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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레위인의 고백
by Justin Loans
2020-11-12
이달 초 따뜻한 일요일 아침, 나는 두 딸과 함께 교회로 걸어가고 있었다. 큰길을 건너 교회 건물로 향하는 옆길로 들어섰을 때, 긴 수염에 초라한 셔츠를 입은 한 노인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를 향해 외쳤다. “이 불쌍한 참전 용사를 좀 도와줄 수 없습니까?”기왕이면 그 노인에 대하여 극적인 변화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그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나는 그 노인과 함께 예배하기 위해 교회로 데리고 갔고, 예배 후에 그는 여러 명의 집사를 통해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게 되었다. 또한, 그 날 교회 방문에서 느낀 사랑과 환대 덕분에 그는 우리 교회에 계속 나오게 되었고, 숙소를 제공하며 중독을 상담하는 지역 기관과도 연결되었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내게 소리치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행여 그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여 나는 바닥만 보고 걸었다. 교회로 가는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재촉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나는 저 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는 집도 없고, 보나 마나 정신 질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내 딸들의 안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요즘이 어떤 상황인가? 코로나 시대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접촉하는 건 말도 안 되지 않은가? 내 변명을 다 쓰려면 하늘을 두루마리도 삼아도 부족할 것이다. 나는 그날 교회 뒤편에 앉아서 내가 한 행동은 예수님이 말씀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레위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2).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보고도 나는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에게서 도망쳤다.레위인으로 가득한 교회?내 이야기가 많은 기독교인에게 모두 해당하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와 직면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돌리고 일상을 살아간다. 최근 들어서 나는 그런 경향이 더 커지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지난 일 년 사이에 미국은 대공황 이후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나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글을 썼다(사 58:10). 차머스 센터(Chalmers Center,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도움을 주는 단체)에서 나는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상처를 주지 않고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방법을 찾는 일을 한다. 올해 들어서 나는 이런 식의 대화를 많이 나눴다. “경제가 붕괴한 후 많은 사람이 교회에 기부했어요. 그런데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기부받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거죠?”목회 전략에 관한 보다 긴 대화라는 맥락 안에서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게 되묻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실업 문제나 재정적 문제를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지역 사회에서는 10~15%가 실직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서구의 복음주의 교회는 교인들이 다 레위인으로만 채워진 것일까? 우리는 사실상 반대편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고,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 계급의 투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고립시킨 건 아닐까? 교회가 물질적 빈곤이 가져다주는 현실에 지금보다 더 밀접해질 수만 있다면,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비와 장기적인 관계 접근이라는 점에서 교회가 제공할 것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분명한 성경적 명령에 직면한 우리는 오히려 혼란과 두려움으로 반응한다. ‘아픈 사람을 도울 때(When Helping Hurts’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차머스 센터의 창립자이자 회장인 브라이언 피커트(Brian Fikkert)는 차머스 센터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교회인 서아프리카의 교회들이 교회 중심의 저축 및 소액 금융을 통해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고향인 테네시주 채터누가(Chattanooga)에선 극히 소수의 사람을 돕는데 그쳤을 뿐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피커트는 이렇게 말했다. “차이는 이것입니다. 채터누가의 교회는 대부분 중산층 또는 상류층이 다니는 곳이에요. 그들은 자기 동네에서 물질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을 돕지요. 그런데 서아프리카에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다 가난해요. 달리 말해 그들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과 사역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죠.”되찾아야 하는 사랑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 몇 가지 제안이 있다. 교회가 더 넓은 지역 사회에 참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또 더 큰 비전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깊이 성경에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윤리적 명령을 더 찾아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적 맥락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방안을 찾고 적용하도록 하자.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롬 12:16),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약 2: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1 3:18). 모세의 율법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윤리적 명령이 들어있음을 기억하라.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레 25:35). 겸손함을 잃지 않는 동시에 의도성을 가지고 사회 경제적 경계를 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라. 타락한 세상에서 만나는 사회적 계층화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큰 장애물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가치 판단이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더 많은 부와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더 우월한 도덕성을 부여하는 경우에 그 장애물은 더 높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지금보다 더 효과적으로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계속해서 지역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천천히 하라. 천천히 움직이라. 무엇보다 신뢰를 쌓아야 한다. 기억하라, 중요한 것은 교회 웹 사이트에 올리는 인증 사진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관계 그 자체이다. 이를 통해서 대다수에 해당하는 백인 교인들은 흑인 교회의 형제와 자매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피커트가 말했듯이 빈곤한 현실에서 서로를 돌보는 세계 교회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빈곤과 지역 사회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자원을 찾아라. 물질적 빈곤이라는 뿌리에서부터 깨어진 관계를 해결하는 곳이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차머스 센터가 하는 사역의 핵심이다. 짧은 글을 싣는 것에서부터 온라인 과정 진행, 소그룹 연구를 통해서 관계 개발 사역에 깊이 파고드는 커리큘럼에 이르기까지, 차머스는 바로 그런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역을 하는 게 차머스 혼자가 아니다. 룹톤 센터(Lupton Center)와 기독교 공동체 개발 조직(Christian Community Development Organization)과 같은 조직은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이웃 치유를 위한 자원과 훈련을 제공하고 있으며, 또한 Love In the Name of Christ (LoveINC)와 같은 파트너는 지속적인 변화를 위해 교회와 커뮤니티 조직을 하나로 모으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마지막 말: 회개교회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교회가 오랜 기간 안락함과 안전에 위협이 되고, 가족 프로그램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이웃들로부터 고의적 혹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분리해온 것이 사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아닌 동정과 경멸의 대상으로 그들을 바라본 것도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은 주일 아침에 내가 참전 용사를 외면한 것과 비슷한 수천 가지의 작은 일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 결과 교회는 인류가 겪는 일반적인 고통을 향해 거의 눈을 감아버린 곳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사역 모델은 교외 부유층을 지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이 세상의 고통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며 죄의 무게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신성한 아래로 이동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사 53장; 빌 2장; 고후 8장). 우리는 왕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이 겪는 삶의 고통, 위험, 불편함에 기꺼이 ‘나’ 자신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의 평안과 안락함을 우선시하고, 문화와 계급, 정치 또는 신학에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자비를 베풀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더 통렬한 회개이다. 우리는 회개함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방향을 돌려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눅 3:8).원제: Confessions of a Levit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
교회생활
구제
평등
레위인
선한사마리아인
이웃사랑
신앙과 일, 뗄 수 없는 하나
by 김돈영
2020-11-11
