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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예배
by Andrew Wilson2019-09-16

영어 단어의 수가 20만개를 넘어서지만, 나는 여기에 단어 하나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 단어는 은혜(charis)와 기쁨(chara)이라는 아름다운 헬라어가 감사(eucharistia)와 선물(charismatia)의 개념들과 합성되어 만들어졌다.


이는 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전을 요약하는 단어로, 하나님의 모든 선물을 귀하게 여기며 축하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이 성례전적(성찬과 예전)이든지 혹은 은사적(예언과 치유)이든지, 교회의 전통이라는 창고에서 옛 보물과 새 보물을 꺼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감화와 하나님의 은혜를 축하하며 성찬을 드릴 수 있도록 초대한다는 뜻이다.  


이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유카리스마틱’(Eucharismatic)이다.


예배가 어지럽혀지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예배가 어지럽혀진다는 말은 최악의 상태인 것처럼 들릴 수 있다. 나는 이에 공감하며, 12세 소년이 기독교 성례전에 처음 참여하게 된 경험을 떠올려 본다. 그때, 그는 덥수룩한 수염에 커다란 사제 모자를 쓴 남성이, 성상들에 둘러 쌓여, 매우 엄숙한 목소리로 “내 마음이 벅차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낭독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또한 기독교 TV에 나와서 아주 기본적인 번영 설교를 하며 성경을 들고 흔드는 설교자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생각해 본다.


교회의 예배 의식들을 생각해 보면, 새롭게 도입된 많은 예배 의식은 죄와 고통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전통적으로 오래 지켜온 예배 의식 역시 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다양하게 반영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예배 시간이 극도로 지루했던 기억이 있다.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목석같은 사람들에게 매주 같은 말을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는 설교를 들으며 앉아 있어야 하는 일은 어린 내게 큰 고역이었다. 그리고 어린 십대 아이로서, 지극히 창피했던 기억도 있다. 예배 시간에 중년의 여성들이 치마를 빙빙 돌리며, 발을 구르고, 탬버린을 흔들면서, 점점 커져가는 목소리로 유대교의 멜로디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합창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당혹스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성례전을 중시하는 교회들이 목석같고, 은사를 중시하는 교회가 우스꽝스럽다면,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Eucharismatic) 모습은 목석같고 우스꽝스러움, 둘 다에 해당될 것이다. 더 이상 나빠질 것은 없다.     


한편,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셰익스피어, 성(sex), 모짜르트, 좋은 포도주, 성부 등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지루하고 창피함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를 가장 사로잡을 만한 진리조차도 그들에게는 너무 감성적이거나 영혼 파괴적인 방식으로 여겨질 수 있다. 나는 매주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일부에게 당혹감이나 불만을 느끼게 하지 않는 예배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고 생각한다. 예배 의식에 불만이 있다고 그것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예배 의식이 꼭 그런 식으로 행해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교회 역사를 연구하면서, 나는 예배 의식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나타난 경우를 무수히 많이 보며 실망했다. 하지만 나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를 연구하고 소망을 되찾았다.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예배의 아름다움


그 다음 나는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상황이 정말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목석이나 허수아비 같은 사람도 있다. 형식주의란 목욕물과 함께 성례전이라는 아기를 버려버린 현대 교회들은 그들의 예배도 똑같이 뻔하며 형식주의의 목욕물이 증발해 버린 지 오래 되었는데도 계속 그 방식을 자랑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혹은 반대편의 전통주의자들의 예배에서는, 어느 누구도 전혀 놀라지 않고, 목회자를 제외하고는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누구도 미소를 짓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가지보다 훨씬 더 흔한 모습은 역사와 관습 그리고 이 두 극단에 대한 회피가 어우러져, 인간성이 배재된 채 성경-교회라는 패러다임 안에 갇혀 있는 교회들의 예배 의식이다. 오래된 것은 케케묵은 일상처럼 보이기 때문에 의심하고, 새로운 것은 문화적 유행처럼 보이기 때문에 의심하여, 그들은 20대와 50대의 어디쯤에서, 안전하지만 무기력하고, 뻔하지만 우아한 예배를 선택한다. 그들은 성례전이나 감정에는 더없이 자유로우나,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면도 결핍되고 영적인 면도 결핍된 예배를 드린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 중 어떤 면은 당신에게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부분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구체화된 예배의 기쁨을 맞이하는 교회를 상상해보라고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 예배를 통해 성도들이 물, 떡과 잔, 기름과 같은 상징의 힘을 재발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성도들이 그동안 놓치고 있던 성경적 요소들을 예배에 포함시키고, 거의 잊고 있던 복음의 깊이를 찾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라. 수도사들의 기도문과 순교자들의 노래를 사용할 때 그 효과가 증폭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성도들은 수백 년 전에 죽은 이들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을 읽을 때보다 더 큰 활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모든 성도들은 성례전에 기쁨으로 참여한다.

  

그 다음, 교회가 성령에 깊이 감화된 모습을 상상해 보라. 즉흥적으로 찬양이 터져 나오고 기쁨이 얼굴에 퍼지는 모습을 말이다. 치유 은사가 있는 이들은 병든 자를 고치기 시작한다. 그들은 시편 150편을 읽으며 치유를 실행한다. 필요할 때는 귀신을 쫓아내기도 한다. 지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모임에서 영적 은사들을 사용한다. 때로는 소리치고 때로는 춤을 춘다. 어린 아이들처럼 웃는다. 그리고 마치 유다의 사자가 그들의 자리 끝에서 깃털을 세우고 튀어나올 것처럼 기도한다. 또한 하나님이 집에서나 사무실에서 그들에게 이야기하시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예배는 영국 사람들의 장례식이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들의 결혼식처럼 보인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을 함께 놓아 보자. 치유의 간증과 고백의 기도, 시편, 찬송과 영적 노래들, 물세례와 성령세례, 영혼을 움직이는 교리와 몸을 움직이는 리듬을 포함하는 예배를 상상해 보라.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꾸며, 아들과 딸이 예언하고, 모두가 같은 성찬에 참여하며 각각의 방식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것을 볼 수 있는가?


그 모습은 성례전과 은사가 어우러진 예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at It Means to Be Eucharismatic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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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Andrew Wilson

엔드류 윌슨은 영국 런던에 위치한 King’s Church의 교육목사이다. 'Echoes of Exodus'를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공동으로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