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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사회적 거리두기와 새로운 가족
by 김선일2020-04-04


전대미문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는 교회에도 엄청난 충격파를 주었다. 모여서 드리던 예배가 온라인 등 비대면 방식으로 바뀌었다. 주일 공예배 외 모든 집회는 중단되거나 역시 온라인으로 바뀌고 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적응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 스마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자들은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황이기에 모두가 당황스럽기만 하다. 아무도 앞으로 진행될 일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뜻밖의 흥미로운 경험담도 전해진다. 모처럼 가족이 한 곳에 모여 온라인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한 교인은 지난 몇 주간 주일마다 분가했던 형제자매들이 부모님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전했다. 물론 아무리 가까운 가족끼리 모인다고 해도 신체적 거리 두기와 손 소독은 철저히 한다고 한다. 서로 다른 교회에 다니던 가족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어느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참여해야 하는가? 추측하건대 인기 있고 유명한 목회자의 설교를 선택할 확률이 높다. 아니면 서로 돌아가면서 자기 교회의 예배를 같이 드리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은 신자가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는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정상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니만큼 일시적인 비정상을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가족 예배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는 우리에게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다. 앞으로 사회가 원래의 모습으로 복귀하게 될 때 교회의 예배와 각종 모임이 어떻게 될는지 쉽게 예측하기 힘들다.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가긴 어려울 것 같다. 전 세계인들이 몸소 경험한 접촉에 대한 두려움은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은 기억으로 각인되어 우리가 맺는 사회적 모임과 관계들에 영향을 줄 것이다. 온라인 프로그램은 예배뿐 아니라 양육에도 응용되어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앞으로 새로운 기준이 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인간의 공동체적 갈망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할까?


우선 가족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것 자체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주된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가족의 해체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통하여 사회적 거리가 넓혀지는 대신 가족 간의 거리는 좁혀지는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이 더 많이 모인다고 해서 행복을 더 많이 느낀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행복과 사랑의 원천이 되어야 할 가족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많은 책임과 희생, 그리고 불평등한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가족은 여전히 중요한 존재이긴 하지만 심히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엄한결 외, ‘2020 트렌드노트: 혼자만의 시공간’). 가족은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정신과 육체를 편하게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골 깊은 갈등과 원망이 가족 안에서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혹자는 요즘 많아지는 1인 가족과 비혼자, 결혼 및 출산 포기 등의 현상은 기성세대가 좋은 결혼의 본보기를 보여주지 못한 까닭이라고 한다(김용섭, ‘라이프트렌드 2020 느슨한 연대’). 스위트홈의 기대는 많은 가족에게 그저 신기루일 뿐이다. 조사에 따르면 동아시아 3국 중에서 한국인의 가족 가치는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가정생활 만족도는 가장 낮게 나온다고 한다(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한국인들에게 가족의 비중은 여전히 높다. 그동안 가족이 모든 사회적 돌봄을 해결해주는 가장 신뢰할만한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족이 필요하다. 가족의 형태는 다변화되고 있지만, 지치고 힘들 때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 친밀감과 보호의 터전으로서 가족은 늘 필요하다. 전통적이고, 생물학적인 가족의 보호막이 허물어지고 있다. (전 연령에 걸친) 1인 가족이나 비혼의 증가로 인해 상호 보살핌을 경험할 대안적 가족의 필요가 점점 커지고 있다. 대안 가족은 단지 동거가족만이 아니라 셰어하우스나 소셜 클럽과 같이 생활방식의 공유나 규칙적 교제 등으로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생물학적 가족처럼 신체적으로 끈끈하지는 않지만,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느슨한 연대의 사회적 가족은 앞으로 더욱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가족의 수요가 많아지는 때,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 됨을 실험하는 것은 현실로 다가온 선교적 과제가 아닐까? 사실 초기 기독교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적 가족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혈연 가족을 넘어서는 믿음과 순종의 가족(마12:46-50)을 제시하셨고, 바울은 교회들을 향한 편지에서 자신과 성도들의 관계를 가족적 유대감으로 표현하였다. 로버트 뱅크스는 ‘바울의 공동체 사상’이란 저서에서, 이는 단순히 의례적인 친밀감의 표시가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는 새로운 가족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복음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한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 더 나아가 세상 속에서 변화된 관계로 이어지게 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들이 대안적 가족임을 인정한다면, 그들에게는 먼저 가족을 돌보는 일이 중요했다. 신약성경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먼저 하나가 되어 서로를 돌아보는 일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로버트 뱅크스는 바울의 두드러진 공헌은 기독교인들의 세상에 대한 외적인 책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내적 역학(inner dynamic)에 대한 가르침에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공공성을 갖느냐 하는 것보다 교회가 어떠한 공동체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심각한 양상으로 번지면서, 과거 로마제국에서 전염병이 창궐할 때 초기 기독교 교인들이 행했던 구제와 돌봄의 교훈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전염병이 퍼지면 이교도들은 그들의 가족일지라도 감염된 자들을 버려두고 도망갔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간호하고 돌봐주었다. 또한 가족을 대신해서 죽은 자들을 장사하기도 했다. 로드니 스타크의 ‘기독교 발흥’의 내용을 기초로 살펴보면 이러한 공공적 선행은 계승해야 할 유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초대교회는 먼저 교회 내의 구성원들이 가족적 공동체로서 상호 돌봄과 위생의 공동생활을 견지해왔다는 점이다. 전염병이 퍼졌을 때, 가족마저 버리고 가는 이교도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배려가 더욱 빛을 발하여 훨씬 높은 생존율을 보여주었다. 높은 생존율은 모두에게 기적으로 보였다.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치료된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사회적 관계망을 대치하는 새로운 가족관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기존의 공적, 사회적 집합체였던 기독교 공동체에 새로운 도전이 주어졌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밀집된 장소에서 낯선 이들과 만나는 것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온라인을 통한 신앙 프로그램이 많아질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가족적 공동체의 열망은 시대가 바뀌어도 식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신뢰할만하고, 안전하고, 진정한 관계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적 빈곤감에 시달릴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대안 가족을 향한 갈급함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마게도냐 사람의 절규(행16:9)에 비견할만하다. 기독교 사역이 생물학적 가족주의를 넘어서 진정한 대안 가족, 즉 두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사회적 가족 형성을 주된 과제로 삼는다면, 이는 분명 그 어떤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복음을 힘 있게 나누는 발판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 가족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을 충만히 경험하고, 외인을 향하여 지혜와 은혜 가운데 말하며(골 4:5-6), 단정히 행하고(살전 4:11-12), 선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벧전 2:12) 돌리는 이들이다. 이는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불문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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