직장 사역을 하다 보니 신앙과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종종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나 현재 직장에 다니는 이들, 사업을 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직장을 다니는 이유, 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러한 질문에 가장 많이 답하는 것은 경제적인 부분을 충당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직업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나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직업을 가지고 일하고, 돈을 벌어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하는 것과 먹는 것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장로님은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합니다.” 사업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며 했던 말이다. 지금 벌여 놓은 사업이 잘되어야 하는 이유는 선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가 커지고, 많은 수익을 내면 선교 헌금을 더 많이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교 헌금을 통하여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지에 교회를 세우는 것을 꿈꾼다. 굶주린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으로 선교 헌금이 사용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회사보다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매출이 더 많이 늘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이다. 거기에 덧붙여서 한마디 더 말한다. 이런 일을 하고 있기에 자신의 회사 물건을 사는 것만으로도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니 많이 사용하고 널리 홍보해 달라고 말이다. 참으로 멋진 비전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큰 꿈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대단히 열정적인 분으로 보였다.‘나’는 둘인가? 하나인가?일은 생활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일 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다. 일과 자신의 목적, 즉 신앙과 성도의 삶을 일과 철저하게 구별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성도로서 드러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일하지만, ‘성도로서의 나’와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나’라는 두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성도로서의 나’는 교회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활동을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예배당 청소나 화장실을 청소하기도 한다. 대형 현수막을 걸기 위해 지붕에 오르기도 하고, 깨진 바닥을 보수하기 위해 시멘트 바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다. 교회 재정을 생각하여 내 돈을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몸으로 일하고, 돈도 쓰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성도로서 마땅한 일이라 생각하기에 오히려 기쁨이 가득하다.그렇다면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어떠한가? 회사에 출근하면 인사를 나누고 익숙한 자리에 앉는다. 주어진 업무를 확인하고 급한 일을 처리한다. 하지만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남보다 더 많이 더 힘들게 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이 넘어오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다른 이에게 넘기는 것이 경험에서 오는 노하우라 생각한다. 새로운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회피하는 데 익숙하고, 높은 인사고과를 위해서는 나에게 유리한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승진을 위해 ‘슬쩍’ 청탁을 하거나, 적은 금액이지만 눈먼 돈을 – 야근비, 부서의 공금, 회사 카드의 포인트, 남는 행사 진행비, 물건 반품으로 환불받은 비용 등 - 내 주머니에 넣기 위해 머리를 쓰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담당자가 창고에 쌓인 재고 물품을 한두 개쯤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은 바보 같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을 하면서도 튀지 않고, 윗사람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회사 생활을 잘하는 ‘슬기로운 회사 생활’이라고 여긴다.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가? 안타깝지만 회사에서 실제로 많이 보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회사 생활이라고 말했던 선배가 생각난다. 특별하게 알려주는 것이니 잘 배우라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문제는 그 선배가 주일에는 열심히 예배하고 봉사하며 나름대로 철저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도로서의 나’와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왜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생활하는가? 이유는 한 가지다.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사실은 교회당에만 계신 하나님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회사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남들과 같은 모습으로, 남들과 같은 목적을 가기고, 남들과 같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잘하는 직장 생활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성도로서의 나’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으로 행하지만,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이 없는 것이다. 단지 나를 위하여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6장의 말씀처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인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지 않는 것이며,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개의 인격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성도로서의 나’와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나’라는 두 인격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만물을 통치하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배당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닌 내가 있는 직장도 하나님의 통치권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온종일 일을 해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느껴졌던 것처럼 회사에서도 이러한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내가 있는 직장 역시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 안에 있다는 것을 온전히 믿는 것이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 두 가지 일을 하는가?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매출이 많아져야 하고, 선교 헌금을 많이 한다고 말한 장로님의 회사에는 여러 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 매출이 떨어지자 회사의 숙소에서 생활하는 그들에게 지급하던 것을 줄였다고 한다. 일을 위해 지급하던 의복과 소모품의 공급량을 줄였고, 생필품과 식비를 줄였다. 물론 회사의 존폐가 걸린 상황이라면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비용을 줄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문제는 다른 곳은 그대로 두고 그들에게 가는 것만 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문제는 그렇게 줄인 비용을 해외 선교 헌금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나라를 위한 선교 헌금이라고 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분에게서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에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선교에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며, 지혜로운 방법으로 회사를 운영하며 헌금하고 있는지 당신들은 알아야 한다는 듯이 말한다는 것이다.무엇이 문제인가? 신앙과 일을 분리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곧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일’과 직업을 가지고 하는 일인 ‘세상의 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예배하고, 전도하는 일, 선교하고, 성경 가르치는 일 등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아는 일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을 뺀 나머지 일은 ‘세상의 일’인가? 그렇다면 ‘세상의 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인가?일하는 성도로서 세상을 사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분명하게 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다만 그것을 허락하신 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사용하고 다스리되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예배와 전도,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애쓰는 일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에 출근하고, 일하고, 먹고, 쉬는 것까지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그 방향을 돌려놓았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일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닐 것이다. 외형적인 모습이 전도와 선교라고 해도, 그 이유와 목적이 자신의 무엇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죄’인 것이다. 이것은 목회 사역에도 마찬가지다. 보이는 모습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 내면의 모습은 하나님과 자신만 알 것이다. 무엇을 위해 하는지 말이다.우리는 결국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장로님의 경우를 이야기해 본다. 회사가 번창하여 많은 수익을 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수익으로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지에 보내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 마음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근본적인 것이 빠져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을 따르는 것이고,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선교지에 헌금을 많이 보내는 것과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좀 더 편안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회사의 수익을 극대화하여 오지에 예배당을 짓는 것과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잘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먼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선교 헌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이들에게 먼저 선교 헌금을 사용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맡겨주신 청지기로서 바르게 사는 것이다.신앙과 일, 뗄 수 없는 하나그리스도인에게 일과 신앙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도 구별할 수 없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며, 그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께서 스스로 돌아서기를 보고 계시는 것이다. 기다려 주시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조금 더 빨리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일터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조금 더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의 시야는 참으로 좁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품는다고 하지만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한다. 이러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따르기 위해 애쓰는 방법밖에는 없다.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구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4:23)
신앙
소명
직장
하나님나라
성도
선교헌금
신잉과일
청지기
나 자신 찾기, 그거 생각보다 힘드네!
by Trevin Wax
2020-11-10
