로들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과 장로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합쳐보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r 7 Job Responsibilities as a Church Member번역: 이정훈
교회생활
지역교회
역할
의무
제자훈련
책임
성도
등록교인
율법이 정한 손 씻기, 자가 격리, 마스크 쓰기
by 박용기
2020-10-15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10월 현재 전 세계적으로 3천6백만 명 이상이 코로나 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1백5만 명 이상이 치료 중 사망했다. 일반적으로 바이러스는 비말감염과 접촉감염으로 전파된다. 비말감염은 감염자가 입을 벌려 이야기하거나 기침, 재채기할 때 체액이 작은 물방울인 비말로 튀어나와 상대방에게 감염된다. 접촉감염은 감염자의 체액이 묻은 물건이나 사람을 접촉함으로 전염된다. 이러한 바이러스 감염을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방법은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를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약 3500년 전에 모세가 기록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오늘날 우리가 시행하는 방역 규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공 보건을 위해서 율법으로 주어졌다. 1. 손 씻기 성경에서 손을 씻는 의미는 정결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만남의 장소인 성막 안에 물을 담은 놋대야와 같은 물두멍을 만들라고 명령하신다. 제사장들은 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어야 했다. 제사장들은 손을 씻지 않고 성소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30:21). 시체를 만지고 자신의 몸을 씻지 않는 자 역시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민 19:20)이라고 말씀한다.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평생 손 씻기를 철저하게 지켰던 바리새인들에게 손 씻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함이라고 말씀하셨다(막 7:1-7). 이 말씀은 손을 씻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육체의 정결을 위해 손을 씻으라는 말씀이다. 손을 깨끗하게 씻은 직후 손에 묻은 수십 마리에 불과한 세균은 3시간 정도가 지나면서 일반적으로 26만 마리로 증가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권장하는 30초 손 씻기 방법을 참고하여 거룩한 손 씻기를 소개하겠다. 식사 전에는 거룩한 손 씻기를 통해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자. ① 깨끗한 흐르는 물에 손을 적신 후, 비누칠하고 손등과 손가락 사이 그리고 손톱 밑을 비누 거품으로 닦자. ② 최소 20초간 비누 거품으로 손을 씻어야 한다. 20초 동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양을 한 번 부르며 손과 마음을 동시에 씻자. ③ 흐르는 물에 비누 거품을 씻어낸 후, 타올이나 에어 드라이어로 손에서 물기를 말리자.2. 자가 격리 현재 해외에서 한국으로 입국하는 사람은 모두 코로나19 진단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그 결과가 음성으로 나와도 바이러스 잠복기를 고려하여 14일 동안 더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 레위기 13장에서도 피부 감염병으로 의심이 될 때 14일 동안 자가 격리를 해야 했다. 첫 번째 7일째에 제사장은 의심 환자를 진단한다. 이때 음성을 판정을 받더라도 의심 환자는 추가로 7일 동안 자가 격리 후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레 13:4-5). 만약 피부 전염병 환자로 확진 판정을 받으면 이스라엘 백성 캠프 밖으로 나가 격리된 채,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46).가족 중 한 사람이 피부 전염병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 공동체 캠프 밖으로 보내져 격리된 채로 평생을 살게 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나와 가족만 생각한다면 전염병 사실을 감추고 생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레위기는 전염병 진단 기간에 있는 자는 예배드리러 나가지 말고, 14일간 자가 격리를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삶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마 22:37-40). 레위기에서 전염 병균은 죄를 상징한다. 영문 밖으로 쫓겨난 전염병 환자는 범죄하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아담과 오버랩 된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고 격리된 인간은 결국은 외로움과 두려움 가운데 죽게 된다. 예수님은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죄인들을 위해서 친히 영문 밖으로 나가셨다.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지셨다. 그곳에서 부정한 자로 하나님께 철저하게 버림받았고, 죽임 당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예수님이 영문 밖으로 나가 부정한 자로 고난 받으심으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길을 열어주셨다. 3. 마스크 쓰기 피부 전염병으로 확진 판정을 받은 자는 “윗입술을 가리고 …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한다(레 13:45). ‘윗입술을 가리고’를 NIV 성경에서 ‘cover the lower part of their face’로 표현했는데, ‘그들의 얼굴 아랫부분을 덮고’라고 번역된다. 오늘날로 말하면 마스크를 쓰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얼굴 아랫부분을 덮는 것은 슬픔과 수치를 상징한다(레 13:45; 겔 24:17; 미 3:7). 마스크를 써야만 공공장소에 갈 수 있는 오늘 우리의 현실은 매우 답답하고 슬프다. 마스크로 답답함을 느낄 때 죄가 우리의 영혼을 수치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슬프게 함을 떠올리자. 예수님만이 슬픔의 마스크를 벗겨 주시고 찬송의 옷(사 61:3)을 입혀 주시는 분임을 늘 기억하자. 그리스도인은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몸을 청결하게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영혼이 죄에 감염되지 않도록 거룩한 영적인 방역 활동도 병행해야만 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사회이슈
손씻기
자가격리
마스크쓰기
세계보건기구
코로나19
팬데믹
이웃사랑
사회적거리두기
시편 73편에서 아삽이 말하는 좋은 죽음
by Timothy Kleiser
2020-10-14
“줄거리를 포기하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지만, 마지막에 내가 죽는 걸로 하지요.” 이건 마가렛 에드슨(Margaret Edson)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연극 ‘위트(Wit)’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비비안 베어링(Vivian Bearing)의 대사이다. 이런 암울한 장면은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관객들로 하여금 비비안이 죽을 지 말 지에 대한 추측을 하게 하는 대신, 죽음 자체를 향한 비비안의(그리고 우리의) 태도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누구나 다 죽음을 맞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누구나 다 살기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죽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우리는 예외없이 이런 현실을 회피하는 데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자 제프 그린버그(Jeff Greenberg)가 이름 붙인 그대로, 죽음은 우리 삶의 “본질에 자리잡고 있는 벌레”이다. 소설가 필립 로스(Philip Roth)는 또 이렇게 말한다. “침착하고 합리적인 모든 사람 속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두 번째 사람이 숨어있다.”죽음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게 끝(finality)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지금도 다가오고 있고, 죽음의 도래가 가져다주는 질문은 너무도 많다. 내 인생은 가치가 있었던가? 내가 그동안 살면서 이룬 것에 어떤 목적이 있었던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질문들을 직면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우리는 “나는 이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극을 받는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좋은 죽음”을 갈망한다. 내가 “좋은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증명하는 죽음 앞에서 누리는 평안한 준비 말이다. 페트라르카(Petrarch)는 이렇게 썼다. “좋은 죽음은 한 평생에 대한 영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이를 보다 더 시적으로 표현했다. “잘 보낸 하루는 행복한 잠을 가져다주고, 제대로 산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다준다.”좋은 삶= 좋은 죽음?기독교인에게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이라는 공식은 역설을 가져다준다. 왜 거룩한 자가 고통받는데 악한 자가 잘 먹고 잘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가? 이 질문은 열두 편의 시편을 쓴 이스라엘의 음악가 아삽을 괴롭힌 문제였다(시 50, 73–83편).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인생의 문제와 슬픔에서 벗어나서 행복한 삶을 살다가 평안하게 죽음을 준비하면서 맞는, 사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다(4-5절). 이미 쓰고도 남을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부와 지위를 더 높이기 위해 폭력과 각종 억압을 사용하는 교만한 자들이다(6-7절). 이런 모든 과정 속에서 그들은 한없이 교만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거나 관심을 갖고 있다는 식의 생각을 비웃으며 조롱한다. 죽음 뒤에 자신들의 삶을 판단하는 그 어떤 심판도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아주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다(8-12절).이런 사람들과는 정 반대로, 다윗 왕 밑에서 수석 음악가로 또 예루살렘에서 언약궤 앞에서 찬양 사역을 감당했던 아삽은 실로 의로운 사람이었다(대상 16:1-5). 그러나 이런 아삽의 모든 신실함에 대한 보상은 그를 죽을 때까지 괴롭혔던 만성적인 고통과 각종 고난이었다(14 절). 그는 점점 더 악인을 질투하게 되었고(3절), 한 걸음 더 나아가 궁금해졌다. 내가 고통받는 동안 악인이 내내 번영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따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걸까(2, 13절)?