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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희생이 맺은 열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순천중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12-29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순천은 미국남장로교회선교부가 호남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선교지부를 세운 곳이다. 또한 이 지역의 선교를 전담한 미국 남장로교회는 북장로교회에 비해서 7년이나 늦게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렇지만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하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회의 성장과 함께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특별히 큰 지역이었다.1892년 남장로교회는 선교사들의 입국과 함께 호남지역을 담당하게 되었고, 1894년 이눌서(W. D. Reynolds)와 드루(A. D. Drew)가 처음으로 순천을 방문했다. 1898년에는 테이트(Lewis Boyd Tate)가 순회하면서 전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순천의 선교 가능성에 대한 조사와 함께 언젠가는 선교지부를 설치해야 할 곳이기 때문에 순회 전도는 지속해 왔다. 그러나 인력이나 재정적인 지원이 동반되어야 했기 때문에 순천은 호남지역에서도 가장 늦은 1913년에야 정식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순천에 앞서서 나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방의 유지를 비롯해서 나주에 선교부가 자리 잡는 것에 반대가 심하여 1904년 광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면서 유진 벨(Eugene Bell), 오웬(C. C. Dwen) 등이 광주에 주재했고, 그들은 호남선교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렇게 광주에 정주하게 된 선교사들 가운데 오웬 선교사는 특별히 전남 남동부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순천을 중심으로 보성과 광양까지 기회를 만들어 순회하면서 전도를 계속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오웬은 1909년 폐렴으로 갑자기 별세했다. 동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오웬이 별세한 후 목포에 있던 프레스턴(J. F. Preston)이 후임으로 광주 선교부에 합세했고, 그해 신임으로 내한한 코잇(R. T. Coit)이 부임해서 합력하게 되었다. 프레스턴은 부임하여 오웬이 관심을 집중했던 호남 동남부 지역을 순회한 결과 이미 여러 개의 교회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남장로교 선교부에 순천지부 설치를 강력하게 요구함으로써 1913년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이에 유진 벨과 프레스턴은 오웬이 집중했던 순천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부 설치를 위해 힘을 모았고, 부임하여 이 지역에 관심이 있는 프레스턴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매곡동 언덕에 2천여 평의 부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곳은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조차 꺼리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아이들의 시신을 항아리에 넣어 버리거나 돌무더기를 만들어 시신을 묻어놓은[風葬] 곳이었다. 한마디로 버려진 땅이고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싫어하는 곳이기에 땅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을 것이다.그렇지만 그러한 비용조차도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이 선교부에는 없었다. 따라서 프레스턴, 벨 등 선교사들이 은행 대출을 받아서 마련했다. 그런 와중에 프레스턴이 1911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여 선교비 확보와 동역할 수 있는 새로운 선교사를 찾는 일을 했다. 안식년 휴가이지만 사실은 선교를 위한 비용과 인력을 확보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이때 만난 것이 전주 신흥학교 설립을 위해서 거금을 기부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그레이엄(C. E. Graham)이었다. 그를 통해서 같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실업가 왓츠(George Watts)를 소개받았다.그런데 왓츠는 군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선교사의 처남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장로였다. 그러니 이미 조선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프레스턴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선교를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우선 순천선교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기금과 13명 선교사의 생활비를 전부 약속했다. 매년 무려 1만 3천 달러를 기부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큰돈을 선교비로 후원해 줄 것을 약속받고 1912년 8월에 안식년 휴가를 마친 프레스턴은 돌아와서 바로 순천지부 설치를 위한 일을 시작했다.이렇게 해서 매곡동 산자락에 1924년까지 마련한 부지가 2만 6천여 평이나 되는 넓은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비교적 초기부터 순천에는 유치원, 남학교, 여학교, 병원, 기숙사, 남녀성경학교 등 종합적인 선교센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왓츠의 지속적인 헌금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는 매년 약속한 선교비를 보내오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설립과 병원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서 8만 달러를 보내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1920년과 1930년에는 직접 태평양을 건너 순천을 찾아와서 선교 현장을 돌아보면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하지만 그 과정에는 또 하나의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순천선교지부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1913년 지부설립을 위해 선발대로 파송된 프레스턴과 코잇 두 가정이 순천에 도착했을 때, 공사가 아직도 진행 중인 사택에서 지내야 했다. 위생 상태는 물론 추운 환경에서 지내야 했는데, 그 과정에 네 살, 두 살 두 아이가 이질에 걸려서 하루 사이에 죽었다. 코잇은 선교부 부지로 매입한 뒷산 골짜기에 아이들을 묻어야 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부인도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회복되었다. 그들의 희생 때문에라도 순천 선교를 반드시 완성해야 했던 코잇이었다. 그렇지만 코잇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이다. 그의 가족은 순천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 순천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선교지부가 설치되기 전의 일이다. 순천보다 일찍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전남 동남부 지역의 여천의 장천교회, 벌교의 무만동교회, 광양의 신황리교회가 1905년에 세워졌다. 어찌 보면 이러한 교회에서 순천읍 지역을 전도한 결과로 세워진 것이 지금의 순천중앙교회이다. 순천에 살던 최정희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고, 김억평, 윤병열, 최사중, 김창수 등과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 강시섭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교인 수가 늘어나자 1907년 북문 밖 양사재라는 서원 건물을 빌려서 짧은 기간 동안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순천중앙교회의 시작이다. 이때 프레스턴 선교사가 이 교회의 당회장으로 돌봤다.1908년 일본군이 순천에 주둔하게 되면서 양사재에서 쫓겨나서 서문 밖(영동)에 있는 5칸짜리 초가를 구입해서 예배를 드렸다. 이때 이미 30여 명의 신자가 회집했다. 그러다가 한일병탄이 있던 1910년 광주에서 파송한 김윤수가 현재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매곡동 144번지에 20평 규모의 T자형 예배당을 마련한 것이 최초로 지은 예배당이다. 하지만 순천을 처음으로 방문하고 전도에 나섰던 오웬은 이곳에 공동체가 형성되는 초기에 그들을 돌보다가 예배당이 건축되기 전인 1909년 별세하고 말았다.우리나라 교회사에는 일반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많다. 그중에도 일제의 박해가 있을 때 교인이 오히려 더 많이 모이는 현상이다. 순천중앙교회도 그랬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 시민들은 오히려 교회를 찾아들었다. 이에 교회는 1923년 부지를 더 확보하면서 예배당을 증축해야 했다. 또다시 1935년에는 붉은 벽돌로 130평 규모의 예배당을 새로 지었다. 이 건물은 지역의 명물이 되었고 해방 이후까지 사용되었다.1939년, 즉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준비하면서 조선반도를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던 그때였다. 마침 그 이전 해에 부임한 박용희 목사가 청년회를 중심으로 성경반을 만들어서 성경공부와 함께 독립운동과 독립정신을 가르쳤다. 이 모임을 간디가 인도에서 인도독립운동을 하면서 사용했던 원탁회로 칭하면서 황두연 장로의 집에서 집회를 이어갔다. 원탁회에서 일본의 황국신민화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했다. 이것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연루된 인사들인 박용희 목사, 장소를 제공하고 함께했던 황두연 장로를 비롯해서 배후의 세력으로 손양원 목사 등 순천노회 목회자 15명 전원을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의 주역인 박용희 목사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42년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6.25사변을 전후해서 순천지역은 특별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격변기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피폐해진 현실은 사람들에게 절망감만 안겨주었다. 정세가 안정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1955년 기존의 예배당으로는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70여 평을 증축해야만 했다. 이어지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도시로 일거리를 찾아 모여들던 1983년 모여드는 신자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해야만 했다. 하지만 건축이 쉽지 않았기에 1985년에야 준공검사를 받았고, 이듬해인 1986년에 봉헌할 수 있었다. 어렵지만 당시로서는 단일 예배당으로 800여 평 규모로 상당히 큰 예배당을 마련했고, 그 예배당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대신에 그 과정에서 1935년에 지었던 정감 어린, 그리고 일제의 수난기와 6.25사변을 겪어낸 예배당은 사라지고 말았다.1992년 미국남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100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순천, 순서, 여수노회가 연합으로 순천중앙교회에서 드렸다. 이것은 선교지부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크고, 동시에 순천중앙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할과 위치가 분명함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 후 순천중앙교회는 2007년 4월 15일 창립 100주년기념감사예배를 드리기까지 순천지역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교회로 성장하면서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를 위해 섬기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순천중앙교회는 특별한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교회인 만큼 기억에 남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특별히 이 교회의 1대 프레스턴 선교사, 3대 담임 목사 이기풍(1920), 7대 담임 목사 박용희(1938), 6.25사변 이후에 임시 당회장으로 활동한 휴 린턴(Hugh Linton) 같은 이들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교회와 지역 사람들의 생활과 신앙을 이끌어 주었고, 나라를 세워 가는 역할을 감당했다.예배당 앞에는 특별한 조형물이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아서 설치되었다. 독특한 모양의 종탑이라고 할지, 높지 않은 탑신을 가지고 있는 십자가 모양의 조형물은 최초 당회장 프레스턴 선교사, 최초 예배당, 원탁회의 사건 등을 부조로 새겼고, 맨 위에는 교회에서 사용하던 종을 달아 놓은 것으로 교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야고보서의 기도 문법을 배우자
by 최창국
2023-12-28
