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하고 흠 없는 삶을 위하여!
by John MacArthur2020-02-18

이십 년 전 읽었던 기사 한 토막이 기억에 생생하다. 1987년 3월 조지아주 코녀스(Conyers)라는 도시에 있는 락데일 카운티 고등학교(Rockdale County High School)의 불독(Bulldogs) 농구팀이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조지아주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학교 역사상 최초의 우승이었다. 18년이나 팀을 지도했지만 한 번도 우승으로 인도하지 못했던 클리블랜드 스트라우드(Cleveland Stroud) 감독에게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이 기쁜 결과였다.


결승전을 마치고 몇 주 후 스트라우드 감독은 늘 하던 대로 선수들의 성적표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3급 선수 중 한 명이 몇 과목을 통과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그가 학과 성적 미달로 농구 선수의 자격을 잃었다는 것을 뜻했다.


사실 성적이 안 나온 그 학생은 팀의 승리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었다.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오긴 했지만, 시즌 내내 한 번도 경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후보급 선수였다. 준결승전 시합에서 팀이 20점 이상 앞서고 있을 때 스트라우드 감독은 모든 선수에게 참여할 기회를 주고자 했다. 바로 그 경기에서 이 학생이 뛰었는데 시간은 45초가 채 되지 않았다. 성적 미달로 선수 자격이 상실되었던 그 학생은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그 경기 결과에 이 선수가 미친 영향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조지아주가 정한 자격 기준을 위반한 것이었다.


스트라우드 감독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봉착했다. 만일 규정을 위반한 사실을 보고하면 자격 상실로 팀의 우승이 취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한다면 학교 외부의 사람들은 위반 사실을 알아챌 수가 없다.


스트라우드 감독은,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해도 이 일에 연루된 그 선수는 규칙 위반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팀의 다른 선수들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감독이 고의로 선수 자격 기준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스트라우드 감독 자신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일이 공개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는다면 자신이 감독으로서 이룬 최대 성과, 곧 팀의 승리는 유지 되겠지만, 규정 위반을 숨겼다는 죄책감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었다.


스트라우드 감독은 그 위반 사실을 깨달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다른 대안은 생각지도 않았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세워두고 있던 사람이다. 그는 팀의 ‘승리’보다 선수들의 ‘성품’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 믿었다. “사람들은 농구팀의 점수는 잊어버리지만, 그 농구팀이 보여주는 진실한 행동은 절대 잊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위반 사실을 보고했고, 팀은 최초로 거머쥐었던 조지아주 우승컵을 반환해야 했다.


하지만 스트라우드 감독과 팀은 그들이 포기했던 우승컵보다 훨씬 더 중요한 명예를 얻었다. 그들은 진실을 지켰고, 주위로부터 엄청난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스트라우드 감독은 ‘올해의 교사상’, ‘올해의 감독상’, ‘올해의 시민상’을 수상했고, 조지아주 의회가 주는 공식적인 상도 받았다. 몇 년 뒤 그는 코녀스 시의원으로 선출되어 여전히 그 위치에서 섬기고 있다. ‘스트라우드 감독이 옳았다.’ 불독팀의 조지아주 우승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지만, 그 팀의 감독이 보여준 진실성은 잊지 않았다.


윤리적 진실성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속성이다. 올바른 교리로 무장하고 성경의 진리를 신실하게 가르치는 일 역시 중요하지만,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의 도덕적, 윤리적 원칙들에 일관성 있게 순종하는 것 역시 ‘동일하게’ 중요한 일이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내야 하는 도덕적 기준은 보편적인 인간 윤리의 기준보다 훨씬 높다.


산상수훈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산상수훈 전체는 율법의 도덕적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율법의 도덕 원칙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논박하는 담화였다.


예수께서는 제6계명이 살인 행위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도 금하심을 가르치신다(21–22절). 간음을 금하는 제7계명 역시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조차도 금한다(27–28절).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우리의 원수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이다(43–44절).


하나님의 율법이 세우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은 얼마나 높을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 자신의 온전하심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


우리로서는 당연히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성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리스도를 완전히 본받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은 계속하여 이 목표를 향해 정진해야 한다(빌 3:12–14).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자신의 윤리적 진실성을 희생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어야 한다.


중요한 이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명성(reputation)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지위, 계급, 또는 경제적 위신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떠한 명성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던(빌 2:7)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가 좋은 명성을 유지하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특히 윤리적 진실성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장로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 중 하나는 디모데전서 3장 7절 말씀과 같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윤리적 진실성을 고의적으로 외면한다면 좋은 명성은 단번에 무너진다. 사람들은 부주의 한 실수나 실패와 같은 잘못은 관대하게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윤리적인 문제를 만드는 사람은 재기불능의 상태로 무너뜨릴 수 있다.


수년 전 교구의 한 성도가 목사라면 듣고 싶지 않을 말을 내게 했다. 사업에서 알게 된 사람 한 명을 교회로 초대했는데, 그 사람이 “그 교회 다니세요? 저라면 그런 교회엔 안 갈 겁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부패한 변호사가 그 교회를 다니잖아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게 누굴 가리키는지 몰랐고 지금도 알지 못한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변호사들은 상당히 많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뭔가 착각했거나, 그 부패한 변호사가 우리 교인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그다음 주일에 나는 강단에서 그 이야기를 나누었고 “만일 그 사람이 말한 그 변호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다면, 삭개오의 교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시고, 이 지역에서 당신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십시오. 그리고 당분간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사람들에게 밝히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교회 전체의 명성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잠언 22장 1절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윤리적 진실성이 온전하고 비난받을 일이 없어야만, 당신에게 명예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우리의 성품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품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도덕법에 대해 강해하실 때,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마음의 정직함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진정한 바로미터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무슨 일을 하는가, 아무도 내 생각을 보지 못할 때 내가 하는 생각들, 그리고 우리 양심의 질문들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이러한 것들이 당신의 도덕적 윤리적 특질에 대한 진정한 측정기이다.


공동체 안에서 좋은 명성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성품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께서 도덕과 윤리 문제를 다루실 때는 우리 마음의 내적 생각들로부터 ‘시작’하신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진실성을 위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지가 당신의 마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승리와 패배는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패배했다면 당신의 성품 역시 망가진 것이다. 성품이 오염되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명성 역시 망가지게 되어 있다.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7:18).


도덕적, 윤리적 진실성을 지키는 일이 왜 그리 중요한가에 대한 세 번째 이유는 우리의 증언(testimony)이다. 당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는가가 당신의 ‘명성’이라면, 당신의 ‘증언’은 당신의 성품과 언행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윤리적 진실성이 없을 때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생각해보라. 쉽게 말해 그 사람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명백히 진리라 가르치는 것들을 못 믿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시 51:6) 등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윤리적 진실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태도로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고 하나님의 자녀라 고백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윤리적 진실성에 관한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윤리적 기준들을 입맛에 맞게 조정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유혹에 빠져서 우리의 명성, 성품, 그리고 증언을 망가뜨리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크고 중요한 것을 잃는 일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Above Reproach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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