믿을 수 없는 인간의 재치비비안 베어링이 ‘위트’의 말미에서 죽을 것이라고 밝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중은 그녀가 어떻게 죽을지를 알게 된다. 바로 난소암이다. 난소암의 예후를 들은 비비안은 자신이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야? 나는 영어로 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깊이 있게 죽음을 탐구했던 ‘존 던의 신성한 소네트(Donne 's Holy Sonnets)’를 연구한 학자니까.” 매우 성공적인 학자인 비비안에게 죽음은 본능적인 현실이 아니라 일종의 지적인 궁금함이었으며, 게다가 그녀의 놀라운 재치를 적용하기에 딱 알맞은 수수께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암이 그녀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하고, 죽음이 보다 더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아삽처럼 비비안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아삽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인간의 지혜 또는 재치(wit)야 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비참한 준비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지혜는 고통이 없고 번영으로 가득 찬 현실이야 말로 좋은 삶의 가장 확실한 표시이자, 동시에 좋은 죽음에 대한 가장 순수한 약속이라고 말한다. 물론 건강과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건 본질적으로 전혀 잘못된 게 아니다. 이러한 축복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시편 73편에 등장하는 악인처럼,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더 갈망할 때 발생한다. 아삽의 지혜가 그에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대신 고통과 당혹함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왔다(17절).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시는 주께서는 또한 빼앗을 수도 있음을 아삽은 깨달았다(욥 1:21). 사악한 자들에게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 누렸던 축복과 함께 언젠가는 “순간에 황폐하게 될 것”(19절)을 의미한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일어나서 “그들을 파멸에 던지시고”, 또 그들은 “완전한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18-20절).죽음으로 이끄는 평안‘위트’ 속 중요한 한 장면에서 비비안은 그녀의 교수였던 애쉬포드(E. M. Ashford)와의 대화를 회상한다. 그는 비비안에게 존 던(John Donne)의 시(sonnet) “죽음아, 교만하지 마라”에 대한 논문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 논문에서 비비안은 세미콜론과 느낌표를 사용하여 존 돈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분석을 어색하게 병치하는, 달리 말해 “엉터리로 구두점을 남용하는” 방식에 의존한 것 같다. 올바른 버전을 통해서 이 극적인 구두점은 단순한 쉼표로 대체된다.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죽음은 죽을 것이다.”“죽음은 이제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느낌표를 붙여서 연기해야 하는 게 아니야.” 애쉬포드는 말한다. “단지 호흡일 뿐이야. 삶과 삶을 영원히 구분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쉼표라는 거지.” 그러나 비비안은 여전히 지적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럼 재치가 중요하군요!” 비비안은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애쉬포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베어링 양, 재치가 아니야, 중요한 건 진리야.” 죽음은 실로 인간의 호흡처럼 순간에 지나가는 것이다. 시편 73편에 나오는 악인처럼,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 확실한 중단(hard stop),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단의 마지막 결말이라는 확신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런 믿음을 붙잡은 사람들은 그 어떤 어리석은 신이나 최후의 심판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살다가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사악한 자들이 임종시에 느끼는 안도감은 평안의 표시가 아니라 마비의 증거가 된다. 자기도 모르게 뱀에게 물려서 마비된 사람처럼, 악인은 치명적인 독이 지금도 자신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번영하던 악인이 평화롭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평화는 끝없는 죽음으로 이끄는 일시적인 평화일 뿐이다. 영원한 멸망이 악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아삽은 단 한 순간도 이 땅에서 행복한 악인을 부러워하지 않았다(21-22절).생명으로 이끄는 고통‘위트’의 이야기는 이제 비비안이 받은 항암 치료가 그녀를 일종의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암에 걸리기 전 비비안은 비할 데 없는 재치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런 성공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만을 의지하게 만들었고 또 오만한(highbrow) 자만심으로 타인과 거리를 두는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그러나 항암 치료가 끝날 무렵, 비비안은 그토록 자신하던 재치에 대한 확신은 떨어지게 되고, 오히려 별로 배운 거 없는(lowbrow) 간호사 수지를 어린 아이처럼 의존하게 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린아이처럼 바뀐 그녀의 변신이 완성된다. 애쉬포드 교수가 방문해서 존 던을 읽어주겠다고 말했지만, 비비안은 거부한다. 이 장면은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에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붙잡고 있던 번영의 수단을 거부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신 애쉬포드의 품에 안긴 비비안은 늙은 교수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듣는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집에서 도망칠 것을 꿈꾸는 새끼 토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생각을 알아챈 엄마 토끼가 새끼 토끼를 끝까지 쫓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새끼 토끼는 이렇게 대답한다. “에이, 그냥 지금 있는 곳에서 엄마의 새끼 토끼로 사는 게 낫겠다.” 애쉬포드 교수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 우리 영혼에 대한 우화 같지 않아? 우리의 영혼이 어디에 숨어있든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숨은 영혼을 찾아내시거든. 안 그래? 비비안?” 비비안은 교수의 말에 동의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삽도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잠시 무식한 동물처럼 행동했지만(22절), 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생각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이 결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23절).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져다주는 세 가지 유익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1) 아삽을 그의 손으로 지키신다, (2) 아삽의 길을 인도하신다, 그리고 (3) 아삽이 죽을 때 그를 당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맞아주신다(23-24절). 헤아릴 수 없는 이런 축복을 자신의 힘과 지혜만 믿고 사는 가난한 악인과 비교해보라.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만으로도 번영하는 삶과 평화로운 죽음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덤 너머에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실로 비참할 정도로 인간의 지혜는 부족하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다가 죽은 이들은 죽음이라는 짧은 잠을 자고 지옥에서 깨어났을 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들의 소망이 마침내 영원토록 이뤄졌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하고 나서야 아삽은 자기가 처한 상황이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을 느낀다. 오히려 반대로, 그를 슬프게 만들었던 고통은 오히려 새로운 종류의 축복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의지하는 처참한 구덩이에서 아삽을 들어올림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생명과 지속적인 만족을 알도록 하신 것이다. 감사함에 넘쳐서 그는 이제 이렇게 선언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5-26절). 고대 희곡 작가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는 이렇게 말했다. “번영 속에서 삶을 마친 사람에 한해서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번영(prosper)”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따라 이 말은 사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아삽이 배운 것처럼, 우리는 그 번영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인간의 지혜와 재치를 감히 믿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와는 달리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은 악인이 누리는 평화로 정의되지 않으며, 의인이 견디는 고통 때문에 부정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27절)은 가장 끔찍한 고통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28절)은 가장 고귀한 번영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죽음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Good Death in Psalm 73번역: 무제
신학
구약
시편73편
죽음
아삽
고통의의미
천국과지옥
악인의번영
하나님의임재
변증적 설교 :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라
by 고상섭
2020-10-13