야고보서는 교회 공동체의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교회 공동체는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약 5:13-16). 여기서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는 명령문은 현재시제로, 기도는 교회 공동체의 일상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야고보서 5:16 하반절은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제시한다. 즉, 의인의 기도는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기도에 대한 전체 단락의 핵심이다(존 윌킨슨, 성경과 치유, 374-75). 효과적인 기도는 바로 의인의 진심 어린 믿음의 기도이다. 하지만 모든 믿음의 기도가 효과적인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믿음의 기도가 반드시 효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가 치유되기를 전심으로 기도했지만 치유되지 않았다(고후 12:8). 여기서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을 통한 질병의 제거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 동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바울의 관계성 속에서 나오는 질병의 새로운 용도가 곧 치유였다.중요한 것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기도의 효과를 의미하는 현재분사 에네르고우메네(energoumene, 효과적인)에 대한 문법적 또는 해석학적 논쟁이 있다. 분사 에네르고우메네가 수동태 혹은 중간태로 해석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메이어는 이 분사는 수동태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의인의 기도는 성령의 초월적인 능력 안에서 효과가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J. B. Mayer, The Epistle of St. James, 177-79). 반면에 기도의 효과에 대한 중간태(middle voice, 능동태와 수동태 사이의 어법)의 의미는 성령의 초월적인 능력보다는 기도 자체로써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현대 주석가들이 선호하고 있다(James Adamson, TDNT (1064), vol. 2, 923-38). 기도의 효과에 대한 이 두 해석은 기도는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인 역사의 경험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영 등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기도의 문법을 수동태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해 성령은 능동적으로 역사하고 우리는 수동적으로 응답을 받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기도의 문법을 중간태로 이해할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은총 또는 창조적 선물이 활성화되도록 하나님의 생명력과 리듬에 참여하는 행위로 이해하게 된다. 잭 레비슨도 기도 실천에서 중간태의 특성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밝힌다.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직접 개입하여 역사하기보다는 출생 때 주어진 하나님의 숨-영(창 2:7)이 넘칠 정도로 채운다(toping up)고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채운다는 것은 없던 것을 갑자기 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마음과 영 등이 온전해진다는 의미라는 것을 구약 과 신약, 그리고 고대 유대 문헌과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헌에 드러난 영(ruach)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밝힌다. 따라서 “우리 속의 하나님의 영이 계속 거룩한 영으로 유지되려면 올바른 실천이 반드시 필요하다”(잭 레비슨, 성령과 신앙, 102). 특히 하나님의 숨-영이 이미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기도 방법도 달려져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숨-영이 우리를 자극하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출생 시 주어진 “우리의 영이야말로 일차적인 기도의 동인이고, 하나님과 신자 간의 처소이며, 인간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장소이다. 하나님의 영이 이 기도를 승인할지는 몰라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이런 촉발과 영감은 내면에서 나온다”(잭 레비슨, 성령과 신앙, 84).야고보서에서 효과적인 기도의 문법이 수동태의 특성보다는 중간태의 특성이 더 타당하다고 할 때, 현대 교회의 기도 이해에 주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기도의 중간태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미흡했기 때문이다. 기도의 문법은 능동태와 수동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중간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단지 기도하는 사람이 성령의 능동성, 즉 기적과 능력을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인 기도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데 텔로스(telos), 즉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명력을 나누는 데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움직이고,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이며, 만남과 응답의 리듬이다”(케네스 리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19).유진 피터슨도 기도의 특유한 특성을 그리스어 문법의 중간태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스어 문법책에는 중간태가 ‘행위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묘사하는 동사 용법을 말한다’고 적혀 있다. 지금 그것을 읽고 있는데, 마치 기도를 설명하는 문서를 보는 느낌이다. ‘행위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체들’이란 표현은 기도에 딱 들어맞는다. 나는 상대의 행위를 통제하지 않는다. 주문이나 의식으로 신을 움직이게 한다는 건 이미 비인격적이고 운명론적인 의지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건 힌두교적인 기도 개념이다. 나는 세상을 지으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분이 시작한 행위에 가담하며,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결과에 참여한다. 행위를 하지도, 행위에 지배받지도 않았지만 주님이 뜻하신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다”(Eugene Peterson, The Contemplative Paster, 103-04).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참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 존재론적 동역자가 아니라 실천적 동역자가 된다. 물론 인간의 욕구가 기도 생활의 가장 원초적인 동기가 된다. 그러나 기도에서 욕구를 위한 차원이 기초적이지만 모든 것은 아니다. 기도의 본질적 목적은 단지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력을 경험하는 데 있다.레오나르도 보프는 그가 어느 날 그를 설레게 했던 한 부인과의 만남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을 소개한다. 그가 만난 부인은 열다섯 살 된 아들과 함께 도시의 쓰레기 집하장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수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그 여인은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경직되어 웅크리고 있었고 울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보프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지경에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그때 그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부드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눈으로 그녀는 나를 바라다보았다. ‘저요?’ ‘어떻게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제 아버지가 아니었던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제가 그의 손에 있음을 느낄 수 없다면, 그 누구에게 제가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보프는 이 만남을 통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마르크스는 잘못 생각하였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서 신앙은 마약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빛을 발하는 해방이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삶이다”(Dorothee Solle, The Silent Cry, 294에서 인용). 우리는 여기서 기도는 단지 말이 아니며, 생산품도 아니며, 신비적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기도의 이러한 신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통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변화시킨다. 방향이 잘못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통치 관계로 만들지만,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만든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사랑이 통치를 무너뜨리고 사랑이 드러남을 알게 되는 바로 이 점에서 기도 또한 작용한다. 그것은 사랑의 한 언어다. 그리고 기도가 사랑의 언어가 아닌 곳에서는 그것을 생략할 수 있다”(Dorothee Solle, The Silent Cry, 296). 여기서 사랑은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어’라고 말하는 종속성과 같은 것이다. 이 종속성은 서로를 충만하게 하는 종속성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사랑이 넘치는 종속성이다. 기도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중 경청’의 엄중한 교훈
by Trevin Wax
2023-12-27
내 믿음의 영웅 중 한 명인 존 스토트는 “이중 경청”라는 개념을 대중화했다. 그는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의 진리에 따라 형성되고 또한 현대 세계의 현실에 완전히 몰입한” 기독교인의 지성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스토트는 “이중 거부”라는 맥락에서 이중 경청이 필요하다는 프레임을 만들었다.이중 거부첫째,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성경 공부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말씀이 세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둘째, 우리는 세상을 따르기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주변의 사건과 경향, 또는 이론에 너무 매료되어 이 세상을 말씀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또는 더 나쁘게는 세상의 기준으로 말씀을 판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이중 거부가 의미하는 바는 현실도피적 후퇴의 길과 혼합주의적 순응의 길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토트의 비전은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이 옹호하는 “선교적 만남”과 유사하다. 선교와 만남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중요하다. 세상에 순응하는 것은 선교적 접점이 없는 만남이라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면 순결이라는 환상에는 이를지 몰라도, 우리가 다가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은 만날 수 없다. 이중 경청의 필요성스토트는 이중 경청을 이중 거부가 가진 긍정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우리는 기대와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혼란스럽고 원하지 않는 말씀을 주실 수도 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주변 세계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먼저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그들에게 말씀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고 노력한다. 스토트의 설명이다. 우리는 겸손한 경외심으로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이해하게 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비판적 예민함으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을 믿고 순종한다는 건 아니다. 단지 세상과 공감하고 복음이 세상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발견하기 위해 은혜를 구하겠다고 결심한다. 팀 켈러는 이중 경청에 있어서 최고의 모델이다. 성경에 뿌리를 두고, 청교도에 대한 독서와 더 폭넓은 개혁 전통에 참여하면서 신학적 성찰에 흠뻑 젖었던 이가 켈러이다. 그는 또한 사회 동향에 대해 늘 호기심이 많았으며, 비그리스도인의 문헌과 분석에도 정통했다. 