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성경과 신학

기독교를 뒷받침하는 세 가지 이정표
by Rebecca McLaughlin2019-07-20

겉보기에 신앙의 방해물처럼 보이는 것들을 가까이에서 살펴보았을 때, 사실은 그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향하게 하는 이정표인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음의 세 가지 경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다양성


기독교는 인종, 장소, 그리고 문화와 상관 없이 오직 예수님만을 주님이라고 주장하는 배타적인 신앙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양성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모든 역사 속에서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큰 운동을 전개해 왔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종교 및 문화적 장벽을 허물었고(요 4:5-29),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라고 명하셨다(마 28:19). 또한 이천 년 후인 오늘날, 기독교 세계관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으며, 가장 많은 인종과 문화가 이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분명 다양성을 무시하는 죄를 반복해서 지어 왔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신 소명인 '다름을 뛰어넘는 사랑' 대신 혐오와 차별의 문화를 생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역사에서 다양성을 결집시키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키워드는 신약성경과 세계적인 교회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다양성을 근절하기는 커녕 그것을 고집하고 있다.


과학


기독교는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창조주로 선포한다. 그러나 이를 믿는 신앙은 과학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 과학의 출발선에 서 있다.


최초의 실증주의 과학자들은 우주를 창조한 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분이 이성의 법칙에 따라 우주를 건설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은 자유롭다고 믿었으며,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두 가지 믿음은 경험과학의 토대를 이루었다. 경험과학의 사상에 대해 초기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는 “하나님을 따라 그분의 뜻을 생각하자”라고 설명한다.


물론 과학은 신학적으로 복잡한 질문을 일으킬 수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처음부터 과학의 선두 자리에 존재했고, 기독교의 신뢰와 정당성에 해가 된다고 여겼던 오늘날의 모든 과학 분야 및 첨단 기술 분야의 중앙에는 여전히 기독교인들이 있다. 과학을 무신론의 기반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우리는 오히려 과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한다. 우리가 창조주를 정확하게 믿을수록 그 기쁨은 더 클 수밖에 없다(계 4:11).



성이 오로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혼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은 신앙이 없는 친구들과의 갈등을 일으킨다. 이러한 고백은 성에 관대한 많은 이들로부터 크리스천은 편협하다는 비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 윤리는 자유주의가 난무하는 사회 속의 조그마한 촛불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 번영의 측면에서 충분한 지지를 받는 기초적인 윤리이다.


여러 연구에서, 성적 파트너의 양적 증가는 슬픔, 우울, 그리고 자살 충동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반면, 평안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남녀는 정신적 건강과 신체적 건강이 전자의 사람들보다 눈에 띄게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한 사람들은 비혼자들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안정적인 성관계를 가지며, 행복을 가장 극대화 하는 성적 파트너의 수는 한 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동성애에 관한 시각에 있어서 우리는 오늘날의 문화와 완전히 대립된 관점을 유지한다. 교회는 이 영역에 대한 많은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일부 초기 기독교인도 동성애의 끌림을 경험했으나 이를 뒤로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왔다(고전 6:9-11).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동성애에 매력을 느끼는 점점 더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인 희생을 발판 삼아 성경적 성 윤리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과 관련해 확고한 경계를 세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경계는 사람들이 다가서지 못하도록 설계된 편견과 증오의 장벽이 아니다. 오히려 그 경계는 삶의 영역에 대한 표시를 의미하고, 다른 사랑을 위한 공간을 창조하도록 설계되었으며, 각 경계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서로 다른 측면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성경은 우리에게 결혼의 확고한 모델을 제시하면서도, 독신 또한 높이 볼 것을 말하며, 남녀 관계의 사랑 뿐만 아니라 친구 관계에서의 깊은 우정 역시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이고(마 12:50), 한 몸이며(롬 12:5),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존재들이자(골 2:2), 모두가 주님의 군사이다(빌 2:25). 덧붙여, 바울은 그의 친구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자”(몬 12)라고 부르며 그가 데살로니가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자녀를 기르는 유모같이” 있었다고 말한다(살전 2:7). 


참된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다. 우리는 유일한 구원자의 근본적인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변증학에서 최고의 답변


우리는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가로지르는 사랑을 믿는다. 왜냐하면 언젠가 모든 민족과 언어 및 국가가 함께 연합함으로써 예수님을 예배할 것이기 때문이다(계 7:9-10). 우리는 과학이 유용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주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히 1:3).크리스천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동안 함께 사는 것을 결혼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성에 대한 정답의 핵심에 예수님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결혼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델로 삼기 때문이다(엡 5:22-33). 


신앙을 설명하는 데에 장애물이라고 추정되는 것들을 깊이 살펴보면, 오히려 그것들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물러서지 말자. 우리 스스로를 사랑과 기도 및 겸손으로 무장하고, 더 깊은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통찰력을 갖추자. 그리하여 믿지 않는 친구들이 서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자.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Hard Questions Will Only Serve Him: A New Dawn for Christian Apologetics

번역: 송유희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Rebecca McLaughlin

레베카 맥클러플린은 런던 Oak Hill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Cambridg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TGC 정기 기고자이며, 대표 저서로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Confronting Christianity, 죠이북스 역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