팀 켈러 목사의 설교의 가장 큰 특징은 변증적 설교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인생 베이직 시리즈’는 팀 켈러 목사의 설교의 핵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그의 설교를 분석하고 이해하기 적합한 책이다. 앞으로 두 번에 걸쳐 팀 켈러 설교의 변증적 방법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팀 켈러 목사 변증적 설교 방식은 코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 변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서 사용한다. ‘전제주의 변증’이란 복음을 선포할 때 단순히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경과 복음을 믿지 않는 이유를 파헤치고 상대방 안에 있는 잘못된 전제 즉 그 사람이 가진 신념의 모순을 드러낸 후, 복음으로 초대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팀 켈러의 설교에는 청중과의 ‘접촉 요소’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중과 접촉되는 요소를 통해 그들의 생각 속에 있는 잘못된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파헤친다. 이 접촉요소를 위해 팀 켈러는 일반서적들을 읽으면서 문화적 내러티브를 파악하고, 다양한 서적과 자료들을 통해 문화 내러티브에 대해 반대하는 자성의 목소리를 연결하여 설교에 자주 인용하는 편이다. ‘인생 베이직 시리즈’를 통해 문화 내러티브를 분석하고 그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자. 1.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라 1) 결혼에 대한 문화 내러티브오늘날 결혼에 대한 문제 중의 하나는 결혼의 시기가 늦어지고 결혼의 비율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왜 현대사회는 이전 시대보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비율이 높은가? 팀 켈러는 두 가지 이유를 설명하는데 하나는 경제적 스트레스이고 또 하나는 팽배한 개인주의라고 분석한다. (결혼에 관하여 12쪽)결혼을 하면 경제적으로 자원이 축난다고 생각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부담은 더 해질 것이라는 불안과 결혼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신념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은 더욱 상대방에게 과도한 짐을 안겨주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건강한 결혼의 기초를 놓을 수 없게 된다고 설명한다.(결혼에 관하여 18-22쪽)현대의 결혼관은 결국 자기중심적 결혼관이며, 그것이 결국 결혼을 통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고,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전 인격을 내어주는 헌신을 통해 연합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팀 켈러는 강요하지 않지만 두 가지 세계관을 대비시켜주고, 세상의 문화적 관점은 모순이 존재하고, 성경적 관점으로 결혼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하고 이치에 맞는 삶임을 드러내준다. 이 과정을 충실히 할 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팀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청중은 비록 설교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설교의 논리 전개에는 강하게 공감할 것이다.”(센터처치 22쪽) 2) 죽음에 대한 문화 내러티브 과거와는 달리 현대인들은 죽음 자체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왜 오늘날의 사람들은 선조들에 비해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 이유를 팀 켈러는 네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현대 의술의 발달로 죽음을 우리 눈에 띄지 않게 가려놓았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죽음과 시체를 보는 경우도 많았는데 요즘은 병원 영안실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기 때문에 죽음과 일반 사람들의 삶이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세속화를 통해 현재의 의미와 만족을 추구하는 세계관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죽음을 부정하다보면 깊은 존재의 허무감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도록 노력하는 경향이 강하다. 네 번째는 죄와 죄책감 그리고 용서라는 범주가 사라졌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런 문화 내러티브의 분석은 단순히 팀 켈러의 생각이 아니라 어네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과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일반서적들을 인용함으로 더욱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죽음에 관하여 14-34쪽)팀 켈러는 ‘설교’에서도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권위있는 사람들의 말을 활용해 논지에 힘을 실으라”고 말한다. 특히 성경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동원해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설교 144쪽)팀 켈러는 이런 문화적 내러티브에 영향을 받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신념이 가진 모순과 그 뿌리를 알려줌으로 그 신념이 바르지 않은 기초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복음으로 초대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전개한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죽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그 죽음은 인간의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일임을 선포한다. 특히 팀 켈러가 문화 내러티브 안에 있는 신념을 드러낼 때는 일반 서적들을 사용해서 모순을 드러낸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의 생각의 모순을 드러낼 때 성경을 통해 반박을 하게 되면 으레 반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 팀 켈러는 적군의 칼을 통해 적군 스스로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 문화 내러티브를 형성하게 된 다양한 신념들을 동일한 문화 내러티브 안에서 반대의견을 통해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2. 성경적 대안이 가장 합리적임을 증명하라성에 대한 오늘날의 문화 내러티브는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서도 자유로운 성관계를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성경이 말하는 혼인 안에서 성관계는 자유를 제약하는 규제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팀 켈러는 그 문화적 내러티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2018년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Courtney Sender라는 여성의 ‘He Asked Permission to Touch, but Not to Ghost’(그는 내 몸을 터치할 때는 늘 허락을 구했지만, 그 뒤에 그냥 종적을 감춰버렸다)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이 여성은 데이트 앱에서 한 남자를 만나 성관계를 가졌는데, 남자는 사사건건 여성의 합의를 구했다. 스웨터를 벗겨도 되는지, 그녀가 허락하자 탱크톱과 브래지어를 벗겨도 되는지 차례로 물었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일종의 배려로 느껴져 아주 친밀함이 들었다는 그 여성은 그 다음날 문자를 보내자 답이 없고 그 남자는 그냥 잠적해 버렸다. 그 사건을 경험한 여성은 오늘날 남자와 여자들 사이의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것의 폭이 너무 좁다는 것을 깨달았다. 팀 켈러는 뉴욕 타임즈의 글을 그대로 설교에 인용하여 오늘날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그 여성의 목소리로 들추어낸다. “합의를 성적인 부분으로만 국한 시키면 의미가 없어진다. 몸은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일부분일 뿐이다. … 육체만 배려하는 합의가 아니라 … 상대의 전인격을 배려하는 것이면 좋겠다. … ‘내가 당신을 배려하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다음날 사라져 버려도 될까요?’라는 물음에 그러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이런 예를 통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에게 삶 전체를 내어주지 않으면서 몸만 준다면 이는 자아의 통합성을 인식하지 못한 처사이다. 하나의 오롯한 인격체에서 몸만 떼어날 수는 없다. 남녀 간의 성관계는 진정 서로의 삶을 주고받는 행위여야 한다. 나중에 제멋대로 떠날 사람에게 몸만 내주는 것은 인간성이 말살된다.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결혼에 관하여 27-30쪽)문화 내러티브를 따라 생각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순을 뉴욕 타임즈의 기사를 통해 더 쉽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문화 내러티브는 인간의 인격을 총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몸만 떼어내서 생각하는 잘못된 관점임을 깨닫게 된다. 아울러 그토록 고리타분한 규제라고 생각했던 성경적 관점이 더 총체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임을 인식하게 된다. 팀 켈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합의에 관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관점이 가장 깊고 폭넓다. 부부 사이에서만 잠자리를 허용할 수 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말은 성행위는 전인적 합의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팀 켈러의 변증의 방식은 지혜롭다. 성경과 문화를 대비시키면서 싸우는 작업을 거치지 않고 쉽게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신념들의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성경적 해답에만 집중하지 말고,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낼 수 있는 일반서적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념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은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일반서적은 삶의 문제에 해답을 제공해 주지 않지만 다양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이제는 더욱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신앙서적을 포함한 다양한 일반서적의 독서를 통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들이 필요한 시대이다.