그랬기에 켈러는 현대의 우상 숭배가 성경의 진리와 접촉하도록, 그것도 가슴을 찌르는 방식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켈러를 그토록 효과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이중 경청이다. 즉 말씀에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임과 동시에 말씀에 비추어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분석하는 자세이다. 존 웹스터의 중요한 상기이중 경청에 대한 스토트의 제안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그건 스토트 때문이 아니라 그 표현이 오용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세상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말씀을 듣고 적용하는 방법을 알기 전에 세상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먼저 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쉽게 바뀔 수 있다. 스토트의 비전은 말씀에서 시작하여 그 말씀을 세상에 적용하려는 노력이다. 그에 반해서 이중 경청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목사나 교사가 우선 성경에 깊이 빠졌다가 나중에 때가 되면 세상의 문화를 분석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야 세상이 더 집중해서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 웹스터(John Webster)가 “제자도와 부르심”이라는 강의에서 주는 중요한 교훈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는 사실상 스토트의 말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임무가 항상 세상이 아닌 말씀에서 시작하고 계속해서 말씀을 강조되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실한 교회는 세상의 리듬을 따라가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흥분되고 불안정한 교회는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으며, 안정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이고 인내심 있는 관심, 그리고 과도한 자극을 피하는 데서 비롯된다. 교회가 주변의 변화하는 문화만큼 유행에 빠지고 흥분한다면, 교회는 참으로 독특한 무엇인가, 즉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 안정된 확고함을 제공하는 능력을 잃을 것이다. 마치 스토트의 “이중 거부”가 피하려고 하는 또 다른 함정을 예상이라도 하듯이 웹스터가 말한다. 물론 교회는 세상이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질 것이다. 정중하고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자기중심적이고 반응이 없는 일종의 긴장증에 빠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도피주의자의 후퇴란 있을 수 없다! 웹스터의 요점은 신실한 교회가 세상의 말을 들을 때 “세상이 떠드는 내용에 매료되거나 압도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복음은 우리를 매료시키고 우리를 모든 것으로 채워 준다. 예수에 집중하기웹스터의 말이다. 복음은 언제나 세상을 능가한다. 예수님 자신은 세상보다 더 권위 있고, 합법적이며, 승리적이고 또 흥미롭게 말씀하신다. 교회가 정말로 세상을 사랑한다면, 교회는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표현을 듣기 위해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복음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복음을 잘 듣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을 돕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이중 경청이 끝없이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말씀을 다 들었으니까 이제는 세상과 소통하면 되겠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쉬지 않고 말씀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배워야하고 또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향해서 진리를 드러내는 길이다. 어쩌면 세상은 후기 현대, 포스트모던, 후기 자본주의, 세계화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는 우리가 지금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고백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와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곳에 머물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에게 이미 성취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제시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분은 자신에게는 마땅한 권리이자 우리에게는 성취가 되는 순종을 기대하신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가볍고 찰나이다. 그러나 말씀은 무겁고 영원하다. 이중 경청이 가능하려면 말씀에 일시적인 우선순위를 두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꾸준히 말씀을 파고 또 파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바라본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참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말씀을 가져간다는 의미이다. 원제: A Crucial Reminder for ‘Double Listen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도의 삶
시편 88편 묵상
by 고명환
2023-12-26
1 자식을 잃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으며 그 아픔은 의식이 있는 한 따라다닌다. 재물이나 건강을 잃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실감의 무게 역시 가벼워지지 않는다. 다윗은 많은 자녀를 둔 복을 받은 것과 비례해서 그들로 인해 심한 고통도 겪어야 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핏덩이로부터 장성하여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던 아들에 이르기까지, 분신과도 같았던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 중 아끼던 아들 압살롬의 죽음은 그 어느 자식을 잃어버린 것보다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 같다. 아버지를 제거하고자 천인이 공노할 일을 벌였던 반역자 아들, 압살롬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그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으로 한동안 슬픔의 나날을 보낸 것을 볼 때, 자식들을 향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분명, 시간을 두고 일어난 아들들의 죽음은 그의 마음에 죽는 날까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했음에도, 그것이 삶의 방향을 흔들지 못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비극 앞에 심한 자책으로 긴 세월을 소모하지 않았고, 주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완숙한 성도로 살아갔다.욥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졸지에 잃은 충격은 많은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컸을 것이 뻔하다. 그 또한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특별한 아버지였음을 성경은 들려준다. 행여나 자녀들이 잔치를 벌이고 나면 자식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를 지었을까 봐 다음 날 아침이면 그들을 생각하며 번제를 드렸다고 한다(욥기 1장). 이렇듯 섬세하게 돌보았던 자녀들이 모두 참변을 당했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낙심하고야 말았다. 허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녀들의 죽음이 주님을 향한 믿음을 헐어 놓지는 못하게 했다. 마음의 고통을 표현했을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녀를 비롯한 그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고백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 주었다. 상실이 그를 주님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젊은 나이에 미국의 뉴 잉글랜드로 이민 온 60대 부부를 알게 되었다. 미국식 아침식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직접 운영하여 경제적 어려움 없이 안정된 생활을 하는 부부였다. 한때 교회를 다녔지만, 오래전에 신앙생활을 중단했다는 주변 사람의 말을 듣고 식당을 찾아간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물론, 교회로 인도할 목적의 방문이었다. 몇차례 식당을 방문하면서 서로에 대한 경계를 낮출 수 있었고, 마침내 그분들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더 깊은 대화를 하며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호기였다. 부부가 사는 집은 둘이 사용하기엔 큰 전형적인 뉴잉글랜드의 이층집이었다. 집에 들어서자 부부는 집안의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며 여러 공간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안내한 방은 칠년 전부터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빈방이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말끔하게 치워진 방의 한켠에는 활짝 웃는 앳된 청년의 사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7년 전에 죽은 아들의 방이라고 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근처 바다로 서핑을 갔던 아들은 사고를 당해 영영 부모의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던 부부는 그가 남긴 모든 것을 고스란히 그 방에 보존한 채 아들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있으면 왜 내 아이를 죽게 해요.”“그분이 진짜라면 아들을 지켜줘야 하지 않아요?”여전히, 분노가 묻어 있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항변에 선뜻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무언가는 말해야 했다. 그래서 만든 대답은 지금 애써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의례적인 대답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바꾸기에는 궁색한 위로의 말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부부의 심한 실의와 불신은 교회와 하나님을 등지게 몰아갔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의 가족과 소유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평탄한 길 만을 걷게 해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지자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다. 안 집사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김미선(가명) 성도의 첫째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약물 과복용이 사인이라고 했다. 남동생이 마약 중독으로 떠난 지 채 일년도 안 되었는데 형도 그 길을 가고야 만 것이다. 얼마 전 동생을 묻는 자리에서 관에 손을 얹고 잘 가라고 눈물로 작별 인사를 했던 형이었는데…. 삼십을 코 앞에 둔 펄펄한 청년 둘이 일년을 사이에 두고 마약의 희생양이 된 것도 가슴이 먹먹한 일이었지만, 남은 아들마저 잃은 김미선 성도의 심정을 생각하자 모든 우울한 기운이 한꺼번에 덮쳐 왔다. 이젠 더 이상 해 줄 위로의 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미군을 만나 타국으로 시집온 그녀에게 두 아들은 삶을 지탱해 주는 한 축이었다. 다른 한 축을 담당해 주어야 할 남편은 잦은 외도로 기대지 못할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속 썩이는 남편 때문에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며 살아왔는데, 두 아들의 잇따른 죽음은 그녀를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할 것만 같았다. 물론, 소식을 들은 주변의 사람들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어찌할 수 없어 며칠을 기다린 뒤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분은 모든 방문자를 거절하고 홀로 막막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들려온 소리는 절망 끝에서 나오는 힘 없는 절규였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지요?”“또, 왜 꼭 하나님을 잘 믿어 보려고 할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그렇다. 남편의 배신 이후 겨우 추스르고 일어나 주님만을 신뢰하며 살겠다고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던 중, 둘째 아들이 떠나는 시련이 닥쳐왔다. 그래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려 몸부림으로 지탱해 왔건만, 또다시 찾아온 불행은 그녀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은 것 같았다. “저도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건넨 힘없는 응대였다. 