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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철저하게 부활에 소망을 둔 삶
by John Piper2019-08-31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15:30-3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15:20).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는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택한 삶이 정말로 불쌍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터무니없었을 우리들의 삶에, 인내하며 행하도록 힘을 부여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이에 대한 믿음이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그가 기꺼이 경험한 평생의 모든 위험에 대해 그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 11:26).


그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자기 부인’의 정도를 생각하며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바울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했을 때 쾌락적인 욕망에 대해 죽는다는 뜻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하루도 어떤 욕망을 죽이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말이다.


“[전략]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3-28).


또 그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운’ 일을 떠올린다. 우리는 그가 의미하는 ‘맹수’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베드로후서 1장 10절과 유다서 10절에서는 복음을 반대하는 어떤 부류를 ‘맹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낙담시키는 것들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 1:8).


그래서 바울은 그가 잦은 위험에 노출되고, 맹수로 인해 매일 싸우며, 죽음의 위협 속에 있었기에, 부활이 없었으면,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 삶은 어리석고 불쌍한 삶이었을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만 이 고난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만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식충이가 되고 술고래가 되자는 의미이다. 부활이 있든지 없든지 그들은 불쌍하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부활이 없으면, 적절히 절제하는 삶이나 거기에서 벗어나 최대한 세상 쾌락을 즐기는 것이 모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바울이 선택하고 있는 것은 세상 쾌락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난을 택한다. 그 고난은 그가 순종을 택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을 때, 아나니아는 주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바울에게 전해 주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6). 바울은 그의 소명의 일부로 ‘고난’을 수용했고, 그는 고난 받아야했다.


바울이 이것을 어떻게 행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철저한 순종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 대답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나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고 나는 그분과 함께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고난은 아무 것도 헛된 것이 없다(고전 15:58)”라고 생각하고 순종했던 것이다.


부활에 대한 소망은 바울의 삶의 방식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그를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방시켜 주었다. 그 소망은 많은 사람들이 이생에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 없이도 행할 수 있는 힘을 그에게 주었다. 예를 들면, 그가 결혼할 권리를 가졌음에도(고전 9:5), 수많은 고난을 감당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즐거움을 포기했다. 그는 부활 때문에 그 즐거움을 포기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소망이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킨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 점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집에 초청하라고 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동기를 얻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4)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현재 우리의 삶이 부활의 소망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잘 살펴보라는 철저한 부르심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이생에서 얻을 것을 기초로 하는가, 아니면 내생에서 얻을 것을 기초로 하는가? 부활이 있어야만 오직 지혜롭다고 설명될 수 있는 사랑을 하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하는가?


우리의 몸이 노화될 때 낙담하여 어떤 것들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시인하는가, 아니면 부활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는가?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의 겉사람은 쇠약해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매일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4:16-17).


우리 모두 한평생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며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 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Radical Effects of the Resurrection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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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hn Piper

존 파이퍼는 desiringGod.org의 창립자이며, Bethlehem College & Seminary의 총장으로 33년 동안 미네소타에 위치한 Bethlehem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대표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라’가 있으며, 최근 저술한 ‘내가 바울을 사랑하는 30가지 이유’​ 외에 5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