목회
설교
팀켈러
인생베이직
결혼에관하여
죽음에관하여
태어남에관하여
문화내러티브
전제주의변증
포스트모더니즘
메이플라워 항해에 관한 팩트 아홉 가지
by Joe Carter
2020-10-12
얼마 전 메이플라워 항해 400주년을 맞았다. 400년 전 서른다섯 명의 청교도들은 뉴잉글랜드에 최초로 영구적인 유럽 정착지를 설립했다.여기 미국의 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 항해와 관련해서 당신이 알아야 할 아홉 가지가 있다.1. 메이플라워 항해를 이끈 종교 집단은 자신들을 부패 집단이라고 인식했던 영국 교회로부터 분리해서 자치적인 지역 교회를 형성하고자 했던 영국 프로테스탄트 집단으로 청교도 분리주의자였다. 분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회중적 형태의 교회 정치를 선호했으며, 공식적인 언약을 기반으로 각각의 개별의 교회가 설립하고, 자체적으로 간부를 선출하고 교회 회원을 “보이는 성도(visible saints)”로 제한했다. 분리주의자 회중은 당시에 종교적인 자유에 좀 더 관용적인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포위 공격을 두려워했던 그들은 잠시 영국으로 돌아간 다음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기로 결정했다. 2. 청교도들은 신세계가 가져다줄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영국 정착촌은 제임스타운이었는데, 그곳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정착민은 오백 명에 달했다. 그러나 레이덴의 망명자들은 미국에 정착하는 것이 그들의 신성한 의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진실로 믿고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더 단순한 마음으로 그분을 믿을 때 우리의 노력에 맞게 더 은혜롭게 축복하실 것입니다.”3. 원래는 메이플라워(Mayflower)와 스피드웰(Speedwell)이라는 두 척의 배가 8월 5일에 북미를 향해 출항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세 번이나 배에 물이 샌 스피드웰은 결국 수리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 배에서 선별된 일부 승객들이 메이플라워에 옮겨 탔다. 9월 6일에 메이플라워가 마침내 출항했을 때, 102명(남성 74명, 여성 28명) 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청교도 분리주의자였다. 청교도들은 나머지 승객을 “이방인”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빌린 일손 또는 하인들이었다. 거기에는 네 살에서 여덟 살인 네 명의 형제자매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일종의 계약제 하인들이었다. 그 외에 또 런던 상인에 의해 모집되어 버지니아 식민지로 향하는 농부들도 있었다. 4.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여정의 전반부 동안에는 비교적 별 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부 항해는 위험했다. 거친 바다와 폭풍으로 인해 메이플라워는 500마일 이상 코스를 벗어났다. 청교도들은 애초에 버지니아 북부(오늘날 뉴욕 주에 있는 허드슨 강 포함)에 입항할 예정이었지만, 배는 거의 난파되어 북쪽으로 돌아 현재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 타운의 프로빈스 타운 항구에 도착했다. 청교도들은 정착지를 결정하기 위해 케이프코드 주변 지역을 탐험하였는데 한 달 반을 보내게 된다. 5. 메이플라워가 버지니아에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그들이 애초에 서명한 버지니아 회사와의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유효한 계약도 없고 또 공식적인 정부도 없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청교도의 규칙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급증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수결 합의에 따라 스스로를 판결하기 위한 임시법이 작성되었다. 나중에 메이플라워 서약(Compact)이라고 알려진 이 협정은 식민지 주민들이 자치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영국왕 제임스에게 충성스러운 신분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짧은 문서였다. “평등한 법률, 조례, 법, 헌법이나 직책을 만들어….” 식민지의 이익을 위해 그 법을 준수하라. 하나의 사회를 만들고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함께 일할 것이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 따라서 살아갈 것이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신세계에서 자치를 수립한 최초의 문서였으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초창기의 성공적인 시도이기도 했다. 6. 메이플라워 서약의 전체 문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아래에 서명한 우리는 대영제국, 프랑스 및 북아일랜드의 신, 국왕, 신앙의 수호자, 등등의 은총을 통해, 숭배하는 군주인 국왕 제임스 1세(잉글랜드 왕) 제임스의 충실한 신민이다.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및 국왕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버지니아 북부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항해를 계획했고, 개척지에서 질서와 유지, 위의 목적의 촉진을 위해서 하나님과 서로의 앞에 엄숙하게 서로 계약을 체결하며, 우리 스스로 민간 정치 체제를 결성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을 제정하여 우리 식민지의 총체적인 이익을 위해 식민지의 사정에 가장 잘 맞다고 생각되는 정당하고, 평등한 법률, 조례, 법, 헌법이나 직책을 만들어, 우리 모두 당연히 복종과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이곳 케이프코드에서 우리의 이름을 서명한 바와 같다. 제임스 영국 국왕이 통치하며, 프랑스, 아일랜드 11년째, 그리고 스코틀랜드 54년째 통치년, 서기 1620년 11월 11일7. 청교도들과 이방인들은 혹독한 뉴잉글랜드의 겨울을 대비하지 못했다. 원주민들로부터 식량 지원을 받았지만 피난처가 없었기에 계속해서 배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괴혈병, 폐렴, 결핵이 혼합된 것으로 보이는 전염병이 겨울 내내 이들을 괴롭혔다. 봄이 되었을 때 정착민 53명과 선원의 절반만이 살아남았다. 봄이 되자 정착민들은 땅에 오두막을 지었고, 1621년 3월 21일에 마침내 메이플라워에서 하선할 수 있었다.8. 정착민의 건강과 경제 상태가 개선되었고, 그해 가을에 윌리엄 브레드포드(William Bradford) 주지사는 이웃 아메리카 원주민을 초대하여 그해의 수확을 “추수감사절”이라는 이름으로 축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플리머스 식민지는 대부분의 지역 부족과 조약을 체결함으로 정착지가 앞으로 유럽에서 올 이민자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곳이 되도록 만들었다. 1640년대 중반까지 플리머스의 인구는 삼천 명으로 늘어났다(그럼에도 메이플라워가 착륙한 지 거의 십 년 후에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에 정착한 북쪽의 청교도 이웃보다는 여전히 적은 숫자였다).9. 플리머스의 청교도 식민자들은 19세기 초까지 “순례자”로 불렸다. 그렇게 부른 이유에 대한 첫 번째 참조는 브레드포드 주지사가 “순례자”가 되어 네덜란드를 떠난 “성도”에 대해 언급한 원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20년 플리머스 창립 200주년에 정치가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가 그들을 “순례자 선조(Pilgrim Fathers)”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Voyage of the Mayflower번역: 무제
역사
종교개혁
메이플라워
순례자
청교도
추수감사절
메이플라워서약
윌리엄브레드포드
좋은 리더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안다
by Paul Tripp
2020-10-11
남자들을 위한 컨퍼런스를 인도할 때 한번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초능력을 하나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것으로 하겠냐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하늘을 날고 싶어 하고 또 누군가는 엄청난 힘을 갖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내 대답은 이것이었다. “일주일을 10일로 만드는 능력을 갖고 싶습니다.”나는 한계가 싫다.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싶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도록 하는 더 큰 능력과 굳이 조사와 연구에 시간을 쏟지 않아도 결과를 낼 수 있게 하는 더 큰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다. 나는 무한하고 싶고 또 전능하고 싶다. 아직까지도 내게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순간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한계로 인한 좌절에서 내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결코 나는 그럴 수 없다. 사역을 하다 보면, 현실적이고 건강하게 감당할 수 있는 정도보다는 좀 더 일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내 능력으로 책임감 있게 처리할 수 있는 일보다는 더 많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이력서를 쓰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게다가 지도자의 경우, 그의 업무가 사역의 성공에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한계를 가진 지도자우주에서 유일하게 무한한 존재는 창조주이다.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들은 한계를 가지도록 하나님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의 경계 밖에서 살고, 사역하고, 인도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게 창조되었다. 리더십 커뮤니티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작업을 수행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정확한 한계를 정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커뮤니티 구성원이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에 너무도 중요하다. 모든 지도자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더불어 하나님이 부여한 한계의 꾸러미들이다. 그렇기에 은사와 한계, 이 두 가지 중에서 오로지 한 가지에만 집중할 때 위험한 일이 생긴다. 아무리 리더라도, 당신은 결코 강점과 은사 그리고 경험으로만 이루어진 패키지가 아니다. 당신은 약점과 취약성의 모음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실로 감미로운 격려를 제공한다. 우리는 한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혼자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는 곳에는 하나님도 같이 가신다. 우리의 약점은 그분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한 작업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약점을 저주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한계와 약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적인 힘이 가진 한계와 망상을 부인하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나는 창조주의 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설정하신 한 가지 구체적인 한계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한계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인정하고 또 겸손하게 받아들이는가의 여부가 리더십 커뮤니티가 사역을 계획하고, 업무를 할당하고, 건강성을 평가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말하고 싶다. 그건 바로 모든 리더가 성숙도에 있어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한적인 영적 성숙도리더십 커뮤니티의 모든 구성원이 영적 성숙도에 있어서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은 모두가 다 인정해야 하는 중요한 점이다. 모든 지도자는 다 성화의 과정 속에 있다. 사역 리더십에 얼마나 오래 있었든, 아무리 훈련을 잘 받았든, 신학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든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여전히 미래에도 영적 진보가 필요한 존재이다. 누구에게나 사각 지대가 있다. 우리 모두는 다 유혹에 취약하다. 각 사람은 다 성격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구원시키고, 확신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이 필요하다.따라서 리더십 커뮤니티는 리더라도 복음에 다 도통한 사람처럼 간주해서는 안 된다. 리더십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양육하는 데에 전념해야 한다. 단 한 사람도 영적 고립과 분리를 경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적인 복음 사역뿐만 아니라 “서로”를 돕도록 부르셨다. 타락하거나 시험에 빠진 목회자와 대화를 나눠보면 그런 사역자 주위에는 언제나 목회적 사랑과 보살핌과는 거리가 먼, 취약하거나 또는 역기능적인 리더십 공동체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지도자는 지속적인 제자 훈련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모든 지도자는 상황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힘든 순간을 가져야 한다. 또한 모든 지도자는 복음의 위로가 필요하고,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형제자매의 도움이 필요하며, 여전히 속에 남아있는 옛 사람의 공격과 맞서 싸우기 위한 사랑과 격려가 필요하다. 상황이 이런데도, 복음 사역을 구상하고, 설계하고, 유지하고, 평가하고, 재설계 하느라 너무 바빠 이끄는 사람들의 영혼을 돌볼 시간을 만들기 힘들다는 말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을까? 한계를 갖고 살면서 사역하기천국에 가기 전까지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사역할 것이며, 타인과 관계하며 삶을 살 것이다. 우리의 한계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을 방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한계조차도 모두 그분의 지혜와 사랑이 가져다 준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우리는 그가 만드신 한계 내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나 또 리더십 커뮤니티 내에서의 대화에서도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명의 일부이다. 우리는 그런 한계를 벗어던지고 살고 싶은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또한 한계에 대처할 때에는 겸손하고 현명한 방식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은 한계가 있는 사람들을 복음적 리더십으로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적 겸손함과 소망으로 이러한 한계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드러나더라도 내가 가진 한계를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작업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이루시는 그분의 일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od Leaders Embrace Their Limits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한계