거듭된 시련은 김미선 성도를 주님을 영영 원망하며 멀어지게 할 것만 같았다. 헌데, 감사하게도, 두어 달 지나 김미선 성도는 교회에 다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주님 외에 그가 갈 곳은 없었다. 살아야 한다면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았던 것이다.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지만 시간이 흐르면 의문도 아픔도 점차 희석되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주님을 따라가기로 다짐했다고 믿고 싶다.내가 교회를 떠난 후 들리는 소식은 희망적이다. 떠났으나 보내지 못한 두 아들의 엄마는 매일 그들이 잠든 무덤을 방문한다고 한다. 아울러, 교회도 착실하게 다녀 새로운 목사님에게서 집사 직분도 받았단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두 아들도 잃고 주님도 잃어버렸다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떨치지 못할 안타까움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성도의 길을 이탈하지 않고 눈물로 가고 있는 것이다. 2시편 88편은 시편 중 가장 어두운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암울한 기운이 무겁게 드리우고 있다. 적어도 고난 가운데 구원을 호소하는 많은 비탄시의 처음, 혹은 중간, 아니면 마지막 부분이 찬양이나 감사로 장식된 것과 달리 이 시의 어느 곳에서나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기도응답에 대한 기대나 밝은 미래에 대한 소망도 그려져 있지 않다. 전편에 걸쳐 짙은 어두움만이 흐른다. 시편 88편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1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2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3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7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8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9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13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4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15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16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17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18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어렸을 때부터 시인을 따라다녔던(15절) 고난은 이제 가까운 친구들마저 떼어 놓았고, 건강마저 앗아가 버렸다(8, 9절). 게다가, 주님은 그를 버렸고 얼굴을 감추셔서 더 이상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 것 같다(14절). 사실 여부를 떠나 여러 절에서 표현했듯, 그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었다. 주께서 그를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 던지셨고, 친구와 건강을 앗아 가셨으며, 두려움과 공포를 보내어 떨게 하셨다. 주님께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극한의 벼랑에 시인을 놓으신 것이다. 세찬 고난 속에서도 시인은 주님 앞에 자리 잡고 낮이나 밤이나 그분을 바라본다(1절). 무덤과 같은 어두움만이 지배하는 환경에서도 그의 영혼은 주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바꿀 수 없는 형편을 상세히 알리는 한편, 비참한 환경에서 갖는 그의 생각과 감정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부르짖어 구원을 호소한다. 찬양과 감사의 구절로 고조된 음역을 연주하는 듯한 시편의 시들 가운데 왜 절망의 늪에 빠진 영혼이 토해내는 신음과 같은 시가 삽입되었을까? 의도를 알지 못하나, 이런 성도의 삶이 분명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이를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고난의 긴 터널 속에 주님은 성도를 놓아두기도 하시는 것을 보여 준다.그리고 이때, 성도가 취할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가르친다. 비록 낙심과 고통으로 주저앉을 수는 있으나 주님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말 것을 암시한다. 원망과 불평 속에 뒤돌아 가기보다 오히려 부르짖어 기도하는 편을 택하라고 들려주는 것 같다. 이것이 다채로운 시편 가운데 이 시가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아닐까?3성도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은 각각 다르다. 어떤 성도에게도 동일한 길이란 주어지지 않는다. 비교적 순탄한 길로부터 험하고 거친 길에 이르기까지 성도가 걸어야 할 길은 다양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헌데, 그중 고난이 기다리지 않는 성도의 길은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재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을 수 있고, 육체나 정신적 질환에 시달릴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당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떠한 조건의 길이 주어졌건 주님은 성도들이 끝까지 완주하기를 원하신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치면 상상치 못할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잃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꿋꿋하게 버텨 시련을 이겨내어, 모두 이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영광에 이를 수 있을지 찾고 따라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인내로 견디어 내야 한다. 누가복음 8장에 기록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는 어떻게 준비된 마음이 열매를 맺는지 들려준다. 이와 함께, 신앙을 포기하는 이유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낙오하는 영혼들에게 시련이나,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시련이나 유혹은 신앙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온다. 다만 이들은 고난이나 세상의 유혹이 마음에 간직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지 못하도록 인내하며 지켜낸다. 그들이 단지 좋은 마음의 상태를 준비했다고 신앙의 승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씀은 가르쳐 준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누가복음 8:15). 지키고 인내하는 생활이 성공적인 성도의 삶을 견인하는 중요한 요건임을 알려 준다. 시편 71편의 성도는 88편의 기자처럼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어 왔고 태어날 때부터 주님을 의지했다고 한다(시편 71:5-6). 이제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고 인생의 서리가 내린 늙고 쇠약한 노인이 되었다(9, 18절). 세월은 흘러 인생을 마감할 시기가 가까웠으나 줄곧 따라다니는 고난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4, 10, 11절). 여전히 그를 해치려는 잔인한 자들은 주변을 맴돈다. 한편, 살아오는 동안 고난이 끈질기게 그를 따라왔다면, 그는 변함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해 왔다. 주님밖에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5, 14절).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에서 ‘견디다’라는 단어는 여러 번 사용되었다.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환난을 예언하시면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24:13).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딜 것을 당부한다(야고보서 5:7). 사도 바울도 여러 편지에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성도들을 격려했다. 인생의 거친 길을 헤쳐 나갈 때 개인이 가진 능력만으로 인생의 시련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면, 절대적인 타자가 원하는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적 삶을 실천하는 여타 종교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과 개인적 관계를 맺고 계시는 주님은 성도의 아픔이나 난관에 객관적 방관자가 아니시다. 곁에서 이기도록 격려하고 위로해 주시는 친구이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주님께서 모든 형편을 아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성도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주님은 그와 함께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성도를 떠나시지 않는다. 눈앞이 깜깜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도 주님은 지켜보고 계신다. 혼자인 것 같으나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이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은 좋으신 분이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하나님이다. 자녀의 불행을 결코 바라지 않으시며 더군다나 망하기를 바라는 분이 절대 아니다. 현재의 아픔이 지금은 이해되지 않지만, 그분의 선한 계획 안에 있고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로마서 8:28)은 분명하다. 주님이 좋으신 분이고 귀한 분으로 마음에 자리 잡는다면 내가 소유한 것을 잃는다 해도 그분을 향한 신뢰에 금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상실감을 갖게 될지 모르나 그분을 떠나지는 않는다. 주님이 삶의 이유이고 목적이고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의 선하심(goodness)을 믿고 현재의 어려움들을 이겨 나갈 것이다. 다윗은 시편 27편에서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선하심을 온전하게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편 27:13, 14).4고난에 굴복해서 얻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소중한 것을 잃고 상실감에 잠긴다고 같은 것을 돌려받지 못한다. 질고 중에 주님을 원망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영혼마저 황폐해질 것이다. 성공을 향해 기도하고 노력해 왔지만 실패만을 거듭해 왔다고 실의에 빠져 주님을 떠난다면, 인생 전체를 실패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고난을 통과했을 때 얻는 유익을 바라보자. 고난은 즐겁지 않으나 고난의 경험은 나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큰 자산이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71절). 사도 바울은 죽음을 선고받은 것 같은 큰 고난을 겪었다고 증언한다. 고난만큼이나 하나님의 위로도 넘쳤고 그 위로로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며 하나님을 찬송한다(고린도후서 1:3-8). 두 아들을 마약으로 잃은 김미선 성도는 그 뒤 같은 슬픔을 겪는 부모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서로 위로하고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는 일에 활동한다고 들었다. 그 성도만큼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진 부모의 심정을 잘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테고, 어떻게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지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고난의 경험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같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쓰일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고난을 주신 이유는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다. 더욱 견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할 경험과 지혜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씀하신다(잠언 24:16). 신앙은 살아내는 거라고 말들 한다. 성도의 삶은 언제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행형이어야 함을 들려주는 교훈들이다. 잠시 주춤할 수 있으나 또 나아가야 하고, 넘어졌으나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로마서 8:18)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 어떤 어려움이라도 딛고 일어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예수 강생의 하모니
by Justin Taylor
2023-12-25