“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라”는 말에 91%의 미국인이 찬성했다는 최근 어느 연구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자신이 누구이고 나의 목적이 뭔지 알고 싶을 때, 그 답이 있는 곳은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내면을 들여다봄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의 마음을 믿고 무엇보다 직감을 따르라. 다른 사람은 그 누구라도 당신이 누구인지 정의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부터 바로 삶을 “깊이 성찰하는” 길이 시작된다.이런 식으로 인생을 볼 때 느끼는 자유가 매혹적일 수도 있다. 당신 스스로 당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원하는 대로 나 자신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름을 바꾸고 얼마든지 새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경력이나 취미 또는 재능으로 내 자신을 정의할 수도 있다. 오로지 나 자신만이 궁극적으로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내 자신을 표현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오로지 나 자신만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독특함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기에, 이 세상을 향해 나의 특별함을 어떻게 드러낼지를 결정하는 주체도 당연히 나 자신이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내면을 살펴보다 보면 반드시 좋은 점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당신이 찾은 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아름답다. 그 누구도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내린 자기 정의(self-definition)가 틀렸다거나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은 말 그대로 궁극적인 모험이 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는 심각한 단점이 있는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전체 프로젝트가 온전히 나 자신에게만 달려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려고 하다가 모든 게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꿈을 쫓아가다가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할까? 이런 식의 실패가 당신이 정의내린 삶의 목적과 정체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이런 실패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감각을 위협하지는 않을까? 더욱이, 당신이 스스로에게 내린 정의가 현실과 아예 동떨어졌거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생각과 전혀 다른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처음에는 모험심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외로움으로 이어질 뿐이라면 어떻게 될까? 공동체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라면?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내린 정의를 향해 박수치는 허수아비들과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있는 공동체 속에서 뭔가를 기여하면서 사는 게 더 의미있고 보람되지 않을까?상호 모순되는 정체성나 자신을 찾기 위해 내면을 들여다보는 전체 프로젝트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를 생각해 보자. 과연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도 나 자신의 독특함(uniqueness)을 발견할 수 있을까? 외부에서 미치는 힘이 당신이 가진 진정한 개성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 온전히 내면만을 성찰한다는 게 애초에 가능이나 한 이야기일까? 교사라는 직업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는 데에 능숙할 뿐 아니라 학생들을 좋아하는 그 사람은 교사라는 일에서 만족과 가치를 발견한다. 그가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특징을 가진 지금의 교사가 된 데에는 어렸을 때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두 명의 선생님 때문이다. 첫 번째 선생님은 아주 훌륭했다. 학생들에게 교육 과정을 안내하고 그들 속에서 배움에 대한 갈증과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두 번째 선생님은 끔찍했다. 창의력을 억제했을 뿐 아니라 특정 주제에 대한 경멸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권위적인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이 두 명의 선생님을 비교하면서 그는 좋은 선생님을 모방하고 싶어했고, 나쁜 선생님과 비슷해지는 그 어떤 방법도 피하고 싶어했다. 물론 이 교사는 자신의 열정과 은사를 발견하기 위해 내면을 성찰했으며, 그 결과 교사라는 직업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목적을 정의하게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오로지 혼자서 그런 과정을 거쳤을까? 그건 전혀 아니다. 그는 과거 만났던 좋은 선생님이 보여준 길을 따라가고 있는 동시에 나쁜 선생님이 보였던 부정적인 영향에도 반응하고 있다. 결국 이 교사는 자기 스스로 내면을 성찰하고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인생의 길을 계획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의 과거는 여전히 그가 내린 자기 정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에게는 닮고 싶은 한 사람과 닮고 싶지 않은 또 한 사람이 있다. 달리 말해,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물론 당신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아는 누구처럼 되려고 하지 않아요.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그 누구와도 똑같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라면 당신은 어쩌면 오로지 끔찍한 선생님만을 만났던 어느 청년과 비슷할 것이다. 해마다 그는 끔찍한 선생님들이 일으키는 문제와 씨름해야만 했다. 학생을 조롱하고 권위를 남용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가르치는 능력은 부족한 그런 끔찍한 선생들 말이다. 그래서 그 청년은 결국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모든 끔찍한 선생님들과는 전혀 다른, 아주 좋은 선생님이 될 거야.” 하지만 누구라도 지금 예로든 이야기에서 깨달을 수 있다시피, 그 청년이 스스로에 대해서 내린 정의는 결코 고립된 상태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비록 그가 참조하는 그 모든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그가 닮고 싶지 않은 대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당신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삶에 대한 “내면 성찰(look in)” 방식은 개인의 개성과 공동체가 서로 등을 지도록 만드는데, 마치 공동체는 언제나 개인을 억압함으로 공동체에 순응하도록 위협한다고 생각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고 또 정의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내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를 격리해야 한다고 가정하는데, 그 결과 우리의 배경, 가족의 영향력, 또는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관계없이 우리 주변의 모든 공동체를 배제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이런 식의 고립된 계획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참조하지 않고는 결코 자신을 발견할 수도 또는 정의할 수도 없다. 그건 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 식의 자아 발견이 가진 가장 아이러니 한 점은 당신이 가장 자유롭다고 느낄 때,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누가 봐도 당신이 아주 많이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 조차도, 당신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관심과 반응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가 기대하는 특정한 기대 또는 제한을 벗어나겠다는 선택조차도 결국은 당신이 가장 신경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오로지 내면 성찰만을 통해서 자신을 찾는 것은 그렇기에 불가능하다. 더욱이, 당신이 스스로 정한 자기 정의에 따라 살기 위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즉 당신이 바라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인간이기에 누구나 진실되지 않은 삶의 패턴과 나쁜 습관에 빠지기 마련이다. 좋은 선생님처럼 되고 싶은 그 교사가 너무 지친 나머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가장 혐오하는 나쁜 선생님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 중 많은 부모들이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이 했던 나쁜 행동을 우리 아이들에게만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어떤 순간 내 속에서 경멸했던 내 부모의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린 시절 부모가 내 속에 만들어놓은 나쁜 영향력에서 벗어난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정해놓은 정의를 따르지 못할 때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정한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바로 그 최고의 순간에 만나는 자신이 진정한 당신 자신인가? 아니면 행여나 당신 자신을 실망시키는 말과 행동이 터져 나오는 바로 그 최악의 순간에 만나는 당신이 “진짜 당신”인가? 진짜 당신은 당신이 되고 싶은 그 사람인가, 아니면 지금의 당신 자신인가? 더 나은 길내면 성찰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중대한 도전 과제를 동반할 뿐 아니라, 결국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에도 결코 충분한 방식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더 나은 방법이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은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게 맞는지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 방법은 내 자신을 정의하고 찾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다. 이 방법은 나 자신의 외부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위를 바라본다. 바로 나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위를 바라봄으로 당신은 더 크고 위대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Finding Yourself’ Is Harder Than You Think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자아성찰
내면성찰
자기정의
자기발견
공동체
습관
팀 켈러를 공부할 때 흔히 갖는 질문 3가지
by 김상일
2020-11-09
얼마 전 팀 켈러를 공부하는 목회자들 모임에 참여해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다. 최근 한국 교회 안에 팀 켈러와 그의 신학에 대한 열풍이 불면서 신학생이나 목회자들, 그리고 기독교 서적을 즐겨 읽는 성도들 사이에 그의 저서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모임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켈러가 구사하는 논리나 언어, 논증 방식이 그가 최근까지도 목회하고 사역했던 뉴욕 맨하탄 지역의 사람들에게 상황화되어 있는 까닭에 많은 분들이 한국적 상황에서 켈러의 주장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 좀 애를 먹는 것 같다. 필자가 처음 ‘팀 켈러의 중간 지대 신학하기’라는 주제로 TGC코리아에 글을 연재하기로 했던 목적이 사실 이런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함이었는데, 여전히 한국의 상황 속에서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을 적용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앞에서 언급한 목회자 분들의 모임에 참석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나왔던 질문들 중에서 세 가지를 골라서 나름대로 답을 해보고자 한다. 아무쪼록 도움이 되면 좋겠다. 1) 팀 켈러는 너무 탁월해서 일반 목회자들이 따라가기가 너무 어렵다?팀 켈러는 여러 면에서 일반 목회자들을 상당히 움츠러들게 하는 인물임에는 확실하다. 그의 독서량은 가히 신학자 수준에 필적할 정도이며, 그의 깊은 사고와 창의성은 일반적인 목회자들이 흉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 면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켈러의 글을 읽다가 “내가 켈러처럼 하려고 하는 건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는 격인 것 같다”는 생각에 제풀에 포기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팀 켈러가 자신을 그대로 따라하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팀 켈러는 이렇게 얘기한다.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영향을 끼친 방법이나 프로그램을 무조건 반복하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 영향력 있는 사역을 경험하고서는, 그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을 그대로 다른 세계에 가져다가 전혀 변화 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45분 동안 한 절 한 절 강해하는 설교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면, 또는 특정한 형태의 찬양 사역에 은혜를 받았다면, 또는 특별한 예배 순서나 시간에서 도움을 받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아주 자세한 세부 사항까지 그대로 복제한다. 