온전성
창조주
피조물
영적성숙도
리더십커뮤니티
복음적리더십
이십대를 위한 인생 교훈 여섯 가지
by Marshall Segal
2020-10-10
이십대는 좋던 나쁘던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시기이다.지금 당신이 이십대라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지금 한번 되돌아보라. 중요한 고비 때마다 당신이 취한 선택으로 인해 기뻤던 때와 슬펐던 때를 기억하는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감사와 후회의 감정을 느꼈던 순간들도 생각해보라. 친구들과의 우정은 또 어떤가? 시간과 돈을 주로 투자한 대상은 무엇이었는가? 사귀던 이성과 일했던 직장은?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왔는가이다. 물론 나머지 인생이 이십대 때문에 결정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어떤 인생을 사는가에 너무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의 인내, 자비 그리고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중 누구나 다 예외없이 인생의 어떤 순간에서라도(서른다섯, 쉰다섯, 심지어 일흔다섯에라도) 급작스럽게 회개하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 수도 있다. 그때까지 어떤 결정을 하면서 살아왔든지 관계없이 성령님은 여전히 각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 마침내 죄를 내려놓고, 영적 교만과 나태까지 옆으로 밀어놓고, 미래 삶의 방향을 바꾸는 데에 가장 최선의 날은 언제는 오늘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젊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신다면,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수십 년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그리스도를 위한 기초를 젊을 때 더 든든하게 쌓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인가? 기초가 무너질 때이십 대는 기초를 쌓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단지 몇 년 정도만 정신차리고 진지하게 노력하면 충분하다고 간주하거나, 또는 젊은 시절의 몇 년 정도는 임대한 시간처럼 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적 생활은 변화가 필요할 때마다 바꿀 수 있는 아파트가 아니다. 젊은 시절을 포함해 매순간 우리는 미래의 나 자신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롬 6:19; 잠 4:18-19). 나이를 먹을수록 바뀌는 게 힘들기에, 젊은 시절은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오늘 나의 행동 하나가 내 인생이 디디고 살아가야할 초석을 더 단단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그 초석을 갉아먹어 흔들리게 만든다. 집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집을 고칠 때 가장 힘든 부분이 초석을 다시 손보는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좋은 초석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경고를 하셨다. 굳건한 초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와도 같이 약한 지반 위에 지은 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두 집 다 하나하나 쌓아올린 벽돌로 만들었다. 그 벽돌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 만드는 결정과 선택이다. 두 집 다 자신감을 갖고 만들었고, 앞으로 오랫동안 튼튼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슨 일이 생겼는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이십 대는 인생을 튼튼하게 만드는 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수많은 길로 넘치는 시간이다. 넓은 길이 앞에 뚫려있기에 누구나 쉽게 길을 잃는 시간이다. 그러나 경고 뿐 아니라 예수님은 신실한 자를 향해 약속의 말씀도 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바람이 불고 비가 들이닥쳐서 집을 흔들릴 때가 되어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이십 대에 기초를 잘 쌓은 사람은 나중에 고난의 바람, 실망의 빗줄기, 그리고 현실의 천둥이 쳐도 하나님 안에 뿌리내린 희망으로 인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십 대에 필요한 여섯 가지 교훈그럼 어떻게 해야 이십 대에 좋은 기초를 쌓을까? 여러 해에 걸친 카운셀링과 내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 그리고 멘토들의 조언 등을 통해서 나는 몇 가지 소중하고 열매맺도록 하는 교훈을 발견하게 되었다.1. 헌신으로 너의 기초를 확실하게 하라다른 어떤 것과도 나눌 수 없는 절대적인 헌신을 그리스도께 바쳐라. 이십 대에 결혼하고 자녀를 낳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결국에는 나눠진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고전 7:32–34).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위한 배우자와 자녀를 준비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신의 마음과 시간 그리고 헌신은 필연적으로 나눠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혼자 있을 때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강권하는 것이다.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35). 독신의 삶은 독특한 슬픔과 더불어 많은 도전거리를 던진다. 그렇기에 독신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신이 주는 어려움이 독신만이 주는 기회마저 박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집중하는 힘, 사역에 열중하는 힘, 오로지 예수님만을 즐거워하는 것, 그럼으로 기초를 더 단단히 쌓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았을 때에도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나중에 인생이 훨씬 더 복잡해지고 감당할 책임이 더 많아졌을 때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제대로 헌신하겠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지금은 우리의 마음판과 우선순위 그리고 계획 속에 우리가 창조되고 구원받은 목적이라는 올바른 닻을 단단히 내려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오늘, 내일 그리고 영원히 누림(enjoying)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십 대에 가장 중요한 이 소명을 놓치고 살고, 그 결과 그런 기회를 다시는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만다.2. 성경 읽는 법을 배우라학교 다니면서 읽는 법이야 다 배웠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세상 글을 읽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기독교인이 정말 제대로 성경을 읽는 법을 아예 모르고 사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교회에서 성경을 빨리 읽거나 몇몇 중요한 구절을 암송하도록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냥 글을 읽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일이다. 그렇기에 이십 대에 성경을 읽으려고 시도한 많은 젊은이들이 성경 읽기를 힘들고 혼란스럽고 종종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많은 이십 대가 성경 읽기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이들이 내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그렇기에 선한 일을 하고 싶다면 이십 대, 삼십 대 그리고 더 나이를 먹어서도 성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혼란스럽고 맥이 빠지고 또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을 때, 바울의 약속을 기억하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성경에 당신 자신을 온통 투자한다면, 매일매일 그리고 수년에 걸쳐서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고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성경을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이미 말씀을 사랑하고 잘 아는 누군가와 함께 소리내서 함께 읽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 말씀을 바라보는 것은 내 자신의 시야를 넓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하루에 한 장씩 성경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서 시작해서 에베소서까지 한번 읽고 그 다음은 신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비로소 구약과 신약을 모두 다 포함하는 성경읽기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읽는 중에도 한 달에 며칠은 집중 읽기 시간을 가짐으로 뒤쳐진 부분을 따라잡거나 또는 암송을 하는 것도 병행하면 좋다.)3. 무릎 꿇는 게 자연스러워져야 한다신앙생활에 필요한 다른 모든 것처럼 기도는 결코 쉽지 않다. 기도하는 게 어렵다는 사람이 성경 읽는 게 어렵다는 사람보다 두 배는 더 많다. 기도가 개인 기도이든 그룹 기도이든 관계없이 그렇다.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인이 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 더불어 기도도 정말로 이상하고 한심한 일이다(고전 15:19).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신다면, 기도야말로 우리가 매일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생산적인 활동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또 자신감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원하시지 결코 띄엄 띄엄 기도하거나 주저하면서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기도는 완벽하고, 자격이 있으며 또한 말 잘하는 사람이 쓰는 왕관이 아니다. 보좌에 앉아계신 아버지는 아버지를 향한 믿음으로 충만해서 기도하는 자들을 오래 참으심과 자비함 그리고 은혜로 돌보신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없이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도 진짜가 될 수 없고 영속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요 15:5). 다른 말로 하면 기도가 없이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진짜가 될 수 없고 영속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하는지 물어보라(눅 11:1-4).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간단한 기도를 연습하고 깊이 기도하기 위한 시간을 따로 확보하도록 하라. 기도하는 시간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무릎 꿇는 것이 편안해질 것이다. 4. 죄와의 싸움을 준비하라우리의 이십 대를 망치는 수백 가지의 길들은 다 가장 큰 적이라는 하나의 길로 통한다. 바로 나 자신의 죄이다. 물론 우리를 유혹하고 협박하고 공격하는 것은 사탄이다. 또 다른 이들의 죄가 내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고난 때문에 우리가 좌초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은 나의 죄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많은 기독교인에게 이십 대는 죄와 싸우는 본격적인 길에 들어서는 시기이다. 또 많은 이들은 죄와의 전투를 회피하고 시간이 흘러 그 댓가를 치르기도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죄를 분별하고 바로 죄를 회개하거나 또는 죄와 맞선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주시는 용서와 의롭게 하시는 능력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 그리고 그 은혜의 힘 안에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는다.죄와의 전투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그 누구도 이 싸움을 혼자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여전히 우리 속에 거하는 이 완악하고 위험한 죄를 다룰 때, 우리는 함께 싸우면서 도와줄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2-13). 죄는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을 가지고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 목표로 삼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내가 가진 약함을 가지지 않은 다른 기독교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5. 