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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그라운드 안의 사람, 그라운드 밖의 사람
by 김형익2020-05-29
빛난다고 다 금이 아니듯이, 예배당 안에 앉아 있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주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이 세리나 창기가 아닌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의 관원이고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점은 매우 충격적이다. 사실 나는 이것에 충격을 받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목사가 자신의 회중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거듭나야 할 사람인지, 거듭났고 확신을 가진 사람인지, 거듭났으나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인지, 거듭나지도 않았지만 거듭났다고 확신에 흡사한 착각을 하는 사람인지, 거듭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알기에 참으로 거듭나기를 열망하는 사람인지, 또 거듭났고 성숙에 이른 사람인지, 거듭났지만 미숙한 신앙에 머무르는 사람인지를 진단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물론 목사가 한 영혼의 중생 여부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시듯이 확정적으로 진단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런 진단은, 요즘 사람들이 그렇게도 꺼려하는(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다 하는) 남을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비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향해서 쓴 서신들을 읽어보면, 바울 사도가 서신의 대상인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진단하고 있고 그 진단 위에서 서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 서신들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신앙의 교과서로 집필된 책들이 아니다. 이점에서 목회라는 현장에서 설교와 목양이라는 책임을 맡은 목사가 회중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고 그 사역에서 영적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

나에게 맡겨진 회중들을 경건한 어른들로 세우는 것은 나의 목회에서 포기할 수 없는 목표 중 하나다. 6년 전에 집필한 책에서 나는 경건한 어른을 이렇게 정의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분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웃어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사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자기 자신보다 그리스도께 푹 빠지는 법을 아는 사람, 자아를 찾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 거룩함에서 자라 가는 사람, 사람들에게 열심과 뜨거움의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의 차이를 깨뜨리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 얄팍한 프로그램이나 어떤 행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존재감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인생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 번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경건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입니다.”(김형익,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생명의말씀사 212-213쪽).

사람은 어떻게 각자의 신앙 여정을 통과하면서 경건한 어른에 이르게 되는 걸까? 내가 늘 질문하고 고민하고 탐구하는 주제다. 최소한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은, 이건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가 그라운드 밖으로 나간 사람들을 참되고 성숙한 신자로 규정하는 현실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경건한 어른이 되는 길은 그라운드 밖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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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품이나 성숙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불신자 중에도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사람이 있듯이, 신자들 중에도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사람이 있다. 성숙한 불신자(A)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신자가 되었을 때, 이들의 영적 성숙은 미성숙한 불신자들(B)보다는 비교적 빠르게 일어나는 편이다. 주님께서도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고 하시지 않았는가. 이때 이들보다 먼저 교인(그들이 참된 신자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 ‘교인’이라고 부르겠다)이 된 사람들 중에서 미성숙한 상태(D)에 장기간 머물던 사람들의 마음에 불편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다. 나보다 한참 늦게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성숙한 신자(C)로 빠르게 성장하여 교회의 영향력 있는 리더가 되고, 경건한 어른이 되지 않는가? 이 시기심이 긍정적으로 작동하면, 그들도 은혜 안에서 성숙해져서 C의 영역(성숙한 신자)으로 가는 길을 택하겠지만, 시기심이 부정적으로 작동하게 되고 그 유혹에 넘어가게 되면 미성숙한 신자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이 E의 영역이다. 시간과 물질의 비상한 헌신, 열심, 봉사 등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게 되는 일종의 불법 속성 과정(?)이다. 이때 목회자가 이들을 성숙한 신자 혹은 경건한 어른으로 인정하게 되면(인정하는 방법은 직분이나 리더십이다), 교회 전체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한다. 그런 교회에서 경건한 어른, 성숙한 신자들을 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E의 영역으로 가서 교회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그라운드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다. 믿음 안에서의 성장과 성숙을 포기하고 봉사와 열심으로 교회의 인정을 얻으려는 E의 영역으로 나간 사람들은 돈과 거짓으로 교회의 인정을 사려고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목사나 장로, 그리고 집사나 권사 중에서 이런 자들이 왜 없겠는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 보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E의 영역에 있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 아닌가! 만일 자신이 E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돌이켜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목회자는 그런 사람들이 D의 영역(미성숙한 신자)으로 돌이켜 C의 영역(성숙한 신자, 경건한 어른)을 향한 은혜의 항해를 시작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목회자가 E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의 성장을 이루어 보려고 한다면, 그 교회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그것은 목사의 영적 매춘이고, 우상 숭배다.

그라운드 밖에는 소망이 없다.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미성숙하다고 해도, 성장의 속도가 더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라운드 안에 있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가 갈 방향은 하나 밖에 없다. 성숙한 신자, 경건한 어른이 있는 C의 영역으로 가는 방향, 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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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