다음은 마태복음 1-2장과 누가복음 1-2장의 예수 탄생 사건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각 복음서 저자가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간단한 연대기이다. 마태는 주로 요셉의 눈을 통해서 사건을 전달하고, (아마도 마리아를 인터뷰했을) 누가는 주로 마리아의 시선으로 사건을 파악한다. 마태 누가 예수의 계보 1:1-17 3:23-38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요한의 탄생을 예고 1:5-25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 1:26-38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 1:39-56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낳음 1:57-80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림 1:18-25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낳음 2:1-7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을 전하고 목자들이 예수를 찾아감 2:8-20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려감 2:21-40 동방에서 박사들이 도착(예수 탄생 1-2년 무렵?) 2:1-12 천사가 요셉에게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 이름 2:13-18 천사가 요셉에게 가족을 데리고 나사렛에 돌아가라 이름 2:19-23 함께 보세요 ▶ Lumo Project 원제: A Harmony of the Birth of Jesus: Matthew and Luk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 없음의 유혹
by Trevin Wax
2023-12-23
유혹 하면 보통 마음을 끌어당기는 특정한 태도와 행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유혹받는 게 뭔지 잘 안다. 분노를 터뜨리는 것, 음란한 환상에 탐닉하는 것,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또는 내가 당한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그러면서 연민에 빠져서 쓰라린 자아의 뿌리를 키우는 모습 등이다. 유혹이라고 하면 보통 죄를 생각한다. 또한 이기적인 충동을 떠올린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진리로 죄와 유혹에 맞서 싸우기를 소망한다. 간과된 유혹특정한 죄에 대해서 선하고 경건하게 저항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가 행여라도 정작 훨씬 더 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혹, 이기심의 더 깊은 근원이자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심각한 유혹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이 유혹은 다른 모든 죄악의 중심에 있으며, 개인 차원의 죄나 사소한 태도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하나님 없음의 유혹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또한 하나님에 관한 특정 성경 가르침을 부인하는 영적 또는 종교적 사람들에 관한 것도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일상생활과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삶, 그래서 우리의 창조주를 아예 언급하지 않고 살고 싶어 하는 유혹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그는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자 저자를 내가 직접 쓰는 이야기의 각주로 축소한다. 이런 유혹을 “하나님 없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그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현실 대부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 부재점점 더 세속화되는 사회에서 이 문화를 정의하는 것은 죄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이다. 우리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건설하고, 하나님을 주변으로 몰아낸다. 그래서 하나님은 삶의 가장자리 여기저기를 떠돌며, 필요할 때 치료를 공급하거나 고난받을 때 위로의 원천 정도로만 소환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게 아니라면, 나와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안전하게 안주하며 내 일상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기를 원한다. 종종 개인적이자 사적 종교라는 감옥에서 하나님을 내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언제나 우리가 만든 조건에 부합할 때이다. 이제 우리는 나를 괴롭히고, 자유를 침해하고, 또 욕망을 방해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안전하다. 이것은 세속 시대의 삶이 직면한 큰 유혹이다. 아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편한 대로 만들어 저기 어딘가 내놓은 존재로 인식하면서 살고 싶은 유혹이다.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유혹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살아가는 이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러나 스포트라이트가 정작 우리를 비췰 때 눈을 가려서는 안 된다. 이 유혹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부재를 당연시하며 사는가? 전능한 ‘내’가 내 생각과 열망의 중심에 있는 진짜 위대한 ‘나’를 얼마나 자주 밀어내는가? 우리의 예배, 모임과 외출, 봉사와 사역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실제적인 고려가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세속 시대 교회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각종 활동으로 바쁘고 싶은 유혹에 항상 직면한다. 문제는 그 하나님이 사실상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일상적인 기독교 용어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조를 암송한다…. 단지 기능적 세속주의자로서.기도하지 않음우리가 하나님을 잊거나 무시하려는 유혹에 굴복했다는 가장 분명한 신호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라진 기도야말로 내 가면을 벗기고 나의 자급자족 정신을 드러낸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현실 세계”를 권력, 정치, 일과 여가, 심지어 사역의 중심으로 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결과 우리는 교회라는 영적 영역과 세상의 거칠고 험난한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을 받아들였다. 한편,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분, 즉 우리가 가진 위대함과 자립이라는 환상을 벗겨내시는 하나님은 옆으로 제쳐둔다. 우리가 진짜로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안다면, 그래서 나를 부르신 분을 의지하지 않고는 길이 없음을 진정으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조용한 절망 가운데에서 그분이 함께하심을 갈구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고 또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하얀 불빛 같은 거룩하심과 함께 다가오는 부드러운 손길의 신선함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하나님을 옆으로 밀어내기세속 시대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가져다준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변으로 밀어낼수록 우리는 더욱 더 중심 무대에 선다. 이제 중요한 건 오로지 인간의 활동이다. 우리의 목표와 열망. 우리의 전략과 기술. 우리의 목적과 계획. 영원하신 분이 단지 보조 역할에 그치기에, 우리는 이제 영원이란 관점을 잃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정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것들은 이제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 숨겨져 있다.뜨거운 기도의 부재로 드러나는 하나님 밀어내기, 이것은 확실히 우리 시대가 직면한 가장 큰 유혹이다. 원제: The Temptation We Most Often Overloo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by 박혜영
2023-12-22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예수의 탄생과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 또는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며,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요 1:13) 말미암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으면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있음을 믿게 되며,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아무 어려움 없이 믿습니다. 둘 다 원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반면, 어느 한쪽을 믿지 못하면, 다른 한쪽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진리는 하나[한 덩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분이 자신은 거듭난 신자지만,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좀 마음에 걸린다고 하면, 그 사람 속에서 진리는 불일치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진리는 하나[한 덩이]라는 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전능(全能)하시며, 전능하기에 전지(全知)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두 분이라고 칩시다. 그럼 상대방을 어쩌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쩌지 못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 순간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쩌지 못하는 대상이 있으면 전능하지 않은 것이며, 전능하지 않다면, 전지하지도 않다는 소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전지하려면 전능해야 하며, 전능하려면 하나님은 한 분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과 특성에 대한 진리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덩이입니다. 원래의 내용으로 돌아와 봅시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요셉이 …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마 1:25)—에서 평범한 사람처럼 열 달을 채우고 출생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자가 육신이 되었으며, “나실 바 거룩한 자”(눅 1:35)가 되었습니다. 같은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에도 적용됩니다. 육신으로 태어나 살던 어떤 사람이, 삶의 어느 순간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요한일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낳았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담하게 “씨[헬. 스페르마]”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요일 3:9). “씨”는 헬라어에서 ‘정자’(精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의 ‘정자’(perm[스펌])가 이 헬라어, 스페르마에서 기원한 겁니다. 하나님이 신령한 “씨”를 육신으로 사는 어떤 사람에게 주시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일 3:9), 곧 “하나님의 자녀”(요일 3:10)가 됩니다. 하나님의 씨에 의해 잉태된 자녀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존재입니다.그럼 “하나님의 아들” 곧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육신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령으로 난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같은 모습이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3:2). “그와 같을 줄을!” 둘 다 성령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장래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으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뭐라고 말하는지 자세히 보면 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잉태된 아기가 어미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자라면 때가 되어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씨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 또한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요일 3:3)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부모에게서 난 사람이 전부인 이 세상에 하나님에게서 난 자가 출현하였습니다. 새로운 종의 인간입니다. 그렇다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죄를 짓지 아니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영화 Past Lives: 가벼운 로맨스 세상에서 발견하는...