지역교회에 헌신하라만약에 이십 대를 위한 딱 하나의 교훈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게 무엇일까? 아마도 놀라겠지만 이것이다. 건강한 지역교회에 등록하고 그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신앙생활을 유지하라. 그리스도를 높이고, 성경을 믿으며, 복음을 설교하고, 죄를 증오하며, 바른 권징을 실천하며, 제자를 만드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교회를 당신의 몸처럼 아껴야 한다(마 12:50). 교회는 지금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에게는 별로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며, 그건 아직까지 어딘가에 매이지 않았고 헌신되지 않은 이십 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모든 게 더 확실해질 때까지 교회에 헌신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대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당신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순종하고, 누리도록 영감을 주는 사람들 안에서 당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하늘과 땅의 주님은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교회를 선택할 정도로 교회를 사랑하셨다.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고 죽음을 맛보았으며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이끌고 계신다. 또한 주님은 교회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성숙하면 이런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하며 또 소홀히 한단 말인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게 많다는 사실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고 또 교회의 약점 때문에 마음을 상하기도 하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의 단점과 실수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교회를 향해 악한 감정을 품는다. 그들은 교회가 그들에게 기쁨과 충만함과 위로를 주기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교회를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은 없다. 이십 대는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방식, 교회라는 신부가 너무 소중하기에 목숨까지 버리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는 좋은 기회이다. 교회가 당신 인생에서 단지 주일 오전 한두 시간만을 차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 당신의 삶을 다 쏟아 넣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없어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고전 12:21). 또한 교회의 지체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도 말라. 당신의 지금 인생과 남은 모든 인생을 교회에 헌신하라. 6. 고난을 준비하라한때 신앙고백을 하던 이삼십 대 중에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을까? 진정한 복음을 이해한 적이 없기 때문에 또는 세상과 죄가 주는 즐거움이 결국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믿음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이 그토록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고난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지 고통을 주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고난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신앙을 버린다.준비되지 않는 위험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미 경고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눅 8:13). 뿌리가 없기에, 즉 “믿음”이 약하기에 그들은 떨어져 나간다. 그들은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4). 그 대신 고난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지게 하다가 곧 하나님에 대해서 원한을 갖게 만들며 결국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고난을 잘 받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영적인 눈을 바로 떠야 한다. 하나님이 고난 중에서도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배워야 한다. 나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나의 교만을 벗어던지고, 인내하면서 소망과 기쁨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을 도우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이 올 것을 알 뿐만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게 되고 또 더 강해지고 성숙해진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많은 이에게 이십 대는 처음으로 고난의 맛을 보는 시기이다. 그렇기에 이십 대는 불속에서도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갈 지 아니면 천천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첫 번째 기로가 된다.신실함(Faithfulness)을 기초로 삼으라지금까지 소개한 교훈을 하나로 꿰는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십 대에 신실함을 배우라.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함, 그분의 말씀을 향한 신실함, 그리고 그분이 당신을 어디에 두더라고 동일한 신실함을 잃지 않도록 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눅 16:10). 미래의 신실함과 많은 열매를 맺는 비밀은 바로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데에 있다. 오늘 우리가 그 신실함을 지키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너무 사소한 일, 바로 그런 일에도 신실한가 아닌가 여부에 달려있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신실함과 열매 맺음을 망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바로 오늘 부주의하고 안일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소명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그 소명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이 세상에 더 드러낼 수 있을지 알려달라고 기도하라. 또한 무엇보다 당신을 신실한 종으로 만들어달라고 기도하라. 그렇게 앞으로 몇 년 아니 몇 십 년을 살았을 때 당신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ere Will Your Twenties Take You? Six Lessons for Beginning Well번역: 무제
영성
신실함
신앙훈련
신앙과소명
이십대
신실한자
지역교회
소명
성 혁명 가운데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by Sam Allberry
2020-10-09
10월 8일자 아티클을 통해 살펴본 문화적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다음 일곱 가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1. 잘 들어야 한다목양 사역에서 가장 저평가 받는 구절 중 하나가 이것이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 몇 장 지나면 비슷한 가르침을 주는 구절이 또 나온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잠 20:5). 누군가가 어디에서 왔는지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잘 들어야한다. 우리의 마음은 “깊은 물”이다. 누군가가 내게 준 첫 인상과 처음 말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의 극히 작은 부분을 드러낼 뿐이다. 잘 들을 때 우리는 비로소 수면 아래 상대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게 된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을 좋아한다면(상대가 좋아한다고 추측하지 말고 반드시 물어보라), 우리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과정을 겪어서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바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경험한 기복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엇을 그들과 나눌지, 또 언제가 가장 좋은 시작점이 되는지를 아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인생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예수님에 관해서, 상처받은 사람일수록 그런 예수님에게 의지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를 이야기하는 게 좋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성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를 얼마나 겸손하게 만들고 또 동시에 도전을 주는지에 관해서 말하는 게 좋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과 더불어 삶에 있어서 불안함 그리고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숨겨진 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마르지 않는 생수, 항상 만족감을 주는 그 생수를 어떻게 제공하는지 보여주는 게 좋은 방법이 된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때 생기는 위험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계속 떠든다는 데에 있다. 상대가 민감해하는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혼자 떠드는 건 우리의 무감각함을 드러낼 뿐이다. 2. 모든 사람에게 다 말할 수 없는 건 특정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라얼마 전 캐나다의 한 일반 대학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 후 한 학생이 다가왔다. “저는 게이이고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는 다른 대학에서 소수자 옹호 그룹을 운영했습니다. 당신의 책을 읽고는 한 목사님과 함께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기독교에 흥미를 느끼게 만들었는지를 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다른 모든 사람을 대하시는 것과 똑같이 나를 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끌었던 소수자 옹호 그룹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구호는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르다. 조만간 퍼레이드가 있는데, 당신들은 우리를 도와야 한다. 페레이드를 여는 달(month)이 되면 우리는 어떤 회사가 우리를 가장 많이 후원했는지도 알아볼 것이다.”하지만 예수님의 메시지를 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르고 싶지 않았다. 가장 본질적인 수준에서 볼 때, 예수님의 메시지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도 동일했다. 그 순간 나는 평등에 자부심을 느끼는 현대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결코 얻지 못하는 진짜 평등이 복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기독교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한 그룹에 대해 하나의 규칙 세트가 있고, 또 다른 그룹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게이 커뮤니티를 미워하고 비난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소수자를 자기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다고 가정한다. 이런 오해를 바로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복음이 우리 모두를 어떻게 평등하게 만드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신다. 우리 모두는 다 타락했고 특히 성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망가졌다. 우리 모두는 다 무질서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 누구도 이 성적인 영역에서 완전하지 않다. 예수님을 바로 따르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특정한 성적 욕망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 정체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결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 중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잘못된 곳에서 존재의 가장 깊은 의미와 자아 감각을 찾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한다. 성별 위화감과 관련하여 우리 모두는 육체적으로 부서진 형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중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얕보는 입장에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형태로 타락한 성소수자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 중 누구도 괴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왜곡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다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타락을 겪은 몸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나는 성별 위화감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위화감이 주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내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원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나는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모든 성적인 죄가 똑같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성적 죄는 다른 죄보다 더 끔찍하다. 