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by Scott Hubbard2021-01-16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낸다. 이 말이 당신의 영혼 속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당신은 환난을 대하는 가장 멋진 태도, 즉 기쁨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고난을 겪는 것만큼 우리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경험은 거의 없다. 환난이 닥치면 거의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속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어떤 이들은 고난을 당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나 어떤 이들은 그분을 저주한다. “주님을 신뢰합니다”라고 눈물로 고백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기도하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전에 엎드려 깨어진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나, 어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를 떠나고 만다. 


고난 앞에서 사람들은 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분명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우리 개인이 고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도 야고보는 환난으로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시험이 그들에게 무엇을 이루게 해주는지 알기 때문에 시험을 신실하게 감당하라 말한다. “내 형제들아 [중략]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중략] ‘너희가 앎이라’”(약 1:2–3). 


야고보가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고난의 유익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유익이 무엇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왜 ‘그런’ 환난들이 ‘지금’ 일어나야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또한 그 환난들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몰랐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능력으로 가득한 그 단순한 약속에 대해 알고 있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낸다. 이 말이 당신의 영혼 속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당신은 환난을 대하는 가장 멋진 태도, 즉 기쁨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불로 연단을 받다


야고보는 금속 가공업에서 차용해 온 듯한 단어를 사용하여 그의 약속을 묘사한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 금과 은이 도가니에서 단련되듯(시 12:6; 잠 27:21)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통해 정화되고 연단을 받는다(벧전 1:7도 보라). 


불로 금속을 깨끗하게 하는 연단의 이미지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고난 중에 느끼는 것을 확증해주기도 하고 그 실체와 직면하게 해주기도 한다. 우선, 그 이미지가 확증해주는 것은 고난이라는 것이 우리를 실제로 불 안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의 열기를 괜찮은 척하며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환난의 뜨거움으로 인한 화상 자국은 우리 영혼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연단은 불과 같다. 불은 우리 살을 데게 한다. 우리 믿음이 은처럼 강하다 해도 말이다.


또한 야고보의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고난 중에 느끼는 것을 대면하여 보게 해주기도 한다. 고난이 연단이라면, 그 고난들은 무작위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시는 분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를 연단하시는 그분은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다. 그분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며 환난의 불꽃이 어떤 것인지 몸소 아시는 분이다.  


환난이 우리를 뒤덮는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신 32:10).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하신 뜻 안에 놓여 있다(엡 1:11). 환난의 불꽃이 높아질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사 43:2).  


고통이 만들어 내는 것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눈은 그 고난이 우리로부터 앗아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불길이 마구 집어 삼키는 것을 망연자실한 채로 바라본다. 하지만 잿더미 아래에서 우리의 고난은 뭔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알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잠잠히 기다리면 고난은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것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고난이 뭔가 영광스러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잠 못 이루는 밤에 우리가 수없이 던지고 낮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질문, 그리고 흔들리는 우리 믿음 위에 어두움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시련이 인내를 이룬다는 것을 알지만, 그 과정이 항상 눈에 보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병, 이혼, 외로움, 기나긴 기다림 같은 고통 뿐이다. 우리가 고난이 뭔가를 이루어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을 늘 보기 때문이다.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고 모든 성도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종기로 고생하는 욥, 고향을 멀리 떠나 남편마저 잃은 룻, 어두움에 휩싸여 시편 88편을 노래한 헤만 같은 이들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들을 추적해보면 분명히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는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된다. 아무 의미 없이 고난을 당한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단순한 고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환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찢으시나 도로 낫게 하신다(호 6:1). 여호와께서 우리를 낮은 곳으로 던지심은 우리를 다시 올려주시기 위함이다(사 30:26). 하나님이 보내시는 불꽃은 우리를 정련하기 위함이다. 존 리폰(John Rippon)의 찬송시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노래를 듣는다.


불 같은 환난 지날 때 네 길을 내리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니

환난의 불이 널 상치 못하네

찌꺼기를 사르리니 정금같이 되리라


인내하는 성도들


정화된 금은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선을 창조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도 야고보는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이라 말함으로 그 많은 선 중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영어에서 ‘endurance‘나 ‘patience’로도 표현할 수 있는 인내(steadfastness)라는 말은 믿음, 소망, 사랑 같은 말처럼 인기가 많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인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인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삶의 무게를 견디고, 우리의 마음을 하늘을 향해 펴고, 영원한 삶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인내의 영광을 보고 싶다면 사도 야고보가 말한 바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중략] 본으로 삼으라”(약 5:10). 인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빛으로 나올 수 있는 오늘날의 미가 선지자다(미 7:8–9). 그들은 척박한 땅을 바라보면서도 “기뻐하리로다”(합 3:18)라고 고백하고 인내하는 하박국이다. 그들은 이전에는 풀무불을 두려워했으나 여호와께서 그 안에 함께 하심을 알기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사드락이다(단 3:25).   


인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롬 12:12). 그들은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는 일을 지체하지 않는다(히 12:1). 지치지 않고 환난의 광야를 걸어간다(고후 1:6). 구속을 간절히 바라나 참음으로 기다린다(롬 8:25).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도 넘어지지 않는다(마 10:22). 그들의 시선은 승리한 전쟁, 극복한 유혹,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영광의 면류관에 고정되어 있다(약 1:12). 그들은 의의 나무들(사 61:3)이고 비바람을 많이 맞았으나 여전히 강한 바람에 맞서는 그루터기들이다(롬 5:3–4). 그들은 영광을 향해 흔들림 없이 전진하는 성도들이고, 우리는 그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한다.


환난의 고통으로부터 하나님은 오래 참음을 만들어 내신다. 고난의 불꽃으로부터 하나님은 인내를 창조해 내신다. 


복합적인 기쁨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어 내는 줄을 ‘안다면’ 우리는 그 고난을 견딜 힘을 얻을 뿐 아니라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만들어질 미래의 인내를 상상해 볼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비한 것은, 환난을 기쁨으로까지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약 1:2). 


그런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다. 늘 쾌활한 사람이 짓는 그런 과장된 미소나 웅변가의 활기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기쁨은 복합적인 기쁨, 즉 저 깊은 곳에 이르는 눈물과 슬픔으로 어우러진 그런 기쁨이다(고후 6:10).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는 뜻이다. 질고를 겪은 그분이 줄 수 있는 그런 기쁨이다. 이 기쁨은 그분에게서 온 것이기에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약 1:4) 되어, 이 고난의 불꽃 저편에 계신 그분께로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곳에 가려면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고난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최고의 순간을 앗아가는 도적도 아니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꿈을 죽이는 암살자도 아니며 아무에게나 무기를 겨누는 광인도 아니다. 우리의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인내를 주시려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다.




원제: Fortified by Fire: How Suffering Makes Us Strong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인내(steadfastness)라는 말은 믿음, 소망, 사랑 같은 말처럼 인기가 많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인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인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삶의 무게를 견디고, 우리의 마음을 하늘을 향해 펴고, 영원한 삶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Scott Hubbard

스콧 허바드는 Desiring God의 에디터, All Peoples Church의 목사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