by Brett McCracken
2023-12-21
셀린 송의 Past Lives는 미묘하고 아름다우며 탁월한 영화로 올해 최고작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반대가 종종 권장되거나 적어도 반대하는 모습이 더 “진정성이 있다”라고 단정하는 세상에서 도덕적 자제와 자기 부인, 헌신의 고수라는 가치를 일깨우는 상쾌함을 준다. 이 영화는 오랫동안 로맨틱 서사를 지배해 온 예측 가능한 대본(“당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가라”)을 180도 뒤집는, 매우 할리우드답지 않은 러브스토리이다. 이십사 년에 걸친 세 번의 연결영화는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열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북미로 이주한 여성 노라(그레타 리)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 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노라의 생애 중 세 시기를 다룬다. 첫 번째는 그녀가 한국을 떠나기 바로 전날이다. 노라(당시에는 나영)는 같은 반 남학생 해성과 절친한 사이로, 두 사람은 로맨스의 정점에 다다른 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로맨스가 결실하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노라의 가족이 한국을 떠나고 이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이 장면은 프레임 오른쪽 상단에서 한 세트의 계단을 올라가는 노라와 프레임 왼쪽 하단에서 골목길의 다른 계단으로 내려가는 해성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그려졌다.)십이 년이 흘렀고, 노라는 이제 뉴욕에 사는 이십 대의 극작가 지망생이 되었다. 한국에서 사는 해성(성인 역할은 유태오가 연기)은 최근에 군 복무를 마쳤다. 두 사람은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를 통해 재회하고 장거리 로맨스가 꽃피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화상 통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연결(이건 결국 2011년경의 인터넷 기술과도 관련이 있다)과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먼 거리도 피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꿈꾸는 미래에 “올인”하고 싶었던 노라는 온라인 관계를 청산한다. (해성과의 관계가 강화되면서 노라는 자꾸 한국에서의 과거에 집중하는 거 같아서 불편해 한다.) 두 사람은 또다시 각자의 길을 걷는다. 다시 십이 년이 흘렀고, 노라는 이제 아서(존 마가로)라는 유대인 작가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 여전히 서울에서 살던 해성이 처음으로 뉴욕을 방문하고, 이십사 년 만에 노라를 직접 만나자,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잊혔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이 시점에서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스라면 영화는 자연스럽게 삼각관계 플롯으로 바뀌기 마련이며, 노라는 결혼한 미국 남자와 그녀의 “소울메이트”가 될 수도 있는 한국 남자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스가 아니다. ‘이게 내 삶이야’(스포일러 주의) Past Lives를 보면서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3부작 (1995년 비포 선라이즈, 2004년 비포 선셋, 2013년 비포 미드나잇)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삶이 대략 십 년 간격으로 서로 다른 세 가지 삶의 지점에서 해성과 노라를 만나는 것처럼, 링클레이터의 비포 영화도 대략 십 년 간격으로 세 가지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을 관찰한다. 링클레이터의 비포 3부작과 셀린 송의 Past Lives는 둘 다 별(star)이 교차하는 로맨스[결코 맺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로맨스를 의미_번역 주]라는 개념을 탐구하며, 그럼에도 두 사람의 만남은 마치 “운명”이 가능하도록 한 것만 같다. 그러나 비포에서는 주인공이 “소울 메이트”(심지어 그 과정에서 이혼까지 감행하더라도)의 자석 같은 매력에 빠지지만, Past Lives는 “소울 메이트”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장을 던진다. 해성이 뉴욕을 방문하고, 노라는 불안감을 느끼는 남편 아서를 안심시킨다. “이게 내 삶이야. 내가 같이 사는 사람은 당신이야.” 그리고 그녀는 덧붙인다. “바로 여기가,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해성을 향한 노라의 복잡한 감정이 진심일지라도, 또 ‘만약에 해성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면?’ 등의 물음이 그녀의 마음을 스쳤다고 해도, 그것은 추상적이고 소용돌이치는 감정일 뿐 “이게 내 삶이야…. 바로 여기가,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라고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다. 그녀는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인생이 주는 “만약에…”라는 낭만보다 현재의 삶과 약속이라는 현실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마냥 낭만적이며 모든 게 가능한 세상이 아니다. 바로 그녀가 사는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주도하는 정신은 그 반대를 외친다. 모든 선택의 여지를 열어 두고 또 모든 가능성을 즐기라고 한다. 약속은 언제라도 지울 수 있는 연필로 쓰지 결코 잉크로 쓰지 않는다. 놀랍게도 노라의 여정은 이러한 시대정신에 저항한다. 관객이 이십사 년 전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말, “뒤에 무언가를 남겨두면 얻는 것도 있다”라는 지혜에 노라가 귀를 기울인 게 분명하다. 한국에서 살았던 노라의 ‘지나간 삶’은 실제였고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러나 뒤에 남긴 상실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녀는 지금 손에 쥔 현실이라는 ‘얻음’에 감사하기로 선택한다. 어떤 면에서, 이런 식의 과거와 현재의 긴장은 친숙한 위안과 매력을 지닌 우리의 “옛 자아”와 비록 원하지만, 종종 거슬리고 불편하며 생소하기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새 자아”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익숙한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거 같다. 영화는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사는 삶이 가질 수밖에 없는 후회와 고통, 향수라는 진짜 감정을 결코 축소하지 않는다. 노라는 해성이 자신의 삶에서 가진 과거의 의미, 현재의 가치 그리고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꿈을 가지고 씨름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를 뛰어난 작품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복잡한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주인공은 단지 달콤한 로맨스를 위해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감정을 성숙한 지혜에 복종시킨다. Past Lives는 때때로 가장 스릴 있고 낭만적인 선택이 가장 “지루한” 일이 될 수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바로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헌신하라. 그리고 신실하라. ‘인연’ 그리고 인도함을 갈망함 Past Lives는 사랑과 로맨스 이야기인 동시에 떠남과 다른 문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민이 가진 “중간” 성격에 대한 반자서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민자는 동시에 두 문화와 연결되고 두 문화로부터 함께 형성되는 느낌을 받는다. 노라에게 있어 해성과 아서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은 한국 출신과 미국이라는 미래 사이의 긴장과 유사하다. 이야기 속의 두 남자가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두 개의 “집”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을 강조한다. 인연(영어에는 딱 맞는 단어가 없다)이라는 한국어 개념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노라가 아서에게 설명하듯이 인연은 환생을 수반하는 불교적 개념으로 사람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과 운명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낯선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옷이 스치는 것도 인연이야. 왜냐하면 전생에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이거든.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건 팔천 생애 동안 팔천 겹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래.”영화 제목은 환생과 인연이 만들어 냈을 수많은 ‘지나간 삶’에 대한 생각을 상기시키며, 수천 년을 거쳐 오늘날 노라, 해성, 그리고 아서 사이의 연결을 알리는 지점까지 울려 퍼진다. 노라와 해성이 브루클린의 회전목마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회전목마의 돌고 도는 움직임은 아마도 서양의 선형적 시간 개념과 반대되는 순환을 중시하는 동양적 시간 개념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던 거 같다. 노라가 실제로 환생과 인연을 믿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이 영화가 인간보다 더 큰 무언가(인연이든 신의 섭리든)가 인간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의 아름다움과 위안을 전한다고 해서 어떤 신비적인 색채를 띄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신비는 다름 아니라 만물을 하나로 묶으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역사이다(골 1:16-17). 비록 기독교 세계관보다는 불교의 세계관을 더 많이 반영하지만, 무언가 가치를 주는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갈망을 이 영화가 어떻게 포착하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의 삶은 더 장엄한 “계획” 안에서 만들어졌고, 그렇기에 우리의 관계는 단순한 무작위의 충돌 그 이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갈망을 다중 우주 추세와 “정경 사건”(canon eventt) 및 “필연적 교차점”이라는 가짜 영적 개념을 포함하여 대중문화의 모든 곳에서 발견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이 무엇이든, 노라는 자신이 단지 삶에서 수동적인 플레이어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녀가 사랑하기로 맹세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녀가 누리고 있지 않은 “만약에 그러면 어떨까”의 삶이 아니라 그녀가 실제로 사는 “내가 직면한 삶”(비록 불완전하더라도)을 포용하는 바로 그 선택이다. 바로 그 선택에서 그녀는 드물고도 신선한 지혜의 모습을 제시한다. 원제: ‘Past Lives’: Mature Wisdom in an Indie Roma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명목상 교인들,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3-12-2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저명한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그의 책 Biblical Perspectives on Evangelism(Abingdon, 1993)에서 구약 관점의 전도 대상자들을 세 유형으로 분류한다. 