그들은 이미 부지불식간에 방법론 중심, 프로그램 중심이 되어 사역 방식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고 있는 것이다. 곧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상황화하지 않은 것이다.”(센터 처치, 206쪽)그렇다면 켈러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점은 켈러가 하는 말을 모두 숙지하는 것도, 켈러의 교회 운영 방식이나 프로그램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일도 아니다. 켈러처럼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일 필요도 없다. 다만 켈러가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지역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우리 나름대로의 신학적 비전을 세워가는 작업을 위해서 자신의 사례를 참고하라는 것이다. 켈러는 신학적 비전을 ‘복음에 대한 충실한 재서술’이라고 정의하며, 각각의 문화적, 시대적 상황마다 복음은 새롭게 재서술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신학적 비전은 각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신학적 비전을 세워가기 위해서 물어야 할 다음 여덟 개의 질문에 대해서 목회자들이 답하는 방식이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 복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 복음을 현대인의 마음에 다가오도록 제시할 것인가?• 문화는 어떤 모습이며, 우리는 문화에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대항하면서 소통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도심, 외곽, 신도시, 시골 등) 우리의 지역적 위치가 우리의 사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공공 영역과 문화 생산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참여할 것인가?• 교회 안의 다양한 사역들 (말씀, 봉사, 공동체, 교육 등)을 어떻게 상호 연결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얼마나 혁신적이며, 얼마나 전통적이어야 하는가?• 우리 교회는 도시와 지역 안에서 다른 교회들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를 세상에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센터 처치, 28쪽)이 여덟 개의 질문들에 답하는 일은 굳이 켈러처럼 지적인 탁월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각각의 목회자들이 자신이 목회하는 지역과 문화의 현재 상황을 잘 파악하고, 그 상황 속에서 이 질문들에 대답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고민하면 된다. 그리고 켈러는 자신이 하는 얘기들을 그런 작업을 할 때 참고하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목회자들이 켈러는 너무 똑똑해서 따라하기가 벅차다는 생각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2) 팀 켈러는 너무 논리가 강해서 논리보다 정서가 더 강한 한국 사람들에게 잘 맞지 않는다?팀 켈러는 논리가 강하다. 그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면이 자칫 잘못하면 한국의 목회자들과 신앙인들에게 켈러가 말하는 것들이 한국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벽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도시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 특별히 젊은 세대 중에는 켈러가 사용하는 논리를 어렵지 않게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만약 켈러의 논리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면, 왜 한국 교회에는 그토록 켈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기성세대들에게 켈러가 하듯이 논리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식으로 사역할 경우 소통이 막히는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질문 또한 앞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팀 켈러가 자신을 모방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목회자 분께서 팀 켈러처럼 도시 지역에 특화된 목회자의 신학적 비전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켈러의 강한 논리 또한 그대로 가져오고자 한다면, 그 목회자는 결코 자신이 속한 지역을 위한 목회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켈러는 뉴욕 맨하탄 지역의 문화적, 지역적 정서를 받아들여서 자신의 목회 스타일에서 논리가 상당히 강해지도록 자신의 신학적 비전을 특화시켰다는 점이다. 논리적인 면보다는 정서적인 면이 더 강한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해서 목회하는 목회자 분들은 반드시 그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나 지적인 욕구, 정서적인 욕구, 관계적인 욕구 등등의 욕구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문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큰 그림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 그 말은 정서적인 욕구가 강한 지역이나 문화권에 산다고 해서 지적이고 논리적인 부분을 경시해서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요는, 목회자들은 어떤 지역에서 목회를 하더라도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문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팀 켈러가 인간과 문화에 대해서 그리는 그림은 어떤 지역이나 문화권에서도 복음을 상황화함으로써 나름의 신학적 비전을 만들어가는 목회자 분들에게 확실히 도움이 된다. 물론 팀 켈러의 그것만 참고할 필요는 없다. 신학적 비전을 세워가면서 도움이 되는 책이나 자료들은 누구의 것이든 참고하면 된다. 3) 팀 켈러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를 안 한다?얼핏 보면 팀 켈러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언급을 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센터 처치 652-674쪽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한다는 인상을 받을 가능성을 남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켈러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사람들이 복음을 깊이 깨닫게 되고, 복음을 믿게 되는 일, 즉 그가 말하는 복음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일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켈러에게 있어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의 핵심에는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복음이 연결하고 소통시켜주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라는 점은 이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만약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믿기 시작하면 좋은 공동체, 서로 연결하고 소통하는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해서 헌신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는 교회 공동체 세우기뿐만 아니라 교회가 하는 모든 사역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교회가 전할 메시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교회는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사역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복음을 여전히 배우고 깨달아 가야할 사람들에게도 복음적인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알려주기가 어렵다. 이런 면에서 켈러는 특히 교회 바깥에 복음을 전하기 전에 교회 안에서 복음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 복음 부흥이 일어난다는 말은, 이제껏 복음과 도덕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특정한 정당과 기독교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던 기성 신자들이 복음이 가진 능력을 이해하게 되고, 실제로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서 교회 안에서 생기는 변화를 가리킨다.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을 직간접으로 담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그 이해를 새로 교회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에 깊이 뿌리내린 공동체, 바깥 문화와도 힘있게 연결하고 소통하는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교회생활
팀켈러
센터처치
중간지대
신학적비전
복음
문화
공동체
어찌 그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by Sammy Rhodes
2020-11-08
지난 몇 주간처럼 종잡을 수 없는 때를 말할 때 보통 하늘이 파랗다고 한다.내겐 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친한 친구의 40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와 함께 뉴올리언즈로 떠난 여행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함께 가고 싶은 도시를 다니며 최고의 음식을 먹고 마시며 즐겼다. 적어도 그 48시간은 더할 수 없이 신나는 시간들이었다.하지만 그 시간이 힘든 시간이기도 했다. 내 친구는 가슴 아프게도 지난 해에 중풍으로 마비가 왔고, 지난 반년 이상 긴 회복 기간을 갖고 있었다. 그의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하는 것은 아직 회복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그는 “내 말이 아직은 어눌한 거 알아”라고 말하곤 한다. 그의 말 중에서 “내 말”이라는 말은 내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한다. 하지만 “아직은”이라는 말은 큰 소망이 된다.미시시피 해티스버그에 있는 그의 집에 돌아가서 그를 내려놓은 후에, 나는 그와 포옹을 하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렌터카로 향했다. 온 세상이 바꿔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우리 안에 낯선 향수병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모든 것들이 예전의 상태로 되돌려지기를 갈망한다. 내 친구가 예전에 건강하던 상태로 다시 돌아가기 원하는 갈망. 그와 함께 완전히 자유롭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갈망 말이다.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롬비아로 돌아가고 있는데, 친구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에 대한 생각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마나 달라졌고 그의 삶이 지금 얼마나 더 힘들지에 대한 생각 말이다.그러고는 검은 구멍이 점차로 커지는 것처럼, 전 세계는 다른 세계가 되어버렸다. COVID-19가 세계 안으로 밀고 들어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우리가 알고 있던 삶은 온통 바꿔져 버렸다. 모든 것들이 다시 예전과 같아질까? 얼마나 달라질까? 우리는 괜찮아질까?힘든 세상에서 예수님은 어디 계신가?우리 삶의 곳곳에서 그런 혹독함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것이 중풍으로 마비된 몸이든지 혹은 치명적 바이러스이든지, 이 세계는 예전 같지 않다. 모든 것이 온전하지 않다. 모든 것이 제 위치에 있지 않다. 외적인 면을 통제함으로 이러한 것들을 감당하고자 최선을 다해 보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터무니없었음을 알게 된다.삶의 모든 영역은 선물이다. 그렇다 그리고 그렇다고 믿는다. 하지만 영원히 바꿔져 버린 삶의 영역들 그리고 좋지 않게 바뀐 부분들은 어디에서 되찾을 수 있을까?여러 해 전에 나는 우울증으로 상담사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그것은 이제 내가 학생들과 만나서 목회적 조언을 찾을 때 하는 질문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지만 영적 현실을 꿰뚫어보는 질문이다. 이번 주에 나는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많이 해보았다. 이는 시편에도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다. 시편 기자가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시 44:23) 그리고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시 88:14)라고 쓴 것처럼 말이다.욥의 “상담자들”처럼 되지 않고자, 마치 모든 것이 안정된 것처럼 들리도록 내가 씨름한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하지는 않으려 한다. 이러한 고통의 상황에서 그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때로 삶이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들고, 모든 것에 대한 답변을 다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의 대답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씨름하지만, 그것들은 너무 무미건조하거나 상투적이거나 현실성이 떨어질 때가 많다.