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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참으로 믿습니까?
by 이승구2020-05-19

지난번에 생각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데 필요한 것의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神性, the divinity, the divine nature)과 성령님의 신성을 확언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좀 더 분명히 생각해 보자. 물론 예수님께서 참된 인성(人性, the humanity, the human nature)을 가지셨다는 것을 전제로 이 논의를 해야 한다. 예수님의 인성이 분명히 확립되지 않은 신성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오해와 이단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간과 공간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께서 분명히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사셔서 그 부모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시고(마 13:55; 눅 1:31; 3:23; 4:22; 요 1:34; 6:42),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몸과 영혼의 온전한 인성을 가지고 지금은 ‘하늘’(heaven)에 계시다고 믿는 것이 예수님의 인성을 믿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던 그때나 하늘에 계신 지금이나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도 “참된 인성”(vere homo, very humanity)을 가지신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동시에 그분이 그저 인간만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vere deus, very God)이시라는 것도 믿어야 한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에 따라서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른 기독교적 고백이다. 일단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백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기독교 밖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강조해야 할 일은 이 사실을 아주 분명히 천명하는 것이다. 기독교 단체라고 하는 곳이나 심지어 교회라고 하는 곳 중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히 믿지 않는 단체나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 단체나 사람들이 사실은 기독교 밖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는 그리스도 교회(Christian church)가 아니며,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Christian)가 아니다.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해야 교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참된 인성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참된 신성을 가지셨다고 공언한다고 해서 다 기독교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참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창세전에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것도 말할 수 있다. 창세전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감히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매우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정통적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자께서는 영원 속에서 “독생하신 분”이라고(요 1:14) 말해야 한다. 이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해서 그가 피조물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표현하면, 또 다른 이단의 길로 가는 것이다. (이를 아리우스 이단이라고 한다. 예전에 알렉산드라의 아리우스가 그와 같이 생각하고 주장했던, 그러다가 이단으로 선언되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영원 가운데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영원중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주께서 친히 이점에 대해서 계시해 주셨기에 우리는 성경에 따라서 이를 말할 수 있고, 또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 이는 다음 몇 가지를 함의하는 말이다.


첫째로,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가 흔히 영원이라고 부르는 그때부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다음에 생각할) 성령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이셨다(the One Triune God)는 사실이다.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the Triune God)께서 유일하신 존재로 계셨다. 아무 것도 없는[무(無)] 중에 참된 존재가 있었으니,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영원히 기쁜 교제를 나누고 계셨다. 이것을 삼위 안의 영원한 교제, 영원한 교통이라고 한다. 서로가 서로 안에 계시며(perichoresis), 영원히 함께 하시며, 깊은 교제를 나누신다. 성경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것도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둘째로, 그 삼위(三位, three persons) 중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말하자면, 성자는 성부의 “독생자(獨生子)”라고 성경의 묘사를 따라서 표현한다(요 1:14). 성경에 이런 표현이 없었다면 우리는 감히 이런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이 표현을 사용하기에 우리는 이 성경적 표현을 따라서 이렇게 말한다. 이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내 아버지가 나를 낳고 내가 자녀를 낳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다 없애자는 의견은 성경에 주어진 표현을 무시하는 것이고 성경을 온전히 따라가지 않는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급하신대로,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유사상가와 성경적 신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우리는 모든 점에서 성경에 얽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시시때때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리하려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극복하고 항상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해야 한다.


정통적 신학에 의하면, 영원 중에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는데(eternally begotten), 이 말은 성부께서 성자 없이 계신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성자는 성부와 같이 영원하다는 의미다. 이 일은 시간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일 이전에는 성부만 있었고, 이 일 이후에는 성부와 성자가 있게 되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이단자인 아리우스(Arius)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Arians)이 주장하던 바였다. 그들은 영원 중에 “성자가 계시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 것으로 아주 악명이 높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영원 가운데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부께서는 한순간도 성자 없이 계신 적이 없으며, 성자는 한순간도 성부 없이 계신 적이 없다. 성부와 성자는 (그리고 후에 언급할 성령은) 항상 같이 계셨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 예전의 교부들은 “성부께서는 항상 말씀하신다”고 표현한 일도 있다. 성자를 가리켜 “말씀”이라고 언급하신 성경 말씀을 따라서(요 1:1),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영원함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은 항상 계속되는 것이니 이는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성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려는 오늘날에는 이런 영원 가운데 있는 소위 내신적(內神的) 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다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라서 말해야 한다. 성경은 성자에 대해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도 표현한다(요 1:18).


이와 같이 이 땅에 계셨던 그러나 지금은 하늘에 계시며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그분의 정체성(identity)이 다른 사람들처럼 태중에 있게 된 때부터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이때 “아들”이라는 호칭 때문에 또 다른 오해를 해서도 안 된다. 아들[聖子]이니 아버지[聖父]보다는 조금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는 성부께서 사용하신 용어요(마 2:15; 3:17; 막 9:7; 눅 3:22; 9:35, 벧후 1:17), 그의 수태를 알리던 천사가 사용한 언어요(눅 1:32),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요(마 11:27; 28:19; 눅 10:22; 요 5:19, 20, 21, 25, 26; 8:36; 17:2), 예수님의 정체성을 증언하는 세례 요한의 언어요(요 1:34), 사도들이 사용한 언어이기에(마 14:33; 16:16; 요 1:49; 3:16, 17; 10:36; 11:27; 14:13; 20:31; 행 9:20; 13:33; 롬 1:2, 3, 4, 9; 롬 5:10; 8:3, 32; 고전 1:9; 15:28; 고후 1:19; 갈 1:16; 4:4; 엡 4:13; 살전 1:10; 히 1:2; 히 3:6; 5:8; 6:6; 10:29; 요일 1:7; 2:22, 24; 3:8, 23; 4:10, 15; 5:5, 10, 11, 12; 요이 1:3, 9) 우리들이 이 “계시적 언어”를 받아서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아들”이기 때문에 성부보다 조금 못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셨고, 성부와 같이 영원하시며”(He is one in essence with the Father, coeternal), “모든 면에서 성부와 같으시다”(being like the Father in all things)는 것을 바르게 고백해야 한다. 그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 즉 인성을 취하실 때부터가 아니라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Jesus Christ is the Son of God not only from the time he assumed our nature but from all eternity)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그저 추상적으로 그런 관념을 가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로, 우리의 예배와 기도와 찬양에서 이 고백을 참된 것으로 드러내야 한다. 성자께 참으로 신적인 경배를 하지 않고, 그렇게 높여 찬양하지 않는 것은 그에 대해서 바르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매일 가정으로나 개인적으로 그분에게 사적인 예배(private service)를 하는지, 특히 그가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매주일에 그분에게 공적인 경배(공예배, public service)에 동참하는지를 점검해보자.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분에게 경배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복음 전하는 일을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의 일차적 목표는 모두 다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들의 삶 전반에서, 특히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지금도 그가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인정하여 그분에게 의뢰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속에서도 오직 그분에게 의지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결국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에서 섬기는 자들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합당한 섬김”(reasonable service)이어야만 한다(롬 12:1). 우리 주님께서 과연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를 살펴서 그런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우리 주변의 모든 것도 할 수 있는 대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힘쓰는 삶에서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신성을 참으로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는 그저 추상적인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함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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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승구

이승구 교수는 기독교교의학(CHRISTIAN DOGMATICS)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로서, 총신대 기독교교육과 졸업, 합동신학대학(MDiv)과 영국 The University of St. Andrews(PhD)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