그 중 어떤 죄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거룩한 연합을 드러내는 창세기의 청사진에서 크게 벗어난 사실을 대표하기도 한다. 수간은 간음보다 더 심각하게 벗어난 죄이고, 동성애는 이성애보다 더 심각한 죄이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 중 누구도 우월감을 느낄 근거가 없다. 우리 모두는 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비춰볼 때 비극적일 정도로 부족하다. 따라서 특히 서로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초기 단계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말라. 그들에게 특별히 적용되는 복음의 측면을 설명하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예수님의 복음을 들려주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취급받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 3. 모두에게 적용되는 제자도의 대가를 인정하라소수자의 길을 떠나서 믿음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 치르는 제자도의 대가는 더 큰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자도의 대가는 모두에게 다 동일하게 크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여기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누구든지’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라도 다 우리가 가진 깊고도 은밀한 욕망을 향해서 “아니요”라고 말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self)”이라는 단어를 “정체성(identity)” 앞에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self)”이라는 단어를 “부인해야 한다” 앞에 놓았다.이런 부르심은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을 따를 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셨고(35절), 그분에 대한 순종이 생명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역설은 이런 상실을 겪음으로써 사실상 우리는 진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자아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내 자신이 적어지는 게 아니라 가장 진정한 내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제자도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단지 소수자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만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면 그건 잔인하고 부당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제자도로 인해 치르는 대가가 소수자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 크다면, 그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라내 친구는 평소에는 너무도 예뻐하는 두 살 딸이 있는데 식사 시간이 되면 예쁘지만은 않다고 한다. 글쎄, 도전감을 느끼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두 살짜리 아기는 음식 투정이 많을 수밖에 없고, 자녀가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입장에서 음식을 들고 던지기까지 하는 아이의 밥 먹이는 시간은 힘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치 이런 두 살짜리 아이처럼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의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정해놓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성적 윤리가 바로 그런 하나님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하나님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대상은 무작위인 거처럼 보인다.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성경이 말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이 왜 그것을 말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합리성과 선함이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금지시킬 때에는 항상 더 중요한 뭔가를 보호하시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정적인 것 뒤에 있는 긍정적인 부분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임의적이지 않을 뿐더러 우리에게 가장 좋은 생명이 되는 것을 주기 위함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이 뭔가를 거절할 때 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뭔가를 허락하신다. 우리가 결혼과 인간의 성에 대한 성경적 비전, 특히 결혼과 성이 단지 인간을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줌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오늘날 깊고 죄악된 욕망과 싸우는데 필요한 완전한 영적 자원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가 수세기 전에 우리에게 상기시켰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애정이 분출하여 밀어내는 힘”이다. 반박만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 비 성경적 사고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진리로 마음을 깨울 수 없다. 5. 성경 줄거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궁극적으로 결혼은 성경적-신학적 주제이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의 결혼으로 시작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의 결혼으로 끝난다. 처음 결혼은 마지막 결혼을 가리킨다.한 남자와 한 여자가 모인 정원에서 성경의 줄거리가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 남녀가 모여 하나가 되도록 창조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모든 인간의 결혼이 작별을 고하고 예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궁극적인 결혼을 위해 무대를 떠날 때, 결국 하나가 될 하늘과 땅의 궁극적인 결합의 그림이다.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실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결혼한 사람이든 독신자이든 이건 이 땅을 사는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이야기이다. 결혼이 복음의 형태를 가리키고 있다면 독신은 복음의 충분함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유일한 결혼이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결혼의 정의를 훼손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성경 전체의 내용에 반하게 된다. 우리의 결혼 신학은 복음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결혼에 대한 견해를 바꾼 교회는 궁극적으로 복음에 대한 견해를 바꾸게 되고, 그렇지 않은 교회를 나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다. 이 사실은 또한 인간의 성에 대한 우리의 모든 신학적 성찰과 토론의 핵심을 상기시킨다.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성경이 결혼에 대해서 말할 때면 반드시 이성애라는 맥락 안에서만 유일하게 경건한 행위로 받아들이는 점을 고려할 때, 성경이 동성애에 관해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는 자명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동성애 신학을 제공하지 않는다. 단지 결혼 신학만을 제공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자체가 복음 신학이다. 6. 계속해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 가장 완전하고 완전한 사람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연애도 하지 않았으며 성관계도 없었다. 따라서 적절한 맥락에서 볼 때, 성이라는 게 좋은 선물이지만 인간으로서 온전한 성취를 이루는 데에 반드시 필수적일 필요는 없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손상하게 되고, 그건 바로 성경이 경고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되는 것이다(요일 4:3).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는 결혼 이외의 성관계는 죄이고(마 15:19-20, 외 유사 구절), 단순한 행동이 아닌 성적 욕망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며(마 5:28),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능하다고 가르쳤다(마 15:19-20). 그리고 결혼에 대한 유일한 경건한 대안은 독신 생활이라고 가르쳤다(마 19:10-12).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결코 성 윤리에 있어서 중립적이지 않았다. 이런 예수님의 입장에 찬성할 수 없다면, 우리의 문제는 단지 교회, 복음주의, 기독교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이런 입장을 외면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결혼과 성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믿는다. 누군가가 결혼에 대한 내 견해를 버리도록 하려면 그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견해를 버리도록 설득해야 한다. “음악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춤추고 있는 무용수들이 미쳤다고 생각한다”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가 우리 기독교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세상 사람들은 결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주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분만이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요 6:35). 사실상, 바로 이 점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 속에 성욕을 창조하셨다. 인간 속에 더 깊고 강력한 갈망이 있을수록 오로지 예수님에게서만이 그것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욕을 만드셨고, 성욕이 예수님을 향한 하나의 통로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성적인 만족이나 현대의 우상은 결코 우리의 갈망을 채울 수 없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먹이고 채우시는 유일한 분이다. 7. 복음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로마서 1장의 앞 구절 사이를 읽으면, 로마교회의 신자들은 바울이 자기들한테 오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복음 메시지는 제국의 여러 지방에서 결실을 맺었지만, 그 중에서도 로마에서 특히 큰 열매를 맺었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자 정점이었다. 로마는 헬라적 사고와 영향력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복음이 제공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에 로마에 쉽게 가지 못하는 게 결코 마음이 꺼려서가 아님을 분명하게 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을 부각했다.“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9-16, 밑줄은 저자의 강조).당시 로마 기독교인이 다른 로마 시민들을 보면서 저들에게는 복음이 통하지 않겠구나 라고 느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소수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에게만은 복음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죄인이 다 똑같을 뿐이다. 하나님에게는 소수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더 고려해야 할 그 어떤 추가적인 은혜와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문화적으로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의 역할이 단순히 “있는 자리를 지키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추수할 곡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re to Find Hope and Help amid the Sexual Revolution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성정체성
성경적결혼
동성애
성혁명
복음
제자도
거룩한연합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by Sam Allberry
2020-10-08