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일하고 계신다내 스스로 ‘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으려고 하자, 위로가 되는 두 가지 진리가 계속 떠올랐다. 첫째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그분은 이 세상의 고통과 멀리 있어 그것에 대한 느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고통으로 인한 모든 굳은살과 흉터와 자기방어기제들로 우리의 마음은 지금 감각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로 인해 이 땅에 생긴 모든 질병과 상실과 고통과 죽음을 아파하고 계신다. 그분이 거룩하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거룩하심 때문이다. 모든 것이 아직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예수님을 살펴보면, 그분의 친구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시는 걸 볼 수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분노와 깊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그분의 친구들을 깊이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공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은 여전히 같은 분 아니신가? 그분은 여전히 사랑하시는 이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시는 분 아니신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이제 마음에 감동이 없으신 건가 아니면 여전히 그분의 사랑하는 형상들로 인해 가슴이 뛰고 계신가?프레드릭 데일 브루너가 아마도 이를 가장 잘 표현한 것 같다. “우리는 ‘놀라워라 주 사랑이, 날 위해 죽은 그 사랑’이라고 찬양한다. 하지만 ‘놀라워라 주 사랑이, 날 위해 우는 그 사랑’이라고 찬양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가? 그분은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하지만 두 번째로, 그분은 또한 일하고 계신다.예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홀로 모든 걸 다스릴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시고,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기억하게 하시는 것 같다. 발코니에서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다른 나라 이웃들의 비디오에서 이것을 매우 아름답게 보았다. 우리는 늘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제는 더 확실해졌다. 우리 홀로는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있는 미세한 다름이나 잡담을 나누는 정도의 관계의 장벽을 뛰어 넘어 진정한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다.일에 묶여 있던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혼돈과 어려움이 아마도 그분이 강제로 휴식을 주고 낯설지만 안식을 취하게 하시는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삶에 리셋 버튼이 눌러졌다. 온라인상에서는 일과 휴식의 복잡한 관계가 어떻게 다르게 보일까? Lynn Ungar는 그녀의 시 “팬데믹”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을 유대인이 안식일을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어떨까가장 성스러운 시간으로?이동을 중단하라. 사고 파는 것도 중단해 보라.그냥 지금 당장 내려놓아 보라.현재와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보라.노래하라.기도하라.꼭 접촉해야 할 이들만 만나라.중요한 문제에만 전념하라.”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중요한 문제에만 전념하면 된다.눈물 흘리는 이들과 함께 (논쟁하지 말고) 울라그 다음엔 좀 더 어려운 질문이 있다. 내 친구와 프랑스 거리에 있는 한 음식점 테라스에 앉아 있을 때, 그는 조심스럽게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셨을까?”라고 물었다.팀 켈러의 저서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가 아무리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 순간에 필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불쑥 꺼내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필요한 건 그러한 어려운 질문을 하는 그의 옆에 그냥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어 주는 것이다. 아마도 언택트 시대에 (적어도 잠시지만), 이러한 것은 창조적으로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통스럽게 삶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서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Ungar는 그녀의 아름다운 시를 이렇게 마친다.“우리 몸이 가만히 있으면,우리 마음으로 다가가게 된다.두렵지만 아름다운 방식으로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지금은 그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우리의 생명이 서로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된다.(분명히 이제는 명백해졌을 것이다)도움을 주려고 하지 말라.마음으로 다가가라.말로 위로하라.우리가 접촉할 수 없을 때감동을 주는 보이지 않는 긍휼의 덩굴손을 내밀라.당신의 사랑을 약속하라좋을 때나 나쁠 때나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이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건강할 때와 똑같이 아플 때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Is Here, in Sickness and in Health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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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감과 친밀감에 관하여
by 노승수
2020-11-07
연인의 이별과 부부의 권태에 결여된 것은 친밀감이 아니다. 친밀감의 결여로 연인이 이별을 경험하거나 부부가 권태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존경심의 결여가 이별의 원인이 된다. 사람들은 관계를 위해 친밀감에 몰두한다. 그러나 친밀감의 탐구가 끝나면 곧 권태를 경험하게 된다. 친밀감은 관계를 유지하는 진정한 원천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친밀감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경외’로 요약되는 존경심을 요구한다.유교적 덕목에서 부부간을 구별이 있는 것으로 부자간을 친한 것으로 정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부 간에 결여되기 쉬운 것이 존경심이고 부자간에 결여되기 쉬운 것이 친밀감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친밀감은 중독이거나 폭력이 결과다. 관계 중독이고 이 중독은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권태를 경험하고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현대는 친밀감을 기본적으로 결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앙의 영역에서도 친밀감이 목회와 신앙의 중심 이슈를 등장하지만, 이는 관계를 망치는 원천이 된다. 그런가 하면, 친밀감은 폭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납치 피해자가 납치 가해자를 동정하거나 지지하게 되는 증후군을 일컫는 말이다. 이 현상은 언뜻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사실은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한 증후군이다. 예들 들어,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의 심리상태는 거반 이런 상태에 놓여 있다. 한 쪽은 위력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쪽은 마치 부모 손에 놓인 갓난아기처럼 무기력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이 결정하도록 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병리적 적응이다. 납치나 가정 폭력에서 한쪽의 위력이 피해자의 인격적 자기 결정을 붕괴시켰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피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심리 내적 노력을 보이게 된다. 그런 중에 가해자의 상황과 성장 배경, 트라우마에 대한 일종의 공감이 형성되면서 생기는 심리 현상이다. 가해자의 과도한 폭력과 강요된 친밀감과 이해는 한 인격이 자율적으로 사랑하는 일을 방해한다. 이처럼 인간관계에서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정상적인 인격적인 반응을 어렵게 하거나 쉽게 권태로 관계가 허물어지게 한다.그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결여되어 있을까? 오늘날 우리 신앙에 있어서 결코 친밀감이 모자라지 않다. 오히려 과하다. 신앙적 방종은 바로 이런 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얼마 전 작고한 J. I. 패커(J. I. Packer)는 현대 복음주의에 대해 일컫기를 “하나님을 편안한 이웃집 할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현대적 친밀감의 요구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에 턱없이 부족한 것은 ‘친밀’이 아니라 ‘존경’이다. ‘경외심을 결여한 신앙’은 오늘날 신앙의 보편적 행태이다. 그래서 이 친밀감을 증진할 여러 ‘신앙적 프로그램’이 요구된다. 이 프로그램들은 신자들의 영적인 만족 특별히 친밀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 신앙을 제대로 진단한 것이 아니다. 잠언이 증언하듯이,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경외라는 태도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이 경외감을 더 적극적 형태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경건’이다. 칼뱅에 의하면, 경건이란 ‘말씀을 어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감정’으로 요약된다. 경외감은 그래서 성경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아는 지식과 열정이 우리를 신앙적 성숙으로 이끈다. ‘신앙적 프로그램’들은 뭔가 성숙한 느낌, 친밀감 등등의 자기만족적 감정을 가져다주지만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이 아무런 성과를 낳지 못하는 것처럼, 백화점 쇼핑이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영적 쇼핑에 불과하다. 진정한 만족과 성숙은 성경을 아는 지식의 성장에서부터 자라는 것이다. 영적이며 심리적인 건강은 우리 감정이 상황에 맞고 우리 이성과 의지가 상황과 관계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위엄과 권능을 가진 분이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서 한 없이 무기력한 존재이다. 하나님과 교제에서 친밀감만 구한다면 우리는 정말 제대로 사귈 수 있을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격이 완전히 다름에도 폭력적이거나 병리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한 없이 자비하시며 우리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밀감이 아니라 경외감을 갖고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를 따라 적정과 절도의 원리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나친 친밀감의 추구가 남녀의 관계에서 권태를 만들 듯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을 경솔히 대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많은 경우 기독교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훈련들과 행위들은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 친밀감의 추구가 거짓 예언과 음성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관계에서 강요가 만들어내는 폭력은 힘 있는 자가 없는 자를 향해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으로 우리가 듣거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다른 의미의 폭력이다.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렘 14:14)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여자들에게 경고하며 예언하여(겔 13:17)
관계
친밀감
경외감
관계중독
스톡홀름증후군
JI패커
하나님을아는지식
존경
칼뱅
경건
70년 세월 그리스도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다
by Russell Moore
2020-11-06
