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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우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by Eric B. Watkins2020-10-19

율법이 요구하던 모든 사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다고 말한다. 이 복음의 위안을 어떻게 받겠는가? 오직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All that the law requires, the gospel gives in Jesus. And how do we receive this gospel comfort? It is by faith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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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


출애굽기 12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소개된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아니면 최소하나마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위안이란 위기의 한복판에서 찾아올 때가 많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을 때도 그들은 결코 안락한 상태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백 년 동안 애굽인 아래서 거친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지만, 수세기 동안 철저히 침묵하고 계셨다. 그리고 애굽은 이방 신들로 가득한 땅이었으며, 그 신들 가운데 하나로 자처했던 바로는 앞서 활약한 요셉이나 그 요셉이 섬기던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이렇듯 세월이 흘러 과거의 따뜻한 기억은 서늘하게 식어 갔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인 전체를 위해 행하신 모든 역사조차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하나님 백성은 불타는 태양처럼 내리쬐는 바로의 허영 아래서 말라가며, 끊임없이 일하고 또 일하는 종살이로 수척해져만 갔다. 그렇게 위기의 시간이 무르익었다.


바로 이러한 어두움을 가르는 서광은, 다름 아닌 구속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셔서 이전에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며 그 약속을 이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더불어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나며, 바로가 신봉하던 신들이 그분 앞에서 하나씩 무너진다. 마치 맹렬히 도전하는 성읍을 공격하기 전 그 성읍의 외곽 지역부터 짓밟아 들어가는 군주와 같이, 하나님은 바로의 신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신다. 그러나 바로는 지나치게 교만해진 자기 자아를 요새로 삼아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완고한 마음을 키워 나간다. 이에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이 더 완고해지도록 내버려 두신다. 이러한 긴장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 앞에서 바로의 권력이 공중의 연기처럼 무력히 사라지는 장면을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바로가 신뢰하던 애굽의 모든 신들은 그분의 심판이 바로 자신을 향해 엄습해 올 때까지 차례대로 고꾸라진다. 그러다가 결국 마지막 재앙이 이르게 되자, 바로의 주변부를 치는 공격이 아니라 바로의 우상 숭배가 일어나는 그 현장, 다시 말해 그 마음을 치는 습격이 이루어진다. 곧 바로의 장자를 앗아가는 재앙이 들이닥친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을 급히 읽고 넘어가면 안 된다. 애굽인의 신앙에서 바로는 대대로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애굽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바로가 그들 중 하나로 간주되었고, 그 신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도 다름 아닌 바로와 그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점에서 바로의 장자는 단지 왕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아닌 미래의 왕, 즉 애굽의 왕좌에 올라 온 땅을 다스리는 신의 권세를 누릴 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로의 장자와 애굽인의 모든 장자를 치신 일은 바로의 그 마음뿐 아니라 전체 애굽인의 세계관에 결정타를 날리신 사건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애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는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덮쳤다. 심판자가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이로써 바로는 처참하게 패배해 무너졌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구속의 소망은 죄와 고통과 사망으로 얼룩진 흑암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곧 심판이 다가오는 중에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절망 가운데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지막 재앙이 들이닥치기 전날 밤, 이스라엘 백성은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죽이고 그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뿌렸다. 이는 예고된 그날 밤 심판자가 애굽 전역을 지나가다가 어린 양의 피를 보면 ‘넘어가게’ 되리라는 약속에 근거한 의식이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구속을 보여 줌과 동시에 그분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보여 주기도 했다. 즉 어린 양의 죽음에서 예시되는 그 끔찍한 심판을 상기시키면서도, 또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 대신하여 심판을 당하도록 다른 대속물을 제공하신다는 사실 역시 그 어린 양의 피를 통해 확신시켰다. 바로 여기에 이중적인 전가가 암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어린 양은 흠 없고 순결했으며, 눈에 띄는 결점도 없었다. 그런 양은 때가 묻지 않은 만큼 값도 비쌌다. 이처럼 흠 없는 어린 양이 각 집안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게 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본성상 죄악되었지만, 어린 양이 그들 자리를 대신해서 자기 피를 대속 제물로 흘림으로써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를 가로막던 죄악이 속하여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심판자가 그 피를 볼 때, 그들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위안의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가 역전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위안의 약속이 있다. 우리의 위안은 단순한 어린 양과 같이 한 마리의 짐승이 보여 주는 구속의 약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구속의 보혈을 통해 찾아오는 참된 위안이다(요 1:29). 이 어린 양은 혈과 육을 입은 세상의 대적들이 아닌 우리가 지은 죄의 삯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이에게 임할 캄캄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드려진 제물이었다. 이 모든 점에서 오랜 세월 애굽에서 종살이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영혼의 노예 상태를 생생히 보여 준다.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자나 여자, 혹은 노예나 자유인이나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본성상 죄에 종노릇하여 그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지닌 가장 큰 위기가 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출애굽기에서 애굽 전역을 지나갔던 그 심판자가 마지막 날 종말론적 심판을 행하실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최후 심판은 그분의 은혜 아래 몸을 숨기지 않은 모든 이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복음은 바로 그 구원을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증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가리셔서 최후 심판을 행하실 때 그 피를 보며 우리를 넘어가신다고 증언한다. 나아가 이보다 더 좋은 소식도 들려주는데,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고 순결하고 거룩할 뿐 아니라 사랑 받는 자녀로 받아주신다고 증언한다. 왜냐하면 흠 없는 어린 양의 피가 우리를 가려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음은, 유월절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 주던 진리를 오늘날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 진리는, 우리의 어떤 능력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이처럼 죄악된 우리에게 소망과 위안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복음은, 율법이 요구하던 모든 사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다고 말한다. 이 복음의 위안을 어떻게 받겠는가? 오직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뿌려야 했듯이, 오늘날 하나님 백성인 우리 역시도 믿음으로 그분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졌기에 마지막 심판 때 심판자가 우리를 넘어가게 되리라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종살이하던 시절의 두려움을 벗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그 거룩한 임재 가운데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실 하나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위안이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Christ Our Passover

번역: 장성우

어린 양은 흠 없고 순결했으며, 눈에 띄는 결점도 없었다. 그런 양은 때가 묻지 않은 만큼 값도 비쌌다. 이처럼 흠 없는 어린 양이 각 집안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게 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본성상 죄악되었지만, 어린 양이 그들 자리를 대신해서 자기 피를 대속 제물로 흘림으로써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를 가로막던 죄악이 속하여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심판자가 그 피를 볼 때, 그들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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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Eric B. Watkins

에릭 와킨스 박사는 플로리다주 세인트오거스틴에 위치한 Covenant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The Drama of Preaching'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