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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츠빙글리에 대한 특종 아홉 가지
by Joe Carter2019-12-17

2019년은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스위스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시점을 밝히는 데 있어서 루터가 95개 논제를 게시한 1517년 10월 31일 못지않게 1519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처럼 커다란 영향을 끼친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에 관해 당신이 알아야 할 아홉 가지 사실이 있다.


1. 츠빙글리는 존 칼빈(John Calvin)이 등장하기 전까지 스위스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종교개혁자다. 그가 스위스에서 일으킨 신앙의 혁명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독일에서 일으킨 운동에 비견할 만한 의미를 지닌다. 츠빙글리 자신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이 지역에서 누구도 루터를 알지 못했던 1516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중략] 그때는 나도 루터의 이름을 들어 보기 전이었다. 그 이후로도 최소한 2년 동안은 그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으니, 나는 분명 루터의 가르침에 따라 설교한 게 아니다. 오직 성경을 따라 설교했을 뿐이다.”


2. 츠빙글리는 오늘날 스위스 동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1484년 1월 1일에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그는 1504년 빈대학교(University of Vienna)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1506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로마가톨릭의 사제직을 수여 받아 글라루스에 있던 그의 모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헬라어를 독학하며 원문으로 된 신약성경의 긴 본문들을 암송해 나갔다.


3. ‘크리스천히스토리’(Christian History) 매거진에 의하면, 사제들조차 성경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대에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Erasmus)의 라틴어역 신약성경을 구입했다. 그 이후로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었다. 스티븐 로손(Steven Lawson)은 루터가 선포한 메시지와 동일한 메시지를 츠빙글리가 먼저 설교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츠빙글리는 1523년에 ‘67개 논제’(Sixty-seven Theses)를 기록했는데, 거기서 그는 금식 강요, 성직자의 독신, 연옥과 미사, 사제에 의한 중보 등 중세 교회의 온갖 미신을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제였음에도 안나 라인하르트(Anna Reinhard)라는 과부와 결혼했다. 이때는 루터가 수녀 출신인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결혼하기 일 년 전이다. 로손에 의하면, 이 모든 일은 츠빙글리가 루터에 대해 알기 전에 일어났다.


4. 종교개혁의 가장 큰 특징은 성경적인 설교를 회복한 데 있다. 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크게 기여를 했는데, 바로 성경의 각 권을 설교하는 혁명적인 접근을 선보였던 것이다. 1519년에 마태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렉시오 콘티누아’(lectio continua)라고 알려진 방법을 적용했다. 마태복음 이후로는 사도행전, 디모데전후서, 갈라디아서,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 요한복음, 바울 서신에 대한 강해설교를 진행했고, 그 다음에는 구약성경으로 가서 시편과 오경, 역사서에 관한 설교를 이어갔다.


5. 츠빙글리는 루터보다 두 달 늦게 태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점도 많았지만, 개신교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츠빙글리는 루터에 대해 “로마의 수퇘지를 멸절시킨 헤라클레스”라고 격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야말로 이 싸움을 위해 주님이 기름 부으신 진짜 다윗과 같다. 하늘의 군장으로 무장한 참된 용사로다.” 그러나 루터는 츠빙글리를 높게 평가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에 대해 “마귀에 속한” 자라고 여기며 “벌레가 파먹은 열매”와 같다고 비난했다. 이런 두 사람의 견해 차이를 좁히기 위해 1529년에 마르부르크 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두 개혁자는 15개의 신앙 조항 가운데 14개에 대해서는 동의하게 되었지만, 성찬에 관해서는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이때는 츠빙글리도 루터가 자신을 “당나귀 같이” 취급한다며 격분했다. 두 사람은 화해에 이르지 못했다.


6. 숀 마이클 루카스(Sean Michael Lucas)가 언급했듯이, “루터파와 개혁파 진영을 갈라놓은 가장 중요한 차이는 성찬에 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서로 갈라지게 된 원인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루터와 츠빙글리가 각각 달리 해석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찬에는 예수님의 몸이 실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의 견해는 그와 달랐다. 루카스의 설명을 빌리면, 츠빙글리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고 믿었다. 교회가 떡과 잔을 나눌 때, 교회가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구현되는 신비로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 변화는 떡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일어난다는 게 츠빙글리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이것은 내 몸이니라’에서의 ‘이니라’에 해당하는 술어는, 교회가 떡을 받을 때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트레빈 왁스(Trevin Wax)는 이렇게 부연한다.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가 성찬에 관하여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한 결과, 지난 5백 년간 개신교의 정치와 신앙에는 균열의 여파가 지속되어 왔다.”


7. 츠빙글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인생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고 확신하며, 복음은 개인적 구원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문화의 모든 요소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혁 운동도 시민이 참여하는 행정 기관을 통해 진전되기를 바랐다. 리곤 던컨(Ligon Duncan)이 말했듯이, “츠빙글리는 카이퍼와 같이 일종의 변혁주의자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했다. 즉 개인이나 교회의 생활뿐 아니라 만사에 미치는 그분의 통치를 확신했다. 그래서 복음의 진전을 위해 정치, 경제, 군사, 동맹 문제 등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8. 1531년 취리히에서는 로마가톨릭 관할에 있는 스위스 지역에서 개혁파 설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 위해 가톨릭교회에 압력을 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가톨릭교회가 반발하며 카펠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한다. 츠빙글리의 사위이자 목회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츠빙글리가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록했다. 어느 사제가 베푼 마지막 종교 의식을 츠빙글리가 거절하자 적군의 대장이 “칼을 뽑아서 츠빙글리를 그 자리에서 찔러 죽였다.” 이때 적군은 츠빙글리의 머리를 베고 몸을 난도질했다. 그의 유골이 유물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시체를 태우고 돼지 창자와 섞어 놓기까지 했다. 이후 루터는 ‘탁상담화’(Tabletalk)에서 츠빙글리가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나는 츠빙글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염려스럽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자신을 부인하면 저주를 받게 되리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9. 츠빙글리의 신학은 가끔씩 ‘츠빙글리주의’라고 불리는데, 주로 스위스 내에서 그 세력을 형성했다. 개신교 종교개혁을 일으킨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음에도, 츠빙글리는 루터나 칼빈, 불링거에 비해 가려져 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견해라든가 성구집이 아닌 성경을 그대로 설교한 그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많은 교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존 페인(John B. Payne)은 이렇게 말한다. “츠빙글리는 개혁주의 전통의 선구자였다. 그 전통은 스위스와 독일 남부를 넘어 프랑스 위그노들과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 걸쳐 있는 회중주의자들, 장로교인들, 그리고 대서양 건너 뉴잉글랜드에 있던 회중주의자들과 중부 식민지의 장로교회와 화란과 독일 개혁교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로를 통해 확장되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Ulrich Zwingli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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