얼마 전 C. S. 루이스(C. S. Lewis)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이 출판된 지 70주년이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앞으로 다가올 세대에 대해서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묻기에 아주 적절한 때를 만난 셈이다. 우리가 때때로 잊어버리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루이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아직까지도 우리의 상상 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단순한 대뇌 네트워크나 변연계로 이뤄진 존재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표지판(signposts)을 찾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논리적 이유나 실용적인 지혜 또는 계몽된 자기 이익이라는 측면에서만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더 깊은 차원을 다루고 있다. 바로 사자의 포효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력을 통해 그 느낌을 알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기도 하다. 기독교 변증론을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면 나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서구 사람들이 거의 항상 일등으로 꼽는 책이 바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이다. 턱을 쓰다듬으며 이런 현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글쎄, 사실은 말이야”라며 반론을 제기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나 순전한 기독교로부터 진리를 알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책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변증이 아니다. 물론 그 책 속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변증이야말로 실로 긴 시간동안 아이를 공격하는 독수리와 같은 많은 비판을 견뎌온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많은 사람들에게 순전한 기독교가 아직까지 울림을 가지는 이유는 그 책이 활자에 담긴 저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종교가 가진 냉소주의와는 달리 우리에게 정치적 의제나 종교 제품을 판매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그 목소리가 전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증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되신 분에 대한 증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의론자를 설득하거나 또는 흔들리는 기독교인을 다시 확신 속에 거하게 하는 루이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옥스포드에서 받은 고전 연구가로서의 훈련이 아니라, 아이들을 작은 방과 가로등 기둥을 지나 나니아 왕국의 수도인 케어 페러벨(Cair Paravel)과 그 너머로 인도했던 경험이다. 오늘날 생존하는 가장 존경받는 판타지 작가인 닐 게이먼(Neil Gaiman)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루이스가 “숨겨놓은 정통 기독교에 관한 의제”에 관해서 배우고 싶었던 흔들림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루이스의 작품을 인정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작품이 루이스가 창조한 마법의 세계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니아 관련한 책들이 주는 이상한 점의 대부분은 마치 그 책 속 이야기가 사실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실제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기록된 보고서 같이 느껴진다.”나니아 속에 등장하는 “장소”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판타지 장르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루이스의 동료 잉클린(Inklings)조차도 J.R.R. 톨킨(J.R.R. Tolkien)의 작품에 나오는 중간계와 같이 신중하게 구성된 창작물과 비교할 때, 나니아는 루시가 옷장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북유럽 신화 및 그 이상과 합쳐진 유대와 기독교 우주론은 아예 산타클로스(Father Christmas)로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니아는 대중문화에서 70년 동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나니아를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인생 전체를 함께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겉보기에 혼란스럽고 황당한 신화가 주는 단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이 우주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우주에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또한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아마도 “암흑 물질”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진짜 장소”라는 게 항상 일관되고 예측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정말로 이상한 우주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 기쁨에 놀라다나니아의 기이함, 차와 벽난로 등의 친숙함으로 표현되는 기이함은 여전히 이 책을 매력있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현대주의자(modernist)든 또는 근본주의자든 간에, 많은 기독교 변증가들은 학문적 합리주의나 문명적 헤게모니 또는 좌파, 우파 또는 중도의 정치적 이념 등을 활용해서 무엇보다 기독교를 친숙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는 데에 치중했다. 그러나 나니아는 그러지 않았다. 루이스는 그가 살았던 세대에게 있어서 복음을 받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복음이 너무 신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너무도 친숙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다의 사자(The Lion of Judah)는 어느새 잘 길들인 강아지가 되어 있었다. 성경 속의 서사는 이제 너무도 익숙해져서 어느 존경받는 문화의 대본책과 구분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새롭게 들리지 않는 그런 복음을 좋은 소식으로도 듣지 않게 되었다.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를 상상의 세계로 던져서 주일학교 스테인드글라스 속 이미지를 다 벗겨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라도 처음으로 그 이야기가 가진 진정한 힘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용을 피해서 진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은 사람도 갈기가 다 깎인 채 스톤 테이블에서 죽은 아슬란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에드먼드를 미워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사실상 그와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달달한 터키 과자 로쿰(Turkish Delight)에 중독된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과 같은, 에드먼드에 대한 아슬란의 말을 읽을 때 그 속에 담긴 은혜 때문에 우리는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여기에 당신의 형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다시 부풀어 오르는 걸까?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가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바로 이 말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슬란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녀의 마법이 약해지고 있습니다.”루이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양심을 보호하고 또한 직관을 형성한다. 뉴스를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원하는 이미지에 맞지 않는 소식은 필터링해서 제거함으로 나 자신의 이성을 “조작(spin)”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보호하던 안전 장소를 벗어날 때 우리는 기쁨에 놀라게 된다. 나단 선지자가 어린 암컷 양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원한 것은 다윗과 이성적인 논쟁을 하는 게 아니라 다윗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감정적으로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그랬기에 다윗은 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야기와 이미지, 그리고 각종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용서는 선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진리를 정형화하거나 또는 도덕적 적용으로 요약하는 대신 “한 남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이야기가 펼치는 더 깊은 수준의 깨달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단순히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하다”라는 말을 하는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접붙여진 가지도 살아있는데, 하물며 뿌리가 죽겠느냐?”나니아 기독교인스톤 테이블은 십자가, 하얀 마녀는 악마, 마술사의 조카는 창세기처럼, 나니아 연대기가 단지 해독(decode)할 게 많은 우화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지속되는 게 아니다. 나니아가 아직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우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리고 가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진짜를 느끼는 게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나니아 이야기가 아직까지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겨울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우리 정신의 눈이 녹기 시작하고 성령의 바람이 그가 뜻하는 곳에서 불기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늘과 같은 세속화 시대에 나니아처럼 새로운 시작을 출발하기에 좋은 장소도 없다. 하지만 물론 이 70년이나 된 이야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는 아니다. 루이스는 아이들에게 여분의 방은 그들이 제어할 수 있는 포털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그 경로로 다시 나니아에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거기로 가려고 하지 마세요. 거기에 도달하는 건 당신이 의도적으로 가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래도 나름 장수했다고 성경이 인정하는 나이가 70세이다. 우리는 이야기꾼 루이스로부터 배운 복음,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그 복음을 더 깊이 고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이 또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스크루테이프 세계(Screwtape world)에서 나니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Chronicles of Narnia Still Grips Our Imagination, 70 Years Later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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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자
스쿠르테이프세계
암흑물질
태어남과 결혼, 죽음 그리고 설교
by 고상섭
