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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예수님, 당신은 알고 계셨나요?
by D. Blair Smith2019-10-19

대중적인 크리스마스 노래인 “마리아,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Mary, Did You Know?)는 마이클 잉글리시(Michael English)가 1991년에 처음으로 부른 곡이다. 이 드라마틱한 노래는 발표 이후로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가사를 보면, 장차 폭풍을 잠잠케 하고 죽은 자도 살리게 될 한 아기의 어머니(곧 마리아)에 대해 우리가 궁금하게 여길 만한 물음들을 다루고 있다. 이 노래에서 연속되는 그 물음들은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모아진다. “마리아, 당신은 그 아기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나요?”


이 노래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진리일 것이다. 이 곡의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여 낳게 된 여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신비를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만든다.


마리아는 분명 알지 못했다.


천사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전달해 준 소식이 있었지만(눅 1:26-38), 그녀는 자신이 낳을 아기가 감당하게 될 모든 일을 알지 못했다. 이는 마리아를 비하하는 게 아니다. 우리와 같이 그녀는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그녀가 가진 지식은 그 범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그분은 정말 다 아셨을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기 자신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을까? 정말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니케아 신경의 고백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으로서 피조되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한 본체”이신 그런 분이라면 말이다.


그리 간단하지 않은 질문


어떻게 보면, 이런 질문은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처럼 여겨진다. 단순한 삼단논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몇몇 본문만 떠올려 봐도,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식을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분은 어느 물고기의 입속에 동전 한 개가 들어있다는 사실(마 17:27)과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요 4:1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다른 장소에 계시며 소식을 듣기도 전에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다(요 11:14).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보면, 위의 질문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기만 하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인으로 자라야만 하는 아기이기도 하셨다. 누가복음 2장 52절은 예수님이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설명한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육체와 정신의 성장을 이루는 인간의 일반적인 발달 과정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그분이 알지 못하신 일들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까? 이를테면 목수의 집안에서 크신 분이 낚시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셨을까? 또 1세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장하신 분이 5세기 영국 섬에서 자라는 게 어떤 경험일지를 아셨을까? 나아가 소년이셨던 분이 당시 소녀로 살아가는 게 어떤 과정일지를 아셨을까?


모르시는 내용도 있음을 말씀하시다


물론 성경은 이런 문제를 간단히 취급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 자신도 모르시는 내용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놀라운 구절을 우리에게 보여 줄 뿐이다. 곧 마태복음 24장 36절과 마가복음 13장 32절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렇다. 예수님도 알지 못하셨다.


이 놀라운 구절에 대해서는 지난 교회 역사 동안 다양한 방법의 접근이 이뤄졌다. 가령 4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이 구절이 함축하는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이 선언하신 지식의 한계는 말씀 자체[곧 성자]의 불완전이 아니라 그 특성상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인성(the human nature)에 관한 내용이다.” 이는 단순해도 그 의미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설명이다. 즉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그분이 지치거나 허기지는 모습과 같이 오직 그분이 지니신 인성의 표현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좀 더 까다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바로 자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요 17:1)에 관해 주석하면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인가를 아시면서도 또한 모르시는 일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신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독론적 개념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참고로 기독론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신학의 분야이다).


본성과 위격에 관한 고전적인 기독론


우선 주후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회의 진술을 살펴보며 도움을 받도록 하겠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처녀 마리아의 자궁에서 성육신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신성에 인성을 결합하셨다. 이는 새로운 본성을 더하신 일이지, 원래의 본성을 감하신 일이 아니다. 즉 바울의 진술과 같이, 그리스도는 신성을 버리신 게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써 “자기를 비”우시는 일을 하신 것이다(빌 2:7). 칼케돈 신경은 이를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부른다. 곧 “혼합이나 변질이나 구분이나 분리 없이” 완전한 두 본성이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칼케돈 공회가 이 진술을 확정한 목적은, 두 본성 중 하나를 감하거나 또는 두 가지를 혼합시키거나 구분하려고 한 당시의 이단 사상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러한 사상과 대조적으로 성자의 한 위격 안에 두 가지 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진술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 즉 예수님도 모르시는 내용이 있다고 말씀하신 문제를 설명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겠는가? 바로 신성만이 아니라 인성도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줌으로써 우리가 그 문제를 풀 수 있게 도와준다.


이 두 가지 본성은, 마치 스위치를 작동하여 켰다가 껐다가 하듯이 예수님의 의식 속에서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이신 성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전지성(omniscience)을 상실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분의 인성이 신성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신 성자는 그 몸이 무소부재하지 않듯이 그 지식에도 전지성을 지니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분의 신성이 인성을 변형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가지 본성은 각각 고유한 특성을 지닌 채로 한 사람 안에서 교통하기에, 그분은 두 본성을 따라 동시에 행동하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행동을 하는 주체는 본성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성에 따라 행동을 하는 주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다른 이들과 동일하신데, 다만 그분은 두 가지 본성을 지니셨다는 사실이 문제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간혹 예수님의 특정 행동을 보면, 어느 한 가지 본성이 다른 본성보다 더 반영될 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배에서 주무시는 모습은 그분의 인성을 반영하지만, 물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은 그분의 신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배에서 주무실 때조차도 그분은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며, 또 물위를 걸으실 때조차도 그분은 인간의 발을 사용하시는 사람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행동은 결국 한 동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된다. 이러한 성경의 묘사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7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중보 사역을 하시며 그 고유한 특성대로 작용하는 두 가지 본성에 따라 행동하신다. 그러나 두 본성은 한 위격 안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때로 어느 한 가지 본성에만 해당되는 행동을 보여 준다고 할지라도 다른 본성 역시 지니고 계신 위격에서 비롯되는 행동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눅 1:43; 요 3:13; 행 20:28).


신비의 영역 속으로


만일 마태복음 24장이나 마가복음 13장처럼 예수님이 자기 지식의 한계를 언급하시는 구절이 성경에 없다면, 우리는 어떤 진리를 놓치게 되었을까? 아마 예수님의 전지성에 대해서는 매우 정돈된 관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돈된 관점이란 게 사실은 우리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견해일 때가 많다. 믿음은 우리에게 푸아티에의 힐라리오(Hilary of Poitiers)가 한 말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바로 그 존재가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그분을 다 파악한 듯 완전히 정의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그분을 경배하는 태도를 지녀야만 한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아시면서도 동시에 모르신다고 말씀하는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순 없지만 여전히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모두가 가진 지식의 한계 역시 죄성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조차 지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분의 인성으로 인해 우리의 인성이 회복되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알도록 허락되지 않은 사실을 불편하게 여기기보다 오히려 그 한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신 29:29). 즉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인내로써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내용은 다름 아닌 사람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인성을 따라 말씀하신 모습을 보여 준다고 논증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성을 따라서는 동일한 내용을 아신다는 사실도 함께 설명했다. 예수님은 그 무한한 지혜 가운데 자신의 백성이 알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셨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은 알기도 하시고 모르기도 하신다.


이는 성육신이 지닌 역설의 신비를 보여 준다. 이 역설은 외견상 드러나는 불합리한 모순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좌절시키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즉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Jesus, Did You Know?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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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 Blair Smith

블레어 스미스는 미국 장로교 목사이자 샬롯에 위치한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조직신학 부교수이다. 그는 Harvard Divinity School에서 석사학위(ThM)를 받고, Durham University에서 역사신학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