서구 세계가 섹슈얼리티와 성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비밀이 아니다. 이십 년 전만 해도 동성간의 결혼이 결코 대중적으로 인정받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트랜스젠더라는 주제 또한 결코 주류 사회가 관심을 가질만한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고 현대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이러한 변화를 보다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진보의 필수 신호이자 바꿀 수 없는 선(good)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고 또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기독교적 견해가 비록 서구 사상으로부터 크게 지지받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합법적인 것으로는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제 전통적인 기독교적 사고는 점점 더 사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지금부터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 속에서 발생한 최소한 네 가지의 변화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방안을 제시하겠다.1. 도덕적 직관이 바뀌었다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그의 획기적인 책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에서 우리의 도덕적 신념이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직관적인 이유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직감적으로 안다. 직감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라는 반응을 유도하는 인간의 직관은 무엇보다 지난 십 년 사이에 아주 많이 바뀌었다. 특정한 도덕적 미각이 새로운 싹을 틔우더니 작용하기 시작했다. 어떤 행동 과정이 해로운 것처럼 보이는가 아닌가의 여부, 자유롭게 하는가 억압하는가의 여부 그리고 공정한가 차별적인가의 여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고, 바로 이런 요인이 우리의 도덕적 결론을 결정한다고 하이트는 주장한다. 이런 변화를 감안할 때 서양 문화가 왜 동성 결혼을 그렇게 빨리 받아들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새롭게 싹을 틔운 도덕적 미각 중 첫 번째를 적용해보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가 아닌가? 길거리에서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동성애 커플이 결혼한다고 할 때, 그런 경우 과연 내게 어떤 불이익이 발생할까? 두 번째로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건 누가 봐도 자유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억압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세 번째로,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해 보인다. 어떤 커플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는데, 어떤 커플은 그렇지 않다면, 그걸 어떻게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옳은 것 같다. 그렇기에 한때 동성 결혼에 반대했던 많은 사람들조차 최근 몇 년 사이에 생각을 바꾼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또한 우리는 동성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추론이 왜 그토록 쉽게 무너지는지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변화하는 인간의 새로운 도덕적 직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도 현재를 사는 세속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을 도덕적 추론에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복음주의 교회가 과연 동성 결혼을 허용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TV 토론을 본 기억이 있다. 교회에서도 동성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여자 토론자는 청중들이 듣기에도 매우 설득력 있고 간결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랑, 당연히 교회도 축복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여기에 반해서 상대 토론자로 나온 복음주의 진영의 목사는 계속 앵무새처럼 이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시청자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는 무언가에, 그러니까 시청자들이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성경의 권위에만 호소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주장에 대한 응답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게 우리 인간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사랑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시기에 사랑이 무엇이고 사랑에 어떤 순서를 매겨야 옳은지 알기 위해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방향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2. 우선순위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오늘날 세속적인 사람들은 소수자(LGBTQ+, 소수 인종과 성소수자를 의미하는 단어)를 향해서 자행되었던 과거의 차별을 되돌아보고 끔찍해한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동성애 공포증과 게이 커뮤니티의 악마화로 인해 그들이 받았던 끔찍한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과 같은 영화와 ‘트랜스페어런드(Transparent)’와 같은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 문화가 한때 명백하게 희생양으로 만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오히려 연민을 가진다. 여러 면에서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변화에 박수를 보낸다. 왕따와 이런 식의 괴롭힘은 성경적으로 볼 때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자행되었던 차별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수치심은 이제 교차 현상으로 이어졌다. 과거에는 사회가 주는 피해로 인해 소수자가 침묵해야만 했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피해자 위치를 하나의 특권으로까지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교차 지점에 있는 누군가가 그런 소수자 지위를 하나 이상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공공 광장에서 가지는 신뢰도는 이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것은 결코 평등한 경쟁의 장이 아니며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불공정의 현장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흑인, 여자, 레즈비언이라면 그 사람의 목소리는 남자, 백인, 이성애자보다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이러한 역학 변화는 또한 소수자가 정서적 또는 심리적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한 필요 이상의 큰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얼마 전 나는 한 일반 대학 캠퍼스에 있는 기독교 단체에게 성생활과 복음에 대해 강의를 하도록 초대를 받았는데, 그 캠퍼스의 소수자 옹호 단체가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는 시위자들을 만나 그들의 우려를 들었고, 내가 행여라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들이 그 모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걱정은 행여라도 그 모임에 참석한 동성애 기독교인이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상처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좀 더 알아보았더니, 아무리 온유하게 표현을 해도 단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사실 자체가 상처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대학 캠퍼스에서 소위 말하는 진보적 사고라는 게 사실은 왜 그렇게도 많은 검열을 자행하는지 알 수 있다. 누군가의 관점이 해를 끼친다면 그런 관점은 더 이상 거론될 수도 또 토론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은 그냥 침묵하거나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3. 성과 결혼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이런 변화는 아주 오랜 시간을 통해서 이뤄졌고, 바로 이 측면에서 볼 때 성적 혁명은 1960대로까지 거슬러간다. 첫 번째로 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섹스를 출산과 연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섹스는 이제 단순히 즐거움의 방법이고 굳이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필요가 없다. 이것은 초음파 기술의 발전과 함께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감수성 및 발달 등에 대한 의학적 이해가 점점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낙태에 찬성하는 로비가 왜 그렇게 열광적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궁극적으로 낙태는 태아에 관한 게 아니다. 아이를 낳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즐거움만을 주는 섹스를 하는, 바로 그 권리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로 결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다. 현재 많은 서방 국가들이 동성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현실이 도래하기 한참 전부터, 결혼에 대한 생각은 훨씬 더 중요한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결혼은 이제 더 이상 자녀 출산을 포함해서 평생 지속해야 하는 거룩한 약속이 아니다. 그 대신 결혼은 이제 사실상 유연성을 가진 하나의 낭만적인 계약이다. 상대를 향해서 가지고 있던 낭만적인 감정이 사그라드는 순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또는 두 사람이 동시에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는 게 결혼이 되었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득세하는 한 굳이 상대 배우자가 이성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결혼이 단지 낭만적인 감정을 누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누가 봐도 불공평한 처사이다. 4. 인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오늘날, “진짜” 당신은 당신 자신이 내면 깊이 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 시대의 영웅이 가지는 서사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한 다음에, 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진짜”는 오로지 당신만이 발견할 수 있고, 다른 그 누구도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이 누구라고 말할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이 가진 몸은 전적으로 우연의 결과이다. 무신론적 진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몸은 ‘당신’이라는 존재가 붙어있는 물질 덩어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 어떤 본질적인 의미나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진화는 이렇게 주장한다. 물리적인 것은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런 주장이 맞다면 우리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몸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가 가진 몸이 우연의 결과에 불과하다면, 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에 비록 몸이 내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캔버스임에도 불구하고, 몸은 그 어떤 식으로도 결코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이런 네 가지 변화는 우리가 사는 이 문화적 시대를 탐색할 때 매우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성 윤리와 성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적 이해는 결코 기이하거나 구식이 아니다. 그건 단지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할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변화들이 단지 세속 사회에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를 다니는 많은 교인들의 의식 깊숙이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물다섯 살 아래의 청년이라면, 이런 생각이야말로 그들이 숨 쉬고 살아온 산소이다. 이런 생각은 그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교회에는 지금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게 성경적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동시에 비록 성경적으로는 확신하지만 감정적으로는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건 설득력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10월 9일 아티클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이어집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re to Find Hope and Help amid the Sexual Revolution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성정체성
동성애
성혁명
결혼인식변화
독신의가치
소수자
조너선하이트
처음
이전
121
페이지
122
페이지
열린
123
페이지
124
페이지
12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