2020-11-05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팀 켈러 목사의 설교의 특징은 변증적 설교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인생 베이직 시리즈를 통해 변증적 설교의 예를 (10월 13일 변증적 설교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라) 살펴보았고, 이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구체적인 예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팀 켈러 목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단순히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취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으로 나아가는 것이 특징이다. 본문 안에서 발견한 성경적 명령을, 인간은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드러내주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고, 그 은혜를 통해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는 패턴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적용한다. 그의 최근 저서 ‘인생 베이직 시리즈’를 통해 어떻게 본문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하고 적용하는지를 예를 살펴보자. 1. 태어남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현대인들은 자녀를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희생하고 싶지 않은 오늘날의 개인주의를 반영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양육하는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35)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을 양육하는 기쁨이 있지만 또한 마음에 칼이 찔리는 듯한 아픔도 경험한다는 말이다. 부모가 마음의 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녀의 새 생명으로 세상을 복되게 할 수 없다. 성경은 생명을 양육하려면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희생의 모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실제로 못과 가시에 찔리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를 치르셨다. 이것이 기독교가 부모들에게 주는 위대한 자원이다(‘태어남에 관하여’ 44쪽). 결국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은 복음의 은혜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만연된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부모마저도 자식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를 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 안에 있는 이기심 때문에 희생하지 않은 문화 속에서, 복음은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그 은혜로 내 삶의 정체성을 삼고, 그 은혜로 사람들에게 희생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2. 결혼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오늘날 결혼에 대한 두 가지 오해는 결혼자체를 자신의 구원으로 생각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과 결혼을 통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큰 고역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에 대한 환멸이다. 순진무구한 연애 감정에 젖어서 배우자를 맹목적으로 받들어 모셔도 안되지만, 한편으로 너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고역이라고 분노해서도 안된다. 배우자를 우상으로 삼는 것도 위험하고, 배우자를 환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은 결혼관이다.이 두 가지 오해를 피하려면 복음으로 결혼을 재조정해야 한다. 성경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묘사한다. 배우자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하게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부정한 배우자인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또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부정한 배우자를 되찾기 위해 그녀를 소유하고 있던 남자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 오시는 남편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부정한 배우자를 사랑하기 위해 값비싼 희생을 치르는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배신하는 최악의 배우자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대속적 희생을 통해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면서 우리의 죄와 악의 문제를 대신지시고 해결해주신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신랑되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너는 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다.” 이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결혼생활이 힘들어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예수님은 자기 땅에 왔지만 그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까다로운 배우자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나는 최고의 배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계속 나를 덮어 주시며 용서하십니다. 이렇게 그분께 받은 사랑이 족하기에 나도 당신에게 똑같이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내가 그리스도를 배신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죄인을 은혜로 품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의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혼이 우상이 되는 것을 막는 힘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배우자임을 인식하는 것이고 또한 불행한 결혼생활의 해답도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결혼에 관하여’ 69~75쪽)3. 죽음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성경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이는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고 말한다. 즉 소망가운데 슬퍼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분노하셨다. 그 분노는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 잘못된 침입자임을 말해준다. 사람은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인데 인간의 타락이 죽음을 가져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분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자신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승리를 주시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만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장래의 은혜를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마가복음 5장에 죽은 소녀에게 예수님은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얘야, 일어날 시간이다.”라고 부르시는 사랑의 음성이다. 학교를 가야 하는 아이를 깨우는 어머니의 음성과 같다. 예수님은 죽음 저편에 있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손을 잡으면, 네가 믿음 안에서 나를 알면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단다. 심지어 죽음이 닥쳐도 간밤에 단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내 손을 붙들고 있다면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단다. 그러니 안심하라” 죽음 앞에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실수는 너무 죽음을 크게 생각해서 슬퍼하기만 하거나, 죽음을 너무 작게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유익하지 않다. 성경은 소망 가운데 슬퍼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이다. 조지 허버트의 말처럼 “죽음은 한 때 사형집행인이었으나 복음 앞에서 한낱 정원사로 전락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지막 날에 모든 눈물을 다 씻어질 것이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행하신 일 때문이다. 결국 죽음의 문제의 해답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죽음에 관하여’ 5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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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허버트
마이크로처치가 온다
by 김선일
2020-11-04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는 일반교회와 가정교회(6~12명의 소그룹으로 매주 모여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형태)가 코로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신앙의 교제를 했는지에 대한 비교 항목이 나온다. 일반교회는 카톡/문자(65%), 온라인 교제(41%), 전화 통화(37%)가 가장 많았던 반면, 가정 교회는 카톡/문자(62%)와 전화 통화(39%)는 일반교회와 비슷한 반면, 온라인 교제는 62%로 훨씬 높게 나왔다. 주목을 끄는 점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대면 모임(일대일 만남, 작은 소그룹 등)에 있어서 가정교회는 68%의 경험을 한 반면, 일반교회의 25%보다 훨씬 높게 나온다. 전체적으로 방역조치로 인한 제한적 상황에서도 소모임 형태의 가정교회는 일반교회보다 한층 다양한 방식으로 교제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코로나 상황에서 가정교회 성도가 일반교회 성도보다 더 활발한 경건생활을 하였으며, 헌금 감소의 타격도 가정교회가 덜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지난 글에서도 주장했지만, 필자는 앞으로 사람들의 관계와 공동체 유형은 더욱 안전하고 신뢰할만한 작은 모임이 될 것이라고 본다. 코로나 상황에서는 방역 통제가 가능한 규모여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비단 코로나 때문만이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가 인간관계를 맺는 규모에 있어서 이전보다 개인적이고, 의미 있는 소수로 좁혀지고 있다. 엠브레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무의미한 관계의 확장 및 유지보다 소수의 ‘친밀한 관계’에만 집중하고 싶어”한다는 결과가 나왔다(Trendmonitor 2020년 9월 24일자 리포트). 새로운 관계를 많이 만드는 오지라퍼가 되기보다는 가족과 친구 중심의 관계에 더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렌드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정서적 변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다 짜놓은 소그룹에, 잘 모르고 편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어색한 공동체 관계를 유지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를 당연시 여기고 무조건 용인만 해줄 수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낯선 자를 환대하며(신 10:19, 눅 10:25-37) 선한 이웃이 될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나 선교 사역은 사람들이 있는 현 상황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있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맞는 접촉을 하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의 비전을 갖고 제자의 삶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이러한 작은 소모임을 중심으로 하는 사역들은 원래 초기 교회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당시 로마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5절) 외에도 아리스도블로의 권속(10절, 나깃수의 가족(11절), 아순그리스도와 불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마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14),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15) 등의 4개의 공동체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모두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에 속한 모임들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로마 내에서 간헐적으로는 전체적으로 신앙의 연결은 가지면서도 평소에는 따로 모였던 모임일 것으로 추측한다(로버트 뱅크스의 ‘바울의 공동체 사상’, IVP, 72-74쪽). 이는 바울이 로마서 16장 7절에서 단일한 교회를 언급하지 않고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라는 표현을 쓰거나, “너희가 거룩하게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하며 서로의 교제를 권하는 것에도 암시된다. 위와 같은 모임과 관계의 소규모화에 비추어 흥미로운 기독교 사역의 형태는 ‘마이크로처치’(microchurch) 현상이다. 마이크로처치는 공식적이거나 제도적인 교회가 아닌, 일상의 작은 만남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신앙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서로 공감하고 쉽게 만날 수 있는 가족, 이웃, 공통적 삶의 이슈, 관심사 등을 토대로 5명 내외의 (예수님 말씀처럼 2~3명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정기적 교제권을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초 소규모라고 해서 반드시 그 한계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 이상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하여 모임이 분화될 것인지는 구성원들이 의논해서 결정하면 된다. 