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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호프 씨의 마지막 희망
by Michael A. Rogers2019-12-07

나는 최근에 호프 씨를 묻었다. 호프 씨는 성숙한 기독교인 여성이고 86세였다. 그녀는 이름이 호프인 것처럼 내가 그녀의 목사로서 알고 지낸 20년 동안 희망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재활센터에서였고, 그녀는 교통사고로 거의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호프 씨는 균형을 잡기 위해 지팡이 두 개나 필요할 만큼 매일 고통 속에서 살았다. 이런 그녀는 여러 가지 건강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기뻐하며 조금도 절망하지 않았다.


호프 씨는 애초에 4개였다가 갑자기 6개로 늘어난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 수술 전에 나는 다른 목사 한 명과 병원에 방문했다. 야고보서 5장에 근거해서 그녀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치유를 위한 기도를 했다. 그녀는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호프 씨는 48시간에 이르는 엄청난 심장 수술을 견뎌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야고보서 5장 15절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마지막 날에) 그를 일으키시리라.”


목사들은 이제 종말이라는 궁극적인 주제, 다시 오실 그리스도, 주님의 날에 있을 모든 영혼을 향한 심판, 믿지 않는 자들을 필연적으로 기다리는 지옥,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에게 준비된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좀 더 자주 설교해야 한다. 요즘 주로 들리는 얕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복음주의 설교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룬다. 당연히 선포해야 할 궁극적인 희망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조차 할애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몇 세기 앞선 성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급작스러운 죽음과 마주했다. 높은 영아 사망률과 전염병의 위험 속에서 살았다. 훨씬 더 짧은 수명이었지만 그들은 우리처럼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를 좇지 않았다. 주변에 산재한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희망을 선포하는 설교가 울려 퍼졌다.


“죽어가는 한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듯, 나는 다시는 설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심정으로 설교했다.”라고 말하는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설교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성경을 보면서 환상적으로 멋진 천국에 관한 이야기가 원하는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구약에서는 믿는 이들에게 현재를 넘어서는 내세의 구원 약속이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극히 드문 약속도 고통이라는 우울한 배경에서 나온다. 욥기 19장 25-26절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시편 16편 11절도 욥기와 유사한 위로를 보여준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사람들조차도 기독교인은 죽은 뒤에 두 단계를 거친다는 신약의 가르침을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가장 먼저는 죽은 후 몸을 떠난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즉각적인 경험이 있다(빌 1:23). 히브리서 12장 23절에서는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그 위대한 부활의 날까지 주님과 함께 있는 왕국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불린다. 오로지 홀로 죽지 않는 존재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의 영과 혼은 불사(immortality)의 선물을 받았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의식을 가진 영혼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육신 없이 영혼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육신을 실재로 간주하고, 영혼은 형체가 없는 일종의 유령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영혼의 무게를 재거나, 영혼을 측정하거나, 영혼을 셀카로 찍은 사람이 있던가? 그러나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중요하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영적이지만, 실질적인 존재를 영유한다. 바울은 이어서 고린도후서 5장 7-8절에서 말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죽을 때에 육신은 무덤에 남기고 떠나지만,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으로 들어간다.


신학자들은 보통 죽음을 통하지 않고 영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라고 부른다. 이 말은 사이(between)와 불완전함(incompleteness)을 함축한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영원의 단계로 들어가는 첫 과정을 “즉각적인 천국”(immediate heaven)이라는 좀 더 긍정적인 말로 부르고 싶다. 강조할 부분은 바로 이 시작 단계에서 접하는 ‘즉각성’이다. 예수님은 회개한 십자가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성경적인 희망은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아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 사망한 즉시 주 안에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with)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희망에는 두 번의 단계가 있다. 놀라운 예수의 재림은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시작이 된다. 그리고는 다음 단계가 급작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 앞에서 분명하고도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는 신자들의 영혼과 함께 온다(살전 4:13-18). 모든 믿는 자들이 부활의 몸으로 새로워진다(고전 15:51-57). 그 놀라운 날에 기뻐하며 왕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은 구세주의 확실한 보호 아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호소해도 정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차단된다(마 25:31-46). 창조는 이제 그 자체로 새롭게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뀐다(롬 8:20-21; 벧후 3:10-13).


성도가 누릴 미래 경험의 정점은 성경의 마지막 두 장에 적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예언한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이것은 모든 악, 죄, 죽음, 슬픔의 흔적이 사라진 궁극적이고 완전한 상태이다. 요한계시록 22장 4-5절은 주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마지막 핵심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중략]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마지막 때 하늘 전체를 덮는 파노라마는 너무나도 놀랍기에 수백만 명의 회의론자들이 성경의 결론을 환상 또는 신화로 여긴다. 냉소주의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기에 “과장된 상상속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들이 냉철하고 현실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무엇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만연해있는 고통과 죽음을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보고 판단한다. 단지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악과 고통을 마지막 결론이라고 믿지 않을 뿐이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 S.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희망은 미래 세계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중략] 그런다고 지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방치하라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했던 그리스도인은 다음 세상을 가장 열렬하게 기다렸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희망은 미래로 확장되는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것이 그분의 확실한 약속이라고 믿는다. 약속한 존재가 하나님이기에 약속의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지 반드시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희망을 한번 살펴보자. 로마서 4장에서 백세가 된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죽은 것처럼 자식을 낳을 수 없고, 태가 죽은 것처럼 임신하지 못하는 아내 사라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을 약속한 존재가 하나님이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절망하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중략]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바울은 선언한다.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라고(21절)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살아있는 희망의 핵심이다.


육신의 죽음으로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그의 역사적인 재림을 상상하는 것, 놀라운 부활의 몸을 받는 것, 그리고 새롭게 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행하는 것, 이러한 미래의 희망을 모두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고, 경험해본 사람도 없기에 그것을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세상에 희망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약속의 당사자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청교도 작가인 토마스 아담(Thomas Adam)은 이 문제를 이렇게 결론 내렸다.


“희망은 맑은 얼굴을 가진 현숙한 여인이다. 그녀는 이 땅에 앉아 있지만, 그녀의 목표는 하늘에 있다. [중략] 믿음은 그녀의 변호사, 기도는 그녀의 간청자, 인내는 그녀의 내과의사 [중략] 감사는 그녀의 귀중품 보관소, 자신감은 그녀의 해군 제독, 하나님의 약속은 그녀의 닻 [중략] 그리고 영원한 영광은 그녀의 면류관.”


우리 부부는 아직 일흔이 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묻힐 땅에 놓을 비석을 작년에 샀다. 누구나 맞이해야 할 죽음에 대항하여 희망의 간증을 새긴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거기에 빌립보서 1장 21절을 새겨 넣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은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오늘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확신으로 서 있는가?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Our Final Hope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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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ichael A. Rogers

마이클 로저스는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터에 위치한 Westminster Presbyterian Church (PCA)의 목사이다. 그는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탁 관리자로 섬겼으며 2018년도에 은퇴했다. 대표 저서로 'What Happens after I Di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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