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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선교적 교회의 아름다움과 능력
by Trevin Wax2020-01-16

나는 마크 갈리의 “The Elusive Presence” 시리즈에 많은 칼럼을 쓸 계획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선교적 개념은 정말로 중요하기 때문에 통찰력 있는 복음주의 관찰자인 마크와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기쁘다.


나는 복음주의 내에 문제점을 기술한 마크의 글이 와닿았지만, 그의 선교적 교회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갈리의 접근에는 로드 드레허의 “Benedict option”와 동일한 자세의 문제점이 보인다는 것이다.


잘못된 태도


Benedict option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드레허 제안의 강점은 다가오는 문화적 압박을 견디기 위해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여, 값진 생명의 무언가를 세상에 돌려줄 수 있도록 하자는데 있다. 문화 전쟁의 최전방에서 싸우는 것은 의미 없다고 말한 드레허의 말은 옳다. 만약 전장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가 영적으로 약하고 영양실조의 상태에 있어서 세상에 보여줄 복음의 문화가 없다면 말이다.


갈리의 선교적 운동에 대한 비판의 핵심에서 귀 기울여야 하는 유사한 경고를 발견한다. 텅 비어있고 열정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한 채로 진행하는 행동주의적 믿음의 접근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드레허의 Benedict option 과 갈리의 “elusive presence”가 제안하는 자세는 주로 방어적이다. 그리고 내가 신약 성경에서 본 자세는 그렇지 않다. 내가 걱정하는 두 자세는 우리를 미션 보다는 유지를 우선시하고, 바깥 대신에 안으로 향하게 한다. 문제점은 태도이다.


선교적 문제점?


갈리가 교회의 선교 개념에서 본 주된 문제점은 교회를 다른 모든 것의 마지막 목표로 삼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지나치게 업무에 시달리게 하며 너무 많은 일 - 복음전도, 선교, 혹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노력으로 지치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 내면의 생명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교회의 선교적 개념이 필요하다면?


밖으로 집중된 선교적 충동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필요를 깨닫고, 연약함과 무능력함을 알게 하며,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깨닫는 내면의 절망감을 일으킨다면?


땅끝까지 예수의 이름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그분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되기를 소망하는 선교사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는다면?


선교와 예배


선교는 예배를 증가시킨다.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가?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을 그분의 주권에 순복하도록 초청하는가? 우리의 목적은 창세기에서 주어진 문화적 명령과 혼합된 지상명령이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이 창조주를 알고 구원자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해야 한다. 믿음 안에서 열매 맺고 번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선교를 지속시키고, 선교는 예배를 증가시킨다.


처음 사랑으로 우리를 다시 부른 마크의 생각은 옳았지만, 현재 문제점에 선교적 교회 개념을 비난한 것은 잘못되었다. 그가 권하는 자세는 우리를 안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밖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선택하시고, 이끄시고, 구속하시고, 심판하시고, 찾으시고, 그분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심으로 창조물을 다시 회복시키시기로 하셨다.


정체성과 기능


선교적 교회는 우리가 누구인가로 정의되지 않고 우리가 하는 일에 의해 정의된다. ‘정체성’ 혹은 ‘기능’ 중 무엇이 먼저인가? 정체성과 기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기능’인 도구와 ‘정체성’인 표현은 둘 다 존재하는데, 이는 레슬리 뉴비긴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식이자 도구라고 말한 이유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정체성이 과업보다 앞선다. 우리는 증거하는 일을 하기에 앞서 증인이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에 앞서 그것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정체성을 주셨다.


마치 왕위에 오른 사람과 같다. 왕이 되었지만 사람들을 통치하거나 판결을 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주어진 정체성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왕으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틀에서 밖으로 나와 부르심을 이행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빛을 비추라고 하셨고 말 아래에 놓인 등불에 대해 경고하셨다. 우리의 정체성이(세상의 빛) 그것의 목적(비추라)과 묶여 있음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비추기 위한(목적) 세상의 빛(정체성)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목표)


만약 교회의 선교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구원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적 자기희생의 사랑이 드러날 수 있겠는가?


두 가지의 유혹


하나님을 위해 너무 바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 교회에는 일로 바쁜 마르다는 많지만, 마리아가 소중히 생각한 “더 좋은 것”을 잊고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인간의 마음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끊임없는 유혹이다.


우리는 내부에만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그러한 유혹에 빠지면 더 이상 지상명령에 대한 의식이 없어진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정체성과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해 간다.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스스로를 보지 않는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잃어가는 것이다. 선교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기도하게 만든다. 선교는 예배가 있는 곳으로 이끈다.


열병이 나은 즉시 섬겼던 베드로의 장모와 예수님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마을로 보내진 귀신들린 남자, 열매 맺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많은 비유를 잊지 말자.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하늘에 가득한 것을 올려다보며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던 이사야를 잊지 말자.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적 행위의 본질은 거룩, 자기희생의 사랑, 그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불같은 열정이다. 우리가 그의 사명에 동참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선교적 교회의 아름다움


하나님은 교회를 선교의 도구와 표현으로 바라보시는데, 교회가 선교적 이해를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정체성과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적 이해는 모든 민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원의 기쁨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 사랑과 구원의 감동을 함께 누리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이 신학을 잃어버리는 것은 복음주의의 문제를 유행 탓으로 돌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진단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

원제: The Beauty and Power of a Missional Church

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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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revin Wax

트레빈 왁스는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