첫째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교회 바깥 불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신자가 되는, 가장 전형적인 전도 과정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들’이 다시 그 언약을 ‘기억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율법을 들으며 여호와를 경배하는 광경(느헤미야 8장)은 이름뿐인 하나님 백성이 회복되는 장면이다. 이는 바로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시키는 사역의 전형이다. 브루그만이 말하는 세 번째 전도 대상은 믿음의 자녀들이다. 그것은 사랑받는 자녀들이 믿음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신앙이 후대에 게 전수되지 않고 교회학교가 사라지는 현상은 바로 명목상 기독교가 뚜렷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위의 세 유형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명목상 기독교를 형성하는 가장 주된 집단이다. 신앙의 정체성을 잃은 교인들, 그리고 신앙이 전수되지 않는 교회의 자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중요한 복음 사역의 대상이다. 이번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현상에 관한 조사를 보면 눈에 띄는 특징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연령이 낮을수록 명목상 교인의 비율이 높게 나왔다. 명목상 교인의 연령별 비율이 20대는 50.1퍼센트, 30대는 41.2퍼센트인데, 40대 이상에서는 30퍼센트대로 나온다. 이는 모태신앙인이나 어릴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이들의 경우 주체적인 신앙 결단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면서 명목상 교인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브루그만이 언급한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믿음이 있는 성인으로 자라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번 조사에서 나온 두 번째 특이한 결과는 한국에서 명목상 교인에 이르는 과정은 단순히 기독교 가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명목상 교인들에게 처음 교회 출석한 시기를 물으니, 비명목상 교인에 비해서 훨씬 높은 응답률을 보인 시기는 ‘결혼 후’였다. 명목상 교인의 19.5퍼센트가, 비명목상 교인의 9.9퍼센트가 결혼 후 처음 교회 출석을 했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 글 “가족적 기독교: 우려와 희망”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로 인해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 많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신앙 그 자체보다는 가족과의 관계로 인해서 교회에 다니는 명목상 교인들이 있다는 의미이다. 현재 교회를 선택한 이유에서도 비명목상 교인들은 설교 때문이라고 답한 이들이 가장 많았지만, 명목상 교인들은 가족이 다니기 때문이라는 답이 가장 높았다.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조사에서 나타난 세 번째 특이점은 명목상 교인들의 비율이 중형 규모의 교회들에서 더욱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결과는 중형 규모의 교회들(100명 이상 2,000명 미만)에서 명목상 교인의 비율이 평균보다 높았다(약 43.5%). 반면 2,000명 이상의 대형교회 출석한다는 명목상 교인은 34.7퍼센트, 100명 미만의 소형 교회에 출석하는 명목상 교인은 약 35.3퍼센트로 나타났다. 명목상 교인을 산출하는 여러 조건(20회 이상)을 대입해 봐도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에서 중형교회보다 비율이 낮은 것은 일관된 결과였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몇 가지 추론적 설명이 가능하다. 일단, 상당히 다양한 신앙 양육 프로그램들이 제공되는 대형교회의 교인들은 그러한 환경에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도전을 자주 받으리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적용할 순 없지만, 성장하고 있는 대형교회라면 좀 더 생동감 있는 영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반면 정체되거나 쇠퇴하는 기성교회의 경우 오래되거나 습관적으로 교회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좀 더 많을 수 있다. 혹자는 이 결과에 대해서 코로나로 인한 교회의 재편 가능성도 이야기한다. 코로나 시기 동안에 사람들이 온라인 예배 시스템이 잘 갖춰진 교회들에 관심을 쏠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대형교회로 이동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명목상 교인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거나, 혹은 가족에 이끌리어 수동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이들(한국형 명목상 기독교), 또는 기독교를 문화적으로 받아들이는 크리스텐돔(Christendom) 체제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서구형 명목상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창 기독교가 확산하는 곳에서도 복음의 혼합과 약화로 인한 명목상 기독교가 일어날 수 있다. 현재 세계 기독교의 성장은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의 일부 지역이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성장하는 만큼, 번영신학과 혼합주의 신앙의 문제도 심각하다. 얼마 전 만난 동남아 지역의 한 선교사는 그곳에서 자신이 다녀봤던 현지 교회들 대다수가 번영신학에 물들어 있다고 안타까워한 적이 있다.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진정한 회심과 온전한 제자도를 위한 과제이며,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늘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다. 이번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조사에서는 명목상 교인들의 신앙 의식과 윤리적 삶에 주목해야 할 결과들이 있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에 대한 동의 비율에서 명목상 교인들은 객관적인 교리들인 성경, 예수의 속죄, 성육신, 성령, 창조, 동정녀 탄생에 동의하는 비율이 70퍼센트 후반에서 80퍼센트 후반에까지 이르렀다. 반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인’(48.1%)이나 ‘하나님이 지금도 인간의 삶에 개입하신다’(68.3%)에는 동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 가장 동의하지 못하는 항목은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38.2%)였다. 이 결과를 보면 명목상 교인들은 기독교에서 표방하는 일반적인 신앙 주제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죄 문제와 하나님의 개입과 같은 실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신앙이 그들의 실제적인 삶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신앙 윤리와 관련된 물음에서도 명목상 교인들은 가장 관용적인 항목은 1위가 음주, 2위가 이혼, 3위가 혼전 성관계, 4위가 흡연 순으로 나왔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목상 교인과 비명목상 교인 간에 허용하는 격차가 가장 크게 나타난 항목들이 있다. 사주, 점, 풍수지리에 있어서 ‘해도 무방하다’는 응답 비율이 명목상 교인은 41.3퍼센트, 비명목상 교인은 7.7퍼센트로 나와서 약 5.5배 차이가 난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명목상 교인은 23.9퍼센트가 허용, 비명목상 교인은 5.3퍼센트가 허용한다고 답해서, 약 4.5배의 차이다. 제사에 대해서 무방하다는 응답도 명목상 교인은 48.7퍼센트가, 비명목상 교인은 13.9퍼센트로 나와서 약 3.5배의 차이가 난다. 이같이 실제 생활의 문제로 들어가면 명목상 교인들은 비교적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과 비교할 때 윤리관과 가치관에서 큰 괴리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명목상 교인들을 위한 사역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이번 조사에서는 명목상 교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교회에서 사람들의 신앙 수준에 맞는 눈높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 첫 번째 진단이다. 교회 안에 많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지만 정작 신앙의 기초에 관해서, 즉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서 문외한인 많은 “숨은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는 모임은 드물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양육은 상시 제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특정 초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회중 전체가 복음의 기초를 갱신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둘째로 명목상 교인을 포용하는 소그룹과 같은 공동체 사역이 필요하다. 명목상 교인이 된 이들 중에는 교회 안의 구역이나 모임이 형식적이거나 이미 친하게 지내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것에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셋째는 아직 신앙이 미숙하거나 자라지 못한 이들을 위한 목회적 돌봄의 필요성이다. 목회자들은 주로 공식적인 사역에 전념하다 보니 교회 내의 직분자들이나 신앙의 연륜이 있는 이들 중심으로 교제권을 국한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아직 신앙의 언저리에 있는 이들에게 목회적 돌봄이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명목상 교인에 대한 사역을 목회자가 도맡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목회자 중심주의, 성직주의는 명목상 기독교를 유발하는 한 가지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목회적 돌봄은 전임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 리더들이 상호 유기적 체계를 이루어 교회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수행되어야 한다.명목상 교인들을 위한 사역의 방향으로 신앙의 기초 교육과 공동체, 그리고 세심한 목회적 돌봄의 필요성을 거론했지만, 이 모든 것은 은혜의 복음 선포라는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 신앙 교육과 공동체, 그리고 목회적 돌봄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반복되며 강조되어야 한다. 팀 켈러는 복음적 부흥은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을 돌아오게 한다고 말한다(팀 켈러의 센터처치, 167).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정교한 사역 프로그램의 설계로 해결되지 않고, 은혜의 복음이 회중 전체의 확신과 기쁨이 되고,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들 때 원천적인 해결로 이어질 것이다.