미국 플로리다주 템파(Tampa, Florida)에 위치한 언더그러운드(Underground) 교회는 200개 이상의 마이크로처치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그 안에는 지역에서 이웃과 만나는 모임부터, 선생님들의 모임, 간호사들의 모임, 싱글맘 모임, 대학생들의 모임과 같은 다양한 마이크로처치들이 있다. 필리핀과 미얀마의 마이크로처치들도 이 언더그라운드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중앙 통제적이고 집중적인 교회 구조가 아니라, 허브(Hub)라고 불리는 ‘코워킹’(co-working) 공유 공간만 있을 뿐이다. 중앙에서부터 소모임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소모임들이 공동의 신앙고백과 사명으로 확장되어가는 형태다. 또한 워싱턴주 타코마(Tacoma, Washington)에서 시작된 소마(Soma) 운동 또한 마이크로처치들의 가족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소마는 마이크로처치라는 용어가 아니라 ‘선교적 공동체’(missional communities)를 사용하지만, 그 사역의 유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웃 생활 공동체, 공립학교 교사 공동체, 시니어 공동체, 이슬람 선교 공동체 등 수백 여 개의 마이크로처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는 주로 주중에 선교적 공동체 모임을 갖고 주일에는 연합 예배를 드리곤 한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 뿐 아니라 그들의 사명이 주중 선교적 공동체 모임에 있다. 영국 성공회의 대표적 선교 운동인 ‘교회의 새로운 표현’(Fresh Expressions of the Church)은 파이오니아(Pioneer)라 불리는 사역자들을 훈련하고 양성한다. 파이오니아는 제일 먼저 1)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2)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고, 2) 정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3)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함으로, 4) 교회로 발전하는 계획을 실행하게 한다. 이 운동은 지난 10년 이상의 실험적 사역을 통해 영국에서는 가장 건강하고 거의 유일하게 실질적인 전도와 교회성장을 이루고 있다.마이크로처치는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선진화된 사역의 모델인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우리의 현장에서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일 수 있다. 판교에 있는 심플교회는 약 10년 전 한 평신도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 집사 부부로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지인을 위로하고 영적으로 도와주었는데, 그 지인이 다른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을 소개하면서 규칙적인 기도와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합류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정례화되자, 모임의 리더는 신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주일 교회로 발전하였다. 이제는 신앙 공동체와 기독교 대안학교 사역을 겸하는 모범적인 교회로 자립하였다. 꼭 마이크로처치로서의 정체성을 갖거나, 위 사례들의 궤적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힌트는 미래의 교회 및 선교 사역이 우리와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가족, 이웃, 관심사, 취미 등이 의미 있는 신앙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는 뜻밖의 자산이 될 수 있다. 근래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불안과 탄식이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눅 10;2)라고 하셨건만, 우리는 ‘추수할 것은 적고 일꾼은 많다’고 탄식하는 현실이 아닌가. 우리의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면, 일상에 관심을 갖고 돌아보면, 많은 잠재력 있는 관계들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진실하고 의미 있는 만남을 갈구하는 심령들이 있을 것이다. 복음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들을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신 선교명령은 때로 ‘멀리’만 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그리고 더욱 깊이’ 가야 할 과제일 수 있다. 임박한 마이크로처치 현상은 그와 같은 가능성과 소명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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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가 특별한 다섯 가지 이유
by Tim Keller
2020-11-03
초기 3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은 다른 어떤 종교 집단들보다도 가장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고 황제를 숭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편협하며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들로 비춰졌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일터나 영향권에서 불쾌하게 인식되거나 배제되어 때로는 죽음까지 처하게 된다면, 왜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 되고자 했을까? 래리 허타도 (Larry Hurtado) 는 두 책 ‘이 땅의 어떤 이들은 왜 초기 3세기에 기독교인이 되려고 했을까?’(Why on Earth Did Anyone Become a Christian in the First three Centuries?)와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Destroyer of the gods: Early Christian Distinctiveness in the Roman World) 라는 책에서 이 질문을 다루고 있다. 허타도는 주된 이유로 기독교 교회는 독특한 “사회 프로젝트” 였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대조적인 공동체였고, 도발적이면서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끄는 반문화적인 집단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기독교 공동체를 그토록 다르게 만들었을까?새로운 정체성허타도는 이토록 특이한 사회 프로젝트의 저변에는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종교적 정체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 이전에는 눈에 띄는 “종교적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교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민족 혹은 국가적 정체성이라는 측면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도시, 부족, 혹은 국가의 출신이라면, 당신은 그 도시와 부족과 국민들의 신들을 예배 했을 것이다. 즉 종교란 기본적으로 한 개인에게 할당되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최초로 인간의 사상에 자신의 인종이나 사회 지위를 막론하고 개인이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개념을 심어주었다. 기독교는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한 개인의 새롭고 본질적인 정체성이 된다는 것을 급진적으로 주장하는 반면 동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종, 지위나 성별을 없앨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다. 대신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가 자신을 두번째 위치로 강등시켰다. 로마 사회에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이러한 주장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노예이건 자유인이건 혹은 높은 신분으로 태어났건 어떤 인종이나 국적으로 태어났건 관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갈 3:26–29). 이는 로마 사회의 견고한 사회 구조와 조직에 급격한 도전이 되었고 그것에서 최소한 다섯가지의 독특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1. 초대교회는 다민족 이었으며 놀랍게도 민족의 장벽을 넘어 연합을 경험했다 안디옥 교회의 리더십에 대한 설명을 하나의 예로 볼 수 있다 (행 13).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놀랄만한 연합을 볼 수 있다. 에베소서 2장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복음의 열매로서 민족적 화해의 중요성을 증언하고 있다. 2. 초대교회는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였다이미 언급했듯이, 기독교인들은 배타적이었고 비판을 받았고 그들은 또한 핍박을 받고 옥살이를 했으며 매맞음과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인들은 용서와 대적들을 향해 복수를 그칠 것을 가르쳤다. 복수를 염두해 둔 수치심과 명예의 문화 속에서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대적들을 조롱하거나 비웃지 않았고 폭력으로 되 갚지도 않았다. 3.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환대로 유명해졌다한 가족이나 부족의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무차별적인” 도움은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 10:25–37)에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심지어 다른 민족들이나 종교에 있는 사람들까지 도와 주었고 이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게리 펀그렌(Gary Ferngren)의 에세이 ‘성육신과 초대 기독교인들의 자선활동’(The Incarnation and Early Christian Philanthropy)를 보라). 도시에 전염병이 생겼을 때, 기독교인들의 특징은 살던 도시를 떠나지 않았고 계속 남아서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며 공동체에서 병으로 아파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봐주었다.4. 초대교회는 삶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공동체였다이는 단순히 기독교인들은 낙태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낙태는 위험한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더 보편적인 일들은 “유아 노출” (Infant exposure)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원치 않는 신생아들은 말그대로 쓰레기더미에 버려져서, 죽거나 혹은 노예나 매춘으로 상인들에게 팔려갔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유아들을 구해주고 데려갔다. 5. 초대교회는 성적으로 반문화적이었다로마 문화는 사회 지위를 지닌 결혼한 여성은 혼외 성관계를 삼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남성의 경우 (심지어 결혼한 남성도) 지위의 높낮이에서 낮은 계층에 있는 노예, 매춘부 그리고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과 성관계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허용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부분적으로 로마 문화의 성은 언제나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 되었기 때문이다. 성은 주로 참을 수 없는 육체적 정욕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성적 기준은 달랐다. 교회는 이성간 결혼 외의 어떠한 성관계도 금지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성이 가지고 있는 “더 심오한 논리”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더 오래되고 겉으로 보기에 더 “자유로워 보이는” 이교도의 성적 관습들은 결국 더 엄격한 기독교 규범을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들은 성을 단순히 정욕으로만 보지 않았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희생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고 연합되는 방법으로써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되 성과 사회적 지위의 이중 잣대를 거부하는 평등주의 자들이었다. 마침내 기독교는 성적 자기 통제를 인간 자유의 실현으로 바라 보았고, 이는 우리가 단순히 우리의 욕망이나 숙명 따위에 빠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수치심에서 죄까지: 후기 고대 사회에서 성윤리의 기독교적 변화’ [From Shame to Sin: The Christian Transformation of Sexual Morality in Late Antiquity]를 보라).사랑의 도전초대 교회는 주변 문화와 어우러지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그들을 도전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결국 놀라운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만일 오늘날 이와 동일한 사회 프로젝트가 시행된다면, 그때와 비슷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features that made the early church unique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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