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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종교개혁 예배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by Sinclair Ferguson2020-03-11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후반기의 예배가 일종의 방관자들이 모여 지켜보는 행사로 전락했다는 우려를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다. 회중이 거의 수동적인 자세로 예배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한 회중에 대해서도 예배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 예배자들은 미사가 연출되는 장면을 관찰만 할 따름이었다. 혹은 성가대의 노래를 그저 듣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의 예배 의식에서 회중은, 그처럼 구경꾼의 모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적극적인 자세로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배의 ‘수준’은 그 예배자들이 거룩한 기쁨을 경험했는지가 아니라, 교회 음악이 시대의 기준에 부합했는지, 성가대의 노래가 훌륭했는지, 미사는 인상적으로 연출되었는지에 따라 평가되었다. 이를테면 사제가 입는 의복이나 미사 때 들려오는 종소리 또는 라틴어, 그리고 성당에 피어오르는 향 등이 그러한 연출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실제적인 목적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을 위해서만 드려졌다.


종교개혁은 그 모든 관습을 바꾸어 버렸다. 그 결과 각각의 예배자들이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며 말씀을 듣고 직접 성찬을 나누며 자신들의 마음과 영혼을 실어 기도하고 찬양했다.


우리가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


그러한 종교개혁은 이 시대에 다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교회 예배에 관해 조언하는 전문가들도 ‘주일 예배의 수준’을 가시적인 기준에 따라서만 평가하기 때문이다(사실 예배의 수준은 누군가의 주관을 뛰어넘어 그 예배를 받으시는 분을 고려해서 평가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시선은 수직적인 차원보다 수평적인 측면에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사야나 사도 요한처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부복하여 그 입을 가리고 경배를 올리는 참된 예배에 대한 갈망을 이미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바울이 바라보았던 예배도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와는 사뭇 달랐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


현대 교회가 전통적인 예배에서 부족함을 깨닫고 그 공백을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오늘날 ‘예배의 개혁’은 성경이 위와 같이 제시하는 예배의 비전을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이 씨름했던 질문도 지금 우리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기쁨을 예배 가운데 드러내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 기쁨을 회중 가운데 반영하며 예배의 전 과정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의 신앙을 고양시키는 목적을 따라 진행되게 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이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도 않고,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 성경을 살펴보지도 않는다면, 예배에 대한 접근,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만을 추구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 결과,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뭔가 가시적인 효과만 가져다주는 방식을 따른다든가, 아니면 다른 교회들이 보기에 좀 더 세련된 스타일만 추구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과거에는 찬송가를 펴서 거기에 인쇄된 악보를 보며 찬양하다가 이제는 대형 스크린에 가사를 띄워 놓고 한 구절씩 따라 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분명 순수하고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흔히 예상치 못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곧 성도의 신앙을 고양시키는 본래의 목적을 이룬다기보다 오히려 그 신앙에 손해를 입힐 수 있다.


말하자면 스크린에 올라온 찬양을 한 구절씩만 따라 하다 보니, 가사 전체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특별히 젊은 세대는 자신이 부르는 찬양이 시편의 고백을 가사로 취한 노래인지도 모르고 따라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앞선 세대와 달리 전체 시편 중 대부분을 암송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편에 나오는 찬송이나 참회의 노래뿐 아니라,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인용한 가사, 그리고 오늘날 우리와 비교할 때 그 문학적 재능이나 신학적 통찰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작사했던 수백 편의 찬송 역시 모를 수 있다.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 흥미를 느끼고 예배에 참석하게 된 오늘날의 어떤 젊은이가 바로 그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되는 사도신경을 몇 주 안에 자연스럽게 암송하겠는가? 복음의 근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고백을 많은 예배에서 생략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 대해서는 친숙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구약성경이 그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죄에 대해서는 쉽게 망각한다. 다시 말해, 르호보암이 앞선 세대의 지혜를 무시하고 자기 세대의 조언만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재앙에 빠뜨린 잘못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적 상황에서 출간된 ‘종교개혁 예배: 현재를 위한 과거의 예전’(Reformation Worship: Liturgies from the Past for the Present)은 아침에 찬물로 샤워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우리 몸이 활기를 되찾는 데 도움을 주는 냉수 샤워처럼 오늘날 예배를 갱신하는 데 유익을 주는 책이라는 말이다.


혹 대중음악만 평생 들어 온 사람은 그러한 노래를 선호할 뿐 아니라 마치 그 노래를 음악의 표준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 채널을 발견하고 바흐와 베토벤, 멘델스존이나 헨델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감성은 더 깊고 풍요로워져서 이전보다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예전은 우리가 참여하는 예배에 아름다운 질서와 흐름 그리고 리듬을 더해 줄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여기서 나는 경직된 자세로 전통적인 예배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든가, 아니면 아무런 독창성도 없이 그저 오래된 예전이면 일단 모방하고 보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아가 “종교개혁자들이 따른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은 방식을 따라야 한다며 강경하게 주장하려는 의도도 없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예배를 질식시키는 결과만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유럽에 살지도 않고, 더더구나 16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오늘날도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다름 아닌 성령과 진리를 따라 예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배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과거의 예전을 참고해 볼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가령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삼위일체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예배의 원리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기 위해 전통적인 예배 방식을 살펴볼 수가 있다. 그럼으로써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과거의 예전이 보여 주는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일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거기에는 지혜와 슬기와 깨어 있는 감각, 그리고 예배의 원리와 목적을 주의 깊게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선포되는 가르침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경험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배우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더욱 올바른 방식을 통해 예배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한 현재 그들의 마음이 시대정신의 영향으로 무뎌져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예배의 감각을 깨워 가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곧 성경을 중심으로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고,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은혜의 경이로움과 믿음의 필요를 인정할 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힘입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신을 상실할 때, 우리의 예배는 세련되기만 할 뿐 차갑기 그지없는 죽은 형식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임재가 서린 거룩한 권능으로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거의 모든 예배를 시작할 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그러한 말이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멘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서로를 향해 인사합시다.” 물론 우리 각자는 서로를 따뜻하게 환영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다. 그분의 임재는 우리로 하여금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하며, 또한 내면의 겸손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을 갖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자신의 임재 가운데로 초대하셨다는 놀라운 특권을 자각하게 된다. 예배란 무엇보다도 그분이 우리를 환영하심으로써 드릴 수 있는 일이지, 우리가 서로를 환영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과 종교개혁의 유산을 통해 그와 같은 예배의 관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여러 가지 탁월한 예전을 모아 놓은 앞선 책(‘종교개혁 예배’)은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한 자료를 훌륭하고도 지혜롭게 사용하는 이가 있다면, 그 손길을 통해 얼마나 큰 복이 교회에 전달되겠는가.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at We Can Learn from Reformation Worship and Liturgies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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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inclair Ferguson

싱클레어 퍼거슨 박사는 Ligonier의 작가이며,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객원 교수였고, 현재는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특임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콜롬비아에 위치한 First Presbyterian Church에서 담임 목사로 섬겼다. '온전한 그리스도', '성숙의 길'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