내가 꼽은 2023년 10대 신학 사건
by Collin Hansen
2023-12-19
수년 동안 J. K. 롤링은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트랜스젠더를 거부하는 거의 유일한 주류 인사였다. 한때 동성애자의 권리를 지지하기 위해 펜을 휘둘렀던 그녀가 논리적으로 볼 때 성 혁명의 다음 단계를 밟지 않음으로써 많은 팬은 배신감을 느꼈다. 악명 높은 Tavistock 성 정체성 클리닉이 작년에 폐쇄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올해 영국 총리 리시 수낙은 성명을 통해서 동성 결혼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혼합 지지와 트랜스젠더 이념 거부를 비준했다.그리고 10월 7일에 군인과 민간인, 남녀노소를 불문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시작되었다. 실로 엄청난 놀라움과 공포를 가져다준 사실은 서구의 주요 도시와 명문 대학 캠퍼스에 하마스를 지지하는 군중이 모였다는 사실이다. 하마스가 LGBT+ 정체성을 반대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시위자들은 스스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동성애자”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결국 하마스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훈련하고 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마스가 자유주의 지지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일부 하마스 지도자들은 억압받는다는 주장이야말로 자신들을 감시하는 서구 세계를 향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도구임을 인식했다.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가 동성애자를 억압하는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시위가 어떻게 가능한 걸까? 그리고 대학 총장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량 학살을 옹호하는 발언을 비난할 준비도 하지 않고 의회 청문회에 들어갈 수가 있는가? 존스 홉킨스 대학의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야샤 뭉크(Yascha Mounk)는 이런 현상을 “정체성 합성”이라고 부른다. 뭉크는 신작 The Identity Trap에서 올해 들어서 좌파 진영에서 과도한 비판적 인종 이론과 교차성, 그리고 성, 인종, 성별에 따라 정체성 그룹을 양극화하는 기타 교리에 대한 반대가 증가했음을 보여 준다. 이리저리 맞물린 탄압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동성애자” 그리고 여성 스포츠를 장악한 남성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등 전혀 일관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뭉크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가 교차성에 헌신하는 페미니스트 운동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이제 그 운동의 활동가들은 새롭게 참여하는 사람이 인종 차별의 본질, 장애인이 겪는 불의, 그리고 팔레스타인 분쟁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일련의 구체적인 입장에 동의할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뭉크의 우려를 공유하는 사람은 러시아 문학 분야의 선도적인 전문가인 Northwestern University의 게리 사울 모슨(Gary Saul Morson) 교수이다. 새로운 대작, Wonder Confronts Certainty에서 모슨은 “피해는 그 자체로 악에 대한 하나의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피해자는 이제 자신이 초래하는 피해를 정의의 한 형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의 관찰은 하마스의 공격에 적용이 가능하고 또한 이스라엘의 보복에 대한 경고로도 읽힌다. 모슨은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복음의 심리학적 진리를 보여 주었다고 주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기억에 남는 인물들을 통해 예수님이 산상 수훈에서 가르치신 내용을 설명한다. 악은 단지 나쁜 행동뿐만 아니라 합당하지 않은 욕망이기도 하다. 살인자의 행동만이 악이 아니다. 악은 비통한 마음이 품는 의도에도 담겨 있다. 그렇기에 억압받는 사람이 종종 억압자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는 악한 시대를 통해 길을 보여 주신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억압의 순환에 쐐기를 박는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요 15:13).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할 수 있다(눅 6:27). 정체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평화를 찾도록 도울 수 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복음은 더욱 빛난다.매년 회고의 글이 그렇듯, 올해에도 최고의 신학 사건을 식별하기 위해서 나는 TGC를 구독하는 미국인의 관점에서 글을 쓴다. 이것은 작은 세상 한구석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의 모습이다. 10. 남침례교 총회는 여성 목회자 문제로 새들백 교회를 제명했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이 가장 유명한 목사가 개척한 교회와 관계를 끊는 순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하다. 릭 워렌은 여성을 주요 사역 직위에 앉히지 못하도록 하는 교단의 견해를 바꿔 달라고 남침례교 총회에 호소하는 입장을 밝혔다. 꼭 워렌이 아니더라도, 여성을 목회자라고 부르는 교회를 훨씬 더 많이 제명할 근거를 줄 헌법 개정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거의 모든 신학적 요점에 동의하는 침례교도들조차도 선교를 중심으로 연합된 이 협약에서 이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관해서만은 일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9. 선거 패배 이후 생명 보호 운동이 재편성되었다.여러 측면에서 볼 때, 생명 보호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Dobbs가 Roe를 뒤집은 첫해인 2023년 첫 육 개월 동안, 이전이었다면 낙태를 선택했던 어머니에게서 약 3만 2,000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의롭고 생명을 보장하는 법은 실제로 행동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이번 가을 선거에서 오하이오에서는 낙태 옹호론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켄터키와 버지니아 전역에서는 낙태 반대론자들을 패배시켰다. 생명 보호 운동의 다음 단계로 중요한 건 설득이다. 태어나지 않은 모든 아기가 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것으로 대우받도록 가르쳐야 한다. 8. 티모시 켈러가 사망했다. 팀 켈러가 사라진 지금, 복음주의 진영에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에 대해 폭 넓은 경험과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확실한 후계자가 없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과연 어떤 다른 글을 썼을지 궁금하다. 예를 들어, 정체성에 대한 서구인의 집착과 같은 주제를 성경 주석과 문화 분석을 독특하게 결합해서 써내려가는 글 말이다. 그러나 켈러가 이전 세대의 신학자들로부터 배운 것처럼 켈러를 존경했던 지금 세대에게도 하나님이 여전히 당신의 신실하심을 증명하실 것이다. 7.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새 하원의장에게 집중되었다. 미국 국회의사당 테러 이후, ‘기독교 민족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이 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그 용어를 정의하기란 어렵다. 좋은 것, 나쁜 것, 추한 것이 다 조금씩 이 용어 안에 스며들어 혼합되었다. 지난 10월 미국 하원이 마이크 존슨을 의장으로 선출했을 때, 그는 가장 강력한 대표로서 빠르게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과 연결되었다. 기독교 민족주의라는 기치 아래 옛 종교적 우파부터 새롭게 부활한 신정(theonomy)에 이르기까지, 비평가들이 모든 걸 하나로 묶으려고 할 때, 그들은 법이 필연적으로 도덕성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든다. 단지 그 영향력이 기독교에서 나올지, 다른 종교에서 나올지, 아니면 어떤 세속적인 변형에서 나올지의 문제일 뿐이다. 6. 대중의 이목을 끄는 개종은 세속주의에 대한 환멸을 암시한다.새롭게 기독교에 들어온 아이야 히르시 알리(Ayaan Hirsi Ali), 캐서린 본 드라첸버그(Katherine von Drachenberg), 그리고 몰리 워든(Molly Worthen)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히르시 알리는 신무신론(New Atheism)의 주요 대변인이었다. 리얼리티 TV에서 문신 예술가로 명성을 얻은 본 드라첸버그는 주술과 신비주의를 추구했다. 워든은 역사를 공부하고 미국의 가장 유명한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들의 이야기는 특히 여성에게 희박한 대안을 제시하는 세속 시대에 복음의 능력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이 여성을 위해 모든 걸 바꾸셨던 반면에 세속주의는 남성 지배로의 복귀를 위협한다. 5. 탈교회 추세가 기대를 뛰어넘었다. 올해가 되어서야 우리는 지난 25-30년 동안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규모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크고 빠른 종교 관행의 변화로, 약 4천만 명의 미국인이 교회 뒷문으로 도망쳤다. 아니, 다시는 교회 정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반제도적 정신을 고려할 때, 당파 정치와 학대 스캔들을 탈교회의 주요 원인으로 의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신학의 격하도 의심할 바 없이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단지 이사하고 새 교회를 찾지 않는 등, 탈교회의 진짜 이유는 평범하다. 그럼에도 좋은 소식은 신학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많은 교회가 그나마 쉽게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환대 실천에 대한 도전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4. Z세대가 영적 부흥의 조짐을 보인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어린 세대에 대한 설문 조사를 읽으면 당장 널리 퍼진 정신 질환과 성별과 성적 지향에 대한 혼란 때문에라도 걱정부터 하는 게 당연하다. 물론 1960년대에도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청소년에 대해서 낙관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며 당시는 예수 혁명으로 부흥하지 않았던가? 올해 발생한 에즈베리 각성에 대한 신학적 평가에서는 열정적인 예배와 진정한 부흥에 대한 고무적인 징후가 많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주님께서 코로나를 비롯해서 적지 않은 고통을 견뎌온 이 젊은 세대를 위해 부드럽고 감미로운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고 계신 거 같다.3. 활동가들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부터 성의 신학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어느 정도 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앤디 스탠리가 복음주의자가 동성결혼을 축복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받아들이기는 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성적 행위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도록 로마가톨릭 신자들을 계속해서 촉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서 놀라는 사람들도 없다. 마찬가지로, 현대 기독교 음악은 종종 성경적 도덕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영국 성공회는 수년 동안 동성 결합을 축복했고, 성공회 내에서 분열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왔다. 구도자에 민감한 복음주의자, 음악계의 거물, 로마가톨릭, 국가 교회 등을 막론하고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신학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회 철학이다. 역사는 실용주의와 복음주의가 결합하는 순간, 결국에는 신학적 자유주의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현명한 신학생과 대학생은 남성과 여성을 각각 만드신 하나님의 설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드러내는 기독교 인류학 수업에 몰려들고 있다.2. ChatGPT는 기술 미래학자들을 두렵고 놀라게 한다. 아마도 2007년 아이폰 출시 이후, 대중의 관심을 끌 만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적이 없는 거 같다. OpenAI CEO 샘 알트먼(Sam Altman)의 미스터리한 해고와 재고용은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 획기적인 기술은 교회 사역과 신학 교육, 그리고 거의 모든 영역에서 좋은 방향이든 또는 나쁜 방향이든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이는 이미 AI가 정보를 발견하고 정리하는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젊은 세대를 따라잡으려는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ChatGPT가 당신의 설교를 작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설교를 단지 데이터 전송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1. 이스라엘 군대와 민간인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이 예상치 못한 지원을 받았다.10월 7일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공격의 규모와 파괴는 전 세계, 특히 이스라엘과 미국 정보부, 군 지도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진짜 큰 충격은 무고한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까지 살해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하마스의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하마스가 높은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많은 하마스 지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식민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당화가 수천 년 동안 경쟁을 벌여온 토지에 대해 명확성을 제공하는 건 아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약속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우리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할 수 있다(시 122:6).원제: My Top 10 Theology Stories of 20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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